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未堂)과 석정(夕汀)의 경우를 통해 본 친일문학에 대한 시각
-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2004.8.14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중에서 편집 -
역사도
사상도 종교도 문학도 민족도
승리만을 위해서 존재할 때
하늘은 가차 없이 철퇴를 내려 멸(滅)하였다.
즉 역사 하나만을 보더라도
박식한 역사가가 되기 이전에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나는 한때 미당 서정주를 좋아했다.
그의 [귀촉도, 꽃밭의 독백, 푸르른 날, 국화 옆에서, 질마재 신화]등
미당의 시를 줄줄 외우고 다녔다.
그러나 그가 친일 부역 작가였고,
징용을 찬양 독려하고, 천황찬가를 짓고,
해방후에도 집권 정치 시류에 편승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훗날 그의 친일 행적에 대한 변명이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 가도 몇 백 년은 갈 줄 알았다.
그리고 이것이 당시 우리 민족 절대 다수의 실상이었다고 회고한다.』라거나
『쓰라는 대로 쓸 수 밖에 없었고 모든 정보가 차단된 상태에서
해방이 그토록 빨리 오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라고
했다는 것을 알고는 그와 결별하여야 했다.
이 경우 문학과 정치와 도덕을 분리한다면
나는 미당을 좋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왜 결별하여야 했는가?
문학도 사상과 행동과 가치관이 수반되지 않을 때
그의 주옥같은 시는 한낱 가면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서정주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의 시와 친일행위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이유로는 『서정주는 시인이었다. 즉, 서정주는 시로써 평가를 받아야 하지
친일행위로써 평가를 받아서는 안된다.』라고 한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옥고를 치룬 이상화,
한국전쟁에 종군 기자로 참여한 박인환,
독립운동을 하다가 북경에서 옥사한 이육사,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어 옥사한 윤동주까지는 거론하지 않더라도...
앞에 나서지 않고 순수 모국어로 저항 문학을 하다가
창씨개명을 거부하기 위하여 생계 수단이었던 직장도 버려야 했고,
군 징집의 위협에 한동안 잠적할 정도로 일제에 저항적이었고,
문예지에 투고한 작품이 사상불온이란 이유로 검열에서 삭제되기도 했고,
일본어로 시 쓰기를 청탁받았으나
『차라리 한 그루 푸른 대로』살기 위하여 아예 절필(絶筆)하였고,
해방후에도 기득권 정치세력에 저항했던 신석정은
미당보다 8살 연상으로 동향(同鄕)이었고, 더구나 평소 교류가 있을 정도로 친밀했다는데
석정과 미당의 처신은 어떻게 이렇게 극과 극으로 다를 수 밖에 없었을까?
미당은 그러한 지조를 지킨 석정을 조금이라도 본받을 수는 없었을까?
결국 그것은 미당의 삶에 대한 가치관, 자기중심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라 보며
그것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미당만의 독특한 시어의 아름다움을 반감시키는 것이다.
절필(絶筆)로써 일제에 항거한 문인으로는
미당과 생몰연대가 동일한 소설가 황순원(黃順元, 1915 ∼ 2000)이 있는데
그는 1937년부터 소설 창작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1940년 <늪>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소설을 창작하기 시작했으나
1942년부터 일제의 전시체재하에 친일작가 대부분이 참여한 위문작가단 결성과
한글말살정책이 시작되자 평양의 빙장리로 낙향, 은둔하며
신석정 처럼 1945년까지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다.
그리고 미당의 이러한 처신과 삶을 일별하여 보면
당시 상황상 어쩔 수 없었다는 정치적인 처신은 딱 눈감아주고라도
문학에서만큼은 정당하게 평가해 달라는 미당 추종자들의 말은
터무니없는 어거지라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명확하게 말해준다 하겠다.
더구나 미당은 그러한 일체의 행위에 대하여 죽는 날까지 변명으로 일관하다가
말년에 이르러 구차하게『그때 그들에게 짓눌리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 협조했으나』라는 단서를 달아가며
『돌이켜보니 내 짧은 생각이었다.』는 말이 유일한 유감 표명이란다.
이상화, 박인환, 이육사, 윤동주 같은 행동으로 저항한 문인이나,
신석정, 황순원 같은 절필(絶筆)하며 은둔한 문인들도 있었다.
일제 말기에 얼떨결에 친일문학을 했을지라도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며
『민족의 죄인』(1948)을 발표하며 만천하에
진심어린 사죄의 반성을 한 채만식같은 문인들도 있었다.
잡지사를 창간하여 통째로 친일 문학으로 도배한 극악한 파인 김동환은 그래도
그의 아들에 의해 다음과 같이 진심어린 속죄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
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미당이나 미당의 무리들(제자), 가족들이 아무런 사족을 달지 말고
진심어린 사죄의 심정을 나타내었다면
미당의 주옥같은 詩들은 그래도 조금 더 빛났을 텐데...
민족문제연구소, 태평양유족회등의 강권으로
미당전시관에 그의 친일 행적을 억지로 전시하면서도
미당 본인은 물론 그의 자손, 제자들까지도 공식적으로 진정성어린
참회의 고해성사가 없다는 점은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라 하겠다.
아직도 그런 미당의 문학과 처신을 분리하여 보자고 주장하는
미당의 무리들에게 거론하고 싶은 구절 하나가 있는데
서산대사의 『금일아행적(今日我行跡)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이란 말씀이다.
여기에 시류에 편승, 타협하였던 문학인 중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등 5개 단체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문학인 42인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명단 4,389명중
미당을 비롯한 친일 시인(詩人) 12인이 있는데 그들은 곧
김동환(金東煥), 김상용(金尙鎔), 김안서(金岸曙), 김종한(金鍾漢),
김해강(金海剛), 노천명(盧天命), 모윤숙(毛允淑), 서정주(徐廷柱),
이찬(李燦), 임학수(林學洙), 주요한(朱耀翰), 최남선(崔南善)이며
그들의 문학을 사멸(死滅)시키지는 않더라도
그들의 문학을 접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지조를 버리고 시류(時流)에 편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들의 작품을 바라 보아야만 할 것이다.
배달9220/개천5921/단기4356/서기2023/07/03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2008년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 친일파 명단
https://cafe.daum.net/VN2000/RCGw/19
■ 미당의 친일문학 및 정치편승 행위와 옹호
https://namu.wiki/w/%EC%84%9C%EC%A0%95%EC%A3%BC
■ 문학뉴스 연중 캠페인 - 친일시 다시 읽기
문학뉴스(http://www.munhaknews.com)
■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문학뉴스(https://qq9447.tistory.com/25)
■ 한국독립동지회 - 민족반역.매국
http://www.k1919.org/wanee/bbs/board.php?bo_table=z4_4
■ 친일문학 42인 작품목록 - 친일작품 선정 기준
https://tptkdrnrud.tistory.com/4911
■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 서정주, 김해강
https://cafe.daum.net/minjokjeonbuk
■ 신석정문학관(전북 부안군 부안읍 선은리 청구원
http://www.shinseokjeong.com/main/
■ 한국 신석정 시낭송협회
https://cafe.daum.net/magnolia0815
■ 부록1) 친일문학의 태동과 반민족 행위의 기록
□ 부록1-1) 친일 문학이란?
□ 부록1-2) 친일문학인의 문학상은 폐지해야 한다
■ 부록2) 미당 서정주를 왜 친일 시인이라 하는가?
□ 부록2-1) 친일파 ‘민족시인’ 서정주
□ 부록2-2) '서정주'를 제대로 알자!
□ 부록2-3) 서정주, 친일은 하늘뜻에 따랐다?
□ 부록2-4) 서정주(徐廷柱)-“시를 안 쓸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어”
□ 부록2-5) 미당이 석정을 살리다
■ 부록3) 서정주 생애의 친일행위와 변명 그리고 정치 편승■ 부록4) 이광수와 최남선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부록4-1)‘친일문학’ 이야기 - 글머리에
□ 부록4-2)‘춘원과 육당의 문학상 제정? 뜬금없고 생뚱맞다
□ 부록4-3) 이광수, 피와 살과 뼈까지 일본인이 되려 했건만
□ 부록4-4) 독립선언서 집필자가 일본에 붙은 역적 되다니
□ 부록4-5) 최남선, 죄과(罪過)는 다섯 가지나 나는‘무죄’다
■ 부록5) 김억과 주요한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부록5-1) ‘안서(岸曙) 김억,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 부록5-2) ‘주요한,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 부록6) 김해강(金海剛, 1903~1987)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부록6-1) 전북출신 문인들의 친일논란
□ 부록6-2) “소화(昭和)의 군신”을 격찬한 김해강
□ 부록6-3) 친일반민족행위자 김해강 단죄비 세워
■ 부록7) 김동환과 노천명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부록7-1) 파인 김동환,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 부록7-2)‘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김동환 3남 김영식씨
□ 부록7-2)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 부록7-3)‘사슴의 시인’노천명은 왜 그토록 구차했을까?
■ 부록8) 신석정(辛夕汀)을 왜 저항시인이라 하는가?
□ 부록8-1) 신석정(辛夕汀) 시인은 누구인가?
□ 부록8-2) 신석정(辛夕汀)-“韓醫와 佛典 버리고 詩의 길 열어”
□ 부록8-3) 친일에 빠진 서정주, 그를 걱정한 선배 시인 신석정
■ 부록9) 신석정(辛夕汀) 세부 연보와 바로알기
□ 부록9-1) 신석정(辛夕汀) 시인 세부 연보(年譜)
□ 부록9-2) 신석정(辛夕汀) 시인 탄생과 시집 소개
□ 부록9-3) 신석정(辛夕汀) 주요 작품 감상
□ 부록9-4) 석정(夕汀)의 지조와 사랑 그리고 미당의 처신
1934년 가을 (좌 미당20세. 석정28세) 그리고 친구들과 청구원의 옹달샘에서...
未堂과 夕汀의 고향인 고창과 부안은 지근거리였으며 간혹 교류하는 사이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志操와 사랑을 신념으로하는 석정과 時流에 편승했던 미당은 밟아간 길이 확연히 달라지게 된다.
1933. 12.「조선일보」「시단회고」란에서 석정을‘목가시인’으로 호칭한 김기림과 함께...
1967.11.4. 시인 신석정(오른쪽,61세)과 비사벌초사를 방문한 김남조(가운데), 김용호(왼쪽).
평생‘지재고산유수志在高山流水’가 좌우명이었던 비사벌초사 정원에서의 서수적 외모의 석정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