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오달제(吳達濟)집중 해부(자료 정리)

이름없는풀뿌리 2022. 9. 12. 20:59
□ 오달제(吳達濟) 집중 해부 1) 1609(광해1) 한양 출, 1637(인조15) 심양 서문 29세 卒 2) 海州 吳氏, 용인 원삼면 학일리 오윤해(吳允諧) 3남중 막내 3) 伯父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1559년 ~ 1636년)에게서 사사 4) 오윤겸은 성혼(成渾) 門人, 성리학 대가, 인조조 영의정까지 오름 5) 1625(인조3) 17세 신득연女 고령신씨 초혼, 1633 임신중 병사 6) 1627(인조5) 19세 사마시 합격 7) 1634(인조12) 백형 부임지 함경도 고원 방문 愛花 만남, 吳道南 출생 8) 1634(인조12) 26세 현감 남식女 의령남씨(19세) 재혼 9) 1635(인조13) 27세 별시문과 장원급제 成均館 典籍, 兵曹 佐郞, 侍講院 司書, 司諫院 正言, 司憲府 持平 10) 1636(인조14) 28세 弘文館 修撰, 10월 副校理, 金→大淸 11) 상소로 사직 -> 칩거하다 남한산성으로 扈從 斥和波 : 明 부모나라, 임진년 도움 보은, 決戰 金尙憲, 鄭蘊, 尹煌, 尹宣擧, 洪翼漢, 吳達濟, 尹集, 金壽賢, 金益熙, 鄭雷卿, 李行佑, 洪瑑, 李禂 ⇒ 3학사만 압송(羅萬甲, 洪瑞鳳 건의) 主和波 : 崔鳴吉, 金瑬, 李貴 12) 1637(인조15) 01/28 29세 인조 하직인사 13) 01/29 출발, 형 達升과 이별, 14) 02/09 양화나루 건너며 형 達升에게 인편으로 편지 보냄 15) 대동강 도착 村家의 벽에 絶句 써놓음 ⇒ 전해지지 않음 집주인 종이 붓 구해 ⇒ 평양감영 ⇒ 政院 ⇒ 집에 전달(思親, 兄, 夫人) 16) 04/15 심양에서 급히 흘려 쓴 답장 간찰 17) 04/19 용골대 訊問 ⇒ 처자 데려다 살라는 회유(제신 朴潢, 宮官 李命雄) 용골대 6차 회유 ⇒ 흔들리는 윤집 설득 ⇒ 회유 뿌리치고 순직 선택 소현세자 陪從 鄭雷卿(弘文館校理) 시신 수습 거절 ⇒ 정뇌경 서찰 본가 전달 鄭雷卿(31세) : 남씨부인과 姨從間, 弘文館校理 陪從 ⇒ 質館 侍講院 文學 18) 1640(인조18) 明 밀통 혐의 최명길도 심양 압송 19) 1653(효종4) 홍익한(도승지), 윤집(부제학), 오달제(좌승지)추증 20) 1681(숙종7) 현절사 봉안, 1685 이조판서추증 21) 1686(숙종12) 홍익한(忠正), 윤집(忠貞), 오달제(忠烈) 시호 : 남구만(오달제 처조카)건의 22) 1697(숙종23) 봉사손 오수일 충렬공유고 편집 간행 □ 오달제(吳達濟1609.06.08~1637.05.13) 조선국 홍문관 수찬 본관 해주(海州) 학력 1634년(인조 12) 별시문과 장원 급제 경력 문관(사헌부 지평, 교리) 겸 정치가 부모 아버지 오윤해(吳允諧), 어머니 해주 최씨 부인(海州 崔氏 夫人) 배우자 초배 의령 남씨 계배 평산 신씨 자녀 아들 오도현(吳道玄), 오도남(吳道南) 친인척 양조부 오희문(吳希文) 친조부 오희인(吳希仁) 장인 남식(南烒) 장인 신득연(申得淵) 외조부 최형록(崔亨綠) 별명 자(字)는 계휘(季輝) 호(號)는 추담(秋潭)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오달제(吳達濟, 1609년 7월 8일(음력 6월 8일) 조선국 한성부 출생, 1637년 5월 13일(음력 4월 19일) 청나라 만저우 지방 펑톈 성 선양에서 사형 집행됨. 조선의 문신이다. 조선국 홍문관 수찬 등을 지냈다.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계휘(季輝), 호는 추담(秋潭),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이력 1634년(인조 1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 병조좌랑,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 정언(正言), 지평(持平), 수찬(修撰)을 거쳐, 1636년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청나라와의 화친을 위해 주화파 최명길(崔鳴吉) 등의 주장으로 사신을 교환하게 되자, 최명길을 탄핵하는 소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하였다. 이듬해 인조가 청에 항복하자, 화의를 반대한 죄로 윤집(尹集)·홍익한과 함께 청에 잡혀가 청나라로 끌려갔다. 적장 용골대(龍骨大)는 그의 뜻을 꺾기 위해 처자를 거느리고 청나라에 와 살라고 회유하였으나, 오달제는 죽음보다 두려운 것은 불의(不義)라고 하고 저들의 말을 좇으면 오랑캐가 되는 것이라 하여 끝까지 항변하여 마침내 심양성(瀋陽城) 서문 밖에서 윤집·홍익한(洪翼漢)과 함께 사형 집행되었다. 이후 이들을 삼학사(三學士)라 하여 절개와 충성을 높이 기리게 되었다. 영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내려 경기도 광주(廣州)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충청도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경상도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작품​ 묵매화(墨梅畫)에도 뛰어났는데, 어몽룡(魚夢龍)·조속(趙涑)·허목(許穆)의 화풍을 따르면서도 명나라의 묵매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 그림은 《묵매도(墨梅圖)》 2점이 전하며, 이러한 구도의 묵매화는 뒤의 조지운(趙之耘)·홍수주(洪受疇)·박동진(朴東晉)· 조희룡(趙熙龍)·이공우(李公愚) 등의 묵매화에 영향을 주었다. 가족 관계​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5세손. 5대조 오중노 고조부 오계선 증조부 오옥정(석성현감, 사섬시주부) 조부 오경민(장성현감, 사헌부감찰, 증의정부좌찬성) 1자오희문, 2자오희인(여주목사) 친부 오희문(선공감역, 증의정부영의정) 1자오윤겸, 2자오윤해, 3자오윤함) 친조부 : 오희인(吳希仁) - 아버지 오윤해의 생부 양조부 : 오희문(吳希文) - 아버지 오윤해의 양부 양조모 : 양사종(梁思終)의 딸 아버지 : 오윤해(吳允諧) 어머니 : 최형록(崔亨綠)의 딸 전처 : 남식(南烒)의 딸 후처 : 신득연(申得淵)의 딸 아들 : 오도현(吳道玄), 오도남(吳道南) 백부 오윤겸과의 관계 부친 오희문 정실 1자오달천(군수) 2자오달승 측실 3자오달주 4자오달원 5자오달사 숙부 오희인에게 동생 오윤해 양자 -오달제(오윤겸 조카, 증영의정) 그러므로 오달제에게 오윤겸은 백부, 쇄미록 저자 오희문은 친조부임. □ 명배신전(明陪臣傳) 오달제(吳達濟) 樂民(장달수) 추천 0 조회 2 20.01.28 강한집(江漢集) : 조선 후기 문신인 황경원(黃景源 : 1709~87)의 시문집. 32권 18책. 고활자본. 지은이 황경원이 죽은 뒤 1790년(정조 14)에 간행되었다. 저자는 영조·정조 때 이조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남유용과 더불어 우아하고 바른 고문을 쓰는 문장가로 알려졌다. 책 첫머리에 총목록이 있고, 조정에 올리는 소차, 친구 사이에 오간 서(書)와 송서, 남의 글에 부친 서문에는 지은이의 정치관이나 문학관이 나타나 있다. 잡저에는 〈서경 書經〉 홍범편(洪範篇)을 해설한 〈홍범전 洪範傳〉이 있고, 〈시경 詩經〉·〈대아 大雅〉의 내용에 대해 친구인 남유용에게 묻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송나라 황제와 신하에 대해 논한 글이 20편 실려 있다. 그는 조선 중기부터 당대에 이르는 허주(許紬)·이후백·정태화·임경업·윤근수·장유 등의 주요한 인물들의 삶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전에서는 명·청 교체시기에 절의를 지킨 임경업·홍익한·윤집 등의 전기를 모아 명배신전(明陪臣傳)을 만들었다. 4권은 명나라 황제의 조제를 들고 그에 대한 지은이의 견해를 실은 발미이다. 기록된 인물들의 삶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자료이다. 오달제(吳達濟) 자는 계휘(季輝)로 조선 해주(海州) 사람이다. 숭정 7년(1634, 인조12)에 갑과에 급제하였고,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이때 청인이 정삭(正朔)을 고치니 최명길이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화친을 맺기를 권하였다. 그러자 간원(諫院)에서 계를 올려 말하기를, “사신을 통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하니, 명길이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신하가 먼 앞날을 내다보는 생각을 갖지 않아서 국가를 망하게 한다면, 그 일이 비록 정당하다고 해도 그 죄는 피할 수 없습니다. 한탁주(韓侂冑)가 북쪽으로 금나라를 정벌하여 천하에 대의를 밝혔으나, 군자들은 오히려 탁주를 나무랐습니다. 그 뜻은 종묘사직이 중요하니 때를 보고 힘을 헤아려 때에 맞게 하는 것이 옳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건주에 대하여 송나라 두 황제와 같은 원수가 없으니, 건주와 화친하는 것에 대해 신은 그 불가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의논하는 자가 이르기를 ‘청이 이미 개원(改元)하였으니 사신을 통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만, 저 청인이 황제가 되고 안 되고는 전하께서 관여하실 바가 아닌데 어찌 예의로써 청인을 나무라겠습니까.” 왕이 그렇게 여기었다. 이때 간원(諫院)의 계(啓)가 그치지 않아 사자를 보낼 수가 없었다. 명길이 이르기를, “간원의 계가 비록 그치지 않더라도 사자는 마땅히 출발시켜야 합니다.”하니, 달제가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신이 듣기에 옛날에 간관이 시비를 다툴 때는 비록 임금의 지존으로도 꺾을 수 없고 공경의 귀중함으로도 그치게 할 수 없었다고 했으니,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공적인 일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저 최명길은 일개 간사한 신하입니다. 건주가 개원(改元)한 후에 사자를 보내기를 청하니, 간관이 탄핵을 하였는데도 명길은 스스로 주장을 굽히지 않고 말하기를 ‘언자(言者)가 비록 그치지 않는다 해도 사자는 마땅히 출발시켜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자고이래로 신하가 언자를 돌아보지 않고 독단하여 강행하는 술책으로 군주를 인도하는 자가 어디에 있었습니까? 원컨대 전하께서는 명길의 죄를 처벌하시어 신하의 절의를 엄히 하소서.” 왕은 달제를 매우 책망하고 즉시 사자를 출발시켜 청나라 조정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명길이 이로부터 매번 들어와 알현할 때마다 좌우를 물리치기를 청하고, 은밀히 왕에게 편의사(便宜事)를 말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들을 수가 없었다. 청인이 몰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맹약을 끊은 주모 신하를 요구하니, 오달제와 남원(南原) 윤집(尹集) 등 11명이 자수하고 가기를 청하였다. 형 달승(達升)이 달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너는 맹약을 깬 주모자가 아닌데 어찌 가기를 청하느냐?”하였다. 달제가, “이미 화친을 배척하였으니 구차스럽게 면할 수는 없습니다.”하니, 달승이 말리지 못하였다. 이때 문을 지키던 장사(將士)들이 왕궁에 육박하여 11명을 청나라 진영으로 내보내기를 재촉하니 궁중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명길이 장사들을 꾸짖으며 “어찌 신하의 예가 없는가?” 하였다. 김류가 달래어 말하기를, “11명을 마땅히 청나라 진영으로 보낼 것이니 너희들도 가라.” 하니 장사들이 조금 물러났다. 이에 김류가 왕에게 말하기를 “11명을 만일 다 보내지 않는다면 3군(三軍)의 노여움을 풀 수가 없습니다.”하니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김류가 또 11명을 묶어서 청나라 진영으로 보내도록 하니 간관들이 간쟁하였다. 김류가 하는 수 없이 두 사람만 보내기로 하였다. 부중(府中)에 앉아 보낼 사람을 정하였는데 박황(朴潢)이 말하기를, “윤집과 오달제 두 사람을 보내면 되겠습니다.” 하여 의논이 마침내 결정되었다. 윤집과 오달제가 장차 청나라 진영으로 가려고 할 때 왕이, “너희들은 나로 하여금 정도(正道)를 지키게 하려 했으나 지금 사지로 나아가게 되었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인가? 내가 너희들의 임금이 되어 너희들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구나.”하고 인하여 느껴 우니 눈물이 흘러내려 옷깃을 적시었다. 윤집과 오달제가 이르기를, “임금의 욕을 당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늘 죽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습니다. 지금 죽을 곳을 얻었는데 또 어찌 유감이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너희들은 모두 부모가 있느냐? 자식은 몇이냐”하니, 오달제가 대답하기를, “신은 모친이 있사온데 올해 칠순이옵고, 신의 처 남가(南家)는 임신해 있습니다.”하였다. 윤집이 대답하기를, “신은 할머니가 계시고 아들 셋이 있어 신의 형 계(棨)의 남양(南陽) 치소에 있사온데, 지금 남양이 무너져서 신은 그 생사를 알지 못합니다.”하였다. 김류가 근신을 시켜서 두 사람을 재촉하여 나가도록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찌 그리 심하게 다그치느냐?”하였다. 윤집이 “전하께서 성을 나가실 때는, 마땅히 세자를 머물러 두시어 군대를 다독거려서 혼란을 방지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왕이 탄식하며, “너희들은 가면 장차 죽을 것인데 오히려 사직을 위해 능히 걱정을 하니, 진정 충신이로다.” 하고 잔술[巵酒]을 내리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사직의 존망을 비록 알 수는 없으나 만일 하늘이 보우하사 다시 혈식(血食)을 올릴 수 있다면, 나는 마땅히 너희들의 처자를 돌보아 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하고는 마침내 통곡하였다. 윤집과 오달제가 절을 하고는 눈물이 흘러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어 성문을 나가지 못하였다. 밤에 달제가 관사(館舍)로 가서 목욕하였다. 달승이 그를 붙들고 밤새도록 눈물을 흘리니, 달제가 “마땅히 죽을 자리를 잃지 않았으니 형님은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였다. 이튿날 빈객들이 성의 서문에서 전송하였는데 통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성 안에서 바라본 사람들도 모두 눈물을 흘렸다. 윤집과 오달제가 청나라 진영에 이르자 흑간(黑干)이 두 사람을 형틀에 묶고 묻기를, “너희들이 짐을 두려워할 게 없다고 여겼다면, 짐의 군대가 왔을 때 어찌 참전하지 않고 도리어 초라한 몰골로 붙잡혀 있는 것이냐?” 하므로, 윤집과 오달제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우리나라가 명나라 천자를 부모로 섬긴 지 또한 300여 년이 되었다. 만력(萬曆) 때, 평수길(平秀吉)이 난을 일으켜 우리 선왕께서 의주(義州)로 피난을 가시게 되니, 명나라 천자께서 대장군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해 주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신민(臣民)들은 오직 명나라 천자만이 있음을 알 뿐이다. 너희 나라가 처음에 황제의 칭호를 훔쳤으므로 우리 왕이 더불어 관계를 끊었는데, 얼마 안 되어 다시 사자를 통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그 불가함을 말했을 뿐이다. 다툰 바는 의리였지 성패(成敗)와 존망(存亡)은 논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청인이 다시 묻기를, “너희들의 이름은 전에 들은 바가 없으니, 자세히 사실대로 대답한다면 너희들은 죽음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하니, 윤집과 오달제가 대답하기를, “우리나라에서 이미 우리 두 사람을 보내었으니, 맹약을 끊은 주모자로 다른 신하는 없다.” 하였다. 청인이 회유하여 말하기를, “지금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나중에 비록 후회한들 어찌 할 수 있겠는가.”하였으나, 윤집과 오달제는, “빨리 나의 머리를 베어라.”하고 다시 말하지 않았다. 이윽고 청인이 그 결박을 풀어주고 군중에 구류하였다. 이틀 후 청군이 포위를 풀고 마침내 오달제와 윤집을 잡아 돌아갔다. 윤집이 오달제에게, “치욕을 당하며 오랑캐 나라에서 죽기보다는 차라리 우리나라에서 죽는 게 낫겠습니다.” 하니, 달제가 “안됩니다. 죽는 것은 같으나 오랑캐 나라에서 죽는 것은 나의 의리를 밝히는 것이니 어찌 즐겁지 않겠습니까. 지금 하루아침의 치욕을 참지 못하여 필부의 절개를 본받으려 하십니까?”하자, 윤집이 “그대의 말씀이 옳습니다.”하고 마침내 죽지 않고 심양(瀋陽)에 이르러 별관에 갇혔다. 닷새가 지나 청인이 장군을 시켜 별관으로 가게 하여 윤집과 오달제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은 주모자가 아니니 반드시 죽이지는 않을 것이고 또한 장차 벼슬을 줄 것이다.” 하였다. 윤집과 오달제가 말하기를, “의리상 다른 나라에서 벼슬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니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할 따름이다.” 하니, 장군이 화를 내어 가버렸다. 윤집과 오달제가 그 종에게, “오늘 오랑캐가 반드시 나를 죽일 것이다.”하니, 종이 울며, “어찌 잠시 그 말을 따르지 않으십니까?”하니, 윤집과 오달제가 웃으며, “몸을 굽히는 치욕은 죽기보다 더한 것인데, 이는 네가 알 바가 아니다.”하였다. 한참 있다가 장군이 다시 나와서 항복하라고 위협하였다. 윤집과 오달제는 죽기를 각오하고 거부하여 따르지 않다가 마침내 심양의 서문 밖으로 끌려 나갔는데, 그 죽음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오달제는 그 때 28세였다. 시호를 충렬(忠烈)이라 하였다. 오달제의 처 남씨는 앞서 임신을 하였는데 때가 되어 딸을 낳았다. 충량과(忠良科) 樂民(장달수) 추천 0 조회 3 20.01.17 00:11 댓글 0 병자호란 때 충절을 지킨 신하들을 기리고 후손을 위무하기 위하여 실시한 과거. 1764년(영조 40년)에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거하다가 순절한 충신들의 충절을 기리고 그 후손들을 위로할 목적으로 실시하였다. 응시 자격은 현절사(顯節祠)와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된 사람의 후손과 귀화한 명나라 사람의 후예에만 주었다. 충량과는 영조 대에만 설행되었다. 1764년(영조 40) 영조는 병자호란 때 충절을 지킨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 후손들을 위무하기 위하여 과거를 설행하여 과거의 명칭을 충량과라 하였다. 충량과에는 현절사와 충렬사에 배향된 충신의 후손과 명나라 사람의 후손만 응시하도록 하였다[『영조실록』 40년 1월 20일]. 남한산성에 있는 현절사는 병자호란 때 척화(斥和)를 주장한 삼학사인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와 김상헌(金尙憲)과 정온(鄭蘊)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곳이다. 충렬사는 강화도가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김상용(金尙容)이 봉안된 곳이었다. 2월 8일에 충량과를 설행하여 김노순(金魯淳)·김장행(金章行)·김이소(金履素) 3명을 급제시켰다. 김노순은 김상용의 7대손이고, 김장행은 김상헌의 5대손이며, 김이소는 김상헌의 6대손이었다. 급제자에 삼학사의 후예는 없었다. 충량과의 홍패에는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고 모년모월(某年某月)만 쓰게 하였다[『영조실록』 40년 2월 6일]. 『영조실록』에 의하면 1764년의 갑신충량과 외에 충량과는 3회 더 설행되었다. 1772년 영조는 집경당(集慶堂)에 나아가 충량과를 설행하였다. 망배례(望拜禮)에 수종하여 참여한 척화한 사람들의 자손을 대상으로 시험을 치르게 하였는데, 수석을 한 김이용(金履鏞)에게 급제를 내렸다[『영조실록』 48년 3월 20일]. 1773년(영조 49) 6월에 충량과를 설행하고 수석을 한 이범화(李範和)에게 급제(及第)를 내렸다[『영조실록』 49년 6월 3일]. 1775년(영조 51) 충량과를 설행하고 수석을 한 생원 이규섭(李奎燮)에게 급제를 내렸다[『영조실록』 51년 3월 19일]. 『국조문과방목』에 의하면 충량과는 1764년에 단 1회 설행되었다. 실록에 급제를 내려 주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위 3명의 급제자를 방목에서 확인해 본 결과 김이용은 김상헌의 후손으로 1773년(영조 49) 증광시에 병과 5위에 올랐다. 이범화는 1774년 식년시에 병과 1위로 급제하였다. 이규섭은 같은 해인 1775년에 설행된 정시(庭試)에서 병과 21위로 등제되었다. 이들에게는 직부전시의 자격을 주었던 것이다. 갑신년 충량과 이외에 시행되었다고 기록된 충량과는 별도의 과명을 갖춘 과거는 아니었다. 충량과는 영조 이후에는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 참고문헌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척화(斥和) 樂民(장달수) 추천 0 조회 1 20.01.16 19:28 댓글 0 외세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적국과 맞서 싸우자는 주장인 주전론(主戰論)과 화친을 도모하자는 주장인 주화론(主和論)이 있어 왔다. 이때 주전론이 바로 척화론(斥和論)이다. 조선시대에는 주자학(朱子學)을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학문으로 신봉하였으므로, 이민족의 침략이 있을 때마다 지배층이었던 관료와 선비들 사이에서 주자학의 명분론(名分論)과 의리론(義理論)에 입각한 척화론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즉 양란기(兩亂期)에는 각종 제도의 모순으로 국가의 전반적인 역량이 약화되어, 이러한 현실에서 전쟁을 고집하는 것은 국가의 멸망을 초래할 수도 있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척화를 주장하는 자들이 많았다. 선조대의 왜란 당시에는 조선이 스스로의 힘으로 왜적을 막지 못하고 명(明)의 군대에 의지해서 전쟁을 수행하였다. 명나라 군대는 평양 전투 이후 전선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일본과 화의(和議)를 진행하고자 하였다. 유성룡(柳成龍) 등 일부 집권 남인(南人)이 당시 상황에서는 화의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이를 추진하자 이산해(李山海) 등 북인(北人)들이 척화를 주장하면서 유성룡 등을 비판하였다.[『선조실록』 31년 9월 28일]. 이것은 남인과 북인 사이에 정국 주도권 쟁탈전의 성격을 띠고 진행되었다. 즉 주화·척화 논쟁이 당쟁과 결부되어 일어났던 것이다. 인조대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정국을 주도하던 인조반정의 공신인 이귀(李貴)·최명길(崔鳴吉) 등이 강화(講和)를 주장하였는데, 윤황(尹煌) 등이 그것은 항복이나 마찬가지라면서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하였다[『인조실록』 5년 2월 15일]. 병자호란을 전후해서는 최명길이 주화론을 주도하였는데,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 등 삼학사(三學士)와 김상헌(金尙憲)·정온(鄭蘊) 등이 척화론을 주장하면서 최명길을 비판하였다[『인조실록』 14년 11월 8일]. 이때는 같은 서인 내에서도 주화론과 척화론으로 분열되어 갈등이 일어났는데, 인조는 전쟁 준비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척화론을 추종하였다가 1637년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당하였다. 이후 전후 처리 과정에서 척화를 주장한 삼학사는 청(淸)나라로 끌려가 사형을 당하였고, 인조 역시 척화론을 비판하면서 윤황 등을 처벌하였다[『인조실록』 15년 2월 19일]. 이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조야에 깊이 뿌리내리면서 척화론을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보는 경향이 조선말까지 지속되었다. 임진왜란과 호란 당시 척화론은 조선 왕조 국가의 현실과는 괴리된 측면이 많았다. 즉 척화론은 현실보다 이념을 중시하는 주장이었다. 특히 호란 당시 주화론자였던 이귀·최명길 등이 인조대 대표적인 변법론자(變法論者)였다는 점이 주의를 요한다. 이들은 인조반정 초부터 제도의 변통(變通)과 경장(更張)을 통해서 국가 체제를 재정비해야만 국방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보고 각종 제도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방향은 당시 지배층이었던 양반과 지주의 특권을 약화 내지 제거하고 대동(大同)과 균역(均役)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제도 개혁에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세력이 주자학의 명분론과 의리론을 내세우면서 척화론을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처럼 척화론은 양반과 지주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주장된 측면이 있었다. 현종·숙종대에 송시열(宋時烈)은 척화론의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면서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세력을 배제하고 배타적으로 정국을 운영하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분열되어 당쟁을 격화시켰다. 인조대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은 숙종대 서인이 소론과 노론으로 분열되는 연원이 되었으며, 영조·정조대 탕평론(蕩平論)과 반(反) 탕평론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사상적으로는 실학(實學)과 주자학의 갈등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였다. 정조의 탕평책이 좌절되고 나서, 19세기에 김상헌의 후손인 안동김씨에 의해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전개된 것은 조선이 스스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사 연구 1』, 혜안, 2006. •이성무 외, 『유성룡의 학술과 경륜』, 태학사, 2008.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 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아카넷, 2003. •한명기,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 푸른역사, 2009. •김용흠, 「정묘호란과 주화·척화 논쟁」, 『한국사상사학』26, 2006. •김용흠, 「병자호란기의 주화·척화 논쟁」, 『동방학지』135, 2006. •김용흠, 「지천 최명길의 책무의식과 관제변통론」, 『조선시대사학보』37, 2006. •김용흠,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의 형성과 정치운영」, 『한국사연구』132, 2006. •김용흠, 「연평 이귀의 정치론과 학문관」, 『한국사상사학』29, 2007. •김용흠, 「조선후기 정치와 실학」, 『다산과 현대』2, 2009. •오수창, 「인조대 정치세력의 동향」, 『한국사론』13, 1985. •오수창, 「최명길과 김상헌」, 『역사비평』42, 1998. •오수창, 「청과의 외교 실상과 병자호란」, 『한국사시민강좌』36, 2005. •오수창, 「오해속 병자호란, 시대적 한계 앞의 인조」, 『내일을 여는 역사』26, 2006. •허태구, 「병자호란의 정치·군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 樂民(장달수) 추천 0 조회 6 19.01.05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오달제(吳達濟)의 시문집. 2권 2책. 목판본. 1697년(숙종 23) 사손(嗣孫) 수일(遂一)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윤증(尹拯)의 서문, 권말에 수일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시18수, 부(賦)2편, 표(表)2편, 대책(對策) 편, 소(疏)2편, 잡저2편, 간록(簡錄)3편, 권2에 부록으로 명계자설(名季子說)·유사·전(傳)·소(疏)·일기 각1편, 계사(啓辭)3편, 제문3편, 교지(敎旨)4편, 봉안문1편, 발문3편, 행장2편, 고사(告辭)1편, 애삼학사(哀三學士)1편, 시2수, 기문(記聞)1편, 장초(狀抄)3편, 소설(小說)·만(挽)·행록(行錄)·신도비(神道碑) 각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대책(對策)은 1633년(인조 11)에 초시(初試)에 합격한 글로 원(怨)·전(錢)·군신(君臣) 등에 관한 내용이다. 원(怨)에 대하여는 지금 백성들의 원망을 하나하나 열거할 수 없으나, 탐관오리가 백성 보기를 집에 기르는 닭이나 돼지처럼 한다 하였다. 전(錢)에 대하여는 먼저 전제(錢制)의 연혁을 열거한 다음 전을 쓰는 법은 백성에게 이롭게 하는 데에 있다고 하였으며, 군신(君臣)에 대하여는 역대의 군신들이 각자의 도리를 다하였음을 말하고, 이렇게 출령(出令)하면 백성을 편안히 하고 국가가 튼튼해진다는 내용이다. 소(疏)중 〈시폐팔조 時弊八條〉는 임금의 염문재이(厭聞灾異)·자존경신(自尊輕臣)· 호당벌이(護黨伐異)·역옥만치(逆獄挽治) 등 8조목으로 나누어 문제를 지적, 그 대응책을 제시하여 시정을 촉구한 내용이다. 〈척화소 斥和疏〉는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직전인 5월 부교리로 있을 때 최명길(崔鳴吉)의 화친(和親)을 반대한 내용이다. 국립중앙도서관·고려대학교 도서관·규장각도서 등에 있다. 오충렬공유고 발문(吳忠烈公遺稿 跋文) 정축년(1697, 숙종23) - 사손 오수일(嗣孫 吳遂一) 아아, 병자년(1536, 인조14)과 정축년(1637) 사이에 있었던 남한산성의 일을 어찌 차마 다시 말을 하겠는가. 그 당시에 자신이 척화(斥和)를 주장한 사람이라고 자수(自首)한 분은 우리 조부이신 팔송(八松) 부군, 청음(淸陰), 동계(桐溪)와 오달제(吳達濟)ㆍ윤집(尹集) 두 공뿐이었다. 이때 우리 숙부 석호공(石湖公)이 상소하여 아버지를 대신해서 가게 해 달라고 청하자, 담당자들은 함께 잡아 보내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에 여론이 모두 분노하기를, “자고로 멸망한 나라는 있어도 충의지사를 잡아다 적의 마음을 풀어 주는 경우가 어디에 있는가. 이 일이 비록 어쩔 수 없기는 하지만, 적의 문서에는 단지 한두 사람을 보내 주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담당자들은 많은 사람을 함께 보내려 하니, 이 무슨 의도란 말인가.” 하였고, 대간 중에 또 이와 관련하여 체찰부(體察府)에 간쟁하는 신하들도 있었으므로 이에 결국 오달제와 윤집 두 공을 해당자로 정하고 청음 등 여러 공은 거기에서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조부께서는 두 공과 함께 적진으로 가지 못한 것을 평생의 한으로 여겼다. 두 공이 오랑캐 땅에서 순절하자, 인조대왕은 그 때문에 크게 상심하고 유사(有司)에게 그 집안을 구휼해 주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우리 효종대왕 때에 와서는 의지를 불태우며 내정을 정비하고 북벌을 감행하여 천하에 대의를 펴고자 하였는바, 그 일환으로 두 공에 대해 관작을 추증하고 자손을 등용하는 등 위로하고 포장하는 뜻을 보이셨다. 그리고 금상(今上) 대에 와서 정경(正卿)을 더 추증하고 시호를 내리며 사당을 세워 주었으니, 융숭하게 보답하고 사후에 영광스럽게 해 주는 의전에 있어 거의 유감이 없게 했다고 할 수 있다. 오공(吳公)의 사손(嗣孫) 오수일(吳遂一)이 공의 평소 유문(遺文)과 여러 공의 서술을 모아 도합 상하 두 편으로 편간하여 근간에 나에게 보여 주었다. 아, 공이 돌아가신 지 벌써 60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국세(國勢)를 크게 떨치지 못하고 민심이 안일에 젖어 있다 보니 그 뒤에 태어난 세대들은 거의 그날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실정에서 만약 이 책이라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 기억이 날이 갈수록 잊혀서 결국에는 거의 오랑캐의 풍속을 달가워하는 데에까지 이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라에서 효종의 의지와 사업을 계승하여 그날의 수치를 한 번 씻음으로써 백세에 천리와 본성을 밝히고자 할 때, 이 책이 그 표준이 되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겠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얼마 안 남은 목숨이지만 눈을 도려내어 성문에 걸어 놓고서라도 그 수치를 씻는 모습을 꼭 보고 싶은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비통에 젖어 눈물을 흘리면서 이 책의 뒤에 써서 돌려주는 바이다. 嗚呼。丙丁南漢之事。尙復忍言之哉。其時以斥和自首者。吾祖父八松府君及淸陰,桐溪與吳, 尹二公耳。吾叔父石湖公上疏。願代父行。當事者議並執送矣。物議咸憤。 以爲自古固有滅亡之國。安有執忠義之士。以快敵人者哉。縱不得已。虜書只索一二人。 而必欲騈送多人。獨何意歟。臺諫又有爭於體府者。於是終以吳,尹二公當之。 而淸陰諸公得免焉。然吾祖父以不得與二公。國赴虜陣。爲終身之恨。及二公之殉節於虜庭也。 仁祖大王爲之衋傷。命有司恤其家。逮我孝宗大王。奮志修攘。欲伸大義於天下。 特命追贈二公爵。錄用子孫以示愍褒之意。今上朝加贈正卿。賜諡立祠。所以崇報哀榮之典。 庶乎其無憾矣。吳公之嗣孫遂一。裒公平日遺文及諸公敍述。合爲上下二編。聞以示拯。 噫。今距其時已甲子一周矣。國勢不振。人心恬嬉。生於其後者。殆不知有當日事。 若微此編之存。其不至於日遠月忘。而甘心於左衽者幾希矣。然則國家欲繼述孝廟之志事。 一灑當日之恥。以明天理民彝於百世。則此編也當爲指南也無疑矣。殘喘雖垂死矣。 願且抉目而見之。遂感痛流涕。而書其後以歸之。 [주-D001] 오충렬공유고(吳忠烈公遺稿) : 《충렬공유고》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조 때의 삼학사(三學士) 중에 하나인 오달제(吳達濟, 1609~1637)의 유고집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심양(瀋陽)으로 끌려가서 처형된 지 60년 뒤인 1697년(숙종23)에 그의 사손(嗣孫) 오수일(吳遂一)이 간행하였다. 《奎章閣 韓國學硏究院 忠烈公遺稿 解題》 오달제는 자가 계휘(季輝)이고 호는 추담(秋潭)이며, 시호가 충렬이다. 《인조실록》 15년 4월 19일 조에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가서 고문과 회유에도 끝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다가 심양성 서문 밖에서 처형당하는 내용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주-D002] 병자년과 …… 일 : 1636년(인조14) 12월부터 1637년 1월 사이에 일어난 병자호란을 말한다. [주-D003] 그 당시에 …… 분 :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이 포위되어 성이 완전히 고립되자, 강화론(講和論)이 우세하여 마침내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로 결정하는데, 청 태종은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의 하나로 척화파 2, 3명을 잡아 인도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에 대한 대책으로 의정부는 1월 22일에 척화인에게 자수하도록 명을 내렸다. 그러자 그날 이조 참판 정온이 자신을 묶어 적진에 보내라고 먼저 차자를 올렸고, 그다음 날 전 교리 윤집과 전 수찬 오달제, 부호군 윤황이 같은 내용으로 상소하였으며, 예조 판서 김상헌은 관을 벗고 궐문 밖에서 짚을 깔고 엎드려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해 줄 것을 청하였다. 《仁祖實錄 15年 1月 22日, 23日》 [주-D004] 청음(淸陰) :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호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자는 숙도(叔度)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청서파(淸西派)의 영수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끝까지 주전론(主戰論)을 펴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물러났다. 1639년(인조17)에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출병을 요구하자, 그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에 6년 동안 잡혀 가 있기도 하였다. [주-D005] 동계(桐溪) : 정온(鄭蘊, 1569~1641)의 호이다. 자는 휘원(輝遠)이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병자호란 때 항복의 수치를 참을 수 없다며 칼로 자결을 시도한 대표적인 척화론자 중에 한 사람이다. 그 뒤에 관직을 그만두고 덕유산(德裕山)에 들어가 은거하였다. [주-D006] 윤집(尹集) : 1606~1637. 자는 성백(成伯)이고 호는 임계(林溪)ㆍ고산(高山)이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병자호란 때 최명길(崔鳴吉) 등의 화의론에 적극 반대하고 척화론자로 자처하여 청나라 심양으로 끌려간 삼학사 중에 한 사람이며,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하였다. [주-D007] 석호공(石湖公)이 …… 청하자 : 석호(石湖)는 윤문거의 호이다. 아버지 윤황이 인조 15년(1637) 1월 23일에 상소하여 자신이 척화론자임을 자수하면서 적진에 나아가 죽게 해 달라고 청하자, 윤문거는 그날 바로 상소하여 아버지 대신 자신이 적진으로 가겠다고 청하였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효종 5년(1654)에 그가 이조 참의를 사직하며 올린 상소에 자세히 보인다. 《石湖遺稿 卷1 辭吏曹參議疏, 韓國文集叢刊 105輯》 [주-D008] 인조대왕은 …… 명하셨다 : 《인조실록》에 보면, 인조 15년 6월 8일에 청나라 심양에 가 있는 재신들에게서 윤집, 오달제, 홍익한(洪翼漢) 등이 살해당한 정상을 담은 치계(馳啓)가 보고되자, 인조는 너무나 슬픈 일이라고 하면서 삼학사의 집안을 구휼해 주라고 하교하였다. 그러나 《인조실록》 18년(1640) 9월 16일의 호조 계사에 따르면, 실제로 홍익한의 집안에는 구휼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날 홍익한의 늙은 어미에게 윤집 등의 관례에 따라 늠료를 지급하라는 결정이 내려진다. [주-D009] 두 공에 …… 보이셨다 : 효종 4년(1653) 3월 3일 주강(晝講)에서 시독관 김시진(金始振)이 삼학사에게 관작을 추증할 것에 대해 건의하자, 효종이 재가를 내려 홍익한에게는 도승지, 윤집에게는 부제학, 오달제에게는 좌승지가 추증된다. 《宋子大全 卷213 三學士傳, 韓國文集叢刊 115輯》 그리고 《효종실록》 8년 6월 7일 조에 보면 대사헌 민응형(閔應亨)이 상소하여, 김상헌ㆍ정온ㆍ홍익한ㆍ윤집ㆍ오달제 등의 충신과 선조 때 공훈이 있었던 신하들의 자손을 녹용하도록 건의하여 재가를 받는 내용이 나온다. [주-D010] 금상(今上) …… 주었으니 : 1681년(숙종7)에는 남한산성에 현절사(顯節祠)를 세워 삼학사를 제향(祭享)하였고 1685년에는 남구만(南九萬)의 건의로 이들에게 이조 판서를 추증하였다. 이어 1686년 6월 13일에는 다시 남구만이 시호를 내려 주기를 청하여 그해 12월 도목 정사에서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남구만은 사적으로 오달제의 처조카이다. 《肅宗實錄》 《韓國文集叢刊解題3 忠烈公遺稿》 [주-D011] 사손(嗣孫) 오수일(吳遂一) : 오달제에게 후사가 없어 종형의 아들 오도현(吳道玄)을 양자로 들였는데, 그 역시 후사 없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므로 다시 종형의 손자인 오수일을 후사로 삼았다. 오수일은 숙종조에 단양 군수를 지낸 인물이다. [주-D012] 공의 …… 모아 : 오달제의 유문은 30편밖에 없고 부록으로 처남인 남일성(南一星)이 지은 〈유사(遺事)〉와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오학사전(吳學士傳)〉, 《승정원일기》에서 관련 기록을 발췌한 〈정원일기(政院日記)〉, 남학명(南鶴鳴)이 지은 〈정부인남씨행록(貞夫人南氏行錄)〉, 박세채(朴世采)와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간첩발문(簡帖跋文)〉 등의 글이 있다. 《韓國文集叢刊解題3 忠烈公遺稿》 □ 애화란 누구인가? - 김 진 원 - 기억이 가물거린다. 2004년 늦가을로 짐작이 된다.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마지막 일요일 남사모에 참석하려 남한산성에 올랐다. 다소 기온이 내려가 옷깃을 여며야만 했던 시간. 정해진 상호 인사와 간단한 공지사항을 말하고 들은 뒤, 회원 일행은 현절사와 동장대 벌봉을 답사하려고 남문관을 떠났다. 길가에 흐느적거리며 서있는 코스모스가 찬 이슬을 맞아 애처롭게 고개를 숙였고, 밤톨들을 인간에게, 다람쥐에게 빼앗긴 껍데기 밤송이들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다. 현절사, 오달제 윤집 홍익한과 김상헌 정온의 충성스런 義死의 본보기를 길고 긴 역사에 남겨 후손에게 척화와 주화의 참 뜻을 바로 배우게 하고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역사적 의식을 기리고자 세운 사당이다. 늘 그곳을 지나가게 되면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참으로 숭고한 곳이다. 일행이 현절사 마당에 들어섰다. 남한산성 구석구석에 있는 역사문화 흔적을 찾아내 이를 해독하고 회원들에게 강의해 주는 명 해설사 중 한 사람이 바로 이승수박사다. 역시 그 시간에도 이박사가 있었다. 이박사가 앞에 나와 현절사에 대해 일상적인 상식 속에 숨겨진 깊고 깊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강의하겠다고 한다. 오매불망 다음 소설의 주제를 매일 고민하며 찾던 내게 귀가 열리고 눈이 확 뜨이는 단어가 들어온다. 애화愛花다. 오달제란 인물에 관해서는 보편적 상식이 전부이던 시간, 오달제에게 숨겨진 여인 관비가 있었단다. 그와 주고받은 漢詩도 남아 있고 아이까지 낳고 사랑을 했단다. 애화! 애화! 작가인 나와의 인연이 될까? 작가란 무릇 인물이 되었던 사건이 되었던 파헤치고 싶은 본질적 욕구가 있다. 그것도 상식 속에서 알지 못했던 꽁꽁 숨겨진 삼학사중 한 사람 오달제의 여인이란 단초 하나만 가지고도 흥미진진한 모티브였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녀를 만나고 싶다. 어서 빨리 더 깊은 자료를 찾아 그녀의 심장과 눈과 입을 만들어 그녀를 소설 안에서 살려내고 싶다는 충동. 그날 하루 종일 남한산성에 있으면서 애화란 여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다음 날부터다. 내 사무실에서 가까운 군포 시립도서관을 뒤졌다. 자료가 약하다. 며칠 후 서초동에 있는 국립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우선 오달제에 관한 충실한 자료와 혹 덤으로 건질 수 있는 애화에 관한 자료를 찾기 위해서다. 유명 역사학 교수들의 논문을 중심으로 자료 찾기는 진행되었다. 어떤 논문은 1800원을 지불해야 출력할 수 있고. 어떤 논문은 700원 등등. 여섯 편의 관련 자료가 들어있는 논문을 출력해 돌아왔다. 그 외에 병자호란에 관한 책을 뒤적이고 조선실록 중 관련 자료들을 발췌해 컴퓨터 문서함에 보관하기를 6개월여. 애화를 살리는 작업이 드디어 시작됐다. 낮에는 사무실 나가 돈을 벌어야하지만, 밤이면 컴퓨터 앞에 앉아 애화란 여인의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했다. 그녀의 출생, 유년시절, 오달제와의 만남과 사랑의 시작, 천한 관비로서 사대부를 사모한 아픈 흔적들을 엮으며 가을이 언제 갔는지 겨울이 언제 왔는지 모를 시간이 지나갈 무렵이다. 오달제와 애화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었다. 그녀가 아이를 임신한 역사적 사실이 있다. 남자아이라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이름은 과연 무엇일까? 더 이상 소설을 진행시킬 수 없다. 작가가 남녀의 사랑이야기를 엮으며 그들이 낳은 아이의 이름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된다. 아무리 픽션을 가미한 논픽션이 역사소설이라지만 이 사내아이의 이름을 몰라서는 내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 소설 쓰기는 멈춰졌다. 난감하다. 우선 이 소설의 모티브를 제공했던 이승수 박사에게 전화를 했다. 그 아이의 이름을 모른다는 답이다. 큰일이다. 여기서 애화란 소설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허탈감이 몰려왔다. 며칠을 고민하다 다시 서초동 국립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하루 종일 자료를 뒤적거려도 내가 원하는 답을 찾을 수 없다. 아무리 관비가 낳은 서출이지만 이렇게 이름 석 자 남겨지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서울대 역사학을 강의하는 정모 교수의 전화번호를 간신히 구해 전화를 했다. 사정을 이야기하니 모른다는 답이다. 포기! 그래 이 소설을 포기하자. 아무렇게나 아들 이름을 지어 쓸까? 작가적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허무한 가슴만 부여잡고 며칠을 고민하던 중에 언뜻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하나가 살짝 지나갔다. 그래 해주오씨 문중 아니 그들의 족보를 뒤지면 그 아이의 이름을 찾을 수도 있겠구나. 몇 달을 앓고 지내던 체기가 가시는 듯 희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해주오씨 대종회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갔다. 답이 없다. 덤벼야 한다. 다부지게 파헤쳐야한다. 다음날 해주오씨 문중의 한 분을 만나 그들이 간직하고 있던 족보를 뒤졌다. 연대별로 찾아들어가던 백여 권의 족보 중 오달제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아래 서庶라는 漢字 옆에 도남道男이라고 분명히 적혀있다. 찾았다. 드디어 찾았다. 난 문중 분의 손을 잡고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오도남吳道男. 두 사람이 한 시절 사대부와 천한 관비로 만나 사랑을 한 그 결과물이 오도남으로 남아있었다. 그다음 소설 쓰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일 년여가 걸린 작가의 애화 사랑은 서서히 마무리되었다. 탈고를 눈앞에 두고 바라본 파란 하늘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남한산성이 주 무대가 된 병자호란 이야기, 폭풍한설 동장군의 기세를 뚫고 오달제가 비참하게 청으로 끌려가는 모습, 그리고 불화산 같았던 사랑을 잃어야했던 허탈감에 강으로 뛰어내린 애화의 마지막 장면까지, 그렇게 애화는 400여년 시간이 흐른 지금 세상에 나왔다. 남사모가 아니었으면 다시 태어나지 못할 여인 애화 그리고 오달제의 서출 아들 이름이 道男임을 세상 처음 발견한 자부심. 오늘도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남사모를 만나러 매월 마지막 일요일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옮기는 이유가 된다. 내 고장 남한산성 그리고 그곳을 사랑하는 남사모 회원 여러분, 그리고 가족 여러분 모두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오희문 쇄미록 장수군에서 임진왜란 만나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은 오희문 기사 작성: 이종근 - 2020년 11월 09일 08시25분 보물 제1096호 오희문 쇄미록(吳希文 瑣尾錄)은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권오창 화백이 2020년에 복원한 〈오희문 초상〉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중 소장)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쇄미록은 조선 중기에 선공감 감역을 지낸 비연(斐然) 오희문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곳으로 피난하며 10여 년간 쓴 일기이다. 1991년 9월 30일에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되었다. ‘쇄미’의 뜻은 『시전(詩傳)』북풍(北風) 모구장(旄丘章)에 있는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流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피난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이다. 일기의 끝에 “이제 종이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流離)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고 서술하여, 이 글의 목적이 피난 중의 일을 기록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임진년 이전인 신미년, 즉 1591년 11월 27일 한양을 떠나 경기도 용인에 사는 처남 서당에서 머문 이야기를 시작으로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 일기를 썼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 남도로 발걸음을 옮긴 오희문은 또 다른 처남이 수령으로 있는 전라도 장수현에 갔다가 경기 용인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있는 오희문 묘소. 용인시 향토유적 제34호이다. 오희문은 과거에는 실패했지만 <쇄미록>을 씀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1592년 2월 충청도 영동과 황간에서 외가 친척을 만나고 다시 장수로 돌아온다. 이어 그해 3월에 다시 길을 떠나 전라도 각지를 두루 순례하고 4월 13일 장수에 도착한다. 그런데 며칠 뒤부터 왜선 수백 척이 부산에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았고, 오희문은 각종 풍문과 문서를 글로 남기는 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10년 여 동안 장수, 홍주, 임천, 평강을 거쳐 서울로 돌아온 것이다. 오희문은 당시 왜적이 장수 인근 고을을 침략하고 노모와 처자의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각종 문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소문의 전달자, 문서 작성일시와 작성자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오희문은 해주 오씨로 서울에 살고 있었는데 처남인 이빈(李贇)이 장수 현감으로 부임하자 장수에서 멀지 않은 황간의 외가를 방문하고, 또 자신 소유의 전라도 노비들에게 신공(身貢)도 걷기 위해 장수현에 들렀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울로 가지 못하고 장수에 머물면서 ‘피난 일기’를 썼다. ‘임자중(任子中)이 집노루 고기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요월당에 앉아 배불리 먹었다. 마침 술이 없더니 추로(秋露) 한 병을 얻어서 경흠의 서모(庶母)의 집에서 각각 석잔 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且任子中 備家獐而來 與洞人輩相與坐於邀月堂飽食 而適無酒 覓得秋露一壺 於景欽庶母家 各飮三杯而罷)는 기록처럼,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장치로서 술을 자주 접했던 기록도 많이 나타난다. 힘든 상황이었지만 종정도(從政圖), 쌍륙(雙六) 등 여가 생활을 즐기던 모습도 나타난다. 병과 약재 처방에 대한 기록도 흥미를 끈다.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일찍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했다. 하나는 복숭아씨를 축문(呪文)을 외우면서 먹는 것이고, 하나는 헌 신 밑장을 불에 태워서 물에 섞어 먹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 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가지고 코 밑에 대어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 쓰던 방법으로서 효력이 가장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또한 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쇄미록은 전쟁 시기인데도 한 끼에 7홉의 쌀로 밥을 지어먹었다고 했다. 당시의 7홉이라면 지금의 420그램에 버금가는 양이다. 오늘날 한국인이 한 끼에 약 140그램의 쌀을 먹는다고 하면 거의 세 배에 이르는 쌀밥을 먹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 시기에도 쌀을 7홉이나 먹었다고 하니 밥을 대식(大食)해야 한다는 생각은 평소에도 가졌던 것이라 여겨진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했다. ‘쇄미록’에는 도망 노비에 대한 기록이 여러 차례 나타난다. 일하기 싫어 도망하는 경우도 있고, 이미 다른 종과 혼인한 사내종과 계집종이 눈이 맞아 도망하기도 했으며, 붙잡혀 왔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또한 현물이 오가는 운반 과정에서 일부 수량을 가로채지 않을까 하는 의심으로 주인과 노비 사이에는 늘 긴장감이 흘렀다. “명복이 함열에서 왔다. 함열 현감이 정미 3말, 생준치 2마리, 꿀 5홉, 녹두 1되를 보냈는데, 다시 되어 보니 쌀 5되가 줄었다. 준치와 꿀은 길 가던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어두워져서 돌아온 걸 보니 분명 고기를 찌고 밥을 지어 먹은 게다. 병을 앓는 집에서 꿀을 구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니, 분명 도중에 팔아서 쓰고는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는 것일 게다. 몹시 괘씸하고 얄밉다. 충아 어미와 인아가 아파서 이것들을 가져오면 죽을 쑤어 먹이려고 했는데, 잃어버렸다고 핑계를 대니 더 화가 난다.”(갑오일록, 1594년 5월 8일) 관군에서 도망쳐 나와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숨어 관곡이나 축내는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심지어는 왜군의 수급이라고 속이고 살해된 백성의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현실도 고발했다. 그렇지만 김면, 곽재우와 같이 제 역할을 하는 의병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지난번에 어떤 의병이 밤에 무주 적진으로 들어가 진영 밖 망대에서 숙직하던 왜놈을 활로 쏘고 수급을 베어 와 바쳤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베어 온 것은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화를 따다가 적에게 살해되어 버려진 무주 백성의 머리였다. 머리털만 제거한 뒤 베어 온 것이다. 의병장이 그런 줄도 모르고 왜놈의 머리라고 여겨 순찰사에게 수급을 바쳤다고 한다. 참으로 우습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9월 13일) 긴장관계는 평소에 경작에 사역하는 노비와의 사이에서도 발생했다. 풀을 베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고 불순한 말을 하는 종의 발바닥을 때리며 응징하기도 하고, 게으름 피우는 노비들의 일터에 불시에 들이닥쳐 혼찌검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노비들도 자신들이 직접 경영하는 생업에는 매우 열심이었다. 전쟁 중에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험도 없던 양봉(養蜂)에 손을 댔다가 갖가지 시행착오를 겪었던 오희문으로서는 자기 몫의 양잠에만 열중하는 노복이 밉기 마련이었다. “채억복에게 벌통을 지워 보내서 곧장 전날에 온 벌통 오른쪽에 앉혔는데, 오후에 양쪽 벌들이 서로 싸워 물려 죽은 벌이 거의 1되 정도 되었다. 아깝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싸움을 말릴 방법이 없어서 날이 저물어 각각 벌집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린 뒤에 먼 곳으로 옮겨 앉혔다. 벌의 종류가 다르면 싸워서 죽이는 것이 이와 같으니 탄식할 일이다.”(무술일록, 1598년 3월 8일) 기해년(1599) 일록을 보면, 임진왜란이 나서 피란살이 중임에도 메밀국수를 만들어 왕에게 올렸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니 제수로서 국수가 중요하였음도 알 수 있다. 1592년 7월의 여름은 오희문에게 무척이나 더웠다. 피난의 고통이 처절했던 것은 7월 초부터 한 달 이상 거의 매일을 산 속 바위 밑에서 지낸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 초 4일: 산 속에서 바위 밑에서 잤다. - 초 5일: 산 속 바위 밑에 있었다. 아침에 사람을 보내서 현에 가서 적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고 또 두 종을 보내서 감추어둔 바위구멍에서 옷을 가져다가 추위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 - 초 6일: 산 속 바위 밑에 있었다.…… 꿈에 경여 내외를 보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 초 7일: 골짜기 산 속 시냇가에서 잤다. 이 날은 곧 칠석 가절(佳節)이다.…… 갓모를 쓰고 밤을 새웠다. 이 밤의 괴로움은 입으로 형용해 말할 수가 없다. 꿈에 윤겸이 보이는데 딴 사람은 관동(館洞) 별실에 있고 윤겸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기둥 밖에서 절을 했다. - 초 8일: 골짜기 속 시냇가에서 잤다. 이 날은 곧 선군의 생신이다. - 초 9일, 10일: 골짜기 속 시냇가에서 잤다. - 11일, 12일: 산 속 바위 밑에서 잤다. 대개 적의 형세가 번져서 전일에 진안에 있던 적은 웅현(熊峴)을 넘어서 전주 땅에 진을 쳤고 영남의 적은 이미 무주 경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합세해서 진주성을 삼키려는 것이다. - 8월 초 1일: 산 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장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깊이 노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 전쟁에서 저자 오희문이 경험한 여러 참상들에 대한 기록들은 당대에도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오윤겸(吳允謙, 1559~1636) 별칭 자 여익(汝益) 호 추탄(楸灘)·토당(土塘) 시호 충정(忠貞) 학력 1597년 문과 급제 경력 대사헌 좌의정 영의정 부모 부 오희문(吳希文) 모 연안 이씨(延安李氏) 이정수(李廷秀)의 딸 배우자 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응화(李應華)의 딸 자녀 5남 5녀 친척 사위 구봉서(具鳳瑞) 손자 오도일(吳道一) 오윤겸(吳允謙, 1559년 ~ 1636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 정치인이다. 본관은 해주. 자는 여익(汝益). 호는 추탄(楸灘)ㆍ토당(土塘),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여 평강(平康)현감으로서 선정을 펼쳤고, 1597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관찰사,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노서(老西)의 영수가 되어 대사헌·이조판서를 지냈고, 1626년 우의정, 1627년 좌의정을 거쳐 1628년 영의정에 올랐다. 생애​ 해주 오씨 시조 오인유의 14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오경민(吳景閔)이고, 아버지는 선공감역 오희문(吳希文)이며, 어머니는 연안 이씨(延安李氏)로 군수 이정수(李廷秀)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89년 전강에서 장원해 영릉참봉(英陵參奉)·봉선전참봉(奉先殿參奉)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호체찰사(兩湖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발탁되었으며, 시직(侍直)을 거쳐 평강현감으로 5년간 봉직하면서 1597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현감을 그만둔 뒤 한때 결성(結城)에 우거했다가 부수찬(副修撰)·이조좌랑·지제교(知製敎)·부교리(副校理)를 역임하였다. 1602년 모함을 받아 곤경에 처한 스승 성혼을 변호하다가 시론(時論)의 배척을 받아 경성판관으로 출보(黜補)되었다. 그 뒤 7년간 안주목사·동래부사 등의 외직을 전전하며, 안주성의 축조를 담당했고, 북도순안어사(北道巡按御史)로서 함경도의 민폐를 조사하기도 하였다. 1610년(광해군 2) 동래 부사이후 비로소 내직으로 들어와 호조참의·우부승지·좌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당시의 권신인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과 이황(李滉)의 문묘 종사를 반대, 사림과 대립하자 이를 탄핵하다가 왕의 뜻에 거슬려 강원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1년 남짓 관찰사로 재임하는 동안 기민(饑民)을 구제하는 한편, 영월에 있는 단종의 묘를 수축해 제례 절차와 각 고을로부터의 제수 마련 법식을 제정해 이후 이를 준용하게 하였다.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첨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집권 세력인 북인의 발호로 계축옥사가 일어나는 등 정계가 혼란해지자 늙은 어버이의 봉양을 구실로 광주목사(廣州牧使)를 자원하였다. 1617년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어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의 정사로서 사행 400여 명을 이끌고 일본에 가서 임진왜란 때 잡혀갔던 포로 150여 명을 쇄환했으며, 이 때부터 일본과의 수교가 다시 정상화되었다. 1618년 북인들에 의해 폐모론이 제기되자 이를 반대, 정청(庭請)에 불참하였다. 이로 인해 탄핵을 받자 벼슬을 그만두고 광주 선영 아래의 토당(土塘)으로 물러나 화를 피하였다. 1622년 명나라 희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하극사(賀極使)로 선발되어, 육로가 후금에 의해 폐쇄되었으므로 바다로 명나라를 다녀와 그 공으로 우참찬에 올랐다.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에 임명되고, 이어 이조·형조·예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다. 특히, 북인 남이공(南以恭)의 등용 문제로 서인이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분열될 때 김류(金瑬)·김상용(金尙容) 등과 함께 노서의 영수가 되어 남인·북인의 고른 등용을 주장, 민심의 수습을 꾀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까지 호종하였다. 이어 예조판서·지중추부사를 거쳐 1626년 우의정에 올랐다. 이듬해 정묘호란이 발생하자 왕명을 받고 자전(慈殿)과 중전을 모시고 먼저 강화도로 피난했으며, 환도 뒤 좌의정을 거쳐 1628년 영의정에 이르렀다. 이 때 노서·소서간의 대립과 갈등이 심해지자 이의 중재에 힘썼으며, 특히 경연에서 정치 혁신을 위한 왕의 각성과 성리학에의 전념을 촉구하였다. 이듬해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숭하고 또 부묘(柎廟)하려는 논의가 일자 이에 반대해 영돈녕부사로 물러났다가 1633년 좌의정에 재임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인렬왕후(仁烈王后)의 상에 총호사(摠護使)로서 과로한 나머지 병을 얻어 죽었다. 죽기 직전 유언으로 조정에 시호를 청하지 말고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게 했으나, 1663년(현종 4) 충간(忠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경기도 광주(廣州, 현 서울특별시 강동구 암사동)의 구암서원(龜巖書院)에 배향되고, 평강의 산앙재영당(山仰齋影堂)에 제향되었다. 《오윤겸선생묘》는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오산리에 있다. 부인 경주 이씨와의 합장묘로 봉분은 2개이고, 묘역은 후손들이 1986년에 새로 단장하면서 봉분 아랫부분에 원형으로 둘레석을 둘렀다. 2개의 묘 사이에는 상석·향로석이 있고, 상석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동자상·망주석·문인석이 각 1쌍씩 배열되어 있다. 왼쪽 묘의 앞에 묘비가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이 짓고 송준길이 글을 쓴 것으로, 인조 25년(1647)에 세운 것이다. 1987년 2월 12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04호로 지정되었다. 평판 예론에 일가견을 가져, 특히 인조 생부의 추숭과 부묘론에 반대하는 논리적 근거를 세웠다. 요컨대, 선조의 왕통을 이어받은 인조는 선조가 비록 할아버지이기는 하나 예묘(禰廟)에 해당되므로, 왕이 아닌 대원군(大院君)을 예묘로 삼는 것은 예에 어긋난다는 의견이었다. 외직에 있으면서 평강현과 경성부의 민폐를 다스려 정치를 잘한 수령(守令)으로 명성을 얻었다. 중앙관으로는 온아단수(溫雅端粹)하고 공정한 자세를 견지, 주위의 촉망을 받았다. 만년에 재상의 자리에 10여 년 간 있을 때 백성의 편의를 위해 연해 공물(沿海貢物)의 작미(作米)와 대동법의 시행을 추진하고 명분론의 반대를 물리치면서까지 서얼의 등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사림을 아끼고 보호해 어진 재상이라 불렸다. 한편, 덕업의 수양에만 힘쓸 뿐 사장(詞章)에는 뜻을 두지 않았으나, 문장은 평이하면서도 조리가 있고, 시는 맑으면서도 운율에 어긋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성혼 문하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 이귀(李貴)·정경세(鄭經世)·이준(李埈)·김류 등과 교유하였다. 특히 이귀와는 동문수학에 외가로 인척 사이의 정의(情誼)가 있었고, 임진왜란 중에 친교가 두터웠다. 다만, 뒤에 노서·소서의 대립에 이귀가 소서의 영수가 되어 추숭을 적극 추진하자 틈이 벌어졌다. 가족 관계 증조부 : 사섬시주부(司贍寺主簿) 오옥정(玉貞) 조부 : 감찰 오경민(景閔) 부 : 선공감역 오희문(希文) 외조부 : 군수 이정수(李廷秀) 모 : 연안 이씨(延安李氏) 이정수(李廷秀)의 딸 처부 : 첨정(僉正) 이응화(李應華) -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후손 정경부인 : 경주 이씨(慶州李氏) 장남 : 오달천(吳達天) 손자 : 오도일(吳道一) 손자 : 오도륭(吳道隆) 증손자 : 오수량(吳遂良) 증손자 며느리 : 함양 여씨(咸陽呂氏) - 영의정 여성제의 딸 고손자 : 오명항(吳命恒) 차남 : 오달주(吳達周) 장녀 사위 : 정두망(鄭斗望) 차녀 사위 : 관찰사(觀察使) 구봉서(具鳳瑞) 정부인 : 덕수 이씨(德水 李氏) 삼남 : 오달조(吳達朝) 사남 : 오달원(吳達遠) 오남 : 오달사(吳達士) 저서 오윤겸의 저서로는 시문과 소차를 모은 《추탄문집》을 비롯해 《동사일록 東槎日錄》·《해사조천일록 海槎朝天日錄》 등이 전하고 있다. □ 삼학사전(三學士傳) 우암 송시열(尤巖 宋時烈)은 국난(國難)을 당하여 의리를 지키며 죽는 방식에 자결(自決), 전사(戰死), 절사(節死) 등 세가지 방식이 있는데, 이 중에서 포로로 잡혀 전사(戰死)하는 것이 가장 貴한 죽음이라고 하며, 삼학사의 절의를 높게 평가하였다. 송시열이 편찬한 삼학사의 전기(傳記)로 송자대전(宋子大典)에 수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다가 심양(瀋陽)으로 압송되어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행적과 언론을 기록하여 춘추대일통(春秋大一通), 존화양이(尊華攘夷)의 뜻을 높이기 위하여 편찬하였다. 삼학사들의 약전(略傳)과 언행을 기록하고 그들이 청나라에 잡혀 갈 때부터 심양에서 죽을 때까지 조정 내부의 의논과 대청관계(對淸關係) 등 주변상황을 기록하였다. 삼학사(三學士)에 대한 약전(略傳)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전후의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으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의 상황에서 조선 지배층의 대내외적(對內外的) 대응방식을 이해한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달제(吳達濟, 1609~1637) 본관은 해주(海州)이며, 자(字)는 계휘(季輝), 호(號)는 추담(秋潭)이다. 19세에 사마시에 합격, 1634년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635년에 정언, 지평이 되고 1636년 수찬(修撰)을 거쳐 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 이 때 후금(後金)의 위협으로 사신(使臣)을 교환하게 되자 이에 반대하여 주화파(主和派)의 최명길(崔鳴吉)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청나라와의 화의(和議)에 극력 반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군(淸軍)에 항복하게 되자 스스로 척화신(斥和臣)을 자처(自處) 적진(敵陣)에 압송되었다. 적장 용골대(龍骨大)의 심문에 굴하지 않아 다시 심양으로 이송되었고, 그 곳에서도 모진 협박과 유혹에 굴하지 않자 결국 심양성 서문 밖에서 윤집, 홍익한과 함께 처형당했다. 뒷날 좌승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고,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평택의 포의사우(褒義祠宇), 홍산(鴻山)의 창렬서원(彰烈書院), 영주의 장암서원(壯巖書院), 고령의 운천서원(雲川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있고, 묵매화에도 뛰어났다. 묘소 입구와 대낭장비(帶囊藏碑) 오달제 등 삼학사는 모두 심양(瀋陽)에서 처형되고, 그 시신(屍身)의 수습조차 금지되었으므로, 그들이 묻힌 곳을 찾을 수 없다. 다만 오달제의 후손들이 그가 몸에 지니고 다니던 요대(腰帶)와 주머니를 이 곳에 묻었다. 오달제의 부인 두명과 함께.... 순조 28년(1828)에 오달제의 손자 오경원이 세웠다. 그 이름은 대낭장비(帶囊藏碑)이다. 그가 지니고 다니던 요대(腰帶)와 주머니(囊)을 묻었다는 의미.... □ 오달제의 편지 1637년 1월, 오달제(吳達濟)는 윤집(尹集)과 함께 청(淸)나라로 끌려 가면서 그의 맏형 오달승(吳達升)에게 편지를 3통 보낸다. 그는 맏형과 남한산성에서 이별한 후, 압송되어 가면서 편지를 써서 소매 속에 감추어 가지고 다니다가 신천(信川)에서 어느 늙은이를 통하여 고향에 보낸다. 그리고 2개월 후 심양(瀋陽)에 도착하여 처참한 죽음을 당한다. 寄伯氏 .. 맏형에게 보내는 편지1 남한산성에서 형님과 이별하던 정상을 어찌 말로써 다 표현하겠습니까? 나라 일이 이 지경 되었는데, 사사로운 인정이야 말하여 무엇할까마는... 형님 그 동안 집안 소식이나 얻어 들었습니까? 온 집안 식구는 아무 탈이나 없는지요? 생각컨데 지금쯤은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 함께 모였을 듯 합니다. 이 아우는 처음 적진(敵陣)에 붙잡혀 왔을 때부터 적장(敵將)인 용골대(龍骨大)로부터 죽이겠다는 협박을 수없이 받아 왔습니다. 그 뒤에도 적군의 진지에 머물면서 수 많은 고초를 당하였습니다. 그 처참한 형상이야 어찌 글로써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가운데에서도 아직 그리 큰 병은 얻지 않았으니, 그것만은 다행입니다. 요즈음 듣자니 저 사람들이 우리를 심양(瀋陽)으로 데려가서는 오래도록 붙잡아 놓겠다고 합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차라리 빨리 죽는 것이 낳겠습니다. 그러나 의리(義理)로 보아 일부러 죽을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굳이 살아도 될 형편이 되면, 그 상황을 보아가며 닥쳐오는 운명에 순종하겠습니다. 노친(老親)과 연약한 아내가, 만일 이 아우가 청(淸)으로 붙잡혀 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반드시 상심한 나머지 병이라도 날 터이니 좋은 말로 위로해 주십시오. 병(病)이 난다고 하여 해결될 일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만일 하늘이 도와준다면 혹시라도 살아 돌아가 만날 날이 있을 지 누가 알겠습니까? 붙잡혀 가는 도중에 가장 필요한 것은 머리빗과 망건(網巾) 그리고 신발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저쪽에는 없는 것들이니 아무리 구하려 하나 구(求)할 수가 없습니다. 뒷날 사신(使臣)이 들어오거든 이것들만이라도 빨리 좀 보내 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망건(網巾)만은 변두리(逸子)가 튼튼하고 넓은 것이라야 쓸 수 있습니다. 이 것들에 대하여는 저의 아내가 저의 성질을 잘 압니다. 따듯한 날이 가까워 오니 봄옷도 한 벌 보내 주십시오. 난리 후이므로 집에서도 주선하기 어려울 듯 하오니, 만일 옛날 입던 옷이라도 보내어 주시면 좋고, 그것도 없거든 꼭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두꺼운 것과 얇은 것이 있으니 번갈아 입으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름 옷은 꼭 보내주셔야 합니다. 또한 저의 남괘자(藍掛子)만은 뒤에 오는 인편(人便)으로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난리를 겪고 난 뒤라 가산(家産)이 탕진되어 틀림없이 노친(老親)을 봉양할 방법이 없을 듯 합니다. 그렇다고 서울로 모시고 올라오더라도 특별히 의지할 곳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 어떻게 처리하셨습니까? 결성(結城)에 있는 저의 처가(妻家)에 농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면 아마 도와 줄 것입니다. 저의 아내와 의논하여 보십시오. 노친을 모시고 우선 거기라도 가서 여름을 나도록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처가의 인심이 자못 두터우니 반드시 보살펴 줄 것 입니다. 모친과 아내, 그리고 조카인 창(昌)과 여러 동생들에게는 종이가 없어서 따로 쓰지 못하였습니다. 저의 뜻을 대신 전하여 주십시오. 제가 양화도(楊花渡) 근처에 있을 때 이 글을 써서 소매 속에 숨겨 두었습니다. 우리가 붙잡혀 가는 도중에라도 혹시 돌아가는 인편(人便)이 있으면 보내려 합니다. 그러나 이 편지가 과연 분실되지 않고 전하여 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종이는 작고 마음은 어수선하여 이만 줄입니다. 뒷날 기회 있으면 자세히 쓰겠습니다. 정축년(1937년) 2월 9일. 사제(舍弟) 達濟 후서(後書 ..追記) 편지를 써 놓은지가 오래 되었는데 보낼 인편(人便)이 없어서 또 이와 같이 덧붙여 씁니다. 우리 일행 중에는 포로가 많아 사람이 무척 많아서 하루에 겨우 10里 정도를 가게 되고, 또 머무는 곳도 많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간다면 3월 중에나 저쪽에 도착할 듯합니다. 길 가는 도중의 어려움이야 어찌 말로써 다 하겠습니까? 다만 주장(主將)이 때때로 음식을 보내어 지난번보다는 대접이 좋아졌습니다. 그리하여 수직(守直)하던 병졸로부터도 크게 곤욕을 당하지 않습니다. 다만 60여일 동안 한 번도 옷을 벗지 못하고 잠을 자니, 서케와 이가 들끓어서 그 괴로움을 형언할 수 없습니다. 베적삼과 베버선 그리고 얇은 솜바지를 빨리 보내 주시겠습니까. 저 쪽에는 바늘과 실도 매우 귀하다고 하니 터진 옷을 기울 방법이 없습니다. 바늘과 실도 조금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글씨를 쓰는 도구도 저들에게는 없다고 하니, 종이와 먹 그리고 붓도 구하여 보내 주십시오. 우선생활에 꼭 필요한 물건들만 이렇게 적었습니다.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나리를 치른 뒤의 집안 형편으로 넉넉히 마련할 수 없을 것도 압니다. 또 저도 저쪽에 도착한 뒤에 어떻게 될지 또는 이 편지가 집에 도착할지, 아니면 도착하지 못할지 모두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하오니 만일 그것들을 보내더라도 많이 보내지 마십시오. 그냥 어렵게 사는 가운데 병이라도 만나면 만족하게 생각하겠습니다. 이 몸은 죽음의 땅에서 살아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듯 하오니, 온 집안 식구들이 저를 불쌍히 여기는 감정 때문에 공연스레 많이 준비하느라고 物資만 낭비하지 말게 해 주십시오. 이 것이 이 아우의 뜻 입니다. 부디 필요 없는 비용을 허비하지 못하도록 꼭 부탁드립니다. 영초(靈草 ..담배)를 좋은 것으로 역시 구하여 보내 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는 파주의 풍수원(楓水院) 근처에서 하루를 묵었으므로, 또 이렇게 글을 써서 앞서 써 놓은 봉투에 넣습니다. 정축년 (1937년) 2월 12일 사제 (舍弟) 달제 奇伯氏 .. 맏형에게 보내는 편지2 봄날이 따듯하여 가고 있는데, 집 안의 안부는 어떠합니까? 고국(故國)을 지척에 두고 이 몸은 호랑이 아가리(虎口)에 물려가고 있습니다. 봄날이 다 가도록 집안 소식을 전연 들을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위로는 병드신 어머니께서 이 자식을 생각하느라고 얼마나 마음 아파하실까 생각하니 더욱 애가 탑니다. 그리고 늙어 가시는 형님이나 연약한 저의 아내와도 만날 기약이 없으니, 이 아우의 마음이야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옵니다. 그러하오나 차마 죽지 못하는 이유는 만일이라도 살아 돌아가서 어머니나 형님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입니다. 지난 달 스무날 저는 붙잡혀 가는 몸으로 어머님의 생일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형님께서 혼자 어머님 모시고 생일상을 올릴 것을 말없이 그려보고 또 어머님께서 늙은 나이에 이 자식을 생각하여 부르짖으며 우실 것을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리었습니다. 자나 깨나 애쓰시는 그 마음을 어떻게 위로하겠습니까? 이 불효막심한 아우는 어머니 말씀을 곁에서 모시지 못 한 채 적군(敵軍)의 포로가 되어, 이렇게 슬하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평상시에도 제대로 모시는 자식 구실을 못하였는데 지금에 와서 오히려 자식으로 말미암아 무궁한 슬픔을 안겨 드리게 되니, 스스로 지은 이 크나 큰 불효한 죄를 가지고 어찌 하늘을 쳐다보겠습니까. 차라리 고국 땅에서 죽어, 어머니를 그리는 넋이 고향 집을 가까이 가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비록 불효한 죄악이야 속죄하지는 못 한다 하더라도, 이승에서의 소원은 조금이나마 덜 수 있을 듯합니다. 지금 신천(信川)에서 오랜 동안 머물고 있사온데, 할 일이 없이 해만 가니 이 애타는 마음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늘 성백(成伯 .. 尹集의 字)과 함께 집에 두고 온 노친(老親)에 대한 이야기를 한답니다. 그리고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울다가 눈물이 목을 막아 흐느끼곤 합니다. 지난 번 양화도(楊花渡)와 풍수원(楓水院)에서 쓴 편지도 아직까지 소매 속에 갈무려 가지고 다닙니다. 혹시라도 고향에 돌아가는 인편(人便)을 만나면 보내려고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끌고 가는 군인들이 주위에 사람을 얼씬도 못하게 하고 또 하도 빈틈없이 지키어, 어쩌다가 우리나라 사람들을 볼 수 있어도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다가 지금에야 간신히 편지를 전하여 줄 사람을 만나, 지금까지 쓴 편지를 함께 봉하여 보내는 바 입니다. 여러 가지 하고 싶은 말들은 앞서 쓴 편지에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행렬은 지루하게도 머무는 곳이 많습니다. 그리하여 언제쯤이나 심양(瀋陽)에 도착할지 모르겠습니다. 아마 4월 중에는 틀림없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을 때에도 집안 소식을 듣지 못하였는데, 저 나라에 가서야 말 할 것도 없이 더 어렵겠지요. 고국 생각 때문에 가는 발걸음이 더욱 무겁습니다. 형님께서는 부디부디 몸조심 하십시요. 어머님의 슬하에는 형님 한 분 뿐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 것뿐이 아니지만은 두 줄기 눈물이 숨구멍을 막습니다. 붓을 들고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떨리어 하고 싶은 말을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마침 생각하였던 바를 詩를 써서 올립니다. 형님에게(寄伯氏) 南漢當時就死身 남한산성 싸움터에서 죽었어야 할 이 몸이 楚囚猶作未歸臣 적군의 포로되어 끌려 가게 되었어라 西來幾濾思兄淚 서쪽으로 가는 동안 몇번이나 형 생각에 울었든가 東望遙憐憶弟人 먼 동쪽 하늘 바라보며 아우 생각하는 이, 가련도 하다 魂逐塞鴻悲隻影 넋은 변방으로 날아가는 외로운 기러기를 쫒아 가고 夢驚池草惜殘春 꿈은 봄이 끝나가는 연못가 풀을 보고 놀란다 想當彩服趨庭日 형님께서 채색 옷을 입고 어머니 앞에 나아가서 忍作何辭慰老親 글쎄! 무슨 말로 늙은 어머님을 위로하였을까 그 중 한 편은 아내에게 붙이는 것이오니 형님께서 불러다 놓고, 그 詩의 뜻을 풀이하여 저의 생각을 알도록 하여 주십시오. 琴瑟恩情重 정이 깊어 금슬도 좋았지요 相逢未二朞 만난지 두 해도 못되었는데 今成萬里別 이제는 멀리 이별하게 되니 虛負百年期 백년해로 하자는 약속 헛되이 등졌구려 地闊書難寄 길은 멀어 글 띄우기가 쉽지가 않고 山長夢亦遲 산이 높아 꿈 길 역시 더디겠지요 吾生未可卜 이 내 목숨은 점 칠 수가 없으니 須護腹中兒 부디 당신 뱃 속의 아이를 보호해 주오 종이도 구(求)할 수 없어서 길거리에 떨어져 있는 것을 주어다가 이렇게 씁니다. 그리하여 유실 누이(柳妹 .. 柳氏에게 시집 간 누이)와 두 형수에게도 따로 편지를 쓰지 못 하였습니다. 이 말씀 전하여 주십시오. 조카인 창(昌)은 여기 있는 편지를 보면 될 것입니다. 제가 바라기는 그가 독서는 많이 하되 아직 대과(大科)는 보지 말게 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의 뜻이나 형수님의 뜻은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정축년(1637년) 3월 9일. 舍弟 達濟 사친시(思親詩) 어머니를 생각하며 風塵南北各浮萍 남북의 풍진에 떠도는 부평초 신세 誰謂相分有此行 이번 길이 헤어지는 길이라 누가 말했소 別日兩兒同拜母 떠나던 날 두 아들이 어머니께 함께 절하였는데 來時一子獨趨庭 돌아올 땐 한 자식만 마당을 서성이겠네 絶踞已負三遷敎 어머님 가르침 뿌리치고 떠난 자식 泣線空巷寸草情 홀로 남아 바느질하며 자식 걱정에 눈물 흐르네 關塞道修西景摹 몸 떠나는 변방 길은 새로 바뀌고 서산에 해는 지는데 此生何路再歸寧 어느 길로 무사히 돌아와 어머님 뵐 수 있을까 오달제가 스스로 척화파임을 자임(자임)하고 청나라로 압송되어 가면서 어머니를 그린 詩이다. 본 詩에서는 군신유의(君臣有義), 부자유친(父子有親), 부부유별(夫婦有別)의 세 가지 인간관계의 충돌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즉, 세 가지 덕목의 우열관계, 순차관계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당시의 이념적 가치는 군신관계가 가장 우위의 德目으로 사회적 당위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나 연약하고 자기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개인으로서의 인간은 이러한 표면적 가치와 자신을 지키려는 내면적 가치는 현실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설매도(雪梅圖) 이 설매도(雪梅圖)는 담묵(淡墨)으로 그 표현이 부드럽고 능숙한 가운데, 설중풍상(雪中風霜)에 매화가 가지가지 맺히고 바위와 대나무를 곁들여 기백이 뛰어난 작품이다. 늙은 등걸이 왼쪽 아래에서 오른쪽 상단으로 구불구불 솟고, 다시 그 끝에서 작은 등걸리 왼쪽 위로 솟아올랐으며, 늙은 등걸 밑에서 가지가 휘어 윗등걸을 걸쳐 솟아 있다. 묵매도(墨梅圖) 추담 오달제 묵매도(秋潭 吳達濟 墨梅圖) 족자 비단 종이위에 수묵. 108.8 x 52.9 cm. 이 묵매도(墨梅圖)는 인쪽 상부에 장문의 발(跋)이 있는데, 이는 오달제의 충렬을 기린 어제시(御製詩)를 그의 후손 오언유(吳彦儒)가 쓴 것이다. 묵매는 약간 진한 담묵(淡墨)에 몰골(沒骨)로 그려 기교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능숙한 필력(필력)으로 활달하게 죽죽 그려나간 기백이 역력하다. 늙은 매화 등걸이 오른쪽 하단에서 좌측 상단으로 굽어 뻗고, 거기서 다시 큰 가지 등걸이 우측 상단으로 뻗어 이 두 등걸이 근간을 이루고, 밑 등걸에서 세 가지로 위로 뻗었는데, 가지 등걸을 거쳐 솟아있다. 매화꽃은 세 가지 중 잔가지가 좌우로 솟은 거의 화면 중심에 있는 가지의 사이사이와 새순 끝에 점점이 피었는데, 다른 가지에는 눈만 붙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이 시대의 양식에 따른 것이지만, 이 그림에서 보이는 서리발 같은 기백을 가히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숭엄해지게 한다. 조선 중기 묵매화의 대표적 화가 중 한 명이었던 그의 매화 그림은 부드럽고 능숙한 담묵 처리를 보여 그의 높고 깨끗한 충정의 이미지를 반연하는 듯하다. 기백이 뛰어난 그의 묵매도는 조지운(趙之耘), 홍수주(洪受疇), 조희룡(趙熙龍) 등의 매화 그림에 영향을 주었다. 이 묵매도 그림은 왼쪽으로 휘었다가 오른쪽으로 가지를 뻗쳐 화면을 대담하게 분활하는 굵은 둥치와 가늘게 자라난 마들가리를 엇갈리게 배치한 구도가 인상적이다. 보일 듯 말 듯한 가는 붓으로 꽃잎을 조그마하게 그리고 짙은 먹으로 꽃술을 점점이 표현하여 순수하고 청초한 매화의 아름다움을 나타냈다. 매화꽃은 세 가지 중 잔가지가 좌우로 솟은 거의 화면 중심에 있는 가지의 사이사이와 새순 끝에 점점이 피었는데 다른 가지에는 눈만 붙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이 시대 양식에 따른 것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서릿발 같은 기백은 가히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숭엄해지게 한다. 한편 이와는 대조적으로 둥치 가운데를 하얗게 남겨놓는 비백법(飛白法)과 몰골(沒骨)로 망설임 없이 매화를 그렸는데 죽죽 그어 올라간 필치는 기교보다도 능숙한 필력으로 활달하게 그어나간 기백이 힘차고 굳건한 느낌을 준다. 묵매도는 약간 진한 담묵에 몰골(沒骨)로 그려서 기교를 나타내지 않았으나, 능숙한 필력으로 활달하게 죽죽 그어나간 기백이 역력하다. 늙은 매화 등걸이 오른쪽 하단에서 좌측 상단 쪽으로 굽어 뻗고, 거기서 다시 큰 가지 등걸이 우측 상단 쪽으로 뻗어, 이 두 등걸이 근간을 이루고, 밑 등걸에서 세 가지가 위로 뻗었는데, 가지 등걸을 거쳐 솟아 있다. 매화꽃은 세 가지 중 잔가지가 좌우로 솟은 거의 화면 중심에 있는 가지의 사이사이와 새순 끝에 점점이 피었는데, 다른 가지에는 눈만 붙어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이 시대 양식에 따른 것이지만, 이 그림에 보이는 서리 발 같은 기백은 가히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숭엄해지게 한다. 화면 가득히 한 그루의 매화가 나타나고 있다. 한 그루라고는 하지만 매화 전체의 모습이 아니라, 옆으로 기울은 중간 둥치와 여기에서 수직으로 솟아난 가는 마들가리 몇 개일 뿐이다. 굵은 둥치 부분에서는 강하고 힘찬 필세를 구사하여, 선비의 기백이 느껴지는 듯하다. 윤곽선을 따로 그리지 않고 먹을 칠하여 나타나는 몰골법(沒骨法)으로 그렸는데, 오른쪽으로 뻗어 나간 가지 중간에는 필치가 빠른 탓인지, 중간 부분이 하얗게 드러나는 비백(飛白)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하늘로 솟구칠 듯 뻗어 오른 마들가리는 예리하게 시작하여, 차츰 굵어지는 긴 호흡을 가진 필선으로 완성 되었다. 좌우로 뻗친 끝가지에는 예리하고 가녀린 필선으로 자세하게 그려낸 하얀 매화꽃이 고운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매화는 오랜 연륜을 가진 늙은 매화이다. 그러나 아직도 봄이 되면 이렇게 새로운 가지를 솟아내고, 고운 꽃도 피어내며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다.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봄소식을 가장 먼저 알리는 매화는, 사군자 중의 하나로 지조와 신념을 가진 선비의 심상을 상징하는 대상이다. 선비는 세상에 나아가 출세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이지만, 때로 마음에 맞지 않는 세상을 만나면 은둔하여, 뜻을 펼 수 있는 시기를 기다린다. 이 그림을 그린 그는 매화 그림을 즐겨 그리면서, 자신의 내면을 담아내곤 하였다. 화면 왼쪽 위에는 오달제가 죽은 뒤 영조가 1756년(영조 32)에 내린 어제(御題)를 오달제의 현손인 성균관 대사성 오언유(吳彦儒)가 쓴 것이다. 묵매도에는 숙종과 영조의 어제(御製) 2편이 씌어 있다. 그림 위에 이어진 비단 부분에 쓴 숙종의 시는 삼학사의 절의와 함께 오달제의 충효를 일깨우면서 충신의 후손이 이어지지 않았음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숙종 때는 오달제에 대한 추모와 현창사업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시호 충렬(忠烈)이 내려졌고 돌아간 지 60주년이 되는 1697년(숙종 23년)에 유고집인 충렬공유고(忠烈公遺稿)가 간행되었다. 1705년(숙종 31년)에 이르러서 정려(旌閭)하고 치제(致祭)하였다. 숙종의 어제(御製)는 같은 해 12월에 쓴 것으로 그 배경에 오달제에 대한 추모사업이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 그림의 좌측 상부에 장문(長文)의 발(跋)이 있는데, 이는 그의 충렬을 기린 영조의 어제시(御製詩)이다. 영조의 어제(御製)는 오언유(吳彦儒)가 받들어 쓴 것이다. 오언유는 봉사손인 오수일(吳遂一)의 손자로 오달제에게 현손이 된다. 영조가 오언유에게 어제(御製)를 내린 때는 병자년(1756년, 영조 32년)이다. 이날 영조는 동지(冬至)를 맞이하여 재신을 거느리고 창경국 명정전에서 망배례(望拜禮)를 행했다. 영조실록에는 대사성 오언유가 숙종이 어제하고 충렬공 오달제가 그린 묵매 장자(障子)를 올렸고 영조가 여기에 제찬(題讚)을 써서 하사하였다고 한다. 영조의 어제에는 청의 침략이 있었던 병자년을 다시 맞는 감회가 드러나 있으며 숙종의 시를 이어 자신도 시를 지음으로써 선왕의 행적을 따른다는 의미도 아울러 나타냈다. 처음 그렸을 때 이 그림은 사군자의 하나로서 이른 봄의 추위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의 고고한 품성을 나타냈을 것이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신하를 기억하는 왕의 찬시는 청나라의 회유와 압박에도 꺾이지 않는 오달제의 충정과 기개를 그림 속에서 다시 한 번 돌아보도록 이끈다. 담묵이지만 유달리 기백있는 필선은 청나라 조정을 통렬히 꾸짓었던 사대부의 기상을 나타내주는 듯한다. 숙종의 어제(御製) - 1705년 숙종 31년 - 妙筆吾東豈有二(묘필오동기유이) 신묘한 붓놀림이 우리나라에서 어찌 둘이 있을까? 觀圖仍忽感前事(관도잉홀감전사) 그림을 보니 갑자기 지난 시대의 사건이 느껴진다. 辭君不暫心忘國(사군부잠심망국) 하직하고 잡혀 갈 때도 마음은 잠시도 나라 잊지 않았고 對虜何嘗口絶詈(대로하상구절리) 청나라에 끌려갔어도 그들을 통렬히 꾸짓지 않았는가? 節義昭昭三子同(절의소소삼자동) 빛나는 절개와 의리는 세 분이 같지만 孝忠炳炳一身備(효충병병일신비) 밝게 비추는 효성과 충성심은 오직 한 몸에 다 갖추어져 誰知嗣續終無傳(수지사속종무전) 뒤를 이를 후손이 끝내 전승되지 않음을 누가 알겠는가? 於此難諶福善理(어차난심복선리) 선행을 하면 복을 내린다는 이치를 참으로 알기 어렵다. 乙酉臘月下澣題(을유납월하한제) 을유년 섣달 하순에 지음 영조의 어제(御製) - 1756년, 영조 32년 오언유가 씀 - 忠烈公吳達濟梅花簇(충렬공오달제매화족) 충령공 오달제 매화족자 御詩續贊仍賜其孫大司成彦儒(어시속찬잉사기손대사성언유) 어시(御詩)를 이어서 짓고 그의 후손인 대사성 언유에게 주다. 今日望拜 緬億昔年(금일망배 면억석년) 오늘 바라보며 인사를 올리니 아득히 지난 시대 일이 생각난다. 遙望中州 冞切愴然(요망중주 미절창연) 중국 땅을 바라보니 더욱 더 처절하고 슬픈 생각만 豈幸此辰 得覽一簇(기행차진 득람일족) 오늘 이 때에 충렬공이 남긴 매화족자를 볼 수 있음은 다행이 아닌가. 東閣一梅 忠烈筆蹟(동각일매 충렬필적) 동쪽 건물에 있는 매화그림은 충렬공의 필적이다. 上有御詩 追慕興歎(상유어시 추모흥탄) 윗부분에 있는 어시(御詩)는 충렬공을 추모하고 안타까워하였다. 韻律停久 敬續以贊(운률정구 경속이찬) 오랫동안 공을 추모하는 시가 중단되어 삼가 이어서 이 시를 짓는다. 樹忠何歲 漢南夕雲(수충하세 한남석운) 어느 때에 충성심을 세웠는가 한남에 저녁구름 때이다. 何以聊表 特賜其孫(하이료표 특사기손) 어떻게 나의 마음을 나타낼까 특별히 그의 후손에게 준다. 崇禎紀元後 三丙子仲冬忠烈公吳達濟玄孫(숭정기원후 삼병자중동충렬공오달제현손) 嘉善大夫行成均館大司成臣吳彦儒奉敎敬書(가선대부행성균관대사성신오언유봉교경서) 숭정기원후 세 번째 병자년(1756년, 영조 32년) 11월에 충렬공 오달제의 현손인 가선대부 행 성균관대사성 신 어언유가 하교를 받들어서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