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州府地圖 『지승地乘』 조선 19세기 전반 채색본 27.0*19.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18세기 廣州 지방의 지리환경18세기 廣州 지방의 지리환경
2011. 3. 25.
김종혁(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차 례
1. 광주의 지리적 위치
2. 광주의 영역
3. 광주의 지세
4. 광주의 교통망
1. 광주의 지리적 위치
한반도의 중앙에는 경기도가, 또 그 안의 중앙에는 서울이 자리하고,
광주는 그 동남쪽에 위치한다. 조선시대에 한강을 경계로 수도 한성과 접경하던 광주는
북쪽의 일부 지역이 서울시 강남구ㆍ강동구ㆍ송파구로 편입되고
성남과 하남이 광주에서 분리, 독립하면서 서울과 떨어지게 되었다.
한강을 끼고 자리를 잡았던 광주는 고대에는 마한의 중심 세력이이었던 伯濟國의 터전이었고,
백제시대에는 수도를 품은 일국의 중심지였다. 고려시대에도 광주는 양주와 더불어 양광도의
두 중심도회의 一邑으로서 조선시대 이전부터 오랜 기간 동안 큰 고을을 이루고 있었다.
도성으로부터 100리 이내의 지역을 일컫는 郊는 경제ㆍ문화적으로 도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라 하여 國中이라 불렀고 그 안에 있는 읍을 京邑이라 하였다.
조선의 우주관에서는 동교에 속하는 광주ㆍ양근ㆍ지평 등은 태양이 솟아오르는 방향이고
남교에 속하는 용인ㆍ이천ㆍ수원 등은 태양이 남중하는 방향이므로 陽의 방향에 속한다.
이에 도성에서 낙향하는 사대부들은 문화적으로 도성의 영향권에 속하고
중앙과의 인연을 유지하기 위해 남교나 동교에 정착하는 예가 많았다. 특히 서울과 접경하고
한강 수로과 봉화로로 통하는 동교의 대읍 광주는 사대부들이 선호하는 세거지로 인식되었다.
조선 개국 당시 경기도에서 읍격이 가장 높은 읍은 전조의 수도였던 개성부였고,
그 다음으로는 파주, 양주, 광주, 여주 등 4개의 목이었다. 이 가운데 파주는
중국을 연결하는 義州路의 경유지였고, 양주는 함경도를 잇는 慶興路와 三防路가 지났으며,
광주는 여주-충주를 지나 태백산 史庫까지 이어지는 奉化路가 관통하였다. 더욱이 광주는
한강과 접하고 있기 때문에 육상교통뿐 아니라 수로교통의 잇점도 보유하고 있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옮겨와 광주는 임시수도가 되었고,
이와 같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1795년(정조 19)에는 개성, 강화, 수원에 이어
네 번째로 留守府가 되었다. 유수부는 수도 방위 강화를 목적으로 한성을 둘러싼
4방에 하나씩 설치되었는데, 이곳에 파견되는 유수는 종2품관으로
외관직이 아닌 경관직이었으며 비변사 구성원에 들었다.
광주 치소에서 서해안 각지로 통하는 해상로의 출구인 梨浦와 鳩浦까지 서쪽으로 90리,
한강 수운의 요지였던 송파진과 광진까지 북으로 20리,
충청좌도와 영남 지방으로 통하는 동래로 상의 낙생역까지 남으로 30리,
강원도로 통하는 평해로 상의 봉안역까지 동으로 30리 거리로서,
광주는 대부분 1일 행정 안에 교통 요지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18세기에 광주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교통ㆍ상업의
측면에서도 東郊 지역뿐 아니라 경기도의 명실상부한 경기도의 으뜸 읍이 되었다.
2. 광주의 영역
지금은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남한산성은 1626년(인조 4)부터 1906년까지 280년 동안
광주의 읍치로 기능한 곳이다. 大東地志(1864) 程里考에 따르면
읍치는 한성에서 남동방향으로 45리 떨어져 있으며,
서쪽으로 과천까지 45리, 서남쪽으로 수원까지 50리 거리에 위치한다.
한편 산수조에 梨浦는 ‘서쪽 90리 지점, 성곶면 바닷가로 어염이 모이는 곳’이다.
광주의 영역이 황해안까지 미친다. 「대동여지도」에서 보이듯,
코끼리 코처럼 바다까지 길게 뻗어 있는 광주의 관할구역 모습은 기형적이다.
의곡면에서 성곶면에 이르기까지 犬牙相入地의 형상을 띠고는 있으나 越境地는 없다. 다만
海東地圖에 지금의 여의도로 추정되는 汝火島가 광주부 영역 밖에 표시되어 월경지처럼
보인다. 그 바로 아래에 ‘땅은 광주에 속하나 民은 한성부에 속한다’고 주기되어 있다.
대동지지 단계에 광주부는 城內에 2개 洞과 慶安, 五浦, 細村, 樂生, 突馬, 東部, 西部,
退村, 草阜, 都尺, 實村, 草月, 中垈, 彦州, 龜川, 六旺, 義谷, 旺倫, 北方, 月谷, 聲串 등
모두 21개의 면을 관할하였다. 이 가운데 城內二洞은 성내면이 되고,
1895년에 한강 이북의 초부면은 양주군으로,
북방ㆍ월곡ㆍ성곶 세 면은 1895년에 안산군으로 넘어가 18면으로 줄어든다.
이로써 광주의 영역은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고 바다와도 단절된다.
9년 후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이 수행됐던
1914년에는 성내면과 세촌면이 합쳐져서 중부면이 되고,
의곡과 왕륜면은 수원군으로 넘어가 의왕면이 된다.
반면 양평군으로부터는 남종면을 받아들여 모두 16개 면을 관할하게 된다.
모든 면이 경계를 맞대고 있으므로 월경지[비지]는 없다.
한편 일찍이 양주로 넘어간 초부면은 1914년에 본래 양주군 와공면과 합쳐져 와부면이 되고,
안산군으로 넘어간 북방ㆍ월곡ㆍ성곶면은 재차 수원군으로 옮겨가 반월면이 된다.
결국 일제시기 지형도에 양주군 초부면 일부와 수원군 반월면은 조선시대에 광주 땅이었고,
광주군 남종면은 본래 양근 땅이었다.
표 1. 광주의 면별 행정구역 변동(1864~1914)
자료 : 1864:대동지지, 1895:한국 지명총람(한글학회, 경기도),
1909:「민적통계표」(이헌창, 1997, 민적통계표의 해설과 이용방법,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14: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1917)
같은 방식으로 이속 관계 고찰의 단위를 리로 낮추면 면 경계가 복원된다.
우선 1914년 이후에도 계속 광주군 소속이었던 면 가운데에
군내면과 세촌면이 중부면으로 통합되었고,
원래 초월면 소속이었던 무수리와 원당리가 퇴촌면으로,
원래 용인군 수진면 소속이었던 구미리가 낙생면으로,
원래 동부면 소속이었던 상사창리와 하사창리가 서부면으로 편입되었으므로
이들을 역순으로 분해하여 원 소속으로 환치시키면 구 면 경계가 복원된다.
이외 수원군으로 편입된 의왕면과 반월면에서
의곡ㆍ왕륜면과 월곡ㆍ북방ㆍ성곶면의 경계를 찾을 수 있고,
원래 초부면 소속이었던 능내리ㆍ조안리ㆍ진중리ㆍ송촌리ㆍ삼봉리와
동부면 소속이었던 팔당리를 양주군 와부면에서 떼어내어
각 리의 소속면을 추적하면 원래의 면 경계가 드러난다.
마지막으로 남종면 5개리 전체를 양평군으로 환원시키면
조선후기 광주 전체의 영역이 면경계까지 복원된다.
표 2. 광주의 면 변동과 면 경계 복원
자료 : 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행정구역의 변동과 관련하여 성호 이익(1681∼1763)의 생거지 문제가 대둔된 적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성호 집안의 세거지와 선영, 그리고 성호의 생거지와 묘지가
안산과 광주 두 지역의 접경지에 모두 걸쳐 있다는 데에 있다.
안산을 주장하는 측에서는 驪州李氏族譜에 선영의 위치가
‘안산 첨성리’로 기록된 점에서 안산을 성호의 생거지로 주장한다. 첨성리 선산에는
6대조 이공려, 5대조 이사필, 고조 이우인 등과 종증조 이상홍ㆍ이상진 등이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선영의 위치가 생거지와 반드시 일치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광주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채제공이 성호의 묘갈명에 쓴 ‘隱居修道於廣州之瞻星里’라는
문구에서 근거를 찾는다. 그러나 더 확실한 근거 중의 하나는 이씨의 호구 문서이다.
아버지 李夏鎭의 1666년(현종 7) 호적단자와 1675년(현종 원) 및 1678년(현종 4) 준호구에
따르면, 그는 평안북도 운산으로 유배가기 전까지 한성부 서부 황화방 소정릉동계에 살았다.
성호는 1681년 유배지에서 태어났다가 이듬해 아버지가 작고하자
어머지 권부인에 의해 선산이 있는 첨성리로 이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하진의 장손이자 성호의 열 두 살 어린 조카 廣休(1693∼未詳)의 준호구를 살펴보면,
28세였던 1720년(숙종 46) 조부와 같은 소정릉동계에 살다가
1723년과 1729년에 서부 반석방 삼리 車子里契로 이주하였고,
1732년과 1741년(49세)에는 다시 소정릉동계에 거주했다. 결국 그의 후손 중 일부는
최소한 하진이 죽은 이후 다시 서울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때 성호도 서울에서 성장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성호에 대해서는 두 건의 준호구가 있다.
성호가 언제부터 광주부에 살기 시작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1744년(영조 20, 64세)과 1753년(73세) 준호구에
성호는 성곶면 일동리 15통 4호 및 15통 3호에 거주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광주부 성곶면 일동리와 안산군 군내면 첨성리 사이의 거리는 약 5리 쯤으로
걸어서 30분 가량 소요된다.
표 3. 광주군의 성곶면과 안산군 군내면의 소속리
자료 : 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점성리와 일동리에 대한 위치는 지리지 및 지명자료와 지도를 통해 고증할 수 있다.
말단 행정단위인 리에 대한 상황이 전국적으로 파악되는 최초의 자료는
輿地圖書(1757∼1765)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아쉽게도 안산군은 면만 기재되었을 뿐
리의 이름이 없다. 그 다음 자료는 戶口總數(1789)로서,
여기에는 첨성리 대신 占星里라는 이름이 안산군 군내면에 소속되어 있다.
점성리는 첨성리에서 변화한 이름으로 추정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별 이견이 없는 듯하다. 이후 점성리라는 이름은
광주군지(1872)나 星湖全書一文集 등의 책에서 안산 땅으로 기록되어 있다.
점성리가 표기된 최초의 지도는 1914년에 측도된 일제시기 1:50,000 지형도 남양 도엽이다.
1914년에 안산군 군내면은 인화면 및 초산면과 더불어 시흥군 수암면이 되고,
점성리는 성포리에 병합되어 행정리로서의 수명을 다하였다. 위 지형도에 성포리는
광주군 성곶면과 북방면 경계선 바로 위에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아래 점성리가
괄호 속에 묶여 기재되었다. 이는 성포리가 기입된 위치가 원래 점성리임을 의미한다.
작은 골짜기 안의 표시된 취락이 점성마을이다.
지금은 마을 앞으로 일명 수인산업도로인 42번국도가 지나가고 주변은 택지로 조성되었다.
성곶면 일리는 현재 구룡공원과 상록수역 사이 일대에 해당한다.
첨성리가 점성리와 같고, 성호가 첨성리에서 생거했다면 성호의 생거지와 묘지는
안산 땅을 벗어나 광주 땅에 편입된 적이 없다.
그러나 호구 자료에 성호는 광주 땅에 살고 있었다. 현재 성호의 묘역과 사당인
瞻星祠가(경기도 문화재 제40호) 소재한 안산시 일동은
1895년까지 광주군 성곶면 일리를 기반으로 확장된 동이다.
군내면 점성리는 분명 안산 땅이고, 성곶면 일리 또한 의심할 바 없이 광주 땅에 속한다.
전술했듯이 광주가 월경지[비지, 비래지]를 보유했던 흔적이나 근거는 없다. 최소한 점성리가
광주 소속이었던 때가 있는가라든가 광주의 월경지였는가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의
여지가 없다. 결국 이 문제는 성호가 생활의 터전을 어디에 두었는가로 귀착된다.
성호의 선영들은 점성리에 있고, 그렇다면 그의 친족들이 점성리를 중심으로 세거했을 것이다.
여주 이씨의 점성리 입향 시기가 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가세가 상당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시간이 지나면서 후손들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어 갔고, 그중 성호는 군 경계를 넘어 광주 땅에 집터를 잡았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생존 당시의 공식 문서였던 성호의 준호구와 필자의 행정구역 복원에 입각하여 판단하면,
성호는 최소한 말년에는 광주 땅에서 살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면
안산 점성리를 성호의 전통적인 세거지로 인정하지 않기가 쉽지 않다. 결국 성호가
광주 사람인지 안산 사람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가 문제로 남는다.
廣州府地圖 『여지도輿地圖』 18세기 중반 종이에 채색 26.9*19.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3. 광주의 지세
지세를 주도하는 지형은 산지와 하천으로, 양자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광주는 북쪽 경계에 한강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광주를 흐르는 한강의 지류들은 기본적으로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가장 규모가 큰 경안천은 광주의 남쪽에 양지에서 발원하여
광주의 동부를 관통하여 석수동 합수점까지 약 50km를 흐르고,
두 번째로 큰 탄천 역시 용인에서 발원하여 광주의 중앙부를 북류하여 약 32km를 흐른다.
이들의 발원지는 한남정맥의 북사면이 된다. 두 하천 사이에는 신곡천ㆍ덕풍천ㆍ고덕천ㆍ
성내천 등의 소지류가 역시 북류하고, 국주봉 서쪽의 의곡ㆍ왕륜면은 안양천 유역에 속한다.
그 서쪽의 월곡면을 남류하면서 관통하는 하천은 황구지천의 상류이며,
나머지 북방면과 성곶면 일대는 황해안으로 직접 유입하는 반월천 유역에 속한다.
경안천 유역과 탄천 유역이 광주 전체 면적의 약 3/4를 차지하므로 두 하천은
광주의 양대 하천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두 하천의 분수계가 광주의 산세를 주도한다.
이른바 광주산맥으로도 일컬어지는 이 산줄기는 초부면의 운길산(610m)에서 시작하여
팔당리에서 한강을 건너 동부면의 검단산(685m)으로 이어진 다음 차츰 고도가 낮아지면서
군내면의 남한산(청량산, 480m)과 검단산(535m), 경안면의 영장산(414m),
오포면의 불곡산(335m)으로 이어진다. 남한산성 내의 취락은 남한산 정상부 아래
높이 약 400m 고도 주변의 평탄면에 입지한 읍치로서,
서북쪽은 그중 가장 높은 산봉들이 솟아있고 남동방향인 경안천 쪽으로는
살짝 트여 있어 일찍부터 천혜의 요지로 주목받은 곳이다.
서쪽을 통해 산 정상에 이르는 길은 경사가 급하고 험하지만 내부의 평지를 지나
남동쪽으로 내려가는 길은 대체로 완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서쪽에서 정상으로 접근하는 도로가 산 능선을 따라 발달해 있고 동쪽이나 남동쪽으로
연결되는 도로가 계곡을 연해 달리는 것도 이와 같은 지세와 무관하지 않다.
산성 내의 계류가 동문으로 빠져 경안천으로 유입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경안천의 유역면적은 598㎢로, 이 안에서는 곤지암천을 비롯하여
우산천ㆍ무갑천ㆍ오곡천ㆍ직리천ㆍ목현천 등의 지류가 주로 동서방향으로 흐른다.
고도 200m 이상의 산지 사이를 흐르는 경안천 연안에는 충적지가 좁고 길게 형성되었고,
각 지류의 합수점 부근에서는 주변보다 넓게 충적지가 발달하였다.
경안천의 합류점부터 퇴촌과 초월면의 경계인 서하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경안면 경안리부터 역리를 지나 오포면 매산리에 이르는 구간이
경안천 유역에서 가장 넓은 들을 형성한다. 경안리 주변의 넓은 평지는
치소를 산성리에서 경안리로 옮겼을 때 신 시가지 건설에 도움을 주었다.
경안천 본류와 그 지류가 곡류하면서 깎아낸 다수의 골짜기들은 얼핏 무질서해 보이지만
침수의 피해가 없고 得水와 땔감의 구득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취락 입지로 선호되었다. 취락이 들어서면 이후에는 자연스럽게 도로망이 발달한다.
즉 경안천 유로방향과 산줄기의 흐름이 남북방향으로 거의 같은 경향을 보이는 가운데
취락 입지패턴이나 교통로의 분포패턴도 일차적으로는 이러한 경향을 벗어나지 않는다.
경안천 유역과 탄천 유역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 곳곳에는 두 지역을 이어주는 고개가 위치한다.
세촌면 상대원리와 경안면 목감리 사이의 이배재(利背峴=利保峴, 280m),
돌마면 갈현리와 경안면 가지리 사이의 渴馬峙,
돌마면 서현리 및 야탑리와 경안면 직리를 잇는 長峴 및 탑골고개,
돌마면 분당리와 오포면 신현리 사이의 설고개(漢城峴)과 태재(白峙) 등의 고개들은
읍치를 중심으로 배치된 동부지역과 서부지역 간 소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통로는 탄천을 거슬러 올라와 남한산성을 관통하여
경안리로 내려오는 봉화로였다. 지금은 갈마치에 터널을 뚫어 3번국도가 지나고,
남한산성 길은 308지방도로로, 그리고 태재길은 57번지방도로로 정비되었다.
북부 지역에서 한강으로 직접 유입하는 소하천 유역과 경안천 유역을 나누는 산줄기는
[분수계, 검단산∼남한산] 고도가 높고 연속성도 강하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탄천과 소하천 유역 사이의 분수계는 별로 뚜렷하지 않다.
이에 전자의 분수령은 거의 면 경계로 이용되었고, 두 유역을 잇는 고개도 奄峴이 유일하다.
지금은 43번국도가 이 고개를 넘는다. 한편 후자의 경우는 산세가 워낙 미미하고,
더구나 송파진에서 풍납동ㆍ추탄ㆍ당정동 등의 마을까지 한강 수로로 쉽게 연결되기 때문에
두 유역간 육로망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유역 면적 241㎢의 탄천은 동막천, 운중천, 대원천, 단대천, 금토천 등의 지류를 갖는다.
전술한 검단산에서 불곡산에 이르는 산줄기는 경안천보다 탄천 쪽의 서사면이 경사가 더 급하다.
그럼에도 탄천은 연안에 경안천보다 더 넓은 충적지를 보유하였다. 합류점에서 남쪽으로
龍仁界에 이르기까지 그 길이과 폭은 각각 약 18km 및 2km 내외에 달한다.
잠실도의 신천리에서 중대면의 송파리, 대왕면의 수서리-무정리-장지리-세천리-둔전리에
이르기까지 넓게 형성된 충적지는 광주의 곡창지대가 된다.
그러나 가장 넓은 평야는 동부면과 구천면의 한강 본류 연안에 형성된 충적지이다.
서울에서 송파진을 건넌 이후 탄천의 동안을 따라서 봉화로가 뻗어있고,
언주면과 과천현의 경계선 상의 저지대와 谷部를 따라서는 동래로가 놓여 있다.
동래로는 양재천 유역에서 月川峴을 지나 탄천 유역으로 들어온 다음
판교에서부터는 남쪽으로 탄천과 나란히 달린다.
판교 이남의 동래로는 현재 경부고속도로 및 23번지방도로로 계승되었다.
과천과 광주의 경계가 되는 탄천 유역권의 서쪽 산줄기는 광교산(582m)에서 시작되어
북쪽으로 백운산(562m)-바라산(428m)-국은봉(542m)-청계산(615m)까지 이어진다.
청계산을 지나면 곧 양재천 연안의 저지대가 나타나지만 경안천-탄천 분수계보다 고도가 높고
경사도 급하다. 과천은 양재천 유역에 속하기 때문에 하천 연안의 저지대가 주요 교통로로
이용되었다. 결국 산세도 험한데다가 양재천 연안의 쉽고 편한 길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산줄기에는 앞의 경우가 달리 고개가 발달하지 않았다.
斗入地 형태가 시작되는 의곡면과 낙생면 사이의 鶴峴(180m)은
지금도 의왕시와 성남시를 잇는 유일한 통로로서 매우 긴요한 고갯길로 이용되고 있다.
고개 남쪽으로 새로 길을 내면서 원래 고갯길은 왕복 2차선 도로를 유지한 채
구길로 남아 있고, 그 위로는 청계터널을 통해 서울외곽고속도로가 건설되었다.
지금까지의 산세는 모두 한남정맥의 지맥들이다. 한남정맥은 위에서 언급한 광교산에서
왕륜면 경계를 따라 내려오다가 다시 안산과 북방면의 경계를 따라 수리산으로 올라간다.
하천 유역권은 단순히 하계망의 경계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광주에서도 경안천과 탄천 연안의곡저평야를 따라 주요 취락과 도로망이 분포하였고,
동시에 타 유역권과는 높은 산지로 가로막혀 있기 때문에
하천 유역권은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기 마련이다. 광주는 경안천, 탄천, 성내ㆍ
고덕ㆍ덕풍천, 안양천, 반월천에 의해 크게 다섯 개의 유역권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각각이
상대적으로 단절된 권역을 형성함으로써 광주 전체의 통일성이 결여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특히 안양천 유역에 속하는 의곡ㆍ왕륜면과 반월천 유역에 속하는 월곡ㆍ북방ㆍ성곶면 등
낙생면 이서의 지역은 광주의 중심지와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산지로 단절되어 지역간 교류가 원활하지 않았다. 이에 결국 19세기 말에 이미
의곡ㆍ왕륜면은, 비록 유역권이 다르지만 그 분수계에 해당하는 산세가 미약하여
소통하기 쉬웠던 수원군으로, 나머지 세 면은 안산군으로 편입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소규모 하계망의 발달은 溪居地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언급하듯이 사대부들은 相宅함에 소규모 계곡 안쪽,
일명 고라실을 으뜸으로 여겼으므로 광주는 그들에게
일정한 생산력과 심리적 안정감을 충분히 제공하는 可居地로 적합하였다.
廣州府地圖 『八道郡縣地圖』 1724∼1776 종이에 채색 50.0*38.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770년 신경준이 제작한 고을지도책의 필사본에 수록되어 있는 광주부의 지도이다.
4. 광주의 교통망
1) 육로 교통망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의 저작 도로고(道路考)(1770)로부터
조선시대 간선도로망이 구체적으로 확인된다. 여암은 전국의 간선도로망을 여섯 개 대로와
각 대로에서 분기한 주요 지선으로 체계화하고, 5∼30리 간격으로 경유지를 열거함으로써
각 경로를 표현했다. 도로고에서 분류한 여섯 개의 대로는 모두 서울을 기점으로 하여
방사선으로 6방의 각 극지까지 뻗어 있다. 서북방향의 제1로부터 시계방향 순으로 명명된
여섯 개의 대로는 8도의 주요 도회인 감영ㆍ유수부․목ㆍ대도호부 등을 망라한다.
표 4. 18세기 후반 간선도로의 분포
대로명 주요 경유지
경성서북저의주로제1(京城西北抵義州路第一) 한성-벽제역-파주-임진-동파역-장단-개성-금교역-
서흥-황주-평양-순안-청천강-곽산-동림산성-전문령-의주-압록강
경성동북저경흥로제2(京城東北抵慶興路第二) 한성-누원-축석령-송우점-만세교-양문역-김화-금성-
창도역-회양-철령-고산역-안변-함흥-북청-길주-명천-회령-온성-경원-경흥-서수라
경성동저평해로제3(京城東抵平海路第三) 한성-망우리현-평구역-이수두리-양근-지평-안창역-
원주-안흥역-방림역-대관령-구산역-강릉-평릉역-삼척-울진-망양정-월송진-달수역-평해
경성동남저동래로제4(京城東南抵東萊路第四) 한성-한강-판교점-용인-김령장-좌찬역-달천진-충주-
단월역-조령-문경-유곡역-낙동진-금호강-대구-팔조령-청도-밀양-황산역-양산-동래-부산진
경성서남저제주로제5(京城西南抵濟州路第五) 한성-동작진-과천-수원-청호역-진위-소사점-아주교-
성환역-직산-천안-삼거리-차령-공주-니성-여산-삼례역-태인-정읍-장성-영암-해남-제주
경성서저강화로제6(京城西抵江華路第六) 한성-양화진-철곶천-양천-악포교-김포-백석현-통진-
갑곶진-강화
자료 : 道路考(1770)
제1로인 의주로는 개성, 평양을 지나 의주까지,
동북방향의 제2로인 경흥로는 누원, 포천, 회양, 함흥을 지나 함경도 경흥 서수라까지,
동쪽방향의 제3로인 평해로는 양근, 지평, 원주, 강릉을 지나 강원도 평해까지,
남동방향의 제4로인 동래로는 용인, 충주, 상주, 대구를 지나 경상도 동래까지,
남쪽방향의 제주로는 과천, 수원, 공주, 삼례, 해남, 이후부터는 해로를 통해 제주까지,
서쪽방향의 강화로는 양화진을 건너 양천, 김포, 통진을 지나 강화까지이다.
이 가운데 광주로는 제3로인 평해로와 제4로인 동래로가 경유한다.
6대로는 19세기 전반기에 봉화로가 새로운 대로로 편입되어 7대로로 확대된다.
봉화로는 송파진을 건너 남한산성-경안역-이천-장호원-가흥-충주-단양-죽령-풍기-영주를
지나 봉화까지이다. 그런데 이 봉화로 노선 가운데 충주까지는 도로고에
‘自京城東南由松坡津抵忠州一路’와 경로가 일치한다.
결국 18세기에도 조선의 대로 가운데 하나가 광주 남한산성을 관통하고 있었다.
우선 광주 영역 내의 동래로 노선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金正浩가 저술한 大東地志(1864) 「程里考」에는 10개의 간선도로망이 소개되어 있다.
이 가운데 광주를 경유하는 동래로 노선은 월천현부터 험천까지이다.
京都-漢江津(10, 卽西氷庫津)-新院(20, 東獻陵五里)-月川峴(10, 古云穿呼川峴又云達于內峴)-
板橋店(10, 西北至松坡津三十里)-險川(10, 一云遠于川)-<龍仁>(20, 京八十里)‧‧‧‧
(석원-달천진-수회-조령-문경-상주-대구-밀양-동래-부산진)
숭례문을 나와 이문동, 도저동, 이태원을 경유하여 한강진에 이른다.
한강진은 지금의 한남대교(915m) 자리이다. 강을 건넌 동래로는 강남대로-양재역
(서울시 역삼동)-양재1교(양재동)-염곡교(염곡동)-신원마을로 이어졌다. 신원동 초입 청계산
등산로 입구에는 미륵당과 함께 정자목으로 식재됐을 법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서 있다.
전술했듯이 광주의 서쪽 산지는 탄천 유역과 양재천 유역을 나누는 분수계가 된다.
두 유역을 잇는 가장 낮은 곳이 월천현으로, 도로가 이곳을 통과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신원에서 월천현을 넘으면 경부고속도로 서쪽으로 금현마을ㆍ금토동을 경유하여
판교분기점까지 포장된 소로가 나 있는데, 이 길이 곧 동래로 옛길이다.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 「廣州」 圖葉에 따르면 월천현은 도로폭을 확보하기 위해
頂部의 산각을 깎아 내었으며, 신원에서 월천현 너머 바로 아래 동래로변에는
소규모의 취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1872년 군현도에 적힌 芽川峴이 곧 월천현이다.
고개길이 열리는 곳은 골짜기가 고개마루까지 깊숙이 연장되는 것이 보통인데,
월천현 외에 전술한 학현이 이와 같은 지형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이곳으로 서울외곽고속도로 및 342번 지방도로가 통과하는 것과
학현 아래 학의동에도 원이 있었던 것은 그 패턴이 월천현과 동일하다.
학현과 월천현은 탄천 유역과 한강 본류 유역을 이어주는 고개로서, 대신할 다른 경로가
거의 없고 嶺下에 원이 설치된 것으로 보아 18세기에도 중요하게 이용된 嶺路로 판단된다.
판교점은 현 낙생초등학교 동편의 393번 지방도로 좌우 양편에 형성된 대표적인 街村의 하나이다.
판교분기점 부근의 삼거리(성남시 삼평동)에서 393번 지방도로로 풍덕천리(용인군 수지면)까지
이어진다. 험천은 ‘一云遠于川’이라 하였으니 현재 성남시 분당구 동원동의 머내마을이다.
판교분기점까지 소로로 계승된 동래로는 이하 험천까지 분당신도시가 개발되기 이전의
393번 지방도로와 일치했다. 구 동래로는 분당이 개발되면서 市道로 편입ㆍ정비되었는데,
지하철 분당선 백궁역~미금역 사이의 길이 옛 경로이다.
풍덕천에서 탄천을 건너 구성면 보정리-마북리를 지나 용인의 읍치였던 언남리로 이어진다.
도로변에 설치된 시설로 긴요한 것이 역이었다. 역의 기본 기능은
행정 및 군사 공문서 전달에 필요한 시설과 인마를 제공하는 것이고, 이외 왕의 거둥,
사신 왕래, 임관의 부임, 관물 수송 등 공식적인 행차에 관련한 제반 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선은 도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초기부터 前朝의 驛制를 정비하였는데,
8도의 중심 도회에 監營을 설치하듯 驛路와 驛을 수 십개의 구역으로 구분하고
그 가운데 하나의 중심역을 두는 것이었다. 이러한 驛域을 驛道라 하였으며,
그 중심역을 察訪驛이라 하였다. 종6품직 찰방은 관찰사에 직속되었기 때문에
역도는 행정 道境界를 넘는 경우는 없었으나 읍경계와는 무관하다.
역도의 관할 구역은 대체로 간선도로를 따라 편성되었다.
경기도 내의 동래로 구간은 모두 良才道 관할인데, 광주부에는 낙생역이 설치되어 있었다.
突馬驛으로 기재된 輿地圖書(1760년경)에 따르면
본역에는 馬 5필과 奴婢 4인이 배치되어 규모가 적은 편에 속했다.
한국지명총람에는 낙생역이 과거 돌마면 수내리(분당구 수내동)에 소재한 것으로
기술되었지만, 그 위치를 비정하는 데에는 몇 가지 검토할 사항이 있다.
우선 광주부에는 낙생면과 돌마면이 계속 유지되는 상황에서
돌마면에 소재한 역을 낙생역으로 이름붙였을 가능성이 적다. 여지도서(1760년 경)의
경우는 돌마역으로 기재하고 있으므로 이 논리에 배치되지 않지만, 世宗實錄地理志(1454)ㆍ
新增東國輿地勝覽(1531)ㆍ東國輿地志(1660년대)ㆍ道路考(1770)ㆍ萬機要覽(1808)ㆍ
大東地志(1864) 등 조선 전ㆍ후기의 자료가 모두 낙생역으로 기재하고 있다.
따라서 돌마역은 오류이거나 혹은 여지도서가 편찬되었던 당시에
이곳으로 이전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지도를 통해서도 낙생역 소재지에 대한 비정이 쉽지 않다.
大東輿地圖에 낙생역이 표시된 지점은 판교점 부근 탄천 본류와 운중천 사이이므로
오늘날 판교동 혹은 백현동에 해당할 것이나, 1872년 군현도에는 탄천 以東의 돌마면 쪽에
낙생역이 표시되어 있고,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에도 현 백궁역 부근에 ‘역촌’이라는
지명이 보이므로 한국지명총람의 조사결과를 따를 수 있다. 신시가지로 개변된 수내동에서는
수내3동 동사무소 앞길이 ‘역말 고갯길’로 지정된 것을 제외하면 역과 관련된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두 번째, 대동지지에 나타난 봉화로 노선은 다음과 같다.
京都-箭串橋(10)-新川津(10)-松坡津(5, 自此南至栗峴十五里秋嶺三十里龍仁二十里,
自津南至深店二十里利保峴五里新峴十五里慶安驛十里此亦大路)-黔北站(15)-慶安驛(15)-
雙嶺店(10)-昆池厓(10)-廣峴(15)-<利川>(20, 京一百三十里, 分岐)-
長磴店(30, 自廣峴不入利川直至長磴店四十五里)-<陰竹>(20, 京一百八十里, 東北驪州五十里)
대동지(1864년) 원형 노선
남한산성 옛길(봉화로) 전체(한양 ∼ 봉화 총 500리, 196km)
(한양) 전곶교 → 신천진 → 송파진
(경기) 율목정 → 남문 → 검북참 → 경안역 → 쌍령점 → 곤지애 → 이천 → 장해원
(충북) 오갑 → 용당 → 충주 → 황강역→ 수산역 → 장위점 → 단양 → 죽령
(경북) 창락역 → 풍기 → 창보역 → 영천→ 내성점→ 봉화
봉화로는 한성에서 경상북도 봉화 太白山史庫까지로 광주․이천․음죽․충주․단양 등은
본선이 경유하였고, 여주․제천․영춘․청풍 등은 지선으로 연결되었다.
한성에서 음죽까지는 慶安道, 이후의 구간은 連原道에서 도로를 관리하였다.
이 길은 도로고의 6대로에 이어 19세기 초부터 제7대로로 지정되었는데,
선조때 설치된 사고와 관련되는 듯하다.
본로의 경로는 부분적으로는 차이가 있지만 서울-장호원 구간은 3번국도,
장호원-충주 구간은 38번국도, 충주-죽령 구간은 36번국도로와 대체로 일치한다.
대동지지 「정리고」 城內分路條에 따르면 도성에서 살곶이다리
[箭串橋, 서울시 사근동]까지의 봉화로는 흥인문, 동묘, 영도교, 왕십리, 차현을 경유한다.
영도교는 청교천 본류에 가로 놓인 다리로 황학동에 있었고,
황학동에서 중앙시장을 지나 왕십리길을 통하면 살곶이다리에 닿는다.
차현은 수레의 왕래가 빈번하여 붙은 이름으로 현재 한양대학교 교내로 편입되었다.
살곶이다리는 중랑천에 놓인 다리이고,
이를 건너면 뚝섬[살곶이벌], 자양동, 신천진(서울시 신천동)으로 이어진다.
신천진은 蠶室島의 북안에 위치한 나루로, 남안에 잠실이 있고, 여기서 다시 한강을 건너면
송파진이다. 지금은 신천진 자리에 잠실대교가 놓였고, 송파진은 송파대로로 연결되어 있다.
송파진을 건넌 이후의 노선은 문정동까지 송파대로와 일치하고,
올림픽훼밀리타운아파트 단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파세무서, 서울여학생 생활교육원, 하남시 학암동, 남한산성까지 이어졌다.
남한산성부터는 308번 지방도로를 따라 검북참[광주 중부면 검북리],
오전리, 새우고개[蝦峴], 목현리, 경안리까지 이어진다.
경안리는 읍치 이전부터 경안역, 파발막, 관청, 장시가 밀집한 광주의 중심지였다.
경안리-장호원 구간의 봉화로는 거의 3번국도와 일치한다.
쌍령은 대쌍령과 소쌍령이 있는데,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두 고개 너머에 쌍령점이 있었으므로
오늘날 쌍동리에 해당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경안천의 지류인 곤지암천이 합수한다.
곤지애(실촌면 곤지암리)는 대대로 장시가 개설된 곳으로,
마을 서쪽에 뾰족바위를 곤지바위로 부른 데서 이름이 붙었다.
넋고개로도 불리는 광현(실촌면 신촌리)은 광주와 이천의 경계점이고 경안천과 복하천의
분수령이 된다. 장등점은 여주군 가남면 태평리 蟾背[섬비]마을로 추정된다.
동래로와 더불어 경기 동남부를 경유하는 奉化路[한성~충주~죽령~봉화]는
한강수로와 인접해 있어 수운과의 연계성이 높고, 충주목ㆍ여주목ㆍ광주목 등의
대도회를 경유하기 때문에 동래로보다 상업적으로 더 중요하였다.
따라서 광주에서는 봉화로 자체 못지 않게 동래로와 봉화로를 잇는 연결로가 중요했고,
분당구 삼평동 삼거리에서 수정구 신촌동까지 뻗어 있는 지방도로가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 도로는 탄천 서안을 따라서 석촌마을(서울시 송파구 석촌동)을 경유하여
송파진까지 나아 있는데, 송파진은 한강의 주요 入京津이었을 뿐 아니라
한강 수로와 간선도로가 결절하는 교통ㆍ상업요지였다.
이에 함께 설치된 송파장은 한성의 시전 상권을 위협할 정도로 규모가 큰 전국적인
大場圈을 형성하였다. 송파장은 경강상인뿐 아니라 향상들의 출입이 매우 빈번하였고,
따라서 동래로 변의 연풍, 괴산, 음성, 충주, 음죽, 죽산, 용인 등의 한강 유역권은 물론이고
청주에서 진천의 광혜원을 지나 죽산으로 연결되는 금강 유역권,
그리고 조령 너머 영남지역의 낙동강 유역권의 상인이나 물화가 동래로를 따라 올라오다가
송파장으로 가기 위해 이곳 삼거리에서 노선을 바꿨다.
일제시기에 경성에서 경안까지의 봉화로와 경성에서 광주 전역에 이르는 동래로는
노선을 그대로 유지하면 達路(3등도로)의 등급으로 관리되었다.
다만 경성-광진-명일리-덕풍리-광지원리-경안리로 이어지는 현재의 43번국도 노선과,
현재 3번국도가 된 경안리 이후의 봉화로는 1등도로로 정비되었다.
18세기 광주의 대로변에는 양재도 소속의 양재찰방역과 낙생역,
경안도 소속의 경안찰방역과 덕풍역, 평구도 소속의 봉안역이 설치되었다.
경기도의 찰방역이 여섯 개 가운데 광주에 두 개나 소재하였다.
양재역ㆍ낙생역, 경안역, 그리고 봉안역은 각각 동래로, 봉화로, 평해로 등
대로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덕풍역은 전술한 일제시기에 1등도로로 정비된
도로변에 위치하였는데, 1872년 군현도에도 이 경로가 표시되어 있다.
자전곶교지광주략도에 나타난 남한산성 옛길표 5. 광주 소속의 역
자료 : 여지도서
지역간 대로가 아닌 지역내 소로망을 가장 상세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여지도서가 거의 유일하다.
그러나 광주부 도로조는 한 개의 대로와 세 개의 소로만 기재되어 내용이 매우 소략하다.
이천 경계까지 송파대로 동으로 90리, 용인 경계까지 소지소로 남으로 70리,
서남방향으로 바닷가까지 용진소로 120리,
양근 경계까지 동북방향으로 사평소로 115리 길만 소개되어 있다.
한편 해동지도와 1872년 군현도에는 도로망이 이보다 자세하다.
남북방향으로 놓인 길 가운데 왕륜면을 관통하는 길이 가장 서쪽에 놓여 있다.
이 길은 신경준의 6대로 중 제주로 또는 대동지지 단계 10대로 중 수원로의 일부로서
오늘날 1번국도이다. 사근행궁과 사근평, 주막 두 기가 표시되어 있다. 두 번째 길은
동래로이며 차례로 봉화로와 전술한 현재의 43번국도길, 그리고 평해로가 표시되었다.
이 지도는 대로뿐 아니라 간로 및 소로도 표시하고 있는데, 동래로와 수원로를 이어주는
학현길과 전술한 삼평동에서 송파진까지 이어주는 간로가 하나의 노선으로 표시되었고,
현재의 서울시 문정동 부근에서 세촌면을 경유하여 경안리까지 이어지는 이배재길과
한강 연안의 한강진에서 송파진까지의 도로가 주요 도로로 표시되었다.
전반적으로 이 지도에서도 광주 지역 내의 도로망이 남북축을 기본으로 하고
또한 각 대로가 한강의 진도에서 시작하는 특징을 보인다.
아울러 각 간선도로를 연결하는 간로 및 소로망이 嶺路로서 분포함을 알 수 있는데,
이는 산줄기와 유로망이 기본적으로 남북방향으로 뻗어 있는 광주의 지세와 밀접히 관련된다.
이러한 육상 교통망은 동서방향의 수로교통망과 결절하면서
지역간 물자 및 문화교류가 증폭되었다.
2) 수로 교통망
광주는 북한강과 한강 본류를 북쪽의 경계로 삼는다. 이에 군내에는 한강진, 사평진,
삼전도, 신천진, 송파진, 광진, 미음진, 두미진, 마참진 등의 진도가 다수 분포하였다.
이 가운데 한강진과 사평진으로는 동래로가, 신천진ㆍ삼전도ㆍ송파진으로는 봉화로가 지나갔다.
사평진과 송파진에는 각각 사평장과 송파장이 설치되어
수륙결절지가 유통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수로를 통한 원거리 운송과
육로를 통한 국지적 유통이 결합된 조선후기의 상품유통구조 속에서
광주는 그 전형을 잘 보여준다. 광진은 뗏목의 집결지로 중요했으며,
미음진ㆍ두미진ㆍ마참진은 다른 진도에 비해 상업포구로서의 기능은 약했다.
한강의 가항구간은 하구에서 영월까지 약 328km에 달하고
북한강은 양수리 합수점부터 상류로 164km 지점의 화천까지였다. 수운을 통해 운반했던
물화 중 소강상품으로는 어염이 가장 중요하였고, 하강상품으로 쌀ㆍ콩 등의 곡물과
담배 등의 특용작물, 그리고 목재ㆍ땔나무ㆍ숯ㆍ약초 등의 임산물이 대종을 이루었으며,
간혹 옹기와 같은 수공업품도 일부 차지하였다.
이들을 선적한 강선이 사평진이나 송파진에 일정 기간 정박하는 동안
주변 주민과 시장의 상인들은 활발한 상업활동을 수행하였고,
이러한 경제교류를 통해 자연스럽게 문화교류도 이루어졌다.
광주 분원리를 중심으로 제작된 그릇류는 광주의 주요 산물이었다.
분원리 외에도 광주에는 번천리ㆍ도마리ㆍ건업리ㆍ선동리 일대에서 가마터가 발견되는데,
백자를 비롯한 도자기류는 백토 등의 원료와 최종 상품 수송에 수운이 절대적이었다.
번천리ㆍ도마리ㆍ건업리 가마터는 15∼16세기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됨으로써
수도 한성과 가까운 지리적 위치와 수운의 잇점을 바탕으로
광주는 분원이 설치되기 이전부터 관ㆍ민용 그릇을 조달한 것으로 생각된다.
분원리에는 1752년부터 1884년까지 130여년간 관요가 운영되었다.
조선후기의 한강 수로는 점차 상품유통로로서의 기능이 강화되었지만,
여객 수송 또는 사대부의 유람 및 친지방문로로서도 기능하였다.
유배 생활을 끝내고 능내에 거주하였던 다산은 조카의 결혼에 참석키 위해
북한강 수로를 이용하여 춘천을 다녀온 적이 있다.
18∼19세기 양근ㆍ광주지역에 천주교가 널리 유포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주변 지역의 인물들이 집결할 수 있었던 것에도
수로 교통은 일정 부분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구한말 이른바 화서학파의 활동공간과 교류도 이러한 양상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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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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