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 이 종 호

이름없는풀뿌리 2022. 11. 23. 09:26
□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병자호란의 開戰원인과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연구 이 종 호* 1. 서론 2. 전쟁배경과 朝·淸의 군사전략 3. 병자호란의 開戰과 전쟁과정 4.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분석 5. 전쟁의 함의와 결론 *건양대학교 군사학과 교수 1.서 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송파의 삼전도비1) 앞에 서면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믿었던 이 말도 또 다른 의미로 새겨진다. 1637년 2월 24일 병자호란의 승자인 청 태종 홍타이지(皇太極)는 높은 단상에서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고 패자인 조선 국왕 인조는 단하에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치욕을 감당해야 했다. 이후 조선은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을 종주국으로 섬기면서 공물과 특산품을 상납하고 청나라가 구축한 동아시아 질서에 편입되었다. 한동안 조선의 지식인층은 숭명배금주의(崇明排金主義)와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대표되는 반청의식을 바탕으로 조선을 소중화로 인식하면서 정신적 측면에서 청을 거부하였으나 북벌계획이 실패하고 청이 제국으로서의 정치적 위상이 확립됨에 따라 결국 조선에는 명에 이어 청에 대한 사대주의가 정착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약 260년 후인 1894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2) 그러나 지금 조선의 한민족은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서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아남아 새로운 국가 발전의 열망을 이어가고 있으나 청나라를 세우고 중국 전역을 통치하였던 만주족은 흔적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동시에 17세기 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거대한 변동(The Great Tranformation)의 단초가 되는 병자호란을 어떠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본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17세기 명·청 교체기라는 큰 변동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병자호란의 결과는 조선, 명, 몽골, 일본 그리고 청의 만주족에게 있어서 동아시아 국제질서 내에서의 국가적 지위 변동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명, 청, 몽골과 청, 명, 조선 그리고 청, 조선, 일본 등 다중 삼각관계에서 청, 몽골, 조선이 동맹관계로 결합되어 명과 대치하는 양극 관계로 변환되었다. 1) 삼전도비는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호수 인근에 있다. 1637년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현장에 청이 1639년에 건립하였고 도승지겸 예문관 제학이던 이경석(李景奭)이 비문의 내용을 적어 넣었다. 비문에는 조선이 청에 항복하게 된 경위와 청 태종의 침략을 “공덕”이라고 찬미한 굴욕적인 내용을 적어 넣었다.자주국방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역사적 유물이다. 2) 이종호,“청과 일본의 동아시아 패권전쟁 비교연구”, 「한국동북아논총」제16집 1호(한국동북아학회,2011),187쪽. 바로 이 시대는 조선이라는 국가의 역사발전 단계에 있어서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35년간의 전란기를 매듭짓고 조선후기 근세사회로 발전해 가는 전환점이 된다. 이렇게 중요한 전쟁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주로 정치, 경제 및 사회사의 시각에서 연구되었을 뿐 정작 중요한 부분인 군사사적 접근은 미흡했다고 보인다. 특히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양국의 군사전략적 관점에서의 연구는 보다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학계에서 연구해왔던 성과물을 바탕으로 병자호란에 임하는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을 비교 분석함으로써 과연 당시의 국제환경과 군사력 그리고 국가적 자원과 수단을 고려해 볼 때 적절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모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함의가 무엇인지 도출해보고자 한다. 2. 전쟁배경과 朝·淸의 군사전략 가. 전쟁의 배경 임진왜란이라는 국제전쟁의 공간에서 여진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한(汗)에 즉위한 누루하치(奴兒哈赤)는 명에 대해서는 군사적 대결을 지속하되 조선과는 되도록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영원성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후 사망하여 그의 아들 홍타이지가 1626년 한위(汗位)를 계승함으로써 후금의 대외정책에 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당시 후금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경제적 위기에 있었다. 팔기군에 의한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요동지역을 병합하고 몽고 제부의 귀속으로 통치해야 하는 강역과 인구는 규모면에서 방대해졌으나 한인들의 동요로 후금이 주력했던 농업경영은 실패하였고 한랭 기후의 도래로 흉작이 겹쳐서 경제상황이 극한으로 내몰렸다.3) 홍타이지는 국가의 규모가 확대되면서 국가경영체제를 중국의 정부체제를 모방하여 재편하였다. 특히 한인관료의 도움으로 관제를 개혁하여 중국식 관제인 6부(六部)를 설치하고 대외정책에 대한 국가전략을 재편하였다. 그는 주변국 정세와 후금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진단한 후에 후금의 국가전략을 대명화의(對明和議)와 요동고수(遼東固守)로 결정하였다.4) 당시 조선, 명, 후금의 삼각관계에 있어서 결정적 전환점은 명의 제국 말기적 정치, 경제, 사회혼란과 누루하치의 뒤를 이어 대조선 강경론자인 홍타이지의 등장 그리고 조선에 있어서 인조반정을 계기로 광해군을 축출한 서인정권이 기존의 중립외교노선을 부정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정책으로 선회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후금의 배후를 위협하기 위해 설치한 가도(椵島)의 동강진에 주둔한 모문룡(毛文龍)군을 조선 정부가 지원함으로써 양국 사이의 갈등은 고조되었다. 또한 당시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발생한 이괄(李适)의 난 이후 그 잔당이었던 한윤(韓潤) 등이 후금으로 망명하여 조선 내부의 정세를 제보하면서 후금의 조선 침공을 부추긴 면이 있다. 결국 홍타이지는 조선 침공을 결심하고 원숭환이 지휘하는 영원성 지역의 명군과는 일시적으로 휴전을 하고 나서 후금의 주력을 조선으로 전환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3) 김문기, 『17세기 강남의 기후변동과 명·청 교체』,부경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 176~182쪽. 4)노기식,‘만주의 흥기와 동아시아 질서의 변동’(중국사),2009.47쪽. 정묘호란에서 후금의 전쟁 목표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가도(椵島)의 모문룡 군의 세력을 제압하여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다. 둘째는 명의 충순한 번국(藩國)인 조선을 견제하는 것이다. 셋째는 조선과 교역하여 양곡 등 필요한 물자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1627년 1월에 발발한 정묘호란은 그해 3월 정묘화약(丁卯和約)으로 종결되었다. 전쟁결과 양국은 형제의 맹약을 맺고 개시(開市)를 개설하여 국경무역이 시작되었다. 또한 조선은 아우의 나라로서 형의 나라인 후금에 매년 막대한 양의 세폐(歲幣), 즉 공물을 보내게 되었다. 후금의 무력에 의해 이루어진 정묘화약은 처음부터 지켜지기 어려운 것이었다. 후금의 입장에서는 세 가지의 전략목표 중에서 두 가지를 달성했으나 첫 번째 목표인 가도의 모문룡 군을 제압하는데 실패했다. 조선과 중강개시와 회령개시를 개설하고 형제관계를 맺음으로써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목표는 달성했으나 그것은 명과 조선이 전통적으로 유지해왔던 군신관계를 용인해 주는 바탕 위에서 수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양국 간에는 병자호란이 발발하기까지 약 10년간 많은 외교적 분쟁과 갈등이 거듭될 수밖에 없었다.5) 조선은 정묘호란을 통하여 후금의 군사력을 실감하였고 정묘화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의 확대를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10년간 명과 후금의 전쟁상황 속에서도 가까스로 유지하였던 불안한 평화를 깨트리고 양국은 왜 전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 의문이다. 전쟁의 원인(遠因)과 전쟁의 근인(近因)으로 구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1) 전쟁의 원인(遠因) (1)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명, 후금, 몽골과 후금, 명, 조선 그리고 후금, 조선, 일본 등 다중 삼각관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립변수는 명과 후금이었으며, 두 국가의 관계가 변동되면서 다른 삼각관계도 급격한 변동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다중 삼각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균형된 상태에서는 명을 패권국으로 하는 질서가 아직 까지는 유지될 수 있었다. 무력충돌과 변화의 시작은 명이 장악하고 있었던 요동에서 시작되었다. 요동은 요하(遼河)의 동쪽 지역으로 중국의 지정학적 시각에서 보면 동으로 한반도를 견제하고 여진족과 접촉할 수 있으며, 서로는 산해관(山海關)과 접하고 있어서 북경으로 바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발해만을 끼고 있어 해양으로 나아갈 수 있다. 또한 북으로는 요하를 넘어 사막, 초원지대의 몽골과 접촉할 수 있다. 때문에 명, 청 시대에 걸쳐서 요동은 동아시아 역사 변동의 한 축이 되었다.6) 누루하치는 1616년 한(汗)으로 즉위하고 국호를 금(金), 연호를 천명(天命)이라 하고 명에 대해 독립을 선포하였다. 1618년 4월에는 7대한서(七大恨書)를 발표한 후 무순(撫順)과 청하(淸河)를 점령하여 명과 전면전쟁에 돌입하였다. 명은 후금의 위협이 가중되자 조선에 대해 임진왜란의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원병을 요청하였다. 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은 후금의 팔기군과 사르후(薩爾滸)전투를 치르지만 모두 섬멸되어 버린다. 누루하치는 조·명 연합군을 대파한 후 요동 진출을 가속화 한다. 5) 한명기, 『정묘·병자호란과 동아시아』(서울:도서출판 푸른역사,2009), 89~90쪽. 6) 남의현, 『명대 요동도사 지배의 한계에 관한 연구』, 강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1~2쪽. 1621년에는 심양이 함락되고 이어서 명의 요동도사(遼東都司)가 설치되어 있는 요양이 팔기군에게 점령당한다. 누루하치가 수도를 허투알라(赫圖阿拉)에서 요양으로 천도하여 요동 경영을 본격화하자 명군은 방어선을 요하 서쪽으로 조정할 수밖에 없었으며, 명과 조선의 육로 통행은 후금에 의해 차단되고 말았다. 요동을 중심으로 명과 후금의 군사적 충돌이 확대되면서 명은 몽골, 조선과 연합하여 후금의 팽창을 저지하려 하였다. 후금 또한 요동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몽골과 대외경제 확대라는 공통의 목적을 위하여 연합관계를 형성해 나갔으며, 사신의 왕래와 혼인(婚姻) 등을 통하여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조선은 오랫동안 명의 번국(藩國)이며, 임진왜란 기간 중에는 조·명 연합군을 구성하여 일본을 패퇴시킨 군사동맹국이므로 후금은 이를 배후의 위협으로 생각하였다. 따라서 견제와 위협 그리고 군사적 수단을 통해 조·명 관계를 단절시키려고 노력하였다. (2) 후금의 국력신장과 제국건설의 야망 : 몽골과 만주북방 제부족의 통합 후금이 국가팽창과 생존을 위해서는 먼저 몽골을 복속하여 통합된 힘으로 대명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 조건이었으므로 누루하치 시대에는 동몽골지역의 커르친부(科爾沁部)와 내할하5부(內喀爾喀5部)를 복속하였으며, 홍타이지 시대에는 몽골에서 가장 강력한 부족인 챠하르부(察哈爾部)를 복속하여 후금의 지배체제 안으로 흡수하였다.7) 후금은 몽골의 통합을 위해 세력을 넓혔던 차하르부(察哈爾部)의 릭단 한에 대항하여 동몽골의 지도자들과 연맹을 결성하고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전쟁을 수행하였다. 1634년 태종 홍타이지는 릭단 한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콩고르가 복속을 해 옴에 따라 몽골 의 제부를 후금에 병합하고 만주 8기(滿洲 八旗)에 분편되어 있던 몽골군들을 분리하여 몽골 8기(蒙古 八旗)를 별도로 창설하였다. 더군다나 릭단 한이 가지고 있던 역대전국옥새(歷代傳國玉璽)까지 수중에 넣음으로써 천명(天命)을 획득했다는 정치적 이념을 창출할 수 있었다.8) 또한 만주 북방지역에 대한 명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하기 위하여 북방 제부족에 대한 복속전략을 계속 강화해 나갔다. 특히 1634년부터 복속하지 않는 흑룡강 지역의 색륜부(索倫部)와 동해 제부에 대한 대대적인 원정전쟁을 개시하였는데 이때는 이미 몽골지역에 대한 병합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강압적인 무력행사보다는 후금으로의 귀부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9) 1636년 몽골의 제부(諸部)가 후금에 병합되고 만주 북방의 제부족이 대부분 후금에 귀부해 옴에 따라 후금은 통치영역 면에서나 군사력 측면에서 명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후금은 명의 내지를 공략하기 위해서 산해관 방면으로 공격할 필요 없이 동몽골의 장성지역(長城地域)으로 우회하여 침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아시아 역학관계는 명에게 매우 불리한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1636년 4월 11일 후금의 태종 홍타이지는 만몽한(滿蒙漢)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의 위(位)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大淸)이라 하였으며, 숭덕(崇德) 원년으로 개원하였다. 홍타이지는 동년 6월 새로이 탄생한 청조(淸朝)의 위력을 과시하고 명의 수도인 경사(京師)일대의 방어력을 탐색하기 위해 약 8만 여명의 팔기군을 장성지역으로 침입시켜 경사에 인접한 창평(昌平)을 공략하고 이후 1개월 동안 화북지역을 철저히 유린하였다. 7) 조병학,『입관전 후금의 몽골 및 만주족 통합에 관한 연구』, 중앙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2,20쪽. 8) 노기식,『후금시기 만주와 몽고 관계 연구』,고려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1999, 197~199쪽. 9) 조병학, 전게서,1999,117~118쪽. 청병은 그해 7월 약 18만의 인축(人畜)을 노략하여 퇴각하였다. 화북에서 철수한 청은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조선에 대해서 대규모 원정전쟁(병자호란)을 단행한다.10) 청은 팔기군을 앞세운 우세한 기동전력으로 명의 수도 주변일대를 공략함으로써 명군이 수세적인 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도록 강요하였으며, 명의 화북지역에 대한 수회의 대규모 침공이 성공을 거두자 청은 군사적으로 대명 전략적 우위를 확보하였다고 판단하였다.11) 이때 청은 조선이 비록 정묘화약(丁卯和約)을 통해 형제국이 되었다고 하나 아직까지 유일하게 명과 동맹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므로 명에 대해 본격적인 군사행동에 들어가기 전에 배후의 위협을 사전에 제거하여 양면전쟁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2) 전쟁의 근인(近因) (1)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시각 차이와 갈등의 확대 그리고 파국 정묘호란이 종결되고 병자호란이 발발하기까지 10년 간 지속적으로 발생하였던 조선과 후금간의 갈등은 정묘화약에 대한 극명한 시각차이가 근원이다. 후금은 정묘호란을 통해서 조선과 형제관계를 수립하고 중강개시와 회령개시를 개설하여 정치·경제 전략적 이점은 획득했으나 가도의 모문룡 군의 격멸 그리고 명과 조선 간 국교를 단절시킴으로써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다는 군사전략적 목표달성에는 실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금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굴복시켰다는 우월감과 조선의 영역을 완전히 점령하지 않고 정묘화약을 통하여 전쟁을 종결시켜 주었다는 시혜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0) 정병철, 『天崩地裂의 시대, 명말청초의 화북사회』, 전남대학교 출판부, 2008,66쪽. 11) 1627년 정묘호란에서 조선에 승리한 후금은 배후의 위협을 제거한 이후 명에 대해 대규모 침공을 단행하였다. 제1차 침공은 1629년, 제2차 침공은 1634년, 그리고 제3차 침공은 1636년 대청제국을 수립한 지 4개월 후인 동년 6월 침공하였다. 그래서 후금 사신의 예우를 명 사신과 동일하게 하라고 요구하였고 조선의 포로 중에서 도망한 자와 요동지역에서 만주족의 횡포로 조선경내에 들어 온 한인 망명자의 소환, 세폐의 증액 그리고 형제관계를 군신관계로 조정하자는 것 등을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다. 반면에 조선은 군사력의 열세를 인정하고 일단은 후금과 정묘화약을 체결함으로써 전쟁의 참화가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였으나, 신료와 사대부들은 소중화 의식(小中華 意識)을 바탕으로 오랑캐인 여진족 정권과 형제관계를 수립한 것에 대하여 국가적 치욕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은 정묘화약 이후 후금의 추가적인 요구사항에 대하여 미온적이거나 오히려 거부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정묘화약에 대한 양국의 극명한 인식의 차이는 이를 자국의 이익에 부합되도록 변경하려는 전략적 의도와 결부하여 언제든지 명과 후금의 군사적 균형의 추이와 같은 정세의 변화에 따라 양국관계의 파국이 현실화될 수 있는 촉매제가 되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팔기군의 기동전력을 이용하여 명의 화북지역에 대한 공략이 성공하고 대릉하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얻은 다음 산동에서 공유덕과 경중명의 대규모 수군까지 귀순해 오자 대명관계에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1633년 6월 향후 대 주변국 정책에 대한 전략회의를 실시하여 조선 문제는 경제적 이득을 고려하여 당분간 포용하되 결정적인 상황의 변화를 기다려 완전히 복속시키는 것으로 확정하였다.12) (2) 군사적 분쟁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에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모문룡군은 후금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군과 연합하여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였다. 따라서 후금은 정묘호란 당시 이를 제거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하자 조선으로 하여금 명군에 대해 일체의 지원을 못하도록 압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이를 묵살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문룡 군에게 군량과 물자를 조달해 주고 군사적 협력관계를 계속 강화하였다. 그러나 명 조정의 실권을 쥐고 모문룡을 비호해 주던 위충현(魏忠賢)이 실각하자 그 파장이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모문룡이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후금에 투항할 의도를 간파한 요동경략(遼東經略) 원숭환이 1629년 6월 그를 피도로 유인하여 살해하였던 것이다. 또한 1630년 유흥치(劉興治)가 가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심세괴(沈世魁) 등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후금은 모문룡의 잔당을 토벌하기 위해 조선에 사신을 보내 선박의 제공을 요구하였으나 인조는 대명의리론을 들면서 이를 거부하였다.13) 결국 조선으로부터 선박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후금은 자체적으로 평안도 연안에서 선박 11척을 획득하여 가도 공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명 도독 황룡(黃龍)에게 해전에서 대패함으로써 군사작전은 실패하였다.14) 이 사건으로 조선과 후금 관계가 악화될 무렵인 1632년 산동의 등주에서 명의 장수 공유덕과 경충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명의 토벌군에 의해 등주가 함락되자 이들은 여순 방면으로 도주하여 후금에 투항하였다. 이들의 규모는 병선 185척, 병력 수만 명 에 이르렀으며, 후금의 홍타이지가 고대해왔던 것이 현실화된 것이다. 즉, 후금은 수군을 이용 함으로써 산해관을 우회하여 천진(天津)과 등래(登萊)를 공략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12) 한명기, 전게서, 2009,135~140쪽. 13) 최동희, 『조선의 외교정책』(서울:집문당,2004), 52~53쪽. 14) 『仁祖實錄』권24, 인조 9년 6월, 康午. 후금은 확보한 수군전력을 진강(鎭江) 일대에 계류시켜 놓고 지리적으로 접근이 용이한 조선 측에 병선을 관리하는 병력의 군량을 제공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동시에 당시 가도의 명군 총병 황룡과 부총병 심세괴도 조선 측에 군량 공급과 공유덕 군을 소탕하는데 동참할 것을 요청 하였다. 양자 사이에서 고심하던 조선은 명군의 제의를 받아들여서 가도에 군량을 공급하고 군대를 파견하여 공유덕 일당을 토벌하는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후금군과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15) 이와 같은 조선의 군사행동은 후금이 조선 문제를 군사력으로 해결하려고 결정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3) 인조의 척화유시문을 용골대 일행이 입수, 開戰의 빌미 제공 후금은 1636년 4월 홍타이지가 만몽한(滿蒙漢) 민족을 대표하는 황제의 위(位)에 오르고 국호를 대청(大淸)으로 선포하기 전에 이를 조선에 알리기 위해 용골대를 사신으로 보냈다. 조선 조정 내에서는 이 문제와 관련하여 큰 동요가 발생하였다. 홍타이지를 황제에 추대하기 위한 존호의 진상에 조선이 참여하는 것은 명과의 사대관계를 고려할 때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이 대부분의 의견이었다. 특히 용골대가 홍타이지 명의의 국서 이외에 두 개의 별서를 가지고 왔는데 이를 접수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 별서는 조선이 명을 배신하고 후금으로 귀순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청 강경론자들은 대청관계를 단절하고 용골대 등 사신들을 참수함과 동시에 서한을 불태우라고 주창하였다. 용골대는 조선의 적대적인 분위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급히 도성을 떠나 본국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인조는 척화를 결심하고 청의 침공에 대비하라는 유시문을 각도에 내렸다. 그러나 평양감사에게 전달해야 하는 유시문이 용골대 일행에게 입수되어 그 내용이 노출되고 말았다.16) 인조의 유시문이 노출된 경위가 어떻든 간에 이 사건은 청이 조선을 침공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나. 조선의 군사전략 인조의 즉위 초에 조선은 후금의 침공에 대비하여 중앙군의 재편성과 함께 지방군을 재정비할 목적으로 속오군(束伍軍)17) 훈련을 담당하는 전담 영장제(營將制)를 시행함으로써 군사력을 증강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평안도에서 황해도, 개성으로 이어지는 서북지역 방어에 전략중점을 두고 압록강변의 의주와 창성을 제1차 방어선으로 하면서 영변, 안주, 평양을 내륙 거점방어의 중심으로 삼는 평안도 지역 방어전략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1624년(인조 2년)에 발생한 평안병사 이괄의 난으로 평안병영이 위치한 영변 일대는 초토화되고 평안도 지역의 군병의 수효는 급감하여 청북지역(청천강이북)에 대한 실질적인 방어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에 따라 전략방침이 수도권 방비를 강화하면서 예상 주공로 방향에 대하여 전력을 집중시키는 것으로 수정됨에 따라 의주대로와 내륙직로가 모이는 안주를 중심으로 청남지역(청천강 이남 지역) 방어를 강화하는 전략이 수립되었다. 이는 정묘호란 때에 후금군 주력의 진출로가 의주- 용천- 곽산 - 안주- 평양이었고 일부 병력이 창성을 공격하여 내륙직로를 견제했던 사례를 고려하여 현실적으로 판단한 것이다.18) 15) 한명기, 전게서,2009,135~140쪽. 16) 육군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제7권」(서울:경인문화사,2012), 306~307쪽. 17) 임진왜란시 유성룡의 건의로 편성된 지방군,양인과 천인이 모두 대상이며, 병농일치제로 평상시에는 농사 및 무예연습, 유사시 소집됨, 영장 통솔 하에 5개사(司), 1사에 5개초(哨), 1초에 3개기(旗), 1기에 3개대(隊), 1대는 화병(火兵)1명을 포함하여 11명으로 구성, 1개의 영(營)은 2,475명으로 편성 18) 육군군사연구소, 전게서, 2012,311~314쪽. 특히 후금군이 대명전쟁을 치르면서 다양한 공성 전술을 익히게 되고 서양식 대형 화포인 홍이포를 생산하여 대규모 화포부대를 운용함에 따라 조선은 그들의 공성능력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대로상에 위치한 평지 읍성의 방어는 안주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포기하고 인근의 산성을 중심으로 방어거점을 옮겨 방어체계를 갖추는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으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략방침에 따라 서북지역의 방어병력은 각각 지정된 산성으로 이동 배치되었다. 의주는 백마산성, 용천은 용골산성, 선천·곽산·정주는 능한산성, 평양은 자모산성, 황주는 장수산성을 입보처로 하여 들어가 지키게 하였다. 수도권 방비를 위해서는 정묘호란 전에 중앙 상비군 강화를 위해 창설했었던 호위청, 어영청 등 군영의 병력을 증강시키고 훈련도감의 전력도 청의 기병에 대응하기 위하여 마군(馬軍: 기병) 5초(600여 기), 보군(步軍) 25초(4,400명) 등 약 5,000여 명으로 증원 하였다. 또한 남한산성에 수어청이라는 군영을 신설하여 수도권 방위력을 확대 개편하였다. 수도 방위를 하는 각 부대는 병력이 2교대 또는 8교대의 순환식 근무를 하기 때문에 실제로 위기 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은 편제병력 중에서 12,000여 명 수준이었다. 조선은 정묘호란을 통하여 청의 군사적 능력을 실감하고 재침공에 대비하여 서북지역의 방어체제를 강화하였다. 만일 이 지역에서 방어에 실패할 경우 국왕은 강화도로 이동하여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전력으로 방어하고 세자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수어청 전력으로 수도권 방어에 임하여 강화도에 대한 압력을 둔화시키다가 각 도의 속오군을 중심으로 편성된 근왕군이 도착하면 수도권에서 결전을 시도하는 방어전략을 수립하였다. 이러한 군사전략의 개념에 따라 강화도와 남한산성의 방어체제를 우선적으로 정비하였다. 〈표 1〉병자호란 직전 수도 한성 방어를 위한 상비군 현황 부 대 규 모 역 할 호위청 1,000명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한 군사들로 창설한 부대로서 국왕의 호위 임무수행 어영청 6,200명 1624년 후금군이 침공할 것에대비하여 국왕이親征 할때 직접지휘하는 근위부대 총융청 20,000명 1624년 경기도의 병력을 통합하여 창설한 부대,후금 침공시 국왕은 강화도,세자는 남한산성 이동, 각 도의 군사력 집결,반격 시 주력의 역할 수행 훈련도감 5,000명 1593년 임진왜란 시 유성룡의 건의로 창설된 중앙 상비군, 정병 양성과 수도방위 임무수행,전 인원이 급료를 받는 직업군인으로 편성됨. 수어청 12,700명 1627년 남한산성의 수비를 위해 창설,경기도 남부지역의 각 진을 총괄 지휘하는 임무수행 총 계 45,000명 출처 : 유재성,「병자호란사」,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1986년,27~36쪽.연구자가 재정리. 다. 청의 군사전략 청 태종 홍타이지는 즉위 후 全 만주와 몽골을 정복하고 명나라로 진공한다는 전략목표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선적으로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었던 조선을 침공(정묘호란)하였다. 이를 통하여 배후의 위협을 해소하고 경제적 이득을 획득하였으며, 이어서 차하르부(察哈爾部)의 릭단 한에 대항하여 10여 년에 걸친 대규모 원정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몽골을 완전히 복속시켰다. 그리고 만주 8기(滿洲 八旗)에 분편되어 있던 몽골군들을 중심으로 몽고 8기(蒙古 八旗)를 창설하여 군사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하였다. 홍타이지는 1636년 몽골의 제부(諸部)를 병합되고 만주 북방의 제 부족들을 대부분 통합함에 따라 대청(大淸)의 황제의 위(位)에 올랐다. 이제 동아시아 역학관계는 명, 청, 조선의 삼각관계로 정립되었다. 청(淸)은 통치영역에서나 군사력 측면에서 이제 명과 대등할 정도의 수준이 되었고 산해관 방면뿐만 아니라 동몽골의 장성지역(長城地域)으로 우회하여 명을 침공할 수 있게 되어 군사전략 수행의 융통성이 확대되었다. 그러나 청(淸)이 명과 전면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배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군과 가도의 명군 전력이 있는 한 내선작전19)을 수행해야 했다. 따라서 청 태종 홍타이지는 기동력이 우세한 팔기군을 기반으로 하여 내선작전의 이점을 활용한 선제적 공세전략을 수행하였다. 우선 1636년 6월 아지게(阿濟格)에게 약 8만의 병력을 주어 장성지역으로 우회하여 화북지역을 침공하게 하였다. 약 1개월의 전역을 통하여 청은 팔기군을 앞세운 우세한 기동력 으로 명의 군사력을 수세적인 태세에 몰리게 하였으며, 획득한 물자와 인력을 활용하여 조선 침공을 준비하였다. 그해 겨울 압록강이 동결되자 청은 배후의 위협이라고 인식하였던 조선군과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명군을 격멸하기 위해 조선을 침공하였다.20) 청 태종은 1627년 정묘호란 때 조선을 공략했던 작전경험을 십분 활용하였다. 즉, 조선군이 방비하고 있는 주요 산성의 거점은 우회하고 기동로의 인접에 있는 도시는 점령하면서 조선의 중심인 한성을 향해 신속하게 공격하였으며, 기동력이 있는 선봉부대를 주력부대 앞에 먼저 진출시켜서 조선 국왕이 강화도로 가는 길목과 남부지방으로 가는 길을 차단함으로써 한강 이북에서 전쟁을 조기에 종결할 수 있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하여 가용병력 중에서 청 팔기병 7만 8천 명, 몽고 팔기병 3만 명, 한병(漢兵) 2만 명 등 도합 12만 8천 명을 조선 원정군으로 편성하였다. 최소한의 잔여병력을 통합하여 패륵 아파타이(阿巴泰)가 갈해성(噶海城)에서 대명전선에 대비하도록 하였으며,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지게(阿濟格)가 우장(牛莊)에 주둔하여 명군이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차단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21) 19) 내선작전은 아군이 2개 이상의 적 사이에 위치할 경우에 수행하는 작전이다. 수개 방향의 외부로부터 위협하는 적에 대하여 아군의 후방 병참선을 내부에 확보한 가운데 실시하는 작전이다. 내선작전의 핵심은 가용한 전력을 통합하여 개개의 적에 대하여 각개격파하는 것으로 전투력의 집중과 시간적 요소가 중요시된다. 20) 김문기, “병자호란 전후의 조선·명·청 관계와 김육의 조경일록(朝京日錄)”, 조선시대사학보,2006,89~90쪽. 21) 유재성, 『병자호란사』(서울:국방부전사편찬위원회, 1986), 133~134쪽. 선봉부대는 호부승정 마푸다가 지휘하는 청 기병 1개기 6천 명으로 편성하여 안동에서 압록강을 도하한 다음 조선군과의 접촉을 회피하면서 신속히 기동하여 한성과 강화도의 통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좌익군은 예친왕 도도가 지휘하는 청 기병 5개기 3만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이 부대는 선봉부대를 후속하다가 한성 이남으로 진출하여 조선 국왕의 남부지방 이동통로를 차단하도록 하였다. 본군은 청 기병 5개기와 몽골 및 한병의 혼합부대로 약 7만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청 태종과 함께 좌익군을 후속하면서 의주, 안주, 평양, 황주 등 각 성을 공략하고 한성으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부부대를 기동로의 주요 도시에 잔류시켜서 병참선을 방호하게 하였다. 우익군은 예친왕 도르곤이 지휘하는 청 기병 2개기와 한병의 혼합군 2만 2천 명으로 편성하였으며, 벽동에서 압록강을 도하한 다음 창성과 영변을 공략하고 평양과 개성을 거쳐 임진강을 도하하여 강화도로 진출하도록 하였다. 청군은 조선군의 방어전략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산성을 중심으로 한 조선군의 방어 거점은 철저히 무시하고 주요부대의 진출경로상에 있는 각 산성의 주변에는 소규모 부대를 잔류시켜서 조선군이 다른 지역으로 전환하지 못하도록 고착시키는 한편 주력부대는 수도 한성에 조기에 진입하기 위하여 신속히 남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수도 한성이 위협을 받게 되면 조선 국왕이 강화도로 옮겨 가서 장기 항전을 할 것으로 판단하고 이를 차단하기 위하여 마푸다를 선봉부대로 우선 투입하였던 것이다. 3. 병자호란의 開戰과 전쟁과정 가. 병자호란의 開戰 청 태종은 마침내 조선 정벌을 공표하고 조선 원정군에 편성된 모든 병력에 대하여 1636년 12월 25일까지 심양에 집결할 것을 하달하였다. 청 태종은 개전에 앞서서 12월 21일 제신들을 이끌고 ‘조선 정벌’의 이유를 하늘에 고하는 의식을 열었다.22) 심양에서 부대편성을 마친 청군은 12월 28일 새벽에 선봉부대를 필두로 하여 조선을 향해 부대기동을 개시하였다. 마푸다가 이끄는 청군의 선봉대는 1637년 1월 3일 압록강을 도하 후 의주를 우회하여 안주 방면으로 남하하였고, 좌익군도 이날 오후 압록강을 도하하여 비어 있는 의주성에 입성 후 저녁에는 임경업 군이 방어하고 있던 백마산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청 태종의 본대는 1월 5일 압록강을 도하하여 의주-용천-곽산-정주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1월 9일 안주까지 진출하였다. 안주성에는 평안병사 유림이 약 3천명의 병력으로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청 태종은 안주성 공격이 실패하자 이곳에 일부 병력만 잔류시켜 놓고 주력을 인솔하여 평양으로 직행하였다. 청군의 우익군은 압록강을 도하한 후 창주의 당아산성을 점령한 후 곧장 영변으로 진출하였다. 영변의 철옹산성에는 부원수 신경원이 약 3천 명의 병력으로 방어에 임하고 있었다. 도르곤이 지휘하는 청군은 이를 점령하는데 실패하고 철수하였으나 신경원이 청군을 추격하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해 큰 타격을 입고 철옹산성도 함락되었다. 이후 청 우익군의 주력은 중화-토산방면으로 계속 남하하였다.23) 나. 조선의 대응책과 남한산성의 포위 1636년 11월경 청군의 공격이 임박하였다는 정보가 조선에 입수되기 시작하였다. 조선 조정 내에서 서북지역의 방비가 아직 충분하지 못하므로 화친을 도모하자는 주화론과 청군과 일전을 겨루자는 척화론 사이에 논쟁이 오가는 중에 청군의 침공이 개시되었다. 청군의 공격에 대한 최초보고가 조선 조정에 도착한 것은 청군 선두부대가 안주까지 진출하였다는 도원수 김자점의 1월 8일 보고서였다.24) 22) 한명기, 전게서, 2009,151쪽. 23) 육군군사연구소, 전게서, 2012,299~302쪽. 24) 『仁祖實錄』권33, 인조 14년 12월, 癸未. 조선 조정은 청군이 이미 안주까지 진출했으므로 안주-평양 선에서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고 도원수 김자점에게 황해도 및 개성의 군병을 황주에 집결시켜 청군의 남하를 저지하게 하였다. 동시에 강화도, 수도 한성, 남한산성을 연하는 수도권지역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청군의 예봉을 차단하고 나서 각 도에서 집결된 근왕병으로 반격작전을 하는 전략을 시행하였다. 이를 위해서 검찰사 김경징으로 하여금 강화도의 방어를 책임지도록 하였고, 심기원을 유도대장으로 임명하여 한성을 지키도록 하였으며, 수어사 이시백으로 하여금 남한산성에 들어가 하삼도와 연락하면서 근왕병의 재편성에 착수하도록 하였다. 각 도의 감사와 병사에게는 병력을 인솔하여 수도권에 집결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인조는 1월 9일 강화도로 이동하였으나 이때 이미 마푸다가 지휘하는 청군의 선봉대가 한성 근교의 양화진과 개화리 일대까지 진출하여 강화도로 가는 통로를 차단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날 밤 늦게 남한산성으로 입성하였다.25) 25) 유재성, 전게서, 1986, 144~147쪽.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들어가자 이제 전쟁양상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청군의 주력부대가 점차 남한산성 주위를 포위하는 형태로 배치가 되어 남한산성의 조선군과 청군 사이에 공방전이 진행되었으며, 그 외곽에서는 조선 조정의 지시에 의해 각도의 조선군이 근왕군으로 남한산성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이를 차단하려는 청군과 여러 차례의 치열한 전투가 진행되었다. 즉,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2중 포위전 형태의 전투가 지속되었던 것이다. 청 태종이 약 7만 명의 본군을 인솔하여 1월 22일 남한산성에 도달한 후 본격적인 포위공세를 개시하였으나 산성의 조선 수비군 1만 4천 명이 견고하게 요새화된 방어진지에서 조직적으로 방어함으로써 청군의 공격은 진척이 없었다. 이에 따라 청 태종은 전쟁이 장기화될 것을 우려하여 인조에게 조속히 출성항복을 하도록 요구하면서 각 도의 근왕군에 대한 차단작전을 시행하였다. <표 2> 병자호란 당시 근왕군과 청군의 주요전투 구 분 전투지역 근왕군의 주요 전투 결과 강원도 근왕군 검단산 (남한산성 남방 1km) ∙원주목사 이중길, 원주영장 권정길이 강원도 근왕군 7천명 편성 ∙원주영장 권정길이 선봉대로 1천 명을 인솔 검단산 도착, 남한산성과 연락 노력 ∙청군 2천 명이 좌우 측방포위공격, 1차 저지 ∙청군 3천 명이 2차 공격, 조선군 패퇴 ∙강원도 근왕군은 경기도 미원 일대로 철수 경기·황해도 근왕군 황해도 토산 ∙도원수 김자점은 5천 명으로 황주 방어 후 청군을 추적, 토산까지 남하 ∙청군 우익군 6천 명과 전투, 조선군 패퇴 ∙김자점군은 2천 명을 수습하여 미원에 전개 평안도 근왕군 경기도 김화 ∙평안감사 홍명구, 평안병사 유림이 5천 명의 근왕군으로 평양-평강을 거쳐 김화 일대에 전개 ∙청군 6천 명과 1일차 전투에서 승리, 조선군 탄약 부족 ∙야간에 전투 이탈하여 가평으로 이동 충청도 근왕군 험천현(남한산성 남방 10km) ∙충청감사 정세규, 충청병사 이의배, 7천 명의 근왕군을 인솔, 험천현까지 진출 ∙청군 양굴리(楊古利)의 7천 명과 전투 ∙조선군 패퇴, 수원-공주 방향으로 철수 전라도 근왕군 광교산(남한산성 남방 40km) ∙전라감사 이시방,전라병사 김준용,8천 명의 근왕군으로 경기도 광교산 진출 ∙험천현에서 조선군을 격파한 양굴리의 7천 명과 전투 ∙2일간 전투, 조선군의 승리, 청장 양굴리 전사 및 패퇴 경상도 근왕군 쌍령(남한산성 동남방10km) ∙경상감사 심연, 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의 8천 명 근왕군이 대구-문경-여주 이동 ∙허완과 민영 등 선봉대 2천 명이 쌍령 진출 ∙청군 6천 명과 전투, 조선군 궤멸, 좌․우병사 전사 ∙본대의 심연은 전의를 잃고 조령으로 철수 출처 : 육군 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 제7권, 2011년, 302~309쪽. 연구자가 재정리 또한 청 태종은 인조의 출성항복을 압박하기 위하여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에게 조선 국왕의 왕자, 종실, 백관 및 그 가족들이 대부분 피난해 있는 강화도를 조기에 공략하도록 임무를 주었다.26) 1637년 1월 내내 각 도에서 올라 온 조선 근왕군은 남한산성에 진입하기 위하여 검단산, 토산, 김화, 광교산 등에서 청군과 격렬한 전투를 수행하였다. 근왕군은 김화전투와 광교산전투에서 청군에게 승리하기도 하였으나 전력이 미약하여 남한산성까지는 도달하지 못하였으며, 대부분의 근왕군은 전투에서 패하고 전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철수하였다. 특히 토산전투에서 패배한 도원수 김자점군은 경기도 미원으로 이동하여 여기서 한성을 지키다가 철수한 유도대장 심기원군 2천명, 함경도 근왕군 7천 명, 강원도 근왕군 6천 명 등 도합 1만 7천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청군의 동태를 관망하였다. 각 도의 근왕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청군의 외곽에 포진하여 전력을 정비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엿보는 수세적인 태세를 유지하였다. 다. 강화회담과 전쟁의 종결 조선 조정 내에서 김류와 최명길 등 주화론자들과 김상헌과 정온등 척화론자 사이의 논란도 1637년 2월 청군의 예친왕(睿親王) 도르곤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고 조선 국왕의 비빈과 왕자, 종실, 백관 및 그 가족들이 포로가 되어 삼전도의 청 태종 본진에 억류되자 강화협상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청군도 일단 산성 공략과 같은 적극적인 공세행동은 자제하고 조선국왕의 출성항복을 계속 요구하였다. 강화협상의 쟁점은 항복을 둘러 싼 국서의 형식과 의례절차에 집중되어 있었다.27) 청군이 산성 공략을 시도하지 않은 이유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명군의 배후위협이 여러 가지 요인 중의 하나일 것으로 보인다. 병자호란의 발발에 따라 명 조정에서는 조선의 상황을 살피고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으며, 2월 초에 명군 약 7만 명 규모를 동원하여 청의 배후를 요격하는 부대기동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28) 조선국왕 인조는 출성항복만은 피하려고 강화협상을 계속 이어 간 반면에 청 태종은 인조의 자진 출성항복만 면제해 준다면 더 많은 실리를 획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끝내 관철시켰다. 2월 21일 인조의 출성 항복을 수락한다는 국서가 청군 측에 발송 되었고 그 다음날 출성할 경우 인조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청 태종의 국서가 도착하였다. 청의 국서에는 종전 이후 조선의 의무사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은 대략 12가지 조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핵심적인 내용은 첫째 조선과 명의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청과 새로 운 사대관계를 맺을 것, 둘째 명에 대한 원정 시 군대를 보낼 것, 셋째 청에서 도망쳐 온 조선인 포로들과 조선에 있는 여진출신 향화인(向化人)을 송환할 것, 넷째 재무장이나 군비 강화책을 금지할 것, 다섯째, 해마다 세폐(歲幣)를 보낼 것 등이었다.29) 26) 『淸太宗實錄』권28,崇德,2년 1월,甲辰. 27) 허태구, 『병자호란의 정치·군사사적 연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9,115-117쪽. 28) 김영숙, 『조천록을 통해 본 명청교체기 요동정세와 조명관계』, 인하대학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1,166-167쪽. 29) 허태구, “병자호란 강화협상의 추이와 조선의 대응”, 조선시대사학보,2010.78~79쪽. 청은 조선을 직접 지배할 수도 있는 유리한 상황이었으나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에 대청체제를 수립하고 청 태종이 이제 더 이상 동북 변방에 위치한 ‘소국의 한(汗)’이 아니라 滿·蒙·漢을 아우르는 다민족국가의 황제임을 드러내는 의식행사를 대내외에 천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즉, 제국 통합의 상징적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1637년 2월 24일 조선국왕 인조를 출성항복하게 하여 삼전도에서 항례(降禮)를 수행하였던 것이다. 4. 朝·淸의 군사전략 비교분석 17세기 조선과 청의 군사지도자들이 구상하고 수행하였던 군사전략을 오늘날의 시각에서 분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제한사항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군사전략의 개념적 접근방식이 시대적 변화에 따라 많이 상이하기 때문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군사전략을 구성하는 기본요소 또는 세 지주라고 공감하는 군사전략 목표, 군사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군사전략개념의 수립 그리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군사자원의 사용 외에도 그 당시에는 대명의리(對明義理)와 같은 예(禮), 명분(名分)의 문제가 군사전략 수립의 중요한 구성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30) 그러나 현대의 군사이론가들이 2,500년 전에 저술된 손자병법의 군사사상과 군사전략적 함의를 찾아서 미래 전략과 전술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고 있는 것처럼 전쟁의 본질은 고대로부터 현대까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 군사적 상식이다.31) 30) 이종호, “군사전략”, 『군사학개론』, 군사학연구회 편저 (서울:플래닛미디어, 2014), 192~194쪽. 31) 이종호, “손자병법의 전쟁전략 연구”, 『전쟁철학』, 이종호 공저 (서울:백산서당, 2009),110쪽. 이를 진리라고 이해한다면 약 400년 전의 병자호란에서의 군사전략을 오늘날의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비교분석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본 논문에서는 당시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 기획가들이 수립하고 시행하였던 군사전략이 국가목표와 국방목표 달성에 가장 최선의 방법이었는가, 그리고 가용한 자원으로 이를 달성할 수 있었는가, 또 선정한 군사전략이 도덕적 측면과 비용 대 효과측면에서 허용될 수 있었는가?라는 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사항들을 확인하는 요소들이 소위 군사전략의 구비조건이다. 이 구비조건의 타당성을 평가하는 요소에는 크게 적합성, 달성가능성, 용납성 등 세 가지가 있다.32) 가. 적합성(Adaptability) 적합성이란 군사전략이 국가목표와 국방목표에 부합하며, 기여할 수 있는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이것은 합목적성이 주관심사이며, 군사적으로 최선의 전략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국가목표와 국방목표에 공헌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조선군은 청의 팔기군과 사르후전투33), 정묘호란 등에서 실전을 통하여 그 능력과 위력을 충분히 실감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병과 화기 중심의 조선군이 야지에서 팔기군의 대규모 기병과 일전을 겨루는 것은 위험성이 높다는 것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을 취하여 청군을 수도권까지 축차적으로 저지하면서 유인한 후에 남한산성과 강화도, 수도 한성이 서로 연계하여 청군을 최대한 격멸하면서 시간을 획득하고, 각 도에서 근왕군이 집결하면 결전을 시행한다는 개념은 합리적인 전략으로 보인다. 32) 황성칠, 『군사전략론』(경기:한국학술정보,2013), 269~270쪽. 33) 사르후전투는 1619년 명과 조선의 연합군이 요동경략(遼東經略)양호(楊鎬)의 지휘로 만주 팔기군과 사르후에서 격돌한 전투이다. 이곳에서 명군이 참패함으로써 요동일대가 후금의 누루하치에게 넘어가게 되었으며, 조선군 1만 명은 이 전투에 서 많은 피해를 입고 잔여병력이 누루하치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국가 및 국방목표 달성을 위한 전략적 중점이 왕실의 보존문제인데 이 당시가 되면 강화도라는 곳이 더 이상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이미 명의 수군장수 공유덕과 경충명이 전선 185척을 이끌고 청에 귀순한 이후라서 청군은 해군력 면에서 강력한 힘을 보유하게 되었다. 조선 원정작전 간 청 태종은 이 해군 전력을 무영군왕(武英郡王) 아지게(阿濟格)에게 지휘하도록 하여 우장(牛莊) 일대에서 명군이 해로를 이용하여 조선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차단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따라서 가도에 위치한 명군이나 강화도를 요해처로 하여 이동하려는 조선 왕실도 이러한 청군의 능력을 간과했으므로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청군은 명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배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군과 가도의 명군 전력에 대해서 기동력이 우세한 팔기군을 기반으로 하여 내선작전의 이점을 활용한 선제적 공세전략을 수행하였다. 우선 1636년 6월 아지게(阿濟格)에게 약 8만의 병력을 주어 장성지역으로 우회하여 화북지역을 침공하게 함으로써 명의 군사력을 수세적인 태세에 몰리게 하였으며, 이때 획득한 물자와 인력을 활용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 조선 침공의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우선 조선국왕이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게 차단한 후에 모든 가용전력을 수도 한성일대에 집중하여 조선군을 포위 격멸하는 단기결전 개념을 적용하였다. 그러나 조선국왕과 조선군 주력이 남한산성과 강화도 일대에서 장기 농성을 한다면 압록강으로부터 한성까지의 병참선 상에 온전하게 전개되어 있는 조선군과 지방에서 올라온 근왕군에 의해 청군은 후방이 위협받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명전선에서도 병력의 열세로 인하여 대단히 우려할 만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위험한 부분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 달성 가능성(Feasibility) 달성 가능성이란 군사전략개념 시행으로 목표달성이 가능한가 그리고 그 개념이 가용자원 및 능력(정신, 물질적)으로 시행이 가능한가를 검토하는 것이다. 가용자원은 현존 및 잠재 군사력 그리고 동맹국의 군사력도 포함된다. 조선군이 가용병력과 전투력 면에서 청군에 상대적으로 열세라는 것을 군사지도자들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따라서 군사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야전에서의 조기 결전을 회피하고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을 채택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청군이 수도권까지 진출하는 시간을 지연시켜야 하는데 대규모 기병집단이 산성공략을 포기하고 도로위주로 신속히 남하한다면 이를 저지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실제 전장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또한 지방에서 근왕군이 수도권 일대에 집결할 때까지 강화도, 남한산성, 수도 한성이 서로 연계하여 수도권 일대에서 적 주력을 최대한 저지해야 하는데 이 전략을 실행하기에 위험요소가 너무 많다. 즉 수도 한성은 성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제한된 병력밖에 없는 중앙군으로서는 방어임무 수행이 곤란하고, 청군의 대규모 기동집단이 육로와 해로에서 남한산성과 강화도를 포위 공격한다면 각개격파 당할 수 있다. 또한 청군으로서는 국왕 인조의 군대를 포위하고만 있어도 각도의 근왕군이 이동을 해오기 때문에 계획된 장소에서 결정적 시기에 조선군을 차례로 타격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전쟁 후반부에 가서는 근왕군은 모두 저지가 되고 국왕 인조만이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의 불리한 위치에 있게 되었던 것이다. 청군은 주 전장이 대명작전이었고 조선원정은 보조 전장이었다. 따라서 우수한 기동집단을 기반으로 하여 내선작전의 이점을 최대로 활용한 단기결전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청군의 수뇌부는 정묘호란에서의 경험도 있어서 조선군의 전략을 이미 꿰뚫고 있었고 공유덕과 경충명의 수군으로 인하여 강력한 수군전력도 확보된 상태였기 때문에 군사전략 수립에 훨씬 많은 융통성이 있었다. 또한 1636년 6월 화북 침공의 성공적인 결과에 따라 전쟁 소요물자까지 충분히 확보하였으며, 동맹군인 몽골 8기도 분편됨에 따라 추가적인 기동부대가 가용한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청군은 대명전선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배비하고 건국이래 가장 규모가 큰 원정부대를 편성함으로써 그들이 계획한 단기 결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다. 용납성(Acceptability) 용납성이란 군사전략개념이 국내적·국제적으로 용납될 것인가를 검토하는 것으로 크게 도덕적 측면과 비용 대 효과 측면으로 구분하여 검토한다. 먼저 도덕적 측면은 국내외적으로 여론이 용납할 수 있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비용 대 효과 측면은 여러 가지 전략개념안 중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추구하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안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군은 병력과 전투력 면에서 청군에 비하여 결정적인 열세에 있었으며, 요동지역이 청군에게 실함된 이후 명과의 교역, 군사적 지원 등 동맹군과의 협력은 매우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을 도와서 나라를 소생시켜 주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의 의식과 중화문화권의 일익을 조선이 담당한다는 대명의리론(對明義理論) 등 국가적 명분 때문에 군사적 모험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묘호란과 같은 국가적 시련기를 거치면서 인구, 농경, 산업 등이 아직까지 회복되지 않았기 때문에 북방의 대규모 기병위주의 군사력과 대치할 정도의 군대를 편성하고 주요 방어 거점에 강력한 거점을 구축한다는 것은 국가 재정형편상 불가능한 사항이었다. 조선의 군사지도자들은 현실적으로 실현시키기에는 대단히 곤란한 문제에 국가의 운명을 걸었던 것이다. 청 태종의 입장에서 조선에 대한 침공은 대명우위의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얻을 수 있는 매우 중대한 결단이었다. 그러나 청군도 경제적 측면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현실에 있었다. 왜냐하면 계획했던 것보다 급격하게 국가의 규모가 커지고 몽골 및 북방의 제부마저도 병합함에 따라 이들의 경제적 문제도 해결해 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 태종은 1634년 몽골에 대한 마지막 대규모 원정작전을 실시하기 전에 화북지방과 산해관 일대에 대한 침공작전을 주도하여 수많은 인축과 재물을 노획하였다. 조선에 대한 원정작전을 시행하기 전에도 그해 6월 화북지방에 대한 침공작전을 수행하여 전쟁물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청 내부에서 급격하게 확장되는 경제적 소요를 충당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조선 침공은 이를 해소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을 수도 있다. 병자호란의 전쟁양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국면별로 전투는 단시간 내에 종결되고 대부분의 시간은 청군과 몽골군의 인축과 재물의 노획작전이 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국제적, 인륜적 관점에서는 비난 받을 수 있겠으나 청군의 입장에서는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라. 구비조건에 의한 朝·淸 군사전략의 상호 비교분석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을 구비조건으로 비교분석하면 다음의〈표3>과 같이 도표로 설명할 수 있다. 〈표 3〉朝·淸 군사전략의 구비조건 비교분석 구 분 청(淸) 조선(朝鮮) 적합성 ∙대명작전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후의 위협 제거 필요 ∙내선작전의 이점 최대한 활용 ∙강력한 수군 확보로 육·해군 작전 협력 및 전략운용의 융통성 확대 ∙그러나 조선군 장기항전 시 위험 ∙산성위주의 수세적방어전략으로 청군 진출 지연 제한 ∙조선 왕실과 수뇌부의 안전 유지가 곤란 ∙청의 수군전력 확보에 따라 강화도가 더 이상 요해처 제한 달성 가능성 ∙단기결전이 가능한 기동부대 편성및 우수한 전투원 확보 ∙사전 명의 화북지역 침공을 통해 대명전선을 안정시키고 전쟁수행물자를 충분히 확보 ∙선봉부대의 능력으로 조선국왕의 강화도 이동 차단 가능 ∙남한산성, 수도 한성, 강화도가 연계성 있는 방어작전 제한 ∙청군이 신속히 강화도 진입로 차단시 국왕 인조 파천 불가 ∙청군에 비해 근왕군의 전력이 상대적 열세, 통합된 지휘체제 불비 그러나 장기전 전환 가능 용납성 ∙청 태종이 滿·蒙·漢을 통합한 다민족국가의 황제로 선포 ∙국가의 규모가 확대됨에 따라 경제적 문제 해소의 필요성 대두, 인축과 재물 노획작전 중점적 수행 ∙군의 전력열세, 동맹군 지원 불가상황에서 명분론에 따른 군사적 모험 감행 ∙청의 우세한 전력을 상대할 수 있는 군사력 건설, 방어거점 수축을 위한 재정적 지원 제한 조선군과 청군의 군사전략개념을 구비조건 측면에서 비교분석해 볼 때 가용전력과 능력 면에서 청군은 대체로 타당성 있는 군사전략을 수립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전략개념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예기치 못한 상황이 초래되어 전략기획가들이 구상했던 단기결전 수행이 어렵게 되었고 강화협상과 조선국왕 인조의 출성항복으로 전쟁승리를 대신하였다. 청 태종은 인조의 항례(降禮)를 통해 滿·蒙·漢을 아우르는 다민족국가의 황제라는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극적인 연출을 할 수 있었다.34) 34) 한명기, 전게서, 2009, 165쪽. 한명기는 여기에서 청 태종이 삼전도에서 ‘성하지맹’을 맺은 것은 끝까지 자신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던 조선을 신속시킴으로써 온전한 의미에서 만·몽·한을 아우르는 ‘황제’를 표방할 수 있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군은 상대적 전력의 열세 속에서 인조가 강화도로 파천하는 것이 실패하자 남한산성으로 계획을 조정하였다. 수도 한성을 비롯하여 국토가 청군에 의해 유린당했지만 남한산성의 방어준비의 견고함과 근왕군의 계속적인 산성 진입 노력은 오히려 청군에게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군의 산성위주 수세적 방어전략은 대청전쟁에서 여러 가지 제한사항을 노출했다. 5. 전쟁의 함의와 결론 병자호란은 지금까지 삼전도에서의 패배의식만이 주로 부각되어 왔다. 그러나 조선이라는 국가의 역사발전 측면에서 이 사건을 들여다보면 이 단계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병자호란으로 이어지는 35년간의 전란기를 마무리하고 조선후기 근세사회로 발전해 가는 전환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는 17세기 명·청 교체기라는 큰 변동의 과정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병자호란의 결과는 청, 몽고, 조선이 동맹관계로 결합되어 당시의 패권국인 명과 대치하는 양극 관계로 국제질서를 변환시켰다. 역사적 대변동 시기에 약소국 조선이 군사전략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렇다하더라도 지금까지는 이렇게 중요한 전쟁에 대한 연구가 주로 정치, 경제 및 사회사의 시각에서 연구되었을 뿐 정작 중요한 부분인 군사사적 접근은 미흡했다고 보인다. 따라서 전쟁의 과정과 결과에 가장 많은 영향을 주는 양국의 군사전략적 관점에서 본 연구를 진행해 본 결과 병자호란에서 조선과 청의 군사전략기획가들은 당시의 안보환경 속에서 제한된 자원을 가지고 타당성 있는 군사전략 개념을 창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투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조선군은 당시의 국제환경과 청군에 비해 매우 열세한 군사력 그리고 제한된 국가적 자원과 수단을 고려하여 산성위주의 수세적 방어전략을 수립하여 시행하였는데 이는 대규모 기병집단의 청군에 대항하여 여러 가지 대안 중에서 조선군이 어쩔 수 없이 채택하게 된 전략개념이었다. 조선군이 채택했던 전략개념이 청군과 대비하여 적절했는지 그렇지 않으면 무모했는지 결론을 내리기에 앞서서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주장하였듯이 전쟁은 본질적으로 불확실성, 마찰 그리고 우연성이 지배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35) 35) Carlvon Clausewitz,Edited and Translated by MichaelHoward and Peter Paret8th.ed,On War(Princeton,New Jersey: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4), pp.156-158. 병자호란 초기의 전쟁양상은 조선과 청의 군사지도자들이 사전에 예측한대로 진행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1637년 1월과 2월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한 청군과 조선군의 2중 포위의 형세와 전쟁양상은 그 당시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전쟁이었다. 물론 남한산성에서 고립무원의 입장에 처해진 인조와 조선군 수뇌부가 가장 많은 고통에 직면했겠으나 강력한 요새로 변해버린 남한산성 주위에 포진하고 있었던 청군도 혹한 속에서 전쟁의 장기화에 대한 우려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또한 청군은 각도에서 올라 온 근왕군을 차례대로 각개격파 했으나 완전히 격멸할 수는 없었으며, 자신들도 양굴리 등 고위 군사지도자의 전사와 장병들의 피해가 막심한 반면에 청군의 외곽에 전개된 조선의 근왕군은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는 것에 불안해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군과의 장기전과 불필요한 전투력의 소모는 차후 대명전역에 큰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다. 군사력의 상대적 불균형으로 인하여 이미 전투 자체의 판정은 끝난 상황이었지만 조선군과 청군의 대치가 이어질 수밖에 없는 조건이 형성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청이 조선을 직접 지배하려고 시도할 수는 없었으며,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협상을 조기에 타결한 후에 주전장인 대명전역으로 주 전력을 전환해야 했던 것이다. 조선군은 열세한 전력으로 청군에 대응하기 위해 차선책을 채택했으나 전쟁의 상호과정 속에서 피아 쌍방 간의 2중 포위전의 형태가 조성되었다. 변화된 상황을 잘 이용함으로써 조선은 전쟁에서는 패배하였으나 국가체제는 유지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병자호란이 종결되고 약 400년이라는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면서 동아시아의 지역 국제질서는 또다시 예측 불허의 격랑 속으로 빨려가고 있다. 미국의 패권이 아직 건재하다고 하지만 G2로 격상된 중국은 지나간 한 세기를 수모와 치욕의 역사로 치부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동아시아의 질서를 확립하려고 국가적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 동아시아 역사의 순환론적인 현실 속에서 남북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운명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달려 있다. 역사로부터 지혜를 빌려야 할 때이다. (원고투고일: 2014. 1. 1, 심사수정일: 2014. 2. 11, 게재확정일: 2014. 2. 19) 주제어 : 동아시아 국제질서, 병자호란, 조선,청,군사전략 ComparativeStudyontheCausesofByeongjaHoranand theMilitaryStrategiesofJoseonandQingDynasties Lee, Jong-ho This is the study on the implications for Korea in relation to the current changes happening in the U.S. and the economic-political developments of modernized China through the comparative analysis of military strategies of Joseon and Qing Dynasties focused on the ‘Byeongja Horan’(the Qing’s invasion into the Joseon territory) during the transition period from Ming dynasty to Qing dynasty. The international relationships in the region of East Asia had gone through a lot of dramatic changes. Within the East Asian international order in that period, all the countries in the region including Joseon, Ming, Mongol, Japan and the Manchurians of Qing faced the decisive turning point in terms of each nations’s status change. That meaned the transition from complicated triangle international relationships which had been formed among one group of Ming, Qing and Mogol, another group of Qing, Ming and Joseon, and the third group relationship of Qing, Joseon and Mogol, had been changed into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lliance of Qing, Mongol and Joseon, and relation against Ming dynasty. As the power struggle between Ming and Qing dynasties for taking initiative in the region of East Asia grew intense, the four countries such as Ming, Qing, Joseon and Mongol had tried to secure their countries' survival. Moreover, they made a lot of efforts to secure their own sovereignty and the hegemony of the area. As the Qing established the political status firmly as imperial country, the toadyism toward Qing dynasty instead of Ming dynasty had followed and continued until about 260 years later, the year of 1894 when Qing-Japan war broke out. On this study, some moves and actions taken by Joseon dynasty as well as several missteps committed by the Joseon military leadership who took them during the war, are analyzed. In addition, the characteristics of war at that time are also brought up and some impacts to Korea today in terms of both domestic and international conditions are examined from the certain related theses that were already written. We also research and annalize the military strategies of Joseon dynasty and Qing dynasty comparably and also assess whether these two countries’ strategies are appropriate or not in consideration of international environments, military power and national resources during the period of ‘Byeongja Horan’, finally try to draw the implications and lessons learned to this day. KeyWords : Eastasiainternationalorder, ByeongjaHoran, Joseon,Qing, Militarystrate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