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과 丁丑 南漢出城

이름없는풀뿌리 2022. 7. 11. 21:08
□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丙子虜亂과 丁丑 南漢出城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병자노란(丙子虜亂)과 정축 남한출성(南漢出城) 신미년(1631) 6월에 오랑캐의 기병 1만여 기가 의주로부터 얕은 여울을 건너 먼저 복병(伏兵)을 시켜놓고, 뒤에 중남(仲男) 아지호(阿之好)ㆍ만월개(滿月介) 등이 한(汗)의 서한을 가지고 나왔다고 한다. 용천(龍川)과 정주(定州) 등의 땅에는 달(㺚)의 보병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배와 물건을 가지고 신미도(身彌島)에 나와 용천 땅을 건너가서 침략하였다. ○ 금(金)의 차사(差使)가 성에 들어와 먼저 접대 당상(接待堂上)을 만나보았는데, 배를 공급해 주지 않는 것을 알고는 한의 서한을 전하지 않은 채 말을 타고 성문을 밀치고 나가버렸다. 이에 정익(鄭榏) 선유사(宣諭使) 을 달려보내 도로 타일러서 불러오게 하였는데, 대개 가도를 공격하려고 출병하면서 우리나라에 배를 빌리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응천일기(凝川日記)》에도 있음. ○ □에, 임금이 경기 감사 이경직(李景稷)에게 전교를 내리기를, “이제 중남이 왔으니 사태가 전과는 자못 달라 전날 수작하는 사이에 관계가 매우 중대하다. 앞뒤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을 각별히 선택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경은 비록 직무가 감사이나 몸은 실제로 서울에 있으니, 파격적으로 이 일을 맡아서 모욕을 당하는 염려가 없도록 하라.” 하니, 이경직이 소를 올려 사퇴하기를, “가만히 생각하건대, 전하께서 신이 처음부터 금 나라 사람들과 접촉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혹 그 전말을 알 것이라고 여겨 이 분부가 있은 것입니다. 다만 신은 아직 서쪽에서 온 장계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비록 적의 세력과 적의 실정이 어떠한지는 알지 못하지만, 다만 길에서 전하는 바를 들으니, 이번의 적병은 전날 사포(蛇浦)에 잠시 쳐들어왔던 적과는 같지 않습니다. 이른바 능거리(能巨里)라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는 신임 받는 대장으로 바로 정묘년에 의주에 와 있던 자인데, 크게 군사를 일으키는 경우가 아니면 나오지 않는 자입니다. 뜻밖에도 그 자가 몰래 군사를 끌고 강을 건너, 먼저 가산(嘉山) 등지에 복병을 설치하고 중남에게 한(汗)의 서한을 가지고 먼저 도착하게 하고서 배를 빌려 섬을 공격한다는 말로 위협하고 공갈하는데, 그 서한 가운데 말이 방자하기 이를 데 없다고 합니다. 이는 아마도 앞뒤 사정을 대략 아는 자의 한두 마디 담소로 누그러뜨려 화를 완화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그렇지만 신의 생각에는, 오늘날 중남을 접대하는 것은 전날과는 달라서 한결 같이 잘 대접해서는 안 되니, 우리의 약함을 보이기보다는 도리어 엄한 말로 바르게 꾸짖음으로써 그 하늘에 맹세한 맹약을 어긴 죄를 밝히는 것이 낫고, 한편으로는 군마를 정돈하여 방어의 계책을 세우는 것이 실로 오늘의 급선무입니다. 중남 등은 우리나라의 대소 사정을 모르는 것이 없으니, 만일 신이 감사로서 들어가 저들을 접대한다는 것을 듣는다면 곧 장차 말하기를 ‘나라에 사람이 없는가 보다.’ 할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廟堂)을 시켜 엄정하고 지려(智慮)가 있는 사람을 지극히 정밀하게 택하여 접대하는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매우 다행일 것입니다.” 하자, 답하기를, “오늘날의 이 임무는 경이 아니면 안 되니 마땅히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이경직이 접대소에 들어가자, 중남 등이 먼저 접대 당상을 보고 배를 빌릴 것을 청하니, 이경직 등이 모두 꾸짖어 물리쳐 허락하지 않았다. 중남이 배를 빌려주지 않을 것을 알고 크게 노하여 한(汗)의 서한을 전하지 않은 채 가버렸다. 《석문소본(石門疏本)》 《우곡일록(愚谷日錄)》 ○ 대사간 이민구(李敏求)가 소를 올리기를, “오랑캐 군사가 깊이 들어와서 며칠 안으로 화가 일어날 것이니, 청컨대 인심을 수습하고 급히 애통의 교서를 내리소서.” 하였다. ○ 아지호가 평양에 이르러 말하기를, “배를 빌려주는 것을 이미 허락하지 않았고, 우리 군사는 각기 15일 분의 양식을 싸가지고 왔기 때문에 이제 양식이 끊어졌는데, 형제의 나라에서 어찌 차마 서로 도와주지 않는 것인가?” 하니, 감사가 답하기를, “배는 섬을 공격하기 위한 용도이니 결코 따를 수 없지만, 양식은 곧 철산(鐵山) 땅에 있는 수백 섬을 마땅히 빌려주겠다.” 하였다. ○ 오랑캐 군사가 곽산(郭山)의 관고(官庫)를 쳐부수어 쌀ㆍ콩ㆍ어물(魚物) 및 읍내의 여염집을 털어 약탈해 갔다. ○ 도독 황룡(黃龍)이 심세괴(沈世魁)를 시켜 병선 30여 척을 거느리고 육지에 나와 오랑캐 군사와 싸워 4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한병(漢兵)이 배를 먼저 타려고 다투다 익사한 자가 또한 1백여 명에 이르렀다. ○ 김시양을 도원수로 삼았다. ○ 장악원 주부 이한(李瀚)과 상의원 별좌 이정방(李庭芳)이 소를 올리기를, “급히 애통의 글을 내시고 친정(親征)할 뜻을 유시하며, 돈을 걸어 군사를 모집하고 개성(開城)에 나아가 주둔하며 제장(諸將)을 호령하고, 황 도독과 합세하여 적을 공격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 전 봉사 채성귀(蔡聖龜)가 또한 소를 올렸다. 성귀는 지평으로서 병자년과 정묘년에 두 차례에 걸쳐 상소하여 화친을 배척하였는데, 여기에서 봉사라고 쓴 것은 잘못이다. ○ 채성귀가 정묘년(1627)에 남한산성에 달려가 위문하고 율시 한 수를 지었는데, 三綱墮地國垂傾 삼강이 땅에 떨어져 나라가 기울고 公議千秋愧汗情 공의는 천추에 청사에 부끄럽도다 忍背神宗皇帝德 어찌 차마 신종황제(임란 때 구원하여 준 명 나라 임금)의 덕을 배반하며 何顔宣祖大王靈 무슨 얼굴로 선조대왕의 영령을 대하겠는가 寧爲北地王諶死 차라리 북지왕 심의 죽음을 할지언정 不作東窓賊檜生 동창의 적 진회가 되어 살지는 않겠네 野老呑聲行且哭 村老 소리를 삼키고 걸으면서 곡하니 穆陵殘日照微誠 목릉의 저문 해가 나의 작은 정성에 비치네 하였다. 성구는 호는 지비재(知非齋)이며 진형(震亨)의 아들이다. 진형은 광해조 때 진사로서 4일을 연이어 소를 올려 인홍(仁弘)을 배척하여 인홍이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어진이를 무함하는 것을 변론하였다. 폐모(廢母) 때에 지은 책문(策文)에, “오늘의 이 일을 어찌 차마 말할 수 있으리오. 천리가 멸하고 인도가 끊어졌다.” 하는 구절이 있었다. 참시관(參試官)이 이를 위에 아뢰려고 하니 주시관(主試官) 이광정(李光庭)이 채진형이 지은 것임을 알고 극력 다투어 그만두게 하였다. 또 선조가 의주로 파천할 때에 달려가 문안하며 군량을 도왔고, 임금이 환도하자 하직하고 돌아가 과거와 벼슬을 일삼지 않았다. ○ 사헌부가 아뢰기를, “정묘년 이후로 사신들이 계속해서 왕래한 것은 종묘 사직과 백성을 위하여 화친을 굳게 하려는 계책이 아님이 없는데, 이제 적의 군사가 까닭 없이 깊이 쳐들어와 우리 변방 백성을 노략질하고 우리 창고의 곡식을 공격하여 빼앗으니, 비록 가도를 치는 것으로 명분을 삼지만 사실은 이미 맹약을 어긴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지금은 결코 한갓 화친만을 일삼아서는 안 되는데 회답사를 단번에 이러한 시기에 보내 당당한 국가에서 어찌 이렇게 욕을 보는 이치가 있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 ○ 옥당이 소를 올리기를, “오늘부터 시작하여 혁연히 분발하여 군사를 내어 적을 쳐서 군신(君臣 여기에서는 명 나라를 군이라 하였고 우리나라를 신이라 한 것이다.)의 대의를 밝히소서.” 하였다. 《응천일기》에도 있다. ○ 이귀가 차자를 올려 청하기를, “전하께서 친히 개성에 주둔하여 도독 황룡 과 합세하여 양서지방의 충의 있는 신하를 불러 모아 싸우면서 지키는 계책을 하시고,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미리 조치하여 수륙 양면에서 기각(掎角)의 형세를 만들고, 별도로 사신을 파견하여 황 도독의 승리를 치하하소서.” 하였다. 《일월록》 ○ 임신년 11월 7일에 오랑캐의 차사 소도리(所道里) 등이 나왔는데, 먼저 사람을 보내 중국의 사신을 대하는 것처럼 접대하는 예법을 행하기를 청하였다. 안주(安州)에 이르러 연회를 베풀지 않는다는 이유로 노하여 그냥 가버렸다. ○ 이때 오랑캐의 차사가 와서 말하기를, “마땅히 전일에 맺은 형제의 맹약을 바꿔 다시 군신의 맹약으로 맺고, 차사를 대접하는 것은 명 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예로서 하라.” 하고, 또 황금 1만 냥ㆍ백금 1만 냥ㆍ오색포(五色布) 10만 동(同)ㆍ흰 모시 1만 동과 정예한 군사 3만 명ㆍ전마(戰馬) 30필을 요구하니, 조정에서 황금은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하여 호피(虎皮)로서 대신 주고 그 밖의 물건들은 절반씩 갖추어 춘신사(春信使) 신득연(申得淵)을 보내 오랑캐 속에 들여보냈는데, 변이척(邊以惕)ㆍ신경렴(申景濂) 등이 동시에 함께 가서 어단(御單)을 만들어 부쳤다. 오랑캐의 차사가 개성에 이르러 어단을 찢어버리고 평산(平山)에 이르자 예물 실은 것을 모조리 버리고 가버렸다. 《속잡록》 《일월록》 ○ 이때 오랑캐가 대장 소도리를 보내 세폐(歲幣)를 요구하며 10여 일을 머물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신득연을 보내 회보하게 하였더니, 소도리가 불쾌한 말을 하고 가버렸다. 유독 김시양과 이서만이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니, 임금이 총융사 이서와 병조 판서 김시양이 모두 겁을 낸다고 하교하였다. 득연이 심양에 가서 오랑캐에게 쫓겨 돌아왔다. 시양이 이때 원수가 되었다. 시양이 서쪽을 순시하다가 안주에 이르렀는데, 조정에서 또 김대건(金大乾)을 보내 다시 세폐를 허락하기 어렵다는 말을 거듭하여 화친을 끊을 뜻을 보이니, 시양이 대건을 의주에 머무르게 하고 소를 올리기를, “강약이 같지 않으면 세폐는 한(漢)과 당(唐)도 면하지 못한 바입니다. 그들의 환심을 잃어서는 안 되니, 천하의 일은 모두 뒤에 잘못을 뉘우치고 고칠 수 있지만 이 일만은 뉘우쳐 고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정충신이 같이 상소하기를 청하니 허락하였다. 종사(從事) 구봉서(具鳳瑞)가 말하기를, “조정에서 화친을 끊기로 의논이 이미 정해졌으니 상소하는 것을 다시 생각하십시오.” 하니, 시양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점쟁이가 말하기를, ‘내가 금년에 귀양살이를 할 화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소가 올라가면 삼사에서 반드시 죄주기를 청할 것이므로 점쟁이의 말이 이제 반드시 맞을 것이다.” 하였다. 시양이 평양에 돌아오자 민성휘(閔聖徽)가 말하기를, “오랑캐의 욕심이 한이 없으니 만약 결전하지 않으면 만족을 모르는 욕심에 응하기 어려우며, 도내(道內)의 인심도 모두 결사적으로 싸우려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이런 상소를 하는가.” 하니, 시양이 말하기를, “도내의 인심은 내가 미처 알 수 없지만 오랑캐가 만일 군사를 움직이게 되면 그 수가 반드시 적어도 3, 4만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무슨 수로 갑자기 3만의 군사를 마련하여 대응할 수 있으며, 설사 군사의 수가 서로 맞는다 하더라도 모두 보병으로 제대로 교련을 받지 못하였으니, 오랑캐가 달(㺚)의 기병으로 짓밟으면 비록 설령 한신(韓信)과 백기(白起)를 장수로 삼는다 하더라도 대적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소가 올라가니 계유년 1월 임금이 비변사에 하교하기를, “김시양과 정충신 등이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여 멋대로 사신을 머무르게 하여 인심을 꺾으니 머리를 베어 여러 사람을 깨우치고자 한다.” 하자,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이 사람들의 죄는 전진(戰陣)에 임하여 실수한 죄와는 같지 않으니, 청컨대 잡아 올려 국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형에서 감하여 정배하였는데, 시양은 영월(寧越)에, 충신은 당진(唐津)에 정배하였다가 대간들의 의논으로 장연(長淵)으로 고쳤다. 2월에 임금이 장차 친정(親征)하려고 송경(松京)에 진주하려고 하는데, 대건이 강을 건너 오랑캐의 국경에 들어가지 못한 채 돌아오니 임금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세폐를 허락하였다. 다음해인 갑술년에 시양이 석방되어 돌아왔다. 이로부터 그는 입을 다물고 군사 일에 관해서 말을 하지 않았다.《하담록》 ○ 계유년(1633) 2월에 오랑캐가 만일 나오면 마땅히 친정하여 앞 길[西道]에 진주할 뜻으로 묘당(廟堂)에 유시하는 한편, 도원수 김자점(金自鮎)과 부원수 윤숙(尹璹)에게 명하여 서쪽으로 내려가게 하였다. ○ 득연과 대건 등이 돌아오니, 간원이 청하기를, “춘신사(春信使) 박노(朴)의 출발을 정지하고, 먼저 소역(小譯)을 보내어 피차간에 화친을 끊은 적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게 하는 동시에 세폐의 일정한 수량을 강정(講定)하게 하여 뒷날에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비변사에서 따르지 않았다. 3월에 박노와 나회소(羅繪素)를 보냈는데, 국서의 대략에, “무궁한 것은 정이요, 억지로 하기 어려운 것은 힘이다. 옛날 사람도 정에 따라 예를 제정하고 재력에 따라 예폐(禮幣)를 제정하였으니, 집에 10석(石)의 술이 있는데 손님에게 5석으로 접대한다면 이것은 그 정을 다하지 않은 것이고, 집에 1석의 술이 있는데 손님에게 1석을 접대한다면 이것은 그 정을 다하는 것이다. 석의 술이 어찌 5석의 술보다 많겠는가마는, 오직 그가 힘을 다하느냐 다하지 않느냐를 볼 뿐이다. 이제 이 예물 단자는 귀국에서 말한 바에 따라 금은과 각궁(角弓)과 같은 토산물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 아울러 힘에 맞도록 살펴서 정하여 영구히 1년에 한번의 항식(恒式)을 심은 것이다.” 하였다. 싸가지고 간 예단은 각가지 색깔의 면주(綿紬) 8백 필(疋), 저포(苧布) 마포(麻布) 8백 필, 목면(木綿) 8백 필, 표피(豹皮) 6백 장, 수달피(水㺚皮) 3백 장, 상화지(霜華紙) 8백 권이었다. 《조야기문》 《일월록》 ○ 일찍이 문룡이 죽임을 당하자 그 부하 장사들이 혹은 군사를 거느리고 오랑캐에 투항하기도 하고 혹은 등주(登州)와 내주(萊州)로 들어가기도 하였으나, 명 나라 조정에서는 내버려두고 묻지 않았다.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은 곧 문룡의 심복이었는데, 가만히 등주에 가서 8, 9만에 이르는 적당(賊黨)을 꾀어 모으고, 오랑캐와 밀통하여 몰래 군사를 일으켜 약탈을 자행하니, 연해 지방에서 무수하게 피해를 입었다. 이에 명 나라에서 장수를 보내 토벌하니, 두 장수가 배를 띄워 처음에는 우리나라로 향하여 용천(龍川)과 철산에 이르러 상륙하고자 하였으나 우리 군사가 싸워 막았다. 명 나라 군사가 추격하자 드디어 압록강으로 향하니, 금 나라에서 왕자로 하여금 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영접하도록 하였다. 동시에 중강(中江)에 진을 치고 금 나라 차사를 의주에 보내어 4만 명의 군량과 삼왕자가 있는 곳에 각각 소 다섯 바리의 양식을 요청하여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군사에게 주려고 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 이해 여름에 금 나라 사람이 명 나라 군사와 서로 버티면서 공갈하고 토색질을 심하게 하였다. 용골대(龍骨大)는 의주에 이르러 소를 약탈하고 또 쌀 1천 5백 석을 토색하여 갔으며, 차아리(車阿里) 등은 의주에 이르러 피곡(皮穀) 84석을 빼앗아갔다. 6월에 당선(唐船)이 모두 출범하여 장자도(獐子島)로 향해 떠나니, 이로부터 오랑캐 군사는 언덕 위에 주둔하고 당병(唐兵)은 모든 섬에 배를 이었다. 금 나라 사람은 우리에게 한(漢)을 돕는다고 꾸짖으며, 갖은 방법으로 공갈하고 침해하고 업신여기고, 당 장(唐將)은 우리에게 오랑캐와 통한다고 의심하니, 양쪽의 요구에 응하느라 비록 병화를 입지는 않았으나 나라의 형세는 텅 비어 이미 지탱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일월록》 ○ 계유년에 등주(登州)의 반장(叛將) 경중명과 공유덕 등이 무리를 이끌고 오랑캐에게 투항하여 적강(狄江)에 이르니, 명 나라 장수가 추격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수군을 일으켜 협력하여 토벌하여 두 적이 쫓겨 육지에 오르자 오랑캐 군사가 와서 마중하고 명 나라 군사는 돌아갔다. 《촬요》 ○ 7월에 공유덕과 경중명 두 적이 오랑캐 군사를 끌고 와서 여순(旅順) 어구를 함락시켰는데, 도독 황룡(黃龍)과 이현(李見)은 죽고, 심세괴가 거느린 수군도 많이 침몰하니, 세괴는 가도로 돌아갔다. 갑술년 봄에 세괴가 우리나라에 오니 인견하고 남한산성에 거처하게 하였다. 《일월록》 ○ 병자년 2월에 첨추무신(僉樞武臣) 나덕헌(羅德憲)을 춘신사(春信使)로 삼고 동지 이확(李廓)을 회답사로 삼아 심양에 보냈다. ○ 금의 한(汗) 홍타시(弘他時)가 국호를 고쳐 대청(大淸)이라 하였으며,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 참람되이 칭하고 숭덕(崇德)으로 연호를 고쳤다. ○ 3월에 오랑캐의 차사 용골대와 마보대(馬保大)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상사에 조제(吊祭)한다고 일컫고 오랑캐 1백여 명과 몽고병 수십 기를 거느리고 의주에 이르렀다. 십왕자가 우리 임금에게 서찰을 보냈는데 참호(僣號)한 것을 통고하고, 함께 한(汗)을 높여서 제(帝)로 삼고 같이 신하로서 섬기기를 청하고, 아울러 우리 사신 이확(李廓) 등이 축하 반열에 참여하지 않은 잘못을 말하였는데, 이는 대개 우리나라의 뜻을 탐지하여 군사를 일으키려고 한 것이었다. ○ 영후관(迎候官) 이숙(李淑)이 금 나라로 나아갔다. ○ 홍문관이 차자를 올리기를, “대의(大義)로써 오랑캐의 사신을 책하시고 엄준한 말로 통렬히 배척하여 방자한 역심(逆心)을 꺾고, 또 서달이 새로 배반하였고 명 나라가 또 우리나라와 일찍이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급히 감사에게 명하여 두 차사를 구금하여 서울로 올려 보내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다. ○ 간원이 아뢰기를, “정묘년에 화친을 허락한 것은 오랑캐를 얽어매어 발악하지 않게 하려는 계책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그후 10년 동안에 수치스럽고 욕된 일과 침해당하고 업신여김을 받은 상황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는데도 이럭저럭 시일만 보낼 뿐 일찍이 항전(抗戰)과 수비에는 유의하지 않고 다만 피폐(皮幣)로써 일을 삼아 국가의 존망을 저 오랑캐들의 희노(喜怒)에 맡기고 있습니다. 아아, 고금 천하에 국가를 요행의 지경에 두고서 오래 지속시킨 경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번에 오랑캐의 차사가 가지고 온 서신은 비록 그 내용이 어떠한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우리 지방관과 문답한 말로써 보건대 그 패만(悖慢)함이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참호(僭號)에 대한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차마 들을 수 없는 바입니다. 그들이 우리나라가 의리로써 배척할 것을 알면서도 감히 이와 같은 말을 하였으니, 그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앞으로 닥쳐올 일의 기미가 십분 우려되는데 인심이 안정되지 않아서 조석을 보전할 수가 없으며 상하가 무사태평하여 조금도 격려하는 뜻이 없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는 자와 같으니 생각이 여기에 이르면 저도 모르게 통곡할 뿐입니다. 아아, 뉘우치고 깨달을 기회는 바로 오늘인데 분발하는 거사를 어찌 생각하지 않습니까. 오랑캐의 차사가 관사에 도착하거든 준엄한 말로 배척하여 끊음으로써 대의를 밝히고 더욱 분발하는 마음을 가다듬어 방비할 방책을 강구하소서. 그러면 중외의 인심이 어찌 공경하여 움직이지 않을 것이며, 충의의 선비들이 모두 전하를 위하여 한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것을 결심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 사헌부에서는 아뢰기를, “금(金)의 차사가 말한 바는 차마 들을 수 없는 것이니 지방의 장수들이 마땅히 엄한 말로 준엄하게 배척해야 할 것인데도 의주 부윤 이준(李浚)의 말은 조금 그럴듯하였으나, 평안 병사 이항(李沆)은 감히 두세 오랑캐 차사가 승인할 만한 말을 입 밖에 내어 규례에 따라서 결정할 것처럼 말하였으니, 비록 무부(武夫)의 무식한 소치이나 강상(綱常)의 대의로 따져본다면 그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국(拿鞫)하여 죄를 정하소서. 도원수 김자점(金自點)은 명령을 받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변방 일에 유의하여 반드시 평소 정한 규모와 계획이 많을 것인데, 크고 작은 계책을 멀리 서울에서 통제하기 결코 어려울 것입니다. 급속히 전진하여 군무를 점검하고 신칙하여, 밤낮으로 변에 대비하도록 명하여 후회해도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 오랑캐의 차사가 서울에 들어왔다. ○ 비변사에서 아뢰기를, “오랑캐 차사의 서울에 들어온 이후에 말한 패만한 말에 대하여는 마땅히 의에 의거하여 준열히 배척할 것이나, 앞으로 반드시 물화를 무역하며 종종 주고 받을 일이 있을 것을 생각합니다. 전 우윤 박노(朴)는 여러 번 오랑캐에게 사신으로 가서 그 곳의 실정과 형편을 잘 알 것이니, 차임하여 다스리는 임무를 맡기소서.” 하니, 아뢴 대로 윤허하였다. ○ 관학 유생(館學儒生)이 소를 올리기를, “오랑캐의 서신을 불사르고 오랑캐의 차사를 목베어 대의를 밝히소서.” 하니, 답하기를, “사신을 목베고 서신을 불사르는 것은 너무 지나친 것 같다.” 하였다. 노서(魯西)가 지은 유소(儒疏) ○ 부제학 정온(鄭蘊)이 차자를 올리기를, “급히 원수(元帥)를 보내어 방비하고 지키는 계책을 지휘하여 너무 과하거나 축소하는 계책은 하지 말게 하고, 나라 안의 무사들은 모두 여러 장수의 수하에 모으고, 모든 포수(砲手)ㆍ살수(殺手)들은 그 반을 나누어 뽑아 원수에게 줌으로써 정묘년에 노사(老師)를 강화도에 쓸 데 없이 두던 것처럼 하지 마소서. 그리고 전하께서는 친히 말을 몰아 송도(松都)에 진주하여 장수와 사졸들을 독책하여 의기(義氣)를 진작시키고, 또 답서를 보내어 반드시 준엄하게 거절하고 배척하여 그들로 하여금 우리로써 구실을 삼지 못하게 하소서. 서달은 새로 중국을 배반한 자여서 부모의 적자이니 비록 관문을 닫아걸고 끊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따라온 오랑캐의 예(例)로써 접대하고 그 내력을 묻지 마소서. 그들이 비록 겉으로는 노한 체할지라도 반드시 우리나라에 사람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였다. ○ 장령 홍익한(洪翼漢)이 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은 하늘을 부르다가 목이 쉬고 땅에 엎드려 피를 쏟으며 간신히 상소 한 편을 엮어 감히 만번 죽기를 무릅쓰고 우러러 전하께 아뢰겠습니다. 신이 일전에 의주 부윤 이준의 장계를 보니, 바로 금한(金汗)이 제(帝)를 칭한 일이었습니다. 이준이 능히 ‘하늘에 두 해가 없다.’는 등의 말로 거절하고 물리쳤습니다만, 신은 저도 모르게 3백 번이나 가로 뛰고 세로 뛰었습니다. 더욱 우리나라의 예의와 명분이 어두워지지 않고 환하게 밝아서 오히려 활을 잡고 있는 무부(武夫)조차 능히 스스로 지킬 줄을 알아 항거하고 굴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이 늠름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물며 전하와 묘당의 신하들이 어찌 일개 무부의 변론보다 못하겠습니까. 신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다만 대명(大明)의 천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뿐인데, 오늘의 이 오랑캐의 말은 어떻게 우리의 귀에 이른 것입니까. 지난번 적신(賊臣 강홍립(姜弘立)이 적을 끌고 갑자기 쳐들어와 파천하시고 화친할 것을 빌어 수호한 것은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 할지라도, 진실로 그때에 먼저 홍립의 머리를 효수하여 우리의 당당한 대의를 해와 별과 같이 밝게 걸어 놓았다면, 오랑캐가 비록 승냥이나 이리떼 같다 할지라도 어찌 우리의 예의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고 흠모함이 없었겠습니까. 계책을 이렇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홍립을 얻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에 의지하여 안위의 기틀로 삼고자 하였으니, 그들이 우리를 오랑캐 풍속을 따르게 하고 우리를 신첩(臣妾)으로 삼으려 하는 것은 참으로 이 때문일 뿐입니다. 신은 오랑캐가 황제라고 참람되이 칭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담이 찢어지려 하고 기가 막히려 하여, 차라리 노중련(魯仲連)의 죽음을 할지언정 차마 그 말로 귀를 더럽힐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가 비록 바다 한 귀퉁이에 치우쳐 있다 할지라도 본래 예의로서 천하에 이름이 알려져 천하가 소중화(小中華)라 일컫고, 열성(列聖)이 서로 계승하여 대대로 명 나라에 대한 번국(藩國)의 직무를 닦아서, 사대에 한 마음으로 성실하고 부지런히 하였습니다. 이제 오랑캐를 받듦으로써 구차하게 편안해지려 하니 설사 잠깐 동안 연명할지언정, 조종(祖宗)과 천하 후세에 대하여 어떠하겠습니까. 또 들으니, 오랑캐의 차사가 데리고 온 자들은 반이 새로 붙은 서달이라 합니다. 무릇 서달은 우리나라와는 이미 서로 사신을 보낸 예가 없는 만큼 무슨 접대의 도가 있겠습니까. 거절하고서 받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국경 안에 들어온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도 아직 묘당에서 한 마디의 말이 없는데, 신은 묘당에 있는 자가 무엇하는 사람인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평소에 나라에 대한 걱정이나 준비가 없을 뿐더러 이제 당장 화가 닥칠 것인데도 오히려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으며, 군부(君父)가 모욕당하는 것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예사 일로 여길 뿐만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랑캐가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은 실로 묘당에서 불러들인 것입니다. 아아, 일이 이미 급하게 되었으니 무릇 혈기 있는 자는 팔뚝을 걷어붙이고 쓸개를 떨지 않는 자가 없는데, 대장은 한가로이 산릉(山陵)에 앉아 있고 전하께서는 묵묵히 깊숙이 계시어 고요하게 한 가지 계책도 없으니 신은 그 까닭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보건대, 오랑캐의 뜻은 뽐내고 과장하고 협박하고 강요하는 데 불과할 뿐입니다. 그가 진실로 천자라 칭하고 대위(大位)에 임하려고 한다면 오직 마땅히 스스로 자기 나라에서나 황제가 되고 자기 무리에게 호령할 것이지, 어찌 기어이 우리에게 묻는 것이겠습니까. 그들이 맹약을 어겨 불화의 실마리를 만들고 드러내놓고 우리 입을 빌리려는 것은 장차 천하에 일컫기를 ‘조선이 나를 높여서 천자로 삼았다.’고 말하려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슨 면목으로 천하에 서 있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급히 그 사신을 잡아서 맹약을 배반하고 제호(帝號)를 참칭한 죄를 문책하고 죽임으로써, 예의의 중대함과 인국(隣國)의 도리를 분명히 보인 뒤에 그 사자의 머리와 서신을 상자에 담아 명 나라에 주문(奏聞)하면 의기(義氣)가 더욱 신장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신의 말이 망언이라고 여기신다면 먼저 신의 머리를 베어서 오랑캐에게 사과하소서. 신이 어찌 차마 군부에게 모욕을 받게 하면서 구차히 살려고 하겠습니까. 아아, 신이 비록 몹시 약하지만 오히려 한 지방의 군사를 맡아서 몸이 오랑캐의 칼날에 죽기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녘 땅 수천 리 사이에 어찌 한 사람의 의사가 없겠습니까. 바로 지금 양서(兩西)의 인민들은 지난 날의 일을 징계하여 절치부심하며 이 오랑캐와 더불어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있으니, 진실로 의리와 용기를 격동시켜 바람을 이용하여 불을 지를 시기입니다. 강할 수 있고 약할 수 있는 것도 여기에 있으며 보존하고 망하는 것도 여기에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는 속히 애통(哀痛)의 교서를 내려 팔방의 선비들을 격문으로 부르고 몸소 말을 몰아 대의로 마주대하고 타이르소서. 전하의 신자(臣子)된 자가 누가 죽음으로써 앞을 다투어 싸워서 충성을 바치지 않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그대의 나라를 위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기나, 사신의 목을 베는 일은 너무 조급한 듯하다. 서서히 그의 행동을 보고 처리해도 늦지 않다.” 하였다. ○ 이때에 조정에서 이명(李溟)ㆍ박노 등 때를 얻지 못한 무리들에게 접대 임무를 맡도록 하니, 이명의 무리가 속으로 뒷날에 화가 있을 것을 알고도 다만 당시의 공론에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무릇 오랑캐를 접대할 때에 일체 태만하고 소홀히 하며 약소하게 하기를 일삼았다. 이때 두 장수가 데리고 온 몽고 사람들은 바로 금 나라에 새로 항복한 자들로 금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후대하게 하여 금 나라의 위력을 과장하는 바탕으로 삼으려고 하였는데, 조정에서 허락하지 않고 다만 따라온 오랑캐로서 대접하여 그의 환심을 잃게 하였다. 게다가, “저편의 신하는 감히 이편 국군(國君)에게 서신을 보내지 못한다.”고 이르고 십왕자의 서신을 끝내 열어보지도 않았다. 인목대비의 상사(喪事)에는 오랑캐 장수가 조문할 때에는 전(殿) 위에서 제를 베풀 것을 허락하였었는데, 이번에는 전이 비좁다는 것을 핑계로 따로 빈 장막을 금천교(禁川橋) 위에 베풀어 제를 행하도록 하였다. 그들이 제례를 행함에 미쳐서 바람이 불어서 장막이 열리자 비로소 속은 것을 깨닫고 문득 노여운 생각이 있었다. 또 도감의 포수가 후원에서 사사로이 연습을 하다가 모두 대궐 아래 모였고 숙위 금군이 또한 교대할 때가 되었는데, 오랑캐의 차사가 대궐 안에 있으므로 각각 무기를 가진 채 모두 장막 뒤에 있었더니, 오랑캐의 장수들이 장막이 열린 틈으로 보고 복병(伏兵)한 것으로 의심하여 고꾸라질 듯이 나와 가버렸다. 그런데 그때 장령 홍익한은 소를 올려 오랑캐의 차사를 벨 것을 청하고, 관학(館學)의 유생들도 소를 올렸는데, 오랑캐의 장수가 비밀리 그 기미를 알고 더욱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켜 관문을 깨고 걸어 나가 민가로 흩어져 들어가 말을 빼앗아 타고 달아나니, 길거리의 사람들이 놀라고 어린 아이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을 던져 쫓아버렸다. 그들이 돌아가는 길로 향하자 경성이 진동하니, 묘당에서 비로소 황겁하여 계속해서 재신(宰臣)을 보내어 오랑캐 차사를 만류하였으나, 오랑캐 장수가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임금이 즉시 팔도에 하교하여 화친을 배척할 뜻으로 효유하였는데, 서도로 전하러 가던 유지(諭旨)를 오랑캐 장수에게 빼앗겨 마침내 말거리가 되었다. 《병자록》 ○ 이명이 이서(李曙)에게 권하여 군사의 위엄을 보이게 하니 용호(龍胡)가 크게 놀라 뛰어 달아나 감히 성내에 들어오지 못하고 시골 마을과 들에서 머물다가 갔다. 이때에 평안 감사 홍명구(洪命耈)가 용호를 베자고 청하니, 설령 조정에서 그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용호는 필시 이미 강을 건너서 미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런데도 홍명구가 이런 빈 말을 하여 당시의 공론에 칭찬을 들으려 하였으니, 당시의 인심이 대개 이와 같았다. 《하담록》 ○ 영의정 윤방(尹昉) 등이 아뢰기를, “이번에 오랑캐의 차사가 왔을 때에 외간의 인심들이 조정에서 의로서 배척하고 거절한 것을 알지만 의혹이 없지 않으니, 팔도에 포고하여 백성들에게 명백히 알도록 하여 충의를 격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대단히 좋은 말이다.” 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 ○ 비변사에서 팔도에 포고하기를, “국가가 갑자기 정묘년의 변란을 만나 부득이 임시로 화친을 허락하였는데, 10년 동안 한없는 욕심을 부리며 만족을 모를 뿐만 아니라 공갈이 또한 심하니, 이것은 진실로 국가의 전에 없던 수치이다. 이에 위로 성명(聖明 임금)에서부터 아래로 신민에 이르기까지 더러움과 아픔을 꾹 참아왔는데, 한번 분발하여 이 모욕을 씻으려고 생각하니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이번에 이 오랑캐들이 더욱 제멋대로 창궐하여 감히 황제라고 참칭하고 우리에게 통의(通議)한다고 핑계대니, 이것이 어찌 우리나라의 신민의 차마 들을 만한 것이겠는가. 강약과 존망을 헤아리지 않고 한번 대의(大義)로서 결단하여 서신을 물리쳐 받지 않고 준엄하게 그 말을 배척하고, 오랑캐 차사 등의 요청에 대해 끝내 말대답도 안 했더니, 노하여 하직도 하지 않은 채 달아나 가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도성의 남녀가 모두 함께 듣고 본 바이다. 비록 전쟁의 화가 코앞에 닥쳐 있는 줄 알지만 도리어 통쾌하게 여긴다. 사방에서 만일 조정에서 이러한 정의로운 조치가 있었다는 것을 듣는다면, 반드시 소문을 듣고 격발하여 죽기를 맹세하고 같이 원수를 삼을 것이다. 어찌 거리의 멀고 가까움과 귀하고 천한 신분 때문에 차이가 있겠는가. 옛날부터 변고를 만나면 반드시 먼저 고유(告諭)하는 글이 있었으니, 이제 이 뜻으로 각도에 하유하여 충의로운 선비로 하여금 각각 책략을 다하도록 하고 용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군중에 참가하도록 하여 함께 이 난국을 구제하기를 기약한다.” 하였다. ○ 3월에 금(金)의 차사가 장단(長湍)을 지나자 박노를 보내 타이르고 예물 단자를 주게 하니, 받지 않고 가버렸다. ○ 군무(軍務)에 관한 임금의 전지를 서도로 내려 보냈는데, 오랑캐의 차사 등이 빼앗아갔다. ○ 도원수 김자점, 종사관 정뇌경(鄭雷卿), 별장 안영남(安頴男)이 서도로 내려갔다. 《일월록》 《조야기문》 ○ 여름 4월 (《병자록》에는 3월 12일로 되어 있다.)에 금한(金汗) 홍타시(弘他時)가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라 참칭하고 연호를 숭덕(崇德)이라 고쳤다. 이때 춘신사(春信使) 나덕헌(羅德憲)(무관 정승으로 첨지중추부사이다.)과 회답사 이확(李廓)이 마침 금국에 도착했는데, 싸 가지고 간 예물 단자를 온당하지 않다고 일컬으며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고, 협박하여 그들을 다른 여러 오랑캐들의 축하하는 반열에 동참하게 하였다. 두 사람이 죽기로 다투다가 끌려 다니며 욕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이 돌아오게 되어 의주에 이르렀는데 평안도의 유생들이 상소하기를, “급히 상방검(尙方劍)을 내려 국경에서 두 사람의 목을 베 효시하고 오랑캐 가운데로 들여보내도록 하소서.” 하니, 비변사에 내려서 의논하도록 하였다. 《일월록》 ○ 이때 금 나라 사람들이 이확 등을 협박하여 축하의 반열에 참가하게 하자, 이확 등이 죽기를 작정하고 따르지 않았더니, 오랑캐의 차사가 이확 등을 구타하여 의관이 모두 다 찢어졌는데, 비록 간혹 엎어지며 자빠졌으나 끝내 허리를 굽히지 않아 굽히지 않는 의사를 보이니, 오랑캐에게 항복한 한인(漢人) 중에 심지어 눈물을 흘리는 자까지 있었다. 이확 등이 돌아오려 할 때에 한이 답서를 맡겼는데 글에 황제라 칭하였으므로 이확 등이 가지고 통원보(通遠堡)에 이르러 청포(靑布)로 싸서 몰래 가죽 주머니 속에 두고, 말이 병나고 짐이 무겁다고 핑계 대고 보(堡)를 지키고 있는 오랑캐의 처소에 놓아 둔 채 왔더니, 감사 홍명구가 이확 등이 처음 금한이 칭호를 참칭한 서한을 받을 때에 엄한 말로 준열히 물리치지 못하고 몰래 중도에 놓아두고 온 것을 죄로 삼아 치계(馳啓)하여 목을 베어 효시할 것을 청하니, 이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이확 등의 죄는 죽이기까지 할 것은 아니다.” 하였다. 비변사에서 회계(回啓)하기를, “우선 잡아오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랐다. 대개 이는 죄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중론(衆論)이 한창 격심하기 때문에 이로써 아뢴 것이다. 삼사가 함께 발론하고 유생 조복양(趙復陽) 등이 모두 소를 올려 벨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이확 등이 한의 서한을 중도에 몰래 놓아두고 온 것을 오랑캐들이 필시 모를 것이라 하여 선전관으로 하여금 의주에 도착하여 심양에 통첩을 보내 이 뜻을 알리도록 하였다. 《병자록》 ○ 5월 1일에 도사 이정철(李廷喆)을 보내 나덕헌(羅德憲)과 이확 등을 잡아왔다. 임금은 “결말을 기다리지도 않고 지레 목을 베어 효시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삼사와 백관과 유생들이 연이어 소를 올려 베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아니하고 덕헌은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이확은 검산산성(劍山山城)에 도삼년(徒三年)으로 정배하였다. 《일월록》 ○ 영의정 김류(金瑬)가 바야흐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니, 나이 젊고 준열한 논의를 하는 자가 따라서 좇았다. 벼슬아치 가운데 간혹 “금한은 스스로 자기 나라에서 황제 노릇을 하는 것이고, 우리나라는 다만 정묘년의 형제의 맹약만을 지킬 뿐이니, 저들이 참칭하는 것은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겠는가.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병력을 헤아리지도 않고 먼저 우호 맹약을 저버려 원망을 돋구고 화를 부르기에 이르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비록 소견이 이와 같다 하더라도 감히 입을 열지는 못하였다. 《병자록》 ○ 이로부터 임금이 여러 번 회오(悔悟)하는 하교를 내려 충의와 적개(敵愾)의 뜻으로 격려하니, 원근에서 상소문이 매일 답지하였는데 모두 화친을 배척하고 오랑캐를 치자는 말이었다. 대간 윤황(尹煌)이 상소하기를, “어찬(御饌)을 줄이시고 종묘의 음악을 철폐하며, 강화도의 행영(行營)을 불사르고 전쟁에 전념하소서.” 하였다. 참의 김덕함(金德諴)은 평양으로 진주하기를 청하고, 참판 정온(鄭蘊)은 송도로 진주하기를 청하였다. 이때 천재(天災)와 물괴(物怪)가 잇달아 나타나, 부평(富平)과 안산(安山)에서 돌이 옮겨지고 영남과 관서(關西)에서 오리가 싸우고 대구(大邱)에서 학(鶴)이 진을 치고, 청파(靑坡)에서 개구리가 싸우고, 죽령(竹嶺)에서 두꺼비의 항렬을 짓고, 예안(禮安)에서 강물이 뚝 끊기고, 양 능(兩陵)에서 우레와 서울에 못물이 붉어지고, 서울 도성 안에서 하루에 지진이 27개 곳에서 일어나고, 도성에서는 이 때문에 세 때의 횃불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큰물이 갑자기 밀려와 동문(東門)의 길이 끊기고 세 대궐이 일시에 모두 지진으로 흔들리고, 흰 무지개가 태양을 꿰뚫는 등 성문(星文)의 변고가 모두 1년 안에 모여들었는데, 김류ㆍ홍서봉(洪瑞鳳)ㆍ이홍주(李弘冑)는 정승의 지위에 있으면서 화친하는 일에는 이미 믿을 바가 없는데도 싸워서 지키는 일에도 또한 강구하는 바가 없었다. 《병자록》 ○ 가을 7월 에 마부대(馬夫大)가 오랑캐의 상인 등을 거느리고 중강(中江)에 이르러 의주 부윤을 만나 보기를 요구하니, 원수(元帥)가, “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는 국경을 넘어갈 수 없다.” 하자, 다음날 돌아갔다. 《일월록》 ○ 8월에 감군(監軍) 황손무(黃孫茂)가 가도로부터 나오니, 접반사 이민구(李敏求)가 데리고 와서 9월 1일에 입경(入京)하였다가 14일에 돌아갔다. 《일월록》 ○ 이때 가도의 도독 심세괴(沈世魁)가 우리나라가 화친을 배척한 뜻을 중국에 보고하였더니, 중국에서 황손무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권장하여 선유(宣諭)하였다. 감군이 돌아가는 길에 관서 지방에 이르러 자문을 보내기를, “귀국 사람들의 인심과 기계(機械)를 보건대, 결코 저 강한 오랑캐를 대적하지 못할 것이니, 중국 조정에서 일시의 장려하는 말 때문에 저들과의 화친을 단절하지는 말라.” 하였다. 《병자록》 ○ 황손무가 입경하니 임금이 교외에 나아가 조칙(詔勅)을 영접하고 대신들이 관소(館所)로 나아가 군무(軍務)를 논하니, 별로 수작하는 일이 없이 장황히 글을 써 보냈는데, “오늘날 적의 세력이 문득 삼한(三韓)을 점유하였다.”는 말을 칭하기에 이르렀으므로 조정에서 변명하고자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범범하게 일컬은 말인 듯하니 굳이 변명할 필요가 없다.” 하니, 양사가 “급히 묘당에 명하여 변명하도록 하소서.” 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대신이 말하기를, 《동강기사(東岡記事)》를 살펴보니, 이른바 삼한이라는 것은 우리의 삼한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글에 ‘동쪽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서쪽으로 삼한을 바라본다.’는 말이 있으니, 요동(遼東)과 광녕(廣寧)을 삼한이라고 일컬은 것이 분명하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9월에 오랑캐가 명 나라의 황릉(皇陵)을 범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간원이 아뢰기를, “방금 가도에서 온 보고를 듣건대, 황제의 전지에 ‘오랑캐가 무도하여 원침(園寢)을 놀라게 하니 짐이 가슴 아프고 이 갈고 있다.’ 하는 말이 있는데, 이미 이 보고를 들었으니 음악을 베풀고 잔치를 베푸는 것은 법과 예에 심히 어그러져 합당하지 않으니, 감군(監軍 황손무)이 비록 생각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 상례(常禮)를 변경하는 조치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5월에 임금이 전교를 내리기를, “내수사의 공목(貢木) 20동을 관서 지방으로 내려 보내어 무과(武科)를 베풀도록 하되, 10동은 안주(安州)의 사졸들과 장교에게 재능을 시험하고 나누어주도록 하고, 10동은 각처의 산성으로 나누어 보내어 또한 재능을 시험하여 상을 베풀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 병조에서 아뢰기를, “청하옵건대, 자원하여 싸움터에 나갈 자는 타도 사람을 막론하고 모두 무과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소서.” 하였다. 이에 이르러 9월에 평안도에 무과에 합격한 자가 1만 2백 34명이었는데, 조총으로 합격한 자는 7백여 명이었다. ○ 이때 방추(防秋)가 이미 박두하였는데 최명길(崔鳴吉)이 화친의 사신을 보낼 것을 청하자, 교리 오달제(吳達濟)와 이조 정랑 윤집(尹集)이 명길을 벨 것을 청하고, 헌납 이일상(李一相)의 상소에는 ‘위로는 천조(天朝)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우리 백성들을 속인다.’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대개 당시의 의논이 화친을 배척하는 것을 청의(淸議)라 하고 화친하여 얽어매는 것을 사론(邪論)이라 여겼으므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병자록》 ○ 부교리 오달제가 상소하기를, “대각은 공론이 있는 곳이고, 공론은 한번 발하면 비록 임금의 존엄으로서도 위협하여 버티지 못하고, 대신의 중함으로서도 저지하여 막지 못하는데, 하물며 오직 임금의 뜻에 들도록 힘쓰는 일개 간사한 신하가 감히 공론과 서로 다툰단 말입니까. 지난번 최명길이 사신을 보내 오랑캐에게 통하자는 뜻을 조정에서 화친을 거절하기로 한 뒤에 말하였으니, 그 의논이 간사함이 진실로 가증스럽습니다. 그런데 다만 재량하여 선택하고 취하고 버리는 권한이 임금에게 있기 때문에 조정에서 그대로 두고 의논하지 않았더니, 그 뒤에 대간이 조정의 계책을 그르다 하여 다투고 서로 피혐하여 의논이 심히 준열하였고, 옥당이 또한 의리에 근거하여 논변하였습니다. 이렇듯 삼사의 공론이 이미 나왔는데도 명길은 임금의 뜻이 화친에 있다는 것을 믿고 국가의 사세를 생각지도 않은 채, 등대(登對)하는 날에 감히 속이고 위협하는 말을 진달하여 위로는 임금의 귀를 현혹시키고 어지럽히고 아래로는 공의(公議)를 위협하고 제지하여 대론(臺論)이 일어났는데도 일변 사신을 보내자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자고로 대간을 안중에 두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곧바로 행하는 술책으로 그 임금을 인도하는 자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옥당이 면대하여 배척하고 여러 사람의 의논이 다투어 비난하기에 이른 만큼 마땅히 몸을 움츠리고 엎드려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며 물의(物議)가 정해지기를 기다려야 할 것인데 오히려 태연하게 차자를 진달하여 오직 화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할 뿐이니, 그 방종하고 기탄 없는 죄는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 명길이 일찍이 경연에서 금한(金汗)을 청한(淸汗)이라 부르기를 청하니, 간관들이 합계하여 배척하기를, “저 오랑캐가 청이라고 호칭한 것은 실로 우연한 칭호가 아닌데, 우리나라에서 또한 이것을 칭한다면 이것은 오랑캐의 참칭(僭稱)을 허여하는 것이니, 그 방자하고 기탄없음이 진실로 이미 극도에 달하였습니다. 국가의 대사를 심복 대신(心腹大臣)과 더불어 몰래 상의하고 승지ㆍ사관은 또한 물리쳐 버렸습니다. 정대하고 광명한 처사라면 승지에게 감추고 거리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임금의 총명을 막고 가려 반드시 제 생각대로 실행하려고 하니, 예로부터 간흉 중에 일찍이 없었던 소행입니다. 삭탈관작하소서.” 하자, 임금이 답하기를, “판윤이 새 호칭을 쓰자고 청한 것은 사례가 당연한 것이며, 몰래 의논하자고 한 것은 또한 대사를 경솔히 누설할까 염려해서이다. 만일 그대들이 의논한 바와 같다면 장량(張良)과 진평(陳平)도 모두 만고의 죄인이 될 것이다. 이 사람은 원훈(元勳) 중신(重臣)으로서 헛된 이름을 구하지 않고 오로지 실사(實事)에 힘써서 충성과 계책이 다른 사람들이 미칠 바가 아닌데, 그대들은 이 몇 마디 말로 얽어 모함하여 다시 등대(登對)할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인가.” 하였다. 《일월록》 ○ 명길이 차자를 올리기를 “싸워서 지킬 계책도 결정하지 못하고 또 화를 완화시킬 책략도 하지 않고 하루아침에 오랑캐의 기병이 달려 들어오면 체찰사는 강화도로 들어가 지키고 원수(元帥)는 물러가서 정방(正方) 황주산성(黃州山城)을 지키고, 백성들은 어육(魚肉)이 되고 종묘와 사직은 파천할 뿐일 것이니, 이런 지경에 이르면 누가 장차 그 허물을 책임질 것입니까.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체찰사와 원수는 모두 마땅히 부(府)를 평안도에 개설하고 병사(兵使)들은 또한 마땅히 의주에 들어가 있되 모든 장수를 단속하여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게 하고, 또 심양에 글을 보내어 군신(君臣)의 대의를 갖추어 말하고 이어서 추신사(秋信使)를 보내지 않은 이유를 말하고 한편으로는 오랑캐의 정세를 살피고 한편으로는 저들의 답변을 그대로 보아서 만일 다른 마음이 없이 형제의 예를 그대로 지키면 송 나라 호씨(胡氏)가 논한 바와 같이 우선 이 전의 약속을 지키고 안으로는 정사를 닦아서 후일을 도모하도록 하여 석진(石晉)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힘쓸 것이며,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의주를 굳게 지키며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 국경에서 안위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비록 만전의 계책은 아니라 할지라도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 오히려 낫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버려둔 채 도모하지 않고 한결같이 주저하면서 진격하여 싸우자고 말하자니 의심스럽고 두려운 생각이 없지 않고, 화친하자고 말하니 또 비방하는 의논이 올까 두려워하여 이것도 저것도 다 미치지 못하여 나아갈지 물러갈지 확정이 안 되었는데, 강의 얼음이 장차 얼어 화가 눈앞에 닥쳐올 것이니, 이른바 ‘너희가 의논이 결정될 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이미 강을 건넜다.’는 말에 불행히도 가깝습니다.” 하였다. 대각의 탄핵 소장이 거듭 일어나니, 명길이 또 차자를 올리기를, “오늘날 신을 공격하는 의논이 약간 연소한 사람의 입에서 나왔는데, 온 나라의 의논이 쏠려도 빙 둘러서서 서로 쳐다만 본 채 마침내 감히 신의 심사를 밝히지 못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번 입을 열면 서로 따라서 ‘화친을 의논한다’는 함정 속으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생각에는 오히려 오늘날 화친하는 일이 그른 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대개 석진의 고조(高祖)가 군사를 일으킬 때에 상유한(桑維翰)이 권하여 고조로 하여금 거란[契丹]에게 아들이라 칭하고 신하라 칭하여 거란의 군사를 빌려서 중국을 취하게 하였고,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경연광(景延廣)이 건의하여 신하의 칭호를 버리고 손자라 칭하고 거란에게 말하기를, ‘할아버지야, 노했거든 오너라. 손자도 10만의 군사가 갈아놓은 칼을 빗겨 들고서 기다리노라.’ 하였습니다. 상유한이 여러 차례 공손한 말로 사과하라고 청했으나 출제가 듣지 않아 그 뒤에 거란이 노하여 시끄러움이 그치지 아니하고 중국이 피폐하게 되어 스스로 보존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이에 사신을 보내 다시 신하로 칭하기를 청하였으나 거란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 후 3년에 거란이 침입하여 석진이 마침내 망하였습니다. 상유한의 간언은 지혜에 가깝지만 임금을 인도하여 오랑캐의 신하가 됨으로써 중국이 어지럽게 되는 토대를 만들었고, 경연광의 말은 바른 데 가깝지만 경솔하게 오랑캐와의 불화를 일으켜 나라가 전복되고 멸망하는 화를 초래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주자강목(朱子綱目)》에는 그들의 관직을 깎아 버리고 두 사람을 나쁘게 평하였습니다. 선유(先儒) 호씨(胡氏)의 논에 이르기를, ‘일을 두고 말하면 연광의 진(晉)을 망친 죄는 속죄할 수 없으나, 심정을 두고 논하면 석진이 거란을 아버지로 섬김으로써 중외의 인심이 모두 평안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연광이 개연히 한번 설욕하려고 하였으나, 경솔하게 신의와 호의를 저버리고 스스로 불화의 단서를 만들었고, 하루 아침의 분함 때문에 그 몸을 망침으로써 그 임금한테까지 화가 미치게 하였습니다. 만일 연광이 우선 전의 맹약을 지키고 안으로 정사를 닦았다면 몇 해 안 가서 뜻대로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무릇 호씨의 학술의 바름은, 중국을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것이 바로 그의 일생의 사업이었던 만큼 수백 년 뒤에 득실을 추론(追論)하되 어찌 조금이라도 주저함이 있겠습니까. 또한 반복하여 억양해서 그 마음은 용서하면서도 그 자취를 죄주기를 이와 같이 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대개 남의 신하로서 나라를 꾀할 때에 먼 앞날을 헤아리는 마음을 지니지 못하여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였으니, 그 일이 비록 바르더라도 죄는 도망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선조조(宣祖朝) 때에 중국의 여러 장수가 싸움에 싫증이 나자 비로소 왜와 화친을 맺을 계책을 두고 우리나라로 하여금 명 나라 조정에 청하여 아뢰게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성혼(成渾)이 맨먼저 허락할 뜻을 진달하니, 선조께서 크게 노하였고 성혼의 문생들도 성혼을 의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에 성혼이 편지로 왕복하여 스스로 해명하기를, ‘시비를 주로 하면 곧 이치만 보고 사물을 보지 못하며, 이해(利害)를 주로 하면 사물만 보고 이치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조정에 있어서는 혹은 시비와 이해가 합쳐 하나가 되니, 조정의 이해가 있는 곳이 바로 시비가 있는 곳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화친을 주장하여 나라를 그르친 진회(秦檜)가 옛날에 있었으니, 천년 뒤에 누가 그의 배에 칼날을 꽂으려 하지 않겠는가. 이 때문에 말이 화친에 미치면 모든 사람이 함께 배척하여 버린다. 비록 그렇지만 일을 처리하는 경우에는 반드시 그 시세를 살피고 사람을 의논하는 경우에는 마땅히 그 실정을 살펴야지 일체의 법으로 표준을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화친을 맺어 보존하기보다는 차라리 의를 지켜서 망하겠다 하는 것은, 바로 신하의 절개를 지키는 말이나, 종묘와 사직의 존망은 보통 사람의 일과는 다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송 나라 한탁주(韓侂冑)가 금 나라를 친 것은 대의를 천하에 폈다고 이를 수 있으나, 선유(先儒)는 거의 종묘 사직을 위태롭게 할 뻔했다 하여 죄로 여겼다. 장남헌(張南軒)은 송 나라가 금 나라에 대해 복수하는 것으로 사업을 삼았는데, 금 나라를 쳐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으니, 종묘 사직을 소중한 것으로 여기고 때를 보고 힘을 헤아리는 것으로 시중(時中)의 의를 삼았을 뿐이다.’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오늘날 조정의 신하들이 마땅히 깊이 생각할 바가 아니겠습니까. 무릇 왜적이 팔도를 유린하고 양능(兩陵)에까지 욕이 미쳤으니,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진실로 백세 뒤라도 반드시 갚아야 할 원수입니다. 그런데 성혼이 일시의 유종(儒宗)으로서 명 나라 장수의 한 마디 말로 말미암아 감히 왜와 화친을 맺을 단서를 명 나라에 아뢰어 청하자고 발언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원수를 잊어버리고 임금을 저버려서 그러한 것이겠습니까. 대개 당일의 사세가 만일 한갓 일체의 의논만 지키고 시세에 알맞은 마땅한 계책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화가 반드시 양능이 변을 당하는 데에 이르고 말 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대개 도에는 경(經)과 권(權)이 있고, 일에는 경중이 있습니다. 의리로 또한 시세에 따르니, 오늘날의 일을 시세로써 말하면 이미 석진(石晉)만큼 강성한 군사력도 없고, 또 임진왜란 때처럼 믿을 만한 명 나라 군사도 없으며, 의리로 말하면 애당초 오랑캐에 대하여 아들로 칭하고 신하로 칭하는 모욕이 없었고 또 조상 때부터 잊기 어려운 원수도 아니니, 만일 주자(朱子)와 호씨(胡氏) 두 현인 및 성혼 같은 신하들이 오늘날에 다시 태어난다면 그 시비와 득실을 결정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오랑캐가 정묘년의 형제의 맹약을 어기고 우리에게 예의에 어긋난 것으로 핍박한다면 의에 있어서 결코 따를 수가 없지만, 이제 이미 그렇지 않고 이웃나라의 예법을 그대로 쓰는 만큼, 저쪽에서 칭호를 참칭(僭稱)하고 안 하고는 우리가 마땅히 물어야 할 바가 아니니, 어찌 예의로써 오랑캐를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화친하자는 말을 한 것은 감히 시비를 돌아보지 않고 한갓 이해의 말만 하여 군부(君父)를 그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시세로써 참작하고 의리로써 재량하고 선유의 정론(定論)으로써 증명하고 조종(祖宗)의 지나간 자취를 참조하여, 이렇게 하면 도리에 해롭고 이렇게 하면 사리에 합한다는 것을 깊이 헤아려 보고 반드시 그렇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일찍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국력은 다 되었는데 오랑캐의 군사는 여전히 강하니, 우선 정묘년의 맹약을 지킴으로써 수년 동안의 화를 누그러뜨리고 그 동안에 인정(仁政)을 베풀어 인심을 수습하고 성을 쌓고 양식을 저축하여 더욱 변방의 방비를 굳게 하고, 군사는 거두어들여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저들의 틈을 엿봐야 하니, 국가를 위한 계책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평소 이런 생각을 마음에 정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여러 번 말하고 들어가서는 어전(御前)에 나아가 아뢰고 나와서는 대신들과 입술이 타고 혀가 마르도록 다투어 스스로 그칠 줄을 몰랐으니, 무릇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나라가 장차 위태로울까봐 걱정해서이지 일신의 이해는 계교할 겨를이 없습니다. 조정에 진실로 측은한 마음이 있는 자가 있다면 마땅히 신을 불쌍히 여기는 바가 있을 듯한데 도리어 노한 눈으로 보며 맹렬히 공격하니, 또한 유독 무슨 마음입니까. 소인의 정상이란 가장 헤아리기가 어려운데, 오늘날의 조정에 만일 소인이 있다면 반드시 스스로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에서 나와서 장차 실없는 의논에 아부하여 헛된 명예를 취하고 온화하게 담소하며 앉아서 대권을 잡을 것입니다. 어찌 괴롭게 자기 견해를 고집하여 여러 사람의 노여움을 범하여 한 세상에 외롭게 서서 여러 번 곤란을 겪으면서도 후회할 줄을 모르겠습니까. 세상에 어찌 이와 같이 어리석고 어두운 소인이 있겠습니까. 아아, 남송의 화친을 주장한 자(진회)는 화가 나라에 돌아가고 이익이 일신에 돌아가더니, 오늘날 화친을 주장하는 자(자기를 가리킴)는 화가 일신에 돌아오고 이익이 국가로 돌아가니,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사람이 어진가 사특한가와 일이 옳으냐 그르냐 하는 것을 또한 알기 어렵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지천집(遲川集)》 《청야만집(靑野漫輯)》 ○ 명길이 입대(入對)하여 승지와 사관을 물리칠 것을 청하고 홀로 아뢴 일은, 대개 화친하는 일을 진달하여 비밀리 의논하여 단행하려는 것이었다. 윤집(尹集)이 이에 상소문을 초하여 극렬하게 의논하려 하니, 그의 형 계(棨)가 보고 말하기를, “말이 너무 지나치다.” 하자, 윤집이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하려 하는데 말이 공손함은 부당합니다.” 하였다. ○ 교리 윤집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요즘 일종의 간사하고 아첨하고 괴이하고 못된 말이 있어 위로는 전하의 귀를 가리고 아래로는 사람들의 바람을 위반하여 장차 천지가 어둡고 막히고 의리가 끊어지도록 하여 나라가 나라다울 수 없고 사람이 사람다울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무릇 화친의 의논이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고 남의 종묘사직을 전복하게 하는 것은 지금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과 같이 심한 경우는 없었습니다. 명 나라는 우리나라에 대해서 부모요, 오랑캐는 부모의 원수이니, 남(명 나라)의 신자(臣子)된 자가 부모의 원수와 더불어 맹약을 맺어 형제가 되어 부모를 잊어버리는 지경에 두고도 태연하게 수치로 여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임진왜란 때의 일은 털끝만한 것도 모두 황제의 은혜였으니,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먹고 숨 쉬는 동안에도 잊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오랑캐가 북경을 핍박하여 황릉(皇陵)을 놀라게 하고 더럽혔으니, 마음이 놀라고 뼈 속 깊이 아파 그 참혹한 것을 차마 들을 수 없어 차라리 우리나라가 망할지언정 의리상 구차히 온전할 수가 없는데, 돌아보건대, 군력이 미약하여 비록 군사를 다 일으켜 중국을 따라 오랑캐를 칠 수 없을지언정 또한 어찌 차마 다시 화친하는 의논을 이때에 주창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더구나 명길이 어전에 들어갈 때에 승지와 시신(侍臣)을 또한 물리쳤다는 것은, 아아, 너무 심합니다. 나라 일을 도모하는 것은 귀에다 대고 소곤거릴 말이 아니요,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비밀스러운 말이 없는 것이 원칙이니, 말한 바와 대답한 것이 만일 의로운 것이라면 비록 천만 인이 참여하여 듣는다 할지라도 또한 무엇이 해로우며, 만일 의로운 것이 아닐진댄 옥루(屋漏)도 오히려 부끄러운데 하늘을 속이겠습니까. 아아, 옛날에 화친을 주장한 것이 진회(秦檜) 같은 이가 없으나 당시의 언어와 사적이 사필(史筆)의 주벌에서 도망칠 수 없었음을 지금까지도 역력히 볼 수 있으니, 진회 같은 큰 간신도 감히 사관을 물리치지 못한 것이 분명합니다. 무릇 진회도 감히 하지 못한 일을 명길이 차마 하였으니, 전하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곧 진회의 죄인입니다. 이제 안으로 조정과 밖으로 일반 백성들까지도 모두 그(최명길) 고기를 먹고자 하는데 전하께서 깊이 궁궐 속에 거처하여 홀로 알지 못할 뿐입니다. 홍처후(洪處厚)의 아룀과 오달제(吳達濟)의 상소는 실로 공론에서 나온 것인데 도리어 엄중한 견책을 당하였으니, 뇌정(雷霆) 아래에 꺾이지 않는 이가 없어 신향(申恦)을 벼슬에 의망(擬望)했기 때문에 특히 전관(銓官)을 파직시키는 데에 이르렀는데, 이민구(李敏求)는 품계가 높은 대사간으로서 공론을 돌보지 않고 애매하게 피혐하여 단번에 정계(停啓)하니, 그 밖에 신진 후배들이 아부하며 더러운 것은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명길의 차자에 허다하게 늘어놓아 임금의 귀를 현혹시키고, 대각(臺閣)을 위협하고 억제하여 공론을 막고 저지하는 계교가, 아아, 또한 교묘하고도 참혹합니다. 옛날에 옳지 못한 짓을 하는 자는 몰래 숨기어 감추고자 하였는데, 이제 명길이 화친을 주장하되 팔뚝을 걷어붙이고 거리낌이 없어 마침내 주자(朱子)와 호씨(胡氏) 두 현인과 우리나라의 명유(名儒 성혼)를 들어서 화친을 주장하였다고 지적하여 현인을 빌려 구실로 삼았습니다. 게다가 지난번 화친을 거절한 것은 전하의 허물이라고 지적하여, ‘허물을 고치는 것을 꺼리지 말라.’(논어에 있는 말)는 말을 하기에 이르렀고, 계속해서 말하기를, ‘백성은 도탄에 빠지고 종묘 사직은 혈식(血食)을 못한다.’ 하며 말이 변덕스러워 전하의 마음을 동요시켰습니다. 무릇 밖으로 강한 적의 세력을 끼고 안으로 그 임금을 위협하니, 이것이 차마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게다가 대간의 의논이 이미 일어났는데도 한편으로 오랑캐에게 서한을 보내는 것이 불가할 것이 없다고 한 것은 어째서 그가 조정을 업신여기며 대각을 업신여김이 이다지도 극단에까지 이른 것입니까. 이 말이 또한 전하의 나라를 망치기에 충분합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그의 죄를 바로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 말을 받아들여 대간의 합계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데도 국서(國書)는 이미 강을 건너갔으니, 아아, 국가에서 대간을 둔 것이 또한 어디에 쓰려는 것입니까. 장차 임금으로 하여금 모든 일을 독단하여 의리를 돌아보지 않고 대간을 돌보지 않은 채 오직 사특한 의논만을 옹호하고 간사한 신하만을 의지하게 하여 마침내 나라를 잃어버리는 데 이르고야 말 것입니다. 정태화(鄭太和)는 사특한 의논에 부동하였는데, 전하께서 사헌부 집의에 특별히 제수하였으니, 이것은 여러 신하들을 아첨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아아, 일찍이 당당한 수백 년의 종묘사직이 마침내 명길의 한 마디 말에 망했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갔으나 회답하지 않았다. 《청야만집》 ○ 10월에 금한(金汗)에서 보낸 마부대(馬夫大)가 의주에 도착하니, 부윤 임경업(林慶業)이 접견하였다. 마부대가 말하기를, “내가 11월 26일에 군사를 일으켜 동으로 쳐들어올 것인데, 너희 나라에서 만일 사신을 보내 다시 화친을 맺고자 한다면, 비록 군사를 출동하는 도중이라도 마땅히 파하여 돌아갈 것이다. 또 우리나라가 황제라 칭하는 것은 남조(南朝 명 나라)에서도 금하지 못한 바인데, 너희 나라가 금하고자 함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 11월에 역관 박인범(朴仁範)이 서신을 가지고 심양(瀋陽)에 도착하니, 한(汗)이 묻지도 않고 받지도 않았으나, 접대와 상격(賞格)은 전날과 똑같이 하여 별로 무례한 기색이 없었다. 다만 용골대와 마부대가 전날에 빼앗아 갔던 우리 임금의 서도에 내려 보낸 유지 및 각 아문의 문서를 첨부하여 내보이며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먼저 맹약을 어긴 것은 아니고 너희 나라가 맹약을 어긴 단서가 분명히 이 글에 있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 먼저 맹약을 깨뜨렸다고 하는가. 얼음이 얼기를 기다려 나가면 알 것이다.” 하였다. 용호(龍胡)가 말하기를, “지금부터라도 조선이 우리를 따라 함께 남조를 공격할 것을 도모하고 화친을 거절한 신하 및 왕자를 들여보내면 서로 믿을 수 있을 것이니, 그때 다시 화친을 정하겠다.” 하였다. 인범이 물리치니, 용호가 발끈하여 말하기를, “왕자와 척화(斥和)한 신화를 들여보내면 비록 군사가 압록강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즉시 정지하고 혼인을 맺고 영원히 서로 화친하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한이 스스로 거느리고 나갈 것이니, 이미 군사도 정돈하였다.” 하자, 인범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본시 예의의 나라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니, 친구의 정이 두터워도 서로 혼인하지 않는 것이거늘, 하물며 두 나라가 맹약하여 형제가 되어 이미 10년이 지났는데, 이제 또 혼인을 요구하니 차마 들을 수 없다.” 하였다. 인범 등이 떠난 뒤에 용골대와 마부대와 두 오랑캐가 쫓아와서 말하기를, “한의 말은 전날에 얻은 너희 나라 문서 가운데 화친을 거절하는 뜻이 많은 까닭에 혼인을 요구하는 말을 하여 서로 믿는 바탕을 삼으려고 한 것이니, 이것은 진담이 아니니, 그대들이 알고나 가라.” 하였다. 《일월록》 ○ 이때 한이 제왕(諸王)을 모아놓고 동침(東侵)할 일을 의논하였는데, 귀영개(貴永介)가 홀로 불가하다 하면서 말하기를, “조선은 구구히 예의를 지키고 있는 쇠약한 나라이다. 지금은 우선 그대로 두고 서쪽(명 나라) 일에만 전력하여 성공한다면 화살 하나 쏘는 힘을 들이지 않아도 그들은 자연히 신하로서 복종할 것이요, 또 우리가 비록 나라를 비우고 서쪽으로 간다 하더라도 그들은 기력이 없어 반드시 감히 우리 뒤를 밟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병력으로써 유린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다만 조선에 산이 많고 들이 적어 도로가 몹시 험하고 또 포 쏘는 기술이 있어 혹시라도 우리의 군사와 말을 손실할까 염려되니, 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한이 그 계책을 그럴듯하게 여겼는데, 구왕 및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가 군사를 출동시킬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고 한다. 《국당배어(菊堂俳語)》 ○ 무인년 겨울에 내가 서장관으로서 심양에 갔을 때, 우리나라 사람으로 정묘년에 포로로 잡혀 귀영개의 가정(家丁)이 된 자가 매매의 일로써 관사에 와서 한이 만일 대왕(귀영개)의 말을 따랐다면 조선은 병난을 입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다. ○ 체찰사 김류가 아뢰기를, “오랑캐가 만일 깊이 쳐들어오면 도원수 및 양서(兩西)의 감사는 노륙(孥戮 처자를 함께 연좌하여 처벌하는 것)의 법으로 처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체찰사(김류)도 중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김류는 일찍이 척화를 주장하였는데, 이 하교를 받든 뒤에는 도리어 화친을 주장하여 최명길의 의논에 붙은 뒤에 비로소 소역(小譯)을 보내 오랑캐의 뜻을 탐지하게 하였다. 삼사가 함께 일어나 들여보내지 말자고 청하여 정론(停論)하기도 전에 임금이 특명으로 출발시켰다. 금한(金汗)이 소역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가 만일 11월 25일 이전에 대신과 왕자를 들여보내어 다시 화친을 정하지 않는다면 내가 마땅히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정(東征)할 것이다.” 하였다. 그 답서에, “귀국이 산성을 많이 쌓았지만 나는 마땅히 큰 길을 통해서 곧장 경성으로 향할 것인데, 산성을 가지고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귀국이 믿는 것은 강화도이지만 내가 만일 팔도를 유린하면 일개 작은 섬으로써 나라가 되겠는가. 귀국에서 의논을 주장하는 자는 유신(儒臣)이니 그들이 붓을 들어 우리를 물리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소역이 돌아와 그 말과 서신을 전하자 묘당에서 재신(宰臣)을 보내고자 하는데, 화친을 물리치는 의논이 바야흐로 준엄하여 감히 사신을 보내자고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다가, 한참 뒤에 박노(朴)를 보내자고 청하였다. 대간들이 또 극력 다투는지라 마지못해 지름길로 박로를 보냈으나, 이미 금한과 약속한 시기를 놓쳤다. 《병자록》 ○ 이때 이시백(李時白)이 남한 수어사(南漢守禦使)가 되었는데, 시백의 아버지 이귀(李貴)가 항상 김류와 뜻이 맞지 않았으므로, 김류는 시백이 남한산성의 수비를 청하는 모든 일에 대해 그 요청을 하나도 따르지 않고 성을 지키는 군사들을 모두 영남군(嶺南軍)으로 배정하여, 만일 다급한 적의 경보가 있을지라도 영남에서 미처 올 수가 없었다. 조종조(祖宗朝) 이래로 요충지대에는 중진(重鎭)을 벌여두었는데, 김류가 도원수 김자점과 함께 건의하여 철폐하여 의주의 진(鎭)은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옮기고 평양은 자모산성(慈母山城)으로 옮기고 황주(黃州)는 정방산성(正方山城)으로 옮기고 평산(平山)은 장수산성(長水山城)으로 옮기게 하여 가까운 데는 큰 길까지의 거리가 3, 40리가 되고 먼 데는 하루 이틀이 걸리는 거리가 되니, 양서 일대의 큰 진이 모두 무인지경이 되었다. ○ 김자점(金自點)이 피곤한 백성을 몰아쳐 정방성(正方城)을 쌓는데, 또 형벌과 매질로써 위엄을 세워 인심을 점점 더 잃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올 겨울에는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다.” 하고, 어떤 사람이 혹, “적이 온다.”고 하면 바로 성을 내었다. 동방(冬防)이 이미 지났는데도 성을 지킬 군졸을 하나도 더 첨가하여 방비하지 않고, 의주 건너편에 있는 용골산(龍骨山)부터 봉화불을 두어, 원수(元帥)가 있는 정방성에서 그치게 하였으니, 대개 이는 봉화가 만일 도성에 이르면 소란스러워질까 염려해서였다. 12월 6일 이후에 연이어 두 번 봉화를 들었는데, 자점은 말하기를, “이것은 박노가 들어가서 오랑캐가 반드시 나와 환영하는 것이다. 어찌 적이 올 리가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치계(馳啓)하지 않다가 9일에서야 비로소 군관 신용(申榕)을 보내 의주에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신용이 순안(順安)에 이르니 적의 기병이 이미 가득 차 있자, 곧장 돌아와 감사 홍명구(洪命耈)에게 고하니, 명구가 크게 놀라 단기(單騎)로 자모산성에 달려 들어갔다. 신용이 돌아와 자점에게 보고하니, 자점이 말하기를, “망녕된 말로 군정(軍情)을 어지럽힌다.” 하고, 목을 베려고 하자, 신용이 말하기를, “적이 내일에는 마땅히 여기에 당도할 터이니 우선 나를 죽이지 마시오.” 하였다. 조금 있다가 나중에 보냈던 군관이 또 와서 급함을 보고하는데 신용이 말한 바와 같으니, 비로소 장계를 올렸다. 대개 적병은 강을 건너서 성진(城鎭)을 돌아보지도 않고 곧장 올라오면서 화친을 맺으려 한다고 칭하며, 바람같이 달려와, 변방을 지키던 신하들이 올리는 장계를 적이 모두 탈취하였다. 이 때문에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변방 소식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병자록》 ○ 청주(淸主)가 황제라 칭하였을 때 사람을 보내어 우리나라에 통고하니, 우리나라에서 접대를 잘하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회답사를 보냈기 때문에, ‘얼음이 얼어 강물이 합한 뒤에 나온다.’는 말로 협박하고서 곧바로 병마를 정비하여 11월 27일을 택하여 서쪽(명 나라)을 침범할 계획을 하고 말하기를, “조선에서 반드시 사람을 보내 와서 빌 것이니, 마땅히 회보를 보고서 일어나겠다.” 하였는데, 그날이 지나도 우리 사신이 도착하지 않자 다시 29일을 택하여 말하기를, “아직 며칠을 더 기다리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날이 지나자 이에 말하기를, “조선의 죄를 먼저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드디어 동침할 계획을 결정하고 3군으로 나누어 나왔다. 회인군(懷仁君)이 정묘년에 잡혀갔던 사람에게 들은 것이다. ○ 청병이 스스로 20만이라 칭하였으나 실은 자기들 군사가 7만이고, 몽고 군사가 3만이며,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의 군사가 2만이니, 합하여 12만이었다. 위와 같다 ○ 9일에 청병이 압록강을 건너서 10일에는 안주에 도착하여, 군사를 지휘하여 포위하려고 하다가 도로 군사를 해산하고 곧장 서울로 향하였다. ○ 12일에 의주 부윤 임경업(林慶業)의 장계가 들어왔는데, 9일에 압록강 건너편에 적병이 가득찼더니, 이날 저녁에 적병이 길을 나눠서 강을 건너 길을 배로 하여 급히 나아간다고 하였다. ○ 오후에 도원수 김자점의 장계가 또 도착하니, 비로소 적의 형세가 급박한 것을 알았지만, 또한 이렇게 빠른 것은 알지 못하였다. 《병자록》 《난리잡기(亂離雜記)》 ○ 13일 오후 저물녘에 장계가 두 번째 왔는데, 적이 벌써 평양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상하가 황망하여 몸둘 바를 모르고 우물쭈물하며 결단을 내리지 못할 뿐이었다. 성중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문 밖으로 나가는 자가 줄을 지었다. 《잡기(雜記)》 ○ 귀양보낸 사람 이하 모든 죄인을 용서하라고 명하고, 새로 임명한 수령관은 서경(署經)을 거치지 않고 바로 부임하게 하였다. 《잡기》 ○ 판윤 김경징(金慶徵)을 도검찰사로 삼고, 부제학 이민구(李敏求)를 부검찰사로 삼아 강화도를 지키라고 명하였다. 그때 묘당에서 장차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의논하는데 우상 이홍주(李弘冑)가 김경징을 천거하였다. 강도패몰(江都敗沒) 조항에 자세하다. ○ 심기원(沈器遠)을 기복(起復)하여 유도대장(留都大將)을 삼았으나, 기원은 상중에서 나왔기 때문에 수하에 군사가 없었다. ○ 호조 참의 남선(南銑)을 찬획사(贊畫使)로 삼았다. ○ 14일 밤에 눈이 내렸다. 적병이 이미 경기도 땅에 도착하였는데, 장단 부사(長湍府使) 황직(黃稷)은 갑자기 오랑캐와 만나 군사들과 함께 다 포로가 되어 머리를 깎이고 항오 속에 편입되어 호복을 입고 오랑캐의 전구(前驅)가 되었다. 《일월록》 ○ 원임 대신 윤방(尹昉)과 김상용(金尙容)에게 명하여 종묘 사직의 신주(神主)와 빈궁(嬪宮)과 원손(元孫)과 봉림(鳳林)ㆍ인평(麟坪) 두 대군(大君)을 모시고 강화도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늙고 병든 재신 박동선(朴東善) 등이 또한 먼저 갔다. 《난중잡기(亂中雜記)》 〈강도패몰〉조항에 상세하다. ○ 대가(大駕)가 창황히 서울을 버리고 달아나 오후에 남대문을 나가 장차 강화도로 향하려는데 탐졸(探卒)이 달려와 보고하기를, “적이 이미 연서역(延曙驛)을 통과하였으며, 오랑캐 장수 마부대(馬夫大)가 수백 철기(鐵騎)를 거느리고 이미 홍제원(弘濟院)에 도착하여 한 부대로써 양천강(陽川江)을 차단하고 강화도로 가는 길을 끊었다.” 하니, 임금이 도로 성 안으로 들어와 남대문 문루에 앉으니, 상하가 황황하고 도성 남녀들의 우는 소리가 길에 가득찼다. 《병자록》 ○ 임금이 이르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장차 어찌해야 하는가?” 하니, 대신과 재신들이 황망하여 대답할 바를 몰랐는데, 전 철산 부사(鐵山府使) 지여해(池如海)는 이때에 체찰부의 편비(褊裨)로서 칼을 짚고 앞에 나와 대답하기를, “적은 국경을 범한 지 사흘이 못 되어 벌써 당도하였으니, 그 군사와 말이 반드시 피곤하고 지쳤을 것입니다. 만일 포병으로써 사현(沙峴)에서 맞아 그 선봉을 무찌르면 반드시 감히 충돌하지 못할 것이고 대가(大駕)는 강화도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5백의 정예병을 얻어 맞받아치겠습니다.” 하니, 일을 맡은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오랑캐 군사의 많고 적음은 알 수 없으니, 5백 명으로써 시험삼이 공격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조 판서 최명길이 나와 아뢰기를, “종묘 사직의 존망이 호흡하는 사이에 달려 있어 해볼 만한 일이 없으니, 청컨대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적장을 보고 까닭 없이 군사를 발동하여 몰래 깊이 쳐들어온 뜻을 묻겠습니다. 오랑캐가 만일 다시 신의 말을 듣지 않고 신을 죽인다면 신은 마땅히 말 발굽 아래에서 죽을 것이요, 다행히 서로 이야기가 되면 잠시라도 칼날을 머무르게 할 것이니, 서울 가까운 곳에서 방어할 만한 땅은 남한산성 만한 데가 없으니, 청컨대 전하께서는 수구문(水溝門)을 통해 나가 빨리 달려 산성에 들어가 일의 추이를 보소서.” 하였다. 또 말하기를, “동중추부사 이경직(李景稷)이 강개하고 기절(氣節)이 많으니, 부사를 삼을 만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금군(禁軍) 20명을 나누어주어 따라가게 하였더니, 모두 흩어져 달아나고 홀로 이경직과 비장 한 사람만 따라갔다. ○ 또 도감 대장(都監大將) 신경진(申景禛)으로 하여금 모화관(慕華館)에 진을 치게 하였다. 이에 앞서 도감 장관 이흥업(李興業)이 마대(馬隊) 80여 기를 거느리고 적을 막도록 하였는데, 창릉(昌陵) 건너편에 이르러 모두 죽었다. 《병자록》 ○ 명길이 사현(沙峴)에 가서 적의 군사를 만나 마침내 말을 머물게 하고,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발동한 까닭을 힐문하며 일부러 이야기를 끌어 해가 기울게 되니, 이에 임금이 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마침내 남한산성에 들어갔다. ○ 신경진이 아뢰기를, “신이 마땅히 수하의 군사로써 뒤를 막을 것이니, 원컨대 전하께서는 곧장 나가서 강화도로 향하소서.”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그와 같이 위태로운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 지름길로 남한산성에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마침내 최명길ㆍ이경직 동지중추부사 으로 하여금 소와 술을 가지고 가서 오랑캐 장수를 만나 그 칼날을 느슨하게 하고, 이어 신문(新門)ㆍ서문(西門)ㆍ남문(南門)의 삼문(三門)을 닫아 함부로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임금이 즉시 수레를 돌려 남한산성으로 향하는데, 동궁의 말고삐를 잡은 자가 도망쳐 달아나고 보이지 않으니, 급히 사람을 모집하여 따라가게 하였다. 동궁이 손수 채찍을 잡고 채찍질하며 구리개[銅峴] 길을 경유하여 수구문을 나가자, 성중의 남녀들이 맨발로 달려 임금의 행차와 서로 뒤섞여 가는데 도로에 엎어지고 곡성은 하늘을 진동하였다. 유시(酉時)에 신천(新川)과 송파(松坡)의 두 나루를 건너니, 강물이 처음 얼었다. 산 밑에 이르자 날은 이미 캄캄하고 이경에서야 비로소 남한산성에 들어갔는데, 임금 앞에서 인도하는 자가 단지 5, 6명뿐었다. 거의 산성의 남문에 이르렀을 때 노루가 있어 가로질러 달아나 길을 건너니, 한 환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길한 징조이니, 전하께서는 오래지 않아 환도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전에 공주(公州)에 파천하실 때에도 이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난리잡기(亂離雜記)》 ○ 이때 사람들이 대부분 전에 화친을 약속한 말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임금은 유독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김류와 이성구(李聖求)는 임금에게 새벽을 틈타 몰래 강화도로 들어가도록 청하고, 이식(李植)은 인천으로 가서 해로로 강화도에 들어갈 것을 청하는데, 묘당의 의논이 비밀히 정해져 아는 자가 없었다. 15일 새벽에 임금이 성에서 나오니 눈 온 뒤라 산 언덕에 얼음이 얼어서 임금이 탄 말이 미끄러져 임금이 말에서 내려 걸었는데, 여러 차례 엎어져 몸이 편안하지 못하여 도로 성으로 들어왔다. 신경진이 서울에서 뒤따라오니 경진에게 동성(東城) 망월대(望月臺)를 지키게 하고, 이영달(李頴達)을 중군으로 삼고, 구굉(具宏)에게 남성(南城)을 지키게 하고, 수원 부사 구인후(具仁垕)를 부장으로 삼고, 이확(李廓)을 기복(起復)하여 중군을 삼고, 이서(李曙)는 그때 북성(北城)을 맡았고, 이시백(李時白)은 서성(西城)을 지키고, 이직(李稷)을 중군으로 삼았다. 영남의 분방병(分防兵)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여주 목사 한필원(韓必遠), 이천 부사 조명욱(曺明勖), 양근 군수 한회일(韓會一), 지평 현감(砥平縣監) 박환(朴煥)이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들어오고, 파주 목사 기종헌(奇宗獻)이 수백 명을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하니, 경성과 지방의 군병이 1만 2천여 명이고, 문관ㆍ무관ㆍ음관이 2백여 명, 종실과 삼의사(三醫司)가 2백여 명, 호종관(扈從官)이 인솔한 노복이 3백여 명이니, 성을 나누어 맡아 지켰다. 《병자록》 ○ 뒤에 들으니, 적이 이미 교하(交河)와 행주(幸州) 등에서 강을 건너 매복하였으니, 이날 행차를 정지한 것은 또한 하늘의 뜻이었다. 《난리잡기》 ○ 김신국(金藎國)이 청하기를,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나가 정포(精砲) 5, 6천으로 하여금 나눠서 조령과 죽령의 두 곳을 지키도록 하면 적이 반드시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경기 감사 서경우(徐景雨)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도 없게 달아나버려, 비변사에서 아뢰어 파직하고, 이명(李溟)을 경기 감사로 삼았다. ○ 이때 임금이 말을 타고 성을 나가서 강화도로 향하는데, 임금이 탄 말이 갑자기 벌벌 떨면서 땀을 흘리고 선 채 앞으로 나가지 않으니, 말을 부리던 자가 채찍질을 해도 그래도 나아가지 않았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다. 억지로 가서는 안 된다.” 하고, 고삐를 잡고 채찍을 돌리니, 말이 매우 빨리 달렸다. 남한산성으로 돌아와 뒤에 들으니, 오랑캐 장수가 임금이 반드시 강화도로 옮겨 들어갈 것이라고 짐작하고 매복하여 길에서 기다렸다 하니, 말이 가지 아니한 것도 하늘의 뜻이었다. 동평위(東平慰)의 《인계록(因繼錄)》 ○ 산성으로 돌아올 때 임금의 발이 동상에 걸려 걸을 수 없어 마침내 털방석으로 받들고 돌아와 남문에 도착하니, 가마가 비로소 왔다. ○ 처음에 최명길이 마부대를 홍제원에서 볼 때 적이 말하기를, “우리가 맹약을 어긴 것이 아니라 너희 나라가 먼저 화친을 끊으니, 국왕을 보고 그 까닭을 묻고자 한다.” 하니, 명길이 말하기를, “임금께서는 남한산성으로 가셨으니 서로 만나 보기 어렵다.” 하고, 명길 등이 경성에 돌아와서 행재소로 치계하였다. 이날 장차 해가 저물려 하는데도 회답하는 글이 오지 않자 오랑캐가 크게 노하여 속았다고 여겨 명길을 죽이려고 하였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말하기를, “화친하는 일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함부로 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불가하다.” 하니, 곧장 남한산성으로 진군하였다. ○ 최명길과 이경직이 산성에 들어가니, 임금이 손을 잡고 노고를 위로하였다. 지천행장(遲川行狀) ○ 명길이 치계하기를, “저 오랑캐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행차한 것은 오로지 화친하는 일에 있는데, 너희 나라의 국민이 모두 흩어지고 심지어는 국왕이 파천하였으니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다. 만일 화친하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왕자와 대신과 척화(斥和)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 그러면 마땅히 여기서부터 돌아갈 뿐이다.’ 합니다.” 하였다. 오랑캐가 순한 말로 우리를 달래고서 한(汗)에게 사람을 보내 대병(大兵)을 청하려는 것이었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깨닫지 못하였다. 절대로 살육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고 온 조정이 자못 믿어, 호부의 관원을 보내 서울에 들어가 화물(貨物)을 취해 화친 용도에 사용하도록 하고, 또 각 사(各司)로 하여금 1원씩 성에 들어가 간수하게 하였다. 이때 적병은 모화관에서부터 남관왕묘(南關王廟)에 이르기까지 진을 치고, 또 동문 밖에 5, 6개의 병영을 만들어 기치와 창칼을 나열하고 군악이 떠들썩하여 보고 듣는 이를 놀라고 의혹스럽게 하였으나, 성중의 사람은 침해하지 못하게 하고 출입과 왕래도 전혀 금지시켰는데, 다만 우마(牛馬)를 보면 빼앗아가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붙잡아 갔다. 《일월록》 ○ 명길이 적진에서 돌아와 나아가 아뢰기를, “먼저 올린 장계에 대해 오래도록 회답 내림이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3분의 1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진하여 이곳에 와, 신에게 먼저 들어가 보고하도록 하고, 그들은 바야흐로 성 밖에 머물러 있습니다. 군사를 거느리고 마전(麻田) 나루를 건너는데 바람과 날씨가 몹시 차 인가에 들어가서 거처하라고 타이르니, 마부대가 말하기를, ‘화친이 성립되기 전에는 비록 바깥에 거처할지라도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였는데, 그 언사와 안색을 보니, 세 가지 조건을 결정한 외에는 결코 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이 속았다. 어찌 세 가지 조건을 위하여 여기까지 쳐들어왔겠는가.” 하였다. ○ 16일에 적의 대군이 이르러 성을 포위하자 안팎이 비로소 통하지 못하였는데, 대개 이것은 마부대가 대군을 거느리고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우선 감언으로 우리를 속이려는 것이었다. 적의 군사가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그 숫자도 많지 않고 얼음 길에 멀리 와서 형색이 귀신 같고 말도 모두 지쳤는데, 우리는 곧장 황급히 성으로 들어와 두려워서 감히 출격하지 못하였다. 마부대가 왕자와 대신을 보내라고 청하니, 조정에서 종실 능봉수(綾峯守)의 품계를 올려 군(君)으로 봉하여 왕제(王弟)라 칭하고, 형조 판서 심즙(沈諿)을 임시로 대신의 직함을 주고 오랑캐 진영으로 내보내니, 심즙이 말하기를, “내가 본래 평소에 말을 성실하고 미덥게 하였으니, 되놈이라도 속일 수는 없다.” 하고, 마부대에게 말하기를, “나는 대신이 아니라 임시 직함이요, 능봉도 종실이지 왕자가 아니다.” 하였다. 능봉이 말하기를, “심즙의 말은 틀리다. 이 사람은 진짜 대신이고, 나는 진짜 왕자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박노(朴)와 박난영(朴蘭英)이 심양에 갔다가 마부대에게 잡혀 진중에 와 있었으므로 마부대가 난영에게 묻기를, “이 말이 사실인가 어떤가?” 하니, 답하기를, “능봉의 말이 옳다.” 하였다. 뒤에 마부대가 속은 것을 알고 난영과 능봉을 베었다. 심즙이 돌아와 성에 들어오니, 좌의정 홍서봉(洪瑞鳳)과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을 오랑캐 진중으로 보내 말하기를, “장차 봉림(鳳林)과 인평(麟坪) 두 대군 가운데 한 사람을 보낼 터인데, 지금은 강화도에 있으므로 미처 보내지 못한다.” 하자, 마부대가 말하기를, “동궁이 만일 오지 않으면 화친은 할 수 없다.” 하였다. 《병자록》 마부대가 말하기를, “내가 본래 왕제를 가리킨 것이 아니라 바로 왕자를 말한 것이다.” 하니, 심즙이 말하기를, “왕자는 지금 아직 상복을 벗지 않아서 이때 중전이 돌아갔다. 멀리 갈 수 없다.” 하자, 오랑캐 장수가 말하기를, “그러면 일은 다 틀렸다.” 하고는, 오랑캐 군사가 나아가서 성 밖을 삥 둘러싸고, 또 오후부터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였는데, 각사(各司)의 인원으로서 입경(入京)하였던 자와 호부의 물화를 싣고 오는 사람들이 모두 적에게 함락되었다. 해가 질 무렵 홀연히 적이 남문에 이른 것을 보고하니, 체찰부(體察府)에서 즉시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을 곤장 쳐 척후를 하지 못한 것을 꾸짖고 성 문을 닫고서 지켰다. 날이 어두워지자 임금이 성을 순시하는데, 동궁이 수행하였다. 《난리잡기》 ○ 이날 밤에 영의정ㆍ좌의정 및 김신국ㆍ이성귀ㆍ최명길ㆍ 한여직(韓汝稷)ㆍ장유(張維)ㆍ윤휘(尹暉)ㆍ홍방(洪)이 동궁을 적진에 보내기를 청하고, 또 신이라 칭하고 황제라 칭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이런 의논이 있다는 말을 듣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이 건의를 한 자들을 죽여 맹세코 하늘을 함께 이고 있지 않겠다.” 하니, 김류가 비로소 그름을 깨닫고 대궐에 나아가 대죄하였다. ○ 이서(李曙)가 병으로 성을 잘 지키지 못하자, 원두표(元斗杓)로 대신 그 무리를 거느리게 하고, 황즙(黃緝)을 중군으로 삼았다. 《병자록》 ○ 17일에 좌의정 홍서봉(洪瑞鳳)ㆍ한여직에게 오랑캐의 진중에 가서, “왕자가 지금은 강화도에 있으니 데리고 돌아와서 보내려고 한다.”고 말하게 하니, 오랑캐가 답하기를, “반드시 세자라야 된다.” 하였다. 세자가 듣고 말하기를, “만일 일이 급박하면 신이 마땅히 나가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눈물을 흘렸다. 또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가서 대군으로 대신할 것을 청하도록 하였으나, 오랑캐 장수가 듣지 않았다. 사신이 돌아오니, 조정의 신하들이 서로 돌아보고 말을 못하고 있었는데, 장유가 먼저 소리치기를, “세자가 가셔야 합니다.” 하니, 대신들이 서로 그 말에 응하여 세자가 가야 한다고 의논을 결정하고 나오자, 김상헌이 체찰부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 “공들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나는 공들과 다시 한 하늘 아래 같이 살지 못하겠다.” 하였다. 김류가 도로 들어가 대죄하고, 상헌이 또한 청하여 들어가 김류를 면대하여 배척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지금은 서로 배척할 때가 아니니, 경들은 잠시 물러가고 서로 힐난하지 말라.” 하였으며, 세자가 이르기를, “서로들 힐난하지 말라. 내가 가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였다. 《잡기》 ○ 성중이 모두 굳게 지키면서 근왕병을 기다릴 것을 생각하였다. 임금이 성을 순시하고 친히 망월대(望月臺)에 거둥하여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더불어 싸우겠다.” 하고는 마침내 싸워 지킬 계책을 결정하고, 이어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유시를 내리기를, “내가 바야흐로 에워싸인 성 안에 있는데, 안으로는 믿을 만한 세력이 없고 밖으로는 개미새끼의 후원도 끊어졌으니 국가의 존망이 호흡하는 사이에 닥쳐 있는데, 적의 정세는 헤아릴 수 없고 화친하는 일은 이미 끊어졌으니, 경들은 급급히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들어와 구원하라.” 하였다. ○ 18일에 날씨가 잠깐 따뜻했다. 북문 대장 원두표가 장사들을 모집하여 성을 나가 오랑캐 순찰군을 쳐서 여섯 사람을 죽이니, 군사들이 조금씩 적을 칠 마음을 갖게 되었다. 나만갑(羅萬甲)을 관향사(管餉使)로 임명하였는데, 창고의 곡식은 다만 1만 6천여 섬이 있어 1만여 군사의 한 달 동안의 양식에 불과하였다. 이서가 일찍이 수어사가 되었을 때 군량을 많이 쌓았으나, 병으로 체직된 뒤에 광주 목사 한명욱(韓明勗)이 산성에 군량을 운반해 들여보내는 것이 민폐가 된다고 하여, 갑사창(甲士倉)을 강가에 짓고 군량을 모두 이 창고에 두었는데, 이에 이르러 모두 적에게 점거 당하였다. 성중에 저축한 양식 및 소금ㆍ간장ㆍ종이ㆍ베ㆍ병기 및 그 밖에 잡물은 모두 다 이서가 준비한 것으로, 이에 힘입어 사용하였다. 《병자록》 ○ 유백증(兪伯曾)을 협수사(協守使)로 삼아 백관들을 성첩에 나누어 소속하게 하였는데, 밤에 보니 오랑캐 군사들이 성 밖 가까이 4, 5리에 삥 둘러 복병하고, 곳곳에 불을 놓아 한밤중에야 꺼지고 혹은 밤새도록 꺼지지 않으며, 서쪽으로 바라보니 백 리쯤에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퍼져 가득 하였다. 9일 뒤에 불길이 비로소 꺼졌다.《난리잡기》 ○ 오시(午時)에 임금이 친히 궐문 밖에 거둥하여 신하들과 군사와 백성들을 모아놓고 애통한 하교로 타이르고 전후로 위리안치한 이하의 죄인들을 놓아주니, 들에 가득찬 신하 중에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임금이 이어서 신하들에게 각각 싸워 지킬 계책을 올리도록 하니, 전 참봉 심광수(沈光守)(심액(沈詻)의 아들)가 청하기를, “최명길의 나라를 그르친 죄를 목을 베어 군사와 백성에게 사과하고, 한편 김상헌을 정승에 임명하면 거의 군정(軍情)을 진복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임금이 답하지 않았는데, 조정의 몇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겁을 내어 몸둘 바를 모르고 얼굴 빛이 사색이 되었다. ○ 의창군(義昌君) 광(珖)과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임금을 뵙고 왕세자를 내보내자는 묘당의 주장을 통렬히 배척하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과 어전에서 함께 죽겠다고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묘당의 말이 그렇게까지 된 것은 아니니, 경이 또한 잘못 들은 것이다. 비록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묘당이 모두 취했으니 어찌하겠는가.” 하자, 익성이 아뢰기를, “어째서 취한 묘당을 쫓아버리고 취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쓰시지 않습니까.” 하였다. 승지 이경증(李景曾)이 아뢰기를, “바야흐로 바깥 인심이 모두 화친하자는 의논을 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사기를 진작시킬 기회입니다. 성중이 곤란을 받고 있지만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며, 남성(南城) 밖에 결진(結陣)하고 있는 적병은 반이 풀로 만든 사람이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성을 순시하면서 서장대(西將臺)에 가서 장수와 군사를 위로하였다. ○ 19일에 백제 시조 온조왕(溫祚王)(일찍이 이 성에 도읍하였다.)에게 제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구굉(具宏)이 군사를 모집하여 성을 나가는 적 20명을 죽이니, 딴 본에는 10여 명이라 되어 있다. 이로부터 응모하는 자가 자못 많아졌다. 체찰부(體察府)에서, ‘북곡성(北曲城)이 매우 허술한데, 협수사(協守使)가 미리 사대부를 사문(四門)에 분산시켰다.’ 하여 뜰에서 구타하고, 이어 백관을 시켜 합심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는 동시에 두 패로 나누어 서로 교체하도록 하였다. 《난리잡기》 ○ 이날 큰 바람이 불면서 비가 오려 하니, 김상헌에게 명하여 성황당에 제사를 지내게 하자, 바람이 즉시 그치고 비도 내리지 않았다. 《병자록》 ○ 20일에 오랑캐 역관 정명수(鄭命壽)(병자년에 포로가 된 사람.)가 남문 밖에 와서 화친을 의논하고자 하니, 김류가 문을 열고 중신을 보낼 것을 청하자, 나만갑이 아뢰기를, “성을 지키는 날에는 문을 열어서는 안 됩니다. 임금께서 만일 화친을 의논하면 사기(士氣)가 반드시 꺾일 것입니다.” 하여, 마침내 성 위에서 문답하도록 명하였다. 《병자록》 《잡기(雜記)》에는 “김신국이 나아가 보았다.”고 하였다. ○ 도원수와 부원수에게 유시를 내리기를, “남한산성이 포위된 지 이제 벌써 7일이 되었으니, 내가 이 외로운 성에 있으면서 위태롭고 급박하기가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들으니, 경들이 이미 대군을 거느리고 경기도 땅에 와 있다고 하는데 급급히 달려와서 군부(君父)의 위급함을 구하라.” 하였다. ○ 납서(蠟書 비밀 편지를 잔글씨로 써서 밀랍으로 뭉쳐서 몰래 전하는 것)로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유시를 내리기를, “군신 상하가 외로운 성에 붙어 있어 위태롭기가 한 오리의 터럭 같으니 급급한 형세를 경들도 상상할 것이다. 밤을 새워 달려와서 전후에서 합세하여 쳐서 기어이 적을 섬멸하여 군부의 위급함을 구하라.” 하였다. ○ 임금이 나만갑에게 묻기를, “ 양식은 며칠이나 지탱하겠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60일은 지탱할 만하니, 절약해서 쓰면 70일은 버틸 수 있습니다. 마두(馬豆)는 하루에 한 되이고 백관의 노비들은 겉곡식을 주며, 지금 남아 있는 양식은 1만 4천 3백여 섬이고, 장은 2백 2십여 독입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대가 맡은 일에 명맥이 걸려 있는 것이니 삼가고 조심스럽게 하도록 하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신국은 아뢰기를, “쌀과 콩이 아울러서 1만 8천 섬이고, 겉곡식이 5천 8백여 섬이니 겨우 다음 달 초순쯤 지탱하겠습니다.” 하니, 만갑이 아뢰기를, “군사가 1만 3천 8백 명이니 50일의 양식은 족히 됩니다.” 하였다. ○ 임금이, 사대부들이 밤을 새면서 성첩을 파수하느라 살이 얼어 터져 견디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전교하기를, “백관들은 낮에는 성첩에 올라가 지키고 밤에는 휴식하며, 일이 있는 때에는 모두 나뉘어 구하여 군사들로 하여금 함께 고생한다는 뜻을 알게 하도록 하라. 그리고 늙고 병든 이들은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니, 이 말을 협수사에게 말하라.” 하였다. 호종한 사람을 기록하여 입계(入啓)하도록 명하니, 4백여 명이었다. 백관이 3백 70여 명이고 종친이 27명이다. 당상관으로 낙후된 자는 11명이고, 종친으로서 낙후된 자는 3백여 명이었다. ○ 21일에 어영별장(御營別將) 이기축(李起築)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성(西城)을 나가 적 10여 명을 죽이고, 동성(東城)의 신경진(申景禛)도 조금 쳐서 죽였다. 이에 임금이 대청에 거둥하여 상을 내리고 먹을 것을 주니, 김신국이 아뢰기를, “임진의 난 때에는 군공청(軍功廳)을 설치하였으나, 지금은 체찰부의 일이 번다하여 전일하게 거행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임진난 때 법에 의거하여 따로 군공청을 두소서.” 하였다. 이경증(李景曾)이, 이조 참의 이경여(李敬輿)와 병조 참의 정기광(鄭基廣)에게 그 일을 전담시키고 군공청 당상으로 명명하도록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 법이 매우 좋으니 잘 의논해서 정해 함부로 상을 주는 폐단과 신용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 심열(沈悅)이 차자를 올려 화친하는 계책을 세우기를 청하니, 조정이 크게 격분하여 드디어 그 상소문을 불살라버렸다. 《잡기》 ○ 22일에 오랑캐의 사신이 또 와서 화친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북문의 어영군이 적 10여 명을 죽이고, 신경진이 또 30여 명을 죽였다. 《병자록》 ○ 협수사가 백관 중에 늦게 도착한 자 5명을 매 때리고, 군사를 모집하여 나가 싸우게 하였는데, 유학(幼學) 윤지원(尹之元)이 응모하여 먼저 나가서 철편(鐵鞭)으로 두 오랑캐 기병을 때려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겼다. 임금이 불러 보고 술을 내리는 동시에 육품 관직에 임명하였다. ○ 성중에 말 먹이 풀이 떨어져 말이 많이 굶어 죽으므로 말을 거둬들여 군사를 먹이었다. ○ 재신(宰臣)이 전직 관원에게 양식을 주지 말 것을 청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들이 이미 나를 따라왔는데, 있으면 같이 먹고 없으면 같이 굶어야지 어찌 주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잡기에도 이와 같다. ○ 23일에 사영(四營)에서 출병하고 임금이 북문에 거둥하여 싸움을 독려하니 각각 적을 죽여 공을 세웠는데, 우리 군사 중에서 사상한 자가 수십 명이 되었다. 오랑캐는 비록 전사하더라도 오랑캐의 법이 시체를 거두어 가는 것을 첫째 가는 공으로 삼았기 때문에 죽으면 곧 실어가 버려 적의 수급을 바칠 수 없으므로 죽인 적의 숫자를 명확히 아는 자에게는 수급을 바치는 것과 같이 상을 주었다. 어영군이 비로소 한 수급을 얻어서 군문에 매달아 놓으니 그 쓸쓸함을 비웃지 않는 이가 없었다. 《병자록》 ○ 임금이 성을 순시하는데 밤 삼경에 서쪽에 별들이 모여서 오래도록 한 큰 별을 둘러싸고 있다가 흩어져서 서쪽으로 향해 가버렸다. 《일월록》 ○ 24일에 짙은 안개가 끼고 비가 오니, 장수와 군사가 비를 맞아 젖고 심하게 얼었다. 이에 임금이 세자와 함께 뜰 한복판에 서서 비를 맞으며 하늘에 빌기를, “오늘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우리 부자가 하늘에 죄를 지은 탓입니다. 군사와 백성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하고, 곧 방석과 산양피(山羊皮) 이불을 걷어치우고 의창군(義昌君)이 드린 것이다. 또 백관의 말 안장 등속을 거두어 장수와 군사들에게 주었는데, 밤중에 비로소 비가 개고 또한 날씨도 심하게 춥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감동하여 울었다. 《병자록》 《잡기》 ○ 25일은 날씨가 몹시 차가웠다. 적이 소나무 가지와 잡목을 성 밖에 쌓아 6, 7일 동안 삥 둘러싸 한 외성(外城)을 이루니, 둘레가 1백여 리이고 높이는 서너 길이나 되었다. 《잡기》 ○ 소나무를 베어 성 아래 80보에 울타리를 벌여놓고 새끼줄로 쇠방울을 달아매어 넘는 자가 있으면 딸랑하고 소리가 나도록 하여 성 안과 밖으로 하여금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송책(松柵)이라 한다. 《병자록》 ○ 26일에 원주 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正吉)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서 금단(黔丹)에 진을 치니, 산성 안에서 구원병을 바라보고 대포를 쏘고 불을 들어서 서로 응하였다. 《잡기》 금단(黔丹)이 《병자록》에는 검단(劍端)이라고 되어 있다. ○ 묘당에서 오랑캐 진에 사신을 보내려고 하니, 나만갑(羅萬甲)이 말하기를, “일찍이 오랑캐가 재차 사람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는데도 응하지 않았다가 지금 만일 까닭 없이 사신을 보낸다면 적이 반드시, 비 온 뒤에 사졸들이 얼고 굶주려서 사세가 궁하여 사신을 보낸 것이라 생각할 것이니, 약한 것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김신국과 이경직에게 명하여 소와 술을 가지고 가는 한편 조그만 상자에 과실을 담아 가지고 오랑캐 진에 가도록 하니, 오랑캐가 말하기를, “우리 군중에서는 날마다 소를 잡고 술을 먹으며 보배가 산처럼 쌓여 있으니 이런 것을 무엇에 쓰겠는가. 너희 나라의 군신이 돌 구멍 속에 들어가 있어 굶주린 지 오래일 것이니, 자연 쓸 만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받지 않았다. 《병자록》 ○ 임금이 삼공에게 묻기를, “재신(宰臣)을 오랑캐 군영에 보내지 않으려 하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영의정이 아뢰기를, “사체가 중대한 듯하니, 재신을 먼저 보내는 것은 사리에 타당치 않습니다. 게다가 만일 재신을 보냈다가 혹시라도 구류당하는 일이 있게 되면 크게 국체를 손상하게 될 것입니다. 먼저 소와 술을 보낸다는 뜻을 마부대에게 통한 연후에 사신을 보내는 것이 타당합니다.” 하였다. 대사간 김반(金槃)이 아뢰기를, “소와 술을 보내지 마소서. 비록 보내더라도 재신을 시키지는 마소서.” 하니, 임금이 묻기를, “무신 가운데 누가 갈 만한가?” 하자, 김류가 이기남(李箕男)을 천거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항복(李恒福)의 아들을 사람들이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고 하는데, 이 사람은 어떠한가?” 하자, 우의정이 아뢰기를, “서자가 적자보다 낫다고 합니다. 또 단지 소와 술을 보낼 뿐이고, 반드시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지는 않을 것이니, 이 사람을 보낼 만합니다.” 하였다. 드디어 소 2마리와 술 10병을 보내라고 명하니, 다음날 기남이 가지고 오랑캐 군영에 갔다가 되돌려 보내자, 기남이 황겁하여 대답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 27일에 원주 목사 이중길(李重吉)이 소를 올려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고자 밤을 새워 달려온 뜻을 진달하였다. 이때에 성중에서는 날마다 구원병이 오기를 바라, 밤에는 성에 올라가서 사방을 바라보던 터였으므로 이에 이르러 성중이 서로 경하하였다. 임금이 가자(加資)하도록 명하였는데, 며칠 후에 적에게 패배하여 전군이 무너져 흩어졌다. 성에서 나온 뒤에 잡아다가 가자한 것을 깎기에 이르렀다. ○ 《병자록》 ○ 잡혀갔던 군사들이 돌아와 말하기를, “적의 포로가 된 자 중에서 연소자를 가려 머리를 깎고 갑옷과 말을 주어 선봉으로 삼고 늙은 사람은 나무 하고 물을 긷게 하며, 부녀자 중에 젊고 예쁜 이는 군중에 두고 늙고 추한 이는 불 때고 물 긷는 일을 시킨다.” 하였다. 《잡기》 ○ 28일에 술사(術士)가 말하기를, “오늘은 화친과 싸움이 모두 길하다.” 하니, 김류가 이 말을 믿고 한편으로는 화친을 청하고 한편으로는 접전하고자 하자, 나만갑이 박황(朴潢) 찬획사 에게 말하기를, “싸우려거든 싸우고 화친하려거든 화친할 것이지, 하루 안에 화친과 싸움을 어찌 같이 할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진실로 노래와 곡을 같이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였다. 《병자록》 ○ 29일에 날씨가 잠깐 화창하니 군사들의 얼굴에 생기가 났다. 김류가 동서남북 네 성의 장수를 불러 명하기를, “남성(南城) 아래에 적의 진영이 매우 엉성하니, 각각 정예군을 내어 무찌르도록 하라.” 하니, 네 장수가 모두 그 계책이 잘못된 것을 역설하였는데 김류가 듣지 않고 친히 장졸을 거느리고 북문에 앉아 대장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병기를 휘두르면서 싸움을 독려하였다. 성 아래에는 개울이 굽이져 있었는데 오랑캐의 기병이 곳곳에 매복한 채 겉으로는 고군(古郡) 남쪽 4, 5백 보 거리로 물러가서 군사와 소ㆍ말을 약간 머물려 주둔시켜 놓고 유인하였다. 김류가 깃발을 휘두르며 진군할 것을 명령하니 우리 군사가 서로 버티면서 산에서 내려가려 하지 않자, 김류가 비장(裨將) 유호(柳瑚)를 시켜 나가지 않는 자를 목베게 하였다. 이에 유호가 만나는 사람마다 함부로 찍어 죽이니, 온 군사가 내려가면 반드시 죽을 것을 알면서도 내려가는데, 별장(別將) 신성립(申誠立)은 사람들과 영결(永訣)하고서 가기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들이 그들의 남겨둔 소와 말을 취하는데도 적들은 못 본 체하고 있다가, 우리 군사가 송책(松柵) 밖으로 다 나온 뒤에야 비로소 적이 말을 채찍질하여 나는 듯이 돌격해 들어오고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나 곧장 우리 군사의 앞뒤를 끊었다. 이에 우리 군사는 총 한 방, 화살 한 번도 쏘지 못한 채 순식간에 짓밟혀 죽은 자가 거의 2백 명이고 신성립(申誠立)과 지여해(池如海)와 이원길(李元吉) 등도 모두 죽었는데, 오랑캐 군사로 죽은 자는 다만 두 사람뿐이었다. 처음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송책을 불사르면 군사가 진격하는 데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하니, 김류가 불사르도록 명하여 송책을 이미 불살라 버렸으므로 오랑캐가 우리 군사를 공격하는 데 더욱 거칠 것이 없었다. 또 처음 접전할 때에 군사들에게 화약을 많이 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시끄럽더니, 접전이 벌어진 다음에야 어느 겨를에 화약을 청하겠는가. 다만 화약통을 서로 두들길 뿐이었다. 산 언덕이 험준하여 이미 갑자가 올라가기 어려웠고 깃발을 휘두르면서 퇴군하였으나 성이 막혀 있어 보지 못해 마침내 모두 섬멸되기에 이르렀다. 유호가 또 초관(哨官)에게 죄를 돌려 퇴군하지 못했다 하여 베어 죽이니,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게 여겼다. 김류가 허물을 돌릴 곳이 없자 원두표가 구원하지 못한 탓이라 변명하여 장차 사형에 처하려 하자, 홍서봉이 말하기를, “수장(首將)이 군율을 어기고서 부장에게 죄를 돌려서야 되겠는가.” 하자, 김류가 마지못해 대궐에 엎드려 대죄하고, 원두표의 중군을 매 때려 거의 죽게 하였다. 처음에 정예 군사를 모두 체찰부에 예속하였는데, 사상자가 적어도 3백 명에서 내려가지 않았는데도 사실대로 보고하기를 싫어하여 40명이라 아뢰니, 이로부터 사기가 떨어지고 묘당에서도 또한 화친하는 것에 전념하게 되었다. 《병자록》 《잡기》 ○ 이에 앞서 중 4, 5명을 뽑아서 산길을 따라 몰래 각 도에 가서 유시하도록 하였는데, 이 무렵에 한 중이 돌아와 충청 감사 정세규(鄭世規)의, “신이 마땅히 죽기를 무릅쓰고 군사를 이끌겠습니다.”고 한 장계를 올렸다. 또 말하기를, “세규가 산성의 위급한 상황을 듣고는 눈물을 흘리고, 임금께 바치는 음식이 맛을 갖추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는 이때 성중에는 닭조차 한 마리도 없었다. 닭을 3마리 잡아가지고 부탁하기를, ‘어떤 일이 있더라도 꼭 바치라고 하였는데, 충청 병사 이의배(李義培)가 곧 닭을 굽고 술을 데워 마시면서 말하기를, ‘성중의 위급한 사정은 묻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으나, 나도 또한 어찌할 수가 없다.’ 하고, 막연히 진군시킬 뜻이 없었습니다.” 하였다. 《잡기》 ○ 유도대장(留都大將) 심기원(沈器遠)이 장계를 올리기를, “호조 참의 남선(南銑)과 어영별장 이정길(李井吉)로 더불어 밤중에 애고개(阿古介) 서경우(徐景雨)의 집 근처에 주둔한 적 4, 5백 명을 공격하여 쳐 죽인 것이 자못 많습니다.” 하니, 곧바로 기원을 하사도 도원수(下四道都元帥)로 삼고, 정길은 가자하였는데, 뒤에 들으니, 이른바 적을 격파했다는 것은 말과 사실이 서로 맞지 않았다. 기원이 남선과 함께 호조의 물건을 삼각산에 운반해 둔 것을 모두 적에게 빼앗기고 적의 추격이 또 급하니, 기원은 걸어서 광릉(光陵)으로 갔다가 이어 양근(楊根) 미원(彌原)으로 들어가 적의 칼날을 피한 채 끝내 근왕(勤王)하지 않았다. 《병자록》 ○ 《잡기》에는 30일로 되어 있다. ○ 이때에 각 도의 감사와 병사가 한 사람도 들어와 구원하는 자가 없었는데, 세규만이 홀로 적의 칼날과 충돌하여 서로 바라보는 지점인 광주(廣州) 검단산성(儉丹山城)에 와서 진을 치고 있다가 마침내 적에게 패하여 만번 죽을 뻔하다가 겨우 살았다. 나만갑이 매양 임금에게 아뢰기를, “전하의 신하 중에는 단지 정세규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밖에는 원수 이하가 모두 군부의 위급함을 앉아서 보고만 있고 근왕에는 뜻이 없으니, 모두 마땅히 군율에 연좌시켜야 합니다. 일이 평정된 뒤에는 사람들이 모두 구원해 주어 법대로 죄주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성에 있을 때에 미리 사형을 정해 성에서 나간 뒤에 모두 베소서.” 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병자록》 ○ 임금이 수어사 이시백(李時白)을 불러 이르기를, “성중의 모든 것이 미비한 것이 많이 있는데, 어찌하여 경은 임무를 맡은 후에 다 조처하지 않았는가?” 하니, 시백이 대답하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와 같으니 신의 죄가 만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러나 신이 임무를 맡은 초기에 오늘의 걱정이 있을까 염려하여 체찰부에 청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면 먼 고을의 군사들이 미처 모이지 못할 것이니, 경기의 각 고을부터 나누어 소속시키자.’ 하였으나, 체찰부가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합동으로 훈련하여 신지(信地)를 정하고 이어 수리하기를 청하였으나, 또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어쩔 수 없이 소속된 군사를 가지고 교대도 없이 밤에도 훈련하여 이제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하였다. 김류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좌의정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을 천거한 것은 대감이 한 것이니, 성을 잘 지키는 것도 대감의 공이며 성을 전복시키는 것도 대감의 죄이다.” 하고, 이내 다른 일을 핑계로 시백을 잡아다가 특별한 곤장으로 매를 때려 피가 흐른 뒤에야 그치니,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시백은 조금도 분통하게 여기거나 원망하는 기색이 없었다. ○ 백관의 급료를 비로소 7분으로 감해 주었다. 《잡기》 ○ 김신국이 매양 임금을 뵙고 번번이 싸울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마땅치 않게 여겼는데, 또 김류와 더불어 병사를 의논할 때 싸울 것을 힘껏 청하자 김류가 화를 내면서 말하기를, “공은 어찌하여 이 자리(정승)를 차지했으면서 이 적을 물리치지 않는가?” 하니, 신국이 웃으면서 일어나 말하기를, “이제 포위당한 성 안에 있으니 마땅히 힘을 합하고 마음을 같이 하여 나라 일을 구해야 할 것인데, 대감이 대장으로 있으면서 남의 말을 이처럼 거절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모든 훈신(勳臣)들이 기뻐하지 아니하여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김신국의 지혜로써 이 적을 대적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 않는데도 싸울 것을 주장하고 화친을 배척하는 것은 명예를 사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신국을 꾸짖기를, “경이 맡은 바 임무는 양식인데 어째서 싸움을 말하는가?” 하자, 신국이 아뢰기를, “만일 양식이 반년만이라도 지탱할 수 있다면 어찌 감히 싸움을 말하겠습니까마는, 신이 계산해 보니 겨우 한 달 양식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참새를 그물질하고 땅을 파서 쥐를 잡는 지경에 이르면 아무리 싸우려고 해도 싸울 수 있겠습니까. 어리석은 신은 사졸들이 아직 굶주리지 않았을 때에 성을 등지고 한번 싸워서 존망을 결정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염헌집》 ○ 30일에 적이 광나루와 마전나루[麻田渡]와 헌릉(獻陵)의 세 길로 행군하여 해가 뜰 무렵에 시작하여 해질 때에 그쳤는데, 풍세가 크게 일더니 적이 그치자 바람도 그쳤다. ○ 행궁(行宮) 근처에 남작(南鵲 집의 남쪽에 서 있는 나무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길조 까치)이 집을 지으니, 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고 길조라 점쳤는데 성중에서 믿는 바는 단지 이것뿐이었다. ○ 문관 이광춘(李光春)이 성에 들어온 처음에 소를 올리기를, “늙은 어머니가 천안(天安)에 있으니, 원컨대 호서로 가서 곡식을 모집하겠습니다.” 하였으나, 적의 포위가 더욱 엄밀하므로 나갈 수가 없었다. 이에 이르러 비변사에 와서 전의 상소를 도로 찾아가기를 청하니, 그 까닭을 묻자, 답하기를, “상소문 가운데 적(賊)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것이 두렵다.” 하니, 사람들이 모두 배를 잡고 웃었다. 《병자록》 ○ 경상 병사가 진군한다는 장계가 비로소 도착하였다. ○ 점심 때에 금단산 위에 포소리가 크게 일어나는 것이 들렸다. ○ 협수사(協守使) 유백증(兪伯曾)이 병이 들어 나만갑이 대신하여 그 임무를 살폈다. ○ 성중에 온갖 것이 다 군색해지고 말과 소가 모두 죽었으며 살아 있는 것은 굶주림이 심하여 서로 그 꼬리를 뜯어 먹었다. ○ 이때 임금이 침구가 없어 옷을 벗지 않고 자며 밥상에도 다만 닭다리 하나를 놓으니, 전교하기를, “처음으로 들어왔을 때에는 새벽에 뭇 닭의 울음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그 소리가 전혀 없고 어쩌다 겨우 있으니 반드시 이것은 나에게만 바치는 까닭이다. 앞으로는 닭고기를 쓰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 적진 가운데에 부녀자들이 무수히 있었고 진 밖에는 어린아이의 시체가 너무나 많았는데, 대개 당초에 사족(士族)들과 민간의 부녀자들이 엎어지고 자빠지면서 걸어 나와 멀리 가지 못하였고, 이어 화친을 맺는다는 말을 듣고는 말이 있어서 피난갈 만한 사람조차 멀리 가지 않았다가, 16일 이후에 적이 죽이고 노략질을 자행하는 바람에 모두 화를 면치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 어미는 몰아다가 진중에 들여놓고 그 아이는 내버린 것이었다. 《잡기》 ○ 정축년(1637) 1월 1일에 광주 목사 허휘(許徽)가 쌀떡 한 그릇을 바치니, 백관에게 나누어 보냈다. ○ 선전관 위산보(魏山寶)에게 오랑캐의 진중에 말을 전하게 하였는데, 처음 적진 속에 이르자마자 적에게 상투를 잡혀 끌려가니, 다른 오랑캐가 만류하였다. 돌아와서 보고할 때에 너무 겁을 먹어 정신이 없어 본심을 잃었다. 김신국과 이경직이 계속해서 적진에 가니, 오랑캐가 말하기를, “한(汗)이 어제 나와서 바야흐로 산성의 형세를 순시하고 있으니, 이 뒤의 일은 우리가 알 바가 아니다. 한이 진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오라.” 하였다. 동성(東城) 밖을 보니 두 개의 누런 양산과 두 개의 큰 깃발을 벌리고 총포를 쏘고 북을 치면서 산 위를 다니더니 날이 기울어질 무렵에야 비로소 돌아가는 것이었다. 다시 사람을 보내 물으니, 답하기를, “내일 다시 오라.” 하였다. 《병자록》 《잡기》 ○ 금단산 위에 사람 소리가 끊어졌다. 이에 오랑캐가 말하기를, “금단의 장수가 누구인가. 내가 이미 격파하였다.” 하였다. 충청도의 군사와 도원수가 또한 이미 패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잡기》 ○ 2일에 홍서봉ㆍ김신국ㆍ이경직이 가서 화친하기를 청하니, 오랑캐가 맹약을 어긴 것을 책하고,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의 문서를 보니, 모두 우리를 노적(奴賊)이라 칭하였다. 우리가 누구의 종[奴]인가. 우리의 행사는 光明正大하니 누가 감히 적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누런 종이에 쓴 것을 조유(詔諭)라 명명하고 상 위에 내놓고 서봉 이하로 하여금 먼저 사배(四拜)를 행하게 하고 그 글을 받들고 돌아가도록 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에, “대청국 관온인성황제(大淸國寬溫仁聖皇帝)는 조선 국왕에게 조유하노라. 너희 나라가 명 나라에 협조하여 우리나라를 괴롭히고 해롭게 하므로 짐이 크게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켰으니, 일찍이 또한 강한 것을 믿고 약한 것을 능멸하여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킨 것인가. 그런데 근래에 와서는 무슨 까닭으로 도리어 너희의 변방을 지키는 신하에게 유시하기를, ‘부득이하여 임시 방편으로 화친을 허락하였으나, 지금은 정의로써 결단하니 경은 모든 고을에 효유(曉諭)하여 충의의 선비로 하여금 각자 책략을 바치도록 하고 용감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정벌에 참가하게 하라.’는 등의 말을 하였는가. 이제 짐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싸우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말대로 지모 있는 자에게 계책을 바치게 하고 용감한 자로 하여금 정벌에 참가하게 하여 몸소 한번 싸워보지 않는가. 군사를 일으키게 한 발단도 또 너희 나라에서 먼저 한 것이다. 짐은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서 대접하였거늘 너희는 더욱 배반하여 스스로 원수가 되어 생민을 도탄에 빠지게 하고 성을 버리고 궁전을 버리고 처자를 흩어지게 하게 하되 서로 돌아보지도 못한 채 겨우 단신으로 도망쳐 산성에 들어가 있으니, 설사 목숨을 천 년 동안 연장한들 어찌 유익하겠는가. 정묘년의 욕됨을 씻고자 하다가 스스로 화를 초래하여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기게 되었으니, 이 욕됨을 또 장차 무엇으로써 씻겠는가. 짐의 모든 신하들이 짐에게 권하여 황제라 칭한 것이거늘, 너희가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우리나라 군신이 차마 들을 바이겠는가.’ 하니, 이 말이 또한 방자하고 망녕되다. 이제 짐이 대군을 끌고 와서 너희의 팔도를 멸할 터인데, 너희가 아비처럼 섬기던 명 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겠는가. 어찌 자식이 거꾸로 매달린 듯 위급한데 아비로서 구원하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 밖의 흉하고 패역한 말을 모두 다 기록하지 못한다. 《병자록》 《잡기》 ○ 3일에 최명길과 이식(李植)과 장유(張維)가 회답하는 글을 지었는데, 최의 글이 더욱 공손했기 때문에 이것을 채택하였다. 그 글의 대략에, “조선 국왕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에게 말씀을 올립니다. 소방(小邦)이 대국에 죄를 지어 스스로 병화(兵禍)를 초래하여, 몸은 외로운 성에 깃들고 위태함이 조석에 박두한지라, 사신을 보내 글을 받들어서 마음속의 정성을 전달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칼과 창으로 막히고 끊겨 스스로 통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제 들으니 황제께서 궁벽하고 누추한 땅에 나왔다고 하니 반신반의하며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됩니다. 이에 대국이 옛 맹약을 잊지 않고 밝게 가르침과 책망을 내려 스스로 죄를 알게 하니, 이것은 정말 소방의 심사를 알릴 수 있는 때입니다. 변방 백성들이 삼을 캔 것과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때의 일은 비록 소방의 본정은 아니나 의심과 오해가 쌓임을 면치 못하였고, 작년 봄 사이의 일에 이르러서는 소방이 진실로 그 죄를 사양치 못할 것이 있습니다. 소방의 신민이 식견이 얕고 좁아 명분과 의리를 고집하여 끝내 사신이 화를 내고 지레 돌아가게 만들었고, 대군이 장차 올 것이라고 위협하므로 소방의 군신이 지나치게 염려함을 면치 못하여 변방 신하들에게 신칙하였으니, 지난 날의 일은 소방이 이미 그 죄를 압니다. 죄가 있으면 정벌하고, 죄를 알면 용서하는 것, 이것은 대국이 하늘의 마음을 본받아 만물을 용납하는 것이니, 만일 정묘년에 하늘에 맹세하던 약속을 생각하고 소방의 백성들의 목숨을 불쌍히 여겨 혹시라도 소방으로 하여금 마음을 고쳐 스스로 새롭게 되게 해주신다면 소방이 나쁜 마음을 씻고 따르고 섬기는 것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반드시 싸움으로 결판내고자 한다면 소방은 시세가 극도에 달하여 죽음으로써 스스로 기약할 따름입니다.” 하였는데, 받지 않았기 때문에 고쳐지었다. 《병자록》 《잡기》 ○ 김류가 최명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 뜻은 그대와 다를 것이 없으나, 다만 선비들의 공론은 어찌하겠는가?” 하니, 명길이 말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만고의 죄인이 될지라도 차마 임금을 반드시 망할 땅에 둘 수는 없으니, 오늘의 화친은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홍서봉과 이경직으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가게 하였더니, 오랑캐가 답하기를, “몽고왕과 모든 왕자가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서로 의논하여 다시 통지하리라.” 하였다. ○ 이서가 죽으니 장수와 군사가 슬퍼하는 모습이 없고 심지어는 이서가 죽었으니 회복을 바랄 수가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이서의 성품이 괴팍스럽고 아랫사람의 마음에 통하지 못하여 오랫동안 인심을 잃음이 이에 이르렀다. 《잡기》 임금이 통곡하고 명주 5필과 관판(棺板)을 주고 7일 동안 소찬(素饌)을 하고, 그 사위 채유후(蔡裕後)로 하여금 호상하고 염습하도록 하였다. 《일월록》에는 2일에 들어 있다. ○ 이때 적 5, 6명이 순찰하다 성 밖에 이르렀는데 훈련원 주부 장성인(張性仁)이 포를 쏘아 세 적을 죽였다. 다른 본에는 2명의 적으로 되어 있다. 임금이 이르기를, “한 번 쏘아 셋을 죽였으니 쾌하도다.” 하고, 특별히 훈련원 첨정을 제수하였다. 《잡기》 《일월록》 ○ 대사헌 김수현(金壽賢)이 아뢰기를, “오늘 적에게 답서를 보낸다고 하는데 만일 공손한 언사를 쓰면 반드시 한층 더할 것이니 어떻게 끝맺겠습니까. 일이 망극하게 된 것이 부득이한 데서 나온 줄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다만 염려되는 것은, 적의 마음이 바야흐로 교만하니 문득 공손한 언사를 더하면 어찌 더욱 망극(신이라 칭하는 것)한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그들이 이미 회답하라 하였으니 마땅히 답서를 만들어 그 뜻을 볼 뿐이다.” 하였다. 장령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만일 보존을 도모하는 길이 있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다만 다시 한층을 더하여 나와 맞으라고 한다면 결코 따를 수 없으니, 따르지 않은 뒤에는 이 일이 모두 허사가 될 것입니다. 이 경우에 이른다면 차라리 바른 것을 지키다가 죽어서 임금은 사직을 위해 죽고 신하는 임금을 위해 죽더라도 또한 무엇을 한하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나도 그와 같이 생각하지만, 위로는 종묘와 사직을 염려하고 아래로는 부형[宗親]과 백관과 허다한 신민을 생각하여 우선 이 답서를 보내 그 뜻을 알아내려는 것이니, 단지 일찍 죽지 못한 것이 한이다.” 하였다. ○ 4일에 유백증(兪伯曾)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무릇 남의 신하가 된 자는 반드시 평소에 충성을 다해야만 난에 임해서도 힘을 얻을 수 있다. 만일 환란을 그치게 하고 평정하는 사업을 평소에 무위도식하는 무리에게 맡긴다면 이는 거울을 등지고서 비치기를 찾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모든 대신들이 나라를 그르친 죄상은 신이 올린 을해년의 상소에 다 말씀드렸습니다. 지금 대신에서 전후로 오래 정승 지위에 있는 자는 오직 윤방(尹昉)과 김류뿐인데, 윤방은 조당(朝堂)에서 자리나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이 비웃거나 욕하거나 불고하고 몸이나 용납받고 지위나 보전하여 이럭저럭 날이나 보내고, 지난해에 용골대가 왔을 때에도 정부의 수반 자리에 있으면서 형편없게 처사하여 싸움의 실마리를 만들었으니, 오늘의 변은 실로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김류는 겁이 많고 꾀가 없으며 시기가 많고 괴팍스러워서 제 고집대로만 하고, 권세는 장수와 정승을 겸하여 뇌물이 폭주하여 저택이 크고 사치스럽고 재화가 풍부하고 넉넉한 것은 비록 전날(광해조 때)의 삼창(三昌 박승종ㆍ유희분ㆍ이이첨을 말함)이라도 그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만과(萬科 무사 만 명을 뽑는 과거)의 설치는 임금의 뜻이 없었는데도 힘써 청하여 시행하였는데, 두 번째 시험에 신용을 잃어 크게 서도(西道)의 인심을 잃었고, 적의 군사가 몰려 닥쳐옴에 미쳐 전하께서는 창황히 도성을 버려 일행의 인마(人馬)와 시위 장수와 사졸이 모양을 갖추지 못하였는데 김류는 짐바리가 60여 필이나 되고 부인은 가교(駕轎)를 탔습니다. 남한에 머무른 날에 임금에게 권하여 미복(微服)으로 몰래 강화로 가게 하였으니, 만일 전하께서 성을 나갔다가 도로 들어오지 않았다면 일이 차마 말하지 못할 바가 있었을 것입니다. 동궁을 모시고 청성(靑城)에 간다는 말이 또 그의 입에서 나왔으니, 남의 신하된 자의 분의(分義)가 어찌 이렇게도 없습니까. 싸움하느냐 화친하느냐 양단 사이에 우물쭈물 하면서 결단하지 못하고 적병을 구경만 하고 시일을 보내다가 군사는 지치고 기운은 꺾여 추한 오랑캐에게 글을 올려 화친을 구걸해도 하지 못하니, 오늘의 일을 어찌 차마 말하겠습니까. 이 두 신하는 모두 베어야 하니, 이 두 신하를 베고 또 애통의 교서를 내려, 사방의 군사의 마음을 감동시키면 큰 위엄이 저절로 서고 큰 의리가 스스로 밝아지고 군율이 자연히 행해질 것이니, 우리가 어찌 갑자가 오랑캐보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취헌소차(翠軒疏箚)〉 ○ 김류가 장차 절로 피하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이 때를 당하여 어찌 혐의를 피할 수 있겠는가.” 하고, 이어 백증의 직을 파면하고 이목(李楘)으로 대신하여 협수사를 삼았다. 《병자록》 《잡기》 ○ 선전관 민진익(閔震益) 등이 나가서 유지를 충청도의 진영에 전하고 돌아왔다. 임금이 이르기를, “담력이 많아 쓸 만하다.” 하고, 칼을 하사하고 통정대부로 올렸다. 《잡기》 ○ 5일에 남병사(南兵使) 서우신(徐祐申)과 감사 민성휘(閔聖徽)가 원수의 처소에 이르고, 전라병사 김준용(金俊龍)이 와서 광교산(光交山)에 머무르고, 감사 이시방(李時昉)이 직산(稷山)에 이른다는 장계가 들어왔다. 《병자록》 《잡기》 ○ 6일에 크게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며 낮에 큰 안개가 껴서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었다. 평안 병사 유림(柳琳)과 부원수 신경원(申景瑗)과 함경 감사 민성휘(閔聖徽)와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의 장계가 들어오고, 강화도의 아전 한여종(韓汝宗)이 두 대군(大君)의 편지와 분사(分司)의 장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병자록》 《잡기》 ○ 7일에 원수 김자점이 광릉(光陵)에 이르러 장계를 올리고, 전라 감사 이시방이 양지(陽智)에 진군하여 장계를 올리기를, “통제사 윤숙(尹璛)에게 통문을 보내 그로 하여금 군사를 보내도록 하고, 승장(僧將) 각성(覺性) 등이 승군 1천 명을 뽑아서 장차 전진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였다. ○ 8일에 날씨가 청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축하하였다. 관상감이 말하기를, “복덕성(福德星)이 조선을 지키고 있으니 사람이 반드시 다 죽기에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잡기》 ○ 모든 장수들이 항상 진군한다고 일컫지만 머뭇거리면서 나아가지 않고, 김자점은 군사를 이끌고 미원(薇原)에 있으면서 들어와 구원할 뜻이 없으므로 좌랑 윤지원(尹之元)으로 독전관(督戰官)을 겸하게 하여 원수의 진으로 보냈다. 《잡기》 ○ 9일에 오랑캐가 산성의 안과 밖이 서로 통하고 있음을 깨닫고 송책(松柵)을 지키기를 더욱 엄중하게 하니, 이로부터 장계가 또한 들어올 수가 없었다. 《잡기》 ○ 10일에 김상헌에게 명하여 온조묘(溫祚廟)에 제사를 지냈다. 별장 김언림(金彦琳)이 밤에 성을 나가 두 사람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니, 김류가 나와 앉아 그 목을 받고, 임금이 상으로 면주(綿紬) 3필을 주고 그 목을 군문에 매달도록 명하였는데, 머리에 한 점의 피도 없어 사람들이 자못 괴이하게 여겼다. 조금 있다가 어떤 원주(原州) 장관이 그 머리를 빼앗아 품안에 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형님이여, 어찌 두 번 죽는 데 이르렀습니까.” 하였다. 지난 번 북문 싸움에서 적의 칼날에 죽은 자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드디어 언림을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베었다. 《병자록》 《잡기》 ○ 11일에 예조 판서 김상헌이 아뢰기를, “사람이 궁하면 근본으로 돌아가는 법이니, 숭은전(崇恩殿)의 영정에 몸소 제사지내소서.” 하니, 원종(元宗)의 영정을 개원사(開元寺)에 봉안하였다. 임금이 따랐다. 성중에 까막까치가 없었는데 이날 성안으로 많이 들어오니, 사람들이 모두 길한 징조라고 말하였다. 《병자록》 ○ 오랑캐에게 붙잡혔다가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이 전하기를, “남양수(南陽守) 윤계(尹棨)가 그의 할머니와 함께 모두 적의 칼날을 면치 못하였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윤계가 일찍이 귀화한 오랑캐를 단속한 일이 있었는데 귀화한 무리들이 적병을 청하여 해치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아우 윤집(尹集)은 전한 사람이 잘못 전한 것이라고 핑계대고 화려한 옷을 입고 다른 사람과 더불어 희롱하니, 사람들이 모두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다. 《잡기》 ○ 12일에 홍서봉ㆍ최명길ㆍ윤희ㆍ허한(許僴)이 두 번째 글을 가지고 가니, 오랑캐가 말하기를, “새로 장수가 또 오고 지금 이미 날도 저물었으니 내일 다시 서문으로 오라.” 하였다. 나만갑이 장유에게 말하기를, “화친을 맺자는 말은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니, 한결같이 애걸만 해서는 결코 청하는 대로 될 리가 없다. 마땅히 이해(利害)로써 말하면 혹 저들을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하니, 장유가 그렇다고 하고, 그 말대로 초안을 잡아서 부제학 이경석(李景奭)으로 하여금 입대(入對)하여 그 사유를 진달하게 하였다. 임금이 김류와 함께 취해 보고, 최명길이 지은 글이 대부분 애걸을 위주로 하였으므로 그 글을 쓰기를 청하므로 채용하였다. 이때에 밖으로부터의 구원이 이미 끊어져 사람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도망하는 자가 계속해서 생겼고, 당초에 단단히 마음먹고 싸워서 치자고 하던 자들도 말하는 바가 없었다. 대간이 다만 장유가 지은 글을 쓰기를 청하였다. 김상헌과 정온(鄭蘊)이 말하기를, “군사가 모두 죽고 사대부가 다 죽은 후에 빌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자록》 《잡기》 ○ 13일에 적의 군사가 사방으로 모여들어 서쪽 교외에 진을 치니, 홍서봉 등 7명을 보냈다. 적의 장수 등이 국서를 받고 묻기를, “맹약을 어긴 잘못이 우리에게 있는가, 너희 나라에 있는가?” 하자, 명길이 가슴을 때리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임금의 뜻이 아니고 바로 신하들의 죄이니, 칼로 찔러 창자를 꺼내 우리 군신(君臣)의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하니, 적의 장수가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서는 어찌하여서 한번 싸워보려고 하지 않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소방(小邦)이 어찌 감히 대국과 더불어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그 글의 대략에, “형이 아우를 대하는 데 있어서 죄과가 있는 것을 보았으면 노하여 책망하는 것은 진실로 마땅하나, 만일 책하기를 너무 엄중하게 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에 어그러지는 것이 있을 것이니, 어찌 상천(上天)이 괴이하게 여기는 바가 되지 않겠습니까. 소방이 바다의 한 구석에 치우쳐 있어서 오직 시서(詩書)만을 일삼고 군사는 익히지 못하였으니, 약한 것이 강한 것에 복종하는 것은 이치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대대로 명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서 명분(名分)이 정해졌습니다. 일찍이 임진왜란에 있어서는 소방이 조석간에 망하게 되니 신종(神宗)이 천하의 군사를 움직여 우리 백성들을 물불의 위험 속에서 건져주어 소방 백성들이 지금껏 뼈에 새겨 차라리 대국에 죄를 얻을지언정 차마 명 나라를 저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명 나라에서 두터운 은혜를 베풀어서 사람을 감동시킨 것이 깊은 까닭입니다. 은혜를 남에게 가하는 것에는 한 가지 길뿐이 아니니, 진실로 그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주고 그 종묘 사직의 위태로움을 구원해 준 데에는 군사를 발동하여 환난을 구원해 주는 것(명 나라)이나, 군사를 회군하여 생존을 도모하여 주는 것(청 나라의 회군)이 그 일은 비록 다르나 그 은혜는 한가지입니다. 군신과 부자가 오래 외로운 성에 처하여 그 군색함이 또한 심하니, 진실로 이때에 대국이 생각을 돌이켜 허물을 용서하여 우리가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있는 길을 허락해 준다면, 소방의 군신은 마음에 깊이 새기고 감사히 받들 것이요, 천하가 이것을 들으면 대국의 위신에 복종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자록》 ○ 14일에 백관과 하인의 양식을 반 되씩 감하고 군졸에게는 7홉을 감하였는데, 이는 대개 창고의 곡식이 점점 다 되어 겨우 20일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 앞서 적이 강릉(康陵)과 태능(泰陵)을 불지르고 또 헌릉(獻陵)을 불질러 곳곳에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덮으니 참혹한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병자록》 《잡기》 ○ 15일에 심기원(沈器遠)과 민성휘(閔聖徽)의 군관이 장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군관이 말하기를 “미원(薇原)의 군사가 1만 7천입니다.” 하였다. ○ 늦겨울의 혹독한 찬 기운이 전에 없던 것이었다. 적이 움직이면 바람이 일어나고 적이 정지하면 바람이 그치며 초겨울에 온 눈이 지금까지 녹지 않았는데, 장수와 모든 군사들이 항상 한데 거처하여 얼굴빛이 푸르고 검어서 사람의 형상 같지 않고 살이 터지고 손가락이 빠져 참혹함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잡기》 ○ 16일에 홍서봉 등이 오랑캐의 진중에 가서 국서에 대해 지금까지 회답이 없는 이유를 물으니, 용골대와 마부대가 말하기를, “공유덕과 경중명의 두 장수가 당병(唐兵) 7만을 거느리고 28병(柄)의 홍이포(紅夷砲)를 싣고 장차 강화도를 침범할 것이다.” 하였다. 적이 흰 깃발에 초항(招降)이란 두 글자를 써서 남별대(南別臺)의 밖 망월대(望月臺) 아래에 세웠는데 바람에 꺾였다. 《병자록》 《잡기》 ○ 17일에 날씨가 조금 화창하였다. 적이 서봉 등을 불러내어 답서를 받게 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에, “짐이 보낸 춘신사(春信使)와 추신사(秋信使)를 대하여 이르기를, ‘너희 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싸움의 실마리를 만들었으니 이제 장차 치러 가겠다.’ 하였으니, 대개 분명히 일러서 보낸 것이지 속임수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또 너희가 맹약을 깨뜨리고 불화의 실마리를 열어놓은 일을 갖추어 써서 하늘에 고한 뒤에 군사를 일으켰으니, 너희가 실지로 맹약을 어겼기 때문에 하늘이 재앙을 내리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어째서 도리어 막연히 서로 관계가 없는 자로서 오히려 하늘[天]이란 한 글자로 견강부회하느냐. 기미년에 까닭 없이 우리를 침범했을 때 짐은 너희 나라가 반드시 군사 일에 익숙하다고 생각하였고, 이제 또 싸움의 실마리를 열기에 너희의 군사가 반드시 다시 정예하게 단련된 줄 알았지, 누가 아직도 익히지 못했다고 생각이나 했겠는가. 너희 나라의 환난을 구할 자는 다만 명 나라뿐이니 천하의 모든 나라의 군사가 어찌 모두 다 이르겠는가. 곤궁하게 산성을 지키면서 운명이 조석에 달려 있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 알지 못하고 이런 빈 말을 하니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천지의 도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고 사악한 사람에게 화를 내려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다. 짐이 천지의 도를 본받아 마음을 기울여 귀순하는 자는 어루만지고 길러주고, 바람을 따라 항복을 청하는 자는 안전하게 해줄 것이지만, 명을 거스르는 자는 천명을 받들어 토벌하고 악한 당이 되어 칼날을 건드리는 자는 베고 완악한 백성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는 사로잡아서 뻣뻣한 자로 하여금 경계할 줄 알게 하고 교활하고 간사한 자로 하여금 말이 막히도록 하는 데 힘쓸 것이다. 지금 너희가 짐과 더불어 대적하는 까닭에 군사를 일으켜 이곳에 이르렀지만, 만일 너희 나라가 모두 짐의 판도(版圖)에 들어온다면 짐이 어찌 기르고 안전하게 하여 사랑하기를 어린아이와 같이 하지 않겠는가. 지금 너희가 살려고 하는가? 마땅히 급히 성을 나와 귀순하라. 싸우려고 하는가? 또한 마땅히 급히 나와 한번 싸우자. 두 군사가 접전하면 상천(上天)이 스스로 처분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에 최명길이 말하기를, “만일 이런 받아들이기 어려운 청을 한다면 대국은 마침내 시체가 쌓인 빈 성을 얻을 뿐이니, 또한 이로울 것이 없다.” 하였다. 《병자록》 《잡기》 ○ 18일에 적이 남문 밖에 와서 소리지르기를, “화친을 하고자 하거든 속히 나오고, 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19일과 21일에 마땅히 결전하자.” 하였다. 또 북문에서 소리지르기를, “속히 나와 말을 들어라.” 하였는데, 나가서 응하기도 전에 모두 다 돌아가버렸다. 이에 글을 써서 홍서봉과 최명길을 시켜 가게 하였더니 오래도록 나와 보지도 않다가 저물녘에 용골대가 나와 말하기를, “장군 마부대가 출타하여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화친을 하려거든 내일 다시 오라.” 하였다. ○ 답하는 글의 대략에, “삼가 밝은 명령을 받드니, 부지런히 간절히 깨우쳐 주셨습니다. 준절히 꾸짖은 것은 바로 가르치기를 지극히 한 것입니다. 가을 서릿발처럼 엄한 가운데 봄처럼 살려주는 뜻을 띠고 있으니, 이제 원하는 바는 다만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서 한번 구습(舊習)을 씻고서 온 나라가 명을 받들어 다른 여러 번국(藩國)에 견주는 데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위급한 것을 곡진히 안전하게 해주어 스스로 새롭게 될 것을 허락해 주신 만큼, 문서와 예절은 스스로 마땅히 행해야 할 의식이 있으니 강구하여 행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을 나오라는 명에 이르러서는 실로 어짊으로 만물을 덮어주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옛날 사람도 성 위에 있으면서 천자에게 절을 한 일이 있었으니, 예는 폐할 수 없으나 군사의 위엄도 두려운 바입니다.” 하였다. ○ 김상헌이 이 글을 보자 찢어버리고 실성통곡을 하니, 소리가 임금의 거처까지 들렸다. 최명길을 꾸짖기를, “그대의 돌아가신 아버지는 자못 명성이 사우간(士友間)에 자자하였는데, 공등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는가.” 하니, 김류가 잠자코 있었다. 명길이 말하기를, “어찌 대감을 옳지 않다고 하겠습니까마는, 이는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이성구(李聖求)는 몹시 노하여 말하기를, “대감이 전부터 화친을 배척하여 나라 일을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비록 후세에 이름이 중하게 될지라도 우리 임금과 종묘 사직은 어찌하겠는가. 대감은 어찌하여 나가서 적과 더불어 의(義)로 겨루지 않는가.” 하자, 상헌이 말하기를, “나는 한 번 죽음이 있을 뿐이나 자결하지는 않겠다. 만일 오랑캐 진영으로 보낸다면 죽을 곳을 얻을 것이다. 대감은 어찌하여 나를 묶어 내주지 않는가.” 하니, 명길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하기를, “대감이 찢었으니 우리들은 마땅히 주워야 한다.” 하고, 오랑캐에게 보내는 답서를 주워 모아 붙였다. 상헌은 임시로 기거하고 있는 집을 물러나 비로소 먹는 것을 물리치고 스스로 반드시 죽기를 기약하고 사람을 보면 반드시 울었다. 성구가 문을 나가니, 신익성(申翊聖)이 칼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화친의 의논을 주장하는 자를 내가 이 칼로 베고자 한다.” 하였다. 《병자록》 《잡기》 ○ 19일에 이홍주(李弘冑)와 최명길과 윤휘(尹暉)가 가서 국서를 전하고 다만 출성(出城)하는 한 가지 조항을 가지고 극력 다투니, 오랑캐가 처음에는 받지 않다가 한참 있다가 받아서 가서는 답을 하지 않았다. 홍주 등이 빈 손으로 돌아오니, 성구가 말하기를, “아침에 요망스러운 여우가 울더니 상헌을 가리킴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였다. 참찬 한여직(韓汝溭)이 최명길에게 말하기를, “그 자를 쓰지 않기에 내가 이미 답하지 않을 줄 알았다. 참 골자(骨子)가 있는 한 글자를 써서 보내도록 합시다. 김상헌이 이미 나갔으니 이때를 틈타 급히 써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자, 신(臣) 자를 가리킨다. 명길이 그렇겠다고 하였는데, 날이 어두워 미처 못하였다. 《병자록》 《잡기》 ○ 용골대가 사신에게 말하기를, “이미 많은 군사를 각도로 보내 ‘너희 부원수가 이제 이미 잡히고 강화도도 함락되었으니 대세를 알 것이다.’ 하였다.”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이 추운 겨울을 당하여 어떻게 육지(얼음 바다)로 배를 운행할 수 있겠는가.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말은 반드시 공갈로 위협하는 것일 것이다.” 하였다. 《병자록》 ○ 한밤중에 적이 동쪽 성으로부터 돌격해 들어와 성이 거의 함락되니, 남녀가 성을 넘어 달아나는 자가 몹시 많아 성안이 가마속 끓듯 하였다. 어영 별장 이기축(李起築)이 장경사(長慶寺)에 있다가 죽을 힘을 내어 몸을 빼내 독전하니, 적이 물러갔다. 이에 임금이 친림하여 위로의 말을 내리고 특별히 가선대부를 가자하고 완계군(完溪君)을 봉하였다. 《명곡집(明谷集)》 ○ 대사간 윤황(尹煌)이 병들어 문밖 출입을 못하면서도 매일 저녁마다 그 아들 문거(文擧)를 불러 말하기를, “오늘 화친하는 일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니, 답하기를, “저들이 허락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자, “사람들이 장차 모두 다 죽을 것이다.” 하였다. 윤황은 본시 정묘년에 화친을 배척하던 사람이었으니, 이때의 이런 태도를 보고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잡기》 ○ 수 꿩이 남쪽으로부터 대궐 아래로 날아오니, 사로잡았다. 《잡기》 ○ 20일에 눈이 많이 내려 한 자나 쌓이고 큰 바람이 부는데, 이홍주 등이 오랑캐의 답서를 받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 글의 대략에, “너희에게 성을 나와 짐을 면대하라고 명하는 것은, 첫째는 너희가 성심으로 기쁘게 복종하는 것을 보려는 것이고, 둘째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나라에 임금을 세워 주고 군사를 돌이킨 뒤에 천하에 인(仁)과 신(信)을 보이려고 한 것일 뿐이다. 만약 계책으로 너희를 유인했다면 짐은 바야흐로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천하를 어루만져 평정하려 하는데 어찌 큰뜻을 모두 속임수로 취할 수가 있겠는가. 짐이 처음에는 너희 나라에서 맹약을 어기도록 맨 처음 주장한 신하들을 모두 죽여 버리려고 하였으나, 이제라도 너희가 과연 성에서 나와 귀순하여 먼저 주모자 2, 3인을 잡아 보내면 짐은 마땅히 목 베어 효시함으로써 뒷사람을 경계시킬 것이다. 이들은 짐이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치려는 큰 계획을 그르쳤고 너희의 백성들을 물불의 위험 속에 빠트린 자가 아니냐. 너희가 만일 나오지 않는다면 설사 아무리 정성껏 빌고 청해도 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차라리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과 함께 죽을지언정 어찌 결박하여 보내겠는가.” 하니, 동궁은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그대들 때문에 우리 집안이 모두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하자, 신하들이 모두 아무 말 없이 물러갔다. 《잡기》 ○ 조정 신하 중에 죽은 자가 2, 3인이고 성을 지키는 군사 중에 얼어 죽은 자가 9인이었다. ○ 21일에 이홍주와 최명길이 국서를 가지고 갔는데, 그 글의 대략에, “조선 국왕 신 성(姓) 휘(諱)는 삼가 황제 폐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동방은 풍속이 각박하고 좁으며 예절이 세세하고 까다로워, 그 임금의 행동거지가 조금이라도 보통의 법도와 다름을 보면 눈을 크게 뜨고 서로 보면서 괴이한 일로 여기므로 만일 풍속을 따라서 모든 일을 처리하지 않으면 나라를 세울 수가 없습니다. 정묘년 이후로부터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 과연 다른 의논들이 많이 있었는데 진정시키려고 애쓰면서도 감히 대번에 질책하지 못한 것은 대개 이런 점을 염려해서입니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성에 가득한 백관과 사서인(士庶人)이 사세가 위태롭고 급박한 것을 눈으로 보아 귀순하려는 의논이 통일되었으나 유독 출성하는 한 가지 조목에 대해서만은 모두 고려조 이래로부터 없었던 일이라고 생각하여 죽기로 결심하고 반드시 나가려고 하지 않으니, 만일 대국이 재촉해 마지않는다면 후일에 얻는 것은 시체가 쌓인 빈 성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니 비록 폐하의 은덕을 입어 다시 나라를 세울 수 있다 하더라도 오늘의 인심으로 본다면 반드시 추대하여 임금으로 삼으려 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 신이 크게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또한 나라 사람들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른다면 폐하께서 불쌍히 여겨 돌봐주려는 본심이 아닐 것입니다. 화친을 배척하는 여러 신하들은 진실로 그릇되고 망령되기 때문에 이미 실속 없는 의논을 하여 일을 그르치는 자를 끄집어 내 모두 내쫓았는데, 다만 생각건대, 이 무리들은 식견이 편벽되고 어두워서 천명(天命)의 있는 데를 알지 못한 채 옛 것과 상도를 융통성 없게 지키려고 하는 뜻에서 그러한 것에 불과하므로 마땅히 폐하께서 용서해야 될 것 중에 있는 듯합니다.” 하였다. 적은 우리나라가 성을 나가는 것과 화친을 배척한 신하들을 잡아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내고 돌려보내면서 회답을 하지 않았다. 홍주가 말하기를, “형제의 나라로서 신이라 일컬으며 표문(表文)을 받들어 올렸으니 이미 지극한 것이다. 다시 이런 따르기 어려운 청을 한다면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니, 오랑캐가 웃으면서 갔다. 《잡기》 ○ 임금이 명길과 대제학 이식(李植)에게 명하여 모두 오랑캐에게 글에 답하게 하여 비록 명길의 글을 썼지만 아첨하고 굴복하여 항복을 청하는 뜻은 이식의 글도 명길의 글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식은 다만 자기의 글이 채용되지 않은 까닭으로 매양 명길을 공격하여 스스로 높은 체하니, 사람들이 모두 불복하였다. 《병자록》 ○ 이조 참의 정온(鄭蘊)이 일찍이 차자를 올려 김자점(金自點)이 즉시 들어와 구원하지 않은 것을 탄핵하며 의금부 도사를 파견해서 그 머리를 베어다가 군중에 매달기를 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소하기를, “전후의 국서가 모두 명길의 손에서 나왔는데 언사가 지극히 비루하고 아첨하여 바로 하나의 항복하는 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신(臣)이란 한 글자를 쓰지 않아 명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는데, 이제 만일 신하라고 칭한다면 군신의 명분이 이미 정해지는 것입니다. 군신의 분의가 이미 정해지면 장차 오직 그 명령대로만 따라야 하는 만큼 저들이 만일 나와서 항복하라고 명하면 전하께서는 장차 나가서 항복할 것이며, 북쪽으로 가자고 명하면 전하께서는 장차 북으로 갈 것이며, 옷을 바꿔 입고 술잔을 돌리라고 명하면 전하께서는 옷을 바꿔 입고 술잔을 돌리시겠습니까. 만일 그 명에 따르지 않으면 저들은 반드시 군신의 의리를 내세워 죄를 성토하고 정벌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라는 이미 망한 것이니, 이 지경에 이르면 전하께서는 장차 어떻게 대처할 것입니까. 명길의 생각은 한번 신하라고 칭하면 성의 포위가 풀리고 군부(君父)께서 보전하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오히려 부인이나 환관의 충성이 되는데, 하물며 절대로 포위가 풀리고 임금이 보전될 리가 없음에야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지금까지 천하 국가에 어찌 영원히 존속하며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겠습니까마는, 남에게 무릎을 꿇고 사는 것이 어찌 바른 도리를 지키면서 사직을 위해 죽는 것만 같겠습니까. 하물며 부자와 군신이 성을 등지고 한번 싸우면 성을 온전히 할 수 있는 이치가 없지 않은 데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해서 고려 말기에 금원(金元)과의 관계와 같지 않은데, 부자의 은혜를 잊을 수 있으며, 군신의 의리를 배반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는 두 해가 없는데 명길은 그 해를 둘로 하려고 하며,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데 명길은 그 임금을 둘로 하려고 하니,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을진대 무슨 짓을 차마 하지 못하겠습니까. 신이 몸은 피폐하고 힘은 약해서 비록 홀(笏)로 내리칠 수는 없지만 그와 같은 자리에서 서로 용납할 수도 없습니다.” 하였다. 《병자록》 ○ 22일에 비변사에서 홍익한(洪翼漢)을 화친을 배척하는 사람들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병자록》 동궁이 하교하기를, “나는 이미 자식이 있고 또 여러 아우도 있으니, 내가 어찌 한 몸을 아껴 종묘 사직을 보존하는 계책을 하지 않겠는가. 내일은 꼭 성을 나가려고 하니, 인부와 말을 준비하여 놓도록 하라.” 하니, 비변사에서 의논하기를, “세자는 성을 나갈 수 없다. 마땅히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보내야 한다.” 하였다. 정온이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비록 제일 먼저 오랑캐의 사신을 목 베고 글을 불사르자고 청한 사람은 아니지만 시종일관 싸움을 주장하였으니, 급히 묘당에 명하여 신으로써 오랑캐의 요구에 응하소서.” 하였고, 이명웅(李命雄)도 스스로 화친을 배척한 죄를 진술하였다. 《잡기》 ○ 개원사(開元寺)의 행랑채와 주(州)의 옥(獄)을 뜯어서 밥 짓는 땔감으로 썼다. ○ 23일에 임금의 몸이 편안치 않았는데 내의원에는 다만 정기산(正氣散) 10첩만이 있을 뿐이라 조제하여 2첩을 올리니 곧바로 회복되었다. ○ 홍서봉 등이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의 진영에 갔는데, 글은 대개, “화친을 배척한 신하 홍익한을 평양 서윤(平壤庶尹)으로 내쳐 스스로 군사의 칼날을 당하게 하였으니, 만일 포로로 잡히지 않았으면 마땅히 우리가 결박해서 보내겠습니다 운운.” 하니, 답하기를, “용골대와 마부대 두 장수가 밖에 있으면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내일 다시 오라.” 하였다. ○ 김상헌이 화친을 배척한 죄로 대궐 아래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상헌이 국서를 찢은 뒤에 6일 동안이나 음식을 물리쳐서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는데,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먼저 오랑캐 진중에 보낸 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비로소 일어나 음식을 먹으면서 말하기를, “내가 만일 먼저 죽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오랑캐의 진중에 가는 것을 피하려고 하였다고 할 것이다.” 하였다. ○ 윤황이 또한 대궐에 나아가 대명을 하자 그 아들인 정언 문거(文擧)가 상소를 올려 아버지 대신 가기를 청하니, 답하기를, “내가 그런 뜻이 없으니 조금도 두려워 말라.” 하였다. ○ 윤집(尹集)과 오달제(吳達濟)가 또한 화친을 배척한 것으로 자수하였는데, 이는 대개 김류와 이성구와 최명길이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을 조사해서 골라내 내보낸다는 의논이 있기 때문이었다. ○ 성을 지키는 장수와 군사 수백 명이 대궐 아래 나아가 화친을 배척하는 사람들을 내어줄 것을 청하였다. 먼저 체찰부에 나아가 칼을 어루만지며 일제히 소리를 치며 나아가니, 김류가 두려워하는 기색으로 일의 곡직을 묻지 않은 채 다만 말하기를, “마땅히 너희들의 청을 따를 것이니, 속히 물러가라.” 하였다. 대궐문을 지키는 관원이 또한 여러 가지로 회유하기를, “조정에서 이미 붙잡아 보내는 논의가 결정되었으니, 그대들은 함부로 말하지 말고 곧 물러가라.” 하였는데, 이것은 대개 체찰부의 중군 신경연(申景禋)과 남양군(南陽君) 홍진도(洪振道) 등이 구굉(具宏)ㆍ신경진(申景禛)의 진중에 왕래하면서 이 거사를 도모한 것이다. 경진이 바야흐로 훈련대장이 되었을 때 수원 부사 구인후(具仁垕), 죽산 부사 구인기(具仁基)와 옛날 두 읍의 장관과 훈련원 장관 등이 이 거사를 하였다. 《병자록》 《잡기》 ○ 이때 장수와 군사가 모두 말하기를, “오늘의 사태는 모두가 명사(名士)들의 고론(高論)에 말미암은 것이니, 만일 이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가 될 수 없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만일 나라에 문사(文士)가 없으면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하고, 혹은 말하기를, “우리들은 매양 명사들을 볼 때마다 자연히 칼자루를 굳게 잡게 된다.” 하였는데, 이는 대개 사나운 무인들이 스스로 반드시 죽을 것으로 작정하고 화친을 배척하는 사람들에게 분을 터뜨린 것으로 신경연과 홍진도가 몰래 선동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소리에 응하여 일제히 일어난 것이 거의 전조(前朝)의 화를 면하지 못할 뻔하였으니, 위태하고 위태하다. 《잡기》 ○ 삼경에 적이 서쪽 성을 침범하였다. 수어 군관(守禦軍官) 송의영(宋義榮)이 눈 밟는 소리를 듣고 잠결에 놀라 깨니 적이 이미 사다리를 기어오르고 있으므로 급히 모난 몽둥이를 잡아 쥐고 적을 쳐서 성 밖으로 떨어뜨리고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성을 지키는 잠자는 군사들을 걷어차면서 말하기를, “선전관에게 적의 순라 군사가 왔다고 일러라.” 하였다. 이에 잠자던 군사들이 모두 일어나 갑작스러워 화살을 쏠 겨를도 없이 어지럽게 돌을 떨어뜨렸다. 이시백이 몸을 빼어나가 힘껏 싸우니, 적은 세 번 진격하고 세 번 퇴각하는 동안 죽거나 부상당한 자가 매우 많았고 높은 사다리와 무기를 빼앗았다. 이때 시백은 처음부터, “군졸 중에 모두 갑옷을 입은 자가 없으니 죽고 사는 것을 마땅히 더불어 같이 하겠다.” 하며, 끝내 갑옷을 입지 않았다. 임금이 여러 차례 갑옷 입을 것을 권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더니, 이에 이르러 화살 두 개를 맞고서 군사들이 놀라 소동할까봐 염려하여 감춘 채 말하지 않다가, 싸움에서 이긴 뒤에야 비로소 그 화살을 뽑으니 피가 이미 등을 적시고 있었다. 이에 상하가 자못 걱정하였지만 마침내 나았다. 대개 시백의 사졸들은 경기 지방 사람들로 교련을 받지 못한 자들인데, 거처와 고락을 한결 같이 사졸들과 같이 하여 마침내 그 힘을 얻은 것이다. 오경에 적이 또 동쪽 망월성(望月城)을 침범하자 신경진이 쳐서 물리쳤는데, 네 번 진격하고 네 번 퇴각하는 동안 죽인 적의 숫자가 더욱 많았다. 《병자록》 《잡기》 ○ 24일 아침에 적이 또 남성(南城)을 침범하고 지난 저녁에도 또 곡성(曲城)을 침범하였는데, 구굉(具宏)이 모두 물리쳐 죽인 적의 수가 또한 많았다. ○ 며칠 전에 적이 망월대(望月臺) 밖에 대포를 설치하니 신경진이 사졸들에게 천자포(天字砲)를 쏘도록 하여 오랑캐의 장수와 졸개 몇 명을 맞추니, 적이 흩어져 갔다.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또 7,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蹲)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 적이 서문으로부터 우리 사신을 부르니 홍서봉 등이 국서를 고쳐서 가지고 가자, 답하기를, “두 가지 일(임금의 출성과 척화신을 묶어 보내는 것)을 모두 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황제에게 아뢸 수 없다.” 하였다. 《병자록》 《잡기》 ○ 어제 오랑캐가 국서를 받지 않으므로 이제 또 가지고 가려 하였더니, 삼사(三司)에서 홍익한 이외에 또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조사해서 잡아보내는 것이 불가하다고 극력 다투니, 임금이 윤허하여 국서를 고쳐 지었다. ○ 청주(淸主)가 모든 장령(將令)들을 소집하여 이르기를, “성에서 오래도록 항복하지 않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내일은 도륙하도록 하라. 그러나 국왕은 반드시 산 채로 사로잡도록 하라.” 하니, 모든 장수들이 아뢰기를, “이 성의 험함은 참으로 천연적인 것입니다. 만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죽고 상하는 자가 많게 될 것이니, 송성(松城)을 굳게 지켜 성이 스스로 마르기를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으나, 청주는 한참 동안 산성을 올려다보다가 말하기를, “죄는 주벌하지 않을 수 없다. 마땅히 급히 명령대로 하라.” 하였다. 《잡기》 ○ 포로로 붙들려갔던 신경원(申景瑗)이 전한 말이다. ○ 25일에 적이 서문으로부터 우리 사신을 부르자 이덕형(李德泂) 정승이 병이 났으므로 가짜 직함으로서 대신한 것이다. 이성귀ㆍ최명길이 나가니, 적이 어제 전했던 국서를 주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너희 나라가 명령을 받지 않기 때문에 노하여 섬멸하고자 하나 환국할 일이 급해 이 전역(戰役)을 왕자와 용골대ㆍ마부대 두 장수에게 맡기고 내일 출발하려고 한다. 황제가 떠난 뒤에는 아무리 화친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을 것이니, 다시 올 것도 없다.” 하였다. ○ 적의 대포가 망월대에 맞아 대장기(大將旗)의 기둥이 꺾어지고 또 잇달아 성첩에 맞아 한 귀퉁이가 거의 다 파괴되어 성 위의 얕은 담은 이미 가릴 것이 없어졌고, 사복시의 아전과 신경진의 군관이 탄알에 맞아 죽었으나, 곧 군량을 넣었던 빈 섬 수백 개로 흙을 담아 파괴된 자리를 막고 물을 끼얹어 얼음을 얼게 하였다. 대포 알이 성중에 계속 떨어지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경진은 군관의 죽음을 눈으로 보면서 성이 무너지면 다시 수선하며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니, 장수의 풍모가 있다고 할 만하다. 《병자록》 ○ 26일에 장수와 사졸들 신경진과 구굉의 진영의 장사들이 또 대궐 아래로 나아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을 붙잡아 보낼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대포에 맞아서 성첩이 모두 다 파괴되어 사세가 이미 더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문사들은 단지 고론(高論)만 일삼고 있으니, 문사들에게 망월대를 지키고 막도록 하소서.” 하니, 김류가 위로하며 타이르기를, “그대들의 노고에 대하여는 장차 중한 상을 의논할 것이다.” 하니, “상을 바라는 것이 아니고, 다만 일을 그르친 사람들에 대해 분통스러워할 뿐입니다.” 하고, 이내 대궐에 들어가 곧바로 진달하려고 하였다. 승지 이행원(李行遠)이 말하기를, “비록 위태롭고 급박한 날을 당했더라도 대내(大內)가 멀지 않은 곳에서 어찌 감히 이런 짓을 하는가.” 하고, 이어 병조 낭청에게 이르기를, “그대들은 대궐문을 지키면서 어찌 난병(亂兵)이 여기에 이르게 하였는가.” 하면서, 칼을 뽑아 들고 쳐죽이려고 하니, 장수와 사졸들이 말하기를, “승지가 칼을 뽑으니 용맹하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나 적을 베는 데는 용감하지 못하고 도리어 죄 없는 사람의 목을 베려 하는가. 승지는 재주와 꾀가 있는 것 같으니 만일 오랑캐의 진중에 데리고 가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속히 나오라. 속히 나오라.” 하자, 동료들이 권하여 이행원을 피하게 하였다. 임금이 다른 승지를 시켜 군사들을 온화하게 타이른 뒤에야 진정되었다. 《병자록》 《잡기》 ○ 홍서봉 등이 오랑캐의 진영으로 가서 세자가 화친을 배척한 사람들을 이끌고 성을 나오려고 한다는 뜻을 전달하니, 답하기를, “반드시 국왕이 성을 나와야만 된다.” 하고, 이어 강화도에서 잡은 내관 나업(羅業)과 장릉 수릉관(章陵守陵官)인 종실 진원군(珍原君)을 내어 보이고, 또 대군(大君)의 손수 쓴 서찰과 재신(宰臣) 윤방(尹昉)과 한흥일(韓興一) 등의 장계를 주면서 말하기를, “우리가 이미 강화도를 탈취하였다. 숙의(淑儀)와 빈궁(嬪宮)과 대군의 부인은 곧 강화읍의 사람을 시켜 데리고 오게 하되, 우리 군사는 뒤에 있으면서 놀라 움직이지 않도록 하여 내일이면 여기에 이를 것이다. 국왕이 성에서 나오기를 기다려 세자와 대군만을 북으로 데리고 가려는 것인데, 그대들이 의혹하여 나오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고, 곧 하늘을 가리키며 맹세하기를, “모름지기 우리 말을 믿고 머뭇거리지 말라.” 하였다. ○ 이때 성중에서는 아직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여 혹 대군의 편지를 거짓으로 써서 위협하는 것이라 의심하기도 하였는데, 임금이 이르기를, “이 편지는 대군이 손수 쓴 글씨이니 속임수가 아니다.” 하였다. 사대부들 가운데 가족이 강화도에 있는 자가 10명에 8, 9명이었는데, 이 말을 듣고 비로소 놀라며 흐느껴 우니 기상의 비참함이 말로 할 수 없었다. 《병자록》 《잡기》 ○ 밤에 대신이 입대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종묘 사직이 이미 함락되었으니 내가 어찌할 도리가 없다.” 하며, 곧 성을 나가기로 의논을 결정하였다. 《병자록》 《잡기》 ○ 임금이 이르기를, “종묘 사직과 신민이 이미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살아 무엇하겠는가.” 하니, 김류와 최명길 등이 나아가 아뢰기를, “피폐(皮幣)와 주옥(珠玉)은 탕(湯) 임금이나 문왕(文王)도 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한(漢) 나라의 고조(高祖)도 홍문(鴻門)에서 허리를 굽혔으며 당(唐) 나라의 대종(代宗)은 친히 말머리에서 회흘(回紇)에게 절하였으니, 이는 남의 임금된 자가 국가 만세를 염려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한 몸 이외에 다른 것은 없는 일반 백성의 계책과는 같지 않습니다.” 하였다. 세자도 울면서 청하기를, “진실로 군부의 화를 면하게 할 수만 있다면 죽는 것도 피하지 않을 것인데, 나아가 인질이 되는 것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였다. ○ 강화도가 싸움에 패하여 함락된 것은 하권(下卷)에 상세하다. ○ 1월 27일에 큰 안개가 끼었다. 이홍주와 최명길과 김신국이 국서를 가지고 오랑캐의 진영으로 갔는데, 그 글의 대략에, “이제 폐하께서 며칠 안으로 행차를 돌린다고 들었으니, 만일 빨리 스스로 달려 나아가 용광(龍光)을 우러러 뵙지 않으면 정성을 펼 수 없으니 후회한들 무엇하겠습니까. 다만 오직 신은 바야흐로 장차 3백 년 종묘 사직과 수천 리의 백성들을 폐하께 우러러 부탁하려 합니다. 정리(情理)가 진실로 불쌍히 여길 만하니, 만일 일이 어긋나면 칼을 뽑아 스스로 자결하는 것이 나으니만 못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자(聖慈)께서는 참다운 정성을 굽어살피시고 교지(敎旨)를 명백히 내리시어 신이 안심하고 귀순할 길을 열어 주소서.” 하였다. 《병자록》 ○ 홍주 등이 오랑캐에게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조알(朝謁)하려고 하면서도 군사의 위엄이 두려워서 하지 못했습니다. 다행히 용서한다면 내일 성을 나오고자 합니다. 혹시 성스러운 황제의 덕을 입어 이역의 귀신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하니, 답하기를, “오늘은 되었으니, 다시 유시(諭示)하기를 기다려서 나오라.” 하였다. ○ 조정에서 각사(各司)의 문서를 취하여 태워 버렸는데, 그것은 노(奴)이니 적(賊)이니 하는 등의 글자가 문보(文報)에 실려 있어서 청인(淸人)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한 것이었다. 《잡록(雜錄)》에도 있다. ○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이 노끈으로 자살하여 거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었는데 나만갑(羅萬甲)이 달려가서 구하니, 또 바지를 묶는 가죽으로 자결하려 하자 곧바로 또 구하였다. 그 조카 광현(光炫)과 아들 광찬(光燦)은 방 밖에서 옷을 갈아입고 가슴을 두드리며 운명하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므로 만갑이 말하기를, “부형의 죽음이 비록 강상(綱常)을 부지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지만 공들은 어찌하여 부형이 자결하는 대로 놔두는 데 이르렀는가.” 하니, 눈물을 흘리면서 대답하기를, “부형의 일은 영감께서 아시는 바입니다. 이미 한 번 죽기로 스스로 판단하셨으니 우리가 비록 구하려고 한들 어찌 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수직(守直)하였는데, 다음날 또 오랑캐의 진영으로 보내려고 하는 의논이 있었기 때문에 마침내 죽지 않았다. 《병자록》 ○ 이조 참의 정온이 스스로 죽을 것을 작정하였다. 고향 사람이 일찍이 명문(銘文)을 청한 자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지어 그 서자를 시켜 전하여 주도록 하였다. 그 시에, 生世何足險 살아 있는 이 세상은 어찌 이다지도 위태롭고 험한가 三旬月暈中 삼순 달무리 속일세 一身無足惜 내 한 몸 무엇이 아까울까마는 千乘亦云窮 천승의 임금도 곤궁하다고 하네 外絶勤王士 밖으로는 근왕의 장사가 끊기고 朝多賣國凶 조정에는 매국노만 들끓네 老臣何所事 노신이 할 일은 무엇인가 腰下佩霜鋒 허리 아래 찬 칼날이 서릿발처럼 반짝이네 하였고, 또, 砲聲四起如雷震 포성은 사방에서 뇌성처럼 일어나 진동하고 衝破孤城士氣洶 깨어진 외로운 성을 뚫고 깨치니 사기가 공포에 떠네 惟有老臣談笑聽 오직 노신만이 담소하며 들으니 擬將茅屋號從容 이 초가집을 종용이라 이름하겠네 하였다. 또 찬(贊)을 짓기를, 主辱已極 臣死何遲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 신하로서 죽는 것이 어찌 더딘가 舍魚取熊 此正其時 생선을 버리고 곰의 발바닥을 취할 때가 바로 이때로다 陪輦出降 余實恥之 임금 행차를 모시고 항복하러 나가는 것을 나는 실로 부끄러이 여기니 一劍得仁 視死如歸 한 칼로 인을 성취하여 죽음을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리라 하였다. 이에 차고 있던 칼로 스스로 그 배를 찔러 흐르는 피가 의복과 이불에 가득했으나 그래도 죽지 않으니,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옛글을 읽고 그 뜻을 알지 못하였더니, 오늘 내가 죽지 않은 것은 거짓 죽으려 한 것이라고 말하여도 괜찮다. 옛말에 이르기를, ‘칼에 엎드려 죽는다.’ 하더니, 칼에 엎어지면 칼이 오장을 찌를 것인데 나는 칼이 오장을 찌르지 않았으니, 오늘에서야 비로소 칼에 엎어진다는 뜻을 알겠다.” 하면서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병자록》 《잡기》 ○ 28일에 세 정승이 입시하였는데, 김류가 김상헌(金尙憲)ㆍ정온(鄭蘊)ㆍ윤황(尹煌) 부자ㆍ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ㆍ 김수현(金壽賢)ㆍ김익희(金益熙)ㆍ정뇌경(鄭雷卿)ㆍ이행우(李行遇)ㆍ홍전(洪瑑) 등 11명을 오랑캐의 진영으로 내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는 대개 취사(取舍)하기가 어려웠고 김상헌에 대한 요즘의 언론이 김류를 거슬린 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나만갑이 홍서봉을 꾸짖으며, 김류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11명은 너무 많으니 다시 청대(請對)하여 약간 명만을 뽑아 보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 김류가 답하기를, “이제 공의 말을 들으니, 반드시 누구는 마땅히 보내야 하고 누구는 마땅히 보내서는 안 될 것을 아는 것 같으니, 만일 보내야 할 사람을 가리켜 준다면 마땅히 따르겠다.” 하였다. 부제학 이경석(李景奭)이 대사간 박황(朴潢)이 들어오기를 기다려 함께 극력 다투려고 하니, 박황이 말하기를, “먼저 정승들에게 항의한 연후에 입시해도 늦지 않다.” 하고, 드디어 김류에게 가서 말하기를, “몇 사람만 내보내더라도 책임을 면할 수 있으니, 10여 명까지 보낼 것은 없습니다. 오달제와 윤집이 당초에 힘써 화친을 배척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이것은 사사로운 죄가 아니니, 이제 이 두 사람을 보내는 것은 또한 심히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나, 끝내 면할 수 없을 바에야 어찌 단지 이 두 사람만을 보내는 것만 하겠습니까.” 하니, 김류가 말하기를, “묘당에서도 보낼 만한 사람을 분명히 알고 있다. 만일 영감의 말과 같았다면 내가 또한 어찌 많은 사람을 보내기를 청하기에 이르렀겠는가. 이제 영감의 말대로 마땅히 다만 이 두 사람만을 보내겠다.” 하자, 박황이 말하기를, “만일 오달제와 윤집 자제들의 정으로 말한다면 마침내 반드시 나를 원망할 것이나, 조정의 일로써 말한다면 많은 사람을 보내는 것보다는 조금 보내는 것이 나은 것입니다.” 하였다. 윤문거(尹文擧)는 애당초 화친을 배척하는 의논에 관여하지 않았으나, 그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기를 청했기 때문에 또한 내보내는 사람들 가운데 들어 있었는데, 박황의 말로 말미암아 면할 수 있었다. 마침내 오달제와 윤집만을 보내는 데 그친 것은 박황의 말을 따랐기 때문이다. 《병자록》 ○ 이조 참의 이경여(李敬輿)가 들어가 성을 사수하자는 의논을 진달하니, 임금이 발끈하여 엄한 분부를 내렸다. ○ 한 사람의 조관(朝官)이 성명은 잊어버렸다. 소를 올리기를, “만고 천하에 장생 불사한 사람이 없고, 만고 천하에 길이 보존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부디 오랑캐에게 항복하여 천하 후세에 수치가 되지 마소서. 소신이 먼저 죽어서 선왕의 영령에 보답하겠습니다.” 하였다. ○ 홍서봉ㆍ최명길ㆍ김신국이 오랑캐의 진영에 나아가 성에서 나오는 절목(節目)을 의논하여 정하는데, 적이 말하기를, “요사이 추위가 심한데 수고롭지 않겠는가?” 하니, 서봉이 말하기를, “황제의 칙지(勅旨)를 받드니 마치 큰 가뭄에 비를 만난 것 같습니다.” 하자, 오랑캐가 말하기를, “마포(麻浦) 위에 항복을 받을 단(壇)을 쌓는 일이 장차 완성될 것이니, 내일은 일찍 와서 예(禮)를 행하지 않을 수 없다. 예는 예로부터 스스로 규례가 있는데, 제 1등의 절목(두 손을 묶고 빈 관(棺)을 메고 가는 것.)은 참혹하여 쓰지 않겠으며, 제 2등의 절목을 행하는 것이 괜찮겠다.” 하니, 서봉이 말하기를, “국왕은 늘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계시는데, 이 옷을 입어도 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불가하다. 군(君) 등과 같이 남색 복장이 가하다.” 하였다. 《병자록》에, “임금과 세자가 입을 푸른 색 옷을 밤새도록 꿰매 올렸다. 오랑캐가 따로 푸른 색 옷을 입으라는 말이 없었는데, 명길이 억측으로 헤아려 와서 말하기를, ‘홍색 곤룡포를 입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하였다. 말하기를, “남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오랑캐가 답하기를, “죄가 있는 자는 정문으로 나올 수 없으니, 서문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옳다. 예를 행한 뒤에는 즉시 마땅히 서울의 대궐로 돌아가게 할 것이니, 너희들은 불신하지 말라. 출정한 군사에서 하도(下道)의 3천 명과 북도(北道)의 3만 명은 이미 명령을 전달하여 돌아오도록 불렀으니, 내일 아침에는 의당 일찌감치 올 것이다. 세자, 대군 및 공경(公卿)의 자제를 데리고 가는 일은 모두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거니와, 황제의 어질고 성스러움으로 반드시 특별히 애휼(愛恤)하여 주실 것이니, 나라를 떠나고 어버이를 이별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기지 말도록 하라. 포로로 잡은 백성들은, 항복을 약정한 이후에 잡은 포로와 강화도 성내의 백성들은 마땅히 풀어주어 돌려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끌고 가겠다.” 국보(國寶 인장)는 서서히 주조하여 주겠다.” 하였다. 《잡록》 ○ 그날 밤에 용골대와 마부대가 한(汗)의 답서를 가지고 와서 전하였는데, 그 글의 대략에, “명 나라에서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바치며 죄를 청하고, 왕래를 끊고 연호를 버리고 모든 문서에 나의 연호를 쓰라. 너는 장자와 한 아들을 볼모로 하고 모든 대신들은 아들과 동생을 볼모로 할 것이다. 짐이 만일 명 나라를 정벌한다는 조서를 내리면 너의 기마병과 보병과 수군을 조련하여 기한을 작정하고 회합하여 착오가 없도록 해야 한다. 짐이 지금 군사를 돌이켜 가도(椵島)를 공격해 취하려고 하니 너는 배 50척을 띄워 보내도록 하고, 우리 대군이 장차 돌아갈 때에는 의당 호군(犒軍)하는 예를 바치도록 하라. 성절(聖節)과 정조(正朝)와 동지(冬至)와 경조(慶弔) 등의 일에 모두 모름지기 예를 올리고, 대신과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문(表文)을 받들어 오고 표전(表箋)ㆍ조칙(詔勅) 사신을 맞이하고 보낼 때는 명 나라에게 하던 옛 예를 어기지 말도록 하라. 군중에 포로로 잡혀 있는 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넌 뒤로부터 만일 도망쳐 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잡아서 본주인에게 돌려보내야 하며, 만일 속바치고 돌아가고자 한다면 들어줄 것이다. 내외의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혼인을 맺어서 화친을 굳게 하고, 신구(新舊)의 성벽은 수선을 허락하지 않겠다. 너희 나라에 잡혀와 있는 올량합(兀良哈) 사람은 모두 마땅히 돌려보내 주어야 하며, 일본과의 무역은 예전대로 하는 것을 허락한다. 너의 이미 죽은 몸을 짐이 다시 살려준 것이고, 너의 다 망한 종묘 사직을 보전하게 하였고, 너의 이미 잃어버린 처자를 완전하게 해주었으니, 너는 마땅히 나라가 다시 이루어진 것을 생각하여 신의를 어기지 말라. 세공(歲貢)으로 바칠 물목(物目)은 황금 1만 냥, 백금 1천 냥, 수우각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단목(丹木) 2백 근(斤), 환도(還刀) 20자루, 표피(豹皮) 1백 장, 녹피(鹿皮) 1백 장, 다(茶) 1천 포(苞), 수달피(水獺皮) 4백 장, 청서피(靑黍皮) 3백 장, 호초(胡椒) 10근, 좋은 요도(腰刀) 26자루, 좋고 큰 종이 1천 권, 좋고 작은 종이 1천 5백 권, 오조용문석(五爪龍文席) 4벌, 각종 화석(花席) 40벌, 백저포(白苧布) 2백 필, 여러 가지 빛깔의 세주(細紬) 2천 필, 세마포(細麻布) 4백 필, 여러 가지 빛깔의 세면포(細棉布) 1만 필, 포(布) 1천 4백 필, 쌀 1만 포(包)이니, 기묘년 가을에서부터 공물을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병자록》 ○ 세폐(歲幣)와 면부(免賦) 숫자는 조공전고(朝貢典故)에 상세하다. ○ 청 나라 군사가 대포 쏘기를 정지하고 맞아 죽은 자가 6명이다. 방패(防牌)를 거두고 다만 복병(伏兵)만을 두었다. ○ 오달제와 윤집이 장차 청의 진영으로 나아가게 되었는데, 기색이 조금도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슬피 울면서 술을 주며 이르기를, “너희들의 부모와 처자는 내가 평생토록 돌보아 줄 것이니, 이 점은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병자록》에 “수년 동안은 쌀을 대주었으나 뒤에는 다시 은전(恩典)이 없었다.” 하였다. 달제 등도 눈물을 흘리면서 하직하고 나갔다. 성에 들어오는 날을 당해 달제는 그 형 달승(達升)과 함께 말이 없어 걸어서 들어왔는데, 이때에 달승이 울면서 비변사에 말하기를, “아우가 당초에 말이 없어 걸어왔는데, 이제 차마 오랑캐의 진영에 걸려서 보낼 수 없다. 말을 얻어 태워 보냈으면 한다.” 하니, 듣는 사람 가운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자록》 《잡기》 ○ 날씨는 조금 풀렸으나 얼어 죽는 자가 계속해서 생기고 많게는 1백여 명에 이르렀다. 전염병이 날로 치성하여 사람이 장차 씨가 없어질 지경이었다. 《잡기》 ○ 29일에 최명길과 이영달(李頴達)이 오달제와 윤집을 거느리고 오랑캐의 진영에 나갔는데, 국서의 대략에, “소방(小邦)에서 일찍이 일종의 부의(浮議)가 있어 자못 나라 일을 어그러뜨리고 그르쳤습니다. 이에 작년 가을 이후로 신(臣 국왕)이 특히 심한 자 약간 명을 적발하여 모두 내쫓고 앞장서서 주창한 대간 한 사람은 천병(天兵)이 국경에 이르렀을 때를 당하여 평양 서윤으로 보내 바로 그날로 부임하도록 독촉하였는데, 혹은 군중(軍中)에서 잡혔는지 혹은 사잇길로 해서 부임하였는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성중에 있는 자들은 비록 간혹 부화뇌동한 죄가 있기도 하지만 전에 내쳐진 자에 비하면 그 죄의 경중이 현격합니다. 그러나 만일 신이 시종일관 잡아 보내는 것을 머뭇거린다면 폐하께서 신이 그들을 용인해 준 것으로 의심할까 염려되기 때문에 두 사람을 색출하여 군문(軍門)에 보내어 처분을 기다립니다.” 하였다. 청주(淸主)가 명길 등에게 각각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갖옷과 술을 주었다. 오달제와 윤집을 잡아들여 묻기를, “너희들은 어찌하여 두 나라의 맹약을 어기도록 하였는가?” 하니, 달제가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대명(大明)에 대하여 3백 년을 신하로서 섬겨, 대명이 있음을 알 뿐이고 청 나라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한다. 황제의 칭호를 참칭하고 사신을 보냈으니, 대간의 몸으로 어찌 화친을 배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으나, 청주가 웃으면서 머물러 두었다. ○ 정온(鄭蘊)이 소를 올리기를, “신이 자결한 것은 바로 전하의 오늘의 일을 차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한 가닥 남은 목숨이 3일이 지나도록 여전히 살아 있으니, 신은 실로 괴이하게 여깁니다. 명길이 이미 전하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신하라고 칭하고서 나가 항복하도록 하였으니, 군신의 명분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신하가 임금에 대해서는 한갓 받들고 따르는 것을 공순함으로 삼을 뿐만 아니라 다툴 만한 일이 있으면 다투는 것입니다. 그(청주(淸主))가 만일 황명(皇明)의 인(印)을 바칠 것을 요구하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다투기를 ‘조종(祖宗)이 이 인을 받아서 쓴 지 이제 3백 년이 되어 가니, 이 인은 마땅히 명 나라에 도로 바쳐야 하지 청 나라에 바쳐서는 안 된다.’ 하소서. 그가 만일 천조(天朝)를 공격하는 데 도움을 요구하면 전하께서는 마땅히 다투기를, ‘우리가 명 나라와 부자의 은혜가 있음은 청 나라에서도 아는 것인데, 자식을 시켜 아버지를 공격하라고 하면 윤리와 기강에 관계가 있고, 공격하는 자에게 죄가 있을 뿐만 아니라 시킨 자도 옳지 않다.’ 하시면, 흉악하고 교활한 그들도 반드시 양해함이 있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다투어야 천하 후세에 죄를 얻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 김류가 나아가 아뢰기를, “세자가 장차 북으로 가는데 삼공이 모두 늙고 병든 사람들이라 쫓아가기 어려울 듯하니, 근력이 한창 강한 자로 다시 정승을 뽑으소서.” 하니, 임금이 우의정 이홍주(李弘胄)를 체직하고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를 정승에 임명하도록 명하였다. 김류가 또 아뢰기를, “세자를 따라가는 데는 반드시 정승이 아니어도 됩니다. 이성구는 본래 재주와 지략이 많으니 우선 본국에 머물러 있게 하여 함께 나라 일을 의논하소서.” 하니, 임금이 또 윤허하였다. 처음에 유백증(兪伯曾)이 김류를 벨 것을 청하였는데, 김류는 3일이 지나도록 오히려 그 말을 들어서 알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어수선한 시기여서 이미 조보(朝報)가 없었고 또 상하의 사람들이 모두 김류와 막혀 통하지 않아서 사람들 중에 말해 주는 자가 없었던 것인데, 유독 성구만이 말해 주었기 때문에 김류가 성구를 시종일관 이와 같이 발탁하였다. ○ 30일에 안개가 짙고 햇볕이 없었다. 호행(扈行) 5백 명을 선출하였는데, 시위할 장수와 사졸들 및 각사(各司)의 당상과 낭청 각각 1인이었다. 《병자록》에는, “임금이 성을 나가면 혹시 저들 오랑캐가 산성을 반드시 점령해야 할 땅으로 여길 것이므로 성의 안위를 알 수 없을까 염려되어 김류가 이홍주(李弘冑)를 대신 가체찰사(假體察使)로 삼도록 청하였다. 임금을 모시고 갈 숫자도 모두 체부(體府)에서 정하였는데, 하인배들이 김류에게 청촉하여 그 숫자의 태반은 아전의 무리와 삼의사(三醫司)에서 내와 삼사와 장관(長官)도 모시고 따라갈 수 없었다.” 하였다. ○ 《잡기》에, “이때 사람들이 성을 나가는 사람들은 응당 북쪽으로 가게 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피하려고 도모하는 자가 많았다.” 하였다. 임금이 세자와 함께 남색 군복을 입고 서문을 통해 나갔다. 청주(淸主)는 일찍이 마전포(麻田浦)에서 진을 치고 마전포 남쪽에 단(壇)을 설치하여 9층의 계단을 만들고 누런 장막과 누런 일산을 펴 놓고 성대하게 병갑(兵甲)과 기독(旗纛)을 진열하고 수하의 정병(精兵) 수만 명으로 네모진 진을 치게 하고는, 우리나라 임금으로 하여금 1백 보 가량을 걸어서 삼공과 육경을 인솔하여 삼배(三拜)와 구고두(九叩頭)의 예를 평지에서 행하도록 하고 여러 신하들이 포석(舖席)을 청하였는데, 답하기를, “황제 앞에서는 스스로 높을 수 없다.” 하였다. 또 앞에 나아가 삼배 고두하게 하고 나서, 이끌고 들어가 계단을 올라가 서쪽을 향하여 제왕자(諸王子)의 위에 앉아 몽고왕과 마주하도록 하였다. 청주는 단의 상층에 남면(南面)하고 앉아서 주례(酒禮)를 행하고 군악을 울렸다. 파할 때에 우리나라 임금에게 담비 가죽 갖옷 2벌을 주니, 임금이 한 벌을 입고 사례로 뜰에서 삼배를 하였다. 차례로 대신과 육경과 승지에게 각각 한 벌씩을 주니, 대신들이 또한 차례로 뜰에서 사례하였다. 이때 숙의(淑儀)와 빈궁(嬪宮)과 대군(大君)과 대군 부인이 강화도로부터 진중에 와 있었는데, 임금을 뵙도록 해 주었다. 또 최명길의 가속들을 내어 주니, 명길이 머리를 숙여 사례하였다. 저녁에 임금에게 서울로 돌아가도록 하므로 삼배를 하고 나오니, 청주가 금 안장에 흰 말을 뒤따르게 하였다. ○ 세자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그 부인이 장차 심양(瀋陽)에 들어가야 하므로 진중에 그대로 머물면서 들판에서 묵었다. ○ 임금이 성을 나갈 때 온 성중 사람이 곡하면서 보내니, 곡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 빈궁은 처음에는 환궁하도록 했다가 밤을 지나고 다시 나오게 하겠다 하더니, 오랑캐가 다시 말하기를, “다른 여자를 대행(代行)하게 하는 일이 없지 않을 듯하니, 그대로 머물러 있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 이내 도로 머물도록 하였다. ○ 날이 이미 저물었는데 임금의 행차는 비로소 강을 건너 입경하였다. 이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오랑캐의 포로가 된 자가 반이 넘고 각 진영 안에는 여자들이 무수하였는데, 우리의 일행을 바라보고 발버둥 치며 슬프게 소리지르니, 청국 군사가 문득 채찍을 휘두르며 금지시키고 몰아 들여보냈다. 간혹 짙은 화장을 하고 깔깔대며 말하면서 슬픈 빛이 없는 듯한 여자도 있었다. ○ 청국 사람들이 상자ㆍ농ㆍ그릇들을 싣고 우리나라 백성들을 몰고 도성으로부터 나오는 자가 길에 쭉 깔렸는데, 이는 대개 청주가 빈 성만을 우리에게 남겨주라고 하였기 때문에 성중에 진을 치고 머물던 자들이 각자 약탈한 것들을 운반해 내오는 것이었다. 사로잡힌 사람들이 길에서 우리의 행차를 만나자 가슴을 두드리며 울부짖으면서 앞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으니, 청 나라 사람들이 노하여 채찍질을 하고, 혹은 우리 행차를 뒤쫓아 치면서 말하기를, “너희들 때문에 이 무리들이 가려 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때에 재신(宰臣) 중에 채찍을 맞은 자가 여러 사람이었다. ○ 이때 날이 저물어 캄캄하였으나 불을 켤 수 없었다. 우리의 일행 5백 명과 강화도에서 온 수백 명을 청주가 1백여의 철기(鐵騎)로 호송하여 밤이 깊어 비로소 동문에 입성하였는데, 성 안은 백성들이 이미 모두 없어져 고요히 인기척이 없었고 다만 2, 3마리의 개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릴 뿐이고, 길 가운데는 죽은 사람의 시체가 잇대어 있었다. 임금이 이내 통화문(通化門)을 지나 들어오고 여러 재신들과 이졸(吏卒)과 인마(人馬)가 모두 대궐 안에 임시로 머물렀다. ○ 2월 1일 이른 아침에 청국 장수가 대궐문에 이르러 말하기를, “황제 앞에 문안드리는 것이 어찌 이렇게 늦는가.” 하니, 영의정이 이 말을 듣고 바로 청주에게 달려 나아갔다. ○ 2일에 남한산성의 군사를 해산하고 모두 성에서 내려오도록 명하였다. 도중에 혹 몽고 군사에게 약탈당한 자들이 있었는데, 전 참의 이상급(李尙伋)은 매를 맞고 죽기에 이르렀다. 청국 장수가 이 말을 듣고 즉시 달려와 작란(作亂)한 자 중에 한 사람은 목 베고 한 사람은 물에 빠뜨리니, 이로 말미암아 노략질이 조금 그쳤다. 《병자록》에는, “상급이 병이 있어 뒤떨어져 혼자 갔는데, 적이 의복을 모두 벗겼으므로 이날 밤에 얼어 죽었다.” 하였다. ○ 청국 군사가 이날 철수하였는데 임금이 동교(東郊)로 나가 전송하였다. 청주는 살곶을 경유하여 양주(楊州)로 향하고 익담령(益潭嶺)을 넘어서 서쪽 길로 갔으며, 나머지 군사들은 날마다 얼마씩 나누어 철수하였는데 13일에야 철수가 끝났다. 몽고 군사는 강원도를 경유하여 북도(北道)로 들어 갔다. ○ 선전관에서 영을 내려 평양으로 가서 홍익한(洪翼漢)을 잡아 오랑캐에게 넘겨주게 하였다. ○ 청주가 강화도의 성내(城內) 사람 1천 6백여 명을 석방하도록 명하였다. ○ 조정에서 공유덕과 경중명 두 장수 (공유덕ㆍ경중명은 명 나라 장수로 오랑캐에 투항한 자들이다.)가 여러 섬을 약탈하려고 한다는 말을 듣고 사람을 보내 글을 가지고 가서 묻기를, “바다 안의 섬들이 장군의 군사 위엄을 듣고 두려워하여 안도하지 못하니, 너그러운 용서가 있기를 바란다.” 하니, 답하기를, “여러 섬에 관한 일은 듣기에 해괴하다. 우리가 어찌 침략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 3일에 용골대와 마부대 두 오랑캐가 역관 정명수(鄭命壽)를 이끌고 대궐로 왔으므로, 영의정과 좌의정이 나가 접대하였다. 김류가 용과 마에게 말하기를, “이제 두 나라는 이미 부자(父子)의 나라가 되었으니 무슨 말인들 따르지 않겠는가. 이 뒤로 가도(椵島)를 공격하고 남조(南朝)를 공격하는 것은 오직 명령대로 따르겠다.” 하였다. 홍서봉이 말하기를, “황금은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것이 아니니 한(汗)에게 아뢰어 감면하게 해 달라. 이것은 온 나라의 바람이다.” 하니, 명수가 말하기를, “본국에서 애당초 조목을 강정(講定)하던 날에 결정하지 못한 것을 내가 어찌 감히 용 장군에게 말하며, 용 장군은 또한 어찌 감히 한에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김류가 그 첩의 딸이 청에게 사로잡혀 있으므로 용ㆍ마 및 역관 정에게 심히 구차스럽게 청탁하여 임금한테까지 알려지기에 이르렀다. 임금이 또한 용골대에게 언급하였으나 용골대가 잠자코 대답하지 않은 채 나오자, 김류가 또 말하기를, “만일 속바치고 돌아오게 해주면 마땅히 천 금을 주겠소.” 하였으니, 포로로 사로잡힌 사람의 값이 오르게 된 것은 모두 다 김류의 말 한 마디에 말미암은 것이다. 김류는 또 명수를 껴안고서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이제 판사(判事)와는 한 집안의 일같으니, 공이 청하는 바를 내가 어찌 따르지 않으며, 내가 청하는 것을 공이 또한 어찌 차마 거절하겠는가. 내 딸이 속바치고 돌아오는 일에 모름지기 충분히 힘써주시오.” 하였다. 명수가 아무 말 없자 김류가 한참 동안 명수를 붙들고 애원하였지만 명수는 옷을 뿌리치고 가버렸다. ○ 세자가 저녁 때 대궐에 가니, 56명의 오랑캐가 따라서 모시고 왔는데, 얼마 안 있어 가자고 심히 급하게 독촉하였다. 명수 이하가 말에 걸터앉아 대궐 안을 길 가는 것처럼 출입하였다. 세자가 곧장 돌아갔다. ○ 이때 여염집들은 무너지고 향교동(鄕校洞)의 어귀에서부터 좌우에 있는 붓 가게의 행랑과 광통교(廣通橋) 가의 크고 작은 인가들이 모두 타버렸다. 닭ㆍ돼지ㆍ거위ㆍ오리도 전혀 볼 수가 없었고, 단지 개 짖는 소리만이 있었는데 사람 고기를 먹으며 미쳐서 날뛰고 있었다. ○ 병조 판서 신경진(申景禛)이 일찍이 정사하는 자리에서 노하여 문관들을 질책하기를, “쥐새끼 같은 무리들이 나라 일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다.” 하였고, 참찬 정기업(鄭基業)이 그 말을 찬양하여 자못 기세가 당당하였다. 좌랑 남노성(南老星)이 나가서 처자를 찾다가 붙들려 그날 저녁에 진작 들어오지 못하니, 기광(基廣)이 노성을 끌어내었다. 대개 기광은 오랫동안 사류(士類)들에게 배척당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무장(武將)에게 붙어 거칠고 패려함이 이와 같았다. 구굉(具宏)이 팔뚝을 걷어 붙이고 큰 소리치기를, “윤황(尹煌)이 늘 말하기를, ‘오랑캐가 만일 들어오면 나의 여덟 아들을 이끌고 나가서라도 쳐서 물리치겠다.’ 하였는데, 여덟 아들이 어디 있는가. 화친을 배척하기를 주창하여 이 지경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만일 윤황을 베지 않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크고 작은 무인들이 성을 지킨 공은 무장들이 이룬 것이고 오늘 성을 나온 것은 중흥과 같은 것이라 하면서 교만 방자하여 문사들을 노예와 같이 보니 사람들이 모두 하루도 보전하지 못할 것처럼 두려워하였다. ○ 6일에 임금이 서강(西江)의 잠두(蠶頭)에 거둥하여 구왕(九王) 한(汗)의 구제(九弟) 을 만났는데, 구왕이 먹을 것을 베풀어 시신(侍臣)들을 접대하였다. 시신들이 굶주리고 목마른 나머지 모두 달게 먹었는데, 먹지 않은 사람은 다만 신익성(申翊聖) 동양위(東陽尉)ㆍ이지항(李之恒) 한림 두 사람뿐이었다. ○ 8일에 구왕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갔는데, 세자와 빈궁과 대군과 대군 부인이 모두 북으로 갔다. 빈궁의 시비(侍婢)는 6명이고, 대군 부인의 시비는 4명이었다. 임금이 창릉(昌陵) 길 옆에 나아가 전송하였는데, 백관과 상하가 일시에 울부짖고 통곡하였으며 임금도 눈물을 떨어뜨렸다. ○ 가함 대신(假銜大臣)에 남이웅(南以雄), 대빈객(大賓客)에 박황(朴熿), 부빈객(副賓客)에 박노(朴), 무재(武宰)에 박종일(朴宗一)ㆍ이기축(李起築), 보덕에 황일호(黃一晧), 겸보덕에 채유후(蔡裕後), 필선에 조문수(曺文秀), 겸필선에 이명웅(李命雄), 문학에 민응협(閔應協), 겸문학에 이시해(李時楷), 사서(司書)에 서상리(徐祥履), 겸사서에 정뇌경(鄭雷卿), 설서에 유계(兪棨), 겸설서에 이회(李檜), 익위에 서택리(徐擇履)ㆍ양응함(梁應涵), 사어(司禦)에 허억(許檍)ㆍ김한일(金漢一), 부솔(副率)에 이간(李旰)ㆍ정지호(鄭之虎), 시직(侍直)에 이헌국(李獻國)ㆍ성원(成遠), 세마(洗馬)에 □, 강문명(姜文明), 사복시 주부에 정이중(鄭以重), 선전관에 위산보(魏山寶)ㆍ변유(邊宥)ㆍ구오(具鏊), 부장(部將)에 민연(閔埏), 의관에 정남수(鄭楠壽)ㆍ유달(柳達)을 명하였다. ○ 이때 춘성군(春城君) 남이웅을 가함으로 재상으로 삼고, 대사간 박황, 참의 김남중(金南重)은 품계를 높여 부빈객으로 삼고, 박노는 이 무렵에 석방되어 조정으로 돌아왔는데 고쳐 부빈객으로 삼은 것은 오랑캐들과 안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남중(南重)은 도로 체직되고 정뇌경은 자청하여 갔다. 《병자록》 ○ 장령 황일호(黃一皓)가 임련(林堜)이 병이 있기 때문에 대신 갈 것을 청하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일호는 어머니는 없고 친구만 있는 사람이다.” 하였다. 일호는 늙은 어머니가 있는 까닭이었다. 익위사 관원들이 대부분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하고 무사들에게 대신 하게 하니, 무사들이 서로 말하기를, “시대가 태평하면 자기네들이 좋은 벼슬을 하고, 난에 임해서는 우리를 구렁텅이로 밀어넣으니 분하지 아니한가.” 하였다. 이때 북으로 가는 것을 피하여 혹자는 몸을 빼어 도망가 숨고 혹자는 병을 빙자하고 면할 궁리를 하니, 식자들이 통탄하였다. ○ 청나라 사람들이 이른 아침부터 행군하여 큰 길에 세 줄을 지어 우리나라 사람 수백 명이 앞서 가고 한두 오랑캐가 뒤따라갔는데, 종일토록 그치지 않았다. 뒷날 심양에서 속바치고 돌아온 사람이 60만이나 되는데 몽고 군사에게 잡힌 자는 이 숫자에 들어 있지 않는다. 임금이 차마 보지 못하여 환궁할 때는 큰 길을 경유하지 않고 서산(西山)과 송천(松川)을 거쳐 산을 따라가 신문(新門) 필시(筆市)에 들어가니, 길가에 어떤 노파가 손바닥을 치면서 크게 통곡하기를, “여러 해 동안 강화도를 수축하는데 검찰사(檢察使) 이하가 날마다 술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더니, 마침내 백성들을 다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허물이냐. 나의 네 아들과 남편은 모두 적의 칼날에 죽고 이 한 몸만 남았으니,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자, 듣는 사람 중에 슬퍼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10일에 두 원수(元帥) 김자점(金自點)ㆍ심기원(沈器遠)과 부원수 신경원(申景瑗)과 강원 감사 조정호(趙廷虎) 등이 대궐에 나아가 대죄하니 모두 잡아 가두었다. 12일에 명하여 자점 등의 죄를 논하였는데, 모두 마땅히 군율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13일에 명하여 자점을 귀양보내고 나머지는 모두 중도부처하라고 명하였다. ○ 청국 군사가 돌아갔는데 오직 공유덕과 경중명은 가도(椵島)를 치려고 군사를 거느리고 진영에 남아 용산(龍山) 등지에서 배를 만들더니, 13일에야 비로소 배를 타고 내려갔다. ○ 19일에 이성구(李聖求)ㆍ회은군(懷恩君)ㆍ정태화(鄭太和)를 심양 사은사(瀋陽謝恩使)로 삼았다. ○ 25일에 내린 애통(哀痛)의 교서에, “백등(白登)의 위태로움보다 심함이 있었는데 겨우 청성(靑城)의 욕을 면하였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산성이 포위되었을 때 어떤 사람이 이 구절을 꿈꿨기 때문에 쓴 것이다. 이때 서북 지방에는 아직도 청국 군사가 있으므로 다만 삼남과 개성에만 교서를 반포하였는데, 청 나라 사람에게 빼앗겼다. 교서에, “뜻을 굽혀 구차히 사는 것은 뜻이 아니다.”는 말과 ‘숭정(崇禎)’이란 연호를 써서 조야가 크게 걱정하였는데, 청 나라 사람은 그 교서를 빼앗아 찢어서 화승(火繩)을 만들었다고 한다. ○ 임금이 친히 모화관(慕華館)에 임하여 군사를 호궤하고 장수와 사졸들에게 상을 주었다. 남한산성에 호종한 백관들에게 각각 품계를 2급씩 올려주고, 성첩을 지킨 호종인들은 공천(公賤)을 막론하고 각각 한 가지 기예로써 정시(庭試)에 응시하도록 명하였다. 재신(宰臣)과 시종 가운데 낙후한 자는 삭직하였다. ○ 조익(趙翼)과 백관으로 강화도에서부터 도망쳐 돌아온 자들도 아울러 나수(拿囚) 하도록 명하였다. [주D-001]북지왕 심의 죽음 : 촉(蜀) 나라의 후주(後主)가 진(晉) 나라에 항복하려고 할 때 그의 아들 북지왕이 말하기를, “부자 군신이 한번 싸우다가 죽을 것이지, 어찌 항복하리오.”하고, 소열황제의 사당에서 통곡하고 자기 처자를 먼저 죽인 뒤에 자살하였다. [주D-002]피폐(皮幣)로써 일을 삼아 : 주(周) 나라 태왕(太王)이 강한 적인(狄人)을 섬길 때 피폐와 주옥(珠玉)을 바쳤다. [주D-003]참호(僭號) : 여기서는 청 나라가 황제라고 칭한 것을 참람한 칭호라 한 것이다. [주D-004]3백 번이나 …… 뛰었습니다 : 춘추(春秋) 때에 진(晉) 나라 위무자(魏武子)가 용맹을 보이기 위하여, 가로 뛰고 세로 뛰기를 각각 3백 번 했다고 한다. 여기서는 분하여 뛴 것이다. [주D-005]방추(防秋) : 국경을 방위하는 군사를 철에 따라 교체하는데, 방추와 동방(冬防) 등이 있다. [주D-006]석진(石晉) : 후진(後晉)의 임금 석경당(石敬瑭)을 말하는데, 거란족과 맹세한 화친을 배반하였다가 거란에게 망하였다. [주D-007]옥루(屋漏) : 시경《(詩經)》에, “옥루에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 있는데, 옥루는 집안 한 구석을 말하는 것으로, 곧 천지 신명에게 양심의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 것이니 혼자 있는 집안 구석도 신명이 굽어본다는 것이다. [주D-008]사필(史筆)의 주벌 : 직접 목을 베는 것이 아니라 사필로 벤다는 말이다. [주D-009]혈식(血食) : 종묘나 서원에 제사지낼 때에는 피가 흐르는 생고기를 쓴다. [주D-010]참새를 …… 지경 : 당 나라 장순(張巡)이 성을 지키다가 양식이 다 되어 그물로 새를 잡고 땅을 파서 쥐를 잡았다고 한다. [주D-011]청성(靑城) : 송 나라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 나라 군사에게 잡혀 청성으로 갔었다. [주D-012]전조(前朝)의 화 : 고려 의종(毅宗) 때 정중부(鄭仲夫) 등의 무인들이 난을 일으켜 문관을 모조리 죽인 것을 말한다. [주D-013]생선을 …… 취할 때 : 《맹자》 고자상(告子上)에 나오는 말인데, “곰의 발바닥과 생선을 내가 다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할 바에는 생선을 버리고 곰의 발바닥을 취하겠다. 생(生)과 의(義)를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할 바에는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 하였다. [주D-014]백등(白登) : 한 나라 고조가 백등에서 흉노의 40만 군사에게 7일 동안 포위당했던 일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