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육명심(陸明心)의 작품을 통해 본 그 때 그 시절』에서
■ 부록5) 김억과 주요한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부록5-1) ‘안서(岸曙) 김억,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 부록5-2) ‘주요한,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 부록5-1) ‘안서(岸曙) 김억,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21. 1. 29.
조선 최초의 번역시집과 창작시집을 낸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 김억(1896~ ? )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리나라 신문학의 첫 장을 연 사람들이 대부분 친일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최초의 신체시를
쓴 최남선, 첫 번째 신소설을 쓴 이인직, 최초의 현대시 「불놀이」의 주요한, 첫 현대 소설 「무정」의
이광수가 바로 그들이다.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21년 1월에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번역해 펴냈고, 같은 해 6월에는 조
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출판하였다.
소월의 스승, 엇갈린 사제의 길
평안북도 정주의 부유한 종가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한 김 억은, 일본 유학에서 돌아와 모교의
교사로 일하면서 김소월(金素月, 1902~1934)을 가르쳤다. 소월에게 김억은 자신을 문단으로 인도한
문학의 스승이었다. 소월이 세상을 떠난 뒤, 김억은 1939년에 『소월시초(素月詩抄)』를 엮어 발간하
기도 하였다.
▲ 최초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1921)와 최초의 개인 시집 <해파리의 노래>(1923)
1977년 소월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 실린 시들 가운데 김억의 작품으로 이미 발표된 것들
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논란 끝에 스승이 제자의 시를 자기 작품으로 둔갑시켜 발표한 것
으로 결론이 났다. 당사자인 김억은 이미 한국전쟁 때 납북되어 행적을 알 수 없었으니 불행 중 다행
이었던가.
안서 김억의 문학 활동은 단순히 최초의 번역시집이나 창작시집을 펴낸 데 그치지 않았다. 초창기 현
대 문학의 전개 과정에서 그의 이름 이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1918년에 주간 문예지
『태서문예신보(泰西文藝新報)』를 창간하였고, 1919년부터 문예지 『창조』, 『폐허』, 『영대(靈
臺)』 등의 동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인도 시인 타고르의 시집을 여러 차례 펴내기도 하였다.
소월과 사제의 연을 맺었지만 두 사람의 길은 어긋나기 시작하였다. 초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이던
시풍에서 점차 현실 참여적으로 바뀌어 간 소월의 민족주의적 성향과 달리, 김억은 친일로 기울어져
간 것이다. 그는 1937년 조선총독부의 문예를 통한 황민화 정책 실천을 목표로 발족한 조선문예회에
참여하면서부터 친일의 길로 접어든다.
조선문예회가 후원한 ‘애국가요 대회’에 발표된 김억 작사 「종군간호부의 노래」, 최남선 작사
「김 소좌를 생각함」 등의 이른바 ‘애국가요’는 1940년대 ‘국민문학 운동’의 실마리가 되었다.
김억은 야전병원에서 활약하는 종군간호부를 기리는 「종군간호부의 노래」로 일제 침략전쟁을 찬양
하고 여성의 전쟁 참여를 부추겼다.
대포는 쾅 우레로 튀고
총알은 땅 빗발로 난다
흰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자애에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 「종군간호부의 노래」
이후 그는 조선문인보국회, 국민총력조선연맹, 조선문인협회, 조선 임전보국단 등 일제의 문화 기구
에 발기인, 간사 등으로 참여하면서 친일 활동의 수위를 높여 갔다. 문인들의 친일 행위에는 필수적
으로 징병제 찬양이 빠지지 않는데, 이는 일제의 압력이 작용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시를 통해 일제 군부와 침략전쟁 찬양
안서 김억은 유독 일제 군부를 찬양하거나 그 역할을 강조하는 형식의 글을 많이 썼다. 1942년 3월
일본 육군기념일을 맞아 발표한 시가 대표적 사례다. 그는 일제 육군이 동아시아에서 ‘수호자적 역
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하며 ‘아름다운 낙원’을 지켜 달라고 축원하였다.
동으로 동으로 밀려들면서 입을 벌리고
하늘엔 검은 구름 땅엔 바람을 들이던
험상궂은 제국(帝國) 제국(諸國)을 단번에 꺾어 버려
이 세계의 눈과 귀는 놀라지 않았던가
이 동아의 수호시여. ……이 동아의 우리는 10억,
마음과 뜻을 하나로 한곳에 모아
고이고이 드리는 정성의 이 잔을
이 동아의 수호시여, 쾌히 드시고
길이길이 정의의 날카로운 칼로
이 세계의 사악(邪惡)들을 몰아대시고
아름다운 이 낙원을 지켜 주시라
- 「육군기념일에」, 《매일신보》(1942년 3월 10일자)
1942년 5월 전사하여 일제의 군신(軍神)으로 추앙된 일본 육군비행대 가토 다테오(加藤建夫) 중좌를
노래한 시에서 그는 일제 침략전쟁의 공적을 미화하였다. 가토 다테오의 부대는, 일본 육군항공사관
학교를 나와 태평양전쟁에서 전사해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최명하(崔鳴夏, 1918~1942, 일본식 이름
은 다케야마 다카시 武山隆) 대위가 복무한 부대이기도 하다.
▲ <매일신보>(1941.12.05.)에 실린 김억의 친일 전쟁시
북지나(北支那)라 중지나(中支那) 또는 남방의
길도 없는 허공을 까맣게 날며
간 데마다 사악(邪惡)을 뚜다려내고
새로운 길 뚜렷이 지으신 군신
높을세라, 그 이름 가토(加藤) 부대장
호령호령 긴 칼을 높이 빼들고
사악을 인도양서 베고 베다가
귀한 정신 그대로 다시 나타나
영구히 이 동아를 지키는 군신
높을세라, 그 이름 가토 부대장
- 「군신(軍神) 가토(加藤) 비행부대장」, 『반도의 빛』(1942.9.)
그의 일제 군부 찬양은 해군 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전사를 노래한 시에서 정점을 찍
는다. 야마모토는 1941년 진주만 공격을 입안하고 수행한 인물로, 솔로몬 제도를 시찰하다 미 육군항
공대에 격추되어 전사하였다.
제독은 가셨으나 귀한 정신은
1억의 맘 골고루 밝혀
저 미영을 뚜드려 눕히일 것을
아아 원수 원수는 돌아가셨다.
원수의 높은 정신 본을 받아서
백배 천배 다시금 새 결심으로
새 동아의 빛나는 명일을 위해
일어나자 총후의 우리 1억들
저 미영이 무어냐 사악인 것을
- 「아아 야마모토(山本) 원수- 원수의 국장일을 당하여」, 《매일신보》(1943.6.6.)
1944년 레이테 해전에서 처음 가미카제(神風) 자살공격대가 등장한 뒤 11월에 조선인 가네하라(金原)
군조(軍曺, 상사에 해당하는 일본군 계급)가 전사하자, 그는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를 통해 조선
의 젊은이들에게 침략전쟁에 나가 희생하라고 선동하였다. 미당 서정주의 「마쓰이 오장 송가」에 비
할 만한 사례다.
역천(逆天)은 부술 것이 순천(順天)은 받들 것이
대장부 세상 났다가 그저 옐 줄 있는다
이 목숨 귀할시고 모두들 아낀다면
일월(日月)의 충의(忠義) 도고는 보잘 것이 있는고
설사(設使: 설령)에 죽더라도 충혼은 그저 남아
사악을 눕히기 전이야 가실 줄이 있과저
신풍(神風)이 부는고야 육탄이 튀는고야
풍탄(風彈)이 튀는 곳에 거칠 것이 없나니
맘들은 한데 모아 역천은 부서지고
님 따라 손 높이 들고 나설 때는 왔나니
- 「님 따라 나서자-가네하라(金原) 군조 영전에」, 《매일신보》(1944.12.7.)
문학적 공로가 큰 만큼 안타까운 친일부역
해방 후, 김억은 한국전쟁 발발 때까지 육군사관학교와 항공사관학교(공군사관학교의 전신) 강사를
지냈다. 전쟁 때 납북되어 북한 국영출판사의 교정원으로 배치되었다. 1956년 납북 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임명되었다가, 평안북도 철산의 협동농장으로 강제 이주되었
다. 그 이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시의 본질을 인간 감정의 표출로 인식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객관적 상관물을 주로 활
용하였으며, 심미적 차원의 형상화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또한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음
악적 요소를 중요시하였다고 평가된다. (방인석)
『친일인명사전』과 정부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에 올랐지만, 그의 시와 시론이 한국 현대
시에 끼친 영향과 서구의 시와 시론을 소개하고 민요시 운동의 중심에 서서 한국적 정서와 가락을 담은
민요시 창작에 주력한 공로는 부인할 수 없다. 소월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소개한 공적도 적지 않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의 이바지가 크면 클수록 식민 지배에 투항 하여 민족을 등진 친일부역 행위의
엄중함도 두드러진다. 그의 대표작 「봄은 간다」를 읽으며 청산하지 못한 역사를 안타깝게 되돌아보
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2019. 5. 낮달
□ 부록5-2) ‘주요한, ‘야스쿠니의 신’이 되도록 천황을 위해 죽으라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19. 2. 24.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권유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
▲ 주요한(1890~1979)
조선총독부가 ‘조선민사령’을 개정한 것은 1939년이고, 이에 따라 조선에서도 일본식 씨명제(氏名
制)를 따르도록 명령한 것은 1940년이었다. 이른바 ‘창씨개명’은 거칠게 정리하면 조선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인이 되라는 요구였다고 할 수 있다. 대부분 조선인이 이 정책에 반대
하였지만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한 친일파도 적지 않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의 시인 주요한(朱耀翰·松村紘一, 1900~1979)도 여기 당당히 이
름을 올린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체제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일본어 시집 『손에 손을(手に手を)』
(1943)까지 낼 정도의 극렬 친일파 주요한은 기꺼이 황국신민의 은혜에 감읍해 마지않는다.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와 ‘팔굉일우(八紘一宇)’
친일파들은 갖가지 지혜를 짜내어 일제의 요구를 만족시킬 만한 창씨를 ‘실천’하였다. 일제의 황민
화(皇民化) 요구에 부응한 창씨명은 소설가 이광수와 시인 주요한, 그리고 평론가 김문집의 그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진무천황이 즉위한 곳의 산 이름인 가구야마(香久山)를 씨로 삼아 ‘가야마(香山)’라 하고
‘광수’의 ‘광(光)’ 자에다 ‘수(洙)’ 자는 일본식의 ‘랑(朗)’으로 고쳐 ‘가야마 미쓰로(香山
光郞)’가 된 이광수가, 단연 그 선두다.
평론가 김문집은 ‘대구(大邱)에서 태어나 도쿄, 즉 에도(江戶)에서 성장하고 용산(龍山)역에서 전사
해 돌아오는 황군 장병을 맞아 운 적’이 있다며 그 각각의 지명에서 한 자씩 따서 ‘오에 류노스케
(大江龍之助)’라 하였으니, 그 둘째다.
마지막이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이름을 바꾼 주요한이다. 바꾼 이름 고이치는 일제의 황
도(皇道)정신인 ‘팔굉일우(八紘一宇)’*를 딴 것이니 그는 확실히 ‘덴노헤이카(天皇陛下)의 적자
(嫡子)’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 일본 천황제 파시즘의 핵심 사상으로,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합리화하기
위해 내세운 구호. ‘전 세계가 하나의 집’이라는 뜻.
주요한은 평양 출신으로, 연극인 주영섭과 단편 소설 「사랑 손님과 어머니」의 작가 주요섭의 형이
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1919년에 문예 동인지 『창조』 동인으로 참가하여 그 창간호에
산문시 「불놀이」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불놀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 자유시로 알려져 있다.
▲ 1993년 세종문화회관 옆 세종로공원에 세워진 주요한 시비. 시 「빗소리」가 새겨짐. 뒤 건물은 외교부 청사.
주요한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다. 1919년에 그는 상하이
로 가서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의 편집을 맡았고, 1924년부터 1936년까지 문예지 『조선문단』
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에는 첫 시집 『아름다운 새벽』을 펴냈다.
1926년 흥사단의 국내 조직 수양동우회의 실질적 기관지인 『동광(東光)』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맡
았다. 1930년대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1937년경에는 친일 실업인
박흥식이 설립한 주식회사 화신(和信)에서 중역으로 일하였다.
수양동우회는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에 의해 결성된 교육, 계몽, 사회운동 단체다. 그러나 식민
통치가 길어지면서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시점에 일본 제국이 일으킨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와해
되었다. 이는 본격적인 전쟁 체제를 조성하기 위해 양심적 지식인과 부르주아 집단을 포섭할 필요가
있던 일제가 수양동우회를 표적 수사한 사건이었다.
서울, 평안도, 황해도 등의 지역에서 모두 181명의 수양동우회 회원 이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체포
되었다. 이 가운데 41명이 기소되었다가 1941년에야 무죄 석방되었는데, 검거된 회원들은 강제로 전
향한 뒤 일제에 협력하게 되었다. 작곡가 홍난파가 그 대표적 인물이며, 중심인물이던 이광수와 주요
한도 이후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7년 종로경찰서에 검거된 주요한은 이듬해 11월 수양동우회 사건의 예심 보석 출소 기간 중에 전
향을 선언하고 조선신궁을 참배하였다.
같은 해 12월 경성부민관 강당에서 열린 전향자 중심의 좌담회인 ‘시국유지원탁회의’에 참석하여
“이 비상시에 있어서 우리는 일본이 승리를 얻어야 하겠다는 입장에서 황군의 필승을 위한 총후의
적성 (赤誠)에 전력을 바쳐야 할 것”(『삼천리』 1939년 1월호)이라고 말하였다. 같은 달 주요한은
수양동우회를 대표해서 종로경찰서에 국방헌금 4천 원을 헌납하였다.
이후 주요한은 그야말로 ‘눈부시게’ 친일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문인협회, 황도학회, 임전대책
협의회* 등 전시 체제기 전쟁 협력 단체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면서 이른바 ‘총후봉공’에 매진하였
다. 내선일체 운동 단체인 국민훈련후원회가 벌인 일본어 보급운동에 참여하고, ‘채권가두유격대’
에서 애국채권을 팔고,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의 의용봉공(義勇奉公) 끝에, 그는
1941년 11월 수양동 우회 사건 최종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 1941년 중일전쟁 시국에 대한 협조를 위해 『삼천리』 사장인 김동환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황국
신민화 운동을 실천하는 상설 단체. 결성 두 달 만에 비슷한 성격의 단체인 흥아보국단과 합병하여
조선임전보국단을 결성하면서 해체되었다.
전쟁 찬양과 죽음 선동, 화려한 총후봉공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것은 주요한이 무죄를 선고받은 지 한 달 뒤였다. 황은에 감읍하였던가. 주요한
은 1941년 12월 14일 조선임전보국단이 주최한 전선(全鮮)국민대회의 미영 타도 대연설회에서 ‘루스
벨트여 답하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루스벨트와 처칠을 방화범, 해적, 어릿광대 등에 빗대면
서 “그대들의 악운은 이미 다 되었”고, “반도의 2400만은 혼연일체가 되어 대동아 해방 성전의 용
사 되기를 맹서하고 있다”(『신시대』 1942년 1월호)며 불을 뿜었다.
1942년 5월에 일본이 1944년부터 ‘조선인 징병제도’를 시행하기로 하자, 그는 조선임전보국단의 징
병제도 대연설회에서 ‘새로운 각오’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다. ‘무적 황군의 일(一) 분자’가 됨
을 욕되게 아니하려면 “① 국체(國體)에 철저하여라. ② 팔굉일우(八紘一宇)의 대 이상을 깨달아라.
③ 충절을 다하라. ④ 사생(死生)을 초월하라. ⑤ 곤 고(困苦)를 견디어라”(『대동아』 1942년 7월
호)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대회에서 시를 낭독하고, 《매일신보》의 ‘반도개병가(半島皆
兵歌)’ 현상 모집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미귀(米鬼)의 잔학성을 폭로한다’라는 주제
의 라디오 좌담회에 참석하고, 해군지원병제 실시 기념으로 열린 미영 격멸 대 강연회에서 강연하는
등 주요한은 다방면으로 일제에 협력하느라 바빴다.
1944년께 주식회사 화신이 안양에 비행기공장을 짓는 데 관여하여 해방될 때까지 이 공장의 운영을
책임졌다. 같은 해 2월 종로경찰서가 주도한 황민화운동 단체에 참여해 ‘총후보국’에 앞장섰다. 3
월 기 존의 조선문인보국회 기관지에서 보국회 시부회(詩部會) 기관지로 바 뀐 『국민시가』의 편집
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런 친일 활동과 함께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도 나날이 무르익었다. 1940년 『조광』 9월호에 시조
「여객기」를 발표하면서 시작한 친일 글쓰기는,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대동아공영권’을
위한 태 평양전쟁 찬양으로 이어졌다.
12월 여드렛날 네 위에 피와 불이 비 오듯 나릴 때
동아 해방의 깃발은 날리고 정의의 칼은 번듯거림을 네 보았으리라
이날 적국의 군함, 침몰 된 자 기함(旗艦) ‘아리조나’를 위시해서
‘오클라호마’와 ‘웨스트버지니아’와 항공모함 ‘엔터프라이즈’
깨어져서 다시 못 쓰게 된 자도 네 척, 이름 좋은 진주만은 비참한 시체가 되고
횡포한 아메리카 나라의 아세아 함대는 앉은자리에서
반신불수의 병신이 됨을 네 보았으리라
- 「하와이의 섬들아」, 『삼천리』(1942년 1월호)
그는 시를 통해서 일제의 싱가포르 점령을 찬양하고, 일제 침략전쟁의 주요 상대국인 영국과 미국을
비난하였다. 또 전력(戰力) 생산을 위하여 ‘총후’의 국민으로서 가져야 할 자세를 강조하는 글도
적잖게 썼다.
‘총후봉공’을 위해 바삐 뛰는 조선인들의 모습을 묘사하였다는 시 「정밀(靜謐)」은 부역 시인의
시적 감성이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보여 준다. 식민지 백성들이 일제 전시 체제의 일부가 되어 버린
순응적 질 서의 순간을 감각적으로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보고, 듣고 또 전신으로 느꼈다.
소집되어 가는 각모(角帽)
몸뻬의 행진
젊은 여성의 땅을 울리는 보조를
흰 수병복(水兵服)의 소년단
애국반상회의 창기대(槍騎隊)
눈 내린 새벽의 요배식(遙拜式)을
- 「정밀(靜謐)」, 『신시대』(1944년 7월호)
「싱가폴 함락가」, 《매일신보》(1942년 2월 18일자)
▲ 「싱가폴 함락가」, 《매일신보》(1942년 2월 18일자)
문인들의 총후봉공 중 중요한 것은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등을 선전·선동하는 일이었다. 주요한
은 이 일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는 지원병 응모 선동에 그치지 않고 조선 청년들에게 지원병이
되어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하였는데, 시 「첫 피(最初の血)」가 그 백미다. 지원병 이인석의 입을
빌려서 그는 천황을 위해 죽자고 선동하였다.
▲ 군복 차림의 이인석 상등병
나는 간다,
만세를 부르고
천황폐하 만세를
목껏 부르고
대륙의 풀밭에
피를 뿌리고
너보다 앞서서
나는 간다.
(……)
역사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뿌려지는 피다.
반도의 무리가
님께 바친
처음의 피다. 205
(……)
형아 아우야, 나는 간다.
너보다 앞서
피를 뿌린다.
앞으로 너들의 피가
백으로 천으로
만으로 십만으로
뿌려질 줄을
나는 안다.
군복 차림의 이인석 상등병
「첫 피-지원병 이인석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206
대륙에서
대양에서
넘쳐흐르게 될 줄을
나는 안다.
- 「첫 피-지원병 이인석(李仁錫)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 「첫 피-지원병 이인석에게 줌」, 『신시대』(1941년 3월호)
젊은 여성은 간호부로, 청년은 가미카제로
선동은 여성들에게도 이어졌다. 그는 시 「댕기(タンギ)」(『국민문학』 1941년 11월호)에서 “까만
댕기에 하이얀 간호복 입고 / 저도 나라를 위해 있는 힘 다 바치겠어요”라며, 젊은 여성들에게도 간
호부로서 전쟁에 참여하라고 독려하였다.
주요한은 ‘가미카제(神風)’로 출전하는 조선 청년을 숭고하게 묘사 함으로써 조선 청년들에게 천황
을 위해 목숨을 바치길 요구하였다. 1944년 5월호 『방송지우』에 발표한 산문 「구단(九段)의 꽃」
에서 조선 의 지원병, 학병, 여자정신대 등을 ‘구단’에 만발한 ‘젊은 사쿠라꽃’에 비유한 것이
다. ‘구단’이란 도쿄의 ‘야스쿠니(靖國)신사’가 있는 곳이니, ‘천황폐하’를 위해 죽어서 신사
에 모셔지는 ‘신(神)’이 되라는 것이 었다.
▲ 「전 국민이 육탄으로」, 《매일신보》(1945년 5월 25일자)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주요한은 마침내 폭뢰로 자살공격을 감행한 조선인 병사를 기리며 이를 따
르자고 선동하기에 이른다. 1945 년 1월 30일 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파갑폭뢰(破甲爆雷)–박
촌(朴村) 상등병에게 드림」에서다.
전쟁 말기에 이들 친일 부역 문인들의 정신 상태가 온전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싶은데, 글쎄
다. 워낙 자기 정당화나 합리화에 능숙한 이들이 문인이고, 그걸 통해 자기 최면에 가까운 확신에 이
르기도 하니, 이 또 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지 모른다.
최후의 항전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패전하였고 조선은 해방되었다. 그 화려한 배덕(背德)의 시대를 건
넌 이들로서 마땅히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마땅했다. 천황과 전쟁을 찬양하다가 그것이 좌
절되었으니 흠모해 마지않는 일본식으로 할복하든가, 아니면 민족을 향해 석고대죄라도 해야 옳건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정부가 수립되었고, 친일파들은 다시 지도자로 소환
되어 정국의 전면에 등장하였다.
해방,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주요한은 1949년 4월 28일 반민법 제4조 제10항, 제11항 위반 혐의로 반민특위 산하 특수경찰대에 체
포되었다가 풀려나는 것으로 친일의 단죄에서 벗어났다. 그는 주로 기업에서 활동하다가 1948년 《국
민 신문》 편집국장을 지냈고, 한국전쟁 당시에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에 참여하였다. 흥사단 기관지
『새벽』을 창간하기도 하였다.
이후 주요한은 많은 친일 문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 나라의 주류로 살아갔다. 1958년 민의원으로 당
선하였고, 1960년 민주당 장면 내각에서 부흥부·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1970년에는 공기업 대한해운
공사 사장을 지내면서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다.
1970년대 들어서는 세종대왕, 도산 안창호, 안중근 등의 각종 기념 사업회 일에 관여하였다. 도산과
안중근 의사 같은 분들의 기념사업이 이러한 극렬 친일 인사들에 의해서 추진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해방 후 식민지 역사에 대한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는 만년에도 전경련 부회장 등 주요 경제단체의 간부를 역임하였다. 주요한은 1979년 11월 17일에
사망하여, 전국 실업인장으로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
서하였다.
이 훈장의 훈격은 1등급이다. 일제의 감옥에서 순국한 시인 이육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된 것
은 해방 45년 만인 1990년이었다. 육사에게 추서된 애국장의 훈격은 4등급이었다. 건국훈장과 국민훈
장을 단순 비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엄청난 전도, 이율배반이 환 기하는 것은 한국 현대사다.
청산하지 못한 식민지 역사가 빚어낸 슬픈 자화상이다.
2019.5. 낮달
친일시 '명작'(김억,주요한,노천명,모윤숙,이광수) / 국민대 정선태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