오죽헌5. 이매창과 아들 조영(趙嶸)은 누구인가?(22/02/18, The Future is Beautiful / Daniel Kobialka)
이름없는풀뿌리2022. 2. 18. 17:51
이매창과 아들 조영(趙嶸)은 누구인가?1. 조영(趙嶸)을 중심으로 한 주요 인물구성
○ 외할머니의 어머니 용인이씨(1480-1569)
조영 출생 3년 전 별세 했지만 오죽헌에 오랫동안 살았던
외할머니보다 18년 더 살고 어머니(이매창) 41세에 별세한 용인이씨의
慈愛로운 훈육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을 것임.
○ 외할아버지 이원수(李元秀,1501-1561)
○ 외할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조영 출생 前 두 분 다 별세했지만 어머니가 4남3녀 중 2째 장녀였으므로
특히 신사임당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며 자랐을 것임.
○ 외삼촌1 이선(李璿, 1524-1570) 조영 출생 2년 전 별세
○ 외삼촌2 이이(李珥, 1536-1584)
조영 13세 때 별세로 이조판서였던 외삼촌 영향 있었을 것임.
○ 외삼촌3 이우(李瑀, 1542-1609)
조영과 30세 차이, 조영보다 3년 더 살아
詩書畵琴의 대가였던 막내 외삼촌 이우의 영향은 많았을 것임.
○ 막내외삼촌장인 황기로(黃耆老, 1521-1575년)
어머니 이매창 예술에 호평을 내린 인물로 조영 4세에 사망.
○ 증조할아버지 조광진(趙光震) 성균관 진사, 생몰연대 미상
○ 할아버지 조건(趙鍵) 조말생 4대손, 사옹원 참봉, 생몰연대 미상
○ 아버지 조대남(趙大男, 1530-1586)
사축서 별검(司畜署 別檢), 청단 찰방(靑丹 察訪)을 거쳐
최종적으로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등 하위직 출사.
出仕에 처남 율곡(1582, 47세 이조판서, 49세 별세)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 조영 15세에 57세로 별세, 이매창과 3남 3녀
○ 어머니 이매창(李梅窓, 1529-1592)
신사임당 26세로 출생, 어머니 44세에 조영 출생,
詩書畵琴 대가였던 어머니 절대적 영향 있었을 것임
조영 21세에 64세로 별세, 임진란 때 원주로 피난, 형 조준과 사망
○ 이모부 윤섭(尹涉 1550∼1624)
파평윤씨, 僉使, 黃州 거주, 22세 차이로 조영 사후까지 살아 약간 영향 추측.
○ 본인 조영(趙嶸, 趙士安, 1572-1606)
35세로 사망, 21세였던 1593 군산이우도 그림
○ 부인 성씨(成氏, )
장인 권유로 결혼, 66세로 사망, 할머니, 남편 조영 간병, 남편사후 6년 상복
○ 친구 김주(金輳: 1564-1636)
8세 연상으로 29세에 군산이우도 序文 작성
○ 장인 성로(成輅, 1550-1615)
조영과 22세 차이로 66세 사망, 조영보다 9년 더 생존,
권필과 정철 동문으로 정철이 실각하여 출사하지 않음.
사위 조영에 절대적인 영향을 줌.
○ 장인 지인 권필(權韠,1569~1612)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고 술로 낙을 삼아,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치며 73세로 일생을 마침.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음.
○ 아들 지인 허목(許穆, 眉叟, 1595~1682)
아들 성후 부탁으로 조영 부부 묘지명, 군산이우도記
○ 아들 성후(成後, 成父)
○ 손자 곤(滾), 량(湸), 항(沆), 완(浣)
2. 어머니 이매창(李梅窓, 1529-1592)
조영(趙嶸)이란 인물을 알기 위해서는
신사임당의 큰 딸 어머니 이매창을 우선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군산이우도』를 그린 그는
아무래도 그림과 시와 음악에 능했던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고조할머니 용인이씨의 사랑과 재력으로
여자들에게까지 詩書畵琴을 가르치는 家風속에서
그녀는 커가면서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학식, 인품, 용모가 신사임당을 닮았다하여
『작은 사임당』불릴 만큼
학문적 예술적 재능이 뛰어났다 한다.
사임당은 딸 매창을 지극히 사랑하여 틈틈이
학문을 가르치고 서예법과 그림 그리기를 지도했다.
그럼에도 매창(梅窓)의 기록은 어머니 사임당에 비하여
단편적이어서 추적하기가 쉽지 않다.
그녀가 살았던 선조-인조 연간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과 같은 대규모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는 율곡 이이 등에 의해 성리학이 토착화되면서
문예 각 부문에서 점차 조선적인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한 때였다.
문학 분야에서는 송강 정철(1536-1593)의 한글 가사와
석주 권필(1569-1612)의 진경시가 나오고,
글씨에서는 석봉 한호(1543-1605)의 석봉체가 출현했던 시로
문예적으로는 대부흥기였지만 임진란으로 주춤하던 시기였다.
어머니 신사임당이 안견의 몽유도원도 습작으로 그림을 시작했듯이
이매창의 매화도를 보면 당대 묵죽도의 대가
탄은(灘隱) 이정(李霆, 1554-1626)의 묵죽도를 습작하며
그림을 익히지 않았나 생각된다.
부안 기생 이매창(李梅窓, 1573∼1610)과는 동명이인이자 동시대인이다.
3.이매창의 식견(識見)
매창은 안목과 식견이 탁월해
남동생 율곡이 국가중대사에 자문을 구할 정도였다소 한다.
병조판서 율곡이 계미년(1583) 북방변란 때 군량 부족을 걱정하자
누이 매창이 조언하여 율곡이 그대로 시행해 효과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野史에 전하고 있기도 하다.
기암잡록(畸巖雜錄, 정홍명, 1582-1650, 송강의 4子)에 의하면
율곡이 벼슬에 오른 뒤에 무릇 국가 중대사가 있으면 그 누이에게 물었다.
계미년 북방 변란 때 율곡이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군량의 부족을 걱정하자,
그 누이가, “오늘날의 급선무는 반드시 인심을 즐겨 따를 것을
생각해서 행하여야 성취할 수 있다.
재주 있는 서얼들이 폐고(廢錮)된지
이미 백년이 넘어서 모두 울분을 품고 있으니,
지금 만일 그들에게 곡식을 납입함에 따라
벼슬길을 틔워준다면 군량을 금방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율곡은 탄복하고 즉시 계청해서 시행하였다.
또한 신명규(1618-1688)가 지은 "조대남묘지명"에
"매창은 능히 경전과 사기에도 통하여
사리를 널리 알기 때문에 율곡이 크고 작은 일에
매양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문득 매창에 나와 자문하는 것이었다."라고 적혀 있다.
이매창은 동생 율곡을 지도할 정도로
높은 지혜와 식견을 가졌던 것이다.
이매창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용인 이씨의 재력에 힘입은 외갓집 오죽헌에서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많은 고전을 읽어
이와 같은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더불어 그녀의 그림은 신사임당도
자신과는 다른 차원의 그림이라고 인정했듯이
그만의 여성이면서 남성적인 독특한 세계를 구축한 점,
어머니 사임당 신씨, 허균 누이 허난설헌등
여성에게 이름을 붙여주지 않던 시절,
(일설에 신사임당도 인선(仁宣)이란 이름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어느 사료에도 나오지 않은 일방의 주장임)
이매창(李梅窓)이란 이름을 가질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고,
율곡이 누이에게 수시로 자문을 구했을 정도로
학식이 뛰어났다는 것등과 더불어
막내 남동생인 옥산 이우의 장인
16세기 초서체(草書體)의 대가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가
사돈인 이매창의 예술에 대하여
글씨와 거문고 및 풀벌레 그림등시(詩)·서(書)·화(畫)·금(琴)을 다 잘하여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고 칭송하였다 한다.
외현손 신명규가 작성한 조대남 묘지명에는
“여중지걸(女中之傑)"로 묘사하고 있다.
4.그러한 이매창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
다만 아쉬운 점은 사임당 못지않은 여걸임에도
이매창의 생애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러한 부분에는 율곡이란 판서에 까지 이른
조선 성리학의 대가를 길러낸 신사임당에 비해
본인의 남다른 재주와 식견을 가졌음에도
사축서 별검(司畜署 別檢), 청단 찰방(靑丹 察訪),
종부시직장(宗簿寺直長)등 하위직 벼슬을 전전한 남편 조대남과
절손되다시피 한 자손에도 원인이 있다고 사료된다.
5. 이매창 母子에 관한 몇 가지 오류
파주 율곡 가족묘원에 가면
주능선에 율곡 직계 묘
우측 능선에 율곡의 큰 누님 이매창과 매부 조대남의 쌍분묘,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 씨의 합장묘,
이매창의 둘째 아들 조영의 묘,
좌측 능선에 율곡의 둘째 누님 매부 윤섭의 묘가 좌 우에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시집간 큰딸 이매창과 그녀의 시부모와 아들,
둘째 매부 윤섭의 묘가 함께 조성된 율곡 가족 묘원을 보면
율곡은 시집간 누이들까지 보살필 정도로
재력도 있었고 매부들과 사이도 좋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떠도는 이야기 중 몇 가지 오류에 대하여 말하고자 한다.
5-1) “매창은 임진왜란 때 아들 둘과 함께
왜군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說이 있는데 이는 오류가 아닌가 한다.
『군산이우도』를 그린 둘째아들 조영은
1572년 출생, 21세에 임란을 맞은 후
1606년 35세로 사망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매창 사후 100여년 후에 신명규가 작성한 조대남 묘지명에 의하면
첫째아들과 함께 원주로 피난갔다가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여
이듬해 봄 둘째 아들 조영에 의해 수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조영이 1593년 군산이우도를 그렸으므로
두 아들과 함께 사망했다는 說은 분명 오류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파주 율곡 가족묘원에
이매창부부과 둘째 조영의 묘소는 있는데
첫째의 묘소가 없는 까닭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매창은 남편 조대남과 3남 3녀를 두었다는데
남편 조대남은 병환으로 임란 6년 전인 매창 57세에 세상을 떠났다 한다.
5-2) "율곡 누님 이매창의 묘소가 율곡가족묘원에 있는 까닭은
당시 여자는 출가하면 시댁의 선산에 묘를 쓰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산은 율곡의 집안 것이 아니라
율곡 매형인 조대남 집안의 소유였으며
율곡 집안의 형편이 넉넉치 못해 사돈집에서 묘를 쓰는 것을
양해해 준 것이라 한다."는 說도 이해가 안 된다.
왜냐면 『율곡남매분재기』를 통해 보더라도
율곡 부모는 파주등지에 어마어마한 田畓과
무려 119명에 달하는 노비를 자녀들에게 상속하기에 말이다.
다만 율곡이 매부들과 사이가 좋았으리라고 짐작되는 단서들은 찾아 볼 수 있다.
율곡집에 처남과 어울리는 장면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백생(李伯生)【순인純仁】·조공보(趙公保)·윤중열(尹仲說)【기(箕)】·
최입지(崔立之)【입(岦)】·최가운(崔嘉運)【경창(慶昌)】 및
조형(趙兄)【대남(大男)】과 계헌(季獻) 등이 나와 함께 양화도(楊花渡) 부근
선유도(仙遊島)에 배를 띄웠다. 내가 장차 서쪽으로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제군(諸君)들이 전송하러 나온 것이다.
가운(嘉運)이 성문을 나올 때 시를 지으므로 그 운에 따라 차운하다.
술 싣고 배 저어 물 굽이 돌아드니,
푸른 산 은은한 곳에 바다문이 열리네.
물가 꽃과 언덕 풀이 안개와 함께 멀어지니,
작별한 뒤 그대들 시름 다시 더할 줄 알겠구려.
(李伯生)【(純仁)】、(趙公保 ※)、(尹仲說)【(箕)】、
(崔立之)【(岦)】、(崔嘉運)【(慶昌)】及
(趙兄)【(大男)】、(季獻), 與余共泛舟(于楊花)
渡傍(仙遊島)。余將有西行,
故諸君出餞也。
(嘉運)出城時有詩, 因次韻
載酒撑船水一隈,
靑山隱向海門開。
汀花岸草與煙遠,
別後知君愁更來。
5-3) "이매창의 남편 조대남은 강절교위(康節校尉),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을 지냈다하기도 하고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했다"고도 하는데
관찰사 역임설 또한 오류가 아닌가 한다.
왜냐면 교위는 5-6품 무관, 직장은 종7품, 관찰사는 종2품인데
조대남(1530-1586)의 사망 1년 전 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선조실록 19권, 선조 18년 윤9월 8일 1585년
종부시 직장 조대남의 파직을 청하다
헌부가 ... 아뢰기를,
"...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조대남(趙大男)은 몸에 중병이 있어
여러날 출사(出仕)하지 못하면서도 구차하게 관직을 보존하고 있으니,
너무도 염치가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하니, 답하기를,
"윤허하지 않는다. 신임관에 대한 일은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고 하였고 외현손 신명규의 조대남 묘지명을 보더라도
조대남의 최종 관직은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6. 아들 조영(趙嶸, 1572-1606)
위에서 어머니 이매창을 자세히 살펴본 것은
그녀가 詩書畵琴의 대가였고 오죽헌의 남녀 차별 없는
가풍 속에서 성장한 그 녀의 정신이
조영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란 추측에서다.
조영 개인 기록은 전무 하다시피 하지만
그가 유명한 군산이우도를 그림으로서 그림과 관련한
「서(序)」, 「시(詩)」, 「제(題)」, 「발(跋)」 등에서
조영의 생과 그림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주므로 그것을 소개하기로 한다.
미수 허목이 쓴 조영 묘지명에서...
공은 평탄하고 간이함을 좋아하였고 평생 남에게 성을 내는 일이 없었다.
시를 잘 읊었고 필치가 오묘하였는데, 산수화를 특별히 잘 그렸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였고 세속의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전쟁이 났을 때에 뱃길을 따라 정주(靜州)의 군산(君山)으로 피난하였다.
미수 허목이 쓴 군산이우도기에서...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취하면 스스로 즐거워했으며, 또 시와 그림에도 능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때 호남에 피란 갔을 때에
김주(金湊) 공과 더불어 객지에서 만나서 한번 보고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친구가 되었고,
인하여 함께 정주(靜州, 영광(靈光)의 옛 이름)의 군산(羣山)에서 나그네 노릇을 했는데,
떠돌이 신세로 해를 넘기면서 날마다 서로 즐겁게 어울려 객지의 고생을 잊었다.
지금 이 시와 그림은 대개 그때에 즐겁게 지내던 것을 묘사한 것이고,
또 김주 공이 이 그림에 서문(序文)을 썼는데, 모두 이 첩(帖)에 담겨 있어 읽어 보매
그때에 서로 깊이 사귄 정을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다.
미수의 묘지명과 군산이우도기에
조영의 성정과 예술이 너무나 잘 평가되어 있다 하겠다.
시를 잘 읊었고 필치가 오묘하였는데 산수화를 잘 그렸다는 조영...
역시 어머니 이매창의 교육과 영향을 받았음이 틀림없고
그의 서예작품과 산수화가 당대에는 꽤 알려질 정도로 존재했을 것이지만
현재 『군산이우도』란 작품 하나만 유일하기에 안타깝다.
외현손 신명규의 조대남묘지명에 의하면
어머니 이매창과 큰아들 조준이 임진란 때 원주로 피난갔는데
거기서 왜군에 의해 변고를 당하여
조영이 1593년 봄 어머니를 파주 율곡 자운산으로 장례했다고 한다.
일찍이 15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21세에 어머니와 형을 잃었으니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게 하고
그의 도피적, 은둔적 성격 형성에 영향을 주고
군산으로의 피난길에 오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된다.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림 역시 세종연간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활력을 잃었음은 물론
조선의 가장 중요한 대외교섭창구이자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었던
명나라의 문화적 자극도 조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1550년에서 1700년의 기간을 지칭하는
조선 중기의 회화는 조선 초기 그림의 양상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작품의 제작 등에서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문인들의 교유와 풍류는 단절되지 않았고
문화활동도 지속되었음을 우리는 『군산이우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진 마음이 통하는 문인들의 조우야말로
평상시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반가움이었으리라.
조영은 “시를 잘 읊고 술 마시기를 즐겼으며 세상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미수 허목이 『미수기언』에서 언급한 것으로 보면 그의 성품이 대략 짐작된다.
조영은 그의 성품처럼 벼슬에 오르지 않고
시문과 글씨, 산수화에 두루 관심을 보이며 일생을 즐기며 살아간 인물이었나 보다.
많은 민초들과 선비, 스님들까지 들고 일어나
왜적에 대항하던 전대미문의 병란에 20대의 젊은이가
그렇게 피해다니는 은둔에 대하여 비난할지도 모르지만
15세에 아버지 조대남을 여의고,
더하여 임진란으로 어머니와 형을 잃은
시대상황이 은둔자적 성격으로 내몰고 피란길에
장인 성로(成輅)와 함께 군산도로 피신하였다가
8살 연상인 문인 김주(金輳: 1564-1636)를 만나게 되었던 것이며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서로의 정회를 돈독히 하기 위해 김주(金輳)가 詩를 짓고
조영이 그림을 그려 ≪군산이우도첩≫을 1593년에 완성하였다.
성로와 조영, 김주는 1597년까지는 군산도에 있다가
1598년 정유재란이 시작되어 왜군이 충청도로
침입하자 강화도로 다시 피신하였다.
『군산이우도』에서 특정한 경치가 묘사되지 않은 것은
문인들의 교유의 기념과 아취 있는 서정을 표현하려는 것이
제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593년 봄에 각각 그림과 글씨를 나누어 『군산이우도』를 그릴 당시
조영은 21세, 김주는 29세가 된다.
『군산이우도』는 자연경관과 인물의 적절한 조화와
원숙한 농담 조절 등으로 미루어
남아있는 작품이 이 한 점밖에 없지만
조영의 화가로서의 기량과 격조가 뛰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군산이우도』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대혼란 속에서도
고아한 품격과 이상을 잃지 않으려 했던
문인들의 노력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자 국난의 와중에도
문화 예술활동의 명맥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예이다.
특히 전해오는 작품의 수효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중기 회화사 연구에 『군산이우도』는
인식의 깊이와 폭을 심화하고 확장하는 데에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다.
『군산이우도』의 뒤쪽에 붙어있는 김주, 조영, 권필, 박경립 등
당시 문인들의 『군산이우도』에 대하여 쓴
「서(序)」, 「시(詩)」, 「제(題)」, 「발(跋)」 등은
조영과 김주의 생과 그림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김주의 『운암문집』, 권필의 『석주집』, 허목의 『미수기언』 등
16·17세기 문인들의 글 속에『군산이우도』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조영과 김주의 만남과
『군산이우도』는 알려진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서화사의 보전(寶典)’ 또는 ‘한국 서화사의 시작과 끝’이라 평가되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도 소개되어 있는 『군산이우도』는
조선 중기 이전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의 상황,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2/18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補正
* 중앙이 율곡 직계, 좌측 상단에 율곡 둘째 매부 윤섭, 우측이 첫째 매부 조대남 일가
* 율곡기념관에 있는 가계도(매창에게 아들 셋이 있다했으나 묘비에는 3남3녀로 표기)
* 우측 능선에 보이는 조대남/이매창/조영 일가 묘지
* 이매창 시부모 조말생 4대손 조건(趙鍵) 합장묘
* 종부시 직장 조대남/이매창 쌍분묘
* 조대남/이매창 묘비 뒷면 상세(수기로 옮겨 적음, 誤記 및 해석 연락주시면 감사)
1) 이 묘표명은 조대남(1530-1586)의 외현손(외손자의 손자)
춘추관 기주관 신명규(1618-1688)가 작성
2) 당초 양주 홍복산에 있던 조대남 묘지를 자운산으로 이장함.
3) 조대남은 사축서 별검(司畜署 別檢), 해주의 청단역(靑丹驛) 찰방(察訪)을 거쳐
최종 벼슬은 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이며 諱 大男, 字 希彦, 玄序,
4) 조대남은 1586.3.22. 병환으로 57세로 사망,
5) 부인(恭人)은 율곡 누이로 경전과 사기에도 능통하여 사리를 널리 알기 때문에
율곡이 크고 작은 일에 매양 의심나는 일이 있으면 자문을 구하곤 하였다.
6) 임진란에 원주로 피난, 1592.8.25. 큰아들과 변고, 1593 봄 둘째 조영에 의해 장례
7) 3남3녀를 두었고 한결같이 학문과 행실이 조행하였고 효자효녀들임
* 이 글의 주인공 조영(趙嶸) 墓
https://blog.daum.net/dldml2xhd/15920443
참고 자료)
□ 이매창[李梅窓, 1529 ~ ?]
(두산백과)
요약조선 중기의 화가로 신사임당의 맏딸이다.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매창(梅窓)은 호이다.
조선 중기의 화가로 유명한 신사임당(申師任堂)의 첫째 딸로
율곡(栗谷) 이이(李珥)에게는 손윗누이가 된다.
아버지는 이원수(李元秀)이다.
조선 초기의 문신 조말생(趙末生)의 4대손인 조건(趙鍵)의 아들이자
강절교위(康節校尉)ㆍ종부시 직장(宗簿寺直長) 등을
지낸 조대남(趙大男)과 결혼해서 조영(趙嶸) 등을 낳았다.
이매창은 신사임당이 26세 때인 1529년에 태어났다.
어머니를 닮아 시(詩)ㆍ서(書)ㆍ화(畫)에 모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조선 중기 명필로 유명한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에게
부녀자 중의 군자(君子)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특히 풀벌레 그림을 잘 그렸으며, 거문고에도 능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강원도 강릉시 오죽헌에는 이매창이 그린 〈매화도(梅花圖)〉가 전해진다.
지본수목화(紙本水墨畵)로 30 × 20.5㎝의 크기인 이매창의 〈매화도〉는
동생인 옥산(玉山) 이우(李瑀)가 그린 〈국화도(菊花圖)〉와 함께
화첩으로 만들어져 보존되고 있으며,
이 화첩은 강원도 시도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이매창의 둘째아들인 조영도 글씨와 그림에 능했는데,
그가 임진왜란 때인 1593년에 그린 〈군산이우도(君山二友圖)〉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그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다.
이매창은 남편인 조대남과 함께 경기도 파주의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 매장되었다.
파주 자운서원(紫雲書院) 뒤편에 있는 율곡 이이의 가족묘역에는 현재
이이와 신사임당을 비롯해 이매창의 시부모인 조건과 이씨 부인의 합장묘,
이매창의 아들인 조영의 묘 등이 있다.
이 가족묘역은 자운서원 등과 함께 국가지정문화재 사적 525호인
율곡선생유적지로 지정되어 있다.
이매창과 어몽룡의 매화도 비교(이매창은 어몽룡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다.)
□ 택당잡고(澤堂雜藁, 이식李植, 1584-1647)에서
계미년(1583) 5월에 서얼(庶孼)과 천예(賤隸)들에게 벼슬길을 터주고
양민이 되게 할 일에 대하여 복명하였다. 자력으로 장비를 갖춰 가서
만 3년 동안 변방에서 수자리를 산 자에게는 벼슬길을 터주고 양민이 되게 해 주었으며,
또 서얼이 변방에 쌀을 납입할 경우에도 또한 벼슬길이 트이고 양민이 될 수 있었는데,
첩자(妾子)와 천첩자(賤妾子)의 납입하는 바에는 차등이 있었다.
모(某)는 또, 병조 군사의 궐번 속포(闕番贖布)를 누고(樓庫)에 쌓아두어,
관원들은 그것을 마치 사장(私藏)처럼 보아 물 쓰듯 하고 있는 반면에, 변방으로 수송되어
군사의 복장이 될 사섬시(司贍寺)에 저장된 베는 곧 떨어져 가는 것을 보고,
그 속포를 모조리 변방으로 수송하기를 청하였으며
또, 군자감(軍資監)에 저장된 베로 전사(戰士)의 옷을 충당하고,
백관들의 녹봉을 덜어서 수자리 사는 군사들 처자의 양식을 공급하기를 청하였다.
이래서 수자리 사는 군사가 남아돌고 내지(內地)의 징발이 많지 않았으며,
변방의 양식은 요족하게 조달되고 새상 원곡(塞上原穀)은 줄어들지 않았으므로
사졸들은 모두 배불리 먹고 따뜻이 입어서 집 생각을 잊었다.
그리고 또 상벌을 분명히 하니,
진보(鎭堡)의 장졸들은 점차로 적군을 향하여 적을 죽여 갔다.
그래서 육진(六鎭)이 다시 안정되고 번호(藩胡)가 다시 반란하지 모한지 20여년이 되니,
이는 대개 모가 한때 조치를 잘한 효험인 것인데,
논자(論者)는 오히려 나라를 병들게 했다고 공격한다.
□ 이매창 둘째아들 조영(趙嶸: 1572-1606)
[출처] 전란중에 이루어진 선비들의 운치있는 만남
『군산이우도』 작성자 건국대학교 박물관
임진왜란(1592-1598)은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조선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우여곡절 끝에 종묘사직을 지켜냈지만 그 상처는 너무나 커서 회복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임진왜란,
북한에서는 임진조국전쟁,
중국에서는 항왜원조전(抗倭援朝戰)·만력조선역(萬曆朝鮮役)·조선왜화(朝鮮倭禍),
일본에서는 분로쿠 게이조의 역(文祿慶長の役)·정한역(征韓役)이라 부르는 전쟁 이후
명은 청으로 왕조가 바뀌었고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서 도쿠가와 막부 정권으로 바뀌었다.
조선과 명, 일본에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것인데,
삼국은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하지만 전쟁터가 된 조선이야말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임진왜란으로 말미암아 조선은 국토가 황폐화되고 민생은 도탄에 빠졌으며
정치·경제·문화·사회·사상 등 각 방면에 걸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그림 역시 세종연간으로 대표되는 초기의 활력을 잃었음은 물론
조선의 가장 중요한 대외교섭창구이자 동아시아 문화의 중심이었던
명나라의 문화적 자극도 조선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인 1550년에서 1700년의 기간을 지칭하는 조선 중기의 회화는
조선 초기 그림의 양상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작품의 제작 등에서 위축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의 와중에도 문인들의 교유와 풍류는 단절되지 않았고
문화활동도 지속되었음을 우리는 『군산이우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이루어진 마음이 통하는 문인들의 조우야말로
평상시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반가움이었으리라.
조선 초기의 문신 조말생의 6대손이자 율곡 이이의 생질인
조영(趙嶸: 1572-1606)은 임진왜란 중에 서해의 군산도로 피신을 하였다.
군산도는 천혜의 경관으로 유명한 선유도가 있는 고군산군도로서
현재는 전라북도 군산시에 속하며 군산 남서쪽 약 50㎞에 해상에 위치해 있는데
새만금간척사업으로 인해 육로로 연결되었다.
조영은 “시를 잘 읊고 술 마시기를 즐겼으며 세상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고
미수 허목이 『미수기언』에서 언급한 것으로 보면 그의 성품이 대략 짐작된다.
조영은 그의 성품처럼 벼슬에 오르지 않고
시문과 글씨, 산수화에 두루 관심을 보이며 일생을 즐기며 살아간 인물이었나 보다.
조영은 그의 나이 20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장인 성로(成輅)와 함께 군산도로 피신하였다가 문인 김주(金輳: 1564-1636)를 만났다.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서로의 정회를 돈독히 하기 위해 김주가 시를 짓고
조영이 그림을 그려 ≪군산이우도첩≫을 1593년에 완성하였다.
성로와 조영, 김주는 1597년까지는 군산도에 있다가
정유재란이 시작되어 왜군이 충청도로 침입하자 강화도로 다시 피신하였다.
『군산이우도』의 뒤쪽에 붙어있는 김주, 조영, 권필, 박경립 등
당시 문인들의 <군산이우도>에 대하여 쓴
「서(序)」, 「시(詩)」, 「제(題)」, 「발(跋)」 등은
조영과 김주의 생과 그림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김주의 『운암문집』, 권필의 『석주집』, 허목의 『미수기언』 등
16·17세기 문인들의 글 속에『군산이우도』가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조영과 김주의 만남과
『군산이우도』는 알려진 내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서화사의 보전(寶典)’ 또는 ‘한국 서화사의 시작과 끝’이라 평가되는
오세창의 『근역서화징』에도 소개되어 있는 『군산이우도』는
조선 중기 이전의 작품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의 상황,
특히 임진왜란 당시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는 작품이다.
[육지로 연결된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의 최근 모습]
[군산이우도, 견본담채, 33.3*45.8cm, 개인소장이었다가 건국대박물관에서 매입 소장]
이제 『군산이우도』를 보자.
작품 전반에서 깔끔하고 정갈한 표현이 돋보인다.
비스듬히 대각선으로 길게 자라난 소나무, 진한 먹으로 표현된 소나무 옹이,
먹색의 대비가 강한 물가의 바위 등은
조선 초기에 명으로부터 들어와
조선 중기 화단에 큰 영향을 준 절파(浙派)화풍의 반영이다.
소나무 아래 책갑과 술병이 올려 있는 작은 책상(.案)을 옆에 두고
앉아 있는 두 선비 중
은은한 회색의 학창의를 입고 책을 들고 있는 인물이 김주,
흰색 학창의를 입고 돌아 앉아 술을 권하는 인물이 조영으로 생각되는데
두 사람 모두 방건(方巾)을 쓰고 있다.
학창의와 방건은 모두 학자나 고관이
편안히 생활할 적에 사용하는 것으로서 어려운 속에서도
학자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으로 여겨진다.
궤안 위에 놓인 책갑과 술병 역시 이와 같은 경향이다.
『군산이우도』에서 특정한 경치가 묘사되지 않은 것은
문인들의 교유의 기념과 아취 있는 서정을 표현하려는 것이
제작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593년 봄에 각각 그림과 글씨를 나누어 『군산이우도』를 그릴 당시
조영은 21세, 김주는 29세가 된다.
『군산이우도』는 자연경관과 인물의 적절한 조화와
원숙한 농담 조절 등으로 미루어
남아있는 작품이 이 한 점밖에 없지만
조영의 화가로서의 기량과 격조가 뛰어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시 말해 『군산이우도』는 임진왜란이라는 미증유의 대혼란 속에서도
고아한 품격과 이상을 잃지 않으려 했던
문인들의 노력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자 국난의 와중에도
문화 예술활동의 명맥은 유지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소중한 예이다.
특히 전해오는 작품의 수효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조선 중기 회화사 연구에 『군산이우도』는
인식의 깊이와 폭을 심화하고 확장하는 데에 중요하게 기여하고 있다.
필자 : 김상엽(인천공항 문화재감정관, 건국대 연구교수)
□ 조영(趙嶸)과 절부(節婦) 성씨(成氏)의 쌍묘명(雙墓銘)
- 미수(眉叟) 허목(許穆)
공의 휘는 영(嶸)이고 자는 사안(士安)이며 한양인(漢陽人)이다.
증조부는 성균관 진사 광진(光震)이고 할아버지는 사옹원 참봉 건(鍵)이고
아버지는 종부시 직장 대남(大男)이다.
어머니는 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니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의 누이이다.
공은 어릴 적부터 행실이 고상하였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에 공은 열다섯 살이었는데도
그 거처(居處)와 곡읍(哭泣)이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행실이 드러나 알려지자
석전(石田) 성 상사(成上舍)가 자기 딸과 혼인시켜 사위를 삼았다.
상사는 휘가 로(輅)이다.
서호(西湖)에서 고결하게 살았는데
공이 한결같이 아버지를 섬기듯이 섬겼다.
공은 평탄하고 간이함을 좋아하였고 평생 남에게 성을 내는 일이 없었다.
시를 잘 읊었고 필치가 오묘하였는데, 산수화를 특별히 잘 그렸다.
천성이 술을 좋아하였고 세속의 일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
전쟁이 났을 때에 뱃길을 따라 정주(靜州)의 군산(君山)으로 피난하였다.
피난길에 성산(星山) 김주(金輳)를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벗이 되어,
군산이우도(君山二友圖)를 그리고 시(詩)와 서(序)도 지었는데,
그 집안에 전해 내려온다.
적(賊)에게 호남이 함락되자 다시 배를 타고 북쪽으로 갈 때에
김주의 아내가 임신 중이었는데, 배에 탄 사람들이 말하기를,
“뱃길은 임신한 부녀자를 꺼리니, 내려야 한다.”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렇게 핍박하면 죽으라는 것과 같다. 의리로 보아 버리고 갈 수 없다.”
하고, 함께 내리려 하니, 성 상사가 말하기를,
“배에 있는 많은 사람이 어찌 부인 한 사람 때문에 다 죽을 리가 있겠는가.”
하며 멈추게 하였다.
이리하여 김주의 가족이 온전할 수 있었다.
뒤에 김주는 벼슬하여 모관(某官)을 지냈다.
공은 35세로 세상을 떠났다.
파평(坡平)의 자운(紫雲)에 장사 지냈다.
아내 성씨(成氏)는 열네 살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할머니 최씨(崔氏)가 노환(老患)이 들었는데 성씨가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다.
성 상사가 다시 혼인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늙은 어머니가 계시는데 다시 혼인하였다가 좋은 아내를 얻지 못하면
어진 내 딸이 잘 봉양하는 것만 못할 것이다.”하였다.
성씨는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를 섬기는 일에
반드시 어버이의 뜻을 미리 헤아려 뜻에 맞게 마음을 다하였으며,
사랑이 친척에게까지 미쳐 온 친족이 감화되었다.
공이 죽을병이 들어 해를 넘겼는데,
성씨는 온갖 고생을 다하고
노심초사하며 날마다 의약(醫藥)을 마련해 올렸다.
사람들이 차마 그 정성을 말릴 수 없었다.
결국 살리지 못하자, 성씨는 밥을 먹지 않고 곡하면서
초상 때처럼 매우 슬퍼하며 3년을 지냈고,
성 상사 때문에 비록 억지로 먹기는 하였으나 공을 위해 6년간 상복을 입었다.
이에 원근에서 모두 절부(節婦)의 행실을 알게 되었다.
만력 말년에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상국(相國) 이정귀(李廷龜)가 서호(西湖)로 성 상사를 방문할 적에는
반드시 그 정표문에 절을 하여 절행(節行)에 경의를 표하였다고 한다.
성씨는 66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같은 언덕에 합장하였다.
아들은 성후(成後)이다.
그 또한 독실히 선행을 행하고 지조를 지키며 가훈을 잘 받들었다.
손자는 넷인데 곤(滾), 량(湸), 항(沆), 완(浣)이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조공 아버지와 성씨 어머니가 / 趙之父成之母
행실이 참으로 훌륭하셨으니 / 匹行之有光
오호라 / 於乎
그 자손들이 잘 이어받아 길이 전해지리라 / 其子孫之承且長
[주D-001]덕수 이씨(德水李氏)이니……누이이다 : 감찰(監察) 이원수(李元秀)가
아들 넷과 딸 셋을 두었는데, 셋째 아들이 율곡(栗谷) 이이(李珥)이고
넷째 아들이 옥산(玉山) 이우(李瑀)이며 큰딸이 조대남(趙大男)에게 시집갔다.
《宋子大全 卷193 監察贈左贊成李公墓表, 韓國文集叢刊 114輯》
[주D-002]석전(石田) 성 상사(成上舍) : 성로(成輅, 1550~1615)를 가리킨다.
자는 중임(重任)이고, 호는 잠암(潛巖)ㆍ삼일당(三一堂)ㆍ석전ㆍ평량자(平涼子)이다.
1570년(선조3) 식년시에서 진사(進士)가 되었다.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문인이며
석주(石洲) 권필(權韠)과 절친했다. 정철과 권필의 불행을 보고는
세상일에 뜻을 끊고 술을 즐기며 은둔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마쳤다.
아들은 없고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조영(趙嶸)에게 시집갔고
둘째는 정철의 손자인 정운(鄭沄)에게 시집갔다.
《白軒集 卷35 處士成公行狀, 韓國文集叢刊 96輯》
[주D-003]김주(金輳) : 1564~1636. 자는 지원(志遠)이고, 호는 운암(雲巖)이다.
대대로 성주(星州)에서 살았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605년(선조38) 증광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624년(인조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 무안 현감(務安縣監) 등을 역임하였으며, 성로, 권필 등과 절친했다.
《國朝文科榜目》 《谿谷集 卷12 故禮曹正郞金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92輯》
[주D-004]이정귀(李廷龜) : 1564~1635. 자는 성징(聖徵)이고,
호는 월사(月沙)ㆍ추애(秋崖)ㆍ습정(習靜)ㆍ치암(癡菴)ㆍ보만정주인(保晩亭主人) 등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1585년(선조18) 식년시에서 진사가 되었고, 1590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호조판서, 양관대제학, 우참찬, 동지중추부사, 이조판서, 병 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韓國文集叢刊解題 3輯, 月沙集, 민족문화추진회》
漢陽趙公節婦成氏雙墓銘
趙公諱嶸。字士安。漢陽人。曾祖成均進士光震。祖司饔參奉鍵。父宗簿直長大男。
母德水李氏。文成公珥之妹也。公少有高行。其先府君亡。公十五。其居處哭泣感人。
行誼著聞。有石田成上099_309a舍以女妻之。上舍諱輅。居西湖。潔身獨行。
公一以事父者事之。
公樂坦易。平生與人無慍色。善吟詩。有筆妙。於山水尤佳。性喜飮酒。不屑屑於世也。
當兵革之世。浮海避亂於靜州之君山。與星山金輳。遇於客途。與語結爲友。作君山二友圖。
又有詩與序。傳其世。及賊陷湖南。復浮海而北。輳妻方娠。舟中人曰。舟行忌孕婦。當下之。
公曰。此迫之令死也。義不相棄。欲與俱下。成上舍曰。舟中多人。
豈以一婦人故俱死也。止之。
輳家得全。後輳仕爲某官。公三十五歿。葬於坡平之099_309b紫雲。妻成氏生十四。母亡。
祖母崔氏老病。成氏事之至誠。上舍不更娶曰。有老母在堂。娶而不得良妻。
不如吾女賢足以能養。
成氏至孝。於事親之節。必先意順適以盡心。仁及親戚。一族化之。
及公得死病經年。成氏苦形焦心。
日給醫藥。人有不忍違其誠。及卒不救。不食哭。自苦如初喪三年。以老上舍故。雖強食。
爲之六年不除衰。於是遠近皆知節婦之行也。萬曆末。旌表其閭。李廷龜。訪成上舍於西湖。
必拜於門。以致敬其節行云。六十六歿。祔葬同原。男成後。亦篤善自守。能世其家訓。
孫四人。滾,湸,沆,浣。銘曰。
趙之父成之母。匹行之有光。於乎其子孫之承且長。
□ 군산 이우도기(羣山二友圖記)
- 미수(眉叟) 허목(許穆)
서호(西湖)에 사는 조성보(趙成父)가 그 선인(先人)의
시화를 싸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전면(前面)에 ‘군산 이우도(羣山二友圖)’라고 씌어 있었다. 인하여 나에게,
“한마디 써 주시오.”하였다.
나는 보고 기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참으로 좋은 말이다. 내가 그대를 위하여 감히 그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대의 선군자(先君子)는 고결한 행동과 고상한 취미가 있어,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취하면 스스로 즐거워했으며, 또 시와 그림에도 능했다.
만력(萬曆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때 호남에 피란 갔을 때에
김주(金湊) 공과 더불어 객지에서 만나서 한번 보고는
마음이 서로 통하여 친구가 되었고,
인하여 함께 정주(靜州 영광(靈光)의 옛 이름)의 군산(羣山)에서 나그네 노릇을 했는데,
떠돌이 신세로 해를 넘기면서 날마다 서로 즐겁게 어울려 객지의 고생을 잊었다.
지금 이 시와 그림은 대개 그때에 즐겁게 지내던 것을 묘사한 것이고,
또 김주 공이 이 그림에 서문(序文)을 썼는데, 모두 이 첩(帖)에 담겨 있어 읽어 보매
그때에 서로 깊이 사귄 정을 생각하고도 남음이 있다.
아, 슬프다. 그대의 선군자는 불행히도 35세에 일찍 돌아가셔서
내가 일찍이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김주 공은 그 뒤에 갑과(甲科)에 합격되어
벼슬이 춘관 정랑(春官正郞)에 이르렀다가 연로하여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에 돌아가 73세로 죽었는데,
영남 사람이라 하여 스스로 호를 남옹(南翁)이라 했다.
이 두 집의 자제들은 서로 골육처럼 의좋게 지낸다.”
원년(元年) 4월 상순에 공암 미수는 쓴다.
群山二友圖記
西湖趙成父袖持其先人詩畫來示余。題其面曰。群山二友圖云。仍索余一言記之。余見之。
喜謂曰。不亦善乎。吾爲君敢不勉。子之先君子。有潔行高趣。樂飮醉自娛。又善於詩畫。
萬曆間。避亂湖南。與金湊公遇於客途。一見心相許。結爲友。因與寄客靜州之群山。
漂泊經年。日相樂。忘其爲窮困客。今此詩與畫。蓋摸寫其樂。而又金湊公序之。皆在一帖。
讀之足以想見其相與之深也。嗟乎。子之先君子。不幸三十五早殀。
余嘗銘其葬。金湊公後以甲科。
官止春官正郞。以年老謝去。七十三歿。嶺南人故自號南翁。
兩家子弟相驩如骨肉焉。四月上浣。孔巖眉叟。書。
[주-D001] 조성보(趙成父) : 본관은 한양(漢陽)이며, 이름은 성후(成後)이다. ㅓ
부친은 이름이 영(嶸), 자가 사안(士安)이다.
《記言 別集 卷25 漢陽趙公節婦成氏雙墓銘》
[주-D002] 김주(金輳) : 1564~1636.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지원(志遠), 호는 운암(雲巖)이다.
1605년 증광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624년(인조2) 61세의 나이로 대과에 합격하였으며, 1625년 예조 정랑이 되었다.
《谿谷集 卷12 故禮曹正郞金公墓碣銘, 韓國文集叢刊 92輯》
대본에는 ‘輳’가 ‘湊’로 되어 있으나,
《계곡집》과 《기언》 별집 권25 〈한양조공절부성씨쌍묘명(漢陽趙公節婦成氏雙墓銘)〉에
의거하여 바로잡았다.
[주-D003] 정주(靜州) : 전라남도 영광(靈光)의 고호이다.
□ 남쪽으로 고향성주(星州)에 돌아가는
김진사(金進士) 주(輳)를 보내며 병인(幷引)
권필 석주집 1권
내가 김군 지원(金君志遠)을 안 지도 10년에 가깝다.
처사(處士) 성씨(成氏)의 집에서 김군을 처음 만났는데,
성씨의 사위 조군 사안(趙君士安)도 좋은 선비이며
김군과 정이 매우 친밀하여 마치 형제 사이와 같았다.
하루는 김군이 군산이우도(群山二友圖)란 그림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보여 주었다.
이우(二友)는 김군과 사안이고 군산(群山)은 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곳이다.
그림은 조군이 손수 그린 것이고, 김군과 조군의 제서(題序)가 있었다.
그리고 나에게 한마디 글을 적어 달라고 하였다.
나는 붕우의 도리가 없어진 것을 탄식한 지 오래였는데,
지금에 붕우의 도리를 보았고 게다가 내가 종유(從遊)하는 사람들이었다.
비록 이 그림 속에 참여할 수는 없으나
그 후미(後尾)에 내 이름을 거는 것도 다행이기에
장구(長句)의 시를 읊어 두루마리 말미에 붙였다.
이로부터 만날 때도 있고 헤어질 때도 있었으나
대체로 불과 수십, 백 리 남짓한 거리에 살던 터라
때때로 서로 찾아가서 울적한 회포를 풀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조군이 세상을 떠났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김군마저 남쪽으로 귀향하였다.
아, 선비가 지기(知己)를 어찌 쉽게 얻을 수 있겠는가.
고금의 세월이 이토록 길고 먼데 한 세상에 함께 태어났고,
사해의 면적이 이토록 넓고 큰데
한 나라에 함께 태어났으며, 나라 사람이 이토록 많은데
유독 나와 이 두 사람이 한마디 말로 친교를 맺어 막역한 벗이 되었은즉
그 우의(友誼)의 숙연(宿緣)은 아마도 우연한 것이 아닐 듯하다.
그러나 한 사람은 불행히 일찍 세상을 떠났고 한 사람은 멀리 천 리 밖으로 떠나
백발의 노년까지 함께 사귀려던 나의 약속을 덧없이 무산시키고 말았으니,
이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의 뜻인 것을 어이하리오.
비록 그렇지만 옛일을 생각하고 이별을 슬퍼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람의 정이다.
이에 애오라지 소회(所懷)를 써서 증별(贈別)의 말로 삼는다.
吾侯不羈士 우리 벗님은 세속을 벗어난 선비라
乃是東南美 그야말로 동남쪽의 훌륭한 인재로세
艱關避兵亂 갖은 고생을 겪으며 병란을 피하여
輾轉西海涘 서해 바닷가 지역을 전전하였어라
爲人古心貌 고인의 마음과 용모를 지녔으니
文藻蓋餘事 문장은 그저 여사에 불과할 뿐
飢寒走不暇 기한에 시달려 늘 분주하지만
得喪無慍喜 세상의 득실에는 무심하였어라
我亦骯髒人 나 또한 뜻이 강직한 사람으로
白首屠沽市 백발이 되도록 저자에 살았는데
相逢風塵中 풍진 속에서 서로 만나자마자
一笑許知己 한바탕 웃고는 지기가 되었어라
往還八九載 서로 왕래한 지 팔구 년 동안
浩蕩江湖醉 강호에서 호탕하게 술 취하였지
今晨來告別 오늘 아침에 찾아와 고별하고
千里適南紀 천 리 먼 남쪽으로 간다고 하네
星山舊田廬 성산에는 옛집과 논밭이 있고
雲谷好山水 구름 낀 골에 산수도 좋은데
身持令名歸 좋은 명성을 가지고 돌아가니
亦足償素志 평소의 뜻을 이뤘다 할 만하네
況人生世間 더구나 사람이 세간에 사는 게
如泛梗相似 마치 물에 뜬 도경과 같아서
縱橫不自覺 이리저리 가는 것 스스로 모르니
聚散固其理 만남과 헤어짐은 당연한 이치일세
但憐鹿皮翁 단지 가련하여라 녹피옹이
末契得數子 몇 사람을 벗으로 사귀었는데
心期坐乖張 마음의 기약이 그만 어긋났으니
襟抱欲誰倚 이내 가슴 누구에게 의지할거나
平生趙士安 평생에 막역한 벗인 조사안은
零落歸蒿里 세상을 떠나 호리로 돌아갔네
逝者不可回 떠나간 사람은 돌아올 수 없으니
萬世長已矣 영원토록 길이 만나지 못하도다
子又決然去 그대마저 이제 결연히 떠나니
後會焉足持 후일의 만남을 어찌 기약하리오
川原莽回互 산천이 아득히 휘감아 도니
相視各垂淚 서로 보며 눈물만 흘리도다
臨歧更贈語 이별 앞에 다시금 당부하노니
珍重愼行李 진중하여 가는 길에 조심하고
如逢北來鴈 북쪽으로 오는 기러기 만나거든
願寄平安字 부디 안부나 부쳐 주구려
[주C-001]김 진사(金進士) : 김주(金輳 : 1564 ~ ?)로 자는 지원(志遠),
호는 운암(雲巖),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과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 배웠다. 《檜淵諸賢及門錄》
[주D-001]물에 뜬 도경(桃梗) : 정처 없는 신세를 뜻한다.
도경은 복숭아나무를 깎아서 만든 인형이다.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 “토우(土偶)가 도경에게 말하기를
‘지금 그대는 동국(東國)의 도경으로 나무를 깎아서 사람 꼴을 만든 것이다.
그런데 비가 내려 치수(淄水)가 불어 그대를 떠내려 보내니,
그대는 표표히 떠서 장차 어디로 가려느냐.’ 하였다.” 하였다.
[주D-002]녹피옹(鹿皮翁) : 전설 속의 신선으로 사슴가죽 옷을 입었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
녹피공(鹿皮公)이라고도 한다. 임치(臨淄) 사람으로 젊을 때 소리(小吏)로 있다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잠산(岑山) 위의 신천(神泉) 가에 초옥(草屋)을 짓고
지초(芝草)를 먹고 신천의 물을 마시며 홀로 살았다.
《列仙傳 卷下 鹿皮公》 여기서는 외로이 사는 작자 자신을 가리킨다.
두보(杜甫)의 견흥(遣興) 3수 중 셋째 수에
“다만 녹피옹이 기심을 잊고 방초를 보는 게 의아해라.〔但訝鹿皮翁 忘機對芳草〕” 하여
녹피옹으로 자신을 비유한 바 있다.
[주D-003]호리(蒿里) : 무덤을 뜻한다. 진(晉)나라 최표(崔豹)의 《고금주(古今注)》에
“해로(薤露)와 호리(蒿里)는 모두 초상 때 부르는 노래로, 전횡(田橫)의 문인에게서 나왔다.
전횡이 자살하자 문인들이 상심하여 비가(悲歌)를 지었으니,
그 내용은 사람의 목숨은 염교〔薤〕에 맺힌 이슬처럼 덧없고 사람이 죽으면
혼백이 호리산(蒿里山), 즉 묘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4]산천이 …… 도니 : 멀리 떨어져 있어 만날 수 없음을 뜻한다.
두보(杜甫)가 멀리 있는 정건(鄭虔)을 그리워하며 지은
유회태주정십팔사호(有懷台州鄭十八司戶)에
“서로 멀리서 그리워할 뿐 각자 성취한 바 없는데
건곤은 아득히 휘감아 도는구나.〔相望無所成 乾坤莽回互〕” 하였다.
군산이우도(群山二友圖)에 제(題)하다
김군 지원(金君志遠)과 조군 사안(趙君士安)을 위해 짓다.
권필 석주집
군산이우도(群山二友圖)에 제(題)하다
김군 지원(金君志遠)과 조군 사안(趙君士安)을 위해 짓다.
漢陽趙夫子 한양의 조 부자는
眼如九秋鷹 눈이 가을 매와 같고
南州金秀才 남주의 김 수재는
心貯玉壺氷 마음에 옥호로의 얼음 간직했어라
二君相去千餘里 두 군은 서로 거리가 천여 리인데
二君氣味乃相似 두 군은 기미가 서로 비슷하여라
浮遊湖海偶見之 호해에 노닐다가 우연히 만나니
相視一笑無復疑 서로 보고 한번 웃고는 이내 친해졌지
男兒得意有如此 남아가 뜻이 맞으면 이와 같나니
海可轉兮山可移 바다도 굴리고 산도 옮길 수 있어라
百年情義比瓜葛 평생의 정의는 과갈에 비길 만하니
死生貴賤焉足說 사생과 귀천 따위야 말할 것이 있으랴
白石淸川松桂林 흰 돌 맑은 시내 솔과 계수 우거진 숲에
晤言不暇煩招尋 부르고 찾을 겨를 없이 서로 얘기 나눈다
古來世事無不有 예로부터 세상사는 있지 않은 게 없으니
却恐會合難可久 만남이 오래가기 어려울까 그게 걱정이라
故用寫作風流圖 그래서 이렇게 풍류도를 그렸으니
趙子丹靑絶代手 조자의 그림 솜씨는 세상에 드물어라
昂藏相對兩幅巾 복건을 쓰고 훤칠하게 마주 선 두 사람
標格不是塵中人 그 풍모가 속진 속의 사람이 아니로세
從此千秋更萬歲 이제부터 천추가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록
傳之仍雲期勿替 이 그림 후손에게 길이길이 전하게 해야지
我手撫圖三歎息 내 손으로 그림 어루만지며 세 번 탄식하노니
管鮑古道今誰識 관포의 옛 도를 지금에 누가 알리오
君唯畫貌不畫心 군은 모습만 그리고 마음은 못 그렸으니
所以不可無我吟 그래서 나의 시가 없을 수 없는 것이지
[주-D001] 한양의……같고 : 지혜가 뛰어난 사람임을 뜻한다.
황정견(黃庭堅)의 〈증조언(贈趙言)〉에 “
요양의 조방사는, 눈이 가을 매와 같아라.〔饒陽趙方士 眼如九秋鷹〕” 하였다.
석가의 십대제자(十大弟子) 중 지혜 제일로 꼽히는
사리불(舍利弗)의 이칭이 추로자(鶖鷺子)인데,
이는 그 어머니의 눈이 물새인 무수리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山谷外集詩注 卷7 贈趙言》
여기서는 조사안(趙士安)의 성이 ‘조(趙)’이고
지혜가 뛰어난 것에 착안하여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주-D002] 옥호로의 얼음 : 마음이 맑고 고결함을 형용한 말이다.
남조(南朝) 송나라 포조(鮑照)의 〈대백두음(代白頭吟)〉에
“곧기는 붉은 거문고 줄 같고, 맑기는 옥호로의 얼음 같다.〔直如朱絲繩 淸如玉壺氷〕” 하였다.
[주-D003] 바다도……있어라 : 벗끼리 의기상투함을 형용하였다.
이백(李白)의 〈부풍호사가(扶風豪士歌)〉에 “부풍의 호걸스러운 선비 천하에 뛰어나니,
의기가 서로 통하면 산을 옮길 수 있네.〔扶風豪士天下奇 意氣相傾山可移〕” 하였다.
[주-D004] 과갈(瓜葛) : 덩굴이 뻗어서 서로 얽힌 외와 칡으로,
집안의 혼인으로 맺어진 친척 관계를 뜻한다.
한(漢)나라 채옹(蔡邕)의 〈독단(獨斷)〉이란 글에
“무릇 선제(先帝) 선후(先后)와 과갈의 관계가 있는 이들은 모두 모였다.” 한 데서 온 말이다.
[주-D005] 서로 얘기 나눈다 : 원문의 ‘오언(晤言)’은
《시경》〈진풍(陳風) 동문지지(東門之池)〉에
“저 아름다운 숙희여, 더불어 얘기할 만하구나.〔彼美淑姬 可與晤言〕” 한 데서 온 말로,
벗들끼리 뜻이 통하여 서로 만나서 정답게 얘기를 나누는 것을 뜻한다.
[주-D006] 세상사는……없으니 : 인생을 살다 보면 온갖 일이 다 생길 수 있다는 뜻이다.
두보(杜甫)의 〈가탄(可歎)〉에 “옛날이 가고 지금이 오는 게 모두 일시이니,
인생의 만사는 있지 않은 게 없어라.〔古往今來共一時 人生萬事無不有〕” 하였다.
[주-D007] 관포(管鮑)의 옛 도 : 춘추 시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의 우정, 즉 관포지교(管鮑之交)를 말한다.
□ 성로(成輅, 1550-1615)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중임(重任),
호는 석전(石田)·삼일당(三一堂)·잠암(潛巖). 양주 출신.
아버지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성영국(成永國)이며,
어머니는 전주 최씨로 제용감부봉사(濟用監副奉事) 최언청(崔彦淸)의 딸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이다.
1570년 (선조 3)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였다.
뒤에 사옹원(司饔院)과 제릉(齊陵)의 참봉이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스승 정철의 잦은 유배를 본 그는 벼슬을 싫어하였고,
또 동문인 권필(權韠)의 죽음을 보고서 더욱 세상과는 인연을 끊었으며,
지은 시고(詩藁)마저 모두 태워버렸다.
편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임진왜란 때에는 어머니가 눈병으로 앞을 못 보고
다리가 아파 걸음을 걷지 못하자, 어머니를 등에 업고 강도(江都)까지 가서
배를 얻어 호남에 피신하여 난을 면하였다.
친구의 아들이 포로가 되었으나 속환(贖還)할 돈이 없어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노자를 털어 구하여준 일도 있다.
좌우에 구용(九容)과 구사(九思)를 써붙이고 일동일정을 그에 맞게 하였으나,
정철이 실각당한 뒤로는 더욱 세상에 뜻이 없어 술로만 세월을 보내었다.
양화도(楊花渡) 강가에 임시 거주하면서
사위 조영(趙嶸)과 함께 서로 의지하여 지냈는데,
술이 있으면 반드시 취해 쓰러지는 것을 한계로 삼았다.
그러면서 늘 말하기를 “병들어 앓지 않고 취해 누운 상태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으면 좋겠다.”고 하였는데,
그 소원대로 어느 날 술 취해 누워서 그대로 죽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석전유고』 2권이 있다.
□ 권필(權韠, 1569~161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승지 권기(權祺)의 손자이며, 권벽(權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아,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관금독작(觀禁獨酌)」을 지었다.
젊었을 때에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다.
광해군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고, 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석주집(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周生傳)」이 현전한다.
□ 허목(許穆, 1595-1682)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문보(文甫)·화보(和甫),
호는 미수(眉叟). 찬성 허자(許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고, 아버지는 현감 허교(許喬)이며,
어머니는 정랑 임제(林悌)의 딸.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 거창현감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를 사사하였다.
또한 그의 소개로 정구(鄭逑)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4년(인조 2) 광주(廣州)의 우천(牛川)에 살면서 자봉산(紫峯山)에 들어가
독서와 글씨에 전념해 그의 독특한 전서(篆書)를 완성하였다.
1626년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문제와 관련해
유신(儒臣) 박지계(朴知誡)가 원종의 추숭론(追崇論)을 제창하자,
동학의 재임(齋任)으로서 임금의 뜻에 영합해 예를 혼란시킨다고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인조는 그에게 정거(停擧: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를 명하였다.
뒤에 벌이 풀렸는데도 과거를 보지 않고 자봉산에 은거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36년 병자호란을 당해 영동(嶺東)으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릉·원주를 거쳐 상주에 이르렀다.
1638년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다가 1641년 다시 사천으로 옮겼다.
그 뒤 창원·칠원(漆原) 등지로 전전하다가
1646년 마침내 경기도 연천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다음 해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편찬하기 시작해
3년 뒤에는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교관이 된 뒤 조지서별좌(造紙署別坐)·공조좌랑 등을 거쳐
용궁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7년 공조정랑에 이어 지평에 임명되었으나,
효종을 만나 소를 올려 군덕(君德)과 정폐(政弊)를 논하고 사임을 청하였다.
그 뒤 사복시주부로 옮겼으나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59년 장령이 되어 군덕을 논하는 소를 올렸으며,
또한 당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이 주도하는
북벌정책에 신중할 것을 효종에게 간하는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이어 둔전의 폐단을 논하였다. 그 해 효종이 죽자 소를 올려 상례를 논했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에 출입했고, 다시 장령이 되었다.
그 때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繼妃)의 복상기간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상소해 정계에 큰 파문을 던졌다. 이를 기해복제라 한다.
당시 송시열 등 서인(西人)은 『경국대전』에 의거해 맏아들과 중자(衆子)의 구별 없이
조대비는 기년복(朞年服: 1年喪)을 입어야 한다고 건의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실은 의례(儀禮) 주소(註疏: 경서 등에 해석을 덧붙인 것)에 의거해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 즉 아들이기는 하지만 맏아들이 아닌
서자에 해당된다고 해석해 기년복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고 또 종묘의 제사를 주재해
사실상 맏아들 노릇을 했으니 어머니의 맏아들에 대한 복으로서
자최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복제논쟁의 시비로 정계가 소란해지자 왕은 그를 삼척부사로 임명하였다.
여기서 그는 향약을 만들어 교화에 힘썼으며,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는 한편,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 효종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복제문제가 다시 제기되었다.
조정에서는 대공복(大功服)으로 9개월을 정했으나
대구 유생 도신징(都愼徵)의 상소로 다시 기해복제가 거론되었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맏아들·중자의 구별 없이
부모는 아들을 위해 기년복을 입는다고 규정했으나,
며느리의 경우 맏며느리는 기년, 중자처는 대공으로 구별해 규정하였다.
그런데 인선왕후에게 대공복(大功服)을 적용함은 중자처(衆子妻)로 대우함이고,
따라서 효종을 중자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근거는 『경국대전』이 아니라 고례(古禮)의 체이부정설이었다.
이는 효종의 복제와 모순되는 것으로서 새로 즉위한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일로 송시열 등 서인은 몰리게 되고
그의 견해가 받아들여져 대공복을 기년복으로 고치게 되었다.
이로써 서인은 실각하고 남인의 집권과 더불어 그는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사직소를 올렸고, 병이 나자 숙종은 어의를 보내어 간호하기까지 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참판·비국당상(備局堂上)·귀후서제조(歸厚署提調) 등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진하고, 의정부우참찬 겸 성균관제조로 특진하였다.
이어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승진되어 과거를 보지 않고도
유일(遺逸)로서 삼공(三公)에 올랐다.
그 해 덕원(德源)에 유배중이던 송시열에 대한 처벌문제를 놓고
영의정 허적(許積)의 의견에 맞서 가혹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해 남인은 송시열의 처벌에 온건론을 주장하던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갈라졌고, 그는 청남의 영수가 되었다.
그 뒤 지덕사(至德祠)의 창건을 건의하고,
체부(體府)·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지패법(紙牌法)·축성(築城) 등을 반대했으며,
그 해 왕으로부터 궤장(几杖)이 하사되었다.
이듬해 차자(箚子)를 올려 치병사(治兵事)·조병거(造兵車) 등 시폐(時弊)를 논하였다.
그러나 사임을 아무리 청해도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돌아왔으나
대비의 병환소식을 듣고 다시 예궐하였다. 특명으로
기로소당상(耆老所堂上)이 되었는데 음사(蔭仕)로서 기로소에 든 것은 특례였다.
1677년 비변사를 폐지하고 북벌준비를 위해 체부를 설치할 것과
재정보전책으로 호포법(戶布法) 실시를 주장하는 윤휴(尹鑴)에 맞서
그 폐(弊)를 논하고 반대하였다. 이듬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해, 나라에서 집을 지어주자 은거당(恩居堂)이라 명명하였다.
1679년 강화도에서 투서(投書)의 역변(逆變)이 일어나자
상경해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맹렬히 비난하는 소를 올렸다.
이듬해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자 관작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저술과 후진양성에 전심하였다.
그는 이기론(理氣論)에 있어서 기(氣)는 이(理)에서 나오고 이는 기에서 행하므로,
이기를 분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특한 도해법(圖解法)으로 해설한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를 지어 후학들을 교육하였다.
사후 1688년 관작이 회복되고, 숙종은 예장(禮葬)의 명령을 내려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했으며, 자손을 등용하도록 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그림·글씨·문장에 모두 능했으며,
글씨는 특히 전서에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작품으로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경례유찬(經禮類纂)』·『미수기언(眉叟記言)』이 있다.
1691년 그의 신위(神位)를 봉안하는 사액서원으로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에 세워졌고, 나주의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의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신명규가 쓴 초서로 최근 경매장에 나와 고가로 낙찰되었다 한다.
□ 신명규(申命圭, 1618-1688)
정언, 헌납, 사간 등을 역임한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원서(元瑞) 또는 군서(君瑞), 호는 묵재(默齋) 또는 적안(適安).
첨정(僉正) 신암(申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사성 신민일(申敏一)이고,
아버지는 부사 신상(申恦)이며, 어머니는 이흥인(李興仁)의 딸이다.
1662년(현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5년 지평(持平)·장령(掌令)을 지내고 이듬해인
1666년에는 전라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바 있으며,
이어 정언(正言)·헌납(獻納) 등을 거쳐 1667년 남해로 유배되었다.
1669년 집의에 이르고, 이어 사간·부수찬 등 주로 대간을 역임하였다.
1673년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郎廳)이 되어 영릉(寧陵)을 옮길 때
석역(石役)의 감독이 태만했다는 죄로 박천·강진 등지로 유배되었다가
1683년(숙종 9)에 풀려났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1725년(영조 1) 진도 유생 박제현(朴齊賢) 등의 상소로 봉암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묵재기문록(默齋記聞錄)』이 있다.
대동야승 제15권 묵재일기
□ 묵재기문록(默齋記聞錄)
4권 4책. 필사본. 저자는 효종·숙종 연간의 복잡하게 전개되던
중앙 정계의 정치 활동에 참여한 관료로서, 묵재(默齋)는 저자의 호이다.
내제(內題)는 단순히 ‘기문록(記聞錄)’이라 되어 있다.
부분적으로 관계 있거나 비슷한 종류의 내용을 한데 모아 놓은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대개 시간의 흐름이나 내용에 제약을 받지 않고
일정한 체재 없이 자유롭게 기술했으며, 필요한 경우 세주(細註)로 내용을 보충하였다.
내용은 청나라에 대한 주화파(主和派)와 척화파(斥和派)의 대립,
소현세자빈(昭顯世子嬪)강빈(姜嬪)의 옥사, 노소론(老少論)의 대립,
숙종 연간 장귀인(張貴人)에 얽힌 사건, 임금과 신하들간의 사적인 관계 등이다.
대부분 17세기 전반과 중반, 중앙 정계의 여러 가지 사건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격렬한 반청론(反淸論)에 서 있는 저자의 입장이 강하게 표출되어 있다.
그리고 저자 개인이나 가문의 내면적인 여러 일들이 실려 있다.
또한 제주도 유배 생활의 경험이나 여행 기록을 비교적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 부분도 있다.
조선 초기 이후 여러 인물들에 대해 전해 오는 이야기들,
저자가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접할 수 있었던
인물들에 대한 내용도 풍부하게 실려 있다.
특히, 저자는 서인(西人)의 입장에 서 있으면서도 일정한 당색에 한정되지 않고,
허목(許穆)·윤휴(尹鑴) 등 남인의 인물들에 대한
교우관계나 개인적인 평을 서술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지배층 뿐만 아니라 민간의 무뢰배에 대한 이야기 등,
사회의 여러 계층의 삶을 조명하였다.
이밖에 과거와 같은 정치 제도의 운영 상황, 민간의 풍습,
신기루(蜃氣樓)와 같은 자연 현상, 제주도의 것을 비롯한 자연 경관이나
지리적 상식 등 수록 내용에 전혀 제한이 없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 사축서(司畜署)
여러가지짐승을 기르는 기관으로서
세조 十二년에 예빈시(禮賓寺)의 분시(分寺)로하였다가 영조때 호조로 합쳤는데
여기 관원으로는 제조(提調), 사축(司畜) 별제(別提). 別號=典廐署
□ 별검(別檢)
전설사(典設司)의 종8품, 빙고(氷庫)·사포서(司圃署)의
정8품 또는 종8품의 벼슬인데 무록관(無祿官)이다.
전설사에 1인, 빙고에 2인, 사포서에 1인을 두었다.
□ 청단도(靑丹道)
조선시대 황해도 해주의 청단역(靑丹驛)을 중심으로 한 역도(驛道).
중심역은 찰방(察訪)이 소재하였다. 관할범위는
개성-배천-연안-해주-장연-송화에 이어지는 역로와 해주-옹진에 이어지는 역로이다.
이에 속하는 역은 배천의 금곡(金谷), 연안의 심동(深洞), 해주의 망정(望汀)·
금강(金剛), 웅진의 문라(文羅), 장연의 금동(金洞)·신행(新行), 송화의 유안(維安),
금강의 남산(南山) 등 9개역이다. 뒤에 남산역은 폐지되었다.
소관역은 모두 소로(小路, 小驛)에 속하였다. 1894년 갑오경장 때까지 존속하였다.
금교역(金郊驛)은 고려시대부터 금교도 소속의 본역으로 설치되어
강음현 오조천에 위치하였다. 조선초기에 금천으로 옮겼으며,
세종대에 황해도참로찰방의 금교참(金郊站)으로 개편되어
흥의(興義)·금암(金巖)·보산(寶山)·안성(安城)·용천(龍泉)·검수(劍水)·
절령(岊嶺)·동선(洞仙)·경천(敬天) 등과 함께 『세종실록』「지리지」에는
10개 참으로 되어 있다. 이후 성종대 『경국대전(經國大典)』 반포시에는
황해도 7참이 금교도(金郊道), 기린도(麒麟道), 청단도(靑丹道)로 분화되어,
금교참은 금교도에 소속되었다가 다시 금교역으로 부르게 되었다.
□ 찰방(察訪)
고려 때는 지방의 역(驛)을 담당한 관리의 명칭이 시대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다.
초기에는 제도관(諸道官) 또는 역순관(驛巡官)이 파견되었으나
현종 때는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로 개칭되었다.
1272년(원종 13)에는 전국에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을 파견하였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 참적제도(站赤制度)의 영향을 받아
포마차자색(舖馬箚子色)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다루가치(達魯花赤)와 탈탈화손(脫脫和孫)을 파견해
우역사무를 감독하게 함으로써 역행정의 자주권마저 박탈당하였다.
원나라가 축출되자 1390년(공양왕 2) 역로 회복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조준(趙浚) 등이 주장해 역승(驛丞) 설치문제가 대두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역승과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함께 설치되었다.
정역찰방은 1402년(태종 2) 경기지방의 역로를 고찰하려고 파견된 것이다.
1433년(세종 15) 이전까지도 전라·경상도를 제외한 전국의 각 도에 1, 2인이 파견되었다.
정역찰방의 임무가 역승의 잘잘못을 규찰하거나
주군(州郡)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고통을 살펴 엄히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 사실에서
정역찰방이 곧 찰방의 전신(前身)으로 추측된다.
1457년(세조 3) 7월에 최초로 전국의 역승 일체를 혁파하고 찰방으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조처는 서리거관자(書吏去官者)로 임명된 역승이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고 백성(吏民)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역승의 관품이 높지 않다 하여 사신왕래자의 작폐가 심하다고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혁이 있은 뒤 1462년 1월에는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많으므로
찰방도(察訪道)에 역승 1인을 더 설치하자는 논의에 따라 역로를 크게 개편하였다.
이 해 8월 충청·전라도에 찰방과 역승 각 3인씩, 경상도에 찰방과 역승 각 5인씩,
강원도에 각 2인씩, 황해도에 찰방만 2인씩 두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경기·충청·전라도에 각 3인씩,
경상도에 찰방 5인과 역승 6인, 강원도에 각 2인씩, 황해도에 찰방 2인과 역승 1인,
영안도에 찰방 3인, 평안도에 찰방 2인으로 법제화되었다.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이 완전히 폐지되고 찰방체제로 전환되었다.
『속대전』에서는 이미 역승을 혁파해 찰방으로 대치했으므로
찰방 수가 크게 늘어나 경기도에 6인, 충청도에 5인, 경상도에 11인,
전라도에 6인, 황해도에 3인, 강원도에 4인, 평안도에 2인이었다. 『
대전회통』에서는 그 수에 변함이 없다.
찰방은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역정(驛政)의 최고책임자였다.
또한 유사시에 북방지역에서는 합배(合排 : 함경·평안도 연안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의 역촌)를 순행하면서 부방(赴防)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행정면에서는 대간(臺諫)이나 정랑직(正郎職)에 있는
명망 있는 문신을 차출해 지방 주현에 파견하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고찰하게 함으로써 민생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 조대남이 근무했던 종부시(宗簿寺) 위치도
□ 종부시(宗簿寺)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3품아문이며 도제조·제조 각각 2명씩 두었는데,
도제조는 종실의 존속친 가운데에서 뽑았다.
정원으로 정3품 정 1명, 종4품 첨정 1명, 종6품 주부 1명, 종7품 직장 1명을 두었다.
1392년(태조 1) 7월 관제제정 때 왕실친속의 보첩과
궐 안의 급사 등의 일을 관장하는 전중시를 설치했다가,
1401년(태종 1) 종부시로 개편했다. 한때 '재내제군부'에 속했다가
다시 종부시로 독립되고, 재내제군부는 1430년(세종 12) 종친부로 개칭되었다.
원래 종부시는 중국 송나라의 종정시와 수옥첩관을 대종정사와 합쳐 하나의 관사로
만든 것으로, 종친 사이의 친목을 꾀하고 잘못이 있으면 이를 규찰하는 일을 담당했다.
그 위에 종학과 춘추관 2품 이상 1명, 3품 이하 1명도 겸하게 되어 있었으며,
10년에 1번씩 〈선원록〉을 수찬하고 3년마다 종실보첩을 속사하도록 되어 있었다.
또 왕자·왕녀의 혼인이 있는 경우 이를 준비하는 일도 관장했다.
1439년(세종 21)에는 종친을 규찰하는 13개 조건을 마련하여 이에 따라 실시했다.
〈속대전〉에서 관원 가운데 첨정을 폐지했으며
〈대전통편〉에서 도제조는 대군이나 왕자군 이외에는 임명하지 못하게 하고,
도제조가 임명되지 않았을 때는 제조 1명을 종반으로써 천망해 임명했다.
주부는 문관 가운데 천망해 임명하고, 직장은 생원이나 진사가 아니면 임명하지 않았으며
규정에 따라 품계가 오르면 전임했다. 〈대전회통〉에서 종친부에 합쳐졌다.
□ 직장(直長)
1392년(태조 1) 7월 관제제정 때 고려의 제도에 따라
사옹원·내의원·상서원 등 많은 부서에 1∼3인씩 설치하였다.
이들은 주로 궁궐내의 재정·물품담당 관서에 많이 두어졌는데
전곡·비품 등의 출납실무를 담당하였다.
이와 비슷한 직책의 종7품직에는 영(令)·승(丞) 등이 각 부서에 설치되어 있었으나
1466년(세조 12) 1월 관제경정 때 모두 직장으로 통일하여
종전의 부사·승·부승 직제가 주부·직장·봉사의 체계로 일원화되었다.
그 결과, 중앙의 약 30개 부서에 이 직이 두어지게 되었다.
□ 근역서화사(槿域書畵史)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은 한국 최초의 서화 인명사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창 오세창(葦滄 吳世昌 1864-1953)이 삼국 시대의 솔거(率居)에서 구한말의 임진수까지
서예가(576명), 화가(392명), 서화가(149명) 등 1,117명에 대한 기록을
역대 자료에서 발췌해 1917년에 완성한 책입니다. 활자본은 1928년에 간행됐습니다.
오세창은 조선 말기의 개화파 중국어 역관인 오경석(吳慶錫)의 아들이고
그 자신이 서화가이자 전각가였습니다.
오세창, <임남해각자(臨南海刻字)>, 비단에 먹, 24×33㎝, 1924년도
오세창, <萬歲報社之章> ‘만세보’는 1906(고종 10) 6월 17일
천도교 교주 손병희의 발의로 창간된 일간신문으로 오세창이 사장이었다.
근역서화징은 한국회화사 연구는 물론 서예사 연구에 있어 절대적인,
없어서는 안 될 자료로 평가됩니다.
오세창은 당대에는 최고 감식안으로 간송 전형필의 컬렉션 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아울러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중 한 사람인 독립운동가이기도 합니다.
한학자 홍찬유 감수로 동양고전학회가 2001년에 번역본(『한글 근역서화징』시공사)을
펴낸 바 있는데, 홍찬유 선생이 쓰신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써 있습니다.
오세창, 『근역서화사(槿域書畵史)』
(1928년 출간 때에는 『근역서화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 책은 우리나라의 보고(寶庫)이다. 위창 오선생은 고고학 대가의 적전(嫡傳)으로
구한국이 장차 망하려하는 때에 태어나셨다. 그때 일인(日人)이 그 변변치 않은
무력을 믿고 우리나라에 침입하여 잔인무도하게 민족을 짓밟으며 못할 짓이 없었으니
강도가 빈집에 들어와 회빈작주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선생은 고심적려하신 끝에 기묘한 처방을 발견하셨으니,
그것이 바로 '근역서화징'을 출간할 계획을 세우신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귀중한 책이 순한문으로 기록되어서
지금같이 한문을 숭상하지 않는 때에 이 책을 독해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국역할 것을 계획하고 1993년 3월 5일에
정후수, 나종면, 김인규, 안외순, 조이옥, 오연숙, 김보경, 김상엽 등과
유도회관에 모여서 '근역서화징 국역위원회'를 조직하고 불녕(不侫)이 총감독이 되어
원문해설을 담당하고 국역은 소장파위원이 담당하여
신구합작으로 하기로 작정하였다..."(1998)
오세창(吳世昌)이 편찬한 한국 역대 서화가의 사전.
활자본. 1책. 국판. 324면. 1917년 편찬하고 1
928년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간행하였다. ‘근역’이란 우리나라를 일컫는 말이다.
편차는 범례·목록·연대편람·채용군서목(採用群書目)·인명총목,
권1 나대편(羅代編:신라∼통일신라),
권2 여대편(麗代編:고려),
권3 선대편(鮮代編:태조∼인종),
권4 선대편(명종∼현종),
권5 선대편(숙종∼철종), 대고록(待考錄), 증록(增錄:헌종∼철종),
씨명자음검색, 씨명자획검색, 별호자음검색, 별호자획검색 순으로 되어 있다.
서술 방식은 성명·자·호·본관·가세(家勢)·출생연도·수학(受學)·관직·사망연도
등을 소개한 뒤에 그의 예술 세계에 대한 기록과 논평을 싣고
그 서목을 밝혔으며 전해지는 작품의 명칭과 소재를 밝혔다.
채용군서목은 인용한 서적을 수록하였는데 모두 《삼국사기(三國史記)》 외
274종의 서적이 저자의 출생연대순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밖에도 읍지·족보·비명·서화제발(書畵題跋)이 있다.
인명총록에는 수록된 순서대로 표권(標圈)·성명·호·생년만을 따로 기록하였다.
수록된 서화가는
권1 나대편은 화가 6명, 서가 16명, 서화가 1명 등 총 23명,
권2 여대편은 화가 28명, 서가 121명, 서화가 20명 등 총 169명,
권3 선대편은 화가 57명, 서가 133명, 서화가 31명 등 총 221명,
권4 선대편은 화가 82명, 서가 164명, 서화가 33명 등 총 279명,
권5 선대편은 화가 188명, 서가 132명, 서화가 51명 등 총 371명,
대고록은 화가 26명, 서가 4명, 서화가 8명 등 총 38명,
증록은 화가 5명, 서가 6명, 서화가 5명 등 총 16명이다.
이를 종합하면 화가는 392명, 서가는 576명, 서화가는 149명으로 모두 1,117명이다.
기록에 보이는 자는 모두 망라하였으며 자신의 품평을 피하고 객관적으로 서술하였다.
성명은 전하지만 연대를 알 수 없거나 자 또는 호만 전하는 사람은 대고록에 부기하였고,
1917년 탈고 뒤 1928년 간행되기까지 수집한 서화가는 증록에 수록하였다.
또한 집필에 사서(史書)·문집(文集)·성보(姓譜)·방목(榜目)·금석서(金石書)를
참조하였고, 중국의 《역대화사휘전(歷代畵史彙傳)》,
일본의 《고화비고(古畵備考)》도 언급하였다.
편저자인 오세창은 중국어 역관이자 개화사상가인 오경석(吳慶錫)의 아들로
한말 개화 관료와 애국 계몽 지사로 활동하였으며,
서예가·감식가인 동시에 3·1운동 당시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고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미술가 단체인 서화협회의 발기인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나라 역대의 서화가를 연구하는 데 가장 권위있는 문헌으로 평가된다.
(The Future is Beautiful / Daniel Kobialk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