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능행과 보부상길이었던 남한산성 옛길

이름없는풀뿌리 2022. 12. 5. 07:19
□ 능행과 보부상길이었던 남한산성 옛길 능행과 보부상길이었던 남한산성 옛길 1. 남한산성 옛길 / 경기문화재단 <길 위의 이야기>는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남한산성 옛길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스토리북입니다.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요한 도로 중 한 곳이었던 남한산성 옛길은 조선시대 왕의 행차길이자 떠돌이 보부상의 생계를 위한 길이었고, 지방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올라오던 길이었습니다. <길 위의 이야기>는 남한산성 옛길에 새겨진 발자국을 따라 우리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전해드릴 예정입니다. 1.1 왕들의 능행길, 민간의 상업루트 * 남한산성 옛길(봉화로)이 표기된 구한말 지도|자전곶교광주지략도|1885년 * 봉화로(奉化路) : 한양에서 봉화 태백산사고까지 이르는 조선 6대로의 하나로 산성구간은 (동대문-전곶교-송파진-학암동-남한산성-검북참-경안리)로 이어지는데 남한산성 연무관 아래를 지나면서 장터가 들어섰다고 한다. 남한산성이 위치한 지금의 성남시, 광주시, 하남시는 옛날 조선시대 행정구 역으로 보면 모두 광주유수부의 관할지역이었습니다. 광주유수부는 남한산성의 군사요충지적 특성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정중심지였습니다. 또 남한산성은 왕의 이동과 관련이 깊은 곳입니다. 조선시대의 왕들은 반드시 선대왕 들의 능에 성묘를 가야 했으며 왕들의 이런 성묘행사를 능행이라고 불렀습니다. 후대의 왕들이 영녕릉(英寧陵)에 참배를 하러 가려면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남한산성 옛길을 이용해 여주까지 가야했습니다. 남한산성 옛길의 또 다른 특징은 조선후기 상거래가 활발해지면서 필요해진 내륙의 유통망으로 민간에서 이용했던 상업루트였다는 점입니다. 많은 보부상들이 바로 남한산성 옛 길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이용된 남한산성 옛 길은 목적지인 경상북도 봉화의 이름을 따 통칭 봉화로라고 불렸습니다. 1.2 보부상과 장돌림 문화 보부상은 ‘봇짐과 등짐을 지고 이동하며 물건을 파는 장사치’라는 뜻입니다. 보상은 보자기에 물건을 싸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판매하는 장사치를 말하며 주로 여성들이 맡았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부상은 부피가 큰 옹기, 그릇, 죽제 품, 소금 등을 판매하였습니다. 보부상은 바로 주요 육상 간선도로망인 삼남로, 영남로, 의주로, 봉화로(남한산성 옛길) 등을 통해 상업유통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됩니다. 장시가 전국적으로 들어서게 되자 일정한 날짜에 열리는 장시를 돌며 상품판매를 하게 되고 이러한 방식은 이들에게 장시를 돌며 물건을 판매하는 장사치라는 의미로 ‘장돌뱅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계기가 됩니다. 상업이 점차 중요해지며 보부상들의 활동영역이 넓어지자 이들이 이동하는 길에는 수많은 주막들이 들어서기까지 합니다. 지금 보부상이라는 이름은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지명들과 5일 장의 ‘장돌림’ 문화는 여전히 새로운 이동 상인들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문화입니다. 1.3 옛 삶의 흔적이 녹아든 옛길, 사라지는 삶의 흔적들 남한산성 옛길은 많은 선비들이 과거를 보러 오가던 길, 물건을 이고 지고 장 터와 장터를 오가던 보부상, 장돌뱅이들의 애환이 서린 길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삶의 흔적이 녹아 있는 옛길이지만 지금은 이 옛길들을 자동차에 내어주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수많은 사람이 직접 이동하며 쌓아온 삶의 흔적, 몇 천 년을 유지해왔을 서낭당과 장승에 대한 신앙이 사라져가고, 암행어사가 마패로 여행을 하고, 파발꾼이 말을 빌리며 외적의 침입에 긴급통신을 전하던 역참과 마방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의병들이 모여 외적을 물리치고 서울로 진공하던 기억이 잊혀지고, 이 길을 따라 피난을 가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던 그 기억들이 사라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효율과 편의를 추구하는 사회변화를 역행할 수는 없겠지만 자동차에 내어주기 전에 수 천 년 동안 옛길 위에 쌓인 우리의 삶의 흔적을 남겨 놓을 필요는 있지 않을까요? 2. 남한산성 옛길 고증 남한산성 옛길의 원형노선을 역사적으로 고증하는 전거는 김정호의 『대동지지』에서 찾았다. 세부 노선에 대한 보완책으로는 「자전곶교지광주략도(自箭串橋至廣州畧圖)」를 활용해 보았다. 왜냐하면 『대동지지』에는 지점과 지점의 지명이 언급되어 있지만, 구체적인 세부 노선에 대한 정보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대동지지』는 현재 경기도 성남시 구간을 통과하여 남한산성 남문까지의 노선은 기술되어 있으나 현재 경기도 하남시에서 남한산성 북문으로 향하는 노선은 생략되어 있다. 이런 경우 「자전곶교지광주략도」를 통해 역사적 공시성을 보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동지지』를 통해서 봉화로의 원형 노선 중 현대의 경기도를 지나는 구간을 파악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남한산성 옛길 조성에 기준이 될 노선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대동지지』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지만 하남시를 통과해 남한산성으로 가는 조선시대 옛길의 원형 노선을 「자전곶교지광주략도」를 통해 파악할 수 있어 현대적 탐방로로 조성될 남한산성 옛길의 노선 다양화를 도모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얻을 수 있다. 2. 1 『대동지지』에 나타난 원형 노선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는 한양과 중요 지점까지의 거리 정보를 정리한 「정리고(程里考)」가 수록되어 있다. 「정리고」에 명시되어 있는 지명을 통해 봉화로의 원형 노선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으며, 아래와 같다. 京都 箭串橋十里 新川津十里 松坡津五里 한양 전곶교 10리, 신천진 10리, 송파진 5리 (自此南至 栗峴十五里 秋嶺三十里 龍仁二十里 自津南至 深店二十里 利保峴五里 新峴十五里慶安驛十里 此亦大路 (여기서 남쪽으로 율현 15리, 추령 30리, 용인20리, 나루 남쪽으로 심점 20리, 이보현 5리, 신현 15리, 경안역 10리이며 이 또한 대로이다.) 栗木亭十五里 廣州五里(京四十五里 西果川四十里 西南水原五十里) 율목정 15리, 광주 5리(서울에서 45리, 서 과천 40리 서남 수원 50리) 黔北站十五里 慶安驛十五里 雙嶺店十里 昆池厓十里 廣峴十五里 검북참 15리, 경안역 15리, 쌍령점10리, 곤지애 10리, 광현 15리 利川二十里(京一百三十里 分岐) 長磴店三十里(自廣峴不入利川直至長磴店四十五里) 이천 20리(서울에서 130리, 분기) 장등점 30리(광현에서 이천을 들르지 않고 곧장 오면 장등점 45리) 陰竹二十里(京一百八十里 東北驪州五十里) 長海院十里(自長磴由門懸直至長海院二十五里) 음죽 20리(서울에서 180리, 동북 여주 50리) 장해원 10리(장등에서 문현을거쳐 곧장오면 장해원 25리) 烏岬十里 龍堂十五里 福城洞五里 鳯凰川十里 可興倉十里(分岐) 荷淵津十里 北倉津十里 오갑 10리, 용당 15리, 복성동 5리, 봉황천 10리, 가흥창 10리(분기) 하연진 10리, 북창진 10리 忠州十里(京二百七十里 東北浦灘津三十里 堤川六十里 西北驪州九十里) 塘里二十五里(有小津) 충주 10리(서울에서 270리, 동북 포탄진 30리, 제천 60리, 서북 여주 90리), 신당리 25리(작은 나루터) 黃江驛五里 西倉十里(分岐) 衣峙十里 壽山驛十里 長渭店十里 황강역 5리, 서창10리(분기) 의치 10리, 수산역 10리, 장위점 10리, 丹陽二十里(京三百六十里 北堤川五十里 西北淸風四十五里 東永春七十里) 단양 20리(서울에서 360 북 제천50리, 서북 청풍45리, 동 영춘 70리) 竹嶺三十里(忠慶交界) 昌樂驛二十里 豐基十里(京四百二十里 分岐 西南龍宮九十里) 昌保驛二十里 죽령 30리(충청·경상 경계) 창락역 20리, 풍기 10리(서울에서 420리, 분기, 서남 용궁 90리), 창보역 20리 榮川十里(京四百五十里 分岐 西北順興三十里 北馬兒嶺三十五里 永春二十五里) 奈城店三十里 영천10리(서울에서 450리, 분기 서북 순흥30리, 북 마아령 35리, 영춘 23리) 내성점 30리 奉化二十里(京五百里 南禮安六十里 東北太白山覺華寺史庫五十里 傍有 洪濟菴) … 생략 봉화 20리(한양에서 500리, 남 예안 60리, 동북 태백산 각화사사고 50리, 인근에 홍제암) … 생략 위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봉화로는 한양 구간에서 전곶교(箭串橋), 신천진(新川津), 송파진(松坡津)을 지난다. 경기도 구간으로는 율목정(栗木亭), 광주(廣州), 검북참(黔北站), 경안역(慶安驛), 쌍령점(雙嶺店), 곤지애(昆池厓), 광현(廣峴), 이천(利川), 장등점(長磴店), 음죽(陰竹), 장해원(長海院)을 지난다. 충청북도는 오갑(烏岬), 용당(龍堂), 복성동(福城洞), 봉황천(鳯凰川), 가흥창(可興倉), 하연진(荷淵津), 북창진(北倉津), 충주(忠州), 신당리(新塘里), 황강역(黃江驛), 서창(西倉), 의치(衣峙), 수산역(壽山驛), 장위점(長渭店), 단양(丹陽), 죽령(竹嶺)을 지난다. 경상북도에서는 창락역(昌樂驛), 풍기(豐基), 창보역(昌保驛), 영천(榮川), 내성점(奈城店)을 지나 봉화(奉化)에 이른다. 한양에서 봉화까지 거리는 총 500리이며, 봉화에서 태백산 사고까지의 거리는 50리로 명시되어 있다. 또한, 각 지점의 이수(里數)가 산정되어 있으며, 작은 글씨로 길에 대한 부가 설명이 이루어져 있어 매우 자세한 지리 정보를 얻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원형 노선 중 남한산성 옛길의 대상이 되는 경기도 구간은 총 11개이다. 먼저 율목정은 현재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군사소비도시였던 남한산성의 군량미나 병기를 저장했던 창고가 있던 마을로 추정된다. 관련하여 『정조실록』에 정조가 남한산성으로 행행(行幸)하는 중에 율목정에 이르러 갑주(甲冑)로 갈아입고 말을 타고, 산성의 남문을 통해 들어갔다는 기록이 나온다.12) 광주는 현재의 남한산성이 소재한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에 해당하며 임금이 거둥하던 중에 숙박을 할 수 있는 행궁이 있던 곳이다. 검북참은 현재의 광주시 중부면 검북리에 해당하며, 경안역은 현재 광주시 경안동이고, 쌍령점은 현재 광주시 쌍령동이다. 곤지애는 현재 광주시 곤지암읍 곤지암리이며, 광현은 현재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에 해당한다. 이천은 현재 이천시 창전동으로 추정되며, 관아터가 남아있는 이천초등학교 주변으로 보인다. 장등점은 현재 여주시 가남면 태평리로 추정되며, 음죽은 조선시대 음죽현 관아가 있던 곳으로 현재 이천시 장호원읍 선읍리로 추정된다. 장해원은 현재 이천시 장호원읍 장호원리에 해당한다.13) 『대동지지』에 나오는 원형 노선 중 경기도 구간을 현재 지명으로 정리하자면 ‘(성남시)창곡동~(광주시)남한산성~산성리~검북리~경안동~쌍령동~곤지암리~ (이천시)수광리~창전동~(여주시)태평리~(이천시)선읍리~장호원리’ 이다. 2.2 「자전곶교지광주략도」에 나타난 원형 노선 * 자전곶교광주지략도(미국의회도서관 소장, 1885년 제작) 남한산성 옛길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고지도로는 18세기 중반에 제작된 「해동지도(海東地圖)」, 「여지도(與地圖)」, 「경기읍지(京畿邑誌)」, 「광주전도(廣州全圖)」, 「동치십일년삼월일음죽현지도」 등이 있다. 하지만 이 중에서도 본고는 「자전곶교지광주략도」11)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유는 위에서도 밝혔듯이 『대동지지』의 노선을 보완할 수 있으며, 현재의 하남시 구간을 통과하는 노선도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도는 살곶이 다리라고도 불리는 전곶교에서 시작된다. 전곶교는 1482년(성종 13)에 왕십리와 뚝섬 사이 중랑천을 가로질러 건립된 석교이다. 지도에서 전곶교 지명 아래 다리의 재질을 석조라고 명기한 부분이 있다. 전곶교에서 두 갈래 길로 나눠지는데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은 『대동지지』의 봉화로 노선과 일치한다. 이 길은 전곶교를 지나 현재 서울시 성수역 인근인 촉수(㯮樹)로 내려간다. 신천진(新川津) 나루에 다다르기 전에 현재 서울시 자양동에 해당하는 자마장(滋馬場)13)을 지나며, 자마장 인근에는 민가가 표현되어 있다. 신천진이라 표시된 한강 중앙에 섬이 하나 표현되어 있으며, 이는 『해동지도』에서 확인되는 부래도(浮來島)이다. 부래도를 지나면 현재의 석촌호수 인근으로 추정되는 송파진(松坡鎭)이 나오고 민가와 주변 마을 길에 대한 표현이 보인다. 마을 아래쪽으로 흔히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 불리는 한비(汗碑)가 표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서쪽으로 원우천(遠隅川)을 거슬러 가다보면 ‘ムンヂョン洞(문죤동)’14)이라 표기된 곳이 나오며 현재 서울시 문정동에 해당하는 곳이다. 이곳에서 용인으로 향하는 갈림길이 표현되어 있는데 동쪽으로 꺾어 올라가면 현재의 성남시 창곡동에 해당하는 율목창리(栗木倉理)가 나온다. 율목창리는 김정호가 율목정이라 표현했던 곳이다. 이곳에서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지화문(至化門)인 남한산성 남문으로 연결된다.15) 11) 이 지도는 1885년 일본군 카이즈 미쓰오(海津三雄) 공병 대위가 1885년에 간행한 지도로 현재 미국의회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경기문화재단, 『남한산성 사료총서 제2권』, 2014, pp.14~15) 12) 임금이 장차 영릉(寧陵)에 전배(展拜)하려고 이날 남한 행궁(南漢行宮)에 머물렀다. -중략- 율목정(栗木亭)에 이르러 갑주(甲胄)로 갈아 입고 말을 탔고,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이 중군(中軍)과 각 영장(營將)과 기고(旗鼓)를 거느리고 영접하였다. 임금이 남문(南門)으로 들어가 행궁에 들어가서 정당(正堂)에 나아가니, 수어사가 현(參現)하였다. 임금이 갑주를 벗고 융복(戎服)을 입고서 호가(護駕)한 대신(大臣)과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와 각무 차사원(各務差使員)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하략-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3일 1779년) 남한산성에 행행하여 백성과 군대의 상태를 살피다 13) 지도에는 자마장(滋馬場)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조선시대 본래 지명은 자마장(紫馬場)이며, 자마(紫馬)는 암말을 뜻한다. 지도 제작 당시 잘못 표기한 것으로 보인다. 14) 지도에는 ‘ムンヂョン洞(문죤동)’이라 표기되어 있지만 문정동(文井洞)이다. 현대의 서울시 문정동의 지명 유래는 병자호란 당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몽진하다가 이곳에서 쉬면서 물을 마셨는데, 그 물맛이 좋아 이 마을에 많이 사는 문씨(文氏) 성을 따서 문정(文井)이라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서울문화포털 서울지명사전, http://culture.seoul.go.kr, 2016년 8월 28일 검색) 15) 경기문화재단, 위의 책, 2016, pp.101~102. [부분 그림] 지도 중 전곶교 갈림길 부분 [부분 그림] 지도 중 남한산성 부분 두 번째 길은 전곶교를 건너고 동쪽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이 길은 화양정(華陽亭)을 지나는데, 지금의 서울시 화양동 지명의 유래가 된 정자이다. 길을 따라 광진(廣津)에 다다르면, 10여 호의 민가가 그려져 있다. 민가의 수가 송파진 정도는 아니지만 다른 곳과 비교하면 꽤 번화했던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강을 건너 산기슭을 따라 가다 보면 구두점(狗頭店)이라는 명칭과 건물 2채가 길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쉬어가는 점포나 주막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조금 더 가면 명일원(明逸院)이라는 지명과 함께 건물 3채가 나란히 있는데, 명일원은 지금의 서울시 명일동의 지명이 유래된 조선시대 공공 숙박시설이다. 이곳을 지나 노선을 따라 가다보면 갈림길이 나오는데 위쪽 갈림길로 들어서면 해천점(蟹川店)이라는 표기가 있다. 해천점은 현재 서울시 상일동으로 추정되며, 갈림길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지금의 하남시 초일동에 해당하는 ‘サ-リ-峴(사-리-현)’이 나온다. 사리현를 넘어 지금의 하남시 춘궁동인 춘장동(春長洞)과 향교(鄕校)16)를 지나 더 가면 현재 하남시 항동 인근인 율목리(栗木里), 중덕리(中德里), 왜동(倭洞)이 표시되어 있다. 산길로 표시된 길을 따라 올라가면 남한산성 북문에 해당하는 전승문(全勝門)과 연결된다.17) 전곶교에서 동쪽 방향으로 가서 광진을 지나는 길은 『조선왕조실록』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먼저 『현종개수실록』에 따르면 1669년(현종 10) 이 길에 대해 병조판서 김좌명과 한성부 우윤 유혁연은 “광진의 물가는 도로가 너무 좁고, 화양정 앞길은 진흙길이어서 행행하는데 불편할 듯 하다.”18)라고 아뢰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으로 보아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광진을 통하는 길이 많이 이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조실록』 1790년(정조 14년) 때 기사에서는 “헌릉, 영릉(英陵), 영릉(寧陵)으로 행차할 때 광진에 배다리를 설치한다.”19)라는 기사가 있어 18세기 후반에는 이 노선이 활발히 사용되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지도가 제작된 1885년 당시 광진을 통과하여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이 활발하게 이용되고 있었음이 확인 가능하다. 전곶교에서 남쪽과 동쪽으로 이어진 노선은 남한산성에서 만나 동문을 통해 현재 광주시 곤지암읍에 해당하는 삼리(三里)로 연결된다. 이 지도를 통해 한양에서 봉화로 이어지던 봉화로의 노선 중 일부를 매우 상세하게 이미지화할 수 있다.20) 이 지도는 근대적 측량 기법을 활용하여 그 노선을 현대 지도에 겹쳐 놓아도 거리의 정확도가 우수한 편이다. 또한, 다양한 기호들을 활용하여 전답, 성곽, 민가 등이 표현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16) 이 지도의 향교는 현재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에 소재한 광주향교를 말한다. 광주향교는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호이다. 17) 경기문화재단, 위의 책, 2016, p.103. 18) (생략)···自東郊作路, 則廣津水邊道路太狹, 華陽亭前路, 泥濘亦甚, 似不便矣.···(생략) (『현종개수실록』 10권, 현종 5년 2월 29일 임술 2번째 기사) 19) (생략)···英陵 寧陵幸行, 移設於廣津.···(생략) (『정조실록』 30권, 정조 14년 7월 1일 기묘 1번째 기사) 20) 『대동지지』에는 전곶교에서 남한산성으로 이르는 구간을 전곶교(箭串橋), 신천진(新川津), 송파진(松坡津), 율목정(栗木亭), 광주(廣州)로 5개 지점을 언급하면서 설명하고 있다. [율목정 栗木亭] 지금의 위례 신도시 지역의 옛이름은 창곡동, 창말이라고 했으며 조선시대 때 남한산성에 필요한 군량미와 무기 등을 보관하던 율목창이 있었던 마을이다. 그 마을 중심지에 세워진 정자 이름이 바로 율목정(栗木亭)이다. 병자호란으로 파손된 남한산성을 보수, 증축한 숙종 임금이 1688년 2월 이곳 정자에서 잠시 쉬면서 낮수라를 드시고 가마를 타고 산성에 올랐다는 기록이 있다. 1779년 8월에는 정조 임금이 능행길에 이곳 율목정에서 황금으로 장식된 갑옷과 투구를 쓰고 말을 탔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1867년 9윌에는 고종 임금이 헌릉에 제사를 지낸 후 남한산성에 올랐는데, 이곳 율목정에 이르러 수레를 타고 남문을 거쳐 행궁으로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율목정이라 이름 지어진 것을 보면 옛날에 이곳 주변에 밤나무가 많았던 모양이다. 사실 지금도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다 보면 곳곳에 산밤나무를 자주 볼 수 있다. 주말이 되면 남한산성 자락길을 쉬엄 쉬엄 산책하곤 하는데, 그 산책길 들머리에 율목정이 있다. 역사적인 사실과 의미를 알고나니 율목정 정자가 다르게 보였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23. 밤나무와 율목(栗木) 지명 경기신문 김대성 기자 sd1919@kgnews.co.kr 등록 2021.08.31 18:00:00 ▲ 정조 선황제 신주. 옆의 구멍은 혼이 드나드는 곳이다.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 임금이 타던 가마. (사진=국립고궁밖물관 제공) 율목(栗木)은 참나뭇과 밤나무속에 속하는 식물의 총칭인데, 이와 관련한 지명이 전국에 다수 분포한다. 율목은 참나무를 비롯해 ‘나도밤나무’나 ‘너도밤나무’같은 여러 종류가 있다. 나도밤나무는 이율곡과 관련된 전설이 있고, 율목은 조상의 신을 모시는 위패를 만드는 데에 사용됐다. 조선의 왕릉 대부분은 경기도 내에 자리 잡고 있어서 위패제작용 밤나무를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기도 하였다.   위례(慰禮) 신도시 주변에 율목 관련 지명이 많았고, 용산 효창원 주변도 율목이었고, 과천이 고구려시대에는 율목군(栗木郡)이었다. 위례와 가까운 수서의 율현(栗峴)과 성남 율동(栗洞)도 유래가 같다. 수서의 율현에서 성남 율동까지를 옛 지명 기록에는 율리(栗里)로 표기하거나, 밤나무 그늘이 진 마을이라 해서 음촌(陰村)으로 표기되기도 했다.   성남 주변으로 지금은 서울이 된 태종 헌릉(獻陵)과 순조 인릉(仁陵), 성종 선릉(宣陵)과 중종 정릉(靖陵) 그리고 위례 지역에 있던 군사훈련장인 교장대(敎場臺)와 남한산성이 있어서 임금의 행차가 잦았던 고장이다. 위례는 울타리라는 뜻인 ‘우리’가 한자 표기된 것으로 사람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을 ‘우리’, ‘성(城)’이라 한다. 우리의 규모가 작게 사용되는 것이 집 울, 울타리, 닭우리, 돼지우리 등이다.   ▲ 임금이 타는 가마의 구조. (사진=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위례신도시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창말’, ‘창곡동(倉谷洞)’이었다. 군량미와 장비를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서 생긴 지명이다. 고지도에 보면 잡은 위치에 따라 율목창(栗木倉), 동본창 등의 창고 이름이 보인다. 고종 4년(1867) 9월 임금이 헌릉에 제사를 지내고 남한산성에 올라갔다. 율현(栗峴)을 지나 매착리(梅着里)에 도착하자 말에서 내려 여(轝)를 탔고, 율목창에 이르자 인부가 여를 메었다. 남한산성 남문인 진남문(鎭南門=지화문) 밖에 이르자 여에서 내려 말을 탔고, 행궁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행궁으로 들어갔다. 서울로 돌아갈 때는 반대 순서로 행차하였다.   조선시대 군사훈련장이 위례에서 잠실까지 펼쳐져 있었는데, 활쏘기를 하던 곳을 율목정(栗木亭)이라 했다. 숙종 14년(1688) 2월에 임금이 남한산성에 올라갈 때 광진(廣津) 북쪽 언덕에서 낮에 잠시 쉬고, 이내 배를 타고 나루를 건너 배에 내려서 앞으로 나가 율목정에서 쉬었다가 산성으로 올라갔다. 또 정조임금이 1779년(기해)에 효종 승하 120주년을 맞아 여주의 효종 영릉(寧陵)에 제사 지내러 갈 때도 남한산성에 오르기 전에 율목정에서 황금으로 장식된 갑옷으로 갈아 입고 말을 탔다.   율목참(栗木站)도 있었다. 조선의 교통제도는 역참(驛站) 또는 역원(驛院)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한양성 남문인 숭례문을 출발하여 양재역을 거쳐 남한산성으로 오르기 전에 쉬어가던 곳이 율목참이다.   위례(창곡동)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주둔했었고, 해방 후에도 육군교도소인 희망대와 육군종합행정학교인 문무대, 국군체육부대인 상무대 등의 군사시설이 있었다. 육군교도소는 김재규 등 10.26 사건 관련자들이 수감됐었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80년 7월 12일부터 이듬해 1월 31일까지 204일간 구금되었던 현대사의 현장이었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출처] 경기신문 (https://www.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