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아침에 사라진 김해강 '친일 단죄비'…'누가 이런 짓을?'(2021/07/01 연합뉴스)
■ 부록6) 김해강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부록6-1) 전북출신 문인들의 친일논란
새전북신문 - 2003.08.14
지금으로부터 꼭 1년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선배들의 과오를 사죄한다는 문인들의 선언이 있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계간 실천문학 등이 중심이 된 이들은 친일문학인 42명의 명단
을 발표하는 침통한 뉴스를 전했다. 문단의 친일시비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날의 선언이 관
심을 모은 것은 42명의 문인을 엄선(?)하여 발표함으로써 그간 분분하게 진행돼온 친일문학인의 범주
를 일정부분 규정했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남은 이들 중에 도내 출신은 시인 서정주와 김해강, 소
설가 채만식이 있다. 서정주·채만식의 친일 행적은 어느 정도 논란을 거쳐온 터라 새삼스러울게 없
었으나 김해강의 경우는 달랐다.
김해강은 해방 이후 전북문단과 전북예총을 건설한 주역이며 ‘도민의 노래’를 비롯한 각급 학교 교
가 등의 작시를 맡아 지역 사회와 끈끈하게 친화된 인물이다. 지역에서조차 거론되지 않던 그의 친일
행적이 전체문인 42명에 포함될 정도였다는데 문화계는 혼란스러웠다. 다시 광복절을 맞아 최근 미당
시를 학생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싣는 것이 옳은가 싣지 않는 것이 옳은가로 평단에 소요가 일고 있
다. 민족이 있는 한 민족을 배반한 문학에 대한 시비는 멈추기 어렵다.
△서정주·채만식·김해강 문학의 빛우리 문단에서 가장 골 깊은 애증의 대상인 미당 서정주(1915∼
2000).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되면서 문단에 얼굴을 내밀었으나 이미 한 해 전
‘스물 세햇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로 시작 되는 시 ‘자화상’을 발표하여 천재의 등
장을 알렸었다. 고향을 떠나 있었으나 그에게는 항상 ‘질마재’ ‘선운사’ ‘불교’의 이미지가 따
라 다니며 그를 낳고 키운 고창의 자랑으로 부각됐다. 생전에 1천여 편의 시를 발표한 그는 왕성한
창작열과 괴기로움까지 풍기는 예술가적 풍모, 문단에서의 영향력으로 항상 우리 문단의 중심을 차지
했었다. 그의 고향 선운초등학교는 미당문학관으로 개편됐다.
백릉 채만식(1902∼1950)은 옥구 임피 출신이다. 1924년 ‘조선문단’에 단편 ‘세길로’가 추천되어
등단했으며 1934년 발표한 ‘레디 메이드 인생’이 출세작이다. 김해강과 채만식은 카프가 사실상 그
들과 신념이 같다고 인정한 동반자 작가들이다. 가난과 조화롭지 못한 가정으로 평생 불우했으나 그
의 문재(文才)만큼은 생전에도 충분히 빛을 발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기자를 거쳐 전업작가가 되
어 발표한 작품이 장편 ‘탁류’이다. 그 자신 생생하게 보고 경험한 군산 지역 민중들의 부초 같은
삶, 완급 없이 급발진으로 묘사한 남녀관계, 식민사회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관계가 잘 드러난 작품이
었다. 100여 편의 소설을 남긴 그를 기념하는 문학관이 군산 금강하구둑에 세워졌다.
김해강(1903∼1987)은 과작(寡作)의 시인이다. 1925년 전주사범을 졸업하던 해 ‘조선문단’에 시
‘달나라’가 당선돼 등단한 그는 다시 193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새 날의 기원’이 당선됐다.
1936년 서정주를 최초로 소개한 ‘시건설’ 동인으로 참여했으며 ‘청색마’와 ‘동방서곡’ ‘기도
하는 마음으로’ 등 세 권의 시집을 냈다. 초기에는 반일시에 가까운 강한 어조의 작품을 발표했으나
1930년대 이후 현실과 한 걸음 떨어진 채 자연과 교감하는 전통적 서정세계를 보였다. 그는 신석정·
백양촌·박동화 등과 전북예총을 건설, 초대 회장을 역임했다.
△ 그리고 그림자‘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그대/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1944년 매일신보에 발표한 미당의 ‘오장(伍長) 마쓰이 송가(頌歌)’의 일부이다. 미당은 1942년부터
44년까지 모두 11편의 친일작품을 발표했다. 42년 매일신보에 ‘시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조선의 젊
은이들이 대일본제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이 되기를 원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지난해에는 그가 창씨
개명한 다츠시로 시즈오(達城靜雄)이라는 이름으로 ‘국민문학’에 발표한 시 ‘무제’가 발견되기도
했다. 이 시에는 ‘사이판섬에서 전원 전사한 영령을 맞이하며’라는 부제가 달려 있었다. 유독 미당
이 친일비판의 표적이 되는 것은 그가 죽을 때까지 끝끝내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았던 이유가 크
다. 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군사정권을 미화하고 칭송한 행적이 계속됐기 때문이다.
채만식의 친일 작품은 1940년부터 발견된다. ‘인문평론’에 ‘나의 꽃과 병정’을 발표했고, 같은
해 매일신보에 ‘대륙 경륜의 장도 그 세계사적 의의’를 썼다. 41년에는 소설 ‘혈전’을 신시대에
발표했고 43년에는 자폭한 한 군인의 유가족을 방문하고 그를 추모하는 글을 썼다. 43년에는 매일신
보에 ‘홍대하옵신 성은’을 발표하는 등 모두 13편의 친일작품을 남겼다. 징병제도가 시작됐음을 기
뻐하는 ‘홍대하옵신 성은’은 ‘(나는) 이미 병정 갈 나이를 훨씬 지나친 몸이다. 일종의 노후물(老
朽物)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의 커다란 감격과 영광을 직접 몸으로 느낄 길이 없다. 천추의 유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자라는 2세가 있다. 그놈이 앞날에 나의 이 유감을 풀어줄 것이다.
그것으로 미흡하나마 위안을 삼는다’고 마치고 있다.
김해강의 친일 작품은 1942년에 발표한 3편이 발견됐다.
3월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에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와 ‘호주(濠洲)여’를 발표했고
6월에는 ‘조광’에 시 ‘아름다운 태양’을 썼다.
국기를 손에 흔들며
어매에 등의 등에 매달린
착한 내 아들과 딸들
태양과 함께 커가는
내 아름다운 가족의 적은 손을 꼬옥 쥐여줍니다
태양과 함께 커가는
내 아름다운 가족의 어린 볼을 사뭇 부벼 줍니다
라고 노래하는 ‘아름다운 태양’은 친일의 표현이 모호하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는 다르다.
아름답고 위대한 죽음으로써
오호 우리 해군의 빛나는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리하여 대동아전쟁 벽두에
제국불패의 태세를 반석 위에 세워 놓은
대동아건설의 거룩한 초석이여! 소화의 군신이여!
하며 격렬하게 외친다.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는 1941년 특수잠수함을 타고 진주만 깊숙이 침
공하여 미 해군 애리조나 호를 격침시키고 죽은 일본 대본영의 수군 9명을 기리는 작품이다. ‘특별공격대의 위훈을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어 있었다. 친일 행적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임은 작품들
이 증거한다. 이로 인해 그는, 2002년 2월 28일에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들의 모임’과 ‘광
복회’에서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708명의 명단에 들어갔으며, 동년 8월 14일에 「민족문학작가회
의」에서 발표한 ‘친일문인’의 詩 분야에서 서정주, 노천명, 모윤숙 등과 함께 12명의 친일문인 명
단에 선정되어 부끄럽게도 친일파로 규정되었다. 감추거나 외면하는 것이 능사일 수 없다. 서정주·
채만식·김해강, 돌아간 이는 말이 없다. 제대로 짚어 바로잡는 것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김선희기자 sunny@sjbnews.com
□ 부록6-2) “소화(昭和)의 군신”을 격찬한 김해강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 2005/03/26
황국만대에 영원한 영광을 찬양하리
1942년 4월 8일, 일본 토쿄 히비야 공원에서는 미국의 전함 ‘애리조나’호를 격침시키고 죽은 일제
의 해군 이와사(岩佐直治) 중좌 등 아홉명의 자살특공대 장례식이 수십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행되
었다. 일제는 이들을 2계급 특진시키고, ‘쇼화(히로히토 일왕)의 아홉 군신’으로 추대하였다. 그리
고 그들의 죽음을 찬미하고, 각급 학교의 교과서에도 싣게 했다. 그런데, 식민지 조선에서는, 이 보
다(아홉명의 군신을 발표한 때) 한 달이나 앞선 1942년 3월 13일자「매일신보」에 이들 ‘천황의 군
신’을 격렬하게 찬양한 선동적인 시가 발표되었다. 바로 김해강의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부
제:특별공격대의 위훈을 추모하며)였다.
황군(皇軍)흥폐의 중임을 두 어깨에 지고 ‘저희는 나갑니다.’
명경지수와 같은 담담한 태도로
바람 높고 파도 거친 3천 5백 해리의 대양을 건너
한 번 가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아아 우리 해군혼의 정화인 아홉 장사여!
아름답고 위대한 죽음으로써
오호 우리 해군의 빛나는 전통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리하여 대동아전쟁 벽두에
제국불패의 태세를 반석 위에 세워 놓은
대동아건설의 거룩한 초석이여! 소화의 군신이여!
태평양 상에 힘차게 펄럭이는 욱일승천의 깃발 아래
고요회 잠자는 아홉 장사의 영령이여!
천고에 빛나는 불멸의 무훈과 함께
황국만대에 영원한 영광을 가슴 높이 찬앙하오리.
‘특별공격대원의 위훈을 추모하며’라는 부제가 붙은 이 시는 1942년 매일신보에 실린 것으로서 김
해강은 시를 통해서 미군함을 향해 돌진한 자살특공대의 희생을 최대한의 수사로 칭송하고 있다.
김해강은 또 1942년 3월 6일자 「매일신보」에 “英蘇 合作 策謀의 報를 接하고” 라는 부제가 달린
3억 5천만의 ‘印度民衆에게’ 와 3월 27일, 28일에는 ‘ 濠州여 上,下 ’를 연일 발표했다. 여기에
서 김해강은 인도와 호주에게 싱가포르와 인도네시아가 함락되었으니 미국과 영국을 믿지 말고, 무적
황군의 진격을 환영하고 대동아공영 건설에 동참하라고 선동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하니하고
같은 해「조광」6월호에 황도신민의 정서가 담긴 ‘아름다운 태양’을 발표했다. 이렇듯 김해강은 일
제 강점기 때 일제의 파시즘과 ‘야마도 다마시’(大和魂)을 찬양하고, 황국신민화를 옹호하며, 대동
아 공영권을 외치는 친일 작품을 썼다.
그 동안 金海剛(본명 大駿)은 한국의 서정적인 시 세계를 노래한 시인으로, 태양의 시인으로 알려져
왔다. 일제식민지 때는 ‘초적’을 비롯해서 ‘새날의 기원’ ‘봄을 맞는 폐허에서’ 등 여러편의
저항의지가 담겨있는 시를 남겨서 문단의 일부에서는 저항시인으로 내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주
요한 등이 부르짖는 임전체제제하의 결전문학, 즉 많은 시인들이 붓을 총검으로 삼고 대동아전쟁에
충성해야 한다라고 하는 시대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지조를 지키지 못했다. 대다수의 친일지
식인들이 그러했듯 해강도 결국 친일부역이라는 굴절된 삶으로 훼절하고 말았다.
□ 부록6-3) 친일반민족행위자 김해강 단죄비 세워
새전북신문 / 기사 작성: 권동혁 - 2020년 08월 30일
전주시, 덕진공원 김해강 시비 옆에 친일행적 담긴 단죄비 세우고 제막식
김해강, 자살특공대원 칭송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 등 친일행적
시, 토지·임야대장 등 공적장부 존재 일본식 이름 정비 착수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 일본은 전략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전투기를 적함으로 돌진시켜
폭파시키는 전술을 구사한다. 일종의 자살특공대인 셈이다. 당시 일본은 이렇게 미국의 전함을 격침
시킨 사례를 두고 “천황의 식민이 작렬하게 전사했다”면서 대대적인 홍보를 했다고 한다. 이 작전
에 성공한 대원 9명을 칭송하는 ‘돌아오지 않는 아홉 장사’라는 시까지 지었다. 시는 ‘이들이 우
리가 바라는 천황의 식민이다. 황국 만대에 영원했다’는 등의 내용이다. 그런데 시를 지은 사람이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조선인 김해강(金海剛)이다.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된 시인 김해강은 전
북지역 각급 학교 교가의 작사자로도 유명하고, 전북도민과 전주시민의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전주시가 110년 전 일본에 국권을 상실한 치욕을 잊지 않고, 친일 시인의 행적을 알리기 위해 29일
김해강 단죄비를 세웠다. 110주년 경술국치일을 맞아 덕진공원에서 열린 김해강 단죄비 제막식에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광복회 전북지부 회원 등 10여 명이 참석했다.
이날 시와 민족문제연구소, 광복회는 김해강 시비 옆에 친일행적이 담긴 단죄비를 세우고, 행적을 낭
독했다. 이는 김해강이 전북 도민의 노래, 전주 시민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오랫동안 지역에서 존경
받는 문인으로 평가돼왔으나, 일본 자살특공대를 칭송한 시를 비롯한 친일작품을 쓴 것으로 드러나면
서 광복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또 시는 토지·임야대장 등 공적장부에 존재하는 일본식 이름의 공부를 정비하는 ‘공적장부 일본이
름 지우기’도 추진하고 있다. 이는 공적장부에 일본식 이름으로 남아 있는 일본인, 일본기업, 창씨
개명자의 귀속재산을 찾아내 국유화하는 게 핵심이다. 시는 9월까지 제적등본과 등기부등본, 토지대
장 등 총 250건에 대한 조사작업
에 들어갈 계획이다.
시는 창씨개명 기록이 있는 공부의 실제 토지 존재유무를 파악한 뒤 △공부정비 △창씨개명 정리 △
공공재산에 해당하는 필지 등으로 분류해 조달청에 통보키로 했다. 특히 일본식 이름으로 등재된 재
산은 창씨개명 이전의 성명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 공부를 정리하고, 이외에는 조달청을 통해 단계적
으로 국유화 처리키로 했다.
앞서 시는 일제가 남긴 치욕스러웠던 역사를 잊지 않고, 잔재를 청산하기 위해 지난 3월, 조례 개정
을 통해 김해강이 쓴 전주시민의 노래를 폐지했다. 또 지난해 일본 미쓰비시 창업자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의 호인 ‘동산’을 따 지은 ‘동산동’의 명칭을 ‘여의동’으로 변경했다. 일제강점기 다가
교에 세워진 일본 건축양식의 석등에는 안내판을 설치했으며, 중노송동 기린봉 초입에는 명성황후 시
해를 도운 이두황의 단죄비를 세웠다.
김재호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장은 “친일잔재의 흔적을 지우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이라며 “앞으로도 후손들에게 부끄럽고 치욕적인 역사를 널리 알려 반복되
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시 관계자는 “일제 잔재를 청산하고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해 민간단체와의 긴밀한 협조체계 속에서
행정력을 집중할 것”이라며 “폐지된 전주시민의 노래 또한 올바른 방향을 설정해 연내 공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권동혁 기자
덕진공원 김해강 시비(단죄비) / AK HISTORY TV(2023/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