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려실기술 제25권 仁祖朝故事本末 丁卯虜亂정묘년의 노란(虜亂)
일찍이 갑자년(1624) 가을에
도원수 장만(張晩)과 한명련(韓明璉)을 체직하고 이홍주(李弘冑)를 대신 임명하였다.
○ 기익헌(奇益獻)이 이괄(李适)과 한명련의 목을 베었다.
이때에 명련의 아들 윤(潤)은 탈출하여 귀성(龜城)에 숨었는데
한 해가 지나서야 부사 조시준(趙時俊)이 비로소 듣고 잡으려고 하니,
한윤이 기미를 알아채고 후금(後金)으로 망명해 들어가 강홍립(姜弘立) 등에게 말하기를,
“본국에서 변란이 일어나 당신들의 처자식을 모두 죽였습니다.
나와 함께 만주(滿州) 군사를 빌려 복수하십시오.” 하니,
홍립과 난영(蘭英) 등이 그 말을 믿고,
드디어 오랑캐 군사가 병인년(1626) 봄에 동침(東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일월록(日月錄)》에는 기축년 여름이라 하였다.
○ 평안 감사가 조정에 아뢰어 홍립의 첩의 아들 숙(璹)에게
당상의 벼슬을 주어 예법을 갖추고 오랑캐 땅에 들여보냄으로써
홍립을 후하게 대접하는 뜻을 보이고 아울러 적의 사정을 정탐하려 하였으나,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하담록(荷潭錄)》 《 속잡록(續雜錄)》
○ 《하담록》에 “강숙과 박난영의 아들 박립(朴雴)을 들여 보냈다.” 하였다.
○ 을축년(1625) 겨울에 하삼도(下三道 충청ㆍ경상ㆍ전라도)의 병사에게 영을 내려
병마를 이끌고 각각 도계(道界)에서 대기하도록 하였다가 병인년 2월에 파하였다. 《일월록》
○ 병인년에 요동 장수 서고신(徐孤臣)이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창주산성(昌洲山城)에 들어와 해를 넘겼는데, 정탐군 편에 우리나라에 보고하기를,
“근래에 오랑캐들이 병마를 정돈하고 군량과 무기를 준비하고 있으니
반드시 동쪽으로 침략하려는 계책이 있는 것이다.
귀국에서는 미리 방비책을 마련해 두십시오.” 하였다.
《조야기문(朝野記聞)》 《일월록》에
“고신은 그뒤 무진년 2월에 벽동(碧潼) 사람에게 타살되었다.” 하였다.
○ 《조야첨재(朝野僉載)》에 “고신은 곧 모문룡(毛文龍)의 부하 참장(參將)인데
창성(昌城) 서안(西岸)에 토굴을 파고 둔전(屯田)하여 자급자족하면서 수시로 출병하여
오랑캐 땅을 불지르고 약탈하였다. 뒤에 오랑캐의 습격을 받아 잡혀 갔는데,
얼마 안 있어 탈출하여 돌아와 남은 군사들을 모으다가 강도에게 살해당했다.” 하였다.
○ 그때 모문룡이 보낸 군사가 강을 건넜는데 조그만 공도 세우지 못하였다.
싸움에 패하여 그 부하 장수 시가달(時可達) 등 죽은 이가 많았는데도
싸움에 패한 사실을 숨기고 매번 승전했다고 아뢰고, 군수 물자를 엄하게 줄여서
이로써 권신들과 사귀어 공으로 도독(都督)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하담록》
○ 모문룡이 가도(椵島)에서 군사 5, 6만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교만 방자하여 우리나라를 향해 불측한 단서가 많이 있어,
서관(西關)의 장사(將士) 중에 의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한 항상 사람을 시켜 오랑캐 땅을 왕래하며 연락한 흔적이 있는 듯하였다. 《조야기문》
○ 병인년 5월에 오랑캐의 추장이 문룡에게 서신을 보냈는데, 극진히 꾀고 달래
이윤(伊尹)이 하(夏) 나라를 버리고 태공(太公)이 주(周) 나라로 돌아간
고사를 인용하기에 이르렀다. 그 서신에 또 말하기를,
“요동은 우리 선왕의 백성이니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남으로 여순(旅順)으로부터 북으로 개원(開原)에 이르기까지,
동으로 진강(鎭江)으로부터 서로 광녕(廣寧)에 이르기까지 모두 어루만져 기르고 있다.
모 장군은 지혜롭고 통달한 분인데 어찌 그리도 어두운가.
지금은 남조(南朝 명(明) 나라)가 멸망하는 때이다.
하늘이 멸망하도록 하는데 장군이 어찌 구할 수 있겠는가.
병진년(1616)에는 큰 바람이 불어 방죽이 무너지고 큰 나무가 뽑히고
궁전 누각 위의 마루에 있던 짐승 장식이 떨어졌고,
무오년(1618)과 기미년(1619)에는 옥하(玉河)의 두 줄기가 핏물이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이 명 나라를 멸망시킬 징조를 보인 것이 아니겠는가.
동부마(佟駙馬)와 요동과 광녕의 제장(諸將)이 모두 싸움터에서 사로잡혀
지금은 모두 현관(顯官)이 되었다. 장군이 만일 온다면
또 다른 장수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하였다.
《조야기문》 《일월록》 《속잡록》에도 있다.
문룡이 또한 우리나라가 의심하는 것을 알고 말하기를,
“오랑캐와 사자(使者)를 서로 통하지 않으면 무엇을 통해 그들의 사정을 알겠는가.” 하였다.
이에, 의주 부윤(義州府尹)과 평안 감사가 장계를 올려
모문룡이 오랑캐와 밀통한 의심할 만한 정상을 보고하였다. 아래에 자세히 나온다.
○ 병인년 5월에 건주(建州)의 오랑캐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등창이 나서 죽었는데,
죽음에 임하여 세자 귀영개(貴榮介) 다른 본에는 ‘永介’로 되어 있다.
둘째 왕자를 세울 것을 명하였다. 귀영개가 아우 홍타시(弘他時) 다른 본에는
‘弘太始’로 되어 있다. 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너는 지용(智勇)이 나보다 나으니 너가 모름지기 위(位)를 계승해야 한다.” 하니,
홍타시는 조금도 사양하지 않고 즉위하였다. 《병자록(丙子錄)》 혹은 말하기를,
“누루하치가 죽을 때를 당해 귀영개에게 이르기를
‘아홉 번째 왕자를 마땅히 세워야 할 텐데 나이가 어리니 너가 섭정하다가
뒤에 아홉 번째 왕자에게 전위(傳位)하라.’ 하였는데,
귀영개는 핍박을 받을까 혐의하여 드디어 홍타시[洪太氏]를 세웠다.” 한다.
《일월록》 외람되이 연호를 천총(天總)이라 하였다.
○ 이때 명 나라의 경략(經略) 원숭환(袁崇煥)이 광녕을 진압하였다.
이 때 나이 27세였다고 한다. 지려(智慮)가 밝고 통달하여
용병(用兵)이 귀신과 같아 전략을 많이 꾸미고 화구(火具)를 넉넉히 준비한 후
편안한 군사로써 피로한 오랑캐 군사를 맞아 싸우니,
오랑캐 군사가 한꺼번에 여러 번 쳐들어 왔으나 연달아 패하고 돌아갔다. 《조야기문》
○ 우리나라 역관(譯官) 한원(韓瑗)이 사신을 따라 명 나라에 갔다가 마침 숭환을 만났는데,
숭환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한원을 빌려 달라고 청하여 자기 진(鎭)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 때문에 한원이 그 전투를 목견하였는데,
숭환이 군사를 지휘하는 것은 비록 알 수 없었으나, 군중(軍中)이 매우 고요하고,
숭환이 두세 명의 막료들과 서로 한담을 나눌 뿐이었다. 적이 습격해 온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숭환이 가마를 타고 망루(望樓)로 가서 한원 등과 함께
옛 역사를 논하고 글을 이야기할 뿐 조금도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얼마 있다가
대포 한 방을 쏘니 포성이 천지를 뒤흔들므로 한원이 무서워서 머리를 들지 못하자,
숭환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적이 왔다.” 하였다.
곧 창문을 열고 내려다 보니 적병이 들에 가득히 몰려오는데
성 안에서는 전혀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그날 밤 적이 외성(外城)에 들어왔는데,
대개 숭환이 미리 외성을 비워두고 적을 유인한 것이다.
적이 병력을 합쳐 성을 공격하자 또 대포를 쏘니
성 위에서 일시에 불을 켜 천지를 환히 비추고 화살과 돌을 함께 떨어뜨렸다.
싸움이 바야흐로 치열해지자 성 안에서 성첩(城堞) 사이마다
매우 크고 긴 나무궤를 성 밖으로 밀어 냈는데,
반은 성첩에 걸치고 반은 성 밖으로 내놓으니 궤 속에 실상 갑사(甲士)가 엎드려 있다가
궤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서 화살과 돌을 던졌다. 이렇게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성 위에서 마른 풀과 기름과 솜 화약을 함께 던지니
얼마 후에 땅 속에 묻었던 포(砲)가 크게 폭발하여
성 밖에서 안팎으로 흙과 돌이 두루 날아 흩어졌다. 불빛 속에서 오랑캐들을 바라보니
무수한 인마(人馬)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적은 크게 꺾여 물러갔다.
이튿날 아침 적의 대열이 큰 들판 한쪽에 마치 잎사귀처럼 뭉쳐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숭환이 곧 예물을 갖추고 한 사람의 사자를 보내 인사하기를,
“노장(老將 누루하치)이 천하를 횡행한 지 오래 되었는데, 오늘 나에게 패전당했으니
아마도 운수인가 보다.” 하였다. 이때 누루하치는 먼저 중상을 입었는데,
이에 이르러 숭환에게 예물과 명마(名馬)를 갖추어 답례하고
다시 한번 싸울 기약을 하였으나, 그로 말미암아 분통이 나서 죽었다고 한다. 《일월록》
○ 서경동왕(黍莖董王) 봄에 재앙이 있었다. 《재상전고(災祥典故)》
○ 천계(天啓) 7년 정묘(1627) 1월에 오랑캐 기병 3만여 명이 압록강을 몰래 건너왔다.
《촬요(撮要)》에는 “오랑캐 아미타수(阿彌他水) 등이 수만의 기병으로
몰래 의주(義州)를 습격하였다.”고 하였다.
13일에 의주에 쳐들어 와서 먼저 사람을 시켜 남산(南山)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게 하기를,
“대금국(大金國) 이왕(二王) 귀영개 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니,
성안의 장수와 군사들은 무장을 해제하고 나와 항복하고,
남쪽 땅에서 온 군병들은 모두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말 발굽으로 짓밟아 마구 죽여 하나도 남기지 않겠다.” 하였다.
이날 부윤 이완(李莞)은 마침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었으므로
성중은 흉흉하여 공포에 떨 뿐,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 이완은 이순신의 조카로서 순신이 적의 탄환을 맞았을 때에
나이가 어렸는데도 능히 대신 군사를 통솔하여 적을 격파하여 매우 이름이 높았다.
혹은 말하기를, “이완이 고을 기생 기린(麒麟)에게 미혹되어
그때 마침 기린의 집에서 취해 잠들었는데, 별안간 적이 습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린이 끌어 일으켜 관아에 나아가 북을 치며 군사를 모았으나
적이 이미 쳐들어 온 뒤라 화살에 맞고 죽었다.” 한다. 《일월록》
○ 이에 앞서 이완은 오랫동안 군사들의 마음을 잃어
사람들이 오히려 적을 따를 뜻이 많았으므로 적병이 강을 건너자 군졸들이 흩어져 버렸다.
초저녁에 한윤(韓潤)이 중국 옷으로 변복하고 몰래 사냥꾼을 따라 들어와
적을 성으로 끌어들여 군기(軍器)를 불태우니 온 성 안이 크게 혼란스러웠다.
14일 새벽에 적이 성으로 육박하여 쳐들어오니,
반민들이 성문을 열고 적을 들어오게 하여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고
이완과 판관 최몽량(崔夢良) 등은 사로잡혔다.
적이, “남도 군사와 북도 군사로 각각 나뉘어 서라.”고 명령하자
남과 북의 군사가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각 좌우로 모이니,
적이 첨방군(添防軍)을 모조리 죽였다. 이어 이완을 삶아 하늘에 제사지내고 나서
몽량에게 항복을 권유하자 몽량이 분노하여 꾸짖기를,
“개 짐승들아, 어찌 이렇게까지 하느냐. 이웃 나라의 도리가 과연 이런 것이냐.” 하니,
적이 어지럽게 칼질하여 죽였다. 곧장 본토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서 그의 군대에 편입시켰다.
항졸(降卒)이 보니, 홍립ㆍ난영ㆍ오신남(吳信男)ㆍ한윤이 적 속에 와 있었다고 한다.
《조야기문》 《일월록》
○ 일찍이 홍립이 한윤과 함께 여러 차례 계책을 꾸며
오랑캐 추장에게 우리나라에 쳐들어 갈 것을 청하였으나,
누루하치는 그들이 제 나라를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꾸짖어 물리쳤다.
홍타시(弘他時)가 대신 위에 오르자
홍립과 한윤이 간청하여 드디어 이런 화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일월록》
○ 적의 추장이 서신을 보내어 힐책하기를, “너의 나라에는 네 가지 죄가 있다.
천극한[天可汗 오랑캐 황제의 칭호]이 돌아가셨는데도 즉시 조문하지 않았으며,
선천(宣川)의 전투에서는 우리가 하나도 살륙하지 않았는데도
곧장 사신을 보내어 사례하지 않았으며,
모문룡은 우리의 큰 원수인데도 국내로 맞아들여 먹을 것을 주고 돌보아주었으며,
요(遼)의 백성은 나의 적자(赤子 신하)인데 망명자를 초대하고 반란자를 받아들였으므로
내가 매우 한스럽게 여기노라.” 하였다. 《조야기문》 《일월록》
○ 병조 판서 장만(張晩)을 도원수로 삼아
종사관 이경필(李景弼) 등과 더불어 평안도로 나가게 하였다. 《일월록》
○ 장만을 파견하여
김기종(金起宗)ㆍ정충신(鄭忠信)ㆍ신경원 등을 인솔하고 가서 적을 막도록 하였다. 《하담록》
○ 각 도에 근왕병(勤王兵)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일월록》
○ 충신이 평안도로 갈 때 장유(張維)가 교외로 나가 전송하면서 함께 앉아 이야기하였다.
충신이 “이 오랑캐가 지금 침략해 온 것은 그 뜻이 화친을 요구하는 데 있으니,
모름지기 화친만 하면 즉시 돌아갈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그 말과 같이 되었다.
대개 충신이 오랑캐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계곡만필》
○ 적의 군사가 승승장구하여 진격해 오자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희건(李希建)이 수천의 군사를 데리고 용골산성(龍骨山城)을 지켰는데,
좌수(座首)가 적과 내응(內應)하는 음모가 있으므로 성을 버리고 탈출하였다. 《조야기문》
○ 이희건이 용골을 지키다가 얼마 안 되어 전사하니,
중군(中軍) 이충걸(李忠傑)은 성을 버리고 도망하고,
협수장(協守將) 장사준(張士俊)은 자기 처자가 사로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성을 바치고서 처자식을 찾아오려는 계략을 꾸몄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전 현감 정봉수(鄭鳳壽)를 추대하여 장수로 삼아 위에 아뢰니,
봉수를 방어사로 삼도록 명하여 김완(金莞) 이하 여러 장수가 모두 그의 지휘를 받게 되었다.
충걸과 사준은 뒤에 김완에게 참수당하였다.
《담운조공집(澹雲曺公集)》 《서학성군유사(書鶴城君遺事)》
○ 17일에 적병이 능한산성(凌漢山城) 곽산(郭山) 에 이르러 성을 둘러보고 부르짖기를,
“성중의 장수와 군사들이 성을 버리고 나와 항복하면
우리 대군(大軍)은 놔두고 지나가겠다.” 하니, 성중에서 답하기를,
“조정의 명을 받아 성을 지키니 마땅히 목숨을 바치겠다.” 하였다.
적이 군사를 휘몰아 진격해 들어오는데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와서 차례로 성에 걸치고
풀로 사람 형상을 많이 만들어 사닥다리 위에 줄지어 세웠다.
성중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막아 이미 비 오듯이 화살을 쏘았으나,
얼마 안 가서 군졸은 힘이 다하고 병기가 떨어지니 적이 성으로 올라와 마구 죽였다.
곽산 군수(郭山郡守) 박유건(朴有建) 《촬요(撮要)》에는 유건(由楗)으로 되어 있다.
과 정주 목사(定州牧使) 김진(金搢)은 집안 식구들과 함께 사로잡히자
항복을 애걸하고 머리를 깎았다.
적은 그의 처첩을 간음하고 항상 장막 속에 두고 행군할 때에는
곧 유건과 김진에게 각각 처첩의 말고삐를 잡게 하였다. 유건이 아내의 부정을 책망하니
처첩들은 남편의 불충을 꾸짖었다고 한다. 《조야기문》 《일월록》
○ 선천 부사(宣川府使) 기협(奇協)이 이 싸움에서 죽었다.
○ 적병이 도처에서 외치기를,
“오늘의 일은 오로지 전왕(前王 광해군)을 위하여 복수하는 것이다. 일이 이루어진 뒤에는
각 도의 군사들에게 10년 동안 납세와 부역을 면제하여 줄 것이다.”고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모두 역적 한윤(韓潤)이 가르쳐준 바라고 한다. 《조야기문》 《일월록》
○ 호남의 전 좌랑 오섬(吳暹), 검열 김여옥(金汝鈺), 정자 신응망(辛應望),
학유(學諭) 이상형(李尙馨)이 군사를 모집하는 통문을 냈다. 《일월록》
○ 21일에는 적 3만 6천 명의 기병이 먼저 안주성 아래에 이르렀고,
22일에는 청천강(淸川江)에 도착하여 크게 진을 쳤는데, 그 수를 셀 수 없었다.
성에서 수백 보 안에 진을 치고 성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빨리 나와 항복하라.”고 외쳤다.
이에 앞서 성 안의 여러 장수들이 서로 의논하여 성 안의 집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는데,
이에 이르러 적병이 말하기를, “사람의 집이란 지극히 귀중한 것인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스스로 불태웠는가.” 하였다.
성 안에서 군관을 시켜 중군(中軍)이라 칭하고,
성문을 나가 적의 사정을 탐문해 오도록 하였다. 가서 보니,
두 추장이 홍립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있고 난영 등은 땅에 앉아 있었다.
적의 추장이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무엇 때문에 호패(號牌)를 만들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이웃 나라와 신사(信使)를 통하지 않고 우호를 닦지 않는가.
더욱이 세 리의 성 안에 있는 수만 명의 무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망녕되게 항거하여 어육(魚肉)이 되는 화를 스스로 취하려 하는가.
너희 나라는 어찌하여 천시(天時)를 살피지 못하고 감히 큰 나라와 원수가 되려고 하는가.
어서 빨리 나와 항복하고 화친하기를 약속하라.” 하고는 술 석 잔을 먹이고 돌려 보냈다.
이 보고를 듣고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 떠는데,
목사 김준(金浚)은 팔뚝을 걷어 붙이며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우리들에게
작록(爵祿)을 주시고 간성(干城)의 직책을 맡겨 주셨으니,
마땅히 힘을 다하여 자기 한몸을 내던져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난을 당하여 모두 구차하게 살려는 마음을 갖는가.” 하고서,
곧 통역관을 성 위로 올려 보내어,
“우리나라는 다만 싸우는 것과 그렇지 않으면 죽는 것을 알 따름이며
본래 항복과 화친은 모른다.”고 외치게 하니, 적이 말하기를,
“내일 너희들을 도륙할테니 후회하지 말라.” 하였다.
다음 날 새벽에 연기와 안개로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데, 적이 나팔을 불고 북을 치면서
1만의 기병이 한꺼번에 쳐들어 오니 성 안에서 대포와 화살을 함께 쏘아
적병이 말에서 참호로 굴러 떨어져 죽는 자가 산처럼 쌓였다.
앞에서 엎어지면 뒤에서 쳐들어와 좌충우돌, 낙타까지 아울러 달리면서
긴 사닥다리를 운반하여 와서 일시에 성에 올라 칼날로 육박전을 벌이니,
형세가 바람 앞의 불같아 손을 쓸 수 없었다.
적이 마침내 성 안으로 뒤쫓아 올라와 마구 죽였다.
병사 남이흥(南以興)과 김준은 손에 화약 포대를 들고 성루(城樓)에 기대어 서서
어지럽게 화살을 쏘았는데, 적의 무리가 한꺼번에 에워싸고 달려 들었다.
김준 등이 드디어 화약 포대에 불을 지르니 집채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이흥과 김준 부자와 여러 장수가 모두 타 죽고, 적병으로 타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적은 성 안에 있는 사람을 모조리 죽여 버리고,
또 수색하여 수백 명을 잡아서 진 앞으로 몰아다가 죽이려고 하는데,
마침 원수부(元帥府)에서 화친했다는 글이 도착하니 풀어 주었다.
풀려 나온 백성들이 백 발자국을 다 가기 전에 추장이 급히 불러 말하기를,
“너희들은 어찌 다시 살려준 은혜에 감사하지 않느냐.
각기 고향에 돌아가 안심하고 생활하라.” 하였다
○ 이때 선전관이 명을 받들고 와서 성 안에 있었는데, 이흥이 말하기를,
“명을 받든 사람은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된다.” 하고,
이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서계하기를,
“외로운 성이 포위를 당하여 장차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만일 주장(主將)이 군사를 독려하여 와서 구원한다면
신 등은 함몰되는 환란을 면할 수 있을 것인데, 감사 윤훤(尹暄)은 군사를 옹위하고
하루면 올 수 있는 거리인데도 좌시한 채 구원해 주지 않으니,
신 등은 죽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일월록》 《조야기문》
○ 우후(虞侯) 박명룡(朴命龍), 병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강계 부사(江界府使) 이상안(李尙安), 자는 정이(靜而),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개천 군수(价川郡守) 전상의(全尙毅), 증산 현령(甑山縣令) 장돈(張暾),
정사공신(靖社功臣) 옥산군(玉山君) 태천 현감(泰川縣監) 김양언(金良彦),
자는 선익(善益), 평양사람. 본관은 진주(晉州). 진무공신 진흥군(振武功臣晉興君).
이에 이르러 힘껏 싸워 몸에 입은 상처가 10여 군데나 되었는데,
사방을 돌아봐도 구원병이 없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판중추부사에 추증되었다.
맹산 현감(孟山縣監) 송덕영(宋德英), 진무공신 연창군(延昌君), 본관은 죽산(竹山)이다.
영유 현령(永柔縣令) 송도남(宋圖南) 전 영장ㆍ박천 군수(博川郡守) 윤혜(尹惠)ㆍ
북영장 한덕문(韓德文) 훈련원 정에 추증되었다. 등이 함께 죽었다. 충민사(忠愍祠)에 들어감.
○ 《하담록》에는 다만 명룡, 상의, 도남, 돈 네 사람만을 기록하였다.
○ 적진에 보냈던 군관이 돌아오니 모든 사람들이 다 죽음을 두려워하였는데,
한 사람의 수령이 분연히 여러 사람 가운데로 들어와서 말하기를,
“신자의 도리가 이와 같은 것인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할 자리는 이곳이다.” 하니,
김준이 듣고 통곡하고 이로써 군사를 격려하였는데, 그 수령의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 시준 등이 이미 죽었으나 살갗은 아직 온전하였는데,
적이 물러가자 고을 백성들이 시체를 거두어 임시로 장사지냈다.
○ 처음에 남이흥은 군사와 백성을 보살피지 않고
자못 형벌을 가하고 죽이기를 일삼고 국방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어떤 사람이 국방에 소홀하여 패하게 되었다고 꾸짖자,
이흥이 말하기를, “공신들이 나를 시기하여 사람을 시켜 사찰하니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였다. 《일월록》
○ 이때 남이웅(南以雄)은 바다를 건너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옥하관(玉河館)에 머물렀는데,
문득 네거리에 남이흥이란 성명을 쓴 붉은 종이가 높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역관에게 물으니 말하기를, “이것은 너희 나라에서 죽음으로써 성을 지킨
신하 남이흥으로 이름을 써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인데,
바로 중국에서 절의를 포상하는 특전이다.” 하였다.
이웅이 비로소 그 일을 알고 이름 아래에 나아가 곡을 하니,
중국 사람들이 그가 이흥의 친척인 줄 알고 예의를 더 갖추어 대접하였다. 《약천집(藥泉集)》
○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과 구굉(具宏) 등에게
서울 포수와 경기 지방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임진(臨津)을 지키도록 하였다.
○ 심기원(沈器遠)을 도순검사(都巡檢使)로 삼아
종사관 이상급(李尙岌)ㆍ나만갑(羅萬甲)ㆍ이(李) 춘파당(春坡堂)의 아버지 와 더불어
남으로 내려가게 했다. 김장생(金長生)을 전라도 호소사(全羅道號召使)로,
장현광(張顯光)을 경상도 호소사로 삼고,
호조 판서 이서(李曙)에게 남한산성을 지키게 하였다.
○ 호패를 폐지하였다. 《전고(典故)》에 자세함
○ 귀양간 사람을 모두 풀어 주었는데, 오직 광해조의 흉당(凶黨)만은 예외로 하였다.
《조야기문》에도 있다.
○ 적병이 가도(椵島)를 침략하자, 섬에 나와 있던 중국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문룡은 철산 신미도(鐵山身彌島)로 옮겨 들어갔다. 《조야기문》 아래에 자세히 나온다.
○ 장만(張晩)이 평산(平山)에 이르러 대기하였는데,
평안 감사 윤훤(尹暄)은 적병이 이미 가까이 쳐들어 왔는데도 계엄을 선포하지 않아
군민(軍民)이 모두 흩어져 버렸다. 윤훤은 평양을 버리고 달아나고,
황해 병사 정호서(丁好恕)도 이 소식을 듣고 또한 황주(黃州)를 버렸다.
이 소식이 보고되자 조정에서 크게 놀라 김기종(金起宗)을 윤훤 대신 감사에 임명하고,
신경원(申景瑗)을 이흥 대신 병사로 삼고,
이익(李榏)을 호서 대신 황해 병사로 삼고, 도사를 보내어 윤훤과 호서를 잡아 왔다.
정충신을 병사로 삼아 부원수를 겸하게 하였다. 《하담록》 《일월록》
○ 처음에 평양에서 안주(安州)가 도륙되는 참화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거리마다 목놓아 슬피 울고, 평양과 안주는 서로 혼인 관계가 얽혀 있다.
적이 이미 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헛소문이 전해지자
군사와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흩어져 도망갔는데,
아무리 타일러도 막을 수 없었다.
윤훤이 화약 상자를 앞에 놓고 적이 성으로 접근해 오기를 기다려 목숨을 바치려고 하니,
부하들이 극력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종사관 홍명구(洪命耈)가 말하기를,
“군사도 없이 텅 빈 성에 앉아 죽음을 기다리는 것은 무익한 짓입니다.
마땅히 잠시 산중에 들어가서 산속의 군사를 모으고,
또 불러 모은 북관(北關)의 병사들이 며칠 안으로 와서 모일 것이니,
적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그 꼬리를 습격하면 기이한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죽기를 각오하고 한번 싸우고서 죽더라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윤훤이 그 말을 따랐다. 22일에 윤훤이 성천(成川)의 남창(南倉)에 이르렀는데,
이날 밤 3경(更)에 큰 별이 서쪽에서 떨어지며 벼락치는 듯한 소리가 들리자
식자(識者)들이 걱정하였는데, 얼마 후에 윤훤이 체포되었다.
○ 23일 영의정 윤방(尹昉)이 아뢰기를,
“듣건대, 평양을 지키지 못하였으니 신의 아우는 감사의 직에 있을 수 없습니다.
다른 장수를 보내소서.” 하였다.
병조 판서 이정귀(李廷龜)가 “길에서 들은 소문은 믿을 수 없으니,
의당 우선 결과를 보자.”고 하였으나, 최명길이 아뢰기를,
“이것을 다스리지 않으면 장차 다른 사람들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여,
드디어 나문(拿問)하라고 명하였다.
○ 양사가 합계하기를,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는
적이 침범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마자 앞장서서 감히 파천(播遷)할 계책을 주장하고,
임진은 요해지라 막아내기 어렵다는 의견을 힘써 주장하여
임금을 의혹시키고 인심을 놀래켜 도성을 붕괴시키고 종묘 사직을 파천하도록 하였으니,
중앙과 지방에서 분통스러워하여 모두 죽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시백(李時白 이귀의 아들)이 강변을 지키려고 하자 이귀가 제멋대로 막아서
사사로이 자기 자식만을 보호하고, 재신(宰臣)들을 면대하여 욕하였습니다.
양사에서 한창 탄핵하여 합계하고 있는데도
태연히 등대(登對)하니, 이귀를 귀양보내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 뒤에 서울을 버리고 피난가자는 청이 이귀에게서 나오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대신들이 또 대죄하니, 즉시 정계(停啓)하였다. 《연평일기(延平日記)》
○ 조정에서 피난하자는 의논이 있어 김상용(金尙容)을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삼고
여인길(呂䄄吉)을 부장으로 삼아 도성의 일을 맡도록 하였다.
○ 24일에 세자에게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명하였는데,
무군도체찰사(撫軍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 좌의정 신흠(申欽),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 병조 참판 이민구(李敏求),
순무사 심기원(沈器遠), 통어사 유비연(柳斐然),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이 따랐다.
○ 27일에 인조가 종묘 사직의 신주를 받들고 강화로 피난해 들어가니,
영의정 윤방(尹昉), 우의정 오윤겸(吳允謙), 이조 판서 김류(金瑬), 찬성 이귀(李貴),
병조 판서 이성구(李聖求), 예조 판서 이정귀(李廷龜), 호조 판서 김신국(金藎國),
참판 최명길(崔鳴吉)ㆍ김자점(金自點)ㆍ장유(張維) 등의 조정 신하들이 모두 따라갔다.
○ 죄기(罪己)의 교서를 내려 중앙과 지방의 신하와 군사와 백성에게 유시하였다.
○ 도원수가 조정의 뜻을 받들어 홍립과 난영의 아들에게 국서(國書)를 가지고
오랑캐의 진중으로 가서 적을 달래 퇴군(退軍)하게 하는 동시에
적의 실정을 탐문하도록 하였다. 홍립의 답서에 말하기를,
“저는 끈덕진 목숨이 죽지 않고 다만 화친하기를 기대했었는데,
마침내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군중(軍中)에서 이에 대해 언급되면 한결같이 화친의 의견을 말하여 죽음으로써 다투었습니다.
이제 두 집의 자식들이 국서를 받들어 칼날을 무릅쓰고 나온 것을 보니,
더욱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힘쓰겠다는 결심이 생깁니다.
삼가 바라건대 영형(令兄)은 온당하게 힘껏 화친을 찬성함으로써
조정의 근심을 풀도록 하십시오. 군사가 이미 깊이 들어와 군사들의 기운이 심히 날카로우니,
한갓 입으로만 변론을 일삼아서는 안되며,
특별히 진실한 호의를 내려 후히 예물을 보내십시오.
경조(慶吊)의 절차에 관해서는 뒤에 의논하기로 합시다.
차사(差使)가 꼭 어전에 나가 직접 문서를 전달하여
피차가 꼭 같이 화친하려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하니,
마땅히 깊이 생각하여 선처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자식은 한 번 만나 보고 곧 돌려보내니, 사세가 체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쪼개지는 듯하나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연평일기》
○ 홍립이 자기 집안이 모두 잘 있다는 사실과
반정(反正) 후에 선류(善類)들이 조정에 가득 차 있음을 자세히 알고
비로소 후회하는 마음이 생겼다. 속은 것을 크게 뉘우쳤다. ○ 《하담록》
○ 북병사 윤숙(尹璹)과 남병사 변흡(邊潝)이 군사를 거느리고 관서에 진주하였다.
이때에 임금이 유시하기를,
“하삼도(下三道 충청ㆍ전라ㆍ경상도)의 병사는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내려가 임진(臨津)의 수비를 도우라.” 하니, 제장(諸將)이 모두 명을 듣지 않고,
충청 병사만이 수천의 병사를 거느리고 동작(銅雀) 나루에 주둔하였으니,
공주(公州) 이상은 적막하게 방비가 없었다. 《일월록》
○ 일찍이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희건(李希建)이 산성에서 나와 근처에 머무르며
적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는데, 김기종(金起宗)이 경내에 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만났다.
마침 조정에서 희건의 관직을 빼앗고 백의종군(白衣從軍)하라고 명하니,
희건이 항상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며 적의 통로를 출입하면서
틈을 엿보아 쏘아 잡아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맹세하였다.
하루는 취기를 타고 말을 채찍질하여 나가자 기종이 극력 말리니, 희건이 말하기를,
“죄는 크고 공은 무너졌으니 마땅히 한 번 죽는 것이 통쾌할 뿐이다.” 하였다.
마침내 숙천(肅川) 경계에 이르러 적의 낙오병에게 살해 당했다. 《일월록》
○ 희건은 본관은 홍주(洪州)이고, 진무공신 홍양군(振武功臣洪陽君)이다.
○ 2월에 적병이 황주(黃州)에 와서 사신을 보내 화친할 것을 협박하면서
세 가지를 요구하였는데, 첫째는 땅을 떼어주는 것이고, 둘째는 모문룡을 잡는 것이며,
셋째는 군사 1만을 빌려 명 나라를 치는 것을 도우라는 것이었다.
당초에 적은 역적 한윤의 말을 듣고 우선 의주를 침범하여
우리나라의 군사력을 시험하려고 하다가, 와보니, 우리 군사가
놀라서 싸우기도 전에 무너지므로 이 때문에 깊이 들어왔다고 한다. 《조야기문》
○ 적병이 평산(平山)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강물이 넘치자 강을 건너 돌아갈 수 없었다.
비록 승세를 타고 전진해 왔으나 깊이 들어오는 것은 또한 본뜻이 아니므로
드디어 유해(劉海) 등을 파견하여 화친을 의논하였다. 《하담록》
○ 9일에 오랑캐가 유해와 홍립ㆍ난영을 차사(差使)로 보내
개성부(開城府) 풍덕(豐德)을 거쳐 행재소(行在所)에 들어오고, 11일에 강을 건넜다.
다음날 우리 측에서는 군사의 위엄을 갖추고 오랑캐의 차사를 접견하였는데,
임금이 답례를 하지 않자 오랑캐 차사가 크게 노하니 통역을 시켜 타일렀다.
진창군(晉昌君) 강인(姜絪) 홍립의 숙부 를 회답사(回答使)로 삼아
적진에 보내 위로하도록 하니, 유해 등이 돌아갔다. 유해는 본래 요동(遼東) 사람인데
후금(後金)에 투항하여 이왕자(二王子)의 사위가 되었다. 《일월록》
○ 일찍이 임금의 행차가 통진(通津)에 머무를 때 오랑캐 차사가 강화를 하고자 오려고 하니,
한창 강화를 하느니 안 하느니 논의가 분분하여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다.
최명길이, “전쟁이 나면 사신이 그 사이에 왕래하는 법이니
단번에 거절하는 뜻을 보이는 것은 부당하다.
우선 맞아 들여 그 말을 들어보고 처리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모든 사람의 뜻도 대체로 그러했으나 아무도 발언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명길이 그 의견을 주장하자 마침내 차사를 진해루(鎭海樓)에서 접견하고
이어 유해가 또 도착하니 강화가 드디어 이루어졌다.
이때 오랑캐 군사는 평산(平山)에 주둔하였는데, 강화와의 거리가 백여 리였다.
강화의 수비가 약하여 사람들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비록 화친을 배척하는 자들도 겉으로만 큰 소리를 칠 뿐
속으로는 사실 강화의 의논이 이루어진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믿을 수 없는 의론을 두려워하여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명길만은 일을 당하여 돌아보거나 피함이 없이 문득 맨먼저 발언하였는데,
마침내 이 때문에 탄핵을 받고 물러갔다. 《계곡만필(谿谷漫筆)》
○ 이때 도성에는 적병이 이미 가까이 들어와 일시에 무너져 흩어지자,
유도재신(留都宰臣) 김상용(金尙容)이 급히
어고(御庫)와 병조ㆍ호조ㆍ태창(太倉)ㆍ선혜청(宣惠廳)ㆍ경영(京營) 등의 모든 창고에
불을 지르도록 하니, 나라의 저축은 이에 탕진되었다. 상용이 즉시 강화로 달아나니
노량진 나루에 두었던 천여 석의 양곡도 모두 흩어져 잃어버리고
여인길(呂䄄吉)이 수 척의 배를 얻어 겨우 2백여 석을 싣고 갔다. 《조야기문》
○ 이때 세자는 전주(全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서울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듣고 좌수영(左水營)으로 향하고자 하니,
이원익(李元翼)이 아뢰기를, “인심이 떠나가고 흩어져 나라가 나라다울 수 없으니,
우선 적이 도성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다른 곳으로 피하는 계책을 세워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자, 세자가 따랐다. 《일월록》
○ 처음에 창성 부사(昌城府使) 김시약(金時若)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방어할 계책을 세웠는데, 군졸들이 겁을 내어 날마다 점점 흩어져 도망가고
정탐 나간 병졸이 돌아오지 않아 적에 대한 보고가 끊겼다.
이에 이르러 의주의 적 2백여 기병이 불시에 쳐들어와 선언하기를,
“너희 나라는 다 함락되고 국왕도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너희가 한 구석에 있는 외로운 성을 가지고 감히 큰 군사를 막겠는가.
빨리 나와 항복하라.” 하였다. 이날 밤에 군졸들이 성을 넘어 달아나자
시약이 군사로 하여금 경계를 엄하게 하고 단속하도록 하니,
성중 군졸들이 일시에 창을 거꾸로 들고 반역하자, 시약이 말하기를,
“나는 지방관으로서 마땅히 이 땅에서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가든지 머물든지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적이 성을 넘어가는 장수와 군졸을 마구 죽이고 이어 성 안으로 달려들어와
시약 등이 사로잡혔다. 적이 포박을 풀어주면서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자
산 채로 의주로 끌고가 죽이고, 두 아들은 머리를 깎아 노예로 만들었다. 《조야기문》
○《촬요(撮要)》에는, “오랑캐의 한 부대가 쳐들어 오니
창성 부사 김시약이 달아나다가 붙잡혀 죽었다.”고 하였다.
○ 12일에 큰 비바람이 불어 강화의 선박들이 많이 부서지고 사람들이 많이 익사하였다.
○ 16일에 윤훤(尹暄)을 강화에서 효수(梟首)하고,
정호서(丁好恕)를 경성(鏡城)에 안치(安置)하였다.
○ 윤훤의 형인 윤방(尹昉)은 이때 영의정이었고
그 일가친척이 대부분 궁중에 연줄이 닿아 있었다.
윤훤은 그 죄가 본시 죽음에 이를 것은 아니었는데, 임금이 그의 일가친척이
강성하기 때문에 반드시 죽여서 여러 사람에게 위엄을 보이려고 하였다.
대간들이 비록 규례에 따라 죽여야 한다고 아뢰었으나 속으로는 사실 차마 그럴 수 없어
이튿날 정계(停啓)하기로 약속하였는데, 임금이 그것을 알고 갑자기 윤허하는 전교를 내렸다.
이때 윤훤은 한창 심명세(沈命世)와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윤허의 명령이 내렸다는 말을 듣고 명세가 통곡을 하니, 윤훤이 천천히 말하기를,
“일이 이미 이에 이르렀는데 어찌 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형을 받으니,
사람들이 대부분 원통하게 여겼다. 김상헌이 그때 북경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돌아와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조정의 공론이 밝지 않아 윤차야(尹次野 윤훤의 자)로 하여금 죽음을 당하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친구들의 수치이다.” 하였다. 《일월록》
○ 대간이 호서(好恕)를 죽일 것을 아울러 청하였으나 임금이 특별히 용서하였는데,
이는 대개 호서가 예전에 이괄의 사자를 벤 충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담록》
○ 이때 대간들이 윤훤이 지방을 지키지 못한 죄를 처단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으므로 대간이 장차 정계하려는데,
마침 정혜옹주(貞惠翁主)가 대궐에 들어가 구명운동을 하였다.
옹주는 윤훤의 조카인 신지(新之)의 아내이며 인조의 고모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조정의 일은 마땅히 공론에 붙여야지, 내가 어찌 감히 올리고 내리고 하겠는가.
고모가 대궐에 들어온 뒤에 만일 윤훤의 죽음을 용서해 준다면
사람들이 반드시 나를 사사롭다고 여길 것이다.” 하였다.
다음날 드디어 대간의 계사를 윤허하였는데,
대개 옹주의 말이 임금을 격발시킨 것이다. 《공사견문(公私見聞)》
○ 홍명구(洪命耈)가 윤훤을 조문하기를,
“공의 심사는 하늘과 땅의 신령이 실로 굽어보시는 바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으로 하여금 평양에서 무익한 죽음을 맞게 하여 유감이 없게 할 것을,
당시에 내가 잘못 공에게 탈출하게 하였다. 아무리 후회한들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그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명구가 금화(金化)에서 순절하였는데,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오늘에야 윤 체찰을 저버리지 않았노라.” 하였다.
○ 20일에 유해(劉海)가 또 평산에서 강화로 들어와 임금을 뵙고
직접 문서를 전하겠다고 요청하니, 임금이 부득이 따랐다. 서로 읍례를 행하는데,
사신으로 온 오랑캐 한 사람이 바로 경성(鏡城)에서 투항한 백성 박중남(朴仲男)이었다.
오랑캐의 차사(差使)가 천계(天啓 명 나라의 연호) 연호를 쓰지 말라고 협박하고
또 왕자를 볼모로 삼겠다고 요구하니,
조정에서는 왕자가 어리기 때문에 갈 수 없다고 답하였다.
종실 원창령(原昌令) 의신도정(義信都正) 비(備)의 아들 을 왕제(王弟)라 일컫고
군(君)에 봉하고, 이홍망(李弘望)을 통신사로 삼고,
목면(木綿) 3백 필, 흰 모시 3백 필, 호피(虎皮) 백 령(令), 표피(豹皮) 백 령을 예단으로 하고,
우봉 현감(牛峯縣監) 이상룡(李祥龍)을 차원(差員)으로 삼아 적진에 보냈다. 《속잡록》
○ 유해가 글을 써서 보여주었는데, 그 대략에,
“나는 한(漢) 나라 사람으로서 잠시 오랑캐 땅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어찌 잠시 동안 유리(流離)해 있다 하여 조선에 대해 위험에서 붙들어주는 도리를 잊겠습니까.
이번에 온 것도 몇 가지 조항을 의논하여 화친을 이룩해서,
옛 사람들이 분란을 종식시켜 주는 의의를 본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가 듣건대, 귀국의 왕은 총명함이 만리를 내다보고
여러 사람의 의논을 홀로 결단하신다 하니,
만일 한때 굽히는 수치를 참는다면 반드시 장구한 계책을 펼 것입니다.
이것은 강한 자를 만나면 피한다는 도리입니다. 어찌 아름답지 않겠습니까.
지금 농사가 눈앞에 닥쳐, 백성들이 혹은 산속으로 도망가고
혹은 바다 섬에 숨어 들어가고 혹은 가업(家業)이 산실되고 혹은 형제가 사로잡혀 있으므로
날마다 모두 목을 길게 빼고 ‘화(和)’ 한 글자를 바라고 있습니다.
지금 귀국의 왕께서 어찌 한 가지 접견의 예(禮) 때문에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생각하지 않으니, 이를 유독 어찌 차마 하십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금(金) 나라 사람들은 마음씀이 바르지 못하여 다시 한번 격동하면
형세가 반드시 서울을 함락시킬 것이고, 서울이 한번 떨어지면
위태롭기가 마치 계란을 포개 놓은 것과 같을 것입니다.
오직 서울 근교만 해를 입을 뿐 아니라 팔도의 백성들이 또한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
기회가 한번 어그러지면 화가 차마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 이때 유해가 임금을 나와서 뵙기를 굳이 청하니, 허락하였다.
유해가 나와서 뵙는데 임금이 용상에 앉아 움직이지를 않자,
유해도 선 채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지 않으면서 성난 기색을 마구 드러냈다.
이에 장유(張維)가 아뢰기를, “유해가 무례하니, 전하께서 한번 일어나면
국가의 체모가 손상되고 큰일이 틀려질 것입니다. 해를 물리쳐 내보내소서.” 하였고,
여러 사람이 나아가 모두 장유의 말과 같이 아뢰자, 유해는 본시 영악한 사람이어서
문득 그 뜻을 알아채고 앞으로 나와 자리로 나갔다.
뒤에 유해는 오랑캐 속에서 탈출하여 돌아가 피도(皮島)에 머물러 있었는데,
매양 그때의 일을 말하며 우리나라를 체통 있는 나라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계곡만필》
○ 일찍이 원창 령(原昌令)이 갈 때에 오랑캐가 임금의 친동생을 청했으나
조정의 의논이 어렵게 여기자, 유해가 손바닥에 ‘가(假)’ 자를 써서 보여
마침내 원창 령을 보냈다. 《계곡만필》
○ 이때 홍립은 그대로 행재소(行在所)에 머물러 있고 난영은 적에게 돌아갔는데,
적이 선언하기를 “화친은 비록 이루어졌으나 우선 평양에 머물러 있다가
풀이 자라기를 기다린 후에 들어가겠다.”고 하였다.
○ 통영(統營)에 하유하여 병선(兵船)을 보내지 말도록 하는 동시에
각 도의 호소사(號召使)에게 모집한 군사들을 보내지 말도록 하고,
모두 양곡으로 대신 바치도록 하였다. 《조야기문》
○ 화친의 의논이 정해지자 사람들이 모두 몹시 한탄하였다.
사간 윤황(尹煌)이 아뢰기를, “우리나라가 적에게 명분 없는 화친을 청하였으니,
이것이 과연 항복이 아닙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윤황의 발언이 흉악하고 참혹하니 ‘항(降)’ 자의 뜻을 물어 보고 아뢰도록 하라.” 하자,
회계하기를, “신이 실언하였으니, 신의 머리를 베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삭탈 관직하라.” 하였으나, 양사가 간쟁(諫爭)하여 다시 복직되었다. 《일월록》
○ 함경 감사 남이공(南以恭)이 영흥 부사(永興府使) 이찬(李穳)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도록 하였으나, 이찬이 오지 않았다.
조정에서 이공이 국난(國難)에 달려오지 않았음을 꾸짖으니,
이공이 죄를 이찬에게 전가하자, 이찬을 참형에 처할 것을 논계하였다. 《조야기문》
○ 윤도ㆍ변흡 등이 황해도에 도착하였으나
조정에서 화친을 의논하였기 때문에 감히 싸우지 못하고
황해 병사 이익(李榏), 부원수 정충신(鄭忠信), 황주 판관(黃州判官) 이숙(李䎘),
문화 현령(文化縣令) 경신후(慶信後), 봉산 군수(鳳山郡守) 나덕헌(羅德憲),
신계 현령(新溪縣令) 이이성(李以省)과 함께 수안(遂安)
다른 본에는 신계(新溪)로 되어 있다. 에 주둔하였다.
오랑캐가 화친을 맺고 물러가면서 그곳을 지나가는데, 그때 충신 등은 갑옷을 벗어 놓고
군사를 쉬게 하고 있다가 오랑캐의 무리가 갑자기 이르자 일시에 흩어져 달아났다.
윤도는 미처 달아나지 못하여 휘하의 장병들을 거느리고 문루에 올라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울 계획을 하였는데, 오랑캐가 “화친이 이미 성립되었다.”고 말하여
청하여 서로 만나 보고 떠났다. 이때 장만은 평산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봉 현령(牛峯縣令) 이상절(李尙節)이 도망쳐 와 장만에게 보고하기를,
“모든 장수가 모두 오랑캐 군사에게 붙잡혔습니다.” 하니,
장만이 급히 행재소에 아뢰어 사람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기문(記聞)》에는 “이익 이하 모두가 사로잡혔는데
신후는 적에게 화살을 쏘다가 힘이 다하여 해를 입었고,
덕헌은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운운.” 하였다.
이때 김시양(金時讓)이 호소사(號召使) 정경세(鄭經世)와 더불어 함창(咸昌)에 모였는데,
좌중이 이 소식을 듣고 모두 깜짝 놀라니, 시양이 말하기를,
“이 소식은 반드시 헛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이 비록 싸우는 데는 능하지 못하나
달아나는 데는 능하니, 성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었다면 혹 이런 염려가 있지만
들판에서 오랑캐를 만났는데 어찌 모조리 사로잡혔을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다음날 서쪽으로부터 소식이 왔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조야기문》 《하담록》
○ 이때 적이 평안도는 이미 점령하였다 하며
자기들에게 항복해 붙는 자들로써 각 고을의 장수로 삼고 유수(留守)하게 하였는데,
곧 평양은 전 만호 강귀룡(姜貴龍)이, 안주(安州)는 첨지 김덕경(金德卿)이,
정주(定州)는 당시의 좌수(座首)가, 선천(宣川)은 장관 정사량(鄭士良)이,
의주(義州)는 천총 최효일(崔孝一)이 홍립의 분부를 받고
홍립한데 기(旗)를 받아 성 위에 달고, 주군(州郡)의 인신(印信)을 마음대로 쓰며,
제멋대로 한인(漢人 명 나라 사람)을 죽이고 약탈하며
백성들의 재물을 겁탈하는 것을 일삼으며, 창고를 봉하여 닫고 적의 재물을 지켜 주었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이 다투어 서로 붙었다.
이에 감사 김기종이 귀룡을 목 베어 효시한 후 치계(馳啓)하였다. 《조야기문》
○ 22일에 유해(劉海)가 다시 와서 퇴군(退軍)한다고 확고하게 말한 후에도
해주(海州)ㆍ연백(延白) 등지에서는 노략질이 날로 심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 천계(天啓)란 연호를 없애라고 위협하며 여러 날을 두고 서로 힐책하였는데,
유해가 말하기를, “중국의 게첩(揭帖)과 같이 연호를 쓰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조정에서 부득이 따랐다. 유해가 가지고 온 오랑캐의 서신에,
“대금국(大金國) 이왕부(二王府)는 조선 국왕 휘하에 서신을 보내노라.
화친은 두 나라가 원하던 바이나 맹서(盟書)가 없는데 어떻게 그 화친을 믿겠는가.
근일에는 조선에서도 군비가 갖추어지고 군졸들도 단련되어 반드시 서로 싸우려 할 것이니,
한번 승부를 겨루어 보는 것도 대장부의 일이로다.
곧장 왕제(王弟)와 대신들을 돌려 보낼 것이니, 날짜를 정하여 만나 싸우자.
실지로 진실한 화친을 하고자 한다면 속히 맹약을 하라.
두 나라의 휴전은 곧 백성들의 행복이다.” 하였다.
유해가 역관 장예충(張禮忠)을 불러 맹약에 임할 것을 요구하자, 예충이 답하기를,
“이미 왕자를 보냈으니 맹약에 참석할 왕자도 없고,
국서(國書)로 화친을 약속했는데 이 밖에 또 무슨 맹약이 있겠는가.” 하니,
오랑캐가 발끈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하면 화친이 성립되지 않을 것이오.” 하였다.
조정의 의논은 굳게 거부하며 따르지 않자, 오랑캐의 차사가 홍립을 보고자 하므로
허락하였더니, 마침내 홍립과 함께 갔다. 《조야기문》 《일월록》
○ 이때 평산의 적이 먼저 물러갔다. 유해와 홍립이 도중에서 회서(回書)를 보냈는데,
어투가 흉악하고 교활하였다. 오랑캐의 서신이 또 왔는데,
화친이 당초의 뜻과 크게 어긋난다고 하면서 우리나라가 무성의하다고 책망하자,
답서를 보내기를, 우리나라에서는 명 나라를 섬긴 지 2백 년이며
은혜를 받은 바가 깊고 중하다고 하였다.
28일에 홍립과 유해는 오랑캐의 차사 13명과 함께
다시 강화로 와서 맹약하라고 협박하였다. 《조야기문》
○ 이때 유해는 관사에 머물러 있었는데, 장유ㆍ이정귀ㆍ김신국이 명을 받들고 만나 보고
화친의 맹약을 강정(講定)하려 하였으나, 김과 이는 말이 능란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유가 유해를 상대로 담판하였다. 그때 유해가 맹약 조건을 몇 가지 내놓았는데,
그 하나는 우리나라로 하여금 중국과 절교하라는 것이었다.
이에 장유가 큰 소리로 통렬히 거부하니, 오랫동안 말이 오가다가
유해가 《논어》에 ‘제 환공(齊桓公)이 공자(公子) 규(糾)를 죽였을 때
소홀(召忽)은 순사(殉死)하였지만 관중(管仲)은 죽지 않았는데도
공자가 관중을 어질[仁]다’고 한 것을 들어서 말하였는데,
대개 이 말로 유혹하며 협박한 것이었다.
이에 장유가 즉시 《논어》에 ‘예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기 마련이지만
사람은 신의가 없으면 행세할 수 없다.’는 말을 들어 반박하니, 유해가 말문이 막혔다.
○ 화친의 의논이 결정되자, 유해가 임금이 친히 맹단(盟壇)에 나오기를 청하였다.
신하들 중에, 간혹 당(唐) 나라 태종(太宗)이 위교(渭橋)에서
회흘(回紇)과 맹약한 일을 인용하면서 마땅히 유해의 청을 허락하라고 말하는 자도 있었다.
장유와 이경직(李景稷)은 오랑캐 차사의 접대를 주관하고 있었는데, 아뢰기를,
“이미 전하께서 상중(喪中)에 계시다고 해명하였으니 가벼이 허락하지 마소서.” 하고,
한편으로는 유해에게 극력 쟁론하니, 드디어 유해도 억지를 쓸 수 없어서
마침내 대신(大臣)에게 맹단에 임하도록 하였다. 오랑캐의 뜻이 본래 화친하는 데 있었고,
유해도 조선과 오랑캐 사이에서 또한 화친을 성립시키는 일로
자기의 임무를 삼고 있었기 때문에 무릇 예절(禮節)의 문제로 쟁론할 때에는
많이 우리나라의 주장을 들었다. 《계곡만필(谿谷漫筆)》
○ 유해가 또 우리에게 보낸 답서에서 명 나라 연호를 쓰지 못하게 하니,
조정에서는 장차 그대로 하려 하였다. 장유가 그때 마침 병석에 있었는데, 차자를 올리기를,
“전부터 서신을 통할 때에 이런 예(例)를 썼다면 연월을 쓰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를 따르지 않을 수 없다.’ 하여
방편으로 이 예를 시작해 낸다면 사리에 어떠하겠습니까.
설령 이 말을 따르지 않아 화친하는 일이 성립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대방(大防)을 결코 가벼이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그들의 군사가 지치고 피로하니, 이와 같은 한 가지 일을 다투느라
마침내 화친하는 일을 그르칠 리도 없을 듯한데 어찌 경솔하게 스스로 겁내어
우리가 지켜야 할 바를 잃기에 이르겠습니까.
사대(事大)의 도리는 연호가 제일 중요한 것이니, 한번 그르치면 후회 막급입니다.” 하니,
임금이 묘당에 의논하게 하여 마침내 장유의 말을 채택하였다. 《백헌집(白軒集)》
○ 3월 3일에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오랑캐와 맹약을 강정하게 하였는데,
단(壇)을 강화 서문 밖에 쌓고 밤중에 단 위에서 회합하여,
흰 말과 검은 소를 죽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서약하였다. 금 나라의 서약문에는,
“조선 국왕과 대금국의 두 왕자는 서약하노라.
우리 두 나라는 이미 강화하였으니 이제부터 한 마음으로 뜻을 같이 할 것이다.
조선국에서 만일 금 나라와 원수를 맺어 병마(兵馬)를 정비하고 새로 성을 쌓아
그 마음가짐이 좋지 못하면 황천(皇天)이 화를 내릴 것이고,
만일 두 왕자가 불량한 마음을 먹어도 황천이 화를 내릴 것이다.
만일 두 나라의 두 왕이 동심동덕(同心同德)하여 공평한 도리로 같이 처하면
용천(龍天)이 보우하여 반드시 복을 얻으리라.” 하였고, 우리나라의 서약문에는,
“조선국은 이제 정묘년 갑진월 경오일에 금국과 서약하노라.
우리 두 나라는 이미 강화를 강정하였으니
이제부터 두 나라가 각각 서약을 준수하여 각각 국경을 보전할 것이다.
만일 우리나라가 금국과 원한을 맺어 화친을 배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곧 황천이 화를 내릴 것이요,
만일 금국에서 불량한 마음을 일으켜 화친을 위반하고 군사를 일으켜 침범한다면,
또한 황천이 화를 내릴 것이다.
두 나라의 임금이 각각 착한 마음을 지키면 함께 태평을 누리리라.” 하였다.
빈청에 지어 바쳤음.
또 대신들이 금 나라의 여덟 대신들과 사사로이 글을 만들어 서약하였다.
이날 유해 등이 기뻐하며 돌아갔고 홍립도 따라갔는데,
포로가 된 남녀를 돌려보내면서 지나가는 길에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였다. 《조야기문》
○ 병조 판서 이정귀, 호조 판서 김신국, 이조 판서 장유가 연미정(燕尾亭)으로 가서
오랑캐의 차사를 보고 화친의 약조(約條)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평산을 한 발자국도 넘지 않겠다고 맹약하였다.
다음날 철병하여 돌아가면서 형제의 나라로 칭하고,
철병한 뒤에는 다시 압록강 기슭을 넘지 않기로 하였다. 또 우리나라에서,
“명 나라는 바로 우리와 부자의 나라로서 2백 년 동안 정성껏 복종하고 섬겼으니,
이제 너희 나라와 화친하였다고 해서 배반할 수는 없다.” 하여,
유해와 용골대(龍骨大) 등이 연일 극력 다투었는데,
유해가 문득 두 손을 마주잡고 말하기를,
“조선국은 예의뿐만 아니라 충신(忠信)이 천하에 으뜸이다.
외로운 섬(강화도)으로 달아나 숨어 나라의 위태로움이 마치 한 올의 머리카락과 같아,
우리 군사가 만일 한번 걷어차면 개성(開城)과 서울이 문득 잿더미로 화하고
군사의 칼날이 온 나라에 번득일 것이니 나라의 존망이 지척에 있는데도
오히려 신의를 지켜 끝내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으니 진실로 공경할 만하다.
내가 마땅히 이런 뜻을 두 왕자에게 고하겠다.” 하고,
즉시 글을 써서 밤중에 두 왕자에게 한 기병(騎兵)을 달려 보내 물으니,
두 왕자가 답하기를, “조선이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음은 또한 좋은 생각이니
그대로 맡겨두고, 단지 우리와 화친하는 맹약을 굳게 결정만 하고 오라.” 하였다.
유해가 세폐(歲幣)를 글로 써서 보이는데 너무 많았다.
이에 정귀 등 세 사람이 힘써 다투어 세폐를 모두 그만두게 하고,
다만 송례(送禮)라고 일컫고 약간의 물건으로 호군(犒軍)하겠다 하니,
오랑캐의 차사가 그대로 따랐다.
적이 회맹(會盟)하려고 할 때에 흰 말을 죽이고
조선 임금이 또한 맹약에 임하여 삽혈(歃血)하기를 요구하니,
조정의 의논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하교하기를,
“이와 같은 인심과 병력(兵力)과 군율(軍律)로써 과연 이 적을 대항할 수 있겠는가.
이미 그렇지 못하여 적과 화친을 하고 하늘에 맹서할 때 어찌 직접 나가지 않겠는가.
비록 지금 세상이 그르다 하고 후세가 비평한다 하더라도 내 마땅히 맹약에 임하겠다.” 하니,
정귀가 이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의 전교가 이에 이르시니, 이것은 참으로 회복의 기틀이 되겠습니다.
다만 전하께서는 또한 상중에 계시어 친히 삽혈할 수 없다는 뜻을
이미 오랑캐 차사에게 역설하였으니, 이것은 신이 담당하겠습니다.” 하였다.
○ 임금은 다만 본부(本府 강화부)의 대청(大廳)에서 분향(焚香)만 하고
승지를 시켜 서약문(誓約文)을 읽게 하고,
정귀와 오윤겸(吳允謙)ㆍ김류(金瑬)ㆍ이귀(李貴)ㆍ신경진(申景禛)이
서교(西郊)의 단소(壇所)에 모여 맹약하였다.
그후 유해가 명 나라에 도로 들어가
우리나라가 명 나라를 배반하지 않은 상태를 극론하였다. 《월사집(月沙集)》
○ 《하담록》에는, “윤방(尹昉)ㆍ오윤겸(吳允謙)ㆍ이성구(李聖求)ㆍ최명길(崔鳴吉) 등이
회맹하였다.” 하였다.
○ 적병이 물러가 안주로 향하는데 정충신(鄭忠信)ㆍ윤숙(尹璹) 등이 진을 치고 시위하니,
적이 먼저 돌격 기병으로 우리 진을 빙 둘러 달리면서
윤숙 등을 깃발 아래에 불러 놓고 묻기를,
“화친을 약정하고 물러가는데, 너희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를 상대하느냐?” 하자 윤숙이 답하기를,
“국토를 지키는 장수는 지키는 자리를 떠날 수 없으므로 우선 명령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어찌 감히 싸움을 하겠는가.” 하니, 오랑캐 추장이 말하기를,
“비록 화친이 정해졌다고는 하지만 너희 군사가 매우 성대하니,
두 진이 한번 교전하여 자웅을 결정하여 봄이 어떨까?” 하자, 윤숙이 답하기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니, 오랑캐 추장이 놓아 주고 갔다. 《조야기문》
○ 처음에 적이 서흥(瑞興)과 평산에 주둔할 때,
유격 기병대가 잠깐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서 소와 말과 곡식과 여자를 탈취하여
묶어 몰아가고, 어린아이는 활줄로 손바닥을 꿰어 끌어갔다.
이에 평안도 한 도는 보전된 땅이 전혀 없었는데,
다만 성천부(成川府) 한 지방만은 적과의 거리가 매우 먼 까닭에
수령과 대소의 장사(將士)들이 모두 이곳에 모였다.
적은 화친하는 일이 비록 성립되었다 하나 대동강 서쪽은 돌려줄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황해도에서는 노략질이 끊이지 않았으나 관서(關西)에서는 노략질이 심하지 않아
백성들로 하여금 안도(安堵)하도록 하였다.
평양에 잔류한 적 3만 1천 5백 명이 각각 여자를 서넛을 거느리고 농사를 크게 지었는데,
이 달 20일 후에 이르러 관사(官舍)를 불태워 헐고 안주로 철수하여 돌아갔다. 《일월록》
○ 의주에 머무른 적은 그 주민 중에서 독농관(督農官)을 정하여
다섯 가구에 소 한 마리를 주어 농사짓게 하였다. 《일월록》
○ 대마도(對馬島)에서는 우리나라에 오랑캐의 난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조총(鳥銃) 3백 자루, 장검(長劍) 3백 자루, 화약 3백 근을 공물로 바치고,
이어 구원하러 나올 것을 청하였다. 《조야기문》 《국조전모(國朝典謨)》
○ 이때 영남 사람 이척연(李惕然)이란 자가 행재(行在)에 들어가 통곡하면서
주화(主和)한 간신을 벨 것을 청하는 소를 세 번 올렸으나,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일월록》
○ 13일에 세자가 전주(全州)를 출발하여 강화로 향하였고,
21일에는 임진(臨津)의 방위군을 해산하였다. 《조야기문》
○ 4월에 강화로 온 각도의 근왕병(勤王兵)을 돌려보내는 한편,
10일에 임금의 행차가 강화를 출발하여 통진(通津)에서 머무르고,
11일에 김포에 머물러 장릉(章陵)에 제사지내고, 12일에 환도하였다. 《일월록》
○ 강화를 승격시켜 유수부로 삼았다.
○ 처음에 모든 성이 무너지고 군사들이 물결처럼 흩어졌는데,
철산(鐵山) 사람 전 현감 정봉수(鄭鳳壽)가 흩어진 병졸을 불러 모아 복수하기를 선언하자
사람들이 모두 즐거이 따랐다. 드디어 군사를 정비하여 적을 쳐서 잡았는데,
전후로 목베어 죽인 적의 수가 수천에 이르렀다.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니 정봉수를 당상관으로 승격시키고 가산 군수(嘉山郡守)를 제수하였다.
응모자들이 더욱 많아져 군사의 세력이 점점 강성해지자
용골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있었는데,
의주에 있는 모든 진영의 적이 여러 번 쳐들어 왔다가는 물러가고 하여
죽은 자가 무수하였다. 여러 적이 합세하여 크게 진격해 들어와 포위하고 공격하여도
여러 날 동안 결말이 나지 않자, 적장 세 사람이 수만의 군사를 이끌고
가만히 산 뒤로부터 험준한 곳을 점거하고 쳐들어 오려고 하니,
봉수가 깨닫고 미리 명령, 정포(精砲) 30명으로 하여금 풀숲 사이에 매복하게 하여
적의 세 장수가 나타나기를 기다려 각각 열 방의 대포를 쏘게 하니,
세 추장이 과연 말을 타고 바위 위에서 서서 군사를 독려하였다.
30명의 정포가 동시에 모두 쏘자 세 추장이 말에서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고
군졸은 크게 무너졌다. 봉수는 적이 다시 쳐들어 올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움직이지 말도록 하였는데, 적의 구원병 수천이 5리 밖에 있으므로
봉수가 밤에 경기병(輕騎兵)을 거느리고 습격하니, 적이 놀라 달아났다.
다음날 비로소 영을 내려 목벤 적의 머리를 모으니 수백을 넘었다.
이 수급(首級)을 막하(幕下)의 갑사(甲士) 장초(張超)를 보내 바치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여 봉수에게 가선대부의 작위를 하사하고,
용천 부사(龍川府使)로 승진시켜 본도(本道)의 방어사를 겸하게 하고,
김완(金完) 이하 모든 장수에게 그의 절제(節制)를 받게 하는 동시에
특별히 장초에게 당상관의 계급을 제수하여 돌려보냈다.
○ 김경서(金景瑞)가 오랑캐의 진중에 있으면서 여러 추장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쳐들어 가고자 하나,
정봉수란 사람이 있는 한 범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는데, 대체로 경서가
용강(龍岡) 사람이므로 봉수를 알고 있었던 까닭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일월록》
○ 일찍이 의주 사람 장사준(張士俊)이 용골성을 점거하고 있다가 오랑캐에게 항복하니,
행 부사 정봉수가 그 아우 기수(麒壽)와 김종민(金宗敏) 등과 함께
사준을 유인하여 베어 죽이고 의병을 일으켜 성을 지키는 한편,
이 소식을 모문룡(毛文龍)의 병영에 알리니,
문룡이 차관(差官)을 보내어 봉수에게 수비도사(守備都司)의 직을 제수하였다.
○ 봉수는 난이 평정된 후 의주 부윤(義州府尹)으로 임명되었다가 뒤에 벼슬이
경상 병사에 이르렀고, 기수는 강서 현령(江西縣令)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정려(旌閭)되었다.
○ 이에 이르러 오랑캐의 군사가 용골산성을 포위하니,
봉수가 격파하여 쫓아버리고 또 의주까지 추격하여
1백여 명의 머리를 베고 말 50필을 얻었는데,
싸움에 이긴 것을 보고하는 글을 오랑캐 군사에게 빼앗겨서 상달되지 못하였다.
○ 조정에서 봉수에게 밀서(密書)를 보내 봉수로 하여금 잠깐 피해
적의 대군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도록 하니, 봉수가 아뢰기를,
“군사를 보충하고 군량만 지속된다면 염려 없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김기종(金起宗)이 계청하기를,
“그의 청을 들어주어 군세를 더욱 강화하소서.” 하였다. 《일월록》
○ 의주에 머무른 적병이 수만이나 되었는데,
선천과 곽산 사이를 횡행하며 힘을 합하여 용골산성을 공격하여 여러 번 쳐들어 왔다가
패하면서도 오히려 득실거리면서 물러가지 아니하였다.
용골은 서남쪽으로 20리의 거리에 바다가 있는데,
봉수가 사람을 시켜 모문룡의 병영에 위급함을 고하니,
모문룡이 전후로 끊임없이 배로 몰래 양식과 무기를 원조해 주어
성 안에서는 이에 힘입어 지탱할 수 있었다. 《일월록》
○ 오랑캐가 우리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용병(用兵)한 것을 책망하니 답하기를,
“금 나라 군사가 즉시 강을 건너가지 않고 우리나라에 잔류하여 노략질하므로
본도의 백성들이 분노하여 복수할 것을 생각한 것이니,
이미 명령한 것이 아니고 또한 금지하기도 어렵소.” 하자,
오랑캐가 호송관(護送官) 이홍망(李弘望)과 상의하고 남여 2천여 명을 돌려보내 주었는데,
김진(金搢)ㆍ박유건(朴有建) 등의 부처(夫妻)가 모두 왔다.
김진 등은 머리를 깎아 죄를 논하여 육진(六鎭)에 군사로 충원하였다.
한편 오랑캐 차사는 왜도(倭刀) 5백 자루를 요구하여 가지고 갔다. 《일월록》
○ 적의 군사가 강을 건너갈 때 홍립과 난영(蘭英)은
각기 아들을 인질로 오랑캐에게 두고 본국에 머물러 있게 되었는데,
두 사람의 어머니가 모두 수년 전에 죽었으므로 애통하며 추복(追服)하였다.
이때 오신남(吳信男)은 아들이 없어서 볼모를 보낼 수 없어서 마침내 적을 따라갔다.
우리나라에서 한윤(韓潤)을 본국에 머물게 해줄 것을 청하였으나 적이 듣지 않았다. 《일월록》
○ 4월에 삼사가 합계하기를, “적이 수일의 도정(道程)에 있는데,
장만(張晩)은 원수(元帥)로 있으면서 먼저 스스로 도망하여 부녀자가 난을 피하듯
깊은 산골에 들어가 숨었으니, 청컨대 관직을 삭탈하고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였다.
거듭 아뢰니, “부여(扶餘)에 중도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였다. 《일월록》
○ 기자헌(奇自獻) 등 갑자년에 죽은 사람들을 신원(伸寃)하여
직첩(職牒)을 주고 연루된 집안 사람들도 풀어주었다. 《일월록》
○ 대간이 아뢰기를, “적병이 우리 강토에 깊이 쳐들어와서
화친하는 일로 협박하여 우롱하고 공갈하는 등 못하는 짓이 없었으니,
이것은 홍립 등이 주관하여 꾸미고 적의 흉계에 찬성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또 홍립은 이미 5도도원수(五道都元帥)라 칭하고
적장의 명령을 받들어 방(榜)을 내어 백성들을 꾀었으니,
그 반역의 죄상이 명백히 드러나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홍립 등을 목 베어 거리에 효시하여 교만한 오랑캐의 기를 꺾어야만 합니다.
홍립은 바로 적에게 항복한 반신(叛臣)인데도 전하께서는 자리까지 주며 접견하셨으니
국가의 수치와 욕됨이 지극합니다. 나라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어찌 차마 그 아들에게 벼슬을 주어 반신의 마음을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진창군(晉昌君) 강인(姜䄄)은 품계가 높은 재신(宰臣)으로서 명을 받고
오랑캐에 사신으로 가자 겁이 나 어찌할 바를 몰라 절도 없이 절하고 꿇어앉았을 뿐만 아니라
양식과 말 먹이를 나누어 부담하려 하고 적이 주는 뇌물을 당연한 것처럼 받고
말 앞에 무릎을 꿇고 적의 명령을 듣는 데에 이르렀으니,
그 절개를 잃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상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벼슬 명부에서 삭제하소서.” 하였다. 송교(松郊) 이공무(李公楘)의 행장
○ 4월에 명 나라 태감(太監) 호량보(胡良輔) 등 네 사람이 혹은 제독이라 일컫고
혹은 총독(摠督)이라 일컬으며 나와서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한 실상을 탐문하고,
겸하여 오랑캐의 실정도 캐냈다.
이에 이상길(李尙吉)을 영위사(迎慰使)로 삼아 가도(椵島)로 보냈다.
○ 5월에 권호(權怙)를 명 나라에 보내어 오랑캐가 침입한 전말과
우리나라가 파천하여 위태하고 급박해서 임시 방편으로 화친한 것 등의 실정을
황제에게 아뢰니, 무진년에 회답하는 조서(詔書)를 보내왔는데, 그 대략에,
“왕이 아뢴 병란을 당한 실정을 보고 짐은 마음에 심히 측은하게 여긴다.
오랑캐와 통문(通問)을 내왕한 것은 임시 방편으로 싸움을 그치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왕의 본뜻은 아닐 것이며, 군신간의 대의(大義)로 말하면 해와 별처럼 밝으니
왕의 충성을 짐이 명백하게 살피고 있다.
더욱 힘써 와신상담(臥薪嘗膽)하여 엄중히 방비하라.” 하였다.
○ 5월에 유해(劉海)가 5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에 이르러
서울로 가는 길에 군사를 벌려 두고 원창군(原昌君)ㆍ오신남(吳信男)과 함께
가정(家丁) 수백 명을 이끌고 서울에 도착하였다.
이에 재신(宰臣)에게 명하여 성문 밖에서 영접케 하였는데,
유해가 임금이 친히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 노하자 상이 부득이 접견하고 술자리를 베풀었다.
유해가 취기를 틈타 오만해져 오랑캐의 예법을 시행하려고 하므로
임금의 얼굴에 입맞추기를 하였다. 임금이 홍립에게 물으니, 홍립이 대답하기를,
“오랑캐는 큰 맹약을 한 번 허락하면 평생 배신하지 않습니다.” 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입맞추는 것은 그대로 따를 수 없다.” 하고, 홍립을 시켜서 타이르니,
유해가 그 다음 예법을 청하였다. 임금과 서로 등을 두드리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다시 홍립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이것 또한 하나의 서약입니다.” 하자, 임금이 따랐다.
○ 홍립과 난영이 오랑캐 땅에 있을 때에 유해의 처제를 아내로 삼았는데,
곧 귀영개(貴永介)의 양딸이다.
오랑캐의 추장이 홍립과 난영에게 각각 요동 백성 5백여 명을 주어 부리도록 하였었다.
이에 이르러 유해가 귀국하면서 두 여인을 데리고 오고
부리던 요동 사람들도 모두 따라왔는데, 조정에서 각 도(道)로 나누어 보내니
홍립이 부끄러움과 분노로 병이 나고 심화가 더쳐 드디어 운명하기에 이르렀다.
그해 7월 혹은 말하기를, “홍립이 울면서 선묘(先墓)를 하직하고 자결하였다.”고도 한다.
모문룡이 듣고 그 여자를 찾아갔다. 《일월록》
○ 《병자록》에는 “혹은 홍립의 여러 친족들이 몰래 죽여버렸다고 하기도 한다.” 하였다.
○ 이때 김세렴(金世濂)이 체찰사의 종사관으로 호남에 가 있다가
진중(陣中)에서 어버이가 돌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는데,
김육(金堉)이 “분상(奔喪)에 역마를 탄 것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하며 벼슬 추천을 막으니,
사람들이, “세렴이 애당초 자기 말을 가지고 가지 않았으니,
역마를 이용하지 않으면 분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였다. 《하담록》
○ 계해년(1623) 8월에 수찬 김시양(金時讓)이 의주 부윤에 임명되자,
비변사에 말하기를, “나는 오랫동안 변방에서 귀양살이를 해서
변방의 사정을 상세히 알고 있다. 변방의 성문 밖은 바로 적의 국경이므로
적이 왔음을 알려줄 척후(斥候)와 봉화(烽火)가 없으면
적이 낮에 쳐들어올 경우에는 성문을 미처 닫을 사이가 없고,
밤에 쳐들어올 경우 성위에서 화살 하나도 쏠 사이가 없다.
군졸들을 격려하여 성위에 올라가 밤을 경비하는 것은 곧 변란을 듣고 나서의 일이다.
만일 군졸들에게 항상 성을 경비시킨다면 군졸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할 수도 없다. 그러나 나에게 안주(安州)를 지키게 한다면 적이 의주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서 성을 지키는 방비를 하여 충분히 적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조정이 나를 그곳에 보내는 것은 지키게 하려는 것인데,
번연히 지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부임하였다가 국가가 패망하는 화가 나 때문에
나오게 된다면, 이것은 조정을 저버리는 것이다.” 하니,
오윤겸(吳允謙)은 그럴 것이라고 여겼다.
그때 최명길이 소를 올리기를, “김시양은 폐조(廢朝) 때에 죄를 얻고
12년 동안 북으로 옮겨갔다가 남으로 이동하며 귀양살이를 하다가
조정에 돌아온 지 겨우 2, 3개월도 안 되었으니,
다시 변방으로 내보내는 것은 합당치 못합니다. 게다가 김은 비록 재주는 있으나
본시 백면서생(白面書生)이니, 변방에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체직을 명하였다.
이민구(李敏求)가 시양에게 말하기를,
“만일 허락하였더라도 사실 지킬 수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뜻은 김을 겁쟁이라고 여긴 것이었다.
이때에 와서 오랑캐의 군사가 의주에 쳐들어와
수문(水門)을 통해 들어와서 성위로 올라와 군졸들을 죽인 뒤에야
온 성중이 비로소 시양의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담록》
○ 이때 홍립의 종 언복(彦卜)이 진중으로부터 강화도로 와서 아뢰기를,
“원컨대 포수 1만 명을 시켜 적을 치도록 하면 1진(陣)을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화친을 하면 오랑캐가 다시 침략할 마음을 일으키지 못할 것입니다.
만일 싸우지도 않고 화친을 한다면 10년 뒤에 오랑캐가 반드시 다시 쳐들어올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그 말을 들어주지 못하였다. 《병자록》
○ 이때 김상헌(金尙憲) 등은 사신으로 명 나라 서울에 있었는데,
본국이 병란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병부(兵部)에 글을 올려
본국을 구원해 줄 것을 청하니, 병부에서 황제에게 아뢰었다.
황제가 순무(巡撫)에게 명하여 날랜 병사로 오랑캐의 배후를 곧바로 치도록 하니,
군문(軍門)에서 수병(水兵) 수천 명을 보내 압록강에 이르고
태감(太監) 네 사람이 계속해서 왔다가 얼마 안 되어 패하고 돌아갔다. 《촬요(撮要)》
○ 장수 모문룡이 또 우리나라를 무고하여 아뢰었는데,
그 가운데 두 마음을 먹고 오랑캐를 끌어들였다는 말이 있었다.
사신들이 예부(禮部)에 글을 올려 변명하니,
예부에서는 황제에게 아뢰어 억울함을 씻어주고 자문(咨文)으로 본국에 알렸다.
○ 금 나라가 화친을 의논할 때에 생원 윤형지(尹衡志) 자는 경가(景可)이고,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기사년에 별시에 급제하여 승문박사가 되었다.
는 이때 나이 24세였는데, 소를 올려 화친을 배척하면서 화친의 주창자들을 공격하고,
계속해서 윤황(尹煌)과 윤지경(尹知敬)도 또한 간쟁하니,
그들의 말을 모두 시행하지는 못하였으나
성을 버린 자들이 이로 말미암아 법의 처단을 받아,
공론이 통쾌하게 여기고 이들을 지목하여 삼윤(三尹)의 정기(正氣)라 하였다. 《염헌집(恬軒集)》
○ 이때 외구는 한창 강한데 우리나라는 군비가 매우 소홀하였다.
이에 김신국이 헌의하기를,
“바야흐로 지금 방비하는 방도는 크게 조처하여
착실하게 원대한 계책을 세우지 않고서는 모두 재물과 힘을 낭비하는 것뿐이며
또한 구차스러울 뿐입니다. 병법(兵法)에 말하기를,
‘주인으로서 손객[客]을 대적하고, 편안한 군사로써 피로한 군사를 대적하라.’ 하였는데,
이제 변방에서 적의 침입을 알리는 보고가 한 번 이르자
격문을 띄워 남도의 군사를 부르니, 남도의 군사가 미처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적은 이미 내지(內地)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습니다.
하물며 시일은 급박하고 사태는 위급한데, 군사들은 피로하고 말은 병드니
무너지고 흩어지는 것은 진실로 당연한 형세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계책으로는 대장 한 사람에게 명하여 해서(海西 황해도) 지방에 나아가
진을 치고 수초(水草)가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한 곳을 택하여
형편 따라 주둔케 하되 굳이 성을 쌓고 책(柵)을 설치할 것은 없습니다.
각도의 군사 5, 6만명을 10번(番)으로 나누어
항상 5, 6천 명에게 3개월씩 지키도록 하면 30개월에 한바퀴 돌게 될 것이고,
2월부터 7월까지는 2, 3천 명을 더 들여보내 농사를 보조하게 하면,
무릇 농가에서 한 사람이 농사지어도 충분히 2, 3인의 식량은 될 수 있으니,
7, 8천명이 기름진 땅에서 농사지으면 2만 명의 1년 식량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봄에는 농사 일을 시키고 여가에는 전쟁을 가르쳐,
5, 6천 명을 늘 주둔지에 있게 하여
오직 무술을 연습하고 무기를 수선하는 것을 일로 삼아 교대로 훈련시키면,
3년 안으로 5, 6만 명이 모두 쓸 만한 군사가 될 것입니다.
또 그 식량이 2만 명의 양식을 충분히 댈 수 있게 되기를 기다려서
힘을 헤아려 군사를 늘여서 옛 천경(踐更) 제도를 본뜬다면,
이는 수만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앉아서 적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니,
급박한 때를 당해서 군사를 출동하고
창황히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과는 득실이 천양지차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군사는 평소에 어루만져 기를 수 있고,
양식은 운반하여 오는 수고로움이 없을 것입니다.
험한 산천과 굽은 도로로 군사를 매복시킬 만한 장소와 적을 칠 만한 곳에 이르러서는
장수는 스스로 헤아릴 수 있고 군사들은 미리 알 수 있을 것이니,
또한 병가(兵家)에서 이른바, ‘지세를 이용해서 승리를 거둔다.’는 것입니다.” 하였으나,
조정에서 따르지 못하였다. 《염헌집》
○ 무진년(1628)에 오랑캐의 차사 박중남(朴仲男)ㆍ박경룡(朴敬龍)과 따라온
오랑캐 7명이 오랑캐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그 글의 대략에,
“달아나 돌아간 사람을 찾아서 돌려보낼 것이며, 회령(會寧)에 시장을 개설할지의 여부와
홍립과 난영이 데리고 간 한녀(漢女)를 찾아보고 유무를 상세히 알릴 것이며,
오신남ㆍ김진ㆍ박유건 등을 또한 찾으라.” 하였다.
중남은 바로 종성(鍾城)의 토병(土兵)으로서 오랑캐에 투항한 자이고,
경룡도 우리나라 사람이다. 중남 등이 금 나라 서울에 들어가 고하였는데,
3월 26일 진강(鎭江)을 떠나서 4월 3일에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국서(國書)를 바치니,
한(汗 만주 황제의 칭호)이 말하기를,
“시장을 개설하는 물화(物貨)는 두 나라가 유무를 교역하는 것이니
빈 손으로 돌아온 것을 어찌 탓하겠는가. 다만 달아나 돌아간 사람들을 찾아 돌려보내는
한 가지 일은 당초에 너희 나라에서 청해서 초출(抄出)한 남녀를 호송한 것인데,
다만 70여 인만 속(贖)바치고 그 나머지는 그냥 돌아가다가
도중에 도망가 잃어버리게 만들었으니, 이것은 찾아간다는 것을 빙자하고
유인하여 도주케 하려는 계책이다. 의주에서 철병한 이후에
도주한 사람을 일일이 돌려보내라고 하였는데, 한 사람도 잡아서 보내지 않았다.
따라서 너희 나라가 화친을 맺은 지 몇 년 안되어 맹약을 이와 같이 어긴 것이지,
내가 어찌 너희 나라와의 맹약을 어겼겠는가.
예전에 남조(南朝 명 나라)가 우리나라와 더불어 소와 말을 잡아 천지에 제사지내고
돌을 세워 맹약의 글을 새겨두었더니,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불화의 실마리를 만들었으므로
우리 선한(先汗 전 황제)이 하늘에 고하고 군사를 발동하여
광녕(廣寧) 등지의 24위(衛)를 모두 우리 수중에 넣었는데,
이것은 하늘이 우리를 그르다 하지 않고 남조를 그르게 여긴 까닭이다.
남조와 너희 나라가 대국이라는 이름을 믿고 우리를 초개(草芥)와 같이 대접하여
강상(江上)에서 시장을 개설한 날에 관원이 직접 곤장을 잡고 우리나라 사람들을 쳤다고 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냐.” 하니, 중남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인민들이 어렵고 가난한 상황은 대인(大人)들이 눈으로 보신 바입니다.
하물며 싸움통에 재물을 모두 빼앗기고 남은 인생들이 어찌 남은 물건이 있겠습니까.
부모 처자를 잃은 자들이 대인께서 속바치는 것을 허락한다는 명을 듣고,
명주와 무명과 종이 등의 물건을 근근히 준비하여 짊어지고 강가에 이르러 속바치고자 하니,
금나라 사람이 너무 많은 값을 요구하여
한 사람의 몸값으로 소나 말로는 10마리를 요구하고,
명주와 포목과 수은(水銀)과 종이의 값으로는 거의 1천 냥 상당을 요구하므로
속을 바치고자 하던 자들이 낙담 통곡하고 마련할 방책이 없었습니다.
당초에 우리나라에서 백성의 불행을 차마 볼 수 없어서 이 일을 추진하였고,
한(汗)께서 속바치는 것을 허락한 것은 또한 인자(仁慈)한 데서 나왔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 유인하여 도망치게 하였을 리가 있겠습니까 운운.” 하였으나,
한이 끝내 믿지 않고, “너희 나라는 모문룡과 통하여 우리를 침범할 계책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이미 강 가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을 허락하고서
무엇 때문에 회령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을 주저하는가.” 하였다.
○ 임금이 가만히 비변사에 물으니, 우의정 김류(金瑬)가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이와 같은 큰 논의에 영상 신흠(申欽)과 좌상 오윤겸(吳允謙)이 병으로 나오지 못하므로
이경직(李景稷)을 시켜 가서 물어보게 하였더니,
영상은 병이 중하고, 좌상은 말하기를,
‘우리 백성이 불행하게도 잡혀갔다가 죽음을 무릎쓰고 도망쳐 돌아온 것인데,
이제 또 잡아 보냈다가 만일 죽음을 당한다면,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에 차마 할 수 없는 바일 뿐만 아니라
후세가 장차 또한 무엇이라고 하겠는가.
따라서 이는 비록 큰 화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행할 수 없다.
다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보낼 사람들이 혹 죽지 않을 수도 있고,
오랑캐들은 이익을 중히 여기니 우리가 만일 많은 재물로써 속바치기를 요구하면
저 포로를 분배받은 자들이 그 재물을 탐내 반드시 죽이지 않을 것이다.
만일 과연 죽이지 않는다면 화를 누그러뜨리고 사람도 보전할 것이니,
그렇게 하는 것이 무방하고 그 수치와 욕됨은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신은 늙고 병들어 아침 저녁으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포로가 된 사람을 찾아오는 일에 대하여 갑자기 질문을 받으니 대답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만일 부득이하다면 다른 사람의 의논대로 정문익(鄭文翼)이 한(汗)과 약정(約定)을 하고
돌아와 보고하는 것을 기다려서 조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 이조 판서 장유(張維)가 상차하여 간쟁(諫爭)하기를,
“나라가 나라가 되는 것은 백성으로써 근본을 삼는 것이니,
백성을 버리고 나라가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평원군(平原君)은 일개 공자(公子)로되 위제(魏齊)를 자기 집에 숨겨두고
진(秦) 나라에 붙들려 가서도 오히려 진왕의 말에 따르지 않고 위제를 내보내지 않았는데,
하물며 당당한 국가로서 어찌 차마 저 추한 오랑캐의 한 마디 말에 가
벼이 우리 백성들을 호랑이 입에 갖다 바칠 수 있겠습니까.
비록 다만 한두 사람을 보낸다 하더라도 천백 명을 보내는 것과 다를 바 없고,
이로써 민심을 잃게 되면
국가의 패망이 어찌 오랑캐 군사의 침범을 기다리겠습니까. 운운.” 하였다.
○ 이때에 오신남(吳信男)은 옥에 갇혀 있었는데
옥에서 나와 박중남 등 오랑캐의 차사를 만나보게 하였더니,
중남은 인사말 이외에 따로 다른 말이 없었고
신남은 집이 먼 시골에 있어서 곧바로 와서 보지 못했다고 하였다.
중남이 은 20냥을 주면서 한(汗)이 보낸 것이라고 말하였다.
○ 이란(李灤)을 잡아 왕명을 제대로 시행하지 못한 것과
오랑캐 나라에 사신을 갔을 때, 행동이 비루하고 어그러져
저들에게 수모를 받은 것과 또 사사로이 당녀(唐女)를 산 죄를 국문하였다.
금부에서 아뢰기를, “이란의 죄는 우리나라에서 따르기 어려운 오랑캐의 청을
제 멋대로 허락하여 막대한 불화의 실마리를 열어 나라를 욕되게 하고
일을 그르친 것입니다.” 하니, 그날로 형을 집행하였다.
○ 이때에 이귀(李貴)가 비밀리 아뢰기를,
“조속히 도망한 사람을 돌려보내라는 청을 따라 눈앞에 닥친 화를 늦추소서.” 하니,
장유가 상차하여 돌려보내는 것을 허락해서는 안 되는 여섯 가지 사유를 논하고,
주서 강유(姜瑜)가 소를 올려 이귀가 망녕되게 말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아 말을 못하게 한 죄를 물리치기를 청하였다.
오윤겸의 상차의 대략에, “병들어 혼미하던 중에 경솔하게 대답하였는데,
장유의 상차를 보니 명백하고 바르며, 또 강유의 상소를 보니 놀람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신이 거의 나라 일을 그르칠 뻔했으니, 신의 죄를 다스리소서.” 하였다.
○ 이귀가 차자를 올리기를, “신이 전후에 상하로 지은 죄는 모두 나라를 위해서요,
사사로움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근심하지 않는 바를 근심하고,
다른 사람이 말하지 않는 바를 말하여 매양 눈 앞의 일만 우선 해결하려는 자로부터
심한 배척을 받아 왔습니다. 따라서 시배(時輩)들은 곧 공신을 공격하는 것으로써
공을 세우는 미끼를 삼고 있어, 늙은 이 몸은 실로 요즘 사람들이
출세하는 기화(奇貨)가 되니, 죽은 중[僧]으로 매질을 연습한다는 속담이
바로 지금의 저의 처지라 하겠습니다. 강유는 무슨 지식이 있겠습니까.
시론(時論)에 영합하여 붙은 것에 지나지 않으니 비교할 것이 없고,
이목(李楘)은 신을 배척하여 효시(梟示)하자고 한 것이 두 번이고
귀양보내자고 한 것이 한 번인데, 이제 또 강유의 의논을 칭찬하고
신이 일을 그르친다고 말하는데, 전하의 유시(諭示)가 비록 간절하나
어찌 감히 출사(出仕)하여 벼슬자리를 욕되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 정경세(鄭經世)가 올린 차자의 대략에,
“붙잡혔다가 도망온 사람을 돌려보내는 데 대한 의견이 조정에 가득 찼는데,
그 말들이 서로 득실은 있으나 끝내 일정하여 믿을 만한 계책은 없습니다.
조정의 의논은 임시 방편으로 우선 눈 앞의 화를 누그러뜨리려고 하나
천리(天理)를 어기고 인정(人情)을 거스르는 것이니,
눈 앞의 화를 반드시 누그러뜨릴 수 없을 것이며,
후일의 근심을 이루 다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바른 것을 지키자는 의논에 이르러서는 이치는 곧고 기운은 씩씩하여,
장유가 말한 바 여섯 가지의 난점 같은 것은 사정을 극진히 말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또한 어떠한 계책을 써서 뒷수습을 잘 하느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으니,
이귀가 겁을 내어 부르짖으며 그만 두지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군사도 없고 양식도 없고 군비도 비어, 해서(海西 황해도)와 관서(關西 평안도)가
한결같이 공허한데, 불행히도 적이 침입하여 온다면 전혀 방비할 도리가 없으니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겁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 무진년 8월에 회답사(回答使) 정문익(鄭文翼)과 박난영(朴蘭英)을 오랑캐에게 보냈다.
한(汗)이 잔치를 베풀어 예물 목록을 받고는 예물로 가져온 장검[長劍]을 취하여
칼집에서 뽑아보고 자못 아끼고 좋아하는 빛이 있었다.
서로 돌려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번 예물 목록은 전날과는 다르니 조선의 진실한 뜻을 가히 알겠다.” 하였다.
문익 등이 도망해 왔던 사람 5명을 바치며 아뢰기를,
“새나 짐승도 또한 그 둥지를 그리워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고향 땅을 생각하여 연연하지 않겠습니까.
죽기를 무릅쓰고 도망쳐 돌아온 것은 실로 인정과 도리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이웃 나라와 친선하는 대의(大義)로 용단을 내려 돌려보내니
측은히 여기고 가슴아픈 생각을 스스로 금할 수 없습니다.” 하니, 한이 이르기를,
“서로 친선하는 것이 이와 같으니 다시 속바치고 돌아갈 것을 허락한다.” 하였다.
드디어 청포(靑布) 3백 필로 속바치고,
9월에 시장을 개설하는 것은 우선 그만두도록 허락하였다.
○ 원(元)의 예물 목록은 인삼 1백 근ㆍ초피(貂皮) 20벌이요,
별도의 예물 목록은 인삼 3백 근ㆍ초피 40벌이었다.
별도의 예물 목록은 돌려보내는 인구가 적은 까닭에 그 뜻에 사례한 것이다.
○ 10월에 문익 등이 돌아오자 품계를 뛰어 올려 공홍 감사(公洪監司)에 제수하였다.
○ 한(汗)은 사람됨이 사나운 기색이 용모에 나타났지만
침착하고 신중하며 말이 적고 행동이 또한 무게가 있었다.
두 눈은 내리떠서 보통 때에는 작고 가는 듯하였으나
간혹 눈을 크게 뜨고 사물을 볼 때에는 광채가 번쩍거렸다.
한은 무엇보다도 뜻 밖에 사람을 달래고 어루만지는 것을 능사로 삼아
위 아래가 간격이 없었으며, 하늘을 섬기는 것을 가장 삼가서 한 가지 일이나
한 가지 정사도 반드시 하늘을 가리켜 증명하였으며,
그 다음으로는 매양 누루하치를 추모하여 항상 말하기를,
“전한(前汗), 전한.” 하고, 간혹 우리나라 사람에게 말하기를,
“전한이 만일 살아 계셨다면 너희 나라 사람을 대하는 것도 반드시 이와 같이
구차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였다.
달아나온 사람들을 돌려보내는 한 가지 일만 보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위 아래가 서로 버티고 조야가 어지럽게 다투고 힐난하여
오래도록 결정하지 못하였지만 그들은 한이 두세 명의 왕과 더불어
한두 마디 말로 결정을 보았다.
비록 문질(文質)이 같지 않고 청탁(淸濁)이 서로 현격하다 하더라도
번쇄(煩瑣)하고 간략함이 이와 같이 달랐다.
○ 무진년에 일본이 사신을 보내 우리나라를 위하여 요(遼)를 쳐서 치욕을 씻을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오랑캐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이에 김신국이 그것이 옳지 못함을 굳게 간하기를,
“무릇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협박하는 것은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하물며 오랑캐는 본성이 사납고 억세니,
왜를 두려워하여 우리 말을 순순히 듣고만 있겠습니까.
반드시 장차 우리에게 왜를 치러가는 길을 빌려 그 분을 풀고자 할 것이니,
우리가 장차 어떻게 대응하겠습니까. 남쪽의 왜와 북쪽의 오랑캐는
서로 멀리 떨어져 아무 상관도 없는데 이제 확실하지도 않은 말로 말미암아
경솔히 그 노여움을 돋우어 두 오랑캐로 하여금 서로 싸우도록 하면
우리가 곧 그 사이에 끼어 있게 될 것이니,
신은 국가가 장차 어찌 될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깊이 그렇겠다고 여겨 드디어 그 의논을 중지하였다. 《염헌집》
○ 경오년(1630) 1월에 의주에서 보고하기를,
“오랑캐가 12월에 심양에서 군사를 일으켜 계주(薊州) 등의 지방을 함락하고
통주(通州)를 포위하였다 운운.” 하였다. 이에 승정원에서 아뢰기를,
“명 나라에 대하여 위문하는 예가 없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신들은 청하기를,
“먼저 선전관과 역관을 가도(椵島)에 보내어 급속히 탐문하여 본 뒤에
분문사(奔問使)를 차출하소서.” 하였다. 심기원(沈器遠)이 소를 올려
“풍정례(豐呈禮)를 빨리 중지하고, 또 분위사(奔慰使)를 보내고
정전(正殿)에 거처하는 것을 피하고 음악을 철폐하소서.” 하였고,
병조 판서 이귀가 군사를 달려 보내 난을 구원할 것을 계청하였다.
얼마 있다가 서쪽에서 들어온 보고에
“한(汗)이 통주에 깊이 쳐들어갔는데 명 나라의 대군이 앞을 차단하고 뒤를 끊었으며
서달(西㺚)이 명 나라와 마음을 합하여 적을 속여 희봉(喜峰) 어귀 아래로 유인하여
수문(水門)에 반쯤 들어왔을 때에 협격(挾擊)하여 크게 무찌르고
남은 군졸들을 포위하였다.” 하였다.
○ 3월에 접반사(接伴使) 진계성(陳繼盛)이 급히 아뢰기를,
“황제가 친히 성위에 임하여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적의 육왕자(六王子)와
이름난 장수 한 사람을 사로잡고 수만 명을 베고 사로잡으니,
적이 삼태영(三台營)으로 물러나 주둔하였다.”고 하였다.
○ 박중남 등이 청포(靑布) 1만 8천여 통(桶)을 무역하여 가지고 가다가 의주에 이르러
유흥치(劉興治)에게 빼앗겨 빈 손으로 돌아갔다.
6월에 용골대(龍骨大)가 청포를 운반해 가는 일로 3천 수백 명을 인솔하고 왔는데,
그 중 3천 명은 의주에 건너편에 머물게 하고,
용골대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안주(安州)에 도착하여 병사 유비(柳斐)와 서로 접견하였다.
유비가 미처 준비하지 못한 뜻을 말하니,
용골대가 성을 내며 차고 있던 칼을 뽑아 병사를 찌르는 시늉을 하고
이내 땅을 서너 차례 치자 따라온 오랑캐가 별안간 튀어나와 병사를 결박하였다.
이어서 중군 군관(中軍軍官)이 즉시 글을 써서 의주에 있는 오랑캐의 처소에 보내는 한편
병사에게, “서울에 가서 청포를 찾아가려고 하니
당장 쇄마(刷馬) 5백여 필을 준비하라.” 하였다. 이에 병사가 치계(馳啓)하니, 전교하기를,
“관향사(管餉使) 성준구(成俊耈)는 금 나라 사람의 삼 값과 청포를 미리 준비하지 못하여
나라를 욕되게 하는 데 이르렀으니 일이 지극히 괘씸하다.
금의 차사가 돌아간 뒤에 잡아다가 국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시켰다. 《응천일기(凝川日記)》
[주D-001]첨방군(添防軍) :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남도와 북도 출신의 군사로 나누어 세웠는데,
남도의 군사를 첨방군(添防軍)이라 한다. 즉 첨가하기 위하여 남도에서 온 군사라는 뜻이다.
[주D-002]간성(干城) : 방패로 몸을 보호하고 성으로 나라를 방비하는 직책이라는 뜻인데,
장군은 곧 나라의 간성과 같다는 것이다.
[주D-003]죄기(罪己)의 교서 : 나라가 위급한 때에 임금이 자기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온 국민에게 사과함으로써 민심을 한층 더 분발시키는 교서.
[주D-004]관중(管仲)은 …… 어질다 : 제(齊) 나라에 난이 있어 공자(公子)들이
망명할 때에 관중이 공자 규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도망갔다가 뒷날 입국하였는데,
환공과 공자 규가 서로 먼저 들어오기를 다투다가 규가 패하여 죽었는데도
관중이 따라 죽지 않고 뒤에 환공에게 벼슬하였다.
그러나 관중은 후일 천하를 안정시킨 공이 있으므로 공자가 그를 칭찬하였다.
[주D-005]천경(踐更) : 옛날 병역 제도의 일종인데, 기간을 정하여 윤번제로 하는 것이다.
[주D-006]평원군(平原君)은 …… 않았는데 : 진(秦) 나라 재상 범수(范睢)가
위(魏) 나라 재상 위제에게 전날에 당한 곤욕을 복수하려고 위 나라에 협박하여
위제의 머리를 베어 오라고 하자, 위제가 도망쳐 조(趙) 나라로 가서
평원군에게 의탁하였으므로 진 나라에서 평원군을 오라고 청해 협박하였다.
[주D-007]문질(文質)이 …… 현격하다 : 우리나라는 문(文)을 숭상하고,
청 나라는 질박(質朴)을 숭상한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