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현절사[숙종14(1688) 유수 이세백 주도 삼학사 배향, 숙종19사액, 숙종37 김상헌, 정온 추배]
□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瀋陽獄에 갇힌 사람들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瀋陽獄에 갇힌 사람들
심양옥(瀋陽獄)에 갇힌 사람들
김상헌(金尙憲)ㆍ조한영(曺漢英)ㆍ신득연(申得淵)ㆍ채이항(蔡以恒)ㆍ
박황(朴潢)ㆍ이경여(李敬輿)ㆍ최명길(崔鳴吉)
일찍이 남한산성의 포위가 풀린 뒤에
김상헌은 곧바로 영남으로 내려가 안동(安東)의 옛 집에 살고 있었다.
그때 호종한 여러 신하들에게 상으로 벼슬을 가자하여 주면서 상헌에게도 품계를 높여주니,
상헌이 곧 소를 올려 사양하였다. 그 소의 대략에,
“전하께서 산성에 머무르실 때 대신과 집정(執政)들이 모두 산성에서 나가기를 권하였는데,
신은 사수해야 하는 의리를 감히 탑전(榻前)에 진달하였으니 신의 죄가 하나이며,
항복하는 글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신이 손으로 그 초안을 찢어버리고
조정에서 통곡하였으니 신의 죄가 둘이고,
전하와 세자 두 분이 몸소 오랑캐의 진영에 나가실 때에 신이 말 앞에서 머리를 부딪혀
죽지 못하였고, 또 병 때문에 수행하지도 못하였으니 신의 죄가 셋입니다.
신이 이렇듯 세 가지 큰 죄를 짊어지고도 아직 형(刑)을 면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처음부터 끝까지 말고삐를 잡고 호종한 여러 대부들과
고르게 은상(恩賞)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삼가 생각건대,
추위와 더위가 없어지지 않는 한 갖옷과 갈포 옷을 폐할 수 없으며,
적국이 멸망하지 않는 한 전쟁과 수비는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뜻을 가다듬고 요새 지대의 방비를 더욱 닦아
국가로 하여금 두 번 다시 모욕을 당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아, 한때의 청국과의 강요된 맹약을 믿지 말고, 지난날의 명 나라의 큰 은덕을 잊지 마소서.
호랑이와 이리의 인(仁)을 지나치게 믿지 마시고, 부모의 나라를 가볍게 끊지 마소서.
대체로 천 리의 국토를 거느리고 원수에게 사역당한다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끄럽게 여기는 일입니다.
매양 선왕께서 아뢴 ‘물은 만 번을 꺾여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水萬折必東]’고
하신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십니다.” 하였다.
○ 무인년(1638)에 장령 유석(柳碩), 지평 박계영(朴啓榮)ㆍ이계 등이 아뢰기를,
“위급한 때를 당하여 임금을 저버리는 것은 남의 신하된 자의 큰 죄입니다.
만약 법을 들어 다스리지 않으면 말류(末流)의 폐해는 장차 신하가 신하 노릇을 하지 않고
나라가 나라꼴이 되지 못하기에 이를 것이니 두렵지 않겠습니까.
남한산성에서 나오시던 날 적의 정상은 헤아리기 어려워 사태를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신하와 백성들의 입장에서 누군들 위태롭고 두려워하며
몹시 절박하여 더할 수 없이 절박하지 않았겠습니까.
김상헌은 전하의 중신(重臣)으로서 죽으려다가 죽지 못한 만큼 의리로 보아
남에게 뒤떨어질 수 없는데도 병을 핑계하고 누워서 끝내 나와보지도 않았습니다.
북문(北門) □을 생각함이 없어,
송 나라 진의중(陳宜中)이 벼슬을 버리고 밤중에 도망간 것처럼 하였으니
남의 신하된 사람의 명분과 의리상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상헌이 마음을 썩이다가 본성을 잃어
아득히 방향을 알지 못하고 미쳐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쓰러졌다면,
그 정상은 불쌍하여 취할 점이 있겠습니다.
그러나 상헌은 도리어 길을 돌아 춘천(春川)으로 가서 권속들을 찾아 인솔하고
편안한 곳을 가려서 영(嶺)을 넘어 방바닥에 편안히 누워 있었습니다.
호종한 자에게 상으로 가자하는 것은 곧 임금의 은전인데,
교지를 봉한 채 돌려보내 마치 자기를 더럽히는 것처럼 대하였으니,
그 불경(不敬)함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하물며 세자께서 타국에 가시는 일은 산성에 있던 날 이미 결정되었는데,
빈객(賓客)의 직책에 있어 명분과 의리가 더욱 중한데도, 애당초 수행할 의사가 없었고
끝내 세자가 떠나실 때 절하고 전송하는 예마저 저버렸으니,
손부(孫傅)가 따라가겠다고 청한 것과는 한결같이 어찌 그리 다릅니까.
이런데도 치죄하지 않는다면 장차 옳고 그름을 뒷세상에 밝힐 수 없을 것입니다.
어찌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인심이 모두 분하게 여겨 오래 될수록 더욱 격렬해지니,
김상헌을 멀리 귀양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김상헌에 대한 논죄(論罪)는 너무 늦었으니, 내버려두어도 무방하다.” 하였다. 《첨재》
○ 그때 임금이 이미 김상헌과 정온(鄭蘊)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때에 와서 그를 탄핵하는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이조 참판 이경석이 경연에 나와 아뢰기를,
“김상헌ㆍ정온이 고집한 바는 당당한 바른 의논인데 어찌 이들을 죄줄 수 있겠습니까.
한 가닥의 정론을 붙들어주고 너그럽게 용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유석(柳碩)과 이계는 상헌에게 배척을 받아 오래도록 청망(淸望)에 길이 막혀 있는 만큼
지금 상헌에게 보복하는 것 같은 혐의스러운 형적을 돌아보지 않고
대번에 스스로 상헌의 죄목을 논열(論列)하는 것은 더욱 부당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김상헌과 정온은 일체인데 다만 상헌만을 들어 논박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상헌은 그 임금을 묻지 않고 그 형의 죽음에 곡하지 않았으니,
과연 인륜을 지켰다고 할 수 있는가.
상헌은 대대로 녹을 먹은 신하로서 나와는 12년 남짓 상종하여 왔는데,
이 망극한 변란을 당하여 임금을 버린 채 묻지 않았으니,
지금 몸을 깨끗이 한다고 하며 멀리 가버리는 자들은 상헌이 앞잡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상헌을 논죄하는 것은 봉황새가 아침 볕에 우는 것이라 해도 괜찮다.” 하자,
경석이 아뢰기를, “유석의 말을 어찌 봉황의 울음이라 이를 수 있겠습니까.
상헌은 끝까지 붙들어주고 너그럽게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상께서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공정하게 들으시고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하였다. 뒤에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상헌의 벼슬을 삭탈하였다.
《병자록(丙子錄》 《백헌연보(白軒年譜)》 합록
○ 이해 겨울에 상헌이 청 나라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군사를 징집한다는 말을 듣고
소를 올리기를, “신이 요사이 길가에서 하는 말을 들으니,
조정에서는 북쪽에서 온 사신의 말을 좇아 장차 군사 5천 명을 징발하여
심양을 도와 대명(大明)을 침범한다 하니, 신은 이를 듣고 놀라고 의혹스럽습니다.
무릇 신하가 임금에게 대해서도 좇아야 할 일과 좇아서는 안 될 일이 있습니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는 비록 계씨(季氏)의 신하가 되었으나
공자는 오히려 그들이 좇지 않는 바가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당초에 우리나라가 세력이 약하고 힘이 모자라서
우선 목전의 보존을 도모하려는 계책(강화)을 하여
전하께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질서를 회복하려는 큰 뜻으로
와신상담(臥薪嘗膽)한 지가 이제 이미 3년이 되었습니다.
부끄러움을 씻고 원수를 갚기를 거의 기일을 정해 놓고 바라고 있는데,
갈수록 더욱 미약해지고 일마다 굽혀 좇아서
결국에는 못하는 일이 없는 지경에 이를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예로부터 죽지 않는 사람이 없고 또한 망하지 않는 나라가 없습니다.
따라서 죽고 망하는 것을 참을 수 있지만 역적을 좇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전하에게 아뢰기를, ‘어떤 사람이 원수를 도와 그 부모를 칩니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치죄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비록 좋은 말솜씨로 자신을 변명할지라도
전하께서는 놓아주지 않고 반드시 국법으로 처단할 것입니다.
이것은 천하의 공통된 도리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저들(청 나라)은 세력이 한창 강성하니
저들의 요구를 어긴다면 반드시 화가 있을 것이다.’고 합니다만, 신은 명분과 의리는
지극히 중한 것이고 이것을 범하면 또한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리를 등져 끝내 위태롭고 멸망을 면치 못하기보다는
바른 도리를 지키며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만약 의리를 버리고
은혜를 잊은 채 차마 이 일을 한다면, 설사 온 천하와 후세의 비웃음을 돌아보지 않더라도,
장차 어떻게 선왕을 지하에서 뵈며,
또한 어떻게 신하들에게 국가에 충성을 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첨재》
○ 그때 우리나라에서 청 나라를 도와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는 군사 행동이 있었다.
왕세자가 심양에서 돌아와 근친(覲親)하니,
청 나라에서 원손(元孫)을 세자와 교대하여 데려갔다.
이에 지평 조한영(曺漢英)이 분연히 말하기를, “돌아오면 장차 다시 갈 것이고
가면 장차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온 가족이 북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하고,
소를 초(草)하여 속히 큰 결단을 내리기를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았다. 회곡 묘비(晦谷墓碑)
○ 소 경진년(1640)의 만언밀소(萬言密疏) 의 대략에,
“지금은 변란이 있은 지 이미 4, 5년이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편안히 즐기고
선비들의 의논은 두 갈래로 나뉘고 훈신(勳臣)과 귀족들은 호화와 사치에 빠지고
군비(軍備)는 해이하고 게을러짐이 날로 더하여
오직 국력을 다해 적을 섬겨 잘 보이기를 구하고 가엾게 여겨주기를 바라는 것으로
만대에 흔들리지 않는 사업으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변덕스럽고 간사한 계책이 여러 가지로 나오고
골짜기 같은 욕심이 만족할 줄을 몰라 도망쳐 돌아온 사람과
귀화해 온 사람들을 추쇄(推刷)하라는 등 우리로서는 반드시 할 수 없는 일을 책임지우고,
차마 끊을 수 없는 지극한 정과 차마 저버릴 수 없는 대의(大義)여서
우리로서는 반드시 좇을 수도 없는 것으로 다그치니,
아, 저들은 정말 호랑이와 이리 같은 자들입니다.
지금 세자를 돌려보낸다고 하면서 우리를 우롱하고는,
원손과 대군을 들여보내라고 위협하니, 이로써 그 자들의 마음을 알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저곳에 들어간 이는 나오기가 어려운데, 세자를 내보낸 것은
우리나라를 저들의 바깥 창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가령 원손과 대군을 그들의 말대로 모두 함께 들여보낸 뒤에,
전하의 병환이 회복되었다는 것을 칭탁하고, 곧바로 즉각 세자를 들어오라고 하거나
혹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한다면 오늘의 조정에서 누가 감히 입을 열어
우리의 원손과 대군을 돌려보낸 뒤에야 세자를 들여보내겠다고 항변할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러한 형세로는 마침내 온 가족이 북쪽으로 가게 되어
이역에서 함몰(陷沒)되기에 이를 것이니, 그들의 계책이 교활하고도 참혹합니다.
더구나 원손은 다만 포대기에 싸인 한 덩어리의 고기일 뿐으로
원기와 혈색이 아직 완전하지 못하고 살과 가죽이 아직 충분하지 못하여,
깊숙한 대궐 안에서도 하루 동안의 춥고 따뜻함과 굶주리고 배부른 것을 알맞게 해 주고
마른 자리와 젖은 자리를 가려 가며 보호하기를 부지런히 한 것이 어떠하였습니까.
이제 갑자기 눈과 바람을 무릅쓰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말을 달려 흔들리고 넘어지면서 차디찬 얼음 땅에 들어가니
병이 나지 않는다고 능히 보장할 수 있는 이치가 어찌 있겠습니까.
아아, 어린아이가 우물로 기어 들어가는 것을 보면 놀라서 측은하게 여겨
미친 듯이 달려가 기운을 다해 구출하는 것은 바로 사람의 상정인 것입니다.
보통 사람에게 대해서도 오히려 그러한데 하물며 우리 임금의 사랑하는 손자로서
천 근의 무거운 물건을 한 가락의 털에 의탁한 것과 같은 경우이겠습니까.
저 여염집의 남녀로서 포로가 되었던 자들도 속전(贖錢)을 내고 모두 돌아왔고,
고관들의 자제로 인질로 들여보낸 자들은 먼 친척을 대신 보낸 사람이 많은데,
유독 전하의 세 아들과 한 손자는 한 사람도 슬하에 없으니,
옛말에 이른바, 천자의 집안에 태어나지 말라.’고 한 말을 더욱 믿겠습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방금 원손이 비록 이미 도중에 있으나 아직 우리나라 국경을
나가지 않았으므로 아직은 위험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죽고 남은 잔약한 백성들을 몰아다가 원수를 도와 부모의 나라(명 나라)를 친다면
역대 선왕의 하늘에 있는 영령들이 저승 가운데서 슬퍼할 뿐 아니라,
또한 국가가 스스로 하늘 아래에 의젓하게 설 수 없을까봐 염려됩니다.
설령 강하고 사나운 힘의 협박 때문에 그 사이에서 자유롭게 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전일 남한산성에 나가서 강화하던 처음에도 한 사람의 사자를 명 나라에 보내어
사정을 진술하지 않았는데, 또 군사를 출동시키기에 앞서
한 장의 글을 보내어 먼저 통지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장차 어떻게 후세에 의롭지 않다는 이름을 면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아, 존망(存亡)의 판가름이 매우 급박한 만큼 기회를 한번 잃으면 다시 얻을 수 없습니다.
구천(勾踐)의 왼쪽 합문(闔門)을 사람이 메우지 않았으면
회계(會稽)에서 받은 치욕을 씻을 수 없었을 것이고,
손권(孫權)이 책상을 칼로 찍지 않았더라면
적벽강(赤壁江)의 승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회곡집(晦谷集)》
○ 경진년(1640) 겨울에 청 나라 사람들이 유석(柳碩) 등의 계사(啓辭)에 대해
약간 들었으나 무슨 말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였으므로
용골대ㆍ오목도(梧木道) 등이 의주에 와서
대신ㆍ재신(宰臣) 및 도승지 신득연(申得淵)을 불러다가 온갖 공갈과 위협을 하며,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 김사양(金斜陽) “김사양이 안동(安東)에 산다는데……” 하고 물었다.
을 찾아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본래 사양(斜陽)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 하였으나,
청인들의 위협이 그치지 아니하므로
득연(得淵)이 김상헌(金尙憲)ㆍ조한영(曺漢英), 유학(幼學) 채이항(蔡以恒)의 이름을
모두 써서 보여주니, 용골대가 영의정 홍서봉(洪瑞鳳) 등을 위협하면서,
“연명으로 치계하여 김상헌 등을 붙잡아 보내도록 하라.” 하자,
온 조정이 깜짝 놀라 얼굴빛이 파랗게 질렸다.
강석기(姜碩期)가 차자를 올려 김상헌 등을 잡아 보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진달하였고,
영중추부사 이성구(李聖求)는 상헌에게 이사(貳師)를 제수하여 보냄으로써
관직을 받지 않은 일이 없음을 밝히자고 청하였다. 《첨재》
○ 상헌이 북쪽으로 가게 되니 임금이 내시를 보내
표피 갖옷과 친필로 쓴 편지를 하사하여 간절히 위로하며 타일렀다.
또 “꼭 서로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불편하여 만나지 못한다.”는 데까지 말이 미치니,
상헌이 소를 올려 감사의 뜻을 아뢰었다. 드디어 의주에 도착하여
용골대의 앞에 부축해 들어가서 그 옆에 드러누우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너의 국왕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너는 왜 따르지 않았느냐.” 하자, 답하기를,
“나는 늙고 병이 들어서 걸음을 걸을 수 없으므로 따라가지 못하였다.” 하였다.
용골대가 말하기를, “벼슬을 받지 아니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답하기를,
“늙고 병들었으므로 조정에서 애당초 벼슬을 주지 않았다.
너희들은 어디서 이런 말을 얻어 들었느냐?”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네가 임금에게 수군을 우리에게 보내지 말라고 권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답하기를,
“수군을 보내지 말라는 것은 내가 비록 임금께 권하였으나 조정에서 내 말을 듣지 않았으며,
또 임금과 신하 사이에 사사롭게 서로 이야기한 일을
타국 사람이 어떻게 말할 만한 이치가 있느냐” 하였다.
오목도 등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가장 어려운 것이 노인이다.” 하였다. 《첨재》
○ 조한영이 북쪽으로 가게 되니, 임금이 내시를 보내어 위로하고
백금(白金)과 표피 모자를 하사하였다. 의주에 도착하자 청 나라 사람들이
군사를 베풀어 위협하면서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내 나라의 일을 논의하였는데 어째서 묻느냐?” 하였다.
죽인다고 위협하였으나 말에 동요함이 없으니, 여러 오랑캐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이 사람 상이(爽爾)하다, 상이하다.” 하였다.
즉 오랑캐의 말로 ‘좋다, 좋다.’는 말이라 한다. 드디어 감옥에 가두었는데,
네 벽에 서리의 두께가 한 자를 넘었다.
한영이 고요히 지내면서 날마다 상헌과 함께 시(詩)를 주고 받았는데, 이것이 모여서
큰 책이 되었다. 상헌이 책 이름을 《설교집(雪窖集)》라 붙였다. 《회곡묘비(晦谷墓碑)》
○ 3년 만에 청인들이 누그러져서 우리나라의 국경인 의주에 옮겨 가두고,
또 1년 남짓 있다가 비로소 석방되었다.
○ 그때 청 나라 사람들이 상헌 등 3명을 데리고 심양에 들어가서 구류시켰고,
득연(得淵)도 또한 구류되었다가 신사년(1641) 1월에 북관(北館)에서 아문으로 압송되었다.
관아에는 질가왕(質可王)이 나와 앉고,
용골대ㆍ비파(比巴)ㆍ가린(加麟)ㆍ범문정(范文程) 등의 여러 박씨(博氏)와
형부의 관원들이 일제히 모였고, 세자를 청해다가 서쪽 벽에 앉혔다.
형관 세 사람이 상헌에게 묻기를,
“국왕이 남한산성에서 내려올 때 왜 따라오지 않았느냐?” 하니, 답하기를,
“병이 위중하여 모시고 가지 못했을 뿐이다.” 하자, 또 묻기를,
“과연 병이 위중했다면 어째서 가까운 곳에 오지 않고
돌아서 영(嶺) 밖의 먼 곳으로 갔느냐?” 하니, 답하기를,
“병이 조금 낫기를 기다려 비로소 내려갈 수 있었을 뿐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병이 나은 뒤에 끝까지 임금을 뵙지 않고 바로 시골로 내려간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답하기를, “나이 70세이면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은 본래 옛날 법이다.
늙고 병들어 벼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을 뿐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관작을 받지 않고 관작의 교지(敎旨)를 돌려보낸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처음부터 벼슬을 제수한 일이 없다.” 하였다. 또 묻기를,
“우리가 수군을 징발할 때 반대하는 논의로 소를 올린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답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으니,
모든 생각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몸은 비록 늙고 병들었으나
어찌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없겠는가.
다만 비록 내가 한 말이 있었으나 채용되지 않았으니,
너의 나라 일이 내 말 때문에 이루지 못한 것이 무엇이냐.” 하였는데,
기운이 늠름하여 조금도 굴복하거나 꺾이지 않았다.
정명수(鄭命壽)도 존경하고 감복하여 형부의 관원에게 통역할 때,
‘너의 나라’ 라는 말을 ‘이곳’ 이라고 고쳐 격노시키지 않으려고 하였다. 《심양일기(瀋陽日記)》
○ 다음으로 득연에게 묻기를, “우리에게 인부와 말을 보내는 일을
계사를 올려 못하게 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 하니, 답하기를,
“용 대장 용골대가 의주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서 먼 길에 조달할 수 없음을 염려하여
그 값을 은으로 들여보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상국(上國)에서 이미 징발령이 있었는데 품정(稟定)하지 않고
지레 먼저 대가를 보내는 것은 일이 매우 미안하니,
반드시 아뢴 뒤에 은으로 하든가 말로 하든가 명령대로 따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대략 의견을 진술한 것이니 이는 일을 신중히 하자는 뜻에 불과합니다.
어찌 그 사이에 반대하는 의견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심양일기》
○ 다음에 한영에게 묻기를, “너는 무슨 일로 소를 올렸느냐?” 하니, 답하기,
“임금이 오랫동안 병을 요양하는 중에 계시어 신하들을 대하는 일이 드물어
여러 가지 일이 해이해지므로 궐내에 누워서라도 자주 대신과 접촉하여
정치에 대한 방도를 강론하기를 청했으니, 이 상소는 이와 같은 것에 불과했을 뿐입니다.
만일 딴 의견을 논의한 일이 있었다면 스스로 마땅히 물러가 밭이나 갈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축년(1637)에 과거를 보아 급제하였고,
수군을 징발할 때는 자신이 병조 낭관이 되어 함께 군사를 선발하였습니다.
거기에 다른 생각이 없었음은 이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 다음에 채이항(蔡以恒)에게 묻기를, “너는 무슨 일로 소를 올렸느냐?” 하니, 답하기를,
“시골에 사는 사람이라 국가의 일은 참여하여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부역이 치우치게 무거운 것을 괴롭게 여겨
부역을 균평하게 하라는 뜻을 약간 진달하였습니다.” 하자, 또 묻기를,
“소위 부역이라는 것은 어떠한 일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냐?” 하니 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는 전지(田地)를 계산해서 부역을 내는데,
전지를 측량(測量)한 뒤로 전지에 대한 세금과 쇄마(刷馬)에 대한 부담이
전에 비해 배나 늘었기 때문에 그 폐단을 상소로 진달했을 뿐입니다.” 하였다.
○ 다시 득연에게 묻기를, “한영ㆍ이항 두 사람이 말한 바가 이와 같은데,
네가 당초에 한 말과 어찌 그리 서로 맞지 않느냐?” 하니, 득연이 대답하기를,
“이것은 내가 재신(宰臣)으로서 심양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장군 용골대가 엄하게 묻기에 다만 전해 들은 말로 말하였을 뿐이지
상소 가운데 사실이나 의견은 실로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정명수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기를, “내가 비록 여기 있으나 조선의 일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루에도 그 수를 알 수 없을 만큼 상소가 많더라도
이곳의 일을 언급한 것이 아니면 무엇 때문에 고발하였겠는가.
의주에서 나한테 말한 것은 이러한데 네가 어찌 감히 이렇게 말하느냐.” 하니,
득연이 말하기를, “정말 그 소를 보지 못하였고
다만 전해 들은 것으로 말하였을 뿐입니다.” 하였다.
○ 질가왕(質可王)이 여러 사람들과 서로 말하기를,
“김상헌은 과연 망가망가(望哥望哥).” 하라고 하면서 칭찬해 마지 않았다.
망가(望哥)라는 것은 청국 말로 ‘매우 어렵다.’는 칭찬이다.
서로 몰래 의논한 뒤에 다시 형부의 관원 세 사람을 문 왼쪽에 서게 하고 말하기를,
“남의 신하된 자는 국가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그 직책일 뿐이다.
김상헌은 제멋대로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어지럽게 펴서
국가를 기울어지고 위태롭게 만들어 백성이 편안하지 못하게 하였다.
황제께서 문죄(問罪)만 하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곡진히 보전하여 주셨으니
마땅히 성심으로 순종해야 할 것인데, 아직도 뉘우칠 줄 모르고
오히려 전의 버릇을 계속하고 있으니, 그 죄는 사형에 해당한다.
득연은 마부와 말을 보내라고 할 때 저의 조정에 아뢰어 방해하여
기한 안에 오지 못하게 하였고,
조한영과 채이항 두 사람은 처음에 고발을 당하였지만 지금 대질해 보니 도리어 애매하다.
조한영이 상소하여 저의 임금에게 자주 신하들과 접촉하라고 청한 것은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을 도모하려는 것이고,
채이항이 부역이 번거롭고 과중하다고 말한 것은
반드시 청국에 대한 세폐(歲幣)와 군량과 수군(水軍)의 징발에 관한 일을 가리켜 한 말이니,
네 사람의 죄가 한결같이 사형에 해당한다.” 하였다.
○ 용골대 등의 청주(淸主)의 명으로 세자에게 와서 말하기를,
“북관(北館)에 갇힌 네 사람의 죄는 법으로 보아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나,
이번 12건의 일은 본국이 모두 이미 스스로 자복하였고 네 사람도 즉시 압송해 왔으므로,
황제께서 특별히 이미 지나간 잘못을 용서하여 네 사람 등은 마침내 헤아려 처치할 것입니다.
박연(朴演)도 물어보아야 할 일이 있으니, 속히 들여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어 옆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고 비밀리 말하였는데,
대략 천 명이나 되는 정예 포병(砲兵)과
5백 명의 취사병에게 각자 군량을 준비해 가지고
3월 20일에 이곳에 와서 점고(點考)를 받도록 하라는 일이었다.
이상은 모두《심양일기(瀋陽日記)》
○ 3월에 박연이 심양에 들어오니, 형부에서 바로 북관에 보내 역시 구류시켰다.
○ 8월에 우참찬 이경석(李景奭)이 수 이사(守貳師)로 심양에 들어갔을 때
상헌 등이 오랫동안 구금되어 곤욕을 받고 있었는데,
화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으나 어떻게 할 계책이 없었다.
경석이 심양에 들어간 지 3일 만에 즉시 온갖 계책으로 잘 도모해서
반드시 그들을 살려서 돌아가게 해야 한다는 뜻을 세자에게 비밀리 아뢰었다.
이에 세자가 통역관 서상현(徐尙賢), 승언(承言) 유호선(兪好善)에게
오랑캐의 장수 중 세력 있는 두어 사람에게 드나들게 하는 동시에,
이따금 진귀한 재화를 비밀리 뇌물로 주곤 하였다.
그들은 가고 올 때면 번번이 경석과 모의하였다. 백헌연보《심양일기》합록
○ 12월에 상헌이 입동(入冬) 후부터 추운 증세의 병이 매우 위중해지니,
비로소 의관이 들어가 봐줄 것을 허락하였다.
용골대와 정명수가 북관에 가서, 득연ㆍ한영ㆍ이항이 도두 병색이 있는 것을 보고
용골대가 청주에게 돌아가서 아뢰기를,
“김상헌은 병이 대단할 뿐만 아니라 심히 늙고 쇠약하였으며,
다른 사람들도 모두 병색이 있습니다.” 하였다. 하루는 청주가 세자에게 말을 전하기를,
“북관에 구금된 5인은 죄가 마땅히 죽여야 할 것이나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한다.
들으니, 김상헌은 병이 심하고, 또 왕자의 관에서 그들에게 음식을 공급하느라
폐를 끼치고 있다 하니, 지금 의주로 내보내 구금하든가
또 금주(錦州)의 싸움터에 몰아 보내어 공을 세워 스스로 죄를 속죄하게 할까 하는데,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는가?” 하니, 세자가 대답하기를,
“5인에게 죽음을 면하게 해주셨으니 너그럽게 용서함이 이미 큽니다.
지금 물으신 것은 진실로 뜻밖입니다. 마른 나무에 꽃이 피게 하는 것도
된서리에 잎이 떨어지게 하는 것도 오직 대국의 처분에 달렸을 뿐입니다.
어찌 감히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용골대가 이 말을 들어가 아뢰고 다시 나와서 말하기를,
“세자가 한 말이 진실로 옳다. 5인을 이사(貳師)에게 인솔하고 의주로 나가서
가두어두게 하고, 다음의 처분을 기다리게 하십시오.” 하였다.
○ □월에 이사 이경석이 김상헌ㆍ조한영ㆍ신득연ㆍ박황ㆍ채이항 등
5인을 압송하고 나와 의주에 두었다. 세자가 내시를 보내어 술을 내려주니,
상헌이 병든 몸을 부축하고 일어나서 절하고 시를 짓기를,
經歲遼河故國思 요하에서 해 넘기며 고국을 그리워할 때
一心猶幸近靑闈 일심으로 세자궁 가까운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더니
明朝獨渡遼河去 내일 아침 나 홀로 요하를 건너 돌아가니
回首靑闈涙滿衣 세자궁 돌아보며 눈물로 옷깃을 적시네
하였다. 떠날 때 세자에게 작별인사를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문에서 허락하지 않았다.
5인이 세자의 관 앞을 걸어 지나가다가 문을 향하여 땅에 엎드려 우니,
세자가 문에 나와서 바라보고 궁관을 시켜 약을 주게 하였다. 《심양일기》
○ 임오년(1642)에 최명길이 심양에 들어가 북관에 갇혔다가
계미년(1643) 4월에 남관(南館)으로 옮겨 구금되었다. 앞에 독보(獨步) 아래에 자세히 나온다.
○ 명길과 상헌은 다만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한 방에 같이 있었다.
명길의 아들 후량(後亮)이, “아버지의 일은 진실로 나라를 위하여
충성을 다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요, 죽음을 마치 본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본다.
자식된 자로서 어버이를 위하여 온전하기를 하는 일에
또한 마땅히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보지 않아야 한다.” 하고,
드디어 금과 은을 여러 천 냥 싸가지고 심양에 들어가서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뇌물을 먹이려 하니, 어떤 이가 말하기를,
“김청음(金淸陰)은 본래 바르고 엄격한 사람이다.
반드시 청음은 자네들이 꾀를 써서 화를 완화시키려는 것을 그르다고 여길 것이다.” 하자,
후량이 말하기를, “이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드디어 상헌을 들어가 보고 말하기를, “산의생(散宜生)은 어떠한 사람이었습니까?” 하니,
상헌이 말하기를, “옛날의 성인이지.” 하자, 후량이 나와서 말하기를,
“김 대감의 은미한 뜻을 알 수 있다.” 하였다.
드디어 정명수(鄭命壽)에게 뇌물을 주고 화를 늦추었다.
완릉행장(完陵行狀)《강상문답(江上問答)》 합록
○ 명길이 처음에는 상헌이 명예를 구하는 마음이 있다고 의심하여
정승 천거에서 깎아버리기까지 하였는데, 같이 구금되자 죽음이 눈앞에 닥쳐도
확고하게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고 드디어 그의 절의를 믿고 그 마음에 탄복하였다.
상헌도 처음에는 또한 명길을 남송(南宋)의 진회(秦檜)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였었는데
그가 죽음을 걸고 스스로 뜻을 지키며 흔들리거나 굽히지 않는 것을 보고
또한 그의 마음이 본래 오랑캐를 위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에 두 집이 서로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상헌이 시를 짓기를,
從㝷兩世好 양대의 우정을 찾고
頓釋百年疑 백 년의 의심을 푼다
라고 하고, 명길이 시를 짓기를,
君心如石終難轉 그대 마음 돌 같아서 끝내 돌리기 어렵고
吾道如環信所隨 나의 도는 둥근 꼬리 같아 경우에 따라 돈다
고 하였다. 또, “장차 정승의 자리에 덕과 공업이 새롭기를 기다린다.” 하였는데,
이는 함께 정승의 지위에 오르기를 기약하는 뜻이요,
구차히 허여한 말이 아니었다. 《강상문답》 《지천유사》 합록
○ 명길이 심양의 옥에 있을 때 일찍이 상헌과 함께 경(經)과 권(權)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상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成敗關天運 성공과 실패는 천운에 달려있으니
須看義與歸 모름지기 의로 돌아가야 한다
雖然反夙暮 아침과 저녁을 바꿀 수 있을 망정
未可倒裳衣 웃옷과 아래 옷을 거꾸로야 입을쏘냐
權或賢猶誤 권은 혹 어진이도 그르칠 수 있으나
經應衆莫違 경만은 마땅히 여러 사람이 어길 수 없다
寄言明理士 이치에 밝은 선비에게 말하노니
造次愼衡機 급한 때라도 저울질을 삼가라
하고, 명길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靜處觀群動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볼 수 있어야
眞成爛熳歸 진실로 원만한 귀결을 지을 수 있다
湯氷俱是水 끓는 물도 얼음장도 다같은 물이요
裘葛莫非衣 털옷도 삼베 옷도 옷 아닌 것 없느니
事或隨時別 일이 어쩌다가 때를 따라 다를 망정
心寧與道違 속맘이야 어찌 정도와 어긋나겠는가
君能悟斯理 그대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語默各天機 말함도 침묵함도 각기 천기로세
하였다. 이경여(李敬輿)가 시를 지어 두 사람에게 보내기를,
二老經權各爲公 두 어른 경ㆍ권이 각기 나라를 위한 것인데
擎天大節濟時功 하늘을 떠받드는 큰 절개요(김상현) 한때를 건져낸 큰 공적일세(최명길)
如今爛熳同歸地 이제야 원만히 함께 돌아간 곳
俱是南館白首翁 모두가 남관의 백발 늙은이일세
하였다. 《지천유사》
○ 택당(澤堂) 이식(李植)이 항상 말하기를,
“청음(淸陰 김상헌)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 비록 지조가 높으나
또한 완성군(完城君 최명길)이 열어놓은 남한산성의 문으로 나왔다.” 하였다.
○ 갑신년(1644) 4월에 우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사신으로 심양에 가니 청주가,
“경여가 전에 죄가 있는 것을 이미 사면하여 보내기는 하였으나
벼슬을 올려 정승을 삼은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드디어 경여를 다시 동관에 가두고 며칠동안 물과 불을 끊었다.
이어 홍무적(洪茂績) 등을 시켜 돌아가 사신으로서의 용무를 보고하게 하였다.
뒤에 질자관(質子館 볼모로 간 왕자의 숙소)에 옮기고 조금 너그럽게 대접하였다.
백강행장(白江行狀)
○ 좌참찬 이경석(李景奭)이 청 나라에서 금고당했다가 풀려서 등용되니
소를 올려 체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해 겨울에 세자가 청국에 “우리나라의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니,
금고 처분으로 버려진 여러 신하를 등용하도록 해주소서.” 하였더니,
을유년(1645) 봄에 청 나라 사신이 나와서 비로소 서용하도록 허락하였다. 《백헌연보》
조칙 (詔勅)으로 유시하기를,
“이경여ㆍ이명한ㆍ이경석ㆍ민성휘(閔聖徽) 4명을 등용하라.” 하였다.
자세한 것은 대명망(大明亡) 아래에 있다.
○ 을유년 봄에 청 나라 사람들이 세자ㆍ대군 및 인질로 갔던 여려 자제들을 돌려보냈다.
최명길과 이경여도 모두 석방되어 귀국하였다. 지천행장.
○ 이경여의 위에 ‘김상헌’이라는 석 자가 있으나,
상헌은 이보다 먼저 이미 귀국하였으므로 마땅히 다시 상고해야 한다.
[주D-001]물은 …… 흐른다 : 모든 물은 마지막에는 동해로 들어간다는 말로,
여기서는 중국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주D-002]봉황새가 …… 우는 것 : 봉황새는 세상에 드물게 나타나는 상서로운 새이다.
여기서는 오랫동안 듣지 못하던 곧은 말을 듣는 것이 봉황새의 울음을 듣는 것처럼 기특하다는 뜻이다.
[주D-003]좇지 않는 바가 있다 : 노(魯) 나라의 집권자인 계씨가 공자에게
자로와 염구의 인품을 물으면서, “시키는 대로 쫓는 자입니까?” 하니, 공자가 대답하기를,
“아비를 죽이고 임금을 죽이는 일은 또한 좇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論語》 先進
[주D-004]바깥 창고 : 진(晉) 나라의 헌공(獻公)이 우(虞) 나라한테
군사가 통과할 길을 빌리려고 보옥(寶玉)과 좋은 말을 뇌물로 주자,
신하들이 귀중한 물건을 아깝게 생각하니, 헌공이 말하기를,
“머지 않아서 우리가 우 나라를 멸망시킬 것이니
저 나라에 있는 물건은 우리의 바깥 창고[外府]에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주D-005]천자의 …… 말라 : 옛날에 나라가 망할 때, 황제와 황후가 자살하면서 한 말이다.
[주D-006]회계(會稽) : 월(越) 나라 임금 구천(勾踐)이 회계산에서 오(吳) 나라에 항복한 것을 말한다.
[주D-007]산의생(散宜生) : 주(周) 나라의 문왕(文王)이 주(紂)에게 잡혀 옥에 갇혀 있을 때에
그의 신하인 산의생이 보옥과 미인을 주에게 뇌물로 바치고 석방되었다.
[주D-008]하늘을 …… 절개 : 송 나라 말년에 어느 사람이 꿈을 꾸고 나서
“하늘이 무너지려는데 문천상(文天祥)이 하늘을 떠받들었다.”고 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