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三韓山斗, 심양의 삼학사 유적(자료정리)

이름없는풀뿌리 2022. 9. 11. 06:58
□ 三韓山斗, 심양의 삼학사 유적 1) 심양의 삼학사비 설화 요약 - 홍타이지가 비록 적이지만 충절심은 본받을 만 하니 -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三韓山斗"라는 碑를 세워주라 함. '삼한'은 조선을, '산두'는 태산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절개가 뛰어난 인물, 즉 삼학사를 칭송한 말임. 2) 삼학사비의 1차 멸실 - 그 碑가 淸朝 末까지 전해지다가 - 국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청조문화 말살정책에 따라 훼손 유실. 3) 삼학사비 碑頭 발견 - 만주국 세워지고 조선인의 移住 많아져 일제가 영사 개설 - 봉천총영사관 부영사 吳斗煥(오달제 후손)이 심양 근무 하면서 - 중국인에게 비석 이야기 듣고 백방 수소문, 碑身이 없는 비두 발견. 4) 중수 삼학사비 건립 - 1935 조선인 성금으로 중수삼학사비 건립(비문 黃潤德, 글씨 金九經) - 1935 삼학사유적보존회 중간삼학사전 발간. 5) 삼학사비 2차 멸실 - 1966 홍위병에 의해 구시대 잔재라며 멸실. 6) 중수삼학사비 발견과 복제품(재중수삼학사비) 건립 - 1980년 말 두 동강난 중수삼학사비 발견(심양소재 발해대학 역사관 보관) - 현재 발해대학 교정에 계룡장학재단 후원으로 복제품 건립. 7) 청태종실록, 만문노당등 관련 문헌 고증은 안 되고 구전 설화임. ◯ 병자호란의 삼충사(三忠士) 호국정충비(護國精忠碑) 발견 청태종이 감동하여 세웠던 것, 봉천 북시장 보령서 / <매일신보> 1933년 5월 12일자 ▲ <매일신보> 1933년 5월 12일에 수록된 "병자호란의 삼충사, 호국정충비 발견, 청대종이 감동하여 세웠던 것, 봉천 북시장 보령서" 제목의 기사이다. [봉천발] 지금으로부터 약3백년 된 이조시대 삼충사(三忠士)의 석비(石碑)가 뜻밖에 봉천(奉天)에서 발견되었는데 청사(淸史)를 뒤져본 바 봉천 총영사관 오부영사(奉天 總領事館 吳副領事), 관동군 윤대위(關東軍 尹大尉)의 조상인 것이 판명되었다. 지난 5일 십간방(十間房) 중일어강습소 황윤덕(中日語講習所 黃潤德)씨가 북시장 보령(北市場 保寧)의 일각에 '삼한산두(三韓山斗)'라 새긴 풍우에 닳은 약 3백년전 석비를 발견하고 청조유사(淸朝遺史), 청사통독연의(淸史通讀演議), 배도잡기(陪都雜記)를 조사한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이 판명되었다. 지금으로부터 2백98년전 당시의 한국 황제 이조인조(李朝仁祖)의 시대에 청태종(太宗)이 조선을 공격하여 경성을 함락하였을 때에 제 왕상(王上)을 필두로 대관은 모두 피난하였었다. 그러나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모(洪翼謨, 漢의 착오)의 삼학사(三學士)는 완강히 부동하여 고성(孤城)을 지키고 농성(籠城)하였었다. 그러나 다른 군사는 중과부적으로 드디어 청국에게 항복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던 바 청조는 그때 이 3명을 인질(人質)로 하여서 봉천으로 호송하여 3명에게 항복하기를 계속하였으나 죽음으로 결심한 3명은 이를 질기지 않고 결국 사형에 처하였었다. 청의 태종은 이 소문을 듣고 적이지만은 일군(一君)을 섬기는 애국심정에 깊이 감복하여 청사에 기하고 석비를 봉천성서(奉天城西)의 적은 절에 세워 정중히 그 영을 제사한 것이었었다. 황씨는 전기 석비를 강습소 내에 보관하고 있는 바 불원간에 동지와 같이 북시장공원(北市場公園)의 일부에 이를 세워서 영원히 지사의 기념으로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 인조 당년(仁祖 當年)의 삼학사(三學士) 봉천(奉天)에서 비석(碑石) 발견 청태종(淸太宗)에 굴복(屈服)않고 장열(壯烈)한 최후(最後) 충혼의백(忠魂毅魄)의 옛자취 / <동아일보> 1933년 5월 13일자 ▲ <동아일보> 1933년 5월 13일자에 수록된 "삼학사 비석" 관련보도이다. 지난 5일 봉천(奉天) 십간방 일중어강습소 소장 황육덕(黃肉德, 황윤덕의 오기)씨는 북시장(北市場) 보선사(保○寺) 문전에서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긴 중동 부러진 비석 한 개를 파내었다. 이 비석은 용을 조각한 훌륭한 비석이나 바람과 비에 닳고 낡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관계로 그 조각면이 확실히 남아 있지 아니 하였다. 그러나 삼한산두의 넉자 만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어 그 당시 사적을 역력히 말하고 있었다 한다. 이 비석인즉 인조(仁祖)의 충신열사 삼학사(三學士)의 유적이다. 지금으로부터 298년전 인조시에 청태종(淸太宗)이 조선과 친선을 맺고자 누차 조선에 사신을 보내었으나 명조(明朝)와의 관계로 이것을 듣지 아니하여 마침 태종은 대병을 거느리고 병자년(丙子年) 섯달에 왕성를 범하였다. 이때 인조께서는 신하와 종친을 데리시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피하시니 때의 형세는 그야말로 사직(社稷)의 흥망을 재촉하는 것 같았다. 형세가 이에 미치매 조정에는 화전양론이 대치되었는데 당시 김청음(金淸陰) 정동계(鄭桐溪) 등 중신과 홍익한(洪翼漢)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등 삼학사가 화친은 항복을 말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반대하였다. 그러나 세 이미 불리하여 화친할 도리 이외에는 좌이대사하는 수밖에 없었으니 청병에게 당하는 백성의 욕은 나날이 심하여 갔으므로 하는 수 없이 청조와과 화친을 맺었다. 이 굴욕의 화친은 왕자 두 분과 화친을 반대하던 삼학사를 배도(陪都) (지금 봉천)로 보내고 말았으니 왕자 두 분은 현재 봉천교섭처(奉天交涉處)인 질관(質館)에 계시게 하고 삼학사는 옥에 넣었다. 그러고 삼학사를 백방으로 달래기도 하고 갖은 악형도 하여 항복을 하라고 하였으나 결국 듣지 아니하여 참하여 버리었다. 이 삼학사의 장열한 충절은 그 후 청조유사(淸朝遺事), 동화록(東華錄), 청사(淸史), 청사통속연의(淸史通俗演義), 배도잡기(陪都雜記) 등에 명기되어 역사로, 소설로, 연극으로 삼학사의 사적은 전하여왔다. 뿐 아니라 당시 청조에서는 삼학사의 절개를 경앙하고 또 자국민의 절의를 장려하기 위하여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은 절개라고 봉천 성서소사(城西小寺) 부근에 묘(廟)를 짓고 전기 삼한산두라고 새긴 석비를 세워 춘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 삼학사의 비가 청조가 망하자 돌아보는 사람없이 20여년 동안을 땅속에 묻히어 있다가 우연히 조선인의 손으로 발굴되었는데 황씨는 봉천의 유지들과 의론하고 이 비석을 목하 황씨의 강습소로 옮기어 두었는데 앞으로 북시장 공원에 삼학사비를 다시 세워 오래, 오래 지사의 혼을 기념할 터이라는데, 현재 봉천총영사관 부영사 오두환(吳斗煥)씨와 관동군사령부의 윤상필(尹相弼) 대위가 이 삼학사 오달제, 윤집의 후손이라고 한다. (사진은 삼학사 충열비 비문) ◯ 삼학사 유적 보존회 창립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3일자 ▲ <조선중앙일보> 1934년 6월 3일자에 보도된 "삼학사 유적 보존회 창립" 관련 기사이다. ◯ 重刊 三學士傳 삼한산두비 자료 이와 관련하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는 다음과 같은 자료가 남아 있다고 하는데, 여기에 정리된 내용을 보면 '삼한산두'비가 발견된 경위와 그 후 '중건비'를 세운 내력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重刊 三學士傳 <想白 古 923. 251 So 58j2> 金九經 編, 1935年 1책(47장), 활자본, 26. 2×15cm. 김구경(金九經)이 1932년 심양(瀋陽)에서 오달제(吳達濟)의 후손인 오두환(吳斗煥)을 만나 오달제의 유고(遺稿) 2책(冊)을 보고, 그와 함께 여러 전적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심양 일대의 삼학사의 유적을 찾아 나섰다가 "三韓山斗"라고 씌여진 비액(碑額)을 발견하여 삼학사유적보존회(三學士遺蹟保存會)를 발기한 후 새로 비석을 세우고(奉天 春日公園 內) 송시열의 <三學士傳>과 남구만이 찬한 오달제의 유사를 합하여 1책으로 만든 것이다. 편자가 실록을 확인하여 붙인 세주가 있다. 김구경은 효종 때 삼학사의 추증을 건의하였던 김시진(金始振)의 10대손이다. 권수(卷首)에 <原碑額圖像>이 있고 金九經이 쓴 <重刊序文>과 황윤덕(黃潤德)이 찬한 <重修三學士碑記>가 있다. 삼학사비(三學士碑)는 청(淸)에서 삼학사(三學士)의 절의를 기려서 세운 비석으로 삼한(三韓)은 조선(朝鮮)을 가리키고, 산두(山斗)라 함은 절의가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음을 일컬은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청인(淸人)의 <질사>에 실려있고 이를 토대로 하여 [삼학사비]를 발굴해 내게 되었다. 이어 <洪掌令翼漢傳>, <尹校理集傳>, <吳修撰達濟傳> (附宋尤菴跋文) 등 송시열이 찬한 삼학사전(三學士傳)이 실려있고, <吳學士遺事> (南一星 撰), <附南藥泉跋文>이 있다. 권말(卷末)에 <三學士遺蹟保存會會員錄>이라 하여 발기인 8인과 찬조회원, 특별회원, 보통회원의 명단이 있다. 회원명단에는 일본인도 수명 포함되어 있다. (김지영) 최근의 몇몇 보도자료에 따르면, 1936년엔가 세워졌다는 '삼학사 유적비(중수비)'는 두 동강이 난 채로 발견되어 발해대학 구내에 옮겨졌다는 소식이 알려졌으나, 정작 '삼한산두'비의 행방을 알려주는 내용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다. 이 비석은 그 후 어떻게 된 것일까? ◯ 중(中) 선양 '삼학사비' 두동강난채 방치 [연합뉴스 2001-08-09 07:01] (선양=연합뉴스) 김종우 기자 = 병자호란때 청나라에 끝까지 항거한 오달제, 윤집, 홍익한 등 '삼학사(三學士)'를 기리는 비석이 만주땅에 망가진 채 방치돼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중국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시 발해대학 교정내 두 동강 난 채 방치돼 있는 삼학사비는 높이 1.5m, 폭 60㎝ 크기로, '삼학사는 절개로써 민족혼을 지켰다'는 내용의 한자 1천여자가 음각돼 있고, 뒷면에는 한글로 '삼학사 유적비'라고 적혀있다. 비문의 글은 `창원 황윤덕'이 짓고, 글씨는 `경주 김구경'이 쓴 것으로 돼있다. 발해대학 학장인 천문갑(千文甲.61)이사장에 따르면 이 비석은 1936년 병자호란 300돌을 기려 우리 동포 120여명이 선양시 춘일공원에 건립한 것이다. 당시 우리 동포들은 항일운동의 거점도시였던 봉천(선양의 옛이름)에서 조국독립을 염원하며 이 비석을 세웠다. 그러나 1966년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불면서 홍위병들이 이 비석을 선양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강인 혼하(渾河)에 내다버렸고, 이후 이를 발견한 중국인이 주춧돌로 사용하려다 조선사람이 세운 것임을 알고 당국에 신고했다. 당시 랴오닝대 교수이자 중국 과학자협회 부이사장이던 천 이사장 등은 이 사실을 알고, 이 비석을 중국인으로부터 인민폐 5천위안(미화 1천달러)을 주고 구입, 현재 위치에 갖다놓았다. 천 이사장은 9일 "앞으로 이 비석을 복원하고, 옆에 소나무와 전각을 세워 삼학사의 충절과 기개를 되살리도록 할 계획"이라며 "12만위안(한화 2천여만원)만 있으면 복원을 할 수 있을 것"이라며 국내 독지가의 관심을 호소했다. (끝) (정리: 2004.12.19, 이순우, http://cafe.daum.net/distorted) ◯ [중국 속의 한국사 기행] 삼학사와 60만 조선 인질의 억울한 혼백은 어디에… 조선 백성의 깊은 상처 숨겨진 요령성 심양 지해범 소장 / 입력 2010.10.29 03:02 중국 요령성(遼寧省) 심양시(沈陽市) 중심가에서 20여㎞ 떨어진 화평구(和平區) 경새로(競賽路)에는 3년제 직업대학인 '요령발해전수학원(遼寧渤海專修學院)'이 있다. 지난 1992년 설립된 이 대학 교정에는 다른 대학에서 보기 힘든 '삼학사 유적비'가 서 있다. 삼학사(三學士)란 병자호란 때 청(淸)과의 화의에 반대하고 항전을 주장하다 청에 끌려가 목숨을 잃은 홍익한(洪翼漢)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 세 분을 말한다. '삼학사 유적비'의 비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 조선은 단군이 처음 나라의 기틀을 세웠고 기자가 강역을 열었다. 풍속이 충효를 숭상하고 선비들은 인의에 도타우니 예로부터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져 왔다. 인조 14년 병자년 겨울 청 태종이 조선을 침략했다. 남한산성의 형세가 위태롭자 조정에서는 강화를 청하자는 의논이 있었다. 이때 대간 홍익한, 교리 윤집, 수찬 오달제는 대의를 부르짖으며 화의를 배척했다.' 유적비는 높이 1.5m, 폭 60㎝ 크기로 전면에는 삼학사의 행적을 기리는 1000여자의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이를 한글로 풀이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문에는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척화의 수괴'로 지목된 삼학사가 심양에 끌려와 청조의 온갖 회유와 형벌에도 굴하지 않다가 이듬해(1637년) 3월 소현세자가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아 죽은 사실이 적혀 있다. 당시 청 태종은 비록 삼학사를 죽였지만 그들의 높은 절개를 기리고 백성들이 본받게 하기 위해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를 내리고 심양성 서문 밖에 사당을 짓고 비석을 세우게 했다. '삼한'은 조선을, '산두'는 태산북두를 뜻하는 것으로 조선에서 절개가 뛰어난 인물, 즉 삼학사를 칭송한 말이다. ①심양 발해학원 교내에 건립된 삼학사비. ②심양관으로 추정되는 건물. 지금은 아동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③지난 2005년 심양 발해학원에 건립된 학사정 앞에서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 (앞줄 오른쪽에서 5번째) 등이 낙성식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_계룡건설 제공 ④인조가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를 행하는 장면을 담은 삼전도비 동판. ◆후손들이 살려낸 삼학사의 정신 발해학원 교정에 세워진 유적비는 사실은 진본이 아니다. 진본은 대학 구내에 마련된 삼학사비 자료실에 두 동강이 난 채로 보관돼 있다. 유적비가 조성된 것은 1935년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금으로부터 70년이나 더 된 비문이 어떻게 18년 역사의 발해학원에 보관돼 있는 것이며, 또 두 동강이 나게 된 것일까. 먼저 병자호란이 발발한 400년 전으로 돌아가 보자. 1616년 중국 동북지방에는 만주족이 중심이 된 후금(後金·청)이 들어선다. 후금과 조선은 광해군이 유연한 외교정책을 편 덕분에 한동안 평화롭게 지냈다. 그러나 후임인 인조는 '향명배금(向明排金·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함)'을 표방하여 후금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에 금은 1627년 1차 조선 원정[정묘호란]을 개시해 개성을 점령하고 조선으로부터 '형제지국'의 맹약을 받아낸다. 그 후 후금이 명의 수도인 북경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전비와 병력을 요구하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격하할 것을 강요하자, 인조는 이를 거부하고 항전 의지를 굳힌다. 홍타이지(태종)는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그해 말 10만 병력을 이끌고 조선 원정길[병자호란]에 오른다. 청군이 압록강을 넘은 사실을 4일 뒤에야 안 인조는 화급히 수비부대를 편성해 보지만 파죽지세로 밀고 오는 청군을 막지 못해 남한산성으로 피란하게 된다.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한 가운데 1만3000명의 병력으로 저항하던 인조는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사와 백성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고 화친파의 주장에 따라 이듬해 1월 30일 삼전도에 나가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이마를 땅에 찧는(三拜九叩頭)' 굴욕적인 항복의 예를 하게 된다. 전승을 기리는 '대청황제공덕비'를 삼전도에 남긴 청군은 삼학사를 인질로 잡아가 끝내 죽였으나, 청 태종은 이들의 절개를 높이 사 사당과 비석을 세운 사실이 청대의 야사인 '질사(�史)'란 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유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삼학사비를 찾아 나선 것은 그로부터 300년이 흐른 뒤 만주에 살던 조선족 동포와 삼학사 후손들이었다. '삼학사 유적비'는 이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교외에서 옛일을 조사하는데, 감개한 탄식을 이길 수 없었다. 마을의 고로에게 물어보니 심양성 서문 밖 세 분이 순절한 곳 곁에 작은 절이 있었는데, 조선의 세 분 절사를 모신 사당으로 전해진다고 하였다. 지금의 북시장(北市場) 보령사(保靈寺) 근처이다. 얼마 안 있어 절문 앞 눈구덩이 속에서 비액(碑額) 하나를 찾았는데 글자를 새긴 흔적이 있었다. 흙을 씻어내고 보니 '삼한삼두' 넉 자가 찬연하니 질사의 내용과 서로 딱 맞았다." 후손들은 비신(碑身)을 찾지는 못했지만 비액을 기초로 하여 비석을 복원한 뒤 심양 춘일(春日)공원 양지바른 곳에 세웠다. 중수비 맨 아래에는 '이조 병자년으로부터 300년이 지난 을해년(1935년) 봄 3월에 창원 황윤덕이 삼가 짓고 경주 김구경이 삼가 쓰다'라고 내역을 적고 있다. 영원히 땅에 묻힐 뻔한 삼학사의 정신을 후손들이 살려낸 것이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복원한 이 비석마저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에 의해 수난을 당했다. 비석은 두 조각이 나 혼하((渾河)에 버려져 소실되고 만 것이다. 훗날 이를 알고 비석을 찾아나선 요령대학의 천문갑 교수 [훗날 발해학원을 세웠으나 2009년 위암으로 별세]는 중국인의 집 주춧돌로 쓰이고 있는 비석을 발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인 5000위안을 주고 구입하였다가, 지난 2005년 한국의 이인구 계룡건설 회장 등의 도움으로 지금의 대학 구내에 원비문은 보관하고, 이를 모조한 비석을 세운 것이다. 똑같은 비석이 지난 2005년 독립기념관에도 세워져 만주를 떠돌던 삼학사의 혼백은 370여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와 안식하게 됐다. ◆백성들에게 더 가혹했던 병자호란 당시 삼학사와 함께 청나라로 끌려온 봉림대군(효종)과 소현세자가 머물렀던 심양관(沈陽館)의 흔적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심양시 심하구(沈河區) 조양가(朝陽街) 131호에 있는 심양시소년아동도서관이 그것이다. 기와 지붕의 모양이 중국의 전통 건축과 다른 모양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강점기 이곳은 일본 만철(滿鐵)출장소와 봉천영사관 등으로 쓰이다가 2차대전 종전 이후 시립아동도서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병자호란의 상처는 조정보다 백성들이 더 컸다. 청군은 항복의 조건 중 하나로 군이 잡은 포로를 돈을 내고 데려갈 것을 강요했다. 청이 제시한 항복문 8항은 이렇게 되어 있다. '군에 포로가 된 자는 합법적으로 돌아오는 자를 제외하고는 조선이 모두 잡아서 청으로 보낸다. 조선에 와서 또는 귀화해서 사는 한인(漢人)이나 여진인은 모두 잡아서 청나라로 보낸다. 27일 이전에 잡힌 자는 심양으로 보내고 그 이후에 잡힌 자는 석방한다.' 이에 따라 포로를 잡으면 돈이 된다는 것을 안 청군은 철수하는 동안 포로 사냥에 혈안이 되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잡아갔다. 김영삼 정부 시절 문화체육부 장관을 지낸 주돈식씨는 지난 2007년 펴낸 '조선인 60만 노예가 되다'에서 당시 심양으로 끌려간 포로가 60만명에 달한다고 밝혔다. 그 근거로 주화파였던 최명길이 '지천집(遲川集)'에서 '청군이 조선 왕의 항복을 받고 정축년 2월15일 한강을 건널 때 포로로 잡힌 인구가 무려 50여만명이었다'라고 한 것을 들고 있다. 또 왕의 부식을 조달한 나만갑이 기록한 '남한일기(南韓日記)'에도 '뒷날 심양에서 속환한 사람이 60만명이나 되는데 몽고 군대에서 포로가 된 자는 포함되지 않았다니 그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 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청은 당시 압도적으로 인구가 많은 명(明)을 치기 위해서는 단기간에 많은 병력과 노동력이 필요해 이토록 많은 인질을 잡아간 것으로 보인다. 추운 겨울에 맨발로 끌려간 조선인은 양반·평민 할 것 없이 만주족의 노예로 전락하여 심양의 상설 노예시장에서 매매되었다. 이중 돈 많은 양반집 가족은 거액의 속환금을 내고 풀려났으나, 이들이 빨리 빼내려는 욕심에 속환금을 한꺼번에 올리는 바람에 돈 없는 백성들은 더욱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몰래 탈출하다가 붙잡혀 매 맞거나 불구가 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고향 땅에 돌아온 조선의 여성들은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다'며 '환향녀(還鄕女)'라는 딱지를 붙여 내쫓는 조선의 남성 중심 문화 앞에 또 한 번 좌절해야 했다. 심양시 9·18사변기념관 부근에 가면 '류조호(柳條湖)'라는 지명이 있다. 이름은 '호수'인데 주변 어디를 봐도 호수가 없다. 요령성 민족사를 연구해온 요령조선문보 오지훈 기자는 "병자호란 당시 이 지역에 제법 큰 호수가 있었는데, 노예로 잡혀온 조선인들이 고통을 견디지 못해 수없이 빠져 죽었다는 얘기가 전해온다"고 말했다. 한 70대 주민은 "60년대까지도 이 주변은 움푹 파인 땅이었으나 개혁·개방 이후 도로가 생겨 그 흔적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한 나라 지도부의 무능으로 졸지에 노예로 전락한 조선의 백성들은 억울한 삶을 이국땅에서 마감했으나, 지금 이들을 기억하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심양 서탑거리는 오늘도 한국인으로 붐빈다. ◯ 청태종 세운 삼학사비, 시대 따라 방치·훼손→중수→소실→재중수 기획취재역사의 맥을 잇다 평택 지역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587호] 2011년 10월 05일 (수) 15:02:45 김혜경 기자 khk0919@pttimes.com ▲ 2005년 경기도 성남시 발해대학후원회와 계룡건설장학재단에 의해 세워진 ‘삼학사재중수비’와 요녕발해전수학원내 전시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중수삼학사비’. 삼학사 기개 높이 산 청 황제, 비 세우고 대 이어 제사 지내게 청 망하면서 땅에 묻혔다. 1933년 조선족 유지들 힘 모아 중수 공산 혁명 때 다른 역사유물과 함께 두 조각으로 부서져 소실 우여곡절 끝에 발해대학 전시…재중수비는 독립기념관 전시돼 글 싣는 순서 1회 삼학사를 통해 찾는 지역정신의 뿌리 ① - 우리는 그들의 어떤 정신을 이어받을 수 있나 2회 삼학사를 통해 찾는 지역정신의 뿌리 ② - 평택, 용인, 성남, 광주 등 지역사회가 기억하는 삼학사 3회 삼학사를 통해 찾는 지역정신의 뿌리 ③ -중국 심양 중산공원, 요녕발해전수학원 삼학사유적비 4회 평택에서 이어지는 민세 안재홍 선생의 물줄기 5회 <조선상고사감>과 한국고대사 인식의 정신적 가치 6회 한국 독립운동가의 요람 신흥무관학교 7회 평택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원심창’ 그는 누구인가? 8회 구파 백정기 기념관을 통해 바라본 ‘민세 공원’ 9회 ‘보훈도시’ 평택의 가능성과 장소마케팅 전략의 비전 10회 우리는 이들의 어떤 정신을 이어받아야 하는가? 평택은 경쟁력 있는 도시로의 도약을 꿈꾸며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급속한 변화의 물살에서 평택은 역사성과 정체성, 그리고 지역정신을 확립해야할 필요성이 있다. 이 세 가지를 확립한다는 것은 지방자치시대를 선도할 수 있는 문화적 기반을 단단히 하는 것이다. 국내외 기획취재를 통해 평택출신 삼학사의 선비정신을 조명하고, 민세 안재홍 선생의 다사리 정신, 아나키스트 원심창의 불굴의 의지, 원균 장군, 이대원 장군 등 우리지역 조상의 사상을 시민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지역정신이 뿌리와 미래비전이란 무엇인가? 그것을 이어받으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솔직하게 털어놓으려고 한다. <편집자주> 중국 요녕성의 수도로서 경제·물류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는 도시인 심양(선양). 삼학사(홍익한·오달제·윤집)의 정신을 따라 조선의 역사를 되짚어보니 취재차 들린 심양은 꽤나 가슴이 아팠다. 때마침 영화 <최종병기 활>에서 청나라에 의해 포로로 잡혀가는 조선인들을 보고 있으니 안타까운 마음은 더욱 극대화됐다. (심양엔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태종의 묘가 있다) 심양 곳곳을 돌아다녔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해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한 후 소현세자, 봉림대군(인조의 차남·효종), 삼학사 등의 인질과 60만 명의 전쟁포로가 강제로 끌려와 서러운 생활을 했던 곳이 바로 이곳인가. 삼학사는 지금의 중산공원에서 처형당했고, 전쟁포로가 된 백성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조선관에 머무르던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조선의 다리역할을 하며 청나라로 끌려온 백성들을 위해 온 힘을 아끼지 않았다. 요녕성발해대학 내 삼학사비전시관에서는 ‘속가와 화냥년 그리고 회절강(回節江)’에 대한 역사를 읽을 수 있다. 청나라의 노예로 잡혀간 사람들은 돈을 지불해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이들 중 여성은 속전(贖錢)을 물거나 도망쳐 고향으로 왔으나, 환향녀(還鄕女)들은 정절을 잃었다는 이유로 ‘화냥년’ 취급을 받았다.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진 여인들이라는 것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부녀자들이 잇달아 회절강(한강·금강·대동강 등)을 지정하기도 했다. 전쟁이 응당 그럴 테지만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갔다. ‘조선’이란 나라가 ‘대한한국’이라는 이름을 갖기까지 수많은 시간을 거쳐 온 만큼 심양에서도 변화의 바람은 거셌다. 심양 중산공원은 삼학사 처형당한 곳 심양엔 삼학사 관련 유적이 두 군데 존재한다. 중화로 남쪽에 있는 ‘중산공원’은 천태종 앞에서 조선의 충절을 부르짖으며 기개를 떨친 삼학사가 처형당한 장소다. 현재 이곳은 심양 주민들이 제일 많이 찾는 공원으로 변해있다. 아이들은 분수근처에서 물장구를 치고, 성인들은 각자 노래와 춤 연습을 하기에 바쁘다. 이곳에서 삼학사의 흔적을 찾을 순 없었다. 당연하지만 아쉬운 마음이 앞섰다. 삼학사의 정신이 시대의 풍파에 맥없이 스러졌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삼학사의 숨결과 정신을 기리는 후대의 마음이 그들을 다시 살아나게 했다. 현재 3년제 직업학교 요녕발해전수학원에서는 다른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삼학사재중수비(三學士再重修碑)’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이곳에 삼학사재중수비가 자리하게 된 연유는 길다. 1638년 청태종은 삼학사를 죽였지만 조선 왕의 신하로서 꺾지 않는 기개와 절의에 사당을 만들고 비를 세웠다. 이 내용은 청대의 야사인 ‘질사(史)’에 실려 있다. 청태종은 친히 삼한산두(三韓山斗·태산같이 높고 북두칠성 같이 빛나는)라는 휘호를 내리고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매년 제사를 지냈다. 청의 시대가 끝나고 세월이 흘렀다. 비를 기억하는 사람하나 없이 건물은 파손되고 비석은 땅속으로 사라졌다. 삼학사비는 1933년 다시 세상을 보게 된다. 당시 삼학사비 중수기사를 실었던 ‘동아일보’의 기사에 의하면 봉천 십간방 일중어강습소 소장 황육덕씨는 사당자리를 살펴보다 우연히 ‘삼한산두(三韓山斗)라고 새겨져 있는 부러진 비석 한 개를 파낸다. 용을 조각한 훌륭한 비석이었지만 바람과 비에 닳고 낡았을 뿐 아니라 오랫동안 땅속에 묻혔던 관계로 그 조각 면이 확실히 남아있지 않았다고 전한다. 비석을 황 씨의 강습소로 옮긴 후 1935년 8월7일 심양에 살고 있는 조선족 유지인사들을 모아 원래 비 머리는 그대로 사용하고 ‘인조 병자 300년이 지난 을해년(1935년) 춘삼월에’라고 새긴 ‘중수삼학사비’는 그해 10월27일 춘일공원 양지바른 언덕에 다시 세웠다. 오래가지 않았다. 모택동이 중국을 지배하면서 반대파를 숙청하고 지식인들을 죽이고, 역사적인 것들을 없애는 과정에서 두 조각으로 부서져 혼하(渾河)에 버려져 소실된다. 집 지을 주춧돌로 사용될 뻔하기도 이후 비신을 발견한 중국인이 주춧돌로 사용하려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문 밖에 내놓았다. 지나던 조선족 교원이 이를 보고 비를 보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심양 고궁박물관은 중국에 대한 역사가 아니라며 거부했다. 훗날 이를 알고 비석을 찾아 나선 요녕발해전수학 천문갑 교수 (당시 요녕대 교수이자 중국과학자협회 부이사장/2009년 별세)가 이를 알고 5천 위안을 주고 구입해 발해대학에 가져다 놓았다. 1997년 경기도 성남시에서는 남한산성을 학술적으로 재조명하면서 삼학사의 정신선양도 물위로 떠오르게 됐다. 광주문화원과 성남문화원의 연대가 이뤄졌고, 광주문화원은 현절사에서 삼학사추모제를 치르게 되었다. 2004년 허창무, 신청, 고재혁, 서학선을 주축으로 요녕발해대학후원회를 결성했다. 훼손된 중수삼학사비의 복원을 활발히 논의하던 중 계룡건설장학재단이 후원해 2005년 삼학사재중수비와 학사정을 세우고, 중수삼학사비는 발해대학 내 전시하게 됐다. 또 하나의 삼학사재중수비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있다. 발해대학 내 전시관 앞에는 이곳을 들른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그들은 이곳에 살아있는 삼학사의 정신을 배우고, 더 발전하기를 바라는 기대를 남겨두고 또 다른 역사의 물줄기를 찾아 떠난다. ☞ 꼭 알아야 하는 사실 한 가지 병자호란 직후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는 ‘조선관(고려관·심양관이라고도 한다)’에 머물며 청나라와 조선을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했다. 그간 소현세자와 조선인들이 머물던 조선관은 현 심양아동도서관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아동도서관 관계자를 통해 그동안 소현세자가 머물던 ‘조선관’은 이곳에서 200m떨어진 곳이라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됐다. 현재 그 자리엔 유치원 건물이 들어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