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병자호란의 결정적 敗因인 홍이포에 대하여...(22/11/15)

이름없는풀뿌리 2022. 11. 15. 22:24
□ 병자호란의 결정적 敗因인 홍이포에 대하여... 흔히 병자호란의 패인을 주화파와 척화파의 끊임없는 갈등, 이괄의 난으로 조선 최정예군인 북방군의 散破, 근왕군의 체계적인 운용 미흡 및 연이은 패전, 남한산성의 고립된 농성에 따라 군수지원 미흡 및 식량고갈 등을 들 수 있지만 청군의 홍이포 공격으로 혼비백산한 점도 결정적 敗因으로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이라 부르는 淸의 조선침략 목적은 조선 병합이 아니고 명 정벌을 위한 후방 안정과 재정과 식량 조달 기지 확보였을 것이라는 필자의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러자면 단번에 조선의 항복을 받고 돌아가 명 정벌에 전념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사용된 것이 홍이포란 신무기였을 것으로 사료된다. 청은 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심양으로부터 홍이포 34문을 끌고 와 세자가 피한 강화도를 함락할 때에도 18문의 홍이포를 동원하였고 임금이 피한 남한산성은 워낙 견고하여 발도 들여놓지 못하자 남격대(검단산)와 망월봉(벌봉)에 홍이포를 끌고 올라와 청량산 아래 행궁과 고골의 사창(司倉)을 향하여 발사한 기록이 나온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일 1637년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 虜汗合諸軍, 結陣于炭川, 號三十萬, 張黃傘, 登城東望月峯, 俯瞰城中。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1637년 성을 순시하다가 장졸을 위로하다 상이 세자와 성을 순시하다가 동성(東城)에 이르러 여(輿)에서 내려 장사(將士)들을 위로하였다. 또 남격대(南格臺)에 이르러 총융사(憁戎使) 구굉(具宏)을 불러 위로하고 이어 장졸(將卒)을 위무하였다. 그리고 승지를 보내어 성첩(城堞)을 지키는 군사들에게 두루 유시하게 하였는데,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 上與世子巡城, 至東城下輿, 慰諭將士, 又至南格臺, 召摠戎使具宏勞問, 仍慰諭將卒。 且遣承旨, 遍諭守堞諸軍, 或有涕泣者。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1637년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甲子/賊放大砲於南格臺、望月峯下, 砲丸飛落行宮, 人皆辟易。 賊兵進逼南城, 我軍擊却之。 또한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이때의 상황이 더욱 생생히 그려져 있는데(최근 국역 완간됨) 일부를 발췌 소개하면 청인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하였다.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 설치하였는데 포의 이름을 호준 또는 홍이포라 하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만한데 수 십리나 날 수 있었다.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 그치지 않았다. 사창(司倉)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겹이나 뚫고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박혔다. (淸人設大砲於望月峰及南城對峰放之.... 敵又設大砲十餘於南隔臺外 砲名虎? 紅夷砲 丸大如沙碗小比鵝卵能飛數十里 每向行宮而放之終日不絶 落於司倉瓦家貫穿三重入地尺許連中) 청나라 군대가 자리잡고 대포를 쏜 장소가 지금 외성 3곳이 있는 검단산, 한봉, 벌봉(蜂岩)이었던 것이다. 남한산성 성안에서 가장 높은 곳은 수어장대가 있는 청량산으로 483m임에 반하여 검단산 520m, 한봉 418m, 벌봉 515m이니 성밖 고봉 3곳에 대포를 설치하고 임금이 계신 행궁을 내려다보며 대포를 쏘아대었다니 그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조선군은 어떤 화기로 대적했던 것일까? 주력 무기는 화살, 칼, 창이었으며 포(砲)로는 천자총통(天字銃筒)으로 대항했는데 근래에 군사전문기관에서 복원하여 시험해 본 결과 500~600m 정도의 飛거리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검증되었다. 그러면 청나라 군대가 사용했던 홍이포(紅夷砲)란 어떤 대포였을까? 홍이포는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거리2~5km, 유효사정거리 700m였으므로 최대사거리 500~600m인 천자총통보다 월등한 무기였다. 실록에 의하면 훗날 영조 7년(1731년) 홍이포 2문을 제작하여 시험 발사한 결과 탄환 도달 거리는 10여里(4km)라는 기록이 있기도 하다. 홍이란 서양 사람을 중국식으로 부르던 말이다. 글자대로 말하면 붉은 오랑캐인데 그 시절 해양강국 네덜란드 뱃사람은 흰 얼굴이 햇볕에 그을어 붉게 보였다. 지금도 백인의 탄 얼굴은 검지 않고 붉으니 그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리라. 홍이포는 이 사람들이 쓰는 서양식 화포였다. 천자총통과는 비교가 될 수 없는 화력의 차이였던 것이다. 청나라도 명나라와 싸울 때 화력의 차이로 고전하였는데 어렵게 홍이포와 기술자들을 구해 무장했던 것이다. 後金(淸)은 사실 그들의 시조 누르하치가 홍이포로 인하여 사망하기에 이르렀으므로 그 위력을 알고 획득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누르하치는 명을 공략하려고 6만의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요하를 건너 명 원숭환이 수비하는 영원성 공략에 나섰다. 누르하치의 후금군은 인해전술로 성벽에 바짝 붙어 구멍을 내고 공격을 시도했지만 능수능란하게 홍이포를 쏘아대는 명군을 이겨내지 못했다. 누르하치는 공격이 늦춰지면 보급선이 끊어질 우려가 있어 퇴각을 명령했다. 이때 누르하치는 明軍이 쏜 홍이포의 파편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심양으로 퇴각한 누르하치는 홍이포의 파편으로 인한 부상이 도졌기 때문인지,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리고 홍타이지(청 태종)가 후금 2대 왕에 올랐다. 홍타이지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켰고, 1637년 1월 30일 삼전도 들판에서 조선 왕 인조를 무릎 꿇려 우리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로 자리매김되어 있다. 당시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7일을 버티다 항복하고 나와서 한겨울 혹한 속을 걸어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삼전도에서 홍타이지 앞으로 끌려나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찧어야 했다. 홍타이지는 여진족의 ‘오랑캐 정신’에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국력을 부강시켰다. 적은 인구에 생산력도 보잘 것 없었으나 오랑캐 전략으로 날을 세운 여진족의 집요한 공세에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마저 무너졌다. 그 전까지만 해도 여진족은 1234년 금(金)나라가 몽골에 멸망한 이후 나라가 없는 상태였다. 원(元)과 명(明)의 통치 술책에 휘말려 소규모 부락단위로 찢어져, 수백년 동안 明과 朝鮮의 변경을 약탈하거나 원조를 받으면서 살아왔던 여진족이 17세기가 열리자마자 세계사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17세기초 중국 명나라는 인구가 1억5,000만명에 달했고, 조선의 인구도 1,400만에 이르렀지만 여진의 인구는 40만~50만명에 불과했다. 척박한 땅에서 소수 민족이 만주를 통일하고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원을 석권하여 대륙을 차지했던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홍타이지가 후금의 새 왕이 되어 1627년 조선을 침공했을 때(정묘호란)만해도 후금군은 홍이포를 획득하지 못한 상태였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이 형제국 협약을 체결하고 조선에서 퇴각한 것은 홍이포를 갖춘 明군이 배후를 위협했기 때문이었다. 1629년 10월 후금은 명의 영토인 하북성 영평을 공격할 때 홍이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포로로 압송했는데 서둘러 홍이포 기술 개발에 나선 결과 후금은 1631년 6월 만주에서 홍이포를 주조하게 되었다. 1631년 8월, 明의 대릉하 공격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많은 홍이포를 가질 수 있었다. 난공불락이라던 明의 대릉하는 홍이포 덕분에 후금군에게 함락되었다. 조선이 청에 항복한 이후에도 청나라는 조선을 지속적으로 감시하였다. 그들이 명과 조선을 굴복시킨 결정적인 무기인 홍이포는 물론 성(城)을 중수하지 못하도록 조선으로 정기적으로 오는 사신으로 하여금 감시하게 하였는데 그럼에도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시는 이런 치욕이 없도록 남한산성 방어체계를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이루어진 일이 산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세 봉우리에 외성을 쌓는 일이었다. 청나라의 간섭이 약화되는 틈을 노려 숙종 12년(1686년) 봉암성을 쌓고 숙종 19년(1693년)에는 한봉성(漢峰城, 汗峰城)을 쌓았으며 숙종 45년(1719년)에는 신남성을 신축했고 이어서 영조29년(1753년)에는 신남성에 동돈대와 서돈대를 개축하는 등 청 사신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노력을 하였지만 패전의 중요한 요인인 홍이포에 대하여는 전란후 100여년 후에야 그 시제품을 만들었지만 실전배치를 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결론적으로 홍이포에 대하여 정리하자면 1) 후금에 시달리던 明은 홍이포의 도입 필요성 절감. 2) 명에 사신으로 파견된 조선사신 정두원도 홍이포의 도입의 필요성을 상소함. 3) 1620년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수장된 네덜란드 함선에서 26문의 홍이포를 건져 올려 명에 인도되어 영원성에 배치된 것이 동양 최초의 홍이포 도입임. 4) 1626년 청태조 누르하찌는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 파편 맞아 그 원인으로 사망. 5) 1629년 10월 후금은 명의 영토인 하북성 영평을 공격할 때 홍이포를 만드는 장인들을 잡아 포로로 심양 압송. 6) 1631년 6월 만주에서 후금 최초 홍이포 주조. 7) 1631년 8월, 明의 대릉하 공격시 후금군은 명군보다 많은 홍이포 공격으로 함락. 8) 1631년 원숭환에 항거한 등주 가도의 반란군이 20여 문의 홍이포와 300여 문의 서양제 화포를 그대로 가지고 청군에 투항 -> 조선 도입 단절됨. 9) 1636년 병자호란시 청보유 46문 중 34문의 홍이포를 강화도와 남한산성 전투에 투입. 10) 결론적으로 동양에서는 최초로 明이 홍이포를 도입해서 청태조의 사망등 후금을 견제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장인과 그 기술이 다시 청에 넘어가 홍이포로 다시 조선과 명이 멸망하게 된 큰 요인이었던 大砲戰爭이었음. 11) 조선에 이 홍이포가 최초 소개된 것은 1627년(인조5년) 박연(벨테브레)에 의해서였고 12) 1631년(인조9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홍이포의 제원을 소개하고 그 도입을 건의하여 인조가 호의적 태도를 보였지만 실무자들은 난색을 표함. 13) 사실 그 당시 정두원의 홍이포 도입 건의와 인조의 호의적 태도가 실현되었다면 60만 포로가 잡혀가고 조선말까지 청의 갑섭을 받는 병자호란의 패전을 막을 수도 있었음. 14) 호란후 조선은 청의 견제로 산성 중수 및 홍이포 도입이 무산되다가 15) 이후 1653년(효종4년) 하멜표류시 건져 올린 네덜란드제 홍이포를 남만대포(南蠻大砲)라는 이름으로 약 50여 년간 12문~16문 정도 보유하기는 했지만 16) 과다한 화약을 사용해야 하는 홍이포의 특성으로 우리 실정에 맞지 않아 17) 강화도에 배치된 12문의 남만대포는 거의 무용지물로 이리저리 돌다 손망실되고 18) 1705년(숙종31년) 남한산성에 배치된 3문의 남만대포(홍이포)중 2문을 녹여서 조선의 실정에 맞는 불랑기포나 현자포 주조에 재활용되기도 했고 19) 1707년(숙종33년)까지만 해도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남한산성에 남겨뒀다는 1문의 홍이포는 그 후 별다른 기록이 없어 산성의 어딘가가 묻혀있을 것으로 사료. 20) 1731년(영조7) 국산 시제품 홍이포 2문을 제작했으나 역시 과다한 화약사용과 산악지형인 조선의 실정에 맞지않아 이후 대대적 생산 배치 기록은 없슴. 21) 따라서 위키백과에 소개된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요호 사건 때 홍이포를 활용했다는 내용은 근거없는 것으로 사료됨. 배달9217/개천5918/단기4353/서기2020/10/10/2022/11/15수정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위키백과에 소개된 홍이포(紅夷砲) 17세기 중국 명에서 네덜란드의 대포를 모방하여 만든 중국식 대포인데 16세기 신항로 개척으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앞장서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였다. 네덜란드도 동아시아 나라에까지 진출하였는데, 명은 17세기 초 네덜란드와 군사적으로 접촉하면서 그들이 사용하던 대포의 위력을 알게 되었다. 명은 이를 연구하여 직접 대포를 만들어냈는데, 당시 명이 네덜란드를 붉은 오랑캐, 즉 ‘홍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새로 개발한 대포를 ‘홍이포’라고 불렀다. 명과 후금 사이에 치러졌던 영원성 전투에서 홍이포가 큰 활약을 하였다. 명의 장군 원숭환이 2만의 군사와 10여 문의 홍이포로 누르하치가 이끄는 13만 기병에 맞섰고, 결국 누르하치가 사망하였다. 이후에 후금에서도 홍이포의 위력을 알고 얻고자 애를 썼다. 후금이 청으로 국호를 바꾸고 명과의 대릉하 전투에서 그 기술자를 포로로 잡아 홍이포를 대량 주조하여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 홍이포를 가져와 사용하였고, 조선은 영조대에 홍이포의 시제품을 제작하였고 제주도에 표류한 네덜란드인인 벨테브레, 히아베르츠, 피아테르츠 등이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조선군에게 홍이포 제작법과 조종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에서 明, 청나라를 거쳐 유래된 대포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 또는 홍이포를 홍이대포(紅夷大砲)라고 부른다. 조선 영조 때 2문이 주조되었다. 또는 '컬버린포' 라고도 한다. 길이 215cm, 중량 1.8t, 구경 12cm, 최대사정거리2~5km 유효사정거리 700m인 전장포다. 1866년 병인양요, 1871년 신미양요, 1875년 운요호 사건 때 사용되었다. 2. 明의 제2차 紅夷砲 구매와 관련된 두 문서: 「報效始末疏」와 「貢銃效忠疏」 / 안상현 안상현 / 2011-12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본 논문에서는 1629-31년 사이에 明 조정이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에게서 紅夷砲를 구매한 사실을 기록한 보고서인 「報效始末疏」와 韓霖의 문집에 실려 있는 「貢銃效忠疏」 판본을 역주하였다. 전자는 1628년 9월 15일에 마카오의 議事亭에 의해 작성되어 1630년 1월 17일에 1월 17일에 明 조정에 제출된 보고서이다. 후자는 로드리게스에 의해 작성되어 「報效始末疏」와 함께 제출된 것이다. 전자는 마카오 포르투갈인들이 明 조정에 요구하는 두 가지 사항, 즉 포르투갈인들의 마카오 거주에 대한 법제화와 신흥 네덜란드 세력에 대한 배척의 내용을 담고 있고, 후자는 마카오에서 北京까지 紅夷砲를 운반한 경과가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韓霖의 문집에 실려 있는 「貢銃效忠疏」는 紅夷砲 운반을 맡았던 사령관 떼이쉐이라가 吳橋兵亂의 와중에 덩저우(登州)에서 전사했음을 전하고 있다. 로드리게스는 그 때 덩저우에서 간신히 탈출해서 마카오로 귀환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러므로 설사 로드리게스를 통해 서양의 홍이포와 염초 제조술을 수입하자는 鄭斗源의 건의가 조선 조정에 의해 채택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실현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홍이포는 17세기에 들어서서 격동의 장으로 변한 중원과 한반도에 있어서 결전 병기나 다름없는 장비였습니다. 홍이포의 위력을 절감한 명은 아예 마카오의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2차례에 걸쳐 홍이포는 물론, 운용 병력까지 전부 고용했을 정도였으니까요. 당시 조선에서 명에 파견한 사신이던 정두원 역시 홍이포를 도입하고자 노력합니다. 정두원이 직접 목격한 홍이포는 컬버린으로, 동시기 영국-네덜란드가 운용했던 제원을 살펴보면 사거리 1.5km에 무게가 약 4,000파운드, 탄환은 15파운드가 나갔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장비를 공개해준 포르투갈 상인 로드리게스를 정두원은 조선 조정에 소개하며, 이러한 장비는 물론 운용 병력과 염초까지 도입한다면 확실하게 북방의 여진족을 제압할 수 있다고 언급했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정두원의 요청은 실패로 돌아가게 되고, 조선은 이로부터 약 1세기가 지난 1731년이 되어서야 최초의 홍이포 2문을 국산화시키는데 성공합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었죠. 이렇게 조선이 홍이포 제작 기술을 늦게 받아들인 이유는 등주의 반란군과 상당한 연관이 있습니다. 우선 명의 홍이포 구매 및 운영에 대해서 알아보아야합니다. 당초 명은 마카오의 포르투갈인들이 들어와 거주하는 것을 묵인했으나, 합법화는 하지 않은지라 만력제 말기에 명-포르투갈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명 조정에서 묵인하자는 쪽보다는 이들을 퇴거시키자는 의견이 높아졌기 때문이죠. 하지만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건국하고 1619년에는 조명 연합군이 부차에서 궤멸당하자 명의 태도는 180도 바뀌게 됩니다. 마카오의 포르투칼인들을 고용하고, 성능이 좋은 서양제 화포를 구매해 후금의 날랜 기병대를 저지하고자 했습니다. 포르투칼 역시 네덜란드 함대가 자주 마카오를 집적거리자, 명 조정에 대한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고, 명이 요구한 홍이포 4문을 인도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화포 인도가 지체되다가, 1620년 요동이 완전하게 넘어가게 되자 사태가 급박해져 명은 홍이포의 도입량을 늘리면서 이들에게 독촉합니다. 한 시가 급했거든요. 포르투칼인들은 자신들의 요새를 방어할 화포도 부족한데 어쩔까, 하는 고민을 하다가 무언가를 생각해냅니다. 바로 광둥성 앞바다에서 자신들이 격침시켰던 네덜란드 함선을 떠올렸고, 지체없이 26문의 함포를 건져올려 북경으로 급히 이송시킵니다. 이 함포들이 명이 요구한 홍이포였으며, 이들과 함께 다수의 운용병력이 고용되어 원숭환 휘하에 배속됩니다. 모두 영원성에 배치되죠. 1626년 누르하치가 영원성을 공격했으나 패배를 당한 것도 홍이포의 역할이 컸으며, 누르하치마저도 전투 중 입은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명은 홍이포의 추가 구매를 추진합니다. 화력 우위를 확고하게 다질 예정이었습니다. 이 때 포르투갈 교관단을 고용하여 명군의 포병대를 교육시켰고, 이들은 등주에 머물면서 훈련 임무를 맡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터집니다. 1631년 등주에서 일어난 공유덕 등 가도 출신 병력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킨 것과 큰 관련이 있었습니다. 원숭환이 모문룡을 참수하고 남은 병력을 휘하에 편입시켰으나, 불만을 품고 이들이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당시 포르투갈 교관단은 명이 구매한 20여 문의 홍이포와 각종 서양제 화포 300여 문을 가지고 명군을 교육시켰으나, 이들의 반란으로 인해 진압군과 함께 싸우던 교관단 장교 3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마카오 등지로 탈출하면서 조선과의 연결이 완벽하게 끊어져버립니다. 특히 교관단에 있으면서 정두원과 지속적으로 연결을 가지던 로드리게스도 71세의 고령으로 인해 탈출 이후 마카오에서 숨을 거두게 됩니다. 반란군은 20여 문의 홍이포와 300여 문의 서양제 화포를 그대로 가지고 청군에 투항했으며, 포르투갈 교관단으로부터 화포 제작법 및 운용법을 습득한 이들로 인해 명이 가지고 있던 화력 우위는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유덕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의 조선 수군을 격퇴하는 인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각설하고, 조선의 홍이포 기술 도입은 가도 출신 병력들의 반란으로 인해 실패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당시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 이후에도 홍이포 기술을 도입하려는 노력은 상당했습니다만, 자체적으로 완벽하게 양산을 시작한 건 거의 1세기가 지난 시점인지라. 정조는 이를 두고서 상당히 한탄합니다. 병자년에 홍이포만 있었더라도 그렇게 패배당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면서 말이죠. 이후 조선은 홍이포를 결전병기처럼 취급하며 각 거점에 배치했고, 이인좌의 난 등에서 화차와 함께 맹활약을 하게 됩니다. 3.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의 홍이포 기록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는 1779년(정조 3)에 서명응(徐命膺)이 수어사 재직 중에 왕명을 받고 착수하여 미완으로 그친 『남성지(南城志)』와 『여지승람(輿地勝覽)』 등 여러 사서와 지리지를 참고하고 수정·보완하여 1846년(헌종 12) 광주부윤 겸 수어사이던 홍경모(洪敬謨)가 편찬한 경기도 광주읍지인 『남한지(南漢誌)』를 1862년에 필사한 중정본(重訂本)인데 남한산성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에 『남한지』라고 하였으며, ‘남한(南漢)’이란 용어를 책머리에 써서 광주부를 대표하는 뜻으로 사용하였다. 그러한 사찬(私撰) 읍지에 속하는 중정남한지(重訂南漢志)에는 이때의 상황이 더욱 생생히 그려져 있는데(최근 국역 완간됨) 일부를 발췌 소개하면 ‘청인이 대포를 망월봉과 남성(南城) 맞은편 봉우리에 설치하고 쏘기 시작하였다. 적이 또 대포 10여대를 남격대 밖에 설치하였는데 포의 이름을 호준 또는 홍이포라 하였다. 탄환이 큰 것은 사발만하고 작은 것도 거위알만한데 수 십리나 날 수 있었다. 매양 행궁을 향해 쏘기를 종일 그치지 않았다. 사창(司倉)에 떨어진 것은 기와집을 세겹이나 뚫고 땅속으로 한 자 남짓이나 박혔다. (淸人設大砲於望月峰及南城對峰放之.... 敵又設大砲十餘於南隔臺外 砲名虎? 紅夷砲 丸大如沙碗小比鵝卵能飛數十里 每向行宮而放之終日不絶 落於司倉瓦家貫穿三重入地尺許連中)’ 4. 실록 및 기타기록으로 본 홍이포(紅夷砲) □ 인조실록 25권, 인조 9년 7월 12일 1631년 진주사 정두원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천리경·서포·자명종·염초화·자목화 등 물품을 바치다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천리경(千里鏡)·서포(西砲)·자명종(自鳴鐘)·염초화(焰硝花)·자목화(紫木花) 등 물품을 바쳤다. 천리경은 천문을 관측하고 백 리 밖의 적군을 탐지할 수 있다고 하였으며, 서포는 화승(火繩)을 쓰지 않고 돌로 때리면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서양 사람 육약한(陸若漢)이란 자가 중국에 와서 두원에게 기증한 것이다. 자명종은 매 시간마다 종이 저절로 울고, 염초화는 곧 염초를 굽는 함토(醎土)이며, 자목화는 곧 색깔이 붉은 목화이다. 상이 하교하기를, "서포를 찾아온 것은 적의 방어에 뜻을 둔 것이니, 정말 가상하기 그지없다. 특별히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라."하니, 간원이 가자(加資)하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 인조실록 25권, 인조 9년 8월 3일 1631년 진위사 정두원과 동지사 서장관 나의소를 불러 입대시키고 중국의 사정을 묻다 상이 진위사(陳慰使) 정두원(鄭斗源)과 동지사 서장관 나의소(羅宜素)를 불러 입대시켰다. 상이 하문하기를, "중원의 일이 어떠한가?"하니, 두원이 대답하기를, "신이 길에서 듣건대 모두들 황상은 거룩하다고 하였습니다. 또 포성이 연일 끊이지 않았는데, 아마도 뜻을 가다듬어 적을 토벌하는 듯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현재 명장(名將)이 몇 사람이나 있는가?"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손승종(孫承宗)이 수장(首將)으로서 군무를 총괄하는데, 등주 군문(登州軍門)인 손원화(孫元化) 등도 모두 승종의 재가를 받고 있으며 제장들이 기꺼이 그의 말을 따르고 있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의 성곽도 돌로 쌓았는가?"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벽돌로 쌓은 것도 있고 흙으로 쌓은 것도 있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육약한(陸若漢)은 어떤 사람인가?"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도(道)를 터득한 사람인 듯하였습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손 군문(孫軍門)은 어떤 사람인가?"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청렴하고 검소하며 소탈하고 청아하니, 위무(威武)는 부족하지만 동문(東門)에서 사람을 얻었다고 할 만합니다."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등주와 내주(萊州)의 군사는 어떠한가?"하니, 두원이 아뢰기를, "명나라가 연경(燕京)과 산해관(山海關)에 전력하기 때문에 산동(山東)은 병세(兵勢)가 미약합니다."하였다. □ 인조실록 28권, 인조 11년 10월 8일 1633년 경상도에서 염초를 구워 수량을 기록하게 하다 경상 병사 박상(朴瑺)이 치계하기를, "새로 나온 염초 굽는 방법을 일일이 전수하여 익히게 하고자 본영(本營)에다 국(局)을 설치하였습니다. 도내 여섯 고을도 염초를 굽게 하면 7월 이후에는 구워낸 수량이 무려 1천여 근에 이를 것이니, 지금부터 여러 곳에서 구워 낸다면 앞으로 화약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구운 염초는 그 수량을 회록(會錄)하게 하소서."하니, 상이 따랐다. 우리 나라에는 처음에 염초가 없었으므로 중국에서 사다가 썼는데, 정두원(鄭斗源)이 북경(北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염초 굽는 법을 배워 가지고 왔다. 이에 그 법을 전수하여 익히게 하여 그 용도를 넓혔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4일 1636년 최명길에게 강화를 청하게 하고 상은 남한 산성에 도착, 강도로 가기로 결정하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5일 1636년 대가가 강도로 떠났다가 되돌아오다. 양사가 김자점 등을 정죄하길 청하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16일 1636년 납서로 제도의 군사를 부르고 도원수·부원수 에게 들어와 구원하게 하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5일 1636년 예조가 온조에게 제사지낼 것을 아뢰다 □ 인조실록 33권, 인조 14년 12월 25일 1636년 사영 대장 신경진 등이 청대하고 한 번 싸울 것을 허락받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일 1637년 청나라 한이 탄천에 진을 쳤다고 하다 청나라 한(汗)이 모든 군사를 모아 탄천(炭川)에 진을 쳤는데 30만 명이라고 하였다. 황산(黃傘)을 펴고 성의 동쪽 망월봉(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내려다 보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8일 1637년 예조가 온조왕의 제사를 다시 지낼 것을 청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3일 1637년 성을 순시하다가 장졸을 위로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19일 1637년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다 오랑캐가 성 안에 대포를 쏘았는데, 대포의 탄환이 거위알만했으며 더러 맞아서 죽은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2일 1637년 강도가 함락되는 전후 사정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 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014) 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강진흔·김경징·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장관(將官) 구원일(具元一)이 장신을 참(斬)하고 군사를 몰아 상륙한 뒤 결전을 벌이려 했으나 장신이 깨닫고 이를 막았으므로 구원일이 통곡하고 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중군(中軍) 황선신(黃善身)은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룻가 뒷산에 있었는데 적을 만나 패배하여 죽었다. --- 하략 ---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4일 1637년 남성에 육박한 적을 격퇴시키다 적이 대포(大砲)를 남격대(南格臺) 망월봉(望月峯) 아래에서 발사하였는데, 포탄이 행궁(行宮)으로 날아와 떨어지자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피하였다. 적병이 남성(南城)에 육박하였는데, 우리 군사가 격퇴시켰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5일 1637년 성첩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지다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용골대가 한의 칙서를 가지고 오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문서를 모아 태우다 제사(諸司)의 문서를 거두어 모아 모두 태웠다. 문서 가운데 간혹 적(賊)이라고 호칭한 등의 말이 탄로나는 것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8일 1637년 이조 참판 정온과 예조 판서 김상헌이 자결 시도와 사론 이조 참판 정온이 입으로 한 편의 절구(絶句)를 읊기를, 사방에서 들려오는 대포 소리 천둥과 같은데 외로운 성 깨뜨리니 군사들 기세 흉흉하네 늙은 신하만은 담소하며 듣고서 모사에다 견주어 조용하다고 하네 하고, 또 읊기를, 외부에는 충성을 다하는 군사가 끊겼고 조정에는 나라를 파는 간흉이 많도다 늙은 신하 무엇을 일삼으랴 허리에는 서릿발 같은 칼을 찼도다 하고, 또 의대(衣帶)에 맹서하는 글을 짓기를, 군주의 치욕 극에 달했는데 신하의 죽음 어찌 더디나 이익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려면 지금이 바로 그 때로다 대가(大駕)를 따라가 항복하는 것 나는 실로 부끄럽게 여긴다 한 자루의 칼이 인을 이루나니 죽음 보기를 고향에 돌아가듯 하고, 인하여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스스로 배를 찔렀는데, 중상만 입고 죽지는 않았다. 예조 판서 김상헌도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끊고 있다가 이때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매었는데, 자손들이 구조하여 죽지 않았다. 이를 듣고 놀라며 탄식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신은 논한다. 강상(綱常)과 절의(節義)가 이 두 사람 덕분에 일으켜 세워졌다. 그런데 이를 꺼린 자들은 임금을 버리고 나라를 배반했다고 지목하였으니, 어찌 하늘이 내려다 보지 않겠는가. 吏曹參判鄭蘊口號一絶曰: "砲聲四發如雷震, 衝破孤城士氣恟。 唯有老臣談笑聽, 擬將茅舍號從容。" 又曰: "外絶勤王帥, 朝多賣國兇。 老臣何所事, 腰下佩霜鋒。" 又作衣帶誓辭曰: "主辱已極, 臣死何遲? 舍魚取熊, 此正其時。 陪輦投降, 余實恥之。 一劍得仁, 視之如歸。 " 因拔所佩刀, 自刺其腹, 殊而不絶。 禮曹判書金尙憲, 亦累日絶食, 至是自縊, 爲子所救解, 得不死, 聞者莫不驚歎。 【史臣曰: "綱常節義, 賴此二人而扶植。 忌之者, 以棄君負國目之, 其無天哉?"】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29일 1637년 윤집·오달제가 하직 인사를 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1월 30일 1637년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다. 서울 창경궁으로 나아가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일 1637년 백관들이 모두 대궐안에 들어가다 이때 몽고(蒙古) 사람들이 그대로 성중(城中)에 있었다. 백관들은 모두 대궐 안에 들어가 있었는데, 여염(閭閻)이 대부분 불타고 넘어져 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이리저리 널려 있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일 1637년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가 고려옥인을 가져오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일 1637년 철군하는 청의 한을 전송하다 청나라 한(汗)이 삼전도(三田渡)에서 철군하여 북쪽으로 돌아가니, 상이 전곶장(箭串場)에 나가 전송하였다. 한이 높은 언덕에 앉아 상을 제왕의 윗자리로 인도하여 앉게 하였는데, 도승지 이경직(李景稷)만 따라갔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2일 1637년 청이 본국으로 하여금 주사를 조발하게 하다 청나라 사람이 장차 가도(椵島)를 습격하려고 경중명(耿仲明)과 공유덕(孔有德)으로 하여금 크게 배를 수선하게 하고, 또 본국으로 하여금 주사(舟師)를 조발하여 보내도록 하였다. 이에 신천 군수(信川郡守) 이숭원(李崇元)과 영변 부사(寧邊府使) 이준(李浚)에게 명하여 황해도의 전선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경중명과 공유덕은 바로 명나라를 배반한 장수로 오랑캐에게 항복한 자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3일 1637년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가 대궐에 오다 용골대·마부대 두 장수가 대궐에 왔으므로 상이 불러서 보니, 용골대가 정명수(鄭命壽)로 하여금 말을 전하게 하였다. 정명수는 평안도 은산(殷山)의 천례(賤隷)로서 젊어서 노적(奴賊)에게 사로잡혔는데, 성질이 본래 교활하여 본국의 사정을 몰래 고해 바쳤으므로 한(汗)이 신임하고 아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5일 1637년 왕세자가 오랑캐 진영에서 와서 하직을 고하고 떠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7일 1637년 근신을 보내어 강도에서 잡힌 사람들은 쇄환해 오다 상이 세 차례 근신(近臣)을 보내 강도에서 사로잡힌 사람들을 쇄환해 줄 것을 청하니, 한(汗)이 남녀 1천 6백여 명을 돌려보냈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8일 1637년 구왕이 철군하면서 왕세자와 빈궁, 봉림 대군과 부인을 데려가자 전송하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2일 1637년 한성부의 고아 문제에 건의를 따르다 □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3일 1637년 도승지 이경석이 일반 백성의 속환을 대신해 주길 청하자 윤허하다 □ 효종실록 11권, 효종 4년 8월 6일 1653년 제주 목사 이원진이 난파당한 서양인에 대하여 치계하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배 안에는 약재(藥材)·녹비(鹿皮) 따위 물건을 많이 실었는데 목향(木香) 94포(包), 용뇌(龍腦) 4항(缸), 녹비 2만 7천이었습니다. 파란 눈에 코가 높고 노란 머리에 수염이 짧았는데, 혹 구레나룻은 깎고 콧수염을 남긴 자도 있었습니다. 그 옷은 길어서 넓적다리까지 내려오고 옷자락이 넷으로 갈라졌으며 옷깃 옆과 소매 밑에 다 이어 묶는 끈이 있었으며 바지는 주름이 잡혀 치마 같았습니다. 왜어(倭語)를 아는 자를 시켜 묻기를 ‘너희는 서양의 크리스챤[吉利是段]인가?’ 하니, 다들 ‘야야(耶耶)’ 하였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 물으니 고려(高麗)라 하고, 본도(本島)를 가리켜 물으니 오질도(吾叱島)라 하고, 중원(中原)을 가리켜 물으니 혹 대명(大明)이라고도 하고 대방(大邦)이라고도 하였으며, 서북(西北)을 가리켜 물으니 달단(韃靼)이라 하고, 정동(正東)을 가리켜 물으니 일본(日本)이라고도 하고 낭가삭기 (郞可朔其)097) 라고도 하였는데, 이어서 가려는 곳을 물으니 낭가삭기라 하였습니다."하였다.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에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있었고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 [註 097]낭가삭기(郞可朔其) : 일본 나가사키[長崎]. □ 승정원일기 168책 (탈초본 9책) 현종 2년 6월 17일 1661년 興政堂에서 洪命夏 등을 인견하고 수세할 木板을 증액하는 문제와 南砲樓의 관리 문제 등을 논의함 □ 현종개수실록 11권, 현종 5년 6월 22일 1664년 강도 어사 민유중이 돌아와 강도의 미곡과 군기의 숫자를 아뢰다 강도 어사(江都御史) 민유중이 돌아와서 강도의 미곡(米穀)과 군기(軍器)의 숫자를 아뢰었다. 인조조(仁祖朝) 이후로 강도를 보장(保障)으로 삼아 40, 50년 사이에 물자를 옮겨 저축하여 국력을 크게 갖추었었는데, 중간에 정축년의 병란을 겪어 완전히 없어졌다. 그 뒤 정세가 조금 안정이 되자 더욱 잘 계획하여 거두어 모아 한결같이 완전하게 수선하고 저축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았다. 유수(留守)는 반드시 재능과 명망이 있는 사람으로 가려서 보내고 또 중신 한 사람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는데, 각사에 있던 기계와 재화도 또한 모두 나누어 보내 저축을 하게 하였다. 심지어는 내탕고에 있는 어용(御用)에 쓸 여러 물품들까지도 나누어 보내 저축을 한 것이 많았다. 저축해 모은 것이 이미 많고 보니, 더러 빈 장부 및 쓰기에 합당하지 않은 기계들이 있었다. 이에 민유중을 보내어 점검하고 조사하여 아뢰게 한 것이다. 본부에는 각궁(角弓)과 목궁(木弓)이 모두 5백 17장(張), 장전(長箭) 4천 5백 30부(部), 편전(片箭) 7천 3백 77부, 조총(鳥銃) 6백 74자루, 연환(鉛丸) 87만 2천 4백 개, 진천뢰(震天雷) 1백 40좌(坐), 대완구(大碗口) 및 대포(大砲)와 중포(中砲)가 모두 65좌, 소완구(小匋口) 30좌, 호준포(虎砲) 37좌, 화약(火藥) 2만 6천 8백 92근(斤), 석류황(石硫黃) 7천 5백 72근, 염초(焰硝) 7천 1백 16근, 철갑(鐵甲) 52벌이었다. 월곶(月串), 제물(濟物), 용진(龍津), 초지(草芝), 광성(廣城), 사각(史閣), 승천(昇天), 인화(寅火) 등의 각보에 나누어 둔 것은, 흑각궁(黑角弓) 1천 3백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목궁 1백 50장, 장전 2천 1백 부, 편전 9백 부, 대조총(大鳥銃) 5백 84자루, 소조총(小鳥銃) 2천 1백 50자루, 대포 1백 79좌, 진천뢰 63좌, 남만 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 2백 44좌, 화약 1만 6천 2백 근, 군향미 11만 2천 3백 47석, 콩 2만 8천 2백 28석, 조(租) 5천 4백 56석이었다. 호조에서 이송한 은(銀) 1만 3천 냥, 면포 10만 8천 필이었다. 기타 주사(舟師)의 비용과 깃발이나 그릇 등의 물건은 다 기록하지 않는다. □ 승정원일기 426책 (탈초본 22책) 숙종 31년 8월 24일 1705년 閔鎭厚가 입시하여 南蠻砲를 佛浪機 玄字砲로 改鑄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 閔鎭厚所啓, 臣於巡審南漢山城時, 見其有異制大砲, 問於將校輩, 則蓋所謂南蠻砲, 而昔年漂海人留置而去, 故朝家仍送於山城。故判書金佐明爲守禦使時, 取其一坐, 塡藥試放, 則盡爲裂破, 故以其餘鐵, 鑄得佛浪機, 而今尙餘一坐云。設令此砲可以試放, 猶不如佛浪機玄字砲之爲緊要, 況不知其試放之法, 而留此無用之物, 一任兒童之所琢, 實無意義, 故臣召匠問之, 則此砲以水鐵·正鐵相雜而鑄成, 今可以鎔作他砲云。 若改作佛浪機玄字砲, 則似爲得宜, 而有難擅便, 敢此仰達。上曰, 依所達改鑄, 可也。備局謄錄 □ 국역비변사등록 56책 숙종 31년 08월26일(음) 1705년 知事 閔鎭厚가 입시하여 南漢山城의 南蠻砲를 녹여 佛狼機와 玄宗砲를 주조하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이달 24일 주강 입시 때에 지사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을 살펴보았을 때에 제도가 다른 대포(大砲)를 보고 장교들에게 물으니 이는 대체로 이른바 남만포(南蠻砲)로서 지난날 표류된 사람이 두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이어 산성에 보냈습니다. 고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수어사로 있을 때 그 하나에 화약을 넣고 시험 발사해 보니 모두 파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남은 쇠로 불랑기(佛狼機)를 주조하였고 지금도 한 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설령 이 포를 시험발사할 수 있다하더라도 불랑기나 현종포(玄宗砲)처럼 긴요하지 못합니다. 더구나 그 발사하는 법도 모르면서 이 무용한 물건을 두어 아이들이 쫓도록 내버려둠은 실은 의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장인(匠人)을 불러 물으니 이 포는 수철(水鐵)과 정철(正鐵)을 혼합하여 주조하였으므로 지금 녹여서 다른 포를 만들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불랑기와 현종포로 고쳐 만들면 옳을 듯 싶으나 마음대로 하기 어렵습니다. 감히 이를 아룁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바에 의하여 다시 주조하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 국역비변사등록 58책 숙종 33년 02월21일(음) 1707년 知經筵事 趙泰采가 입시하여 南漢山城의 南蠻砲를 해체하여 玄字砲를 주조하는데 있어 3門 중 1門을 남기는 문제에 대해 논의함 이번 2월 20일 주강에 입시하였을 때에 지경연사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을 시찰하러 나가기 때문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산성에 있는 남만포(南蠻砲) 3문(門)을 해체하여 현자포(玄字砲)를 주조하기로 전 수어사가 품의 결정한 바 있었으나 지금 들으니 2문은 이미 해체 주조하였고 1문은 미처 일을 시작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외국의 병기이고 보관해 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것을 파괴하여 다른 병기를 주조해보았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차후에 혹 그 제도를 상고하여 원용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1문은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 숙종실록 48권, 숙종 36년 2월 22일 1710년 제조 민진후가 남한 산성 남격대를 살펴보는 일로 아뢰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 남격대(南格臺)에 돈대(墩臺)를 쌓는 것이 마땅한지의 여부(與否)로,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기하(李基夏)·우윤(右尹) 윤취상(尹就商)과 함께 가서 살펴보는 일은 지난해에 이미 하교를 받았는데, 이기하가 마침 병이 들어서 홀로 윤취상과 가서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기하의 병이 이미 차도가 있다 하니, 후반(候班)을 거두어 치운 뒤에 신이 이기하와 함께 다시 가서 보려 합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 숙종실록 48권, 숙종 36년 3월 21일 1710년 제조 민진후가 남한 산성의 남격대에 돈대를 쌓아 지키기를 청하다 약방(藥房)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제조(提調)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남격대(南格臺)를 살펴보았더니, 남격대가 남장대(南將臺)와 서로 마주보고 있는데, 세 산봉우리가 성중(城中)을 내리누르기 때문에 전부터 성을 쌓고 돈대(墩臺)를 쌓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지금 윤취상(尹就商)과 이기하(李基夏)의 논한 바가 대개 서로 같으나, 단지 윤취상은 저 사람들의 위협을 초래하게 될 것과 군병(軍兵)을 많이 얻기가 쉽지 않을 것을 염려하는데, 이는 참으로 의견(意見)이 있습니다. 그러나 삼전도(三田渡)의 비(碑)가 있는 곳에서는 거리가 약간 멀어 눈에 띄지는 않을 듯합니다. 더욱이 돈대를 쌓고 나무를 심으면, 결코 염려할 만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군병(軍兵)에 이르러서는 혹 주필(駐蹕) 하실 것 같으면 저절로 추이(推移)할 방도가 있을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반드시 적(賊)의 모든 군사가 가서 침공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또 민심[人情]이 모두들 남쪽이 허술한 것을 의심하는데, 만약 이곳에 돈대를 쌓는다면 민심을 진정(鎭定)시키는 데 하나의 도움이 될 것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세 봉우리에 모두 쌓을 필요는 없고, 단지 가운데 봉우리의 최요해처(最要害處)에 하나의 돈대를 설치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이른바 가운데 봉우리의 아래는 산기슭이 퍼져 있어 적병의 왕래를 넉넉히 살펴볼 수 있는데, 옛사람들이 기치(旗幟)를 많이 설치하여 적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한다고 하였으니, 하물며 돈대를 쌓아 이를 지키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신(臣) 한 사람의 말로써 단정할 수는 없으니, 이기하·윤취상 등의 서계(書啓)를 가져다 살펴보시고, 널리 묘당(廟堂)의 여러 의논을 물으셔서 장점을 따라 품처(稟處)케 하심이 마땅할 듯합니다."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민진후가 또 아뢰기를, "별파진(別破陣)은 성(城)을 지키기에 가장 긴요하므로, 이정청(釐正廳)에서 군인의 수효를 변통(變通)할 때 현재 있는 2천 명으로써 계하(啓下)하였으나, 묘당의 의논을 얻는 데 따라 첨정(簽丁)을 더하도록 허가하였기 때문에, 신이 전후에 임무를 맡아 잇따라 차례로 수득(搜得)하였으나 이 또한 한정(限定)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일찍이 2천 명으로써 4국(局)을 만들었고, 국마다 한 초관(哨官)을 두었으니, 지금 만약 5백 명을 한정해서 첨정을 더하여 5국을 만들되, 한 초관(哨官)을 더 설치하고 이후에는 다시 인원수를 더 늘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로써 정제(定制)하되, 초관(哨官)을 더 설치하도록 명하였다. □ 영조실록 30권, 영조 7년 9월 21일 1731년 훈련 도감에서 새로 준비한 동포·홍이포에 대해 아뢰다 훈련 도감(訓鍊都監)에서 말하기를, "본국(本局)에서 새로 준비한 동포(銅砲)가 50이고 홍이포(紅夷砲)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輻)입니다. 동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2천여 보(步)가 되고, 홍이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10여 리(里)가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 나라에서 새로 제작한 것으로 예람(睿覽)하시도록 올렸으니, 청컨대 감동(監董)한 사람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 영조실록 77권, 영조 28년 9월 23일 1752년 뇌성의 이변으로 원손을 위해 복을 아끼는 하교를 내리다 광주 유수(廣州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원손을 위해 복을 아끼시는 하교를 하시니, 신은 실로 흠앙(欽仰)하는 바입니다. 억만년토록 무궁한 아름다움이 또한 여기에 터잡을 것입니다."하였다. 또 아뢰기를, "남한 산성 밖에 높은 봉우리가 하나 있는데, 병자년에 오랑캐들이 이 봉우리 위에서 엿보았으니, 실로 요긴한 곳입니다. 민진후(閔鎭厚)가 수어사(守禦使)가 되었을 때 봉우리 위에 작은 성을 쌓아 천총(千摠)이 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켰습니다만, 그 형세를 지탱하기 어렵고 또 땅이 높아서 성가가 쉽게 무너집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돈대(墩臺) 둘을 쌓아 적이 올라올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이 과연 성 안을 내려다보고 있는가?"하므로, 이기진이 말하기를, "홍이포(紅夷砲)를 쏘면 포탄이 성중에 들어온다 합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형과 돈대를 그림으로 그려 올리는 것이 옳겠다."하였다.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8일 1779년 남한 산성 승군의 폐단 시정을 명하다 임금이 남한(南漢)에 있었다. 연병관(鍊兵館)에 나아가 문사(文士)·무사(武士)를 시험하여 문과(文科)에 민태혁(閔台爀) 등 3인을 뽑고 무과(武科)에 이상연(李尙淵) 등 15인을 뽑았다. 진사(進士) 윤영의(尹永儀)가 무적자(無籍者)로서 부거(赴擧)하였는데, 창방(唱榜) 뒤에 옥당(玉堂)에게 빼어 버리기를 청하고 대간(臺諫)이 법에 따라 중벌하기를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이어서 문과·무과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는데, 민태혁은 과거(科擧) 전에 자궁(資窮)하였으므로 통정(通政)으로 승자(陞資)하였다. 임금이 수어사 서명응에게 말하기를, "남한 한 성은 국가에서 급할 때에 믿는 곳이다. 편안히 다스리는 방책은 오로지 해영(該營)에 달려 있으나, 승군(僧軍)의 단속으로 말하면 또한 우리 조종(祖宗) 때에 창설한 법인데 편안히 다스리는 방책 가운데의 한 가지이다. 승군의 좌작 진퇴(坐作進退)하는 방법도 시열(試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승장(僧將)을 시켜 관하(管下)의 군오(軍伍)를 거느리고 관(館) 앞에 벌여 서게 하라."하였다. 승군들이 방진(方陣)·원진(圓陣)을 법식대로 벌여 이루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련(操鍊)하지 않은 군사가 오히려 절제(節制)를 아니, 가상하다."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승장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네가 능히 행진(行進)하는 법을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병법(兵法)의 서적들도 능히 통달하여 아는가?"하매, 승장이 아뢰기를, "병서(兵書)는 배운 것이 없으나, 방진·원진을 벌여 이루는 법은 승군의 고규(古規)가 있으므로 방법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군의 설치는 대개 인묘(仁廟)갑자년 성을 쌓을 때부터인데. 그때 이승(異僧) 각성(覺性)이라는 자를 얻어서 명하여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아 성역(城役)을 오로지 맡겼다가 이어서 승군을 불러 모아 단속하여 군오를 만들어 각 사찰에 나누어 살게 하였으나, 근년 이래로 이미 조련에 부지런하지 않거니와 또 노역(勞役)을 돌보지 않아서 점점 이산(離散)하는 자가 많다 하는데, 그러한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들은 달리 의지할 자재(資財)가 없는데 공사(公私)의 역(役)에만 응할 뿐이니, 이것을 괴롭게 여겨 점점 다 도산(逃散)하여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결(團結)하여 군사를 만드는 것이 급할 때의 도움이 될 뿐이 아니라 다 같은 내 백성이니, 이미 그 유리(流離)하여 보전하기 어려운 폐단을 알고도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경은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생각하라."하였다. 매화(埋火)를 설치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원숭환(袁崇煥)이 영원(寧遠)에서 시험한 홍이포(紅夷砲)의 유제(遺制)이다. 병자년에 이 방법을 배우지 않아서 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이 방법을 썼다면, 적병이 어찌 감히 성 아래에 접근할 수 있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산성의 별파진(別破陣)이 다 이 기법(技法)을 익혔는데 요즈음은 두 사람이 익숙할 뿐이라 하니, 이것도 권장하지 못한 탓이다."하였다.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9일 1779년 남한산성내 백성의 가장 큰 폐단인 보휼고의 빚을 탕척하다 --- 상략 --- 남성(南城)에 이르러 이현(梨峴)을 가리키며 하교하기를, "병자년에 김신국(金藎國)·정온(鄭蘊) 등 여러 사람이 4백 명의 군사로 먼저 이곳에 웅거하여 삼남(三南)의 성식(聲息)을 통하기를 청하였으나 체부(體府)에서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적에게 빼앗겨 안팎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현 왼쪽 조금 남쪽으로 산성 가까운 곳 위에 돈대(墩臺)가 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남격대(南格臺)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남격대인데, 이 대에 오르면 성안을 굽어볼 수 있고 동쪽으로 무갑산(武甲山)에 이르면 쌍령(雙嶺) 이내의 산골짜기가 멀리 돌아간 곳을 다 앉아서 볼 수 있다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기진(李箕鎭)이 남격대를 수축(修築)하고 이현에 나무를 길렀다 하는데, 그러한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 하략--- 5. 정두원(鄭斗源, 1581~?) 관련자료1 정두원(鄭斗源·158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정숙(丁叔). 호는 호정(壺亭)·풍악산인(楓嶽山人), 시호는 민충(敏忠). 1612년 생원이 되고 1616년 증과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23년 성천부사(成川府使)가 된 후 인조를 도와 반청숭명(反淸崇明) 정책을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1624년 관향사(館餉使)로 명나라 장군 모문룡(毛文龍)에게 군량을 조달하였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임진강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1630년 2월에 진위사(陳慰使)로 선발되었고, 공조참판(工曹參判)과 무과시관(武科試官) 등을 거쳐, 7월에 서장관(書狀官) 이지천(李志賤)과 함께 한양을 출발, 요동(遼東)을 점령하고 있는 후금(後金) 군대를 피하여 해로를 통해 10월 명의 등주(登州)에 도착하였다. 1631년(인조 9) 2월 북경(北京)으로 가서 사행의 임무를 수행한 후, 다시 등주에 들렸다가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J. Rodriguez, 陸若漢) 신부를 만나 다수의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와 진귀한 서양의 기물(器物)등을 가지고 7월에 귀국하였다. 이때 그가 가지고 온 것들은 《치력연기》(治曆緣起), 디아스(E. Diaz, 陽瑪諾) 신부의 《천문략》(天文略), 리치(M. Ricci, 利瑪竇) 신부의 <곤여만국전도>(坤與萬國全圖), 천문서(天文書) 및 원경서(遠鏡書), 천리경설(千里鏡說), 알레니(G. Aleni, 艾儒略) 신부의 《직방외기》(職方外紀), 《서양국 풍속기》(西洋國風俗記) 등의 서적과 서양 화포[紅夷砲], 《홍이포 제본》(紅夷砲題本), 화약[焰花], 자명종(自鳴鐘), 천리경(千里鏡), 자목화(紫木花) 등 여러 종류에 이르렀으므로, 17세기 조선 사회에 있어서 양적·질적으로 서양 문물의 본격적인 재래(齎來)로 평가된다. 특히 천리경은 은화(銀貨)로 300∼400냥에 이르는 것으로 100리 밖에 있는 적진(敵陣)의 미세한 부분까지 볼 수 있는 것이었으며, 홍이포는 화승(火繩)을 쓰지 않고 화석으로 불을 일으켜 구래(舊來)의 조총이 두 번 쏘는 사이에 4∼5발을 쏠 수 있다는 점에서, 1627년 정묘호란 이후 후금에 대항하기 위한 무력 증강에 부심하던 국왕 인조의 비상한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이에 인조는 “정두원이 가져온 화기(火器)는 그 제도가 정말하고 기묘하니 우리 나라 사람들이 배우면 반드시 그 위력에 힘입을 것이므로 그 수효의 다소를 논할 수 없으며, 또 바닷길에 고생이 심하였고 그만한 공적이 있으니 한번 위로하여 마땅하다”라고 하면서, “기이하기만 하고 실용성이 적다”는 주장을 내세운 승정원과 간관(諫官)들이 보름 이상에 걸친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두원에게 자급(資級)을 더하는 조치를 철회하지 않았다. 이후 정두원은 여러 차례 문무과의 시관을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 부호군(副護軍), 호군(護軍), 부사맹(副司猛),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천부사(利川府使), 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의 중책을 맡으면서 인조의 대청 복수 설치(對淸復讐雪恥) 의지를 충실히 구현하였다. 한편 정두원에게 다수의 서양 기물과 한역 서학서를 준 로드리게스 신부는 통역사 겸 역사학자로 잘 알려져 있는 포르투칼 출신의 예수회원이다. 1630년 말 명나라 황제를 도와 후금과의 싸움에 포르투칼 군인들을 동원하는 등의 행적으로 조선 왕실에서도 긍정적인 인물로 호평받았다. 그는 1577년부터 약 46년간 일본 나가사키(長崎) 등에서 대장군을 비롯한 지방의 대명(大名)들과 친분 관계를 유지하면서 선교 활동을 펼치다가, 일본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자 1623년 중국으로 건너와서 조선에 복음을 전파하려 하였다. 1631년 귀국하는 조선 사신 정두원 일행에게 다수의 서양 서적과 진귀한 기물들을 선물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마테오 리치식 왕실 전교(王室傳敎)의 일종으로 행해진 것이다. 1631년 정두원 일행이 로드리게스로부터 서양 천문학의 추산법(推算法)을 배우고 《천문략》이란 역법서를 들여와서, 1653년 마침내 조선 왕조가 시헌력(時憲曆)을 채용·설치하고 홍이포 등 화기를 개발하여 1650년대 두 차례의 나선 정벌(羅禪征伐 : 朝·淸 연합군의 흑룡강 러시아 선박 격퇴 사건)을 단행하기에 이르기까지, 세례지도, 역법, 병기 등 발달된 서양의 문물이 속속 조선 왕조에 도입되었다. 또한 인조, 효종 등 국왕들의 북벌 계획(北伐計劃)에 벨테브레(J.J. Weltevree, 朴淵, 朴燕), 하멜(H. Hamel) 등 서양인 기술자 집단의 활용이 적극 모색되는 등 서양 인식의 폭의 깊이를 확대, 심화하는 데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6. 정두원(鄭斗源, 1581~?) 관련자료2 정두원은 인조를 도와 친명배금(親明拜金)에 앞장섰던 인물로, 인조 2년(1624)에는 관향사(館餉使)로 조선 조정에 후금(後金)을 치도록 강요하던 명의 모문룡(毛文龍, 1576~1629)에게 군량을 조달하였다. 그리고 인조 5년(1627)에 발발한 정묘호란 때에는 임진강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이런 그가 인조 8년(1630) 진주사로 명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당시는 여진족의 후금이 요동 지방을 점령하고 있어서 육로로 갈 수 없었기에 서해를 건너 산동반도의 등주(登州)를 거쳐 북경으로 갔다. 이듬해 1631년 2월 귀국길에 오른 정두원은 등주에서 예수회 선교사 로드리게스 신부를 만나 그에게서 천리경(千里鏡), 서양 화포(西砲), 자명종(自鳴鐘), 염초화(焰焇花), 자목화(紫木花) 등과 많은 한역서학서를 받아 귀국하였다. 그 내용은 《국조보감》(國朝寶鑑)에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진주사 정두원이 명의 서울에서 돌아와 서양 화포, 염초화, 천리경, 자명종, 자목화 및 각종 도서 등을 올렸다. 임금은 그 뜻이 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라 하여 한 자급(資級)을 특별히 올려 주려다가 사간원의 계사(啓辭)로 취소하고 말았다. 정두원이 먼저 와 보고하기를, ‘서양이라는 나라는 중국과는 9만 리나 떨어진 거리에 있어 3년을 와야 명의 서울에 올 수 있습니다. 육약한(陸若漢)은 바로 이마두(利瑪竇)의 친구로서 자기 나라에 있으면서 화포를 만들어 말썽을 부리던 홍이(紅夷), 모이(毛夷)를 섬멸하였습니다. 게다가 천문과 역법에는 더욱 정통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광동(廣東)에 와서 화포로 오랑캐 무리를 토벌하자고 청하자 황제는 그를 가상히 여기고 그에게 교관(敎官)을 맡겨 등주(登州)의 군영으로 보냈으며, 빈사(賓師)의 예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리고 흠천감(欽天監)에서 역서를 만들면서도 전적으로 (육)약한의 말대로 한다는 것입니다. 하루는 약한이 신을 찾아왔는데 나이가 97세라는데도 정신이 깨끗하고 기상이 거침없어서 마치 신선 같았습니다. 신이 화포 1문을 얻어 우리나라에 가 바치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즉석에서 허락하고 아울러 그 밖의 다른 서적들과 기물들을 주기에 그것들을 뒤에다 적습니다. 치력연기(治曆緣起) 1책, 천문략(天文略) 1책, 이마두 천문서(利瑪竇天文書) 1책, 원경설(遠鏡說) 1책, 천리경설(千里鏡說) 1책, 직방외기(職方外記) 1책, 서양국풍속기(西洋國風俗記) 1책, 서양국에서 바친 신위대경소(神威大鏡疏) 1책, 그리고 천문도(天文圖) 남북극(南北極) 2폭, 천문(天文) 광수(廣數) 2폭, 만리전도(萬里全圖) 5폭, 홍이포(紅夷砲) 제본(題本) 하나였습니다. 천리경은 천체 관측뿐만 아니라 적군 진영 속의 미세한 물건을 100리 밖에서도 관측할 수 있는 물건으로 그 값이 은화 300~400냥이 가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구관(日晷觀) 1대는 시각을 맞추고 동서남북을 정하며 해와 달의 운행을 알아보는 데 쓰이며, 자명종은 12시간마다 저절로 소리가 나는 것입니다. 화포는 불심지를 쓰지 않고 화석(火石)으로 쳐서 불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인데, 우리나라 조총(鳥銃) 두 발을 쏠 시간에 4~5발을 쏠 수 있어 빠르고 잽싸기가 귀신과 같으며, 염초화는 바로 염초를 굽는 함토(醎土)이고, 자목화는 바로 목화로서 빛이 붉은 것입니다’ 하였다(《국조보감》 35, 인조 9년 7월). 정두원은 로드리게스 신부를 명의 황제가 인정할 정도로 천문, 역산(曆算)과 총포 제조에 뛰어난, 고결한 정신과 수려한 외모를 지닌 신선과 같은 인물로 인조에게 보고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후금과의 전쟁에 대비하여 전력 증강에 몹시 애쓰고 있던 인조는 천리경, 홍이포(紅夷砲), 염초화 등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정두원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지위를 한 자급 올려주고자 하였으나, 승정원과 사간원(司諫院)에서 “기이하기만 하고 실용성이 적다”라는 이유로 반대함으로써 수포로 돌아갔다. 인조의 각별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정두원이 가져온 물건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였고, 책들도 누가 읽었는지 또 어떻게 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다만 정두원을 따라 명에 갔던 39명 가운데 역관 이영후는 로드리게스로부터 받은 《천문략》과 《치력연기》 등과 같은 책들을 읽고 나서 그와 서신 교환을 하였다. 그는 유교사회의 전통적인 개천설이나 혼천설과 전혀 다른 우주관인 12중천설(十二重天說)을 비롯한 서양의 역법 등에 관한 의문점을 가르쳐 주기를 바라는 편지를 썼던 것이다. 그가 특히 충격을 받은 것은 《만국지도》의 오대주설(五大洲說)이었다. 그는 자신이 믿고 있던 화이적(華夷的) 세계관에 대한 충격을 솔직하게 고백하였다. 그러나 1632년 손원화(孫元化)의 부대에서 반란이 일어나면서 이들 사이의 교류는 단절되었다. 그런데 정두원이 로드리게스를 만나고 돌아온 지 22년 뒤에 조선은 서양의 역산법을 공식적으로 채택하였다. 김육이 예수회의 천체력과 이로부터 도출된 방식이 믿을 만하다고 주장하여 샬 폰 벨 신부가 제작한 시헌력(時憲曆)을 채택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김육은 인조 24년(1646)부터 몇 차례의 시도 끝에 마침내 효종 4년(1653) 천문학관(天文學官) 김상범(金尙范, ?~1655)을 북경에 파견하여 뇌물을 써가며 흠천감에서 시헌력을 배우게 하였으며, 그 결과 조선 정부는 그가 작성한 시헌력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처럼 논쟁 없이 서양의 역법을 받아들인 것은 서양의 문물이 당시 유교가 지배하는 조선 사회의 가치와 양립할 수 있는지에 대해 거의 염려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다시 말해서 17세기의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어느 누구도 서양인의 우수한 기술이 자신들의 가치관이나 왕조의 안정을 위협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흔히 조선이 중국보다 유교 이념에 더 집착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17세기의 조선에서 반서양(反西洋)을 외치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렇지만 조선 정부는 서양의 역산법에 대해서는 논의하면서도 서양의 종교나 우주론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18세기에 들어서서도 천문학을 신학이나 형이상학적 의미가 배제된 수학 공식의 문제로 계속 간주하였다. 서양 역법(時憲曆)을 채택한 지 반 세기가 지난 뒤에도 예수회 선교사들이 제시하는 그리스도교의 우주론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관향사 조선 후기에 지방의 군량(軍糧)을 관리하던 벼슬. 인조 1년(1623)에 설치하여 초기에는 전국적으로 파견하였으나, 이후 평안도 지역에 치중하여 파견하였고 평안 감사가 겸임하였다. 홍이포(紅夷砲) 상세 설명 https://kanghwalove.tistory.com/42 https://kanghwalove.tistory.com/41 7. 강화도와 홍이포(紅夷砲) / 江華史探 / 2014-08-27 강화도의 대표적인 국방유적지인 갑곶돈지(甲串墩址)와 초지돈(草芝墩), 광성돈(廣城墩) 그리고 남장포대(南障砲臺)에는 홍이포(紅夷砲)라는 대형화포가 전시되어 있는데 대부분 모조품, 복제품이다. 유일하게 초지돈에 전시되어 있는 1門이 진품이라고 하는데 그 출처와 제작년도가 확실하지 않다. 갑곶돈지(甲串墩址)에 전시되어 있는 홍이포 조선시대 돈대를 복원하면서 그 시대에 사용했던 무기를 같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히 볼거리 제공 차원을 넘어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는데 고증이 제대로 안됐거나 왜곡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에는 역사적 실체에 큰 손상을 주게 된다. 갑곶돈지에 전시된 홍이포의 설명판을 보면 도대체 이 홍이포는 언제 누가 만든 무기인지,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으며 왜 강화도 국방유적지에 전시해 놓았는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최근에는 명칭도 '홍이포(紅夷砲)'에서 '대포(大砲)'로 슬며시 바꿔놨다. 고유명사 '홍이포'를 일반명사 '대포'로 바꿨다는 것은 애매모호함으로 무엇인가를 가려보겠다는 의도가 아닐까.. 1977년 이후 40여 년 가까이 홍이포였는데 이제 와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음을 드러낸 것인데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알려고 하지도 않는?) 홍이포의 가려진 프로필을 하나 하나 살펴보고 의문의 역사현장을 바로 잡고자 한다. 7.1 홍이포(紅夷砲)는 어떤 무기인가 홍이포는 15~17세기 영국, 독일, 스페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유럽지역에서 사용하던 컬버린砲(Culverin포)가 그 원형이다. 나라마다 시기마다 규격과 디자인은 조금씩 달랐지만 긴 사거리와 강력한 파괴력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대형화포이다. 요즈음으로 치면 미사일 잡는 미사일 패트리어트(PAC-3)나 국산 탄도미사일 현무2-B 정도의 위상을 가진 강력한 전략 전술무기였던 것이다. 17세기가 되자 홍이포는 여러 경로를 통해 아시아에 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 당시 거의 모든 화포가 그랬듯이 홍이포도 포구장전식(砲口裝塡式)의 평사포로 최대사거리가 4Km정도 되지만 실제 전장에서는 700m 전후의 유효사거리에서 직경100mm 정도의 철환(鐵丸)을 직사(直射)하여 목표물에 강력한 물리적 타격을 가하는 무기였다. "폭발탄이 아니라서 위력은 약했다"고 자료들마다 한결같이 그렇게 써놨던데 현재의 기준으로 보니 그런 것이지 당시로서는 상당한 파괴력을 갖춘 중화기였다. 이것은 요즘 전차포의 철갑탄이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지를 알아보면 이해하기가 쉽다. 적 탱크의 두꺼운 철판 장갑을 강력한 운동에너지만으로 뚫어 버리는 날개안정분리철갑탄(APFSDS)처럼 홍이포에서 발사되는 100mm 직경의 둥근 쇳덩어리는 성벽이나 건물, 함선 등을 직접 부숴 버리거나 적의 밀집 보병들을 쓸어버리는데 상당히 위력적이었다. 포의 길이는 2m가 좀 넘고 포신의 무게만도 1.8톤에서 3톤까지 나가는 대형화포이다. 웹(Web)에서 검색되는 각종 백과사전이나 문헌자료들을 보면 『홍이포(紅夷砲)는 네덜란드에서 중국을 거쳐 유래된 대포이다. 그 당시 네덜란드를 홍이(紅夷)라고 불렀기 때문에 홍이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라고 획일적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홍이(紅夷)는 네덜란드라는 특정국가를 가리키기 보다 얼굴색이 붉거나 붉은 옷을 입은 유럽인들의 총칭으로 봐야하고 1600년대 초 明나라가 처음 홍이포를 도입할 때도 네덜란드에서가 아니라 마카오에 진출한 포루투갈 사람들을 통해서였다. 17세기 초, 중반 조선에는 두 무리의 외국인이 표류해 온다. 벨테브레이(박연)와 하멜 일행인데 이들이 바로 네덜란드 사람들이었다. 박연은 당시 첨단 서양무기인 홍이포의 존재와 화포에 대한 정보를 우리에게 알려줬고, 26년 뒤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자신들의 난파선에서 수거한 네덜란드제 실물 홍이포를 수리하여 일선에 배치하고 그 조작술을 전수하는 등 최신무기 홍이포가 조선에 유입되는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것들이 네덜란드를 부각시키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홍이포 또는 홍의포(紅衣砲)라고도 부르는 이 무기를 한 때 조선에서는 남만포(南蠻砲) 또는 남만대포(南蠻大砲)라고 불렀던 적이 있다. 네덜란드인에게서 얻은 포였고 네덜란드인을 남만인으로 칭했기 때문이다. 효종4년(1653) 8월6일자 실록에서 박연과 하멜 일행을 남만인으로 기록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제주 목사(濟州牧使) 이원진(李元鎭)이 치계(馳啓)하기를, “배 한 척이 고을 남쪽에서 깨져 해안에 닿았기에 대정 현감(大靜縣監) 권극중(權克中)과 판관(判官) 노정(盧錠)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보게 하였더니,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배가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혀 살아 남은 자는 38인이며 말이 통하지 않고 문자도 다릅니다. -중략- 이에 조정에서 서울로 올려 보내라고 명하였다. 전에 온 남만인(南蠻人)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보고 ‘과연 만인(蠻人)이다.’ 하였으므로 드디어 금려(禁旅)에 편입하였는데, 대개 그 사람들은 화포(火砲)를 잘 다루기 때문이었다. 7.2 홍이포의 사용例 ◆ 칼레 해전 작은 섬나라 영국과 대제국 스페인 사이에서 벌어진 1588년의 칼레해전에서 영국 해군은 사정거리가 긴 컬버린포 153문으로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너뜨렸다. 이로부터 약 250년 동안 대포로 무장한 군함이 해양을 지배하게 되고 영국은 태양이 지지 않는 강력한 국가로 부상한다.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의 태동이 컬버린포 즉, 홍이포에서부터 시작됐음을 알 수 있는 장면이다. 칼레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Armada)를 컬버린포로 공격하는 영국 해군 ◆ 네덜란드의 마카오 침공 1622년6월23일, 13척의 전함과 1300명의 병력을 실은 네덜란드 함대가 마카오를 공격했다. 당시 마카오는 150명 정도의 포르투갈 수비병이 배치되어 있었을 뿐 아직 제대로 수비 태세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사전 포격 후 상륙한 800명의 네덜란드 군대는 사실상 도시를 거의 장악한 듯 하였다. 마카오 몬테요새의 홍이포 이 때 마카오를 구한 것은 말 그대로 신의 가호였다. 아직 반밖에 완성되지 않은 몬테요새에 설치된 포르투갈군의 홍이포가 운 좋게 네덜란드 함대의 화약고를 명중시킨 것이다. 이에 네덜란드 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이 때를 놓치지 않은 마카오 수비대가 역습을 가하자 네덜란드 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 明과 後金의 영원성 전투 1619년 만주의 사르후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後金의 기세는 가히 노도와 같았다. 요동의 중심지인 요양이 무너졌고, 50여개의 요새와 70개의 성이 함락되었다. 요하 동쪽에서 明나라의 영역은 급속도로 줄어들고 있었으며, 막강한 만주 기마군단이 산해관을 통과하여 중원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다. 그러나 명나라에는 계요독사(?遼督師)라는 직책을 가진 유능한 지휘관, 원숭환(袁崇煥)이 있었다. 후금을 막기 위해 산해관으로 가는 길목 100km 전방에 영원성(寧遠城)을 새로 축조한 그가 가장 신경을 썼던 것은 화력을 증강시키는 일이었다. 당시 여러 전투에서 위력을 입증한 서양의 신무기 홍이포를 포르투갈 상인들의 근거지였던 마카오(澳門)에서 30문을 도입하여 북경의 도성과 산해관 등지에 배치했는데 원숭환은 산해관의 홍이포 11문을 영원성에 옮겨 재배치하고 후금의 공격에 대비했다. ★ 중국 요녕성 興城市에 있는 영원성 - 明代의 성으로 보존이 잘 되어있다. 재현해 놓은 홍이포는 砲架의 고증이 제대로 안된 듯 너무 부실하다. 1626년 1월 드디어 후금의 누르하치가 이끄는 13만 기병이 물밀듯이 쳐들어오자 이에 맞선 明軍은 2만명의 병력과 11문의 홍이포로 대항한다. 원숭환의 탁월한 전술과 강력한 홍이포의 활약으로 결국 누르하치가 이끄는 후금군은 대패하게 되고 누르하치도 이 때의 부상으로 8개월 후 세상을 떠난다. 뼈아픈 패배를 통해 홍이포의 위력을 절감한 후금軍도 이 신무기에 눈독을 들이게 되고 다방면으로 노력한 끝에 결국 홍이포를 다수 보유하게 된다. 7.3 조선에서의 홍이포 ◆홍이포에 대한 정보 입수 1627년(인조5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 벨테브레이(박연)가 표류해 왔는데 이 사람이 조선에 귀화하면서 홍이포 제작법을 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옛 문헌을 확대해석하여 생긴 오류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윤행임(尹行恁1762~1801)의 문집 "석재고(碩齋稿)"에 있는 그 부분을 살펴보자. 朴延者 阿蘭陀人也 崇禎元年 漂流至湖南 朝廷隷訓局 將降倭及漂漢人 延初名胡呑萬 工於兵書 能製火砲甚精巧 --중략-- 朴延爲國效其能 遂傳紅夷砲之制 奇哉 박연은 하란타(河蘭陀, 네덜란드)인이다. 숭정(崇禎) 원년에 호남(湖南)에 표류해 왔다. 조정에서는 훈국(訓局, 훈련도감)에 예속시켜 항왜(降倭)와 표류해 온 한인(漢人)을 거느리게 했다. 박연의 원래 이름은 호탄만(胡呑萬)이다. 병서에 재주가 있고, 화포를 매우 정교하게 만들 수 있었다.--중략-- 박연은 나라를 위해 그 재능을 살려 드디어 홍이포의 제(制)를 전하였다. 기이한 일이다. 끝 문장 "遂傳紅夷砲之制 奇哉 드디어 홍이포의 제(制)를 전하였다. 기이한 일이다."에서 "제(制)"는 제도(制度) 즉, 홍이포의 제원과 운용방법 정도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을 "홍이포 만드는 법을 전하였다."로 확대 해석해서 인용되고 있다. '奇哉'도 '기이한 일이다!' 보다는 '기특한 일이다!'가 더 맞을 듯... 하여간 이때는 조선에 아직 홍이포가 없었다. 카탈로그(Catalog) 상에만 존재하는 선망의 신무기였다. 국조보감 35권에 실린 정두원 관련 기사 1631년(인조 9년) 7월. 진주사(陳奏使) 정두원(鄭斗源)이 明나라 서울에서 돌아와 서양화포(西洋火砲)ㆍ염초화(焰硝花)ㆍ천리경(千里鏡)ㆍ자명종(自鳴鐘)ㆍ자목화(紫木花) 및 각종 도서(圖書) 등등을 올렸는데 이 각종 도서 중에 "홍이포의 제본(題本)"이 들어있어 이를 두고 조선이 명으로부터 홍이포 제작법을 도입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제본(題本)은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뜻하는 말이니 이 역시 홍이포에 관한 카탈로그를 입수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육군박물관의 홍이포 설명문에는 아예 정두원이 홍이포를 서양 선교사로부터 얻어왔다고 써놨다. 홍이포라는 것이 외교사절의 짐보따리에 넣어가지고 다닐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는 것은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사람이라면 다 알 수 있을 것이다. ★1640년대 무렵부터 1715년경까지 영국군이 사용한 수석식 조총 실제로 "서양 화포(西洋火砲)"라는 것을 하나 얻어가지고 오긴 했는데, 이것을 포(砲)라고 해놓으니 요즘 사람들이 홍이포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다. 서포(西砲)라고도 했던 이것은 기존의 화승식(火繩式) 조총보다 한 단계 더 발전한 수석식(燧石式), 그러니까 부싯돌 점화방식의 조총(Flintlock Musket)이었음이 "국조보감(國朝寶鑑) 제35권 인조條"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엔 총을 화포(火砲)라고 표현하기도 했고 조총수(鳥銃手)를 포수(砲手)로 칭했던 만큼 화약을 이용해 발사하는 무기는 통칭하여 포(砲) 또는 화포(火砲)라고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신무기 홍이포에 대한 정보가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조선 조정에도 입수되지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바로 제작하지는 못한다. 뒤에 따로 언급하겠지만 직접 홍이포를 만들기 까지는 100년의 시간이 더 걸린다. 하드웨어 자체의 설계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어 보이지만 당시의 제철, 주물 기술로는 높은 압력과 열에 견딜 수 있는 포신을 만들기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첨단 소재인 구리합금, 즉 청동을 써야하는데 구하기 힘든 수입품인데다 고가였다. 이런 고급소재가 포 1문 만드는데 1.8톤 이상이 소요되니 당시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다. 설령 만들었다 해도 군수지원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엄청나게 소요되는 화약과 100mm짜리 쇠포알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당시 군부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국산 대포인 구경 120mm 천자총통이나 105mm 지자총통도 화약을 허비한다는 비난을 받으며 군부로부터 그다지 환영받지 못했으며 천자총통의 경우는 임진왜란 이후 거의 도태 되다시피 한다. ★ 동거(童車)에 실린 천자총통, 지자총통, 현자총통이 각각 대장군전, 장군전, 차대전을 장전한 채 발사 대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 대포라고 부를 수 있는 화포는 이 세 개 정도이다. 선조33년 기록에 전투에서 가장 긴요하게 쓰이는 것이 현자총통이라고 했다. 한 발 쏘는데 들어가는 화약량을 보면 천자총통이 30냥(1.1Kg), 지자총통이 20냥이었으니 4냥만으로 한 발을 쏘는 75미리 구경의 현자총통(玄字銃筒)이 특히 해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었으며 조선후기에 지방 수영(水營)에 가장 많이 비축된 대포도 현자총통이었다. 7배나 더 많은 화약을 쓰는 천자총통이 그렇다고 위력도 7배가 되는 것은 아니었으니 현자총통은 그야말로 賢者들이 선택하는 총통인가 싶다. 이러한 화포사상을 갖고 있던 시대였기에 조선 군부의 홍이포에 대한 외면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선망의 대상이자 대형화포에 대한 신드롬까지 불렀던 홍이포였지만 우리에게는 못 만든 측면과 안 만든 측면을 같이 가지고 있던 혼돈의 아이템이었다. * 홍이포의 화약 소모량은, 1696년(숙종22년)에 이형상이 편찬한 강도지(江都志)에 거의 유일하게 언급되어 있는데 무려 5근14兩(3.5Kg)이나 된다. 군수 담당자가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드는 천자총통(30兩)의 세 배가 넘고 조총(3錢) 313발을 쏠 수 있는 어마 어마한 양이다. ◆ 홍이포의 보유와 강화도 배치 1653년(효종4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장 상선 스페르베르(Sperwer)號가 제주도 해안에서 난파되어 헨드릭 하멜을 비롯한 36명의 네델란드人이 표류해 온다. 이 난파선에는 30문의 홍이포가 탑재되어 있었는데 이 중 일부를 건져 올렸다고 하멜은 표류기에 써 놓았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기록이 있는데 조선왕조실록 현종 5년(1664년) 6월 22일 4번째 기사 '강도 어사 민유중이 강화도의 미곡과 군기의 숫자를 아뢰는' 장면이 그것이다. 월곶(月串), 제물(濟物), 용진(龍津), 초지(草芝), 광성(廣城), 사각(史閣), 승천(昇天), 인화(寅火) 등의 각 보에 나누어 둔 것은, 흑각궁(黑角弓) 1천 3백 50장, 교자궁(交子弓) 4백 50장, 목궁 1백 50장, 장전 2천 1백 부, 편전 9백 부, 대조총(大鳥銃) 5백 84자루, 소조총(小鳥銃) 2천 1백 50자루, 대포 1백 79좌, 진천뢰 63좌, 남만대포(南蠻大砲) 12좌, 불랑기(佛狼機)포 2백 44좌, 화약 1만 6천 2백 근, 군향미 11만 2천 3백 47석, 콩 2만 8천 2백 28석, 조(租) 5천 4백 56석이었다. 호조에서 이송한 은(銀) 1만 3천 냥, 면포 10만 8천 필이었다. 이 기사에, 일반 대포 1백79좌에 이어서 표기되어 있는 '남만대포 12좌'가 11년 전 난파된 스페르베르호에서 수거한 홍이포이다. 강도어사 민유중이 이를 보고할 무렵 하멜은 동료 11명과 함께 여수 좌수영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선원 중에서도 고위 사무직인 서기(書記)였지만 원래는 포수(砲手) 주특기였다. 일행 중에도 포수가 몇 명 있었으니 이들이 홍이포를 수리하고 포술도 가르치고 했을 것이다. 1696년 이형상(李衡祥)이 숙종에게 올리기 위해 편찬한 강도지(江都志)의 군기(軍器) 항목을 보면 각 진(鎭). 보(堡). 돈대(墩臺)에 배치된 각종 무기류의 숫자가 나오는데 여기에는 남만대포가 16좌로 나온다. 그러면서 "바다에 표류되었던 남만의 배에서 얻은 것"이라는 설명이 함께 있어 강화의 남만대포가 하멜의 홍이포라고 확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한다. 이로써 남만대포는 하멜 일행이 개량하여 만든 홍이포일 것이라는 추정이나, 이 홍이포를 바로 남한산성으로 보내졌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 이 홍이포는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Gorinchem)市가, 표착 당시 스페르베르호에 있던 포를 원형 그대로 복원하여 하멜기념관에 기증했다고 한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남만대포의 모습이며 당시 전형적인 함선용 포가에 장착되어있다. 하멜은 조선에 13년 체류 하는 동안 전남 강진에서 7년을 살았는데, 강진군은 이를 기념하여 2009년 하멜기념관을 개관하였다. 그러나 요해지(要害地)에 배치한 무기로서의 효용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 기사에서 보듯 주력화포 불랑기포를 비롯해 기존 화포의 수량이 월등이 많았으니 12~16門에 불과했던 남만대포는 그저 치장용이나 전시용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하여튼 조선이 최초로 보유했던 홍이포는 멀고 먼 바닷길을 건너 온 오리지널 네덜란드製였고 남만대포(南蠻大砲)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41년이 지난 숙종31년(1705년) 비변사등록 8월26일자 기사를 보면 얼떨결(?)에 보유했던 홍이포(남만대포)가 이 후 어떤 결말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 이달 24일 주강 입시 때에 지사 민진후(閔鎭厚)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을 살펴보았을 때에 제도가 다른 대포(大砲)를 보고 장교들에게 물으니 이는 대체로 이른바 남만포(南蠻砲)로서 지난날 표류된 사람이 두고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이어 산성에 보냈습니다. 고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수어사로 있을 때 그 하나에 화약을 넣고 시험 발사해 보니 모두 파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남은 쇠로 불랑기(佛狼機)포를 주조하였고 지금도 한 개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설령 이 포를 시험 발사할 수 있다하더라도 불랑기포나 현자포(玄字砲)처럼 긴요하지 못합니다. -이하 생략- 2년 뒤인 숙종 33년(1707년) 2월 21일 기사에서는 지경연사(知經筵事) 조태채(趙泰采)가 입시하여 南漢山城의 南蠻砲를 해체하여 玄字砲를 주조하는데 있어 3門 중 1門을 남기는 문제에 대해 품신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번 2월 20일 주강에 입시하였을 때에 지경연사 조태채(趙泰采)가 아뢰기를 "신이 남한산성을 시찰하러 나가기 때문에 아뢸 말씀이 있습니다. 산성에 있는 남만포(南蠻砲) 3문(門)을 해체하여 현자포(玄字砲)를 주조하기로 전 수어사가 품의 결정한 바 있었으나 지금 들으니 2문은 이미 해체 주조하였고 1문은 미처 일을 시작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바로 외국의 병기이고 보관해 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것을 파괴하여 다른 병기를 주조해보았자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고 차후에 혹 그 제도를 상고하여 원용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1문은 우선 그대로 두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50여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3문만이 남은 이 네덜란드 홍이포는 돌고 돌아 남한산성까지 오게 되는데 2문을 녹여서 현자포를 만들고 오직 1문만을 남겨뒀다. 이 때 이미 조선의 주력화포는 보유수량으로 보나 대신들의 언급으로 보나 불랑기포(佛狼機砲)임이 확실하고 홍이포의 파괴력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지자총통,현자총통같은 조선 고유의 重화포도 다수 보유하고 있었다. 훗날 혹시 참고할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남겨 뒀던 네덜란드製 홍이포 1문은 소재가 묘연한데 남한산성 내 어느 골짜기에 묻혀서 발굴될 날만 기다리고 있을지.. 아니면 장택상 별장의 현관 기둥으로 쓰이다가 지금은 초지돈內 보호각(保護閣)에 진품이라고 전시되어있는 그 砲일지 모를 일이다. ◆ 국산 홍이포 개발 1731년(영조7년) 9월21일 훈련도감에서 자체 개발에 성공한 홍이포에 대해 보고하는 장면이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훈련도감(訓鍊都監)에서 말하기를, "본국(本局)에서 새로 준비한 동포(銅砲)가 50이고 홍이포(紅夷砲)가 둘인데, 그것을 싣는 수레는 52폭(輻)입니다. 동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2천여 보(步)가 되고, 홍이포의 탄환 도달 거리는 10여 리(里)가 되니, 이는 실로 위급한 시기에 사용할 만한 것입니다. 홍이포는 바로 우리 나라에서 새로 제작한 것으로 예람(睿覽)하시도록 올렸으니, 청컨대 감동(監董)한 사람의 노고를 기록해 주소서.”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를 보면, 홍이포를 자체 기술로 개발하면서 굉장히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쓴 흔적이 보인다. 당시 시험사격장이 도성 바깥 왕십리(往十里)의 수레재(車峴) 근처에, 그러니까 살곶이 다리 가기 전 현재의 한양대학교와 덕수고등학교 일대로 추정되는 곳에 있었는데 홍이포 개발부서인 훈련도감의 장붕익(張鵬翼)大將이 여기까지 오가면서 직접 사격시험을 주관했다. 홍이포(紅夷砲) ◆ 시제품에서 멈춘 국산 홍이포 국산 홍이포의 시험발사가 성공해서 영조대왕에게 보고까지 하게 되는데 이는 1631년, 정두원이 明나라에서 홍이포 제본(題本)을 입수한 때로부터 정확히 100년만에 우리 손, 우리 기술로 만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후로 홍이포에 대한 더이상의 추가기록이 없다가 77년이나 지난 1808년, 순조의 명으로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홍이포가 다시 등장한다. 만기요람은 호조판서 서영보(徐榮輔)와 문장가 심상규(沈象奎)등이 나라의 군정(軍政)과 재정(財政)을 파악하도록 만든 정무 지침서로 왕을 위한 업무 매뉴얼이다. 여기 군정 2편에 5군영의 무기보유현황이 나오는데 훈련도감 군기(軍器)항목을 살펴보면 다른 무기들과 함께 홍이포 2坐가 재고로 잡혀있다. 【軍器】 鳥銃八千二百三十九柄。行用銃七千九百四十六柄。內。四千四百三十八柄。 軍兵分給。○別鳥銃一百五十四柄。長鳥銃五十柄。內。三層火門一柄。大鳥銃五十六柄。 銅絲大鳥銃三十二柄。黑骨鳥銃一柄。 千步銃四柄。馬上銃二百五柄。銅砲一百十九坐。 虎?砲十七坐。循環砲十坐。紅夷砲二坐。佛狼機六十五柄。四號十五柄。五號五十柄。 子砲三百三十五柄。銅小銃十一柄。三穴銃一百五十三柄。三當鞭一柄。四當鞭一柄。 砲棍二柄。鉛丸一百八十萬九千七百九十二箇。子砲大丸六百箇。中丸六百箇。 銅絲大鳥銃丸一萬四千五百三十六箇。大鉛丸三萬三千一百五箇。銅砲丸三千三百五十一箇。 四號丸一萬八千七百七十箇。五號丸二萬四千一百五十箇。 行用丸一百七十一萬四千六百八十箇。-이하 생략- 다름 아닌 1731년산 시제(試製) 2문이 이때까지 그대로 훈련도감 무기고에 남아있는 것인데 이는 77년 동안 홍이포의 추가제작이 전혀 없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2문의 시제품을 만들어 기술적인 부분, 운영상의 문제 등을 다양하게 테스트하면서 제식화를 위한 과정을 진행했으리라 보는데 이후 양산하여 실전배치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성능이 뛰어난 무기임에도 불구하고 홍이포는 당시 조선의 실정에 부합되지 않는, 다시 말해서 제작비나 운영 유지비 같은 것이 너무 많이 드는..그래서 장점보다 단점이 더 부각되는 무기였음을 알 수 있다. 만기요람이 편찬되고 5년 후인 1813년에는 융원필비(戎垣必備)라는 조선 후기의 무기백과사전이 발간된다. 훈련도감의 박종경 대장이 쓴 책으로 당시 모든 화포의 제원과 사용법을 정리한 책인데 여기에 홍이포는 없다. 이후 56년이 지나고 병인양요를 겪은지 3년 뒤인 1869년에 훈련대장 신헌(申櫶)이 융원필비를 바탕으로 쓴 군사장비서 훈국신조군기도설(訓局新造軍器圖設)에도 역시 홍이포는 없다. 여기까지 살펴본 바,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두가지로 요약된다. 하나 - 1653년 부터 약 50여 년간 네덜란드제 홍이포를 남만대포라는 이름으로 12문~16문 정도 보유했다. 강화도에 배치된 이후 거의 무용지물로 이리저리 돌다 손망실되고 일부는 불랑기나 현자포 주조에 재활용되기도 했다. 오직 한 문만 남겨뒀으나 현재 소재 불명. 둘 - 1731년 자체 기술로 국산 홍이포를 개발했으나 시제품 2문으로 끝. 이후 추가제작이나 실전사용 기록 전무. 7.4 통한(痛恨)의 홍이포 ◆ 조선에 역대급 굴욕을 안겨준 홍이포 영원성 전투 등에서 홍이포에 두들겨 맞아 본 후금은 1631년 무렵이 되자 직접 생산체제까지 갖추고 홍이포를 주력 화포로 삼는다. 국호를 청(淸)으로 바꾼 이들은 1637년 1월 5일(양력) 12만8천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쳐들어 온다. 이른바 병자호란이다.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청군에 속수무책인 조선 조정은 피난가기 바빴다. 1월 9일 세자빈 강씨(姜氏), 원손(元孫), 봉림대군(뒤의 효종), 인평대군 등은 강화도로 가고 인조는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가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앉았는데 청군은 이런 조선의 임금에게 사정거리가 길고 파괴력이 강한 홍이포로 위협을 가했다. 2월19일 …이에 이르러 적이 또 10여 대의 대포를 설치하고 남격대(南隔臺) 밖에 또 7, 8대를 설치하였는데, 대포의 이름을 호준(虎?)이라 하고 일명 홍이(紅夷)라고도 하였다. 탄환의 크기는 모과와 같고 능히 수십 리를 날 수 있었는데, 매양 행궁(行宮)을 향해 종일토록 끊임없이 쏘았다. 탄환의 위력은 사창(司倉)에 떨어져 기와집 세 채를 꿰뚫고 땅 속으로 한 자 가량이나 들어가 박힐 정도였다. (연려실기술) 대포 소리가 종일 그치지 않았는데, 성첩(城堞)이 탄환에 맞아 모두 허물어졌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실록) 1월 25일, 남한산성을 포위한 채 계속 압박을 가하던 청은 강화도 대안인 김포 통진에 청군 우익 병력을 포진시키고 강화도 공략을 준비한다. 20여 일 동안 상륙용 삼판선(三板船)을 만들고 홍이포까지 끌고 와 준비를 마친 청군은 2월 16일 드디어 강화해협을 건너 갑곶에 상륙을 감행하여 강화부성을 점령한다. 이때의 상황이 실록 인조15년(1637년) 2월 16일(음력 1월22일) 8번째 기사에 잘 나와 있다. 오랑캐가 군사를 나누어 강도(江都)를 범하겠다고 큰소리쳤다. 당시 얼음이 녹아 강이 차단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허세로 떠벌린다고 여겼으나 제로(諸路)의 주사(舟師)를 징발하여 유수(留守) 장신(張紳)에게 통솔하도록 명하였다. 충청수사(忠淸水使) 강진흔(姜晉昕)이 배를 거느리고 먼저 이르러 연미정(燕尾亭)을 지켰다.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에서 배를 정비하였는데, 장비(裝備)를 미처 모두 싣지 못했다. 오랑캐 장수 구왕(九王)이 제영(諸營)의 군사 3만을 뽑아 거느리고 삼판선(三板船) 수십 척에 실은 뒤 갑곶진(甲串津)에 진격하여 주둔하면서 잇따라 홍이포(紅夷砲)를 발사하니, 수군과 육군이 겁에 질려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적이 이 틈을 타 급히 강을 건넜는데, 장신· 강진흔· 김경징· 이민구(李敏求) 등이 모두 멀리서 바라보고 도망쳤다. ◆ 강화도 갑곶에 전시되어 있는 홍이포는 제2의 삼전도비 천험(天險)의 요새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강화도가 홍이포 공격으로 속절없이 무너졌다. 700여 미터 폭의 강화해협 갑곶수로가 대형 해자(垓子)처럼 가로막고 있어서 웬만한 공격력 가지고는 물을 건너 상륙하기 어려운 곳인데 처음 접해보는 강력한 홍이포 공격에 갑곶을 수비하던 장졸(將卒)들이 다 도망 가버리니 적들이 쉽게 상륙할 수 있었다. 청나라가 준비한 회심의 일격이 바로 홍이포였던 것이다. 강화가 함락되니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며 성문을 굳게 닫고 있던 남한산성의 인조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졌다. 성문을 열고 삼전도로 나온 인조는 굴욕적인 삼궤구고두(三?九叩頭)로 청에 항복하게 된다. 칼레해전에서 스페인 무적함대의 명성이 영국해군의 홍이포 153문에 의해 날아갔듯이 조선의 보장지(保障地) 강화도는 만주 여진족의 홍이포 몇 방에 처참하게 무너지면서 치욕의 역사 한 페이지를 만들고 말았다. 이런 수모를 당하고 20년이 흐른 뒤에야 갑곶지역에 수비부대 제물진(濟物鎭)이 이전 배치되고 또 23년 후에는 해안 경계초소인 갑곶돈(甲串墩)이 주변의 여러 돈대와 함께 보강되었다. 강화도 전체는 다시 왕조의 보장지(保障地)로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면서 방어를 위한 전술기지인 진보(鎭堡)와 해안 경계초소인 돈대를 섬 전체에 구축하고 동쪽 해안에는 방벽 즉 외성까지 쌓아 방어력을 더욱 높혔다. 이 중 갑곶돈, 광성보, 초지진 그리고 외성 일부가 1977년에 전사유적지(戰史遺跡地)로 복원, 보수, 정화된다. 위 사진은 1977년 10월 28일 강화전적지복원보수정화사업 준공식에서 역사학자 이병도가 갑곶에 포각(砲閣)까지 세우고 그 안에 복제 전시한 홍이포에 대해 박정희 대통령에게 무언가 설명을 하고있는 장면이다. 도대체 무슨 내용일까 궁금하다. 이 홍이포 때문에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얘기는 분위기상 절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저 자리에 홍이포가 전시되지 못했을 텐데.. 그럼 하멜의 스페르베르호에 있던 남만대포 열댓문이 이 지역에 잠시 배치됐었다는 얘기는 했을까? 이병도는1930년대에 하멜표류기를 번역 출간한 적이 있으니 이 사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가 무슨 하멜기념관도 아니고 그 정도 史實이 갑곶돈 홍이포 전시의 의미가 될 수는 없다. 1978년 이선근 등이 집필하고 문화재청 문화재관리국에서 발간한 <강화전사유적보수정화지(江華戰史遺跡補修淨化誌)>에 "갑곶돈은 우리 민족이 외적의 침략에 줄기차게 싸우던 전적(戰跡)으로서 조국 수호의 정신적 교육의 터전이 되는 곳이다." 라는 언급이 있다. 그럴듯한 표현 같지만 사실 이 속에는 부끄러운 역사의 진실이 숨어있다. 고려시대 몽고가 침입했을 때 버틴 것 말고는 위에 언급했듯이 병자호란 때 그리고 프랑스가 쳐들어왔던 1866년 병인양요 때 강화의 관문 갑곶은 저항 한 번 제대로 못하고 적에게 점령 당했던 곳이다. 특히 병자호란 때의 패배는 인적 피해와 함께 정신적, 물질적 피해가 막심했기에 그때의 홍이포가 더욱 통한(痛恨)으로 다가온다. 갑곶돈지에 전시된 홍이포는 그래서 제2의 삼전도비(三田渡碑)라 할 만한 치욕의 대상물이다. 현재 잠실 석촌호숫가에 서있는 삼전도비, 다시 말해서 삼전도청태종공덕비(三田渡淸太宗功德碑)는 당대에 청의 강요에 의해 세워졌지만 제2의 삼전도비라고 할 수 있는 강화 갑곶돈지의 홍이포는 1970년대의 후대들이 스스로 세웠다는 데에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7.5 맺는 말 우리에게 홍이포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지 확실하게 되짚어 보고 싶었고 갑곶돈지에 전시해 놓은 홍이포는 제2의 삼전도비라고 해도 될만큼 치욕스러운.. 그래서 거기 놓여 있어서는 안되는 역사물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다 보니 글이 꽤 길어졌다. 공격만 당했지 남에게 쏴 본 적은 커녕 제대로 보유 해보지도 못했던 홍이포를 우리는 막연히 선조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사용했던 성능 좋은 대형화포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 아무런 연고도 없는 갑곶돈지, 광성돈, 초지돈, 남장포대는 물론 수원 화성(華城)과 19세기 말에 구축된 인천의 화도진(花島鎭)에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전시해놓고 있는 것이다. 수원화성 적대(敵臺)에 설치해 놓은 홍이포와 인천 화도진에 전시해 놓은 중국 스타일의 홍이포도 한마디로 넌센스라고 밖에 할 수 없다. 1879년에 신설한 화도진에는 흥선대원군의 특명으로 만든(1874년) 운현궁 대포, 중포, 소포만 전시하는 것이 맞다. 수원화성의 경우는 적대가 좀 썰렁하고 심심해 보이니 느닷없이 홍이포를 하나 올려 놓은 것 같은데 영조 때 만든 홍이포 시제품 2문이 화성으로 갔다는 역사적 근거가 없다. 그리고 홍이포는 화성(華城)의 북서적대나 북동적대같은 성첩(城堞)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무기라는 것을 요즘 사람들이 쉽게 간과하는 것 같다. 보면 알겠지만 화성의 적대는 홍이포 사격을 위한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 성첩 자체가 홍이포 발사시의 반동이나 충격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파워가 몇 단계 아래인 천자총통, 지자총통조차도 성(城) 위에서는 사용불가이다. 그래서 이런 대형 화포들은 거의 함선용(艦船用)이나 공성용(攻城用)이다. 성이나 돈대는 주로 현자총통이나 불랑기포로 지켰고 19세기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울 때에도 광성보, 손돌목돈, 초지돈에서 실제 사용한 화포는 불랑기포(佛狼機砲)였다. 이제 제2의 삼전도비 "갑곶 홍이포"를 어찌 해야할 지 생각해봐야 한다. 요즘 세간에는 중국의 부상과 맞물려 병자호란 다시보기 열풍이 일고 관련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상황에서 갑곶돈지 홍이포가 간판을 대포로 바꿔 단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모두가 잘 몰랐을 때는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역사정보가 일반화, 보편화 되다보니 이제서야 "이건 아니네?~"하면서 감을 잡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문제는 간판을 바꿔 다는 정도로 어물쩍 넘어가서는 절대 안될 일이다. ★ 조선군의 제식 화포, 4호 불랑기포(佛狼機砲)의 모포(母砲)와 자포(子砲) 갑곶돈은 복원의 첫단추부터 잘못 꿴 곳이라 근본적으로 손을 다시 대야 할 곳이지만 우선은 홍이포부터 철거해야 한다. 그리고 그 포각(砲閣)에다 우리 선조들이 갑곶돈을 비롯한 모든 돈대에서 실제로 배치했던 불랑기포를 1호부터 5호까지 규격대로 쭉 전시해 놓아야 한다. 여기에 완성도 높은 스토리텔링을 곁들이고 불랑기포 발사시연까지 프로그램화하여 내방객들에게 보여 준다면 강화도의 관문인 갑구지(甲串)는 한층 의미있는 역사유적으로 거듭 날 것이다. 호국의 제일선에서 적과 맞서 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선조들이 어렵게 쌓아 온 역사를 왜곡이나 훼손으로부터 지켜내고 후손에게 제대로 알리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