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친일시인부록2) 미당 서정주를 왜 친일 시인이라 하는가?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3. 19:47



■ 부록2) 미당 서정주를 왜 친일 시인이라 하는가?

□ 부록2-1) 친일파 ‘민족시인’ 서정주

□ 부록2-2) '서정주'를 제대로 알자!

□ 부록2-3) 서정주, 친일은 하늘뜻에 따랐다?

□ 부록2-4) 서정주(徐廷柱)-“시를 안 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어”

□ 부록2-5) 미당이 석정을 살리다



□ 부록2-1) 친일파 ‘민족시인’ 서정주
글: 서일환 (역사 칼럼니스트)

서정주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천년고찰 선운사 인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2대 부통령을 역임한 친
일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 서정주는 14세에 서울로 상경하여 중앙고보 재학 중에 광주학생독립
운동에 참여하여 구속되어 퇴학을 당했다. 18세에 성북구 개운산 대원암에서 석전 스님 밑에서 수학
했고 동아일보에 시 ‘그 어머니의 부탁’으로 등단했다. 1938년 23세에 ‘애비는 종이었다 ~ 스무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는 ‘자화상’을 남겼다.​

□ 창씨개명하고 친일행위
1942년 27세의 청년 서정주는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로 창씨개명을 하고 태평양전쟁을 찬양했다. 
조선의 청년들에게 ‘일본을 위한 전쟁에 나가서 싸우다 죽는 것은 일본 천왕이 반도인에게 부여한 
크나 큰 영광’이라면서 징병과 학병의 참여를 독려하는 시와 평론을 썼다. 1943년 태평양전쟁에 종
군기자로 참전했고 일본어로 간행된 친일노선의 문예지 ‘국민문학’과 ‘국민시가’를 편집했다. ​

서정주는 매일신보 1944년 12월9일자에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
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 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가미가제 특별 공격대원’이라는 내용의 ‘송정오장 송가’를 기고했다. ‘마쓰이 오장(印在雄)’
으로 창씨개명하고 조선에서 최초로 가미가제 특공대로 끌려간 조선청년 인재용을 극찬하는 내용이다.​

서정주는 1945년 갓 서른 나이에 해방이 되자 친일행위에 대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
다.’면서 ‘친일행위는 했으나 받은 대가가 없었다.’고 변명했다. 또한 반민특위에 끌려가서 ‘적
어도 일제 치하에 몇 백 년은 더 있을 줄 알았다.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올 줄은 몰랐다.’고 고백했
다. 이승만으로부터 친일행위에 대한 면죄부를 받고 ‘이승만 박사 전기’를 집필했고, 박정희의
5·16 쿠데타와 유신체제를 지지했다.​

□ 전두환 독재정권 찬양까지
서정주는 5·18 광주학살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대통령 후보의 지지연설과 전두환 대통령 당선 축
하연설을 하였다. 1987년 1월 18일 전두환의 56회 생일에 ‘전두환 대통령 각하 56회 탄신일에 드리
는 송시'를 올렸다. 1987년 4월 13일 전두환이 직선제 개헌요구를 거부하고 현행 헌법을 유지한다는 
4·13 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서정주는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
고의 미소를 가진 대통령이라고 찬양하고 ‘일해’라는 호까지 진상했다.​

‘국화 옆에서’의 작가 서정주는 ‘오랑캐꽃’의 작가 이용악, ‘절정의 노래’의 작가 오장환과 함
께 한국시단의 3대 천재로 손꼽혔다. 서정주는 친일행위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오장환과 이용악은 
월북하여 금기의 인물이 되었다. 생전에 1000여 편의 시를 써서 1941년 첫 번째 시집 ‘화사집’을 
시작으로 1988년 자서전적 시집 ‘팔할이 바람’, 1997년 마지막 시집 ‘80 소년 떠돌이의 시’ 등 
수많은 시집을 출간했다. 중앙대학교와 동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고 한국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했
다. 2000년 12월 24일 친일행위를 반성하지 못하고 사망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누구는 ‘서정주는 시로써 평가를 받아야 하지 친일행위로써 평가를 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하
고 누구는 ‘서정주는 이광수를 능가하고 이완용과 맞먹는 아주 골수 친일파다’라고 주장한다. 하지
만 역사는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 문학인 42인’,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
명사전’에 등재된 서정주를 친일파로 평가했다.



□ 부록2-2) '서정주'를 제대로 알자!
고창 이행용 문학인 '서정주 친일 행각 강력 비판'
'고창문학연'에서 강연하는 이행용氏 2004/12/15
(전북=연합) 전북 고창 출신인 미당 서정주의 친일 과거사에 대해 미당의 고향인 고창의 문인 이행용
씨가 미당의 우상화 조짐에 대해 강력히 반발하는 강연을 하였다. 지난 14일 오전 고창에 있는 미당
문학관에서 열린 제3회 고창문학연에서 미당재단의 박우영 이사장이 격려사를 통해 미당의 화려한(?)
경력을 강조하며 미당을 칭송하는 발언을 하자, 고창 태평양유족회 손일석 지부장 및 오세환 자문위
원등이 강력 항의 하는 과정에서 소란이 일기도 했다

곧이어 이행용 문인은 행사에 참여한 관내 교사 및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연을 통해 일제 강점기
에서의 민족적 고통은 아직 치유되지 않았고, 늦게나마 과거사에 대해 진상조사가 곧 진행될 예정으
로 있는 마당에, 미당을 우상화 하는것은 적절치 못하며, 문학인들의 좀 더 객관적이고 진지한 접근
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지난 IMF 환란기에 있었던 금모으기의 예를 들면서 900여회의 외침을
받으면서도, 반만년 역사를 이어 올수 있었던것은, 끈끈한 애족심에서 근본이 설명되어진다고 설명한
뒤, 일제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싯점에서 미당에 대한 찬양 일색의 행사들은 지양되어야 할것이라 
주장하였다. 더우기 예술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미당에 대해 조심스럽고 사실
적인 설명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진정한 문학인은 단어와 문구의 선택과 배치에 치중하기에 
앞서 자신의 얼을 글속에 올곧게 심어서 세상을 감동시킨다고 역설 하였다. 

그동안 기득권 보수세력들에 의해 금기시 되어왔던 친일 반민족행위자들에 대한 비판과 진상조사가,
이제라도 인권적이고 민족적인 차원에서 극명하게 이뤄져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하고, 일제의 치욕과 
친일세력의 반민족행위를 반면교사로 삼아 후대의 안녕과 번영을 약속해줘야하는 책무가 우리에게 있
다고 덧붙힌 이행용씨는, 미당은 일제말인 1944년에 '오장 마쓰이 송가'와 '헌시'등 14편의 적극적인 
친일시를 신문에 실어 민족적 비굴함을 보였으면서, 3년 후인 1947년에는 그 유명한 '국화옆에서'로 
시적 재능을 인정받아 당시의 문화 권력에 진출하여 교수, 문인협회장등 온갖 기득권을 생을 마감할
때까지 향유했지만, 단 한번도 일제의 아픔을 곱씹고 살아가는 민족에 대해 반성과 사죄를 하지 않은 
반인륜적 인물이다고 규정했다.

이행용씨는 끝맺음말을 통해, 미당의 탁월한 시적 세계에 대해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미당이 우리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인물로 우상화 되거나 반성되어지지 않은 치부를 은폐 또는 미화하려는 불합리
하고 참담한 조짐에 대해 깊히 우려한다며 단상에서 내려왔다.
2004.12.14. 화 (연합)



▲ 가미카제 특공대원들. 미당은 특공대원으로 죽어간 조선청년을 찬양하는 '송정오장 송가'를 썼다.


▲ '송정오장 송가'가 실린 〈매일신보〉( 1944. 12. 9.)





□ 부록2-3) 서정주, 친일은 하늘뜻에 따랐다?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 2018 2018. 12. 17.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서정주(徐廷柱, 1915~2000)는 적어도 이 나라에서는 시인을 대표하는 이름이다. 그의 서정시가 이른 
성취는 곧 한국 현대시의 성취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교과서마다 다투어 그의 시를 싣고, 지
역의 나이 지긋한 시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그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나온 그의 제자들이다. 진보 문
학 진영의 원로 고은도 그의 제자다. 그는 첫 시집 <화사집>(1941) 이래 <귀촉도>(1946), 
<시선>(1955), <신라초>(1960), <동천>(1968), <질마재 신화>(1975), <늙은 떠돌이의 시>(1993)
등 여러권의 시집을 펴내면서 가히 시선(詩仙)의 지위를 얻은 듯하다. 그는 마치 우리 현대시단의
살아 있는 '표준' 같은 존재로 보이기도 했다.

서정주는 ‘화사집’ 시대, ‘귀촉도’ 시대, ‘동천-신라초’ 시대 등으로 명명된 개인의 시사(詩
史)가 버젓이 고교 교과서에 오를 만큼의 지위를 지닌 흔치 않은 시인이었다. 초기의 ‘악마적이고 
원색적인 시풍’에서 ‘동양사상’과 ‘불교와 토착적 전통의 융화’를 거쳐 ‘우주와 공감할 수 있
는 시적 깊이’까지 이른 미당 시세계의 변천은 그대로 우리 현대시사의 주요 흐름의 일부였던 것이다. 

서정주의 시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된 것은 고교 시절이다. 형이 사 온 민음사판 얄팍한 미당 시집이 
있었는데 제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책머리에는 “스승의 시는 한 편도 뺄 수 없다”는 엮은이 
고은 시인의 글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고은은 70년대에 민중시를 쓰면서 스승과 정신적으
로 결별하게 된다.)

그 시집에서 읽은 ‘자화상’과 ‘밤이 깊으면’을 달달 외워버렸다. ‘밤이 깊으면’은 미당이 젊은 
시절, 자신의 아내에게 바친 시라는데, ‘달래마늘같이 쬐그만 숙아’ 어쩌고 하는 시구의 울림이 어
쩐지 마음에 감겨왔던 것이다.

‘애비는 종이었다’로 시작되는 시 ‘자화상’은 미당이 스물세 살 적에 쓴 시다. ‘나를 키운 건 8
할이 바람이다’는 시구로도 유명한 이 시는 고교 문학 교과서에도 더러 실려 있고 모의고사에도 가
끔 출제되기도 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실제 그의 부친은 종이 아니라, 전북 고창의 거부 인촌 
김성수 집안의 마름이었다고 한다.

미당은 전북 부안의 줄포공립보통학교를 나와 1929년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생으로 입학했
다. 이듬해 11월 광주학생운동 기념시위를 주도해 퇴학과 함께 구속되었으나 나이가 어려 기소유예되
었다. 1933년 중앙불교전문강원에 입학해 12월 <동아일보>에 시 ‘그 어머니의 부탁’으로 등단했다.

1936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벽(壁)’이 당선되었고, 중앙불교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11월
부터 다음 해 12월까지 시가(詩歌) 중심의 문예 모임인 '시인부락' 동인으로 활동했다. 1939년 만주
로 가서 회사원으로 일하다 1941년 고향으로 돌아왔다.


▲ 미당 서정주가 펴낸 시집들.

같은 해 첫 시집 <화사집(花蛇集)>을 발간하고 동대문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1942년 봄까지 근무했
다. 서정주가 문필로 친일 대열에 합류한 것은 같은 해 7월, <매일신보>에 평론 ‘시(詩)의 이야기-
주로 국민시가(國民詩歌)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부터다.

“대동아공영권이란 또 좋은 술어(述語)가 생긴 것이라고 나는 내심 감복하고 있다. 동양에 살면서도 
근세에 들어 문학자의 대부분은 눈을 동양에 두지 않았다. 몇몇 동양학자들이 따로 있어 자기들의 일
상 사용하는 한자의 낡은 문헌들을 자의적(字義的)으로 해석해 내는 정도에 그쳤었다.…… 시인은 모
름지기 이 기회에 부족한 실력대로도 좋으니 중국의 고전에서 비롯하여 황국(皇國)의 전적(典箱)들과
반도의 옛것들을 고루 섭렵하는 총명을 가져야 할 것이다. 동양에의 회귀가 성(盛)히 제창되는 금일”
- <매일신보>(1942. 7. 13.~17.)

불과 스물여섯, 등단한 지 10년도 안 된 젊은 시인은 ‘동방 전통의 계승과 보편성에의 지향’을 내
세우면서도 은근히 ‘대동아공영권’의 논리를 내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1943년 10월에 최재서와 
용산 주둔 조선군이 김제평야에서 진행한 전쟁연습에 조선군 보도반원 자격으로 종군했다.

그 후, 최재서가 경영하던 인문사에 입사하여 1944년 2월까지 일본어로 간행된 친일노선의 문예지인 
<국민문학>과 <국민시가>를 편집했다. 서정주는 주로 시·소설·잡문·평론 등을 통해 일제에 협력했
다. <국민문학> 1943년 10월호에 발표한 ‘항공일(航空日)에’ 는 일제가 침략전쟁을 미화하고 전쟁
동원을 독려하기 위해 제정했던 항공일 행사에 맞춰 쓴 기념시다. 

아아 날고프구나 날고 싶어
부릉부릉 온몸을 울려
사라진 모든 것
파랗게 걸린 저 하늘을
힘차게 비상함은
내 진작 품어 온 소원! 

<매일신보>에 발표한 ‘헌시(獻詩)’(1943. 11. 16.)는 ‘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라는 부제
를 달고 있다. 학도지원병 제도는 일제가 1943년 8월부터 실시한 징병제와 함께 식민지 청년들에게 
황국신민의 의무로 강요된 전쟁동원령이었다. 이 시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학도지원병의 영웅적 전투 
행위를 그려내면서 조선 학생들에게 학도지원병 출정을 독려하고 있다.


 
어머니여, 저 용맹스런 함성은 저 곳이리
푸른 혈조가 끊임없이 내려와
커다란 목소리, 나를 부른다 

아아, 기쁘도다 기쁘도다
희생 제물은 내가 아니면 달리 없으리 

어머니여, 나 또한 창을 들고 일어서리
배를 띄우리
사이판으로!
매킨·타와라로! 아투로!
-‘무제- 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국민문학> 1944년 8월호) 중에서 

무제- 사이판 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는 태평양전쟁 말기에 사이판 등지에서 일어난 
일본 병사들의 옥쇄(玉碎)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를 통해서 미당은 옥쇄를 감행한 병사들
과 하나가 되어 적과 맞서 싸우자고 선동했다.

일반에도 널리 알리진 ‘송정오장 송가’(<매일신보> 1944. 12. 9.)는 1944년 11월 24일 한국인 출신 
소년 비행병으로 제일 먼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로 전사한 인재웅(창씨명 송정수웅)을 추모하는 내
용이다. 서정주는 이 시에서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조선 병사의 죽음
을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위한 영광스런 자기희생인 양 노래했다.

서정주는 수필 ‘인보정신(隣保精神)’(<매일신보> 1943. 9.1~9.10.)에서는 이웃 간에 일어난 촌극을 
통해 일본 국기에 대한 흠모의 정을 그렸다. ‘스무 살 된 벗에게’(<조광> 1943년 10월호)와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조선의 어머니에게’(<춘추>1943년 10월호)에서는 일제의 징병에 젊은이와 어머
니들이 적극 부응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이보단 앞서서 이미 우리들의 선배의 지원병들은 우리들의 것이요 동시에 천황 폐하의 것인 그 붉
은 피로써 우리들 앞에 모범을 보이어 우리들의 나갈 길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미 야스쿠니 신사의 영
령이 된 한 사람의 이인석(李仁錫) 상등병의 피는 절대로 헛되이 흘려져 버리고 말 성질의 것은 아닙
니다. 가나우미. 땅에 흘려진 피는 또한 늘 귀 있는 자를 향하여 외치는 것이라는 것도 총명한 그대
는 잘 알 것입니다. 지원병들의 뒤를 이어서 인제부터 젊은 사람들은 스물한 살만 되면 부절(不絕)히 
일어서서 일본제국 군인으로서의 자기를 단련해 갈 것입니다.”
- ‘스무 살 된 벗에게’ 중에서

서정주는 소설로도 일제에 협력했다. <조광>에 발표한 ‘최체부 (崔遞夫)의 군속지망’에서 침략전쟁
에 복무하는 것이 부와 명예를 누리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였다. 자신의 갈래도 아
닌 소설을 써서 거기 일제의 전쟁 논리를 따른 것이다. 

“덴노헤이까 반자이(천황폐하 만세)! 하고 큰 획으로 맨 처음 줄을 아로새긴 밑에, 신문지를 두 쪽
에 낸 것만 한 백로지 위에 탄원의 문구가 가득히 쓰이어 있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체부의 소
원은 마침내 관계 관원들을 울린 바 있어서, 그의 벗인 해리면 사무소의 가네무라 군과 같이 얼마 후
에 두 사람 은 군속이 되어 먼 남녘 나라로 떠났다. 최체부는 떠날 달부터 꼭꼭 그의 집에 돈을 부치
어, 집안은 전보다 살기에 궁색지 않았고, 마을사람들의 끝없는 호의와 존경 속에서 최체부의 어머니
도 손자를 따라 아침 해가 떠오를 때면 규-조-요하이(궁성요배)를 하는 갸륵한 습성이 생기었다.”
- 소설 ‘최체부(崔遞夫)의 군속지망’(<조광> 1943. 11) 결말 부분

해방을 맞이할 때 서정주는 우리 나이로 갓 서른이었다. 그것은 그가 일제에 협력하라는 압력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뜻인데 이는 그의 친일이 자신의 자발적인 행위였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이다. 그러나 자신의 부역행위에 대해 서정주는 어떠한 반성의 뜻도 표하지 않았다.

<서정주문학전집>에 실린 자전적 성격의 글인 ‘천지유정’의 ‘흑석동시대’와 ‘창피한 이야기들’
에서 그는 자신을 ‘친일파’, ‘부일파’로 부르는 것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자신은 다만 일본의 
“욱일승천지세 밑에서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로 체념하면서 살아간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강변
했던 것이다. '하늘뜻에 따라 일제에 순응했다'는 것인데, 반민족적 행위에 '하늘뜻' 운운하는 것은 
'파렴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미당은 1992년 월간 <시와 시학>에서도 자신의 친일행적 시비와 관련, 자신의 입장을 밝힌 바 있다. 
그는 “국민총동원령의 강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친일문학을 썼다.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던 일”이라고 고백했다. 일찍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
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는 토로와도 맥을 잇는 발언이었다.

해방 후 서정주의 삶은 여느 친일 문인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여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동아일보>에서 사회부장, 문화부장으로 활동하다 정부 수립 후 문교부 
초대 예술과장으로 근무했다. 어떤 시대든 주류로 살아가는 데에 그는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창립과 함께 시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고, 전기 <이승만 박사전>(삼팔사)을 발
간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종군문인단을 결성해 활동했다. 이후 그는 정년까지 대학 교수로 후진
을 가르쳤고, 문단의 중진과 원로로서의 지위를 누리면서 평탄한 삶을 살았다.

서정주는 해방 후 이승만 정권과의 관계도 만만치 않았지만, 1980년 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
부와의 유착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는 전두환 대통령 후보의 찬조 연사, 대통령 당선 축하 
축시 헌사, 광주항쟁 이후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행한 군사 파쇼 정권에 대한 지지 발언 등으로 일
제와 독재정권 주변을 맴돌며 권력과 야합한 인물로 지탄을 받았다.


▲고향인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폐교 터에 세워진 미당시문학관.

1987년 1월 18일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생일 축하장에서 자작시 ‘전두환 대통령 각하 제56회 탄신일
에 드리는 송시’를 낭독했다. 낯부끄러운 찬양과 아부로 점철된 이 시는 문인이 도덕적으로 타락할 
수 있는 극한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전략…]
1986년 가을 남북을 두루 살리기 위한
평화의 댐 건설을 발의하시어서는
통일을 염원하는 남북 육천만 동포의 지지를 받고 있나니
이 나라가 통일하여 홍기할 발판을 이루시고
쥐임없이 진취하여 세계에 웅비하는
이 민족기상의 모범이 되신 분이여!
이 겨레의 모든 선현들의 찬양과
시간과 공간의 영원한 찬양과
하늘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서정주는 2000년 12월에 사망했고,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6월, <중앙일보>에서 미당문
학상을 제정해 매년 시상하고 있다. 2001년에는 고창에 미당시문학관이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2005
년 이후 매년 가을 ‘미당문학제’가 열리고 있다.

미당시문학관은 민족문제연구소와 태평양전쟁유족회의 친일·친독재 작품 병행전시’ 요구를 받아들
여 2006년부터 문학관 안에 친일작품과 전두환 생일 축시 등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그게 그나마 
우리가 청산한 식민지 역사의 일부라고 자위할 수 있을는지는 잘 모르겠다. 

2014. 5. 28. 낮달






□ 부록2-4) 서정주(徐廷柱)-“시를 안 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어”
문인의 遺産, 가족 이야기 〈15〉 시인 徐廷柱의 후손들
월간조선 2016.02.26.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kimchi@chosun.com 
⊙ “未堂의 두 아들은 미국놈이 되야 버렸어”
⊙ “질마재는 노래하고 가깝고, 꽃도, 바람도 가까운 곳”
⊙ “未堂의 아버지는 종이 아니라 仁村의 養父인 同福令監의 땅 관리자”
⊙ “未堂은 ‘한 민족이 영 멸망하지 않아. 먼 훗날을 봐야지’라고 말해”


서정주 시인의 동생 정태씨.

진작부터 가고 싶었다. 대(大)시인 미당(未堂) 서정주(徐廷柱·1915~2000)의 고향 ‘질마재’(전북 
고창군 부안읍 선운리)와 줄포로. 미당이 노래한 시적(詩的) 신화의 공간을 한 번 거닐고 싶었다.
기자가 내려간 그날(2016년 1월 25일), 사흘 동안 최고 39.5cm의 폭설이 내렸다. 길이 끊어지고 차가 
멈춰 섰다. 눈이 점령한 들과 산, 바다를 겨우 돌아 시인의 생가를 찾았다. 그곳에서 미당의 동생 서
정태(徐廷太·93)씨를 만났다. 그는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으나 놀라운 기억력과 구수한 방언으로 자
신의 우상(偶像)인 미당을 회고했다.
 
서정태씨, 그도 1947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등단해 3권의 시집을 상재(上梓)한 시인이다. 《경향신
문》에 처음 시를 발표했고 모윤숙(毛允淑)이 주간으로 있던 잡지 《문예》에 시를 썼다. “《문예》
에 김춘수(金春洙) 시인보다 몇 달 앞서 발표혔(했)어. 헐(할) 만하니까 실렸을 것 아니여? 그 후로 
일부러 발표할라고도 안 혔고.”
 
90세가 되던 2013년 시 90편을 모아 시집 《그냥 덮어둘 일이지》(시와 刊)를 펴냈다. 그가 언론계에 
30여 년 종사하고 은퇴한 뒤 미당과 자신의 생가이기도 한 질마재에 정착했다. 그는 〈선운리에 와 보니〉
라는 시에서 자신의 귀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옷소매 묻은 먼지 떨쳐버리고 / 내 고향 찾아와 보았더니 / 모두가 거, 잘했다 반겨주네//하수란 
놈은 앞니가 다 빠져 있고 / 석거도 눈곱 낀 눈으로 덥석 손 잡더니 / 거참, 잘 왔다 반겨주네// 세
월의 풍상이야 어떻든 / 목숨이 모질어 살아남은 / 담장 안 석류나무 한 그루 / 몇 번이던가 사람은 
떠났어도 / 집 앞 개울물은 흐르고 / 아득히 보이는 산은 그대로일세// 떼어버린 혈연이나 정한 같은 
것 / 여기까지 따라와 맴돌지만 / 이제 와서 무슨 상관이랴 // 고창 선운리 사람들 / 이승 다 겪은 
도인 같기만 해 / 그 한 모서리에 끼어 살고 싶네〉
 
  —시인의 고향, 질마재는 어떤 곳인가요. 
  “여그(여기) 자체는 말이여. 원래 포구여. 여그 논이 있는 데까지 (옛날에) 바닷물이 왔단 말이
여. 미당의 〈해일〉이란 시를 보면, 바닷물이 외가(外家)까지 들어와 게를 잡곤 했다고 혔어. 여그 
사람들, 자연허고 가깝지 학문하곤 가깝지 않여. 장사하고 가깝지도 않고 놀기를 좋아혀. (손짓으로 
눈 덮인 들판 너머를 가리키며) 저 건너편이 고부현(고부면)인디(데) 그 사람들은 이재(理財)에 밝
아, 사는 것이 괜찮여. 근디 여그 사람들, 살기가 형편없어. 맨날 놀기만 좋아혀. 놀기 좋아헌다는 
것은 노래(시)하고 가깝고, 꽃도 가깝고, 바람도 가깝다는 뜻이여.”
 
미당의 두 아들
 

大시인 미당 서정주.

미당이 쓴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해일(海溢)〉이란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 외할머니네 마당에 올라온 海溢엔요, / 예순살 나이에 스물한살 얼굴을 한 / 그리고 천살에도 
이젠 안 죽기로 한 / 신랑이 돌아오는 풀밭길이 있어요. / (중략) / 갑술년이라던가 바다에 나갔다가 
/ 海溢에 넘쳐오는 할아버지의 魂身 앞 / 열아홉살 첫사랑쩍 얼굴을 하시고…〉 
어부(漁父)인 미당의 외조부는 젊어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한다.
 
—와서 보니 이곳엔 산도 있고, 바다도, 강도 있네요. 
미당은 그런 고향을 못 잊어 《질마재 신화》(1975년 刊)라는 시집을 펴냈다. 서정태씨의 말이다. 
“이 산(소요산)이 악산(惡山)이여. 봄 되면 진달래가 무지하게 펴. 대개 악산에 진달래가 많거든. 
여기 올라가려면 고개를 몇 바퀴 돌아야 혀. 그런 깊은 숲속에 새나 울어쌌고 혔을 거여. 여그 처녀
들, 재 너머 시집보낼 때, 눈물바다가 되(었)을 것이여. 별 수 없이 시를 안 쓸 수 없었어. 미당의 
영향을 받아서 나도 시를 쓰고 있고.”
 
—요즘 건강은 어떠세요. 
“눈도 캄캄하고 그려.”
 
—미당의 두 아들은 어떻게 지냅니까. 
몇 년 전 기자와 연락이 닿은 미당의 장남 승해(徐升海·1940~)씨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롤리
(Raleigh)에서 변호사로, 차남 윤(徐潤·1957~)씨는 시애틀 인근 버지니아 메이슨 병원에서 의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승해가 일흔일곱인가 여덟인가 그려요. 둘째 윤이 예순인디, 둘이 17년 터울이여. 첫째는 변호사, 
둘째는 심장내과 의사가 되어. 다 미국놈들이여. 윤은 작년 여그 왔었어. 승해는 즈그(자기) 아버지 
장사 지내고 아즉(아직) 안 왔고.”
 
—장남 승해씨는 소설로 등단했다던데요. 
“승해와 동규(소설가 황순원의 아들 황동규)의 교차 추천은 문단에서 유명한 야그(얘기)여. 미당이 
예전에 소설가 황순원(黃順元)과 이웃 간에 살았거든. 그래서인지 황순원의 아들 동규(黃東奎)는 미
당이 시로 추천하고, 미당 아들 승해는 황순원이 소설로 추천혔어. 그런데 승해는 소설 쓰다가 미국 
가서 변호사를 혀. 그건(소설) 안 쓰고. 윤이는 서울대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듀크대 의대를 갔어. 윤
이가 미국 갈 무렵에 내게 ‘의대에 갈렵니다’ 그려. 자기 전공은 화학인디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
려 의대 간다고 혔어. 작년 7월인가 윤이가 가족을 다 데불구(데리고) 여그 왔었어. ‘화학공부 하다
가 의사 되야 60살까지 의사하네’라고 혔더니 웃더라고.”
 
미당은 스물여섯이던 1940년 장남 승해를 낳아 손수 이름을 짓고 〈장남 승해의 이름에 부쳐서〉라는
시도 남겼다.
 
〈그러고는 그래도 고추 달린 녀석이 생겨났기에 / 머리에 맨 먼저 떠오른 대로 / 升海라고 이름을
붙여주었지. / 바닷물을 됫박으로 품고 있으란 것이지.〉
 
몇 년 전 두 아들에게 미당을 회상해 달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서승해는 말을 했었다. 
“아버지는 20세기 한국시의 제일인(第一人)이십니다. 그렇게 큰 시인이 되기 위해 가족이 고통당한 
것은 차마 말할 수 없습니다. 한평생 반절은 미쳐 사셨습니다. 먹고사는 일엔 모두 그렇게 무능력자
일 수 없었어요.”
 
차남 서윤은 이렇게 얘기했다. 
“근현대 격동기를 살았던 젊은이로서 아버지의 시 〈풀리는 한강가에서〉나 〈무등을 보며〉를 읽고 
위로받던 기억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어요. 아버지 시가 우리 마음을 울렸던 것은 언어의 유희가 아
니라 가슴으로 쓰신 글이기 때문입니다.”
 
—미당 두 아들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서정태씨의 말이다. “승해는 아들(徐仁)만 하나 낳았는디 그것도 둘째 윤이마냥 듀크대 의대를 나와
외과의사를 헌다고 혀. 윤은 아들 둘을 낳았는디 큰 애(서건)는 대학원 다닌다고 허고, 둘째(서신)는
대학에 다니고 있대. 전공? 그건 안 물어봤어.”

“우리집 애들한테 문학 하는 옆자리도 못 가게 혔어”
미당 선생은 1915년 전북 고창군 부안면 선운리 578번지에서 아버지 서광한(徐光漢)과 어머니 김정현
사이에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나와 미당허고는 8살 터울이여. 미당이 살었(았)다면 금년에 백두(102)살인 셈이지. 나는 아흔넷이
고. 나허고 미당허고 지내기는 6·25 전쟁까지 쭉 같이 있었어. 핵교 다닐 때는 떨어져 있었지만 해방 전후
로 같이 지냈으니깨(까). 내가 28살 먹던 해까지. 그해 6·25가 났거든. 그 후엔 따로 생활혔으니깨.
 
미당과 나 사이에 누님이 한 분 계셨어. 4살 터울인 서정옥(徐廷玉) 누님은 죽은 지 오래되(었)어. 
그 다음에 내 밑으로 남동생(徐奉祺)허고, 여동생(徐廷熙) 혀서 5남매인디 다 죽고 나만 살았어. 암
으로 죽구(죽고), 병명은 모르지만 그냥 아파서 다 죽었어.”
 
서정태씨는 1946년부터 시작해 1978년 무렵까지 언론계에서 일했다. 서울과 호남에서 기자로 활동하
며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언론사 사주가 된 적도 있다고 한다.  
“정확히는 (언론계 종사 시기가) 35년쯤이나 될 거여. 1946년 5월부터 서울서 기자생활 시작혔(했)
으니깨. 그거 허(하)다가 중간에 잠깐 딴 직장 갔다가… 1951년부터 78년까지 혔으니깨. 한번 계산혀 
봐요. 중간에 2~3년쯤은 다른 거(직업)도 혔어.
 
—다른 일은 뭐 하셨는데요. “공무원.”
—어떤…. 
“꼭 밝혀야 혀? 잘 야그 안 허거든. 몰라, 장관이라도 혔다면 몰(모를)까. (잠시 뜸을 들인 후) 미
군정 때 경무부, 지금의 경찰청에서 발행하는 《민주경찰》이라는 잡지의 편집담당을 혔어. 그것도 
언론이라고 치자면 칠 수 있지. 1950년 6·25 나던 해까지 일혔으니까. 전쟁이 나고 피란 가면서 그
만두고 51년부터 전주에서 본격적으로 신문기자 생활을 혔어.”
 
—신문사는 어딘데요. 
“전두환 정권 그 전으로 혀서 최종으로는 《전북일보》여. 일도일사(一道一社) 헌다고 다른 신문 다 
폐간허고 각 도에 1개씩 신문사가 있었잖어. 편집국장도 허고 주필도 허고, 군사정권 되기 전에, 그러
니까 장면(張勉) 정권시절엔 언론자율화가 되야서 신문사가 많이 생기고 그러지 않었어? 그땐 내 명
의로 신문사도 가져 보고 그렸어. 그런 것 다 빼 버리고 언론계 종사 35년 그렇게 써 놓으면 되야.”
 
—슬하에 자녀는? 
“2남2녀를 뒀어. 큰애(徐象範)는 사내인디, 아들 며느리 내외가 고교교사로 정년퇴임혔어. 지금은 
예순다섯. 담당과목은 과학이여. 대학에서 물리학 전공을 혔거든. 둘째(徐慶錫)는 예순셋이고, 셋째
(徐喜錫)는 쉰아홉. 다 시집가서 잘 살어. 막내 놈(徐弘錫)이 쉰일곱인데 미국 가 있어. 미국 놈이 
되야 버렸어. 막내가 무슨 일은 허느냐고? 모르지… 사업헌다고 허니까.”
 
—문학이나 예술 쪽에 종사하는 분은 안 계시네요. 
“나는 우리집 애들한테 문학 허는 옆자리도 못 가게 혔어. 대학전공도 첫째는 물리학과에 보내고 둘
째는 섬유공학으로 전공을 택혔어. 셋째는 간호학, 막내아들은 기계설계.”
 
—왜 그러셨어요. 소질을 타고 났을 텐데. 
“문학혀서 어떻게 살아. 그 무렵에는 밥 굶기 딱 좋거든. 현재도 그럴거여. 어디 시만 써서 먹고 살
어? 시 한 편에 10만원 고료 받아서 한 달 살려면 20편은 발표혀야 혀. 그런 지면이 있어? 나는 아
예, 핵(학)교 들어갈 때부터 그건(문학은) 못허게 혀가지고….”
 
—손자 중에 문화예술 방면에 활동하는 분은 없나요. 
“큰애(徐象範) 딸이 의사고 아들은 현재 군 복무 중인디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국
제 공인회계사를 준비 중이여. 막내(徐弘錫)는 손자, 손녀 하나씩 있는디 아직 어리니깨. 큰딸(徐慶
錫)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아들은 한양대 경영학과를 나와서 월급쟁이 생활을 허고 딸 둘은 
학원을 혀. 둘째 딸(徐喜錫)은 딸 하나만 뒀는데 지금 YTN PD여.” 
 
‘애비는 종이었다’의 진실 
—미당의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서정태씨는 “우리 아버지?” 하고 잠시 말문을 닫았다.
 
미당이 스물셋 무렵 토해낸 시 〈자화상〉에서 ‘애비는 종이었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종의 아
들’로 태어나 그를 키운 건 ‘바람이 팔 할’이라고 썼다.
 
“조선시대 때는 양반이 3대째 벼슬을 못허면 양인이 돼. 우리 고조부가 정3품 당상관이여. 통정대부
를 허셨어. 증조부, 조부는 벼슬을 못허셨고. 우리 아버지(徐光漢)는 당신이 벼슬을 혀야 양반 유지
가 된다고 여겨, 어릴 적부터 과거를 보셨는디 원래는 옆 마을 무장현(茂長縣) 분이여. 옛날에 지방 
선비들이 중앙에 나가 과거를 보려면 지방현 백일장에서 장원을 혀야 혀. 그래야 과거 볼 자격을 줬
어. 요즘으로 치면 예비고사 치고 대학별 본고사 치고 그런 식이여. 
 
아버지가 14살 때 무장현 백일장에서 장원을 혔어. 각 고을마다 1년에 한 번씩 백일장 보는디 고창현
에서 장원, 흥덕현에서 장원, 심지어 장성현에서 장원을 혀, 이 일대에서 유명혔어. 그때가 17~18살 
먹었을 것 아니것어? 그 당시 무장현의 현감이 ‘달성서씨(達城徐氏)’ 동성동본인디 항렬로 볼 때 
아버지 윗대 항렬이셨어. 그분이 자식이 없어서 아버지를 양자로 삼으려 혔는디 아버지는 형이 죽어 
사실상 외아들이여.
 
그래 미적미적헐 때, 세상이 개화되야서 과거제가 폐지돼 버렸어. 당시 무장현감이 서울로 아버지를 
유학 보냈어. ‘한성학원’이라는 곳이 당시 서울에 처음 생겼단 말이여. 신식 핵교인 셈이지. 거기
서 기술을 가르쳐. 측량기술. 우리 아버지가 측량기술을 배웠어. 그라(리)고 한일합방(한일병탄)이 
되고 군 서기로 돌아오셨어.
 
고창군 일대 국유지를 측량하러 다(녔)는디 당시 호남갑부가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1891~1955) 
선생의 집안이여. 인촌의 양부(養父·金祺中·1859~1933)가 ‘동복영감’(同福令監·전남 동복 고을
에서 조선 말 현감을 지낸 까닭에 동복영감이라 불렀다)이여. 동복영감이 가만히 보니 우리 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대지주니까 측량헐 일도 많을 거 아니것어? 그래서 스카우트되야서 간 거여. 그것이 잘
못되고 말았어. 우리집도 노비를 부리고 있었는데도 〈자화상〉을 읽고 ‘노비의 후예인갑다’ 혀서 
아직꺼정 말이 있는디 그게 아니여. 실은 동복영감 땅 관리허는 일을 맡았었어. 왜정 때 그 시를 발
표허니깨 백철(白鐵)이라는 평론가가 ‘특수계급의 후손인갑다’ 혀서 신문에 글을 쓰고, 김동리(金
東里)가 반박을 허고 논전이 붙은 적도 있어.”
 
—‘팔 할이 바람’이란 뜻은 어떤 의미일까요. 
“아주 고약헌 역풍인 셈이지.”
 
—풀어 설명해 주세요. 
“예를 들면 비극적인 문제만 자꾸 생긴다는 것, 그런 게 아니것(겠)어. 자기 뜻과 상관없는 인간의 
숙명 같은 것…. 재작년인가, 문학지망가 수십 명이 여그(여기) 와서 그 질문을 혀. 그때 그렸어. 
‘누구헌테든 오는 것(바람)이 아니것냐’고. 어떤 이는 바람이 역풍이지만 어떤 이에겐 따스한 미풍
일 수도 있고 시를 읽는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 다를 거여.”

未堂의 반항과 퇴학, 가출 
—동생이 볼 때 형은 어떤 분인가요. 
“내게 미당은 제일 존경하고 절대(적인 존재)여. 동생 중에 나를 제일 예뻐혔어. 내가 5살 때부터 
미당 품안에 살았어. 나를 데리고 잔 것이지. 미당이 중앙고보를 15살에 들어갔단 말이여. 첫 여름방
학 되야서 집에 올 때 강아지 인형을 하나 사왔어. 그리고 바나나를 사온 거여. 그때 처음 먹어봤지. 
수월찮이 비쌌을 것이여. 그라고 내가 여름날 학질을 앓을 때 동화책을 사다주기도 혔고 (미당이) 아
버지한테 미움당해 몇 개월간 가출할 때도 꼭 집에 올 때는 내 선물을 사다줬어. 누이동생도, 남동생
도 있지만 다른 것 없어. 나한테만 사다줘.
 
한번은 내가 보통핵교 3학년 때 미당이 《아라비안나이트》를 사다줬는디, 소설 속에 요란한 얘기가 
많잖어. 고것이 자꾸 떠올라. 말라리아 때문인지 이불을 덮고 있어도 (소설 속 장면이 떠올라) 생시
인지, 꿈인지 시달렸던 기억이 나.
 
근디 우리 아버지허고 미당허고는 별로 사이가 안좋아. 아버지는 과거시험에 합격,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과거제가 사라지는 바람에 절망허고 마셨어. 일본 고등문관 시험을 봐봤자 째비도 안 되고 
그만뒀단 말이여. 아들을 뒀는디 미당이 머리가 좋아. 보통 애들은 8~9살 때 서당 들어가. 반년은 되
아야 천자문 떼는디 미당은 보름 만에 떼 버렸어. 미당이 언젠가 ‘열흘 만에 뗐다’고 하던디 내가
여그 와서 알아보니 보름이라 혀. 그때가 봄이었던가 봐. 아버지가 좋아서 떡허고 술허고 혀서 온 동네
잔치를 혔어. 여그 뒷산이 소요산이라는 산인디, 진달래가 흐드러져. 얼마나 기뻤으면 잔치를 혔을꼬.
 
그 아들이 보통핵교를 다니는디 1학년부터 늘 수석이여. 1등을 헌단 말이여. 5학년 수업을 마치고, 
인촌이 설립한 중앙고등보통핵교에 시험을 봐서 합격을 혔어.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기대를 혔겄느냐 
말이여. 아들이 고등문관 시험에 합격혀서 벼슬도 허고, 도지사도 허는 그런 기대를 안 혔것어?”
 
그런데 미당은 중앙고보 2학년 시절인 1930년, 광주학생운동 1주기를 맞아 기념시위를 주도하다 퇴학
을 맞고 말았다.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정책의 노예교육을 반대한다’는 등의 슬로건 제창과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친 것이 죄목이었다. 중앙고보의 교주(校主)가 동복영감이니 아버지의 상심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중앙고보 2학년 때 퇴학을 맞아서 집에 왔어. 만세사건 주모자로. 중앙고보 퇴학자 6명 중 한 명이
었어. 방학 때가 아닌디 왔단 말이여? 마침 아버지가 밥상에서 진지를 드시는디, 미당이 ‘이래 저래 
돼서 퇴학 맞고 왔습니다’ 허니 아버지의 수저 떨어지는 소리가 ‘땡거렁’ 나더라 그 야그여. 얼마
나 기가 막히면 그렸것어. 그러니 (미당을) 좋아혔것어?
 
사실 중앙고보에 입학허던 날, 아버지가 미당을 데불고(데리고) 서울 혜화동에 있는 경성제국대학에 
데려갔어. ‘장차 니가 다닐 핵교는 이 핵교다’ 허면서 말이지. 제국대학이 전국 수재만 들어가는 
대학 아니냐 그 말이여. 그 아들이 퇴학 맞고 집에 왔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것어?” 
 
“아버지는 미당이 눈에 띄기만 혀도 ‘저놈의 자식…’ 그렸어”
 
장남 승해씨와 함께한 서정주 시인 내외.

이듬해 1931년 아버지 서광한은 퇴학 맞은 미당을 고창고보에 편입시킨다. 그리고 집도 줄포에서 학
교 부근인 고창 월곡으로 옮겼다. 미당이 학업에 전념할 수 있게 택한 일이었다. 서정태씨의 말이다.

“서울로 유학 보냈더니 몹쓸 친구와 어울려 그렸나 싶어서 고창고보에 다시 보냈어. 그때 개성에 있
던 오산고보허고, 고창의 고창고보는 전국에서 퇴학 맞은 학생만 다 받아 줘. 오산고보는 안창호(安
昌浩) 선생이, 고창고보는 일본인 신부(神父)가 세웠다고 혀. 아버지가 이 고창고보에 (미당을) 편입
혔어. 그래서 열 살 때부터 살던 줄포에서 고창의 월곡이란 데로 이사를 갔는디, 그 집은 안채가 있
고 초당이 있어. 대밭 속에 있는 초당이여. 아들이 공부에 전념허라고 마련한 집이지. 
그란디(런데) 거기서도 또 퇴학을 맞고 말았어.”
 
—어쩌다…. 
“근디 퇴학이 아니라 자퇴여. 왜 그런고 허니, 고창고보에서 퇴학 맞으면 다른 어느 핵교에 갈 수 
없어. 낙인 찍히니까. 담임이 일본 와세다대 영문과를 나온 홍 선생이라는 분이었는디 ‘니가 자퇴를 
혀야 헌다. 그래야 나중에라도 다른 핵교라도 갈 수가 있다’셨어. 그래서 자퇴서를 낸 것이지.”
 
—고창고보에서 시험거부를 했다면서요. 
“일본 식민지교육을 반대헌다고 혀서… 대개 껄렁껄렁한 학생들이 그런 짓 허는 것 아니것어? 모범
학생들은 안 그러잖여. 지금도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게 대개 껄렁껄렁한 사람들 아녀? (웃음)”
 
—왜 그랬을까요. 당시 미당이 껄렁껄렁했습니까. 
“그러니까….”
 
—아버지에 대한 반발입니까. 
“아버지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일종의 사회에 대한 반발심이지.”
 
—부모님 마음도 아프셨겠네요. 
“고창고보를 그만둘 때 몇 달 간 아버지는 몰랐었어. 미당은 핵교 간다고 허고선 산으로, 들로 나다
니고… 어디 한 달 이상 거짓말헐 수 있어? 그러니 (미당이) 가출을 혀야 헐 것 아닌가벼? 그러면 인
자(이제), 나쁜 짓거리 허는 수밖에 없지. 은행 없던 시절이라 서랍에 돈도 놔두고 그렸잖여. (미당
이) 아버지 서랍에 있던 돈, 있는 대로 탈탈 털어서, 요즘 같으면 천만 원이나 몇백만 원 훔쳐서 갔
어. 나중 돈 쓸려고 아버지가 서랍을 여니 없잖여. 핵교 다니던 놈이 사라져 핵교에 가니 퇴학 맞았
다는 거여. 그제야 도망친 것을 아는 것이지. 아버지는 미당이 눈에 띄기만 혀도 ‘저놈의 자식…’ 
그렸어. 그럴 것 아니여?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헌테 기대혔는데 그 아들이 그런 짓을 허니 
좋아허것냐, 이거여.”
 
—미당에 대한 기대는 차남에 대한 기대로 옮겨지지 않았을까요. 
“그란디 나는 어릴 적부터 병약혀. 여름만 되면 학질을 앓어. 학질이 말라리아여. 보이는 게 환상적
으로 보이고 그렸어(그랬어). 우리 아버지가 겨울만 되면 대구감영(大邱監營)에 가서 한약재를 사다
가 보약을 매겨(먹여).”
 
—미당이 고창고보를 그만두고 가출한 것이 처음이었나요. 
“한두 번이 아니여. 내가 기억허기로 5~6번은 되야. 처음 가출헐 땐, 요즘으로 치면 몇 천 만원 가
지고 갔을 거여. 인천 가서 밀항혀 상해 임시정부로 갈려는데 허덜(하지를) 못혔어. 결국 서울 가서 반년 
있었을 거여. 가출허면 대개 몇 개월 만에 와. 긍개(그러니까) 몇 개월 쓸 돈, 훔쳐간 거 아니것어? 
문제는 서울 가서도 친구들허고 어울릴 수 없잖여. 친구들은 낮에는 핵교 다녀야 혀서 밤에만 어울리
는데, 낮에 갈 데도 없고 혀서 도서관을 간 거여. 도서관 가서 재미있는 책 읽는다는 게 소설 책 아
니것어? 그래서 본격적으로 문학을 허게 된 거지.”
 
미당이 시를 쓰게 된 이유 
—미당 문학의 뿌리는 무얼까요. 
“어쩌면 문학을 안 헐 수 없는 분위기가 되야 있었는지 몰러(라). 왜 그란고 허니, 미당이 질마재에
서 서당을 다(녔)는디, 지금도 요 앞에 ‘미당 서당터’가 있어. 그 건너편이 바로 외가(外家)여. 미
당이 서당 갔다가 외할머니 댁에 들르지 않았것어? 누룽지도 주고, 고구마도 주고, 그 맛 들어서 외
가에 가는디, 우리 외할머니가 굉장히 유식한 분이셔. 〈춘향전〉 〈심청전〉에서 〈장화홍련전〉 
〈소대성전〉 〈유충렬전〉 〈사씨남정기〉까지 다 야그(얘기)를 혀 줘. 그 야그에 맛들어 항시 간단 
말이지. 그란디, 그 야그가 너무 길어 한꺼번에 다 못혀. 서당 가서 공부허다가 그 다음 얘기 듣기 
위해 또 간단 말이여. 또 핵교서 퇴학 맞고 갈 데가 없어 요즘으로 치면 시립도서관 같은데 갔어. 물
론 17~18살 때 사회주의자도 되어. 톨스토이주의에 빠졌거든. 미당이 쓴 자서전에도 없는 야그인디 
틀림없어. 톨스토이에 빠져 가지고, ‘나도 그럼 저 빈민 속에서 살아봐야겠다’고 헌 거지.
 
서울 마포의 넝마주이 거지소굴에 들어갔어. 근디 고것이 장안의 명물이 되야 버렸어. 거지라면 떨어
지고 때묻고 얼굴이 시커멓고 혀야 헐텐디, 옷을 말쑥하게 차려 입고, 장발에 겉멋은 들어서 ‘마도
로스 파이프’를 떡 물고 다니니까 서울의 명물이 되야 버렸어.
 
‘괜찮게 사는 놈인디, 거지 굴속에 산다’는 소문이 장안에 났어. 그 당시 조선불교계의 대종사, 석
전(石顚·朴漢永·1870~1948) 스님 귀에 들어갔단 말이지. 가만히 중(석전)이 생각혀 보니 그놈 참 
묘허단 말이여. ‘이상한 놈이니 델고(데려) 와 봐라’고 상좌에게 얘기혔대. 상좌가 미당헌테 가서,
‘큰스님이 자네 좀 보자시네’, ‘뭣 땀시로( 때문에) 그런다요?’, ‘나는 모르것어’ 미당이 가만 
생각혀 본게(보니), 이상헌 일이다 말이지. 그래도 갔어.”
 
미당은 삭발하고 《화엄경(華嚴經)》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봄 진달래꽃에 취해 툇마루에서 담
배를 피우다 스님에게 들켰다. 며칠이 지나 스님께서 그를 불러 “자네는 중노릇 할 그릇은 아니고, 
이백(李白)이나 소동파(蘇東坡)같이 시나 쓰고 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고 전해진다.
 
계속된 서정태씨의 회고다. 
“자, 그란디, 석전이 중 시키려고 미당에게 ‘춘원(春園), 육당(六堂)도 다 내헌테 배웠는디 불경공
부 안 헐래?’ 물었어. 미당이 머리 깎고 중이 되려고 금강산에서 참선허려고도 혔어. 나중에 도저히 
중이 안 될 것 같아서 중앙불교전문학교(동국대 前身)에 입학헌 것이여. 석전이 그때 그 핵교 이사장
으로 계셨거든. 거기 문과에 들어갔는디 몇 개월 공부허는 것이 맨날 일본말 번역한 문학개론서나 지
껄이니까 핵교에 안 가 버렸어. 지금도 휴학으로 되야 있어. 허허. 그 무렵, 《동아일보》에다 독자
투고를 혀. 가끔 (신문에 이름이) 나온단 말이여. 그럭저럭 혀서 스무 살이 되어. 그해 겨울에 독자
투고를 허고 집에 내려왔는디, 신춘문예 당선되다는 편지가 왔어.”
 
—아버지도 기뻐하셨겠네요. 
“그랬겠지. 저놈이 문학하려는 갑다 생각혔(했)겠지.”
 
—그땐 아버지가 동복영감 일은 안 하셨나요. 
“그거? 중앙고보에서 퇴학 맞고 난 후에 미당이 아버지한테 야그(얘기)혔어. 고창고보 편입허기 직
전에. 그때 미당 나이가 16살이나 되을까? ‘아버지 그만두십시오. 지(제)가 창피혀서 못 살겠습니
다’ 그렸더니, 딱 그만둬.”
 
—아버지로선 참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텐데. 
“아, 어려운 일이지. 보통사람은 그럴 것 아니것어? ‘어린 것이 배고픈 사정, 몰러서 그런 말 헌
다’고. 그란디 우리 아버지는 딱 그만뒀어.”
 
—대단하시네요. 
“우리 아버지는 자식 허자는 대로 허셨어.” 

“미당이 친일 안 혔으면 오늘날 얼마나 떳떳하것어”

  
눈 덮인 서정주 시인의 생가 전경.

1943년 가을, 미당은 최재서(崔載瑞)의 요청으로 《국민시인》이라는 시 잡지의 편집일을 맡게 됐다. 
그것이 친일파 문인의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훗날 미당은 “호구지책이었을 뿐”이라고 했으나 그 
흔적은 평생을 따라다녔다.
 
서정태씨의 회고다. 
“당시 우리집 호주(戶主)였던 미당이 군(軍) 소집영장을 들고 나를 찾아왔어. 내가 당장 군에 끌려
갈 판이여. 형이 ‘어떻게 할래?’ 물어. 날더러 도망가래. ‘기회는 지금뿐이다. 도망가려면 지금 
가라’는 거여. 내가 허허 웃었어. 내가 도망가면, 소집영장 건넨 호주는 어떻게 되는 거여? 그라고 
도망가면 어디로 가것어? 그땐 산마다 일본군이 진을 치고 있었어. 소나무에서 송진을 짜내느라 말이
지. 그 우거진 지리산까지 들어가 송진 짠다고 난리여. 그럼, 기차 타고 만주로 가야 허는디 기차 속
에서 다 잡혀.
 
1945년 4월초에 일본군에 입대혔더니 나를 전남 목포로 데려가데. 중핵교 다닐 때도 교련시간에 일본
군인보다 더 지독한 훈련을 받었어. 기초훈련 받을 필요도 없는디 한 2주일 기초훈련 시키고 배에다 
태워. 그라고 어디로 갔는디 조그만 섬에 내렸어. 꼭 잉어 같은 비행기가 바다 위에 떠. 가만 보니, 
일본 비행기가 아니라 미국 비행기여. 하늘에서 기총소사를 허는디 뒤꿈치가 벌씀벌씀혀. 한참 지나
고 나니 타고 온 배가 없어졌어. 가라앉아 버린 거여.”
 
—거기가 어딘가요. 
“지금 나로우주센터 있던 곳(전남 고흥군 봉래면)이여. 거그(거기) 바닷가에서 20m짜리 (땅)굴을 파, 
바닷물이 들어가게. 한 분대가 굴 하나씩을 파고 거기다 기차레일을 깔어. ‘특별잠수함’을 거기다 
넣으려고. 그 잠수함은 전진만 허지 후퇴는 없는 것이여. 폭약을 잔뜩 넣어 미영 함대에 부딪쳐 죽는 
자살특공대여. 거그다 (내가) 배치되어. 45년 4월에 들어가 한 3개월, 100일쯤 작업을 혔나? 잠수함
을 가져올 정도로 (굴을) 팠는디 어느 날 천황이 무조건 항복허게 되다고 허는 것이여. 해방 된 것이지”
 
—미당의 친일시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1943년 무렵, 정읍의 한 여관에 둘이 잔 적이 있어. 그때 일본이 싱가폴을 점령헐 때여. ‘이러다
가 영 일본놈화되는 거 아니여?’ 허고 물으니, 미당이 뭐랬느냐면, ‘한 민족이 영 멸망허지 않어. 
먼 훗날을 봐야지’ 그렸어(그랬어). 그때도 친일 글 좀 쓸 때였어. 사실, 미당이 겁이 좀 많어. 겁
이 많어가지고, 1943년인가 44년인가 고창경찰서에 끌려가 40일 만에 석방된 때가 있단 말이여. 오지
기 당혔을 것 아니여? 그 후에 친일작품 많이 썼어. 내가 볼 때 친일은 아니여. 보신책으로 쓴 것이여.
 
미당 생가에 건립된 ‘미당시문학관’에 미당이 쓴 친일작품 하나도 안 빠트리고 전시해 놨어. 그러
고, ‘마쓰이 히데오’에 대한 시(〈송정오장(松井伍長) 송가〉)도 말이지. 그 시는 내가 군대 간 후
에 쓴 시여. 지 동생, 개죽음당허는 것 아닌가, 나헌테 괜찮을까 혀가지고 쓴 것이여. 그란디 내가 
야그헌 것은 제3자 야그로 안 알어. 친형제가 말헌 걸로 알어. 미당 친일 야그헐 때 누구보다도 나
(내)가 괴로워. 미당이 친일 안 혔으면 오늘날 얼마나 떳떳허게 자랑허것어.”
 
몇 시간째 이어지던 서정태씨의 목소리는 어느덧 깊이 잠겨 있었고 목이 쉬어 있었다. 가족을 서울에 
두고 홀로 고향에 내려와 미당(생가)을 지키는 까닭을 어렴풋이 알 듯도 했다. 질마재를 마지막 돌아
갈 시의 귀처(歸處)로 삼은 미당처럼, 그는 어린 시절 자신을 그렇게나 사랑했던 미당을 귀처로 삼은 
듯 보였다.⊙






□ 부록2-5) 미당이 신석정을 살리다

□ 전주 풍류 1년간 - 서정주
좋은 자연과 인정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풍토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전주란 어느 만큼의 연줄을 바라고
큰 세간들을 놓아 둔 채
트럭에 실려 이리까지 온 우리 -
과부된 처이모와 두 딸, 그리고 우리 내외와 내 아들 승해는
이리 → 전주 90리 길은 조랑말 마차에 보따리들을 싣고
터벅터벅 그 길을 걸어가기로 해서
전시의 답답한 우리에게 산보의 여유를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이에 늘 우리를 따라 우아하게 굽이치며 우리를 위로하던
주위의 고운 산 둘레들의 덕도 톡톡히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도중에 해가 저물어
參禮(삼례)라는 곳의 마부 집에서 호롱불과 함께 밝힌 하룻밤이
조랑말이 발굽을 구르며 콧소리를 하는 것이 밤내 잘 들리던
그 고전적이고 풍류적인 하룻밤을 나는 잊을 길이 없다.
거기다가 이튿날 해돋이에 우리가 도착해 본 大場村(대장촌) -
정말로 아름다운 처녀들의 눈썹의 연속처럼
곱게 곱게 뻗쳐있는 산맥의 妙境(묘경)을 눈여겨서
찾아와 내려 첼로소리로 모든 것의 가슴을 울리는
수만 마리 기러기들의 집산지인 그 대장촌에 들어섰을 때에는
우리의 이 보행을 나는 아! 소리쳐 축복하지 않은 수 없었다.
이러구러 전시의 살맛도 만드는 것인가?
전주에 들어가자 나는 시인 李轍均(이철균)과 河喜珠(하희주)를 만나
그들의 교직이 있는 전주의 전주고등학교에 국어교사 자리를 구했더니
대장촌의 그 기러기들의 첼로소리 영향인지
교장 柳靑(유청) 씨 호의로 즉각 그 한자리가 차례가 와서
삼례 마구간의 조랑말이나
대장촌의 기러기만큼은
팔자가 그만 괜찮게는 되었지.
 
그러나 이 팔자의 풍류라는 것도
늘 첼로의 태평한 소리 같기만 한 것도 아니니
내가 전주고등학교의 선생 자리를 얻어 놓은 다음에
정읍의 처가에 좀 쉬러 갔다가 당한 일 그것은 또 꽤나 위험한 일이었네.
2월 어느 날의 으스스 추운 해질녘
나는 한복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처갓집 방 아랫목에 누워 있는데
때마침 이곳 여고에 선생으로 있던 내 청소년 때 친구 韓太錫(한태석)이가
‘잘된 밀주를 금방 개봉했으니 어서 와서 자시게’하는
쪽지를 인편에 보내어
나는 입고 있던 한복에 오버코트만 걸치고 가서
밤이 꽤나 깊을 무렵까지 그걸 고래 물마시듯 마시고 있었는데
여기서 돌아가는 어두운 길에서 나는 헌병의 불심검문에 걸렸으니
이때 여기는 내장산의 좌익 빨치산들이 밤에 출몰하는 일이 있어
비상계엄령 치하였는 걸
나는 취중에 그것마저 깡그리 잊고 흐느적흐느적 돌아가는 길이었다.
거기다가 나는 주민등록증까지도 벗어둔 양복저고리에 넣은 채 잊어버리고 나온 터라.
이것의 제시에 내가 속수무책이 되자
헌병들은 ‘이 새끼 빨치산 앞잡이구나!’ 하며
나를 땅바닥에 쓰러트리고는
총대로 마구잡이로 후려갈기며 또 군화로 차고 밟았다.
나는 그저 얼얼하고 먹먹해 있었는데
그들은 다시 나를 일으켜 세워
두 헌병이 나를 양쪽에서 부축해 서자
그 상사인 듯한 사람이 저만치에서
‘너희들 그 자를 냇가로 끌고 가 즉결로 그만 처치해버려라’ 하는 것이었다.
그래 나도 두 헌병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너무나도 허망하게 총맞아 죽으러 가고 있었는데,
이런 때에도 오실 수 있는 건 역시 천우신조라
그 두 헌병 중에 하나가 인정이 두터운 사내여서
‘그래 영감아 잘 생각해봐.
이 정읍 천지에 영감을 보증할 만한 유력자가 하나도 없어?’
물어주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이곳 경찰서장도 나와는 중학 동창이기도 해
그걸 더듬더듬 말했더니, 재깍
이 말의 사실여부를 밝히는 확인과정을 거쳐
비로소 또 한 번 나는 살아남을 수가 있었네.
운수는 좋았지만, 이날 밤 얻어맞은 덕으로 나는 뒤에
만성늑막염 환자가 되어 여러 해를 앓았지.
 
전주고등학교에서의 수업은
오전만 하기로 하고,
대우는 교감과 동격,
나는 여기 있는 동안에 이 학교 교가도 새로 지었고,
1950년 6. 25에 전몰한 이 학교 출신의 학도병들을 위해
교정에 세운 충혼탑에는
해공 申翼熙(신익희) 씨 글씨로 탑명의 글도 지었다.
나는 또 당시의 전국 문화단체 총연합회의 전북지부장이기도 했던 관계로
전주 시민을 위한 여러 연설장에도 나갔고,
이곳 전시 연합대학에서도 가람 李秉岐(이병기) 선배와 함께
강좌도 가졌었다.
그러나 이런 일들보다도 내게 더 안 잊히는 일은
체포되면 죽게 된 시인 辛夕汀(신석정) 씨를 살려내는 데 일조가 되었던 일이다.

 
1951년 3월인가 4월의 어느 날이던 것 같은데,
이때 전북일보의 주필이었던 내 대학생 때의 동기생 吳明淳(오명순) 군이
북노송동의 내 숙소로 숨이 턱에 차 찾아와서 하는 말이
‘부안 신석정의 마음이 좌익이 아닌 건 자네도 알지?
그런데 그 사람이 지난 여름의 북괴 남침 때
부안에 별 인물이 없는 관계로 강제로 뽑히어 그곳
군민위원장이 되었다나.
그래 우리 국군이 수복해 오자
어쩔 수 없이 변산 속으로 빨치산들을 따라 들어갔었는데
가족들 생각에 얼마 전에 그곳을 빠져나와
부안에서 숨어 다니다가 안 되게 생기니
지금은 여기 전주에 숨어들어 나한테 도움을 청하고 있네.
자네가 들으면 살려낼 길이 있는데
어떻게 하려나?’ 하는 것이었네.
‘어떻게?’ 하고 내가 물으니
‘이곳 대한청년단 전북지원장 겸 태백일보 사장 孫權培(손권배) 씨는 자네도 잘 알지?’ 해서
내가 ‘이름만은 알지’ 하니
‘아직 면식이 없더라도
그 사람이 익히 자네를 알고 존경하고 있으니
그 사람을 지금 당장 나하고 같이 찾아가서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대로만 하면 돼.
손권배 씨더러 먼저 신석정의 본심이 좌익이 아닌 걸
책임진다고 하고,
그 다음엔 그 사람의 태백일보에
신석정 作(작)의 대한민국 예찬시를 한 1주일 연재시키라 하고
그 다음에는 그 태백일보의 편집고문의 하나로 辭令(사령)
광고만 내달라고 하게.
손권배 씨는 지난해 여름 북괴군 전주 점령 때
그의 단원들로 우익 유격대를 꾸려 산속에 숨어살면서
이곳 북괴군 진지를 박살내기도 한 용사로
이승만 대통령의 신임도 이만저만이 아니라
이 전주에서는 그를 거역할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미당 알겠나? 내가 말한 대로만 해. 어서 가세!’
그는 이렇게 주장하며 내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것이었네.
그래 우리 둘이는 어린애들처럼 모처럼의 신바람을 내서
오명순의 案(안)대로 해본 것이 들어맞아
우리 시인 신석정은 이때 말로 즉결이라는 것의
그 고배를 면할 수가 있었던 걸세.
어허허허!

 
그러나 나 미당 이 사람으로 말하면
2월에 헌병들에게 얻어맞은 상처가 속으로 곪느라 그랬던지
늘 속이 아프고,
길가에 새로 돋은 풀잎들이나
그 곁에 있는 어린 것들의 웃음에는 서글픈 대로 공명은 하면서도
더 사는 것이 영 귀찮기만 해
아주 조용한 적멸 속으로 들어가 버리려고
5월 어느 날인가의 저녁때엔
이때 마침 내게 있던 학질을 핑계로
그 치료제인 극약 ‘데라보르’든가 하는 것 100알들이 한 병을 구해
그걸 몽땅 한꺼번에 다 먹어 버렸네.
이것 열개 이상은 치사량이라 했으니
다섯 사람쯤의 寂沈(적침)에 잠길 만한 富裕(부유)한 복용이셨지.
거기다가 이건 자살이 아니라, ‘빨리 나으려고 많이 먹은’
실수로 하기 위한
거짓말을 내게 끝까지 시켜야 했으니
정말 못나고도 또 못난 일이었지.
 
하지만 이걸로도 나는 죽을 팔자는 아니라
내가 음독하자 이내 詩友(시우) 이철균이 꼭 맞게 찾아와
이 근방에 살던 그의 친구 의사를 데려와서 물과
토재를 몽땅 먹여 나를 위아래로 토해내게 해
진달래꽃빛의 많은 것을 나는 토하고
죽음을 한 걸음 앞에서 또 한 번 면하게 되었네.
그러고는 꽤 오랫동안 나는 기억상실의 몽롱한 안개
같은 의식 속에 잠겨 지냈네. 



미당 명시 12편(말당의 친일시) / 역사동향연구소(김갑수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