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
김 일 환 * *
목 차
1. 머리말
2. 南漢山城과 汗峰 : ‘立馬’ 이미지의 생성
3. 寧遠城과 首山 : ‘남한산성’의 소환
4. 袁崇煥과 諸葛亮 : ‘남한산성’의 재전유
5. 결론
국문초록
이 논문은 조선 지식인들의 역사적 경험이
외국의 특정 장소에 투사되어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이후 그 곳을 지나는 조선인들이 그 공간을 자기화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1626년 寧遠城을 지키던 袁崇煥이 後金의 포위 공격을 격퇴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었던 누르하치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嘔血臺 이야기’는
이런 현상을 설명할수 있는 좋은 예이다.
이 이야기는 明과 淸의 자료에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반면 조선의 연행록에서는 지속적으로 보일 뿐만 아니라
소설에 핍진할 정도로 그 편폭을 확대시키고 있다.
‘嘔血臺 이야기’는 병자호란 당시 淸 太宗이 주도한 남한산성 공격과
그 결과로 이어진 항복의 아픈 기억을 後金의 포위를 이겨내고
결국 오랑캐를 패퇴시킨 袁崇煥의 승전으로 치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廣寧부터 시작하는 명청교체기의 격전장을 지나가면서 슬픔을 고조시켰다.
그러다 寧遠城과 首山 위의 煙臺를 마주하면서
南漢山城과 ‘漢峰[汗峰]’에서 겪은 치욕과 아픔을 袁崇煥의 승리로 치유하고,
‘五山立馬’의 고사를 이용하여 청나라의 멸망을 희구하였던 것이다.
袁崇煥의 통쾌한 승리, 오랑캐의 궤멸적 패배와 자발적 복종은
『삼국지연의』에 보이는 제갈량과 맹획의 반사곡 전투를 위시한 칠종칠금 고사를 원용하였다.
정통을 회복해야 하는 蜀漢의 비극적 운명과 그런 역경을 타개하려는
諸葛亮의 필사적인 노력, 北伐의 지난함과 그 과정에서 보인 南蠻 평정 등의
구체적인 문면이 당대 조선과 明의 처지와 호응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처럼 ‘嘔血臺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전개와 소설의 서사적 전개가 겹쳐지는 장면에
‘좌절’과 ‘극복 의지’를 더하여 한 편의 감동적인 전쟁담을 만들어
연행노정의 한 지점에 아로새긴 것이라 할 수 있다.
* 이 논문은 2013년 10월 25일 한국한문학회 제10차 전국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원고
「燕行路에서 만나는 ‘南漢山城’-寧遠衛․袁崇煥․嘔血臺와 관련하여」를 보완한 것이다.
토론을 맡아주신 김현미 선생님과 조언을 해주신 여러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 동국대학교 강사. 전자우편: chukong@hanmai.net
주제어 : 燕行, 병자호란, 남한산성, 袁崇煥, 嘔血臺, 제갈량.
1. 머리말
鴨綠江 以北부터 北京에 이르는 路程은
淸나라 황제가 다스리던 땅으로 淸人과 漢人들의 생활공간이다. 하지만 이들은
압록강부터 산해관까지의 노정[關外]에 대해서는 조선의 지식인들만큼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淸의 황제들은 封禁한 조상들의 근거지와 그곳으로 가는 통로를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그때마다 황제가 남긴 御筆이 곳곳에 새겨져 있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지만,
조선의 연행사들이 남긴 방대한 詩文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분량이다.
淸나라 말기부터 民國 초기에 산출된 각 지역의 地方誌와 비교해도
해마다 여러 번 그 길을 오가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축적해 놓은 양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그 공간을 자연스레 ‘우리의 것’으로 여겼다.
이런 친연성이 만들어지게 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동아시아의 패권이 漢族의 明에서 滿洲族의 淸으로 대체된 것이 가장 큰 이유라 할 수 있다.
明淸 교체기의 혼란으로 25년 동안 온전히 다니지 못했던 연행길1)에
다시 선 조선의 연행사들은 그 길을 여전히 이질적인 외국으로 대하면서도
때때로 매우 친연적인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本稿에서 다룰 ‘嘔血臺 이야기’는
연행 노정이 조선 지식인들의 공간이라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1626년 寧遠城을 지키던 袁崇煥이 後金의 포위 공격을 격퇴[寧遠大捷]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었던 누르하치가 피를 토했다[嘔血]는 이 일화는
明과 淸의 자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데 반해
조선에서 산출된 연행록에는 지속적으로 보이고 있다.2)
이 嘔血臺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살펴보면, 연행록의 記事가
선배 연행사들이 남긴 기록과 실제 현지에서의 ‘傳聞’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조선 땅에서 이루어진 역사적 경험이 외국의 특정 장소에 투사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냈고,
이후 그곳을 지나는 조선인들이 그 공간을 전유했다는 것이 이 논문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바이다.
嘔血臺 이야기가 만들어지던 17세기는 동아시아 중화질서가 변동하여
조선의 지배층 인물들이 체제 유지를 위해 다각적으로 노력하던 시기였다.
이 과정에서 자신들의 문제의식을 역사적 類比의 차원에서 담아낼 수 있는 사건이나 인물들을
과거 속에서 찾아 논리화하려는 노력이 병행되었고, 이는 기존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역사 인식에 일정한 변화를 초래하거나 새로운 인식의 출현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3)
1) 후금이 요동지역을 장악한 1621년(광해군 13)부터 대명외교가 단절된 1637년(인조15)까지는 해로로 ‘朝天’을
지속했다. 병자호란으로 종주국을 淸으로 바꾼 1637년부터 順治帝가 ‘入關’한 1945년까지는 瀋陽으로 ‘使
行’을 다녀왔다.
2) ‘嘔血臺’ 이야기의 중국 쪽 전승에 대해서는 김일환(2012a) 참조. 17세기 이후 연행록에서의 수록 양상은 김
일환(2012b) 참조. 한편 이와 관련하여 成大中은 청나라의 史官이 『明史』에 ‘寧遠大捷’에 대해서는 적었지
만, 전투의 구체적인 장면은 묘사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成大中, 『靑城雜記』卷5, 「醒言」.
3) 허태용(2009), 24면.
※ 朝天 : 천자를 배알하다, 入關 : ① 山海關 안으로 들어가다 ② 東北(둥베이)로부터 중국 관내에 들어가다
이런 측면에서 ‘북방고대사인식’과 ‘정통론’이 주목을 받았다.
특히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된 燕行 공간에서는 자주 ‘高句麗’와 ‘安市城’이 소환되었다.4)
이 논문에서는 그보다 근년에 이루어진 병자호란의 체험과 치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생성된 공통의 기억,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중화와 오랑캐’, ‘패배와 승리’, ‘복수’ 같은 요소들이
연행 노정의 특정한 장소와 결합되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2. 南漢山城과 汗峰: ‘立馬’ 이미지의 생성
嘔血臺 이야기의 구성 요소 중 하나는 ‘오랑캐 추장[虜酋]이 주도한 포위’이다.
조선도 ‘오랑캐 추장’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포위를 주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丙子胡亂 때에 있었던 청 太宗의 南漢山城 포위가 그것이다.
淸軍 선봉이 安州를 지났다는 보고가 도착한 것이 1636년 12월 13일,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힌 仁祖와 그의 신하들과 친위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한 것이 14일 밤, 남한산성 밖에 淸軍이 출현한 것이 15일 밤,
강화를 위해 청군 진영에 가짜 왕자와 대신(綾峯守 偁과 형조판서 沈諿)을
사자로 보낸 일이 발각된 것이 16일이었다. 이날 이후 청군은
성 주변에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하는 등 본격적인 포위작전을 시작했다.5)
4)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이승수(2003), 이승수(2006), 허태용(2009) 참조.
5) 병자호란 중 남한산성 내부의 상황에 대해서는 羅萬甲의 『丙子錄』과 장경남(2013), 한명기(2013) 등 참조.
① 청나라 칸이 모든 군사를 모아 炭川에 진을 치고는 30만 명이라 하였다.
누런 일산을 펼치고 성 동쪽의 望月峯에 올라 성 안을 굽어보았다.6)
② 오랑캐가 말하였다.
“어제 칸이 오셔서 지금은 산성의 형세를 순시하고 계신다.
이 뒤의 일은 우리들이 알 바 아니다. 마땅히 칸께서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린 뒤에
답을 돌려주리라.”(중략) 오후에 동쪽 성 밖으로부터
두 개의 양산과 두 개의 큰 깃발을 펴고, 대포를 쏘았다. 이는 분명히 칸이었다.7)
③ 오랑캐가 답하였다.
“우리 皇帝가 어제 이미 군영에 도착하셨으니 의논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방금 城[松城]을 순시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셨으니,
낮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오라.” 밖을 보니, 오랑캐가 누런양산을 받쳐 들고
나팔 불며 포를 쏘고 북을 두드리고 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8)』
정축년 1월 1일은 남한산성의 조선군이 칸[汗, 청 태종]을 처음으로 목격한 날이다.
칸은 조선의 강화 사절이 방문했음에도 만나주지 않고 산에 올랐다.
그런데 관련 기록들은 칸이 올라간 봉우리에 대해 조금씩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조실록①』에서 말하는 ‘望月峰’은 ‘蜂巖峯’, 일명 ‘벌봉’을 말한다.
이 봉우리는 남한산성 동쪽에 있는데, 오직 이 봉우리만 성 안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9)
6)『仁祖實錄』卷34, 仁祖 15년 1월 1일 辛丑, 662면,
虜汗合諸軍, 結陣于炭川, 號三十萬, 張黃傘, 登城東望月峯, 俯瞰城中.
7) 羅萬甲, 『丙子錄』, 丁丑正月初一日,
(중략) 胡言: “昨日, 汗出來, 方巡視山城形勢, 此後之事, 非我等所知,
當待汗還陳, 然後回報.” (중략) 午後, 自東城外, 張兩諒傘․ 兩大旗, 放大炮, 此必是汗也.
8) 南礏, 『南漢日記』, 「崇禎九年 十二月 二十五日」.
9) 洪敬謨, 『重訂 南漢志』 卷1 「山川」(오성․김세민(2005), 20면).
하지만 뒷날 ‘칸이 올라간 산봉우리[汗峰]’로 불린 곳은 이곳이 아니다.
羅萬甲(1592~1642, ②)은 동쪽 성 밖이라고만 말한다.
南礏(1592~1672, ③)은 칸이 ‘소나무 성’을 순시하기 위해 산에 올라갔다고 하고 있다.
‘松城’은 淸軍이 포위를 위해 남한산성 밖에 소나무 가지와 잡목으로 에워쌓은 木城을 말한다.
조선군이 한 번도 돌파하지 못했던 백리가 넘는 장벽이었다.
하지만 병자호란 중에 작성된 詩文 어디에도 ‘汗峰’이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肅宗 중반 이후부터 ‘汗峰’이라는 지명이 출현한다.
내[金萬基]가 이곳을 지키면서부터 여러 차례 올라왔다.
부하들을 사열하고 형세를 살피는 것은 지키는 신하의 직책이므로 경치의 훌륭함과
구경하는 즐거움을 느낄 여가가 없었다. 일찍이 나이든 군교와 물러난 군졸에게 물어
사방을 둘러보며 자주 비탄에 잠기는 것은 스스로 어찌 할 수 없었다.
그 서쪽으로는 평야가 연결되어 바로 한강으로 닿으니
오랑캐가 일찍이 진을 치고 대장기를 세웠던 곳이다.
비록 한강의 흐름을 기울여도 그날의 비린내는 씻지 못할 것이다.
동쪽으로 하나의 봉우리가 있으니 이른바 ‘可汗’이라고 하는데,
높고 험준하여 성루와 마주 서 있는 모습인데, 오랑캐왕이 말을 세운 곳이라 전해진다.
(그가) 호시탐탐 엿보며 우리나라에 사람이 없다고 한 것을 생각하면, 지사의 아픔을 어찌 다하랴!
북으로 굽어보면 긴 골짜기 뻗어내려 곧게 고읍터로 달린다.
이르기를 이 북문은 포위당했을 적에 삼백 군사가 전사한 곳이라고 한다.
그 왼쪽 편이 죽자 오히려 빈주먹을 펼치니 몸은 들풀의 거름이 되고
혼은 귀신의 으뜸이 되어 배회하는 것이 어제 일 같아 머리카락이 곤두서 갓을 찌르게 한다.
성 안의 유허와 버려진 자취를 돌아 볼 때,
김․정[金尙憲, 鄭蘊] 두 선생의 말리던 곳을 오히려 분별할 것 같다.
그 옛날 降書를 찢고 통곡하며 칼을 꽂고 죽기를 구하던 모습이 엊그제 일과 같이 역력하며,
높은 산의 경치를 보며 일어나는 회포가 스스로 가슴 속을 격동시킨다.
슬프다, 터와 묘가 슬픔을 일으키고, 종묘가 공경함을 일으키는 것은 천리의 양심이라.
그 접한 바를 따라 말없이 전율을 느끼면서 태연하니 살아있는 것이며,
진실로 그러한 발단으로 인하여 실마리를 넓히고 충실하게 하면
인과 예의 열매를 다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대에 올라 그 감개하고 탄식하지 않을 자가 있을까?
누구나 이것으로 인하여 더욱 臣死의 의에 힘쓴다면
이 장대에서 어찌 홀로 部下나 사열하고 형세나 찾을 뿐이겠는가?
만약 풍경이나 구경하고 유람이나 탐하면서 다시 감개하고 탄식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는 이른바 그 양심을 잃은 자일 것이다.
글로 써서 후인에게 경계하며 또한 고하노라.10)
汗이 올랐다는 봉우리를 ‘汗峰’이라고 부른 사람은 金萬基(1633~1687)가 처음인 듯 하다.11)
10) 金萬基, 『瑞石先生集』卷5(문집총간 144), 「西將臺記」, 419면.
余自守是土, 已屢躋焉. 閱儲胥審形勢, 乃守臣之職, 而至於景物之勝, 遊覽之樂, 則未能暇也.
蓋嘗問諸老校․退卒, 而環顧指點, 感慨累欷, 而不能已焉. 其西則曠野綿延, 直抵江涘,
金虜之所 嘗列壘立牙之地. 雖決江漢之經流, 無以洗當日之腥羶. 東有一峯, 名以可汗, 崒嵂與城譙若相持,
尙傳胡王之所立馬, 相其眈眈然睥睨, 謂東土無人, 志士之痛曷已. 北俯長谷逶迤, 直走古邑墟,
云是北門劘壘之役, 三百健兒所戰沒之地. 若其左驂已殪, 空弮猶張, 身膏壄草, 魂作鬼雄, 仿像疇昔,
令人髮豎指冠. 顧瞻城中, 遺墟廢址, 金․鄭二先生之所止舍, 猶可辨識. 乃其裂書痛哭, 剚刅求死, 歷歷如前日事,
而高山景行之懷, 自激于中. 噫, 墟墓興哀, 宗廟興敬, 是秉彝之良心, 隨其所按而犁然感油然生者也.
苟因其犁然油然之端而擴而充之, 則仁禮之實, 不可勝用矣. 登斯臺也而其有不感慨累欷者乎.
苟能由是而益勉臣死之義, 則其有得於斯臺者, 豈獨閱儲胥審形勢而已哉. 若或玩景物而耽遊覽,
無復感慨累欷之心, 則是所謂牿亡其良心者也. 書以自警, 且諗後人云爾.
11) 물론 엄밀히 말하면 그는 ‘可汗峰’이라고 하고 있지만,
‘可汗’이나 ‘汗’ 모든 ‘khan’의 음차어이므로 결국은 같은 말이다.
그는 廣州留守(兼守禦副使)로 있던 1667년 11월부터 1669년 1월 사이에 「西將臺記」를 지었다.
김만기는 ‘西將臺’를 필두로 남한산성과 그 주변에 있는
병자호란의 전흔과 상흔을 하나하나 언급하고 있다.
淸軍의 대장기가 세워졌던 한강변 주둔지, 칸이 올라가 남한산성을 내려 보던 可汗峰,
(金瑬의 무리한 명령으로) 3백 명의 조선군이 몰살당한 北門,
金尙憲과 鄭蘊이 온몸으로 和議를 거부하던 일을 하나하나 호명하고 있다.
이렇게 이미지를 연쇄시킨 결과,
南漢山城은 괴롭고 부끄러운 곳에서 자랑스럽고 결의를 다질 수 있는 장소가 된다.
千尺層臺迥 천 자나 되는 층대 빛나니
曾經百戰來 일찍이 수많은 전투를 치렀다네
艱危那忍說 어렵고 위태로움 어찌 차마 말하리
鎖鑰愧非才 성 지키던 자 재목이 아님 부끄럽구나
大野茫茫遠 큰 들은 아득히 멀고
長江曲曲廻 긴 강은 굽이굽이 돌아가네
愀然倚孤劍 추연히 외로운 검에 기대어
斜日獨徘徊 해거름에 홀로 배회하는구나12)
그리고 金萬基는 스스로를 南漢山城을 지키고 있는 인물로 그려내고 있다.
有史 이래 확인된 교전은 병자호란의 포위전 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채 두 달도 안 되는 기간이었는데
‘百戰’이라는 표현을 써가면서 西將臺를 격전지로 격상시킨다.
그리고 병자호란 당시 정국의 주도권을 쥐던 인물들을 비판하면서
평화로운 나라를 지키기 위해 고심하는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뒷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후 김만기는 1672년 병조판서가 된 이래
扈衛大將, 訓練大將, 摠戎使 등의 군직을 맡으며 군권을 놓지 않았다.
「西將臺記」는 둘째 아들 金鎭圭(1658~1716)가 家狀에서 金萬基의
기개와 문장을 강조하기 위해 인용할 정도로 그들 가문에게는 중요한 글이었다.13)
12) 金萬基, 『瑞石先生集』卷3(문집총간 144), 「西將臺, 復用前韻」, 386면.
13) 金鎭圭, 『竹泉集』卷31(문집총간 174), 「先考奮忠効義炳幾協謨保社功臣, 輔國崇祿大夫, 領敦寧府事,
兼知經筵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成均館事, 五衛都揔府都揔管, 光城府院君,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府君家狀」, 455면.
府君平日長在詞翰言議之職, 而及當吏事, 綽乎刃游, 無所惉懘, 人服其通才焉. 廣卽丙丁難駐蹕之所也,
府君於公餘, 登覽吊古, 輒愾然太息, 以至發爲文辭. 其 「登西將臺記」, 有曰: “墟墓興哀, 宗廟興敬,
是秉彛之良心, 隨其所接而犂然感油然生者也. 登斯臺也, 而其有不感慨絫欷者乎. 苟能由是而益勉臣死之義,
則其有得於斯臺者, 豈獨閱儲胥審形勢而已哉.” 嗚呼, 於斯文而亦可見所存矣.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되는 것은 金萬基가 ‘可汗峰’이라고 부른 봉우리의 정체다.
여전히 ‘벌봉’인지 ‘한봉’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벌봉’과 ‘한봉’ 모두 남한산성 안을 바라볼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다만 金萬基의 記文으로 분명해진 것은 있다. 오랑캐 왕이 남한산성[조선]을 조감할 수 있는
곳에 올라 자신에게 대적할 상대가 없다고 천명한 것14)을 기정사실화 했다.
‘立馬’의 이미지를 南漢山城과 결부시킨 것이다. 이 ‘立馬’의 이미지를
더 구체화시킨 사람이 있으니, 역시 척신 계열인 金錫冑(1634~1684)였다.
① 一夕胡烽照漢宮 하룻밤에 오랑캐 쳐들어왔단 봉화 오르니
先王於此駐飛龍 선왕께서 여기에 행차하셨네
誰知百二金湯地 누가 알았으리, 이만이 백만을 막는 금성탕지에
更有吳山立馬峯 다시 오산의 입마봉이 있었음을. 15)
② 壯士橫戈壓虎關 장사는 창을 비껴 호관을 누르고
西門一箭破完顏 서문에서 날린 화살 完顔을 깨뜨렸네
至今雉堞連雲處 지금도 성가퀴는 구름 속으로 이어지니
猶有當時戰血斑 외려 당시 싸우던 피 자국 있으리. 16)
14) 주 10)의 밑줄 친 부분 참조.
15) 金錫冑, 『息庵集』卷5(문집총간 145), 「遊南漢山城感舊」 8수 중 2번째인 <望可汗峯>, 183면.
16) 金錫冑, 『息庵集』卷5(문집총간 145), 「遊南漢山城感舊」 8수 중 4번째인 <觀西暗門破賊處>, 183면.
金錫冑는 숙종 즉위 직후인 1674년 9월에 守禦使로 임명되어,
1678년 御營大將으로 이배되기까지 4년 동안 수도 및 남한산성의 방어를 책임졌다.
그는 수어사로 임명받은 직후
산성의 수비 면적에 비해 인원이 적다고 둔전의 확대를 청하기도 하였다.
그가 남긴 「遊南漢山城感舊」 8수는 金萬基의 「西將臺記」와 긴밀하게 조응하고 있다.
서장대에 올라[登西將臺],
가한봉을 바라보면서[望可汗峰],
옛날 흉노족 정벌에 나섰던 漢 高祖의 30만 부대가 화친을 함으로써
온전히 귀환했던 일을 생각하고[有感] 17),
李時白이 淸軍의 습격을 격퇴한 서암문을 바라보고[觀西暗門破賊處],
金瑬의 명령에 따라 북문으로 출정했다가 전사한 병사들을 슬퍼하고 있다[哀北門戰士].
金萬基가 실제 사실을 적으면서 斥和의 높은 기개로 글을 마무리한 반면에
金錫冑는 漢 高祖와 李時白의 분전을 끼워 넣으며 쓰디쓴 패전을 낭만적으로 처리했다.
① [望可汗峰]에서는 淸軍의 전격적인 침입에 계획했던 강화도로 들어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들어온 궁색함과 압도적인 적의 포위를 말하고 있다.
“吳山의 立馬峰”은 金나라 4대 황제 海陵王 完顔亮(재위 1149~1161)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南宋을 칠 때 쓴 시에서 가져온 것이다.18)
17) 古州東北盡黃雲, 烏驪靑駹各一群, 漢家戰士三十萬, 奇功還屬奉春君.
한 고조가 흉노 정벌을 나섰다가 ‘平城[白登山]’에서 포위를 당했다가 무사히 귀환한 일을 말하고 있다.
‘烏驪’는 흉노 포위진의 북쪽을 맡았던 기마대, ‘靑駹’은 동쪽을 맡았던 기마대이다.
‘奉春君’은 흉노와의 화친 교섭을 성공시킨 劉敬이다. 『史記』, 「匈奴列傳」 참조.
18) “만 리에 온갖 제도 하나로 통일되니, 강남에 어찌 다른 나라가 있으리요.
백만 군사 이끌고 서호의 곁에 가서, 오산의 제일봉에 전마를 세우리라.
萬里書車一混同, 江南豈有別疆封. 提兵百萬西湖側, 立馬吳山第一峰.”(『鶴林玉露』권1)
오랑캐로 멸시받던 여진족의 왕이 백만대군을 이끌고 ‘天下一統’을 말하는 당당한 선언이었다.
金錫冑는 매우 의도적으로 이 고사를 인용했다. ‘중국의 통일자’로 자부하던 海陵王은
양자강을 건너 南京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采石磯에서 宋軍에게 격파당하고,
마침내 자신이 형 熙宗의 황위를 무력으로 빼앗은 것처럼
종제 世宗에게 황위를 빼앗겨 버리고 말았다.19)
金錫冑는 남한산성의 패배를 말하는 것처럼 하면서,
결국은 淸나라가 곧 망할 것이라는 강력한 희망을 피력한 것이다.
② [觀西暗門破賊處]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흉노족에게 포위를 당했던 한나라 군대가
화친을 통해 온전히 귀환할 수 있던 고사를 인용함으로써
일견 ‘主和’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인다. 하지만 정축년 1월 24일 밤에 있던
李時白 주도의 수비전에서 오랑캐를 격퇴했음을 노래한다.
화살 하나에 거꾸러진 ‘完顔’은 ‘여진족’인 淸軍 일반을 가리키는 동시에
‘오랑캐 왕[完顔亮]’을 직접 겨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청나라와의 관계는 안개 속이지만, 조선의 적개심이 여전함을 피력했다.
이는 出城한 임금이 칸에게 무릎을 꿇음으로써 분명히 패했지만,
적으로 하여금 성벽을 넘게 하지는 않았다[金城湯池]는 묘한 자존심의 발로로 볼 수 있겠다.
오늘의 눈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 ‘정신승리법’은
잘 알려진 것처럼 조선 지식인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는다.
宋時烈(1607~1689)의 제자로 의리론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李選(1632~1692)을 비롯한
많은 후임들이 남한산성을 찾은 뒤에 金錫冑의 이 시에 차운하였다. 20)
19) 宮崎市定(1983), 281면.
20) 李選, 『芝湖集』卷1(문집총간 143), 「次金斯百錫胄遊南漢山城韻」 8수 중 2번째인 <望可汗峯韻>, 347면.
憶曾先后駐行宮 선대의 임금께서 행궁에 머무신 것을 생각하노라니
何似白登困六龍 황제께서 백등에서 곤욕당한 것과 닮지 않았는가
忍見鳥飛難過處 새들도 날아 지나가기 힘든 곳을 차마 보니
路人猶指可汗峯 길 가던 사람 가한봉이라 알려주네.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산에 올라 남한산성을 굽어보는
‘말을 탄 칸[立馬]’의 이미지가 생성되었다.
詩文에서의 이미지뿐만 아니라
조선의 대청 방어 전략에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증대되면서,
‘汗峰’은 숙종부터 영조, 정조 때까지 지속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한봉에 앉아서 보면 大闕[行宮]은 물론 산성 안의 虛實을 도적들이
엿보아 알 수 있기”21) 때문에 성을 쌓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하지만 남한산성 수비에 배정된 군사는 적은데,
방어해야 할 성벽이 길어지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힘들여 쌓은 성벽이 오히려 방어력을 떨어뜨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숙종 19년(1693)에 수어사 吳始壽(1631~1681)가 주도하여 성을 쌓았다가,
숙종 31년(1705)에는 쓸모가 없다하여 수어사 閔鎭厚(1659~1720)가 훼철하고,
다시 영조 15(1739)년에 趙顯命(1690~1752)이 개축하는 등
쌓았다가 무너뜨렸다 하는 일이 반복되었다.22)
이런 지리 번쇄한 논의와 물력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汗峰’의 존재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상식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숙종, 영조와 정조는 남한산성을 직접 돌아보기까지 하였으니,23)
이 행차에 배석했던 관료들은 ‘남한산성과 한봉’을 하나의 이미지로 인식하였다.
21) 『英祖實錄』卷24, 영조 5년 8월 23일 乙丑, 150면.
22) 남한산성의 증․개축 과정은 洪敬謨, 앞의 책, 「城池」 참조.
23) 조선후기 국왕의 남한산성 행차에 대해서는 김문식(2012) 참조.
앞서 언급한 것처럼 金萬基와 金錫冑는 숙종 시기의 대표적인 척족세력이었다.
金萬基는 [金長生(1548~1631) -> 金集(1574~1656)]으로 이어지는
광산 김씨의 후손으로 老論의 중핵이 되고, 肅宗의 장인으로서 막강한 권세를 누렸다.
金錫冑 역시 [金堉(1580~1658) -> 金左明(1616~1671)]으로 이어지는
청풍 김씨의 후손으로 肅宗 때의 정국을 주도했다.
한때 山黨과 漢黨으로 대립하던 두 척신 가문은 庚申大黜陟[경신환국, 1680]을 함께 주도했으며,
이후 宋時烈까지 결합하면서 정치적․문화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24)
특히 老少분기가 이루어지면서 이들은 ‘義理’를 강력하게 내세웠는데,
南漢山城을 다룬 金萬基의 ‘文’과 金錫冑의 ‘詩’는 이를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숙종의 ‘換局’을 거듭하며 ‘南人’에게 전략적으로 내어준 때를 제외하면,
노론 계열이 수어사[남한산성]을 맡아왔다. 이들이 지속적으로
생산해낸 이미지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지닌다 하겠다.25)
3. 寧遠城과 首山: ‘남한산성’의 소환
遼陽부터 山海關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연행 노정은 명청교체기의 전장이었다.
특히 명나라의 방어 거점이었던 [廣寧->寧遠衛->山海關]으로 이어지는 축선은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공격과 방어가 이루어지던 곳이다.26)
이 가운데 寧遠衛는 조선인들이 유난히 관심을 많이 보였던 곳이다.
24) 이희중(2007), 231~232면.
25) 南漢山城의 개보수 작업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면서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다. 이때마다 記文이 제작되었다.
글을 지은 작가는 당연히 노론 계열이고, 이 글에서 다루는 소재․주제는 모두 ‘光城’[金萬基]와
‘淸城’[金錫冑]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1751년부터 1753년까지 광주유수를 지낸 李箕鎭(1687∼1755)의
글을 보면 흡사 ‘聖地 순례’의 분위기까지 보인다.
李箕鎭, 『牧谷集』권7(한국문집총간 속67집), 「無忘樓記」, 460면,
崇禎丙子之冬, 虜大擧犯我, 進圍南漢城. 翌年正月, 遂有城下之盟. 其後百十有五年, 而賤臣者,
受守禦命于是城. 始至廵列堞, 乃陟西將臺, 周覽訖, 仍過天柱寺. 見光城金公所爲詩若文, 其辭多感憤不堪讀.
(중략) 若一城之形勝事跡, 金公詩文已盡之. 又有淸城金公詩三首, 同在寺壁, 今幷移于此.
26) 遼陽-瀋陽-廣寧 구간에 대한 연행사들의 인식에 대해서는 林文星(2012)을 참조.
바다 건너 들려온 전황에 따르면 寧遠衛는
袁崇煥이라는 걸출한 존재에 힘입어 淸의 남진을 막아내는 ‘요새’였다.
또한 조선을 끊임없이 괴롭게 하던 毛文龍(1579~1629)을 처단한 것도 袁崇煥이었다.
그리고 해로 사행의 첫 기착지이기도 했다. 비교적 항해가 무난한 登州 노선과 달리
渤海를 횡단해야 하는 寧遠衛[覺華島] 노선에서는 많은 조난이 있었다.
그러므로 기착지인 ‘寧遠衛’의 ‘寧遠城’은 희망과 안도를 주는 곳이었다.
袁崇煥이 죽은 뒤에도 그의 후임들은 비교적 잘 지켜냈다.
청나라에 의해 억지로 파병된 조선군들이 종군했을 당시에도,
전방의 錦州․松山․杏山․塔山은 물론
후방의 中後所․前屯衛․中前所가 다 함락되어도 ‘寧遠城’은 건재했다.27)
무엇보다 ‘寧遠城’은 청나라의 오랑캐의 추장[虜酋]인 누르하치와
淸 太宗을 모두 격퇴시킨 곳이기도 하였다.
이런 ‘難攻不落’의 ‘金城湯池’는 조선인에게는 없는 곳이었다.
江華島는 점령당했고, 南漢山城은 성문을 열었던 것이다.
‘寧遠城’은 조선인들에게 ‘로망’이었다.
1645년 淸이 入關하면서,
드디어 10년 만에 조선 사신들은 다시 寧遠城에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寧遠城을 지나게 되면서 과거에 누르하치가 이 성을 공격할 때에
袁崇煥의 砲擊에 패퇴한 뒤에 화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조심스럽게 연행록에 실리기 시작했는데,
해가 갈수록 점차 구체적인 상황 묘사가 이루어졌다. 실제 누르하치는
심양으로 퇴각한 뒤에 죽었는데, 이야기에서는 달아나면서 피를 토하고 죽는다고 하였다.
특히 寧遠城의 전투를 특유의 전고 활용으로 이미지화한 것은 金錫冑였다.
1683년 연행을 다녀온 金錫冑는 鮑叔牙가 제나라 桓公에게 말했던
‘莒땅에서의 일을 잊지말라[毋忘在莒]’는 뜻에서 「擣椒錄」이라는 시집을 묶어내는데,
여기에는 ‘寧遠衛’에 대한 시가 6편이나 실려 있다.
특히 포위로 벼랑 끝에 몰린 趙襄子가 전격적으로 반격에 나서고,
楚나라 출신의 項羽가 (秦나라에 대한 복수의 차원에서)
秦始皇陵과 阿房宮을 불태운 典故를 섞어 만든 「寧遠述感」이라는 장편은
寧遠城에 대한 조선 연행사들의 인식을 다잡는 계기가 되었다.28)
27) 朴世堂, 『西溪燕錄』(「연행록총간」), 18면, 「(戊申十二月)壬申」,
寧遠去海不能十里, 明之未亡, 爲咽喉重地, 常屯十萬兵. 袁崇煥亦留鎭於此, 嘗以計, 大殲北兵.
28) 김일환(2012b) 참조.
이후에 산출된 燕行 관련 詩文에는 이전 ‘燕行使’들이 보여준 조심스러운 태도가 사라진다.
淸을 극복하는 상징 인물로서의 ‘袁崇煥[袁公, 袁總督, 袁經略]’이 등장하고,
포격으로 패퇴한 군대가 ‘부정칭’에서 ‘북쪽 군대[北軍]’로,
급기야는 ‘건주의 오랑캐[建奴]’로 불리기도 하였다.
18세기로 넘어오면 황제가 피를 통하고 죽었다고 하면서,
그를 ‘늙은 추장[老酋]’이나 ‘칸[汗]’으로 직접 지칭하였다.
아울러 패전한 그가 원통한 마음에서 피를 토하고[嘔血] 죽은 장소가 특정되기 시작한다.
寧遠城의 南門 전방에 있는 ‘首山’이 그 대상이었다.
寧遠城을 마주하고 좌우로 늘어선 ‘首山’은 세 봉우리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봉우리에 ‘煙臺’가 설치되어 있다.
明末 또는 淸나라 때에 작성된 현지 기록물에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인이 쓴 연행기록에만 이 봉우리 또는 그 위에 설치된 ‘將臺’에서
‘오랑캐의 추장’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말하고 있다.
‘오랑캐의 침입을 맞아 방어하는 성,
그 성을 조망하기 위해 오랑캐의 두목이 올라간 산’이라는 조건은
‘남한산성의 위협이 되면서 청의 황제가 직접 올라 정탐을 한 봉우리’와 그대로 겹쳐진다.
寧遠城의 ‘首山’은 南漢山城의 ‘汗峰’인 것이다.
다음은 李觀命(1661~1733)이 1717년 사은사의 부사로 북경에 갈 때,
寧遠城 안에서 지은 작품이다.
金錫冑의 「望可汗峰」처럼 ‘立馬’를 소재로 시상을 전개했다.
辛苦築城笑祖龍 고생스레 성을 쌓은 진시황이 우습구려
小墩無奈障胡鋒 작은 돈대로 오랑캐 칼끝을 어찌 막는가
可憐獨峙高岡上 가련하다, 높은 언덕 위에 홀로 솟아
長衛吳山立馬峰 길이 오산의 입마봉을 지키시라.29)
이 시는 제목에서 밝힌 것처럼
寧遠城 안에서 煙臺와 이를 마주 보고 있는 金汗의 將臺를 보고 지었다.
북경으로 가는 연행 노정, 즉 廣寧에서 寧遠城으로 갈 때는 ‘烟臺/將臺’가 있는
‘首山’을 지나서 寧遠城 안으로 들어간다. 寧遠城 안에서 首山을 올려 보아야
金錫冑가 南漢山城 안에서 汗峰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시선이 확보된다.
寧遠衛에서 袁崇煥을 떠올리거나[寧遠衛憶袁軍門崇煥],
嘔血臺를 바라보면서 袁崇煥을 애통하게 여기면서[望嘔血臺哀袁將軍崇煥]
지레 울어버리는 것도 곤란하다.
李觀命은 金錫冑가 汗峰을 바라보는 위치에 자신을 정확히 일치시킨 것이다.
李觀命은 어렵게 쌓은 장성으로 오랑캐의 공격을 당해내지 못한 秦始皇을 비웃는다.
首山 위에 서 있는 烟臺을 가련하게 보고 있다. 煙臺 체계로 북방민족을 경계하고,
城을 거점 삼아 철기군을 주력으로 한 淸을 막아내려 했던 明도 패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煙臺’에 희망을 걸고 있다. 칸의 지휘[將臺]를 막아달라는.30)
‘城下之盟’을 맺은 南漢山城을 노래한 金錫冑와 비교할 때, 오히려 패배주의적 감성이 묻어난다.
이는 金錫冑가 남한산성에 올랐을 때는 ‘三藩의 난’으로 중원에 여전히 혼란이 있었지만,
李觀命이 연행한 때는 康熙 56년으로 청나라가 전성기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31)
29) 李觀命, 『屛山集』권2(문집총간 177), 「望見寧遠後山上煙臺, 與金汗將臺對峙」, 32면.
30) 이 烟臺를 세운 사람은 戚繼光이다. 朴趾源, 『熱河日記』(문집총간 252), 「盛京雜識」, 173면.
烟臺自此始, 五里一臺, 圓徑十餘丈, 高五六丈, 築同城制, 上設砲穴女墻, 戚南宮繼光所設八百望是也.
31) 정치적으로 보면 李觀命은 戚臣인 金錫冑보다 더 老論의 중심에 선 인물이다. 그는 노론사대신 중의 한 명인
李健命(1663~1722)의 형으로 ‘辛丑換局[辛任士禍]에서도 살아남아 끝까지 少論과 맞섰다. 물론 개인적인 성
향이 다를 수 있으나, 당대의 역사적 상황이 인식의 변화를 추동한 것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여기서 문학적 상상력이 발동한다.
조선의 연행사들은 ‘儒將’의 이미지가 강한 袁崇煥으로 하여금 오랑캐에게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안겨준 현장, 寧遠城과 ‘嘔血臺’를 ‘反淸’의 상징으로 소환한다.
그렇기 때문에 명나라[烟臺] 옆에 군대를 지휘하던 칸의 자리[將臺]를 만들어낸 것이다.
절의 왼쪽 편에 있는 높은 언덕 위에 烟臺가 있었다.
烟臺 옆에는 또 將臺가 있었다. 장대는 일명 嘔血臺라고도 하였다.
내가 역관 金慶門에게 관련된 일을 물어보니, 그가 대답했다.
“일찍이 중국 사람들의 전설을 들었습니다. 청 태종 때에
袁崇煥이 寧遠城에 군사를 두어 지킴으로써 山海關으로 가는 길을 막았습니다.
太宗이 몇 년을 공격해도 빼앗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늘 책사들과
대 위에 앉아 성안을 내려다보며 깨뜨릴 계책을 강구했습니다.
하루는 특별히 큰 대포를 만들어 쏘아 성의 한쪽 면을 무너뜨렸습니다.
날이 밝으면 정예 병력을 이끌고 기세 좋게 쳐들어갈 것을 논의했습니다.
다시 와서 대에 올라 병사들을 지휘하여 전진하려고 했는데,
바라보니 새로운 성첩이 완연했고 성벽이 높이 솟아있었습니다.
그 무너진 곳을 하룻밤 동안 고쳐놓았던 것입니다. 태종이 크게 놀라
‘어찌 이런 신기한 일이 있나?’라고 하고는 정신을 잃고 몇 되의 피를 토했고,
이에 즉시 군사를 물렸습니다.
대포를 맞고 성벽이 훼손된 그 날,
수비하는 사람이 달려가 袁崇煥에게 고하였습니다.
袁崇煥이 한참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말했답니다.
‘알고 있다. 번거롭게 말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놀래키지 말라.’
종사관 한 명을 부르더니 귀에 대고 몇 마디를 말하니, 종사관이 알겠다며 물러갔습니다.
그는 큰 천에 벽돌을 쌓은 형상을 그려 그 무너진 곳을 가리고는,
몰래 그 안에서 성벽을 수리하니, 며칠이 되지 않아 성벽이 완성되었습니다.
태종이 나중에 이에 대해 듣더니
‘이 계책은 내가 쫓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탄식했답니다.
袁崇煥이 있을 때에는 감히 다시 침략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袁崇煥이 살해되었습니다.
조대수가 대신하였는데, 성이 마침내 함락되었습니다.
대의 이름이 ‘구혈’이라고 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합니다.”32)
32) 李正臣, 『櫟翁遺稿』권7(문집총간 속53), 「燕行錄」(1721), <辛丑四月十八日>, 99면,
寺之左邊高嶺上, 有烟臺, 烟臺傍, 又有將坮, 將坮一名乃嘔血坮也. 吾問故事於譯官金慶門, 則對曰:
“曾聞中國人傳說, 淸太宗時, 袁崇煥鎭守寧遠, 以遏進關之路, 太宗攻之數年, 不能拔, 常與謀士坐坮上,
俯瞰城中, 而講究必破之策. 一日別作大砲, 打壞城之一面, 議以明朝督精銳, 長駈以入. 復來登臺,
方欲麾兵而進,望見新堞完然, 崇墉屹屹, 其毁者已完於一夜之間. 太宗大驚曰:‘何其神也?’魄裭心死, 嘔血數升,
仍卽退軍. 當其放砲毁城之日, 守者奔告崇煥, 崇煥方對客圍棊, 點頭而徐答曰:‘已知之矣!愼勿煩言,
而驚惧衆心.’招從事一人, 附耳語數勾, 從事唯唯而退, 作大布帳靛畵甎築之形, 以蔽其毁處, 潛自其內修築,
不日而城完. 太宗追聞之, 歎曰: ‘是謀非吾所能及也.’崇煥在時, 不敢復侵. 未幾, 崇煥殺死,
祖大壽代之而城遂陷. 坮之名嘔血以此.”云.
1721년 사은부사로 연행한 李正臣(1660~1727)이 남긴 기록이다.
역관 金慶門(1673~1737)이 청나라 사람에게 들었다며, 현지에서 채록한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鐵甕城을 내려다보며 부하들과 破城의 계책을 熟議하는 ‘칸’의 모습이 이채롭고,
득의양양하던 그가 袁崇煥의 계책에 좌절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어 신빙성에 문제가 있다.
袁崇煥이 寧遠城을 지키고 있을 때까지
淸은 明이 보유한 紅夷砲의 사정거리를 넘어서는 포를 개발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적어도 淸이 포격으로 明의 성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아울러 明이 무너진 성을 천에 그림을 그려 가리고
하루 동안 성을 보완했다는 점도 큰 신빙성을 갖지 못한다.
성벽이 무너져 鐵騎가 그대로 성벽을 넘어갈 수 있는데,
하루를 기다리는 것도 전략전술상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다.33)
寧遠城은 南漢山城과 달리 평지에 있어 훨씬 공략이 수월했다.
반면 오랑캐의 수장과 관련해서는 다른 이본에 비해 개연성을 가지고 있다.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수장이)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데 비해
이 이야기에서는 ‘피를 토하고 후퇴했다’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1626년 ‘寧遠大捷’의 패배자는 ‘누르하치’,
1629년의 ‘寧錦大捷’에서도 ‘청 태종’은 말머리를 瀋陽으로 돌릴 수밖에 없었다.
노추가 이 성을 내습했을 때, 마침 우리나라 역관이 이곳에 도착해 있었다.
袁崇煥 공을 뵈니, 공은 만권의 책을 쌓아두고 방안에 앉아 있었다.
깊은 밤에 한 장수가 와서 보고 하자 袁崇煥 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있지 않아 성 밖에서 하늘을 진동시킬 정도의 포성이 들려왔다. 나가보니
오랑캐 기병이 연기와 화염 속에서 폭풍에 휩싸인 듯 튀어 오르니,
어떤 이는 성안으로 떨어지기도 하였다. 미리 紅夷砲를 성 밖에 매설해놓고,
적이 오자 폭발시켰던 것이다. 오랑캐의 용맹한 장수와 정예병이 여기서 다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원 공이 성에 올라 직접 내려다보면 탄식하였다.
“사람을 이렇게 많이 죽였으니, 내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이른바 ‘노추’는 겨우 몸만 빼내 수십기를 데리고 달아났다.
원공이 양고기와 술을 보내 위로하여 말했다.
“앞으로 다시는 오지 말라.” 노추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고 한다. (중략)
동문으로 성을 출입하는데, 서문 밖 조씨네 집에서 숙박했다.
사람들이 청 태종이 피를 토했던 대는
성 동쪽으로 1리쯤 되는 산꼭대기에 돌로 쌓은 대라고 말해주었다.34)
1790년 동지사로 연행한 金箕性(1752~1811)이 남긴 기록은
嘔血臺 이야기의 출처가 두 군데로 나뉘어 있다.
淸軍이 내습하기 전에 도착해 있던 조선인 역관을 이야기의 최초 발화자로 보아야 한다.
이야기를 말한[云] 주체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嘔血臺의 위치에 대해서는
寧遠城의 조씨네 집 사람들이 알려주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구도는 자연스레 ‘嘔血臺’ 이야기의 생성 과정을 알려준다.
조선에서 구혈대 이야기를 듣고 온 사람이 현장에서 구체적인 물증을 요구했고,
이야기를 들은 현지인들은 지형을 고려했을 때 ‘首山’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침 首山의 봉우리에는 ‘煙臺’가 있었고, 그 ‘煙臺’가 다시 남산한성의
‘汗峰’에 둘러쳤던 성벽으로 연결되었다고 보는 것은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33) 南漢山城에서 淸軍의 습격이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음을 기억하자.
34) 金箕性, 『庚戌燕行日記』(연행록총간), 48면, 「(十一月)三十日丙午」,
老酋來襲此城, 時我國譯官適到此, 謁袁公, 公積萬卷書, 坐一室, 夜深有一將有所來告, 袁公點頭, 俄而城外,
砲聲震天, 見胡騎飄騰於煙焰之中, 或墜於城內. 盖預埋紅夷砲於城外, 賊至而發也. 虜之猛將精兵, 盡於此.
翌日朝, 袁公登城臨視而歎曰: “殺人此多, 吾其不免乎?”所謂老酋僅以身免與數十騎遁走, 袁公送羊酒慰之語曰:
“後勿更來.” 老酋嘔血而死云. (중략) 從東門入出城, 西門外宿于趙姓民人家. 人謂, 淸太宗嘔血之臺,
卽城東里許山 頭築石爲臺處云.
4. 袁崇煥과 諸葛亮: ‘남한산성’의 재전유
嘔血臺 이야기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두 계통으로 나뉜다.
袁崇煥이 寧遠城을 침입한 오랑캐의 鐵騎兵을
紅夷砲 또는 地雷를 사용하여 산산히 ‘燒死’시키는 이야기와
오랑캐의 포격으로 무너진 성벽을 그림 그린 천으로 가려 성벽이 멀쩡한 것처럼
위장했다가 실제로 하룻밤 동안 복구하여 공격의 의도를 꺾은 이야기이다.
18세기 중반 이후에 기록된 대부분의 이본들은 이 두 가지 결과에
오랑캐의 두목 또는 황제가 失意하여 嘔血臺에서 피를 토해 죽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명나라 때부터 지뢰를 사용하여 요새를 방어했다는 연구 결과도 있지만 ,35)
嘔血臺 이야기에서 보이는 전투 장면은 지나치게 과장이 되어 있다. 嘔血臺 이야기 중에서
가장 극적으로 구성된 작품은 『靑邱野談』에 실린 「山海關都督鏖虜兵」이다. 36)
35) 중국인은 1277년에 지뢰로 사용되는 폭탄을 발명했다. 하지만 이 지뢰는 대개 국경의 관문이나 좁고 험한 길
에 설치했다고 한다. 로버트 템플(2009), 256~262면 참조.
당시 明軍의 최대 무기는 사정거리가 긴 홍이포와 강력한 청의 기병이 돌파할 수 없는 성벽이었다.
36) 작자 미상, 「山海關都督鏖虜兵」, 『靑邱野談』(국립중앙도서관본: 김기동(1981)),
大明末, 我國使臣, 入中原. 時都督袁崇煥, 鎭山海關, 以防建虜. 都督年纔二十餘, 迎接使臣, 與之棊,
其雍容雅閑 談笑可掬, 城中闃若無人. 日纔午, 軍校一人, 趍而前告曰: “奴兒哈赤率十萬兵來, 駐三十里外矣.”
都督曰: “唯.” 使臣曰: “今大敵臨境, 公何不施備禦之策乎? 請停棋.” 都督曰: “不怕, 已有措處矣.”
圍棋如故, 俄而又告曰: “二十里矣.” 又告曰: “十里外矣.” 都督乃與使臣, 登樓而觀之, 一望平野,
虜騎如蟻, 黑雲慘憺, 朔風淅瀝, 使臣回顧城中, 則各堡樓上, 虛張旗幟, 兵且不滿三千云. 使臣大惧,
都督呼一校, 附耳語曰: “如是如是.” 校唯〃而退, 仍酌酒如故, 俄而城樓上, 砲聲一起霎時間,
忽聞天崩地塌之聲, 烟焰漲野, 虜陣盡入於灰燼中, 腥臭塞鼻, 使臣始聞其地雷砲之預設, 誠天下壯觀也. 日已曛,
烟塵稍息, 見野山邊, 一燈明滅而走. 都督嘆曰: “天也!” 呼一校謂曰: “彼燈影, 乃奴兒哈赤也. 持壺酒,
走馬往遺之, 且傳吾語, ‘十年養兵, 一朝成灰, 吾以薄酒慰之’云.” 往傳則虜酋受其酒, 痛飮而走.
使臣收拾精神, 請問其顚末, 辭而去云. 이 이야기의 ‘과장’에 대해서는 현혜경(1998) 참조.
명나라 말에 우리나라 사신이 중원에 들어갔다.
그 때 도독 袁崇煥이 산해관에 진을 설치하고서 건주의 오랑캐를 방어하고 있었다.
도둑은 나이가 겨우 20여 세였는데, 사신을 영접하고 함께 바둑을 두었다.
그는 온화하고 한아하였고, 담소를 나눔에 따듯하였다.
성안은 고요하여 마치 아무도 없는 듯 같았다.
정오쯤 되자 장교 한 사람이 달려와 앞에서 아뢰었다.
“누르하치가 십만 병을 거느리고 와서 30리 밖에 주둔하고 있나이다.”
도독이 말하였다. “알았다.”
사신이 말하였다. “지금 대적이 경내에 임박해 있는데
공께서는 어찌하여 맞아 방어하는 계책을 펴시지 않으십니까? 바둑을 그만 두시지요.”
도둑이 말하였다. “두려울 것 없소. 이미 조처를 해두었소.”
여전히 바둑을 두었다. 조금 있다가 장교가 또 아뢰었다.
“20리 밖에 이르렀습니다.” “10리 밖에 이르렀습니다.”
도독이 그제서야 사신과 함께 망루에 올라 상황을 살펴보았다.
아득히 펼쳐진 들판에 오랑캐 기병이 마치 개미떼 같았고
검은 구름은 몹시 어두침침하였으며 삭풍이 쓸쓸히 불고 있었다.
사신이 성안을 돌아보니 각 보루(堡壘) 위에 기치를 무수하게 꽂아놓았지만,
병사는 3천명도 안된다고 하였다. 사신은 크게 두려웠다.
도독이 한 장교를 불러 귀에 대고 “여차여차해라”라고 말하니, 장교는 “예, 예.”하고
대답한 뒤 물러났다. 그리고 나서 도독은 다시 예전처럼 술을 부어 마셨다.
조금 후 성루 위에서 대포 소리가 한번 일어나더니 삽시간에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소리가 났으며 연기와 불꽃이 들에 가득찼다.
오랑캐 진영이 모두 잿더미로 변해 버렸고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사신은 그제야 비로소 지뢰포를 미리 설치해 놓았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로 천하의 장관이었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연기와 먼지도 조금 잦아들었는데,
들판 끝의 산을 보니 등불 하나가 깜박거리며 달려가고 있었다.
도독이 탄식했다. “하늘이시여!” 한 장교를 불러 말했다.
“저 등불의 그림자는 누르하치다.
술병을 가지고 말을 달려가서 그에게 주고 내 말도 전하거라. 10년 동안 병사를
양성한 것이 하루아침에 재로 변해버렸으니 내 변변찮은 술로나마 위로한다고 하여라.”
장교가 가서 전하니 건주 오랑캐의 추장이 술을 받아 모두 마신 뒤 달려갔다.
사신은 정신을 수습하고 그 전말을 청하여 들은 뒤 작별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편찬자가 ‘사행단의 일원’이 아니기 때문에 ‘역관’이 아닌 ‘사신’이 직접 증언자로 등장한다.37)
영원대첩 당시 마흔 살이었던 袁崇煥은 ‘스무 살 남짓’의 침착한 才士가 되어
바둑을 두면서 빠른 속도로 전진해오는 淸軍을 침착하게 응대하고 있다.
3천명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조용히 적을 맞이한 袁崇煥은 삽시간에 화염을 불러일으키고
천지를 진통시켜 ‘십만 대군’을 몰살시키는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이런 과장이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유명한 소설의 전투 장면과 인물 설정을 차용했기 때문이다.
그 소설은 조선 후기 크게 유행을 한 『三國志演義』이다.38)
37) 李星齡의『春坡堂日月錄』에 보이는 기록에 따르면, 이 사신은 ‘역관 韓瑗’이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로 파견되던 조선 사신들의 ‘水路朝天路’는 登州 노선이었다.
韓瑗이 袁崇煥을 만난 것은 이로부터 2년 뒤의 일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일환(2012a) 참조.
38) 조선 후기 문학에서『三國志演義』를 다양하게 수용하고
향유한 현상과 그 의미에 대해서는 허태용(2003)와 하윤섭(2012),
『삼국지연의』의 초기 유통에 대해서는 윤세순(2004)와 박재연(2010),
『삼국지연의』가 우리 고소설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김광순(1987),
대략적인 비교 연구가 아닌 구체적인 장면을 조응시켜 의미를 찾아낸 연구로는 엄태웅(2011)을 참조.
『三國志演義』는 중요한 전투를 모두 ‘불’로 장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39)
올돌골은 군사를 거느리고 위연의 뒤를 쫓으며 무찌르다가,
산속을 바라보니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가 없었다. 그제야 올돌골은
매복한 촉군이 없음을 짐작하고, 마음 놓고 뒤쫓아 골짜기 안으로 들어가서 보니,
검은 기름을 칠한 궤를 실은 수레 열 대가 길에 놓여 있었다.(중략)
한 군사가 달려와서 고한다.
“이 골짜기 입구도 이미 큰 나무와 돌들로 막혔고,
모든 수레에 실린 것은 다 화약이라, 일제히 타들어가고 있습니다.”
올돌골은 사방에 풀도 나무도 없기 때문에 오히려 당황하지 않고 길을 찾아 달리는데,
문득 양쪽 산 위에서 무수한 횃불이 마구 날아 떨어지고,
횃불이 땅에 닿자마자 導火線에 불이 붙어 鐵砲가 폭발하니,
온 골짜기에 불덩어리가 어지러이 춤을 추며 난다.
만병들은 입은 등갑마다 모조리 불이 붙어,
올돌골과 3만 명 등갑군은 서로 얼싸안고 반사곡 안에서 모두 타서 죽었다.
공명이 산 위에서 굽어보니, 만병들은 불에 타서 주먹과 다리를 쭉 뻗었고,
거의 철포에 맞아 머리가 깨지거나 또는 몸 일부가 없어진 채로 골짜기 안에 죽어 있으니,
그 지독한 악취에 코를 들 수가 없었다. 공명이 눈물을 흘리며 탄식한다.
“내 국가를 위해 공은 세웠으나, 이런 참혹한 짓을 했으니,
나도 오래 살지는 못하리라.”40)
39) 『三國志演義』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영향력이 가장 깊은 삼대 전쟁-원소와 조조 사이에 벌어진 官渡大戰,
조조와 손권․유비 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赤壁大戰, 유비와 손권 사이에 벌어진 夷陵大戰-이 있다.
이들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결정적 수단은 모두 ‘火攻’이었다. 조조의 경기병들이 원소의 양식저장소를
불태운 ‘火燒烏巢’, 거짓 항복한 황개가 발동하여 쇠사슬로 묶인 조조의 대선단을 불태운 ‘火燒赤壁’,
육손의 지휘하에 수백리에 걸친 유비의 진영을 차례로 불태운 ‘火燒連營’이 그것이다.
40) 『懸吐三國志』제90화, 博文書館(나관중․김구용(2003), 163~164면).
살시킨 諸葛亮은 참혹한 전술을 쓴 자신이 長壽하지 못할 것을 예견한다.
정통성을 가진 蜀漢을 위해 평생 헌신하다 五丈原에서 쓰러진 諸葛亮의 삶은
寧遠大捷(1626)과 京師保衛戰(1628) 등 지속적으로 淸의 침략을 막아내다
反間計로 목숨을 잃은 袁崇煥의 삶에 겹쳐진다.
고소설 연구 초기부터 『三國志演義』를 비롯한 연의류 소설의 ‘埋伏’, ‘包圍’, ‘火攻’ 등의
요소가 군담소설의 구성이나 전투 장면 묘사에 활용되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하지만 ‘전쟁 이야기[軍談]’를 즐기려는 목적을 갖지 않은 글에서는 서사 구조나 장면 묘사의
동일성/유사성이라는 겉으로 드러나 있는 점 외에 보다 섬세한 측면의 접근이 있어야 한다.
공명이 盤蛇谷에서 맹획의 가장 강력한 부대를 섬멸했다.
이에 일곱 번째 잡힌 猛獲이 諸葛亮에게 대대손손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이에 諸葛亮은 그를 일으켜 세우고 길이 南蠻을 다스리게 하고 빼앗은 땅을 모두 돌려주었다.
이로써 ‘南蠻’은 蜀漢의 일부가 되었다. 정통성을 가진 자[漢族]의 전략전술과
너른 아량에 ‘心腹’하는 오랑캐야말로 조선 지식인들이 꿈꾸던 바였다.
① 작년에 적병이 山海關의 外城으로 쳐들어갔다.
군문 袁崇煥이 성 밖에 굴을 파고 성 안으로까지 통하게 하고는,
그 굴 안에 화약을 채우고 흙을 덮었다. 이렇게 하기를 성 사방에 두루 하였다.
적이 쏟아져 오더니 장차 성을 오르려고 하였다. 성안 사람이 굴에 불을 놓으니,
땅 속에서 화약이 터졌다. 적의 기마병이 불길에 휩싸여 쓰러지거나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면서 불에 타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적은 그 한쪽에만 화약을 묻은 것으로 여겨 다시 다른 쪽부터 밀고 들어갔다.
성안 사람들도 앞에 했던 것과 같이 하니 역시 같은 양상으로 죽어 나갔다. 적은 한번
불을 놓은 곳에는 다시 폭파 설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것으로 여겨 다시 그쪽으로 들어갔다.
앞서 불을 놓을 때에 이미 저들이 다시 들어올 줄을 알고 중간 중간
폭파시키지 않은 것이 있었는데, 이에 다시 불을 붙였다.
적이 3번 들어왔다, 3번 모두 패배하니, 크게 두려워하여 퇴각했다.
얼마 있지 않아 성안에서 갑옷도 입지 않은 사람이 혼자 말을 타고 적진으로 뛰어 들어가서는
적장을 만나 위로하면서 “너희들을 무고하게 희생시켜서 미안하다”라는 대장의 말을 전했다.
또 금과 은, 옥과 비단 등을 가득 실어 보내고는
“이것을 전사한 병사들의 가족에게 주어 위로해 주시오”라고 하였다.
진중에 그 말이 전해졌고, 이에 모두 남쪽을 향해 절하였다.
이로부터 袁 軍門을 諸葛亮의 후예라고 칭했다고 한다.41)
①은 申楫(1580~1639)이 1627년 1월부터 4월까지 關北 등지에서
張晩(1566~1629)과 鄭忠信(1576~1636)의 軍糧을 조달하면서 남긴 기록인
「管餉錄」에 전해지는 袁崇煥의 寧遠城 전투 장면이고,
41) 申楫, 『河陰先生文集』卷6(문집총간 속20), 「管餉錄」, 138면,
昨年賊兵進攻山海關外城, 軍門袁崇煥於城外設隧道, 通穴城中, 藏火藥於隧, 掩其坎, 如是者環于四面.
賊大至將登城, 城中人乃放火于隧, 火發地中, 賊騎爲火焰所蕩, 騰躍半空, 燒死者甚衆. 賊以爲偶設於此,
復從他面入, 城中人又如之, 死者亦然. 賊以爲前之放火處, 未必及設機, 復從其面以入, 前者放火之時,
已意其復入, 間間不放, 今又放火, 賊三入三北, 大懼而退. 俄而自城中有一人, 幅巾匹馬, 馳赴賊陳,
見賊將慰之, 且傳大將之言曰: “哀爾無辜之糜爛.” 以金銀玉帛稛載而致之曰: “以此往慰戰亡者之妻子也.”
陳中聞其言, 皆南向拜, 自此稱袁軍門爲後諸葛云.
② 東八里堡 길 동남쪽에 雞鳴山이 있다.
산 위에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구혈대라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袁崇煥이 寧遠城을 지킬 적에 청 태종이 군사를 이끌고 이를 습격하였다.
그때 우리나라 역관이 마침 이곳을 지나다가 들어가서 袁公을 뵈니,
공은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고요히 방에 앉았으며, 성안도 모두 고요하였다.
밤이 깊어 한 장교가 들어와 일을 아뢰니, 공은 머리만 끄덕일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 역관을 데리고 작은 누각에 올라 창문을 밀치고 내려다보았다.
얼마 후 성 밖에서 砲 소리가 우레와 같이 들리더니
수많은 청병이 연기와 불꽃 속으로 갑자기 날아서 올랐다.
이는 미리 地雷砲를 성 밖에 묻었다가 적이 이르자 폭발시킨 것이었다.
이튿날 원공이 성에 올라 자세히 살피더니, 탄식하였다.
“사람을 죽임이 이처럼 많으니, 나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청 태종이 겨우 몸만 빼내서 10여 기의 군사와 달아났다.
공이 사람을 시켜 양고기와 술을 보내며 위로했다. “이후에는 다시 오지 말라!”
그리고는 후회하여 말했다.
“화약 기운을 뒤집어 쓴 자가 술을 마시면 죽는다.
내가 술을 보낸 것은 남을 유인하여 죽게 한 것과 같으니, 의리가 아니구나.”
쫓아가서 돌아오게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청 태종이 과연 분이 나서 여기에 이르러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 때문에 (구혈이라고) 대의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42)
②는 金景善(1788~1853)이 1832년부터 1833년까지 동지사 서장관으로
중국을 다녀오면서 남긴 연행록 『燕轅直指』에 실린 「嘔血臺記」이다.
영원대첩이 1626년 1월에 있었으므로,
그로부터 거의 1년 뒤에 남긴 申楫의 기록은 조선쪽에 전해지는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申楫의 기록은 200년 뒤에 나온 金景善의 기록에 비해
전투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자세하고, ‘儒將’으로서의 袁崇煥의 면모가 강화되어 있다.
‘使行’ 임무의 참고서로 작성한다는 저작 의도43)를 생각하면,
金景善의 기록 태도가 건조하다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燕轅直指』는 연행록 ‘三家’를 종합한다고 자부한 만큼
방대한 항목과 풍부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44)
42) 金景善, 『燕轅直指』卷2, 「出彊錄」, <嘔血臺記>,
東八里堡路東南邊, 有鷄鳴山, 山上有峯突兀, 名曰嘔血臺. 世傳袁崇煥守寧遠城, 淸太宗引兵襲之.
時我國譯官適過此, 入見袁公, 公積書萬卷, 靜坐一室, 城中皆寂然. 夜深, 一小將入白事, 公點頭而已.
引我譯上小樓, 拓窓俯瞰. 少頃, 城外砲聲如雷, 無數淸兵, 飄騰於烟焰之中. 蓋預埋地雷炮於城外, 敵至而發也.
翌日, 公登城臨視, 歎曰: “殺人此多, 吾其不免乎?” 淸太宗僅以身免, 與十餘騎逸走.
公使人送羊酒慰之曰: “後勿更來!” 已而悔曰: “人之冒焇藥氣者, 飮酒則死. 吾之送酒, 有若誘人致死,
非義也.” 令追還而不及, 淸太祖果憤恚至此, 嘔血而殂, 故因以名臺云.
43) 金景善,『燕轅直指』(燕行錄選集), 「燕轅直指序」, 2~3면, 後之有此行者, 自辭陛曁反面,
無日不臨事而攷閱, 對境而參證, 有如指掌之按行, 則或可詡其簡便, 而不爲無助也否.
44) 金景善,『燕轅直指』(燕行錄選集), 「燕轅直指序」, 1~2면, 歲壬辰, 余充三行人, 七閱月而往還.
山川道里, 人物謠俗, 與夫古今事實之可資採摭者, 使事始末, 言語文字之間, 可備考據者, 無不窮搜而悉蓄,
隨卽載錄, 而義例則就準於三家, 各取其一體, 卽稼齋之日繫月月繫年也, 湛軒之卽事而備本末也,
燕巖之間以己意立論也.『燕轅直指』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전일우(2005) 참조.
그렇다면 申楫의 문집을 다시 살펴야 한다.
문집이 간행된 것이 19세기이고, 후손들의 윤문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 소설의 틈입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45)
申楫의 기록은 시기적으로 후대에 연행 기록들에 비해 전투 장면은 상세하고 박진감이 넘치지만,
淸軍 장수의 인적 정보를 비롯하여 전투의 핵심 정보에 대해서는 소략하다.
‘七縱七擒’을 연상하게 하는 ‘三入三北’이 보이고,
‘儒將’ 袁崇煥과 그에게 ‘心服’하는 오랑캐 등 『三國志演義』의 틈입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많다.
게다가 말미에서는 드러내놓고 諸葛亮과 袁崇煥을 일치시키고 있다.
1835년 冬至副使로 연행했던 趙斗淳(1796~1870)이 ‘嘔血臺’가 있다는
‘鷄鳴山’을 두고 지은 시에는 이제까지 살펴 본
‘袁崇煥’과 ‘諸葛亮의 火攻’과 ‘立馬’와 ‘胡王의 패퇴’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
羊酒勞人意氣閒 양고기와 술로 고단한 이의 마음 풀어주지만
千軍藤甲片無還 천군의 등갑군은 한 조각도 돌아가지 못했네
好敎第一吳峰馬 오산의 입마봉이 제일이라고 즐겨하지만
却立秦王五將山 진왕 苻堅도 오장산에서 쓰러졌나니. 46)
양고기와 술은 퇴각하는 후금군[또는 누르하치]에게
袁崇煥이 위로로 보냈던 물품47)을 말한다.
적군을 물리친 袁崇煥은 嘔血臺에 있던 누르하치를 위로한 것이다.
45) 申楫의 遺文은 그의 申光夏가 收拾하고 직접 編次하여 도합 30여 권으로 정리해두었다.
그러나 喪亂을 겪으면서 태반이 散逸되자, 1800년경에 이르러 權徶이 이를 ‘增潤’했다.
申弘佐, 「河陰先生文集跋」, 『河陰先生文集』卷6(문집총간 속20), 196면 참조.
46) 趙斗淳,『心庵遺稿』卷3, 「雞鳴山」 중 제2수, 80면.
47) 다른 기록에는 ‘양고기’가 ‘돼지고기’로 바뀌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제갈량이 술과 안주를 보냈다는 것이다.“遣使以甕酒乘豚唁之.”(成大中, 『靑城雜記』卷5,「醒言」).
천군의 ‘藤甲軍’은 누르하치가 자랑하던 십만의 ‘騎馬兵’을 말한다.
袁崇煥이 紅夷砲를 써서48) 오랑캐의 주력을 남김없이 파괴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기마병으로 강남을 평정하겠다던 海陵王의 자부심을 갖고 있던 누르하치가 직접 ‘南征’을
꾀하다가 패퇴하여 五將山에서 목숨을 잃은 前秦의 苻堅처럼 죽었음49)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海陵王과 苻堅과 달리 ‘虜酋’ 누르하치는 비록 죽었지만
그의 아들과 손자들에 의해 중국 대륙이 통일되고,
그들이 ‘皇帝’가 되어 2세기나 존속하고 있으며,
자신이 그곳으로 사행을 가고 있음에 대해서는 눈감고 있다.
5. 결론
17세기 후반부터 尊主論이 北伐論을 대신하여 주도적인 국가 담론이 되고,
‘蜀漢正統論’이나 ‘對明義理論’의 차원에서 諸葛亮을 주목했다는 논의가 있다.
특히 주도면밀한 업무와 국가에 대한 헌신이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본받아야 할 인물’로 간주되어 굉장한 추숭을 받게 되었다.50)
48) 趙斗淳은 제목에 주를 달아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在寧遠衛東八里山上, 有嘔血臺, 傳言袁崇煥, 以紅夷砲, 大殺淸兵云.”
49) 趙斗淳은 제4구에 “秦王苻堅, 從淮南敗還, 遂死于西秦五將山.”의 협주를 달았다.
50) 최근 여러 연구자들이 존주론과 『삼국지연의』의 유행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가장 최근에 제출된 백진우(2013)을 참조할 것.
물론 이런 담론적 차원의 접근도 가능하지만, 『三國志演義』가 실제로 사랑을 받은 데에는
그 안에 보이는 蜀漢과 諸葛亮의 역경 타개 노력과 비극적 운명이라는
구체적인 서사 문면이 당대 조선과 明의 처지와 호응을 이룬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은 ‘북쪽 오랑캐’를 물리적으로 압도한 적이 없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준비론이나 자강론의 측면에서 논의가 진행되었고, 淸軍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명청교체기의 여러 전투와 인물들에게 투사했던 것이다.
특히 淸의 입관 이후 北京으로 가는 육로가 회복되면서
승리의 ‘현장’을 직접 밟으면서 병자호란의 기억을 소환하였다.
廣寧부터 시작하는 명청교체기의 격전장을 차례로 지나 寧遠城과 首山 위의 煙臺를 마주하면,
南漢山城과 ‘漢峰’에서 겪은 치욕과 아픔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곳은 南漢山城과 달리 오랑캐의 포위를 이겨내고 대군을 물리쳤다.
조선 연행사들은 병자호란[南漢山城]의 패배를 비슷한 구도로 진행되었던,
그러나 그 결과는 달랐던 袁崇煥의 승리로 치유했던 것이다.
‘嘔血臺 이야기’는 실제 역사의 전개와 소설의 서사적 전개가 겹쳐지는 장면에
‘좌절’과 ‘극복 의지’를 더하여 한 편의 감동적인 전투 장면을 만들어
연행노정의 한 지점에 아로새긴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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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hansanseong Fortress on the
Route of Envoy to China
Kim, Il-hwan
*
51)
This paper aims to verify that the historic experience of the
intellectuals during Joseon period was reflected in specific areas in a
foreign country and so helped to create new story and people from Joseon
who passed those areas exclusively used those areas. The representative
example is the "Guhyeoldae" story. When Won Sunghwan who protected
Yeongwonseong fortress fought off the later Jin in spite of enveloping
attack in 1626, Nurhachi led the army of later Jin died as spitting out
blood. This story can't be easily found in the data from Ming dynasty or
Qing dynasty. However, the journals of envoy written by Joseon people
continuously mentioned about the story and the story was expanded in
a novel enough to be vividly felt by readers. "Guhyeoldae" story replaced
the painful memory which Joseon dynasty surrendered to the emperor
Kangxi, Qing dynasty, when his army surrounded Namhansanseong
fortress during Manchu invasion in 1636 with the victory of Won
Sunghwan winning against the siege operation by Nurhachi.
The envoys from Joseon dynasty elevated the sorrow as passing
through the ferocious battlefields during the transition from Ming
dynasty to Qing dynasty from Guangning. They comforted themselves by
the victory of Won Sunghwan against humiliation and pain in
Namhansanseong fortress and Hanbong when they passed Yeongwonseong
fortress and Yantai over Shoushan mountain. They wished
collapse of Qing dynasty using the ancient story "五山立馬". The thrilling
victory by Won Sunghwan, annihilating defeat of barbarian and voluntary
* Lecturer, Dongguk University. E-mail : chukong@hanmail.net
obedience quoted the Bansagok battle by Zhuge Liang and Meng Huo in
Romance of the Three Kingdoms and old story of Qiqingqizong(Zhuge
Liang arrested Meng Huo seven times and set him free seven times).
The details including the tragic fate of Shu-Han which should restore
legitimacy, desperate effort of Zhuge Liang to overcome adversity,
difficulty in conquering the north and peace of Namman in the process
to conquer the north corresponded to the situations in Joseon and Ming
dynasty at that time. "Guhyeoldae" story was engraved in the route of
envoy to China by creating one impressive battle scene and adding
discouragement and wills to overcome to the scene where history and
narration in a novel were overlapped.
key words : Envoy to China, Manchurian Invasion to Korea in 1636,
Namhansanseong Fortress, Won Sunghwan, Guhyeoldae(mountain
where Nurhachi vomited blood due to uncontrollable anger), Zhuge Liang
본 논문은 2014년 2월 4일 투고되어 2014년 3월 7일 심사 완료하여
2014년 3월 17일 게재를 확정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