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三學士

이름없는풀뿌리 2022. 7. 11. 22:46
남한산성 현절사 추향사 봉행 광경(2020/10/31, 음09/15) 肅宗大王御製 嗟哉三學士 오호라 삼학사 凜凜節如何 늠름한 절의는 어떠했는가 知是皇朝在 황조에서 보여준 의기를 아노니 力排醜虜和 和誘(화유) 앞에서도 꿋꿋한 捕虜 (포로)였도다 拜辭忠愈款 抗拜(항배)의 충은 이름을 넘었고 臨死志尤磨 죽음에 임해서도 뜻은 더 깊이 새겼도다 舊宇圖新煥 옛집의 그림은 새롭게 빛나니 追思感實多 뒤따르는 생각에 만감이 일도다 □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三學士 연려실기술 제26권 仁祖朝故事本末 三學士 홍익한(洪翼漢)이 평양의 임지에 있을 때 청국 사람들이 군사를 거두어 돌아가니, 증산 현령(甑山縣令) 변대중(邊大中)을 시켜 그를 잡아 오랑캐의 영문에 보내게 하였다. 대중이 익한을 묶어서 곤욕을 주면서 음식을 먹을 수 없게 하자, 익한이 묶은 것을 풀어 밥을 먹게 해달라고 빌었으나 대중이 허락하지 않았다. 은산 현감(殷山縣監) 이순민(李舜民)이 간곡히 타일러서 묶은 것을 풀어주었다. 빨리 달려가 5일 만에 의주에 도착하여 드디어 미관 첨사(彌串僉事) 장초(張超)에게 압송하게 하였다. 통원보(通遠堡)에 이르니, 청국 사람이 잡혀온 사유를 묻고 음식을 내주어 먹게 하였다. 심양에 이르니 청주가 별관에 가두게 하고 연회를 베풀어 아침ㆍ저녁의 식사를 공급하여 해칠 의사가 없음을 보였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3월 5일에 청주가 성대하게 군사의 위세를 차리고는 익한을 끌어들여 문초하였으나 익한은 의젓이 우뚝 서서 항거하여 말하며 굽히지 아니하였다. 이어 붓을 달라고 하여 쓰기를, “대명(大明) 조선국에서 잡혀온 신하 홍익한이 화의(和議)를 배척한 사유는 분명히 설명할 수 있는데, 다만 말이 서로 통하지 않으니 마땅히 글씨로 써서 아뢰겠다. 무릇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형제는 될 수 있으나 천하에 아버지가 둘 있는 자식은 없다. 조선은 본래 예의를 숭상하며 사간원의 관원들은 오직 바로 말하는 것을 기풍으로 삼고 있다. 그러므로 작년 봄에 대가 마침 언관(言官)의 직책을 맡고 있던 중에 너의 나라가 장차 맹약을 어기고 황제로 일컬으려 한다는 것을 듣고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만약 과연 맹약을 어긴다면 이것은 형제가 서로 어그러짐이요, 만약 과연 황제라고 일컫는다면 이것은 천자가 둘 있게 되는 것이다. 집안에 어찌 서로 어그러진 형제가 있을 수 있으며 하늘과 땅 사이에 어찌 두 천자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너의 나라는 조선과 새로 우호의 맹약을 맺은 바 있는데 먼저 위반하였다. 명 나라는 조선에 대하여 오랫동안 어루만져 길러준 은혜가 맺어 있는 만큼 깊이 맺어진 큰 은혜를 잊고 너희들이 먼저 저버린 빈 언약을 지킨다는 것은 매우 이치에 맞지 않고 사리에 부당하다. 그러므로 앞장서서 척화(斥和)의 논의를 세워서 예의를 지키고자 한 것은 신하의 직분일 뿐이다. 어찌 감히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다만 남의 신하가 된 자의 명분과 도리는 마땅히 충성과 효도를 다하는 것뿐인데, 위로는 임금과 어버이가 있으나 모두 보호하여 안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니, 지금 왕세자와 대군은 모두 포로가 되었고 늙은 어머니는 살았는지 죽었는지조차도 알지 못한다. 진실로 쓸데없는 한 장의 소를 올린 까닭으로 인하여 국가에 재화와 실패를 초래하였으니 충효의 도리로 헤아려볼 때 땅을 쓸어버린 듯 없어졌다. 스스로 자신의 죄를 깊이 생각하니 죽어야 옳지 용서받을 수는 없다. 비록 만 번 죽임을 당할지라도 진실로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이다. 피를 한 번 북(鼓)에 바르고 혼은 하늘을 날아가서 고국에 돌아가 노닌다면 시원하고 시원하겠다. 이밖에는 다시 할 말이 없다. 오직 빨리 죽기만 바란다.” 하니, 청주가 보고 크게 노하여 따라간 노복들을 따로 가두고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의 사정은 까마득히 듣지 못하였다. 어떤 이는 10일에 살해되었다 하고, 어떤 이는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과 동시에 피살되었다고 하고, 어떤 이는 깊숙한 곳에 가두었을 뿐이라고도 한다. 해를 지나도 소식이 없으니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았음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병자록》 《일사기문(逸史奇聞)》 ○ 흥익한의 자(자)는 □이며, 본관은 남양(南陽)이다. 찬성 숙(淑)의 현손 당성위(唐城尉) 여(礖)의 아우이며 애(磑)의 손자 으로서 호는 화포(花浦)이다. 문과에 급제하였고, □에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정공(忠正公)이다. ○ 익한이 체포되었을 때에 길에서 중국 사람을 만나니 무슨 까닭으로 붙잡혔는가 묻고 문득 슬퍼하고 애석히 여겨 말하기를, “참으로 만약 명 나라의 천자가 이 일을 안다면 어찌 놀라서 격려하지 않겠는가. 남자가 이에 이르면 죽는 것도 빛이 난다.” 하고, 번갈아 위로하고 격려하였다. 홍익한의 《북행일기(北行日記)》 ○ 용골대(龍骨大)가 묻기를, “너는 무슨 까닭으로 들어왔느냐?” 하니, 익한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척화를 앞장서서 주장한 대간으로서 붙잡혀 왔다.” 하자. 용골대가 말하기를, “너의 나라의 조관(朝官) 중에는 척화를 주장한 자가 퍽 많은데, 어찌 유독 너 한 사람뿐인가?” 하니, 익한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남을 끌어들이겠는가.” 하였다. 용골대가 두세 번 따져 물으니, 익한이 말하기를,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홀로 나 한 사람뿐이다.” 하자, 용골대도 웃으며 가버렸다. 《일사기문》 ○ 홍익한의 종 무작쇠[茂作金]가 돌아와 한 말이다. ○ 관에 갇혀 있다가 3월의 답청일(踏靑日)에 지은 시에, 陽陂細草折新胎 양지바른 언덕에 새싹이 움트니 孤鳥樊籠意轉哀 새장 속의 외로운 새 마음 더욱 슬프구나 荊俗踏靑心外事 형의 답청 풍속 생각조차 할쏘냐 錦城浮白夢中來 금성에서 들던 술잔 꿈 속에 떠오르네 風飜夜石陰山動 밤바람 돌을 날려 음산(흉노에 있는 산이름)이 진동하고 雪入春澌月窟開 봄물은 눈이 섞여 월굴이 열리누나 飢渴僅能聊縷命 주림과 목마름에 실같은 목숨 간신히 이어가는데 百年今日淚沾腮 인생 백년 오늘에 눈물이 뺨을 적신다 《병자록》 ○ 3일 이전의 일은 모두 익한의 일기 속에서 나왔다. ○ 《병자록》에 말하기를, “익한의 두 아들과 사위가 모두 적의 칼에 죽었고 늙은 어머니와 딸 한 사람이 살아 있다.”고 하였고, 《일사기문》에 말하기를, “아내와 며느리가 오랑캐에게 붙들렸으나 욕을 당하지 않고 몸을 깨끗이 보전하고 죽었다.”고 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익한에게는 다만 양자 응원(應元)이 있을 뿐이고 벼슬은 직장이나, 다시 상고해야 한다. 딸 3명은 정창징(鄭昌徵)ㆍ윤세명(尹世鳴)ㆍ심익선(沈益善)에게 시집갔다. ○ 윤집ㆍ오달제는 오랑캐가 군사를 거두어 돌아갈 때 한 장수에게 끌려서 군진(軍陣)의 뒤를 따라 북쪽으로 가게 되었는데, 끌고 가는 자가 그의 절개와 의리에 감복하여 항상 존경을 하였다. 양화도(楊花渡)에 이르러서 윤집이 그의 아우 유(柔)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2월 3일에 처음 백씨(伯氏)가 목숨을 버렸다는 기별을 듣고 차라리 바로 죽으려다가 나라를 위해 억지로 음식을 먹으며 살고 있을 뿐이다. 내가 끌려가는 것은 대개 청국이 지난 봄의 척화한 사람을 잡아 보내라고 요구하므로 조정에서 홍익한으로 대답하였더니, 또 남한산성 안에 있는 사람으로 척화한 자를 요구하였으나 성중에는 마침 그 사람이 없기에 나와 오달제가 소를 올려 자진해서 나선 것이다. 이 일은 곧 내 스스로 하는 것이니 조금도 남을 원망할 일은 없다. 다만 늙으신 어버이가 돌아가실 날이 가까웠는데 다시 뵐 수 없으므로 하늘을 우러러 피눈물을 흘릴 뿐이다.” 하였다. 도중에서 어떤 이가 달제에게 이르기를, “온갖 곤욕을 맛보다가 오랑캐 땅에서 죽는 것보다 우리 땅에서 죽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니, 달제가 말하기를, “옳지 않다. 사람은 이 세상에 나면 진실로 한 번은 죽기 마련이다. 죽는 데도 마땅히 죽어야 할 곳을 얻어서 우리의 절개와 의리를 밝히는 것이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니겠는가. 어찌 굳이 좀스러운 사나이의 작은 절조를 본받겠는가.” 하였다. 《우암집》삼학사전(三學士傳) ○ 달제가 대동강 가에 이르러 촌집에 유숙하면서 벽에 절구(絶句) 한 수를 써놓으니, 청 나라 사람이 한인(漢人)을 데리고 와서 보았으나 별다른 말이 없다고 이르고 마침내 가버렸으며, 시도 결국 전해지지 못하였다, 또 시를 지어 주인 늙은이에게 부탁하여 집에 부치게 하였는데, 그의 ‘어버이를 생각한다[思親]’는 시에, 風塵南北各浮萍 난리에 남북으로 각기 부평초같이 흩어지더니 誰謂相分有此行 이렇게 아주 갈 줄이야 뉘 알았으리 別日兩兒同拜母 어머님 이별하던 날 두 아들이 절했더니 來時一子獨趨庭 올 때는 한 아들이 홀로 뜰에 나아가라 絶裾已負三遷敎 옷깃을 끊고 나왔으니 삼천의 교훈을 저버렸고 泣線空悲寸草情 읍선(泣線)하며 공연히 촌초정(寸草情)만 슬퍼합니다 關塞道脩西景暮 관문 국경에 길이 멀어 저녁 해 저무는데 此生何路更歸寧 이생에서 무슨 길로 다시 문안드리오리까 孤臣義重心無怍 외로운 신하 충의가 중하니 마음에 부끄러움 없으며 聖主恩深死亦輕 성주의 은혜 깊어 죽음 또한 가벼워라 最是此生無限痛 이생에서 제일 한없이 슬픈 일은 北堂虛負倚閭精 동구에서 기다리실 어머니 정을 저버림이로다. 하였고, 그의 ‘형을 생각하는 시[思兄詩]’에 南漢當時就死身 남한산 욕된 날에 죽었어야 할 이 몸인데 楚囚猶作未歸身 초수(楚囚)로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는 신하로다 西來幾灑思兄淚 서로 오며 형님 생각에 몇 번이나 눈물 뿌렸던고 東望遙憐憶弟人 동쪽을 바라보니 아우 그리는 형님 가련하네 魂逐旅鴻悲隻影 혼은 기러기 따르는데 외그림자 서러워라 夢驚池草惜殘春 춘초몽(春草夢)에 놀라 깨니 가는 봄 애석해라 想當彩服趨庭日 우리 형 색동옷 입고 어머니 앞에 나아갈 때 忍對何辭慰老親 늙으신 어머니를 무슨 말로 위로할까 하였다. 아내에게 보내준 시에는, 琴瑟恩情重 부부의 은정은 중한데 相逢未二朞 만나서 두 돌도 못 되었구려 今成萬里別 이제는 만리에 이별하여 虛負百年期 백년 언약 헛되이 저버렸소 地書O難寄 땅 멀어 편지도 부치기 어렵고 山長夢亦遲 산이 기니 꿈조차 더디리 吾生不可卜 나의 살길 점칠 수 없으니 須護腹中兒 뱃속의 어린 것 보호 잘하오 《병자록》 ○ 4월 15일에 심양에 도착하자 예부(禮部)의 한 작은 방에 가두더니 자물쇠로 잠그고 엄중하게 지켰다. 19일에 용골대가 불러가 청주의 말을 전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화친을 배척하였다고 하나 앞장서지는 않은 듯 하니 반드시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너희들의 처자를 거느리고 와서 이곳에서 살도록 하라.” 하니, 대답하기를, “그 말은 결코 좇을 수 없다. 마땅히 빨리 우리를 죽여라.” 하였다. 용골대가 되풀이하여 거듭 달래고 또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끝내 굽히지 않으니, 용골대가 일어나 들어가 버렸다. 윤집 등이 나와서 데리고 온 하인에게 말하기를, “오늘 오랑캐들이 반드시 우리를 죽일 것이다.” 하니, 하인이 놀라 울며 말하기를, “어째서 우선 그 말을 좇지 않고, 대번에 그의 노기를 돋우어 스스로 큰 화를 앞당기십니까?” 하자, 윤집 등이 웃으며 말하기를, “몸을 굴복하는 모욕은 죽음보다 도리어 더한 것이다. 이것을 네가 알 바가 아니다.” 하였다. 《우암집》 ○ 오달제가 윤집 등에게 말하기를, “죽는 것은 비록 사람의 상정(常情)에 어려운 일이긴 하지만, 잠깐 동안만 참으면 마침내 아무 것도 모르게 되는 것이니 두려워 할 것이 없다. 더군다나 죽음보다도 두려운 것(불의(不義))이 있는데 구구히 살기를 도모한다면 어찌 비루하지 않겠는가. 우리들이 만약 저들의 말을 좇아 처자를 거느리고 와서 산다면 마침내 오랑캐가 되고 말 것이니, 이를 어찌 차마 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로 웃고 이야기하며 평상시와 같이 음식을 먹었다. 한참 뒤에 용골대가 다시 나와 달제 등을 끌어들이고 또 따라간 종 3명도 잡아다가 담장 옆에 가두어놓았다. 그때 우리나라의 정승들이 용골대의 부름을 받아 같이 참석하여 앉아 있었다. 용골대가 다시 소리를 높여 협박하였으나 달제 등도 항변하여 거부하기를 다섯 차례나 하였다. 정승들도 두세 번 권하고 타일렀으나 마침내 듣지 않으니, 용골대가 그들이 끝내 굴복하지 않을 것을 알고 드디어 부하들을 시켜 단단히 결박하여 끌어내었다. 달제 등이 돌아다보며 흥분하여 꾸짖었다. 드디어 성(城)의 서문 밖으로 끌고 갔는데 그곳은 바로 오랑캐들이 사형을 집행하는 곳이었다. 《충렬공유사(忠烈公遺事)》 ○ 그때 용골대가 정승 남이웅(南以雄)ㆍ박노(朴 )ㆍ박황(朴潢)과 겸보덕 이명웅(李命雄)을 아문(衙門)에 불러놓고, 윤집 등을 그 앞에 데려다가 청주의 명을 전달하기를, “이 사람들이 화의를 끊기를 부르짖어 두 나라로 하여금 분쟁이 일어나게 하였으니, 그 죄가 지극히 중하다. 그러나 황제께서 사람의 목숨을 중히 여기고 아껴 저들의 사형을 용서하고 처자를 거느리고 여기에 들어와 살도록 허락하였는데, 윤집은 곧 말하기를, ‘처자가 난리에 흩어져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한다. 이 뒤에 알아보고 처리하겠다.’ 하였고, 오달제는 말하기를, ‘내가 죽음을 참고 여기에 온 것은 만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간다면 다시 나의 임금과 늙은 어머니를 뵈려는 것이다. 만약 다시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빨리 죽는 것이 나으니만 못하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황제께서 살리고자 하시는데 저가 죽음을 재촉하는 것이므로 사세가 죽이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정승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들은 모두 나이 젊은 사람들로서 다만 임금과 어버이를 연모하는 생각만 간절하여 망녕되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약 끝까지 곡진히 보전하여 준다면 어찌 천추만대에 이름이 남을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용골대가 말하기를, “이것은 정승들이 일의 형편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하였다. 정승들이 간곡히 빌어 마지 않았지만 달제들은 마침내 죽음을 면치 못하였는데, 참혹하여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질관(質館) 정승들의 장계와 정뇌경(鄭雷卿)이 오학사(吳學士)의 집에 보낸 편지를 합록하였다. ○ 그들이 죽은 뒤에 필선 정뇌경(鄭雷卿)이 통역관을 시켜 그들의 시체를 거두어오려고 간청하였으나, 오랑캐들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 6월 6일에 질관(質館)의 장계가 오니, 임금이 승정원에 하교하기를, “두 신하의 일은 지극히 참혹하고 슬프다. 마땅히 매달 그의 집에 녹봉을 주라.” 하였다. 《삼학사전(三學士傳)》 ○ 윤집은 자는 성백(成伯)이며, 본관은 남원(南原)이다. 섬(暹)의 손자이고 계(棨)의 아우이며, 호는 임계(林溪)이다. 신미년(1631)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 오달제는 자는 계휘(季輝)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호는 추담(秋潭)이다. 정미년(1607)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갑술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벼슬은 교리였다. 영의정을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 효종조에 경연관 김시진(金始振)이 아뢰기를, “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 등 3명의 절개와 충의는 마땅히 포상하는 증직(贈職)이 있어서 절의를 장려해야 할 것인데, 그 당시에는 의심과 두려움에 눌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월이 오래 되었으니 다른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기를, “홍익한에게는 도승지를, 윤집에게는 부제학을, 오달제에게는 좌승지를 추증하라.” 하였다. ○ 지금 경술년(1790)에 서호수(徐浩修)가 사신으로 청국에 갔다가 서점에서 《황청개국방략(皇淸開國方略)》이라는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청 나라 태종 3년조(1629)에 쓰여 있기를, “3월 간지(干支) 에 조선 배신(陪臣) 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 등이 사형되었다. 명 나라에 편들 것을 앞장서서 부르짖고 맹약을 깨뜨리고 전란을 일으킨 죄를 처단한 것이다.” 하였다. 사신은, 그 책 가운데 우리나라를 무함한 말이 많으므로 감히 사오지 못하고 다만 이 말을 베껴 가지고 돌아왔다. 그 간지를 상고하여 보니 바로 5일이었다. 삼학사의 집에서는 옛날 심양의 질관에서 장계가 들어온 날로 제삿날을 삼았는데, 이에 이르러 고치려고 하였으나 의논이 일치하지 않아서 아직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보(補) 정뇌경(鄭雷卿) 청 나라의 통역 정명수는 바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포로가 되어간 자이다. 청 나라의 세력에 의지하여 방자하고 포악하게 굴었다. 필선 정뇌경은 그(정명수)가 반대로 말참견하여 우리나라를 헐뜯으므로 신하와 임금이 그의 침범과 포악을 참지 못하여 계략을 써서 제거하고자 하였다. 그때 명수가 우리나라의 일을 전담하고 있었다. 뇌경은, 청 나라 사람 중 명수를 미워하는 자를 시켜 그가 간사하게 도적질한 것을 고발하게 하고 염헌이 말하기를, “뇌물을 받은 일이다.” 하였다. 우리가 그 증거를 대주고자 하였으니, 그렇게 하면 오랑캐가 명수를 벨 것이므로 우리가 능멸당한 치욕을 조금 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을 명수에게 누설한 자가 있자, 명수가 갑자기 뛰어들어와서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니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었다. 뇌경이 재신이 있는 자리에서 명수의 죄에 증거 될 만한 문서를 면전에서 불살라서 그를 안심시켰다. 그를 미워하는 자가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마침내 고발하였다. 사건이 질관(質館)에 넘어오니 질관의 여러 사람들이 모두 어물어물하는데 뇌경만이 홀로 처음 계획과 같이 말하기를, “명수의 죄가 틀림없습니다.” 하였다. 청 나라 사람이 증거될 만한 문서를 요구하니, 뇌경이 대답하기를, “정말 있었는데 이미 불태웠습니다. 이 일은 재신들이 실로 알고 있습니다.” 하자, 청 나라 사람이 재신에게 물으니 일의 성패가 재신들의 입에서 결정될 판이었다. 재신이 전부터 오랑캐들과 왕래하면서 명수와는 관계가 있었다. 드디어 대답하기를, “알지 못한다.”고 하여 뇌경은 마침내 무고죄로 보고되었다. 임금이 듣고 사람을 시켜 재신에게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구출하려고 하면 도리어 그 노여움을 더할 것이므로, 그대로 죄 주기를 청하느니만 못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그 말대로 그대로 믿었다. 뇌경이 드디어 사형되었는데, 바로 기묘년(1639) 4월이었다. 정뇌경(鄭雷卿)의 묘표 ○ 처음에 뇌경이 일을 실패하고 힐난을 받게 되니, 종관(從官)들이 서로 의논하여 말하기를, “뇌경이 반드시 죽을 것이니 세자를 끌어댄다면 아마 청 나라 사람들이 꺼리는 바가 있어서 깊이 치죄하지 않을 것이다.” 하자, 박노가 홀로 말하기를, “우리들이 세자를 좇아와서 예측할 수 없는 곳에 목숨을 내맡기고 있는데, 설사 세자가 그 일에 간여하였더라도 신하된 자로서 마땅히 숨기고 자신이 스스로 맡아야 할 것인데, 하물며 세자는 알지도 못하는 일이랴. 만약 세자에게 위태로운 일이 생긴다면 우리들이 어떻게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하니, 드디어 그만 두었다. 세자가 몸소 가서 구원하려고 하니, 사서 정지화(鄭知和)가 찬성하였다. 세자가 박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세자의 말씀을 반드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니, 욕을 당하게 될 뿐일 것 같습니다. 세자께서는 천천히 청 나라 사람들의 기색을 보아서 말을 할 만하거든 말씀하시고 가볍게 발언하지 마소서.” 하였다. 세자가 가니 청 나라 사람들이 막아서 곧 되돌아왔다. 박노가 종관들과 함께 돈으로써 뇌경의 죄를 속죄하기를 청하니, 청 나라 사람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뇌경이 처음에 사서 김종일(金宗一)과 같이 모의하였는데, 이제 와서 종일이 죄를 면하게 되니, 스스로 정뇌경을 저버리게 된 것을 알고 도리어 박노를 탓하기를, “뇌경을 구원할 수 있는데도 구원하지 않으니 인정이 아니다.” 하였다. 그 일의 실정을 모르는 자들은 자세히 살펴보지도 않고 의심하였다. 《염헌집》박노의 비문 ○ 명수는 본래 은산현(殷山縣)의 관노(官奴)였다. 정묘년에 포로가 되어 심양에 들어갔다. 정축년 이후로는 항상 통역하는 사자(使者)로서 우리나라에 왕래하였다. 두 나라 사이의 사정은 일체 그가 손아귀에 넣고 조종하는 대로 되었다. 조정에서는 벼슬을 주어 그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갑자기 높은 지위에 올려주고 또 그의 겨레붙이들에게도 벼슬을 주었으며, 그가 태어난 고을을 승격하여 은산부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명수는 임금을 업신여기고 아래로 삼공ㆍ육경부터 모두 질책과 모욕을 받았으나 감히 대항하지 못하고 오직 돈으로 달래기를 힘쓸 뿐이었다. 《야곡삼관기(冶谷三官記)》 ○ 뇌경이 사형을 받게 되니 박노가 청인에게 다투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에는 학사(學士)는 비록 죽을 죄가 있더라도 참형하지 않고 교형(絞刑)을 한다.”고 하니, 청인이 좇았다. 사형되자 박노가 청인에게 뇌물을 주고 시체를 거두어 귀국하였다. 《염헌집》 ○ 뇌경이 관복을 입고 세자에게 나아가 하직을 아뢰니, 세자가 그의 손을 잡고 울며 말하기를, “남한산성에서 나오던 날 식견 있는 경재(卿宰)들이 모두 북으로 가기를 꺼려하는데, 그대만이 홀로 앞장서서 나를 따라와 3년을 같이 고생하다가 불행하게도 이 지경에 이르렀다. 들으니, 그대에게 늙은 어머니와 어린아이가 있다 하니 훗날 귀국하게 되면 내가 어찌 잊겠는가.” 하고, 앞에 와 앉게 하여 다른 잔으로 술을 부어주었다. 뇌경이 물러간 뒤에 세자가 신유(申濡)에게 이르기를, “내 차마 뇌경이 살아서 사형장에 가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스스로 사약을 마시게 하였으나, 약이 그다지 효험이 없어서 마침내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고 하였다. 뇌경이 동쪽을 향하여 궁궐을 바라보며 네 번 절하고 또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두 번 절하고 조용히 죽음에 나아가되 얼굴빛을 변하지 않았다. 그때 나이가 36세였다. 《심양일기》 ○ 효종(孝宗)도 처음에 또한 그 일을 알고 지극히 슬퍼하였으며 수의(襚衣)와 제주(祭)를 갖추어 주었다. 한 공주를 지목하여 뇌경의 아들과 혼인할 뜻을 보였으나 뒤에 마침내 일찍 죽었다. 정뇌경의 묘비 ○ 그때 최후량(崔後亮)이 심양에 있었는데, 뇌경에게 말하기를, “왜 일찍 나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하니, 답하기를, “자네가 반드시 힘껏 말릴 것이니 말해도 유익할 것이 없으므로 말하지 아니하였네.” 하였다. 후량이 그를 구제하고자 하여 드디어 효종을 잠저에 가서 뵙고 소매 속에서 시 한 구절을 올렸다. 시에 말하기를, 天下卽今無節俠 천하에 지금 기절 있는 협사가 없으니 窮道知己更誰憑 죽게 된 때에 구제해 줄 지기 누구를 믿을까 虞卿急土歸公子 우경이 위제를 구제하려고 평원군에게 갔으니 莫使侯生恨信陵 후생으로 신릉군(信陵君)을 한하게 하지 마오 하였다. 효종이 맥없이 말하기를, 남의 급한 것을 구제하기는 신릉군도 어렵게 여긴다.” 하였다. 완릉행장(完陵行狀) ○ 삼학사가 죽음을 당하였을 때 뇌경이 오 학사의 집에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시운(時運)이 이렇게 되어 오랑캐에게 포로가 되었으니, 조만간 한번 죽을 것인데, 만약 이 벗처럼 명백히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한다면 뒤에 죽는 자가 도리어 먼저 죽은 자에게 불쌍하게 여겨질는지 누가 알겠는가.” 하였더니, 이때에 이르러 그 말이 예언이 되었다. 뇌경이 죽음에 이르러 지은 시에, 三良昔死遼東濱 옛날에 세 어진이가 요동 물가에서 죽으니 關塞浮遊夢有鄰 관새에 떠 다니는 꿈속 혼이 이웃이 있네 今招阿震添新伴 지금 진백을 불러 새 벗을 더하였으니 共訪令威作主人 우리 함께 영위(令威)를 찾아 주인을 정해 보세 하였다. 이 시는 바로 전날의 편지에서 말한, ‘먼저 죽은 자와 뒤에 죽는 자’의 뜻이다. 또 그의 말과 얼굴빛이 태연하여 죽음을 본집에 돌아가는 것같이 보았으니, 진실로 오계휘(吳季輝)의 벗이라고 할 수 있다. 《오학사유사(吳學士遺事)》 ○ 정뇌경은 자는 진백(震伯)이며, 본관은 온양(溫陽)이다. 경오년(163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 서리 강효원(姜孝元)도 정명수의 실지 죄상을 극력으로 말하였기 때문에 같이 죽음을 당하였다. 《심양일기》 ○ 뇌경이 죽을 때 자손에게 과거를 보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그 아들 유악(維岳)이 효종 임진년(1652)에 진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효종이 편전에 불러 보고 낯을 들게 하고 이르기를, “네가 네 아버지를 닮았구나. 네가 벌써 이렇게 성장하였느냐.” 하고, 곧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정뇌경은 분을 내어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하여 죽음을 당하였다.” 하였다. 유악에게 이르기를, “힘써서 여기에 그치지 말라.” 하였다. 또 시신에게 이르기를, “그 뇌경의 봉록을 끊지 말라.” 하였다. 또 은(銀)과 베를 따로 보내게 하고 유악에게 손수 호피(虎皮) 등의 물건을 하사하고, 또 술과 음식을 내리고 물러가도록 하고, 다시 특별히 벼슬을 제수하였다. 현종(顯宗) 병오년(1666)에 유악이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그의 행신(行身)이 밉살스러워 이상진(李尙眞)이 이조에 있으면서 아버지를 욕되게 하였다고 배척해 말하고 청망(淸望)에 추천하는 것을 막고자 하다가 말이 먼저 누설되었다. 유악이 정언이 되자 단독으로 상진을 탄핵하였으니, 상진이 그의 중상을 입은 것이다. 정뇌경의 묘표와 이상진의시장(諡狀)을 합하여 기록하였다. 황일호(黃一皓) 신사년(1641) 7월에 의주 부윤(義州府尹) 황일호가 청 나라 사람에게 살해되었다. ○ 처음에 최명길이 심양으로부터 돌아올 때, 일호가 새로 의주 부윤으로 임명되었다. 명길이, 일호가 재주와 인망이 있으나 뜻이 크고 눈치가 빠르지 못하여 국경에 일이 있는 때를 당하여 일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고 하여, 드디어 비변사에서 아뢰어 논하기를, “황일호가 비록 재주와 지혜는 있으나, 아마 치밀하지는 못한 것 같으니, 신의 소견으로는 김술(金述)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미 임명하였으니 시험해 보는 것도 무방하나 끝내 구구한 염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였다. 일호가 과연 어떤 일로 청 나라 사람들의 노여움을 돋우어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데 이르렀다. 《곤륜집(昆侖集)》 ○ 경진년(1640)에 정태화(鄭太和)가 평안 감사가 되었을 때, 의주에 사는 무인(武人) 최효일(崔孝一 )이 주장(主將) 임경업(林慶業)에게 죄를 짓고 온 가족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명 나라에 귀의하여, 편지로 의주의 여러 호장(豪將)들과 약속하여 아무 날에 부윤을 잡아 묶어서 바닷길을 거쳐 명 나라로 갈 것을 약속하였다. 이틀 전에 관향 종사(管餉從事) 허적(許積)이 이것을 알아내어 급히 편지를 보내 태화에게 알렸다. 태화가 하룻밤 만에 서쪽으로 5백 리를 달려가서 방어할 계획을 하였다. 그때 용골대(龍骨大)가 의주에 있다가 또한 이 일을 알아내고 정명수(鄭命壽)와 함께 세차게 달려왔다. 태화를 보고 매우 칭찬하기를, “감사가 먼저 도착하다니, 어쩌면 그렇게 신(神) 같은가.” 하였다. 태화가 곧 의주의 호장 30여 명의 성명을 나열하여 써서 급히 체포하게 하였다. 태화가 생각하기를, “이 무리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간악한 싹을 미리 꺾을 수 없을 것이요, 이 무리들을 모두 제거한다면 또한 국경의 민심을 위로하고 안정시킬 수 없다.”고 하고, 드디어 의주에서 인망이 있는 자들에게 비밀리 편지를 보내 먼저 피하라고 타일러 놓고 나서 군사를 보내 잡게 하였다. 《식암집(息菴集)》 ○ 이때 청 나라 사람이 간첩을 시켜서 최효일의 편지라고 속이고, 그의 생질로 의주에 사는 자에게 부치니, 그 생질의 답장에 “황 부윤이 우리 집을 위로하고 구휼하여 줍니다. 외삼촌께서 만약 황 부윤을 통하여 우리나라와 밀통(密通)한다면 우리나라가 그것을 인하여 다시 명 나라 조정과 통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 말이 있었다. 청 나라 사람들이 이 편지를 손에 넣고 더욱 노하여 차사(差使)를 보내어 와서 갖은 방법으로 공갈하고 위협하였다. 임금이 비밀리 천금으로 뇌물을 주어 화를 완화시키려 하였으나, 마침내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이는 실로 신사년 11월 9일이었다. 《우암별집(尤岩別集)》 ○ 그때 청 나라 장수가 장차 일호를 죽이려 하니, 영의정 이성구(李聖求)가 극력 간쟁하였다. 청 나라 장수가 노하여 말하기를, “정말 이렇게 한다면 정승 노릇을 3일도 못하게 될 거요.” 하였다. 동료 정승들은 저 사람의 뜻이 굳은 것을 보고 중지하고 변명하지 말고자 하니, 성구가 말하기를, “비록 하루 동안도 정승 노릇을 못할지라도 사람이 죄 없이 사지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어찌 힘을 내어 구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동주집(東洲集)》 ○ 황일호는 자는 익취(翼就)이고, 신(愼)의 아들이며,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호는 지소(芝所)이다. 을해년(1635)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병조 참지에 이르렀다. 좌찬성을 추증하였고, 시호는 충렬공(忠烈公)이다. ○ 최(崔)ㆍ차(車) 두 역사(力士)를 장송( 送)하였다. ○ 일호의 아들 진(璡)이 어머니를 섬겨 효도하였다. 아버지가 오랑캐의 옥에서 죽었으므로 그 일을 한평생 피눈물을 흘리며 청 나라를 원망하고 아버지를 사모하였다. 천거되어 벼슬을 주었으나 나가지 않으니, 그때의 사람들이 그를 왕부(王裒)에 견주었다. 일찍이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두 사람을 스승으로 섬겼다. 특별히 지평을 추증하였다. 《강화지(江華志)》 [주D-001]피를 …… 바르고 : 옛날에 군중에서 북을 새로 만들 때에는 적병을 잡아 죽여 그 피로 북의 틈을 칠하였다 한다. [주D-002]답청일(踏靑日) : 중국의 풍속에 3월 3일을 답청일이라 하는데, 이날에는 모든 남녀가 산과 들에 나가서 푸른 새싹을 밟는 풍속이 있다. [주D-003]옷깃을 끊고 나왔으니 : 진(晉) 나라의 온교(溫嶠)가 나라 일을 위해 집을 떠나려 하는데, 그의 어머니가 옷자락을 붙잡고 말리니 온교가 옷자락을 끊고 가버렸다. [주D-004]읍선(泣線) : 당 나라 맹교(孟郊)의 시에, “자모(慈母)의 수중에 실밥[線]은 유자(遊子)의 신상(身上)에 옷이로다.” 하였는데, 여기서는 옷을 보고 어머니를 생각하여 운다는 것이다. [주D-005]촌초정(寸草情) : 맹교의 시에, “한치 되는 풀[寸草]의 정(情)을 가지고 삼춘(三春)의 은혜를 갚기 어렵다.”는 구절이 있는데, 촌초는 아들에게 비하고 삼춘은 어머니에게 비한 것이다. [주D-006]동구에서 …… 정 : 제(悌) 나라의 왕손가(王孫賈)가 왕을 따라 전쟁에 나갔다가 패하여 왕이 간 곳을 모르고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가 꾸짖기를, “네가 아침에 나가서 늦게 오면 내가 문에서 기다리고, 저물녘에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동구에서 기다렸는데, 네가 지금 왕을 따라 나갔다가 왕의 간 곳도 모르고 무엇하러 돌아왔느냐.” 하였다. [주D-007]초수(楚囚) : 춘추 시대에 초(楚) 나라 종의(鍾儀)가 진(晉) 나라에 포로가 되어 갇혀 있었으므로 초수(楚囚)라 하였다. [주D-008]춘초몽(春草夢) : 진(晉) 나라 사영운(謝靈運)이 꿈에서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아름다운 시구를 얻었다. [주D-009]색동옷 입고 : 옛날 노래자(老萊子)가 70세에 이르도록 양친이 살아 있어 효도로 봉양할 때 어린 아이처럼 색동옷을 입고 그 앞에서 재롱을 피웠다 한다. [주D-010]신릉군(信陵君) : 위(魏) 나라 공자 신릉군은 선비를 좋아하고 남의 급한 일을 구제하기를 좋아하였는데, 후생은 나이 70에 이문(夷門)에서 문을 지키는 천한 자리에 있었다. 신릉군이 그의 어진 것을 듣고 공손히 청하여 대접하고 그의 꾀를 써서 위 나라 군사를 거느리고 조(趙) 나라의 위급함을 구원하려 가는데 후생은 신릉군의 은혜를 갚기 위하여 신릉군이 군중(軍中)에 당도한 날에 자살하였다. [주D-011]세 어진이 : 진(秦) 나라 목공(穆公) 때에 자거씨(子車氏)의 세 아들이 모두 어질었으므로 목공이 그들을 사랑하여 자기가 죽을 때에 그 세 사람을 함께 생매장하도록 하였다. [주D-012]영위(令威) : 요동 사람인 정령위(丁令威)가 신선이 된 뒤에 학으로 변하여 고향에 돌아와서, “진(秦)성곽(城郭)은 예전 그대로인데 인물이 아니로다.”라는 시를 지었다. [주D-013]왕부(王裒) : 위(魏) 나라 왕부(王裒)의 아버지인 왕의(王儀)가 죄 없이 원통하게 사마소(司馬昭)에게 죽었으므로, 왕부는 벼슬을 하지 않고 조석으로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울며 평생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