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과 이긍익(李肯翊) 이야기
- 낭만도사 2021. 12. 24. 10:17
조선시대 왕조와 집권세력 등의 야사나 숨은 이야기에 자주 언급되는
출전 서적 중에 하나가 약 30년간에 걸쳐 저술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조선의 유명한 대서예가였던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1777)선생이다.
조선 태조 이성계의 둘째 아들 정종(定宗) 이방과(李芳果)의 후손이다.
가문이 소론에 해당되어 노론의 핍박을 많이 받았다.
필자도 지난번 코로나가 시작될 때쯤에 이광사의 완도군 신지도 유배지를 찾아봤었다.
정약용처럼 유배가 주는 후손의 혜택들이 있기도 하다.
당파 싸움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분들이 유배지에 있었기에
유배문학이 피어난 것은 아이러니한 것이다. 책을 저술함에 있어
이긍익의 서술 자세를 존경하고 싶다. 작자 이긍익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을 살펴보는게 좋을 듯하다.
1. 작자 이긍익(李肯翊)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다.
자는 장경(長卿), 호는 완산(完山) 또는 연려실(燃藜室)이며, 한성부 출생이다.
이광사의 아들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조선의 제2대 임금인 정종 이경 서자 덕천군 이후생(德泉君)의 후손이다.
‘연려실(燃藜室)’이란 아버지가 손수 휘호해 준 서실(書室) 이름으로,
한(漢)나라의 유향(劉向)이 옛 글을 교정할 때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에 불을 붙여 비추어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가문은 전통적으로 소론에 속했으며,
경종대의 신임옥사와 1728년의 이인좌(李麟佐)의 난으로 크게 화를 당하였다.
그리고 20세 때 아버지 이광사가 나주괘서사건에 연루, 신지도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
어려서 아버지 이광사에게 수학하여 학문과 글씨가 뛰어났으며,
실학을 제창하고 고증학자로서도 유명하였다.
집안이 가학으로서 양명학(陽明學)을 내수(內修)해왔기 때문에
이긍익 역시 특히 양명학 계열에 속하였다.
일찍이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에서 비롯된 양명학은
정제두(鄭齊斗)를 통해 이긍익에게 전해졌다. 그의 집안은 소론에 속하였는데,
노론의 집권으로 여러 번 귀양살이를 했으며 온 집안이 크게 화를 입었다.
많은 책을 저술했으나 여러 번 귀양살이를 하느라 대부분 유실되고,
조선 왕조 야사(野史)의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연려실기술』만 전한다.
이긍익의 역사에 대한 안목을 살펴 볼 수 있는 저작으로 『연려실기술』을 꼽을 수 있다.
이긍익은 고증을 역사에서 제일의 생명으로 여기고 어디까지나 '술이부작(述而不作)'과
'불편부당(不便不黨)'의 정신으로 남인·북인·노론·소론 및 유명·무명 인사를 가리지 않고
자료들을 섭렵, 인용하였으며, 거의 국내자료에 국한하였다.
이것은 한치윤(韓致奫, 1765 ~ 1814)이 《해동역사》를 쓸 때
외국자료를 통하여 한국사를 이해하려 한 것과 대조된다.
역사는 내 나라의 자료에 의하여 이루어져야 한다는 강한 자아의식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사서술에서 생명으로 다룬 것은 객관성·공정성·체계성·계기성·현실성이었는데
당시 상황에서 앞선 역사의식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는 뒤에 정약용(丁若鏞) 등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광사의 고승간화도
2.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개요
·작자 : 이긍익(李肯翊)
·창작/발표시기 : 1776년(영조 52) 이전, 1934년(번역), 1966년(국역출간)
이 책은 편저자 이긍익의 생존 때부터 전사본(傳寫本)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어서,
특별히 정본이 없이 전해져왔다. 더구나 편저자 자신이 그 범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문에 여백을 두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는 대로 수시로 기입, 보충하는 방법을
취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보충하게 하여 정본을 이룩하도록
희망하였으므로 종래의 전사본 중에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다.
또, 편저자 자신의 최후 정본인 원고본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어
그 정본이 어떤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가장 권위 있고
정본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1913년 일본인 주관의 조선고서간행회 인본(印本)의 대본이고,
다른 하나는 1911년 최남선(崔南善)이 주관한 광문회(光文會) 인본의 대본이다.
전자는 원집 33권(태조∼현종), 속집 7권(숙종), 별집 19권, 합 59권임에 대하여,
후자는 단지 원집 24권(태조∼인조), 별집 10권, 합 34권뿐이다.
이 책의 찬술연대는 저자의 연보가 구체적으로 전해오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으나,
41세 되던 1776년(영조 52) 이전에 일단 완성된 듯하다.
내용
이 책의 첫머리에 그의 아버지 광사(匡師)가 책 이름을 휘호하였는데,
광사는 서예가로서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1776년에 사망하였다.
실각한 소론가문의 후손으로,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어온 양명학(陽明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의례서(義例序)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종래 야사류로서 ≪대동야승 大東野乘≫·≪소대수언 昭代粹言≫ 등의 단점인
산만한 서술, 소홀한 자료수집, 균형 잃은 서술과
동서분당 이후 왜곡된 역사서술 등을 극복하고,
조직적인 체계, 편리한 열람,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의 수록,
불편부당한 서술을 추구함으로써 역사를 위한 역사를 찬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내용은 조선 태조부터 현종까지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고사본말(故事本末)의 형식으로 엮은 원집과 그가 생존했던 시기인
숙종 당대의 사실을 고사본말로 엮은 속집, 그리고 역대의 관직을 위시하여
각종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 등 여러 편목으로 나누어
그 연혁을 기재하고 출처를 밝힌 별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원집과 속집을 정치편이라 한다면 별집은 문화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된 야사이다.
당시 조선왕조의 국사를 원집과 속집에 넣고, 국조(國朝)·사전(祀典)·사대(事大)·
관직·정교(政敎)·문예·천문·지리·변어(邊圉:대외관계)·역대 고전 등을 별집에 수록하여
조선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보다 조리 있고 다채롭게 이해, 파악하고자 하였다.
기사본말체의 서술방식은 비교적 진보된 서술로서,
역사상의 사건전말을 밝혀 역사 전개의 진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 서술에 있어서 인과성이 중요시된 것이며
사건해명을 위주로 한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19세기 서양의 사가들이
사실지상주의(事實至上主義)를 내세운 것과 다를 바 없는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은 사람들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들을 모아 분류하여 편집한 것이요,
하나도 나의 사견으로 논평한 것이 없다. 나는 사실에 의거하여 수록하기만 할 뿐
그 옳고 그름은 후세사람들의 판단에 미룬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보다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관점에서 편찬하였다.
따라서, 저자의 사견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특징이며,
오직 선배학자들의 기술을 그대로 옮겨놓은 뒤,
그 기사의 끝에 반드시 인용서목을 첨가해두었다는 것을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속집에는 사료의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원저자만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원저자의 뜻에 부응한 것이다.
이 책에 인용된 조선시대의 야사·일기·문집류는 400여 종에 이른다.
주로 인용된 서책은 ≪고려사≫·≪국조보감≫·
≪동국통감≫·≪삼국사절요≫·≪조선왕조실록≫ 등의 정사류보다는
≪동각잡기 東閣雜記≫·≪기재잡기 寄齋雜記≫·
≪식소록 識小錄≫·≪해동잡록 海東雜錄≫ 등의 야사류가 주가 된다.
또한, 문집류만도 100여 종에 이르는데, 그 활용한 빈도대로 밝히면
≪율곡집 栗谷集≫·≪지봉유설 芝峰類說≫·≪하담집 荷潭集≫·≪성옹집 醒翁集≫·
≪음애집 陰崖集≫·≪월사집 月沙集≫·≪서애집 西厓集≫·≪염헌집 恬軒集≫·
≪추강집 秋江集≫·≪사재집 思齋集≫·≪우암집 尤菴集≫·≪상촌집 象村集≫ 등이 있다.
서술 태도의 특징으로는
우선 역사적 사실의 취사선택에서 객관제일주의의 역사정신을 반영하였다.
즉, 저자의 사견이 없이 각 조항마다 반드시 그 인용서목을 밝힌 것은
실증사학의 연구태도와 일치되고 있다.
다음으로는 공정성을 그 생명으로 삼아, 사심 없이 불편부당의 필치를 보인 것이다.
그 증거로서 여러 선현을 부를 때 옛 사람들이 본명을 직서하지 않고
호·시호·자 등을 쓴 것을 비판하면서, 선현의 이름들을 직서(直書)하였다.
그것은 역사서술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한, 역사의 현실성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즉, 속집에서 당쟁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수집하여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역사로써 역사를 고발하게 하였다. 따라서, 저자의 평생사업으로 이룩한 대작인 이 책은
종래 체계가 없던 모든 야사에 대하여 정비된 체계를 세웠으며,
우리나라 야사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풍부한 사료의 하나로 대표된다고 하겠다.
19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의
≪조선야사전집 朝鮮野史全集≫에 일부가 국한문체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국역총서 古典國譯叢書≫
제1집 A5판 12권(색인 포함)으로 국역하여 출간하였다.
혜원 신윤복의 아버지로 알려진 신한평이 그린
‘이광사 초상’. 보물 제 1486호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폐족 가문에 태어나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
- 시심마 2018. 1. 6. 09:31 -
폐족 가문에 태어나 당파성을 배제한 역사서 <연려실기술> 남긴 이긍익
이긍익(李肯翊·1736(영조 12년)~1806(순조 6년))은 이광사(李匡師)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나기 6년 전인 영조 6년(1730)
소론 강경파였던 백조부 이진유(李眞儒)는 귀양지에서 끌려와 국문을 받았다.
그는 “오직 우리 숙종(肅宗)을 섬기는 도리로써 경종(景宗)을 섬겼고
경종을 섬기는 도리로써 성상(聖上·영조)을 섬겼으니,
평생에 힘쓴 바는 충의와 명절(名節)이었습니다”라고 항변했으나,
<영조실록>이 이진유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의 소하(疏下)의 역적들이었다’라고 쓴 대로
선왕(先王·경종)의 충신이었던 그는
영조의 역적으로 몰려 장사(杖死·곤장 맞다 죽음)당하고 말았다.
이후 그의 자식은 물론 조카들도 과거 응시가 금지된 폐족(廢族)이 되었는데,
이긍익의 부친 이광사(李匡師)가 과거 응시를 포기한 채 집에서 학문과 글씨 연마로
세월을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긍익에게도 한때 희망은 있었다.
비극의 근인(近因)을 탓하지 않다
내가 열세 살 때 선군(先君·이광사)을 모시고 잘 때, 꿈에 임금이 거둥하셨기에
아이들과 길가에서 바라보는데 임금께서 홀연히 연을 멈추시고
특명으로 나를 앞으로 오라고 하시더니, “시를 지을 줄 아느냐?”라고 물으시기에
“지을 줄 압니다”라고 답했더니 “지어 올리라”고 명하셨다.(<연려실기술> 의례(義禮))
»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에서 일체의 당파성을 배제했다.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모두 수록해 ‘사료로 말한’것이다.
이긍익은 ‘운(韻)을 내달라’고 요청했고,
영조는 ‘사(斜)·과(過)·화(花) 석 자를 넣어 지으라’고 명했다.
잠시 후 시가 완성되었느냐는 영조의 질문에 이긍익은 ‘두 자가 미정이어서 감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라고 답했고, 영조가 ‘그냥 말하라’고 하자 미완성의 시를 읊었다.
雨泊淸塵輦路斜 비가 맑은 티끌에 뿌리는데 임금 타신 연(輦)이 길에 비끼니
都人傳說六龍過 도성 사람들이 육룡(六龍)이 지나간다고 서로 말하네
微臣草野猶簪筆 미천한 초야의 신하가 오히려 붓을 잡았으니
不羨□□學士花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
이긍익이 짓지 못한 두 자에 대해 영조는 “거기에 ‘배란’(陪??)이라고 넣어
‘임금 수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네’로 하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이 일화는 이긍익이 13살 때 이미 수준 높은 시를 지을 정도로 학식이 있었음을 나타내는데,
이 꿈은 집안에 희망을 주었다. 꿈 이야기를 들은 부친 이광사는 ‘길몽’이라고 기뻐했고
이긍익도 “훗날 어전에서 붓을 가질 징조라고 생각했다”.
이때가 영조 24년(1748) 무렵인데,
이긍익이 스무 살 때인 영조 31년(1755) 나주벽서 사건이 발생하면서
집안은 오히려 멸문(滅門) 위기에 휘말린다.
나주벽서 사건의 주모자 윤지·윤광철 부자와 부친 이광사가
편지를 주고받은 것이 드러나면서 투옥된 것이다.
이긍익의 모친 문화 유씨는 마흔둘의 젊은 나이로 자결했고,
이광사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함경도 부령으로 귀양 갔다.
졸지에 모친이 자결하고 부친이 유배 간 상황에서 이긍익은
동생 영익을 부친에게 보내 시중 들게 하고
자신은 7살짜리 여동생을 데리고 가계를 꾸려야 했다.
이긍익은 이때 채마밭을 일궈 생계를 마련했다고 전해진다.
이 모든 비극의 근인(近因)은 백조부 이진유였지만 그의 집안은 이진유를 비판하지 않았다.
부령 유배지에서 이광사는 자식과 조카들에게 쓴 편지에서
‘우리 집안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은 백부(이진유) 때문이지만 사실은 가운(家運)일 뿐이다”라고
백부를 비난하는 대신 가운을 탓했다.
이광사도 이진유의 행위를 선왕에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했음을 시사하는데,
경종이 독살설 속에 세상을 떠남에 따라 가운이 기운 것이지
이진유의 잘못은 아니라는 생각인 것이다.
이광사는 유배지 부령에서 편지를 보내
“가세가 뒤집어지고 멸망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자제(子弟)들은 마땅히 효도와 우애에 더욱 독실해야 하고
예의를 서로 격려해야 한다”(‘자식과 조카에게 주는 편지’(寄子姪書))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긍익은 서울에 남은 한 살 위의 종형 이문익(李文翊)과
치심(治心)의 방도에 대해서 토론한다.
이문익의 부친 이광현(李匡顯)도 경상도 기장에 유배 중이었는데
동생 충익(忠翊)이 봉행하고, 문익은 서울에서 모친을 모셨다.
며칠 굶은 문익에게 모친이 배고프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배고픔을 잊기 위해 책을 읽습니다”라고 답변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의 궁핍 속에서
이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치심(治心)의 근원에 대해 서로 토론했다.
이광사는 이때 이긍익에게 편지를 보내
“마땅히 먼저 사물(四勿)을 행해야 한다”고 훈계한다.
사물이란 공자가 안회(顔回)에게 가르친 자신을 극복하고 예로 돌아가는
‘극기복례’(克己復禮)의 네 가지 계율을 말하는데,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非禮勿聽),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動)’는 것이다.
유배와 곤궁 속에서 치심을 논하고 사물을 논하는 데서 이 집안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사료로 말하는 ‘기사본말체’
이런 상황에서 이긍익이 천착한 것은 바로 역사였다.
이긍익은 13살 때 꿈 이야기의 뒷부분을 이렇게 결말지었다.
“그 후 내가 궁하게 숨어 살게 된 뒤로는 그 꿈을 전연 잊어버렸다.
요즘에 와서 문득 생각하니, ‘초야의 신하가 붓을 잡다’(草野簪筆)란 시 구절은
늙어서 궁하게 살면서 야사를 편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어릴 적에 꿈으로 나타난 것인 듯하니,
실로 우연이 아니라 모든 일이 다 운명으로 미리 정해진 것일게다.”(<연려실기술> 의례)
이긍익이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부친 이광사의 영향이 컸다.
이광사는 <동국악부>(東國樂府)에서 국조(國祖) 단군부터
두문동에 은거한 고려 충신들의 이야기까지 30가지 일화를 30수로 읊을 정도로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부친의 역사에 대한 이런 관심이 이긍익에게도 이어져
조선 후기 3대 역사서의 하나로 손꼽히는 방대한 <연려실기술>을 편찬한 것이다.
‘연려실’(燃藜室)은 이긍익의 호인데,
의례에서 이긍익은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지은 까닭을 설명하고 있다.
내가 젊었을 때, 일찍이 사모하던 유향(劉向)이 옛글을 교정할 적에,
태일선인(太一仙人)이 청려장(靑藜杖)에 불을 붙여[燃] 비춰주던 고사를 사모했는데,
선군으로부터 ‘연려실’(燃藜室)이란 세 글자의 큰 수필(手筆)을 받아
서실의 벽에 붙여두고 그것을 각판하려다가 미처 못했다.
친지들이 서로 전하기를, “그것이 선군의 글씨 중에서 가장 잘된 글씨라고
서로 다투어 모사(模寫)하여 각판을 한 이도 많았고,
그것으로 자기의 호를 삼은 이도 있다” 하니, 또한 우스운 일이다.
이 책이 완성된 후 드디어 <연려실기술>이라고 이름 짓는다.(<연려실기술> 의례)
2012년 발견된 이긍익 부친 이광사의 書帖
놀라운 것은 <연려실기술>에 일체의 당파성을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역사 기술의 객관성을 그만큼 중시했던 것이다.
영조 때의 일은 제외하고 태조(太祖)부터 숙종 때까지만 저술한 이유도
집안이 직접 관련된 영조 때의 일을 서술하면 객관성을 해칠까 우려한 것이다.
폐고(廢固)된 집안에서 역사를 서술하는 데 대한 우려도 있었다.
이긍익이 의례에서 “처음 내가 이 책을 만들 때
나와 가까운 친구가 ‘남에게 보이지 말라’고 권고하기도 했다”고 밝힌 것이 이를 말해준다.
이때 이긍익은 “남이 이 책을 알지 못하기를 바란다면 만들지 않는 것이 옳고,
만들어놓고서 남이 알까 두려워한다면 도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만큼 객관성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연려실기술>은 연대순으로 엮는 편년체(編年體) 사서가 대부분인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 역사서이다. 그는 해당 사안에 대한
상반된 견해의 사료를 수록함으로써 ‘사료로 말하게 하는 저술 방법’을 택한 것이다.
그는 “각 조에 인용한 책 이름을 밝혔으며, 말을 깎아 줄인 것은 비록 많았으나
감히 내 의견을 붙여 논평하지는 않아 삼가
‘전술(傳述)하기만 하고, 창작하지 않는다(述而不作)’는 공자의 뜻을 따랐다”고 밝히고 있는데,
‘술이부작’(述而不作)은 <논어> 술이편에서 공자가
“나는 옛것을 전하기만 할 뿐 창작하지는 않았다”라고 한 데서 나온 말로서
사료만 제공하고 판단은 독자들에게 맡기는 저술 방법이다.
세력 움직임이 영화처럼 환하네
이긍익이 이런 편찬 방법을 택한 것은 극심한 당쟁 때문이었다.
“동서 분당 이후로 피차의 문적(文籍)이 헐뜯고 칭찬한 것이 서로 상반되어 있으나
사료를 싣는 자가 한 편으로 치우친 것이 많았다. 나는 사실 그대로를 모두 수록하여
뒤의 독자들이 각자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게 하려 한다.”(<연려실기술> 의례)
일기나 문집, 또는 개인 저술의 야사 등
모두 400여 종의 다양한 사료를 인용하면서 일일이 출처를 밝힌 것도
객관성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렇다고 이 책에 이긍익의 생각이 반영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료를 제시한다고 해도 해당 사건을 선택하는 것은 이긍익의 몫이다.
이긍익은 사건 설정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방식을 택한 셈이다.
당쟁으로 얼룩진 숙종 시대를 보면
‘갑인년(현종 15년·1674)과 을묘년(숙종 1년·1675) 사이의 시사(時事)’라는 항목에서
예송 논쟁에 대한 서인과 남인 사이의 견해를 모두 싣고 있다.
‘장희빈이 원자를 낳다’라는 항목에서는 장희빈의 출산이 왜 극심한 당쟁의 이유가
되는지를 알 수 있는 사료를 취사선택해서 실었다.
그런데 사료 기재 방식이 아주 재미있다.
예를 들어
“10월 소의(昭儀) 장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 당시 장씨의 어머니가 뚜껑 있는 가마를 타고 대궐 안에 드나들었는데,
사헌부 지평 이익수(李益壽)가 보고 가마를 때려 부수고 불태워버리며 그 종을 다스리니,
임금이 ‘출입하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아뢰지도 않고 제멋대로 형벌을 가하느냐’라고 말하고
내수사(內需司)에 명하여 금리(禁吏)와 소유(所由·사헌부의 이속)에게 죄 주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많이 반대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숙종조 고사본말’)라고 실었다.
남인계 여인 장희빈이 왕자를 낳자
긴장한 서인들이 장희빈의 어머니를 핍박하는 장면인데,
장희빈의 왕자 출산을 둘러싼 궁중 각 세력의 움직임이 영화를 보는 것처럼 환하게 드러난다.
이런 편집 방식을 통해 이긍익은 현실의 승자인 서인·노론뿐만 아니라
패자인 남인의 시각과 움직임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이 없었다면 우리는 현실의 승자인
노론 쪽에서 저술한 역사서밖에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노론과 다른 시각의 역사서 서술은 시대의 금기였기 때문이다.
이긍익은 객관성이란 명분 아래 집권 노론뿐만 아니라
야당인 소론과 재야였던 남인의 견해까지 모두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려실기술>이 이긍익이 아니라 부친 이광사의 저술이라는 지적도 있다.
현전하는 필사본에 이긍익이 편찬했다는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과
귀양지의 정약용이 아들 정학연에게 <연려실기술>을 읽으라면서,
“이도보(李道甫·이광사의 자)가 편찬했다”라고 주석한 것,
홍한주(洪翰周)가 “원교(圓嶠·이광사의 호)가 편찬한 <연려실기술>만은
대개 기사본말체를 본뜬 것”이라고 기술한 것 등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광사는 정조 즉위년(1777)에 이미 사망했으나 <연려실기술> 의례의
“경술(庚戌·정조 14년·1790)에 금강산에 놀러 가면서 전질을 남에게 빌려주고 갔다”는
구절은 이광사가 편찬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또한 <연려실기술>에는 많은 비문들이 인용되어 있고 어떤 비문들은
직접 가서 보았을 것인데, 유배지의 이광사가 답사를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다.
<동국악부>를 지은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광사도 역사에 관심이 많았기에
유배 가기 전 많은 사료를 수집하거나 필사해놓았을 수는 있지만
이를 <연려실기술>이란 한 꾸러미에 꿴 이는 이긍익인 것이다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다
이긍익은 의례에서 “내가 자료를 얻어 보지 못하여
미처 기록에 넣지 못한 것은 후일에 보는 이가 자료를 얻는 대로 보충하여
완전한 글을 만드는 것이 무방할 것이다”라고 썼다.
역사는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한 시대 모두의 것이란 열린 생각이다.
그래서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이긍익의 초야의 붓은 실로
‘임금 수레 모시는 학사의 꽃’이 부럽지 않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이다.
□ 병자호란과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
'연려실기술'은 태조부터 현종까지 각 왕대의 중요 사건을
고사본말(故事本末)의 형식으로 엮은 '원집',
저자가 생존했던 숙종 당대의 사실을 기록한 '속집',
역대 관직과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 등의 연혁과 출처를 밝힌 '별집'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연려실기술'을 관통하고 있는 역사 서술 정신은
'술이부작(述而不作·서술만 하고 창작은 하지 않음)'이다.
필요한 자료를 나열하여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할 뿐 자신의 견해는 거의 밝히지 않았다.
각종 자료를 취사선택하는 과정에서 저자의 생각이 일부 표현되어 있지만
최대한 객관적 입장을 유지했다. 400여 종의 자료를 광범하게 인용한 것은
객관성을 위해 노력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조선의 역사를 관통하는 자료들을 광범하게 모아 본말(本末)을 구성하고,
자료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배치하는 한편,
사건에 대한 평가는 후세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연려실기술'이 지금까지 조선을 대표하는 역사서로 꼽히는 까닭이다.
개괄
이 책은 편저자 이긍익의 생존 때부터 전사본(傳寫本)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어서,
특별히 정본이 없이 전해져왔다. 더구나 편저자 자신이 그 범례에서 밝힌 바와 같이,
본문에 여백을 두어 새로운 자료를 발견하는 대로
수시로 기입, 보충하는 방법을 취하였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같은 방법으로 보충하게 하여 정본을 이룩하도록 희망하였으므로
종래의 전사본 중에는 서로 내용이 일치하지 않는 것도 있다.
또, 편저자 자신의 최후 정본인 원고본 역시 전해지지 않고 있어
그 정본이 어떤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가장 권위 있고 정본에 가까운 것이라 생각되는 것은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1913년 일본인 주관의 조선고서간행회 인본(印本)의 대본이고,
다른 하나는 1911년최남선(崔南善)이 주관한 광문회(光文會) 인본의 대본이다.
전자는 원집 33권(태조∼현종), 속집 7권(숙종), 별집 19권, 합 59권임에 대하여,
후자는 단지 원집 24권(태조∼인조), 별집 10권, 합 34권 뿐이다.
이 책의 찬술연대는 저자의 연보가 구체적으로 전해오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으나,
41세 되던 1776년(영조 52) 이전에 일단 완성된 듯하다.
이 책의 첫머리에 그의 아버지 광사(匡師)가 책이름을 휘호하였는데,
광사는 유배지인 신지도(薪智島)에서 1776년에 사망하였다.
실각한 소론가문의 후손으로, 가학(家學)으로 전승되어온 양명학(陽明學)의 분위기에서
성장한 저자가 이 책을 저술하게 된 동기는 의례서(義例序)에 잘 나타나 있다.
이에 의하면 종래 야사류로서 <대동야승 大東野乘>·<소대수언 昭代粹言> 등의 단점인
산만한 서술, 소홀한 자료수집, 균형 잃은 서술과 동서분당 이후 왜곡된
역사서술 등을 극복하고, 조직적인 체계, 편리한 열람, 정확하고 풍부한 사실의 수록,
불편부당한 서술을 추구함으로써 역사를 위한 역사를 찬술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내용은 조선 태조부터 현종까지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고사본말(故事本末)의 형식으로 엮은 원집과
그가 생존했던 시기인 숙종 당대의 사실을 고사본말로 엮은 속집,
그리고 역대의 관직을 위시하여 각종 전례·문예·천문·지리·대외관계 및 역대 고전 등
여러 편목으로 나누어 그 연혁을 기재하고 출처를 밝힌 별집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원집과 속집을 정치편이라 한다면 별집은 문화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사본말체(紀事本末體)로 된 야사이다.
당시 조선왕조의 국사를 원집과 속집에 넣고,
국조(國朝)·사전(祀典)·사대(事大)·관직·정교(政敎)·문예·천문·지리·변어(邊圉)·
역대 고전 등을 별집에 수록하여
조선시대의 정치·사회·문화를 보다 조리 있고 다채롭게 이해, 파악하고자 하였다.
기사본말체의 서술방식은 비교적 진보된 서술로서,
역사상의 사건전말을 밝혀 역사 전개의 진상을 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역사 서술에 있어서 인과성이 중요시된 것이며
사건해명을 위주로 한 역사책이라는 점에서, 19세기 서양의 사가들이
사실지상주의(事實至上主義)를 내세운 것과 다를 바 없는 역사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저자가 “이 책은 사람들의 귀나 눈에 익은 이야기들을 모아 분류하여 편집한 것이요,
하나도 나의 사견으로 논평한 것이 없다. 나는 사실에 의거하여 수록하기만 할 뿐
그 옳고 그름은 후세사람들의 판단에 미룬다.”라고 말하고 있듯이,
보다 객관적이고 체계적이며 합리적인 관점에서 편찬하였다.
따라서, 저자의 사견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특징이며,
오직 선배학자들의 기술을 그대로 옮겨놓은 뒤,
그 기사의 끝에 반드시 인용서목을 첨가해두었다는 것을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속집에는 사료의 출처가 밝혀져 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보아
원저자만의 손으로 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원저자의 뜻에 부응한 것이다.
즉, 저자의 사견이 없이 각 조항마다 반드시
그 인용서목을 밝힌 것은 실증사학의 연구태도와 일치되고 있다.
다음으로는 공정성을 그 생명으로 삼아, 사심 없이 불편부당의 필치를 보인 것이다.
그 증거로서 여러 선현을 부를 때 옛 사람들이 본명을 직서하지 않고
호·시호·자 등을 쓴 것을 비판하면서, 선현의 이름들을 직서(直書)하였다.
그것은 역사서술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또한, 역사의 현실성에 중점을 두어 서술하였다.
즉, 속집에서 당쟁에 관한 풍부한 자료를 수집하여 상세히 기술함으로써
역사로써 역사를 고발하게 하였다. 따라서, 저자의 평생사업으로 이룩한 대작인 이 책은
종래 체계가 없던 모든 야사에 대하여 정비된 체계를 세웠으며,
우리 나라 야사 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풍부한 사료의 하나로 대표된다고 하겠다.
1934년 계유출판사(癸酉出版社)의 <조선야사전집 朝鮮野史全集>에
일부가 국한문체로 번역되어 나왔으며,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고전국역총서 古典國譯叢書>
제1집 A5판 12권(색인 포함)으로 국역하여 출간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병자호란 관련기술
1636년 12월은 우리 역사상 가장 추운 겨울이었다.
청나라의 침입으로, 12월 15일 남한산성에 피난한 인조는
47일을 이곳에서 버티다 1637년 1월 30일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을 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서의 모습을 가장 잘 담고 있는 책이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이다.
'연려실기술'의 주요 기록을 보자.
"대가(大駕)가 창황히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 오후에 남대문을 나가
장차 강화도로 향하려는데 탐졸(探卒)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이 이미 연서역을 통과하였으며, 오랑캐 장수 마부대가 수백 철기(鐵騎)를 거느리고
이미 홍제원에 도착하여 한 부대로써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었다" 하니,
임금이 도로 성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문루에 앉으니,
상하가 황황하고 도성 남녀들의 우는 소리가 길에 가득 찼다"와
"수구문을 나가자, 성중의 남녀들이 맨발로 달려 임금의 행차와 서로 뒤섞여 가는데
도로에 엎어지고 곡성은 하늘을 진동하였다.
유시(酉時)에 신천(新川)과 송파(松坡)의 두 나루를 건너니, 강물이 처음 얼었다.
산 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캄캄하고 이경에서야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인도하는 자가 단지 5, 6명뿐었다"는 기록은
강화도로 가는 피난길을 차단당해,
남한산성으로 피난지를 옮긴 인조 일행의 처참한 상황이 나타나 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의 궁색한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이때 왕이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자며
밥상에도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으니, 전교하기를,
"처음 들어왔을 때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으니 반드시 이것은 나에게만
바치는 까닭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는 기록에서는
닭고기에 한이 맺혔을 인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적의 대포가 망월대에 맞아 대장 깃발의 기둥이 꺾어지고
또 잇달아 성첩에 맞아 한 귀퉁이가 거의 다 파괴되어
성 위의 얕은 담은 이미 가릴 것이 없어졌고,
사복시의 아전과 신경진의 군관이 탄알에 맞아 죽었으나,
곧 군량을 넣었던 빈 섬 수백 개로 흙을 담아
파괴된 자리를 막고 물을 끼얹어 얼음을 얼게 하였다.
대포 알이 성중에 계속 떨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는 기록에서는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대포를 쏘는 청군의 위력에
두려워하는 군사들이 생생하게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정치사를 다룬 역사서로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해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국가가 주도해서 편찬한 기록들이 있다.
정보와 자료의 수집이 쉽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개인이 당대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서 객관적이고 실증적으로 조선의 역사를 정리한 '연려실기술'의 가치는
매우 크다. '연려실'이란 '명아주(藜)를 태운(燃) 방(室)'이란 뜻으로 이긍익의 호다.
중국 한나라 때 유향(劉向)이 어둠 속에서 글을 읽을 때,
푸른 명아주 지팡이를 짚은 노인이 나타나 지팡이에 불을 붙이고
홍범과 오행의 글을 주었다는 고사에서 유래했다.
밤에도 불을 밝히면서 열정적인 저술 활동에 정진하고자 했던
저자 이긍익의 의지가 나타나 있다. -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