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 관련 인물, 자료□ 논문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과 관련 인물들
1. 원숭환(袁崇煥, 1584 ∼ 1630)
2. 김만기(金萬基, 1633 ∼ 1687)
3. 김진규(金鎭圭, 1658 ∼ 1716)
4. 김석주(金錫冑, 1634 ~ 1684)
5. 이관명(李觀命, 1661 ~ 1733)
6. 이정신(李正臣, 1660 ∼ 1727)
7. 김경문(金慶門, ? ∼ ?)
8. 김기성(金箕性, 1752 ∼ 1811)
9. 신집(申楫, 1580 ∼ 1639)
10. 김경선(金景善 1788 ∼ 1853)
11. 조두순(趙斗淳, 1796 ∼ 1870)
1. 원숭환(袁崇煥, 1584 ∼ 1630)
명나라 말기의 무장이다. 자는 원소(元素)이며, 현재 광동성(廣東省) 동관(東莞)에서 출신했다.
뛰어난 전략으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 현재 요녕성 남부)에서 후금(後金)군에게 승리해
제갈량에 비견되면서 찬사를 받는 등 군사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명 왕조 내부의 알력 다툼으로 처형됐다.
만력47년(1619) 35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에 급제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문관이었다. 복건(福建) 소무현(邵武縣) 지현(知縣) 재임 시절부터
군사에 대해 토론을 좋아했다는 일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이미 관직에 오를 때부터 군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진사에 급제한 해는 후금의 군대에 맞서 양호(楊鎬)가 이끄는
명나라 10만 군사가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한 때이기도 하다.
이후 명나라의 요동과 요서에서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1620년, 만력제가 죽고 태창제가 즉위했으나, 9월 26일 재위 29일만에 태창제는
신하에게 독살당해(이른바 홍환안紅丸案) 천계제가 즉위하였다.
천계2년(1622), 소무현지현에서 병부(兵部) 직방청리사(職方淸理司) 주사(主事)로 임명됐다.
이 때, 위장을 하고 혼자서 적의 진영에 가서 정보를 수집하면서
영원성(寧遠城) 개축(또는 보수)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하게 느꼈고,
귀국 후 여진과 접해있는 요동의 방위를 위해 지원했다. 그리고 산해관(山海關)의
외곽으로 영원성을 축성했다. 이 성은 성벽의 높이는 10.2m, 성벽의 두께는
기저부에 약 9.6m, 상단에 약 7.7m이며, 거의 사각형이며, 4개의 문을 갖고 있었다.
그곳에 군신의 반대를 무릅쓰고, 네덜란드에서 수입한 신식 대포인 홍이포를 성에 설치하여
총병(總兵) 만계, 참장(參將) 조대수(祖大壽)의 보좌를 받아 병사를 잘 훈련시켰다.
천계6년(1626년) 1월, 누르하치(努爾哈赤)의 후금의 군세에 맞서 싸운 영원성 전투에서
승전해 누르하치를 전사시켰고 , 그 공적으로 병부시랑 요동순무 주지관외 군사로 임명되었다.
천계7년(1627년) 영원성과 금주성(錦州城)에서 홍타이지(皇太極)를 격퇴하였다.
숭정원년(1628년),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兵部尙書兼右副都御史)
독사계료등래천진(督師薊遼登萊天津)이 되었다. 동시에 조선 가도(椵島, 皮島)를 거점으로
부정부패를 자행하고 있던 명의 수군 좌도독 모문룡(毛文龍)을
해적질, 가도 양민 학살, 갖은 행패, 명군 농락의 이유로 참형에 처했다.
그러나 모문룡의 부하들이 청나라에 투항했고,
홍타이지는 장성을 우회하여 북경을 공격하기로 방침을 바꾸면서,
명나라에 간자를 보내 내시를 매수하여 원숭환이 모반을 꾀하고 있다는 소문을 흘렸다.
시기심이 강한 숭정제는 쉽게 그 소문을 믿었고, 당시 엄당(閹黨)의 잔당의 부활을 노리고
동림당 계열을 제거할 음모를 주도한 온체인(溫體仁)과 왕영광(王永光)도 이를 이용하려 하였다.
온체인은 모문룡과 같은 고향인 절강(浙江) 출신이었다.
위충현을 찬양하는 송가를 짓는 등 엄당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온체인은,
모문룡을 살해한 원숭환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이부상서(吏部尙書) 왕영광 또한
위충현의 잔당으로서 동림당에 대한 보복을 늘 꾀하고 있었다.
숭정3년(1630년) 9월 22일, 북경 방위를 위해 급하게 달려온 원숭환은 모반 혐의로
능지형에 처해졌다. 혹자는 이것을 명나라가 멸망하게 되는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1631년 10월 28일 그의 사후 그를 믿고 따랐던 부하 조대수 등은
주장(主將)의 투옥과 죽음을 통탄하다가 결국 후금으로 투항하고 말았다.
이로써 명나라는 자신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던 영원성과 금주성을 잃어버렸다.
원숭환의 처형 후, 그 일족은 거처를 잃고 유랑민이 되었지만,
원숭환의 아들 원문필은 후금군에 입대하여 공을 세웠고, 영고탑의 한군팔기에 편입되었다.
김용이 명나라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쓴 소설 《벽혈검》에서
원숭환의 남겨진 자식 원승지가 아버지의 원죄를 풀기 위해서 활약하는 모습을
설정으로서 그리고 있지만 ‘원승지’ 자체가 가공의 인물로, 픽션이다.
2. 김만기(金萬基, 1633 ∼ 1687)
2.1 개요
김만기(金萬基, 1633년 ~ 1687년 3월 15일)는 조선 시대 중후기의 문인·문신이자 척신이다.
병조판서 등을 거쳐 예조판서 등을 지낸 그는 인경왕후의 친정아버지로 숙종의 장인이다.
자는 영숙(永叔), 호는 서석(瑞石), 정관재(靜觀齋),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구운몽을 지은 서포 만중은 그의 아우이며, 김익훈은 그의 숙부이다.
김익희, 송시열의 문인이다. 당색으로는 서인 당원이었다가 서인 분당 시 노론에 가담하였다.
1652년(효종 2) 생원,진사시 양시에 장원으로 합격한 뒤,
1653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1659년 효종이 죽고 복상문제로
제1차 예송 논쟁이 발생하자, 송시열, 송준길, 김수항을 따라 기년복설을 지지하였다.
1666년(현종 7)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사간원대사간, 승정원좌승지 등을 역임했다.
1671년(현종 13) 딸 인경왕후가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국혼을 하고, 1674년 사위 숙종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로 승진하고 광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
1671년 예조참판으로 승진한 뒤 승문원 제조, 오위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
병조참판 등을 거쳐 1672년 성균관대사성과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을 겸직하고,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직했다.
1673년 병조판서, 춘추관지사,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하고,
1674년 보국, 돈령부영사가 되었으며 2차 예송 논쟁 때에는 3년복설을 주장하였다.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역임했다.
1680년 김석주, 김익훈 등과 함께 남인 타도에 앞장섰다.
1680년 허영, 허새의 옥사를 다스린 공로로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관에 책록되고
풍정도감 도제조를 역임했다. 사후 부조지전을 받고 1719년(숙종 45)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2.2 생애 초기활동
증조부는 형조참판을 지내고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된 문원공 사계 김장생이며,
할아버지는 증 의정부영의정 허주 김반이고,
아버지는 생원 증 의정부영의정 광원부원군 김익겸이다. 어머니는 윤지의 딸 해평윤씨이다.
동생은 서포 김만중이다. 그밖에 광남 김익훈이 그의 숙부였고, 신독재 김집은 그의 종조부였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순절하였고
홀어머니 해평윤씨와 유복자 동생 김만중과 함께 어렵게 자랐다.
후일 그가 일찍 죽자 서포 김만중은 어머니 해평윤씨를 직접 봉양하기도 했다. 본관은 광산으로
사마방목, 문과방목 중의 일부 사본에는 그의 본관을 광산의 별칭인 광주로도 기술한다.
그의 집안은 서인 당원으로 김만기도 곧 서인의 당원이 된다.
후에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자 대체로 그의 후손들은 노론에 가담한다.
그 뒤 숙부 김익희(金益熙)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증조부 사계 김장생과 종조부 신독재 김집의 문하생인 우암 송시열의 문인으로 수학하였다.
군수를 지낸 한유량(韓有良)의 딸 서원부부인 한씨(西原府夫人韓氏)와 결혼하여
김진구(金鎭龜), 김진규(金鎭圭), 김진서(金鎭瑞), 인경왕후 등의 자녀를 두었다.
효종 4년(1652년) 생원시와 진사시 양시에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2.3 관료생활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그 뒤 장예원 주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 등을 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김만기는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효종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자는 그 누구인가?
법도에 맞게 지적하여 인도해 줄 자는 경 등 약간의 사람뿐이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1659년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그해 5월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이후 서인으로 활동하며,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 윤휴 등 남인을 공격했다.
이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1660년(현종 4) 수찬이 되었다. 1661년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통정대부로 승자하여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우부승지가 되었고
1666년(현종 8)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특별히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사간원대사간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곧 우승지를 거쳐서 승정원 좌승지로 옮겼다.
1667년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1669년에는 다시 홍문관부제학을 거쳐서 이조참의가 되었다.
2.4 인경왕후 입궁 이후
1671년(현종 13) 딸이 세자빈이 되었고, 이후 가선대부 예조참판으로 승진,
승문원 제조, 도총부 부총관, 관상감 제조를 겸했다가 병조참판으로 옮겼다.
1672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곧 부제학으로 전보되었다가 호조참판을 거쳐서
홍문관과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 지성균관사, 동지경연사에 동지의금부사를 겸임했다.
1673년 영릉(寧陵)을 옮길 때 산릉도감(山陵都監)의 당상관이 되었으며, 다시 복상문제가 발생하자
1674년 7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다시 자의대비의 복제에 대하여 상소(上疏)를 올려
3년상을 주장하였다. 그 해 병조판서에 지춘추관사를 겸했다.
1674년(현종 16) 예조판서로 옮겨 정헌대부로 승진되고 이듬해(숙종 1) 숙종이 즉위하자
국구로서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에 책봉되었고,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위대장, 전생서 제조를 겸했다.
이후 총융사(摠戎使)를 겸하여 병권(兵權)을 장악하였으며,
이로 인해 척신이 군사력을 손에 넣었다며 남인들의 공격과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그 후 김수항(金壽恒) 등의 천거로 대제학을 지냈으며
1680년(숙종 7) 경신대출척 때 훈련대장으로 끝까지 남인과 맞섰으며,
이후 숙부 김익훈, 숙종의 외당숙인 청성부원군 김석주와 공모하여 역모를 날조하였다.
한편 국구가 된 후 사화의 조짐이 발생했지만 그때마다 충성과 지혜를 발휘하여
국정을 편안케하고,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훈업을 이룬뒤에는
그때그때 벼슬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니 선비들이 산악같이 우러러 보았다.
국구의 지위에 있음에도 사치하지 않고 호사를 부리지 않고 항상 검소하였으며,
예법대로 생활하였으므로 그의 스승 중의 한사람인 우암 송시열은 그를 극찬하였다.
2.5 생애 후반
같은 해,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종실인 복창군·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의 역모를 막은 공을 세워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관에 책록되었고,
1686년(숙종 13) 풍정도감(豊呈都監) 도제조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파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1685년(숙종 11) 스승 송시열 등과 함께 증조부 사계 김장생의 미간행 저술, 시문 등을
모아 사계유고 27권(부록 3권 포함)을 간행하였다.
경서, 사기 제가서에도 달통하였다. 또한 그는 법도를 따라 행하여 한 자 한 치도 어긋나지 않았고,
의복 또한 예법(禮法)대로 옷을 입고 화려하게 꾸미지 않았다 한다.
광산 김씨의 족보를 편찬, 간행하는데 앞장섰으며 그가 간행한 족보를 서석보(瑞石譜)라 부른다.
저서로는 시문 등을 모은 《서석문집》 18권을 남겼다.
작품으로는 사육신과 계백 등을 배향한 충곡서원의 유허비 글씨 등이 있다.
2.6 사후
죽은 뒤 경기도 시흥군 대야미리(현 군포시 대야미동) 산 1-12번지에 안장되었다.
경모재(敬慕齋)에 제향되었고, 1719년(숙종 45)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비명과 신도비문은 1687년 스승인 우암 송시열이 지었고, 글씨는 김진규가 썼다.
그밖에 숙종이 직접 써 준 어필비문(御筆碑)이 1699년(숙종 25)에 묘소 근처에 세워졌다.
사후 증직으로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성균관 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1992년 6월 5일 그의 묘소와 비석, 신도비는 경기도 기념물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김진규 글씨
3. 김진규(金鎭圭, 1658 ∼ 1716)
3.1 개요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달보(達甫), 호는 죽천(竹泉).
김반(金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영의정 김익겸(金益謙)이고,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김만기(金萬基)이며, 어머니는 한유량(韓有良)의 딸이다.
누이 동생이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이다.
3.2 생애 및 활동사항
1682년 진사시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1686년 정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던 중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자 지평으로 기용되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깊어지자, 1695년 소론인 남구만(南九萬)에 의해
척신(戚臣)으로 월권 행위가 많다는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1699년에는 스승을 배반했다는 명목으로 윤증(尹拯)을 공박하였다.
1701년 대사성을 거쳐 부제학(副提學)·대제학·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1713년 강화유수에 임명되었다. 그 밖에 홍문관의 여러 관직과
사인(舍人)·빈객(賓客)·이조참판·병조참판·공조판서·좌참찬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병조참판으로 재직 중일 때 소론에 의해 유배당했다가 2년 후 풀려나왔다.
문장에 뛰어나 반교문(頒敎文)·교서·서계(書啓)를 많이 작성하였다.
또한 전서·예서 및 산수화·인물화에 능해
신사임당(申師任堂)의 그림이나 송시열의 글씨에 대한 해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글씨로는 강화충렬사비(江華忠烈祠碑)·대헌심의겸비(大憲沈義謙碑)·증지평이령비(贈持平李翎碑)가 있다.
정치적으로는 대표적인 노론 정객으로서, 스승인 송시열의 처지를 충실히 지켰다.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영조가 1766년 치제(致祭)했으며, 1773년 문집 간행에 재물을 하사하고 서문을 몸소 지었다.
문집으로 『죽천집(竹泉集)』, 편서로 『여문집성(儷文集成)』이 전한다.
김석주 글씨
<김석주초상>, 17세기, 견본채색, 178x130cm, 실학박물관
1683년 사은사로 연행한 김석주는
강희연간 궁정화원인 초병정에게 초상화 초본을 받고 시정햐야할 사항을 요구하였다.
초병정은 중국에 들어온 서양인 선교사에게 서양화법을 배워 참고하였기 때문에
김석주가 자신의 초상화에서 간취되는 서양화법을 수용하기에는 생소하였을것이라 짐작할 수있다
4. 김석주(金錫冑, 1634 ~ 1684)
4.1 개요
조선 시대 중후기의 외척, 권신, 작가이자 비상한 머리와 수완을 지닌 책사로서,
당시 명성왕후 김씨를 도와 정국을 주도했다. 경신대출척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대동법을 실현시킨 영의정 김육의 손자로 장원급제자이며 노론의 창립 멤버지만,
동시에 현종의 처사촌이자 숙종의 외종숙(5촌)으로서 당시 외척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제2차 예송 논쟁 당시 그는 서인이었음에도 남인 허적 등과 손잡고
송시열, 김수항 등 대동법에 반대했던 산당(山黨)을 몰아냈다.
그를 비롯해 서인 내 한당(漢黨)과 남인은 연정을 했고 그 역시 이조판서와 우의정을 역임했다.
연정을 깨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자기 처외숙인 김익훈 등과 짜고 남인들을 역모로 몰았다가
역풍을 맞고 오히려 서인들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서게 만들었다.
이 때는 다시 스승 송시열과 손잡는다.
자는 사백(斯百), 호는 식암(息庵),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4.2 출생과 가계
1634년 한성부 남산(南山) 북록(北麓)인 회동(會洞, 현 서울시 중구 회현동 2가)에서 태어났다.
기묘명현, 즉 조광조와 함께 희생된 김식의 후손으로
증조부는 강릉참봉 김흥우(金興宇), 할아버지는 영의정 김육이며 아버지는 병조판서 김좌명이다.
어머니 신씨는 오위도총부도총관 신익성(申翊聖)의 딸이다.
또한 그는 현종의 정비인 명성왕후의 사촌 오빠에 청풍부원군 김우명의 조카이고,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 광산 김씨 역시 그의 처가 친척으로
김반은 그의 처외조부가 되며, 김익훈은 처외숙부이고,
후일 노론으로 같은 길을 걷는 김만중, 김만기는 그의 처외사촌이 된다.
그는 타고난 관상이 범과 비슷해 남들의 이목을 끌었는데 자신도 이를 자랑으로 생각했던 모양으로
후일 '범은 산이 있어야 좋다'며 자기 생가터를 재산루(在山樓)라 명명하기도 했다.
생가에는 그가 손수 심은 노송과 19절 폭포,
그 아래에는 찬우물이 있어 우물 동쪽 석벽에 '창벽(蒼壁)’이라고 새겼다.
실생활은 주로 종로방 관훈동(현재 종로구 인사동 주변) 저택에서 했다.
4.3 생애 초반
그의 집안은 할아버지 때부터 문벌로 든든한 재력도 있었고, 마찬가지로 할아버지 김육이
살아생전 보급에 힘썼던 인쇄 기술이 가업이기도 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비상한 머리와 수완으로 온 집의 기대와 사랑을 받았다.
영의정을 지낸 할아버지 김육의 문하에서 어린 시절 배웠고
그 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배움을 이어갔다.
그러나 송시열이 할아버지 김육과 대동법 시행 문제에서 충돌한 것을 시작으로
이래저래 악연이 쌓이면서 스승인 송시열과의 관계는 소원해진다.
나중에 노소론 대립 때는 노론으로 같은 편에 선다.
1657년(효종 8) 진사가 됐으며, 바로 성균관에 입교했다.
1658년(효종 9) 김육이 타계한다.
1661년(현종 2) 현종이 직접 성균관에 와 친히 문제를 낸 말문제 시험에서 눈에 띄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자격을 얻었다.
1662년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 전적, 이조좌랑 등을 지냈다.
사촌 동생인 명성왕후가 현종의 비가 돼 숙종을 낳은 후
외척으로서 서인 내에 새로운 세력을 형성해 간다.
특히 그는 명성왕후의 총애를 받았는데,
명성왕후는 자기 친동생이자 숙종의 외삼촌인 김석연이 있었지만
8살 위인 사촌오빠 김석주의 재주와 식견에 많이 의지하고 수시로 불러 의논했다.
4.4 관료 생활 초반
1662년 장원 급제 후 권지로 잠시 임관까지 대기하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됐다.
이후 이조좌랑(吏曹佐郞)과 이듬해 10월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부교리·수찬 등을 겸직해
젊은 엘리트 관료가 반드시 거쳐가야 할 요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사헌부는 대간 혹은 정언이라 해서 바른 말을 하는 자리였는데
금천(衿川)과 과천(果川)의 절에서 승려들을 불법 동원해 노역시킨
왕실 종친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를 탄핵하기도 했다.
1665년 1월 종6품 수찬이 됐으나 후임 이일상의 실수를 두둔했다는 이유로 파직당했다.
그해 3월 부수찬으로 강등, 음력 9월엔 부교리를 지냈다.
그해 10월 백성들의 포흠 탕감 및 대규모 부역 중단을 건의했다.
당시는 전지구적인 소빙기로 조선도 예외없이 큰 흉년이 연이어져 나라가 위태로왔다.
다음은 그의 건의문을 발췌한 것이다.
“하늘의 마음을 몸받아 하늘의 견책에 답함으로써 수성하는 실상을 극진히 하시며,
이런 마음가짐으로 신공(臣工)들을 면려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주소서.
그리하여 줏대 없이 사심에 끌리는 누습(陋習)을 일변시켜 깨끗이 씻고
진작 쇄신하는 굉규(宏規)를 세우소서. ”
“국가에서 법을 심각하게 하여 독책하려는 의도를 조금도 너그럽게 하지 않는 이유는
오직 누적된 포흠을 징수하고 물린 부세를 받아들이는 데 있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것이 과연 무슨 계책인지를 모르겠습니다.
누적된 포흠의 폐단에 대해서는 전후 제신들이 누차 논하였습니다.
탕감시키자는 의논이 일찍이 금년 봄에 한 번 발론되었고
일이 거의 시행되게 되어 있었습니다만 갑자기 다시 조절(操切)하는 말 때문에
중도에 저지되고 말았습니다. 아, 그 문서를 남겨 두어도 국가에서 곡식을 얻어 내기에
부족하지만 없애버리면 민심을 얻을 수가 있는 것이니, 헛된 장부를 견감시켜
실제적인 혜택을 베푸는 계책으로는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신이 지난 가을에 병랑(兵郞)으로 있을 적에 마침 군포(軍布)를 관장하고 있었으므로
복심(腹心)인 경부(京府)의 저장 또한 헛군데로 흘러나가는 것이 상당히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숙경공주의 집을 지을 적에 토목 공사의 공역(功役)이 3년 만에 끝이 났는데
신이 삼가 공장(工匠)과 모역(募役)의 역가(役價)를 계산하여 보니 2백 14동(同) 남짓 되어
금(金)으로 환산하여도 7천, 8천 냥을 밑돌지 않는 숫자였고,
거기다가 다시 탁지(度支)의 양료(糧料)와 내사(內司)의 비용까지를 계산하여 본다면
반드시 1만 냥이 차고도 남을 것입니다. 진실로 하나의 궁(宮)을 짓는 데 드는 비용을
한 해 민역(民役)의 대신으로 옮겨 충당시킨다면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신은 여기에서 더욱 전일 간신(諫臣)의 소장 내용을
당초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현종이 그의 건의를 모두 수용해 민심 이반을 막긴 했으나 이는 나라 재정에 곧 부담으로 돌아왔다.
1665년 10월 청나라에서 사신이 파견되자
이를 맞이할 원접사 박장원(朴長遠)의 문례관으로서 청국 사신을 영접하고 돌아왔다.
4.5 삼사 언관 활동
1666년 4월 수찬, 9월 다시 수찬이 되었다.
10월 재난이 발생하자 부교리 홍만용(洪萬容)·심재(沈梓)와 함께
왕에게 근신할 것을 청하는 상언을 올리기도 했다.
11월의 경연에 입시했을 때는 경연을 계속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백골징포와 황구첨정의 폐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묵살되고 고쳐지지 않았다.
1666년 11월 경연검토관이 되고,
11월의 경연에서 어린아이를 병역에 넣는 자들에 대한 강경 처벌을 요청하였다.
“조정에서 어린아이를 정군(定軍)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각도의 수령은 금지령을 무시한 채 젖먹이 아이까지도 모두 찾아 내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마땅히 그 법을 거듭 밝혀서 지금부터 만일 어린아이로 정군하는 자가 있으면
그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현종이 흔쾌히 승낙하여 각 도에 암행어사를 보내
어린아이를 정군과 군역, 군포 징수대상으로 넣은 지방 수령들을 추고, 파면시켰다.
1666년 11월 겸 세자시강원 문학, 1667년 1월 부수찬이 되었다가
2월 홀로 합계한 김익렴, 이숙 등을 규탄하고 사직하려 하였으나 현종이 만류하였다.
3월 수찬이 되었다. 이후 이조정랑, 사간원헌납,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그러나 한동안 서인의 분당으로 한당(漢黨)에 가담하여
집권당이던 산당(山黨)에게 중용(重用)되지 못하였다.
1669년 7월 부교리, 1670년 2월 사간원헌납이 되었다.
이때 어머니의 회갑잔치를 지나치게 성대하게 한 전라감사 김징 등을 공격하였다.
3월 이조 좌랑을 거쳐 세자시강원의 겸직을 맡았으나,
뇌물을 받은 김징(金澄) 등을 탄핵하고 스스로 사직하였다.
6월 부수찬, 8월 교리를 지냈다. 그해 10월 부교리 최후상(崔後尙),
부수찬 이훤(李藼)·신후재(申厚載) 등과 함께 세출액의 수를 줄일 것을 청하였다.
이후 과거 시험에 답안지가 뽑히지 못했으나
아버지 이원정의 해명으로 과거에 합격하게 된 이담명을 계속 물고 늘어졌다.
1673년 5월 교리, 6월 헌납, 7월 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바로 헌납이 되었다.
7월 8일 이조 좌랑, 7월 10일 이조 정랑 등을 지내고, 1674년 2월 부응교가 되었다.
4.6 2차 예송 논쟁 전후
당시 서인의 분파가 가속화되자 그는 한당(漢黨)에 속했다.
한당이던 그는 집권당이던 산당(山黨)과 갈등하였고, 그의 할아버지 김육이 시행하려던
대동법을 산당의 김집, 송시열 등이 적극 반대하고
비판을 가했던 점 역시 송시열 등에게 악감정을 갖는 원인이 되었다.
결국 산당의 압력으로 요직에 중용되지 못하였다.
1674년 세자시강원 겸보덕(兼輔德)에 이어 좌부승지가 되었다.
1674년(현종 15년) 용인의 충렬서원의 원장을 지냈다.
1674년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상복을 입는 복상문제로 제2차 예송논쟁이 일어나자,
서인이었음에도 남인의 온건파 허적 등과 결탁하여
송시열·송준길·김수항(金壽恒) 등의 산당 훈신들을 숙청하고 특진되어
수어사(守禦使), 승정원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이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고 또 홍문관, 예문관 양관의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4.7 북벌론 실패
1674년부터 남인 허적과 윤휴 중심으로 북벌론이 계획되었다.
김석주 역시 북벌론 재개에 지지 의사를 표했고
곧 체부(도체찰사부) 부활과 만과 설치, 병력 선발 등의 안이 건의되었다.
송시열은 유배소에 있으면서도 이 점에는 깊이 공감하고 지원하라는 글을 문하들에게 보낸다.
그러나 허목은 서인에게 유화적이었던 허적의 태도에 불만이었고,
김석주의 지지의 본심을 의심한다.
한편 1676년에 연중(筵中)에서 대사헌 윤휴가 북벌의(北伐議)를 주장하니
병조판서 김석주가 말하기를 군사를 출전시킬 시기는 이미 정하여졌으나
군량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고 말하니
당시 이조참판인 심재(沈梓)가 나가서 말하기를
복수하여 설욕하는 대의는 진실로 좋으나
작은 나라로서 위험한 때에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그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
북벌론에 적극 찬성하던 그는 국가의 보장지지(保障之地)인 강화(江華)를 직접 둘러보고
군비를 더욱 강화할 필요성을 느껴
강화연안(江華沿岸) 요소 요소에 돈대(墩臺)를 구축할 필요성을 느끼고
49개 처의 돈대를 구축할 것을 의정부에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그의 건의가 수용되면서 53개 처의 돈대를 구축하였다.
서인, 남인의 당론이 일치하면서 일시적으로 통합이 가능하였으나
남인의 당수였던 허목은 불가함을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
장정을 많이 징발하면 국가의 일꾼이 없어진다는 것과
청나라는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에다가 국론까지 분열되었는데 상대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남인 강경파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북벌론은 다시 묻혀진다.
결국 송시열은 같은 남인이던 윤휴의 북벌론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북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4.8 생애 후반 남인 숙청 공작
이후 훈련대장(訓練大將)과 판의금을 겸하고
이후에 남인 정권에서 특별히 의정부우의정에 올라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하였다.
그러나 남인이 집권 이후 허적의 서자 허견이 횡포를 부리고,
숙부인 김우명의 첩과 말싸움 끝에 김우명의 첩의 이빨을 부러트리는 등의 행패를 부렸으며,
게다가 처경 왕족 사칭 사건으로 조정의 기강이 헤이해지고,
남인 윤휴 등도 토목업자 등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등 남인계의 부패행위가 도를 넘어서게 되자
그는 다시 송시열의 문하생인 김익훈과 내통하여 남인을 타도할 계획을 세운다.
그 뒤 허적과 등을 돌리고 다시 송시열과 결탁하여 남인을 역모로 몰고
그 공으로 보사공신(保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청성부원군(淸城府院君)으로 진급했다.
1682년(숙종 8년) 병조 판서로 있을 때 국가 재정을 줄이고
왕권 호위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훈련도감의 경번군(更番軍)인 훈련별대(訓鍊別隊)와
병조(兵曹) 소속의 갱번군인 정초군(精抄軍)을 통합하여
금위영을 설치케 하고 대장(大將)을 겸하였다. 이후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했고
1682년 5월 우의정이 되었고, 그해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했으며,
이어 김익훈(金益勳)과 함께 남인의 완전 박멸을 위해 김환, 전익대 등을 사주하여
허영, 허새 등 남인들이 모역한다고 고변하게 하는 등 음모를 꾀하였다.
이로써 서인 청류파의 비난을 샀다. 1683년, 사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4.9 최후
사은사(謝恩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음험한 수법으로 남인의 타도를 획책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로부터 심한 반감을 사 정치적으로 몰락했고,
이는 바로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1684년 9월 병으로 은퇴해 있다가 사망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0세였다.
4.10 사후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축출되고 공신의 호를 박탈당하였으나
후에 1694년의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권되었다.
허새의 옥사가 무고로 드러나면서 남인은 그를 탄핵,
부관참시를 기도하였으나 숙종의 완강한 반대로 부관참시는 모면하였다.
사후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가 출향되었으나,
1886년(고종 14) 다시 복권되면서 숙종묘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식암집》, 《해동사부(海東辭賦)》 등이 있다.
이관명이 나정기에게 보낸 편지(1715년)
5. 이관명(李觀命, 1661 ~ 1733)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영조 때 영의정 홍치중, 영의정 정호, 좌의정 민진원과 노론 4대신 중 한 명이며,
영조 때 좌의정을 지냈다. 이사명, 좌의정 이이명의 사촌이고, 좌의정 이건명의 동생이다.
본관은 전주. 자는 자빈(子賓), 호는 병산(屛山).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세종대왕의 서자 밀성군 이침의 후손으로 광원군 이구수의 5대손이다.
할아버지는 효종~숙종대의 서인 정승 백강 이경여였고,
백부 이민적의 아들이 숙종 때의 서인 이사명과 후일 숙종과 독대를 한 후,
신임환국 때 노론 4대신이 된 이이명이고, 동생은 역시 노론 4대신인 한포재 이건명이다.
숙종 때 문과에 급제해서 지평, 사서, 부수찬, 교리, 시독관, 부교리, 검토관, 겸문학, 수찬,
이조좌랑, 겸사서, 헌납, 부응교, 겸필선, 집의, 부사과, 겸보덕, 보덕, 응교, 시강관, 사인,
사간을 거쳐 승지가 되고, 대사간, 이조참의, 이조참판, 부제학을 거쳐 대사간이 되고
이후 예조참판, 이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대사성,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을 거쳐
동지의금부사, 부제학을 하다 이후 이조참판과 홍문관제학을 겸하고
형조판서와 예조판서로 제술관을 겸한 뒤
다시 이조판서, 대제학, 예조판서를 거쳐 경종 때 동지경연사를 겸하며
예조판서, 대제학, 형조판서, 공조판서를 하며 좌부빈객을 겸했으나 신임사화로 파직되었다가
이후 영조 때 지돈녕부사를 거쳐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이르렀고
나중에 판중추부사로 물러난다.
그뒤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728년(영조 5) 이인좌의 난 진압 직후 분무원종공신 1등(奮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되었다.
이정신 글씨
6. 이정신(李正臣, 1660 ∼ 1727)
6.1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방언(邦彦), 호는 송벽당(松蘗堂).
이명한(李明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만상(李萬相)이다.
아버지는 군수 이봉조(李鳳朝)이며, 어머니는 전라감사 홍주삼(洪柱三)의 딸이다.
6.2 생애 및 활동사항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1699년(숙종 25)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벼슬길에 나가 정언·수찬·응교·장령·헌납 등 삼사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1711년 동래부사로 외보(外補)되었으며,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1716년 병조참의에 올랐고,
1721년 경종이 즉위한 뒤 호조참판에 배수되고 사은부사(謝恩副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돌아와 도승지에 임명되어 소론으로서, 조태구(趙泰耉) 등과 더불어
노론의 세력을 탄핵,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그뒤 병조참판을 거쳐 외직으로 나가 경기도관찰사·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신임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유배되었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해주에 있는 이관명(李觀命)이 찬한
「인조대왕탄강구기비(仁祖大王誕降舊基碑)」 음기(陰記: 비의 뒷면에 쓴 글)의 글씨가 남아 있다.
남이 해 할지라도 나는 아니 겨로라니
참으면 덕이요 겨로면 같으리라
굽음이 제게 있거니 겨를 줄이 있르랴
- 이정신 시조 -
조선인조탄강구기비(朝鮮仁祖誕降舊基碑)
이 비는 1720년(숙종 46년)에 황해도 해주군 해주면 남본정에 건립된
조선인조탄강구기비(朝鮮仁祖誕降舊基碑)이다.
이후 옹정 5년(1727년) 2월에 영조의 명을 받들어 추각(追刻)하였는데,
해주로 어가가 옮겨 머무르다가 서울로 돌아온 달은 실록을 상고하니 8월이고,
몇 개월은 한달 남짓으로 고쳐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관명(李觀命)이 찬하였고 이정신(李正臣)이 글을 썼으며 제액(題額)은 김제겸(金濟謙)이 썼다.
비석의 이면(裏面)에 의하면 인조대왕이 탄생한 내력을 소상하게 적고 있다.
임진년(1592년)에 소경대왕(昭敬大王:선조)이 의주로 행차했다가 10월에 어가를 해주로 옮겨
수개월간 머물다가 서울로 돌아오면서 왕비와 여러 왕자 및 비빈들에게는 그대로 머물게 하였다.
그리고 을미년(1595년) 11월 7일에 인헌왕비(仁獻王妃)가
해주 백성인 우명장(禹命長)의 집에서 인조대왕을 낳았다고 한다. 그 후 현종 6년(1665년)에
목사(牧使) 홍석기(洪錫箕)가 그 곳을 찾아가 옛터를 공전(公田)으로 바꾸고 담장을 둘러쳐 보호하였고,
숙종 14년(1688년)에 관찰사 김구(金構)가 담장을 쌓고 대(臺)를 짓고
돌을 깎아 기문(記文)을 청하였으나 국상을 당하여 겨를이 없었다.
숙종 16년(1690년)에 관찰사 권환(權瑍)이 상서하자 비석을 대(臺)에 세우고
“인조대왕이 탄생하신 옛터(仁祖大王誕降舊基)”로 제(題)하고 오늘에 이르러 비문을 찬술한다고 하였다.
옛 인물들의 자취가 있는 곳을 후세에 길이 남기고
이를 계기로 하여 당사자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전형적인
유허비(遺墟碑)로서의 특색을 모두 갖춘 비이며, 인조 탄생의 시대적 배경 등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인조 대왕이 탄생한 옛터 비의 음기(陰記)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 홍문관대제학(兼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의금부성균관사(知義禁府成均館事)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세자우부빈객(世子右副賓客) 신 이관명(李觀命)이 명령을 받들어 찬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형조참의(刑曹參議) 신 이정신(李正臣)이 명을 받들어 쓰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사간원헌납(行司諫院獻納) 신 김제겸(金濟謙)이 명을 받들어 전액(篆額)하다.
왕세자가 대리청정한 지 3년되는 기해년에 신 이관명에게 명령하기를 “해주에 인조 대왕이 탄생하신
옛터 비가 있는데 우리 임금 16년 되는 경오년에 명하여 세운 것이다. 그런데 그 글이 곧 역신(逆臣)
이 찬술한 바라서 이것으로 후세에 전할 수는 없다. 너는 태사(太史)로서 그것을 개술(改述)하여 올려
라.” 하였다. 신이 글을 지으라는 명령을 받들어 의리상 감히 사양치 못하고 삼가 살펴보니, 황명(皇明)
만력(萬曆) 임진년에 일본 왜적이 대거 쳐들어왔을 때에 여러 군(郡)들이 함락되어 소경 대왕(昭敬大
王)이 서쪽으로 의주에 행차하였다가 계사년에 황제가 제독(提督) 이여송(李汝松)을 보내어 여러 장군
들을 독려하여 평양의 왜적을 크게 격파하고 드디어 서울을 회복하였다. 그 해 10월에 임금께서 어가
를 해주(海州)로 옮겨 수개 월간 머무르다가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왕비와 여러 왕자와 비빈들에게
는 그대로 머무르도록 하였다. 원종 대왕(元宗大王) 때에 잠저(潛邸)에 있으면서 해주 백성인 우명장(禹
命長)의 집에 머물렀는데 을미년 11월 7일에 인헌 왕비(仁獻王妃)가 우리 인조 대왕을 낳았다. 이날
홀연히 붉은 빛이 밝게 비치고 기이한 향기가 방안에 가득하였다. 부부인(府夫人) 신씨(申氏)가 꿈속에
붉은 용이 왕후의 옆에서 승천하는 것과 또 어떤 사람이 병풍에 글을 쓰기를 “귀한 아들이 천년 얻
음을 기뻐하네.”라고 하는 것을 꾸었다. 부부인이 즐거워하다가 꿈에서 깨니 이미 인조 대왕이 태어나
있었다. 오호라. 하늘이 위대한 성인을 나라의 운명이 엎어질 때에 내시어 마침내 혼포(昏暴)한 군주
를 축출하고 종사(宗社)를 받들어 해동(海東)을 중흥(中興)시키는 임금이 되고 만세의 굳건한 기틀을
열었으니, 그 뜻이 어찌 우연이라고 할 수 있으리오. 수산(首山)의 맑고 맑은 기운이 당시에 신령스러
운 것 또한 마땅히 춘릉(春陵)의 울울창창함과 더불어 칭송하며 표장(表章)하여 영세토록 전하고자 한
다. 그러나 먼 지방이 세월 속에 바뀌고 징험할 문헌도 없어서 단지 옛 노인들이 서로 전하는 말과 행
로(行路)의 지점에만 의지하니 한탄스러운 것이 오래되었다. 현묘(顯廟) 6년 을사년에 목사(牧使) 신 홍
석기(洪錫箕)가 그곳을 찾아가 옛터를 공전(公田)으로 바꾸고 담장을 둘러쳐 보호하였다. 지금 임금 14
년 무진년에 관찰사 신 김구(金構)가 담장을 쌓고 대(臺)를 짓고 또한 돌을 깎아 조정에 아뢰어 기문
(記文)을 청하였으나 마침 국상을 당하여 겨를이 없었다. 경오년에 관찰사 신 권환(權瑍)이 상서하여
다시 청하므로 이에 비석을 대(臺)에 세우고는 제목하기를 “ 인조 대왕(仁祖大王)이 탄생하신 옛터”라
고 하였는데 금일에 이르러 비문을 다시 찬술한다. 이것이 그 일의 내용이다. 옛날에 송(宋)이 협마영
(夾馬營)의 일로서 성원(聖院)에 아뢰니 곧 태조와 태종이 탄생하신 땅에 아울러 절을 세우고 이름을
내려 후세에 전하게 하였다. 이제 우리 임금께서 비석을 세워 사실을 기록하여 성조(聖朝)가 태어나신
터라는 것을 천명하는 것은 옛날의 일보다도 탁월하다. 국가 만년토록 이수의 머리가 우뚝 솟아 한 고
을 백성들의 우러르는 바가 될 것이며 공경스러운 마음이 장차 무궁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아름답고
아름답도다.
강희(康熙) 59년 2월 일에 세우다. 해주로 어가가 옮겨 머무르다가 서울로 돌아온 달은 착오가 있어서
명하여 실록을 상고하니 10월의 10은 마땅히 8로 고쳐야 하며, 몇 개월은 마땅히 한달 남짓으로 고쳐
야 한다. 옹정(擁正) 5년 2월 일에 명을 받들어 추각(追刻)하다.
海州 朝鮮仁祖誕降舊基碑
仁祖大王降誕舊基碑(表 面)
(裏面)
仁祖大王誕降舊基碑陰記
資憲大夫吏曹判書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義禁府成均館事同知 經筵事
世子右副賓客臣李觀命奉 令撰
通政大夫刑曹叅議臣李正臣奉 令書
通訓大夫行司諌院獻納臣金濟謙奉 令篆
王世子代理之越三年己亥 令臣觀命若曰海州有
仁祖大王誕降舊基碑我
聖上十六年庚午所 命竪而其文乃逆臣之所撰不可以是傳後汝爲太史其改述以進臣承 令周章義不敢辭謹按
皇明萬曆壬辰日本賊大擧入寇列郡陷沒
昭敬大王西巡龍灣癸巳 皇帝遣提督李汝松督諸將大擊敗平壤賊遂克復京城其年十月 上移蹕海州留數月囘鑾而 命
留 王妃及諸 王子妃嬪
元宗大王時在潜邸寄寓于州民禹命長家乙未十一月七日 仁獻王妃誕生我 仁祖大王是日忽有紅光照耀異香滿室府
夫人申氏夢見赤龍騰于 后側又有人書諸屛曰貴子喜得千年府夫人欣然而寤則己 誕矣嗚呼天之篤生 大聖人於國
步板蕩之辰終使之黜昏暴奉 宗社爲海東中興之主而開萬世不拔之基其意豈偶然哉而首山淸淑之氣效靈於當時者亦
當與春陵之欝欝葱葱並稱而表章之以垂永世而遐鄕貿貿文獻無徵只憑故老之相傳行路之指點而咨嗟久矣
顯廟六年乙巳牧使臣洪錫箕訪尋舊址易以公田圍墻以護之今
上十四年戊辰觀察使臣金構築墻設臺且伐石而聞于 朝請
記之適値 國哀未遑庚午觀察使臣權瑍驛書申請於是立碑臺上題之曰 仁祖大王誕降舊基至今日改撰碑文此其事之
終始也昔宋以夾馬營啓聖院即太祖太宗誕聖之地並建寺錫名傳之後世今我 聖朝立石記實以闡明 聖朝發祥之基
者卓越前古而 國家萬年螭頭屹然爲一方黎庶之所瞻仰起敬將無窮期矣猗歟休哉
康熈五十九年二月 日立 移蹕海州及 囘鑾之月有差誤 命考 實錄十月之十當作八數月當作
月餘 雍正五年二月 日奉敎追刻
7. 김경문(金慶門, ? ∼ ?)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수겸(守謙), 호는 소암(蘇巖). 아버지는 김지남(金指南)이다.
숙종 때 역관이 되어,
1711년(숙종 37) 청나라에 파견되어 국경을 침범하는 자들을 잘 다스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백두산정계비를 세울 때 통역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1732년(영조 8)에 사행(使行)들이 책문(柵門)을 출입할 때
통역을 맡는 처지가 되었기 때문에 뇌물을 많이 받았다는 탄핵을 받았다.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편서로는 『통문관지(通門館志)』가 있다.
추월(秋月)이 만정(滿庭)한데 김기성(金箕性)
추월이 만정한데 슬피 우는 저 기러기
상풍(霜風)이 일고(一高)하면 돌아가기 어려우리
밤중만 중천(中天)에 떠 있어 잠든 나를 깨우는가
-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 -
8. 김기성(金箕性, 1752 ∼ 1811)
8.1 개설
본관은 광산(光山). 초명은 두성(斗性), 자는 성여(成汝),
호는 이길헌(頤吉軒). 참의 김상익(金相翊)의 아들이다.
8.2 생애 및 활동사항
1765년(영조 41) 14세의 나이로 장헌세자(莊獻世子: 사도세자)의 장녀(長女)인
청연군주(淸衍郡主)와 혼인하여 광은부위(光恩副尉)가 되었다.
『청구가요(靑邱歌謠)』에 김두성이란 이름으로 시조 2수가 전한다.
그러나 같은 시조 작품이 『악학습령(樂學拾零)』(일명 병와가곡집)에는 김기성이라는 이름으로 실리고
‘영조조(英祖朝)광은부위(光恩副尉)’라고 소개되어 있어
이 둘이 이명동인(異名同人)임을 짐작케 한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영조조에 김두성, 정조대에 김기성이란 기명(記名)을 사용하고 있고,
『광산김씨세보(光山金氏世譜)』에 의하면
‘두(斗)·기(箕)’자(字)가 같은 항렬임을 알 수 있어 동일인물임을 뒷받침한다.
실록에 의하면 김기성은 1790년(정조14)에 동지 겸 사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서사관(書寫官)을 지냈다. 『청구가요』에 김두성의 이름 아래 19수의 작품을 수록했으나
해당 작품을 다른 가집에서 확인해 보면 2수만 김두성의 작품이고
나머지 17수는 모두 박문욱(朴文郁)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청구가요』의 시조작가로 소개된 김두성은
광은부위였던 김두성(김기성)과는 전혀 관계 없는 별개의 인물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청구가요』에 실린 작자들은 편자인 김수장과 매우 친밀했던 동료나 후배들로서
당대의 대표적 가객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유독 광은부위만은
이 때 겨우 10대의 어린 나이로서 가객의 반열에 들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김수장과 교유하던 김두성이라는 가객이 먼저 있었고
뒤에 그의 작품이 동명이인이던 광은부위 김두성(김기성)의 작품으로
와전된 것이라는 추정도 논의된 바 있다.
그의 작품 중에 “추월(秋月)이 만정(滿庭)한듸……”라는 작품은
『악학습령』에 작자의 ‘17세작(作)’이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청구가요』가 편찬되던 시기(김수장의 나이 75∼80세 쯤)의
광은부위 김두성(김기성)의 나이와 일치한다.
이 때문에 반드시 다른 인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평가된다.
현전 작품 2수의 내용은 한벽당(寒碧堂)의 경치를 담담하게 읊은 것과
이별의 슬픔을 기러기에 부쳐 노래한 것이다.
천천[穿川] 하음(河陰) 신집(申楫 1580~1639)
何年神禹導龍門 어느 해에 신령스런 우임금이 용문을 뚫었더냐?
萬古方看斧鑿痕 오랜 세월동안 도끼로 찍은 흔적을 볼 수 있었네.
莫道吾東功不及 우리나라의 공력이 (중국에)미치지 못한다고 말하지 말라
至今遺跡此中存 지금까지 남은 자취가 이 곳에 있으니.
9. 신집(申楫, 1580 ∼ 1639)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여섭(汝涉), 호는 하음(河陰).
경상도 상주 출신. 신종위(申從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신연(申演)이고,
아버지는 주부(主簿) 신경남(申慶男)이다. 정경세(鄭經世)의 문인이다.
1606년(선조 3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문한직인 전적(典籍)을 지냈다.
광해군이 즉위한 뒤, 대북정권이 패륜행위를 거듭하자 벼슬을 버리고 명승지를 찾아 유랑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강원도도사로 종군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의병장이 되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이르렀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조가 강하였다.
성리학을 비롯하여 의약·복서(卜筮)·지리·천문 등에 통달하였으며,
스승 정경세와 학문과 의례에 대하여 많은 문목(問目)과 토론을 하였다.
상례(喪禮)와 복제(服制)에 관한 문목이 『우복집(愚伏集)』에 수록되어 있다.
10. 김경선(金景善 1788 ∼ 1853)
자는 여행, 본관은 청풍.
1830년(순조 3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39년 이조참의, 1841년 대사성을 지냈다.
1843년 전라도관찰사, 1851년 우참찬으로 진주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1853년 판의금부사에 올랐다.
그는 청나라에 다녀오면서〈연원직지 燕轅直指〉라는 연행기를 기록했다.
청나라가 서세동점에 시달리고 있는 상황을 보고하고
뒷날의 아편전쟁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조두순 글씨
11. 조두순(趙斗淳, 1796 ∼ 1870)
11.1 요약
40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순조·현종·철종·고종 등 4명의 왕을 보필했다.
요직을 두루 역임한 관료로서 문서 편찬과 폐정개혁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26년 황감제시에 장원, 같은 해 중광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규장각대교로 뽑힌 뒤 겸사서·승지·대사성을 지냈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한 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중앙요직을 지냈고,
1853년 우의정을 거쳐 1858년 좌의정에 올랐다. 고종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1865년 영의정에 올라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전적인 신임을 받아 국정에 참여했다.
삼군부를 부활시켰고, 경복궁 재건, <대전회통> 편찬 등을 지휘하여
세도정치 기간 중 실추되었던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대원군의 명을 받아 천주교를 철저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11.2 개설
본관은 양주. 자는 원칠, 호는 심암. 아버지는 목사 진익이며, 어머니는 박종악의 딸이다.
1826년(순조 26) 황감제시(매년 제주도에서 진상한 밀감을
왕이 성균관 유생들에게 하사하면서 거행하는 일종의 과거시험)에 장원하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이듬해 규장각대교로 뽑힌 뒤, 겸사서·승지·대사성을 지냈다.
1834년 헌종이 즉위한 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판·황해도관찰사·공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 중앙요직을 지낸 후
1848년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
1849년(철종 즉위) 대제학에 이어 이조판서·지중추부사를 지냈고,
1853년(철종 4) 우의정을 거쳐 1858년 좌의정에 올랐다.
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자 명복의 추대를 적극 주장하여 조대비로 하여금
즉위전교를 내리게 함으로써 고종 즉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65년(고종 2) 영의정에 올라 조대비와 흥선대원군의 전적인 신임을 받으며 국정에 참여했다.
1866년 벼슬을 그만둔 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869년에 봉조하가 되었다.
그는 40년 동안 관직에 있으면서 순조·헌종·철종·고종 등 4명의 왕을 보필했고,
요직을 두루 역임한 관료로서 문서편찬과 폐정개혁 등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849년 예문관대제학으로 실록청도당상이 되어 〈헌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했고,
이듬해 철종의 친아버지인 전계대원군의 신도비문을 지었다.
1851년(철종 2)에는 외교문서집 〈동문휘고 同文彙考〉를 편찬했다.
1862년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각지에서 농민항쟁이 계속 발생하자,
정원용·김흥근(金興根)·김좌근(金左根)과 함께 삼정이정청의 총재관이 되어 개혁방안을 수립했다.
당시 정부관료들은 농민항쟁이 삼정문란으로 인한 것으로 파악했는데,
조두순은 그중에서도 특히 환곡제도의 폐단을 가장 심각한 원인으로 파악해,
파환귀결을 실시할 것을 적극 주장했다.
파환귀결이란 환곡을 없애고, 그 이자로 충당하던 국가의 재정수요를 대신
토지에 옮겨 1결당 2냥씩 받는 방법이다.
이는 토지소유자가 환곡세의 부담을 지게 되는 개선책으로
조선 후기 이래 지배층이 계속해서 지향해온 균부균세를 지향하는 세제개선방안의 하나였다.
삼정이정청에서는 오랜 논의 끝에 조두순의 주장을 채택했으나,
당시 환곡제를 통해 이익을 보던 계층들의 반발 때문에 실시가 지연되었으며,
게다가 1863년 철종이 갑자기 죽어 일부지역에서만 실현되었다.
고종이 즉위한 후 조두순은 1864년(고종 1) 〈철종실록〉 편찬의 총재관이 되어 이를 간행했다.
이듬해 영의정이 되어 삼군부를 부활시켰고, 경복궁 재건,
〈대전회통〉 편찬 등을 지휘하여 세도정치 기간중 실추되었던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또한 대원군의 명을 받아 천주교를 철저하게 탄압하기도 했다.
저서로 〈심암집〉이 있다. 시호는 문헌이다.
□ 논문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과 관련 자료들
▲제5폭 <산해관 동라성(山海關 東羅城)> 북경으로 가는 천하제일관이라는 산해관의 동쪽 나성을 그린 것으로,
조선 사절단이 해자(垓字) 위 다리를 건너고 있는 모습이다.
'김홍도 作' 숭실대 연행도
['김홍도 作' 숭실대 연행도] 연행사절 노정 파노라마 묘사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이 김홍도 작품임이 확실하다고 보고한
연행도(燕行圖)는 총 14폭을 전체 627.2㎝ 길이인 종이에 세로로 이어붙인 형식이다.
이 중 제1폭은 청나라로 파견되는 조선 사신단이 정월 초하루에
북경의 자금성(紫禁城) 태화전(太和殿)에서 청 황제를 배알하고 신년 하례하는 의식 절차를
'조선사신 부 연경시 연로 급 입공 절차'(朝鮮使臣赴燕京時沿路及入貢節次)라는 제목 아래 기록했다.
조선의 외교 절차 등을 기록한 통문관지(通文館志)라는 문헌에도 그대로 보이는 이 문장은
이 연행도가 중국에 무수하게 파견된 사신단 중에서도 새해 첫날 중국 황제를
조알(朝謁)하는 동지사(冬至使)를 소재로 했음을 엿보이는 대목이다.
나머지 제2폭 이후 14폭까지가 실제 연행과 관련한 그림이다.
현재는 1장짜리 두루마리 형식이지만 원래 이런 모양은 아니었다.
화면 하나는 세로 35.4㎝, 가로 45.3㎝ 정도 크기이며 각 화면 가운데는 접힌 흔적이 있다.
따라서 이 연행도는 원래는 책 형태인 화첩(畵帖)이었다가
나중에 이를 소장한 누군가가 배접을 해서 두루마리 형식으로 바꿨다고 짐작된다.
각 화면 오른쪽 상단에는 어느 장소, 어떤 일을 그렸는지를 밝힌
제기(題記)가 있었지만 훼손되어 대부분 알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연행도 전문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은주 박사는 다른 연행도나
현지답사 등을 통해 각 화면이 무엇을 소재로 했는지를 다 밝혀냈다.
이에 의해 제2폭 화기는 '臺'(대)라는 한 글자만 남았지만 구혈대(嘔血臺)임을 알아내고,
제3폭은 누가 봐도 만리장성 그림이며,
실제 화기에서도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는 글자를 희미하게나마 확인한다.
4폭에서는 영원패루(寧遠牌樓)라는 제목을 읽을 수 있다.
5폭 제목은 완전히 지워졌지만 산해관(山海關) 동라성(東羅城)임을 알아냈고,
6폭은 중간에 한 글자가 지워졌지만 망해정(望海亭)임을 쉽사리 알 수 있다.
7폭은 '門'(문)이라는 마지막 글자만 남았지만 조양문(朝陽門)임이 드러난다.
첫 글자가 지워진 8폭은 태화전(太和殿)임을 쉽사리 알 수 있고,
9폭은 조공(朝貢)이란 두 글자가 뚜렷하다.
10폭 이후 13폭까지는 모두 제목 글자가 없어졌지만 각각 벽옹과 오룡정(五龍亭),
정양문(正陽門), 그리고 유리창(琉璃廠)임을 알 수 있으며,
마지막 14폭은 서산(西山)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따라서 제2폭 구혈대 이후 6폭 망해정까지는
한양에서 출발한 사절단이 산해관으로 들어가는 과정까지 들른 주요 사적을 그렸으며
7-9폭(조양문ㆍ태화전ㆍ조공)은 실제 청 황제를 배알하는 행위를 소재로 했다.
반면 10폭(벽옹) 이후 14폭(서산)은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마친 사신단이
북경 일대를 유람하면서 들른 주요 관광지나 명승지를 소재로 했음을 알 수 있다.
이 연행도는 1931년 동경부(東京府)미술관에서 열린 조선 명화 전람회에 처음 소개됐으니,
당시 그 도록으로 발간된 '조선명화전람회목록'에는 연행도 중에서도 제12폭인 정양문을 게재하고는
일본인 아유가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1864-1946)이 소장한 노가재연행도(老稼齋燕行圖)라고 했다.
노가재란 연행을 한 경험이 있는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호.
이에서 비롯되어 후대에 이 화첩은 노가재가 1712년 11월 3일 동지사 정사이자 친형인
김창집(金昌集.1648-1722)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동행한
김창업의 사행(使行)과 관련된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이것이 숭실대 교수를 역임한 매산(梅山) 김양선(金良善.1907-1970)의 수중에 들어가고,
1967년 그가 설립한 한국기독교박물관 전체를 숭실대에 기증함에 따라 소장처가 이동됐다.
이후 이 연행도는 어찌 된 셈인지 1760년 작품이라 소개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 연행도 제10폭이 소재로 삼은 벽옹은 청나라 국가 최고 학부인 국자감의 공묘 서측에
1784년 겨울 준공됐다는 점에서 제작 시기는 당연히 그 이후가 되어야 한다.
한국기독교박물관이 그 영인본을 제작하면서 이 연행도를 상세히 조사하는 과정에서
제작시기와 관련해 이런 중대한 사실을 밝혀내고, 아울러 그것이 다름 아닌
단원 김홍도의 작품으로 확신해도 좋다는 결론을 도출하게 된 것이다.
항해조천도(航海朝天圖), 재질 종이, 40.8cm*34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인조의 책봉을 요청하기 위해 1624년에 명나라에 파견된 이덕형(李德泂) 일행의 사신 행차 길을
담은 그림이다. 모두 25점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은 당시에 제작된 《연행도폭(燕行圖幅)》을 토대로 18
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전반 무렵에 다시 모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서장관(書狀官)으로 함께 갔던
홍익한(洪翼漢)의 『화포선생조천항해록(花浦先生朝天航海錄)』에는 사행의 규모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갖가지 일화가 매우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그림의 끝부분에는 훗날 바닷길을 이용해 사행할 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사행길을 그림으로 그리게 했다는 이덕형의 글이 적혀 있다.
조선시대 사행기록화 - 옛 그림으로 읽는 한중관계사
저자 정은주
출판 사회평론 | 2012.7.10.
페이지수 616 | 사이즈 175*239mm
판매가 서적 32,000원
책소개
『조선시대 사행기록화』는 옛 그림을 통해 한중관계사를 읽어내도록 이끌어주는 책이다. 한국학중앙
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정은주의 박사학위 논문을 근간으로 삼은 것으로, 한중 양
국 간 대외인식의 변화와 외교 절차 전반을 살펴본다. 더불어 그 결과물로 제작된 기록화의 시기별
특징과 내용을 고찰하여 미술사적 의의를 모색하고 있다. 화원 뿐만 아니라 중국과의 회화교류와 수
용 및 전개에 영향을 미친 연행 구성원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다.
저자 : 정은주
저자 정은주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에서 미술사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주요 연
구 분야는 조선시대 대외관계 기록화 및 회화식 고지도이다. 현재 한국고지도연구학회 학술이사로 활
동하고 있으며,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저로는 「연행사절의
서양화 인식과 사진술 유입」(2008), 「연행 및 칙사영접에서 화원의 역할」(2008), 「건륭연간 만국
래조도 연구」(2011), 「계미(1763)통신사행의 화원 활동 연구」(2011), 「강화부궁전도의 제작배경
과 화풍」(2009), 「조선후기 회화식 군현지도 연구」(2011), 「김정희의 연행과 서화교류」(『김정
희와 한중묵연』, 과천문화원, 2009), 「조선후기 부경사행과 연행도」(『연행, 세계로 향하는 길』,
실학박물관, 2010) 등이 있다.
목 차
I. 들어가며 13
II. 조선 전기 명나라 사행과 기록화 23
1. 명과의 관계와 외교절차 30
1) 조선 전기 명과의 관계 30
2) 명나라 사행과 외교절차 32
3) 명 사신을 영접하는 절차 37
2. 명나라 사행을 그린 기록화 41
1) 명나라 사행기록화 41
2) 조선사절단의 계회도 46
3. 명 사신 영접을 그린 기록화 48
1) 명 황제의 조서를 맞는 영조도 49
2) 명나라 경리와 군문 접반도 58
3) 명 사신 반차도 69
4) 관서지역과 한강유람도 76
III. 조선 중기 바닷길로 간 명나라 사행과 기록화 93
1. 명과의 관계와 해로사행 95
1) 명청교체기 조선과 중국 95
2) 명청교체기 해로사행 노정 98
2. 해로사행기록화 관련 문헌기록 105
1) 해로사행기록화에 대한 기록 105
2) 해로사행기록화의 제작목적 115
3. 해로사행기록화의 내용과 사료적 가치 120
1) 바닷길 노정 : 곽산에서 등주외성 120
2) 육로 노정 : 등주부에서 북경 137
4. 해로사행기록화의 양식적 선후관계 160
IV. 조선 후기 청나라 사행과 기록화 171
1. 청과의 관계와 사행 173
1)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173
2) 조선 후기 청나라 사행 175
2. 조선 후기 청나라 사행기록화 186
1) 화원 이필성이 그린 청나라 사행, 《심양관도첩》 189
2) 시화로 엮은 강세황의 청나라 사행, 갑진연행시화첩 228
3) 1784년 이후 청나라 사행, 《연행도》 273
4) 19세기 청나라 사행을 그린 기록화 302
5) 청나라 관련 기타 회화 306
3. 조선시대 중국사행 및 영접에서 화원의 활동 320
1) 조선사절단의 구성과 화원 321
2) 중국사행에 동행한 화원 활동 324
3) 중국사신 영접에서 화원의 활동 329
V. 청에서 제작된 조선 관련 기록화 351
1. 청 사신 아극돈의 조선사행과 《봉사도》 353
1) 《봉사도》를 그린 청나라 화가, 정여 355
2) 화첩 순서와 제작 연대 360
3) 사행의 노정에 따른 주제와 화풍 364
4) 《봉사도》와 조선의 외교 의례 384
2. 청나라 궁중 회화에 묘사된 조선인 399
1) 황청직공도의 조선인 399
2) 만국래조도의 조선사절 416
3. 청인이 그...
책 속으로
130p.
《연행도폭》 제3폭부터는 본격적으로 조선의 영해를 벗어난 중국령의 해로 위에 출현한 어룡(魚龍)
을 그린 것이다. 해로를 통해 명에 차견되었던 조천사 일행은 철산 앞 바다를 전후한 곳에서 배의 순
항을 위해 기풍제(祈風祭)를 수차례 올렸는데, 이국의 바다 한가운데서 만난 악천후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룡의 출현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면 위 석성도 부근에 나타나는 용의 승천 장
면은 1624년 사행을 기록한 서장관 홍익한의 『조천항해록』과 정사 이덕형의 『죽천유고』에 실린
『조천록』의 1624년 8월 12일의 기록 내용과 상호 연관성이 엿보인다.
…그림에서 석성도 부근에 검은 운기(雲氣)가 하늘을 감싸고 그 가운데 형체를 온전히 드러내지 않은
용이 승천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러한 자연 현상은 실제 용이 출현했다고 보기 어렵고, 바다에서 대
기의 불안정으로 물기둥이 치솟는 용오름 현상으로 추정된다.
-3장 「조선 중기 바닷길로 간 명나라 사행과 기록화」 중에서
228p./267p.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은 1784년 10월부터 1785년 2월까지 정사 이휘지(李徽之,
1715-1785), 서장관 이태영(李泰永, 1744-1803)과 함께 진하사은겸동지사행(進賀謝恩兼冬至使行)의
부사로 연행하였다.
강세황 일행이 중국에서 교유한 정황은 이휘지가 소장했던 시화첩과 같은 형식으로 1785년 초에 제작
된 영남대학교박물관 소장 《연대농호첩》에서도 확인된다. 연대(燕臺)에서 붓을 희롱한다는 의미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강세황의 중국사행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 시화첩에는 2폭에 걸쳐 ‘연
대농호’라고 내제를 쓰고, 제3폭에 행서로 쓴 육유(陸游, 1125-1210)의 칠언절구를 비롯하여 중국
역대 문인들의 시문을 강세황의 유려한 서체로 옮기고 사군자도를 함께 장황하였다.
228p.
《연행도》 제7폭부터 제9폭까지는 조선사절이 북경에 도착하여 체류 중 행한 공적 활동 공간인 조양
문 동악묘, 태화전 등과 외교의례를 그리고 있다. 제7폭 〈조양문(朝陽門)〉은 화면의 박락으로 화제
가 드러나지 않지만, 북경성의 동문 조양문을 중심으로 그 일대 동악묘(東嶽廟)와 일단(日壇)을 그린
것이다. 조양문 앞은 늘 거마에 막혀 조선사절이 성문에 도착하면 한나절이 지나서야 비로소 갈 수
있을 정도로 번화한 곳이었다. 조양문은 본래 원나라 대도(大都)동문인 제화문(齊化門)으로 1368년
(홍무 원년) 축조 이래 여러 차례 중건하였고, 1439년(정통 4)에 성루와 옹성 등을 개건하여 조양문
이라 개칭하였다. 성루 체제는 정면 5칸으로 숭문문(崇文門)과 거의 일치하였다. 성문과 전루를 옹성
이 에워싸고, 문루는 삼중 처마에 청와(靑瓦)를 올렸다. 옹성 위에도 역시 이중처마에 청와를 올린
적루(敵樓) 형태의 문루가 있었다. 화면은 북경 조양문이 오늘날 현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기록
적 가치를 더...
조선시대 한중관계사의 빈 부분을 그림으로 채우다
조선시대 사신 행렬에는 언제나 화원(畵員)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의 임무는 외교절차를 그리는 것
뿐만 아니라 가는 길의 풍경과 사적(史蹟) 등 사행 전반의 모습까지 자세히 묘사해오는 것이었다. 사
신이 사행을 떠날 때부터 마칠 때까지, 양국 간 교류가 이루어지는 곳에는 언제나 화원이 있었다. 사
행기록화는 이렇게 탄생한 ‘기록으로서의 미술’이다.
저자는 기존 문헌기록과 관련 그림을 함께 분석하여 당시 사행의 모습을 완벽히 고증해낸다. 또한
[조천도], [연행도] 등에 나타난 당대의 화법을 분석하고, 강세황, 김정희 등의 작품과 사행의 연관
성을 면밀히 밝힌다. 이를 통해 사행기록화는 역사적 사건을 재현한 사료로 인정받는 한편, 기존 한
국미술사에 새로운 범주를 제시한다.
목숨을 건 사행길, 그리고 화원
조선은 해마다 명(明)에 사신(使臣)을 보냈다. 고된 사행 여정은 명청교체기에 이르러 더 험난한 바
닷길로 가게 되었다. 조각배에 몸을 싣고 성난 파도와 싸우며 사행을 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었
다. 실제로 많은 사신들이 바다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624년 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한 이덕형(李德泂, 1566-1645) 일행은 생사를 오
간 해로사행을 함께 한 우의를 기리기 위해 자신들의 여정을 기록하여 나누어 가진다. 여기에는 후에
같은 길로 사행을 가야 할 사신들을 위해 자료를 만들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남긴 기록에는 위기의 순간을 포착한 그림도 있었다. 현재 전해지는 해로사행기록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천도], [항해조천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연행도폭], 육군박물관 소장
[조천도]-에는 바다 위에서 고군분투하는 이덕형 일행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는 당시에도 오늘날
종군기자마냥 위험을 무릅쓰고 생생한 사행현장을 화폭에 담아낸 사람들이 있었다는 얘기. 바로 사행
에 참여한 화원(畵員)들이 그 주인공이었다.
조선의 외교 현장에는 언제나 화원이 있었다. 사진이 없던 시절, 외교 현장을 이미지로 남기는 것은
화원의 몫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까지 공식적인 조선 외교사에서 주목하지 않는 대상이었다. 그
나마 조선시대 외교와 화원의 관계는 일본 통신사행과 관련하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조선 화원의 그
림 자체가 큰 이슈였던 일본 통신사행과 달리, 중국 부경사행에서의 화원은 그리 비중 있게 다루어지
지 않았다.
화원의 사행, 정치ㆍ문화적 목적 동시에 달성
그러나 조선의 입장에서는 중국사행의 비중이 더 컸다. 일본 통신사행에서는 화원이 사신단의 책임자
인 정사의 추천으로 결정되었지만, 중국 부경사행에는 도화서 녹취재 시행 결과에 따라, 즉 시험에
통과한 ...
출처 : 인터넷 교보문고
[조선시대 사행기록화] - 옛 그림속에 담긴 그들의 여정
정은주 지음 | 사회평론 | 2012. 7
“누런빛이 공중에 비치고 금빛 하늘이 위아래로 번쩍이는 것만 볼 수 있었다.‥‥(중략)
뱃사공은 황룡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글은 1624년 중국사행을 다녀온 이덕형이 중국령의 해로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다.
《연행도폭》제3폭 [석성도], 17세기, 지본담채, 37.5x65cm, 국립중앙도서관
17세기에 석성도 부근을 그린 그림은 좀 더 구체적으로 상황을 제시하는데
이국 바다에서 만난 악천후와 어룡의 대한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대기의 불안정으로 물기둥이 치솟는 용오름 현상이 그리보였을터.
그림에 그려진 승천하는 용의 모습이 흥미롭다.
조선시대에는 명과 청에 조선사절을 파견하였는데,
이때 그려진 부경사행 관련 기록화는 크게 조천도와 연행도로 구분된다.
조선사절을 명의 수도에 파견한 조천도는 해로 노정에 치중된 반면 청과의 관계에서
연경에 파견한 조선사절의 활동을 담은 연행도는 북경일대 유적과 명승을 표현하고 있다.
《조천도》제4폭 [황현]부분, 19세기모사, 지본채색, 35.8x64cm, 육군박물관
황현은 등주부에 속하는 지역으로 홍익한의 『조천항해록』에 의하면
황현일대의 주요 사적으로 진중자 구처와 마고선적을 언급하였는데, 화면에 마고선의 유적을
기념한 비석이 있어 황현에서 황산역을 향해 지나는 길에 이를 목도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천도], [항해조천도],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연행도폭],
육군박물관 소장 <[ 천도]는 위험했던 순간을 포착하듯 담고 있어 당시 긴박했을 상황을 짐작하게 하며,
사료의 기록 과도 일치하는 사적의 표현은 기록화가 지닌 사실성을 주지하게끔 한다.
김윤겸, 《사대가화묘》[호병도], 18세기, 지본담채, 57x33cm,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후기의 화가 김윤겸(金允謙;1711~1775)이 그린 『호병도(胡兵圖)』이다.
진경산수화풍(眞景山水畵風)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서,
화면에는 두 사람의 청나라 병사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데, 인물의 얼굴이나 옷 주름에
명암을 표현하고 있어 작가가 당시 중국을 통해 유입된 서양화법을 수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그림은 『사대가화묘(四大家畵妙)』라는 화첩에 실려 있는데,
이 화첩에는 김윤겸 · 김후신 등의 그림 총 12점이 수록되어 있다.
김윤겸이 그린 [호병도]는 청나라 병사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김윤겸이 청국으로 가는 사행에 동행했음을 짐작케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시기에 그려진 기록화는 중국사행에서의 문화 교류와
그에 관한 기록을 시각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며, 그림을 그린 화원에 대해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져야 하지만 부경화원에 대해서는 누락된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아쉬운 부분이다.
《사로삼기첩》제3폭 [계문연수], 지본수묵, 23.3x27.5cm, 국립중앙박물관
강세황은 1778년 연행하는 박제가에게 주었던 별장시에서
중국에서 태어나지 못하여 견식을 넓힐 수도 없고 중국 문인들을 만나 교유하지 못하고
늙음을 탄식하였는데, 1784년 10월 부터 1785년 2월까지 진하사은겸동지사행의 부사로 연행하였다.
연행 노정에서 중국실경과 공식 사행활동을 그린 《사로삼기첩》과《영대기관첩》이 전하고 있다.
화원은 중국사행뿐 아니라 조선에 파견된 중국사신의 접대를 담당하는 관반 일행으로도 참여하였는데,
중국 사행을 그린 화가는 화원 외에 강세황과 같은 사대부화가도 포함되어 주목된다.
중국에 파견된 조선사절이 제작한 기록화외에 조선사신의 모습을 담은 청나라의 궁정기록화,
청국 사신의 조선사행 노정을 그린 작품까지 살펴볼 수 있어
사행관련 기록화가 단지 중국사행시기에 그려진 그림만을 일컫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정선, [서교전연], 1731년, 지본수묵, 26.9x47cm, 국립중앙박물관
정선이 그린 <서교전연>은 1731년 이춘제 등 연행사 일행이 말을 타고 진입하는 장면을 담고 있는데,
조문명의 『학암집』「서교전별」에는 연행사절단이
서교의 영은문 주변에서 가족 친지들과 이별을 고한다는 기록을 살펴볼 수 있다.
사행을 떠나는 일원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이 그림은
당시 서교의 주요 건축물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영조어필, 《심양관도첩》제1폭, 1761년, 지본묵서, 43.6x54.8cm, 명지대 LG 연암문고
18세기 대청사행 기록화로 중요시 되는《심양관도첩》은 영조의 어명으로 비롯되었는데,
대외관계에서 핵심역할을 했던 심양관 옛터를 비롯하여 북경으로 진입하는 산해관,
북경 내 문묘와 국자가, 역대제왕묘 등 사절단이 거쳐 간 주요 사적을 글과 그림으로 담고 있다.
이필성 《심양관도첩》제14폭 [산해관내도] 1761년, 46.1x55.2cm, 명지대 LG 연암문고
진황도 산해관 동성 천하제일관 누각 1761년, 46.1x55.2cm, 명지대 LG 연암문고
《심양관도첩》은 건물도형, 배반도, 실경도로 그려져 공적인 제작 목적이 두드러지며,
당시 사행을 기록한 이상봉의『북원록』을 통해 화원 이필성이 사행에 참여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어
화가 또한 알 수 있다. 책에서는 그림에 표현된 사적과 실제의 모습을 비교분석하였는데,
그림을 문헌의 기록과 함께 살펴보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정여, 《봉사도》제 6폭, 전원풍속, 견본채색, 40x51cm, 중국민족도서관
《봉사도》제 6폭 부분
김두량, 김덕하 《사계산수도》부분
정여, 《봉사도》제18폭, 관소연청 전연부분, 견본채색, 40x51cm, 중국민족도서관
사신이 청국으로 회정하는 당일 전연을 행하는 장면이다.
18세기 청나라 사신 아극돈은 1717년부터 1725년까지 네 차례 조선사행에 참여했는데,
조선사행 견문을 묘사한《봉사도》는 청에서 제작된 조선사행 관련 기록화로 유일하다.
아극돈은 사행을 마치고 청국의 화가 정여에게 화첩을 그리도록 하였는데,
조선사행시기에 조선 화공에게 화제를 제시하여 그려간 그림은
정여에게 조선의 실경과 풍속을 그리는데 참고가 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흥미로운 점은 아극돈이 그림을 주문했을시 도화서 소속의 화원이 동원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아극돈이 산수와 풍속을 원했기에 당시 화원 중에 김두량이 차출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이와 관련하여 김두량이 아들 김덕하와 함께 제작한《사계산수도》와 비슷한 소재가 그려져 주목되며
사신에 대한 연향과 공연, 궁중의례가 자세히 그려져 있어 중요시된다.
나빙, 《치지회수첩》[박제가 초상], 1790년, 지본담채, 22.9x26.6cm, 개인
주학년, [추사전별연도], 1810년, 지본담채, 30x26cm, 개인소장
한편 청나라 궁중회화와 청인이 그린 그림에 묘사된 조선인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나빙은 1790년 건륭제의 팔순절을 축하하기 위해 연행한 박제가의 초상을 그리고 제시를 남겼으며
주학년은 1809년 10월 연행했던 김정희가 귀국하기 전 전별연을 배경으로 그림을 남겼다.
진방정, [남이웅 초상], 1627년, 견본채색, 164x103cm, 개인
남이웅초상은 명나라 궁정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김석주초상], 17세기, 견본채색, 178x130cm, 실학박물관
1683년 사은사로 연행한 김석주는
강희연간 궁정화원인 초병정에게 초상화 초본을 받고 시정햐야할 사항을 요구하였다.
초병정은 중국에 들어온 서양인 선교사에게 서양화법을 배워 참고하였기 때문에
김석주가 자신의 초상화에서 간취되는 서양화법을 수용하기에는 생소하였을것이라 짐작할 수있다.
이는 당시 서양화법적 요소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며
실학박물관 소장 김석주 초상화는 김석주의 요구를 반영한 초병정의 작품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사절단이 중국 화가에게 주문하여 제작한 초상화가 다수 유입되기도 하였는데,
조선후기 중국에서 제작한 서양화법과 관련한 조선사신의 초상화는
조선의 유입된 서양화법의 경로를 밝힐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송조천객귀국시장도], 15세기전반, 견본채색, 103.6x163cm, 국립중앙박물관
橫幅, 絹本彩色, 絹表裝堆朱의 軸頭, 送朝元客歸國詩章의 題字, (林厓 의書)있음.
명나라 사행을 주제로 한 기록화 중 가장 이른 작품은 <송조천객귀국시장도>로
최근까지 17세기 초 해로사행을 배경으로 북경의 자금성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왔다.
저자는 1409년부터 1621년 이전까지 육로로 이동했던 것을 감안할 때
사행했던 1370년부터 1409년 사이 사행과 관련 있으며
북경으로 천도하기 전 명나라의 수도였던 남경성을 그린 것이라 시정하였다.
그림위에 명 감찰어사 금유심이 쓴 전별시중 “해역을 항해하여 황성에 조공 와서”라는 구절을 통해
서도 해로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사신을 전송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다.
사행관련회화의 범위를 확대하여 연구한 결과가 담긴 이 책은
제작연도가 1760년으로 알려져온 숭실대 한국기독교 박물관 소장 《연행도》가
벽옹이 준공된 1784년 작으로 비정하는 등 기존의 정보들을 수정하여 담고 있으며
화원의 역할을 고찰하고 부경사행의 화원을 보충하는 등 사행관련 회화를 흥미로운 주제로 이끌고 있다.
다만 이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의 전문가적인 설명은 조금 어려운 감이 있으나
그 동안 크게 주목하지 못했던 사행관련 기록화 안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음을 600여장의 분량에 담긴 글과 자료들이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