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연무관과 봉화로(奉化路) 이야기

이름없는풀뿌리 2022. 11. 29. 14:52
* 봉화로(奉化路) : 한양에서 봉화 태백산사고까지 이르는 조선 6대로의 하나로 산성구간은 (동대문-전곶교-송파진-학암동-남한산성-검북참-경안리)로 이어지는데 남한산성 연무관 아래를 지나면서 장터가 들어섰다고 한다. □ 연무관과 봉화로(奉化路) 이야기 봉화로(奉化路) -사고(史庫)로 통하는 길 여암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1770년에 그의 저작 '도로고'(道路考)에서 처음으로 조선의 간선도로를 6대로(大路)로 파악하였고, 이후 고산자 김정호(金正浩, ?~1864)는 1860년대에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그것을 10대로(大路)로 확대해 규정한 바 있다. 약 100년 사이에 네 개의 대로가 추가된 셈이다. 이 중 첫 번째 대로(大路) 즉, 조선시대 7대로가 곧 '봉화로'(奉化路)이다. 봉화로에 대로의 자격이 부여된 때는 19세기 초반으로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와 '산리고'(山里考) 등의 자료에서 이를 알 수 있다. 봉화로의 출발점이 한양인 것은 다른 대로와 마찬가지다. 하지만 종점이 보통의 고을이 아닌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라는 특정 지점인 것은 이채롭다. 이 사고가 설치된 곳은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의 각화산 산중이다. 조선의 실록은 처음에 춘추관과 충주사고에서 보관했는데, 세종 대에 증설의 필요를 느껴 경북 성주와 전북 전주에 사고를 더 설치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에 전주본을 제외한 다른 실록이 소실되었고, 이에 전주본을 바탕으로 명종까지의 실록을 다시 만든 후 평북 영변의 묘향산에 사고를 설치해 전주본을 옮기고, 강릉 오대산과 봉화 태백산, 무주 적상산에 사고를 더 지어 새로 간행한 실록을 분산·보관하기 시작했다. 전주본은 이후 1628년(인조 6)에는 강화의 마리산으로, 1660년(현종 1)에는 같은 섬 안의 정족산으로 옮겨다니게 된다. 500년을 써 내려온 역사 기록물인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이 자랑할 수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이에 조선왕조실록은 훈민정음 해례본과 더불어 1997년 10월에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으며, 2001년 9월에는 승정원 일기와 프랑스에서 소장하고 있는 직지심체요절(하권)이 추가로 지정됐다. 세계기록유산은 2004년까지 세계적으로 총 90건이 지정돼 있다. 봉화로의 종점이 하필 태백산사고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주·무주·강릉·강화 등이 각기 통영로·제주로·평해로·강화로 본선 또는 지선이 지나고 있으므로 사고는 기본적으로 대로로 연결되는 주요 지점으로 인식되었던 듯하다. 대강의 봉화로 경로를 살펴보면, 한성의 동대문이나 광희문을 나선 봉화로는 살곶이다리로 청계천을 건넌 후 송파진, 광주 경안동과 곤지암·이천·음죽을 경유해 경기도를 벗어난다. 이 후 충주·단양·죽령·풍기·영주 등을 지나 봉화까지 이어진다. 봉화로는 경기도 이천과 충청도 충주의 가흥창 및 서창에서 분기하는 3개의 1차 지선이 있는데, 여주·제천·영춘·청풍·순흥·예안 등이 이들 지선으로 연결된다. 봉화로에 대한 도로관리는 한성에서 음죽까지는 경안도(慶安道)에서, 이후의 구간은 연원도(連原道)에서 담당했다. 오늘날 봉화로 노선은 대체로 서울에서 장호원까지 3번 국도가, 장호원에서 충주까지는 38번 국도가, 충주에서 죽령까지는 36번 국도가, 죽령 이후 봉화까지는 5번 국도 및 36번 국도가 계승하고 있다. '대동지지'에 의거한 경기도내의 봉화로의 노선은 다음과 같다. '경도(京都)~전곶교(箭串橋, 10리)~신천진(新川津, 10리)~ 송파진(松坡津, 5리, 가장 가까운 남쪽의 율현까지 15리, 추령까지 30리, 용인까지 20리, 가장 가까운 남쪽의 나루인 심정까지 20리, 이보현까지 5리, 신현까지 15리, 경안역까지 10리)~검북참(黔北站, 15리)~경안역(慶安驛, 15리)~ 쌍령점(雙嶺店, 10리)~곤지애(昆池厓, 10리)~광현(廣峴, 15리)~ 이천(利川, 20리, 서울에서 130리, 분기점)~ 장등점(30리, 광현으로 진입하지는 않고, 이천까지 직진거리로 45리)~ 음죽(陰竹, 20리, 서울에서 180리, 동북방향의 여주까지 50리)~장해원(長海院, 10리)' '대동지지'의 '정리고' 성내분로조(城內分路條)에 따르면 도성에서 살곶이다리(箭串橋, 서울시 사근동)까지의 길은 흥인문, 동묘, 영도교, 왕십리, 차현을 지난다. 영도교는 청교천 본류에 가로 놓인 다리로 황학동에 있었고, 황학동에서 중앙시장을 지나 왕십리길을 통해 살곶이다리까지 이어졌다. 차현은 수레의 왕래가 빈번해 붙은 이름으로 현재 한양대학교 교내에 편입돼 있다. 살곶이다리는 중랑천에 놓인 다리이고 이를 건너면 뚝섬(살곶이벌), 자양동, 신천진(서울시 신천동)으로 이어진다. 신천진은 잠실도(蠶室島)의 북안에 위치한 나루로, 남안에는 잠실이 있었고, 여기서 다시 한강을 건너면 송파진에 닿았다. 지금은 신천진 자리에 잠실대교가 놓였고, 송파진은 송파대로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정황은 1890년 중반에 측도된 '구한말 한반도 지형도'(남영우 편, 1996, 성지문화사 영인본)와 1910년대에 일제가 제작한 5만분의 1 지형도에 잘 나타나 있다. 송파진을 건넌 이후의 봉화로는 문정동까지 송파대로와 일치하고, 올림픽훼밀리타운 아파트단지가 끝나는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꿔 송파세무서, 서울여학생 생활교육원, 하남시 학암동, 남한산성까지, 남한산성부터는 308번 지방도로를 따라 검북참(광주 중부면 검북리), 오전리, 새오고개(蝦峴), 목현리, 경안리까지 이어진다. 광주는 1626년(인조 4)에 남한산성을 쌓고 하남시 춘궁동 일대에 있던 치소를 성안으로 옮겼으며, 1795년(정조 19)에는 읍격이 유수부로 승격하였다. 읍치가 성 밖 경안리로 나온 것은 1906년으로, 경안리는 오래 전부터 경안역, 파발막, 관청, 장시가 밀집한 광주의 중심지였다. 경안리에서 장호원까지는 3번 국도와 거의 일치한다. 대쌍령과 소쌍령으로 이어지는 쌍령은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그 너머에 쌍령점이 있으므로 오늘날 쌍동리에 해당할 것이다. 이곳에서는 경안천의 지류인 곤지암천이 합수한다. 곤지애(실촌면 곤지암리) 역시 경안동과 마찬가지로 5일장의 역사가 오랜 곳이다. 마을 서쪽에 뾰족바위를 곤지바위로 부른데서 이름이 붙은 곤지암은 봉화로를 기반으로 실촌면은 물론 이 일대의 상업요지로 기능해 왔으며, 최근에는 중부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가 건설되면서 중심성이 더욱 높아졌다. 넋고개로도 불리는 광현(실촌면 신촌리)은 경안천과 복하천의 분수령이 되면서 동시에 광주와 이천의 경계점이 된다. 장등점은 여주군 가남면 태평리 섬배(蟾背, 섬비)마을로 추정된다. 음죽은 청미천 유역에 위치한다. 1914년 이천으로 편입되면서 청미면이 되어 군으로서의 이름을 잃었다. 장해원은 오늘날의 장호원으로, 음죽의 치소가 장호원읍 선읍리에 있었다. 장호원은 전국의 시장 정보가 최초로 수록된 자료인 '동국문헌비고'(1770) 때부터 지금까지 5일장이 개시되는 곳으로서 음죽의 전통적인 상업요지이다. 장호원은 일찍이 1941년에 읍으로 승격된다. 〈김종혁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역사지리학자〉 <<봉화로가 내려다 보이는 연무관(08:24) : 무예훈련, 무예시험을 보았다 함.>> <<조선 10대로의 하나인 봉화로 옆 산성장터, 송파장, 수원장과 더불어 번창>> <<조선시대 6대로(신경준, 『도로고』, 1770,) 개념도>> <<대동지지(1864년) 봉화로 원형 노선>> 남한산성 옛길(봉화로) 전체(한양 ∼ 봉화 총 500리, 196km) (한양) 전곶교 → 신천진 → 송파진 (경기) 율목정 → 남문 → 검북참 → 경안역 → 쌍령점 → 곤지애 → 이천 → 장해원 (충북) 오갑 → 용당 → 충주 → 황강역→ 수산역 → 장위점 → 단양 → 죽령 (경북) 창락역 → 풍기 → 창보역 → 영천→ 내성점→ 봉화 <<자전곶교지광주략도에 나타난 남한산성 옛길>> □ 연무관(演武館)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6호,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00-1 연무관은 문무관 시험을 보는 공개적인 시험 장소였으며 특히 무기 시연은 물론 주조(晝操)·야조(夜操) 등의 군사훈련을 거행했던 장소였다. 2009년에 연무관 해체보수 중 어칸 종도리 하부의 중수기와 외목도리에서 상량문이 수습됐다. 상량문이 기록돼 있는 외목도리는 전에 종도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데, 인조 3년(1625)에 창건해 숙종28년(1702)에 대대적으로 중수해 입주상량한 기록이 돼 있고, 종도리 안에 봉안돼 있던 중수기에는 영조 39년(1763)의 중수기록과 고종 10년(1873)의 중수기록이 돼 있어 대략 60년 간격으로 수리가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잦은 수리가 이뤄져서 그런지 근래 보수 전 연무관의 평면이 독특했다. 정면은 5칸 인데 반해 후면은 6칸으로 후면 중앙에 기둥을 덧달아 사용한 것인데 해체 후 발굴결과 연무관지는 고려시대 문화층부터 근,현대까지 5차례에 걸친 층위가 중복돼 있는 것이 확인됐다. 2009년 보수 시 후면 중앙에 덧달았던 기둥을 없애고 5칸으로 다시 고쳤다. 연무관은 수어장대와 같이 팔각의 주초 위에 원형의 기둥을 사용했고, 공포는 초익공으로 장식했다. 후면의 퇴칸은 마루를 깔지 않고 강회다짐한 흙바닥으로 돼 있는데 건물 내부에서 끝부분 여닫이 판문을 통해 나갈 수 있다. 지붕은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으로 건물내부 가운데 있는 대들보에는 전·후면에 용을 그렸고 측면 대들보에는 봉황을 그려 넣은 것이 특이하다. □ 관련 문화재연무관 상량문(演武館 上樑文) ‘숭정기원후삼계미오월초육일상량’으로 시작되는 연무관 상량문이다. 숭정(崇禎, 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의 연호를 쓴때부터 계미년이 세 번째로 돌아온 해인 영조 39년(1763)에 연무관을 중수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연무관중수(演武館重修)’로 시작되는 상량문이다. 상량문 첫 부분에 ‘숭정기원후사계유(崇禎紀元後四癸酉)’의 연대가 순조 13년(1813)으로 계산되나, 상량문 내용 중 유수 겸 수어사 조석우(曺錫雨)는 1873년에 유수를 역임하였고, 판관 조희석(趙熙奭) 역시 1873년에 판관을 역임하였으므로 상량문의 연대는 고종 10년(1873)으로 추정된다. 연무관 중수에 참여한 유수, 판관 등의 관리와 목수 등 기술자들의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7일 1779년 지수당에 행하시어 백성의 고생되는 바를 아뢰게 하다 임금이 이천(利川)부터 가교(駕轎)를 타고 경안역(慶安驛)에 이르러 주정(晝停)하였다. 남한산성(南漢山城)의 좌익문(左翼門)에 이르러 갑주(甲胄)로 갈아 입었고, 수어사(守禦使)가 처음과 같이 영접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지수당(地水堂)에 나아가 대신(大臣)·수어사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당은 사면이 지수(池水)로 둘려서 제군(諸軍)이 해갈(解渴)할 수 있다. 이 당은 어느 해에 세운 것인가?"하매,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현묘(顯廟)임자년211) 사이에 고(故) 부윤(府尹) 이세화(李世華)가 세운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수라는 이름은 ‘땅속의 물은 병중(兵衆)이다. 노성(老成)한 사람이라야 길하다.’라는 뜻에서 딴 것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객사(客舍)에 나아가서 편액(扁額)을 물으매, 서명응이 대답하기를, "인화관(人和館)입니다. 고 목사(牧使) 유임(柳琳)이 처음 세웠고 관의 이름은 고 목사 이태연(李泰淵)이 지어 건 것입니다."하였다. 연병관(鍊兵館)에 이르니, 수어사 이하가 참현(參現)하였다. 경기 감사·광주 부윤이 본주(本州)의 부로(父老)인 백성 등을 거느리고 명을 받고 나아가니, 승지(承旨) 이병모(李秉模)를 시켜 윤음(綸音)을 읽어 하유(下諭)하게 하고, 또 이병모를 시켜 하유하기를, "나 과인(寡人)은 너희들의 부모가 되어 혜택이 아래까지 미칠 만하지 못하여 너희들이 늘 굶주림과 추위에 괴로운 걱정을 면하지 못하게 하였다. 궁궐이 비록 깊숙하다고는 하나 늘 너희들이 유랑하며 몹시 괴로운 정상을 생각할 때마다 어찌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음식을 먹는 것이 편안하지 않을 뿐이겠는가? 이번에 먼 능(陵)에 동가(動駕)하여 선조(先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정례(情禮)를 조금 폈는데, 연로(輦路)가 지나는 곳에서 너희들이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모여들어 길에 가득차서 모두 기뻐하는 빛이 있으니, 내 마음도 기쁘다. 행행(行幸) 때의 모든 사역(事役)을 비록 다 면제하기는 하였으나, 저치미(儲置米)를 회감(會減)하고 추 대동(秋大洞)을 면세(免稅)한 것으로 말하면 이것이 어찌 너희들이 조금이라도 짐을 더는 혜택이 될 만하겠는가? 산성(山城) 백성의 노고는 다른 곳보다 더욱이 심하거니와 무릇 너희들의 근심되고 고생되는 단서를 모름지기 내 앞에서 모두 아뢰어야 한다. 내가 묘당(廟堂)과 수신(守臣)을 시켜 고칠 방도를 강구하게 하겠다."하였다. [註 211]임자년 : 1672 현종 13년.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7일 1779년 수어사 서명응에게 남한 산성에 대해 물으시다 행궁(行宮)에 나아가 임금이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이르기를, "이곳의 형승(形勝)은 천험(天險)이라 할 수 있다마는, 무비(武備)가 닦이지 않아서 한 번 전란(戰亂)을 당하면 수습하지 못하니, 어찌 지리(地利)가 부족한 것이겠는가? 이 성은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쌓은 것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인묘(仁廟)갑자년212) 에 쌓기 시작하여 병인년213) 에 일을 끝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둘레가 몇 보(步)쯤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성 안쪽은 6천 2백 97 보이고 바깥은 7천 2백 95 보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상신(相臣) 민응수(閔應洙)가 수어사이었을 때에 이 성을 중수(重修)하면서 돌벽돌을 철거하고 비로소 기와를 이었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민응수가 비로소 성역(城役)을 하였으나 곧 갈리고 조관빈(趙觀彬)이 갈음하여 비로소 일을 끝냈으며 천신(賤臣)이 명을 받고 수개(修改)할 때에 기와를 철거하고 벽돌을 덮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사문(四門)의 편액(扁額)은 다 경이 쓴 것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봉(汗峰)에 성을 쌓은 것은 어느 때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숙묘(肅廟)계유년214) 에 수어사 오시복(吳始復)이 쌓기 시작하였는데 을유년215) 에 민진후(閔鎭厚)가 수어사이었을 때에 훼철(毁撤)하였다가 선조(先朝) 기미년216) 에 조현명(趙顯命)이 개축(改築)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217) 에 노인(虜人)이 이 봉우리에 올라 대포(大砲)를 쏘았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포환이 행궁의 전주(殿柱)를 치기까지 하였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 봉우리에 오르면 성 안을 굽어볼 수 있다 하니, 이곳에 성을 쌓아 적인(敵人)이 먼저 점거하는 것을 막는 것은 참으로 그만둘 수 없다. 남장대(南將臺)는 산성의 주봉(主峰)이고 그 요해(要害)가 되는 것이 한봉보다 심하므로 고 판서(判書) 민진후가 성을 쌓을 것을 건백(建白)하였으나 중간에 폐기되었고, 선조 임신년218) 에 유수(留守) 이기진(李箕鎭)이 또 연중(筵中)에서 건백하여 이어서 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이제는 성은 없고 돈대가 있을 뿐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성은 이미 중간에 폐기되고 다만 돈대가 있을 뿐인데 한 돈대에 1백 인을 용납할 수 있으니, 이것을 전력(專力)하여 굳게 지키면 산성과 기각(犄角)의 형세가 될 것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병자년에 묘당(廟堂)에서 의논하여 일부의 군사로 이 길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러지 못하였다, 이어서 적인에게 점거되어 안팎이 단절되었다."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군사로 지켰다면 양남(兩南)에서 성원(聲援)하여 서로 통할 수 있었을 것인데, 마침내 적이 점유하였으므로 성 안과 성 밖의 소식이 오래 막혀 어찌할 수 없는 지경이 된 것을 유식(有識)한 자들이 지금까지도 한탄하고 아깝게 여깁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온조왕(溫祚王)의 옛 성터가 아직도 있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높은 봉우리와 가파른 재 위에 아직도 돌로 쌓은 자취가 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이 지리(地利)가 인화(人和)만 못하다 하였다. 비록 이런 천참(天塹)의 성이 있더라도 인화가 없다면 어떻게 보존하여 지키겠는가? 군사와 식량 두 가지 일은 다 한쪽을 폐기할 수 없으나, 식량이 있고서야 군사를 모아서 성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병자년 때의 일로 말하면 이서(李曙)가 1만여 석을 미리 저축하였으나 겨우 40일의 식량을 대었을 뿐이고 마침내 성지(城池)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또한 식량을 잇지 못한 까닭이다. 지금 전란에 대비하는 것은 군사를 조련(操練)하는 것뿐이 아니라 양곡을 저축하는 방도도 각별히 더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창고에 남겨 둔 군향(軍餉)은 얼마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군향은 조적(糶糴)219) 하는 쌀 2만 5천 석과 각곡(各穀), 3만 석을 합하여 5만 7천 석 영(零)인데 이제는 다 절미(折米)가 되어 4만 4천 석 영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운데에서 1만 5천 석은 민간에 나누어 주고 지금 창고에 남겨 둔 것은 다만 2만 9천 석 영이 있을 뿐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영(本營)에 해마다 들어온 돈은 얼마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저서소(儲胥所)의 본전(本錢)은 1만 6천여 냥인데 선조 신사년220) 사이에 장신(將臣)이 연중(筵中)에서 아룀에 따라 이식(利息)을 면제하고 내청(內廳)·외청(外廳)에 대하(貸下)하였으며, 경영(京營)의 별비전(別備錢)은 2천 7백여 냥이고 그 밖에 각 항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7천여 냥인데 한 해 경비(經費)의 나머지는 수천 냥에 지나지 않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들으니 동문(東門) 밖의 전토(田土)는 예전에 사옹원(司饔院)의 시장(柴場)에 붙였는데 효묘(孝廟) 때 수어사 이시방(李時昉)이 계청하여 면세(免稅)하고 성 안 민호(民戶)에 붙여서 경작하게 하였다 하는데 지금도 그러한가?"하매, 부윤(府尹) 송환억(宋煥億)이 말하기를, "선조 무오년221) 에 부윤 심성희(沈聖希)가 다시 조세를 거두어 연말에 쌀 한 말을 성안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군향을 저축하는 것은 몇 창고인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합하여 여덟 창고이고 이 밖에 또한 숙창(稤倉)·승창(僧倉)·송파창(松坡倉) 세 곳이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른바 숙창·승창이라는 것에도 저축한 곡식이 있으며 그 수는 얼마인가?" 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숙창을 설립한 뜻은 대개 호조(戶曹)·진휼청(賑恤廳)·상평청(常平廳)의 예(例)와 같습니다. 모든 제향(祭享)의 비용과 진휼의 비용과 인부·쇄마(刷馬)의 삯이 다 여기에서 나오는데 잡곡이 모두 4천여 석입니다. 승창은 고(故) 수어사 이세백(李世白)이 공명첩(空名帖)222) 으로, 곡물을 운영하고 해마다 조적하여 모곡(耗穀)223) 을 받았고, 그 뒤에는 창고를 지어 저축하여 또한 군향에 붙였는데 잡곡이 또한 2천여 석이 못되지는 않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열 집이 있는 고을[十室之邑]에도 또한 충신(忠信) 한 사람이 있는데, 이 고을로 말하면 경내(境內)의 호구를 통틀어 셈하면 1만 호의 고을[萬戶之邑]이라 할 수 있거니와 지령(地靈)·인걸(人傑)에는 본디 고금의 차이가 없으니,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는가? 병자란 때로 말하면 서흔남(徐欣男)은 사노(私奴)에 지나지 않는데 노병(虜兵)이 세 겹으로 에워 쌌을 때에 홀몸으로 빠져나가 능히 삼남(三南)의 여러 도(道)에 명을 전하였고, 맹원빈(孟元賓)은 한낱 한산(閑散)일 뿐인데 성조(聖祖)께서 행행(行幸)하셨을 때에 제 말을 바치기를 청하여 무사히 입성(入城)하실 수 있게 하였고, 여조(麗朝)의 김방경(金方慶)·조견(趙狷)이 다 이곳에서 났으니, 광주(廣州) 한 부(府)는 인재의 부고(府庫)라 할 수 있을 만하다. 요즈음에도 향당(鄕黨)에서 이행(異行)·기재(奇才)로 이름난 자가 있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이 본주(本州)의 읍지(邑誌)를 보니, 병자란 이전에 노협(魯協)이라는 자가 이곳에서 한 이인(異人)을 만났는데 능히 병자란을 예견하였다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보면 세상에서 모른 가운데에 어찌 뛰어난 인재가 없겠습니까?"하였다 . 임금이 말하기를, "그때 승평 부원군(昇平府院君) 김유(金瑬)의 군관(軍官) 박진귀(朴震龜)가 일찍이 한 나무 거북을 김유에게 바치며 이것을 쓰면 일면(一面)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김유가 오활하고 괴이하다고 생각하여 물리쳤다. 대개 박진귀는 그것으로 스스로 비유한 것인데, 당시 사람이 모르고서 병자년에 수용하지 못하였으니,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신도 그 말을 들었습니다. 대개 또한 이인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남한(南漢)은 본디 이름이 일장산(日長山)이었으나 국조(國朝) 중엽 이후에 비로소 청량산(淸凉山)이라 칭하였는데, 사람들이 청나라 군사가 와서 침범할 조짐이라 하였다. 이런 말이 과연 있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것은 고로(故老)가 서로 전하는 말입니다."하였다. [註 212]갑자년 : 1624 인조 2년. [註 213]병인년 : 1626 인조 4년. [註 214]계유년 : 1693 숙종 19년. [註 215]을유년 : 1705 숙종 31년. [註 216]기미년 : 1739 영조 15년. [註 217]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218]임신년 : 1752 영조 28년. [註 219]조적(糶糴) : 환곡(還穀)을 방출하고 수납하는 것, 즉, 봄에 백성들에게 나라 곡식을 꾸어 주는 것은 조(糶)라 하고, 가을에 백성에게 봄에 꾸어 주었던 곡식 에 10분의 1의 이자를 덧붙여 거두어 들이는 것을 적(糴)이라 함. [註 220]신사년 : 1761 영조 37년. [註 221]무오년 : 1738 영조 14년. [註 222]공명첩(空名帖) : 성명을 적지 않은 임명장(任命狀). 관아(官衙)에서 부유층(富裕層)에게 돈이나 곡식 따위를 받고 관직(官職)을 내리되, 관직 이름은 써서 주나 성명은 기입하지 않음. 이에 의하여 임명된 사람은 실무(實務)는 보지 않고 명색만을 행세하게 됨. 공명 고신첩(空明告身帖). [註 223]모곡(耗穀) : 각 고을 창고(倉庫)에 저장한 양곡(糧穀)을 봄에 백성에게 대여했다가 추수(秋收) 후 받아들일 때 말[斗]이 축나거나 창고에서의 손실을 보충하기 위하여 10분의 1을 첨가하여 받는 곡식.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8일 1779년 남한 산성 승군의 폐단 시정을 명하다 임금이 남한(南漢)에 있었다. 연병관(鍊兵館)에 나아가 문사(文士)·무사(武士)를 시험하여 문과(文科)에 민태혁(閔台爀) 등 3인을 뽑고 무과(武科)에 이상연(李尙淵) 등 15인을 뽑았다. 진사(進士) 윤영의(尹永儀)가 무적자(無籍者)로서 부거(赴擧)하였는데, 창방(唱榜) 뒤에 옥당(玉堂)에게 빼어 버리기를 청하고 대간(臺諫)이 법에 따라 중벌하기를 청하니, 모두 윤허하였다. 이어서 문과·무과의 방방(放榜)을 행하였는데, 민태혁은 과거(科擧) 전에 자궁(資窮)224) 하였으므로 통정(通政)으로 승자(陞資)하였다. 임금이 수어사 서명응에게 말하기를, "남한 한 성은 국가에서 급할 때에 믿는 곳이다. 편안히 다스리는 방책은 오로지 해영(該營)에 달려 있으나, 승군(僧軍)의 단속으로 말하면 또한 우리 조종(祖宗) 때에 창설한 법인데 편안히 다스리는 방책 가운데의 한 가지이다. 승군의 좌작 진퇴(坐作進退)하는 방법도 시열(試閱)하지 않을 수 없으니, 승장(僧將)을 시켜 관하(管下)의 군오(軍伍)를 거느리고 관(館) 앞에 벌여 서게 하라."하였다. 승군들이 방진(方陣)·원진(圓陣)을 법식대로 벌여 이루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련(操鍊)하지 않은 군사가 오히려 절제(節制)를 아니, 가상하다."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승장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네가 능히 행진(行進)하는 법을 아니, 참으로 가상하다. 병법(兵法)의 서적들도 능히 통달하여 아는가?"하매, 승장이 아뢰기를, "병서(兵書)는 배운 것이 없으나, 방진·원진을 벌여 이루는 법은 승군의 고규(古規)가 있으므로 방법을 대강 알 수 있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승군의 설치는 대개 인묘(仁廟)갑자년225) 성을 쌓을 때부터인데. 그때 이승(異僧) 각성(覺性)이라는 자를 얻어서 명하여 팔도 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아 성역(城役)을 오로지 맡겼다가 이어서 승군을 불러 모아 단속하여 군오를 만들어 각 사찰에 나누어 살게 하였으나, 근년 이래로 이미 조련에 부지런하지 않거니와 또 노역(勞役)을 돌보지 않아서 점점 이산(離散)하는 자가 많다 하는데, 그러한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들은 달리 의지할 자재(資財)가 없는데 공사(公私)의 역(役)에만 응할 뿐이니, 이것을 괴롭게 여겨 점점 다 도산(逃散)하여 지탱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결(團結)하여 군사를 만드는 것이 급할 때의 도움이 될 뿐이 아니라 다 같은 내 백성이니, 이미 그 유리(流離)하여 보전하기 어려운 폐단을 알고도 구제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경은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을 생각하라."하였다. 매화(埋火)226) 를 설치하였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이것은 원숭환(袁崇煥)227) 이 영원(寧遠)에서 시험한 홍이포(紅夷砲)228) 의 유제(遺制)이다. 병자년229) 에 이 방법을 배우지 않아서 쓰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그때 이 방법을 썼다면, 적병이 어찌 감히 성 아래에 접근할 수 있었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예전에는 산성의 별파진(別破陣)이 다 이 기법(技法)을 익혔는데 요즈음은 두 사람이 익숙할 뿐이라 하니, 이것도 권장하지 못한 탓이다."하였다. [註 224]자궁(資窮) : 품계(品階)가 다 되어 다시 더 이상 올라갈 자급(資扱)이 없이 되는 것. 곧 당하관(堂下官)의 최고위(最高位)에 있는 것을 이름. 계궁(階窮). [註 225]갑자년 : 1624 인조 2년. [註 226]매화(埋火) : 폭발물을 배설하는 일. 또는 그 폭발물. 폭발하면서 불덩이가 유성(流星)보다 빠르게 달려나가고 소리가 진동하여 연기가 하늘을 뒤덮으므로, 지포(紙炮)·화포(花炮)와 함께 볼꽃놀이에 이용됨. [註 227]원숭환(袁崇煥) : 명나라 의종(毅宗) 때의 병부 상서. [註 228]홍이포(紅夷砲) : 명나라 신종(神宗)이후 화란에서 전래한 대표. [註 229]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9일 1779년 남한산성내 백성의 가장 큰 폐단인 보휼고의 빚을 탕척하다 임금이 남한(南漢)에 있었다. 서장대(西將臺)에 나아가 성조(城操)를 행하였는데, 시임(時任)·원임(原任)인 대신(大臣)과 수어사(守禦使)에게 명하여 입시(入侍)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선대왕(先大王) 경술년230) 행행(行幸) 때에 이 대(臺)에 들르셨고 오늘 내가 또 여기에 왔는데 산천이 옛날과 다름없어 사물에 접하면 감회를 일으키니, 내 마음이 더욱 절실하게 슬프고 사모하게 된다. 병자년231) 에 적병이 밤을 타서 널빤지를 지고 성에 오르는 것을 아군이 발각하고 끓인 물을 부으니 모두 문드러져 물러갔다 하는데, 이곳이 바로 그곳인가?"하매, 영의정(領議政) 김상철(金尙喆)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그때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꿈에 온조왕(溫祚王)이 와서 적병이 성에 오른다고 알리는 것을 보셨습니다. 성조(聖祖)께서 놀라 깨어 곧 명하여 정탐하게 하셨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아서 장사(將士)를 시켜 격퇴하게 하셨는데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으므로, 환도(還都)한 날에 특별히 명하여 온조묘(溫祚廟)를 세워 봄·가을로 제사하게 하셨으니, 일이 매우 영이(靈異)합니다. 전하께서 이곳에 와서 옛날을 우러러 생각하시니, 성심(聖心)이 느껴 사모하는 것이 다시 어떠하겠습니까? 다만 생각하건대, 임금의 효도는 여느 사람들과 다르거니와, 이것은 무왕(武王)이 잘 계술(繼述)하여 천하의 달효(達孝)가 된 까닭이니, 반드시 성조의 성덕(盛德)·지선(至善)을 오늘날에 본받아 계술하는 도리를 다할 것을 생각하소서."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리 숙조(肅祖)·영고(英考)께서 효모(孝廟)의 지사(志事)를 뒤따르고 중화(中華)의 멸망을 개탄하여 모든 계술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지 않으신 것이 없으니, 이것은 후사(後嗣)가 본받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서 어찌 감히 만분의 일이라도 성조의 성덕을 닮기를 바랄 수 있으랴마는, 구구하게 스스로 힘쓰는 마음만은 늘 선지(先志)를 추술(追述)하고 영덕(令德)을 실추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그 계술을 잘하는 방책은 참된 마음으로 참된 정사(政事)를 행하기에 달려 있을 뿐이다. 그러고서야 내 오늘의 마음이 겉치레로 돌아가는 것을 면할 수 있을 것이거니와, 경들도 내 이 마음을 몸받아 협찬(協贊)하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하였다. 성조(城操)의 예(禮)가 끝나자 여(輿)를 타고 서장대를 나가 서성(西城)에 이르러 주필(駐蹕)하여 성 안팎을 둘러보고 임금이 말하기를, "천주봉(天柱峰) 아래 숲 사이에 은은히 나타나는 누각은 천주사(天柱寺)인가?"하매, 승지(承旨) 서유방(徐有防)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성 밖 산골짜기를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곳은 조금 낮기는 하나 사면의 언덕 기슭이 험준하니, 이 성의 요해(要害)라 할 수 있다." 하였다. 남성(南城)에 이르러 이현(梨峴)을 가리키며 하교하기를, "병자년에 김신국(金藎國)·정온(鄭蘊) 등 여러 사람이 4백 명의 군사로 먼저 이곳에 웅거하여 삼남(三南)의 성식(聲息)을 통하기를 청하였으나 체부(體府)에서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마침내 적에게 빼앗겨 안팎이 막히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이현 왼쪽 조금 남쪽으로 산성 가까운 곳 위에 돈대(墩臺)가 있는 것은 이것이 바로 남격대(南格臺)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남격대인데, 이 대에 오르면 성안을 굽어볼 수 있고 동쪽으로 무갑산(武甲山)에 이르면 쌍령(雙嶺) 이내의 산골짜기가 멀리 돌아간 곳을 다 앉아서 볼 수 있다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고(故) 판서(判書) 이기진(李箕鎭)이 남격대를 수축(修築)하고 이현에 나무를 길렀다 하는데, 그러한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남문루(南門樓)에 이르러 주필하여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이곳을 지나는 여느 사람도 모두 분완(憤惋)하고 강개하는데, 더구나 내 마음이겠는가? 이제 이 누각에 올라 남으로 오는 한길을 굽어보며 병자년을 상상하니 똑똑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때 김유(金瑬) 등이 강도(江都)로 이필(移蹕)하기를 청하여 성조께서 밤에 이 문을 나가다가 얼음이 미끄럽고 길이 험하여 말을 버리고 걷기까지 하여 옥체(玉體)가 편찮으시므로 회가(回駕)하여 성으로, 들어오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이제 보니 이곳은 읍(邑)보다 낫지 못하다. 예전부터 파천(播遷)하는 괴로움이 어느 세대엔들 없으랴마는, 어찌 병자년처럼 창황하여 어쩔 줄 모른 때가 있었겠는가? 이제 비록 태평한 세월이 오래 되어 나라 안이 안녕할지라도, 편안할 때에 위태한 때를 잊지 않는 도리로서는 군신 상하(君臣上下)가 척연(愓然)히 흥기(興起)하고 감분(感奮)하여 서로 경계하고 힘써야 할 바이다. 그때 제장(諸將)이 각각 사문(四門)을 지켰는데, 남문은 구굉(具宏)이 지키면서 혹 출병(出兵)하여 접전(接戰)하기도 하여 참획(斬獲)이 많이 있었다."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이제까지도 성 아래 골짜기 사이에서 혹 철환(鐵丸)·전촉(箭鏃)을 얻는다 합니다."하였다. 북성(北城)에 이르러 연주봉(連珠峰) 위에 주필하여 하교하기를, "이 성 밖은 산비탈이 높고 가파르며 산골짜기가 멀리 돈 것이 남성 밖 보다 더욱 심하다. 이것이 호병(胡兵)이 매복하던 곳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유(金瑬)가 이 성에서 독전(督戰)할 때에 적에게 속아서 경솔히 먼저 출병(出兵)하였다가 전군이 패망하였다."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때 어영군(御營軍) 3백 인이 일제히 성에서 내려가 앞다투어 적에게 나아갈 즈음에 좌우의 복병이 일제히 일어나서 그들에게 섬멸되었고 또 주장(主將)이 화약(火藥)을 아껴 쓰므로 화약을 청하는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옛사람의 글을 보면 무릇 옛 싸움터를 지나는 자는 문득 옛일을 슬퍼하는 뜻을 금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더구나 내가 이곳에 친히 와 보니 마치 충혼(忠魂)·의백(毅魄)이 아직도 산골짜기 사이에 머물러 있는 듯하여 마음이 매우 슬프다. 내가 여기에서 또 느끼는 것이 있다. 싸움터를 한번 보고도 오히려 슬프고 상심되니, 궁벽한 마을 깊은 시골의 오두막에서 잔인할 정도로 몹시 고생하는 정상이 어찌 이곳에 와서 옛일을 생각하는 것만할 뿐이겠는가? 병자년에 청병(淸兵)이 다 이 곳에 둔쳤는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호병이 성밖 사면에 차서 조각만한 땅도 빈 곳이 없게 되었고 북문(北門) 밖으로 말하면 적병이 가장 많이 모여서 가파른 산기슭과 깊은 구덩이도 영루(營壘)의 옛터가 아닌 곳이 없다 합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곳의 지명(地名)은 무엇이라 하는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성문 밖 한길의 왼편은 금암동(金巖洞)이고 오른편은 마근동(馬跟洞)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본주(本州)의 고읍(故邑) 터는 어느 곳에 있는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산 북쪽의 조금 넓은 곳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느 곳이 검단산(黔丹山)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곧바로 북쪽으로 바라보이는 데에 있는 길게 굽고 깎아질러 선 산이 검단산입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원주 영장(原州營將) 권정길(權正吉)이 근왕병(勤王兵)을 거느리고 여기에 이르렀으나 적에게 막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봉화를 올려 서로 응하니, 성안 사람들이 바라보고 원병(援兵)이 있음을 알고 모두 용동(聳動)하여 기뻐하였다 한다. 성 동쪽에 험준하게 높이 나온 것은 한봉(汗峰)인가?"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국청사(國淸寺)라는 이름은 중 각성(覺性)이 이름지어서 먼저 알린 것이라 하는데, 참말인가?" 하매, 서유방이 말하기를, "갑자년232) 성을 쌓을 때에 각성이 두 절을 창건하여 국청(國淸)·한흥(漢興)이라 이름지었으나 당시 사람들이 그 뜻을 모르다가 병자년 이후에 비로소 한(漢)과 한(汗)이 같은 음이고 금(金)나라가 이 해에 국호를 청(淸)이라 고친 것을 알았는데, 인조 대왕(仁祖大王)께서 기이하게 여겨 각성에게 매우 후하게 물건을 내리셨다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명이 서로 부합된 것을 어찌 반드시 앞일을 예언한 말로 죄다 돌려야 하랴마는, 후세 사람으로서 보면 일이 우연하지 않을 것이다."하였다. 북문루(北門樓)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리고 하교하기를, "이 성의 형편을 이제야 비로소 두루 보았다. 성이 뭇 봉우리 꼭대기에 있고 좌우의 산골짜기가 언틀먼틀 가파르니 천험(天險)인 땅이라 하겠다. 참으로 급할 때에 믿을 만하다마는, 당초에 한번 적과 결전(決戰)하지 못하고 마침내 성이 떨어지는 치욕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대개 지리(地利)를 믿을 만하지 못한 것이 이와 같다. 그러나 《역경(易經)》에 ‘왕공(王公)은 험조(險阻)를 베풀어 나라를 지킨다.’ 하였거니와, 지리와 인화(人和)가 다 그 마땅한 것을 얻었다면 어찌 청병을 걱정하였겠는가?"하였다. 침과정(枕戈亭)에 이르러 수어사(守禦使) 서명응(徐命膺)에게 말하기를, "완풍 부원군(完豊府院君) 이서(李曙)가 성을 쌓을 때에 덤불이 우거진 가운데에서 이 정자를 찾아냈다 하는데 그러한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일이 본주의 읍지(邑誌)에 실려 있는데, 여기는 온조왕의 옛성이므로 사람들이 온조왕이 세운 것으로 여깁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명(明)나라 부총관(副摠管) 정용(程龍)이 벽에 난초 두어 떨기를 그리고 또 용을 그렸는데 하늘에서 비가 내리려 하면 구름과 바람이 늘 그 사이에서 나오고 혹 비를 빌면 응험이 있다 한다. 지금도 옛 자취를 볼 수 있는 것이 있는가?"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정두경(鄭斗卿)의 화란가(畵蘭歌)를 보면 정사(程使)가 벽에 그렸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세월이 오래 되어 벽이 무너져서 필적(筆跡)은 징험할 것이 없습니다."하였다. 연병관(鍊兵館)에 환어(還御)하여 대신(大臣)에게 이르기를, "이번 동가(動駕)는 참으로 열성(列聖) 때에 행하신 전례를 따른 것이나, 길이 1백여 리에 가깝고 날짜가 일여드레가 되어 백관(百官)·군병(軍兵)이 달려온 노고가 참으로 가엾고 염려된다. 세 고을의 백성으로 말하면 그 민망하게 생각하는 것이 더욱이 심상한 것이 아니고 또 바라던 끝에 실혜(實惠)가 없다면 어떻게 백성의 뜻을 위로하고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하겠는가? 열성 때의 행행(行幸)에는 다 특별한 은혜가 있었으므로 나도 덕의(德意)를 우러러 따라서 올 가을의 대동(大同)을 모두 견감(蠲減)하라고 명하여 조금이라도 구제하는 방도로 삼았으니, 산성(山城)의 백성에게는 더욱이 특별하게 은혜를 베푸는 정사(政事)가 없어서는 안 된다. 경들은 이미 연석(筵席)에 입대(入對)하였으니, 무릇 폐단을 바로 잡을 방도를 함께 강구하여 품정(稟定)하라. 내일은 회란(回鑾)할 것이므로 내 마음이 연연(戀戀)하여 잊을 수 없다."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산성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것은 보휼고(保恤庫)의 빚돈만한 것이 없습니다. 당초 빚을 준 것은 비록 이식을 받아 보태어 쓸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이제는 시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본전은 이미 다하였는데 이식은 오히려 남아 있어서 이웃에서 거두고 겨레붙이에게서 거두기까지 하므로 온 경내(境內)가 소요합니다. 장교(將校)·서리(胥吏)로부터 아래로 군졸·평민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이 폐단을 면할 자가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모두 탕척하여 몹시 괴로움을 당하는 것을 늦추어 주어야 하겠다."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서명선(徐命善)이 말하기를, "백성을 돌보시는 성의(聖意)는 누구인들 흠양(欽仰)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이를 전수 탕척한다면 경용(經用)이 줄어질 것이니, 민망스럽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숙묘(肅廟)께서 일찍이 하교하시기를, ‘백성에게 이롭다면 살갗인들 어찌 아까우랴?’ 하셨고, 선대왕(先大王)께서 번번이 이 하교를 사륜(絲綸) 사이에 일컬으셨다. 나 소자(小子)가 옆에서 듣고 지금까지도 배송(拜誦)하고 내가 사복(嗣服)하고부터는 이성(二聖)의 덕의를 우러러 몸받거니와, 무릇 백성을 편하게 하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어찌 피부가 아깝지 않을 뿐이겠는가? 국용(國用)이 줄어지는 것은 돌볼 것도 못된다."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거가(車駕)가 본부(本府)에 와서 먼저 민폐를 물었는데, 이른바 보휼고의 취리전(取利錢)을 가장 깊은 폐단이라 하니, 소생시키고 개혁하는 정사를 베풀어 부담을 벗는 방도가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전후 성 안 백성의 빚돈을 탕척하고 문권(文券)을 불사르라."하고, 이어서 서명응에게 이르기를, "이것을 탕척하고 나면 지방(支放)에 드는 것을 다른 데에서 옮겨 채워 주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하매, 서명응이 말하기를, "보휼고의 빚돈 4천 냥을 탕척하라고 특별히 하교하신 것은 참으로 성안 백성에게 죽은 자를 살리고 뼈에 살을 붙이는 듯한 은혜입니다마는, 유영(留營)의 지방 4백 냥은 구처(區處)할 방도가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신이 청하여 얻은 광주(廣州)의 결전(結錢) 1천 4백 냥을 보휼고에 획송(劃送)하여 지방 등의 수용(需用)에 충당하고 혹 쓰고 남은 것이 있으면 해고(該庫)에 저축하여 두어 뜻밖의 비용에 대비하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일전에 연중(筵中)에서 행행(行幸)과 조련(操鍊) 때 신의 영문(營門)에서 책응(責應)하는 것이 많은 것을 염려하시어 관서(關西)의 좁쌀 2천 석을 획급(劃給)하셨습니다마는, 지난해 해서(海西)에서 관향(管餉)에 보탠 좁쌀도 값이 싸서 팔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과 도신(道臣)이 왕복하여 상의해서 그대로 황주(黃州)·봉산(鳳山) 두 고을에 두고 수어청(守禦廳)의 곡식으로 조적(糶糴)하게 하였거니와, 이번에 책응한 전곡(錢穀)은 모두 신의 청(廳)의 관향 전곡(管餉錢穀)에서 가져다 썼으므로 달리 빌린 일이 없는데, 또 저것을 팔아서 이것을 갚는다면 옮겨다가 바꿀 즈음에 절로 폐단이 많을 것이니, 이번에 비용으로 든 것은 곧바로 사실에 의거하여 관향 전곡에서 회감(會減)하되, 성조(城操)를 15년 동안 행하지 않은 것은 비용으로 드는 것을 장만하기 어렵기 때문이였으니, 이번 관서의 좁쌀 2천석도 한결 같이 해서 좁쌀의 전례에 따라 그대로 고을에 두고 조적하여 3천 석의 모곡(耗穀) 3백 석을 해마다 돈으로 바꾸어 유영에 저축하여 성조한 뒤에 시사(試射)·시방(試放)하고 호궤(犒饋)하고 상주는 비용으로 삼게 하소서."하니, 그대로 따랐다. 서명응이 말하기를, "산성에는 예전에 부정전(釜鼎錢)을 받아들인 2백 80냥이 있어서 한 해 걸러 숯을 사고 소금을 사서 혹 묻거나 구웠거나, 다 내영(內營)·외영(外營)의 장교·서리들이 경영하므로 이른바 탄염(炭鹽)이라는 것이 이름만 있고 실속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유영 별장(留營別將)에게 맡겨 숯은 전대로 묻어 두고 소금은 강화(江華)·황주(黃州)의 예(例)에 따라 염산(鹽山)을 만들면 실효(實效)가 있을 것입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부윤(府尹) 송환억(宋煥億)에게 명하여 부로(父老)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오게 하고 승지(承旨)에게 명하여 위유(慰諭)하게 하였다. [註 230]경술년 : 1730 영조 6년. [註 231]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232]갑자년 : 1624 인조 2년. ○ 정조실록 8권, 정조 3년 8월 10일 1779년 인명원이 명당자리가 아님을 지적하다 임금이 연병관(鍊兵館)에 나아가 장사(將士)를 호궤(犒饋)하였다. 이날 회란(回鑾)할 때에 인명원(仁明園)에 들렀는데, 우의정(右議政) 서명선(徐命善) 등에게 말하기를, "감여가(堪輿家)235) 의 말을 내가 비록 알지는 못하나, 산을 보는 법은 반드시 언덕 기슭이 명당(明堂)을 둘러 안아 깊숙한 곳을 취하는데, 이 원(園)의 산세(山勢)는 하나도 명당을 둘러 안은 것이 없고 한길에 가까워서 성국(成局)하였다 할 수 없고 또 한길이 혈(穴) 앞에 너무 가깝기 때문에 이 길을 막으려 한다고 한다. 이 길은 아조(我朝)의 개국(開國) 이래 4백 년 동안 두루 다닌 길이고, 더구나 예전부터 능침(陵寢)에 왕래하는 연로(輦路)이니, 하루아침에 막으려는 것은 아주 놀랍고 두려운 일이다."하매, 서명선이 황공하여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돈화문(敦化門)을 거쳐 환궁(還宮)하였다. [註 235]감여가(堪輿家) : 풍수지리를 공부한 사람. ○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9월 11일 1867년 조선 개국(開國) 476년 서장대와 남장대를 돌아보다 서장대(西將臺)와 남장대(南將臺)를 두루 보았다. 이어 연무관(演武館)에 나아가 야조(夜操)를 보고 돌아와 행궁(行宮)에서 경숙(經宿)하였다.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 6) 9월11일 (신유) 맑음 남장대에 친림한 뒤 연무관으로 가서 야조를 거행할 것이라는 하교 사알을 통해 구전으로 하교하기를, “남장대(南將臺)에 친림한 다음 그대로 연무관(演武館)으로 가서 야조(夜操)를 거행할 것이니, 해방은 그리 알라.”했다. ○고종 4년 정묘(1867, 동치 6) 9월11일 (신유) 맑음 대가가 서장대와 남장대에 나아갔다가 연무관에 임해 야조를 거행할 때 겸도승지 김병지 등이 입시했다. □ 일성록(日省錄) ○ 정조3년 기해(1779,건륭 44) 7월 8일(경인) 남한산성의 성조(城操)를 한 방면에서 거행하라고 명했다. 좌의정 서명선이 아뢰기를 “신이 그저께 연석에서 삼가 연병관(鍊兵館) 앞에서 군병을 시열(試閱)하라는 하교를 받들었으므로 물러나 그곳의 지형과 규모를 물어보았더니, 좌작진퇴(坐作進退)를 논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군대가 좌작진퇴를 하지 못한다면 군용(軍容)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남한산성의 성조를 빠뜨리고 행하지 않은 지가 20년 가까이 된다고 하니, 이번에 만일 한 방면에서 조련을 행한다면 광주(廣州) 위아래 지역에 있는 아병(牙兵) 2초(哨), 남한산성 안의 승군(僧軍) 1초, 과거에 응시한 무사 가운데 수첩군관(守堞軍官) 200명, 그 나머지 남한산성 안의 표하군(標下軍)과 잡색군(雜色軍)을 통틀어 계산해 보면 족히 1000명은 됩니다. 길을 닦는 등의 잡역(雜役)을 제외하고 서남쪽 한 방면에 배열해 성조를 거행하되, 성상께서 서장대(西將臺)에 나아가 그 절주(節奏)를 내려다보신다면 좋을 듯합니다.”해, 그대로 따랐다. □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편 경영진식(京營陣式) 수어청(守禦廳) 남한수성(南漢守城) 전영의 전·좌·중·우·후사 각 5초는 남문에서 동문까지 벌려 서며, 좌영의 전·좌·우·후사 각 4초는 남문에서 서문까지 벌려 서며, 중영의 전·좌·중·우·후사 각 5초는 서문에서 북문으로 향해 장경암문(長慶暗門)까지 벌려 서며, 우영의 전·좌·우·후사 각 4초는 장겸암문에서 동문까지 벌려서며, 후영의 전·좌·중·우·후사 각 5초는 봉암(蜂巖)에서 한봉(汗峰)까지 벌려 서며, 친아병인 중사 5초는 연병관(練兵.) 앞에 진을 치고, 좌사의 5초는 동돈(東墩)에 벌려 서며, 우사의 5초는 서돈(西墩)에 벌려 서며, 좌영 마병의 좌초 및 훈련도감과 어영청의 전초는 남문 통로의 유병(遊兵)이 되며, 마병의 중초 및 훈영과 어영의 좌초는 서문 통로의 유병이 되며, 마병의 우초 및 훈영·어영의 중초는 북문 통로의 유병이 되며, 우영 마병의 좌·중초 및 훈영·어영의 우초는 동문 통로의 유병이 되며, 마병의 우초 및 훈영·어영의 후초는 봉암 통로의 유병이 되며, 난후마병의 1초는 서장대(西將臺)의 뒤에 진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