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자호란과 천연두
구범진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교수 / 민족문화연구 72호
목 차
1. 머리말
2. 천연두의 공포와 ‘生身’ 홍타이지
3.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의 천연두
4. 병자호란의 종결 과정: 시간에 쫓긴 청군
5. 맺음말
국문초록
1637년의 병자호란은 천연두(만주어로 ‘마마’) 유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에 일어났으며, 실제로 당시 청군 진영에서는 천연두가 발발하였다.
홍타이지는 ‘마마’에 면역이 없는 ‘生身’이었기 때문에
‘마마’가 발발하면 안전한 장소로 몸을 피하는 ‘避痘’에 들어가야 했다.
그렇다면 천연두는 병자호란의 전개 과정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던 것일까?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는 적어도 정축년 2월 말까지는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가 계속되리라고 예상했으며, 강화도 공격은 2월 하순으로 예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은 정월 말에 끝났다.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청군이 정월 17일 돌연 종전을 위한 협상을 서두르기 시작했다는 점과,
청군이 결빙에도 불구하고 예정을 앞당겨 기상천외한 강화도 공격 작전을 감행했다는 점을
전쟁의 종결을 앞당긴 주요 요인으로 꼽을 수 있다.
홍타이지가 갑자기 전쟁의 종결을 서둘렀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 무렵 전황은 청군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명군의 배후 위협도 없었다.
그렇다면 사료상 그 사실만 확인되고 시점은 알 수 없는
청군 진영의 천연두 발발이 홍타이지로 하여금 전쟁의 종결을 서두르도록 압박했던 것은 아닐까?
1. 머리말
오늘날에도 우리는 대규모 화산활동이나 지진, 태풍 등과 같은 거대 자연현상 앞에서
무기력함을 절감하곤 하지만, 역사를 되돌아보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등과 같은 微物로 인해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공포에 시달린 적이 적지 않다. 예컨대 14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흑사병이나
20세기 초 전 세계에서 수천 만 명의 사망자를 냈던 스페인 독감 등을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에 끼친 영향의 광범위성과 장기지속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천연두 바이러스를 능가하는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천연두를 비롯한 구대륙의 전염병이 16세기 초 아메리카 대륙 원주민의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힌 사례는 이미 일반의 역사 상식이 되어 있다.1)
그러나 천연두의 위협과 그에 대한 공포는 16세기 아메리카 대륙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천연두는 대략 기원전 1만 년경에 출현한 것으로 추정되며,
아프로-유라시아 대륙의 거의 전역에서 오랫동안 실로 무수한 인간의 생명을 앗아간 유
행성 전염병이었다. 18세기의 유럽만 해도 매년 약 40만 명이 천연두로 목숨을 잃었고,
모든 맹인의 3분의 1은 천연두를 앓은 후유증으로 시력을 상실한 것이었다고 한다.
보통 사람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표트르 2세, 프랑스의 루이 15세 등
18세기 유럽의 군주 가운데 다섯 명이 천연두로 사망하였다.2)
물론 그 위협과 공포의 크기에 비례하여 인간은 일찍부터 천연두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노력
을 기울여, 이미 10세기경에 중국과 인도에서 人痘를 이용한 種痘法이 나타났다고 한다.
1) William H. McNeill, 허정 옮김,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서울: 한울, 1992, 227-249면.
2) Abbas M. Behbehani, “The Smallpox Story: Life and Death of an Old Disease,”
Microbiological Review, Vol. 47, No. 4, 1983, pp.456-458.
1796년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가 牛痘를 이용한 백신 접종법을 고안한
이후로는 인간과 천연두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졌다.
1960년대 후반 세계보건기구(WHO: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는
천연두 근절이라는 야심찬 목표아래 전 세계적인 백신 접종 프로그램을 시작하였다.
그 덕분에 천연두의 자연 감염은
1977년 10월 소말리아에서 발생한 사례를 마지막으로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마침내 1980년 5월 세계보건기구는 천연두의 근절을 공식 선언하였다.3)
이제 천연두는 인류가 최초로 완전 정복에 성공한 전염병으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적어도 18세기까지의 인류 역사에서 천연두의 영향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천연두가 역사에 끼친 영향은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특히 청 제국의 역사에서 천연두는 남 다른 위상을 점하고 있다.
이미 선행 연구를 통해 밝혀졌듯이,
청조는 중국 역사상의 어떤 왕조보다도 천연두 문제에 민감하였고,
청 제국의 정치·군사·외교 등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천연두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것은 선행 연구의 몫으로 돌리기로 하고,4)
여기에서는 단적인 예 몇 가지만 들어보겠다.
1636년 ‘다이칭 구룬(Daicing Gurun: 大淸國)’의 탄생은 홍타이지의 차하르 정복을
계기로 한 것이었다. 당시 홍타이지와 대결했던 차하르의 대칸 릭단(1588-1634)은
1634년 가을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5)
3) Behbehani, Op. cit., 1983, pp.455-456; William Atkinson, et al. eds., Epidemiology and
Prevention of Vaccine-Preventable Diseases,
Washington D.C.: Public Health Foundation, 2005(9th ed.), p.281.
4) Chang, C. F. (張喜鳳), “Disease and Its Impact on Politics, Diplomacy, and the Military:
the Case of Smallpox and the Manchus (1613-1795),”
Journal of the History of Medicine and Allied Science, Vol. 57, 2002, pp.177-197; 張喜鳳,
「淸初的避痘與査痘制度」, 漢學硏究14-1, 1996, 135-156면; Chang, C. F. (張喜鳳),
“Strategies of Dealing with Smallpox in the Early Qing Imperial Family,”
in Hashimoto Keizo, Catherine Jami, and Lowell Skar, eds.,
East Asian Science: Tradition and Beyond, Osaka: Kansai University Press, 1995, pp.199-205; 杜家驥,
「淸初天花對行政的影響及淸王朝的相應措施」, 求是學刊 31-6, 2004, 134-141면 등 참조.
5) 東洋文庫淸朝滿州語檔案史料の総合的研究チーム 譯註,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本文, 東京: 東洋文庫東北アジア硏究班, 2009
(이하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천총 8년 윤 8월 6일, 255면;
淸實錄, 北京: 中華書局, 1985, 천총 8년 윤 8월 7일 경인.
두 기록의 날짜에 하루 차이가 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만약 릭단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18세기 중엽 乾隆연간 청의 준가르 정복 과정에서는 준가르 초원의 유목민 가운데 열에
셋이 청군에게 도륙되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열에 넷이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6)
준가르 유목민의 지도자 아무르사나도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다.7)
따라서 청의 준가르 정복에 대해서도 ‘천연두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청조가 천연두의 ‘혜택’만 입었던 것은 아니다.
17세기 중엽 順治帝가 겨우 스물네 살의 나이로 사망한 것도,
19세기 후반 同治帝가 스무살에 사망한 것도 천연두 때문이었다.8)
결국 운명을 돌이키지는 못했지만, 入關 초기의 황제 순치제는
천연두 유행의 가능성이 특히 높은 겨울과 봄이면9)
거의 어김없이 은둔 생활에 들어가 천연두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했다.
康熙帝는 어려서 천연두를 앓아 면역을 획득한 덕분에 순치제의 계승자로 선택되었다.
강희제는 황태자(胤仍: 1674-1725)가 천연두에 걸렸다가 회복된 이후
인두 접종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청조는 천연두 면역이 없는 몽골의 왕공 귀족에 대하여
北京 대신 熱河로 와서 朝覲의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안배하였다.10)
만약 천연두가 없었다면, 入關 이후 청 제국의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상의 예들은 중국사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만주인들이 천연두 관련 기록을 많이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장성 이북 지역에서의 천연두 감염에 관한 기록은
16세기 중엽 이후에야 서서히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다.11)
이는 청 제국 건설의 주인공 만주인들이 ‘낯선 전염병’ 천연두에 유전적으로
취약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입관 이후의 청조는 과거의 한인 왕조들에 비해
천연두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6) 魏源, 聖武記, 北京: 中華書局, 1984, 156면.
7) Arthur W. Hummel, ed., Eminent Chinese of the Ch’ing Period (1644-1912),
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43, pp.9-11.
8) 杜家驥, 앞의 논문, 2004, 136면, 138면.
9) Atkinson, Op. cit., 2005, p.293.
10) 천연두가 청에 끼친 영향과 청의 천연두 관련 정책에 대해서는 각주 4)의 여러 논문 참조.
11) Chang, Op. cit., 2002, pp.178-179.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천연두에 대한 만주인의 공포가
이미 입관전 시기부터 뚜렷하다는 사실이다(후술).
그리고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만주인은 입관 전 시기에 조선을 상대로
두 차례의 대규모 전쟁을 일으켰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그것이다.
만주인은 두 전쟁에서 공히 조선땅 깊숙이까지 침공하였다.
게다가 이들 전쟁은 모두 일 년 중 천연두의 유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에 일어났다.
천연두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4세기에 걸치는 시기에 중국에 전파되었으며,
그 뒤로 한반도를 거쳐 6-7세기 무렵에는 일본에까지 들어갔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양대 호란이 발발할 무렵의 한반도에는 이미 천 년에 이르는
천연두 유행의 역사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12)
현존하는 임진왜란 이후 17세기 말까지의 조선 軍籍에서
사람들의 얼굴에 마마 자국이 어느 정도인지가 필수적인 기입 사항이었을 정도이다.13)
그렇다면 두 차례 호란의 전개 과정에서 만주인은
과연 조선의 천연두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청과 조선이 남긴 주요 기록에 의거하는 한, 조선의 천연두가 두 전쟁의 전개 과정에
어떤 영향을 끼친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두 전쟁 중에서
병자호란의 경우는 천연두가 전쟁의 종결 과정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가설을 제기하고자 한다. 즉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천연두로 인해
시간에 쫓기고 있었기 때문에 협상에 의한 종전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이를 밝히기 위하여,
먼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의 제 2장에서는 입관 전 시기의
만주인과 홍타이지에게 천연두가 얼마나 큰 공포의 대상이었는지를 소개할 것이다.
다음으로 제 3장에서는 정묘호란 때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때에도
청군이 조선의 천연두와 ‘조우’했었다는 사실을 밝힐 것이다.
12) 신동원, 호환 마마 천연두: 병의 일상 개념사, 서울: 돌베개, 2013, 166면.
13) 조영준·차명수, 「조선 중·후기의 신장 추세, 1547-1882」, 경제사학 53, 2012, 9-13면.
조선에서 천연두를 포함한 ‘痘疹’의 유행 실태에 관해서는
김호, 「조선후기 ‘두진’ 연구: 마과회통을 중심으로」, 한국문화17, 1996, 133-183면 참조.
제 4장에서는 병자호란 당시 홍타이지가 瀋陽에 보낸 서신의 내용과
정축년 정월 중순 양측의 협상 과정을 전하는 사료를 정밀하게 분석하여, 이를 토대로
청군이 모종의 ‘압박’에 쫓겨 전쟁의 종결을 서둘렀다는 주장을 전개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 5장의 맺음말에서는 청군을 시간에 쫓기도록 만들었던 ‘압박’이 청군 진영의
천연두 환자 발생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이에 근거하여 전쟁의 종결 과정을 재구성해 볼 것이다.
2. 천연두의 공포와 ‘生身’ 홍타이지
만주인은 천연두를 ‘마마(mama)’라고 불렀다(이하 ‘천연두’와 ‘마마’를 혼용).14)
1613년 海西女眞의 여허에서 약300호의 사람들이 마마로 몰살당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는 청의 입관 전 만주 지역에서 대규모 마마 감염 사실을 전하는 최초의 기록이다.15)
누르하치 시기에서 홍타이지 시기에 걸쳐 만주 지역에는
滿·蒙·漢이 함께 집주하는 사회가 형성되었다.
인구 구성상 한인의 비중이 점차 증대함에 따라
천연두의 발생 빈도도 늘어나고 피해 규모도 커지게 되었을 것이지만,
마마로 인한 사망자가 얼마나 되었는지를 사료로 직접 확인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마마가 입관 전의 만주인들에게
얼마나 심각한 위협이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예컨대 만주인 국가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신 기로오(Aisin Gioro) 일족만 보더라도
마마로 사망한 사실이 확인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天聰 5년(1631) 6월 다이샨의 다섯째 아들 발라마가 천연두로 사망하였다.16)
崇德 4년(1639)에는 다이샨의 장남 요토와 여섯째 아들 마잔이
화북 원정 도중 천연두로 사망하였다.17)
만주인들은 일찍이 1622년에 마마 환자를 발견하여
보고하는 임무를 띤 관직(‘査痘官’)을 설치하였다.18)
14) 신동원은 한국어의 ‘마마’라는 어휘도 만주어의 영향을 받아 정착한 것으로 추정한다.
신동원 2013, 172면, 175-176면.
15) Chang, Op. cit., 2002, p.178.
16) 청실록천총 5년 6월 19일 신유.
17) 청실록숭덕 4년 3월 9일 병인, 6월 2일 무자. 또한 입관 이후의 일이지만, 순치 6년 3월에는
도도와 아지거의 부인들이 천연두로 사망하였다(杜家驥, 앞의 논문, 2004, 153면 참조).
18) Chang, Op. cit., 2002, pp.180-181.
그들은 어려서 천연두를 한 번 앓은 사람은
다시는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이에 천연두를 앓아 면역을 획득한 이들(‘urehe’: 熟身)과
그렇지 않은 이들(‘eshun’: 生身)을 구별하는 어휘도 갖추게 되었다.
천연두가 발발하면 生身의 왕공은 ‘避痘所’로 몸을 피하였다.
생신이었던 순치제가 천연두 유행의 가능성이 높은 동계와 춘계에
거의 매년 ‘避痘’를 해야 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19)
그의 부친인 홍타이지 역시 생신이었기 때문에 피두에 관한 한
순치제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행태를 보였다.
홍타이지의 피두 사례는 만주인들이 얼마나 천연두를 무서워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입관 전의 만주인 국가에서
천연두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도 잘 드러내므로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가치가 있을 것 같다.
먼저 홍타이지는 피두를 위해 중요한 장례나 제사에 참석하지 못한 경우가 여러 번 있었다.
예컨대, 천총 5년 6월 마마로 사망한 다이샨의 아들 발라마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20)
천총 6년(1632) 12월에도 마마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형 망굴타이의 장례에 참석하지 못하였다.21)
천총 9년(1635) 2월 누르하치에 대한 제사에 불참한 것도 천연두 때문이었다.22)
또한 홍타이지는 천연두 때문에 중요한 국정 활동을
熟身 버일러에게 맡기거나 연기하곤 했다.
예컨대, 천총 5년 정월 홍타이지는 피두 중이었기 때문에
코르친의 수장 투시예투를 배웅해야 하는 자리에 나가지 못하고
숙신 버일러와 대신을 대신 보내야 했다.23)
천총 7년(1633) 5월에는 귀순해 온 孔有德 등과의 만남을 피두로 인해 연기해야 했다.24)
19) 순치제의 避痘에 대해서는 杜家驥, 앞의 논문, 2004, 135-136 참조.
20) 청실록천총 5년 6월 19일 신유.
발라마의 부친 다이샨도 생신이었기 때문에 아들의 장례에 불참하였다.
21) 滿文老檔硏究會 譯註, 滿文老檔V, 東京: 東洋文庫,
1955-1963(이하 滿文老檔), 874-875면, 877면.
22) 東洋文庫淸代史硏究室 譯註, 舊滿洲檔: 天聰九年1·2, 東京: 東洋文庫,
1972(이하 舊滿洲檔: 天聰九年), 80면.
23) 滿文老檔IV, 470-471면.
24) 東洋文庫淸代史硏究室 譯註, 內國史院檔: 天聰七年, 東京: 東洋文庫, 2003
(이하 內國史院檔: 天聰七年), 64면.
천총 8년(1634) 2월에도 홍타이지는 피두소로 몸을 피하였고,25)
그 때문에 천총 8년 3월 尙可喜의 귀순 때 그와의 만남을 연기해야 했다.26)
숭덕 연간에도 천연두는 홍타이지의 활동에 중대한 걸림돌이 되곤 했다.
특히 숭덕3년(1638)과 숭덕7년(1642)에는 천연두 때문에 장기간의 국정 공백이 초래되었다.
숭덕 3년의 경우 홍타이지는 마마가 돌고 있었기 때문에
정월 초하루 大政殿에서 열린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였다.27)
2월에는 후흐호트 방면에 침입한 할하 몽골에 대한 출정에서 귀환한 직후
아직도 심양에 유행 중이던 천연두를 피하기 위하여 사냥여행을 떠나야했다.
4월 12일 사냥에서 돌아올 때에는 마마 관련 종교적 금기 때문에
“밤을 타서 몰래 들어와야” 했다.28)
그러나 마마의 기세가 여전했으므로 홍타이지는 다시 피두에 들어가
“외부 사람들을 일절 만날 수 없었다.”29)
7월 초순에 이르러 귀순해 온
沈志祥과 접견할 수 없었던 것도 천연두 때문이었다.30)
이 해 홍타이지의 피두는 적어도 9월초순까지는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후술 내용 참조).
숭덕 7년에도 상황은 못지않게 심각했다.
10월 25일의 萬壽節에는 피두를 이유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도록 하였다.31)
11월 8일에는 40일분의 양식을 준비하여 사냥여행을 떠났는데,
이는 “비록 사냥이라 말하나 실은 마마를 피하기 위해서 나간 것”이었다.32)
홍타이지는 윤 11월 8일 심양에 귀환하였으나 천연두의 기세가 여전했기 때문에33)
은둔 생활을 계속해야 했다.
25)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66면, 69면.
26) 內國史院檔: 天聰八年, 92-93면.
홍타이지는 4월 10일에 이르러서야 상가희를 만났다(內國史院檔: 天聰八年, 117면).
27) 河內良弘 譯註·編著, 國史院滿文檔案譯註: 中國第一歷史檔案館蔵 崇徳二·三年分,
京都: 松香堂書店, 2010(이하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64면;
소현세자 시강원 지음, 정하영 등 역주, 심양장계: 심양에서 온 편지,
서울: 창비, 2008(이하 심양장계), 130면.
28) 심양장계, 149면.
29) 심양장계, 159면.
30)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422면.
31) 청실록 숭덕 7년 10월 25일 임술.
32) 심양장계, 813면.
33) 윤 11월 10일 청은 소현세자에게 “마마가 크게 번지니,
관소와 질관(質館) 중에 아직 마마를 앓지 않은 사람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조사해 들판과 농소(農所)로 내보내라.”는 지시를 전하고 있다(심양장계, 830면).
淸實錄의 숭덕 7년 윤 11월 부분에
홍타이지의 활동에 관한 기록이 단 사흘만 남아있을 정도이다.34)
홍타이지는 12월 2일 다시 사냥을 떠나 26일 심양으로 돌아왔고,
숭덕 8년 정월 초하루에는 賀禮를 거행하지 않았다.35)
물론 홍타이지가 마마가 도는 기간에 모든 공식 활동을 접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숭덕 3년 가을 홍타이지는 화북으로 출정하는
요토 휘하의 우익군을 환송하는 의식(8월 27일)과
도르곤 휘하의 좌익군을 환송하는 의식(9월 4일)에 참석하였는데,36)
이는 피두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안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壯途에 나서는 원정군을 직접 환송하러 나간 것이었다.37)
그러나 이는 대단히 예외적인 상황으로, 생신이었던 홍타이지는
분명 마마에 대한 공포로 인해 일상생활은 물론이고
정치, 의례, 외교 등의 여러 측면에서 심각한 제약을 받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 되겠지만,
천연두의 위협과 그에 대한 만주인의 공포는 평시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불결한 위생 상황이나 열악한 의료체계로 인해
전근대 시기의 戰場이 전염병의 온상이 되었다는 상식을 고려하면, 만주인의
마마에 대한 공포는 분명 전시가 평시보다 훨씬 더 심했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천연두가 오래 전부터 유행성 전염병으로 자리를 잡고 있던
명의 영토에서 전쟁을 벌일 때에는 마마의 위협이 중요한 고려사항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천총 7년(1633) 6월 명, 조선, 차하르 가운데
어느 나라를 먼저 치는 것이 좋겠느냐는 문제를 두고 열린 회의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34) 杜家驥, 앞의 논문, 2004, 135면.
35) 청실록은 숭덕 8년 원단의 하례가 열리지 않은 이유를
홍타이지의 건강 문제(“聖躬違和”)로 밝히고 있다(청실록 숭덕 8년 정월 1일 병신).
그러나 심양장계에는, “황제께서 사냥 갔다 돌아오신 후 절대로 밖에 나가시지 않으니,
어떤 이는 ‘병이 있다’고 하고, 어떤 이는 ‘마마를 꺼려서다’라고 하는데,
아직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심양장계, 853면).
36)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581-585면, 599-603면.
37) 청실록숭덕 4년 5월 19일 신사. 청실록의 이 기사는
숭덕 4년(1639) 5월 도도에 대한 問罪에 관한 것이다. 이 때 도도의 일곱 가지 죄명 가운데
첫 번째는, 홍타이지가 피두중임에도 불구하고 도르곤의 출정을 환송하러 나갔는데도
도도는 피두를 핑계로 자신의 친형을 환송하러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청실록등에는 버일러 9명(지르갈랑, 아지거, 도르곤, 도도, 두두, 요토, 사할리얀, 호거,
아바타이)과 대신 7명(양구리, 렁거리, 호쇼투, 여천, 피양구, 일던, 칵두리)이
천총 7년 6월 전략 회의에서 제기한 의견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38)
이 회의에서는 거의 전원이 조선과 차하르보다는
명에 대한 공격과 약탈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지르갈랑은 명을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저곳은 마마가 걱정스러워, 황상께서 친히 가시더라도 오래 머물 수 없습니다
(但彼處痘疹可虞, 皇上親往, 不可久留).”라고 하여
생신인 홍타이지가 장기 주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양구리 역시 명의 내지 깊숙이 들어가 몇몇 城을 점령한 다음에는
“숙신[已出痘] 버일러와 장수에게 병력을 이끌고 주둔하게 하고,
황상과 버일러 중 생신[未出痘者]은 일단 심양으로 돌아와야
(即令已出痘貝勒將帥, 率兵屯駐, 皇上與貝勒之未出痘者, 暫且還都)”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천연두 감염을 우려하여 홍타이지와 생신 버일러는
내지 침공작전에 아예 참여하지 말아야한다는 입장을 피력한 버일러들이 더 많았다.
예컨대 요토는 “만약 장성 [너머로] 병력을 진입시킨다면,
황상과 생신 버일러는 [장성 바깥에] 남아 지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如進兵長城, 皇上與貝勒之未出痘者, 居守可也).”라고 하였고,
사할리얀은 홍타이지와 생신 버일러는 출정하더라도 명의 변경 바깥에 머물면서
숙신 버일러와 장수에게 병력을 맡겨 내지로 침입하여 山海關의 배후를 치자고 주장하였다.
“황상께서는 변경 바깥에 駐軍하면서, 여러 버일러와 장수를 골라
여덟 갈래로 나누어 달려 들어가 [명의] 내지에 군대를 진주
(皇上軍於邊外, 擇諸貝勒將帥, 分八路馳入, 駐軍內地)”시키자는 아바타이의 주장도
마마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그 취지는 사할리얀과 다를 바 없었다.
38) 청실록 천총 7년 6월 18일 무인; 內國史院檔: 天聰七年, 93-95면.
이들 7명의 대신과 당시 팔기의 구사어전 명단을 비교해 보면
(張晉藩·郭成康, 淸入關前國家法律制度史, 瀋陽: 遼寧人民出版社, 1988, 327-328면 참조),
양황기의 다르한과 정람기의 설러가 누락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천총 연간의 금군과 숭덕 연간의 청군이 벌인 주요 군사작전을 개관해보면,
요토 등의 주장처럼 대명 전쟁에서
생신 버일러와 숙신 버일러의 역할 분담이 기본 원칙으로 작동했던 것 같다.
금군-청군이 화북에서 벌인 군사작전은
천연두 유행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겨울에서 이른 봄에 이르는 시기를 피하거나,
숙신의 버일러·장령에게 작전을 맡기는 형태로 이루어졌던 것이다.39)
물론 천연두는 실제 발발하기 전까지는 잠재적인 위험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필요가 우선시되는 경우 생신 버일러가 어쩔 수 없이
천연두 감염의 위험을 감수한 경우도 없지는 않았다.
숭덕 3년 가을부터 숭덕 4년 봄에 걸쳐 전개되었던 화북 약탈전에서
우익 병력을 지휘했던 요토가 濟南에서 천연두로 사망한 사례가 대표적이다.40)
그러나 요토의 사례는 그 뒤로 생신과 숙신 간의 역할 부담 원칙이
더욱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숭덕 6년(1641) 7월 우전초하(ujen cooha), 즉 八旗漢軍의 石廷柱는
錦州 공격을 위한 전략을 제안하면서, 숙신 버일러를 宣府·大同 방면으로 침투시켜
명의 원병 파견을 저지하고 생신 버일러에게는 금주 쪽을 맡겨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41)
또한 순치 원년(1644) 4월 호거는 섭정왕 도르곤이 생신인 자신을
對明 出征에 동행하도록 한 것이 부당하다면서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42)
3.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의 천연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입관 전의 만주인은 對明 전쟁에서
마마의 위협을 중대 요소로 고려하고 있었다.
머리말에서 언급했듯이 이 시기에 만주인이 조선을 침공하여 벌인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은 일 년 중 천연두의 유행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계절에 일어났다.
특히 병자호란 때에는 병자년12월 8일(양력 1637년 1월 3일) 선봉부대에 이어43)
39) 杜家驥, 앞의 논문, 2004, 137면.
40) 청실록숭덕 4년 3월 9일 병인, 6월 2일 무자.
41) 청실록숭덕 6년 7월 23일 정유.
42) 청실록순치 원년 4월 1일 무오.
43)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26면.
12월 10일(1월 5일) 본진이 압록강을 건너 조선 경내에 쳐들어왔기 때문에,44)
조선에서 청군은 마마의 위협에 노출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제로 병자년 겨울 서울에서는 마마가 창궐하고 있었다.
11월 21일 承政院에서는 “근일 痘疫이 大熾하여”
지방에서 올라온 軍士와 과거를 보러 상경한 儒生 중에도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있어
“無所救護”의 처지에 있는 그들을 위해 藥物을 지급할 것을 주청하고 있다.45)
또한 南漢日記의 저자 南礏은 병자년 12월 12일
“아침밥을 먹은 뒤에 궐문을 나와 泮村[성균관 근처의 동네]에 가서
痘疾을 앓고 있는 李子章[이름은 爾樟]을 문병하였다.”46)
병자년 12월 14일 가족을 피난시키고자 서울을 나섰던 洪翼漢도,
“이 날 [밤] 북풍이 칼과 같았고 빽빽하게 눈이 내렸다.
길 위에는 얼어 죽은 사람이 많았다. 婺兒[홍익한의 딸로 보임]는
전에 집에 있을 때부터 이미 痘疫을 앓고 있었다. 바람에 닿고 눈을 맞으니
거의 혼절하여 소생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47)
이러한 상황에서 청군은 과연 조선의 마마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병자호란 당시의 상황을 들여다보기에 앞서 먼저 정묘호란의 경우를 살펴보자.
정묘호란 당시 금군이 압록강을 건넌 날짜는
정묘년 정월 13일(양력 2월 28일)이었으므로 48)
병자호란 때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들이 마마의 위협에 직면할 확률은 여전히 높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는 단지 가능성에 그치지 않았다.
정묘호란 때의 금군이 조선에서 마마의 위협을 인지하였고
늦게나마 그 위협을 실감했다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되는 것이다.
천총 원년(정묘년) 정월 8일(1627.2.23) 아민, 지르갈랑, 아지거, 두두,
요토, 쇼토 등이 이끄는 금군이 심양을 출발하였다.49)
44) 滿文老檔VII, 1483면.
45) 承政院日記3冊, 仁祖 14年 11月 21日 辛酉.
46) 南礏, 申海鎭 역주, 南漢日記, 서울: 보고사, 2012, 18면.
47) 洪翼漢, 「花浦西征錄」(花浦集, 고려대학교 해외한국학자료센터), 1b면.
48) 滿文老檔IV, 34면.
49) 滿文老檔IV, 34면.
정월 13일(1627.2.28)에 압록강을 건넌 금군은
義州, 林畔, 宣川, 定州 등을 잇달아 함락시킨 뒤 18일에는 郭山을 점령하였고,50)
이날 심양으로 전황 보고를 위한 使者를 파견하였다.51)
정월 22일 심양에 도착한 보고서를 보면, 平壤으로 진격할 예정이며
이미 점령한 의주에 대신(amban) 8명과 병사(cooha)1천 명,
정주에 대신 4명과 병사 5백 명을 잔류시켰다고 하면서52)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유목하는 몽고인, 관직[이 있는] 몽고인을 의주에 보내어,
[의주에 잔류시킨] 우리 군대를 그쪽[조선 내지]으로 데려가면 어떨까요?
이를 한(han: 汗)께서 생각해 주십시오. … 거기[심양]에서 만약에 [병력을] 보낸다면,
생신(eshun)의 대신들을 보내지 마십시오. 마마(mama)가 나옵니다.53)
조선도 ‘마마(mama)’가 도는 곳이므로 점령지를 지킬 증원 병력을 보낼 경우
‘생신(eshun)’의 대신들을 파견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이 무렵에
금군이 조선 역시 마마로부터 자유로운 지역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에 대한 답신에서 홍타이지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마마의 소식(mama i medege)이 퍼져 있다면,
우리의 생신 버일러들, 몽고의 생신 버일러들을 돌려보내면 어떨까?
[그러나] 장애가 되지 않는다면 [그대로] 진행하도록 하라.
그것을 또한 너희가 생각하라. 몽고의 생신 버일러들을 돌려보낼 경우,
[그들을 데려올] 친구를 [적당히] 헤아려 보내라.54)
만약 조선 현지에 ‘마마의 소식’이 널리 퍼져 있다면,
만주와 몽고의 ‘생신(eshun)’ 버일러들을 귀환시키는 것도 고려해 보라는 취지였다.
그러나 조선에 출병한 금군의 지휘부가 생신 버일러들을 귀환시킨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마마 발발의 가능성을 인지하였을 따름이고 실제로 금군 진영이나 그 부근에
‘마마의 소식’, 즉 마마의 발발이 당장에 있지는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50) 滿文老檔IV, 34-35면.
51) 滿文老檔IV, 8면.
52) 滿文老檔IV, 8-9면.
53) 滿文老檔IV, 9면.
54) 滿文老檔IV, 10면.
이후 금군은 남진을 계속하여 2월 8일 平山에 진주하였고,
그 이후 강화도로 파천한 조선 조정과 강화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3월 3일 강화도에서 쌍방 간 ‘盟誓’를 통한 화의가 일단 성립하였다.
하지만 아민이 강화도에서의 ‘맹서’에 불만을 품고 반발하였기 때문에
3월 18일에 이르러 평양에서 재차 ‘맹서’가 이루어졌다.55)
금군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시점까지 조선현지의 금군에 마마의위협은 현실화되지 않았다.
그러나 평양의 ‘맹서’ 직후, “조선국(solho gurun)에 마마의 소식이 있다고 해서,
만주 군대의 생신 버일러는 모두 각각 흩어져서 (돌아)왔다.”56)
즉, 홍타이지가 일찍이 우려한 바 있는 조선 현지에서의 ‘마마의 소식’은
이미 두 차례의 ‘맹서’가 이루어짐으로써 전쟁이 끝나고
금군이 철군을 시작할 무렵에야 발생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천연두는 정묘호란의 전개 과정 자체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고,
단지 생신 버일러들이 마마를 피해 각기 흩어져 귀환하도록 만드는 데 그쳤을 뿐이다.57)
그렇다면 병자호란의 경우는 어떠한가?
정묘호란 시기의 기록에는 전쟁이 막 끝난 뒤이긴 해도
조선에서의 천연두 발발 사실이 언급되어 있으나,
병자호란 시기의 경우는 계절적으로 마마의 발발 가능성이 더 컸을 뿐만 아니라
그 무렵 서울에 “痘疫이 大熾”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간 청의 기록에서 천연두에 관한 언급은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병자호란 때의 천연두 문제가 지금껏
주목의 대상으로 떠오르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58)
55) 滿文老檔IV, 34-58면.
56) 滿文老檔IV, 57-58면.
57) 정축년 4월 10일, 홍타이지는 구르부시 어푸(Gurbusi Efu), 시르후낙(Sirhvnak),
달라이(Dalai), 만주시리 어푸(Manjusiri Efu), 엉거선(Enggesen) 등 정묘호란에 참전했던
몽골의 버일러들이 금군의 버일러들과 헤어져 먼저 귀국한 것을 두고,
“너희에게만 처자가 있느냐? (조선에) 간 버일러와 군사의 어전들에게는 처자가 없느냐?”
라고 하면서 꾸짖고 있다(滿文老檔IV, 59면).
이들은 당시 조선에서 마치 도망치듯 먼저 귀국한 것으로 보이는데,
혹 천연두에 대한 공포 때문이 아니었을까?
58) 단지 Chang, Op. cit., 2002, pp.186-188에서 후술하는
보호토와 탄타이 등에 대한 처벌 사실을 간단히 언급했을 따름이다.
그러나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 진영에
마마가 발발했다는 사실을 전하는 확실한 증거가 존재한다.
숭덕 2년 6월 27일, 홍타이지는 “朝鮮과 皮島[=椵島] 원정 당시 王 이하
諸將 이상에 법을 어긴 妄行이 많았다.”고 하면서 그들을 論罪하도록 하였다.59)
당시의 논죄 상황을 전하는청실록의 기록 가운데
천연두와 관련된 내용이 보이는데, 그 부분만을 뽑아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인명 죄목
固山貝子 博和託
본인 니루(牛彔) 아래의 索克什가 마마에 걸렸다[出痘]는 사실을 들었고,
또한 松阿里가 그 사실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밝히지 않은채
그대로 군영에 머물게 하였는데, (이는) 御營과 서로 가까웠다.
(聞本牛彔下索克什出痘, 又經松阿里告之, 竟不聲明, 仍留在營, 與御營相近.)
額駙 達爾哈
巴哈納의 동생 海蘭이 披甲의 數 안에 들고도
生身이라는 이유로[以未出痘] 먼저 귀환하였는데, 稽察할 줄을 몰랐다
(巴哈納弟海蘭, 在披甲數內, 以未出痘先歸, 不知稽察).
固山額真 譚泰
克宜福의 아들이 生身이라고 먼저 귀환한 것을 색출하지 않았다
(不將克宜福子未出痘先還之處查出).
固山額真 阿山
郎球의 아들, 吳達海의 아들, 蘇爾馬의 아들이 모두 騎兵의 數 안에 들고도
生身이라는 이유로[以未出痘] 먼저 귀환하였는데, 색출하지 않았다
(郎球子吳達海子蘇爾馬子, 俱在騎兵數內, 以未出痘先還, 不行查出).
固山額真 杜雷
藍塔의 아들은 生身[未經出痘], 雅星阿의 아들은 비록 熟身[已出痘]이나,
披甲의 數 안에 들지 않았는데도 원정에 따라왔다가 먼저 돌아갔는데, 살펴서 색출하지 못하였다
(藍塔子未經出痘, 雅星阿子雖已出痘, 而不在披甲數內從征先回, 不行察出).
근거: 청실록 숭덕 2년 6월 27일 갑자.
위의 표에서 固山貝子 博和託(아바타이의 아들 보호토[Bohoto])의 죄목을 보면,
자기 휘하 니루의 索克什이 천연두에 걸렸고
松阿里[아마도 査痘官이었을 것이다]로부터 이 사실에 대한 보고를 받았으나
끝내 이를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대로 군영에,
그것도 홍타이지가 머물던 御營 가까이에 잔류시켰다는 것이다.
額駙 達爾哈(병자호란 당시 정람기 만주의 구사어전 다르한[Darhan])의 죄목은
자기 휘하의 구사에서 출병 인원(‘披甲數內’)에 포함된 자가 ‘생신’이라는 핑계로
먼저 귀환한 사실을 적발하
정황기 만주의 구사어전 탄타이(Tantai: 譚泰),
정백기 만주의 구사어전 아산(Asan: 阿山),
정홍기 만주의 구사어전 둘러이(Dulei: 杜雷) 등의 죄목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둘러이의 경우는 출병 인원에 포함되지 않았는데도
몰래 조선에 출정한 경우를 적발하지 못한 것도 위의 죄목에 포함되어 있다.
다르한을 비롯한 구사어전 네 명의 죄목은
당시 천연두의 공포에 질려 불법적으로 전선을 이탈하여
서둘러 귀국한 자들까지 발생한 청군 진영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60)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심각한 것은 말할 나위 없이 보호토의 죄목에 보이는,
홍타이지의 御營 부근에 마마 환자가 발생하였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마마가 발생하면 생신 홍타이지는 避痘에 들어가서
외부 인사와의 접촉을 극도로 제한하는 것이 정상적이었다.
그러나 정월 30일 인조의 ‘出城’과 三田渡에서의 항복의식을 마친 홍타이지가
2월 2일 서울을 출발할 때까지의 기록 가운데 천연두 발발로
홍타이지의 신변에 일어났을 법한 비상상황을 전하는 기사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이 기간에 대한 청 측 기록은 거의가 전황에 관한 주요 사실이나 당시 작성된
문서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고 홍타이지의 행적은 거의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뒤의 상황을 전하는 기록에 천연두 관련 기사가 포착된다.
內國史院滿文檔案을 보면, 2월 13일에
“정주의 관원, 곽산의 관원이 (각각) 네 마리씩의 소를 가지고 叩頭하며 마중을 나와 있었다.
(그러나) 마마 소식이 있다고 하면서 알현시키지 않았다.”는 기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61)
이 기사는 홍타이지가 심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마 소식” 때문에 조선 관원과의 대면 접촉을 기피하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59) 청실록숭덕 2년 6월 27일 갑자.
60) ‘披甲數內’, 즉 출병 인원에 포함된 ‘生身’의 이탈 현상은 병자호란 자체의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들은 이미 조선에 출정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홍타이지는 정축년 2월 2일 서울을 떠나면서
쇼토에게 니루마다 4명씩의 갑병(uksin)을 맡겨, 삼순왕 휘하의 병력 전부와 더불어
피도, 즉 가도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95면).
또한 2월 15일에는 구사어전 아산과 여천을 쇼토의 가도 공격에 합류시키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 명령에는 쇼토와 삼순왕 외에 우전초하를 이끌던 石廷柱의 이름도 참전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같은 책, 121-122면).
출병 인원에 포함된 ‘生身’의 이탈은 가도로의 출병 인원에 포함되어
조선에 잔류해야 했던 자들 가운데에서 나타난 현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1)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15면.
내국사원의 만문 당안에서 이 기사 외에
“마마 소식”을 직접 언급한 기록은 더 이상 찾을 수 없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의 홍타이지에게서 승자의 기쁨을 만끽하는 모습을
발견하기 어려운 것은 의외라고 할 수 있다.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을 일으키기 전 “朝鮮王宮”에 들어가
조선의 왕을 만나는 꿈을 꾼 적이 있음에도62)
종전 이후 서울에 입성하지도 않은 채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
또한 심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위치한 조선의 크고 작은 도시에 입성한 흔적도 없다.
게다가 당시 조선의 관원들은 홍타이지가 관할 경내를 지날 때 마중을 나와
길가에 꿇어 앉아 배웅을 하였는데, 이런 경우 홍타이지는
그들과의 근거리 접촉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63)
심양에 도착한 뒤에도 홍타이지는
한동안 조선에서 온 사람들과의 근거리 접촉을 피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2월 8일 도르곤과 함께 심양행에 올랐던
소현세자 일행은 4월 10일 심양에 입성하였는데,64)
홍타이지가 소현세자 일행을 처음 접견한 것은
그로부터 거의 한 달이 지난 윤 4월 5일의 일이었다.
홍타이지가 이처럼 오랫동안 소현세자 일행을 접견하지 않았던 것은 마마 때문이었다.65)
지금까지 고찰한 바와 같이,
병자호란 당시 청군 진영에서는,
그것도 홍타이지가 머물던 어영 부근에서 마마 환자가 발생하였다.
전쟁이 끝난 이후 홍타이지가 마마로 인해 행동에 제약을 받았던 것도 확실해 보인다.
이는 종전 무렵 마마가 발발하여
금군의 철군 과정에 영향을 끼쳤던 정묘호란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병자호란의 경우 사료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청군 진영의 마마 발발 사실뿐이다.
그 발발 시점은 사료가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까닭에 알 수가 없다.
62) 청실록숭덕 2년 6월 17일 갑인.
63) 예컨대 2월 10일 안주에서 조선 관원 100여 명이 마중을 나와 下營 장소까지 따라오자,
홍타이지는 그들을 “멀리에 앉게 하고” 술을 내려 마시게 하였다(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12면).
64) 仁祖實錄卷34, 仁祖 15年 2月 8日 戊寅; 심양장계, 67-68면.
65) 심양장계, 74면. 向化人으로 과천에 살던 김늦남은 병자호란 때 포로로 잡혀
심양으로 끌려가고 있었는데, 청군은 그가 마마에 걸려 걸을 수 없게 되자
그를 의주에 버려두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심양장계, 734면).
김늦남의 사례로부터 추정하건대, 홍타이지는 당시 소현세자와 함께 심양에 끌려온
사람들 속의 마마를 경계하여 소현세자 일행과의 만남을 연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정묘호란 때와 마찬가지로 종전 무렵에야 마마가 발발하였고,
따라서 전쟁 자체의 전개과정에 끼친 영향도
거의 없었을 것이라는 수준에서 고찰을 멈추어야 하는 것일까?
만약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때 청군 진영에 마마가 돌기시작했다면,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없던 홍타이지와 생신의 버일러들은
그 시점부터 귀국을 서둘러야 한다는 ‘압박’에 쫓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천연두의 발발 시점에 관하여 사료가 ‘침묵’하고 있다면,
그 대신 전쟁 기간 청군 진영에서 그러한 ‘압박’의 존재 여부를 추적해 보면 어떨까?66)
4. 병자호란의 종결 과정: 시간에 쫓긴 청군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 진영에 전쟁을 속히 끝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따지려면, 당시 청군이 전쟁의 지속기간을
어느 정도로 전망하고 있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청군 선봉부대의 압록강 도강(병자년 12월 8일)을 개전 시점으로,
인조의 ‘出城’(정축년 정월 30일)을 종전 시점으로 각각 잡으면,
병자호란은 날수로 53일간 지속되었던 셈이다.
그런데 개전 초기 홍타이지는 서울 기습작전을 통해서
전쟁을 훨씬 더 빨리 끝내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병자년 12월 3일, 홍타이지는 戶部承政 마푸타와 前鋒(gabsihiyan)의 수장 로사 등에게
300명의 병력을 주면서 “먼저 [떠나] 장사꾼으로 위장하여 밤낮 없이 가서
조선의 왕이 사는 王京의 성을 포위하라.”고 지시하였고,
이어서 도도, 쇼토, 니칸에게 護軍(bayara) 1,000명을 맡겨 추가로 출발시켰다.67)
또한 12월 9일에는 요토와 양구리에게 3,000명의 병력을 맡겨
도도 등을 지원 하도록 하였다.68)
마푸타와 로사의 부대가 압록강을 건넌 지 겨우 엿새가 지난
12월 14일 서울에 육박하였고, 이로 인해 강화도로 가는 길이 차단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시작한 것은 잘 알려진 대로이다.
66) 청 측의 기록이 전쟁 기간의 천연두 발발에 대하여 ‘침묵’을 지키고 있는 배후에는
병자호란의 역사를 ‘분식’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대해는 각주 161)에서 제기한 문제와 더불어 다른 기회에 논의하고자 한다.
67) 滿文老檔VII, 1479-1480면.
68) 滿文老檔VII, 1482-1483면.
이로써 홍타이지의 서울 기습작전 구상은, 인조의 강화도 파천을 저지함으로써
정묘호란 때와 같은 장기 대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조선 조정이 강화도와 더불어 조선의 양대 保障處 중 하나로 꼽고 있던 남한산성에69)
들어가는 것까지는 막지 못하였다. 말하자면 ‘절반의 성공’을 거두는 데 그쳤던 것이다.70)
이제 전쟁은 남한산성 포위전으로 접어들었다.
마푸타와 로사의 부대가 12월 14일 서울에 도달한 데 이어,
12월 16일 도도와 요토의 부대가 도착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하였다.
12월 19일, 21일, 25일 등에 걸쳐 도도로부터
조선 왕의 남한산성 입성 사실에 관한 보고를 접수한 홍타이지는,
12월 25일 도도에게 증원 병력을 급파하였고, 26일에는 후위의 두두에게 사자를 파견하여
“홍이포, 대장군포, 화기 등을 속히 도착”시킬 것을 지시하였다.71)
우익 부대를 이끌고 남하한 홍타이지는
12월 29일 한강을 건너 남한산성 서쪽에 御營을 설치하였다가,72)
정축년 정월 4일 한강 북안으로 어영을 옮겼다.73)
같은 날 두두와 함께 후위에 있던 三順王, 즉 孔有德, 耿仲明, 尙可喜와
우전초하의 金玉和가 馬兵을 이끌고 남한산성에 도착하였다.74)
정월 10일에는 좌익 부대를 이끌고 남하한 도르곤과 호거 등이 도착하여
홍타이지에게 그간의 전과를 보고하였다.75)
같은 날 두두 등이 홍이포를 비롯한 화약무기와 중장비를 끌고 청군 진영에 도착하였다.76)
이로써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는 진용을 완비한 셈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무렵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의 농성을 종결시키기까지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을까?
69) 허태구, 「丙子胡亂 江華島 함락의 책임자 처벌」, 진단학보 113, 2011, 100면.
70) 숭덕 2년 6월 27일 로사는 조선 왕의 남한산성 입성을 막지 못한 죄로 처벌을 받았다
(청실록숭덕 2년 6월 27일 갑자).
71) 滿文老檔VII, 1490-1498면.
72) 滿文老檔VII, 1499면.
73)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2면.
74)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3면.
75)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6-18면.
76)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9-20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현존 사료로부터 찾기란 언뜻 난망해 보이지만,
뜻밖에도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하는 기록이 존재한다.
정축년 정월 16일 홍타이지는
가장 먼저 서울에 도착했던 로사 등의 前鋒 병력 300명을 전원 귀국시키면서77)
본국 留守의 임무를 맡고 있던 지르갈랑 등에게
당시까지의 전황을 알리는 서신을 보낸 바 있는데,
이 서신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A) 또한 집안[청 본국]에 지체해서는 안 될 큰일과 긴급한 소식이 있어
[사자를] 보낸다면, 이삼 백 [명의] 사람을 파견하라.
사소한 일과 소식이 있으면, 사람 파견하여, 2월 20일에, 通遠堡에 와서 있으라고 하라.
여기[홍타이지의 군영]에서 데리러 간 [사람들]을 만나 이쪽으로 오도록 [하라].78)
(A)의 내용을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본국에 긴급한 처리를 요하는 사무가 발생하는 경우
지르갈랑 등은 홍타이지에게 使者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당시 청군은 압록강에서 서울까지의 교통로를 점령하여 장악한 상태가 아니었다.
따라서 사자 일행의 안전한 여행을 위해서는 상당한 병력의 호위가 필요했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긴급 사무가 발생하면
2-3백 명규모의 병력을 파견하라고 지시한 것이다.79)
그러나 기타 사소한 사무나 소식에 대해서는 2월 20일에 통원보로 사람을 보내어
대기시키면, 그 날짜에 맞추어 자신이 그들을 데리러 사람을 보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통원보로 보낼 사람에겐 응당 홍타이지 쪽에서
상당수의 호위 병력을 딸려 보낼 요량이었을 것이다.
(A)는 홍타이지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본국과의 연락 사무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지만,
여기에서 특히 주목할 대목은 “사소한 일과소식이 있으면, 사람 파견하여,
2월 20일에, 通遠堡에 와서 있으라고 하라.”는 부분이다.
통원보에서 서울까지의 여정을 감안하면, 이것은 정월 16일의 시점에서 홍타이지가
적어도 2월 말까지는 서울에 머물러 있을 작정이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77)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25-26면.
78)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38면.
79) 마찬가지로, 정월 16일의 서신을 심양에 보내면서 로사가 이끄는 전봉의 병력
300명 전원을 귀국시킨 것도 사신의 안전한 여행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조의 남한산성 농성은 병자년 12월 14일부터 시작되었으므로,
홍타이지는 농성이 두 달 보름 정도, 즉 70-80일간 지속되리라 예상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인조의 실제 남한산성 농성은 정축년 정월 30일까지 날수로 47일 만에 끝이 났다.
이로부터 70-80일은 너무 긴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의문이다.
결과론적 시각을 떨쳐내고 당시의 상황에 접근해 보면, 홍타이지가
남한산성 포위 기간을 70-80일로 전망하고 있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홍타이지는 남한산성 포위전 계획을 구상하면서 응당 유사한 작전 경험,
즉 천총 5년(1631)에 있었던 大陵河城 포위전을 선례로 참고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홍타이지의 대릉하 원정은 만주인이 실전에 홍이포를 최초로 투입했다는 사실 외에80)
일정 기간의 농성 역량을 갖춘 적군의 성곽 요새를 상대로
장기 포위전을 벌여 최초로 승리를 거둔 싸움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81)
병자호란 시점에서 볼 때 만주인의 전쟁 경험 중
대릉하성포위전보다 남한산성 포위전을 닮은 전쟁은 없었던 것이다.
천총 5년 7월 27일 직접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떠난
홍타이지가 대릉하성을 포위한 것은 8월 6일(양력 9월 1일) 밤의 일이었다.82)
8월 7일 홍타이지는 대량의 전투 손실이 예상되는 攻城戰 대신에
대릉하성 주위를 참호와 담장으로 둘러싸서 봉쇄하고 성 안의 명군이 나오거나
외부의 명군이 성을 구원하러 오는 경우에만 맞아 싸운다는 작전을 수립하였다.83)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남한산성 고립 전략과 다를 바가 없었다.
홍타이지의 친정, 대규모 병력 동원, 홍이포 등 신종 화약무기 동원 등에서도
남한산성 포위전과 별 다를 바 없었던 대릉하성 포위전에서
홍타이지가 10월 28일(양력 11월 21일)
祖大壽의 ‘出城’ 항복을 받기까지 걸린 시간은 날수로 82일이었다.84)
80) 黃一農, 「紅夷大炮與皇太極創立的八旗漢軍」, 歷史研究2004-4, 89-91면.
81) Frederic Wakeman, Jr.,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Berkely: Unvirsity of California Press, 1985, pp.170-194.
82) 청실록천총 5년 7월 27일 기해; 8월 6일 정미.
83) 청실록천총 5년 8월 7일 무신.
여기서 천총 5년 대릉하성의 명군이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의 조선군보다 더 많은 물자를 비축하고 있었기에
82일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즉, 남한산성 내에 식량, 땔감, 식수 등이 불충분한 사정을 인지하고 있었으므로, 85)
홍타이지가 남한산성의 포위전이 대릉하성의 경우보다는
짧게 끝나리라 예상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농성군 쪽의 물자 부족 사정은 대릉하성의 경우도 전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심하면 심했지 더 나은 상황은 아니었다.
병자년 12월 20일 羅萬甲은 남한산성의 식량이 60일분은 족히 되며
아껴서 쓴다면 70일은 버틸 수 있다고 인조에게 보고한바 있다.86)
이는 다소 낙관적인 전망에 치우친 감이 없지 않지만,
적어도 정축년 정월 30일 인조의 ‘출성’까지 남한산성에서는
동사자나 병사자는 있을지언정 아사자는 나오지 않았다.87)
이에 반해 천총 5년의 대릉하성에서는 농성을 시작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난
9월 23일경 대릉하성 수축에 동원되었던 민간인의 과반이 아사하고
성내에 남은 곡식은 100석에 불과하였다.88)
결국 군사들이 “修城夫役 및 商賈·平民을 죽여서 먹는”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고,89)
농성 시작 무렵 대릉하성에 있던 약 3만 명 가운데
농성이 끝난 뒤 살아남은 사람은 11,682명에 그쳤다.90)
84) 청실록천총 5년 10월 28일 무진.
85) 滿文老檔VII, 1493-1494면;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34면.
86) 政院日記3冊, 仁祖 14年 12月 20日 庚寅.
羅萬甲은 정축년 정월 14일 일인당 지급량을 하루에 군사 3홉, 백관 5홉으로 줄이면
2월 24일까지는 버틸 수 있다고 보았고(羅萬甲, 윤재영 역, 丙子錄, 서울: 삼경당, 1985, 67-68면),
정월 19일에도 인조에게 아직 한 달은 버틸 만한 식량이 있다고 말하였다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9日 己未).
당시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식량과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허태구, 「병자호란 講和 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52, 2010, 59-61면 참조).
그러나 대릉하성의 명군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았던 것도 사실이다.
87) 예컨대, 남급은 정월 20일의 일기에 성첩을 지키던 군사 9명이 밤 사이에 동사하였다 적었고,
정월 28일의 일기에도 얼어 죽은 사람이 속출하여 많게는 백여 명이 이르렀으며 전염병의 기운이
점차로 성하여 사람들이 다 죽을 지경이라고 기록하였다(南礏, 南漢日記, 81면, 106면).
88) 청실록천총 5년 9월 23일 갑오.
89) 청실록천총 5년 10월 14일 갑인.
90) 청실록천총 5년 11월 2일 신미; Wakeman, Op. cit., 1985, p.190.
단, 8월 18일 홍타이지가 심양에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당시 대릉하성에는 馬兵 7천, 步兵 7천,
工役 3천, 商賈 2천 등 합계 19,000명이 있었다고 한다(청실록 천총 5년 8월 18일 기미).
대릉하성의 사례에 비추어 보건대, 홍타이지가 남한산성 포위전을 70-80일로
전망하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A)의 기록을 사실로 간주해도 별무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남한산성 포위전은 어떻게해서 홍타이지의 전망보다 빨리 끝날 수 있었던 것일까?
주지하는 바와 같이 홍타이지는 정월 20일
인조의 출성과 척화신 두세 명의 縛送을 終戰의 구체적 조건으로 제시하였고,91)
이에 대하여 인조가 정월 24일에 후자를,
이어서 정월 27일에 전자를 수용함으로써 전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92)
즉, 병자호란은 쌍방의 협상을 통해서 막을 내렸던 것이다.93)
그렇다면 쌍방의 협상은 도대체 어떻게 진행되었기에 정월 16일 시점
홍타이지의 전망보다 약 한 달가량 빨리 전쟁을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일까?
여기서 병자호란 당시의 협상 과정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개전 초기의 12월 14일부터 17일까지
쌍방은 연일 접촉하면서 화의 조건을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협상은 타결을 보지 못하였고,
12월 18일 인조는 결전의 각오를 밝혔다.94)
91) 張存武·葉泉宏 編,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1619-1643,
臺北: 國史館, 2000(이하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5-206면.
단 이 책에서는 출전이 된 청 측 사료의 기록을 따라 이 조유의 날짜를 ‘정월 19일’로 적고 있다.
그러나 이 조유가 조선 측에 전달된 것은 ‘정월 20일’이었다.
한편, 병자호란 기간 홍타이지가 조선 조정에 보낸 詔諭는 여러 자료에 실려 있으며
각각 약간의 자구상 출입이 있다. 그 가운데 詔諭 원본을 베껴 정리한 詔勅謄錄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奎12904의2)이 원래의 모습에 가장 가까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하의 주석에서는 편의상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을 주로 사용하기로 한다.
92)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10-213면.
정월 24일과 27일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보낸 국서는 조선과 청의 여러 기록에 실려 있다.
예컨대 仁祖實錄은 정월 24일의 국서를 인조 15년 정월 23일조에,
정월 27일의 국서를 인조 15년 정월 27일조에 싣고 있다.
그러나 이하의 주석에서는 인조가 홍타이지에게 보낸 국서는 홍타이지의 詔諭와 마찬가지로
편의상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을 주로 사용하기로 한다.
93) 대릉하성 포위전의 경우도 양측의 협상으로 싸움이 끝났다.
홍타이지는 8월 14일 대릉하성의 명군을 지휘하던 祖大壽에게 투항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낸 이래
여러 차례에 걸쳐 신변 보장을 약속하면서 투항을 촉구하였다
(청실록 천총 5년 8월 14일 을묘, 9월 18일 기축, 10월 7일 정미, 10월 9일 기유 등).
청실록에 따르면 조대수가 투항을 결심한 것은 10월14일의 일이었다(청실록천총5년 10월14일 갑인).
그러나 내부의 반발 등으로 조대수의 출성은 그로부터 다시 보름가량이 지난
10월 28일에야 이루어졌다(청실록 천총 5년 10월 28일 무진).
94) 허태구, 앞의 논문, 2010, 55-58면.
이어서 12월 20일과 21일에는 청군이 홍타이지가 머지않아 도착할 것이고
그 이후로는 협상의 여지가 사라진다면서 조선 측을 압박한 바 있으나,
조선 측의 협상 거부로 아무런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95)
실제로 홍타이지의 서울 도착이 임박한 가운데 청군은 조선 측과의 접촉을 끊었고,96)
12월 27일에는 조선 측이 보낸 歲時 선물도 싸늘하게 거절하였다.97)
홍타이지가 서울에 도착한 12월 29일 이후 쌍방의 협상은
두 나라의 군주 간에 국서의 교환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상을 띠었다.
정월 1일 청군은 조선 측이 보낸 세시 선물을 다시 거절하였으나, 이어서 다시 파견한
사신 일행에게는 이튿날 다시 오라는 말을 전하여 협상의 여지를 남겼다.98)
정월 2일 청군은 좌의정 홍서봉이 이끄는 사신 일행에게 홍타이지의 ‘詔諭’를 전했다.
이 조유에서 홍타이지는 전쟁 발발의 책임이 조선에 있다고 주장하였다.99)
정월 3일 인조는 전일 받은 조유의 비난에 대한 해명을 담은 ‘上書’를 보냈다.100)
그러나 청군은 이 국서에 대하여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였고,
이로부터 열흘 동안 아무런 접촉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사이 전황은 조선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하게 돌아갔다.
청군은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황해도, 전라도 등에서 올라온
조선의 근왕병을 차례로 격파하였고,101)
앞서 언급했듯이 정월 10일에는 모든 부대의 남한산성 집결을 완료하였다. 또한 남한산성
주위에 강력한 포위망을 구축하여 산성 안팎의 연락을 거의 완벽하게 끊어 놓았다.102)
95) 같은 논문, 58면.
96) 홍타이지가 12월 25일에 접수한 도도 등이 보낸 상주를 보면, 무청거를
홍타이지에게 보낸 뒤로 조선 측과의 접촉을 끊었다는 내용이 있다(滿文老檔VII, 1493면).
도도 등이 파견한 무청거가 봉산을 지나고 있던 홍타이지의 군영에 도착한 것은
12월 21일의 일이었다(滿文老檔VII, 1492면).
97) 허태구, 앞의 논문, 2010, 62면. 98)
仁祖實錄卷34, 仁祖 15年 正月 1日 辛丑. 99)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197-198면.
100)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199-200면.
101) 당시의 전황에 관해서는,
柳承宙, 「丙子胡亂의 戰況과 金化戰鬪 一考」, 史叢55, 2002,389-435면 참조.
102) 南礏, 南漢日記, 62-63면,
“(정월 9일) 胡人覺有城內外相通之事, 守松城尤嚴, 狀啓不得入來.”
정월 9일 이후 외부의 장계가 남한산성에 들어온 것은 정월 15일 도착한
沈器遠의 장계가 유일했다(南礏, 南漢日記, 71-72면).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조선 조정은 재차 협상을 시도하였다.
정월 11일 두 번째 국서를 작성한 조선 조정은 이튿날 사신을 청군 진영에 보냈다.
청군은 이 국서의 접수를 일단 거부했지만,
다음 날 다시 오라고 하였고 실제로 정월 13일에 국서를 접수하였다.103)
하지만 청군은 이 국서에 대해서도 묵묵부답이었다.
정월 3일의 국서에 이어 정월 13일의 국서에 대해서도
청 쪽에서 묵묵부답의 태도로 일관하자,
정월 15일 조선 조정은 이튿날 사신을 내보내기로 결정하였다.104)
이에 정월 16일 쌍방의 접촉이 이루어졌는데,
이날의 접촉은 특히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청 쪽의 기록에는 이날 홍타이지가 로사 등 300명의 병력을
심양으로 귀환시킨 사실과 그들이 가져간 서신의 내용만 보인다(전술).
로사 일행의 출발은 아마도 이른 아침의 일이었을 것이므로,
쌍방의 접촉 시점은 그보다 늦은 시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다.105)
그런데 이날 쌍방 간에 오고간 대화의 내용을 전하는
조선 측 기록은 진술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
어느 쪽이 맞을지를 판별하기 위해서는
정월 16일과 정월 17일·18일 등의 기록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사찬 기록 세 가지를 보자.
南礏의 기록에 따르면, 정월 16일 청군 진영에 간 洪瑞鳳 등이
국서에 답을 하지 않는 이유를 묻자 잉굴다이는
답서가 아직 미완성 상태라면서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고 한다.106)
羅萬甲의 기록에서는,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지자 잉굴다이·마푸타가
공유덕· 경중명이 “唐兵 7만을 거느리고 홍이포 28문을 싣고 왔다”느니
“장차 江都를 침범”하겠다느니 하는 협박만 늘어놓았다고 한다.107)
103) 허태구, 앞의 논문, 2010, 66면. 정월 13일 국서는,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0-202면.
104) 仁祖實錄卷34, 仁祖 15年 正月 15日 乙卯.
105) 趙慶男에 따르면 이날의 접촉은 해 질 무렵에 이루어졌다
(趙慶男, 亂中雜錄, 서울: 민족문화추진회 영인본, 1977, 續雜錄 第四, 17b면[정축 정월 16일]).
106) 南礏, 南漢日記, 72-73면, “十六日, 風雪甚寒. 登堞. 洪相等往賊陳.
問國書何不相報. 答曰. 修答書未畢. 姑待之. 賊用木柱書招降二字. 立于南別臺外.”
107) 羅萬甲, 丙子錄, 282면, “十六日, 風雪. 洪瑞鳳崔鳴吉尹暉, 往虜陣,
問前送國書, 迄今不報之由, 則龍馬兩胡, 多發恐嚇之言曰, ‘孔耿兩將, 領唐兵七萬,
載運紅夷砲二十八柄而來. 又將犯江都’ 云. 而且以白旗, 書招降二字, 立於望月峯下, 爲風所折.”
趙慶男은 잉굴다이가 “앞뒤의 국서는
[글을] 다 지은 것이 아니어서 회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 만약 [새로운] 국서가 없으면 다시 출입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108)
이처럼 남한일기, 병자록, 난중잡록 등의 정월 16일 기록은
모두가 너무 간단하고 단편적이어서 구체적인 맥락을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청의 답서 발송과 관련해서는 진술이 엇갈리고 있다.
나만갑은 잉굴다이 등의 협박적인 언사만 기록하였고(이에 대해서는 후술),
남급은 곧 답서가 있을 것처럼 쓰고 있는 데 비해,
조경남의 기록은 그 자체의 의미가 애매하다.
“앞뒤의 국서는 [글을] 다 지은 것이 아니어서[前後國書, 作之未畢.]”에서
“다 지은 것이 아닌” 글이 남급의 경우처럼 자신들의 답서를 가리키는 것인지,
아니면 조선의 국서 내용이 응당 써야 할 내용을 다 쓰지 못했다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은 것이다. 언뜻 전자로 보아야 할 것 같지만,
이 경우 이어지는 “회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앞으로] 만약 [새로운] 국서가 없으면
다시 출입하지 말라.”는 내용과 부합하지 않는다.
사실 관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역시 조선의 관찬 기록과 대조할 수밖에 없다.
승정원일기에는 이날 있었던 쌍방의 대화 내용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인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洪瑞鳳·尹暉·崔鳴吉을 보내어 오랑캐 진영에 가게 했다.
잉굴다이가 “만약 새로운 이야기가 없으면 다시 와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최명길이 [돌아와 임금에게] 請對하여, “臣이 李信儉에게 물었더니, 信儉이
汝亮·命守의 뜻이라며 전하기를, 이른바 새로운 이야기란 곧 第一層之說이라고 [합니다.]
人君은 匹夫와 다르니, 진실로 보존을 도모할 수 있다면
그 지극한 [수단이라도] 못 쓸 바 없습니다. 새로운 이야기 운운한 것은
우리가 [第一層之說을] 먼저 발설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臣이 생각하기에는, 마땅히 [적당한] 때에 이르러
먼저 발설하여 화친하는 일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108) 趙慶男, 亂中雜錄, 續雜錄 第四, 17b면, “十六日. 城中遣魏山寶于淸陣,
淸人久不出, 至暮傳言曰, ‘大臣出來.’ 山寶回報, 洪尹許出去. 龍胡曰, ‘前後國書, 作之未畢,
似難回報. 若無國書, 更勿 出入.’ 洪等還. 淸人立受降旗於南別臺前, 爲大風飄折, 人皆喜之.”
청하건대, 영의정을 불러 의논하여 결정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上이 “어찌 갑작스레 의논하여 결정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최명길이 “이러한 이야기는 史冊에 쓰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자,
上이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109)
인조와 최명길 간의 대화에 등장하는 ‘第一層之說’이란
아마도 인조의 홍타이지에 대한 ‘稱臣’을 가리키는 것 같다.110)
그렇다면 이날 잉굴다이는 ‘새로운 이야기’,
예컨대 ‘칭신’의 의사를 밝힌 새로운 국서를 가져올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사신이 “다시 와서는 안 된다.”는, 협상의 여지조차 남겨두지 않겠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자면, 위에서 소개한 남급의 기록은 신뢰하기 어렵고,
조경남의 기록에 “앞뒤의 국서는 [글을] 다 지은 것이 아니어서[前後國書, 作之未畢.]”
운운한 부분은 그간 조선의 국서 내용이 응당 써야 할 내용을 다 쓰지 않았다는 의미로
풀이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그 다음날, 즉 정월 17일에 있었던 일과도 부합한다.
정월 17일 청은 단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 바꾸어
적극적인 협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갑작스럽게 먼저 남한산성으로 사람을 보내어 사신 파견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전날의 만남에서 확인한 잉굴다이의 태도로 볼 때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109) 仁祖實錄卷34, 仁祖 15年 正月 16日 丙辰,
“遣洪瑞鳳·尹暉·崔鳴吉往虜營. 龍胡曰, ‘若無新語, 不須更來.’ 鳴吉請對曰, ‘臣問諸李信儉,
信儉傳汝亮·命守之意. 所謂新語, 乃第一層之說也. 人君與匹夫不同, 苟可以圖存, 無所不用其極.
新語云者, 欲我之先發也. 臣意, 宜及期先發, 以完和事. 請召領相議定.’
上曰, ‘何可造次議定乎?’ 鳴吉曰, ‘此等說話, 書之史冊不當.’ 上命勿書.”
110) 허태구는 “第一層之說”에 대하여 “지금까지의 강화 조건을 떠올려보면 문맥상
인조의 出城을 의미하는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하였다(허태구, 앞의 논문, 2010, 70면).
또한 承政院日記인조 15년 정월 17일조의
“鳴吉曰, ‘當如是矣. 第一字說話, 何以爲之?’ 上曰, ‘會稽說話耶?’ 鳴吉曰, ‘然矣.’”라는
대화 내용에 보이는 “第一字說話”가 곧 “第一層之說”이라면,
이는 越王 句踐이 겪었던 會稽의 치욕, 즉 吳王 夫差에 대한 出城 투항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남한산성 농성 당시 인조는 끝까지 자신의 출성만은 면하고자 하였다.
사실 당시에는 당장은 치욕을 감수하더라도 훗날 복수를 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월왕 구천의 고사를 인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정월 16일의 시점에서는
“第一層之說”을 홍타이지에 대한 ‘稱臣’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인조의 홍타이지에 대한 ‘稱臣’은, 홍타이지의 정월 20일 조유를 받은 뒤,
“朝鮮國王臣李倧謹上書于大淸國寬溫仁聖皇帝陛下”로 시작하는 국서를 작성하여
정월 21일 청군 진영에 보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7-209면).
대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대화가 있었다.
仁祖 : “胡人이 와서 [사신을] 불렀다고 들었는데, 무슨 의도인지 알겠는가?”
洪瑞鳳 : “어제는 느긋느긋한 마음을 극도로 보이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갑작스레 와서
(사신을) 청하니, 필시 저들에게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럴 것 입니다.”111)
이 대화는 곧 답서가 있을 것처럼 쓴
남급의 정월 16일 기록이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만약 남급의 기록이 사실이었다면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정월 17일 청의 접촉 제안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날
청의 접촉제안은 공교롭게도 조선 측에 홍타이지의 국서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급의 기록은 아마도 이날의 국서 전달 사실을 의식한 추정의 결과였을 것이다.
이날의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의 정월 13일자 국서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인조에게 “출성하여 투항하라[出城歸命: tucifi dahame jio]”고 요구하였다.112)
그런데 이 시점에서 주목할 대목은 홍타이지가 국서를 보냈다는 사실 자체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전날까지만 해도 청은 회답 국서를 보낼 의사가 없어 보였다.113)
따라서 정월 17일의 회담 제안과 국서는
분명 청의 돌연한 태도 변화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때문에 청군진영에서 돌아온 홍서봉은 청군의 실상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반드시 “낭패한 일[挫衂之事]”이 있었던 것 같으며,
필시 조선 관군에 패배를 당하였으리라는 추측을 내놓았다.
최명길 또한 청군이 전황이 불리해져서 온 것이 분명한 것 같다고 추정하였다.114)
111)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7日 丁巳, “上曰, ‘聞胡人來招云,
未知何意耶?’ 瑞鳳曰, ‘昨日極示緩緩之意, 而未經一日, 遽爲來請, 必渠有急事而然矣.’”
112)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2-204면.
이 국서의 만문본은,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39-46면 참조.
113) 정월 16일 심양에 보낸 서신에서도 홍타이지는, 조선 측에서 보낸 국서를 가리켜
“조선의 왕은 … 그 자신을 꾸짖어달라고 청하고 무엇이든지 성스러운
한의 명령에 따르겠노라고 말한다. [그에 대해] 우리는 말[칙서를] 주지 않고 있다.”라고 하여
답서를 보내지 않고 있는 상황임을 밝혔을 뿐 답서를 보낸 의향은 전혀 비치지 않고 있었다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34면).
114)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7日 丁巳, “上曰, ‘其言云何?’ 瑞鳳曰, ‘無非誇大之言,
而多爲不似之語. 未知其實狀如何, 而似必有挫衂之事矣.’ 鳴吉曰, ‘… 且見其目圓大, 似有敗狀. ….’”
정월 18일에도 청은 먼저 사람을 보내어 접촉을 제안함과 동시에
19일등의 날짜에 싸움을 벌이자고 말하였다.115)
협상이든 싸움이든 청군 쪽에서 먼저 나서서 연일 접촉을 시도해 오자,
인조는 “그들이 급하고 쫓기고있는[忙迫]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것이다.”라느니,
“이 賊은 극히 흉악하고 교활한데 어제부터 황망한 기색이 있으니
어째서 이러한지 모르겠다.”라고 말하였다.116)
최명길은 “賊이 오늘 또 와서 싸움을 약속하니,
반드시 급한 일[忙事]이 있는 것입니다.”라고 하였고,117)
李景稷은 “반드시 까닭이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싸움에 뜻이 있다면
어찌 반드시 미리 통보하겠습니까?
오늘의 이 일이 어쩔 수 없어서 나온 것임을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동조하였다.118)
심지어 홍타이지가 서울에 왔다는 청군의 주장을 믿지 않고 있던
李命雄은, “賊이 연일 와서 부르는 것은 역시 반드시 까닭이 있을 겁니다. … 그 나라 안에
숨겨진 근심이 있어 날을 약정하여 [군사를] 귀환하도록 하였기 때문에 기한이 이미
임박하여 빨리 [일을] 이루고 돌아가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하였다.119)
115) 南礏, 南漢日記, 74-78면, “十八日, 日氣稍和, 登堞. 賊到南門外呼曰, ‘欲和則速出.
不欲則 十九日或二十一日當決戰. 宜審量之.’ 賊又到北曲城號曰, ‘出來聽.’ 又到北門號曰,
‘速出聽言.’ 朝廷未及出應, 皆還去. … 賊於陣中令曰, ‘十九日二十一日是攻城之期. 宜練兵以待’云.
而大聲使聞於我, 豈劫和之事也. ….”
116)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8日 戊午, “上曰, ‘外援之事, 不可必也. 其所以忙迫者,
必有以也. 今日則不送使价, 可也. 今日若送, 則渠必以我爲㤼, 明日送之, 似可矣.’”;
“上曰, ‘雖然事有其機, 不可不察. 此賊極爲兇狡, 而自昨似有慌恾之色, 未知何以如此耶.’”
117)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8日 戊午,
“鳴吉曰, ‘賊今日又來約戰, 必有忙事. 無乃外援或來耶?’”
118)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8日 戊午,
“景稷曰, ‘必有所以也. 渠若有志於戰, 則何必預通乎? 今日此事, 孰不知出於不得已也.”
119)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8日 戊午,
“命雄曰, ‘… 賊之連日來呼者, 亦必有以. … 此賊上與天朝結怨, 汗來之說, 似無異[理]也. 昨日文字,
以日計之, 則必稟定於汗處而來, 無乃其國內 有隱憂, 約日使還, 故期限已迫, 欲爲速成而還乎?”
이렇듯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은, 한편으로는 “通信”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請戰”하는 청군의 행태를 두고
그들이 모종의 이유로 시간에 쫓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120)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정월 17일부터 청은 돌연 먼저 나서서
접촉을 제안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청과 조선은 거의 매일 접촉하였다.121)
내용적으로는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이 청의 요구를 하나씩 수용하는 방향으로
협상이 전개되었지만, 협상 전개의 양상은 청이 조선 조정을 협상을 통한 종전을 향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는 형태를 띠었다.
19일 등에 싸우자던 18일의 “約戰”은, 최명길이 지적한 대로,
조선의 사신 파견과 국서를 재촉하기 위한 압박 전술일 뿐이었다.122)
심지어 정월 20일에는 “四更”의 야심한 시각에 사람을 보내어
조선 쪽에 사신을 내보내라고 요청하는 일까지 벌어졌다.123)
이는 극히 느긋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협상 자체를 거부하던
정월 16일까지의 고압적 태도와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식량이 부족한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각 도의 근왕병로부터
어떠한 낭보도 접하지 못하고있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에 쫓기기는 청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홍타이지가 정월 20일의 국서에서 제시한 국왕의 출성 조건을 두고
쌍방 간에 줄다리기가 한창이던 정월 25일, 잉굴다이는 황제가 이튿날 귀국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조선의 사신들에게 결단을 서두르라고 압박하였다.124)
120) 承政院日記 3冊, 仁祖 15年 正月 18日 戊午,
“上曰, ‘予意, 答書不必送於今日, 而今聞使臣下直云, 必於今日可去耶?’
瑞鳳曰, ‘從西門通信, 從他門請戰, 今日不得不去矣.’ 瑬曰, ‘若於渠之請戰後, 始爲送人, 則似爲示弱.
而朝旣約送國書, 送書之事, 請戰前所言也. 今日送之無妨矣.’ 上曰, ‘必明日定戰之[何]意耶?’ 瑞鳳曰,
‘似爲恐㤼之言也.’ 瑬曰, ‘其必不戰則未可知也. 此奴自前不爲僞 [危]言矣. 然必有忙事也. …’”
121) 承政院日記 3冊, 仁祖 15年 正月 17日-30日.
이 기간에 쌍방은 정월 22일을 제외하고 매일 접촉하였다.
122) 承政院日記 3冊, 仁祖 15年 正月 19日 己未, “上曰, ‘今日是約戰之日,
而北門之賊尤少云, 其故何也.’ 鳴吉曰, ‘必迎擊緩[援]兵, 而所以約戰者, 不過欲促今日之事也.’”
123) 承政院日記 3冊, 仁祖 15年 正月 20日 庚申,
“四更, 胡差來招, 以夜不開門言送. 平明, 又爲來招, 李弘胄 ·崔鳴吉 ·尹暉等出接以還.”
124) 仁祖實錄 卷34, 仁祖 15年 正月 25日 乙丑:
“龍·馬曰, ‘皇帝明當回還, 國王若不出城, 使臣絶勿更來.’”
26일에는 황제가 언제 돌아갈 예정이냐는 최명길의 질문에 곧 귀국할 것이라고 답했다.125)
이 때문에 정월 27일의 국서에서 인조는 황제의 귀국이 임박했다기에
서둘러 투항을 결정했다고 特筆하였다.126)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정월 16일의 서신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2월 말까지 조선에 머물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월 하순의 홍타이지는,
적어도 조선 측이 보기에 분명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조선에서의 전황은 말 그대로 청군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조선의 근왕병들은 청군에 일차 격파된 이후 꿈쩍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적인 측면에서 그들로 하여금 귀국을 서두르게 할 만한 요인이 있었다면,
그것은 명군의 본국 공격 가능성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경의 명 조정은 청의 조선 침공 소식을 이미 병자년 12월 10일에 접수하였다.127)
그러나 당시 명군은 즉각적인 군사 행동에 나설 만한 형편이 되지못하였다.128)
전선의 명군이 군사 행동을 시도한 것은 2월 중순의 일이었으며,
그것마저도 청군과 마주치기도 전에 말머리를 돌린 듯하다.129)
2월 중순의 시점은 홍타이지가 압록강을 건너 심양에 도착할 무렵이었다.130)
125) 承政院日記 3冊, 仁祖 15年 正月 26日 丙寅,
“上曰, ‘今日不言汗之歸期乎?’ 鳴吉曰, ‘臣問之, 則只言近當還歸, 而的期則不言矣.’”
126)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13면,
“今聞陛下, 旋駕有日, 若不早自趨詣, 仰覲龍光, 則微誠莫伸, 追悔何及?”
127) 李晩榮, 崇禎丙子朝天錄(燕行錄叢刊增補版) 병자년 12월 25일.
128) 홍타이지는 병자년 5월 아지거, 아바타이, 양구리 등에게 원정군을 맡겨
명의 내지를 대거 침공한 바 있다. 5월 30일 심양을 떠나 9월 28일 귀환한 아지거 등의 원정군은,
北京 일원의 12개 城을 함락시키고 약 20만의 人畜을 비롯한 대규모의 약탈 성과를 거두었다
(滿文老檔VII, 1091-1093면, 1189-1096면, 1246-1276면, 1292-1296면 등).
또한 아지거의 약탈이 한창이던 8월 12-13일에는 도르곤과 도도 등을 錦州 방면으로 출정시켰다.
이는 關外 주둔 명군의 내지 이동을 저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는데,
도르곤과 도도 등은 아지거 원정군의 귀환 직후인 10월 2일 심양에 돌아왔다
(滿文老檔VII, 1233-1235면, 1303-1305면 등 참조).
병자년 여름과 가을 북경과 금주 두 방면에서 벌인 청의 대명 군사작전은 겨울에 조선을 침공했을 때
명군이 감히 배후를 위협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사전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129) 凌義渠, 「圖奴固在先著制勝尤貴萬全疏」, 崇禎 10년 2월 15일,
奏牘(續修四庫全書 493) 卷4, 67면,
“該本部院密會總監倂鎭道, 挑選關外馬步戰兵曁監標親丁若一萬八千人, 選於本月十二日,
統領出邊, 從義州赴養善木三岔河等處, 相機搗剿, 俟有接戰斬獲情形, 另行馳報.”
또한 金堉에 따르면, 금주 방면의 명군이 2월 20일경 출병하였으나
장령들이 너무나 겁을 먹은 나머지 우왕좌왕하다가 청군과 마주치지도 못하고
3월 10일경 복귀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金堉, 朝京日錄(한국고전종합DB), 정축년 윤 4월 18일).
130)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32-135면.
게다가 다른 무엇보다도 홍타이지가 본국으로부터 명군의 공격 가능성에 대한 보고,
즉 (A)의 “지체해서는 안 될 큰일과 긴급한 소식”에
해당하는 보고를 받은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131)
따라서 그들에게는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 조정과 협상에
나설 동기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은 정월 17일 태도가 돌변하여 협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들은 홍타이지의 귀국을 서두르고 있었다.
도대체 정월 16일과 정월 17일 사이에 어떤 일이 발발했던 것일까?
앞서 언급했듯이, 병자호란은 정월 16일의 서신에 보이는
홍타이지의 전망보다 약 한 달 일찍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전쟁이 협상을 통해 ‘신속히’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협상은 정월 17일 청의 돌연한 태도 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또한 정월 17일의 국서에서 홍타이지는 인조에게 ‘出城’과 ‘決戰’의 양자택일을
요구하였지만, 동시에 인조의 신변을 보장할 수 있다는 의사도 내비쳤다.132)
인조도 “저들의 국서에는 용허하는 뜻도 있다[渠之國書, 亦有容許之意].”고 하여
그런 의사를 간취했다.133)
조선 조정은 새로운 국서를 작성하여 청에 보냈고,134)
홍타이지는 정월 20일 인조의 출성과 척화신 두세 명의 縛送이라는 조건을
제시함으로써 협상의 쟁점을 구체화하고 단순화하였다.135)
이리하여 인조가 자신의 출성과 척화신 박송을 수용하기만 하면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조건은
모두 당시 조선의 입장에서 쉽사리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특히 인조의 ‘출성’은 과거 금에 의해 북송이 멸망할 때의
‘靖康의 變’이 再演되리라는 우려 때문에 더욱더 수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131) 병자호란 시기 홍타이지가 심양으로부터 온 사람
[술더이]을 처음 만난 것은 심양으로 귀환 중이던 2월 12일이었다(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14면).
술더이는 정월 16일의 서신을 갖고 로사 등과 함께 귀국했다가 돌아온 것이었다.
132)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4면, “若爾國盡入版圖, 朕豈有不生養安全, 字之若赤子乎?”
133) 承政院日記 3冊, 仁祖 15年 正月 18日 戊午,
“上曰, ‘渠之國書, 亦有容許之意. 如是而上保宗社, 下脫父兄百官, 則寧非幸也?
朝夕危亡之秋, 當一心誠實, 可也. 不可與昔日屋下私談, 務爲高大而已也.’”
134)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4-205면.
135)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5-206면.
따라서 청의 입장에서 보자면, 적극적인 협상 태도는
종전의 필요조건일지언정 충분조건은 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청은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에 대한 다면적인 압박술을 추가로 구사하였다.
하나는 남한산성에 대한 공격이었다.136)
청군은 정월 23일 심야부터 연일 남한산성을 향해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였고
동시에 홍이포를 쏘아댔다.137)
그러나 남한산성에 대한 청군의 공격은 끝장을 보겠다는 작정으로
총력을 투입한 작전은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연일 협상을 계속하고 있었던 만큼,
어디까지나 협상을 서둘러 매듭짓기 위한 압박술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압박술은 소기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청군의 공격에 지치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던 남한산성의 무장과 병사들이
정월 26일 급기야 척화신을 박송하여 협상을 타결할 것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리는 사태까지 일어났던 것이다.138)
다른 하나는 강화도에 대한 공격이었다.
청군은 정월 22일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을 거두었고,
정월 26일에 이르러 이 사실을 조선측에 통고하였다.
강화도 함락의 비보에 조선 조정의 분위기가 급변하였고,
인조는 어쩔 수 없이 출성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139)
따라서 청군의 강화도 점령은
인조의 출성을 결정지운 ‘최후의 일격’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홍타이지가 정월 16일 심양에 보낸 서신에는,136)
후술하듯이, 홍타이지는 강화도를 점령한 이후에도 조선의 왕이 투항하지 않으면,
그때에 가서 남한산성을 공격한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청은 조선 조정에 강화도 함락 사실을 통고(정월 26일)하기도 전인
정월 23일 밤부터 남한산성에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는 정월 16일 시점의 계획을 모종의 이유로 변경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137) 羅萬甲, 丙子錄, 94-98면, 107면; 南礏, 南漢日記, 89-96면.
청군은 정월 28일에야 포격을 그쳤다(南礏, 南漢日記, 103면).
참고로, 仁祖實錄은 최초의 홍이포 공격이 정월 19일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仁祖實錄卷34, 仁祖 15年 正月 19日 己未),
承政院日記의 “上曰, ‘今日是約戰之日, 而北門之賊尤少云, 其故何也.’”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9日 己未)와 같은 기록을 보건대 사실은 아닌 것 같다.
138) 仁祖實錄卷34, 仁祖 15年 正月 26日 丙寅; 羅萬甲,丙子錄, 98-99면;
南礏, 南漢日記, 97-100면 등. 139) 허태구, 앞의 논문, 2010, 78-79면.
앞서 살펴보았듯이 청군의 강화도 공격이
원래는 2월 중순 이후로 예정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 보인다.
이는 홍타이지가 애초에 2월 중순 이후로 잡았던
강화도 공격 일정을 앞당겨 정월 22일에 감행했다는 의미가 된다. 그렇다면 홍타이지가
언제, 그리고 왜 강화도 공격을 앞당기기로 결정하였는지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정월 16일 심양으로 보낸 서신의 강화도 공격 계획 관련 부분을 살펴보자.
(B) ① [포로로] 잡은 사람[들]에게 물었더니, 절반의 사람은
“조선의 왕과 더불어 [그의] 장남과 여러 대신들이 모두 [남한산성에] 있다.
다른 아들들과 왕의 처는 강화도에 있다.”고 말한다. [나머지] 절반의 사람은,
“[조선의] 왕과 더불어 그의 아들들과 처가 모두 [남한산성에] 있다.”고 말한다.
② 그래서 배를 준비하여 섬을 먼저 취하고자 한다. 섬의 아들들과 처를 잡으면,
성 안의 사람들은 저절로 우리에게 투항할 것이라고 판단하여 섬을 먼저 취한다.
그럼에도 투항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성을 공격한다.
섬을 보건대 [취하기] 쉬울 것처럼 보인다. 하늘이 [우리를] 아끼는지
아끼지 않는지를 어찌해야 알 수 있을까?140)
①에서 홍타이지는 서로 엇갈리는 두 가지의 정보를 언급하고 있다.
하나는 조선 왕과 그의 장남 및 群臣은 모두 남한산성에 있지만
그 나머지 식구는 강화도에 있다는 정보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왕과 그의 식구가 전원 남한산성에 있다는 정보이다.
당시 홍타이지는 전자에 더 무게를 두었던 모양으로,
②에서 조선 왕의 처자를 잡기 위해 강화도를 공격할 계획임을 밝히고 있다.
그는 조선 왕의 처자를 잡으면 남한산성에서 농성 중인 조선 왕이
자연히 항복할 것이라고 예상하면서, 남한산성에 대한 攻城은
처자가 사로잡힌 뒤에도 조선 왕이 항복하지 않을 경우로 미루고 있다.
이어서 강화도 공략이 어렵지는 않아 보인다고 하면서,
“하늘이 [우리를] 아끼는지 아끼지 않는지를 어찌해야 알 수 있을까?”라고 끝을 맺고 있다.
(B)는 정월 16일 시점의 홍타이지가 대릉하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남한산성에 대한
전면적 공성전은 뒤로 미룬 채, 강화도로 피신한 인조의 처자를 포로로 잡는다면
인조가 항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강화도 공격이 남한산성에 대한
공성전보다는 전투 손실이 훨씬 더 작으리라는 계산에 기초한 발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홍타이지는 같은 서신에서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리고 있다.
(C) 이 파견한 사람이 도착하는 즉시 전체에서 신중하며 능력 있는
두 명의 대신, … 등을 내놓게 하여 아이가 강[靉陽河]에서 배를 만들도록 보내라.
… 배 만드는 것은 퉁커션[佟克申]이 만드는 배와 같은 배 열 척,
말을 (실어 물을) 건너게 하는 조선의 배와 같은 배 열 척,
모두 합해서 스무 척을 만들어라. … 배를 [하류로] 내려
義州의 강으로 가져갈 수 있는 곳에서 만들어라. … 배를 만드는 사람을 이번에
[사람을] 파견[하여 보낸] 소식이 도착하는 즉시 출발시켜라.
배[의 건조]를 2월 15일 이내에 끝내놓고 대기하라.141)
내국사원의 만문당안을 보면 정월 16일
홍타이지가 심양에 보낸 서신은 모두 두 통이었다. 한 통은 황후에게,142)
다른 한 통은 지르갈랑을 비롯한 본국을 留守하던 왕·버일러에게 보낸 것이었다.143)
전자는 당시 시점까지의 전황을 서술한 다음에 위에서 소개한 (B)로 끝을 맺고 있지만,
후자는 (B)까지를 황후에게 보낸 서신과 완전히 동일하게 반복한 다음에
바로 이어서 (C)를 쓰고 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A)는 (C)의 생략 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한문 청실록은 (A)를 포함하는 (C)의 내용이
마치 별도의 서신인 것처럼 기재하고 있으나,144)
사실 홍타이지는 지르갈랑 등에게 보낸 서신에서
(B)에 바로 이어서 (C)의 내용을 지시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C)는 (B)의 강화도 공격 구상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집행 명령이었다고 보아야
할 터인데, 여기서 홍타이지는 압록강 하구로 통하는 아이가 강[靉陽河] 강변에서
합계 20척의 선박을 건조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
이는 병자호란 당시의 청군이 선박을 끌고 남하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조선 현지에서도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선박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나온 명령이었다.
140)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34면.
141)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37-38면.청실록 숭덕 2년 정월 16일 병진의 한문 기록 참조.
142) 황후에게 보낸 서신은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26-30면에 실려 있다.
143) 지르갈랑 등에게 보낸 서신은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30-38면에 실려 있다.
144) 청실록은 (C)의 내용을 “又諭曰” 다음에 기재하고 있는 것이다
(청실록 숭덕 2년 정월 16일 병진).
또한 선박의 구성을 보건대 홍타이지는 자신들의 장기인
騎兵을 상륙작전에 투입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가 선박의 건조 시한을 2월 15일로 지정하였다는 점이다.
이 서신의 선박 건조 시한과 아이가 강에서 강화도까지의 이동 시간을 고려하면,
정월 16일 시점에서 홍타이지는 강화도 공격 시점을
아무리 빨라야 2월 하순으로 상정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실제의 강화도 상륙작전이 정월 22일에 일어났다는 사실을 들어,
정월 중순 시점에서 홍타이지가 작전 시기를 2월 하순으로 잡은 것은
너무 ‘느긋한’ 것이 아니었느냐는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역시 결과론에 기초한 의문이다. 정축년 정월 중순 무렵은
결빙 때문에 상식적으로 선박을 기동시키는 작전이 불가능한 때였다.145)
정상적인 상황에서라면 강화도 공격 구상은
해빙 이후에야 비로소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측의 기록을 보면 정월 18-20일에 조선 조정은 한강의 해빙기를 맞아
京江의 선박들을 군사적으로 활용하는 방안 등을 논의하고 있었다.146)
이는 정축년 정월 하순에 접어들면서 한강의 얼음이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홍타이지가 정한 2월 15일이라는 선박 건조 시한은
한강의 해빙보다 한참 뒤가 된다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C)에서 보듯이 홍타이지는 “배를 [하류로] 내려 義州의 강으로”
이동시킬 수 있는 지점을 골라 선박을 건조하도록 하였는데,
압록강의 지류인 아이가 강에서 건조한 선박이 남하하려면 한강이 아니라
압록강의 얼음이 풀려야 했다.
홍타이지는 압록강의 얼음이 풀릴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던 것이다.
그가 지정한 시한 2월 15일은 양력으로 3월 11일이었고,
압록강 수자원의 근대적 이용이 개시되기 전인 1920년대 압록강 하구 龍巖浦 부근의
해빙 시기는 보통 3월 24일경, 상류의 中江鎭 부근은 4월 4일경이었다.147)
145) 허태구, 앞의 논문, 2011, 110-111면 참조.
후술하듯이 청은 정월 17일에 강화도 공격을 조선 측에 예고하였으나,
조선 측에서는 결빙을 이유로 믿으려 하지 않았다.
146) 承政院日記3冊, 仁祖 15年 正月 18日 戊午; 19日 己未; 20日 庚申.
147) 동아일보1924년 4월 11일 2면 기사; 1927년 3월 27일 5면 기사;
1928년 3월 23일 5면 기사; 1929년 4월 1일 2면 기사 등 참조.
따라서 홍타이지는 압록강의 평년 해빙기보다
열흘이상 앞서서 선박의 건조를 마치도록 명령했던 셈이 된다.
너무 ‘느긋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척이나 서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C)의 선박 건조 명령과 건조 시한은 분명 강화도 공격 계획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의 선박 건조가 강화도 공격이 아니라 병자호란 직후 이루어진
가도 공격을 미리 준비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 역시 결과론적인 의문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이에 대한 답변도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홍타이지가 가도
공격 계획을 처음으로 공개한 것은 종전이 확정된 정월 28일의 일이었다.
정월 28일의 詔諭에서 홍타이지는
“짐은 이제 回軍을 하면서 가도[피도]를 공격하여 취할 것이다.
너는 배 50척을 낼 수 있을 것이다. 수병의 총·포와 활·화살은 모두 스스로 준비해야 한다.”
라고 하여 선박 50척과 수군의 작전 참가를 인조에게 요구했던 것이다.148)
홍타이지는 조선의 전선과 수군을 가도 공격의 필수 전력으로 생각했던 것 같은데,
조선 수군의 참전은 물론이거니와 가도에 대한 공격 자체도
병자호란이 끝나기 전까지는 실행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앞서 (A)에 드러나듯이, 정월 16일의 시점에서 홍타이지는
2월 말까지 전쟁이 지속되리라 전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만약 가도 공격을 위한 것이었다면
(C)의 2월 15일은 불필요하게 촉박한 시한이었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많은 시간을 들여 좀 더 많은 선박을 건조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49)
게다가 실제의 가도 공격 당시(정축년 4월 8일)
청군이 (C)에 등장하는 선박을 투입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150)
148)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1619-1643, 214면:
“朕今回兵, 攻取椴島. 爾可發船五十隻. 水兵鎗砲弓箭, 俱宜自備.”
149) 홍타이지의 가도 공격 계획 구상은 그 자체가 강화도 상륙작전의 성공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2월 15일 홍타이지는 가도 공격에 관한 지시를 하달하였는데,
그 지시 가운데 강화도 상륙작전에 썼던 선박들을 가져다 쓰거나 그와 비슷한 선박을
만들어 쓰라는 내용이 보이기 때문이다(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21-122면).
실제로 가도 공격 당시 청군은 강화도에서와 마찬가지로 小船 70척과 조선 선박 4척을
수레에 실어 명군이 예상치 못한 장소로 이동시킴으로써 기습적인 상륙작전에 성공하였다
(仁祖實錄卷37, 仁祖 16年 7月 12日 癸酉).
150) 4월 8일 밤 가도 공격 개시에 앞서, 4월 5일 청군은 곽산에 모여 작전회의를 열었다.
당시의 작전계획을 전하는 기록(盛京滿文原檔 제7호, 4월 5일조)에 따르면,
배후를 치는 보병의 기습 상륙작전에는 새로 건조한 小船을,
정면의 水戰에는 청군이 각지에서 획득한 선박및 조선군의 선박을 각각 투입하였다
(劉建新·劉景憲·郭成康, 「一六三七年明淸皮島之戰」, 歷史檔案1982-3, 86면).
청군이 가도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서 새로 건조했던 小船은 공유덕·경중명이
병자호란 종전 후 2월 13일까지 용산 등지에서 건조한 것으로 보인다
(李肯翊, 練藜室記述[한국고전종합DB] 卷25 仁祖朝故事本末, 정축년 2월 13일조).
한편 심양으로 철군하던 홍타이지가 압록강을 건넌 날짜는 공교롭게도 2월 15일이었다.151)
이 사실을 의식하여 (C)의 선박 건조가
철군 시의 도강을 준비한 것이 아니냐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역시 종전 시점을 2월 말로 전망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
또한 2월 15일 홍타이지의 도강 시 선박 이용 여부를 전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심양장계에 따르면 홍타이지는 2월 25일경 鳳山에 머물고 있던 도르곤 휘하의 청군에
“눈이 녹아서 강물이 불어날 때가 되었으니 여울을 건너지 말고 배로 건너도록 하되,
安州 서쪽의 모든 수령들이 배를 많이 마련하여
일시에 건너도록 하라.”는 명령을 내린 바 있다.152)
정축년 2월 25일은 양력으로 3월 21일이므로,
위에서 언급한 압록강 하류의 평년 해빙기에 임박한 시점이다. 이는 동시에
홍타이지가 건널 무렵에는 아직 얼음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타이지는 아닐지라도 나중에 귀국한 도르곤 휘하의 청군이
(C)의 선박을 이용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러나 2월 25일경 전달된 홍타이지의 명령에 드러나듯이 청군은 도강에 필요한
선박을 “安州 서쪽의 모든 수령들”, 즉 조선의 관원들이 제공하도록 했다.
실제로 3월 28일부터 도강을 시작한 도르곤 휘하의 청군에
선박을 제공한 것은 의주부윤 임경업이었다.153)
도르곤의 청군은 (C)의 선박을 이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151)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16면.
152) 심양장계, 46면.
153) 심양장계, 61-62면,
“강을 건널 배는 전날 구왕의 분부에 따라 미리 준비하도록 부윤 임경업에게 일러두었는데,
임경업은 옛날 배 4척 이외에 작은 배 20척을 새로 지었습니다.”
이처럼 (C)의 선박 20척은 이후의 기록에 전혀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간단해 보인다.
선박 건조가 시작되기도 전인 정월 22일에 강화도 공격이 단행되었기 때문이다.
즉 (C)의 선박은 아예 건조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청군의 실제 강화도 공격은 원래 예정한 것보다 한 달 이상을 앞당겨 감행되었고,
따라서 본국의 아이가 강에서 건조 중이었을 선박을 쓸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그들은 한강 연안에서 거룻배 수준의 “小船 80척”을 만들어 썼다.154)
(C)에 등장하는 造船 기술자 퉁커션이 마침 조선에 출정해 있었기에
이들 선박의 건조를 지휘하였다.155)
그런데 정월 22일 청군의 강화도 공격과 관련하여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 시점이다.
이 무렵은 한강의 얼음이 아직 풀리지 않았기 때문에
선박을 마련했을지라도 그것을 강화도까지 항행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청군은 이들 소선 80척을 수레에 싣는 등의 방법으로
육로를 통해 갑곶 건너편까지 이동시켰다.
이는 결빙이라는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당시의 상식을 뛰어넘는 실로 기상천외한 작전이었다.
또한 이 소선을 이용한 상륙작전은 그들에게 상당한 모험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들의 장기인 기병 전력을 구사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결과적으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정월 22일 청군의 강화도 공격 작전은 위험천만한 모험이기도 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며,
이러한 모험은 원래 2월 말로 잡았던 강화도 공격 작전을
얼음이 아직 풀리지 않은 시점으로 앞당겨야 했기 때문에 감행한,
말 그대로 ‘窮則通’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홍타이지는
원래 2월 하순으로 예정했던 강화도 공격을 정월 22일로 앞당겨 감행하였다.
그렇다면 그는 어느 시점에 계획을 변경한 것일까?
정월 22일에 있었던 청군의 강화도 공격 계획이 최초로 언급된 날짜는,
청의 기록에서는 정월 16일이지만,
조선의 기록에서는 정월 16일과 정월 17일의 두 날로 갈리고 있다.
편의상 조선의 기록을 먼저 검토해 보자.
154)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101면; 허태구, 앞의 논문, 2011, 110-111면.
155) 청실록 숭덕 2년 7월 17일 계미.
이미 앞에서도 소개한 바 있듯이,
나만갑은병자록의 정월 16일조에 그날에 있었던 쌍방의 접촉에서 잉
굴다이·마푸타가 공유덕·경중명이 “唐兵 7만을 거느리고 홍이포 28문을 싣고 왔다”느니
“장차 江都를 침범”하겠다느니 하는 협박을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러나 인조실록의 정월 16일조에는 이런 내용이 보이지 않으며,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잉굴다이등이 공유덕·경중명의 출병과
홍이포, 그리고 강화도 공격 등을 입에 올리며 조선 사신을 협박한 날짜는
정월 16일이 아니라 정월 17일이었다. 즉, 정월 17일의 회담을 마치고 돌아온
홍서봉과 최명길은 인조와 다음과같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仁祖: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던가?”
洪瑞鳳: “[스스로를] 誇大하는 말이 아닌 게 없었는데,
[말] 같지 않은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 실상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시 낭패를 본 일[挫衂之事]이 있는 것 같습니다.”
崔鳴吉: “저들이 강물 위의 배를 고치고 꾸며서 장차 江都를 향하겠다고 말하였으나,
저들이 어찌 감히 얼음 위로 배를 움직이겠습니까?
또한 孔有德·耿仲明이 [이번] 일을 함께하여 紅夷砲를 갖고 왔다고 말하였는데,
이 말은 誇大하는 말이 아닙니다. 또한 그 눈이 둥글고 큰 것이
[우리 관군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156)
정월 17일의 회담에서 홍서봉과 최명길은 청군이 무엇인가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두 사람은 어쩌면 그들이 조선 근왕병에게 중대한 타격을 입은 것이 아닐까 하는
희망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최명길은
나만갑이병자록정월 16일조에 적은 것과 동일한
잉굴다이 등의 협박 내용을 보고하면서, 그 가운데 강화도 공격 운운한 것을
아직은 결빙기라 배를 운항할 수 없다는 인식하에 단순한 공갈로 치부하고 있다.
병자록은 앞뒤의 맥락이 없는 단편적인 기록인 반면,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君臣 간의 대화를 비교적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두 기록 가운데 후자의 신뢰성이 더 높다는 것은 췌언을 요하지 않는다고 할 것이다.
156) 承政院日記 3冊, 仁祖 15年 正月 17日 丁巳,
“上曰, ‘其言云何?’ 瑞鳳曰, ‘無非誇大之言,
而多爲不似之語. 未知其實狀如何, 而似必有挫衂之事矣.’ 鳴吉曰, ‘渠言修飾水上船, 將向江都云,
渠何敢氷上行舟乎? 且與孔耿同事, 持紅夷砲而來云, 此言非誇大之言. 且見其目圓大, 似有敗狀.’”
이처럼 조선 기록에 의거하는 한
청군이 정월 22일의 강화도 공격을 처음으로 언급한 것은 정월 17일이었다.
그러나 청의 기록에서는 정월 16일 잉굴다이가 이를 조선에 통고했다고 전하고 있다.
홍타이지는 정축년 정월 24일 인조에게 한 통의 조유를 보내어,
정월 22일 강화도를 함락시켜 국왕의 처자를 사로잡아 보호하고 있다고 하면서
정월 20일의 조유에 따라 속히 항복할 것을 촉구하였다. 이 조유의 전반부에서 홍타이지는
정월 16일 잉굴다이와 마푸타를 보내어 인조가 직접 산성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면
정월 18일 강화도를 공격하는 부대를 출발시키겠다고 통고하였고,
이어서 인조의 출성을 기대하여
18일 출발하려던 부대를 붙잡아 두었다가 결국 출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19일에 병력을 출발시켜 22일에 강화도공격을 단행하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157)
그러나 이 조유는 그 존재 자체가 의심스러운 문건으로
훗날에 竄入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조유의 요지는
“왕, 네가 나의 명을 바로 따랐더라면 어찌 이렇게 되었겠느냐?”는158)
식으로 청군의 강화도 공격과 함락의 책임을 인조에게 씌우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서는
청의 만문·한문 사료에 공히 수록되어 있지만, 이상하게도 조선의 기록에는
완전히 ‘누락’되어 그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다.159)
병자호란 기간 홍타이지의 조유로 조선의 기록에 ‘누락’된 것은 이 조유가 유일하다.
내용의 측면에서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과 부합하지 않는 대목이 발견되는 등
찬입의 가능성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여럿 있지만,
여기에서는 지면의 제약을 고려하여 결정적인 증거 하나만 들어 두겠다.
즉, 당시 이런 조유가 실재하였다면
조선 조정은 정월 24일에 강화도 함락 소식을 입수했어야 하는데, 조선 조정이
강화도 함락 사실을 처음으로 인지한 것은 분명 정월 24일이 아닌 정월 26일이었다.160)
157)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62-66면; 실록숭덕 2년 정월 24일 갑자.
158) 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 64면.
159) 허태구는 이 사실에 주목하여 이 조유가
“조선 측에 전달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허태구, 앞의 논문, 2010, 77-78면. 그러나 竄入 가능성까지 의심하지는 못하였다.
160) 仁祖實錄과 承政院日記를 필두로, 조선측의 모든 기록은 이 점에서 완전한 일치를 보이고 있다.
반면에 청의기록을 보면 만문(內國史院滿文檔案譯註)이든 한문(淸實錄)이든 일치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조유는 훗날 모종의 필요에서 실제 일어난 사건
(정월 22일의 강화도 함락)의 경위를 윤색·가공하여 찬입한 것이며,161)
그 과정에서 일부 사실 관계의 오류가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홍타이지가
정월 16일 심양으로 서신을 보낼 때까지만 해도 2월 하순으로 잡고 있던 강화도 공격을
정월 22일로 앞당긴 시점은 늦어도 정월 17일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셈이다.
정월 16일과 정월 17일 간에는 단지 하루의 시차가 있을 뿐이다.
이 단 하루 사이에 청군 진영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그것은 도대체
얼마나 중대한 사건이었기에 강화도 공격 시기를 앞당기기까지 하였던 것일까?
5. 맺음말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정월 16일 홍타이지가 심양에 보낸 서신 내용에 따르면
그는 남한산성에 대한 포위가 적어도 2월 말까지 지속되리라는 전망을 품고 있었다.
남한산성에 대한 공성 작전은 강화도 공격 이후로 미루어 둔 상태였으며,
강화도 공격은 압록강의 얼음이 풀릴 2월 하순으로 예정하고 있었다.
이 무렵 청은 조선 측이 정월 3일과 13일에 보낸 국서에 대해서 묵묵부답이었으며,
정월 16일에 있었던 회담에서도 느긋하고 고압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 다음 날인 정월 17일부터
청군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먼저 나서서 종전을 위한 협상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다.
어쨋든 청의 기록에 정월 26일조에는 아무런 기사도 없다.
정월 26일 강화도 함락 사실 통고는 조선의 투항결정을 이끌어낸 중대한 사건이었음에도
청의 기록은 정월 26일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날인양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정월 24일 조유 내용과의 모순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이는 다시 정월 24일 조유의 찬입 추정을 뒷받침하기도 한다.
161) 민국 10년(1921) 중국의 國立北平歷史博物館은 청의 內閣大庫 당안을 정리하다가
抄本淸太宗朝與高麗往來詔諭書表1책을 발견하였고, 民國 22년(1933) 12월에 이르러
滿淸入關前與高麗交涉史料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숭덕 원년 5월부터 숭덕 6년 8월까지 청과 조선이 주고받은 문서 78통이 포함되어 있다.
이 사료에 실린 홍타이지의 조유 15통은 다른 기록을 통해서도 그 존재가 모두 확인된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정월 24일 조유가 보이지 않는다.
이 역시 조유의 竄入 추정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증거로 꼽을 수 있다. 이처럼 정월 24일 조유가
찬입된 것이라면, 찬입의 배후에 어떤 동기가 작동하고 있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별도의 기회에 淸實錄과 내국사원 당안 등의
병자호란에 대한 서사를 전반적으로 재검토함으로써 해명해 보고자 한다.
또한 조선 측에서 단순 공갈로만 여길 정도로
기상천외했던 정월 22일의 강화도 공격 작전을 예고한 것도 역시 정월 17일이었다.
원래 2월 하순으로 예정했던 강화도 공격을 한 달이나 앞당겨 감행하기로 했던 것이다.
식량이 부족한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외부로부터 어떠한 낭보도 접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조정은 당연히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조선의 입장에서 협상에 의한 종전은 말 그대로 ‘不敢請이언정 固所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청은 그렇지 않았다. 전황은 그들의 압도적인 우세였다.
명군의 배후 위협도 없었다. 그들에게는 협상을 서두를 동기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월 17일 이후
청군은 갑자기 마치 무엇인가에 쫓기는 듯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단 하루 사이에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까닭은 무엇일까?
정월 16일의 서신은 아마도 이른 아침에 심양으로 떠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이튿날 아침 청군의 회담 제안에 이르는 24시간 동안
청군 진영에서는 전쟁 계획의 근본적 궤도 수정을
불가피하게 만들 만한 중대사건이 벌어진 것이 아닐까?
그러한 사건이 발발한 시각은 정월 16일 조선 사신과의 회담 이후로 좁혀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시각이 회담 전이었을 가능성도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그에 대한 대책을 아직 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회담에 임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발생 시각을 특정할 수는 없으므로, 편의상 그것을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라고 해 두자.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보건대, 분명 홍타이지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으로 인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정월 16일경의 청군에게 전쟁 계획의
근본적 궤도 수정을 요구했을 법한 군사적 상황 변화는 없었다.
군사적 측면에서는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 될만한 ‘후보’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정월 16일의 중대사건’이라는 미지수에
‘御營 부근에 천연두 환자가 생겼다는 사실의 인지’라는 사건을 대입해 보면 어떨까?
이 경우 홍타이지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이 복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월 16일 아침 심양행 서신을 발송하는 시점까지 홍타이지는
천총 5년 대릉하성에서의 경험에 비추어
남한산성 포위전이 총 70-80일 지속되리라 고 전망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대릉하성에서와 마찬가지로
남한산성에 대한 전면적인 공성전은 우선순위에 두고 있지 않았다.
그 대신에 2월 하순 결빙의 장애가 사라질 시기에
강화도를 공격하겠다는 구상을 품고 있었다.
전황도 압도적 우세였고 앞으로 최소 한 달 이상 조선에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당장 남한산성에 고립된 조선 조정과의 협상에 나설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정월 16일 보호토 휘하의 니루에 마마 환자가 발생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더구나 이 환자는 홍타이지의 어영 가까이에 머물고 있었다.
이제 홍타이지는 더 이상 느긋하게 기다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생신 버일러들과 함께 避痘를 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병력을 총동원하다시피 하여 시작한 전쟁에서162)
빈손으로 귀국할 수는 없었다. 마마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전까지라도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왕의 투항을 이끌어내야 했다.163)
정월 17일부터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의 조선 조정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기 시작했다.
협상은 주효했다.
조선의 왕은 정월 19일의 국서에서 “擧國承命”, “傾心歸命” 운운하며
사실상 臣屬 의사를 표시하였다.164)
홍타이지는 이에 화답하여 왕의 출성과 척화신의 박송을 종전의 조건으로 내밀었다.
연일 조선 조정과의 협상을 지속하는 동시에,
홍타이지는 남한산성에 포격과 산발적인 공격을 가하면서 조건 수용을 압박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홍타이지는 강화도 공격 시기를 앞당기기로 하였다.
결빙 상태에서 정상적인 작전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窮則通’이라고 했던가?
소선 80척을 건조하여 육로로 이동시킨다는 기상천외한 발상이 떠올랐다.
162) 구범진·이재경,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구성과 규모」, 한국문화 72, 2015, 433-465면.
163) 청군이 정월 16일과 17일의 단 하루 사이에 전쟁 전략을 신속히 수정한 점에 대하여
한마디 덧붙여 두고자 한다. 마마의 발발(outbreak)은 물론 우발사태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청군은 이미 정묘호란 때 조선의 마마를 인지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월 16일과 17일 간에 일어난 청군의 전략 수정은 일종의
우발작전계획(contingency operation plan)에 따라 이루어졌던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164)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05면.
정월 22일 청군은 강화도 갑곶에 상륙하였다.
홍이포의 지원 사격이 있었지만 조선 수군의 전선이 지키는
강화해협을 거룻배에 불과한 배로 건너는 것은 분명 모험이었다.
그러나 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어 조선 왕의 가족을 사로잡았다.
정월 26일 홍타이지는 조선 조정이 이 사실을 확인하게 하였다.
정월 27일 조선의 왕이 마침내 출성 조건마저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정월 28일 홍타이지는 ‘歸順’ 이후
조선이 준수해야 할 약조를 담은 조유를 남한산성에 보냈고,
정월 29일에는 조선의 왕이 윤집과 오달제를 ‘敗盟’의 ‘首謀’로 지목하여 박송하였다.165)
정월 30일 홍타이지는 삼전도에서 출성한 인조를 상대로 ‘귀순’ 의식을 거행하였다.166)
마마의 발발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감행한 친정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도록 위험을 감수하며 지낸 시간이 이미 2주일이나 되었다.
홍타이지에게 승전의 기쁨을 만끽할 여유는 없었다.
마마가 도는 서울 시내에 들어가는 것도 너무 위험했다.
2월 2일 홍타이지는 서둘러 귀로에 올랐다.167)
심양으로 가는 길에 조선의 관원들이 영접을 나왔다.
홍타이지는 그들과의 근거리 접촉을 피했다.
2월 15일 의주를 떠난 홍타이지는 2월 21일 심양에 돌아왔다.
4월 10일 도르곤이 소현세자 등 조선의 인질과 포로들을 데리고 심양에 들어왔다.
그러나 마마 감염을 우려하여 소현세자 일행과의 만남을 윤 4월 5일까지 미루었다.
165) 淸入關前與朝鮮往來國書彙編, 213-216면.
166) 仁祖實錄 卷34, 仁祖 15年 正月 30日 庚午; 청실록 숭덕 2년 정월 30일 경자.
167) 심사를 거쳐 수정 원고를 넘긴 뒤에 당시 홍타이지가
천연두에 쫓기고 있었다는 이 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사료를 추가로 발견하였다.
숭덕 2년 7월 5일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이 종결된 뒤에도 조선에 잔류하여 가도 공격에 참가했던
왕공들에 대하여 가도 작전 기간의 “失律”을 책망하였다.
이때 그는 2월 초에 있었던 자신의 귀국을 가리켜,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避痘先歸)”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청실록 숭덕 2년 7월 5일 신미.
인쇄를 목전에 둔 까닭에 본문 서술에는 미처 반영하지 못하고 여기에 附記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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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mallpox and Qing Invasion of Chosŏn in 1637
Koo, Bumjin*
Smallpox was the most dreadful contagious disease to the Manchus and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the early Qing history. Whenever there was a news of smallpox
outbreak, Hong Taiji and many of his family members, who had no immunity
toward the disease, immediately confined themselves to safe places. When they set
up a military operation plan, or when they were out on the battlefield, the
Manchus never forgot to take measures to protect the emperor and princes
with no immunity from the threat of smallpox.
When Hong Taiji personally led his imperial forces to invade Chosŏn Korea in
1637, there occurred a smallpox outbreak in a military camp close to his tent,
which, considering that smallpox was one of the most common epidemic disease
among the Koreans, was not a surprise. Here we may well raise a question: Was
Hong Taiji able to carry out his war just as he had planned regardless of the
outbreak?
A close investigation of primary sources reveals that Hong Taiji had estimated
his siege of the Nam Han Mountain Fortress would not be over until the end of
the second lunar month of 1637. And he had a plan to attack the Ganghwa Island
toward the end of the second lunar month. As a matter of fact, however, the war
reached its conclusion by the end of the first lunar month. Two factors
contributed to this earlier conclusion of the war. First, Hong Taiji made a sudden
shift toward a negotiation to end the war in spite of the fact that he was enjoying
overwelming military superiority over Chosŏn. Second, he advanced the attack of
the Ganghwa Island by a month, despite all the difficulties and dangers of
a midwinter landing operation. He gained a complete success in the adventurous
operation, which left the king of Chosŏn no choice but to accept the terms of
surrender Hong Taiji offered.
* Professor, Seoul National Universit
“병자호란 일으킨 청 황제, 천연두 탓 황급히 귀국…역사책에 기록 않고 숨겨”
중앙선데이 입력 2020.04.18 00:20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지식은 얼마나 정확한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기존 병자호란 서사를 뒤집는 사례를 많이 소개했다. [사진 임안나]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지식은 얼마나 정확한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 교수는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기존 병자호란 서사를 뒤집는 사례를 많이 소개했다. [사진 임안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누군가에게는 역사를 떠올리게 한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구범진(51) 교수가 그런 사람일지 모른다.
청나라 역사 전문가인 그는 1636년 조선을 침략해 병자호란을 일으켰던
청황제 홍타이지가 인조의 항복을 받자마자 서둘러 귀국길에 올랐다는 주장을 편다.
당시 서울에서 유행하던 천연두가 두려웠다는 것이다.
그런 가설을 몇 해 전부터 공론화해왔다.
2016년 학술논문(‘병자호란과 천연두’)을 발표한 데 이어
지난해 초에는 대중적으로 쉽게 풀어쓰고 내용을 확충한 단행본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까치)을 펴냈다.
흥미로운 점은 청이 그런 사정을 역사책에 기록하지 않고
숨기려 한 정황이 역력하다는 점이다. ‘중국과 전염병’이라는 조합도 그렇지만,
이를테면 홍타이지의 현대판인 중국의 시진핑이
코로나 발생 사실을 한동안 숨겼다는 점과도 공교롭게 겹친다.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펴내
구 교수의 병자호란 책은 물론 천연두만 다룬 건 아니다.
한문은 물론 만주어를 해독하는 그는 청실록, 청실록의 원문인 만주어 사료 등을
폭넓게 활용해 책을 썼다. 그렇게 쓰인 책은 전례가 드문,
제대로 쓰인 병자호란 전쟁사라는 평가다.
그동안 잘못 알려져 있었다며 바로잡은 역사적 사실이 많다.
우선 지금까지 미지수였던 청군 병력을 3만4000명으로 추정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12만8000명 설이 통용됐었다.
국경을 넘은 청군이 초고속 진군, 시차진군이라는 허를 찌르는 작전으로 나오는 바람에
조선군이 허망하게 무너졌다는 내용도 있다. 학계에서 사실로 ‘합의’될 경우
실익 없는 ‘명분-실리’ 논쟁만 일삼다 자멸했다는 우리 병자호란 서사의
자학적인 색채가 좀 걷힐지도 모르겠다. 지난 8일 구 교수의 연구실을 찾았다.
Q 천연두 얘기가 가장 궁금하다.
청 제국을 건설한 만주인들이 유전적으로 천연두에 취약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책에도 썼는데(262쪽), 청 제국의 주역과 현대 중국인들은 다르긴 하지만
중국 사람들이 전염병에 취약하다, 그렇게 얘기할 수 있나.
A “천연두를 먼저 경험한 건 당연히 중국이었다.
유라시아 정주지역에서 발견되는 풍토병이다. 한국에는 삼국시대에 들어왔다.
아시아 동쪽 지역, 만리장성 이북의 초원지대 유목민 사회에서
천연두를 앓았다는 기록은 16세기가 돼서야 나타난다.
이후 18세기까지 천연두는 청나라 역사의 중요한 순간순간에 등장한다.
가령 홍타이지의 아들이었던 순치제(順治帝)는 천연두를 피하려고
피두(避痘)를 자주 했지만 결국 천연두에 걸려 죽었다.
만주인들은 천연두를 ‘마마’라고 부르며 극도로 두려워했다.
마마의 발생을 신의 뜻으로 여겼다.”
Q 그러니까 병자호란이 신의 뜻을 거스르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보고
홍타이지의 조기 귀국을 은폐하려 한 건가.
A “1644년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을 뚫고 중원에 진출해
대제국으로 성장하기 전까지 청에게 조선은 중요한 이웃이었다.
자기들보다 대국, 문명국이었다.
그런 나라를 정벌하는 병자호란은 그래서 무척 중요한 전쟁이었다.
홍타이지는 조선 정벌에 나선 청나라 군대가 하늘의 은혜를 입고 있다고 표현했다.
성스러운 전쟁, 정의로운 전쟁, 신이 도와야 하는 전쟁이었던 거다.
그런데 실록을 편찬할 때 가급적 꺼림칙한 일은 쓰지 않는다.
‘회호(回護)한다’고 하는데 쓰지 않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게 된다.
청황제가 조기 귀국했어도 전쟁에 이겼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지 않나.
굳이 조선에서 만난 마마 얘기를 쓰지 않은 거다.”
구 교수는 “천연두가 청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연구자들 사이에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고 했다.
그런데 홍타이지는 천연두를 앓지 않아 면역이 없기 때문에
걸릴 경우 위태로운 ‘생신(生身)’이었는데도 직접 조선 정벌에 나섰다.
문제는 남한산성에서 조선왕조와 대치하던 정축년(1637년) 정월 16일과 17일 사이,
청군 진영에 중대한 작전 변경이 있었다는 점이다.
갑자기 전쟁의 조기종결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뭔가 있는 것 같아 천연두 관련 기록을 뒤지다 종전 후 여섯 달 뒤인
정축년 7월 『청태종실록』 기록에서 홍타이지가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했다는
‘피두선귀(避痘先歸)’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고 했다.
홍타이지의 조기귀국 사실을 폭로하는 결정적인 증거라는 얘기다.
Q 무척 기뻤겠다.
A “짜릿했다. 사실 논문을 완성한 후 주변에 읽혔을 때
결정적인 한 방이 부족하다는 반응을 받던 차였다.
아직 피두선귀 구절을 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사료를 다시 뒤졌고 결국 찾게 됐다.”
Q 논리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책에서 제시한 근거들만으로
A 홍타이지가 천연두가 두려워 조기 귀국했다고 역사책을 고쳐 쓸 수 있는 사안인가.
“연구자들은 재미있다고 판단돼도 자기들 연구 주제가 아니면
대개 인용이나 반박을 하지 않는다. 역사책을 고쳐 쓰기를 바라는 게 아니다.
연구자들로 부터 맞는 얘기로 인정받는 게 내가 바라는 최선의 상황이다.”
Q 책대로라면, 우리의 병자호란 지식에 오류가 많아 보이는데 연구자는 많지 않나.
A “우리의 병자호란 서사는 강화도가 어떻게 점령됐는지를 면밀히 따지기보다
강화도를 지키던 병력이 술 마시고 놀다가 싸움에서 패했다는 식으로,
모든 사안을 도덕적 책임론으로 환원시켜 설명하는 데 치우쳐 있는 것 같다.
추궁과 단죄만 하려다 보니 정작 전쟁의 실상을 놓치게 된다.
그렇게 잘못된 내용이 정사(正史 )가 돼버린다.
이런 현실이 바뀌려면 연구자들의 생각부터 사실을 중시하는 쪽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나는 좀 회의적이다. 역사 연구는 천문학 하는 것 같다.
갈릴레오가 아무리 지구가 돈다며 증거를 제시해도 사람들이 안 믿지 않았나.
패러다임 시프트 같은 전환이 필요하다.”
구 교수의 문제의식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역사 연구자들이나 일반인들의 역사감각이 자기도취와 자학,
두 극단 사이를 오가는 것 같다고 했다.
세종대왕에는 열광하면서도 병자호란 시기에 대해서는
한없이 자학적이 되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그러나 정밀하게 따지고 들어가면, 병자호란이 최악의 치욕스러운 전쟁이었다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지만 과도하게 자학적인 대목들이 있다는 얘기다.
천연두, 청나라 역사에 지대한 영향
그러면서도 한국은 중국 주변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중국의 일방적인 역사 서술에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문명국 주변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역사기록을 갖고 있어서다.
중국의 독주에 ‘카운터에비던스(counterevidence)’,
그러니까 반증을 제시할 수 있는 나라라는 얘기다.
Q 코로나 팬데믹 이후 중국의 위상에 변화가 오게 될까.
A “미래를 얘기하는 역사학자는 약장수고 사기꾼이라고 생각한다.
미래를 내다본다면 주식을 사야 한다.
이번 사태로 구미 선진국에 대한 환상은 확실하게 깨진 것 같다.
중국은 잘 대처한 것처럼 처신하는데 사실은 중국 때문에 벌어진 일 아닌가.
언론 자유가 없는 정치적 억압구조에서 발생한 일이다.
저런 시스템에서는 비슷한 일들이 계속해서 발생할 것 같다.
우리는 모든 것을 투명하게 처리하는 거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덕분에 헬조선 얘기가 쑥 들어가지 않았나.
너무 도취나 자학에 빠지지 않고 균형을 잡아가면 좋겠다.”
쉽지 않은 내용, 추리소설 같은 글쓰기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녹록하지 않다. 학술서 냄새가 물씬 난다.
미주(尾註)·참고 문헌·찾아보기가 두툼하다.
하지만 마치 추리소설 읽는 것처럼 흥미 수위가 상승하는 구간들이 있다.
구 교수 특유의 글쓰기 때문이다.
전쟁의 실상 규명에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사료 분석과 추론을 통해 해답을 찾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역사학적 사고 프로세스를 보여주려 했단다. (32쪽)
그런 의도가 반영된 대표적인 대목은 역시
청나라의 작전 변경, 홍타이지의 은폐 흔적을 드러내는 제5장 ‘반전’, 제6장 ‘마마’다.
정축년 정월 16일 청군 막사에 존재했을 진실의 순간을 향해 긴장감 있게 치닫는다.
강화도의 허망한 함락 원인을 분석한 제4장 ‘조류’는
세계적인 인명사전 마르퀴즈 후즈후에 두 차례나 등재된 바 있는
변도성 국립해양조사원 연구관의 도움을 받았다. 일종의 학제간 연구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병자호란을 끝낸 건 천연두였다”
[책과 길] 란, 홍타이지의 전쟁/구범진 지음/까치/403쪽/2만5000원
입력 : 2019-02-21 11:10
영화 ‘남한산성’(2017)은 수작이었다.
김훈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이 작품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이 벌인 허무한 말(言)의 전쟁을 선명하게 드러내며 호평을 이끌어냈다.
몇몇 평론가는 그해 연말 ‘올해의 영화’ 리스트를 공개하며 이 작품을 첫손에 꼽았다.
그런데 ‘남한산성’에 담긴 내용은 어디까지가 사실일까.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인 구범진(50)은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영화에 대한 아쉬움을 표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영화는) 사실과는 영 거리가 먼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다”
“명품 사극의 자격을 갖추기에는 사실관계의 고증이 너무 부실했다”
“고증의 부실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진짜’ 병자호란은 어떤 전쟁이었을까.
왜 전쟁이 터졌던 것이며 조선의 패인은 무엇이었을까.
책에 담긴 내용을 개관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병자호란의 ‘가짜 뉴스’를 파헤치다
책을 펴낸 출판사 까치의 박종만 대표는 지난달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나온 병자호란 책들과는 다를 것이다. 조선의 사료만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아니다.
청의 자료를 분석했다. 어쩌면 학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책이 될 수도 있겠다.”
박 대표의 자신감처럼 최근 출간된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는
병자호란의 통설을 뒤집는 이야기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저자는 거듭 강조한다.
전쟁이 남긴 교훈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쓴 게 아니라고.
자신은 “전쟁의 실상을 자세히 규명하고 싶을 따름”이라고.
독자에 따라서는 저자의 이런 태도가 의아하게 여겨질 것이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더불어 대중에게 가장 잘 알려진 전쟁이니까.
하지만 병자호란의 “미시 서사”는 그동안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었다.
학계에서는 병자호란 진상 규명에 소홀했다.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을 상대로
단죄의 칼날을 휘두르는 데만 주력했다. 지금도 병자호란은 1636년 12월에 발발해
이듬해 1월 시시하게 끝난, 한국사 최대의 치욕으로만 끝없이 되새김 되고 있다.
그렇다면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진상 규명에 얼마나 성공했을까.
일단 제목에 주목하자. 저자가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건
적군의 수장이자 청의 군주인 홍타이지다.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즉, 이 책은 홍타이지의 시선에서 다시 쓴 병자호란사다.
홍타이지는 직접 군을 지휘하는 친정(親征)으로 전쟁에 임했다.
다른 장수를 대리인으로 내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를 살피자면
전쟁이 발발하기 8개월 전인 병자년 4월로 돌아가야 한다. 당시 청나라는 대국이 아니었다.
명나라도 건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홍타이지는 황제 즉위식인 칭제(秤帝) 의식을 치렀다.
칭제는 누가 보더라도 홍타이지의 과대망상이었다.
당시 홍타이지가 “천자(天子)의 자리”에 올랐다고 선포하면서 들이민 근거 중 하나는
10년 전 정묘호란으로 조선을 정복했다는 거였다. 하지만 행사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은
홍타이지에게 세 번 무릎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다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거부했다. 홍타이지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황제가 되려면 조선부터 확실히 짓밟아야 했다.
“엄청난 공을 들여 준비했을 ‘황제 즉위식’이 ‘미완’에 그침으로써 발생한
‘칭제’의 정당화라는 정치적 과제도 홍타이지 본인의 몫이었다.
병자호란은 ‘잉태’ 당초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홍타이지 본인의 정치적 야망과 어젠다를
군사적 수단으로 달성하는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청의 승전 비결은 얼마간 알려져 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강화도 파천을 통해 지구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전쟁이 원정군에 불리한 지구전이 안 되려면 한달음에 서울까지 내달려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치는 걸 막아야 했다. 요즘 말로 하자면, 홍타이지는
서울까지 가는 길에 진을 치고 있던 조선군을 ‘노룩 패스’했다. 그리고 이 전략은 적중했다.
저자는 이 같은 이야기를 조선과 청의 각종 사료를 바탕으로 흥미진진하게 풀어낸다.
특히 주목할 만한 부분은 병자호란과 관련해
세상에 퍼져 있는 허위 사실을 바로잡은 대목이다.
대표적인 게 청의 병력 규모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청의 병력이 12만8000명이 넘었을 거라고 넘겨짚었는데
이건 사료적 근거가 없는 가짜 뉴스였다. 청의 동맹군인 외번몽고 병력까지 더해도
청의 병력은 3만4000명 수준이었다는 게 저자의 분석이다.
청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 즉 피로인(被擄人)이
50만~60만명에 달했을 것이라는 추정도 엉터리다.
병자호란 무렵 청나라 인구는 130만~240만명 정도였다.
만약 조선인 50만명이 잡혀갔다면 조선인이 이후 청나라 최대 인구 집단이 됐을 수도 있다.
청은 50만명의 포로를 본국까지 끌고 갈 여력도,
동장군이 맹위를 떨치던 조선에서 ‘포로 사냥’에 나설 이유도 없었다.
천연두가 전쟁을 끝내다
소설 ‘남한산성’은 결딴날 운명을 맞닥뜨린 조선의 상황을 이런 문구로 전하고 있다.
“갈 수 없는 길과 가야 하는 길은 포개져 있었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멋진 문장이지만 당시 조선이 마주한 병자호란의 전황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서 죽을 것”이 예정돼 있었다. 남한산성으로 임금과 신하들을 몰아넣었으니
홍타이지는 느긋하게 시간만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남한산성의 식량은 늦어도 2월 20일이면 바닥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고사(枯死) 작전’을 펼치는 것만으로도 청의 승리는 명약관화했다.
그런데 당시 기록을 살피면 흥미로운 지점을 만나게 된다.
전쟁은 1월 17일 갑자기 협상 국면으로 바뀐다.
우리는 청이 이길 게 확실한 전쟁에서 왜 협상에 나섰던 건지 물어야 한다.
혹시 비축해둔 식량이 없어서였을까. 그건 아니었을 게다.
가을걷이가 끝난 조선인의 곳간을 약탈하는 것만으로도
청은 부족한 식량을 너끈하게 충당할 수 있었을 테니까.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청이 태도를 바꾼 건 천연두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엔 천연두가 유행했다.
조선에 주둔하던 청군 진영에서도 천연두 환자가 발생했다.
홍타이지는 천연두에 극도의 공포심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천연두에 쫓겨 종전을 서둘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사실은 왜 지금껏 알려지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는 이 같은 사실이 명시된 자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청에서는 천연두를 “신의 뜻”이라고 여겼다.
만약 천연두가 청군 진영에 유행한 걸 기록으로 남긴다면
홍타이지로서는 모순적인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그는 줄곧 조선 침략이 신의 뜻을 받든 “의로운 전쟁”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이 밖에도 이 책에는 병자호란 미스터리를 낱낱이 파헤친 이야기가 간단없이 이어진다.
저자의 화법 역시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다.
저자는 매 챕터마다 인상적인 질문을 던지고, 변죽을 울리며 독자를 감질나게 만든 뒤,
테트리스 게임을 하는 것처럼 논리의 벽돌을 쌓아 미스터리를 하나씩 각개격파한다.
어쩌면 병자호란을 다룬 세상의 모든 책은 이 책 이후 모두 수정돼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출처] - 국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