廣州府地圖 『지승地乘』 조선 19세기 전반 채색본 27.0*19.0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서 태 원* 2011. 3. 25.
I. 머리말
II. 壬辰倭亂중 紀效新書法도입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III. 胡亂및 廣州留守府制의 확립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1. 胡亂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2. 廣州留守府制의 확립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IV. 맺음말
I. 머 리 말
조선후기 군사제도는 壬辰倭亂과 丙子胡亂등을 겪으면서 많은 변동과 모순을 보여주었다.1
壬辰倭亂에서는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 紀效新書法을 도입하여
훈련도감과 속오군을 창설하면서 조총의 사용은 물론이고
‘군대의 편제․지휘체계․陣法’ 등이 변화하였고, 仁祖代에는 2차례의 胡亂과 관련하여
기병의 강화 및 총융청․수어청․어영청 등이 설치되었다.
이어 孝宗代에는 北伐을 슬로건으로 군비확충이 진행되었고,
肅宗代에는 금위영이 창설되어 조선후기 五軍營體制가 성립되었다. 아울러 肅宗代이후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상업이 번성한 도성의 방어를 강화하자는 논의 및 정책이 추진되었고,
평화시대인 18~19세기 지방군의 치안유지 기능 등도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군대 창설로 인한 軍額의 증가와 關防시설의 정비 등은
국가의 재정부담 및 軍多民少2의 폐단을 심화시켰으며.
자연재해를 이유로 18~19세기에는 군사훈련이 자주 정지됨으로써
국방력이 약화되었고 兵權을 둘러싼 당파간의 대립 등도 나타났다.
이에 정부는 한편으로는 군사력을 강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재정지출이나 군역 담당자의 부담을 경감시키려는 조치들을 추진하였는데,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도 그러한 측면과 연관되어 추진되었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후 正祖代廣州留守府制가 정착되기까지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을 살펴보는 것은 군제의 변동은 물론이고
조선후기 군제의 모순을 정부가 어떻게 인식하고 시정하려 하였으며
4都留守府의 기능을 파악하는 데에 중요한 작업으로 여겨진다.
*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
1 조선후기 군사제도에 관한 단행본 및 연구사 정리 등으로는 다음의 글이 참고가 된다.
車文燮,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大出版部, 1973;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檀國大學敎出版部, 1996;
李泰鎭외,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後期篇-, 陸軍本部, 1977;
李泰鎭,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變遷, 한국학연구원, 1985;
崔孝軾, 朝鮮後期軍制史硏究, 신서원, 1995;
吳宗祿, 「군사제도」, 한국역사입문(2), 풀빛, 1995;
이근호․조준호․장필기․심승구, 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1998;
徐台源, 朝鮮後期地方軍制硏究- 營將制를 중심으로 -, 혜안, 1999;
김우철, 「조선후기 군사사연구의 현황과과제」,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 비평사, 2000;
송양섭,「조선후기 군역제 연구현황과 과제」, 조선후기사 연구의 현황과 과제, 창작과 비평사, 2000;
김우철, 朝鮮後期地方軍制史, 경인문화사, 2001;
盧永九, 「朝鮮後期兵書와 戰法의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2;
정해은, 조선후기 국토방위전략,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金鍾洙, 朝鮮後期中央軍制硏究訓鍊都監의 設立과 社會變動, 혜안, 2003;
이민웅, 임진왜란 해전사, 청어람미디어, 2004;
백기인, 朝鮮後期國防論硏究, 혜안, 2004.
2 柳馨遠, 磻溪隨錄 卷21, 兵制, 諸色軍士條;
백승철, 「17․18세기군역제의 변동과운영」, 이재룡박사환력기념 한국사학논총, 한울, 1991, 515~524쪽.
지금까지 조선후기 廣州에 대한 군사적 측면에서의 연구는
유수부 경영이나 수어청 등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먼저 이존희는
조선시대 유수부의 군사․행정 조직과 경제기반 등 유수부를 전체적으로 다루는 가운데,
仁祖代부터 광주의 경우 수령의 행정적․군사적 명칭이 남한산성과 관련하여
몇 차례 변화하였다가 正祖代廣州府留守官이 관제로 정착된 것은 조선후기 군제정비 및
唐․宋에서 보여준 陪都로서의 유수관 설치의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3
다음으로 이태진은 남한산성의 수축은 단순한 국왕의 피신처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전략적 측면이 있고 병자호란 후 反淸意識으로 인한 남한산성 재건과
孝宗代북벌계획에 따른 남한산성의 재정비 등을 언급하면서,
‘1683년 (숙종 9) 경비절감을 위해 수어사와 京廳을 혁파하고
광주유수로 하여금 남한산성을 총괄하게 하였던 것이,
1690년 守禦使制로 復設된 것은 남인이 남한산성에 자파의 세력을 침투시키려는 의도였다’며
당쟁과 관련된 광주유수부제의 변천을 파악하였다.4
이어 차문섭은 수어청에 대해 ‘屬營과 編制․ 屯田開發과 財政․ 各兵種과 操鍊’ 등을
다루는 가운데, 廣州府안에서 군사책임자인 수어사와 행정책임자인 부윤 사이에서 발생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때로는 출진하여 광주유수가 수어사를 겸하게 하는 일원체제로,
때로는 京廳을 두어 별도의 수어사가 산성을 수어하게 하는
이원체제를 취하는 등 여러 차례 변혁이 이루어졌다고 보았다.5
이러한 연구를 통해 광주유수부의 군사지휘체계 변천과 관련하여
조선후기 유수부의 군사적 기능이나 서인과 남인의 당쟁 및 남한산성의 군사지휘권을 둘러싼
광주부윤과 수어사의 대립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위의 연구는
광주유수부가 정착되기까지 조선후기 광주의 군사지휘체계를 전체적으로 다룬 연구가 아니라,
유수부나 수어청과 관련하여 부분적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조선후기 광주의 군사지휘체계 변천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는 미흡하다고 여겨진다.
이에 본고에서는 첫째 壬辰倭亂중 紀效新書法이 도입되면서
廣州의 군사지휘체계가 조선전기에 비해 어떻게 변화하였고,
둘째 胡亂및 肅宗代이후 都城防衛體制의 강화 주장이 제기된 후 정조대 廣州留守府체제가
확정될 때까지 광주의 군사지휘체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南漢山城과 관련하여
살펴봄으로써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을 종합적으로 파악해보려 한다.
3 李存熙,「朝鮮時代留守府經營」, 韓國史硏究 47, 1984, 38~39쪽;
李存熙, 조선시대의 한양과 경기, 혜안, 2001, 187~189쪽.
4 李泰鎭, 앞의 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85~87쪽․ 108~111쪽․ 124~126쪽․ 159~162쪽.
5 車文燮, 앞의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245~246쪽
(車文燮, 「守禦廳硏究」上․下, 東洋學硏究6․9, 1976․1979).
II. 壬辰倭亂중 紀效新書法도입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조선전기 廣州의 군사체계는 진관체제에 의해 운용되었는데, 그 내용을
경기도 육군의 主鎭․巨鎭․諸鎭의 위치 및 군사지휘관을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
<표 1> 조선전기 경기도 육군의 主鎭․ 巨鎭․ 諸鎭의 위치 및 군사지휘관 - 생략
즉 조선전기 경기도 육군의 지휘계통은 ‘主鎭-巨鎭(鎭管)-諸鎭’으로 되어 있었는데7
최고 상층부인 主鎭은 경기도 관찰사가 兵馬節度使를 겸하면서 거진을 통제하였고,
광주․수원․양주․장단 등 4개의 巨鎭은 각각 諸鎭을 통제하였다.
따라서 광주목사는 거진인 廣州鎭管의 兵馬僉節制使를 겸임하면서,
수령이나 판관이 兵馬同僉節制使나 兵馬節制都尉를 겸임하는
‘여주 ․ 이천 ․ 양근 ․ 지평 ․ 음죽 ․ 양지 ․ 죽산 ․ 과천’ 등 諸鎭을 절제하였다.
이렇게 진관체제는 전국의 행정조직인 邑을 동시에 군사조직인 鎭으로 편성하여
각 읍의 수령에게 군사지휘관의 임무도 겸하게 함으로써
국가방위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일원화하려 한 것이었으며,8
平時에는 節制使․僉節制使가 진관의 최고 지휘관으로서 소속 읍의 군병 조련을 주관하고9
有事時에는 진관에 소속된 읍의 군사를 집결시켜 主將의 명령을 받도록 함으로써
비록 한 진관이 함락되더라도 다른 진관이 계속해서 방어함으로써
빠른 시간에 넓은 지역으로 적이 진출하는 것을 막는 특징이 있었다.10
따라서 진관체제는 군사와 행정을 일치시키면서
진관 즉 거진 중심으로 훈련과 방어 등을 담당하는 제도이다.
이러한 진관체제는 군사와 행정을 일치시켜 일사분란한 지휘체계를 확립하고
별도의 군사지휘관 파견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지만, 수령 중 병법을
잘 모르거나 武才가 없는 경우 유사시 군사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아울러 적이 대규모로 또는 상습적으로 침입하는 경우 각각의 진관을 따로 방어하기보다는
특정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켜 방어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때문에 승리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정부는 적이 상습적으로 또는 대규모로 침입하는 경우,
군사적 식견 및 경험이 뛰어난 군사지휘관을 중앙에서 파견하여
지방군 지휘관들과 함께 특정 지역을 집중적으로 방어하게 하였다.11
즉 겨울철 압록강 물이 얼면 여진족이 상습적으로 평안도에 침입하는 것을 대비하기 위해
성종대부터 助戰將을 파견하였고, ‘을묘왜변․삼포왜변․이탕개 난’ 등 적의 대규모 침공시에는
병사보다 품계가 높은 都元帥․都巡察使등을 파견하여 전투를 총 지휘하고 병사와 품계가 같은
방어사로 하여금 兵使․水使등과 함께 지방군을 나누어 지휘하게 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12
그리하여 중앙 군사 지휘관의 파견 및 分軍法 그리고 특정 지역에 병력을 집중시켜
방어하는 것 등을 특징으로 하는 制勝方略이 鎭管體制를 보완하기 위해
유사시의 방어전술로 새롭게 채택되었다.
비록 제승방략은 중앙과 지방 지휘관 간의 지휘권 다툼이나
중앙 군사지휘관이 제 때에 전쟁터에 도착하지 못하는 문제점,
중앙 군사지휘관과 그 수행원들에 대한 경제적 부담 등이 있지만
진관체제에 비해 유동성이나 집중성이 뛰어난 특징이 있었다.
6 <표 1>은 민현구, 조선초기의 군사제도와 정치, 한국연구원, 1983, 252쪽의
경기 진관편성표를 정리하여 작성한 것이다.
7 經國大典 卷4, 兵典, 外官職條. “節度使稱主鎭節制使․僉節制使稱巨鎭同僉節制使․萬戶․都尉稱諸鎭”.
8 허선도, 「제승방략 연구(下) - 임진왜란 직전 방위체제의 실상- 」, 진단학보 37, 1974, 8~9쪽.
9 宣祖實錄 卷49, 27년 3월 丁未, 22책, 243쪽.
10 宣祖修正實錄 卷25, 24년 10월, 25책, 609쪽.
11 허선도, 「제승방략 연구(下) -임진왜란 직전 방위체제의 실상-」, 진단학보 37, 1974, 9~14쪽.
12 서태원, 「朝鮮前期有事時地方軍의 指揮體系-중앙군사지휘관의 파견과 관련하여-」,
사학연구 63, 2001, 52~62쪽.
이렇게 진관체제는 물론이고 제승방략도 유사시의 방어전술로 활용되는 가운데,
조선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다.13
하지만 조선군은 일본군의 조총 전술은 물론이고 진관체제와 제승방략이 지니는
약점 등으로 인해 임진왜란 초기의 내륙 전투에서 일본군에 크게 고전하게 된다.
실제로 진관체제에 의해 군사지휘관을 겸임한 수령 중에는 武才등이 부족하여
군사를 제대로 이끌고 싸우지 못하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아울러 제승방략에 의해 경상도 군을 집중 배치하여 일본군을 격퇴하려 했던
대구방어선이 중앙에서 순변사 이일이 제 때에 도착하지 못해 붕괴되었고,
이어 충청도 병력이 주축이 된 충주 탄금대 전투도 일본군에게 패배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넓은 지역에 적이 진출하는 것을 허용하여
일본군은 4월 13일 부산을 침공한 후 불과 20여 일 만에 한양에 입성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일본의 조총전술 및 진관체제․제승방략의 문제점 등을 시정하여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물리치기 위해 평양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에 그 효용성이 입증된 명의 기효신서법을 도입하게 된다.
즉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중앙에 訓鍊都監과 이듬해 지방에 束伍軍을 창설하여
砲手중심으로 三手兵을 육성함으로서 일본군의 조총 전술을 격파하려 하였고,14
兩軍營의 편제도 ‘營-司-哨-旗-隊’로 편성하는 가운데
평안도 6개 진관15 및 경기도 5개 지역에 營16을 설치하여
특정지역을 집중적으로 방어하는 데에서 야기되는 제승방략의 약점을 보완하려 하였다.
아울러 營의 최고 책임자인 營將을 별도로 임명하여 군사임무를 전담시킴으로써
병법을 모르는 수령이 군사와 행정을 겸임함으로써 나타나는
진관체제의 문제점도 시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임진왜란 중 기효신서법에 의해 경기도에 편성된 5개의 營은,
조선전기 진관체제의 거진과 비교하여 차이가 있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17
<표 2> 경기도의 조선전기 거진과 임진왜란 중 5營
조선전기의 巨鎭 5營
경기도- 廣州,水原,楊州,長端
左營 : 龍津(屬邑: 이천,여주,광주.양근,지평,양주,포천,가평)
右營 : 水原禿城山城(屬邑: 수원,남양,인천,부평,양천,통진,김포,안성)
前營 : 龍仁石城山城(屬邑: 죽산,음죽,진위,안산,양지,용인,금천,과천)
後營 : 坡州山城(屬邑: 고양,파주,교하,풍덕,장단,연천,삭녕,영평,개성)
中營 : 京城訓鍊都監軍
13 서태원, 「임진왜란에서의 지방군 지휘체계」, 실학사상연구 19 ․20, 2001, 323~336쪽.
14 차문섭, 앞의 朝鮮時代軍制硏究, 158~167쪽 및 179~204쪽;
金鍾洙, 앞의 朝鮮後期中央軍制硏究訓鍊都監의 設立과 社會變動, 158~167쪽;
김우철, 앞의 朝鮮後期地方軍制史, 21~44쪽.
15 鎭管官兵編伍冊殘卷(조선사료총간 10), 조선사편수회;
「鎭管官兵編伍冊殘卷」, 制勝方略․續武寶鑑․鎭管官兵編伍冊(正文社영인본, 1982).
16 柳成龍, 懲毖錄 卷15, 軍門騰錄, 移京畿巡察使文.
17 經國大典 卷4, 兵典, 外官職, 京畿;柳成龍, 懲毖錄 卷15, 軍門謄錄, 移京畿巡察使文.
즉 중앙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 훈련도감을 제외하면 경기도 4곳에 영이 설치되었는데,
경국대전의 巨鎭에 비해서는 설치지역이 다르다.
이러한 차이는 방어에 유리한 산성을 중심으로 3營이 편성되고, 한강을 통해
서울로 진입하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龍津에 營을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때문에 조선전기 거진으로서 ‘여주․이천․양근․지평․음죽․양지․죽산․과천’ 등을
속읍으로 가졌던 광주는 임진왜란 중에 龍津의 속읍이 되었고,
조선전기 경기도의 巨鎭인 양주도 용진에
그리고 수원과 장단은 각각 수원 독성산성과 파주산성에 소속되게 되었다.
한편 營의 최고 책임자인 營將의 품계는 仁祖代이후 正3品인 데에 비해
‘右營인 水原禿城山城의 영장은 종3품 虞候,
前營인 龍仁石城山城의 영장은 종6품 察訪’ 출신으로 낮았는데,
전쟁 중에 갑자기 營將을 선발하게 되어 그러한 현상이 초래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중국처럼 수령과는 별도로 군사지휘관인 영장을 두어 백성을 다스리는 직책과
군사를 관리하는 직책을 구분함으로써,
유사시에 수령이 군대를 제대로 지휘하지 못하여 전쟁에서 패하거나
전쟁에 임해 갑자기 장수를 교체하는 폐단을 없애려 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난 1601년(선조 34) 2월 우참찬 洪進은 전쟁 중에 鎭管法을 폐지하고
갑자기 중국의 제도를 본 떠 陣法이나 旗幟를 중국처럼 하였는데,
평온한 시기에 행하였으면 성공했겠지만 전시에 행했기 때문에 효과가 없어
지금 우리나라의 군제는 중국식도 아니고 조선전기의 제도도 아닌 채 혼란스럽다며
紀效新書의 병법을 따르지 말고 종전처럼 鎭管․制勝方略의 법에 의해
수령으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훈련을 시키자고 제의하였다.18
이어 같은 해 8월에는 특진관 李尙毅가
‘중국에는 백성을 다스리고 군사를 관리하는 직책이 따로 있어
사변이 발생해도 혼란이 없지만 우리나라에는 그러한 제도가 없으니,
진관수령을 가려 뽑아 소속 읍을 檢擧하고 道主로 하여금 진관수령을 統治하게 하면
條理가 있을 것이라며 唐陣法을 숭상하고 鄕陣法을 쓰지 않기 때문에
진관법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19고 하자,
宣祖가 공감을 표시하며 진관에게 소속 읍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한 것에서 기효신서의 병법은 그대로 존속된 반면
조선전기처럼 巨鎭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면서 소속 읍을 통제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광주도 임진왜란 중에 일시적으로 용진의 소속 읍이 되었지만,
적어도 1601년(선조 34) 8월 이후에는 조선전기 巨鎭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광주목사는 영장을 겸하면서 조선전기 거진 수령의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실은 대체로 孝宗代이후 대체로 삼남은 영장을 파견하고
그 외 지역은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兼營將制가 시행되었을 때,
광주를 비롯한 경기도의 조선전기 巨鎭은
조선후기 겸영장제가 시행되었던 지역과 일치한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20
18 宣祖實錄 卷134, 34년 2월 己卯, 24책, 196쪽.
19 宣祖實錄 卷138, 34년 6월 甲戌, 24책, 263쪽.
20 續大典卷4, 兵典, 外官職條.
III. 胡亂및 廣州留守府制의 확립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호란 및 광주유수부제의 확립과 관련된 광주의 군사지휘체계의 변천은
남한산성과 밀접한 연관성을 맺고 진행되었다.
임진왜란에서 산성은 ‘높은 곳에 위치하므로 왜적의 長技인 鳥銃이 위력을 발휘할 수 없고,
土山과 雲梯를 설치할 곳이 없어 적이 성안의 사정을 모르며,
적은 산 밑부터 오르다가 성 밑에 이르면 숨이 차고 기력이 빠지는 반면
우리의 군병은 안정되어 적이 움직이는 대로 맞아 싸우되
큰 돌만 굴려도 적을 물리칠 수 있다’21는 利點이 있었으므로,
정부는 임진왜란 후 유성룡의 건의를 받아들여 산성을 중점적으로 수축하였다.22
남한산성을 수축하자는 논의는 1603년(선조 36) 제기되었는데
宣祖는 남한산성을 수축하여 수원 禿城처럼 군사를 조련시키고 지키게 함으로써
京都의 保障을 삼고 諸鎭도 절제하려는 뜻을 보였고,23
光海君代일부가 수축된 후 李适의 난으로 도성 주변에
堡障地가 필요하다고 인식한 인조는 남한산성의 수축을 완성하였다.24
물론 남한산성은 단순히 국왕의 피신처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라
有事時 국왕이 훈련도감 군사 및 어영군 등을 거느리고 江都로 들어가면,
세자는 총융군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그 곳을 거점으로 江都에 대한 압력을
둔화시키고 그 동안 각 道로부터 집결한 군사로서 對敵하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25
여기에서는 남한산성의 수축이 끝난 후 胡亂과 광주유수부제가 확정될 때까지
광주의 군사지휘체계 변천에 대해 살펴보겠다.
21 萬機要覽軍政篇4, 附關防總論, 柳成龍山城論.
22 趙楨基, 「西厓柳成龍의 國防政策硏究」,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0, 104~106쪽. 23
宣祖實錄卷159, 36년 2월 乙巳, 24책, 449쪽.
24 李炫熙,「朝鮮南漢築城蠡測」, 史叢 7, 1972.
25 李泰鎭, 앞의 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85쪽.
1. 胡亂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호란과 관련된 광주의 지휘체계 변화는 防禦營制와 營將制등과 관련하여 이루어졌다.
먼저 호란을 대비하기 위해 1624년(인조 2) 총융청이 창설되자
광주는 수원 ․ 양주 ․ 장단 ․ 남양과 함께 총융청의 5營에 편성되었지만,
1626년 11월 남한산성의 城役이 끝나자 廣州邑治를 산성으로 옮기면서
광주목사가 남한산성의 방어사를 겸임하게 된다.26
조선전기에는 별도의 방어영이 설치되지 않고 삼포왜변 등 有事時에
중앙에서 군사적 경험이나 식견이 풍부한 군사지휘관을 防禦使로 파견하여
지방 군사지휘관인 兵使․水使등과 함께 지방군을 나누어 통솔함으로써
승리를 극대화시키려 하였는데,27
임진왜란이 끝난 1601년(선조 34) 수도권 방어를 위해 水原에 방어사를 설치한 뒤
單兵使(觀察使兼) 지역인 京畿․江原의 淮陽(→春川→鐵原) ․長湍(→坡州) ․ 廣州에
방어영이 설치됨으로써 수령이 방어사를 겸임하게 된 것이다.28
물론 이러한 조치는 한편으로는 중앙에서 유사시에 군사지휘관을 파견하는 것을 지양함으로써
適期에 적의 침공에 대응하고 평소 훈련을 주관하던 지휘관이
유사시에도 군사를 지휘함으로써 전투의 효율성을 증대시키려는 측면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별도의 군사지휘관 파견이나 설치에 따른
경제적인 폐단을 시정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아울러 조선전기에 유사시 별도로 파견된 방어사가 무관이었던 것과는 달리
조선후기 방어사는 문신도 담당하였는데, 그것은 후기의 방어사는 군사는 물론이고 행정도
담당하였다는 점과 무신의 군사지휘권 독점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문신의 의도도 엿보인다.
하지만 방어사를 겸임하는 수령이 병법을 모르거나 武才가 없을 경우
유사시에 군사를 이끌고 효과적으로 적에 대응하지 못하는 문제점이 야기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임진왜란이 끝난 후 兼營將制의 시행으로 인하여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였는데,
광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丁卯胡亂에서 영장을 겸한 문관 및 蔭官수령 중에서 군사를
이끌고 적과 싸울 수 없어 전쟁에 임해 갑자기 장수를 교체해야 하는 폐단이 발생하자,
정묘호란이 끝난 1627년(인조 5) 군사적 식견이 있는 堂上이상의 무관을
영장으로 전국에 파견하여 수령이 영장을 겸하는 兼營將制의 약점을 시정하려 했다.29
仁祖代營將의 설치 숫자와 지역을 대략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0
경기도:廣州, 南陽, 楊洲, 驪州(1635년에 竹山으로 옮겨짐)
충청도:洪州, 淸州, 公州, 忠州
경상도:安東, 尙州, 大邱, 金海, 晋州, 慶州
전라도:順天, 全州, 羅州, 礪山
황해도:鳳山, 豊川
강원도:春川, 原州, 三陟
함경도:洪原, 永興, 德原
평안도:德川, 中和, 順天, 咸從, 龜城, 寧邊
그리하여 광주에도 營將이 별도로 파견되었는데, 영장의 파견으로 인하여
광주진관의 소속 읍에 대한 군사적 통제권이 영장에게 위임되게 된다. 이러한 별도의
영장 파견은 수령과의 군사지휘권 다툼이나 민에게 경제적 폐단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때문에 병조에서조차 별도로 營將을 너무 많이 파견하여 매사에 방해만 되므로
광주․수원의 수령은 武弁은 아니지만 방어사를 겸임하여 將領으로 대우하고 있으니
영장을 겸하게 하고, 鎭管중에서 무신이 수령인 경우에는 이천 등의 예를 따라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면서 中軍을 거느리고 군병을 조련함으로써
각 고을이 別營將을 供億하는 폐단을 없애자고 하였다.31
물론 별도로 파견된 영장은 지방군사력을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하였고,
병자호란에서도 활약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32
병자호란을 겪은 후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1637년(仁祖15) 영장 파견이 중지됨으로써33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는 겸영장제가 다시 시행되게 된다.
그러다가 北伐을 슬로건으로 내세운 孝宗代에 청을 의식하여34
1654년(효종 5) 삼남에만 별도로 영장을 파견한 후, 35
대체로 삼남에는 영장을 파견하고 다른 지역은 겸영장제가 시행되는 것으로
효종대 이후 영장제가 제도화됨으로써
광주를 비롯한 경기도 鎭營將6명은 모두 수령이 겸임하게 된다.36
이러한 차이는 청의 감시나 경제적인 어려움과 함께
경기도 등 수도주변의 소속 읍은 중앙군에 소속되어 운용되었고
평안도와 함경도의 경우 輿地圖書․靑雲譜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무신이 수령으로 파견된 비율이 다른 도에 비해 높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37
더욱이 조선후기 경기도는 총융청․수어청․진무영의 창설 등으로 인하여
鎭營의 수가 크게 늘어났으므로,
수어청 前營에 속하였던 광주의 소속 읍은 ‘이천․용인․삼전도’로
조선전기 광주진관에 소속된 ‘여주․이천․양근․지평․음죽․양지․죽산․과천’에 비해 크게 축소되게 된다.
한편 1633년 광주목사는 討捕使도 겸임하게 되었다.38
토포와 관련된 광주의 소속 읍은 ‘금천․과천․양주․포천․영평․가평․양근․지평’이었는데,39
이들 중 ‘과천․양근․지평’은 조선전기 광주진관의 소속 읍이었으나
나머지 지역은 조선후기 前營인 광주의 소속 읍도 아니었다.
따라서 광주의 토포 소속 읍과 군사적 통제를 받는 소속 읍은 일치하치 않았고,
군사적통제를 받는 읍에 비해 討捕소속 읍이 훨씬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전기 토포사는 지방에서 盜賊의 발호가 심각할 때 종종 파견되다가40
宣祖代에 처음으로 鎭管의 수령이 討捕使를 겸임한 후41
仁祖代에 도적이 많이 발생하여 수령이 討捕使를 겸임하는 것을 증가시켰고,42
1665년(현종 6) 11월부터 三南의 營將이 討捕使를 겸임43하면서
營將의 討捕使兼任도 점차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이렇게 토포사를 두어
도적체포의 효과를 높이려 한 것은 왜란과 호란을 통해 민생이 피폐해진 것은 물론이고,
조선후기 賦稅收奪의 강화와 이앙법과 貨幣經濟의 발달 등에 따라
몰락 농민이 도둑이 되거나 私鑄錢등 각종 범죄행위가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26 문교부․국사편찬위원회, 輿地圖書 上, 京畿道廣州建置沿革條, 1973, 114쪽;
重訂南漢誌卷9 下編, 城史條.
27 서태원, 앞의「朝鮮前期有事時地方軍의 指揮體系-중앙 군사지휘관의 파견과 관련하여-」,
63쪽 및 56~62쪽.
28 車文燮, 앞의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285쪽.
29 仁祖實錄 卷16, 5년 4월 丙辰, 34책, 194쪽.
30 增補文獻備考 下, 卷234, 職官考21, 鎭營將兼討捕使條;
一哂錄, 卷19, 外道鎭營條.
31 仁祖實錄卷16, 10년 11월 乙未, 34책, 355쪽.
32 서태원, 앞의 朝鮮後期地方軍制硏究-營將制를 중심으로-, 60~62쪽.
33 仁祖實錄卷34, 15년 2월 丙戌, 34책, 675쪽;
備邊司謄錄6冊, 仁祖19년 7월 12일, 1책, 487쪽.
34 元斗杓, 灘叟元斗杓實紀 卷3, 備局諸臣入侍條.
35 孝宗實錄卷12, 5년 2월 壬申, 35책, 663쪽.
36 續大典을 통해서 각 도 鎭營의 설치지역을 살펴보면 다음의 표(생략)와 같다
(續大典卷4, 兵典, 外官職條참조)
* 파견 : 營將이 파견된 곳 * 무수 : 武臣수령이 營將을 겸하는 경우
37 평안도 수령은 「여지도서」에서는 ‘文(7) ․ 무(18) ․ 음(7)’
그리고 「청운보」에서는 ‘문(7) ․ 무(22) ․ 음(7)’ 이었고,
함경도의 수령은 「여지도서」에서는 ‘文(4) ․ 무(6) ․ 음(1)’
그리고 「청운보」에서는 ‘문(2) ․ 무(16) ․ 음(1)’ 이었다
(임승표, 「朝鮮時代賞罰的邑號陞降制硏究」, 홍익대 박사학위논문, 2001, 12쪽). 38
앞의輿地圖書 上, 京畿道廣州建置沿革條, 114쪽.
39 重訂南漢誌卷4, 中篇상, 軍制, 防營條(한국학문헌연구소편,
韓國地理志叢書: 邑誌경기도편② 아세아문화사, 1985, 542쪽).
40 明宗實錄 卷27, 16년 10월 壬戌, 20책, 603쪽;
仁祖實錄 卷30, 12년 12월 갑진, 34책, 581쪽.
41 宣祖實錄 卷54, 27년 8월 丁卯, 22책, 334쪽;
一哂錄 卷19, 軍制考, 外道營鎭條.
42 仁祖實錄卷29, 12년 3월 丙申, 34책, 546쪽.
43 備邊司謄錄25冊, 顯宗6년 11월 2일, 2책, 906쪽.
2. 廣州留守府制의 확립과 廣州의 군사지휘체계 변천
조선전기 유수부가 舊都의 통치․사신의 접대․御鄕관리 등 행정적 측면이 중요시된 것에 비해,
조선후기 유수부는 王都의 방어 등 군사적 측면이 중시되었다.44
도성을 지켜야 한다는 견해는 남한산성의 축조가 시작된 1624년(인조 2)
이미 예조판서 李廷龜에 의해 제기되었고,45
17세기의 실학자 반계 유형원도 山城보다는 평소의 생활 근거지를 중심으로
방어체제를 구축하자고 주장하였다.46
그 후 도성의 인구가 18세기에 30만 명 이상이 되고
상공업 유통경제의 발달 등으로 도성이 대도시로 변모하자,
번화한 도시와 민을 보호할 필요성이 높아져
1704년(숙종 30)을 전후하여 도성을 고수하자는 도성수축론이 강화되었으며
1728년(영조 4) 李麟佐亂을 계기로 도성수비체제가 확립되었다.47
물론 18세기의 실학자 농포자 정상기도 도성은 宗廟와 社稷이 있는 곳이고
자녀와 玉帛가 모인 곳이므로 꼭 지켜야 한다며 여장을 6~7자로 높이고
돈대 ․ 砲樓․ 치성 ․ 옹성 등 방어시설을 설치하고, 강변의 창고를 南小門일대로
옮겨 적의 기습에도 양식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자고 하였다.48
아울러 도성의 외곽 및 청석골 ․ 교동 ․영종도 등 인근 도의 전략적 요충지를 선별하여
도성방어를 위한 지휘체계를 마련하고 원군을 확보하자고 하였으며, 도성방위를 위한
保障으로 강화․남한산성․북한산성은 입지조건에 문제가 있다며 춘천을 추천하였다.
그밖에 영조대 무관으로 활약하였던 宋奎斌도 도성의 자체방어체계와
松都․江都․남한산성․수원 禿山山城등 주변의 방어체계를 적절히 조화시키면,
도성은 그 어느 지역보다도 방어 작전을 완벽히 펼칠 수 있는 곳이라며
도성방어론을 주장한 바 있다.49
남한산성은 유사시 국왕의 피신처 및 도성의 외곽을 방어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는데,
1626년(인조 4) 광주목사가 남한산성 방어사를 겸임하면서
광주의 邑治가 산성 안으로 이동되었다. 여기에서는 광주유수부제도가
1795년(정조 19) 확정되기까지 광주의 군사지휘체계변동을 살펴보겠다.
1626년(인조 4) 광주목사가 남한산성 방어사를 겸임하였고,
1637년 丙子胡亂후 反淸의식이 고조되는 가운데 남한산성의 재건이 추구되며
그러한 상황에서 광주목사는 부윤으로 승격되게 된다.50
하지만 남한산성의 군사책임자인 수어사와 행정책임자인 광주부윤과의 사이에서
여러 부작용이 일어나 정부는 광주부윤을 수어부사로 삼아 일원적인 체제로 정비하려 하였으나,
행정담당관인 從事官의 계급이나 하는 일이
守禦副使와 같아 다툼이 발생하여 수어부사를 혁파하였다.
44 李存熙, 앞의 조선시대 한양과 경기, 213~215쪽.
45 仁祖實錄 卷54, 2년 3월 庚午, 33책, 598쪽.
46 金駿錫, 「柳馨遠의 政治․國防體制改革論」, 東方學志 77 ․78 ․79 합집, 1993, 393~394쪽.
47 이태진, 앞의 韓國軍制史-近世朝鮮後期篇-, 184쪽;
이태진, 앞의 朝鮮後期의 政治와 軍營制變遷, 225~246쪽;
吳宗祿, 「朝鮮後期首都防衛體制에 대한 一考察 -五軍營의 三手兵制와 守城戰-」,
史叢 33, 1988, 28~30쪽;
이근호, 「숙종대 중앙군영의변화와 수도방위체제의성립」,조선후기의 수도방위체제, 1998, 62~93쪽;
강성문, 「영조대의 도성 사수론」, 韓民族의 軍事的傳統, 2000, 144~145쪽.
48 신대진, 「朝鮮後期實學者의 國防思想硏究」,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67~73쪽.
49 孫承喆, 「정조시대 風泉遺響의 도성방위책」,鄕土서울54, 1994;
이재범, 「해제:宋奎斌의 生涯와 그의 軍事實學思想」,
防守雜說․風泉遺響;軍事史硏究資料集,1997, 31~38쪽;
백기인, 앞의 朝鮮後期國防論硏究, 99~120쪽.
50 重訂南漢誌 卷1 上編, 職官條.
그러다가 1668년(숙종 9) ‘수어사와 부윤이 각각 軍兵과 財賦를 관장하면서
백성들을 침탈하므로 수어사를 혁파하자’고 한 송시열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수어사와 京廳이 혁파되면서 유수부로 승격한 광주는, 4營인 광주․양주․죽산․원주 및
左部․右部․中部에 속하는 철원․충주․홍천․횡성․지평 등의 군병을 절제하게 되었다.51
따라서 이렇게 수어사와 수어경청이 혁파되고 광주가 유수부로 승격하여
남한산성을 군사와 행정면에서 통제하게 된 것은, 군사와 행정의 일치는 물론이고
수어청 경청을 유지하기 위한 재정을 절감시키고 산성 주민들의 고통을
경감시켜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아울러 광주가 유수부로 승격한 것은 행정적인 측면의 목사․ 부윤
그리고 군사․치안적 측면의 영장․방어사 및 토포사에 비해
廣州守令의 위상이 가장 높아졌음을 의미하며,
광주부윤이 담당하였던 前營將 및 討捕使의 임무가 여주목사에게 옮겨짐으로써
군사 및 치안상의 지휘체계변화가 초래되었다.52
하지만 1690년 ‘留守를 정2품 宰臣으로 差送하였기 때문에 자주 교체되어
軍務에 소홀함이 많고 經歷이 가족을 인솔하여 남한산성에 가서 軍餉을 소모하니,
유수를 강등하여 부윤으로 삼고 예전처럼 수어사를 차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영의정 權大運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별도로 수어사가 서울에서 남한산성의 군무를 총괄하게 되었다.53
실제로 조선전기의 군사체제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군사지휘관의 파견은
군사적인 측면에서는 유리하지만 재정적인 문제가 있고,
수령의 군사지휘관 겸임은 재정절감의 효과는 있지만 군사적인 측면에서 불리하였다.
하지만 수어청의 경우 수어사는 서울에 있고 군병은 남한산성에 있으므로 수어사를 별도로
두는 것이 재정적인 면은 물론이고 군사적인 측면에서 꼭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다.
때문에 1690년 守禦使制로 復設된 것은
남인이 남한산성에 자파의 세력을 침투시키려는 의도였다는 지적도 있다.54
한편 광주유수가 다시 부윤으로 격하되자,
여주목사가 담당하였던 토포사와 영장의 직책은 광주부윤에게 환원되었다.55
이렇게 광주부윤이 유수가 되었다가 다시 환원되는 변화는 영조대에도 계속되었다.
良役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均役法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국가의 재정을 절약하기 위해 1750년(영조 26) 광주부윤을 유수로 승격시켰다가,
留守와 經略이 자주 교체되어 맡은 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며
광주유수를 다시 부윤으로 격하시켰던 경우가 그 예이다.56
물론 이때에도 광주유수가 되었을 때 이천부로 옮겨졌던 營將등의 임무는,
광주부윤으로 격하되자 다시 환원되었다.
그러다가 1795년(정조 19) 남한산성을 설치한 것은 그 곳을 保障으로 삼아
위급한 때 대비하려는 것인데 수어사는 산성에 머물러 兵務를 살피지 않고
거의 서울에 있으므로 맡은 바 임무를 소홀히 하고,
京營800명의 標下軍은 재정을 크게 축내면서 경기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다며
수어경청을 혁파하고 광주를 다시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광주유수로 하여금 南漢守禦使를 겸하게 하였다.
아울러 광주가 담당하였던 前營의 기능은 이천부로 옮겨졌으며,
이 때의 廣州留守府확립을 끝으로 4都留守府制가 정비되게 된다.
51 차문섭, 앞의 朝鮮時代軍事關係硏究, 155~157쪽 및 175~177쪽.
52 備邊司謄錄 37책, 肅宗9년 3월 22일, 3책, 647~648쪽;
備邊司謄錄 37책, 肅宗9년 윤6월 3일, 3책, 673쪽.
53 備邊司謄錄 44책, 肅宗16년 1월 20일, 4책, 274~275쪽.
54 李泰鎭, 앞의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後期篇, 160~162쪽.
55 備邊司謄錄44책, 肅宗16년 1월 20일, 4책, 274~275;
肅宗實錄 卷22, 16년 1월 己未, 39책, 215쪽.
56 차문섭, 앞의 朝鮮後期軍事關係硏究, 162~165쪽.
IV. 맺 음 말
이상에서 조선후기 廣州의 군사지휘체계의 변천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 내용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壬辰倭亂중 일본군을 효과적으로 격퇴하기 위해 紀效新書法이 도입되면서
지방에 새롭게 營이 창설되는 가운데, 경기도에서도 읍성에 비해 방어에 유리한
산성(수원 독성산성․용인 석성산성․파주산성) 및
한강을 통해 서울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龍津등에 營이 설치되게 된다.
용진 아래에 위치한 조선전기의 巨鎭 廣州는 용진의 屬邑이 되었으며,
조선전기 경기도의 나머지 3개 거진 중 양주는 광주와 같이 용진에
그리고 수원과 장단은 각각 수원 독성산성과 파주산성에 소속되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끝난 후 광주목사는 조선전기에 巨鎭의 군사지휘권을 담당했던 것처럼,
營將을 겸임하여 營의 군사지휘권을 담당함으로써 紀效新書法에 의해
군대의 편제나 병법 등에 변화가 있었지만 군사지휘권에서는 변동이 없었다.
둘째, 南漢山城이 축조된 후 광주의 군사지휘체계에 대해 호란 및
광주 유수부제의 변천과 관련하여 살펴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1626년 남한산성의 城役이 끝나자 廣州邑治를 남한산성으로 옮기고
광주목사가 남한산성의 防禦使를 겸임하면서 군사지휘체계에 변화가 초래되었다.
이어 丁卯胡亂에서 수령 중 兵法을 몰라 적과 제대로 맞서 싸우지 못하는 문제점이 표출되자,
정묘호란 후 전국에 營將이 파견되는 가운데 광주에도 영장이 파견되어
광주목사가 행사하였던 군사지휘권을 대행하는 변화가 丙子胡亂까지 계속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경기도에서는 수령이 영장을 겸임하는 兼營將制度가 정착됨으로써
광주목사의 군사지휘권이 다시 회복되었으나,
仁祖代와 肅宗代에 총융청․수어청․진무영 등이 창설되면서
조선전기에 비해 광주의 소속 읍은 줄어들었다.
한편 광주목사는 1663년 討捕使도 겸임하였는데,
광주의 토포 소속 읍과 군사적 통제를 받는 소속 읍은 일치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肅宗代이후 도성 방위 체제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廣州留守府制의 실시는 군사력의 강화는 물론이고
국가의 재정부담 및 경기 민의 고통을 경감시키는 것과 연관하여,
廣州留守의 守禦使 겸임과 별도의 수어사 임명 등 변천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1795년(정조 19) 南漢山城은 보장으로 삼아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려는 것인데
守禦使는 서울에 머물러 임무를 소홀히 하고 서울의 標下兵도 재정을 축내며
경기도의 민에게 고통을 준다며, 守禦京廳을 혁파하고 廣州를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광주유수로 하여금 남한수어사를 겸임하게 하는 광주유수부제의 확립을 끝으로
조선후기 4都留守府制가 정비되게 된다.
- 실학사상연구 29집, 투고일: 2006. 1.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