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1779년 정조의 영릉 거둥 / 한 상 권

이름없는풀뿌리 2022. 12. 30. 05:19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병풍 中 제7폭 始興還御行列圖 부분도, 견본채색, 151.5x66.4cm, 국립중앙박물관 1779년 정조의 영릉 거둥 - 한 상 권(덕성여자대학교)* - 1. 머리말 2. 영릉 거둥 실태 3. 영릉 거둥 목적 4. 맺음말 요 약 문 즉위 직후 발생한 역모사건을 진압한 정조는 정치적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의 하나로 여주에 있는 효종 능인 영릉寧陵에 거둥하였다. 정조가 영릉 거둥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념인 존주의리尊周義理를 구현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영릉 거둥을 통해 효종-숙종-영조로 이어지는 존주의리의 계승자임을 천명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하나는 국왕의 권위를 확립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서의 군사훈련을 통해 무비武備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한편 군주로서의 위용을 한껏 드러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교적 이상정치인 왕정王政을 구현하는 일이었다. 정조는 거둥 도중 양반과 평민들을 직접 불러 만나고 여러 가지 은전을 베풀어줌으로써 왕정을 구현하고 백성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이상 정조는 영릉 거둥을 통해 사회통합력을 제고하고 의리를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탕평정치체제를 구축함으로써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주제어 : 정조, 효종, 존주의리尊周義理, 영릉寧陵, 거둥, 군사君師, 왕정, 의리탕평 『始興還御行列圖』부분도 1. 머리말 거둥은 군주의 이미지를 시각화하는 작업이었다. 국왕은 거둥을 통해 군주로서의 위엄을 한껏 드높일 수 있었다. 거둥은 국왕의 권위를 공식적으로 그리고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합법적인 기회였다. 숙종‧영조‧정조 등 탕평군주들은 만기萬機를 주관하는 국왕의 확고한 모습을 보이고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 궁궐 밖으로 나왔다. 국왕중심 통치 질서의 확립과 왕도정치 이념의 구현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거리로 나온 것이었다. 엄숙하고 장엄한 거둥은 백성들에게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훌륭한 구경거리였다. 거대하고 질서정연한 거둥은 국왕의 위대함과 강대함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존엄하고 장엄한 국왕의 행렬을 관람하러 나온 백성은 점차 많아져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국왕에 대한 백성들의 열광 또한 실로 경탄할 만하고 심히 감동적이었다.1) 거둥을 통해 백성들은 국왕의 친밀하고도 성실한 태도에 대해 위안을 받았고 존경과 감사를 표시하였다. 1)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3일(갑인). 임금이 侍臣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산에 가득히 찬 것은 백성이고 들에 두루 찬 것은 익은 곡식이다. 농사가 다행히 풍년을 얻은 것은 참으로 하늘이 돌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덕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해를 이어 풍년이 들기를 바야흐로 절실히 빌거니와, 백성으로 말하면 담장처럼 늘어서서 억만으로 셀만하다.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서 메우고 막아 두루 찼는데, 내가 오늘 이 곳에 와서 이 백성을 대하니, 오가는 마음은 한 사람이라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할 방도를 생각하는 것이다마는, 믿는 것은 또한 경들이 협력하여 보좌하는 공에 달려 있다.” 이하 조선왕조실록 번역문은 국사편찬위원회의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http://sillok.history.go.kr) 번역문을 참조하였다. 국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거둥은 왕실은 존엄하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다. 국왕은 거둥을 통해 강인하고 자비로운 가장으로서 최상의 규범을 구현하고 있다는 모습을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그 결과 왕조의 위업과 안정 그리고 영속성에 대한 감정을 크게 고양시킬 수 있었다. 국왕은 거둥을 통해 왕실의 위엄을 보여줌으로써 정쟁을 초월하는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거둥을 통해 군주는 지속적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국왕은 모든 계급적 적대감, 정치적 갈등, 분파적 이해를 넘어서는 초월자적 위치에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었기 때문이다. 거둥은 모선보민慕先保民의 이념을 구현하는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였다. 국왕은 거둥을 통해 강대함과 찬란함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전망도 제시해야 했다.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적 이념과 추구하는 사회모습을 백성들에게 분명히 보여주어야 했던 것이다. 의미 있는 과거의 재발견(과거와의 연속성)을 통해 계승해야 할 사회적 가치를 천명하는 데 거둥의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성에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행복을 부여해야 된다고 생각한 군주들이 많은 비용이 드는 거둥을 자주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거둥은 사회갈등을 치유하는 소통이기도 했다. 국왕의 행차 공간은 종종 백성과 소통하는 장소로 변하곤 했다. 국왕은 거둥하면서 백성과 일체감을 조성하는데 노력하였다. 국왕은 거둥을 통해 민원을 해결해 줌으로써 도덕적 신망을 높이고, 왕정을 구현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자발적인 복종과 헌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국왕은 거둥 도중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다. 백성들은 단순한 관람자나 방관자가 아니라 자신의 억울함을 개진하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다. 국왕이 거둥을 통해 백성들과 직접 만나는 것은 18세기 중엽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새로운 모습이었다. 이러한 국정운영 방식은 동양 삼국 가운데 조선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이기도 했다.2) 1779년(정조 3) 8월 정조는 여주에 있는 효종 능인 영릉에 8일간 거둥하였다. 이는 1795년(정조 16) 화성 능행과 더불어 가장 오래 거둥한 것이 된다.3) 또한 이 시기는 정조 특유의 의리탕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했다. 따라서 정조의 영릉거둥은 향후 정국의 향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움직임이었다. 영릉 거둥의 실태와 목적을 검토함으로써 정조 초반 정국의 동향을 이해해 보도록 한다.4) 2) 박지원, 『열하일기』 盛京雜識 商樓筆談.. “중국에서는 황제의 행렬이 지나가면 문을 굳게 닫고서 방 안에 있어야 하며 황제를 직접 볼 수가 없었다.” 原武史, 『直訴と王權』 朝日新聞社. “일본의 德川時代는 행렬의 시대라 부를 정도로 參勤交代에 의한 大名行列이 성행한 시대였다. 통상 150인부터 300인, 많을 때는 2,500인을 넘는 대 행렬이 江戶와 전국 200 이상의 地方諸藩과의 사이를 매년 왕복하였다. 幕府老中을 비롯, 정무의 樞要에 있는 자가 駕籠에 통행하는 사이에 농민‧町人‧승려‧하급무사 등이 소장을 제출하는 駕籠訴는 에도시대 후기가 되면 상당히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는 사람들의 소를 직접 수리‧심리하는 최종의 기관은 어디까지나 寺社‧町‧勘定의 三奉行(奉行所)이며, 老中 및 若年寄는 그 직역이 아니었다. 따라서 비록 봉행소에서 판결에 불복하여도 그 이외의 기관 및 役職에 상소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駕籠訴도 장군에의 직소와 마찬가지로 막부법을 파괴하는 비합법적인 소에 불과하였다. 駕籠訴를 할 경우에는 駕籠訴人은 老中 屋敷에 일시 구류된 후에 가벼운 형사벌을 부과 받고 관계역소에 나가고자 하면 넘겨줘 옥부의 表門까지 보내진다. 이때에는 소장도 함께 되돌려주는데, 결국 老中및 若年寄에는 수리되지 않는다. 또한 將軍吉宗이 직소에 대신하는 합법적인 하의상달을 위한 수단으로 1721년에 江戶의 評定所門前에 설치한 「目安箱」에 대해서도 거기에 소할 수 있는 사항은 정치에 관해 유익하다고 인정되는 의견 및 役人의 私曲, 非分 등에 엄격히 제한되어 이를 파괴하는 경우에는 역시 형사벌에 처해졌다. 箱의 열쇠를 가진 사람은 장군뿐이며 실제 그것을 열어 확실히 본 사람은 吉宗과 家齊뿐이라고 할 정도로 目安箱이 역대의 장군에게 활용되었는지의 여부는 커다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3)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능행을 66회 하였으며 궐 밖으로 거둥한 날은 123일이었다. 정조의 거둥 기간은 평균 이틀이었다(김지영, 『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 ―의궤반차도와 거둥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5, 124쪽). 4) 정조의 영릉 거둥에 대한 선행 연구로는 김문식, 『1779년 능행과 남한산성』,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이 있다. 『始興還御行列圖』부분도 2. 영릉 거둥 실태 1) 숙종의 영릉 거둥 17~18세기 탕평군주라 불리우는 숙종과 영조 그리고 정조는 각각 한차례 여주로 천장한 효종 능 영릉에 거둥하였다.5) 이를 정리하면 아래 <표 1>과 같다. [표 1] 숙종, 영조, 정조의 영릉 거둥 국 왕 숙 종 영 조 정 조 능행 시점 1688년(숙종 14) 2월 1730년(영조 6) 2월 1789년(정조 3) 8월 능행 기간 4박 5일(26일~30일) 4박 5일(25일~29일) 7박 8일(3일~10일) 숙종과 영조가 영릉에 거둥한 기간은 4박 5일이었다. 숙종과 영조는 2백 리 가까이 되는 장거리 거둥을 하였는데,6) 이틀은 이천에 머물면서 효종능인 영릉寧陵과 세종능인 영릉英陵에 전배하였다. 나머지 이틀은 남한산성에 머물면서 봄대동미를 감해주는 등 읍폐‧민막을 해소해주는 한편, 병자란 전망처에 치제致祭하거나 병사를 거느리고 근왕勤王하다 패망한 이들의 후손들을 녹용錄用하는 조치 등을 통해 절의節義를 숭장하였다. 5) 1659년 5월 효종이 41세의 나이로 창덕궁에서 승하하자 이 해 10월 양주 건원릉 서쪽 산등성이에 장사지내고 능호를 寧陵이라 하였다. 그런데 장사지낸 지 채 1년도 안 되어 얼었던 땅이 풀리면서 능 전면 난간의 지대석과 裳石 연결 부위가 조금씩 꺼지고 틈이 생겼다. 장마를 거친 다음부터는 병풍석과 駕石 등의 연결 부위까지 틈이 생기고 정자각 기와 위에 바른 석회도 벗겨져 떨어진 곳이 많아 수리해야 했다. 이후 15년 동안 석물에 회를 바르고 수리하는 등 영릉에는 역사가 없는 해가 없었다. 마침내 1673년(현종 14) 3월 靈林副令 이익수가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 를 들어 천장을 요청하였고, 현종도 이를 받아들여 이 해 10월 양주에 있던 구릉을 여주로 옮겼다. 능을 여주로 천장한 이듬해인 1674년 2월 효종비 仁宣王后가 승하하였으며 8월에는 현종마저 승하하였다. 이 때문에 현종은 건원릉에 안치된 구 영릉에는 1660년(현종 1), 1661년(현종 2), 1662년(현종 3) 세 차례 거둥하였으나 여주로 천장한 신 영릉은 참배하지 못했다. 6) 1749년(영조 25) 간행된 『度支定例』권1, 「排設房 別例」에 따르면 여주에 있는 英陵과 寧陵은 5일정이었다. 숙종의 영릉 거둥에서 주목되는 점은 능행을 추진하는 과정이 신료들과의 갈등으로 순탄치 못했다는 사실이다. 즉위 직후인 1675년(숙종 1) 12월, 숙종은 여주로 천장한 효종 능에 친히 나아가 제사하고 성묘할 터이니 길일을 택하여 올리라고 일관에게 명하였다. 이듬해 2월이면 인선왕후 대상大祥도 끝나므로 영릉에 거둥하여 추모의 정을 펴고자 하니 3월 보름 전까지 길일을 택하여 들이라는 명이었다.7) 임금이 효심이 발하여 추모의 정을 펴기 위해 선왕의 능묘를 봉심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은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 경우는 달랐다. 영의정 허적이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 청나라 사신이 와 있으므로 형세 상 어렵다는 것이었다. 칙사가 돌아간 이후라 할지라도 농사철이 임박하였기에 농민에게 피해를 준다고 하였다. 더구나 올해는 흉년이 들어 칙사 행차에 이어 능행까지 겹친다면 경기 백성들이 견디기 어렵다며 반대하였다. 66세의 노성한 대신이 민폐를 내세워 반대하자 15세의 어린 나이인 국왕은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숙종은 능행을 당분간 정지한다고 하였다.8) 이듬해인 1676년(숙종 2) 12월, 숙종은 영릉에 거둥하겠다는 의사를 다시 피력하였다. 현종 삼년상도 끝났으므로 여주로 천장한 효종 묘에 성묘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영의정 허적이 또 다시 반대하고 나섰다. 이번에는 서울에 전염병이 치성하고, 도로가 닦여지지 않아 임금이 중상을 입을 우려가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어 반대하였다. 좌의정 권대운도 거들고 나섰다. 영릉까지 거리가 400리 되어 왕복 5~6일이 걸리므로 어린 나이의 국왕이 신체를 상할 염려가 있으며, 백성들이 심한 기근으로 힘들어 하고 있으므로 거둥을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9) 두 대신의 반대로 숙종은 영릉 거둥의 의지를 또다시 접을 수 밖에 없었다. 7) 『숙종실록』권4, 숙종 1년 12월 11일(갑자). 8) 『승정원일기』 250책, 숙종 2년 1월 17일(경자). 9) 『승정원일기』 257책, 숙종 2년 12월 15일(계해). 숙종은 1680년(숙종 6) 환국을 단행함으로써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인조반정 일 주갑이 되는 해인 1683년 2월,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 잡음으로써 춘추대의를 밝힌 공로가 있다 하여 효종 묘정廟廷을 세실世室로 정하였다.10) 1688년(숙종 14) 무진년 2월, 숙종은 오랜 숙원을 풀기 위해 영릉에 행행하겠다는 교서를 내렸다.11) 그러자 우의정 이숙이 차자를 올려, 흉년에 백성을 소란스럽게 하고 또 전염병이 많다며 뒷날로 물릴 것을 청하였다. 숙종은 효종을 꿈에 보아 사람의 정리가 지극하니 백성들도 이해해 줄 것이라며, 정리情理를 내세워 민심民心의 동요를 명분으로 하는 신하들의 반대 움직임을 꺾고 어렵사리 영릉에 거둥하였다.12) 10) 『숙종실록』 권14, 숙종 9년 2월 21일(계사). 세실은 글자 그대로 대대로 그 실에 신주를 모신다는 의미이다. 친진에 이르렀더라도 덕이 있는 군주는 祧毁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11) 『숙종실록』권19, 숙종 14년 2월 2일(을사). “寧陵 공경히 전알하는 것은 禮에 있어서 마땅히 먼저 할 바이다. 더구나 내가 敬思殿에서 承重服을 받았음에랴? 喪制가 끝나기 전에 瞻拜하고 슬픔을 펴려고 생각하였으나, 事故에 거리끼어 지금까지 행하지 못하였으니, 情과 禮의 흠결은 이미 말할 수 없고, 追慕하는 슬픈 감회도 갑절이나 鬱結하여, 寢食이 편치 못하다. 올 봄의 전알은 결코 그만둘 수 없으니, 이달 그믐 전 스무날 후로 擇日하여 들이라.” 하였다. 경사전은 바로 仁宣王后의 魂宮이다. 12) 『숙종실록』, 행장. “내가 일찍이 꿈에 孝廟를 뵈니 효묘께서 손을 맞잡고 기뻐하시며 玉音이 丁寧하셨다. 깨어나니 눈물이 흘러서 양 볼을 적셨으며 추모하는 마음이 갑절이나 간절하여 실로 스스로 억누르기 어려웠다. 神道를 생각해 본다면 사람의 정리를 벗어나지 않고 지극한 정리가 있는 곳에는 하늘도 반드시 가엾이 여겨 용서해 줄 것이다. 그런즉 저들이 지극히 어리석지만 신령한 백성들이니, 어찌 이번의 행차가 마지못한 데서 나온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겠는가?” 2) 영조의 영릉 거둥 1728년(영조 4) 3월 소론과 남인의 일부가 영조의 왕통을 부정하여 정변을 일으킨 무신난戊申亂이 일어났다. 임금인 영조가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이 전국적으로 퍼졌고 여기에 중간층 및 하층민이 적극 참여하면서 일어난 전국적 조직망을 갖춘 대규모 반란이었다. 무신난을 진압한 직후인 1728년 8월 영조는 영릉에 전알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그러자 봉조하 최규서 등이 대신·삼사와 함께 능이 여주에 있어 서울에 떨어진 것이 2일정이나 된다면서 “임금께서 서울을 떠나 예니레 계시면 민심이 반드시 흔들릴 것이고 홍수 끝에 길을 닦느라 농사를 손상하고 곡물을 해칠 것이니, 생업을 잃은 백성이 어찌 불쌍하지 않겠습니까?”라며 명을 거두기를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선조(先朝: 숙종)께서 장차 영릉에 거둥하려 할 때에 느껴 꿈꾼 일이 있거니와, 나도 꿈속에서 떠날 때를 임하여 준비하였으니, 올해 안에 전알하지 못한다면 정리를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라며 숙종의 꿈 이야기를 예로 들면서 거둥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에 밀려,13) 능행을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1729년(영조 5) 8월 영조는 기유대처분己酉大處分으로 노·소론내 온건론자들을 고르게 등용해 탕평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4) 영조는 왕권 확립을 위해 붕당을 부정하는 파붕당破朋黨을 대의명분으로 내걸었다. 영조는 당파가 만들어왔던 여론을 공론으로 인정하지 않고 당론으로 평가절하 했다. 당론이 더 이상 공론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고 붕당을 약화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각 붕당의 주장과 인물 가운데 온건한 쪽을 뽑아 조제보합한다는 완론탕평이었다.15) 영조는 이를 바탕으로 왕권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13) 『영조실록』권19, 영조 4년 8월 7일(을유). 領議政 李光佐가 말하기를, “큰 변란을 겪은 뒤에는 안정을 생각해야 할 것이고 또 天災·時變이 이처럼 매우 참혹할 때에는 바로 두렵게 여겨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야 할 것이니, 먼 외방으로 거둥하실 수 없겠습니다. 임금의 효도는 한 때의 전알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이니, 대개 宗社와 만백성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동정 하나하나에 반드시 만전의 방도를 살펴야 하는데, 이제 끝내 天聽을 감동시켜 돌리지 못한다면 庭請해야 할 것입니다.” 14) 『영조실록』권23, 영조 5년 8월 18일(경신). 15)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역사, 1998, 311쪽. 이해 11월 23일, 영조는 숙종을 세실로 모시기로 결정하였다. 숙종 세실의 명분으로 문묘의 차례를 바로 잡았다는 것과 원단苑壇(대보단)을 처음 세워 더 없이 큰 춘추의리를 밝혔다는 것, 군신간의 상제喪制를 모두 회복시켰으며 크고 작은 궐전闕典을 모두 정비했다는 것 등이 주목되었다.16) 숙종을 세실로 모신 영조는 1730년(영조 6)인 경진년 2월 계지술사繼志術事를 명분으로 삼아 다시 영릉거둥을 시도하였다. 숙종의 무진년 영릉 참배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거둥의 당위성을 주장한 것이다. 그러자 영의정 홍치중과 우의정 이집 등이 나서서 만류하였다. 이에 대해 영조는 “경들은 기필코 나의 행행幸行을 정지시키려 하나, 나도 역시 고집이 있다. 더욱이 군신君臣 사이의 분의分義는 지극히 중요하니, 어제의 분부를 받은 뒤에 지금 또 빈청賓廳에 모여 의논하는 것이 옳은가? 이번에 내가 꿈에 영릉에 갔으니, 이는 지성에서 발로된 것이다. 그런데도 경들은 막으려 하는가?”하면서 ‘군신분의君臣分義’‧‘몽왕녕릉夢往寧陵’ 등을 이유로 내세워,17) 2월 25일부터 29일까지 5일간 영릉 전알을 할 수 있었다. 이와같은 신하들의 반대에 대해 사관은 신료들이 민심 이반을 핑계로 국왕의 거둥을 저지하였으나, 오히려 백성들은 왕의 능행을 기뻐하였다며 비판하였다. 당초 임금이 영릉을 전알하려 했을 때는 막 무신년의 변란을 겪은 데다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 중에 역적들을 따른 자가 많아 인심이 채 안정되지 않았고, 또한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므로, 조정에서 이런 때에 여러 날이 걸리는 곳으로 동가하는 것은 위험과 의구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대신과 중재들이 피차를 논할 것 없이 모두 이 일을 들어 큰 의리로 삼았던 것이다. 소장이 공거公車에 가득 차고 심지어 눈물을 흘리며 극력 쟁집하는 사람까지 있었으나, 임금은 마침내 듣지 않았다. 대저 여주와 이천의 백성들이 반드시 모두 역적을 따른 것도 아니었고, 촌락의 전염병의 기운이 반드시 장전 가까이 침범하는 것도 아니었다. 임금이 성조聖祖를 사모하는 마음이 일어나 한 번 전알하고 소분하려한 것은 곧 천리에 당연한 일인데, 조정의 신하들이 다른 계책 없이 단지 행행을 정지하기만 일삼았으니, 그 또한 당시의 풍조가 미열에 가까웠던 것이다. 마침내 난여鑾輿가 평온하게 돌아왔고 먼 외방의 민생들이 기뻐하였으니, 당시 다투며 고집했던 사람들이 또한 할 말이 있겠는가?18) 16) 이현진, 『조선후기 종묘 정비와 세실론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06, 297~298쪽. 17) 『영조실록』권25, 영조 6년 2월 2일(신축). 18) 『영조실록』권25, 영조 6년 2월 29일(무진). 3) 정조의 영릉 거둥 효종 승하 이주갑二周甲 되는 1779년(정조 3) 기해년 가을 정조는 영릉 거둥을 하였다. 이 해 정월 15일, 정조는 봄에 영릉을 거둥하고 싶으나 흉년을 당하여 민폐가 염려된다며 주저하였다. 그러자 행도승지 홍국영이 올해는 다른 해와 다르니 행행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며, 행좌승지 정민시도 민역만 감해준다면 폐단이 없을 것이라며 거들었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정조는 2월에 영릉 전배를 하려 하였으나 민간에 양식이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결행하지 못하였다.19) 7월 들어 농사일이 거의 실마리가 잡혔다고 보고, 정조는 영릉寧陵에 친제親祭하고 영릉英陵에 전알展謁하는 일자를 8월 3일로 확정한다고 발표하였다.20) 정조의 영릉 거둥에서 주목되는 점은 숙종이나 영조와는 달리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까닭을 알기 위해 정조 초반 정국의 동향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정조대는 각 기간마다 왕권의 위상과 정국구도에 단계적 변동이 있었다. 1776년(정조 즉위)부터 1779년(정조 3) 9월 홍국영을 축출하기까지는 의리탕평을 준비하는 기간이었다. 정조는 즉위 직후 대리청정을 반대한 홍인한·정후겸 등을 역적으로 몰아 사사하고,21) 김구주를 흑산도로 유배 보냈다. 저위儲位를 핍박하여 위태롭게 한 죄로 척리戚里를 제거한 것이다. 19) 『승정원일기』1433책, 정조 3년 1월 15일(경자). 20) 『일성록』, 정조 3년 7월 6일. 21) 『정조실록』권1, 정조 즉위년 7월 5일(갑술). 척리戚里는 왕실의 번병인데 지금은 이와 반대이어서 전고에 없던 흉역이 왕실의 척리인 사람에게서 나왔다. 그리하여 흉도와 역당들이 신축·임인 년보다 몇 배나 더 많으니 선조先朝의 초복初服 때에 견주어 내 몸이 외롭고 위태로우며 국세가 위급한 것이 과연 어떠했겠는가?22) 정조는 세손시절 작성한 󰡔존현각일기󰡕를 내주면서 대리청정을 반대한 척연귀근戚聯貴近과 세족 거실世族巨室들의 난역亂逆 실상을 편찬하도록 하였다.23) 󰡔명의록󰡕편찬 목적에 대해, 정조는 규장각 각신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명의록이라는 한 권의 책은 모년의 의리를 천명한 것이다. 가만히 춘추의 환하면서도 어둡고 은미하면서도 드러나는 뜻을 취하였으니, 한 글귀 한 글자가 금과 옥으로 만든 저울과 자처럼 법도가 엄정하여, 실추되려는 왕의 강기를 진작시켰고 쓰러져 버린 사람의 기율을 바로잡아 주었다. 아마도 천하의 큰 제방이 이로 말미암아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북면하고 있는 조정 신하들이 이 책의 의리를 알지 못한다면 무엇으로 나를 섬길 것인가.24) 춘추의리를 밝힘으로써 실추된 군강君綱을 확립하려는 목적으로 󰡔명의록󰡕을 발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의록을 통해 군강을 확립하고[立君綱], 인심을 바루며[正人心], 순역을 밝히고[明逆順], 공죄를 분별하고[敍功罪], 명분을 엄히 하고[嚴名分], 제방을 존엄하게 하여[峻隄防] 신자臣子들로 하여금 천상天常은 무시할 수 없고 왕법王法은 간범할 수 없다는 것을 훤히 알도록 하겠다는 정조의 바람과는 달리, 또 다른 역모가 진행되고 있었다. 홍상범 등이 중심이 되어 살해와 저주, 추대의 세 과정으로 역모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국왕을 살해한 다음 이복동생인 은전군恩全君 찬禶을 옹립하겠다는 계획이었다.25) 1777년(정조 1) 8월 발각된 이 역모사건에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인 전 승지 홍낙임이 연루되었고 고모인 화완옹주도 가담하였다. 22) 『정조실록』권2, 정조 즉위년 11월 19일(정해). 23) 『정조실록』권2, 정조 즉위년 8월 24일(계해). 24) 『홍재전서』권177, 「일득록」17, ‘훈어’ 4, 提學臣沈煥之丙辰(1796)錄. 25) 『정조실록』권4, 정조 1년 8월 11일(갑진). 정조는 은전군을 자결케 한 다음 역모 주동자를 처형하였으며 화완옹주는 강화도 교동에 유배 보냈다. 이 역모 사건으로 홍계희 중심의 친왕 관료계가 일망타진되었다. 정조 초반 거듭되는 역모로 난역에 가담한 세실과 거족들이 대부분 대역 죄인으로 처벌되었다. 정조는 “즉위한 이후에 와서는 그 당시에 국가를 원망하던 무리들이 각기 저지른 죄 때문에 모두 제거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는데 그 중에 는 척리가 절반이나 된다.”고 하였다.26) 숙종, 영조와는 달리 정조가 영릉 거둥에 저항을 받지 않았던 까닭은 역모를 토벌한 직후 결행하였기 때문이었다. 척리와 권간이 대부분 역모에 연루되어 조정에는 교목세신이 거의 남지 않았기에 영릉 거둥은 순조롭게 결정되었다. 정조의 영릉 거둥은 7박 8일의 일정이었다. 이는 1795년(정조 19)의 화성 능행과 함께 가장 긴 기간의 거둥이었다. 정조의 영릉 거둥은 경술년(1730) 이후 60년 만에 처음 가는 것이며 기간도 8일이나 되는 만큼 준비할 일이 많았다. 길을 닦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는 문제가 제일 컸다. 정조는 길을 닦을 때 전답을 침범하는 폐단, 능침 부근 가까이 있는 마을을 훼철하거나 유린하는 폐단이 없도록 경기관찰사에게 각별히 당부하였다. 아울러 한강을 건너기 위해 선창을 조성하는 데 따른 선인들의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니 공조 판서는 모든 일을 직접 집행하고 말단 관리에게 맡기지 말도록 당부하였다. 정조는 숙소도 미리 정해주었다. 출궁하는 날에는 남한산성 행궁에서 묵고, 다음날은 이천 행궁에서 묵고, 다음날 능소에 나아가 제사를 지낸 뒤에는 여주 행궁에서 묵고, 다음날에는 다시 이천 행궁에서 묵고, 그 다음날부터 환궁할 때까지 남한산성 행궁에서 묵을 것이니 이대로 알고 거행하라고 하였다.27) 정조의 영릉 거둥 8일간의 활동을 정리하면 <부록 1>이 된다. 26) 『정조실록』권1, 정조 즉위년 7월 3일(임신). 27) 남한산성행궁에서 4박, 이천행궁에서 2박, 여주행궁에서 1박 머무는 일정이었다. 3. 영릉 거둥 목적 정조는 영릉 거둥을 하면서 존주의리와 산림중용을 천명하였으며, 무비武備강화를 위해 군사훈련을 실시하였고, 유교적 왕정이념 구현을 위해 여러 가지 은전을 베풀었다. 1) 존주의리와 산림중용 정조는 즉위하면서 충역‧시비‧의리를 분명히 하는 준론탕평을 주창하였다. 결코 선악을 혼합하고 시비를 같이하는 것이 탕평의 결과가 될 수 없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28) 정조는 영릉 거둥이 열성列聖 때에 하신 전례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였다.29) 정조가 말하는 계술繼述이란 효종-숙종-영조로 이어지는 존주의리 계승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일통一統을 중시하고 이적夷狄을 물리치며 천리天理를 밝히고 인심人心을 선하게 하여, 조그마한 동쪽 변방에게 홀로 대명大明의 해와 달을 보존하도록 한 것은 우리 열성조列聖朝가 전수해 온 가장 중요한 의제義諦로 나 소자가 감히 힘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30) 숙종·영조가 효종의 지사志事를 뒤따르고 중화의 멸망을 개탄하여 모든 계술繼述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였으니, 후사後嗣인 자신도 대명의리 즉 존주의리를 계승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31) 정조는 영릉 거둥 도중 남한산성에 이르러 행차를 멈추고는 다음과 같이 하교하였다. 28) 『정조실록』권2, 정조 즉위년 9월 22일(경인). 29)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9일(경신). 30) 『홍재전서』권177, 「일득록」17, ‘훈어’ 4, 提學臣沈煥之丙辰(1796)錄. 31)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9일(경신). 병자년 일이 완연히 어제와 같은데,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멀다고 하셨던 성조의 하교를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는구나. 사람들은 그것을 점점 당연지사처럼 잊어가고 있고 대의에 대한 관심도 점점 희미해져 북녘 오랑캐를 피폐皮幣로 섬겼던 일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고 있으니 그것을 생각한다면 그 아니 가슴 아픈 일인가. 이렇게 백성들의 힘이 쇠잔하고 경비가 모자라는 시기에 왜 꼭 먼 길을 가야만 하겠는가마는 또 이 기해년을 당하여 영릉 행차를 하지 않는다면야 그것이 어디 천리요 인정이겠는가.32) 북벌을 위해 군사력 배양에 힘쓰고 대명의리를 만천하에 밝힌 효종 능에 행행함으로써 잊혀져가는 존주의리를 환기시키는 것은 천리와 인정에 합당하다는 것이다. 병자란으로 국체國體의 상징인 국왕 인조가 신료들 앞에서 이적으로 폄하해온 청의 태종에게 항복 의례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치러야 했던 치욕은 당시 사회 전반에 심각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에 조선의 정계와 학계는 인통함인忍痛含冤의 의리론을 바탕으로 하여 복수설치復讎雪恥를 명분으로 북벌을 추구함으로써 패전의 충격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제체 정비의 기본 방향을 의리와 명분을 강조하는 예치禮治로 설정함으로써 인조반정 이래의 정책에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그러나 숙종 초반 청이 삼번三藩의 난亂을 진압하고 체제의 안정을 확립하게 됨으로써 북벌은 실현 불가능한 정책임이 판명되었다. 이것은 병자호란 이후 국가운영의 전제를 흔드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의 정계와 학계는 북벌의 연장으로서 존주의리론尊周義理論을 제시하였다. 이는 무력에 의한 복수설치의 논리가 존주라는 의리명분적인 내용으로 대체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북벌이 그 실현을 위해 국왕으로 하여금 신료들의 협조를 구하도록 유도하였다면 존주의리론의 강화는 반대로 그 구심점이 되는 국왕의 위상을 제고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은 존주의리론을 내세워 중화문화의 수호자로서 명나라의 적통이라는 인식하에 외양外攘에서 내수內修로 방향전환을 꾀하면서 자강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으며 그 중심에 탕평군주인 숙종, 영조, 정조가 있었다. 32) 『정조실록』권54, 부록, 행장 정조의 영릉 거둥은 존주의리 계승이라는 사상적 의미 외에 산림을 중용한 정치를 계승한다는 정치적 의미도 있었다. 17세기 중엽 왕으로부터 세도를 위임받은 산림이 사림의 여론을 지지기반으로 하여 의리주인으로 자처하였으며 정치를 주도하였다. 효종은 북벌 실현을 위하여 붕당을 형성하고 있던 신료들의 폭넓은 협조를 구하였다. 그 결과 붕당의 학문적 종주로서 공론을 주도하던 산림의 정치적 위상이 강화되었는데, 이는 산림이 문치文治의 실질적인 담당자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산림은 학문은 물론 붕당을 매개로 정계의 정책논의에 적극 개입하여 정국을 주도해 나갔다. 현종대 예송은 이러한 기조 위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각 붕당은 문치의 구체적인 수행자로서 그 핵심이었던 예제의 내용을 규정하였으며 그것은 왕실의 상례까지 확장되었다. 예송은 붕당의 학문적 관점에서 왕실의 예제를 규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산림이 문치를 주도하였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정조는 선왕의 정치를 개관하면서 세상의 도리 즉 세도世道를 이룬 세력으로서 훈신과 산림, 외척을 지목하였다.33) 그리고 산림이 세도를 담당하기 시작한 것은 효종대에 이르러서였다고 보았다. 계해년(1623, 인조1) 이후 훈신勳臣이 나라의 권한을 쥐어 행하는 일 가운데 청의淸議를 거스르는 것이 많았다. 효묘孝廟가 그 폐단을 깊이 살펴 알고서 사림士林을 불러와 조정에 포진시켰으니, 청명淸明한 정치하면 지금까지도 영릉寧陵의 성대한 시절을 이야기한다.34) 33) 정옥자, 『일득록 연구』, 일지사, 2000. 34) 『홍재전서』권167, 「일득록」7, ‘정사’ 2, 檢校直提學臣李晩秀庚戌(1790)錄. 인조 대에는 훈신勳臣이 세도를 자임하였으나 각종 폐단이 일어났다. 그러자 효종이 훈구의 폐단을 거울삼아 산림에서 글 읽는 선비들을 등용하여 조정이 청명하고 군신 간에 뜻이 맞아 세도를 이루었다는 것이다.35) 숭유중도崇儒重道가 조종의 가법이라고 생각한 정조는 즉위 초부터 지성으로 산림의 선비를 부르고자 하였다.36) 산림을 등용하여 치화治化를 비보裨補함으로써 삼대의 지치를 이루고자 한 것이었다. 특진관 홍낙순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전하께서는 성질聖質이 청명하고 성학聖學이 고매하셔서 물루物累의 해가 없으신데, 또 지성으로 산림을 불러들이셨으니, 이는 진실로 한나라‧당나라 이래로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입니다. 옛날 우리 효묘孝廟께서 선정先正을 예우하여 크게 모유謨猷를 세워 힘쓰셨는데, 뜻이 부합한 것이 밝고도 뚜렷하여 그 유풍과 남은 공렬이 지금까지도 민멸되지 않고 있습니다.37) 1778년(정조 2) 5월 정조는 “송시열은 천하의 대로大老이고 해동의 진유眞儒였다.”라고 선언하고, 효종 묘정에 추향 追享하였다.38) 그리고 영릉 거둥길에 경기도 유생들이 여주에 있는 문정공 송시열 사당에 사액해줄 것을 청하자, 대로사大老祠라 사액하고 어제御製 어필御筆로 된 비를 사정祠庭에 세우도록 하였다.39) 정조가 사우의 건립을 허락한 것은 국왕이 된 이후 최초의 일로서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40) 노론은 공자에서 주자, 주자에서 송자(송시열)로 이어지는 성학도통설을 주장하고 있었는데, 정조가 송시열을 효종의 묘정에 추향함으로써 이를 추인한 셈이 되었다. 35) 『홍재전서』권177, 「일득록」17, ‘훈어’ 4, 檢校直提學臣李晩秀丁巳(1797)錄. 36) 『정조실록』권2, 정조 즉위년 8월 10일(기유). 37) 『정조실록』권6, 정조 2년 12월 15일(신미). 38) 『정조실록』권5, 정조 2년 5월 2일(신유). 39) 『정조실록』권54, 부록, 행장. 40) 김문식, 『정조의 제왕학』, 태학사, 2007, 342쪽. 2) 무비武備 강화 능행을 열무閱武의 일환으로 인식한 것은 효종부터였다. 효종은 능행이 ‘조선祖先에게 정을 펴는 것’이라고 표방하고 있지만 실제는 군사훈련에 더 무게를 두었다. 능행 시 융복을 입고 말을 타는 것 또한 능행이 군행으로서의 의미가 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청에 대한 복수설치를 당면 과제로 설정했던 효종은 수많은 군사를 동시에 움직일 수 있는 능행이라는 기회를 군사를 정련하고 무비를 갖출 수 있는 기회로 적극 활용했다.41) 현종은 양주에 있는 구 영릉에 세 차례 갔는데, 이 중 두 차례 군사훈련을 하였다. 1661년(현종 2) 8월 28일 구 영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돌곶이에 이르러 갑자기 금군禁軍의 활솜씨를 시험하였다. 이때 생각지도 못한 일을 갑자기 행하게 되자 시종신侍從臣과 위사衛士들까지 앞뒤로 엉겨 다시 질서를 찾아볼 수 없이 혼잡스럽게 되면서 모두 경악하였다.42) 1662년(현종 3) 9월 9일에는 구 영릉을 전배하고 환궁하면서 금군의 장수에게 명하여 먼저 사하리의 들판에 가서 진을 치고 기다리게 하고 동서로 말을 달리면서 살펴 보았다.43) 그러나 두 차례 모두 당일로 돌아왔으므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한 것은 아니었다. 41) 김지영, 앞의 논문, 127쪽. 42) 『현종실록』권4, 현종 2년 8월 28일(갑술), 이에 대사간 朴長遠과 집의 李俊耉가 아뢰기를, “군병을 검열하는 것이 본디 중요한 일이긴 합니다만, 3년 복을 이제 막 벗고 園寢에 성묘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하다니, 해서는 안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은 몇 년 동안 잇따라 흉년이 들어 그야말로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하고 닦아 나가야 할 때인데, 신의 생각으로는 이 일이 멋대로 즐기며 노는 것에 가까울 듯 싶습니다.” 43) 『현종개수실록』권7, 현종 3년 9월 9일(기묘). 숙종 역시 열무에 적극적인 국왕이었다. 이러한 점은 사신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무략이 강하지 않은 점을 근심하여 매양 교외에 거둥하는 기회가 있으면, 길 가운데서 조련을 시켰다. 때로 강상에서 열무하거나 후원에서 시재試才한 뒤 포상을 크게 내려 장신을 후하게 대접하고 사졸을 후하게 돌보았다.44) 그러나 효종 대 이후 숙종 초반까지 국왕이 열무 거둥을 하면 내수외양內修外攘을 강조하는 신료들의 반대가 극심했었다. 북벌을 시대과제로 설정하였던 효종대에 능행을 군사훈련의 기회로 삼은 것은 실질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숙종 대 이후에 국왕이 직접 열병하고 군사훈련을 한 것은 많은 군사들이 도열한 가운데 임하여 군병을 움직이는 통수권자로서 군주의 위상을 확고히 보이려는 또 다른 현실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숙종 대에 들어서도 능행과 열무는 함께 행해지는 일이 계속되자, 병조판서 이이명은 능행 시에 열무하는 규례를 없애고 춘추 2, 3월과 8, 9월간에 따로 열무 거둥을 하자고 건의했다. 숙종은 이 견해를 수용하여 능행과 열무를 분리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숙종은 무진년 영릉 거둥 시 열무를 하지 않았다. 영조 대에 들어서도 역시 능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장대將臺에 친림하여 군사조련을 보는 일이 거행되었다. 영조 대 처음으로 능행을 앞두었을 때, 민진원은 능행과 열무를 분리하고자 했던 숙종대의 조치를 이어 환궁할 때 열무를 하지말자고 청했다. 그러나 영조는 ‘나라의 큰 일이 사전祀典과 융사戎事에 있다.’라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선조에서도 장대에 임어하여 군용을 보는 일을 항상 논했다고 하며 능행 후 돌아가는 길에 장대에서 군용을 보겠다는 뜻을 밝혔다.45) 그러나 영조 역시 숙종과 마찬가지로 경술년 영릉 거둥 시 열무를 하지 않았다. 영조는 “남한산성에서 관무재觀武才를 행하고 싶지만 날짜가 더뎌질까 염려스러워 실행하지 못하니, 무진년의 전례대로 따로 어사를 보내어 시행함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영조는 수어사 윤순에게 명하여 이 사실을 장사들에게 효유하게 하고, 유엄을 어사로 삼았다.46) 44) 『숙종실록』, 부록, 지문. 45) 김지영, 앞의 논문, 127~130쪽. 46) 『영조실록』권25, 영조 6년 2월 29일(무진). 영릉에 거둥하면서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실시한 국왕은 정조뿐이었다. 정조는 능행에 앞서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불러, “군사가 일 백리 밖 나들이를 하려면 그 군용이 더욱 더 질서 정연해야 할 것이다.”하고, 대가 앞에 있는 신전信箭을 가리키며, “대리 청정 초기에 선왕께서 저것을 내게 주시고 언제나 사행師行 때면 저 화살을 대가 앞에다 꼭 세워두게 하셨는데, 그것은 정벌을 단독 결정하라는 뜻이었다.”고 하였다.47) 정조가 능행을 포괄적인 군사행동의 일환으로 인식하였음은 출행 시에 관왕묘에 들렀던 일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영릉에 가기 위해 궁성을 나선 정조는 흥인문 밖의 관왕묘 앞에 이르러 “송나라에서 군행軍行을 할 때 반드시 전배의 예를 행하였던 것을 좆아 우리 숙조와 영고께서도 전배를 하였고 백관 또한 반열에 참여하였다.”고 하여, 숙종과 영조를 이어 능행을 군행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밝혔다. 정조의 영릉 거둥 중 무비武備와 관련된 활동을 일지별로 정리해 보면 <부록2>와 같다. <부록 2>에서 보듯이 영릉에 거둥하면서 치룬 행사 가운데 절반가량이 무비와 관련된 것으로, 군사훈련이 능행의 주요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거둥 첫날인 8월 3일 남한산성에 이르러 병자년의 치욕을 상기시키면서 무비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우리나라의 무비는 요즈음 더욱 허술해져서 백성은 북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군병은 좌작진퇴坐作進退의 절차를 알지 못하는데 하루 이틀 세월만 보내니, 병자란 때의 일을 생각한다면 군신상하가 어찌 이처럼 게으를 수 있겠는가?48) 47) 『정조실록』권54, 부록, 행장. 48)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3일(갑인). 정조는 영릉에 전배한 후 돌아오는 길에 다시 남한산성에 들러 본격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8일 연병관에서 문‧무과시험을 보고 방방放榜한 다음 승군을 시열試閱하였다. 승군들이 방진方陣, 원진圓陣을 법식대로 벌여 이루자, 정조는 조련操鍊하지 않은 군사가 오히려 절제를 아니 가상하다며 남한산성 승군이 유리遊離하는 폐단을 시정하도록 수어사 서명응에게 명하였다. 군사훈련에 이어 병기 시험도 하였다. 승군 훈련에 이어 매화埋火를 설치하자, 정조는 이것은 홍이포紅夷砲의 유제인데 병자년에 기법을 배우지 않아서 쓰지 못한 것이 참으로 한스럽다고 하였다.49) 다음날 정조는 서장대에 임하여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군사훈련인 성조城操를 시열試閱하였다. 20년 동안 빠뜨리고 행하지 않은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이다.50) 성조의 예가 끝나자, 정조는 여輿를 타고 서장대를 나가 남문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곳을 지나는 여느 사람도 모두 비분강개하는데, 더구나 내 마음이겠는가? 이제 이 누각에 올라 남으로 오는 한길을 굽어보며 병자년을 상상하니 똑똑히 눈에 보이는 듯하다. …예부터 난리의 즈음에 파천하는 괴로움이 어느 시대엔들 없었으랴마는, 병자년에 너무 급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던 우리 조정과 같은 경우가 어찌 있었겠는가. 이제 비록 태평한 세월이 오래되어 나라가 안녕할지라도 편안할 때에 위태로움을 잊지 않는 도리에 있어서 임금과 신하 모두가 두려운 마음으로 느끼어 서로 힘쓰고 경계해야 할 바이다.51) 병자년의 쓰라린 교훈을 되새겨 무비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조는 문무가 겸비되는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우리나라는 비록 문치를 숭상하였으나 반드시 무비를 다듬었는데, 이후 문치를 숭상하여 무비를 닦지 않았기 때문에 병자년의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 정조의 판단이었다. 49)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8일(기미). 50) 『일성록』, 정조 3년 7월 8일(경인). 51) 『일성록』, 정조 3년 8월 9일(경신). 정조는 1778년(정조 2) 반포한 대고大誥에서, “우리 동국에 이르러 문치로 나라를 세웠고 무략 또한 갖추어졌다.”고 하여, 융정戎政을 민산民産‧인재人才‧재용財用과 더불어 향후 추진할 4대 국정과제의 하나로 제시하였다. “문강文講과 무강武講, 문제文製와 무사武射는 마치 수레바퀴나 새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정조는 선전관으로 하여금 무강·무사시험을 문강·문제하는 문신들 예에 준하여 실시하도록 명했다.52) 정조는 “문·무는 똑같이 필요한 것이어서 어느 한 쪽만을 중히 여겨서는 안 되는 것” 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 비록 문치를 숭상하기는 하였지만 반드시 무비에 대해 계칙하여 똑같이 여기는 마음을 진념하였고 치우치게 중히 여기는 폐단을 경계하여 왔었다. 서북에 이르러서는 이것이 변방을 방어하는데 관계가 되는 것이어서 그들의 강하고 용감한 성질로 인하여 전적으로 말 타기와 활쏘기에 능한 재능이 있는 이를 뽑아서 습속에 따라 다스려 왔었고 혹시라도 변한 적이 없었다. 이는 실로 문을 장려하고 무를 분발시키는 것을 지역에 따라 마땅함을 달리한 것에 연유된 것이다.53) 정조는 송나라가 오로지 문교만 숭상하고 무위를 떨치지 못하였기에 오랑캐들이 침략하는 바람에 나라가 위태롭고 넘어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후세에서 마땅히 거울로 삼아 경계해야 할 것이라며, 문무 겸비의 방책을 신하들에게 하문하였다. 52) 『정조실록』권54, 부록, 행장. 53) 『정조실록』권12, 정조 5년 11월 2일(경자). 대체로 문무를 아울러 사용하는 것은 예로부터 어려웠다. 상호 부족한 것을 보완하는 것은 또한 상리인데, 어떻게 하면 관대하고 질박한 것을 주로 삼고, 강력하고 굳센 것으로 구제하여 문약에 이르지 않고 무력을 남용하는 데에 이르지 않게 할수 있겠는가? 대체로 예악을 숭상하면서도 활쏘기와 말타기를 폐지하지 않고 농사의 여가에 수렵을 잊지 않으며, 군사 훈련을 하는 가운데에서도 시서예악의 글을 익히고, 차분하고 여유 있게 예절을 갖추면서도 군대의 앉고 서며 나아가고 물러가는 절도에 익숙하게 하는 것은 옛날 성군이 능히 한 것이다. 내가 비록 덕이 없지만 이것을 소원하고 있는데,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할 수 있겠는가?54) 정조가 ‘문약에 이르지 않고 무력을 남용하는 데에도 이르지 않는 방책’을 묻자, 신료들은 “우리 전하께서 이러한 뜻을 가지고 계시는데, 뜻을 게을리 가지지 않는다면 일이 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재능이 천박하여 대양對揚할 수 없습니다.”55)라며 노골적으로 반발하였다. 54)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 6월 26일(병술). 55) 『정조실록』권15, 정조 7년 6월 26일(병술). 3) 왕정이념의 실현 16세기 사림세력의 성장과 함께 군주로 하여금 왕도王道와 인정仁政을 실현하기 위한 학문인 성학을 이수하여 성인군주가 될 것을 요구하는 군주성학론君主聖學論이 등장하였다. 군주성학론은 양반사대부를 정치의 실질적 주체로 보고 정치과정상의 핵심적 행위자이자 공론의 수렴자로서 붕당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군주성학론이 대두하면서 왕권의 절대성은 위협받기 시작하였다. 성학을 공부하고 치자로써 적합한 도덕적 소양을 수양해야 한다는 점이 왕이건 사대부이건 똑같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군주성학론은 혈통과 세습에 의해 국왕의 절대권‧전제권을 확보하려는 군부론君父論에 비해, 국왕의 권위를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기준에 의해 판단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한 단계 발전한 정치이론이었다. 군주의 절대권‧전제권을 부정하는 군주성학론은 왕권의 세속화에 기여하였다. 군주성학론을 거치면서 국왕은 더 이상 하늘의 명을 받아 백성을 다스리는 절대적‧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천명을 인간사회에 구현하는 능력, 즉 유교에서 이상으로 여기는 왕도정치를 현실사회에 실현할 때만이 권능을 인정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 때문에 군주에게는 탁월한 능력, 비범함과 도덕적 자기완성을 지향하는 의지가 있어야 하며 그것을 실천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했다. 이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국왕 스스로가 나서서 정치적 능력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었다. 숙종, 영조, 정조 등 탕평 군주들은 군주성학론이라는 성리학적 왕정론에 공감하면서도 군주가 왕정 실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수용하면서 사림정치가 보여준 신권중심의 정치를 극복하고 국왕중심으로 국정운영을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이다. 국왕의 권력주권을 신하들로부터 되찾으려 한 정조는 군주성학론에 충실하면서도, 이를 국정운영의 헤게모니를 국왕이 장악하는 정치이론으로 바꾸어 버렸다. 요‧순‧우‧탕‧문‧무‧주공‧공자‧맹자‧주자로 이어지는 유학의 도통을 군주인 자신이 계승했음을 천명한 군사론君師論이 그것이다.56) 정조는 군주도통론君主道統論을 선언함으로써 삼대 이상사회를 실현할 주체는 신하가 아니라 국왕자신임을 분명히 하였다. 정조는 군사의 정치적 지향점인 왕정을 실현하기 위해 백성과 하나 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국왕은 더 이상 천명을 받은 초월적‧신비적 존재가 아니었으므로, 백성들에게 다가가서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을 해결해줌으로써 세속화된 권력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었다. 영릉에 전알하기 위해 광나루에 이르러 용주龍舟를 탄 정조는, “임금은 이 배와 같고 백성은 저 물과 같은 것이다. 내가 지금 배를 타고 백성을 대하니 더욱 두려운 생각이 든다. 옛날에 성조께서 주수도舟水圖를 그리시고 사신詞臣을 불러 명銘을 지으라고 하신 것도 역시 그러한 뜻에서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57) 56) 『홍재전서』권53, 弘于一人齋全書欌銘幷序○庚申(1800). 57) 『정조실록』권54, 부록, 행장. 숙종은 󰡔주수도설舟水圖說󰡕을 저술하여 대신에게 내보이며 말하기를, ‘군주는 배와 같고 신하는 물과 같다. 물이 고요한 연후에 배가 안정되고 신하가 현명한 연후에 군주가 편안하다. 경등은 마땅히 이 주수도의 뜻을 본받아 보필의 도리를 다하여야 할 것이다.’58)라고 하였다. 숙종의 󰡔주수도설󰡕은 신하가 국왕을 잘 보필해야 한다며 신료들의 책무를 강조한 것이다. 반면 정조는 물의 비유 대상을 신하에서 백성으로 바꾸었는데, 이는 백성의 주동성과 능동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정조는 백성에 대한 국왕의 책무를 강조하였다. 이는 다음 발언에서도 확인된다. 대가大駕가 이천을 지날 때 길 옆에 구경 나온 백성들이 산과 들에 널려 있었으며, 어떤 머리 하얀 늙은이가 길을 막아서서, 우리 임금 좀 뵙기를 원한다고 아뢰자, 여러 신하들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내 아직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쳐갈 만한 정사나 명령이 하나도 없었는데 백성들이 이렇게 천리를 멀다 않고 왔으니 부끄럽고 두려울 뿐이다.”라고 하였다.59) 정조는 방백과 수령을 불러보는 자리에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愛民之心]’이 ‘내 몸을 아끼는 마음[愛身之心]’보다 더하며, 이러한 나의 마음이 결코 형식적인 데서 나온 것이 아님을 잘 이해하도록 하라고 당부하곤 했다.60) 정조는 국왕의 거둥을 뜻하는 행행行幸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행행이라는 것은 백성이 거가의 행림行臨을 행복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거가가 가는 곳에는 반드시 백성에게 미치는 은택이 있으므로 백성들이 다 이것을 행복하게 여기는 것이다.61) 58) 『숙종실록』, 부록, 지문. 59) 『정조실록』권54, 부록, 행장. 60) 『홍재전서』권32, 敎3, 歲首勸農敎 甲辰(1784). 61)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3일(갑인). 국왕은 거둥을 하면서 백성이 행복해질 수 있도록 은전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행의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정조는 수가隨駕하는 대신과 경기관찰사 그리고 각종 임무를 맡은 차사원差使員 등에게 백성들을 편하게 하고 폐단을 구하는 방책[便民捄弊策] 아뢸 것을 명하였다. 정조는 능행 도중 유교적 왕정이념 구현을 위해 여러 가지 은전을 베풀었다. 백성에게 베푼 은전[恤民]의 내용을 일자별로 정리하면 <부록 3>이 된다. 이를 다시 신분별로 나누어 살펴보자. 먼저 양반에게 베푼 은전이다. <표 2>는 이를 정리한 것이다. [표 2] 정조가 영릉에 거둥하면서 양반에게 베푼 은전 구분 내 용 대 상 은 전 내 용 과시 문과별시 광주‧이천‧ 문과에 민태혁 등 3인을 뽑고 방방放榜을 행함 科試 여주 유생 무과별시 광주‧이천‧ 무과에 이상연 등 15인을 뽑고 방방을 행함 여주 무사 사은 원우중건 송시열 효묘의 능침이 있는 곳이며 賜恩 또 송시열이 소요한 곳이라 하여 특별히 허시 소견 척화斥和 조사朝士 홍병찬·김이유 등 9인을 행궁에서 소견 사절인死節人후손 능행 첫날인 8월 3일, 정조는 남한산성에 이르러 부역하는 군졸을 위휼해야 할 터이니 내일 이천에 이른 후 수어중군이 광주부윤과 함께 관무재觀武才 초시를 실시하고 시취試取하여 무과 전시殿試에 이르도록 할 것을 명하였다.62) 그리고 8일 여주‧이천‧광주 세 고을의 인사를 위로하기 위해 남한산성 연병관에 친히 나아가 문과와 무과 별시를 행하여 합격자를 뽑고 방방放榜을 하였다. 송시열 원우도 건립하도록 허락하였다. 경기 유생 정운기 등이 송시열의 원우가 1731년 세웠다가 1741년에 훼철되었다며 중건해 줄 것을 요청한데 따른 특별한 조치였다. 그리고 병자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 죽은 자손 9인을 입시하도록 하여 소견하였다. 둘째, 소민의 읍폐‧민막 등 각종 민원을 해소하여 주었다. <표 3>은 이를 정리한 것이다. [표 3] 정조가 영릉에 거둥하면서 소민에게 베푼 은전 대상 내용 조 치 은 전 내 용 소민 읍폐 부세견감 ①광주‧이천‧여주 세 고을 소민의 가을 조세[秋賦]를 특별히 감해주도록 명함. 민막 ②속전續田 폐해를 묘당에게 명하여 품처하도록 명함. ③이전미移轉米를 거두어 광주에 보관해 두라고 명함. ④보휼고保恤庫 채전債錢 4,000냥을 탕척하고 문권을 불사르도록 명함. ⑤여주‧이천‧광주 3읍의 조적糶糴은 군향軍餉과 읍환邑還을 막론하고 모두 모곡耗穀을 감해주도록 명함. 거둥 첫날인 8월 3일, 남한산성에 도착한 정조는 광주의 호구와 민호를 묻고, 호역戶役 등 잡역의 폐단에 대해 물었다. 이튿날인 8월 4일, 경안교에 이르러서는 다리를 수리하는데 민간에게 폐를 끼치는 것을 걱정하였다. 넷째날인 8월 6일, 광주‧이천‧여주의 양반과 평민, 부로들에게 연로輦路가 지나는 곳에 특별한 혜택이 없을 수 없다며, 가을 조세를 특별히 감면하는 조치를 취하였다(①). 이어 경기감사와 이천현감에게 백성을 거느리고 입시入侍하도록 한 후 승지에게 명하여 병통을 아뢰도록 하유下諭하였다. 경기감사 정창성이 속전續田의 폐해가 가장 심하다고 아뢰자, 속전의 폐해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묘당으로 하여금 강구하여 아뢰도록 하였다(②). 정조는 백성들에게도 폐단을 아뢰도록 하였다. 광주백성들이 이전미移轉米를 남한산성에 납부하지 않고 본 읍에서 거두어서 보관하도록 해 줄 것을 요청하자, 요청을 받아들여 이전미를 남한산성에 운반하지 말도록 하였다(③). 가장 획기적인 조치는 보휼고保恤庫의 채전債錢을 탕감해준 일이었다. 정조는 남한산성 연병관에 머물면서 대신들을 불러 놓고 산성의 백성에게 특별히 은혜를 베풀려고 하니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다. 수어사 서명응이 “산성 백성에게 폐단이 되는 것은 보휼고 빚돈만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아뢰자, 정조는 채전을 모두 탕척하고 문권을 불사르도록 하였다(④). 보휼고는 원금 4천 냥으로 운영하는 민고民庫의 일종으로, 남한산성 내 민인에게 급채給債하여 매년 이자로 600여 냥을 받아서 지방支放 부족에 충당하고 성곽 보수비용으로 사용한지 16년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본전은 이미 다 없어지고 이자는 그대로 있어 매번 채전을 수봉收捧할 때 가두고 때리는 소리로 성안이 시끄러웠으며, 장교‧아전에서부터 군졸‧평민에 이르기까지 보휼고로 인해 피해를 입지 않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었다. 수어사로부터 보휼고 채전의 폐해를 들은 정조는, “비록 지리地利를 얻어도 인화人和가 없으면 누구와 더불어 성을 지키겠는가.”하면서, 연병관 뜰에서 채권을 모두 불태우고 지방支放과 수보修補 비용은 광주부 결전結錢에서 충당하여 지급하도록 하였다.63) 62), 63) 『重訂南漢誌』. 셋째, 양반 평민 모두에게 관련된 은전이었다. 정조는 70내지 80이상의 부로父老들에게 식물제급이나 가자 등의 은혜를 베풀었는데, 이는 거둥 시 흔히 볼 수 있는 은전이었다. [표 4] 정조가 영릉에 거둥하면서 양반[士]과 평민[庶]에게 베푼 은전 사은 식물제급 부로 ① 광주‧이천‧여주 세 고을에 사는 양반과 평민가운데에서 賜恩 70 이상인 자에게 음식물을 내림 ② 경재卿宰를 역임하고 70이상으로 가까운 고을에 거주하는 자에게도 음식물을 내려 줌 가자 부로 광주‧이천‧여주 세 고을에 사는 80 이상이고 행행을 두 번 겪은 자는 각각 한 자급을 더하여 줌 민의 소견 관광 길가에 관광하는 사람이 산야를 가득 메우자, 어가를 머물고 수렴 민인 승지를 통해 어느 지역 백성이냐고 묻고, 차사원에게 연로輦路 백성을 금하지 말도록 함 상언격쟁 영릉 동구에서 살곶이다리까지 상언을 받도록 함 정조가 영릉 거둥에서 취한 조치 중 눈에 띠는 점은 백성들을 직접 만나보는 등 적극적으로 민의 수렴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정조는 거둥 도중 시신侍臣을 돌아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산에 가득히 찬 것은 백성이고 들에 두루 찬 것은 익은 곡식이다. 농사가 다행히 풍년을 얻은 것은 참으로 하늘이 돌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덕이 없는 것을 생각하면 어찌 조금이라도 이렇게 될 수 있겠는가? 해를 이어 풍년이 들기를 바야흐로 절실히 빌거니와, 백성으로 말하면 담장처럼 늘어서서 억만으로 셀만하다. 늙은이를 부축하고 어린아이를 데리고서 메우고 막아 두루 찼는데, 내가 오늘 이 곳에 와서 이 백성을 대하니, 오가는 마음은 한 사람이라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게 할 방도[無一夫不獲之方]를 생각하는 것이다마는, 믿는 것은 또한 경들이 협력하여 보좌하는 공에 달려 있다.64) 군사君師를 자임한 정조는 모든 백성을 빠짐없이 돌봄으로써[無一夫不獲之方], 유교적 왕정이념을 현실사회에 구현하려 하였다. 정조는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 능행 도중 어가를 멈추고 백성들을 직접 만나보거나, 상언 격쟁을 허용하였다. 그리고 환궁 후에는 상언을 기안 내에 회계回啓하도록 명하였다.65) 64)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3일(갑인). 65) 『일성록』 정조 3년 8월 11일(임술), “이번의 上言을 모두 기한 안에 回啓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하교하기를, “이번 상언은 대부분 먼 지방 사람이 한 것이어서 더러 격식을 어기기도 하였을 것이나, 이런 이유로 모두 다 빼버려서는 안 된다. 四件事 이외만 빼고 그 나머지는 모두 각 該司에 내려 다 기한 안에 회계하게 하고, 회계하는 것이 기한을 넘기면 該房이 살펴서 推考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처럼 백성들의 여론을 수렴한 바탕 위에서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국정 운영방식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국왕이 백성들과의 접촉이 활발해지는 18세기 중엽부터였다. 영조 대 국왕의 행차를 구경 하기 위해 구름같이 모인 백성들은 민심의 향배를 확인할 수 있는 잣대로 받아들여졌다. 영조는 적극적으로 구경나온 백성들과의 소통을 시도하였다. 관광민인들이 전체 어가행렬을 보는 것을 막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왕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백성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상언의 기회를 점차 늘려나가는 것은 그들에게 국왕을 강하게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영조는 대소 거둥 시에 직접 민인을 소견하여 그들의 폐막을 들어주었다. 능행이나 성내 거둥 시에 곳곳에서 어가를 멈추고 백성들을 소견하는 모습은 영조 대 거둥에서 늘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영조는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져 주고 위로하는 방법으로 직접 만나서 민막을 들어주는 것이 상언을 받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상언이라는 전통적인 방식에 더하여 곳곳에서 어가를 멈추고 백성들을 만나보려 했고 이 점이 영조 대 이후의 국왕 행차에서 가장 달라진 면모였다.66) 관광하는 민인들을 적극적으로 거둥의 일부로 끌어들이고자 하는 노력은 정조대에도 계속되었다. 8월 3일 거둥길에 광진 주정소에 다다른 정조는 길을 끼고 구경하는 백성들을 막지 말라고 명하였다.67) 이처럼 정조가 민막을 해소하고 민의를 수렴함으로써 소통의 주체로 나서고자 한 까닭은 사회통합력을 높여 크게 하나가 되는 사회 즉 대동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정조는 자신을 특정계층이나 특정지역의 이익을 대변하는 상대적‧사적 존재가 아니라 백성 전체의 이익을 골고루 보호하는 절대적‧공적 존재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대동 사회 구현으로 나타났다. 모든 백성을 아울러 대동 사회를 구현하려는 정조의 정치이념은 인재 등용에서 서울과 지방간의 소통을 강조하는 일시경외一視京外와 균부均賦‧균산均産‧균역均役을 지향하는 손상익하損上益下로 표현되었다. 일시경외가 지역 간 대동을 추구하는 소통정책이라면 손상익하는 사회세력 간 대동을 추구하는 소통정책이었다. 정조의 손상익하에는 소민을 보호한다는 이념이 압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68) 정조는 능행을 통해 백성들과의 만남을 강화하고 소통을 활성화함으로써 사회통합력을 제고하고자 하였다. 66) 김지영, 앞의 논문, 227~229쪽. 67) 『정조실록』권8, 정조 3년 8월 3일(갑인), “華陽亭에 이르렀을 때에 가랑비가 내리다가 廣津의 晝停所에 이르렀을 때에 갰는데, 길을 끼고 구경하는 서울 백성을 막지 말라고 명하였다.” 68) 한상권, 『正祖의 君主觀』, 『조선시대사학보』41, 조선시대사학회, 2007, 163~166쪽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中 舟橋圖, 24.1x33.6cm, 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 4. 맺음말 민본주의적 군주상을 이상으로 추구한 조선의 국왕들은 도덕적 리더십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였다. 정조는 역모를 진압한 후 정치적 난국을 타개할 수있는 방안의 하나로 효종대왕의 능인 영릉에 거둥하였다. 능행을 통해 국정운영의 주도자로서의 국왕의 모습을 신료와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군주의 이미지 만들기 작업을 시도한 것이었다. 정조가 능행을 통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는 세 가지였다. 하나는 조선사회가 추구해야 할 이념인 존주의리를 구체화하는 일이었다. 이를 정조는 과거와의 연속성을 통해 확보하고자 하였다. 이념적 정통성은 역사적 연속성 위에서 찾을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정조의 기해년(1779) 영릉 거둥은 숙종의 무진년(1688)과 영조의 경술년(1730) 거둥의 전통을 계술繼述하는 것이었다. 정조는 영릉 거둥을 통해 효종-숙종-영조의 존주의리의 계승자임을 천명함으로써 의리탕평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게 되었다. 정조는 존주대의론을 군신의리론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국정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신료들의 자발적인 복속을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다른 하나는 국왕으로서의 권위를 확보함으로써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었다. 이는 관병과 열무 즉 군사훈련을 통해 이루어졌다. 군사훈련에서 국왕은 상징이자 단결의 구심점이었다. 국왕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잘훈련된 군사는 군주의 권위를 크게 높여주었다. 강력한 군대의 지지와 호위를 받는 국왕은 살아있는 권력이었다. 군사훈련은 군주를 중심으로 결집할 때 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정조는 남한산성에서의 군사훈련을 통해 국방력을 강화하는 한편 군주로서의 위용을 한껏 드러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인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사회통합을 이루는 일이었다. 이는 국왕이 백성들을 만나고 읍폐‧민막을 해소해 줌으로써 이룰 수 있었다. 정조는 행행 도중 민의수렴과 휼민조치를 취함으로써 백성들의 자발적인 복종을 도출해냈다. 이상 정조는 영릉 거둥을 통해 백성들과 소통함으로써 사회 통합력을 제고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친정체제를 구축함으로써 탕평정치를 추진할 수 있었다. [부록 1] 정조의 영릉寧陵 거둥 일지 (1779.8.3.~8.10) [부록 2] 정조의 영릉寧陵 거둥 중 무비武備와 관련된 활동 (1779.8.3.~8.10) [부록 3] 정조의 영릉寧陵 거둥 중 휼민恤民과 관련된 활동 (1779.8.3.~8.10) 참고문헌 1. 원사료 『숙종실록』 『승정원일기』 『영조실록』 『일성록』 『정조실록』 『중정남한지』 『홍재전서』 2. 연구 논문 1) 저서 김문식,『정조의 제왕학』(태학사, 2007) 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 정옥자,『일득록 연구』(일지사, 2000) 2) 논문 김문식,『18세기 후반 정조 능행의 의의』,『한국학보』88(1997) 김지영,『조선후기 국왕 행차에 대한 연구 ―의궤반차도와 거둥 기록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05) 이현진,『조선후기 종묘 정비와 세실론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06) 한상권,『정조의 군주관』,『조선시대사학보』41(조선시대사학회, 2007)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 8폭병풍 中 제6폭 舟橋圖, 견본채색, 151.5x66.4cm, 국립중앙박물관 『화성능행도병풍(華城陵幸圖屛風)』국립고궁박물관 고궁박물관 소장 [화성행행도 8폭 병풍]. 각 폭의 높이 147.0cm, 가로폭 62.3cm 《화성능행도》는 1795년(정조 19) 정조가 어머니 惠慶宮 홍씨(洪氏)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思悼世子의 묘소인 현륭원(顯隆園)이 있는 경기도 華城에서 개최한 행사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본래 여덟 장면의 배열순서가 《원행을묘정리의궤園行乙卯整理儀軌》의 圖式 순서와 일치했으나, 2000년에 보수하면서 행례 순서에 따라 새로 장황하였다. ​ 제1폭 명륜당 참배[華城聖廟展拜圖], 제2폭 과거시험[洛南軒放榜圖], 제3폭 혜경궁 회갑잔치[奉壽堂進饌圖], 제4폭 경로잔치[洛南軒養老宴圖], 제5폭 야간군사훈련[西將臺城操圖], 제6폭 활쏘기와 불꽃놀이[得中亭御射圖], 제7폭 한양으로 돌아오는 행렬[還御行列圖], 제8폭 환궁길 한강 배다리[漢江舟橋還御圖]로 구성. 같은 주제의 병풍이 국립중앙박물관과 삼성미술관 리움에 각 1건, 동국대학교박물관,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박물관, 도쿄예술대학 등에 낱폭으로 소장되어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화성능행도병풍》 제3폭 [봉수당진찬도]는 다른 소장본들과 달리 화면의 좌우가 바뀌어 있는데 이는 후대에 모사하는 과정에서 화본(畵本)이 뒤집힌 것으로 생각한다. (출처 : 국립고궁박물관) 『華城陵幸圖』 재질 섬유(견), 김득신(金得臣, 1754-1822) 크기151.5cm*66.4cm, 국립중앙박물관 《화성능행도(華城陵幸圖)》는 정조가 1795년 윤 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어머니 혜경궁 홍씨(1735~1815)를 모시고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1735~1762)의 원소 현륭원顯隆園에 행차한 뒤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던 일을 그린 것이다. 1795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탄신 일주갑이 되는 해로 정조가 현륭원 전배를 마친 뒤 화성 행궁에서 진찬례를 베풀어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고자 세심한 배려와 치밀한 계획 아래 이루어졌다. 이를 기념하여 행사의 도설(圖說)을 김홍도에게 제작하게 하고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그대로 담았다. 그리고 이 도설에 기초하여 김홍도를 따르던 김득신·최득현·이인문·이명규·장한종·허식 등에 의해 병풍으로 제작된 것으로 생각된다. 《華城陵幸圖》는 국왕의 친림, 호위하는 군사, 관료들과 구경나온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삼삼오오를 이룬 인물의 포즈를 다양하고 해학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시정을 리얼하게 묘사하여 당대 풍속적인 소재를 담은 기록화의 백미로 인정된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제1폭 화성성묘전배(華城聖廟展拜) 제2폭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 제3폭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 제4폭 낙남헌양로연도(洛南軒養老宴圖) 제5폭 서장대야조(西將臺夜操圖) 제6폭 득중정어사도(得中亭御射圖) 제7폭 환어행렬도(還御行列圖) / 上 국립중앙박물관 본 / 下 고궁박물관 본 제8폭 한강주교환어도(漢江舟橋還御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