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고대일록(孤臺日錄)》 해제(解題) / 정우락 경북대 교수

이름없는풀뿌리 2022. 9. 22. 08:20
정경운 《고대일록(孤臺日錄)》 해제(解題)
 
樂民(장달수)추천 0조회 620.12.12 00:07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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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일록(孤臺日錄) https://cafe.daum.net/jangdalsoo/k4T9/18


《고대일록(孤臺日錄)》 해제(解題)
- 어느 시골선비의 전쟁체험과 위기의 일상에 대한 기록 -
정우락 경북대 교수


1. 서지 및 구성상의 특징


전쟁에 관한 기록은 다양한 장르를 통해 전해진다. 시가(詩歌)를 비롯하여 설화나 소설, 혹은 전(傳) 등의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고대일록》과 같은 실기(實記)를 통해 전해지기도 한다. 특히 실기는 전쟁의 여러 국면을 가장 효과적으로 형상화한다. 여기에는 전쟁의 원인을 밝히는 것에서부터 전쟁으로 인한 참상과 그 극복의지 등이 두루 제시되어 있다. 실기는 설화나 소설과는 달리 한 개인의 전쟁체험을 역사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비교적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중요하다. 그러나 의도된 공적인 기록물은 아니다. 풍문을 참고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공문서 내지 사문서 등 고문서를 다양하게 활용하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에 독특한 자료적 가치가 있다.
《고대일록》은 경상 우도인 함양 일대에서 초유사 김성일의 소모 유사(召募有司), 의병장 김면의 소모 종사관(召募從事官) 등으로 활약한 정경운(鄭慶雲 : 孤臺, 1556~?)이 쓴 전쟁체험에 대한 기록이다. 그는 전쟁 발발 이후 의병활동을 하면서 자세하게 전쟁을 경험하였고, 그의 경험범위를 벗어난 전황은 전언이나 편지 혹은 조보(朝報)나 방문(榜文) 등의 각종 공사문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정유재란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 피난 생활을 하면서 갖은 고초를 당한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병화로 소실된 남계서원(藍溪書院)을 복원하게 되는데, 이때 서원 이건과 위차 문제를 중심으로 발생한 함양 선비사회의 갈등, 그 중심에 서 있었다. 《고대일록》은 바로 이 같은 배경하에서 기술된 것이다.
《고대일록》은 4권 4책으로 구성된 해서체 필사본으로 총 514쪽이다. 광곽(匡廓)의 크기는 가로 19.6cm, 세로 25.7cm이며 한 면이 12줄로 되어 있고, 각 줄은 새로 시작하는 날짜는 28자 내외, 새로 시작하는 날의 기사가 한 줄을 넘어 이어서 쓰는 경우는 24자 내외로 되어 있다. 필사본인 관계로 판심과 어미가 없으며 계선도 표시되지 않았다. 주석이 필요한 경우는 그 아랫부분에 쌍행(雙行) 혹은 단행(單行)으로 처리하였고, 필사하다가 빠진 부분이 있으면 작은 글씨로 첨가하였으며, 글자가 뒤바뀐 부분은 알기 쉽게 글자 옆에 기호로 표시해 두었다.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경우는 작은 글씨로 ‘결(缺)’이라 써 놓았다.
이 책은 1592년(선조 25) 4월 23일부터 1609년(광해군 원년) 10월 7일까지 기록되어 있으니 약 18년간의 기록이다. 권1은 1592년(선조 25) 4월 23일부터 1593년(선조 26) 12월 30일까지 2년간, 권2는 1594년(선조 27) 1월 1일부터 1597년(선조 30) 12월 30일까지 4년간, 권3은 1598년(선조 31) 1월 1일부터 1602년(선조 35) 12월 28일까지 5년간, 권4는 1603년(선조 36) 1월 1일부터 1609년(광해군 1년) 11월 1일까지 7년간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이유가 분명치 않으나 1599년 6월 11일부터 1600년 5월 6일까지 약 11개월의 일기는 아무런 표시가 없이 결락되어 있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대일록》은 정경운이 직접 쓴 것이 아니다. 김윤우(金侖禹)의 연구에 의하면 정경운이 쓴 원본 《고대일록》은 초서체로 쓴 것인데 이 책은 정경운의 제4자인 정주석(鄭周錫)이 소장하고 있었다. 이 책은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8대손 정동규(鄭東圭, 1869~1940)에 의해 해서로 다시 필사되었고, 9대손 정용호(鄭龍鎬) 대에 와서는 함양군 휴천면 목현리에 큰불이 나서 원본 《고대일록》은 소실되고 말았다. 그리고 10대손 정성하(鄭性河) 대에 이르러 혼인 관계를 맺고 있던 정인홍의 방손 정이상이 6부를 복사하였으며, 1986년에 경상대 오이환(吳二煥) 교수가 이를 발굴하여 세상에 널리 알렸다.
현전하는 《고대일록》에는 서지 및 구성상 몇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 원본에 대한 필사본임을 알 수 있다. 《고대일록》은 1529년 4월 20일부터 시작하는데 이에 의하면 ‘왜적(倭賊)이 상륙했다. 일기 가운데 십여 장이 모두 떨어져 나가 첫 부분은 살펴볼 수가 없다.〔1592년 4월 20일 조〕’라고 기록해 두고 있다. 이는 정동규가 해서로 필사할 때 원본이 이미 10여 장 없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현전하는 필사본 《고대일록》에는 결락된 부분이 80여 곳이나 발견된다. 이것을 《고대일록》에는 ‘결(缺)’로 표시해 두고 있는데, 정동규가 필사할 당시 원본이 이미 많이 훼손되어 있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이로 볼 때 《고대일록》은 정동규가 읽기 어려운 초서를 해서로 바꾸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였고, 그 내용을 오래 전하기 위하여 새 종이에 필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앞부분은 자세하게 기록하고 뒷부분은 소략하게 기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1이 2년간, 권2가 4년간, 권3이 5년간, 권4가 7년간의 일기이다. 각 권의 분량은 대체로 비슷한데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1592년 4월 23일부터 1593년 12월 30일까지의 2년간 기록은 가장 자세하고, 1603년 1월 1일부터 1609년 11월 1일까지 7년간의 기록은 가장 소략하기 때문이다. 《고대일록》의 기술방법은 먼저 날짜를 쓰고 사안에 따라 일을 서술하였으며, 다른 내용을 서술할 때는 ‘○ ’표를 하고 그 아래 기록을 하였다. 날짜가 바뀌면 행을 바꾸어 기술하였다. 이 방법을 앞쪽에서는 대체로 유지하지만, 뒤쪽으로 갈수록 ‘○ ’표 아래 다음 날의 일들을 기록하기도 하고, 특별한 일이 없을 때는 며칠씩 건너뛰기도 한다. 건너뛰기는 권4로 갈수록 더욱 빈번하게 나타난다.
셋째, 정경운이 시문집과 일기를 쓰면서 활용한 자료집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대일록》은 기본적으로 전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을 산문으로 기술한 것이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특별한 감흥을 시문의 형태로 남기기도 한다. 시문의 경우 용암(龍岩)에서 오장(吳長 : 思湖, 1565~1617)을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고 지은 〈장상사(長相思)〉와 목단과 측백으로 관인법(觀人法)을 말한 〈목단측백설(牧丹側栢說)〉은 작품을 일기 속에 수록해 두었다. 그러나 거의 ‘영일절(詠一絶)’, ‘성일절(成一絶)’, ‘음일절(吟一絶)’, ‘정일절(呈一絶)’로 표기하거나 ‘견시집(見詩集)’이라 하여 지은 시문집이 따로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일기를 쓰는 데 활용한 자료인 관보(官報), 격문(檄文), 교문(敎文), 통문(通文), 사신(私信) 등은 모두 《별록》에 정리해 두었는데 《고대일록》에는 ‘상견별록(詳見別錄)’ 등으로 표시해 두었다. 별록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고대일록》을 쓰면서 활용된 고문서들이 존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고대일록》은 그의 8대손 정동규에 의해 다시 필사된 것이다. 필사 과정에서 이중으로 필사되는 등 오류가 보이기도 하지만 일부를 제외하면 원형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락된 부분은 ‘결(缺)’로 처리하여 오히려 자료적 신빙성을 더욱 확보할 수 있게 했다. 위에서 언급한 서지 및 구성상의 특징을 고려할 때 《고대일록》은 그 짜임새 면에서 문제가 없지 않으나 바로 이 점이 오히려 전쟁체험을 사실적으로 전한다. 《고대일록》은 1992년과 1993년 2년에 걸쳐 경상대 남명학연구소에서 《남명학연구》 2집과 3집에 권1과 권2, 권3과 권4를 각각 영인하여 소개한 바 있으며, 2001년에는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임진왜란사료총서(壬辰倭亂史料叢書)》 10으로 영인해 낸 바 있다.
《고대일록》에 대한 그동안의 연구는 이 책에 대한 해제적 성격을 띤 연구, 정경운의 전쟁체험을 다룬 연구, 함양지역 재지사족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고대일록》을 단편적으로 활용한 연구 등으로 나누어진다. 본 해제는 이상의 연구성과를 참고하면서 정경운의 자술이력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재구하고, 《고대일록》에 나타나는 서술의식을 먼저 살펴본 다음, 정경운이 《고대일록》에서 전쟁을 어떻게 형상화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발생한 자신의 위기적 삶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논의의 중심에 둔다. 이를 통해 우리는 향촌에 살았던 일개의 선비가 전쟁을 만나 어떤 역할을 하며, 또한 그의 삶은 전쟁으로 인해 어떤 위기에 봉착하는가 하는 부분을 미시사적 입장에서 자세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2. 정경운의 자술이력


정경운은 진양인(晉陽人)으로 1556년(명종11) 2월 29일 경상도 함양읍(咸陽邑) 백연리(栢淵里) 돌뿍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자를 덕옹(德顒), 호를 고대(孤臺)라 하였는데 자호는 위천(渭川)의 뇌계(㵢溪) 가에 소고대(小孤臺)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일록》에도 수없이 나오듯이 정경운은 이 고대에서 자연을 감상하거나 여러 벗들과 술을 마시거나 하면서 자신의 정신적 안착지로 삼았다. 그는 강린(姜繗 : 濫蔭, 1568~?)의 말을 빌어 ‘고대는 호랑이가 걸터앉은 듯하고, 긴 숲은 교룡이 춤추는 듯하며, 바람과 구름이 감싸고 있고, 빼어난 경관이 펼쳐져 있다.〔1602년 11월 11일 조〕’면서 《고대일록》에 특기해 두고 있는데, 그의 고대 사랑을 충분히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경운의 시조는 첨정(僉正)을 지낸 정중공(鄭仲恭)이다. 그의 9세손은 절제사(節制使) 훈(薰), 10세손은 현신교위(顯信校尉) 확(確)이다. 11세손 효충(孝忠)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희철(希哲)과 희보(希輔)가 바로 그들이다. 이 가운데 희보는 정경운의 조부로 호가 당곡(唐谷)이다. 그는 남해군 이동면(二東面) 초양리(草陽里)에서 출생하여 17세 되던 해에 함양의 동면 모간리(毛看里)로 이주하여 세거하면서 이후 그 후손들이 함양지방에 널리 분포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정희보는 삼남의 대학자로 불릴 만큼 유명하였으며 성리학과 《주역》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그의 제자로는 노진(盧禛 : 玉溪, 1518~1578), 양희(梁喜 : 九拙, 1515~1580), 도희령(都希齡 : 養性軒, 1539~1566) 등 유명한 선비들이 많았다.
정희보는 업(業)ㆍ승(乘)ㆍ율(栗)ㆍ기(棄)를 낳고, 율(栗)은 경손(慶孫)과 경운(慶雲)을 낳았다. 정경운의 아버지 율은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를 지냈으며 유호인(兪好仁 : 㵢溪, 1445~1494)의 손서가 되면서 돌뿍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 결과 정경운은 외가에서 나서 자라게 된다. 정경운의 생애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고대일록》 1605년 4월 7일 조에 ‘포로가 되었던 사람들의 배 한척이 일본으로부터 도망하여 왔고, 유정(惟政)이 왜국의 대도(大都)에 들어갔다고 한다.〔1605년 4월 7일 조〕’라고 기록한 후, 스스로 자신의 이력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에 그는 50세까지의 자기 생애를 간략히 회고한다. 이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하자.


나는 두 살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외조부(外祖父)께 의지하여 길러졌다. 아홉 살에 외왕부(外王父)께서 또 돌아가시고 열세 살에 자모(慈母)께서 돌아가셨다. 양부모가 모두 돌아가셔서 맏형에게 수학(受學)하였고 외왕모(外王母)께 길러졌다. 열다섯에 또 여의었으며, 이때부터 형 보기를 아버지와 같이 하였고 형수 보기를 어머니와 같이 하였다. 열아홉에 또 형님을 잃었는데, 학업은 어(魚) 자와 노(魯) 자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몸과 그림자가 서로를 위로할 지경이었다. 경오년(庚午年, 1570, 15세)부터 기묘년(己卯年, 1579, 24세)까지 형수를 우러르며 목숨 이어 나가기를 마치 한유(韓愈)가 정부인(鄭夫人)에 대해서 하는 것과 같이 하였다.〔1605년 4월 7일 조〕


자술이력서의 들머리로 자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회고한 부분이다. 그 스스로 말하고 있듯이 2세의 부친 사망, 9세의 외조부 사망, 13세의 모친 사망, 15세의 외조모 사망, 19세의 형 사망 등 그의 어린 시절은 가족의 사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이때문에 어린 시절에는 형에게 수학하고 외조모에게 길러졌는데 그는 자신의 고달픈 처지를 몸과 그림자가 서로 위로한다는 의미의 ‘형영상조(形影相弔)’로 표현하였다. 이 같은 불우를 겪었지만 그는 스스로 의리에 대한 자부심으로 가득했다. ‘외롭고 곤궁한 가운데에도 오히려 의(義)와 이(利)의 구분을 알아, 집이 성시(城市)에 가까웠으나 한 번도 시리(市利)를 도모하는 잘못이 없었다.〔1605년 4월 7일 조〕’라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나아가 다음과 같이 누구를 스승으로 모시고 따랐는가 하는 부분도 명확히 기록해 두고 있다.


신사(辛巳)년(1581, 26세)에 비로소 스승을 찾을 줄 알아 내암(來庵) 선생께 청하였는데, 선생께서 못난이로 물리치지 않으니 그 후 잇따라 출입하였다. 매양 ‘가을달이 차가운 강물에 비친다〔秋月照寒水〕’는 시구(詩句)를 생각하며 부모와 같이 우러르고 신명(神明)과 같이 믿었다.〔1605년 4월 7일 조〕


스승 정인홍과의 만남을 기록한 부분이다. 정경운이 당시 선생으로 부른 사람은 정인홍을 비롯하여 김면(金沔), 정구(鄭逑)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 물론 정인홍은 ‘선생’으로만 표시하며 극진한 예우를 하였고, 많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의 정치적 부침(浮沈)이나 질병 등을 소상히 기록해 두었다.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부모같이 우러르고 신명같이 믿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같은 글에서 ‘노둔함을 채찍질하여 선생께 나아가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때로 편지를 부쳐 안부를 묻고 연달아 이끌어 주는 은덕을 받았다.〔1605년 4월 7일 조〕’라고 한 것도 모두 이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벗은 어떤 사람이 있었는가.


(가) 마음으로 현인을 사모하면서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서 약간의 옛 책을 읽고 자득함이 있었고, 박공간(朴公幹), 박경실(朴景實), 노지부(盧志夫), 정현경(鄭玄卿), 강극수(姜克修) 등과 벗하였다.〔1605년 4월 7일 조〕
(나) 강위서(姜渭瑞)와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우산(牛山)의 언덕에 함께 집터를 정하였다. 정(情)이 같고 지(志)가 같고 사우(師友)가 같고 학업(學業)이 같고 궤안(几案)이 같고 비방이 같았다. 아양(峨洋)의 사이에 비견하였고 간담(肝膽)을 서로 내비쳤는데, 완전히 기러기가 무리 지어 날아올라 멀리 가려는 것 같았다.〔1605년 4월 7일 조〕


정경운이 친밀하게 사귀었던 벗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다. (가)에서는 다소의 책을 읽어 자득함이 있었다고 하며 그와 절친했던 벗을 소개하고 있다. 박여량(朴汝樑 : 感樹齋, 1554~1611), 박손(朴𧂍 : 景實, ?~1597), 노사상(盧士尙 : 迂溪, 1559~1598), 정경룡(鄭景龍 : 玄景, ?~1594), 강린(姜繗 : 濫蔭, 1568~?)이 바로 그들이다. (나)에서는 지기들 가운데서도 사생지교(死生之交)를 맺고 간담상조(肝膽相照)의 관계라며 강응황(姜應璜 : 白川, 1559~1636)을 특별히 소개하고 있다. 이 밖에도 《고대일록》에 자주 등장하는 정경운의 벗으로는 정순(鄭淳 : 士古, 1556~1597), 문경호(文景虎 : 嶧陽, 1556~1619), 노주(盧冑 : 風皐, 1557~1617), 박이장(朴而章 : 龍潭, 1540~1622), 하혼(河渾 : 夢軒, 1548~1620), 정홍서(鄭弘緖 : 松灘, 1571~1648), 오장(吳長 : 思湖, 1565~1616), 노사예(盧士豫 : 弘窩, 1538~1594) 등이 있어 그의 지기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을사(乙巳)년〔1605, 50세〕에 상(喪)을 만난 후에는 인사(人事)에 뜻을 두지 않고 다만 삼현(三賢)의 사당이 풀숲에 매몰될까 염려할 뿐이었는데, 강극수(姜克修)가 반궁(泮宮)에 유학하여 돌아오지 않아 신위를 봉안하는 것을 쉽게 기약할 수가 없었다. 쇠하고 슬픈 몸을 애써 일으켜 다반으로 조처하여서 날을 택하여 이안(移安)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고을 사람들은 혹 죄로 여기기도 하고 혹 소홀함을 지적하기도 하고 혹 성례(盛禮)에 참여하지 못한 것으로써, 분을 품고 이를 갈며 비어(飛語)를 날조하며 음험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여 반드시 죄인의 처지에 빠뜨리고자 하였다.〔1605년 4월 7일 조〕


전쟁이 끝난 후 남계서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향촌의 분열상을 기술하고 있다. 정경운은 39세(1594년)에 남계서원의 유사(有司)가 되어 여러가지 일을 보게 되는데, 50세 이후로는 인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서원의 일만 전심하게 된다. 그러나 당시 남계서원에서는 ‘정여창-노진’으로 이어지는 선진 측과 ‘정여창-강익’으로 이어지는 후진 측이 정여창을 주향으로 하면서도 노진과 강익의 위차문제를 두고 대립하게 된다. 위의 자료에서 정경운은 당시의 고달픈 심정을 기술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이 그는 두문(杜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다.


마치 외로운 학은 무리가 적고 솔개와 갈가마귀가 많은 것 같았다. 이로부터 뜻이 인사(人事)를 사절하고 두문(杜門)하여 허물을 살폈다. 허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비웃었는데, 마치 기러기가 마시지 않고 쪼지 않고 듣지 않고 보지 않으며 구름 속에서 날개를 접고서 기색을 살피며 드물게 나와 거의 그물에 걸리는 재앙을 면하는 것 같이 하였다.〔1605년 4월 7일 조〕


남계서원 운영권을 두고 벌인 신구의 대립과정에서 정경운은 선진 측으로부터 영구히 손도(損徒)당하고 강응황(姜應璜:白川, 1559~1636) 등은 4개월 동안 손도당하였다. 여기서 나아가 선진 측은 후진 측의 배후로 지목되었던 정인홍과 정구의 영향력을 배제시켰다. 이 분쟁은 결국 후진 측의 승리로 끝나기는 하지만 정경운은 이 사건을 거치면서 재앙의 그물에 걸리지 않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위에서 보듯이 자신을 외로운 학으로 상대를 솔개ㆍ갈가마귀로 비유하면서 스스로의 심정을 드러냈으며, 인사를 사절하고 두문불출하기로 마음먹었다. 1617년 그가 62세 되던 해에 남계서원의 원장이 되어 실무를 담당하기도 하지만 정경운은 만년을 비교적 조용하게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정경운은 함양의 재지사족으로 비교적 여유 있는 가세를 자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초년은 부모를 여의고 형수에게 의탁하여 살았으니 매우 불우하였다고 하겠다. 26세에 정인홍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되며, 강응황과 사생지교를 맺으면서 우의를 돈독히 하였고, 전쟁기와 그 이후 남계서원의 일을 맡아보면서 서원의 이건과 향현사(鄕賢祠)의 위차문제를 둘러싸고 일어났던 향촌 내 갈등의 중심에서 괴로워한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50세 이후로는 두문을 선언하며 세상일을 접고자 하였다. 그의 자술이력에서는 임진왜란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특별히 기록하지는 않았다. 《고대일록》 자체가 이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따로 기록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일 터이다.


3. 《고대일록》의 서술의식


《고대일록》의 서술의식은 단순하지가 않다. 이것은 교열과 교감과정을 거친 문집이 아니라 그날의 중요한 일이나 인상이 깊은 것을 글감으로 선택하여 쓴 체험적 기록이기 때문이다. 날씨를 대체로 생략하는 등 특이점이 발견되기는 하나 연월일을 적고 그날의 일기를 쓰는 일기쓰기의 일반적인 방식은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대일록》은 이 같은 일기의 일반적인 글쓰기 방식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정경운의 독특한 서술의식이 내포되어 있어 이를 정밀하게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정경운의 세계관과 직결되는 것이어서 중요한 것이 아닐 수 없다.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고대일록》에 나타난 서술의식의 기반은 춘추대의(春秋大義) 정신에 있다. 춘추대의는 사마천이 《사기》에서 밝혀 놓고 있듯이 ‘위로는 삼왕의 도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의 기강을 분변해 혐의를 분별하며, 시비를 밝히고, 의심스러워 결정하지 못하는 것을 결정하며, 선을 선으로 여기고 악을 악하게 여기며,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고 불초한 이를 천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망한 나라를 보존하고 끊어진 세계를 이어 주며, 잘못된 것은 보충해 주고 사라진 것은 복원시키는 것이 왕도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효용성 역시 제기하고 있다. 특히 춘추는 치인(治人)에 매우 유용한 것으로 옳음〔義〕에 따라 이룩되는 공공(公共)의 이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정경운은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하여 《고대일록》을 기술하고자 했다. 우선 형식적인 측면에서 《춘추》의 기술방법을 차용하고 있다. 매년 정월 초하루를 기술하면서 《춘추》의 방식을 따르고 있는데, ‘二十一年 癸巳 春 王正月 丙辰朔’, ‘萬曆甲午 春 王正月 初一日 庚辰’, ‘戊戌 春 王正月 初一日 丁亥’ 등으로 표기한 것이 그것이다. 《춘추》 역시 ‘元年 春 王正月’, ‘三年 春 王二月 己巳’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춘추대의 정신에 입각하여 집권자와 관리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당대의 부조리와 시비를 가리고자 했다. 이에 대해서는 장을 달리해서 살펴볼 것이다.
둘째, 《고대일록》은 개인과 국가라는 이원적 초점으로 기술되어 있다. 일기는 보통 개인에 초점을 두고 미시적으로 기술하고, 실록은 국가에 초점을 두고 거시적으로 기술한다. 《고대일록》이라는 명칭은 그 필사 과정에서 붙인 듯하지만 일기의 내용은 정경운이 겪은 체험적 기록이 대부분이다. 즉 험난한 전쟁체험뿐만 아니라 집안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 남계서원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당시 함양지역 사림들의 갈등상,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본 사물 등이 충실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대일록》은 개인의 신변잡기에만 그치지는 않았다. 선조의 몽진, 용만(龍灣)에서의 사냥, 도성으로의 환궁, 임금의 인후에 난 종기로 인한 괴로움 등 임금과 관련된 사실을 비교적 자세히 기록하였다. 나아가 인목대비의 가례나 희서(煕緖)의 첩을 빼앗고자 한 임해군의 무도 등 왕가에 대한 이야기도 다양한 통로를 통해 자료를 수집하여 기록해 둔다. 일기를 적으면서 춘추의 기술방법을 채택하였듯이 그의 서술의식에는 국가라는 거대한 집단에도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개인의 신변잡기를 중심으로 기록한 부분과 함께 이원성을 이룬다. 이는 정경운이 일상을 거느린 개인이면서 동시에 공공의 정의를 생각하는 사대부임을 자각한 결과라 하겠다.
셋째, 《고대일록》은 일화나 신이담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정경운은 그가 듣고 본 것 가운데 신이한 것이 있으면 이것을 특기해 두고 있다. 1604년 12월 20일과 1605년 4월 4일에 기록해 둔 향태(香胎)에 관한 이야기는 그 대표적이다. 향태라는 여자는 일곱 달 만에 아들 셋을 낳았는데 모두 긴 수염을 갖고 있었고, 천상에서 혼인을 하여 근친을 오는 날이면 여인들을 거느리고 땅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갔으며, 얼마 되지 않아 다시 한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에 대하여 정경운은 ‘신괴(神怪)한 일이기 때문에 그것이 이치에 맞는지를 헤아릴 수 없다.〔1604년 12월 20일 조〕’라는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이에 대한 이야기를 소상하게 적어 두고 있는 것은 신괴에 대한 관심의 표명이라 할 수 있다.
칠석날 비가 오거나 그렇지 못할 때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를 항상 염두에 둔 것도 같은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고대일록》에는 보통의 일기처럼 매일 날씨를 적지는 않았는데, 7월 7일에는 견우직녀의 고사를 생각하며 비 소식을 전하였다. ‘비가 내렸다. 견우와 직녀의 만남이 이제 얕지 않아 그러한 것인가.〔1605년 7월 7일 조〕’, ‘칠석(七夕)인데도 비가 오지 않으니, 어쩌면 견우직녀의 정분이 쇠하여 점점 쇠퇴했기 때문이 아닐까.〔1607년 7월 7일 조〕’, ‘비가 내렸다. 이른바 견우와 직녀의 눈물이 인간 세상에 변화되어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는 것이다.〔1609년 7월 7일 조〕’ 등의 허다한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넷째, 《고대일록》에는 미시사적 객관성을 유지하려는 의식이 있었다. 일기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미시적으로 기술한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여 객관성을 잃는 경우가 많다. 정경운의 《고대일록》 역시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주관적 정서를 주된 창작의 원리로 삼는 한시작품은 따로 시집을 마련하여 거기에 싣고 있다는 측면에서 나름대로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이것은 《고대일록》이 정경운의 산문정신에 입각하여 현실을 사실적으로 관찰하고, 그것을 객관적 입장에서 서술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러 가지 공문서를 선택하여 요약해서 싣고 《별록》을 따로 두고 정리했던 사실도 그의 객관정신에 의거한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김성일이 함양군에 도착하여 사인(士人)들을 불러 모으기 위하여 쓴 격문〔1592년 5월 9일 조〕, 노사상이 향인(鄕人)들과 모여 의병을 일으키기 위하여 보낸 통문〔1592년 5월 22일 조〕, 명나라 군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열읍에 보낸 통문〔1593년 2월 15일 조〕 등 허다한 기록이 그것이다. 정경운이 이처럼 공문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것은 그 스스로의 주관에 빠져 사태에 대한 정확한 기록이 이루어지지 않을까를 염려한 까닭이라 하겠다.
다섯째, 《고대일록》은 졸기를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행적을 알리고 귀감이 되게 하였다. 정경운은 죽음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을 하면서 상세하게 기록했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노비에 이르기까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가능한 대로 여기에 대하여 기록하고 인물평을 하였다. 가까이로는 손자와 딸, 종매 등이 있었고 멀리로는 조정의 신하들이 있었다. 김성일이나 이순신 등 볼만 한 행실이 있으면 이를 기록으로 남겨 모범으로 삼고자 했고, 김명원이나 최상중 그리고 이귀와 같이 악행을 저지른 경우는 역시 기록을 남겨 경계하고자 했다.
정경운은 졸기를 적으면서도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예컨대, 김시민의 경우 그의 죽음에 대하여 진주사람들이 부모상(父母喪)과 같이 하였다는 점을 들어 그가 민심을 얻은 것에 대하여 칭찬하면서도 대의(大義)에 힘쓰지 않고 작은 은혜를 베푸는 데 한결같이 힘썼다고 비판한 것이 그것이다. 정경운이 쓴 졸기에는 물론 그와 가깝게 지내던 동서 박홍량(朴弘樑)과 지기 정경룡(鄭景龍) 등에 대하여 특별한 마음으로 기록하고 있기도 하지만, 김면과 같이 위난의 시기에 분연히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적을 토멸하다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의병장에 대하여 그 안타까운 마음을 싣기도 했다. 소모 유사나 종사관으로 활동했던 그의 이력이 작용한 결과라 하겠다.
이상에서 보듯이 《고대일록》의 서술의식은 대체로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춘추대의 정신에 서술의식의 기반을 두고 있는 점, 개인과 국가라는 이원적 초점을 유지하고 있는 점, 일화나 신이담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는 점, 미시사적 객관성을 유지하고자 한 점, 졸기를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게 하고자 한 점 등이 대체로 그것이다. 《고대일록》에 나타난 이 같은 서술의식은 이미 살펴본 바 있는 《고대일록》의 형태적인 측면과는 서로 다른, 즉 정경운의 역사의식이 그 이면에서 작용한 결과여서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고대일록》이 일기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지만 단순히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가나 집단에 관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개인의 문제를 충실히 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4. 전쟁의 형상과 현실비판


정경운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활동에 참여하게 되는데, 일본군이 철수하는 1598년 11월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피란을 모색하고 그해 9월에는 진안과 용담을 거쳐 1598년 4월에는 전라도 익산으로 피신을 했다가 1599년 3월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 과정에서 그는 전쟁으로 인한 참혹상을 목도하게 되었고 이에 따른 원인과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사정의 이러함을 염두에 두면서 《고대일록》에 나타나고 있는 전쟁에 관한 기록을 그 참혹상과 함께 다양한 현실비판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자.


1) 전쟁 참상의 사실적 형상


《고대일록》은 다른 실기자료와 마찬가지로 전쟁의 경과 및 자신의 전쟁체험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깊은 감동을 준다. 정경운은 당대의 국맥이 실과 같다고 생각했다. ‘국맥이 실과 같아서 도적들이 바닷가에 진을 치고, 명나라 병사는 이제 막 도착했다. 그러나 나라의 비용은 텅 비어 고갈되었다. 비유컨대 장차 죽어 가는 사람의 목숨이 호흡하는 사이에 있는 것과 같아서, 그 흥망을 단언할 수 없다〔1595년 7월 8일 조〕’고 한 데서 이 같은 사정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국맥을 실 같은 ‘호흡지간(呼吸之間)’에 있는 것으로 파악한 정경운은 그 실상을 기아와 살육, 국토의 황폐 등을 통해 다양하게 제시하였다. 이에 대한 기록을 《고대일록》에서 찾아보기로 한다.
전쟁에 따른 기아의 심각성은 필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고대일록》 1593년 5월 25일 조에 의하면, ‘정사연(鄭士淵)을 만나 개령(開寧)과 김산(金山)에서는 난리를 겪으면서 관인(官人)이 서로 먹는다는 소리를 듣고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가만히 시세(時世)가 이러한 지경까지 이르렀음을 탄식하나니, 이것이 누구의 잘못인가.〔1593년 4월 25일 조〕’라고 하였다. 여기서 정경운은 관인이 서로 먹는다고 하고 있으니, 그 이하 백성들의 곤핍은 말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행간에서 알 수 있게 했다. 뿐만 아니라 그 자신 가족을 기아로부터 구제하고자 농사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구걸과 상행위를 하면서 이를 극복하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기아로 인한 곤핍도 커다란 문제이지만 전쟁으로 인한 살육의 참혹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박제옹(朴濟翁)의 부자(父子)가 적의 손에 죽었다는 말을 듣고 참담하고 쓰린 마음을 이길 수 없다〔1594년 11월 1일 조〕고 하거나, 옥산창(玉山倉)에 들어가 유숙하면서, 첨지(僉知) 김백옥(金伯玉)과 그의 3형제가 모두 적의 칼에 부인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한 일〔1598년 4월 25일 조〕 등이 모두 그것이다. 특히 그의 가족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참상은 다음과 같이 사실적으로 기술해 두기도 했다.


(가) 날이 저물 무렵 처형인 김득윤(金得允)과 김득지(金得智)의 부음이 왔다. 김군 형제는 물건을 매매하는 일로써 좌도(左道)에 갔는데 한 달이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오게 되었다. 무계진(茂溪津)에 이르렀을 때, 적에게 해를 당하여 시신이 강물에 던져졌다. 그 종이 혼자 와서 부음을 전했다. 연약한 아내와 어린아이가 집에 가득히 통곡하니 인간의 비참한 것이 이때보다 극심함이 없었다. 지난해에 처제(妻弟)가 청송(靑松)에서 굶어 죽고, 형제가 또 도적의 손에 죽었다. 장인의 자식 중에 나의 아내만 남았으니 참혹하고 참혹하도다.〔1594년 1월 16일 조〕
(나) 조카가 산에 이르러 정아(貞兒)의 시신을 찾았다. 머리가 반쯤 잘린 채 돌 사이에 엎어져 있었는데, 차고 있던 칼로 휘두르려고 하는 것이 마치 살아 있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아아! 내 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차고 있던 칼을 주면서 “만약 불행한 일을 만나더라도 너는 적의 뜻을 따르지 말라.”라고 하였었다. 이후로는 한 번도 머리를 빗지도 않고 얼굴을 씻지도 않았으며, “큰 적이 이에 이른다니 내가 살 수 있을지는 반드시 기약하기 어렵다.”라는 말을 그 어미에게 항상 했었다고 한다. 마침내 흉적(凶賊)을 만나 당당하게 겁도 없이 왜적을 나무라면서 삶을 버리고 절개를 온전히 하였으니, 곧도다! 내 딸이여!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도다.〔1597년 8월 21일 조〕


(가)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뒤인 1594년 1월 16일의 기록이다. 처의 형제가 굶어 죽거나 적에게 죽음을 당했다는 기록이다. 이로 인한 처가의 멸문을 비통한 심정으로 기술하고 있다. (나)는 정유재란이 일어났던 1597년 8월 21일의 기록이다. 이때 함양이 왜군에 의해 무참히 유린되고 있었으며, 정경운은 가족을 거느리고 1개월여를 산골짜기로 피신해 다녔었다. 이 와중에 정경운은 가족을 잃었다. 당시의 상황을 정경운은 1597년 8월 18일 조에 기록해 두고 있다. 즉 해 질 무렵 왜적이 고함을 지르고 칼을 휘두르며 사방으로 돌입하자 사람들이 모두 산골짜기에 엎어지고 넘어지면서 도망을 갔는데, (나)는 사흘 뒤 큰딸의 시신을 찾고 난 다음 그의 비통한 심정을 토로한 것이다.
전쟁으로 인한 참혹상은 가족뿐이 아니었다. 정경운은 전쟁 후 도성에 들어갔다가 그곳이 폐허가 된 것을 발견하고 이에 대한 느낌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1594년 11월 19일 도성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궁궐은 탕진되고 사람이 살던 집은 폐허가 되어 백에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고 하면서, 온 세상이 쑥대밭이라 비통한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1594년 11월 19일 조〕고 한다. 그리고 1595년 2월 8일 조에는 고령에 가서 노비의 집에서 잠을 자면서, ‘고령 사람들은 옛날 집터에 천막을 치고 사는 자들이 3분의 1이었다〔1595년 2월 8일 조〕’라고 하면서 고령의 황폐함을 나타내 시골이나 도성 할 것 없이 국토 전체가 전쟁으로 인해 황폐하게 되었음을 나타냈다.
국토가 유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정경운은, ‘아! 우리나라 2백 년 문물제도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깨어져 다시 더 남은 자취가 없게 되니, 백수(白首)의 서생도 지금 처음 보매 서리(黍離)의 탄식을 금할 수 없거늘, 나라의 녹을 먹는 공경(公卿) 재상(宰相)들이 감개하는 심회가 없을 수 있겠는가.〔1594년 11월 19일 조〕’라고 하면서 당시의 심정을 전했다. 그러나 비통함을 갖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었으므로 ‘만약에 임금과 신하가 힘을 합쳐 한결같이 와신상담(臥薪嘗膽)하는 각오를 지니고 회복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하늘의 뜻을 되돌리고 민심을 수습하여 원수를 갚는 데에 거의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1594년 11월 19일 조〕’라고 하면서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서서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으므로 여기서 은구형(隱求型) 지식인의 좌절을 심각하게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상과 같이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전쟁의 참상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국맥을 실 같은 ‘호흡지간’으로 인식한 그는 당시의 기아와 곤핍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 함양으로 쳐들어온 적에 의해 가족들이 살육당하는 것을 목도하고, 이로 인한 특별한 심회를 눈물로 기록해 두고 있다. 그러나 그는 시골에 숨어 사는 일개의 유생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심각한 좌절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임금과 신하가 합심하여 와신상담의 각오로 이 난국을 타개해 줄 것을 바랄 뿐이었다. 우리는 여기서 정경운이 소모 유사로 비교적 적극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벼슬하지 못한 은구형 지식인이 지닌 전쟁대응의 한계를 절감하게 된다.


2) 현실에 대한 다각적 비판


전쟁과 관련한 실기자료에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현실비판, 현실에 대한 참상, 왜적에 대항하는 여러 국면들, 왜군과 명군의 동정, 작자 주변의 이야기 등이 대체로 그것이다. 《고대일록》 또한 예외가 아니다. 정경운은 당대를 ‘조석을 보존할 수 없는’ 시기라고 보았다. 그것이 주로 전쟁에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혼란을 틈타 토적(土賊)이 안에서 일어나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비판이 개선의지를 담보한다고 볼 때 정경운의 현실비판은 결국 어떤 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다. 1594년 1월 17일 조의 기록을 보자. 당시 국토 전체가 얼마나 혼란에 빠져 있었는지를 확인케 한다.


충청도(忠淸道) 내에 도적이 크게 일어나 13곳에 진을 치고 3, 4읍을 걸쳐 점령하였다. 도망자를 불러들이고 모반자를 받아들여 유민(流民)들을 위무하니, 민심이 그림자처럼 따라서 무리가 매우 많아졌다고 하니, 슬프도다. 바다의 도적이 아직도 경계 안에 있는데, 토적(土賊)이 또 나라 안에서 일어나니, 이때의 형세가 매우 위태로워 조석(朝夕)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1594년 1월 17일 조〕


위의 글은 당시의 혼란상을 적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내우외환에 대한 원인과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가? 정경운은 위정자들에게 있다고 보았다. 분노의 화살이 일차적으로는 왜적을 향했지만, 결국 당대의 위기 상황을 몰고 온 근본적인 원인은 위정자의 무능과 부패에 있다고 본 것이다. 관군은 약탈을 일삼고 관리들은 매관매직을 일삼는다고 했다. 상벌은 원칙이 없으며 조정에는 아무런 계책이 없다고 했다. 하늘은 일식으로 재앙을 경고하기도 하고〔1596년 윤8월 1일 조〕, 황해도에서는 큰 돌이 10여 리를 걷다가 멈추기도 하였으나〔1595년 7월 8일 조〕 조정의 신하들은 일없이 녹만 먹을 뿐, 사적인 일에만 힘쓸 따름〔1595년 7월 8일 조〕이라고 했다. 정경운의 이 같은 생각은 다음 자료에서도 확인이 가능하다.


(가) 위로는 공경(公卿)으로부터 아래로는 처음 벼슬을 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술에 빠져 있는 것으로 일을 삼고 경리(經理)에는 뜻이 없으니 중흥(中興)을 어찌하며, 백성을 어찌할까?〔1594년 1월 17일 조〕
(나) 내년에 흉년이 들 것을 헤아리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백성들은 어찌할 것이며, 국가는 어찌할 것인가? 순찰사(巡察使)는 아득히 농사를 권할 뜻이 없고 수령(守令)은 흥청망청 오직 술과 고기로써 일을 삼으니, 결국 어떠하겠는가?〔1594년 4월 7일 조〕
(다) 임금이 의주(義州)에서 서쪽으로 용만(龍灣)에 가서 사냥을 하였다. 지금까지 2년 동안 온 나라의 신민들이 죽지 못하는 것을 한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데도 임금의 수레를 따르는 여러 신하들은 나라를 회복하는 것을 나머지 일로 여기고 사감(私感)을 펴내는 것으로 때를 얻고 있다. 아아! ‘썩은 나무가 정권을 잡고, 걸어 다니는 송장이 권력을 사용한다’라는 말이 불행히도 여기에 가깝다고 하겠다.〔1593년 1월 1일 조〕


정경운은 위의 글을 통해 위로는 임금에서 아래로는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위정자를 다양하게 비판하고 있다. 존망의 기로에 서 있는 위기적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관리들은 술과 고기만을 일삼는다면서 현실인식과 그 대응의 안일성에 대하여 맹렬히 비판하였다. ‘후목병정(朽木秉政), 행시용권(行尸用權)’이라는 말 속에 그의 비판정신이 가장 절실하게 함축되어 있다. 이 같은 사태가 오게 된 최종적인 책임은 임금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인식은 1596년 11월 26일 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근찰방 김지화(金志和)가 서울에서 와서 황신(黃愼)이 밀계를 올리자 임금은 적과 싸우다 죽을 뜻이 없고 다만 요동으로 피란을 가려 하였다고 하면서 사간(司諫) 김홍미(金弘微)의 간언(諫言)을 특기하고 있는 데서 사정의 이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사간(司諫) 김홍미(金弘微)가 간하여 말하기를, ‘나라의 임금이 사직을 위하여 죽는 것이 의리(義理)의 바름인데, 전하께서는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라는 말을 하니, 전교(傳敎)하여 말씀하시기를, ‘마땅히 천천히 의논하도록 하라’고 하셨다고 한다. 사대부의 가속(家屬)은 임의로 도망가 숨어서 전날처럼 꺼꾸러지는 환란이 없도록 하라는 영을 내리시니, 이로 말미암아 인심이 흉흉하여 조석을 보존할 수 없게 되었다. 또한 팔도에 향(香)을 내려 산천의 신령에 제사를 드려서 왜적으로 하여금 감히 서쪽으로 향하지 못하게 하라는 영을 내리시니, 이것이 과연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인가.〔1596년 11월 26일 조〕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이원적 초점을 유지하고 있으므로, 사적인 일기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임금의 행적에 많은 관심을 갖고 기록하고 있다. 전쟁 초기에는 임금에 대한 신뢰가 적극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전쟁이 장기화되어 감에 따라 이 같은 신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위의 자료에서 보듯이 임금 스스로는 나라를 위해 죽으려는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의 의리가 없이 도망가기에 급급하고, 기껏 영을 내린다고 하는 것이 사대부들은 알아서 피신하라는 것과 초월자의 힘을 빌기 위하여 산천에 제사를 드리게 하는 것이라 했다. 이에 정경운은 이것이 과연 ‘나라를 다스리는 계책인가’를 따져 묻고 ‘한강 이남을 버리고 서로 잊힌 땅으로 말씀하시니, 눈물이 흐르는 것을 깨닫지 못하겠다.〔1596년 11월 26일 조〕’며 한탄하였던 것이다.
선조의 실정에 이어 관리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면서 비판하기도 했다. 즉 군사들에게 포악한 박천봉(朴天鳳)〔1594년 1월 11일 조〕, 위급한 현실인데도 술을 마시면서 유흥을 즐기는 이정암(李廷馣)〔1594년 6월 8일 조〕, 국가와 백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을 일삼는 윤두수(尹斗壽)〔1594년 10월 17일 조〕, 악행으로 백성을 떠나게 하는 거창 현감 권황(權滉)〔1595년 11월 10일 조〕, 깃발과 무기를 호화롭게 하여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종사관 신흠(申欽)과 김상용(金尙容)〔1596년 4월 23일 조〕 등 일일이 예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리들을 비판하였다. 그는 이러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는 조정이 위난의 시기에 어떤 특별하면서도 획기적인 계책을 내놓을 리는 만무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계책도 하나같이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이어서 그것으로 국운의 회복을 기약하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생각했다.
이상에서 보듯이 정경운은 전쟁의 참상과 이로 인한 혼란의 원인이 외부의 적에게도 있지만 내부적인 토적과 위정자에게도 막중한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특히 위정자들의 안일한 대처와 부패가 결국 조선을 멸망의 길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명나라 군사 및 의병들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어 전쟁의 이면을 들여다보게 한다. 생각의 이러함은 여타의 전쟁일기에도 두루 나타나는 바이지만, 정경운은 관리의 부패상과 부조리에 대한 소문을 듣고 자료가 수집되는 대로 일기에 삽입하고 있다. 비판이 개선을 목적으로 한다고 볼 때 그가 평화를 지향하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 하는 것을 역으로 이해할 수 있다.


5. 전쟁체험기의 일상과 위기적 삶


정경운은 전쟁이 일어나 의병을 모집하기도 하고, 정유재란 이후에는 피란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여러 참상을 직접 목도하며 한탄을 거듭하면서도 사대부로서의 일상을 그만둘 수 없었다. 즉 상례와 제례를 비롯하여 출사를 위한 과거응시나 공부, 산수유람, 한시창작, 서원운영에 관한 일 등에 대하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질병이나 노비에 관한 문제 등도 일상의 중요한 부면이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 두고 있다. 그러나 그의 일상은 전쟁기의 특수한 일상이며 동시에 위기의 일상이라 하겠는데, 이를 전쟁체험기의 일상과 위기에 봉착한 삶으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한다.


1) 전쟁체험기의 일상


탄생과 죽음은 인간의 일상에서 누대로 변하지 않는 것이다. 이에 따른 여러가지 의식들이 있는데, 《고대일록》에는 간략하나마 이것에 대하여 기록해 두고 있다. 아들 주복의 생일과 돌잡이〔1597년 4월 25일 조〕, 자신의 생일과 가족의 생일, 그리고 마을 사람들의 생일이 있으면 간단히 적어 기념하였던 것이다. 아들의 경우를 보면, ‘아들 주복(周復)의 생일이다. 마음은 집에 들어가서 돌상에 있는 물건을 집는 것을 보고 싶은데, 비가 내리는 것이 마치 물 붓듯 하여 주눅이 들어 감히 가지를 못했다. 고대에서 바라보기만 하니 내 심정은 오죽할까. 나중에 들으니 아들이 책을 골라잡고 붓을 집었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1597년 4월 25일 조〕’라고 기록해 두고 있다. 전쟁기이기는 하나 탄생과 함께 아들에 대한 장래의 희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고대일록》은 죽음에 관한 기록들로 가득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터에서 죽은 수많은 군사들의 죽음에 대해서도 기록해 두고 있지만 가족과 친지의 죽음, 지인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신의 비통한 심정과 함께 사실적으로 기록한다. 아들 주복은 정경운이 40세 되던 해인 1596년 4월 25일 태어났는데, 날 때부터 허약하였고 전염병마저 걸렸다. 정경운은 여러 사람에게 묻고 옛 처방을 참고하여 장문혈(章門穴)에 뜸을 뜨기도 하는 등 정성을 다하였으나, 1598년 6월 27일에 요절하고 만다. 이에 대하여 정경운은 ‘내가 사십을 넘겨 겨우 아들 하나를 두었으나 결국 그의 요절을 보고 마니, 운명의 기박(奇薄)함이 어찌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단 말인가.〔1598년 6월 27일 조〕’라며 비통한 마음을 토로한다.
다양한 죽음이 있었으므로 제사 역시 많을 수밖에 없다. 정경운은 부모의 제사를 비롯해서 일찍 죽은 형과 조고, 외조부모와 장인의 제사를 특별히 중시했는데 형편이 닿는 대로 제물을 준비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 과정에서 빈곤 때문에 당형(堂兄)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형편을 전하기도 하고〔1593년 12월 10일 조〕, 아버지의 제사 때 전염병 때문에 제사에 쓸 물품을 제대로 갖출 수 없었던 것에 대한 심정을 전하기도〔1594년 5월 18일 조〕 한다. 그리고 전쟁 중에 어머니의 제삿날을 맞아 밥 한 그릇만 올리고 곡을 하자니 눈물만 흐를 뿐〔1598년 1월 29일 조〕이라며 비통해 한다. 정경운은 이처럼 제사를 매우 중시하였다. 겨울에 시냇물을 건너며 뼈에 사무치는 차가움을 느꼈을 때 그는 ‘나는 과거를 보러 가면서도 힘들여 애를 쓰고 심신이 피곤한 것을 꺼리지 않았는데,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러 가면서 감히 힘들고 괴롭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라고 혼자 생각했다〔1594년 12월 9일 조〕’라고 한 데서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정경운은 전쟁기이지만 과거를 통해 입신하기 위하여 집요하게 노력하였다. 등과야말로 불안한 시대에 자신의 가문을 살리는 유일한 길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월이 가면서 과거를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으나 그는 이를 포기할 수 없었다. 이때문에 그는 임금을 측근에서 모시는 꿈을 자주 꾸게 된다. ‘오늘 밤 꿈에 갑과(甲科)에 급제하여 임금의 용안을 우러러 뵈었다.〔1595년 10월 21일 조〕’, ‘이날 밤 임금 앞에서 모시는 꿈을 꾸었는데, 근시(近侍)하는 신하 같아 보이는 사람이 임금의 손에서 어찬(御饌)을 받아 내려주었다.〔1596년 3월 16일 조〕’, ‘오늘 밤 꿈에 임금을 뵈었다. 나는 옥련(玉輦)을 메고 뒤를 따랐는데, 위아래의 산록(山麓)과 앞뒤의 의장(儀仗)이 매우 성대하였다〔1602년 9월 7일 조〕’고 하는 허다한 기록이 그것이다. 다음의 자료 역시 같은 입장에서 서술된 것이다.


오늘 밤 꿈에 임금을 탑상(榻床)에서 모셨고, 선생께서 임금과 함께 주무셨다. 임금께서 나를 부르시어 술을 내리셨다. 명령을 받들어 나아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임금께서 조용히 말씀하기를, “이것은 선생께서 좋은 모임을 즐기는 것이니, 광무제(光武帝)가 엄자릉(嚴子陵)과 함께 잤던 일에 비견할 수 있소.”라고 하셨다. 뜻밖의 꿈이 이처럼 분명한데, 이것은 무슨 조짐인가.〔1602년 9월 18일 조〕


위의 자료에서 임금은 광해군이고, 선생은 정인홍이다. 정경운은 이들을 광무제와 엄자릉에 비유하면서 그는 임금으로부터 하사주를 받았다고 했다. 임금과 스승의 관계 사이에서 그 스스로를 자리매김하고 있으니, 정인홍을 매개로 하여 출사하고자 하는 그의 무의식이 이 같은 꿈의 형태로 표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 밖에도 ‘과거에 급제한 사람이 홍방(紅榜)을 가지고 오는 꿈을 꾸었는데 무슨 조짐인가.〔1602년 1월 20일 조〕’, ‘꿈에 문자선(文子善)이 나에게 먹 세 개를 주었는데, 무슨 조짐일까. 또한 과거에 급제하는 꿈을 꾸었다〔1601년 12월 16일 조〕’라고 하면서 과거에 대한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이 같은 희망과 조짐으로 과거장에 나가면서도 ‘센 머리로 과거에 나아가려니 너무 한탄스럽다.〔1603년 2월 13일 조〕’, ‘과거를 그만두려고 결심하였다가 남들의 권유를 받아 시험에서 문장도 이루지 못하였으니 너무 한탄스럽다.〔1603년 2월 20일 조〕’라고 하면서 그의 진솔한 마음을 적어 두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정경운이 과거에 얼마나 집착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알게 된다.
이 밖에도 정경운은 강경(講經) 및 한시창작과 유람 등에 대한 사대부 일상을 《고대일록》을 통해 전하고 있다. 그 스스로 서원에 가서 삭강(朔講)에 참여〔1601년 8월 10일 조〕하는가 하면, 시험을 위한 고강(考講)과 강경 등에 대한 당시의 풍속을 전하기도 했다. 조카가 《소학》을 고강하기 위해서 산양(山陽)에 다녀온 것〔1602년 3월 1일 조〕이나, 주사과(舟師科)에 응시한 사람들은 강경(講經)이 많기 때문에 상경하지 않았다고 한 것〔1602년 9월 10일 조〕 등이 모두 그것이다. 이 같은 일련의 과거공부와 함께 산수유람에 대한 인식, 문학 창작에 대한 상황 등을 전하기도 했다.


(가) 이른 아침에 용유담(龍遊潭)에 갔다. 오익승(吳翼承)ㆍ노경소(盧景紹)ㆍ강위서(姜渭瑞)ㆍ우혜보(禹惠甫)ㆍ손관부(孫寬夫) 등의 여러 사람을 엄천(嚴川)에서 만나, 서로 함께 고삐를 나란히 하고 계곡을 따라 단풍이 가득한 산에 올랐다. 영청(影淸) 계곡에 도착하니, 참으로 경관이 빼어났다. 오후에 용담(龍潭)에 도착하였고 용당(龍堂)에 모여서 묵었다. 여러 사람이 모두 술을 가지고 와서 실컷 즐기고서 헤어졌다. 술에 반쯤 취하자 박군수(朴君秀)가 익승(翼承)에게 거스르는 말을 많이 했는데, 편협되고 과오 꾸미는 것을 차마 볼 수가 없었다.〔1604년 윤9월 4일 조〕
(나) 정사고(鄭士古)가 그 어버이를 위하여 생신 잔치를 벌이고 풍류를 베풀었다. 얼큰히 취하여 절구(絶句) 한 수를 읊었다. 아주 즐겁게 놀고 잔치를 마쳤다. 날이 저물어 사고(士古)의 초가집에서 유숙하였다.〔1595년 1월 7일 조〕


(가)는 1604년 윤9월 4일의 기록이다. 전쟁이 끝난 후 정경운은 오장 및 강응황 등과 함께 용유담으로 단풍구경을 가서, 특히 영청계곡의 빼어난 경관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이처럼 정경운은 사대부 일상에 흔히 나타나고 있던 산수유람을 즐겼으며, ‘나는 서계(西溪)의 하류(下流)로 가서 유람했다’고 하거나〔1593년 4월 16일 조〕, 피난기에 백마강을 굽어보면서 사람이 떠나고 난 뒤의 감회를 쓸쓸하게 묘사〔1598년 9월 30일 조〕하기도 했다. 특히 1596년 10월 2일의 기록에는 이준(李埈: 蒼石, 1560~1635)과 함께 엄천을 유람했는데, 이준이 훌륭한 경치를 감상하는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없지만 기생을 데리고 간 것은 ‘경치를 더럽힌 일〔1596년 10월 2일 조〕’이라고 하여, 전쟁기의 유람태도를 비판하기도 했다.
(나)는 사대부의 일상 중 빼놓을 수 없는 한시창작에 대한 기록이다. 이에 의하면 정경운의 지기인 정순(鄭淳: 士古, 1556~1597)이 그 아버지 생신을 맞아 여러 사람들을 초대하여 풍류를 벌였고, 여기에 참석한 정경운은 한시를 창작하게 된다. 이 같은 작시행위가 《고대일록》에는 다양하게 보이는데 그 동인이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이경보(李敬甫)가 편지로 시를 보내와 화답시를 쓰기도 하고〔1593년 8월 19일 조〕, 반가운 비가 내려 손사민(孫士忞)에게 「희우(喜雨)」를 제목으로 하여 절구를 짓도록 하기도 한다〔1604년 5월 17일 조〕. 그리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나무가 뽑히거나〔1601년 2월 12일 조〕, 평평한 모랫벌에 눈이 쌓인 승경(勝景)을 보고〔1595년 11월 28일 조〕 시를 짓기도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쟁체험기 정경운이 사대부의 일상 가운데 하나인 작시활동에 상당히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전쟁체험기 정경운의 일상은 탄생과 죽음 등 인간의 보편적 일상뿐만 아니라 사대부 계급의 일상이라 할 수 있는 독서와 산수유람, 과거와 창작활동 등으로 다양하다. 이 밖에도 농사에 대하여 강한 의지를 보인 대목도 여려 차례 발견된다. 사평(思坪)에 밭이 있어 이곳에서 올기장, 목화, 콩 등을 심고 가꾸었다. 전쟁이 진행되는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틈이 나면 나가 살폈다. 즉 ‘사평(思坪)에 가서 목화밭을 살펴보았는데 들판에 왜놈들의 막사가 가득 들어차 있어서 간담이 서늘했다〔1597년 9월 1일 조〕’는 기록을 통해서 볼 수 있듯이 그의 농사에 대한 의지는 매우 강력한 것이었다. 이 같은 의지는 삶의 의지와 바로 환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위기에 봉착한 삶


전쟁은 정경운의 삶을 온통 위기로 몰아넣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모집하는 소모 유사로 활약했고, 정유재란 때는 피란으로 온갖 고초를 당하였다. 그는 이 같은 비참한 생활 속에서도 사대부로서의 일상을 지속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전쟁의 소강기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일상의 복원을 위하여 적극 노력하였다. 전쟁은 그로 하여금 사대부로서 가장 중요한 봉제사(奉祭祀)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제사 때 제수을 갖출 수가 없었던 적이 있었고, 가난하여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종형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기도 했다. 정경운은 이같이 무너져 가는 사대부의 삶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고대일록》을 써 내려갔다.
가난과 기아를 가져다 주는 전쟁은 도둑이 들끓게 했다. 정경운은 이 부분에 대하여 체험한 바를 자세하게 서술해 두고 있다. 1592년 3월 27일에는 집안에 도둑이 들어 유기(鍮器)ㆍ철물(鐵物)ㆍ포백(布帛)ㆍ곡물(穀物) 등을 모두 훔쳐 갔고, 1594년 6월 24일에는 올벼를 대부분 도둑맞고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급기야 1595년 정월 14일에는 조카의 말을 도둑맞게 되는데, 이때는 난이(蘭伊)라는 종을 데리고 직접 찾아나서기도 한다. 당시의 상황을 정경운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닭이 두 번째 울 무렵에서야 비로소 도둑맞은 것을 알고 온 집안이 깜짝 놀랐다. 나는 난이(蘭伊)를 데리고 곧바로 팔량원(八良院)으로 갔는데 종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고 웅현(熊峴)으로 종적을 찾으러 갔다. 말 도둑이 이 길을 따라서 넘어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종으로 하여금 먼저 추격하게 하고 그 뒤를 밟아 갔다. 운봉(雲峰) 땅에 이르러 두 다리가 시큰거리고 아파서 걸음을 옮길 수 없어 이재(李穧)의 집을 찾아갔다.〔1595년 1월 15일 조〕


이 자료를 통해 우리는 말 도둑을 찾아 팔량원과 웅현 등을 헤매는 정경운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정경운은 말 도둑을 잡지 못했다. 도둑맞은 지 나흘 뒤인 1595년 정월 18일에 ‘죽곡(竹谷)에 가서 말 도둑의 소식을 들었다〔1595년 1월 18일 조〕’고 기록하고 있듯이 이 사건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었던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말은 중요한 교통수단이면서 막중한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도둑은 조선 사람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명군도 닥치는 대로 도둑질해 갔다. ‘총병군 가운데 한 놈이 우리 집에 와서 얼레 빗 봉지와 금은 옥을 도둑질해 가져갔다〔1597년 6월 30일 조〕’, ‘명나라 군사가 우리 행기(行器)와 덮개를 도둑질해 갔다〔1598년 10월 24일 조〕’고 한 허다한 기록이 그것이다.
정경운의 생애 가운데 가장 험난한 시기는 아마도 정유재란의 체험과 그 이후 전라도 지역에서의 피난살이가 아닌가 한다. 그는 정유재란으로 맏딸 정아를 잃는 등 가족을 잃었고, 이후 전라도 지역으로 피난하여 생존을 위하여 금산장(錦山場), 익산장(益山場), 함열장(咸悅場), 고산장(高山場), 이성장(利城場), 장계장(長溪場), 임피장(臨陂場) 등지를 떠돌며 상행위를 하기도 했다. 시장에서 포목(布木)으로 소금을 바꾸기도 하고, 싸게 산 소금을 되팔기도 하는 등 소금장수로서 목숨을 이어 갔다. 특히 소금의 경우는 시장에서 제대로 팔리지 않아 마을을 떠돌며 팔았다. 다음은 정경운이 《고대일록》에서 기록한 소금과 관련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여기에서 보면 정경운은 1598년 3월 29일 익산장에서 포목과 소금을 교환한 이래, 용안이나 용담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금장사를 한다. 이때 일정한 숙식처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유군현이나 홍수지 등의 집에 투숙하기도 한다. 그는 대체로 소금을 팔아 이문을 남겼는데, 살 소금이 없어 많은 고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1598년 7월 19일 조에 ‘용담현(龍潭縣)에 도착하였다. 사람이 거처하는 곳을 잇달아 방문하여 소금을 팔고자 했으니 그 힘듦이 어떠했겠는가.〔1598년 7월 19일 조〕’라고 했고, 1599년 10월 30일 조에는 ‘병상(兵相)이 편지를 써서 소금 몇 말을 부쳐 왔다. 마치 수많은 보물을 받은 것과 같다〔1599년 10월 30일 조〕’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소금행상에 따른 고충을 충분히 알게 된다.
정경운은 피난처에서 양식을 구걸하기도 한다. 그의 삶이 얼마나 위기적 국면에 봉착했는가 하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대목이다. 정경운이 자신과 가족이 먹을 양식 걱정을 하게 되는 것은 1597년 12월 21일 조부터 자주 나타난다. 당시의 상황을 정경운은 ‘바람이 불고 눈이 많이 내려 지척을 분간키 어렵고 양식과 돈도 다 떨어져 어찌할 수가 없다. 동행한 동지들도 상황이 이렇게 되니 모두 흩어졌다〔1597년 12월 21일 조〕’고 하였다. 이를 기점으로 하여 그는 다동(茶洞)과 영강(永康) 등 지역을 바꾸어 가며 구걸하였고, 때로는 군수를 비롯하여 다양한 사대부들을 찾아다니며 양식을 구하기도 하였다.


(가) 영강(永康) 마을에서 양식을 빌렸다. …〈결락(缺落)〉… 피란에 분주하여 오늘에 이르러서는 계책이 급하게 되어 처음 양식을 빌리니 나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1597년 12월 28일 조〕
(나) 지부(志夫)를 만나 시장에서 양식을 구걸했다. 두꺼운 얼굴에 부끄러워 마치 시장판에서 매를 맞는 것 같으니, 곤궁함에 마음이 상하는구나!〔1598년 4월 10일 조〕
(다) 천촌(川村) 및 삼례역(參禮驛)에서 양식을 구걸하다가 해가 저물어 거처하는 집으로 돌아왔다.〔1598년 4월 13일 조〕


(가)에서 처음으로 양식을 구걸하는 심정을, (나)에서는 노사상(盧士尙)과 양식을 빌리며 느낀 참담한 심정을, (다)는 마을과 역을 떠돌며 동냥하는 상황을 적은 것이다. 이 같은 구걸도 한계가 있어 1598년 6월 5일에는 익산군수 이상길(李尙吉)을 만나 어려운 점을 이야기하여 양식과 필묵을 받아 오기도 하고, 6월 13일에는 주부(主簿) 소윤원(蘇潤源)과 진사(進士) 김정익(金廷益)을 찾아가 보리를 얻어 오기도 한다. 그리고 1599년 2월 10일에는 첨지(僉知) 한대윤(韓大胤)의 집에서 양식을 구했다. 이처럼 전쟁은 사대부로서의 기본적인 품위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아넣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정경운의 삶은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전쟁은 변하지 않는 일상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었지만, 목숨을 연명하기 위하여 그를 거리로 내몰았다. 도둑이 들끓어 집안에 있던 유기와 말 등을 도둑맞기도 했다. 전라도의 익산 등지에서 피난생활을 할 때는 구걸을 일삼았으며, 떠돌이 소금장수가 되어 여러 촌락을 다니며 다른 사람의 집에 의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시장판에서 매를 맞는 심정이 들었으니 사대부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지킬 수가 없는 자괴감마저 들었다. 피난지에서 고향으로 돌아와서 전후 복구 작업에 충실하면서 많은 부분이 만회되기는 하지만, 전쟁으로 인한 삶의 훼손은 그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것이다.


6. 《고대일록》의 가치


지금까지 우리는 정경운의 《고대일록》을 중심으로 이 책의 서지사항과 구성상의 특징, 작자의 생애와 서술의식, 전쟁의 형상과 현실비판, 전쟁체험기의 일상과 위기적 삶 등을 두루 검토하였다. 정경운의 문집이 따로 전하지 않는 상황에서 소략하지만 《고대일록》에 전하는 자술이력은 그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여기서 그는 50세까지의 외로운 생애를 회고하고 있는데, 정인홍을 부모와 같이 우러르고 신명(神明)과 같이 믿었던 스승이라 하였으며, 강응황(姜應璜)을 사생(死生)의 사귐으로 간담(肝膽)을 서로 비춰 보던 친구라며 특기하였다. 그리고 남계서원 운영과 관련한 고달픈 심정을 피력하고 두문(杜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전쟁에 대한 특별한 심회를 밝힌 것이 없는 것은 《고대일록》 자체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대일록》을 검토해 보면 서술의식이 분명히 드러난다. 즉 매년 정월 초하루를 왕정월(王正月)로 기록하면서 《춘추》의 기술방법을 따랐으며, 개인과 국가라는 이원적 초점을 유지하면서 미시와 거시적 기술을 동시에 성취하고자 했다. 그리고 《고대일록》은 민간에 떠도는 일화나 신이담을 충실히 반영하고 있으며, 신변을 다루면서도 최대한 집단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기록하고자 했다. 이 밖에도 《고대일록》은 필요한 경우 졸기를 남겨 후세 사람들에게 그 사람의 행적을 알리고 귀감이 되게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서술의식은 그의 일기가 단순한 신변잡기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일록》에는 전쟁의 참상들이 사실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으며, 이에 따른 현실비판 역시 다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정경운은 당대를 ‘죽어 가는 사람의 목숨이 호흡하는 사이에 있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그의 위기의식이 얼마나 심각하였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구체상을 관인이 서로 잡아먹을 정도의 기아상태와 가족의 이산, 처참한 죽음 등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리고 이같이 참혹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던 현실에 대하여 전방위적으로 비판하고 나서기도 했다. 위로는 임금으로부터 아래로는 하급관리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위정자들을 비판하였다. 이들에 대하여 ‘후목병정(朽木秉政), 행시용권(行尸用權)’이라 요약하고 있는데, 이 말 속에 그의 비판정신이 가장 절실하게 함축되어 있다.
정경운의 《고대일록》에는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사대부의 일상과 전쟁으로 인해 심각하게 훼손되는 이들의 삶이 다양하게 제시되어 있다. 탄생과 죽음에 대한 의식이 보편적인 인간의 일상이라면 과거와 독서, 그리고 산수에 대한 유람은 사대부로서의 일상이라고 하겠는데, 정경운은 이에 대하여 기회 닿는 대로 기술해 두고 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기아는 그로 하여금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게 했고 사대부로서의 권위를 상실케 했다. 때로는 떠돌이 소금장수로, 때로는 동냥을 하는 걸인으로 전락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정경운의 삶이 어디까지 추락하고 있는가를 분명히 목격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핀 정경운의 《고대일록》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고대일록》이 기본적으로 국가와 개인이라는 이원적 초점을 갖고 있으나 개인 쪽으로 초점이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정경운이 소모 유사로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전쟁을 기록하는 데 있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는 하나 자료수집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때문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경험적 서술이 중심을 이룬다. 이것은 《고대일록》이 전쟁체험기의 미시사나 생활사적 측면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고대일록》이 지닌 가치를 몇 가지로 나누어 관찰해 보기로 하자.
첫째, 임진왜란 시기 의병활동을 자세하게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경운이 임란이 일어나자 소모관 역할을 했기 때문이며, 또한 각종 자료를 활용하며 일기를 썼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전황도 기술하고 있지만, 전투 준비상황 등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어 도움이 된다. 예컨대, ‘경내 백성들을 모두 헤아려 형편에 따라 부과할 군자(軍資)를 정했다. 사자(士子)들은 각기 촉철(鏃鐵) 5동과 화살 깃 15개를 내어 길고 짧은 화살을 갖추고 민간에서 오래된 활을 수습하니, 모두 294장이 있었다〔1592년 6월 10일 조〕’는 등의 허다한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더욱 나아가 스스로 전투를 준비하다가 당한 고통을 체험적으로 기술하기도 했다. 집의 후원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다가 화살이 왼쪽 손을 잘못 맞혀 합곡(合曲)으로부터 장지를 깊숙이 관통하는 상처를 입은 것〔1592년 12월 25일 조〕에 대한 기록 등이 그것이다.
둘째, 임진왜란 시기 남명학파의 동향에 대하여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경운은 정인홍의 충실한 제자로서 조식의 재전제자가 된다. 덕산〔덕천〕서원을 드나들면서 남명을 숭모하였고, 정인홍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전쟁기 남명학파의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남명집》 간행도 그 가운데 하나다. 《고대일록》은 정인홍을 중심으로 한 《남명집》의 해인사 간역(看役)에 대하여 전하고 있으며, 정인홍이 《남명집》 갑진본 말미에서 쓴 이황에 대한 변척(辨斥)으로 인한 서남인(西南人)과의 대립과 갈등을 들은 바대로 자세하게 전한다. 이 과정에서 정경운은 강좌(江左)의 유생과 성균관 유생에 대하여 ‘도깨비〔怪鬼輩〕’, ‘살모사〔虺〕’, ‘물여우〔蜮〕’ 등의 격한 표현을 동원하며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셋째, 서원경영권을 둘러싼 향촌사회의 분열상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함양지역사회의 주도권 문제와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남계서원의 중건과 경영을 두고 대립한 것이다. 즉 ‘정여창-노진’으로 이어지는 계열과 ‘정여창-강익’으로 이어지는 계열의 신구대립과 갈등이 그것이다. 특히 후자에는 정인홍이 그 배후에 있었으므로 정경운은 이 계열에 소속되어 많은 활동을 하게 된다. 이들의 본격적 충돌은 남계서원의 위차문제를 둘러싸고 진행되었다. 정여창을 주향으로 하되 노진과 강익에 대하여 어떠한 위차를 설정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한 갈등의 복잡한 전개과정이 《고대일록》에는 잘 나타나 있다. 우리는 향촌사회의 주도권 경쟁에 따른 대립과 갈등의 한 단면을 이를 통해 읽을 수 있다.
넷째, 사족의 위기관리 능력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고대일록》에는 사족적 지위의 불안과 전통사회의 동요가 잘 나타난다. 정경운은 전쟁으로 인해 사족으로서의 지위가 불안해지는 것을 몸으로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위기는 농사를 통한 부의 획득과 노비경영을 통한 노동력의 확보를 통해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때문에 그는 전쟁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리밭이나 목화밭 등을 철저히 관리하였고, 백운산이나 다동, 그리고 전라도 지역으로 피난을 하는 와중에도 농사를 포기하지 않았다. 노비에 대한 문제도 이와 강하게 밀착되어 있다. 노비들의 노동력으로 농사가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정으로 인하여 그는 도망하는 노비를 추포하는가 하면 노비의 상황을 알아보기 위하여 전라도 일대를 살피고 돌아오기도 한다.
이상에서 제시한 것 외에도 《고대일록》은 많은 가치를 지닌다. 노사상이 《고대일록》 1592년 5월 15일 조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듯이 의기를 떨쳐 나라를 구하려고 했던 선비정신이나, 노사예(盧士豫)나 노사상(盧士尙) 등 역사상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의병들 역시 이를 통해 그 행적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위난의 시기에 인간의 본질이 어떻게 드러나며, 사족들은 또 어떻게 그 위난을 극복해 나가는가 하는 문제도 심각하게 고민하게 한다. 정경운의 《고대일록》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제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위난의 시기에 있어 사족의 응전력과 그 역할이 오늘날 우리의 문제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따지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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