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의 image
- 장만영 / <시건설>(1936) -
병든 하늘이 찬 비를 뿌려......
장미 가지 부러지고
가슴에 그리던
아름다운 무지개마져 사라졌다.
나의 「소년」은 어디로 갔느뇨. 비애를 지닌 채로
이 오늘 밤은
창을 치는 빗소리가
나의 동해(童骸)를 넣은 검은 관에
못을 박는 쇠마치 소리로
그렇게 자꾸 들린다......
마음아, 너는 상복을 입고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렴.
* 동해(童骸) : 어린 아이의 뼈
* 마치 : 못을 박거나 무엇을 두드릴 때 쓰는 연장으로 망치보다 작다.
* 작품해설 : 이 시는 이미지스트로서의 장만영의 면모를 잘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전원(田園)의
평화와 동심(童心)의 청순한 시심(詩心)을 간직하고 있던 장만영도 갈수록 혹독해져 가는 일제 치하
의 현실 상황에서 더 이상 그 순수성을 지킬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상처 입은 동심은 결국 밝고 건
강한 그의 시를 침울하고 절망적인 것으로 변모시킴으로써 절망·허무·비극·암흑 등과 같은 이미지
로서의 ‘비’를 노래하게 된다.
1연은 ‘병든 하늘’이 뿌리는 ‘찬 비’를 통해 폐허와 절망의 현실을 상징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장미’는 사랑을, ‘무지개’는 희망을 의미한다. 2연은 사라져 버린 소년을 부르는 호칭적 진술을
통해 더욱 절망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소년’이 누구를 뜻하는지 알 수 없으나, 1연에서 제
시한 암울한 현실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배려로 여겨진다. ‘장미’→‘무지개’→‘소년’으로 이
어지는 ‘상실’의 분위기는 ‘비애’라는 구체성으로 나타난다. 한편, 2행으로 처리할 수 있는 시행
을 단행으로 배치함으로써 그것을 강조한다. 3연은 비의 절망적인 이미지를 통해 화자의 극한적 현실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화자는 자신의 방을 ‘검은 관’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창을 치는
빗소리’를 ‘검은 관에 / 못을 박는 소리’로 생각하는 절망의 극한적 상태에 빠져 있다. 이것은 19
세기 말 서구에 등장했던 다다이즘의 정신적 불안과 공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해’는
어린 아이의 시신이라는 뜻으로 2연의 ‘소년’과 관련시킨다면, 그것은 소년이 버리고 간 육신이 되
며, 결국 화자 자신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식민지 현실이란 시인에게서 동심의 순수성마저 빼앗아
가 버린 절망적인 상황임을 알 수 있다. 4연은 화자가 자신에게 전하는 위무(慰撫)의 말이다. 사랑과
희망, 소년의 순수까지도 상실해 버린 화자로서는 이미 ‘상복’을 입은 상주(喪主)나 다름이 없다.
그러기에 화자는 자신에게는 ‘너는 상복을 입고 / 쓸쓸히, 진정 쓸쓸히 누워 있을’ 육신이 있는
‘그 어느 바닷가의 무덤이나 찾아 가’라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의 찬 비의 이미지는 ‘상실
과 죽음’으로 형상화되어 시인의 비극적 현실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릴리안 밀러 <달빛 아래 마을> 목판화 1930년대
달·포도·잎사귀
- 장만영 / <시건설>(1936) -
순이(順伊), 벌레 우는 고풍(古風)한 뜰에
달빛이 밀물처럼 밀려 왔구나.
달은 나의 뜰에 고요히 앉아 있다.
달은 과일보다 향그럽다.
동해(東海) 바다 물처럼
푸른
가을
밤
포도는 달빛이 스며 고웁다.
포도는 달빛을 머금고 익는다.
순이, 포도넝쿨 밑에 어린 잎새들이
달빛에 호젓하구나.
* 작품해설 : 장만영의 시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는 이 작품은 이 시가 발표된 1930년대를 풍
미했던 모더니즘 시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모더니즘 시가 본디 도시와 기계문명을 비판적으로
그리는 것에 비해, 그의 시는 농촌을 중심으로 한 자연을 소재로 하여 그림과 같이 선명한 이미지를
구축하는 작품 세계를 펼쳐 보였다. 이미지즘 계열의 모더니즘에 속하는 작품 경향을 드러내면서도
도시보다는 전원을 소재로 하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 시는 ‘순이’라는 토속적 이름의 여인을
처음과 끝에 등장시켜 시상을 개폐하는 이중적 기능을 부여하는 한편, 시 전편을 섬세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로 만들어 주고 있다. 이처럼 시적 자아가 여인을 부르는 이 문답(問答) 방법은 자신의 깨달음
을 독자에게 확대시켜 자신에게 동참시키는 호소력을 함축하는 화법(話法)에 해당한다.
‘벌레 우는 고풍한 뜰’은 바로 생성과 성숙을 제공하는 모성(母性)의 표상이며, 포도가 익어가는
그 속에 포용되어 있는 시적 자아는 ‘순이’라는 순진무구한 여인(모성)을 끌어들여 자신과 함께 자
연속에 융화, 합일되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의 전체적 분위기를 이끌고 있는 ‘푸른 / 가을 /
밤’ 에 달빛을 머금고 익어가는 포도는 생성 이미지와 성숙 이미지를 단면적으로 보여 주며 작품의
정점을 이룬다. ‘뜰에 고요히 앉아 있’는 ‘달빛’에 ‘과일보다 향그러운’ 후각을 가미시켜 신선
함이 느껴지게 했으며, 한 행으로 처리할 수 있는 ‘푸른 / 가을 / 밤’을 세 행으로 나누어 배열함
으로써 시각적 인산을 부여하는 한편, 평면적 구조를 입체적인 것으로 바꾸어 가을밤의 신선함을 더
욱 돋보이게 하고 있다. 한 마디로 한국적 전통시와 회화적 모더니즘의 표현 기법이 결합하여 탐스런
포도처럼 생성·성숙된 아름다운 작품이다.
* 장만영(張萬榮, 1914-1975)
1914년 황해도 연백 출생
1932년 경성제이고보를 거쳐 일본 미자키 영어학교 rhed과 졸업
1932년 『동광』에 「봄 노래」가 김억에 의해 추천
1937년 제1시집 『양(羊』) 간행
1953년 서울신문 출판국장으로 있으면서 『신천지』 주재
1966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68~ 신시 60년 기념사업회 부회장
1975년 사망
호는 초애(草涯). 1914년 1월 25일 황해도 연백 태생. 1932년 경성제이고보를 마친 후, 일본에 유학
하여 도쿄 미자키영어학교(三崎英語學校)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시절인 1932년 5월 『동광』에 투고
한 시 「봄노래」가 김억에 의해 추천됨으로써 시단 활동을 시작했다 광복 후에는 『서울신문』 출판국
장, 한국시인협회 회장(1966), 신시 60년 기념사업회 부회장(1968) 등을 역임하였고, 학생문예지
『신문예』, 산호장출판사, 춘조사 등을 경영한 바 있다. 시집으로는 『양』(1937)을 위시하여, 『축
제』(1939), 『유년송』(1948), 『밤의 서정』(1956), 『저녁 종소리』(1957), 『장만영 시 선집』
(1964) 등이 있으며, 자신의 시를 해설한 『이정표』(1964) 등의 저서가 있다. 그의 시 세계는 강한
모더니즘적 경향을 보이면서도 도시 문명을 소재로 하기보다는 전원적 세계를 현대적인 형식으로 노
래했다는 점에 특성이 있다. 그의 특성에 대해 최재서는 “이미지와 운동이 합쳐진 세련된 위트의
시”라고 말한 바 있다. 이런 특성은 시 「아침창」에 나오는 “어제밤 나의 베개 머리를 지키던 꿈들
은/꿀벌들처럼 자꾸 유리창을 넘어간다”와 같은 시행들에서 확인할 수 있다. 후기에 이르러 그의 시
세계가 농촌과 전원의 세계를 지적으로 노래하는 서정주의로 선회한 것은 초기 시의 이러한 특성과
연관이 있다. 그는 전원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신석정과 유사하며, 이미지를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김
광균과 유사한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시집 : 『양』(1937), 『축제』(1939), 『유년송』(1948), 『밤의 서정』(1956), 『한국시집』(1957)
『저녁종소리』(1957), 『그리운 날에』(1962), 『장만영시선집』(1964), 『저녁놀 스러지듯이』
(1973), 『양』(1974), 『추억의 오솔길』(1975), 『어느 날의 소녀에게』(1977), 『놀 따라 들불따
라』(1988)
달,포도,잎사귀 / 테너 임정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