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역사의 뒤안길

친일시인부록4) 이광수와 최남선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이름없는풀뿌리 2023. 10. 6. 04:33
▲ 반민특위에 체포된 친일파의 재판 장면 9월 22일은 67년 전인 1948년 친일파의 반민족 행위를 처벌할 수 있도록 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이 공포된 날이다. 또 정확히 1년 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 폐지법안이 국회에서 가결된 날 이기도 하다. 그러나 친일파를 처단하면 공산당이 활개를 칠 것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도 시기상조론과 훈련된 인재가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어 친일파를 비호했다.(아시아경제 2015/09/22) ■ 부록4) 이광수와 최남선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부록4-1)‘친일문학’ 이야기 - 글머리에 □ 부록4-2)‘춘원과 육당의 문학상 제정? 뜬금없고 생뚱맞다 □ 부록4-3) 이광수, 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려 했건만 □ 부록4-4) 독립선언서 집필자가 일본에 붙은 역적 되다니 □ 부록4-5) 최남선, 죄과(罪過)는 다섯 가지나 나는‘무죄’다 □ 부록4-1) ‘친일문학’ 이야기 - 글머리에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 2018 2018. 12. 19.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문학’을 가르치면서 느꼈던 갈증 ▲ 지난해 발간된 교주본 <친일문학론> 중등학교에서 서른 해 가까이 문학을 가르쳐 왔지만 정작 ‘친일 문학’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가르치 지 못했다. 늘 판박이 식의 지식 전수에 급급하다 보니 그랬지만 기실 스스로 친일 문학에 대한 이해 가 얕았던 게 가장 큰 이유다. 결국 친일 문학에 관해서는 널리 알려진 서정주의 <송정오장 송가> 정 도로 얼버무리기 일쑤였던 것이다. 춘원 이광수의 경우는 그나마 창씨개명에 앞장섰고 학병지원을 권유하는 등 따위로 알려진 게 있어서 대충 주워섬기면 되었지만 막상 누가 친일문인이고 누가 아닌지를 꼽다 보면 이내 이야기가 짧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 시간마다 공부가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정작 제대로 그걸 찾아보지는 못했다. 교단 을 떠날 시기를 저울질하게 된 이즈음에 와서 임종국 선생의 역저 <친일문학론>을 사게 된 것은 ‘늦 게 든 철’일지도 모르겠다. <문학>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개화 전후의 우리 현대문학사를 설명할 때마다 나는 일종의 갈증을 느끼곤 한다. 신체시와 신소설, 자유시와 현대소설 등 개화기와 현대문학을 여는 첫 작품을 쓴 문인 들은 모두 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는 친일 부역자들인 것이다.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를 썼던 육당 최남선은 ‘보람 있게 죽자’ 따위의 글을 써 식민지의 청년들에게 학도병 출전을 권했던 인물이다. 그는 해방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무소에 수감되기도 했다. 신소설 <혈의 누>(1906)를 썼던 이인직은 매국노 이완용의 비서로 매국활동을 벌인 인물이다. 러일전쟁 때는 일본육군의 통역 노릇을 했고, 한일합병 교섭에 나서기도 한 인물이다. 첫 자유시 <불놀이>(1919)를 발표한 주요한은 황민화 시집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였다. 최초의 현대소설 <무정>(1917)을 써 일제 강점기 내내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었던 춘원 이광수 역시 육당 과 함께 초기 민족주의 활동을 벌이다 변절한 대표적 친일 부역자였다. 유독 친일파가 많은 데가 문단이라는 건 글쟁이들은 자기 합리화와 정당화에 능란한 이들이기 때문이 라는 농담을 나는 단순히 농담으로만 여기지 않는 편이다. 이른바 ‘문약(文弱)’이란 낱말의 함의가 이들 문인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근현대문학의 효시가 된 작품과 작품집. 왼쪽부터 신체시, 신소설, 현대소설, 자유시가 실린 문예지. ▲ 우리 근현대문학을 연 대표적 문인들은 모두 친일 부역자들이었다. <친일문학론>을 사 놓고도 꽤 오랫동안 미적대다 연말께야 겨우 책을 펴고 ‘공부’를 시작했다. 어 쩌면 이 공부가 현직에서의 내 마지막 ‘문학 공부’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친일인명사전>의 기록을 참고해 가며 책을 읽다가 확인한 것은 “그때 태어났다는 것, 그때 살았다 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문열)은 아니라는 것이다. 친일파 연구의 고전 <친일문학론> <친일인명사전> 발간과 관련해 진행되고 있던 친일청산 논의에 대한 작가 이문열의 ‘물타기’에도 불구하고 ‘친일’은 우리 민족사의 오욕이요, 현실이다. 일제의 식민지배 35년이 현실이듯 친일 부 역의 길을 갔던 이들에 대한 역사적 단죄가 비켜간 간 것도 우리 역사의 일부다. <친일인명사전>은 속절없이 흘려보낸 세월 덕분에 ‘단죄’ 대신 선택된 역사적 성찰인 것이다. 고 임종국 선생 필생의 역작으로 불리는 <친일문학론>은 1966년 초판 출판 이래 1977년 중판을 펴낼 때까지 10년도 넘게 ‘판본을 거듭하지 하고 묵혀’지고 있었다. 그것은 ‘친일파가 청산되지 않은 우리 역사 못지않게 경이’로운 일(민족문제연구소장 임헌영의 ‘교주본 발간사’, 이하 인용 부분 같음)이었다. ‘문학만이 아닌 전 분야에 걸친 친일파 연구의 고전’이 된 이 책의 중요성을 ‘친일파 청산의 굳건 한 의지와 그 역사적 의의를 자리매김한 점’이었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문학론>을 다시 펴낸 것은 2002년이었고, 이후 이건제 박사가 2년 가까이 저작물과 원자료를 대조하며 내용에 대한 교정과 주해를 추가한 교주본이 간행된 것은 지난해였다. 496쪽의 부피에 저자의 혼신의 노력이 담긴 초판은 드디어 645쪽의 교주본으로 새롭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컴퓨터는 물론이고 복사기도 없던 시절 저자가 도서관을 전전하며 방대한 사료를 찾아 육필 로 쓴 원저에는 한자와 일어 고유명사 등이 많았다. 이를 한글로 풀고 출처와 인용을 재확인하고, 필 사 과정에서의 오류 등을 바로잡고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한글화 작업을 거치며 드디어 <친일문학론>은 교주본으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한편 <친일인명사전>은 <친일문학론>이 일찍이 제기한 문제의식을 계승하여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부 끄럽고 민망한 시기로 남아 있는 식민지 시기 인사들의 친일의 행적을 객관적 자료로 추적한 책이다. 여러 곡절 끝에 시민들의 도움을 받아 완성된 이 사전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기준에 따라 선정 된 인물들에 대해 ‘구체적인 반민족행위와 해방 이후 주요 행적 등’을 수록하고 있는 것이다. 두 ‘책’을 넘나들면서 게으른 ‘공부’를 하다가 이를 글로 써서 정리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기특한 생각을 했다. 마침맞게 그렇게 정리한 글을 갈무리해 둘 공간(블로그)도 있다. 마음을 먹고 이 글을 쓰기까지 또 좋이 한 달쯤이 걸렸으니 과연 끝낼 수 있을지 어떨지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친일문학론>의 작가 및 작품론에서 다루고 있는 작가는 마지막 부분의 신인 작가론을 빼면 김동인부 터 최정희까지 모두 28명이다. <친일인명사전> ‘문학’ 분야에 이름을 올린 작가는 모두 52명인데 필명 등으로 이름이 겹치는 이들을 빼면 40명이다. 양쪽에 이름이 겹치는 문인이 24명, <친일인명사전>에만 있는 이는 16명이고, <친일문학론>에만 있는 이는 네 명이다. 김사량, 김소운, 이효석, 최남선인데 앞의 세 사람은 사전에 등재되지 않았고, 최남 선은 중추원 분야에 올랐기 때문이다. 이인직도 ‘문학’ 분야가 아니라 ‘유림’에 올랐다. 오욕의 역사에 대한 성찰 <친일인명사전> 작품보다 친일 행적이 두드러져 사전에 오른 이들은 이름도 낯설다. 이들과 함께 문학평론가를 빼면 대략 17명 정도가 비교적 잘 알려진 문인이다. 순서 없이 짚이는 대로 이들이 쓴 친일 문학을 톺아볼 까 한다. 일차적으로 내가 학교에서 배우고 가르친 이들 문인에 대한 정보로 시작하되 두 책의 도움 이 빠질 수 없다. 날짜를 기약하지 않고 쉬엄쉬엄 갈 작정이다. 아직 가 보지 못한 그들 삶과 문학의 갈피갈피를 기웃 거리면서 그 훼절과 배덕에 혀를 차고 고소를 금치 못할 테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문인의 이야기를 마칠 때마다 아이들에게도 그 삶의 진면목을 알려주게 될 것이다. 지난 1월 16일은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 감옥에서 순국한 민족시인 이육사(1904~1944)의 70주기였 다. 그가 숨지고 난 이튿날(1944.1. 17) 춘원 이광수는 ‘축 입영(入營)의 노보리(깃발)’과 센닌바 리를 찬양한 “학병에게 보내는 세기의 감격”이라는 글을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독립과 해방을 위해 몸을 던진 민족시인의 삶과 친일 부역 문인들의 삶은 마치 별개의 경로로 전개되 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기실 이들의 삶과 문학은 동시대에 엇갈리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난 시대 의 역사지만 친일, 부역의 역사와 문학을 공부하는 까닭이 여기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다. 2014. 1. 21. 낮달 □ 부록4-2) ‘춘원과 육당의 문학상 제정? 뜬금없고 생뚱맞다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 2018 2018. 12. 16.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문협의 ‘춘원·육당의 문학상’ 제정 논란에 부쳐 ▲ 반민특위 법정의 육당 최남선 . 그는 1949년 2월에 체포 수감되었다 . 문인들은 여느 사람에 비해 좀 눈치코치가 없는가. 해방 71돌이 코앞이지만 청산하지 못한 일제 식민 지배의 상처와 오욕이 새롭게 환기되는 시기에 한국문인협회(문협)가 육당 최남선(1890~1957)과 춘원 이광수(1892~1950)를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하겠다니 하는 얘기다. 문인협회, 육당과 춘원문학상을 제정하겠다고? 보도에 따르면 문협은 최근 열린 이사회에서 협회 회원을 대상으로 수여하는 ‘육당문학상’과 ‘춘 원문학상’ 제정안을 가결했다고 한다. 또 춘원이 <무정>을 발표한 지 100년이 되는 2017년을 기념해 심포지엄 등 기념행사도 여는 방안을 구상하고 있다. 문효치 이사장의 제안으로 논의가 시작된 이 안건이 ‘별 이견 없이 통과되었다’니 더욱 놀랍다. 회 원이 1만3천여 명인 이 국내 최대의 문학단체에는 우리 역사와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기본 자의식을 갖춘 이도 하나 없는가 싶어서다. 동인문학상(김동인), 미당문학상(서정주), 팔봉문학상(김기진) 등, 일제 때 친일 전력이 있는 문인을 기려 그 이름을 딴 문학상이 없지는 않다. 그러나 한국 현대문학의 서막을 열었고, 이른바 ‘2인 문 단시대’(1910년대)를 이끌어 왔던 이들 두 문인을 기리는 문학상이 지금껏 제정되지 않았던 이유는 굳이 상고해 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일제 말기에 친일부역 행위에 종사한 이들이 적지 않은데도 1949년 2월에 두 사람이 반민족행위특별 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이유도 자명하다. 반민특위는 두 사람 이 지키고 누렸던 한국문단에서의 지위에 걸맞은 책임을 물었던 것이다. 엔간한 성취라도 이룬 문인이 있으면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이 백화제방인 시대인데도 해방 70년이 지나도록 이들을 기리는 사업이 진행되지 않았던 이유도 같다. 그런데 71돌 광복절을 앞두고 뜬금없 이 웬 ‘춘원문학상’이고 ‘육당문학상’이란 말인가. 문협의 이 생뚱맞은 문학상 제정 소식에 민족문제연구소와 역사정의실천연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등 7개 역사·사회단체가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업의 몰역사성을 준열히 꾸짖은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한국문인협회의 최남선·이광수 문학상 제정을 규탄한다.” “최남선과 이광수는 친일 행적만 모아도 전집을 낼 수 있을 정도로 의심의 여지없는 ‘민족의 죄인’” “이는 한국문인협회가 한국문학의 정신사적 기반마저 스스로 부정하는 행위” 문인협회의 해명은 그간 이 나라 보수 우익세력들이 지난 수십 년 간 되풀이해 온 논리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건 여차하면 공과(功過)를 계량해 공의 손이라도 들어줄 기세를 교묘히 감추고 있다. 독립 이후, 독재를 비호하는 논리로 재생산되고 있는 그 논리 말이다. “친일행위와 문학성은 독립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두 문인의 친일 행적 때문에 그동안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그들의 문학작품 은 친일행위 전에 창작된 것”(문효치 이사장) “육당과 춘원이 친일 문제로 공격을 받았지만 친일적 행각과 문학적 성과는 별개로 해야 한다. 이들 의 뛰어난 문학적 성과마저 매도할 수는 없다.”(이광복 부이사장) 이런 사람들이었는데도? 문인협회의 해명에 대한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의 일갈에는 따로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 민족에게 큰 아픔을 준 두 문인의 친일행위는 반민족행위의 상징이기에 이들을 기리는 상을 만든다는 것은 이완용을 기리는 상을 제정하는 것과 똑같다.”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최남선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일제의 역사왜곡과 식민사학 수립에 협력, 만 주국의 건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친일 고위관리를 양성했고, 이광수는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회 장에 취임해 조선 문학을 일제의 선전도구로 만드는 데 앞장서 왔다고 밝혔다. [관련 글 : 이광수, 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려 했건만] / 최남선, 죄과(罪過)는 다섯 가지나 나는 ‘무죄’다] 육당과 춘원의 친일 행적은 굳이 다시 살피지 않는다. ‘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려 했’던 춘 원 이광수[관련 기사]와 동포 청년들에게 ‘성전(聖戰)에 나서 보람 있게 죽자’고 권유했던 육당 최 남선이 '길든 말과 글'로 이룬 친일어록으로 대신한다.(이 자료는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낸 <친일인명사전>에서 인용한 것이다.) □ 부록4-3) 이광수, 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려 했건만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18. 12. 16.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 1946년의 이광수. 해방후 자신의 친일 경위를 담은 <나의 고백>은 변명으로 일관했다. 춘원(1892~1950)을 처음 만난 건 언제쯤이었을까. 기억은 확실치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에 그의 존재 를 알았던 것 같지는 않다. 책읽기를 즐기던 형과 누나들 덕분에 나는 고미가와 준페이(五味川純平) 의 ‘인간의 조건’, 미우라 아야꼬(三浦陵子)의 ‘빙점’ 따위의 일본소설에는 진작 입문했지만, 집 에서 춘원의 소설 작품을 읽었던 기억은 없기 때문이다. 도회로 진학한 중학교 1학년 국어 시간에 그를 만난 것은 확실하다. 교과서에 ‘현대문학사’를 다룬 소단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서 그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소설 ‘무정’을 썼다는 것과 ‘흙’의 주인공이 ‘허숭’이라는 것 등을 배운 기억이 생생하기 때문이다. 늙수그레한 국어 교사는 시골 청년 들이 자전거를 빌려 타고 읍내에 와서 그 날치 <매일신보>를 읽고 돌아갔다는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 < 무정 > 초판본 . 고려대도서관 소장본 그러나 꽤 열심히 독서를 한 편이었지만 나는 중고등학교 때에 그의 소설을 읽지는 않았다. 의도적으 로 회피한 것인지 자연스레 그리 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장편소설 ‘무정’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 에서 ‘한국현대소설론’을 들으면서였다. 과제가 되어버린 ‘독서’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이걸 읽기 위해서 시골 청년들이 수십 리 길을 오 갔다고? 나는 거의 짜내듯 그 ‘재미없는’ 소설을 읽어야 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이미 꿰고 있는데 다 ‘최초’의 현대 소설이다. 이미 반세기가 훌쩍 지났고 그간 끊임없이 발전해 온 소설 미학의 세 례를 받을 만큼 받은 문학도의 눈에 ‘무정’이 찰 리 만무했던 것이다. 고교 시절로 기억하는데 ‘KBS 무대’에서 방영한 그의 중편 ‘무명(無名)’을 시청한 적이 있다. 식 민지 치하 어느 감방 안의 인간 군상을 그린 작품인데 주인공으로 출연한 신구의 소름 끼치는 연기에 나는 넋을 잃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아, 춘원에게도 저런 울림이 있는 작품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 했지만 나는 굳이 원작을 찾아 읽지는 않았다. ‘이광수'에서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춘원의 문학적 업적이야 알려진 대로다. 그는 적어도 육당 최남선과 함께 이른바 ‘2인 문단시대’를 꾸린 1910년대의 주인공이었다. 이런저런 이력 가운데 그의 천재성을 입증할 만한 기록들은 넘친다. ‘최초의 현대소설’로 평가 받는 ‘무정’은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다. 우리 문학이 여전히 '신소설’ 류의 서사에 머물러 있을 때 그는 장편소설 한 편으로 단박에 이 땅의 '현대'를 그려내 보인 것이다. 나는 춘원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지만, 그는 굳이 ‘작가’가 아니어도 ‘충분’했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굳이 그의 문학에 두드러졌던 ‘계몽주의적 성격’을 감안하지 않더라 도 그는 세상을 향해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던 사람 같다. 그는 어쩌면 작가가 아니라 사상가가 되고 싶어 한 이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여기는 까닭이 거기 있다. <친일문학론>은 무려 25쪽에 걸쳐서 ‘이광수론’을 전개한다. 임종국은 춘원의 창씨성명으로 허두를 뗐다. 그는 춘원의 창씨성명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에 대해 ‘향산’은 그가 평북 출신이니 ‘묘향산’에서 따 온 거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의 ‘선씨(選氏) 고심담’ 앞에서 '항복'을 선언 하고 만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진무 천황께옵서 어즉위를 하신 곳이 가시하라(橿原)인데 이곳에 있는 산이 가 구야마(香久山)입니다. 뜻 깊은 이 산 이름을 씨로 삼아 ‘향산’이라고 한 것인데 그 밑에다 ‘광 수’의 ‘광’자를 붙이고 ‘수’자는 내지식의 ‘랑’으로 고치어 ‘향산광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 지도적 제씨(弟氏)의 선씨 고심담(<매일신보> 1940.1.5.) 중에서 그는 다른 글(‘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2.20)에서 창씨와 관련해 자신의 심경을 부연한다. 흔 히 친일 인사들이나 그들을 비호하는 이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일제의 강제나 겁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자발적 순종이되, ‘천황의 신민’으로서의 '황공함'이 묻어나는 술회다. 창씨의 동기 : 내가 향산이라고 씨를 창설하고 광랑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改)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 민족 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 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좀더 천황의 신민다웁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 창씨와 나 (< 매일신보 > (1940. 2. 20)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안창호 등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난 춘원은 이듬 해 정신적 스승인 안창호가 사망하자 충격을 받고 실의에 빠졌다. 결국 병보석 상태에서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을 받던 중 그는 전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하는 등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춘원의 친일행적은 눈부시다 할 만하다. 그는 창씨개명 후 ‘내지인과 차별 없이 되기 위한 노 력’에 전력을 다했다. 그는 ‘황실 중심사상과 그에 관련된 생활방식’을 섭취하고 “우리들의 천황 이 사용하시는 말을 우리 국어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고 ‘혼상례의 일본식화’, ‘의례 준칙의 일본화’, ‘일본적 실내장식의 도화 섭취’, ‘식생활의 일본적 개량’ 등을 권장했다. 모국어로 글을 쓰던 작가 이광수는 그예 조선어를 버리고 일본어를 ‘국어’로 맞아들임으로써 마침 내 황국신민 가야마 미쓰로로 변신했다. 모국어를 통해 그 나라의 문학을 일구어 나가는 작가로서 그 는 자신의 고유한 문학적 정체성을 포기한 것이다. 강제병합 27년, 결국 당대 최고의 작가는 이후, 민족을 등지는 길로 나아갔다. 춘원은 조선문학은 “일본 국민 전체를 독자로 할 것이요, 나아가서는 대동아 전역의 문학이 되기를 기할 것”이라면서 “국문학의 용어가 국어일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분간 조선문의 문학이 존속하 겠지만 그것은 필경은 국어로 번역되어서 국문학에 채택 흡수될 것”이니 문학에 뜻하는 자 국어 공 부를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라고 충고하기도 했다. 그의 ‘국어’는 물론 일본어다. 작가로서 모국어에 대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는지를 의심할 만한 발언이다. 그는 조선어(한글)가 당분간은 쓰이겠지만 필경은 일본문학에 흡수될 것이라고 내다보면서 일본어 습득에 힘을 쏟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세계를 창조하는 작가로서 있을 수 없는 '자기 부정'이다. 작가로서의 ‘자기 부정’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고.”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매일신보> 1940.9.4.~12) 그는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느라 그의 문학을 그 친일의 제단에 바친다. 임종국은 그의 소설 가운데 ‘그들의 사랑’(<신시대>, 1941.1~3)을 가장 문제가 많은 작품으로 꼽는다. 연재가 중단된 미완성의 이 장편은 한 조선 청년이 어떻게 친일파를 변모해 가는가를 굴욕적으로 보여준다. 조선 청년 이원구는 일본인 학자의 집에 기숙하면서 '조선사람의 가정생활이 방만하고 무질서한 것’ 과 '일본이 내 조국인 것'을 깨닫는다. 그는 '광주학생사건이 조선 청년 전체에게 불행을 준' 것이라 주장하면서 '그런 잘못된 감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임종국은 이 작품에 드러난 이원구의 사상은 ‘사대주의’와 ‘자기모멸’에서 유래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 학병 보내는 세기의 감격 . < 매일신보 >(1944.1.17.) 문학으로 이어지는 그의 친일행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징병제에 대한 찬양이다. '병역'을 치러야 '옹근 국민'이 된다며 '징병'이 고맙다고 말하는 그에게는 이제 '충용한 황국신민'의 결기만 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 동안 조선사람 남자들은 병정이 못 되었으니 반편 국민 노릇을 한 셈이었습니다. 내후년부터야 옹근 국민이 되는 것입니다.”-‘징병과 여성’(<신시대>, 1942. 6) “한번 병역의 의무를 치르고 남으로 완전한 국민이 된다. 병역을 안 치른 국민은 반편이다. 그러므 로 징병이 고맙다는 것이다.”- ‘앞으로 2년’(<신시대>, 1942. 9) “황국신민적 충의의 정신, 청황의 신민이며 일본은 우리의 조국이다. 우리는 생명으로써 이 조국을 지킬 것이라는 신념”- ‘병역과 국어와 조선인’(<신시대> 1945. 5) 1943년 11월에 최남선·김연수 등과 함께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지원병을 권유하는 ‘선배격려대원’ 으로 연설했다. 이 행사에 관련한 최남선과의 대담에서 춘원은 메이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특별지원병 궐기대회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런 장면은, 일찍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오. 우리들의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는 참으로 내선일체가 실현된 것 같은 장면이었지요. 조선 학생들이 의견을 말하면 내지 학생들이 그것을 뒷받침하는 말을 하며, ‘하나가 되자’라는 그런 생각으로 가득했지요.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모두가 울고 있더군요.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 - <조선화보> (1944. 1) 신념화한 ‘대동아공영권론’ “자,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이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 대아세아 건설을 완수시키자 이럼으로써 비로소 /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듦이 되리라 //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 - 시 ‘모든 것을 바치리’(<매일신보> 1945. 1. 18) “끌려가는 일본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구경하는 국민이어서는 아니 된다. 자발적, 적극적으로 내 지 창조적으로 저마다 신체의 어느 부분을 바늘 끝으로 찔러도 일본의 피가 흐르는 일본인이 되지 아 니하여서는 아니 된다.”- ‘황민화와 조선문학’(<매일신보>1940.7.6) 일제의 강제나 겁박에 따른 소극적 행위가 아니다. 이미 그는 1940년 전후의 일본의 동양체제론, 내 선일체론, 대동아공영권론 등을 받아들인 이후 마침내 일본 천황 중심의 대동아공영권론을 신념화하 기에 이른 것이다.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총을 메고 전장으로 나가고 어여쁜 우리 딸들은 몸뻬를 입고 공장으로 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오늘이 아닌가. 천년화평 도의세계를 세우랍신 / 우리 임금님의 명을 받자와 ‘예’ ‘예’ 하고 집에서 뛰어나오는 무리 이날 설날에 반도 삼천리도 기쁨의 일장기 바다. 무한한 영광과 희망의 위대한 새해여.”- ‘새해’(<매일신보> 1944.1.1) 곳곳에 등장하는 ‘우리 임금님’이 누군가. 그는 마음으로 천황폐하를 위해 이 한 몸을 초개같이 바 치자고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춘원은 전시 동원체제에 부응하여 1943년부터 실시한 학병제에 적극 동조,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일왕의 총알받이로 지원할 것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이 성전의 용사로 / 부름 받은 그대 ― 조선의 학도여 지원하였는가, 하였는가 / ― 특별지원병을 ― 그래, 무엇으로 주저하는가 / 부모 때문인가 충 없는 효 어디 서리, / 나라 없이 부모 어디 있으리 […중략… ]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 삼천만 동향인의 앞잡이 되라 총후의 국민의 큰 기탁(寄託)과 / 누이들의 만인침(萬人針)을 받아 띠고 가라” - ‘조선의 학도여’(<매일신보> 1943.11.5.) 중에서 이미 반세기도 전의 과거사라고 하더라도 이게 조선의 으뜸 작가, 만인의 연인으로 불리었던 춘원 이 광수의 행적이라는 걸 확인하는 건 여간 끔찍한 일이 아니다. 그는 온몸으로 황민화와 내선일체, 국 어와 국민문학을 주장하고 그 선두에서 부역을 이어갔지만 역사의 진전, 일본의 패망 앞에선 무력했다. ▲ 경기 남양주 봉선사 ( 奉先寺 ) 에 있는 춘원 이광수기념비 변명으로 일관한 <나의 고백> 그는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버려야 한다’는 신념을 가졌지만 그는 결코 일본인이 될 수는 없었다. 1945년 그의 '천황폐하'가 무조건 항복했을 때 그는 해방 조국의 민족반역자로 역사 앞 에 서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 끝까지 변명으로 일관했다. 1948년 12월 자신의 친일행적에 대한 경위와 그 역사철학적 맥락을 밝힌 <나의 고백>에서 그는 민족 의식이 싹트던 때부터 일제 말기까지 자기의 행위를 민족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일 제 말기의 친일행위 역시 ‘애국자로서의 명예를 희생하더라도 민족보존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고 육지책’이었다고 강변했다. 1949년 2월 7일 그는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차 심문 후 그는 친일에 대 한 고백서를 썼지만, 여전히 <나의 고백>에서와 같은 변명으로 일관했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뒤 특검 에 송치되었으나 그해 8월 불기소 처분되었다. 춘원은 1950년 7월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어 그해 10월 25일 폐결핵이 악화되어 사망했다. 향년 58세. 60년도 살지 못하면서도 그가 민족을 등지고 친일 부역의 길을 걸은 것은 무엇을 위해서 였을까. 그의 말대로 그게 ‘민족’을 위해서였을까. 민족과 민족어를 부정했던 작가의 선택에 대해 서 이미 역사는 무언으로 응답한 듯하다. 2014. 1. 26. 낮달 전망(展望) (이광수 / <녹기> 1943.1) 그것 필시 멋진 일임에 틀림 없도다 이 지구가 일찌기 본 적이 없는 멋진 세계임에 틀림없도다 우리들이 지금 쌓아올리고 있는 대동아는 보게나, 저 아름답고 풍만한 남방을 저 흑독한 추위와 더위의 북방 광야를 그리고, 그 사이에 펼쳐지는 온화하고 변화무쌍한 우리의 온대를 저 남반구의 여왕 오스트레일리아도 그 곁에서 쉬어나갈 수 있는 뉴우질렌드도 거기에 뒤지지 않는 아름다운 하와이도 그것은 모두 아시아 대륙의 자녀들어다 한편으론 아시아 대륙을 정복하며 한편으론 태평양의 섬들을 보호 육성하며 우리의 일본은 군림한다 신의 나라, 천황의 나라, 부유한 나라, 아름다움과 사랑의 나라 아시아에 봄이 다하는 날 없고 여름의 무성, 가을의 결실은 항상 있도다 구슬 같은 쌀이 열리는 토지, 금이랑 석유가 샘솟는 토지 아시아에 부족한 것이 있으랴 ----- 아니, 없도다 그 백성 10억, 아름다운 자태에다 현명함을 겸비했도다 강하기로 치면 쇠와 같고 부드럽기로는 금과 같도다 자비를 사랑하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이기를 벗어나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는 덕업을 쌓는도다 천만 년 이어질 천황폐하 여기에 계시도다 충효가 한데 어우러진 백성과 이 땅에 영광 있으리라 장차 인류 구제의 근원지는 이 땅 이 땅, 이 백성으로 이루어내리라 새로운 세계 --- 황도(皇道)의 대동아를 그 안락, 희열, 아름다움 그 찬란한 빛 --- 그것은 필시 멋진 일임이 틀림없도다 조선의 학도여 (이광수 / <매일신보> 1943.11.5) 그대는 벌써 지원하는가 --- 특별지원병을 내일지원하려는가 --- 특별지원병을 공부야 언제나 못 하리 다른 일이야 이따가도 하지만은 전쟁은 당장이로세 만사는 승리를 얻은 다음날 일 승패의 결정은 지금으로부터 시각이 바쁜지라 학교도 쉬네 한 사람도 아쉬운지라 그대도 부르시네 1억이 모조리 전투배치에 서랍시는 오늘 그대는 벌써 뜻이 정하였으리, --- 나가리이다, 나가 싸우리이다 --- 싸워서 이기리이다 --- 미영을 격멸하고 돌아오리이다 조국의 흥망이 달린 이 결전 민족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루판 단판일세, 다시 해볼 수 없는 끝판 그대가 나가서 막을 마루판 싸움 아시아 10억 --- 칠흑 같은 머리 흙보석 같은 눈 황금색 살빛 자비와 인과 맑은 마음과 충과 효와 정열과 예의와 겸손과 근면과 화평과, 이러한 정신, 이러한 문화, 온유하고 순후한 10억의 운명이 달린 결전 거룩한 우리 향토 아시아의 성역을 짓밟아 더럽히던 적을 쫓으라 --- 하옵신 결전 이 사정 저 형편 궁리하리, 제만사 제잡담하고 나서라 조선의 학도여 그대들의 나섬은 그대들의 충의 가문의 영예 삼천만 조선인의 생광이오 생로, 일억 국민의 기쁨과 감사 남아 한번 세상 나, 이런 호기 또 있던가, 일생일사는 저마다 다 있는 것, 위국충절은 그대만의 행운 가라 조선의 6천 학도여, 삼천만 동향인의 앞잡이 되라, 총후의 국민의 큰 기탁과 누이들의 만인침을 받아 띠고 가라. 새 해 (이광수 / <매일신보> 1944.1.1) 새해가 왔네. 지구가 처음 보는 위대한 새해, 탐욕의 지옥인 구세계가 무너지고,인의와 예의 새 세계의 터를 닦는 새땅. 태평양의 물결에 잔잔함이 돌아오고, 아세아의 천지에 부흥의 만세소리가 우렁차게 일어날 새해. 기뻐라. 나는 이 새해를 보았어라, 개벽 이래에 처음 오는 위대한 새해를 노래하는 나의 행운이여. 그러나 1 억의 동포여 이 해 새해는 또 땀을 많이 흘려야 할 해. 농부는 논밭을 갈기에, 가꾸기에, 일구기에, 광부는 땅 속에서 파기에, 깨뜨리기에, 져내기에. 공부(工枇)는 공장에서 갈기에, 두들기기에, 어부는 바다에서 그물치기에, 낚기에, 끌기에, 남, 녀,노, 소, 일억일심 (一億一心), 쉬일 새 없이홀리는 땀이 일본의 국토를 흠씬 적실 때에 ---------오직 그대에만야. 영광의 승리는 오는 것이다. 이를 일러 1억 전투배치, 전력증강.빛나는 새해 위대한 새해. 씩씩한 우리 아들들은 총을 메고 전장으로 나가고 어여쁜 우리 딸들은 몸빼를 입고 공장으로 농장으로 나서네. 말 모르는 마소까지도 나라 일 위해 나서는 오늘이 아닌가. 천년화평 도의세계를 세우랍신 우리 임금님의 명을 받자와 [예], [예] 하고 집에서 뛰어나오는 무리 이날 설날에 반도삼천리도 기쁨의 일장기바다. 무한한 영광과 희망의 위대한 새해여. 선전대조(宣珽大詔) (이광수 / <매일신보> 1942.1) '미국과 영국을 쳐라' 하옵신 대조(大詔)를 내리시다 십이월 팔일 해뜰 때 빛나는 소화 육십 년 하와이 진주만에 적악(積惡)을 때리는 황군의 첫 벽력 웨스트 비지니와 오클라호마 태평양 미함대 부서지다 이어서 치는 남양의 해공육 프린스 업 웨일즈 영함대기함 앵글의 죄악과 운명을 안고 구안탄 바다 깊이 스러져버리다 아시아의 성역은 원래 천손민족이 번영할 기업 앵글의 발에 더럽힌 지 2 백 년 우리 임금 이제 광복을 선(宣)하시다 내 모든 것을 듸림 (이광수 / <매일신보> 1945.1.17) 황은지극(皇恩至極)하옵시니 피로써 나라를 지키라고 말씀하옵신 지 얼마 안되어 이제 또 정치력으로 황철(皇澈)을 익찬(翼贊)하여 받들라고 하옵신다. 조선의 아들들이 총을 들고 전선에서 싸우는 것과 같이 충성스런 경륜을 안고 의정단상(議政壇上)에 나서리. 병역의 엄숙한 의무이며 존귀한 황민(皇民)의 특권이었듯이 국정 참여는 공민(公民)의 특권인 동시에 극히 엄숙한 의무이니라. 황국은 앞서 삼천만의 폐하의 고굉을 더하였음과 같이 황국은 이제 또 삼천만의 보필(輔弼)의 신(臣)을 더하였다. 일억일체(一億一體)로 황국을 지키사 일억일체로 황모(皇謨)를 익찬하자. 이제 피(被)와 차(此)가 없다. 오직 하나니라. 자,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더 큰 싸움을 이기게 하자. 우리들이 있음으로써 대아시아 건설을 완수시키자. 이러므로써 비로소 큰 은혜에 보답하여 받들음이 되리라 아아, 조선의 동포들아, 우리 모든 물건을 바치자 우리 모든 땀을 바치자 우리 모든 피를 바치자 우리 충성에 불타는 머릿속을, 심장을, 바치자. 동포야 우리들, 무엇을 아끼랴 내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말지어다. 내 생명 그것조차 바쳐 올리자 우리 임금님께, 우리 임금님께 * 이 시는 1945년 1월 17일에 열린 처우감사 총궐기 전 조선대회에서 결의표명을 대신하여 낭독한 시 이다. 여기에서 처우감사는 일제의 제국의회(국회)에 조선인을 대표한 귀족의원, 중의원을 내보낼 수 있게 해 준 데 대한 감사인데, 이 시에서는 그것이 '국정참여'로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참 정권'은 허울 뿐으로 사실은 우리나라를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키면서 독립의 의지를 말살하고 징병 등 온갖 것을 쥐어짜기 위한 계략이었다. □ 부록4-4) 독립선언서 집필자가 일본에 붙은 역적 되다니 [김종성의 히스토리]친일파의 재산 – 최남선 / 민족·국제김종성(qqqkim2000) / 닭털주 2023.4.30. ▲ 육당 최남선 ⓒ 위키미디어 공용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 것이 무어냐 요게 무어야"로 시작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육당 최남선이 만 18세 때인 1908년 11 월 <소년> 창간호에 권두시로 실은 작품이다. 이 시를 쓴 최남선은 11년 뒤인 1919년에는 3·1 독립선언서 집필도 맡았다. 29세 때인 이 당시의 활 약은 일제 재판 기록에도 묘사돼 있다. 1972년에 원호처(국가보훈처)가 발간한 <독립운동사 자료집> 제5권에 담긴 재판 기록은 "각 서면의 기초는 최남선이 이를 담당"했다고 말한다. 민족대표 33인 명 의로 발표될 독립선언서·의견서·청원서 등의 집필을 그가 맡았다는 것이다.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 제4-17권은 "1920년 대 들어와 최남선은 <심춘순례><백두산 근참기> 등을 집필하면서 조선의 역사와 지리 연구를 지속적 으로 진행했으며, 아울러 단군 연구에 많은 성과를 낳았다"고 한 뒤 "그러나 그는 1928년부터 조선사 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고 설명한다.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사를 재편성하는 조선사편수회였다. 거기에 들어간 것은 역사상 최악의 착취 시스템인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역사 왜곡에 가담하는 일이었 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친일 인생으로 평가됐다. 1890년 4월 26일 한성부에서 출생한 최남선은 12세 때인 1902년 경성학당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웠다. 대일본해외교육회가 1896년 설립한 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그 뒤로도 그와 일본의 학연은 계속 이 어졌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 최남선 편은 이렇게 서술한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했다. 같은 해 11월 도쿄부립 다이이 치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2월에 그만두었다. 1906년 3월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나 4월에 와세다대학 고 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했다." 학교를 번번이 그만둔 것은 집필과 출판에 대한 욕구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와세다대학 재학 중에도 대한유학생회 회보의 편집을 맡았다.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한 뒤인 1907년 5월에는 신문관(新文館)이라는 출판사를 설립했다. 이듬해에는 잡지 <소년>을 창간했다. 국권 침탈 직후인 1910년 10월에는 조선광문회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독립선언서 작성으로 인해 2년 8개월간 복역하고 나온 뒤인 1922년에는 동명사라는 출판사를 세웠다. 이듬해에는 일간지 <시대일보>의 인가를 받아 사장 겸 주간으로 활동했다. 새로운 출판사를 거듭 세 운 것은 경영이 잘되지 않았으나 남의 눈치 안 보고 글을 발표하는 것에 대한 집념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 필요한 자금과 편의 얻고자 친일로 돌아서 이런 가운데 역사학 연구에서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37세 때인 1927년에 발표한 '불함문화론'이 그 중 하나다. 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실린 박성수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학중앙연구 원) 교수의 기고문 '최남선: 반민특위 법정에 선 독립선언문 기초자'는 이 논문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일인 학자들의 단군 말살론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며 "이로 인해 조선인의 반일 여론이 비등"했다 고 평했다. 이렇게 일제에 맞서 단군을 지키고자 했던 그가 바로 이듬해에 조선사편수회로 들어갔다. 이로 인해 그가 어떤 시선을 받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불함문화론'을 저술한 해에 상하이에서 체포돼 징역 14년형을 받고 투옥 중이던 독립운동가 겸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이 감옥에서 그를 향해 개탄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박성수 기고문에 따르면, 일본인 간수가 수감 중인 김창숙에게 최남선의 <일선동조론>을 읽어보라고 건넸다. 김창숙은 "도시 이런 흉서가 있는가!"라고 개탄하며 책을 비틀어 던져버렸다. 꼿꼿한 선비의 전형으로 칭송되는 김창숙은 "기미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던가"라며 "이런 자가 도리어 일본에 붙은 역적이 되다니 만번 죽어도 그 지은 죄는 남을 것이다"라고 개탄했다. 최남선도 조선사편수회에 들어간 것이 자신의 약점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만번 죽어도 그 지은 죄가 남을 것"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게 1949년 2월 7일 국회 반민특위에 체 포돼 수감된 뒤에 집필한 '자열서(自列書)'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욕을 먹게 된 계기가 "조선사 편수위원의 수임(受任)에 있다"라며 이렇게 서술했다. "무슨 까닭에 이러한 방향 전환을 하였는가. 이에 대하여는 일생의 목적으로 정한 학연(學硏) 사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고 그 봉록과 그리로 서 있는 학구상 편익을 필요로 하였었다는 이 외의 다른 말을 하고 싶지 않다." 공부하고 글 쓰고 출판하는 일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탓에 고정 수입과 학문적 편의가 필요해서 조선사편수위원이 됐다고 말한 것이다. 학교를 번번이 그만두면서도 집필을 계속한 사실, 출판사를 연이어 세우면서 자기 글을 계속 발표한 이력을 감안하면, 집필과 출판에 필요한 자금과 편의를 얻고자 친일로 돌아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조보다 학문이 더 좋다고 말했다. "지조냐 학서(學書)냐의 양자 중 그 일(一)을 골라잡아야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고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라고 술회했다. 학자 겸 출판업 자의 길을 유지하기 위해 지조를 버렸다는 진술은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애당초 독립운 동에 큰 뜻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독립선언서 같은 중대 문건을 작성할 기회가 주어 졌기 때문에 다소의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그렇게 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친일로 학자의 지위와 경제적 이익도 얻어 최남선은 학자의 길을 걷고자 친일파가 됐다고 말했지만, 그는 학자와는 어울리지 않는 길을 서슴없 이 걸었다. 위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보고서>는 "1940년 항일무장투쟁세력에 대한 투항 권유를 주요 임무로 했던 동남지구특별공작후원회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약 21개월 동안 조선총독부 중 추원 참의(주임관 대우)를 지냈다", "학병 지원을 선전·선동하는 기고 활동을 했다"라고 열거한다. 그는 한국 학생들을 전쟁터로 내몰았을 뿐 아니라 중추원 참의가 되어 총독부에 자문도 제공하고, 만 주 지역 독립군에 대한 투항 권유 활동에도 가세했다. 흥아보국단·조선임전보국단 등에 참여해 침략 전쟁을 지원한 것들을 포함해 그의 친일 행위는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었다.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도 글을 기고해 일본의 선전전에 가담했다. 1938년부터 5년간은 일본 괴뢰국인 만주국의 국립대학 교수로도 활동했다. 만주 건국대학 교수가 되어 일본 이념을 전파하는 데도 앞장섰다. 학자의 지위를 유지하고자 그렇게 했다고 변명했지만, 친일이 그에게 그런 이익만 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경제적 이익도 함께 제공했다. 그가 중추원 참의 재직 중에 벌어들인 월수입은 100원이다. 1938년에 서울 편창제사방직주식회사 노동자는 식사 제공에 월 3원 내지 7원을 받았다. 그는 건국대 학 교수가 된 뒤에는 훨씬 더 많은 수입을 벌었다. 한국 친일파 연구의 기초를 닦은 임종국의 <친일문학론>에 이런 대목이 있다. "중추원 참의를 그만두 고 만주국 건국대학으로 간 최남선은 '최남선의 보수'(<삼천리> 1939.1)에 의하면 '학교에서 교수로 서 매월 800원 그리고 서울 매일신보사에 집필 원고로 하여 매일 8원씩 합계 240원을 받아 합하여 1040원'이었다는데, 이밖에 '최근에 만선일보에 취임하였으므로 거기서도 보수를 받기로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니 연수입 약 1만 5천원 내외." 서울의 공장 노동자 월급을 감안하면 그가 친일의 대가로 얻은 수입은 일반인들이 괴리감을 느낄 만 한 것이었다. 일제가 그만한 사례를 한 것은 그의 글들이 한국인들의 정신을 무장 해제시키고 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라는 시구처럼 그의 글은 식민지 한국인들의 정신과 마음을 철썩 철썩 때리고 부수는 데에 활용됐다. 그래서 그만한 봉록과 편의가 친일파 최남선 에게 제공된 것이다. □ 부록4-5) 최남선, 죄과(罪過)는 다섯 가지나 나는 ‘무죄’다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19. 12. 29. 참회의 ‘자열서’에서조차 무죄를 주장한 ‘해에게서 소년에게’의 시인 ▲ 육당 최남선 (1890~1957) 우리는 신체시(新體詩) 「해에게서 소년에게」(1908)의 작자로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을 만난다. 최초의 신체시로 평가되는 이 노래는 근대 자유시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가 있을 뿐, 정제된 형식을 갖추거나 일정한 장르적 특성을 지닌 시편으로는 볼 수 없다. 이 작품은 그가 창간한 잡지 『소년(少年)』 창간호(1908년 11월호)에 실렸는데, 이때 그는 열여덟 살이었다. 요즘 같으면 고등학교 졸업반일 나이에 잡지를 창간하였다는 게 놀랄 만한 일이지만, 그것 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학으로 한글을 깨쳐 열한 살 때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하던 육당의 비범성과 함께 근대로 이행하던 ‘시대’의 소산으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하다. 「해에게서 소년에게」와 『불함문화론』의 작가 육당 최남선은 1902년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 본으로 유학하였다. 1906년,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회학보』 편찬원을 맡아 편집인 으로 활동하였다. 그해 겨울에 귀국하여 1907년 인쇄시설을 갖춘 출판사 신문관(新文館)을 설립하였다. 1908년 11월 1일 춘원 이광수와 함께 최초의 근대 종합잡지인 『소년』을 창간하였는데, 지금 우리는 이날을 ‘잡지의 날’로 정해 기리고 있다. 1909년에는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를 결성하였다. 이듬해 10월 민족문화를 보호하기 위해 조선광문회(朝鮮光文會)를 설립하여 조선 고서(古書)를 국문 으로 번역·발간하였고, 10여 종의 육전소설(六錢小說)을 펴냈다. 이때 육당은 조선어사전 편찬 계획 을 구상하였다고 하니, 어문과 역사에 대한 만만찮은 자질을 이미 드러낸 셈이었다. 한일병합 후에도 그는 『붉은 저고리』(1912), 『아이들 보이』(1913), 『새별』(1913)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발행하였으나, 조선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 폐간되었다. 1914년에도 종 합계몽잡지 『청춘』을 발간하여 새로운 지식을 보급하고 민중을 계몽하고자 하였지만, 이 역시 1918 년에 강제 폐간되었다. ▲ 육당 최남선이 간행한 잡지들. 근대 종합잡지인 <소년>(1908)과 종합계몽잡지 <청춘>(1914) 육당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의 주역으로 「독립선언서」를 기초하고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한 뒤 1921년 10월에 가출옥하였다. 일제가 밝힌 가출옥 사유는 ‘(최남선이) 청년들을 규합하는 데 대단히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총독부에서 청년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을 취하려 한 것이다. 총독부는 또 조선은행 총재 미노베 슌키치(美濃部俊吉)에게 잡지 『동명(東明)』의 발행 자금을 지원 하도록 주선하였는데, 그 이유도 가출옥 사유와 맥을 잇는다. 총독부는 최남선의 출판물을 통해 “조 선의 사상계의 악화를 구하고, 또 진학문·이광수 등의 생계비 출처로 삼게 하도록” 하기 위해서라 고 밝혔다. 최남선은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세우고 9월에 주간지 『동명』을 창간하여 1923년 6월까지 발행하 였다. 1923년 일간지 발간을 인가받고, 이듬해 3월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사장 겸 주간으로 활동 하였다.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6년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국토 순례기인 『심춘순례(尋春巡禮)』, 근대 최초의 창작시조집 『백 팔번뇌』를 출간하였다. 1927년에는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으로 보고 민족정신을 강조한 기행 수필 『백두산 근참기』를 출간하고, 동북아시아 문화권 속에서 한국 문화를 고찰한 논문 『불함문화론(不 咸文化論)』을 발표하였다. 『불함문화론』에서 그는 동방 문화의 근원지를 단군신화의 무대인 백두 산이라고 주장하였다.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식민사학에 참여 최남선은 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거쳐 12월부터 조선사 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조선사편수회는 1925년 6월 조선총독부가 산하의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조선 사료의 수집, 편찬 및 조선 사의 편수를 담당”하도록 확대 개편한 기관으로, 이후 ‘조선사’ 편찬 등을 통해 식민사학을 집대성하였다. 조선사편수회 위원은 조선 총독 이 ‘조선 역사에 학식과 경험이 있는 내선(內鮮)의 인재’를 선정하고 일본 내각에서 임명하였는데, 이로써 이들에게 ‘조선사’의 내용에 책임을 지는 지위를 부여한 것이다.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에 가담한 일을 주변에서 최남선이 일제의 식민 지배에 협력하는 변절의 단초 로 판단했던 듯하다. 이 일로 그는 이광수와 절교해야 했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그에게 결별을 선 언하였다. 한용운은 육당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기도 하였다. 뒷날 김창숙 선생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하고 있을 때다. 교도소장이 최남선의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 을 주면서 감상문을 쓰라고 하자, 선생은 첫 몇 장을 읽더니 교도소장에게 책을 던지며 의연히 외쳤다. “나는 반역자가 미친 소리로 요란하게 짖어대는 흉서(凶書)를 읽고 싶지 않다. 기미년 독립선언서가 (최)남선의 손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이런 사람이 도리어 일본에 붙어 역적이 되었으니 비록 만 번 죽여도 죄가 남는다.” ▲ 만주에서 1937년에 창간한 친일신문 <만선일보> 1935년 무렵부터 최남선은 한국과 일본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 을 주장하면서 일본 신도(神 道)의 보급에 관여하였다. 그가 시도한 개량적 문화주의운동인 문화동원론은, 일찍이 1920년대에 한 국 문화의 우월성을 주장한 불함문화론에서 일본 문화 우월론으로 넘어가는 1940년대 시기에 과도기 적 지위를 갖는다. 그것은 태생에서부터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논리였던 것이다. 1936년 6월 최남선은 조선 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 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매일신보》에 연재한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2 월 9~11일)를 통해 조선 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매일신보사 주최의 ‘북지사변 비상시국좌담회’와 경성일보사 주최 의 ‘시국과 조선’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시국의 인식을 철저히 할 것은 물론이며 총후봉공에 극진 노력하여 출동 군인의 가족 부조 보호에 유 감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국론을 절대 지지하여 대세에 순응하는 동시에 국제 스파이와 유언비어에 미혹하지 말고 비상시국에 철저하여 분진하는 것이 가장 간절한 일이다. - 경성방송국의 시국 강연 중에서 1938년부터 1941년까지 《만몽일보(滿蒙日報)》와 《만선일보(滿鮮日報)》 편집 고문을 맡았다. 1938 년 4월 만주 건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1943년 2월까지 만몽 문화를 강의하였다. 만주국 국무원 직할 의 건국 대학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실현하기 위한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수도 신징(新京)에 세워진 대학이었다. ‘문화동원론’에서 ‘일선동조론’까지 ▲ 김동환이 서울에서 발행한 취미/시사 중심의 월간 종합 잡지 「최남선의 보수」(『삼천리』 1939년 1월호)에 의하면, 그는 “학교에서 교수로서 매월 800원, 그리 고 서울 매일신보사에 집필 원고료를 매일 8원씩 합계 240원을 받아 합하여 1040원”의 수입이 있었 고, 이 밖에 “최근에 《만선일보》에 취임하였으므로 거기서도 보수를 받기로 되었다”고 전한다. 간단히 계산해도 연 수입이 약 1만5천 원에 이르는데, 이는 당시 군수 연봉(1050~3400원)에 비기면 엄청난 고액이었다. 1940년부터 최남선은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원하는 기관과 단체의 간부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일제에 협력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관동군의 토벌 작전과 선무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동남지구 특별공작후원회의 고문직을 맡았다. 1941년 8월에 황국정신의 앙양, 강력한 실천력의 발휘, 시국 인식의 철저와 그 대책 결의, 근로 보국 의 실행 등을 목적으로 하는 흥아보국단(興亞保國團)의 준비위원을 맡았고, 같은 해 9월 전시 최대의 민간 협력 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관련 글 : 국민총력전을 위한 친일 단체 ‘조선임전보국단’ 결성]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3년 11월에는 일본에 유학 중인 조선인 학생들의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학도병 일본 권설대(勸說隊)로 활동하였다. 동포 청년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종용한 것이다. 일본 메이 지대학 강당에서 열린 ‘반도 출신 출정 학도 궐기대회’(11월 24일)에서 그는 “미영(米英) 격멸의 용사로서 황군이 된 참 성심을 발휘하는 가운데 잘 싸워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라며 학병 지원을 권 유하는 연설을 하였다. 이 강연에는 춘원 이광수도 동행하였다.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는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최남선과 이광수의 대담 내용이 실려 있다. 이 대담에서 그들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좀 낯 뜨겁다. 춘원 :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 났더군요.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 육당 :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 육당 : 어떤 학자는 ‘(일본)무사도의 연원은 신라의 화랑이 그 토대였다’라는 것을 생각할 정도지요. 춘원: 저 ‘화랑’의 사상이란 오늘날 막바로 부활시켜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 1943년 학병 권유 연설 후 대담(왼쪽부터 육당, 춘원, 마해송) 최남선은 만주사변(1931) 이후 일제의 만주 침략과 만주국 건국을 지지하는 여러 편의 글을 언론에 기고하였다. 1937년 11월호 『재만 조선인 통신』에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라는 글을 기고해 조선 인이 일제의 만주 침략을 지지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만주국 관립 건국대학을 선전하면서 비슷한 주 장을 되풀이하였다. 또한 그는 만주국 건국 12주년을 맞아 『방송지우』 1944년 4월호에 기고한 「신세계 건설의 도화 선」에서 만주국 건설에 대하여 “세계의 질서를 바꾸려 하는 일”이며 “동방의 맹주요, 신세계의 지도자인 일본 제국의 용기와 총명과 정의”로 이루어졌다고 찬양하였다. 그는 만주 침략은 “‘도의 (道義)’를 위한 것”이요, 만주국 건국은 “일제에 의한 ‘낙토 건설’”이라고도 극찬하였다. 나라를 위하여 일신을 바칠 큰 뜻이 있고 나라를 위하여 어떠한 곤고(困苦), 결핍이나 어떠한 근로라 도 사양하지 않을 결심이 있으며…… 오인(吾人)은 오국(吾國)을 구성하는 각 민족 중에 이러한 청년 이 많기를 바라고 기도한다. - 「건국대학과 조선 청년」, 『삼천리』(1938년 10월호) 대동아공영권 지지, 전쟁 참여와 학병 지원 독려 최남선은 중일전쟁 시기에 일제의 중국 침략과 ‘대동아공영권’을 지지하고, 조선인의 전쟁 참여와 학병 지원을 독려하는 글을 썼다. 그는 《매일신보》에 기고한 「내일의 신광명(新光明) 약속」(1937 년 8월 15일 자)에서 “일본의 존재와 발흥은 아시아의 기운이요 동방의 빛”이 라며 중일전쟁이 “일본을 맹주로 하여 일대 대동단결을 만들어서 백색 인종에 대하여 우리 동방의 역사와 생활과 영 광을 확보할 좋은 기회”라고 주장하였다. 「학도여 성전(聖戰)에 나서라–보람 있게 죽자」(《매일신보》 1943년 11월 5일 자)에서는 “오늘날 대동아인으로서 이 성전에 참가함은 대운(大運) 중에 대운임이 다시 의심 없다. 어떻게든지 참가하고 야 마는 최고 명령을 받고 있다”라며 “원광법사의 임전무퇴의 사자(四字)까지를 진두(陣頭)의 청년 학도에게 선물하고 싶다” 고 썼다. ▲ 「 내일의 신광명 약속 」, 《매일신보》 (1937년 8월 15일 자 ) 그는 《매일신보》에 발표한 「나가자 청년학도야」(1943년 11월 20일 자)에서 “(대동아전쟁의) 세 기적 성업에 이바지하게 됨은 실로 남자로서 태어난 보람이 있는 감격”이라며, “청년학도들은 두 어깨에 짊어진 특별한 의무와 책임”을 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대동아의 전장에 그 특별지원병 으로서의 용맹한 출전”을 해서 “일본 국민으로서의 충성과 조선 남아의 의기를 바로 하여 부여된 광영의 이 기회에 분발 용약(勇躍)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출전”할 것을 독려하였다. 그는 해방되던 해인 1945년에도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에 보답합시다」(『방송지우』 1945년 1월 호)를 통해 “대동아의 전쟁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치는 싸움”이라며 “조선 동포도 대동아 민 중으로서 세기의 거룩한 사업에 참가하여 일본 국민으로서 그 추진력의 일부를 만들고 있”다며 특공 대 정신을 거론하기까지 하였다. 육당 최남선이 조선 문화의 일본화야말로 ‘조선 문화의 당면 과제’라고 사자후를 뿜어댔지만, 일본 은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결코 오지 못할 것 같던 해방이 왔다. 그는 우이동에 은거하면서 외부 출입 을 삼가고 역사 논문 집필에 전념하였다. ▲ 「나가자 청년학도야」, 《매일신보》(1943년 11월 20일 자) 참회의 ‘자열서’에서조차 무죄 주장 최남선은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가 친일파로 변절하였다’는 것 때문에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비난을 받았다. 그가 반민족행위자 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수감된 것은 1949년 2월이었다. 수감 중 그는 자신은 “민족을 위해서, 연구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 협력하였다”고 항변하였으며, 특 별재판부에 참회의 뜻을 담은 ‘자열서(自列書)’*를 제출하였다. * 예전에 자기가 저지른 죄과를 스스로 인정하고 그 사실을 적어 임금에게 내던 것을 ‘자열소(自列 疏)’라 고 하였는데, 그러한 성격의 글이라는 뜻으로 쓴 듯함. 최남선은 자열서에서 자신의 죄과를 첫째, 조선총독부의 한국사 왜곡 기관인 조선사편수회 편수위원 이 된 사실(1928년), 둘째,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가 된 사실(1938년), 셋째, 만주 괴뢰국의 건국 대학 교수가 된 사실(1939년), 넷째, 일제 말기에 학병 권유 연사로 활동한 사실(1943년), 다섯째, 악명 높은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부르짖은 사실 등으로 시인하였다. 그러나 그의 참회는 거기까지였 다. 자신이 제시한 다섯 가지 죄과 조목에 대한 최남선의 다음 진술은 곧 무죄의 주장이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일평생 일조로(一條路)를 일심으로 매진한 것을 자신하는 자이다. ……다만 조선사 편수 위원, 중추원 참의, 건국대학 교수, 이것저것 구중중한 옷을 연방 갈아입으면서도 나의 일한 실제는 언제고 시종일관하게 민족정신의 검토, 조국 역사의 건설, 그것밖에 벗어진 일 없었음은 천일(天日) 이 저기 있는 아래 감연히 명언하기를 꺼리지 않겠다. - 최남선, 「자열서」 중에서 석 달 후인 5월에 최남선은 병보석으로 출감하였다.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방해하면서 지지부진하 던 반민특위는 6월 6일에 친일 경찰들이 특위의 특별경찰대를 강제 해산하면서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재판에 회부된 친일파들은 사실상 아무도 처벌되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최남선은 해군 전사 편찬위원회에서 일하였다. 휴전 후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 문에 위촉되었고, 신문과 잡지에 한국의 역사·문화와 관련된 기고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는 『한국 역사대사전』을 편찬하던 중 1957년 10월 10일 병사하였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의 죄과를 고백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고자 하였다. 2011년에 그의 장손이 조부의 친일론을 반박한 책 『나의 할아버지 육당 최남선』을 펴냈다. 조전손전(祖傳孫傳)인가, 그는 책에서 조부의 행적이 ‘조선의 세계화 작업’이었다고 강조한다. 조선사편수회 위원과 중추원 참의 등 친일로 인식되는 부분은 ‘근대 세계주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불거진 오해’라는 것이다. 역사는 비록 굴절되거나 왜곡될 수는 있지만, 국권피탈기에 육당 최남선이 민족을 등지고 식민 통치 에 협조한 사실은 그 자체로 부정할 수 없다. 그게 일제의 겁박이든 자발적 부역이든, 숱한 상황 변 수 가 그들의 행위를 웅변으로 변호한다고 해도 말이다. 슬픈 것은 최남선의 친일 부역이 아니라, 하고 많은 부역자 가운데 자신의 과오를 진실로 인정하고 민족 앞에 엎드려 사죄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해방 70년이 훌쩍 지나도 여전히 그것 이 논란거리를 넘지 못하는 것 또한 씁쓸하고 슬프다. 2019. 5. 낮달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 (최남선 / <소년> 창간호, 1908. 11) Ⅰ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따린다, 부슨다, 문허 버린다. 태산 갓흔 놉흔 뫼, 딥태 갓흔 바위ㅅ 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디 하면서, 따린다, 부슨다, 문허 버린다.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Ⅱ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내게는, 아모것, 두려움 업서, 육상에서 아모런 힘과 권(權)을 부리던 자(者)라도, 나 압헤 와서는 꼼땩 못하고, 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디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압헤는.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Ⅲ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나에게 뎔하디 아니한 자가 지금까디 잇거던 통긔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의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의 역시(亦是) 내게는 굽히도다. 나허구 겨르리 잇건 오나라.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Ⅳ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됴고만 산(山)모를 의지하거나, 됴ㅅ쌀 갓흔 뎍은 섬, 손ㅅ벽만한 땅을 가디고, 고 속에 잇서서 영악한 톄를, 부리면서, 나 혼댜 거룩하다 하난 자 이리 둄 오나라, 나를 보아라.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Ⅴ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나의 땩될 이는 한아 잇도다. 크고 길고, 널으게 뒤덥흔 바 뎌 푸른 하날. 뎌것은 우리와 틀님이 업서, 뎍은 시비(是非) 뎍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업도다. 됴 따위 세상에 됴 사람텨럼,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Ⅵ 텨……ㄹ썩, 텨……ㄹ썩, 텩, 쏴……아. 뎌 세상 뎌 사람 모다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한아 사랑하난 일이 잇스니, 담(膽) 크고 순정(純精)한 소년배들이 재롱텨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 입맛텨 듀마. 텨……ㄹ썩, 텨……ㄹ썩, 텩, 튜르릉, 콱. Ⅰ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태산 같은 높은 뫼. 집채 같은 바윗돌이나. 요것이 무어야, 요게 무어야. 나의 큰 힘 아나냐, 모르나냐, 호통까지 하면서 따린다, 부순다, 무너 바린다.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처……ㄹ썩, Ⅱ 처……ㄹ썩, 척, 쏴……아. 내게는, 아모 것, 두려움 없어, 육상에서,아모런, 힘과 권을 부리던 자라도, 내 앞에 와서는 꼼짝 못하고, 아모리 큰 물건도 내게는 행세하지 못하네. 내게는 내게는 나의 앞에는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Ⅲ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나에게 절하지, 아니한 자가, 지금까지 있거던 통기하고 나서 보아라. 진시황, 나팔륜, 너희들이냐. 누구 누구 누구냐 너희 역시 내게는 굽히도다. 나허구 겨룰 이 있건 오나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Ⅳ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조고만 산 모를 의지하거나, 좁쌀 같은 작은 섬, 손벽 만한 땅을 가지고고 속에 있어서 영악한 체를, 부리면서, 나 혼자 거룩하다 하난 자, 이리 좀 오나라, 나를 보아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처……ㄹ썩, Ⅴ 처……ㄹ썩, 척, 쏴……아. 나의 짝될 이는 하나 있도다, 크고 길고, 넓게 뒤덮은 바 저 푸른 하늘. 저것이 우리와 틀림이 없어, 적은 시비, 적은 쌈, 온갖 모든 더러운 것 없도다. 조 따위 세상에 조 사람처럼,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콱.처……ㄹ썩, Ⅵ 처……ㄹ썩, 처……ㄹ썩, 척, 쏴……아. 저 세상 저 사람 모두 미우나, 그 중에서 똑 하나 사랑하는 일이 있으니, 膽(담) 크고 純精(순정)한 소년배들이, 재롱처럼, 귀엽게 나의 품에 와서 안김이로다. 오나라, 소년배, 입 맞춰 주마. 처……ㄹ썩, 처……ㄹ썩, 척, 튜르릉, 꽉. ▲ 일제강점기 지성계를 대표했던 동경삼재의 모습. 왼쪽부터 나이순으로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 동경삼재(東京三才)는 일본 동경(도쿄)으로 유학 간 조선인 유학생들 중 세 명의 인재를 아울러 부르 는 말이다. 바로 당대 문필가로 이름을 날렸던 홍명희, 최남선, 이광수를 뜻한다. □ 동경삼재(최남선, 홍명희, 이광수) 소개 / 송풍수월 https://blog.naver.com/ohyh45/222082107875 매국노들의 마지막 삶 / KBS다큐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