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이란?

이름없는풀뿌리 2022. 9. 17. 19:40
□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이란? 임진왜란 때 오희문(1539∼1613)이 난을 겪으면서 쓴 일기로, 선조 24년(1591)∼선조 34년(1601) 2월까지 약 9년 3개월간의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오희문은 학문에 뛰어났으나, 과거급제를 못해 정식으로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의 아들 오윤겸은 인조 때에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는 병자호란 때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까지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三學士)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 일기는 총 7책으로 되어있고, 각 책의 끝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 의병들이 쓴 여러 글, 유명한 장수들이 쓴 성명문, 각종 공문서, 과거시험을 알리는 글, 기타 잡문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사정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밖에 임진왜란 시기에 있어서 관군의 무력함에 대한 지적과 비판, 명나라가 구원병을 보낸 것과 화의 진행과 결렬, 정유재란에 관한 것 등 장기간에 걸쳤던 전쟁에 관하여 전반적이고 광범위하게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오희문 자신이 관직에 있지는 않았지만, 친분이 두터운 많은 고을수령들의 도움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상황에 누구보다 정확하게 종합적으로 정보를 입수,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수현에서 보고 들은 각 지역의 전투현황과 각 의병장들의 활약상, 왜군의 잔인한 살인과 약탈행위, 명나라 군대의 무자비한 약탈과 황폐화, 전란에 따른 피난민사태, 군대징발, 군량조달 등 다른 자료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사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당시 민중의 생활상과 지방행정의 실태 등 임진왜란에 관계되는 사료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회전반의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들이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으며, 민간인으로서 생활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에 더욱 그 가치를 더해준다. 출처 : 문화재청 □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을 통해본 원균 기록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원균과 쇄미록 경향신문 이기환 선임 기자 입력 : 2019.04.02 20:34 “우수사는 이달 초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 1592년(선조 25년) 7월26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쇄미록>(사진)에 기록된 승전보이다. 전투를 주도한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1540~1597)을 가리킨다.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이순신과 이억기이다. <쇄미록>에 따르면 승전보의 주인공은 원균이다. 이 밖에도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 척을 불태웠다 하고…” “수군절도사 원균이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 담은…”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원균이 결코 모함가이고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고 있다.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과 갈등은 극심했다. ‘전공다툼’ 때문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칠천량 전투의 패배(원균)와 명량대첩 등의 승전보(이순신)에서 극명하게 갈렸다. 또 하나의 차이는 <난중일기>라는 ‘기록’을 남긴 이순신과 그렇지 않았던 원균이었다는 것이다. 그나마 당대의 여론을 반영한 포의의 선비 오희문의 일기가 원균의 공적을 객관적으로 소개한 셈이다. 오희문은 또 ‘진·가짜 의병’을 솎아내는 감별사였다. “이름만 의병일 뿐 실은 도망쳐 죄를 얻은 관군이 죄다 모여 처벌이나 면하려는 수작인 자”들도 있고,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왜병에게 살해된 백성의 머리털을 깎은 뒤 머리만 베어온 자들”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의병의 이름에 걸맞은 사람은 영남의 곽재우와 김면, 경기의 홍계남,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김천일과 고경명뿐”이라고 소개했다. <쇄미록>을 읽으면 다시 한번 일본인의 잔학성에 치를 떨게 된다. 긴 나무에 백성들의 머리를 무수히 걸었는데, 이미 부패해서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남아 있거나 망건만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고발했다. “여자들을 돌아가며 강간했는데, 여자의 치마를 들춰보니….” 차마 <쇄미록> 전문을 인용할 수 없을 정도로 농락당한 여성들 앞에서는 피가 거꾸로 솟는다. 또 “최근엔 걸인도 드물다. 두어달 사이에 굶어죽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육촌의 친척도 죽여 씹어먹는다”는 대목에서는 할 말을 잃게 된다. 문자 그대로 ‘헬조선’에서도 한집안의 가장, 남편, 아들로서, 노비의 주인 혹은 양반가문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했던 한 개인의 분투가 일기에 녹아 있다. "원균은요" 선비 오희문의 임진왜란 '헬조선' 경험기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이기환 경향신문 선임기자 입력 : 2019.04.05 “우수사는 이달초(7월 8일) 전라 좌·우 수군과 함께 나가서 적선 80척을 나포해서 700여명의 수급을 베었다. 초 10일에도 또 적선을 만나 80여척을 사로잡았다…” 1592년(선조 25년) 7월26일 오희문(1539~1613)의 일기인 <쇄미록>에 기록된 한산대첩 승전보이다. 당연히 이순신의 승전기록일 것 같지만 다 그렇지는 않다. 일기에서 전투를 주도했다는 우수사는 바로 경상 우수사인 원균을 지칭한다. 원균의 주도 아래 전장에 나서 대승을 도운 전라 좌·우 수군의 지휘관은 바로 이순신(전라 좌수사)과 이억기(전라 우수사)이다. <쇄미록>에 따르면 주인공은 원균이고, 조연이 이순신과 이억기 같은 느낌이 난다. 이는 역사적으로 알려진 원균의 평판과 사뭇 다른 기록이다. 원균(1540~1597)은 어떤 인물인가. 성웅 이순신(1545~1598)을 모함해서 밀어내고 그의 자리를 차지했고, 조선 수군을 궤멸상태로 빠뜨린 칠천량 패전의 책임자이며, 전투에 임해서는 늘 도망만 다니는 겁쟁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기록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원균은 전쟁 후 이순신·이억기(1561~1597)와 나란히 ‘선무공신’으로 책록됐다. ‘임진왜란 승전’의 으뜸 공적은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군이라고 ‘엄지척’하며 조선군 장수들의 공을 폄훼하기에 급급했던 선조조차도 “우리나라 장수 중에는 이순신과 원균, 권율 등이 다소간의 전공을 세웠다”고 인정했다. 선조는 1592년 9월1일 장수들의 공을 재평가하면서 “원균과 이억기는 이순신과 공이 같은 사람(同功之人)”이라고 ‘동급’으로 대우했다. 정유재란을 명(중국)의 시각에서 그린 ‘정왜기공도’(征倭紀功圖·가로 9m, 세로 4m). 왜를 정벌한 공을 기념한 그림이다. 정유재란(1597~1598) 마지막 3개월간 육·해상에서의 전투장면을 당시 명군을 따라왔던 화가가 폭 30cm, 길이 6.5m의 두루마리에 그렸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 견원지간이던 이순신과 원균 이순신과 원균의 반목과 갈등은 극심했다. 이유는 ‘전공 다툼’이었다. 1594년(선조 27년) 11월12일 판돈녕부사 정곤수(1538~1602)는 “이순신의 부하들은 당상(정 3품)에 오른 자가 많았던 데 비해 원균의 부하 중 우치적이나 이운룡 등의 공이 큰데도 상대적으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보고했다. 선조 역시 “원균이 먼저 군사를 요청했고 이순신은 따라간 것이다. 이순신이 원균보다 왜군을 많이 잡았으나 원균이 군사를 청해서 성공이 시작된 것”이라고 평가했다.(<선조실록> 1596년 11월7일) 실록에는 2년 이상 이어진 이순신·원균의 갈등 관련 이야기가 아주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그걸 찬찬히 읽어보면 원균을 소인배로 매도하기에는 너무 일방적인 평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원균을 더욱 불리하게 만든 것이 있으니 바로 이순신의 <난중일기>다. 일기라는 것이 무엇인가.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기에 자신의 심중을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러니 자신의 일기에 ‘전공 다툼’으로 관계가 틀어진 원균을 좋게 쓸리 만무하다. 누가 먼저 갈등의 단초를 제공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경기 용인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있는 오희문 묘소. 용인시 향토유적 제34호이다. 오희문은 과거에는 실패했지만 <쇄미록>을 씀으로써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 이순신의 뒷담화, ‘원균은 고약한 인간이야’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이순신은 여수 본영의 전라 좌수사였고, 원균은 경상우수사였다. 가뜩이나 밉상인데 매일 마주쳐야 하는 장수였던 만큼 지휘권과 전공, 관할구역 등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이순신은 다름아닌 일기에 원균에 대한 감정을 거리낌없이 풀어헤쳤다. 아닌게 아니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원균 이야기가 80~120번 정도 언급된다. 짐작하겠지만 절대 다수가 원색적인 비난이다. “원균의 술주정에 배 안의 모든 장병들이 놀라고 분개하니 고약스러움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1593년 5월) “원균이 술을 마시겠다고 해서 조금 주었더니 잔뜩 취해서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는 말을 함부로 했다. 해괴했다.”(1592년 8월26일) “원균이 온갖 계략으로 나를 모함하려 덤비니 이 역시 운수다. 뇌물로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에 잇닿아있으며, 그렇게 나를 헐뜯으니 그저 때를 못 만난 것만 한탄할 따름이다.”(1597년 5월 8일) 심지어는 “원균이 공연수와 이극함이 좋아하는 여자들과 모두 관계했다”(1594년 1월 19일)고 비난하기도 한다. 이 인용문들은 빙상의 일각이다. 원균을 흉측한 인물로 묘사하고 성격은 ‘음흉’ ‘간흉’하고 그의 이야기는 ‘흉계’이며, ‘해괴하기 이를데 없다’고 표현하기 일쑤였다. 누차 하는 얘기지만 이순신은 누구 보라고 일기를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400여년 뒤 후손들이 자신이 비밀리에 쓴 일기를 죄다 들춰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이순신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신의 속마음이 저토록 적나라하게 들춰진 것에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신상이 탈탈 털리는 기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이순신의 원색적인 비난을 받은 원균은 모함꾼, 비겁자, 술주정뱅이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은 원균에게는 실록이라는 공식역사서 외에는 달리 변명할 수단이 없다. ■ ‘원균도 승전의 주인공이었다.’ 그것이 원균의 비극이다. 그러나 맨처음의 인용문에서 보듯 역시 동시대 임진왜란을 함께 겪은 뭇 선비 오희문의, 다름아닌 일기(<쇄미록>)에 원균의 위상을 짐작케하는 기록이 남아있다. 그나마 원균으로서는 불행중 다행이 아닌가. <쇄미록>에는 원균 관련 기록이 두 건 더 나온다. “들으니 영남 우수사 원균이 지난달에 적선 10여척을 불태웠다 하고 이 도의 좌수사인 이순신이 이달초 여러척의 배를 이끌고 전라도 수군 절도사와 함께 적선 42척을 불태우고….”(‘임진남행일록’) “전 만호 이충이 전에 경상 우수영에 갔다가 수군절도사 원균이 또 적선 24척을 불사르고 적병 7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소식을 담은 서장을 은밀히 지니고 이 고을을 지났다. 그를 우연히 만나니 근심이 풀렸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6월2일) ‘~들으니’로 시작되고 ‘원균의 승전보에 근심이 풀렸다’는 <쇄미록> 내용은 당대 민간의 여론을 생생한 필치로 반영하고 있다. <선조실록>에도 당대 민간의 여론이 원균에게 불리하지 않았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두 장수의 갈등을 주요 안건으로 다룬 1594년 11월12일의 경연장에서 선조가 “바깥 여론이 원균을 체직(경질)시키려 하는가”라고 묻자 호조판서 김수(1547~1615)는 “별로 체직시키려는 여론이 없다”고 손사래를 친다. 이때 정탁(1526~1605)이 “원균은 사졸이 따르니 가장 쓸만한 장수이고 이순신도 비상한 장수지만 어찌 사적인 분노로 이렇게 다툴 수 있느냐”고 비판하면서도 “그럼에도 원균의 경질은 안될 일”이라고 주장한다.(<선조실록>) “두 사람에게 글을 내려 질책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 때문에 원균을 경질한다면 필시 수군이 흩어질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오희문의 묘비. 오희문은 비록 현달하지는 못했지만 맏아들(윤겸)은 영의정이 됐고, 손자(달제)는 유명한 삼학사의 한사람으로 이름을 날렸다. ■ 자잘한 이의 떠돌이 일기 <쇄미록>은 평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선비 오희문의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선조 24년) 11월27일 종 2명을 거느리고 남행길에 오른 오희문이 1601년(선조 34년) 2월27일까지 9년 3개월간이나 써내려간, 이른바 ‘피란일기’라 할 수 있다. ‘쇄미(쇄尾)’라는 이름부터 그렇다. 오희문은 <시경> ‘패풍·모구’의 “자잘하며 자잘한 이, 떠도는 사람이로다.(쇄兮尾兮 流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또한 오희문은 전쟁이 다 끝나고 서울로 되돌아온 뒤 “종이도 다되기도 했고, 한양에 도착해서 이리 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그만 쓴다”는 변을 남기고 ‘일기 쓰기’를 멈춘다. 과거에 실패한 오희문은 현달하지 못했다. 그러나 장남(오윤겸·1559~1636)이 영의정에 올랐고, 손자인 오달제(1609~1637)가 그 유명한 삼학사 중 한사람이었다. 장남 덕분에 본인도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니 <쇄미록>을 쓴, 그 투철한 기록정신과 문장력이 후손들의 현달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쇄미록> 중 1591년 11월부터 1592년 6월28일까지는 그날그날의 일기가 아니라 추후에 한꺼번에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 1591년 11월~1592년 6월28일까지의 글은 흔히 ‘임진남행일록’으로 일컫는다. 나머지는 그날그날의 일기이다. 국립진주박물관은 최근 필사본 7책 800여장 분량의 <쇄미록>(보물 제 1096호)을 총 8권1세트로 엮은 번역서를 출간했다. ■ ‘이런 개·돼지 같은 무리들을 어쩌면 좋으랴’ <쇄미록>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조선과 조선 백성들의 민낯을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다. 당시 남부 지방을 여행중이던 오희문이 임진왜란 개전(4월13일)소식을 들은 것은 사흘 후인 16일이었다. “왜선 수백척이 부산에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이 들리더니 저녁 나절엔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다는 말이 들려 경악을 금치못했다”(‘임진남행일록’)고 썼다. 왜군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오자 오희문은 백성들을 팽개치고 줄행랑친 선조 임금을 원망하는 듯한 일기를 남긴다. “만일 주상께서 도성을 굳게 지키고 장수에게 명하여 미리 준비하여 막고 강을 끼고 위 아래로 목책을 많이 설치하고 먼저 필사의 각오로 길을 끊었다면 적이 아무리 강하고 예리해도 어찌 능히 날아서 건너오겠는가. 계교가 여기에 벗어나지 않는데 스스로 먼저 퇴둔(退屯·물러나서 진을 침)하니 몹시 애석한 일이다.”(‘임진남행일록’) 오희문은 또 임금을 잘못 보필해서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든 벼슬아치들을 여러번 비판한다. “임금의 행차가 의주에 이르렀을 때 주서 임취정·박정현과 한림 조존세·김선여가 안주로 도망갔기에…벼슬을 삭제했다. …위급함을 당한 오늘날에 임금을 헌신짝 버리듯 했으니 이런 개돼지 같은 무리를…”(1592년 8월21일) 사관인 임취정·박정현·조존세·김선여는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던져넣고 도망간 자들이다. 이 자들 때문에 선조즉위년(1567년)부터 임진왜란 개전 이전(1592년) 까지 25년의 기록이 깡그리 사라져버렸다. 오희문은 또 “조정에 풍랑이 또 일어나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은 배척한다니…반드시 나라를 망치고야 말 것”(1594년 10월22일)이라 한탄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의 비밀병기로 쓰인 비격진천뢰.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 육촌 친척까지 잡아먹는 지경으로… 전쟁의 참상은 필설로 다할 수 없이 끔찍했다. “길에서 굶어죽은 사체를 거적으로 말아서 덮어둔 것을 보았는데 그 곁에 두 아이가 울고 있었다. 물었더니 그 어미라 한다. 그 뼈를 묻으려 해도 힘이 없어 옮길 수 없으므로….”(1594년 2월24일) 이 정도의 상황은 약과였다. 심지어 ‘육촌 친척까지 잡아먹는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말그대로 ‘헬조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근엔 걸인도 드물다. 두어달 사이에 굶어죽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육촌의 천척도 죽여 씹어먹는다 하기에….”(1594년 4월3일) 오희문은 이 대목에서 “요즘 혼자 가는 사람을 쫓아가 죽인 뒤 잡아먹는다”면서 “사람의 씨가 다 말라 갈 지경”이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오죽하면 성주를 점령한 왜군이 관청의 곡식을 나눠주자 백성들이 “새로운 상전(왜군)이 나를 살렸다”고 했단다. ■ 예나 지금이나 천인공노할 왜적들의 만행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천인공노할 왜병들의 만행을 기록한 오희문의 글을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긴 나무를 죽 세워두고 우리나라 사람의 머리를 베어 무수히 걸었는데 부패해서 살과 뼈는 떨어지고 머리털만 걸려 있거나 망건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고 한다. 분한 마음을 이기기 어렵다.”(1592년 9월24일) “왜병들이 선릉(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과 정릉(중종의 무덤)을 모두 파내어 재관을 부수고 옥체(임금의 유골)을 꺼내 버려서 중종은 겨우 구렁에서 찾았고, 성종은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혹은 말하기를 불태웠다고도 하고, 강에 띄었다고 하니….”(1593년 5월8일)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다. 왜병들이 성종 부부의 무덤인 선릉과 중종의 무덤인 정릉을 파헤쳤다는 내용이다. 왜병에게 유린당한 여성들은 또 어떤가. 오희문도 이 대목을 기록하면서 “가슴 아프고 참혹한 일”이라 했다. 필자 역시 피가 거꾸로 솟는다. “왜적은 영남 양반가 여성 중에 얼굴이 고운 자를 뽑아 5척에 실어 일본으로 보냈다. 여인들의 머리를 빗고 분 바르고 눈썹을 칠하게 했는데…. 먼저 간음한 여자들이고 나머지는 여러 적들이 돌아가면서….” “왜적의 포로가 된 여인이 전투 후 살려달라고 애걸했다. 적들에게 돌아가며 강간을 당해 자결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치마를 들춰보니….”(‘임진남행일록’) 필자가 차마 더는 인용하지 못할 정도로 참담한 내용이다. 남편이라는 작자가 아내와 자식을 내팽개치고 도망친 사례도 있었다. “길에서 아이를 보니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 역시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남편이 모자(母子)를 버리고 갔다… 새와 짐승이라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거늘….”(1593년 7월15일) 경기 평택시 도일동 마을 뒤편 야산 언덕 위에 자리잡은 원균의 무덤. 이순신과 함께 선무 1등공신으로 책록될만큼 전공을 세웠다. ■ 다 같은 의병이 아니다 의병이라고 다 같은 의병이 아니었다. “죽은 우리 백성의 머리털을 깎아버리고 머리를 베어 가지고 왔는데 의병장이 그걸 알지 못하고 진짜 왜병이라고 하여 순찰사에게 바쳤다고 한다. 우스운 일이다.”(1592년 9월13일) 9월1일자 일기를 보면 더욱 한심하다. “먼 지역에 물러나 움츠린 채 양식만 축내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으니…. 이름만 의병일 뿐 실은 도망친 관군들이 처벌이나 면하려는 수작이다. 좌도의 수군 중에는 물에서 싸우는 것이 싫어서 의병에 가담한 자도 많다.” 그러나 오희문은 당시 용맹을 떨친 의병들을 거명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의병이 곳곳에서 거병했지만 그 이름에 걸맞은 사람은 오직 영남의 곽재우와 김면, 경기의 홍계남,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김천일과 고경명 뿐이다. 나머지에 공적이 현저한 인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1592년 10월1일) 이중 전사한 고경명과 조헌을 두고는 “모두 나랏일을 위해 전사하여 죽을 자리에서 죽었으니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다고 할 만 하다”고 칭찬했다. 또한 충청도의 의병장 홍계남을 두고는 “가는 곳마다 공을 세우니 적들이 홍장군 하면서 감히 침범하지 못했고, 충청도 내지가 편한 것은 모두 홍계남의 공이니 가상한 일”(10월1일)이라 했다. 의병장 중에서 으뜸은 역시 곽재우였던 것 같다. 오희문은 “영남의 의병장 곽재우는 왜적의 수급을 헤아릴 수 없이 베었지만 공으로 여기지 않고 몸소 죽음을 무릅쓰고 싸운다”(9월8일)고 극찬했다. 오희문은 특히 용렬한 의병장과 곽재우 의병장을 비교하면서 “사람의 뜻과 기상의 차이를 여기서 또한 볼 수 있다”고 했다. 개전 초기 조선군이 연전연패할 때 분연히 일어나 신출귀몰하며 용맹을 떨친 곽재우의 무용담이 전설처럼 떠돌았던 것 같다. 오희문은 “곽재우가 용감한 무사 4명을 이끌고 적선 3척을 쫓아냈고 13명을 거느리고 적선 11척을 공격해서 달아나게 했다”고 기록했다. 아마도 1592년 5월4~6일 사이에 벌어진 모종의 전투에서 거둔 승전보인 것 같다. 평양성 전투도. 이여송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한 1593년(선조 26) 1월의 전투를 그린 것이다. 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의 전투 끝에 일본군이 항복을 선언하고 철수했다. |국립진주박물관 제공 ■ 명나라군의 횡포 선조는 자칭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으뜸요인으로 ‘명나라군’을 꼽았다. 예컨대 전쟁이 끝난 뒤인 1601년(선조 34년) 3월 14일 선조는 “왜란에서 적을 평정한 것은 오로지 중국 군대의 힘”이었다면서 “조선의 장사(將士)는 중국 군대의 뒤를 따르거나 혹은 요행히 잔적의 머리를 얻었을 뿐 자기 힘으로는 적병 한 명도 베지 못했다”고 폄훼했다. 하지만 조선을 도와준 중국 군대는 곳곳에서 말썽을 피웠다. 또 그 중국군대를 맞이하기 위해 들어가는 물자는 엄청났다. 오희문도 고발한다. “호남으로 내려간 중국군사가 길가 민가에서 재물을 약탈하는 것이 끝이 없다. 마치 적의 변을 당한 것과 같다.”(1593년 7월7일) “… 명나라 병사들이 끊임없이 오가며 소주와 꿀, 병아리 등의 물건을 찾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큰 몽둥이로 마구 매질하여 고을 수령까지 모욕했다. 그 괴로움을 견딜 수 없다.”(1594년 6월4일)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는 조선을 위해 구원병을 보낸 것이 아니라 명나라를 위해 보낸 것일 뿐”이라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 때문일까. <쇄미록>에는 당시 명나라 경략(부사령관) 송응창(1536~1606)의 언급을 실었다. “너희 나라(조선)의 군신은 ‘중국을 위한 것이지 구원병이 아니다’라 하지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만약 중국을 위할 뿐이라면 압록강을 지킬 일이지 뭐하러 천하의 병사를 움직이고 100만냥의 은을 소비하면서 수천리 밖에까지 원정했겠는가.”(1593년 4월19일) ■ “도망간 노비놈들 붙잡히기만 해봐라” <쇄미록> 역시 일기인만큼 오희문의 마음 속 이야기를 가감없이 털어놓고 있다. 노비 2명이 한꺼번에, 그것도 요즘의 승용차 역할을 하는 말에 식량을 싣고 도망가자 “분통이 터진다. 붙잡으면 윗전을 사지에 몰아넣은 죄를 어찌 용서하겠느냐”고 앙앙불락한다.(1593년 2월20일) 오희문은 심부름을 하는 노비가 도중에 물건을 빼돌린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었다. “명복(노비)이 돌아왔다.… 베갯모를 팔아 벼 8말, 콩 3말 5되를 얻어 짊어지고 왔는데 다시 세어보니 1말이 모자란다. 분명 명노가 훔쳐 먹은 게다. 괘씸하고 얄밉다.”(1593년 10월30일) “명복이 돌아왔다. 함열현감이 ~를 보냈는데 쌀 5되가 부족하다. 준치와 꿀은 길 가던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어두워져서 돌아온 걸 보니 분명 고기를 찌고 밥을 지어 먹은 게다. 꿀은 도중에 팔아서 쓰고는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는 것일게다. 몹시 괘씸하고 얄밉다.”(1594년 5월8일) 하지만 노비가 중간에 ‘꿀꺽’ 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 당시만 해도 도량형이 관가의 것과 민가의 것이 달랐다. 실제로 오희문 자신이 이산 현감에게 직접 받은 벼 1섬도 돌아와 다시 보니 11말7되 남짓한 경우도 있었다.(1594년 6월4일) 또 명나라군에게 말을 뻬앗기고 구타까지 당한 노비(덕노)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고 괘씸해 하다가 나중에 사실임이 밝혀진 일도 있었다. 그러나 오희문은 덕노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기보다는 잃은 말을 아쉬워하는 심정만 토로했다.(1599년 3월5·11일) ■ ‘귀여운 막내딸이 내 마음을 잡는다’ 오희문은 <쇄미록> 곳곳에 아내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을 담았다. “새벽에 꿈을 꾸니 아내가 집에 있는데 옛날과 같다. 막내 딸 단아는 분을 바르고 깨끗이 단장했는데 내가 무릎 위에 안고 그 볼을 만졌다.”(1592년 7월3일) 특히 막내딸은 끔찍하게 사랑했다. “…막내딸은 얼굴이 곱고 밝으며 성질이 몹시 단아하여 내가 몹시 사랑하던 터였다. 고운 마음과 눈매가 자나 깨나 눈에 보이니 <시경>에 이른바 ‘귀여운 막내딸이 실로 내 마음을 잡는다’는 거였다. 이 두 구절을 쓰니 슬픈 눈물이 절로 옷을 적신다.”(‘임진남행일록’) 하지만 당시는 어쩔 수 없는 가부장 사회였다. 전쟁 통에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이었는데, 그나마 먹을 것이 있으면 남자들이 우선이었다. “아침에 나와 두 아들은 함께 콩죽 반그릇을 먹었고, 아내와 세 딸은 전혀 얻어먹지 못하고 하루종일 지냈다”(1594년 3월1일) ■ ‘저녁밥 먹으려면 병 걸린 여자들이 나아야 할텐데…’ 또한 당시는 남자가 부엌에서 밥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아내와 두 딸, 네 계집종이 모두 학질을 앓고 누워서 저녁밥 지을 사람이 없으니 그들이 덜 아프기를 기다려 짓는다면 반드시 밤이 깊을 것이다.”(1593년 9월7일) 집안 여자들이 모두 학질을 앓고 있는데, 아니 그래 저녁밥 먹지 못할 것을 걱정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조금 덜 아프기를 기다린다는 것인가. 지금 같으면 큰일 날 일이다. 일기이니만큼 마음의 소리를 가감없이 담은 것이라 변호해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이 대목에서는 ‘해도 해도 너무 했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법 하다. 그래도 사관들마저 사초책을 불구덩이에 던지고 도망갔던 한심한 시절이 아닌가. 오희문은 자신의 한 몸 추스르기도 어려운 그 시절, 하루하루 꼬박꼬박 그 참혹한 역사(임진왜란)를 기록해 나갔다. 사실 오희문은 당대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인간’이었다. 과거에 실패한 뒤 평생을 포의(布衣)로 지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어떤 장원급제자도 부럽지 않다. <쇄미록>을 남김으로써 오희문이라는 이름 석자 또한 영영 남겼기 때문이다. <참고자료> 오희문, <쇄미록 1~8>, 전주대 한국고전학연구소·유영봉 등 옮김, 국립진주박물관, 2019 김우철, ‘쇄미록 해제’, <쇄미록 1>, 국립진주박물관, 2019 신병주, ‘16세기 일기자료 <쇄미록> 연구-저자 오희문의 피란기 생활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60, 조선시대사학회, 2012 김태형, ‘이순신과 원균의 포폄시비 일고’, <한국인물사연구> 22, 한국인물사학회, 2014 방기철, ‘임진왜란기 오희문의 전쟁체험과 일본인식’. <아시아문화연구> 24, 가천대아시아문화연구소, 2011 이순신, <난중일기>, 이은상 옮김, 지식공작소, 2014 □ 쇄미록(鎖尾錄) 이야기 / 樂民(장달수) 쇄미록(瑣尾錄)조선시대 임진·정유 양란 당시의 전란 사실을 기록한 오희문의 피란일기 고문헌용례사전(2) 樂民(장달수) 2018.09.14. 7책. 필사본. 이 책은 오희문이 한양을 떠난 1591년(선조 24) 11월 27일부터 환도한 다음날인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간 임진·정유 양란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지내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책의 명칭을 ‘쇄미록’이라 한 이유는 ≪시전 詩傳≫ 모구장(旄丘章)에 있는 “瑣兮尾兮 遊離之子 (쇄혜미혜 유리지자 :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것은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사람)”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으로 유리기(遊離記) 또는 피란록(避亂錄)이라는 뜻이다. 책의 내용은 제1책이 임진남행일록(壬辰南行日錄)과 임진일기이다. 이 가운데 〈임진남행일록〉은 날마다 기록한 것이 아닌 신묘년(1591) 11월 27일부터 임진년(1592) 6월말까지 사이의 중요한 사실만 들어 기록한 것이다. 제2책은 〈계사일록〉인데 1593년 정월 14일부터 3월 말까지의 기록이 없다. 이것은 그가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제3책은 갑오일록, 제4책은 을미일록·병신일록·정유일록, 제5·6책은 정유일록, 제7책은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으로 구성되어 각 연도의 사실을 적고 있다. 그리고 각 책의 말미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敎書), 의병들의 격문(檄文), 명나라 장수의 성명문(聲明文)과 각종의 공문서, 과거방목(科擧榜目), 기타 잡문을 수록한 것들도 있다. 이 책은 오희문의 개인 일기인 까닭에 주로 사생활을 기록한 부분이 많으나 전쟁에 관한 기사도 많이 실려 있다. 왜병의 침입과 전국 각지의 전황, 관군의 무력, 명군(明軍)의 내원(來援)과 화의(和議), 화의의 결렬과 왜병의 재침 등 임진·정유 양란의 전황이 대략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 가운데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기사가 수록되었다. 그가 전라도 장수에서 직접 보고 들은 금산·무주·용담·진안·웅현·전주 등 여러 곳의 전황과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용인전투에서의 패배,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김덕령(金德齡),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심수경(沈守慶) 등의 애국정신과 활동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왜군의 잔인한 살인·방화·약탈·강간 행위, 명군의 무지한 약탈과 행패, 한양의 파괴 상황에 관한 내용은 중요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다. 이 밖에도 이 책은 전쟁에 관련된 기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와 민중들의 생활 상태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는 데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예컨대 전란으로 인한 피란민들의 유리, 군사 징발과 군량 조달로 인한 백성들의 도산(逃散), 처와 자식을 버리고 도망한 아버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 죽은 어머니의 젖을 만지면서 우는 아이 등을 기록하였다. 이외에도 임진년에는 걸식자가 많았으나 다음해에는 다 굶어 죽어 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비록 집을 지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행병과 배고픔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는 사실 등 일반 백성의 생활은 참담의 극에 달했으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기록은 보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오희문의 아들·사위 및 친척·친지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수령이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은 당시 수령의 권력과 호화한 생활, 아전의 생태, 일수(日守)·서원(書員)의 성격,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면(面)의 장무(掌務), 경주인(京主人)·영주인(營主人)의 임무 등 지방행정 제도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있다. 또 군대의 징발과 공물의 징수, 군량의 수송, 잡역의 초정(抄定), 농민의 경제 생활에 관한 실제 문제가 있다. 더욱이 오희문이 양반으로서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특권과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 특 히 노비의 신공(身貢)과 매매·소송·입안(立案) 및 각지의 산물과 풍속에 대해서도 자세히 실려 있다. 1962년 필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화해 ≪한국사료총서 14≫로 간행했으며, 상·하 2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이 책의 해제가 실려 있다. 이 책은 비단 임진왜란에 관한 사료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 임진왜란의 생생한 증언 기록,『쇄미록(鎖尾錄)』 고전산문 낙민 2016.03.27. - 16일: 전하는 말에 왜선(倭船) 수백 척이 부산에 모습을 나타냈다 하더니 저녁에는 부산과 동래가 모두 함락되었다는 소문이 들리니 놀라움을 이길 수가 없다. 생각컨대 성주(城主)가 굳게 지키지 못한 까닭이다. 十六日: 傳道倭船數百隻 現形於釜山 夕聞釜山東萊見陷 不勝驚愕 意爲城主之不堅守也 - 19일: 영남에서 변의 보고가 하루에 세 번이나 왔는데, 용맹스러운 장수와 강한 군사가 왜병의 소식만 듣고 먼저 무너지고, 큰 고을과 견고한 성이 하루도 못되어 함락되었다고 한다. 왜병은 세 길로 나누어 바로 서울로 향하여 산을 넘고 강을 건너서 마치 사람이 없는 데로 들어가듯이 한다. 신립, 이일 두 장수는 조정에서 믿는 바로 견고하게 지킬 줄 알았는데, 부월(斧鉞)을 받고 와서 지키다가 중도에서 패배당하여 조령의 요새를 지켜내지 못하였다. 이에 적이 중원(中原)으로 들어가서 대가(大駕)가 서쪽으로 파천(播遷)하고 도성을 지키지 못했으니 슬프다. 우리 생령(生靈)들이 모두 흉한 칼날 앞에 피를 흘리고 늙은 어머니와 처자가 흩어져 이리저리 떠돌게 되어 생사를 알지 못하니 밤낮으로 통곡할 뿐이다. 十九日: 嶺南之報變 日夕三至 猛將猂卒 聞風而先潰 大府堅城不日而失守 分兵三路 直向京城 踰山越江 如入無人 申李兩將 朝廷之所恃而爲固 受鉞來禦 中道見`敗 鳥嶺失險 賊入中原 大駕西巡 都城不守 哀我生靈 盡爲凶鋒之膏血 老母妻子 遊離飄落 未知生死 日夜痛哭而已 - 8월 초 1일: 산 속 바위 밑에서 잤다. 내가 산 속에 들어온 후로 장차 한 달이 넘어 절기가 중추로 접어드니 찬 기운이 사람을 엄습하여 갑절이나 처량하다. 깊이 노모와 처자를 생각하면 지금 어느 곳에 있으며 아직도 보존하고 있는지?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오. 壬辰 八月 初一日: 在山中 宿岩下 自余入山 今將月餘 節入 中秋 寒氣襲人 倍常淒冷 深思老母妻子 今在何處 而尙得保存乎 念及於此 寧不悲痛 - 또 어제 오는 길에 7, 8세 되는 아이를 보니 큰 소리로 통곡하고 있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가리고 슬피 울고 있었다. 괴이해서 그 까닭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지금 내 남편이 우리 모자(母子)를 버리고 갔다고 한다. 무엇 때문에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떠돌면서 걸식했는데 이제는 더 빌어먹을 곳이 없어서 장차 굶어 죽게 되었으므로 내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으니 우리 모자는 정녕 굶어 죽게 되었기에 우는 것이라 한다.…… 슬프다 창생이 장차 다 없어지고 하나도 남지 않으려는가. 탄식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癸巳 七月 十五日: 且昨日來 路見 七八歲兒童 鼓聲痛哭 有女左路傍 亦掩面悲泣 怪而問之 則答曰 金刻我夫棄我母子而去 余曰 何以棄去 又曰 三人遊離乞食 而今則乞不得 將爲餓死 故我夫棄我母子而獨去 我將此饑死丁寧 以此哭之云云…哀我蒼生 其將盡而靡遺矣 可勝歎哉 - 길에서 굶어 죽은 시체를 거적으로 말아서 덮어둔 것을 보았는데 그 곁에 두 아이가 앉아서 울고 있다. 물었더니 그 어미라 한다. 어제 병으로 죽었는데 그 뼈를 묻으려 해도 비단 저들 힘으로 옮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땅을 팔 도구를 얻을 수가 없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나물 캐는 여인이 광주리에 호미를 가지고 지나가므로 두 아이가 말하기를, 그 호미를 얻으면 땅을 파고 묻을 수 있다고 한다. 슬프고 탄식스러움을 이길 수가 없다. 甲午 二月 十四日: 且路見餓屍 以藁席掩覆 傍有兩兒坐立 問之則曰 其母也 昨日病餒 而死 欲埋其骨 非但力不能移動 又不得堀土之具云 頃之有菜女 持筐荷鋤而過去 兩兒曰 若借得此鋤 則可以掘土而埋之云 聞來不勝哀歎哀歎 『쇄미록』은 조선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쓴 일기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인 1591년 11월부터 시작하여 1601년 2월까지 9년 3개월간의 내용을 담고 있다. 제목을 『쇄미록』이라 한 것은 『시경(詩經)』의 ‘쇄혜미혜(瑣兮尾兮) 유리지자(遊離之子)’에서 나온 것으로, 유리기(遊離記) 또는 피난의 기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쇄미록』은 장기간에 걸쳐 쓴 전란의 기록물이며, 생활사 연구에 단서가 되는 다양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쇄미록』의 전반부는 임진왜란의 발발과 여러 지역을 전전하는 힘겨운 피난 행적이 중심을 이룬다. 1592년 7월의 여름은 오희문에게 무척이나 더웠다. 피난의 고통이 처절했던 것은 7월 초부터 한 달 이상 거의 매일을 산 속 바위 밑에서 지낸 것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 초 4일: 산 속에서 바위 밑에서 잤다. - 초 5일: 산 속 바위 밑에 있었다. 아침에 사람을 보내서 현에 가서 적의 소식을 알아오게 하고 또 두 종을 보내서 감추어둔 바위구멍에서 옷을 가져다가 추위를 막을 계획을 세웠다. - 초 6일: 산 속 바위 밑에 있었다.…… 꿈에 경여 내외를 보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 초 7일: 골짜기 산 속 시냇가에서 잤다. 이 날은 곧 칠석 가절(佳節)이다.…… 갓모를 쓰고 밤을 새웠다. 이 밤의 괴로움은 입으로 형용해 말할 수가 없다. 꿈에 윤겸이 보이는데 딴 사람은 관동(館洞) 별실에 있고 윤겸이 밖에서 들어오더니 기둥 밖에서 절을 했다. - 초 8일: 골짜기 속 시냇가에서 잤다. 이 날은 곧 선군의 생신이다. - 초 9일, 10일: 골짜기 속 시냇가에서 잤다. - 11일, 12일: 산 속 바위 밑에서 잤다. 대개 적의 형세가 번져서 전일에 진안에 있던 적은 웅현(熊峴)을 넘어서 전주 땅에 진을 쳤고 영남의 적은 이미 무주 경계에 이르렀으니 반드시 합세해서 진주성을 삼키려는 것이다. 전쟁에서 저자 오희문이 경험한 여러 참상들에 대한 기록들은 당대에도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참상은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전언에 이르러서 절정에 달하고 있다. ‘그윽히 들으니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아서, 심지어 육촌의 친척도 죽여가지고 씹어 먹는다 하기에 항상 상서롭지 못하다고 했더니, 이제 다시 들으니 서울근처에서 전일에는 비록 한 두 되의 쌀을 가진 자라도 죽이고 빼앗는데, 근일에는 사람이 혼자 가면 쫓아 가서라도 죽여 놓고 먹는다.’ (「갑오일록」, 갑오 4월 2일)는 표현에서는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극한 상황까지 몰고 갈 수 있는지를 접하게 한다. 위에서 『쇄미록』의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 보았다. 우선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오희문의 철저한 기록정신이다. 전쟁 속에서도 거의 매일의 일기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피난 생활을 비롯하여 조정에서 들은 전황과 의병의 활약상, 각종 제사와 상업 행위, 질병과 치료, 여가 생활 등 다양한 내용들을 모두 담았다. 이러한 기록들은 임진왜란이라는 전쟁의 상황과 그 속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히 전달하고 있다. 이외에도 『쇄미록』에는 오희문의 관직에 대한 집념, 가문의 영광을 위한 모색, 외가와의 인연, 아들에 대한 기대, 딸과의 친분, 꿈속에 등장하는 가족 등 오희문 개인의 생각을 보여주는 내용들이 다수 기록되어 있다. 한 개인의 일기 기록이지만 당대의 사회상과 그와 함께 살아갔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 조선중기 생활사의 보고(寶庫)가 되는『쇄미록』에 대한 활발한 연구들을 기대한다. □ 420년 전 임진왜란의 기억 고전산문 낙민 2016.05.02. 『쇄미록(鎖尾錄)』은 조선중기의 학자 오희문(吳希文 1539~1613)이 남긴 일기이다.1) 임진왜란을 당하여 쓴 피난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일기 곳곳에는 일상의 삶을 살았던 당대인들의 생활 모습도 잘 드러나 있다. 2012년 4월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꼭 420주년이 되는 해이다. 『쇄미록』에 나타난 오희문의 피난기 일상의 삶을 통해 420년 전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 속으로 들어가 본다. 『쇄미록』에는 외가(外家)와 친분이 두터웠던 사실이 우선 주목된다. 오희문의 부친인 오경민은 처가의 기반이 든든하였기 때문에 혼인 이후 오랜 기간을 영동에서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연으로 오희문은 외가에 대한 정이 각별했고, 『쇄미록』에는 오희문이 피난 시절 외가인 영동을 찾아갔음이 나타난다. 1)『쇄미록』에 나타난 임진왜란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서는 고전의 향기 2010년 7월 12일 기사를 참조할 것, 이튿날 무주를 지나 영동의 삼촌 숙모의 집에 도착하니 삼촌은 부증(浮症)으로 인해 증세가 매우 위태로웠다. 여러 종형제가 모두 모여서 서로 만나 매우 기뻐했으나 삼촌의 병으로 인해 함께 즐길 수가 없었다. 하루를 머물고 황계의 남백원(南百源)의 집으로 향했다. 백원은 나의 종형으로서 어렸을 때 외숙모 밑에서 함께 자라서 정이 골육(骨肉)과 같은데 서로 15년 동안이나 떨어져 있다가 이제야 서로 보게 되니 슬프고 기쁜 마음이 교차한다. 이제 고원(故園)에 오니 사물을 보는 대로 회포가 일어난다. 살아 있고 죽은 것이 세상을 달리했으니 슬픈 눈물이 절로 떨어진다. 수일을 머물면서 외할아버지의 산소에 가 뵈면서 예전에 나를 기르느라 애쓰신 은혜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내가 이 고을에서 나서 외숙모에게 자랐으니 은혜가 (어머니와) 같고 망극한 까닭이다.2) [翌日 過茂州 到永同三寸叔母家 三寸得浮症 症勢極危 諸從兄弟皆會 相見甚喜 因三寸之病 未得共歡 留一日 向黃溪南百源家 百源乃余從兄 而童稚之時 同育於外母 情如骨肉 相離十五餘年 今得相見 悲喜交幷 今來故園 覽物興懷 存亡異世 感涕自零 留數日 尊拜外祖墓下 追減昔日劬勞之恩 不覺淚下 余生於此鄕 而養於外母 恩同罔極故也] 2)『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3쪽. 위의 기록에서 오희문은 어린 시절에 외가인 영동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외종형을 골육으로 표현하고, 외숙모의 은혜가 어머니와 같이 망극하다고 표현한 것에서 외가에 대한 깊은 정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러나, 오희문의 형제들은 모두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쇄미록』에서는 ‘나는 본래 한양 사람인데 여기에 손이 된 지가 이제 4, 5개월이 되니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 모두 친구와 같다. 한번 남쪽으로 오면서 이 고을을 바라보니 마치 내 고향과 같았는데, 이제 경계에 들어오니 내 마음이 또한 기쁘다. (余本京人 爲客於此 今之四五朔 上下若舊 一自南行 還望此縣 如吾故鄕 今來入界 吾心亦喜)’ 라는 표현에서도 오희문 스스로 한양인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임진왜란 직후인 1593년 5월의 기록에는 전란 후 한양으로 돌아온 후의 상황을 기록한 내용을 보면 오희문의 집안이 서울을 기반으로 했음을 볼 수 있다. 죽전동(竹廛洞)의 친가는 당초에 적이 들어와 진(陣)을 쳤지만 적이 나간 후에 가까이 있는 시민(市民)들이 먼저 들어와 도둑질해갔다. … 이현(泥峴, 진고개)에 있는 윤해(允諧)의 양가(養家)는 온 집안이 모두 철거되었고 깨진 기와와 헐어진 흙이 모두 남은 터에 가득하였다. …… 주자동(鑄字洞) 종가(宗家)에 가보니 모두 타 버렸고, 사당만이 홀로 남았는데 들으니 신주(神主)를 후원에 매안했다고 하므로 처음에는 들어가 보고 파내서 뵈려 하였으나 비 천복(千卜)의 남편 수이(遂伊)가 말하기를, 집안에 죽은 시체가 쌓여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한다.3) [竹前洞親家 則當初賊雖入陳 而賊出後 市人在近者 先入偸去 ... 泥峴生員養家 則全家盡撤 坡瓦毁土 皆滿遺址 ... 進見鑄字洞宗家 則盡燒而祠堂獨存 聞神主埋于後園 初欲入見掘出展拜 而婢千卜之夫遂伊曰 家中死屍積在 不可入] 3) 『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 「계사일록」癸巳 5월 8일, 582쪽. 위의 기록에서 나타나듯 오희문 집안의 근거지인 한양의 죽전동(竹廛洞)과 주자동(鑄字洞)은 전란 후 폐허로 변해 있었다. 전쟁 속에서도 오희문은 아들인 오윤겸 형제를 서당으로 보내 과거 진출을 독려하였으며, 그 결과에 집착하였다. 1594년 10월 오윤겸이 낙방했을 때는 크게 상심하였으며, 1595년 윤겸(允謙), 윤함(允諴), 윤해(允諧) 3형제가 별시 초시에 모두 합격하자 매우 기뻐하였다. 1597년에는 오윤겸이 별시문과에 급제하자, 온 집안의 기쁨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단, 윤해가 실패한 것이 유감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 집안에서 한 사람이 급제한 것만으로도 족한 일이니, 어찌 두 사람의 영광을 바랄 수 있겠는가? 전전해서 기별이 오나 사실 같지가 않다. 강경(講經)한 사람은 2백여명인데 급제자는 19인뿐이라고 한다. 문중(門中)의 5대조 이하는 등과(登科)가 없었는데, 이번에 나의 아들이 처음으로 이겨낸 것이다. 지금부터 뒤를 이어서 일어날 희망이 있으므로 일문(一門)의 경사를 말로 어찌 다 표현하리오. 한없는 기쁨이 넘친다. 하늘에 계신 아버님의 영혼이 필경 어둡고 어두운 저승에서도 기뻐하실 것을 생각하니 비감한 마음이 극에 달한다.4) [渾家之喜可言 但允諧見屈 是可恨也 然一家一得足矣 豈望兩得乎 傳傳來報 未知實的也 講經之人二百餘人 而所擢只十九人云云 吾門玄高以下 無登第之人 今者余子始捷 從此庶有繼起之望 一門之慶如何可言 尤極喜幸喜幸 先君在天之靈 必喜慶於冥冥之中 悲感之心亦極] 4)『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정유일록」정유 3월 19일. 593쪽. 라고 하여 큰 기쁨을 표시함과 함께 조상에 도리를 다했다는 비감한 심정을 표현하였다. 전쟁의 와중이었지만 장인을 비롯한 인척의 제사는 잊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 나타난다. ‘22일은 장인 제삿날이다. 나와 종윤 형제가 제사를 지냈고 주인(主人) 형 이빈(李贇)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에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二十二日 妻父之忌 吾與宗胤兄弟行祭 而主兄領軍到礪山 未還耳)5)’거나, ‘지난 달 29일은 곧 아버님의 돌아가신 날이다. 내가 이 고을에 있기 때문에 主人 형이 제사 음식을 많이 차려주면서 나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且去月二十九日 乃先君諱日 而吾在此邑 故主兄成備祭需 使吾設尊行之)6)’는 기록에서 제사를 꼼꼼히 챙긴 저자의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오희문은 개인의 제사 뿐만 아니라 역대 선왕의 제사를 걱정하였다. ‘7월 1일 이 날은 곧 인종(仁宗)의 제삿날이요, 지난 28일은 또한 명종(明宗)의 제삿날이다. 주상께서 파천하시어 이 두 날을 당하시면 어떻게 마음을 잡으실까? 북쪽 하늘을 바라다보면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 (七月初一日 是日乃仁宗諱日 而去念八 亦明宗忌辰也 主上播越 當此兩日 何以爲心 瞻望北天 不覺淚下)7)’라고 하면서 피난을 떠난 선조가 선왕의 제사를 어떻게 지낼지를 걱정했다. 아내가 자주 꿈에 등장하는 내용도 흥미롭다. ‘지난 19일 밤 꿈에 아내를 보니 완연히 옛날과 같았다. 내가 남쪽으로 온 후로 한 번도 꿈에 보이지 않더니 오늘 꿈은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살았는가 죽었는가, 슬프고 슬프도다. (去十九日也 夢見荊妻 宛如平昔 自余南來 一不入夢 而今日之夢 是何故也 生耶死耶 悲乎悲哉)8)’라는 기록이나, ‘새벽에 꿈을 꾸니 형포(荊布)9), 아내)가 집에 있는데 완연히 옛날과 같다. 막내 딸 단아(端兒)는 분을 바르고 깨끗이 단장했는데 내가 무릎 위에 안고 앉아 그 볼을 만졌다. (曉來夢見荊布在館洞家 宛如平日 末女端兒 塗粉淨粧 吾卽抱坐膝上 俯撫其腮)10)’는 기록은 아내와 딸에 대한 그리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병과 약재 처방에 대한 기록도 흥미를 끈다.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일찍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했다. 하나는 복숭아씨를 축문(呪文)을 외우면서 먹는 것이고, 하나는 헌 신 밑장을 불에 태워서 물에 섞어 먹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 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가지고 코 밑에 대어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 쓰던 방법으로서 효력이 가장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또한 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且今乃母主患瘧之日也 早施譴治之方三事 一則桃實呪符而食 一則古鞋底 燒火作木 和水而飮 一則燕子 糞作末酒浸 當鼻下 取臭氣 此皆古方也 得效最著而爲之 亦不難矣)11)’ 이외에 ‘임자중(任子中)이 집노루 고기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요월당에 앉아 배불리 먹었다. 마침 술이 없더니 추로(秋露) 한 병을 얻어서 경흠의 서모(庶母)의 집에서 각각 석잔 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且任子中 備家獐而來 與洞人輩相與坐於邀月堂飽食 而適無酒 覓得秋露一壺 於景欽庶母家 各飮三杯而罷)12)는 기록처럼,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장치로서 술을 자주 접했던 기록도 많이 나타나며, 힘든 상황이었지만 종정도(從政圖), 쌍륙(雙六) 등 여가 생활을 즐기던 모습도 나타난다. 『쇄미록』의 기록을 통하여, 임진왜란이라는 전란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일상의 삶을 살아갔던 오희문과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만나보았으면 한다. 5)『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8쪽. 6)『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9쪽. 7)『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일록」임진 7월 1일, 518쪽. 8)『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남행일록」, 508쪽. 9) 荊釵布裙의 준말. 형차는 後漢 梁鴻의 아내 孟光이 가시나무 비녀를 꽂은 고사에서 나온말이며, 포군은 천한 옷을 걸친 아내를 뜻한다. 곧 자신의 아내를 낮춘 말이다. 10)『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임진일록」임진 7월 3일, 519쪽. 11)『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을미일록」을미 6월 2일, 730쪽. 12)『쇄미록』(海州吳氏秋灘公派宗中 편, 1990),「계사일록」계사 8월 5일, 598쪽. □ 평범한 양반 오희문의 비범한 난중일기 '쇄미록'을 읽다 김석입력 2021.02.13. 09:00 여기 조선 중기를 살다간 한 평범한 양반이 있습니다. 이름은 오희문(吳希文, 1539~1613). 해주 오씨의 13대손으로 연안 이씨와 혼인했고, 평생 과거시험이나 벼슬과는 인연이 없었던 인물이죠. 말 그대로 평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냥 양반이었습니다. 하지만 오희문은 임진왜란을 이야기할 때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남았습니다. 그가 남긴 일기 덕분입니다. 《쇄미록(瑣尾錄)》(보물 제1096호) 《쇄미록(瑣尾錄)》. 오희문이 자기 일기에 붙인 제목입니다. '보잘 것 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이죠. 오희문은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인 1591년 11월 27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고 난 뒤 1601년 2월 27일까지 장장 9년 3개월, 3,368일 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썼습니다. 현재 전하는 필사본은 총 7책, 1,670쪽, 51만 9,973자입니다. 사료적 가치가 커 1991년 보물 제1096호로 지정됐죠. 그리고 마침내 2018년에 역주본이 전 8권으로 출간됩니다. 사료의 가치를 생각하면 늦은 감도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전문 연구자도 아닌 일반 독자가 이 방대한 일기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죠. 마침 임진왜란 특성화 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오희문의 일기를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가 열리고, 얼마 전엔 한국사학자 신병주 교수의 해설로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이 출간됐습니다. 오희문 지음, 신병주 해설 《한 권으로 읽는 쇄미록》(사회평론아카데미, 2020) 오희문은 전쟁에 직접 참여한 적도, 전쟁을 직접 목격한 적도 없습니다. 오희문의 일기는 피란 생활의 기록이죠. 전방이 아닌 후방의 기록입니다. 끝없는 피란 과정 속에서도 죽지 않으려면 먹어야 했고, 살 집이 필요했으며, 때가 되면 제사를 지내고, 자식들 결혼도 시켜야 했습니다. 임진년부터 정유년까지 7년을 질질 끈 전쟁의 여파에서 자유로운 조선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전쟁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죠. 평범한 양반이었던 오희문의 삶도 송두리째 바뀌었습니다. 전쟁은 칼 휘두르고 총 쏘는 전방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오희문의 일기는 똑똑하게 보여줍니다. 전쟁의 처참함을 증언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들은 읽는 내내 가슴을 때리죠. 어제 오는 길에 7, 8세 되는 아이가 큰소리로 통곡하고 여인 하나는 길가에 앉아서 역시 얼굴을 감싸고 슬피 우는 것을 보았다. 괴이해서 까닭을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지금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습니다."라고 했다. 내가 무엇 때문에 남편이 버리고 갔느냐고 물었더니 대답하기를, "세 사람이 떠돌면서 밥을 구걸했는데 이제는 구걸해도 얻지 못하여 굶어 죽게 생겼기에, 제 남편이 우리 모자를 버리고 갔습니다. 우리도 장차 굶어 죽을 것이 분명하니, 이 때문에 우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들으니 애통함과 측은함을 견디지 못하겠다. - 1593년 7월 15일 새벽에 출발했다. 몇 리 못 가서 울타리 밑에서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었는데, 어미를 부르며 슬퍼했다. 이웃 사람에게 물었더니, 어제저녁에 그 어미가 버리고 갔다고 한다.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니 불쌍하기 그지없다. 자애로운 하늘은 지각없는 짐승조차 쓸어 없애지 않건만, 가장 지혜롭다는 인간을 이처럼 극단으로 내모는가. 극단에 내몰리지 않았다면 어찌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렀겠는가. 크게 탄식한들 무엇하겠는가. - 1594년 1월 23일 인륜마저도 저버리게 한 끔찍한 배고픔은 전쟁이 불러온 가장 큰 후유증이었을 겁니다. 극한에 내몰린 인간이 스스로 인간성을 저버리는 현실, 그리고 배고픔을 끝내 견디지 못한 이들의 덧없는 죽음들…. 길에서 거적에 덮인, 굶어 죽은 시체를 보았다. 그 곁에 두 아이가 앉아서 울고 있어 물었더니 제 어미라고 한다. 병들고 굶주리다 어제 죽었는데, 그 시신을 묻으려고 해도 제힘으로 옮길 수 없을 뿐 아니라 땅을 팔 연장을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잠시 후 나물 캐는 여인이 광주리에 호미를 가지고 지나갔는데, 두 아이가 하는 말이 저 호미를 빌린다면 땅을 파서 묻을 수 있겠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슬프고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 1594년 2월 14일 영남과 경기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많은데, 심지어 육촌의 친척을 죽여서 먹기까지 했단다. 항상 불쌍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다시 듣자니, 전에는 한양 근처에서 쌀이라도 한두 되 가진 사람이라야 죽이고 빼앗더니 최근에는 혼자 가는 사람이 있으면 마치 산짐승처럼 거리낌 없이 쫓아가서 죽여 잡아먹는다고 한다. 이러다가는 사람의 씨가 말라 버리겠다. - 1594년 4월 3일 전쟁이 한창일 때는 이런 끔찍한 현실을 목격해야 했던 오희문과 가족에게는 목숨을 위협하는 또 다른 재난이 있었죠.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병마였습니다. 오희문 자신은 물론이고 그 가족도 학질과 종기 등에 끝없이 시달립니다. 그 와중에 오희문 부부가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은 끝내 목숨을 잃고 말죠. 막내딸 단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오희문의 일기를 보면 먼저 보낸 딸을 그리워하며 애통해하는 아버지의 절절한 마음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국립진주박물관 전시코너 ‘그림으로 보는 쇄미록’ 집집마다 쥐와 벼룩과 이가 창궐하고 굶주린 호랑이까지 수시로 출몰했던, 지금으로선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삶의 질곡들을 오희문은 낱낱이 적었습니다. 지독하리만치 성실한 기록이죠. 이리저리 피란을 다니면서도 1년 내내 돌아오는 수많은 제사를 거르지 않으려 애쓰고, 심지어 공이 있는 노비들의 제사까지 지내주었다는 기록을 읽노라면, 전통 시대에 '제사'라는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 시대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더듬어보게 되죠. 《쇄미록(瑣尾錄)》은 비슷한 시기에 경남 함양에서 의병 활동을 했던 시골 선비 정경운(鄭慶雲, 1556~?)의 일기 《고대일록(孤臺日錄)》과 더불어 평범한 양반이 쓴 비범한 기록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귀중한 기록들이 사라지거나 훼손되지 않고 후손들을 통해 대대로, 무사히 전해진 사실 자체가 진한 감동을 주죠. 그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면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희로애락이 생생하게 전해져 더 깊은 감동을 얻게 됩니다. 무려 9년 3개월 동안 이어진 오희문의 마지막 일기는 이렇게 끝납니다. "이후로는 종이도 다 되어 그만 쓰기로 했다. 또 한양에 도착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경운 고대일록 : http://news.kbs.co.kr/news/view.do?ncd=4320825 쇄미록 연구 : https://blog.naver.com/ss920527/222860607789 □ 전북 장수에서 임진왜란 맞은 오희문 '쇄미록'을 쓰다 이종근의 행복산책 2022. 6. 1. 10:40 -전북 장수에서 임진왜란 맞은 오희문 '쇄미록'을 쓰다 어릴 적 시골에서 큰 밥그릇에 가득 고봉으로 밥을 쌓아서 먹던 어른들의 밥그릇이 기억납니다. 조선시대 3대 사서인 오희문(1539∼1613)의 '쇄미록(瑣尾錄)'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의 군량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첩자가 알아내 온 바, 당시 조선군의 식사량으로 계산해보니 약 한달 분량이었습니다. 한 달 뒤면 왜군들의 식량이 떨어져 물러 갈 것이라 생각하고, 성 앞에 진을 치고 기다렸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달이 지나도 왜군들이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왜군들의 밥그릇은 조선군의 1/3 크기였고, 그래서 식량 아끼려고 밥그릇이 아닌 김치 종지에 먹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왜군이 식사량을 줄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조선 백성의 밥 한 그릇은 약 690g으로 지금보다 4~5배가 큰 엄청난 대식가였으며 1940년대까지도 비슷한 크기였습니다. 고려시대는 1040g, 고구려 시대는 1300g의 밥그릇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학자인 오희문은 임진왜란 시기에 쓴 일기인 '쇄미록'에 이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는 장을 담그기도 했는데 오늘날 메주에 해당하는 말장과 소금의 비율을 상세히 적어놓기도 합니다. '여종 강비의 남편 한복이 그물을 가지고 연못에 가서 고기를 잡아 붕어 17마리를 얻었기에 저녁밥 지을 쌀을 주고 바꿨다. 다음 날에 다시 잡으면 식혜를 담갔다가 한식 제사에 쓰련다' 임진왜란을 기록한 3대 저서로 난중일기, 징비록과 함께 오희문의 쇄미록을 꼽습니다. 쇄미록(瑣尾錄)은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뜻입니다. ‘쇄미’의 뜻은 시전(詩傳) 북풍(北風) 모구장(旄丘章)에 있는 '쇄혜미혜 유리지자(瑣兮尾兮 流離之子)'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피난에 대한 기록이란 의미입니다. 일기의 끝에 “이제 종이도 다하고, 또 서울에 다시 돌아와 유리(流離)할 때도 아니므로 붓을 그친다.”고 서술하여, 이 글의 목적이 피난 중의 일을 기록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 토목 일을 맡은 관리였던 바, 지방에 사는 외거노비들에게 공물을 받을 목적으로 1591년 11월 27일 한양을 떠났다가 전라도 장수에서 임진왜란을 맞은 후 1601년 한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9년 3개월 동안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기를 썼씁니다. “지난번에 어떤 의병이 밤에 무주 적진으로 들어가 진영 밖 망대에서 숙직하던 왜놈을 활로 쏘고 수급을 베어 와 바쳤다고 했는데, 지금 다시 들으니 베어 온 것은 왜놈의 머리가 아니라 목화를 따다가 적에게 살해되어 버려진 무주 백성의 머리였다. 머리털만 제거한 뒤 베어 온 것이다. 의병장이 그런 줄도 모르고 왜놈의 머리라고 여겨 순찰사에게 수급을 바쳤다고 한다. 참으로 우습다”(임진남행일록, 1592년 9월 13일) 오희문은 각종 풍문과 문서를 글로 남기는 침략하고 노모와 처자의 생사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각종 문서를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소문의 전달자, 문서 작성일시와 작성자를 빼놓지 않고 기록했습니다. '쇄미록'에는 가자미 등 어류 44종, 오징어 등 연체류 4종, 게·전복 등 갑각류와 패류 6종 등 다양한 해산물이 등장합니다. “명복이 함열에서 왔다. 함열 현감이 정미 3말, 생준치 2마리, 꿀 5홉, 녹두 1되를 보냈는데, 다시 되어 보니 쌀 5되가 줄었다. 준치와 꿀은 길 가던 사람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어두워져서 돌아온 걸 보니 분명 고기를 찌고 밥을 지어 먹은 게다. 병을 앓는 집에서 꿀을 구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니, 분명 도중에 팔아서 쓰고는 빼앗겼다고 핑계를 대는 것일 게다. 몹시 괘씸하고 얄밉다. 충아 어미와 인아가 아파서 이것들을 가져오면 죽을 쑤어 먹이려고 했는데, 잃어버렸다고 핑계를 대니 더 화가 난다.(갑오일록, 1594년 5월 8일) 16세기 조선 중기의 수산물 조리법을 짐작할 수 있는 음식명도 많이 나오는데, 사용된 조리법은 죽, 탕, 찜, 삶기, 구이, 회, 포, 젓갈, 식해, 건조, 절임 등입니다. “이른 아침에 물고기를 두어 말을 얻었는데 모두 크기가 전일에 잡았던 것이 아니다. 그중에 빙어는 크기가 청어만 한 것이니 20마리나 된다. 회를 쳐서 먹으려 했으나 겨자가 없고 또 술이 없어서 먹지 못했으니 한스럽다. 모두 쪼개서 말리게 하고 그 나머지 큰 것을 구워 먹었다”(1597년 10월 6일) 같은 대목은 당시 생활상을 엿보게 해줍니다. ‘임자중(任子中)이 집노루 고기를 가지고 와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요월당에 앉아 배불리 먹었다. 마침 술이 없더니 추로(秋露) 한 병을 얻어서 경흠의 서모(庶母)의 집에서 각각 석잔 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且任子中 備家獐而來 與洞人輩相與坐於邀月堂飽食 而適無酒 覓得秋露一壺 於景欽庶母家 各飮三杯而罷)'는 기록처럼, 생활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장치로서 술을 자주 접했던 기록도 많이 나타납니다. ‘또 오늘은 어머님께서 학질을 앓으실 날이어서 일찍 학질 떼는 방법 세 가지를 했다. 하나는 복숭아씨를 축문(呪文)을 외우면서 먹는 것이고, 하나는 헌 신 밑장을 불에 태워서 물에 섞어 먹는 것이요, 하나는 제비 똥을 가루로 만들어 술에 담가가지고 코 밑에 대어 냄새를 맡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모두 옛날 쓰던 방법으로서 효력이 가장 있다고 해서 하는 것이요, 또한 하기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1594년 2월 10일자엔 '먹을거리가 부족해 사내종들에게는 아침에는 7홉을 주고 저녁에는 죽을 쑤어 나누어 먹였다'고 나옵니다. '쇄미록'에는 “조선의 일반적인 성인 남자는 1끼에 7홉이 넘는 양의 쌀을 먹는다”고 적혀 있습니다. 당시 7홉은 420g 정도로 현재 공깃밥의 2배입니다. 당시 7홉을 지금의 계량 단위로 환산하면 1,260㎖나 된다. 290㎖ 밥그릇으로 5그릇입니다. 보통사람은 요즘 사람의 3배, 양이 큰 사람은 5배의 밥을 먹었다고 봐야 합니다. 전쟁통인데도 쌀 일곱 홉으로 밥 한 그릇을 지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수북하게 담은 감투밥·머슴밥·고봉밥은 날마다 꾸는 꿈이었습니다. 먹을거리가 눈앞에 보이면 아무리 폭식을 했다고 해도, 결국 쌀밥을 많이 먹는 데 목숨을 걸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대식의 쌀밥을 위해서 나라에서도 곡물 생산에만 집중했습니다. '쇄미록'에는 “듣자니 시장에서 큰 전어 한 마리의 값이 쌀 석 되 값”에 이른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예로부터 맛이 으뜸이니 본전 생각 따위는 접어두고 폭풍 흡입한다는 의미입니다. '쇄미록'에는 정사(正史)에서는 볼 수 없는 생생한 이면의 역사가 펼쳐진다. 때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던 시대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도 하고, 막연히 알고 있던 개념적 사실에 구체성을 부여하기도 합니다. 오희문은 전쟁으로 어렵고 힘든 날을 보내야 했지만 남편으로, 아버지로, 아들로, 주인으로, 가장으로서 여러 역할을 해내며 16세기를 살았고 그 하루하루를 일기에 담아 오늘에 전했습니다. 420여 년이 지난 지금, 잠시나마 코로나19의 힘든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꿈꿔보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표지'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권말'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임진남행일록'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갑오일록'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계사일록'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정유일록'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식기'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기해일록' 보물 제1096호 명 칭 : 오희문 쇄미록 (吳希文 瑣尾錄)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필사본/ 일기류 수량/면적 : 7책 지정(등록)일 : 1991.09.30 소 재 지 :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35, 국립진주박물관 (남성동,진주성)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오문환 관리자(관리단체) : 국립진주박물관 □ "조선왕조 양반사회 실상은"…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 특별전 2020-10-12 11:00:31 진주박물관, 13일~내년 3월7일…보물 등 52점 전시 [진주=뉴시스] 정경규 기자 = 경남 진주박물관은 오는 13일부터 내년 3월7일까지 기획전시실에서 임진왜란을 겪은 한양 양반인 오희문(1539~1613)의 난중일기 '쇄미록-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특별전을 연다고 12일 밝혔다. 조선중기의 양반 지식인 오희문은 임진왜란(1592~1598)을 몸소 겪으며 9년3개월(1591년11월27일~1601년2월27일)동안 거의 매일 일기를 기록했다. 이번 특별전은 오희문의 일기 '쇄미록'을 집중조명한 것으로 7년 전쟁의 참상과 지옥같은 현실속에서도 지속된 인간 삶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자리이다. 이번 특별전은 진주박물관이 지난 2018년 새롭게 역주한 ‘쇄미록’ 출간을 계기로 기획됐다. 전시품으로는 오희문의 초상, 그의 셋째아들 오윤함의 초상, 오희문과 해주오씨 묘지명 등이 선보인다. 특히 오희문의 초상은 해주오씨 추탄공파 종중에서 권오창 화백에게 의뢰해 새롭게 제작했다. ‘쇄미록’1~7책은 한 책씩 살펴보면서 오희문의 숨결을 느껴 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이외에도 임진왜란 시기 중요한 개인일기로 남아 있는 ‘김용 호종일기(보물 제484호)’, ‘조정 임진란 기록 일괄(보물 제1003호)’, ‘노인 금계일기(보물 제311호)’등 보물 4건 18점을 포함해 총 52점을 선보인다. 전란 속에서 일기를 쓴 오희문은 과거시험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던 점에서는 평범한 양반이다. 그러나 오희문의 큰아들 오윤겸(1559~1636)은 인조때 영의정을 지냈으며, 손자인 오달제( 1609~1637)는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키다 청나라에 끌려가 죽은 삼학사 중 한 사람으로 이름을 남겼다. 이런 배경으로 오희문이 남긴 ‘쇄미록’에는 전쟁과 관련된 기록은 물론 사노비, 음식, 상업, 의료 등 16세기 말 사회경제사와 생활사 관련 내용이 풍부하다. 임진왜란 당시 쓰인 다양한 기록물과 차별화되며 더 중요하게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배계층이었던 양반과 이 시대를 특징짓는 이른바 ‘양반사회’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쇄미록’ 만큼 도움이 되는 책도 없다. 이처럼 중요한 자료이지만, 기록물 한 가지로 특별전을 기획한 시도는 흔치 않았다. 이번 ‘쇄미록’ 특별전시는 일반적인 고서 전시를 탈피해 ‘쇄미록’ 책 자체와 여기에 실린 다채로운 내용을 관람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수치를 활용한 다양한 도표와 디지털 영상물 및 그림 제작 등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다. ‘쇄미록’의 주요 장면은 수묵 인물화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신영훈 작가의 21컷 그림으로 담아냈다. 9년 3개월 동안의 전반적인 내용을 그림책을 보듯 일별할 수 있도록 했다. 관람이 끝난 후 주요 그림들을 전통제책법인 오침안정법으로 묶어 가져갈 수 있도록 체험 공간도 마련했다. 또 관람객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 오희문의 인물 관계도를 게임 요소를 곁들인 터치스크린 콘텐츠로 제작했다. 진주박물관 관계자는 "코로나19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는 올해 가을 우리가 처한 현실과 비슷한 점이 많다"며 "가족이나 지인끼리 방문해 특별전을 관람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고 말했다. [쇄미록] 오희문의 난중일기 슬샘 ・ 2021. 5. 24. 12:56 안녕하세요^^ 슬샘입니다.​ <국립#진주박물관 기획#특별전>으로 오희문의 난중일기 쇄미록이 2020年10月13日~2021年8月15日 전시 관람되고 있는 소식을 우연하게 접하게 돼 22일(토)다녀왔어요. 쇄미록이란? 오희문이 1591年11月27日부터 1601年2月27日까지 9년3개월 동안​ 쓴 일기입니다​ 한양의 양반 #오희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5개월 전 한양을 떠나 남쪽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전라도 장수에서 뜻밖의 임진왜란 소식을 듣게 된 오희문은 어머니와 처자식과 헤어진 채 1년여를 보내다 가족과 다시 만나 충청도 임천과 홍주, 강원도 평강으로 유랑의 삶을 어어갑니다. '쇄미록'이란 <보잘것없이 떠도는 자의 기록>이란 의미입니다.​ 그가 임진왜란 속의 삶의 여정이 이 [쇄미록]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유랑의 기록쇄미록은 평강에서 한양으로 돌아가면서 끝을 맺습니다. -쇄미록의 일부 中-​ 쇄미록은 모두 7권으로 되어 있어요. 일기를 쓴 해마다 '계사일록,갑오일록, 을미일록'등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임진년(1592年)에 기록한 제1책을 직접 체험해서 만들어 볼 수도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