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탄강 여행 ①고석정(孤石亭, 22/08/12, The Hunt / BrunuhVille)
이름없는풀뿌리2022. 8. 17. 06:09
요즈음 – 한탄강 여행 ①고석정(孤石亭) –
옛날의 기억으론 홀로 서 외로웠는데
좌우로 기암괴석 엎드려 거느린 모습
그 이름 君石亭이라 불러주고 싶었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8/12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한탄강 여행 ①고석정(孤石亭)(1)
22/08/12 둘째와 한탄강 여행.
자료를 보고 고석정,
순담계곡주상절리잔도길,
산정호수 한 바퀴를 둘러보기로 함.
게릴라 폭우에도 우리가 출발하니 개임.
(2)
고석정은 25년여 전
직장동료들과 와 보았던 기억.
다만, 거기로 가는 38선 휴게소, 승일교, 이동등
곧게 넓혀진 도로와 주변은 많이 변하여 생경한 느낌.
신라 진평왕 진솔왕, 고려 충숙왕이 유람했으며
세종께서 강무훈련을 했고
조선 명종 때 의적으로 활동했던
임꺽정이 숨어 지냈던 곳이라 하는데
폭우에 꽉 찬 강물에 유람선이 있어 가족과 함께 타 보며
단층지대 주상절리의 한 복판에서 시원한 강바람을 맛보다.
(3)
절개된 단층의 강 한복판에
외로이 서서 孤石亭이라 했는가 본데
오랜만에 와 살펴보니
좌우로 늘어선 柱狀節理가 신하들 같아
孤石이 아닌 君石으로 보였다.
배달9219/개천5920/단기4355/서기2022/08/12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고석정 도착(14:00)
2) 19억년 전 편마암, 3억년 전 미산층, 50만년 전 현무암을 한 곳에서 만남.
3) 고석정(孤石亭)
4) 선상 유람
5) 선상유람(14:20-14:30)
6) 올라와 광장에서 내려다 봄.(14:50)
7) 세종이 철원평야에서 講武훈련을 하고 뒷풀이한 장소
덧붙임)
세종대왕은 재위시 철원에서만도 19회의 강무를 시행했다 하여
세종실록에서 눈에 띄는 講武에 관한 관련 자료들을 찾아 보았다.
그 당시의 임금님 사냥과 무예 훈련을 통한 세종의 생생한 정황을 느껴보려 함.
□ 세종 1년 11월 3일 1419년
상왕이 임금과 강원도에서 대규모로 강무하다
임금이 수강궁에 나아갔다. 상왕이 임금과 더불어 강원도에서 강무하였는데,
양녕 대군 이제(李禔), 효령 대군 이보(李𥙷), 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 우의정 이원,
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 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
판도총제부사(判都摠制府事) 이화영(李和英), 장흥군(長興君) 마천목(馬天牧),
병조 판서 조말생, 도총제 이담(李湛), 홍부(洪敷), 광록시 경(光祿寺卿) 권영균(權永均),
소경(少卿) 한확(韓確), 총제 유은지(柳殷之)·문효종(文孝宗)·곽승우(郭承祐)·이춘생(李春生)·
성달생·전흥(田興)·박실(朴實)·박성양(朴成陽)·이순몽(李順蒙)·원윤(元胤)·이교(李皎)·
황상(黃象)·문귀(文貴), 병조 참판 이명덕, 당성군(唐城君) 홍해(洪海), 지신사 원숙,
좌대언 김익정, 우대언 이수(李隨), 동부대언 유영, 첨지돈녕부사 홍상직(洪尙直),
첨총제(僉摠制) 김월하(金月下)·지백연(池伯淵)·조정(趙定)들이 어가를 따랐다.
상호군(上護軍)·대호군(大護軍)·호군(護軍)·사금(司禁)·사엄(司嚴) 및 사사로 부리는
반당(伴儻)을 제한 외에도 갑사(甲士)·별패(別牌)·시위패(侍衛牌)를 아울러
2천여 명이었으며, 말이 만여 필이고, 별군 방패(別軍防牌)가 수천 명이었는데,
연사종·이화영·이춘생·박성양·박실·황상들로써 3군 장수를 삼았다.
이날 평구역(平丘驛)100) 등처에서 매사냥을 관람하고
양주(楊州) 조시배령(曺時背嶺) 남쪽에서 점심을 먹었다.
경기 감사 조치(曹致)와 경력(經歷) 유사근(柳士根) 등이 와서 뵈옵고
술과 과일을 올리므로, 첨총제 이상을 장전(帳殿) 앞에서 호궤(犒饋)하고,
시위하는 대소 인원에게 술을 하사하도록 명하였다.
드디어 용진(龍津) 남쪽에서 사냥하고, 용진 여울을 건너
남쪽 언덕에 유숙하였는데, 조치가 또 술과 과일을 올리므로,
시위하는 대소 인원에게 나누어 주게 하였다. 매양 주정(晝停)에서나 숙소에서
반드시 〈지방에서〉 바치는 술을 시위하는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註 100]평구역(平丘驛) : 양주군.
□ 세종 2년 2월 22일 1420년
광주·양근 등지, 철원·안협 등지를 강무장으로 정하다
선지(宣旨)하기를, "강무장(講武場)으로는 경기도의 광주·양근(楊根) 등지,
철원·안협(安峽) 등지, 강원도의 평강(平康)·이천(伊川) 등지, 횡성(橫城)·
진보(珍寶) 등지로 결정하고, 그 지역 안에는 전부터 거주하던 사람과 이미 땅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는 사람 이외에, 오는 사람이나 및 새로 개간하거나,
나무를 베거나, 사냥하는 등 일은 일체 금한다."하였다.
□ 세종 3년 2월 13일 1421년
상왕이 철원에서 강무하는 데 임금이 부득이 따라가다
상왕이 장차 철원에서 강무(講武)하려고 할 때 임금과 함께 가려고 하므로,
임금이 거상이 다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굳이 사양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비록 강무하는 데 쫓아가지만, 짐승을 잡는 것은 아니요, 다만 조석 식사에 모시고
정성(定省)하는 것뿐이니, 만약 쫓아가지 아니하면 정성이 오래 궐할 것이다.
비록 거상이 끝나지 아니하였으나, 나를 위해 따라가라."하니,
임금이 부득이해서 따라가는데, 봉녕 부원군(奉寧府院君) 이복근(李福根)037)을 보내어
광효전에 떠남을 고하고, 드디어 떠나서 녹양원(綠楊原)에 도착하니,
상왕도 또한 풍양으로부터 와서 독바위[甕巖]의 남쪽에서 만났다. 상왕이 시위 군사와
거둥 때의 모든 일은 부득이한 일 이외에는 일절 면제할 것을 명하였다.
저물게 양주(楊州) 동존(東存) 들에 도착하니, 경기 관찰사 성엄(成揜)과
경력(經歷) 이숙치(李叔畤)와 양주 부사(楊州府使) 홍이(洪理) 등이
조복(朝服) 차림으로 와서 뵙고, 각도 관찰사는 사람을 보내어 방물을 헌상하였다.
[註 037]이복근(李福根) : 태조의 맏아들 이방우(李芳雨)의 아들.
□ 세종 3년 2월 25일 1421년
상왕이 강원도로 강무하러 갈 채비를 하게 하다
상왕이 풍양으로부터 장차 강원도 진부(珍富) 등처에서 강무하려 할 때,
임금이 광효전에 고하고 따라가고, 우의정 이원(李原)과
평양 부원군(平陽府院君) 김승주(金承霔) 등이
거가(車駕)를 호위하였다. 두 임금이 양주(楊州) 초두(草豆) 등에서 만나니,
경기 관찰사 성엄(成揜)과 경력 이숙치(李叔畤)와 광주 목사 이육(李稑)과
판관 김종서(金宗瑞)와 양주 목사 홍이(洪理) 등이 조복 차림으로 와서 뵈었다.
두 임금이 장전(帳殿)에서 주연을 베푸니, 효령 대군 이보(李𥙷)·
경녕군(敬寧君) 이비(李)·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
청평 부원군(淸平府院君) 이백강(李伯剛)·평양군(平壤君) 조대림(趙大臨)·
찬성사(贊成事) 조연(趙涓)·참찬 최윤덕(崔閏德)·
도총제(都摠制) 권희달(權希達)·이징(李澄)·이담(李湛)·동지돈녕(同知敦寧) 문귀(文貴)·
이교(李皎)·이명덕·김익정·성엄이 시연하였다.
사냥해서 잡은 새를 종묘·광효전·공정 대왕 혼전에 천신하여 올리고,
용나루[龍津]를 건너서 저녁에 거가가 용나루 동쪽 언덕에 머물렀다.
□ 세종 6년 9월 19일 1424년
경기도의 연천 등과 강원도의 김화 등의 강무장을 혁파하여 백성이 농사짓게 하다
병조에 전지하기를,
"경기도의 연천(漣川)·안협(安峽)·삭녕(朔寧)·임강(臨江)과
강원도의 김화(金化)·금성(金城)·회양(淮陽)과 황해도의 우봉(牛峯) 강무장(講武場)은
이제 모두 혁파하였으니, 백성이 개간하여 농사짓는 것을 허락하라."하였다.
□ 세종 7년 3월 9일 1425년
왕이 철원 평강 등지에서 강무하다
임금이 철원(鐵原)·평강(平康) 등지에서 강무(講武)하였다.
이날 거가(車駕)가 출발하여, 점심참에 양주(楊州) 사천동(沙川洞) 어구에서 머물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 이보(李𥙷)· 경녕군(敬寧君) 이비(李)·공녕군(恭寧君) 이인(李䄄)·
의성군(誼城君) 이용(李㝐)이 입시(入侍)하고,
경기 감사 김겸(金謙)·경력 안숭선(安崇善)·정역 찰방(程驛察訪) 이길배(李吉培)·양질(楊秩)·
양주 부사(楊州府使) 이승직(李繩直) 등이 조복(朝服)을 갖추고서 맞아 뵈오니,
거가를 수종하는 당상관(堂上官)에게는 친히 술잔을 내리고, 3품 이하에게도 술을 내리었다.
이로부터 거가가 회정할 때까지 이 예로 하였다.
저녁에 풍천평(楓天平)에 〈악차(幄次)를 설치하고〉 머무르니,
경기·충청·전라도의 감사는 말과 그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고,
평안도 감사는 매[鷹] 3마리를 바치고, 경기 감사는 또 술과 과일을 진상하였다.
□ 세종 17년 2월 13일 1435년
왕세자를 인솔하고 철원 등지에 가서 강무하다
임금이 왕세자를 인솔하고 철원(鐵原) 등지로 가서 강무(講武)하니,
종친과 부마(駙馬), 그리고 의정부와 대간(臺諫) 각 1명, 병조의 대소 무신이 호종하고
문무 여러 신하들은 흥인문 밖까지 전송하였으며, 경기 감사 성개(成槪)·
경력(經歷) 이의흡(李宜洽)·찰방(察訪) 이자(李粢)·양주 부사 김종흥(金宗興) 등이
길가에서 맞아 배알하였다. 녹양평과 회암 남산에서 사냥하고 풍천에 머무르니,
경기·황해·경상·충청 등 각도의 감사들이 방물(方物)을 바쳤다.
□ 세종 18년 3월 10일 1436년
철원 들에서 유숙하다
철원(鐵原) 들에서 사냥하니, 강원도 감사 유계문(柳季聞)·
도사 이충로(李忠老)·철원 부사 권서(權曙)가 경상에서 맞이하여 알현하였다.
말흘천(末訖川) 가에서 유숙하고, 명하여 금후로는 강무할 때에
경기·강원도의 수령관(首領官)은 경계를 넘어와서 문안하지 말게 하였다.
□ 세종실록 148권, 지리지 경기 철원 도호부지리지
지리지 / 경기 / 철원 도호부 / 삭녕군
지리지 / 경기 / 철원 도호부 / 영평현
지리지 / 경기 / 철원 도호부 / 장단현
지리지 / 경기 / 철원 도호부 / 안협현
지리지 / 경기 / 철원 도호부 / 임강현
지리지 / 경기 / 철원 도호부 / 마전현
지리지 / 경기 / 철원 도호부 / 연천현
⊙ 철원 도호부(鐵原都護府)
본래 고구려의 철원군(鐵原郡)인데, 신라가 철성군(鐵城郡)으로 고쳤다.
신라 말에 궁예(弓裔)가 군사를 일으켜서 고구려의 옛 땅을 빼앗아,
당(唐)나라 천우(天祐) 2년(905) 을축에 송악군(松嶽郡)으로부터 와서 도읍하고,
궁실(宮室)과 누대(樓臺)를 짓기를 극히 사치하게 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이라 하였다가, 양(梁)나라 정명(貞明) 4년 무인에 이르러
고려 태조(太祖)가 여러 장수들의 추대한 바 되니, 궁예가 변란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몰라 미복(微服)으로 도망하였다.
태조가 즉위(卽位)하여 도읍을 송악으로 옮기고, 철원(鐵圓)을 고쳐 동주(東州)라 하였다.
【궁예의 궁전 옛터가 부(府) 북쪽 27리 되는 풍천(楓川) 언덕에 있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 을사에 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 무오에 지동주사(知東州事)로 고치고,
그 뒤 동주목(東州牧)으로 승격시켰다가, 충선왕(忠宣王)경술105) 에
여러 목(牧)을 없앰에 따라 철원부(鐵原府)로 강등하였다.
본조(本朝)에서도 그대로 따랐다가,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도호부(都護府)로 고쳤다.
별호(別號)는 육창(陸昌)이다.
보개산(寶蓋山) 【부(府) 남쪽에 있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김화(金化)에 이르기 30리, 서쪽으로 삭녕(朔寧)에 이르기 30리,
남쪽으로 영평(永平)에 이르기 20리, 북쪽으로 평강(平康)에 이르기 30리이다.
호수(戶數)가 3백 51호, 인구가 7백 70명이요,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62명이다.
토성(土姓)이 3이니, 최(崔)·송(宋)·유(柳)이고,
망성(亡姓)이 15이니, 장(張)·김(金)·정(鄭)·형(邢)·신(辛)·고(高)·한(韓)·조(曺)·노(盧)·
안(安)·이(李)·채(蔡)·허(許)·박(朴)·방(芳)이며,
속성(續姓)이 1이니, 방(邦)이다.
인물(人物)은 문하 시중(門下侍中)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 무민공(武愍公) 최영(崔瑩)이다.
【고려 말에 벼슬하였다.】
땅이 메마르고 높아서, 기후가 일찍 추워지며, 간전(墾田)이 4천 3백 43결(結)이다.
【논이 4분의 1도 안 된다.】 토의(土宜)는 오곡(五穀)과 조·팥·참깨·메밀·뽕나무·삼[麻]이요,
토공(土貢)은 꿀·밀[黃蠟]·지초·느타리[眞茸]이며,
약재(藥材)는 석창포(石菖浦)·복령(茯苓)·당귀(堂歸)요, 토산(土産)은 송이[松茸]·산개(山芥)·
신감초(辛甘草)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니, 부(府) 서쪽 골바리[高乙波里]에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1이니, 부(府) 동쪽 송리(松里)에 있다. 【모든 하품(下品)이다.】
강무장(講武場)이 부 북쪽에 있다.
【땅이 넓고 사람이 드물어서, 새와 짐승이 함께 있으므로,
강무(講武)하는 곳으로 삼고, 지키는 사람과 망패(網牌)106) 90명을 두었다.】
고석정 옛터[孤石亭古基]는 부 동쪽에 있다.
역(驛)이 2이니, 용담(龍潭)·풍전(豐田)이요,
【금상(今上) 6년 갑진 3월에 풍천(楓川)과 전원(田原) 2역(驛)을 합쳐서 풍전이라 하였다.】
봉화가 2곳이니, 소이산(所伊山)은 부(府) 서쪽에 있고,
【북쪽으로 평강(平康) 서리바미[霜伊所山]에 응하고, 남쪽으로 혜재곡(惠才谷)에 응한다.】
혜재곡(惠才谷)은 부(府)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영평(永平) 미로곡(彌老谷)에 응한다.】
관할은 군(郡)이 1이니, 삭녕(朔寧)이요,
현(縣)이 6이니, 영평(永平)·장단(長湍)·안협(安峽)·임강(臨江)·마전(麻田)·연천(漣川)이다.
[註 105]경술 : 2년.
[註 106]망패(網牌) : 포수.
The Hunt / BrunuhVil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