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弘道筆 風俗圖 畵帖, 보물(1970),《단원풍속도첩》밭갈이, 《檀園風俗圖帖》밭갈이
세로 26.8cm, 가로 22.7cm 이 화첩은 김홍도의 풍속도를 엮은 화첩이다. 1918년 조한준(趙漢俊)에게
서 구입했고 모두 27점이었으나 1957년 원 화첩의 수미에 위치한 〈군선도〉2점은 별도의 족자로 만
들고 풍속도 25점만 새롭게 화첩으로 꾸미고 《단원풍속도첩》이란 명칭을 붙였다. 이 화첩에 속한
그림 중 4점이 1934년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게재되었다. 이 화첩은 1)서당, 2) 논갈이, 3) 활
쏘기 4) 씨름, 5) 행상, 6) 무동, 7) 기와이기, 8) 대장간, 9) 노상과안, 10) 점괘, 11) 나룻배, 12)
주막, 13) 고누놀이, 14) 빨래터, 15) 우물가, 16) 담배썰기, 17) 자리짜기, 18) 벼타작, 19) 그림감
상, 20) 길쌈, 21) 편자박기, 22) 고기잡이, 23) 산행, 24) 점심, 25) 장터길 순서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작품명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각 계층의 생업장면과 놀이 등 생활의 이모저모가 잘 나타나 있
다. 예외도 없지 않으나 대체로 배경을 생략하고 등장인물들이 취하는 자세와 동작만으로 적절한 화
면구성을 이루고 있다. 평범한 일상사이나 화가의 따뜻한 시선과 예리한 시각에 의한 순간의 포착은
이를 볼거리로 부각시켜 그림이 그려진 사회분위기를 잘 전한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으로 창을 내겠소
- 김상용 / <문학2호>(1934) -
남으로 창을 내겠소.
밭이 한참갈이
괭이로 파고
호미론 풀을 매지요.
구름이 꼬인다 갈 리 있소.
새 노래는 공으로 들으랴오.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
왜 사냐건
웃지요.
추억(追憶)
- 김상용 / 시집 <망향(望鄕)>(1939) -
걷는 수음(樹蔭) 밖에
달빛이 흐르고,
물에 씻긴 수정(水晶)같이
내 애상(哀傷)이 호젓하다.
아- 한 조각 구름처럼
무심(無心)하던들
그 저녁의 도성(濤聲)이 그리워
이 한밤을 걸어 새기야 했으랴?
김상용(金尙鎔, 1902∼1951)
시인·영문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월파(月坡). 경기도 연천 출생. 아버지는 기환(基煥), 어
머니는 나주정씨(羅州丁氏)이며, 시조시인 오남(午男)은 여동생이다. 1917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보성고등보통학교로 전학하여 1921년에 졸업하였다. 이듬해 일본으로 건너가 1927년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귀국 후 보성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듬해 이
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일제의 탄압으로 영문학 강의가 폐강되어,
1943년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광복 후 군정하에서 강원도지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이화여자
대학 교수로 복직하였다(1945).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영문학을 3년 동안 연구하고
1949년에 돌아왔다. 6.25 전쟁이 터지자 부산으로 피란갔지만, 1951년 6월 22일, 갑작스런 식중독으
로 세상을 떠났다.
최초의 문단활동은 1926년 ≪동아일보≫에 시 〈일어나거라〉를 발표하면서 출발하였고, 그 뒤 〈이
날도 앉아서 기다려 볼까〉·〈무상 無常〉·〈그러나 거문고 줄은 없고나〉 등을 계속 발표하였으
나, 이때 발표한 창작시는 미숙한 것들이었다. 그의 시가 평단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35년 ≪시원
詩苑≫에 〈나〉·〈무제 無題〉·〈마음의 조각〉 등 몇 편의 가작을 발표하고 나서부터이다. 일반
적으로 그의 작품세계는 자연을 가까이하려는 단면을 드러내며 그와 함께 대상을 따뜻한 마음씨로 바
라보는 눈길이 느껴진다. 1939년 시집 ≪망향≫을 간행하였다. 이 시집에서는 일본의 탄압과 수탈에
대하여 소극적인 대응태세로 보이는 자연귀의의 정신경향이 나타난다. 대표시 〈남으로 창을 내겠
소〉에서는 자연 속에 묻혀 살면서도 그 속에서 생을 관조하는 단면이 엿보인다. 대표작으로는 〈노
래 잃은 뼈꾹새〉·〈어미소〉·〈향수〉를 꼽을 수 있다.
광복 후 수필집 ≪무하선생방랑기 無何先生放浪記≫를 간행하여 과거의 관조적인 경향보다는 인생과
사회에 대한 풍자적이고 비판적인 안목을 보여주었다. 또한, 영문학자로서 포(Poe,E.A.)의 〈애너벨
리〉(新生 27, 1931.1.), 키츠(Keats,J.)의 〈희랍고옹부〉(新生 31, 1931.5.), 램(Lamb,C.)의 〈낯
익던 얼굴〉(新生 32, 1931.6.), 데이비스(Davies,W.H.)의 〈무제〉(新生 55, 1933.7.) 등을 번역하
여 해외문학의 소개에도 이바지하였다.
이런 유명한 시를 남긴 시인에게도 흑역사가 있다. 바로 그가 이화여자대학교의 전신인 이화여자전문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벌어진, 도둑 누명을 쓴 학생의 자살 사건이다. 기숙사에 살면서 학교
청소 등의 일을 하며 고학하던 문모 양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문모 양은 금전출납부를 관리하며
사생들의 돈을 맡아주는 일도 하게 되었다. 어느날 주모 양이 문 양에게 40원을 맡긴 후 20원을 찾아
썼다. 이후 주 양이 남은 20원을 찾아 쓰려고 문 양을 찾아갔는데, 금전출납부에는 주 양이 이미 나
머지 20원도 찾아간 것으로 되어 있었다. 주 양은 문 양이 도둑이라며 펄펄 뛰었고, 문 양은 억울하
다며 펄펄 뛰었다. 문 양이 사감 박은혜 선생에게 불려갔다 올 때마다 학우들이 문 양을 보는 눈길은
싸늘해졌고, 문 양은 학우들로부터 철저히 따돌림을 받았다. 당시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학장이었던
김상용은 문 양을 다독이고 도둑 누명을 풀어주기는커녕 "네가 했다고 시인해라. 돈은 내가 채워주겠
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문 양을 죽음으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했다. 문 양은 가족과
학교, 학우들 등에게 보내는 유서 5통을 남긴 채, 1937년 1월에 학교 교정의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
했다. 이 사건은 당대 문단에서 엄청난 논란을 초래했다. 당대의 명 시인인 김상용이 교육자로서 제
대로 된 처신을 못했다는 비난이 쏟아졌는데 심지어는 춘원 이광수까지도 "김상용은 교육자로서 글러
먹은 인간이다. 책임을 지고 교수직을 사임해야 할 것이다."라고 대놓고 신문에 비판글을 썼을 정도
였다. 그러나 김상용은 이런 세간의 비난에도 아랑곳 않고, 태평양 전쟁으로 일제가 모든 학교에서
영문학 강의를 금하게 되는 1943년까지 계속 교수로 이화여자전문학교에 남아 있었다. 이런 걸로 보
면 인성은 썩 좋은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2002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
명단과 민족문제연구소가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교육/학술 부문에 선정되었
다.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을 썼기 때문.
≪참고문헌≫ 金尙鎔全集(金軟東 編, 새문社, 1983), 九人會硏究(金時泰, 제주대학논문집 7, 1976),
金尙鎔解說(李昇薰, 韓國現代詩文學大系 10, 知識産業社, 1984), 현대시인연구Ⅱ(김학동, 새문사,
1996), 韓國現代詩史 1(金容稷, 한국문연, 1996).(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김상용(金尙鎔)의 친일 행위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등 5개 단체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 5,207명중
친일 시인(詩人)이 있는데 그들은 곧 미당을 비롯한
12인이 있기에 우리는 꼭 기억하여야만 할 것이다.
김동환(金東煥), 김상용(金尙鎔), 김안서(金岸曙), 김종한(金鍾漢),
김해강(金海剛),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서정주(徐廷柱),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주요한(朱耀翰), 최남선(崔南善)이며 김상용의 친일 행위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1943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등 총 3편의 친일 작품을 게재하는 등
친일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됨.
이화여전에서 교편을 잡고있을 때, 교육자답지 못한 처신으로
학생을 자살하게 만들어 당시 문단에서 큰 비판을 받은 흑역사가 있음.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김상용 / 1943.8.4 매일신보)
물결 깨어지는 절벽 이마 위
가슴 헤치고 서서, 해천(海天) 행해 휘파람 부는 듯
오랜 구원 이룬 이날의 기쁨이여!
말 위에 칼을 들고 방가의 간성이 됨이
장부의 자랑이거늘, 이제 부름 받았으니
젊은이들아 너와 나의 더 큰 광명이 무어랴.
나아가는 너희들 대오에 지축이 울리고
복락의 피안으로 깃발은 날린다.
새 우짖고, 초목조차 환희를 속삭일 제
결의와 힘에 넘치는 너의 얼굴에
아침 태양은 더 정다이 미소하도다.
감벽의 대막 위에 점철한 섬과 섬
거기 10억 동포는 묶여 살았다.
그 사슬 끊이고, 해방의 노래 높은 날,
낙토 건설의 첫 개척을 우리 맡았도다.
명실 함께 1억 선진의 일원이 됨이여.
어서 저 잡초 베이고, 여기 꽃을 꽃을 심자......
충에 죽고 의에 살은 열사의 희원
피로 네 이름 저 창공에 새겨
그 꽃다움 천천만대에 전하여라.
남으로 창을 내겠소 / 시낭송 김정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