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작가 육명심(陸明心)의 작품을 통해 본 그 때 그 시절』에서
■ 부록7) 김동환과 노천명의 친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부록7-1) 파인 김동환,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 부록7-2)‘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김동환 3남 김영식씨
□ 부록7-3)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 부록7-4)‘사슴의 시인’노천명은 왜 그토록 구차했을까?
□ 부록7-5) 盧天命과 趙敬姬 兩人에 死刑求刑
□ 부록7-1) ‘파인 김동환, 일제에 엎드려 ‘웃은 죄’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20. 12. 16.
서사시 ‘국경의 밤’과 ‘산 넘어 남촌에는’의 시인 김동환의 친일 부역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 파인 김동환(1901~?)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白山靑樹, 1901~?)이라면 낯선가. 그럼 혹시 「북청 물장수」나 우리나라
최초의 서사시라는 「국경의 밤」을 기억하시는가. 그도 저도 아니면 「웃은 죄」라는 시는 어떤가.
시골 마을 우물가 처녀와 한 나그네 사이에 오간 미묘한 교감을 과감한 서사의 생략으로 그려낸 이
짧은 시는 여운이 꽤 길다.
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 웃고 받었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대두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그래도 기억이 아련하다면 「산 너머 남촌에는」이라는 대중가요를 기억하시는가. 1965년에 김동현이
작곡하고 ‘꾀꼬리’로 불린 가수 박재란이 부른 이 노래는 당시 크게 히트했다. 같은 시행의 반복과
토속적인 시어에다 7·5조 3음보의 율격이 매끈하게 목에 감겨오는 노래다.
그러나 이처럼 만만찮은 서정을 보여준 김동환은 조선인 최초의 지원병으로 1939년 6월 하순에 전사
한 이인석(李仁錫)을 찬양한 시를 통해 일본군 지원을 선동한 시인이기도 하다. 평범한 농민은 전사
를 통해서만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으니, 이인석을 본받아 이 땅의 젊은이들은 하루바삐 ‘영
광스러운 죽음의 길’로 뛰어들라고 독려한 것이다.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 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 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나.
-「권군(勸君) ‘취천명(就天命)’」, <조선일보>(1943.11.7.)
김동환은 함경북도 경성 출신이다. 본명 김삼룡(金三龍)을 김동환으로 개명한 것은 1926년. 호는 파
인(巴人)·취공(鷲公), 필명은 김파인(金巴人)·초병정(草兵丁)·목병정(木兵丁)·석병정(石兵丁)·
화병정(火兵丁)·강북인(江北人)·강서산인(江西山人) 등을 썼다.
김동환은 1924년 5월 문예지 『금성』에 시 「적성(赤星)을 손가락질하며」로 등단했다. 이후 동아일
보,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에서 기자로 일했고, 1925년 3월 첫 시집이자 우리나라 현대시 사상 최초
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을 발간했다.
일본 유학 시절, 유학생들이 창립한 재일조선노동총동맹에서 중앙집행위원을 맡았던 그는 1925년 8월
부터 1928년 7월까지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서 활동했다. 1927년 1월 프롤레타리
아 연극단체인 불개미극단을 창단하기도 했다.
▲ 대중잡지 <삼천리>는 1930년대 중후반 이후 시국성을 드러내는 화보로 표지를 장식했다.
김동환은 1929년 6월 삼천리사를 만들어 종합월간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1930년에는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2월에는 서대문경찰서에 검속되었다가 풀려났다.
김동환이 창간한 『삼천리』는 1930년대 중후반부터 체제에 순응하여 내선일체와 황민화 운동을 적극
선전하였는데 그의 친일도 이러한 출판 활동과 궤를 같이했다.
백산청수(白山靑樹:시라야마 아오키)로 창씨개명한 그는 ‘태백산의 푸른 나무[백산청수(白山靑樹)]’
대신 ‘백산고사목(枯死木)’의 길로 나아갔다.(임종국) 김동인과 박영희 등이 선정되어 떠난 ‘북지 황
군 위문 문단사절’ 행사(1939)에 후보로 선출되었다가 탈락한 그는 이후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벌인다.
조선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결성에 발기인으로 참여해 출범 때 간사를 맡았고 뒤에 조선문
인협회 이사로 ‘전선 병사 위문대 보내기’ 행사를 주도했다. 1941년 10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
報國團) 상무이사를 맡은 뒤 쓴 글은 자못 비장한 어조로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선동한다.
황군 장병 11만 명이 죽었는데 조선사람은 겨우 세 사람이 죽었고 국채 소화의 힘도 내지의 어느 1현
만도 같지 못하고 그 밖에 무엇무엇 모두 다 빈약하였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심히 부끄러
운 일이외다.
대체로 우리가 이번 성전에 참가하는 데 세 가지 단계를 밟아야 할 줄 압니다. 제1기는 사상전 즉 우
리 2400만 조선인이 다 황도 정신을 파악한 일본국민이 되는 일로, 이러하기 위하여는 우리들 일부에
종래 가지고 있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깨끗이 청산하고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서 내선일체의 길에
들어섭시다.
그런 뒤 제2기로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돈과 땀을 나라에 바칩시다. 돈으로 애국공채를 사고 전쟁에
필요한 놋그릇, 금, 동, 쌀을 바칩시다. 또 땀, 즉 노력을 바칩시다. 국가에서는 지금 지하자원의 개
발, 양미 증식을 위하여, 국민의 노력을 간절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노력을 통하여 국책
에 협력합시다.
이렇게 국민정신을 통일하고 그런 뒤 노력과 물자와 돈을 바치고 그러고 난 뒤 할 일이 있습니다. 그
것은 피를 바치는 일이외다. 우리의 생명을 전장에 바쳐야 하겠습니다. 황군 장사 모양으로 총과 칼
을 메고 우리도 전장에 나아가 우리나라 일본제국을 방위하여야 할 것입니다.
- 「임전보국단 결성에 제(際)하여」(일문), 『삼천리』(1941년 11월호)
1943년 8월부터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되자 8월 7일자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를 통해 일왕의 은혜에
감읍하면서 온 민족이 그 ‘님’의 앞으로 가자고 노래했다.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에서는
‘이기지 못하거든 죽어서 돌아오라’고 강변하기도 했다.
▲ 김동환이 쓴 싱가포르 함락에 감격한 소감. <매일신보>(1942.2.20.)
5월 담장에
월계꽃 피듯
인제, 우리 자녀
송이송이 피오리다.
누가 감히 낮추어 보랴
님이 쓰실 이 소중한 몸을,
누가 감히 범하려 들랴
님이 부르실 이 거룩한 자녀를.
앞으로! 어서 앞으로!
우리 2천7백만, 님의 앞으로!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8.7.)에서
아들아 오늘 나아가거든 마지막까지 참고 버티어서 끝끝내 이기고 돌아오라.
이기지 못하겠거든 신던 신 한 짝이라도 이 아버지는 돌아오기를 원치 않는 줄 알아라.
- 「출정하는 자제에게 주는 말」, 『신시대』(1944년 3월호)
사랑하는 병사여!맥추(麥秋) 익어가는 4백여 주(州) 넓은 벌엔 그대의 선배들이
우리의 명예와 신뢰를 짊어지고 지금 싸우고 있잖는가,
그 중에 두 분은 벌써 ‘호국의 충혼’이 되어서
정국(靖國:야스쿠니) 신사 신전 속에 고요히 누워 계시잖는가,
아직도 4년에 미치는 동아의 전화(戰火)는 끈칠 줄을 몰라서
백만의 요우(僚友)가 포첩(砲疊) 속에 분전하고 있거늘
어서 그대도 조련(操鍊)을 마쳐 나아가 군고(軍鼓)를 치라, 나아가 나팔을 불라.
- 「1천 병사의 수풀(一千兵士の森)」, 『삼천리』(1940년 12월호)
동포를 침략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는 여러 편의 글에서 미국과 영국의 침략성을 상기시켰고 이에 대립하는 일본
의 전쟁은 ‘침략’이 아닌 ‘해방’전쟁으로 묘사했다.
이 총 끝 닿는 곳, 진주만이요, 보르네오요, 적도 밑이며
이 총소리 들리는 곳, 비율빈(比律賓:필리핀)이요, 포왜(布哇:하와이), 인도 사람의 귀라
강적 영미의 심장 찌르려 한다 그 총자루 5억인가 10억인가,
[…중략…]
일본이여, 일본이여 나의 조국 일본이여
어머니여, 어머니여 아세아의 어머니 일본이여
주린 아이 배고파서, 벗은 아이 추워서
젖 달라고, 옷 달라고 10억의 아이 우나이다, 우나이다
- 「총, 1억 자루 나아간다」, 『삼천리』(1942년 1월호)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천리 옥야(沃野) 비율빈도 동양 것이요
석가 신(神) 인도 땅도 동양 것이라
주인 두고 너희들은 왜 들어왔노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백여 년을 아편 위에 영화 누리던
거만스런 홍콩 총독 몰아내듯이
마래(馬來 : 말레이시아) 포왜 인도 총독 모두 내치자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 미영을
아세아의 땅 위에 익어 오르는
벼 한 포기 석유 한 알 다치게 말고
파나마 수에즈 운하 저쪽에 몰자
- 「미영장송곡(米英葬送曲)」, <매일신보>(1942.1.13.)
▲ 김동환이 <삼천리>(1942.2.)에 발표한 전쟁시 '총1억자루’
1942년 5월, 김동환이 창간한 잡지 『삼천리』는 제호를 『대동아』라 바꾸고 본격적으로 일제의 침
략전쟁을 지원·찬양하기 시작했다. 그는 개체호에 실은 「내외동포에 호소한다-본지 대동아로 개제,
재출발에 즈음하여」(內外同胞にふ訴-本誌大東亞と改題, 再出發に際して)에서 영미를 동아에서 완전
추방할 때까지 전진하기 위해 일체의 사심을 버리고 ‘야마토(大和) 정신’ 속으로 뛰어들어 최대의
양식과 희생을 바치자고 호소했다.
침략전쟁을 지원할 ‘총후(銃後:후방)’의 자세에 대해서 『대동아』에 발표한 「군복 깁는 각시네」
는 그가 쓴 친일 시의 백미(?)다. 이 시는 이른 봄 조선임전보국단 본부에 장안 각시들이 모여 조선
군사령부에서 가져온 해진 군복을 정성스레 깁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임금님 부르심이 내리자, 이내 일어나
만 리 전장에 내달아 이렇게 옷이 다 해질 철까지 싸운 것을, 싸우신 것을.
군복 입은 남편이 어떻게 빛나 보일까
사내 된 이 살아서 군복을 입고, 죽어 국기에 말려 묻힐 것을
조선의 여인도 인제는 전장에 달리는 젊은이에 꽃다발 드리노라, 치마폭에 한 아름 안아 드리려노라.
- 「군복 깁는 각시네」, 『대동아』(1942년 5월호)
우리들은 겨우 일곱
수는 적으나 바위라도 치리라
하고 수저운 듯 손 들며 일어서는 7인의 청년
어찌 일곱이 적다 하리,
7백에서 줄고 줄어 오늘의 일곱됨이 아니고
그대들 이제 7천으로 7만으로 썩썩 늘어갈
그 일곱이 아니던가.
(……)
임금님을 위해 싸움마당에 나아가
목숨 버릴 것을 이미 각오하고 나서는 그 양 미간
나는 거기서 불을 보았다, 큰 해를 보았다.
- 「우리들은 7인」, 『대동아』(1942년 5월호)
김동환은 1943년 조선문인보국회의 심사부장을 맡은 데 이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후신인 국민
총력조선연맹의 참사로 활동했다. 일제의 신체제 운동을 수행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은 1944년 2월에 보
도특별정신대를 결성하여 조선 각지의 대회에 보냈는데 김동환은 경상북도로 배정받아 활동했다.
그는 1944년 7월에는 일본어 논문 모음집 『조선 동포에게 고함(朝鮮同胞に告ぐ)』을 편찬하여 발간
했다. 이 책은 징병제·대동아전쟁·내선일체·전시 식량증산·징병제 하의 조선부인의 역할 문제 등
을 다루었는데 필자는 언론사 사장, 일본문학보국회원, 귀족원 의원 등으로 활동하는 일본인들이었
다. 마침내 김동환은 충실한 일제의 하수인 구실을 다하고 있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에 자수, 셋째아들이 부친의 죄과를 사죄
해방 후, 1946년 2월 김동환은 조만식이 이끌던 조선민주당의 간부로 활동했다. 1948년에는 삼천리사
를 다시 열고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삼천리』를 복간, 1950년 6월까지 펴냈다.
김동환은 1949년 2월, 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수감되었다가 공민권 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김동환은
구차한 궤변으로 자신의 친일행위를 변명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전쟁 중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자수한 뒤 그는 행방불명되었다. 납북된 것으로 여겨지지만 이
후 행적은 밝혀진 것이 없다. 재혼한 소설가 최정희(1912~1990) 역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
렸으니 친일도 부창부수였던 걸까. 최정희와 낳은, 뒷날 소설가가 된 지원(1943~2013)과 채원(1946~
), 두 딸이 있다
부친의 일대기를 펴낸 바 있는 파인의 셋째아들이 2002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연 학술심포지엄에서
‘부친의 친일 죄과’를 민족 앞에 사죄한 것은 특기할 만하다.
친일인사가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참회하는 예도 드물지만, 후손이 선대의 친일 행위를 사죄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나 싶다. 파인의 삼남 김영식은 부친이 친일문인으로 지목된 것에 ‘아무런 이의가 없
다’며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선친의 행적은 분명히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경찰 총경으로 은퇴한 김영식은 반민특위 김상덕 위원장의 후손들을 직접 만나
사죄하기도 했으며, 민족문제연구소 회원이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 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
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국학자료원, 1994), ‘펴내는 말’에서
파인 김동환의 시 「웃은 죄」를 눈으로 거듭 읽어본다. 우물가 처녀에겐 나그네와 나눈 교감에 대해
서 ‘웃은 죄’밖에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시인이 자신의 나라와 민족을 부정하고 식민 지배에 투항
한 것은 어떤 변명으로도 용서받기 어렵다. 그는 그것을 알았기에 두 번에 걸쳐 자수를 감행한 것이
었을까. 꾀꼬리 가수 박재란의 목소리로 「산 너머 남촌에는」을 들으며, 파인이 노래했던 남촌은 어
디였을까를 무심히 생각해 본다.
2019. 05. 낮달
※김동환의 유명한 친일 시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김동환 / <삼천리> 1942. 1)
1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거친 물결 억센 바람 헤치고서
일억 자루의 총, 일억 국민의 어깨에 메어져 앞으로 나아간다.
이 총 끝을 막을 자 누구더냐
이 총자루 당할 자 누그더냐
태평양에, 대서양에 아무도 없고
아세아에 북미주에 아무도 없다
아하, 거룩한 싸움터로
일억 자루의 총은
노인의 어깨에도 청년의 어깨에도 메어져
화약 냄새 풍기는 전장으로 전장으로 내닷는다.
2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높은 산 깊은 바다 헤치고서
일억 자루의 총, 일억 국민의 어깨에 메어져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이 총 끝 닿는 곳, 진주만이요 보르네오요, 적도 밑이며
이 총소리 들리는 곳, 비율빈(比律賓)이요 포왜(布哇), 인도 사람의 귀라
강적 영미의 심장 찌르려한다. 그 총 자루 오억인가 십억인가.
아하, 장할시고, 그 중에도 우리들 청년은 비행기타고
하늘을 날까 잠항정(潛航艇)에 몸 실어 천길 물속 헤엄칠까
어뢰를 안을까, 탱크를 몰까
때는 왔다 때는 왔다 아세아 청년 일어설 날이 왔다.
3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총, 일억 자루 나아간다
모진 포위(包圍), 억센 압박 헤치고서
일억 자루의 총, 일억 국민의 어깨에 메어져 자꾸자꾸 나아간다
지금은 남미의 고-히밧에도
마닐라의 사탕농원에도 화약이요 피빗 냄새뿐이나
강적 영미가 물러가는 날 다시 새는 노래하고
색시는 뽕 따고 아이는 소리치리라
머지 안은 평화의 그날 맞기위하여
우리들은 어서 빵 나눠 먹고 담배 나눠 피며
한 몸 한 마음되여 저리 승리의 깃발 날리는
전장으로 전장으로 고함치며 내닷자
4
일본이여, 일본이여 나의 조국 일본이여
어머니여, 어머니여 아세아의 어머니 일본이여
주린 아이 배고파서, 벗은 아이 추워서
젓 달라고, 옷 달라고 십억의 아이 우나이다. 우나이다
그네들은 당신 집구들이 좁은 줄 아나 당신 마음 넓고 큰줄 믿고서
지금 두 손 벌려 안아 달라 외칩니다. 외칩니다
강한 몸에 어쩔 길 없어서 그 몸 더럽힌 적 있으나
아직도 그 영혼 깨끗하고 그 피 순결하나이다
아하, 늙은 아세아(亞細亞)의 산천에
이제 젊은 생명의 소리 들린다. 씩씩하게도 들린다.
오래 적적하던 우리 가슴속에도
새 세기(世紀) 동트는 나팔소리 들린다. 들린다 우렁차게
미영장송곡(米英葬送曲)
(김동환 / <매일신보> 1942.1.13)
1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미영(暴惡米英)을
천리옥야(千里沃野) 비율빈도 동양것이요
석가나신 인도땅도 동양것이라
주인 두고 너희들은 왜 들어왔노
2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미영을
백여년을 아편위에 영화누리는
거만스런 홍콩총독 몰아내듯이
마래(馬來) 포와(布와) 인도총독 모두 내 치자. ('와'가 한문으로 없어요. --; )
3
물러가라 쫓아내라 포악미영을
아세아의 땅위에 익어오르는
벼한폭 석유한알 다치게 말고
파나마 세즈운하 저쪽에 몰자
권군 취천명 (勸君 就天命) / 김동환
- 특별지원병에게 보내는 한 시인의 편지.
(김동환 / <매일신보> 1943.11.6)
1
그대는 20대 우리는 40대
부자 이대 서로 나란히 서서 전장을 내닫세.
다만 오늘은 그대 선진(先進)되고 내일날 우리 뒤따르리
안 나서면 무얼 하나
못 쳐서 오륙 십 살면 무얼 하나
차라리 한두 해도 번듯하게 살아 버리지.
번듯하게 사는 길이란 -
제 목숨 나라에 바쳐, 나라가 그 생사 맡아주심일레
그러면 살 제는 후하게 따뜻하게 뜻같게 하여주시고
죽을 젠 그 자리 거룩하고 높게 꾸며주시네.
지금, 조국은 전쟁하는 때
살고 죽고를 더욱더 군국(軍國)에 바칠 때일세.
이인석 군은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도 병(兵)되어 생사를 나라에 바치지 않았던들
지금쯤 충청도 두메의 이름없는 농군이 되어
베옷에 조밥에 한평생 묻혀 지내었겠지.
웬걸, 지사, 군수가 그 무덤에 절하겠나.
웬걸, 폐백과 훈장이 그 제상에 내렸겠나.
2
그대 안 나가면 어떻게 되나-
변호사를 하겠지, 교사나 중역이 되겠지.
그러나 한편 남대문과 종로에 폭탄이 떨어지고
그대의 처자는 미영병(米英兵)에 모욕을 당하면 어떻게 하리.
이 일은 파리 대학생과 이태리 학도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조국을 나아가 막지 않는 자엔 천벌이 내리느니라!'
또 그대가 안 나가고 이불을 쓰고 드러누울 수는 있겠나.
명춘(明春)엔 동생되는 중학생 수만이 징병으로 나서고
보국대로 좌우 친화(左右親和)가 괭이 들고 자꾸 나서고
소년들까지 징용공으로 공장에 나갈 적에
양심 있고 의리 있는 그대, 나가지 말란들 그리 될까.
어서 하루 급히 나서라, 벗이여, 학우여!
오오, 조선 동포의 대표여 꽃이여!
오오, 제국의 수재여, 빛[光]이여!
오오, 폐하의 고굉(股肱)이여, 나라의 기둥인 그대여!
부명(父命)을 받들고 어서 나서라!
군명(君命)을 받들고 어서 나서라!
때는 급하느니, 천명을 받들고 어서어서 나서시라.
* 이 시에 등장하는 '이인석'은 최초의 지원병(실제로는 강제 모병) 전사자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
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원병 '이인석'의 죽음을 찬양하고, 양심과 의리가 있는 청년이라면 당연
히 일왕(日王)의 명령을 아버지의 명령처럼 받들어 전쟁터에 나가야 한다고 선동하고 있다.
적국 항복 받고지고
(김동환 / <매일신보> 1944.1.6)
1
싸우고 또 싸우며 제 3년 들어서다
이날 아침 간절한 소원 두 가지 있아오라,
첫째는 올해에 '정국 항복' 꼭 받고 싶고
둘째는 우리 동포 모두 '지도민족(指導民族)' 되어지이다.
2
'적국 항복' 받기 위해 우리 피 더욱 흘려
흘린 피 되어요 승(升)에서 두(斗)요 석(石)으로 올리고저,
바치온 돈도 천 원이요 만 원에서
백만이요, 억천만 원으로 올리옵고저.
3
'지도민족' 되기 위해 우리 모두 무장하여
폐하의 주신 검(劍)으로 '조국일본 강토' 지키옵고저
또 우리 아이 모두 '의무교육' 받아 지혜롭고
백성들은 '연성(鍊成)' 받아 병농일여(兵農一如)에 달하옵고저.
4
아세아는 부(富)하고 크라, 올해부터
우리 모두 이 땅의 귀인(貴人)되고 지도자 되어지이다.
어서 이 흉적을 물리치고서
어서 우리 자체(自體)를 닦고 씻어서.
□ 부록7-2)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김동환 3남 김영식씨
민족반역자처단협회 /【부일 후손 들은 지금】/ 2006.07.01 12:59
[민족반역사죄]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 3남 김영식씨
"부친의 '친일 죄과' 민족 앞에 사죄"
[인터뷰] '친일문인' 파인 김동환 3남 김영식씨 정운현 기자 jwh59@ohmynews.com
▲사진1- "부친의 '친일죄과'를 대신 사죄합니다" 파인 김동환의 3남인 김씨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
대기를 펴내면서 서문 말미에 부친의 친일행적에 대해 민족과 역사앞에 대신 사죄한다고 밝힌 바 있
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지난 14일 오전 여의도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는 일제하 친일작가들의 명단과 작품목록 공개, 그리고
후배 문인들이 선배문인들의 어두운 과거사를 대신 반성하는 자리가 있었다. 친일인사 명단 공개는
지난 2월 28일 일단의 국회의원들이 708명의 명단을 공개한 데 이어 두번째다.
이어 이날 오후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친일문제 전문 연구기관인 민족문제연구소(이사장 조문기)
추최로 학술심포지엄이 열렸다. 제목은 '강요된 부역인가, 내재된 신념인가'로, 내용은 문화예술계
친일인사들의 친일논리와 성격을 다룬 것이었다.
본 행사 직전 사회를 맡은 윤경로 한성대 교수는 이날 행사에 참석한 몇몇 저명인사들을 소개하고는
이어 한 초로의 인사를 소개했다. 그는 일반석도 아닌, 장내의 뒷편 마련된 임시의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순간 참석자들의 시선이 모아졌다. 어찌보면 그는 이런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부자연스런'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는 바로 오전에 그 자리에서 발표한 친일작가 42인 가운데 한 사람인 파
인 김동환의 아들 김영식(69)씨였다.
대체 친일파로 지목된 인사의 아들이 친일파를 지탄하는 자리를 제 발로 찾은 까닭은 무엇이며, 또
주최측이 그를 떳떳이 소개한 것은 무슨 의미인가. 이같은 의문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그는 선대
의, 즉 부친의 친일행위를 부친을 대신해 민족과 역사앞에 용서를 빈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그가 그
자리에 동석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하나도 어색하지 않다.
그는 지난 94년 부친의 일대기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을 펴내면서 '펴내는 말' 말미
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가 일제 말엽에 한 때 저지른 치욕적인 친일행위를 뉘우치고 변절고충을 고백하면서
'반역의 죄인'임을 자처했던 바 있음을 되새겨 보면서, 저는 가족을 대신하여 국가와 민족 앞
에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친일인사 가운데 해방후 자신의 친일죄과를 사죄한 사람이 없지 않다. 민족대표 33인중 1인으로 친일
로 변절했던 최린은 반민특위에 끌려와 눈물로 자신의 죄과를 사죄했으며, 일제때 전남도 광공부장
출신으로 제2공화국 때 국방장관을 지낸 현석호는 '한 삶의 고백'이라는 자선전을 통해 자신의 친일
행적을 뉘우친 바 있다. 또 일제말기 군수를 3년여 지낸 걸 두고 부끄럽다며 남들이 오해할 정도로
참회를 해오고 있는 전 홍익대 총장 이항녕씨도 당연히 이 대열에 설만한 사람이다. 이런 사례가 많
을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겨우 이 정도가 전부일 정도다. 대부분의 친일인사들은 말로, 더러는 자서
전이나 후학들이 쓴 일대기에서 글로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변명하거나 심지어 미화, 왜곡, 은폐해 왔다.
자신의 죄과도 아닌, 선대의 죄과를 대신 뉘우치고 용서를 구하기는 말만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쉽다면 아마 김씨와 같은 사례가 속출했을 것이나 김씨 전후로 아직 그런 사례는 확인되지 않고 있
다. 16일 그를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나 최근의 심경, 근황 등을 들었다.
- 지난 14일 민족문학작가회의 등에서 친일문인 42인의 명단과 작품목록을 공개했다. 그 속에 선친의
명단도 포함돼 있는데 심경이 어떤가?
"새로운 사실도 아니고, 이미 내 자신이 수용한 내용이어서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그날 제시된 아버
지의 친일작품은 40여건으로, 내가 찾아낸 52건에도 미치지 않는 수치다. 아버지는 반민특위 재판부
에서 실정법(반민법)으로 처벌을 받은 인물로, 죄상을 두고는 왈가왈부할 것이 전연 없다. 내 자신이
공개석상에서 부친의 친일행위를 사죄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버지의 경우는 신문기자, 가곡작
사자로서는 공(功)이 크나 문인, 잡지인, 출판인으로서의 행적에는 분명 문제가 있다.
그저께 학술세미나장에 갔더니 사회자가 뜻밖에 나를 인사를 시켜 미안한 마음으로 두 번이나 인사를
했다. 그분들이 왜 나를 소개했는지를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참석자들이 나를 향해 항의를 하지 않았
는데 아마 내가 아버지의 친일죄과에 대해 사죄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 부친을 친일문인으로 지목한 이번 결과에 대해 승복하는가?
"아버지가 명단에 포함된 것에 대해 아무런 이의가 없다. 아버지는 반민법에 의해 처벌을 받은 사람
이다. 다만 친일문인을 가늠하는 잣대로 식민주의와 파시즘 옹호를 들이댄 것은 조금 이견이 있다.
그들의 친일행태를 '이즘', 즉 '주의'로만 판단하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본다. 친일문제는 현시
점에서 역사적인 교훈의 사례로 이야기돼야 한다고 본다. 내 자신이 친일문제를 연구하는 민족문제연
구소의 회원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며, 그래서 그날도 학술회의장을 찾은 것이다."
▲ 사진2-파인 김동환이 조선일보 총독부 출입기자 시절 총독부로 받은 촌지를 모아 창간한 잡지
<삼천리>. 이 잡지는 초창기 민족적 색채가 짙었으나 중일전쟁 이후 친일잡지로 돌아섰다.
- 부친의 친일행적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첫째, 문인으로서 시와 평론을 통해서 50편 정도의 친일성 글을 썼다. 또 일제하 전시협력단체인 임
전보국단 출범의 산파역을 맡았으며, 조선문인협회 간사 등 친일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하기도 했다.
둘째, 잡지인으로서 1938년도 이후 친일 성향의 잡지인 <삼천리>, <대동아>를 발행했으며, 셋째, 출
판분야로 단행본 출간에서도 역시 같은 문제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3가지 분야에서 친일행적을 남겼
다고 본다.“
- 친일경력자 후손 가운데 유독 혼자 선대의 친일죄과를 사죄했는데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93년 3월 모친이 돌아가신 후 누이동생(김영주·시인·캐나다 거주)과 함께 아버지의 행적을 기록으
로 정리해 보자고 의견일치를 보고서 아버지 관련자료를 수집한 것이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아
버지의 일대기는 그로부터 1년 뒤인 94년 11월 출간하게 됐는데, 자료수집 과정에서 아버지의 친일행
적이 담긴 자료도 같이 입수하게 됐다. 아버지의 친일행각을 대신 사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아버
지가 해방후 간행한 <꽃피는 한반도>라는 책에서 '반역의 죄인'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친일에 대해
사죄한 글을 보고 나서다. 아버지가 사죄한 이상 나도 역사와 민족 앞에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해 아버지 일대기를 펴낼 때 서문에 그 내용을 실었다"
- 다른 친일경력자 후손들이 사죄하지 않는 이유는 뭐라고 보나?
"남의 일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나는 내가 관련된 일만 상관한다. 잘 모르겠다."
- 부친을 대신해 사죄를 했을 때 주위의 반응은 어땠나? 혹 쓸데없는 짓을 했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었나?
"나를 잘 알고 아껴주시는 어떤 대학교수 한 분이 그런 일을 왜 했느냐고 따지듯이 말한 적이 있다.
그 분은 나의 사죄가 좋지 않은 선례가 될 수 있다, 꼭 그렇게 해야 되는 거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친일파에 대한 잣대 자체가 분명하게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에게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이
었다. 그러나 나는 부친이 실정법으로 처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거기에 관해서 아무런 의의가 없
다고 봤다."
▲ 사진3-<삼천리>를 발행하던 당시의 파인 김동환과 문인들. 왼쪽부터 춘원 이광수, 이선희,
모윤숙, 최정희, 그리고 파인. 최정희와 파인은 한 때 동거했었다.
- 이번에 발개된 친일문인 명단 작성은 적절하다고 보는가?
"문학인 분야는 상세하게 자료가 분석이 되어서 불만이 없다. 해방전에 우리 나라에서 알려진 문인이
50여명이었는데 이번에 친일문인으로 지목돼 발표된 사람의 숫자가 42명이다. 친일성이 극히 경미하
거나 작품이 하나밖에 안돼 이번 명단에서 제외된 정지용, 김정한, 김사량 등 몇몇을 포함하면 대부
분의 문인들이 친일을 한 셈이다. 항일시인이랄 수 있는 윤동주, 이육사, 이상화 등 겨우 몇 사람이
빠지는 셈이다. 이것은 언젠가 누구의 손에서라도 밝혀지게 되는 사안이다. 문학분야에 비해 다른 분
야는 상대적으로 연구가 미진하다고 본다."
- 14일 장철 광복회장이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친일파는 다 죽고 후손만 남았으니 이제 (친일
파를)용서하자고 했는데, 이같은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도 그 내용을 봤다. 그 내용에 대해 민족문제연구소에서 강하게 반발한 것으로 안다. 친일파 청산
문제에 대해 의견이 다를 수는 있다고 본다. 그러나 광복회 회장이 '친일파청산 중단론'을 주장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은가. 광복회 내부에서 그런 얘기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
이 그런 이야기를 할 경우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공(功)이 있을 경우 과(過)가 상쇄될 수 있다고 보는가?
"이율배반적인 얘기가 되겠는데, 잘 된건 잘된 것이고 잘못된 건 잘못된 것이다. 따로 생각해야한다.
공이 있다고 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 흔히 공과론을 거론할 때 자주 거명되는 김성수와 김활란에 대한 그동안의 평가는 제대로 돼 왔다
고 보는가?
"나는 아버지 것만 관심이 있다. 다른 사람 것은 잘 모르고, 또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하기 곤란하다."
- 우리사회에 민족정기는 반듯하게 세워져 있다고 보는가?
"민족이 존재하는 한은 민족정기가 바르게 서고 전승이 되어야 한다. 다만 시대상황에 따라 그것이
조금 가려질 때도 있다고 본다. 친일문제 연구가 본격 시작된 지 10여년이 지났지만 그런 노력에 비
해서 역작용이 오히려 강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언젠가 서강대에서 친일파 모의재판이 열려 보러 간
적이 있다. 행사 전에는 행사알림 기사가 나왔는데 정작 대상자 10명이 모두 사형판결을 받은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곳에서도 보도하지 않았다. 다루기 어려운 사안이었는지 빈 메아리일 뿐이었다. 신문이
이같은 사안을 다뤄야 한다고 본다."
- 그간 언론의 친일문제 보도가 미약했다는 얘긴가?
"종합적으로 판단해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신문보도가 좀 의아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사전에 행사소
개는 보도해놓고 그 결과를 보도하지 않는다면 그 보도태도는 납득하기 어렵다. 친일문제와 같은 주
제가 언론에서 소외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 부친과 관련된 자료를 오랫동안 수집해 왔는데, 그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이 있다면.
"지난 93년 어머니(신원혜)가 작고하신 후 아버지 관련기록을 모으기 시작한 지 근 10년이 돼 간다.
아버지의 친일자료를 접하면서 언젠가 가진 의문은 대체 부친이 어떤 이유로 친일의 길로 들어섰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차에 모 대학교수를 통해 그가 국회도서관에서 아버지가 반민특위에 잡혀와서
쓴 '자술서'를 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그 교수에게 여러 차례 자료를 좀 보여달라고 부탁했으
나 자기 논문에 먼저 사용한 뒤 보여주겠다니 몇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 사진4-김씨의 부친 파인 김동환이 자신이 친일한 이유를 "잡지를 위해"라고 보도한 <평화일보> 기
사(1949.5.8)
늘 아버지의 친일변절 이유가 궁금했는데 최근에 그 해답을 찾았다. 금년 5월쯤에 한 자료수집가가
1949년도에 발행된 신문들을 내게 보여준 적이 있는데 거기서 1949년 당시 반민특위서 재판을 받고
있던 아버지 관련 기사를 발견했다. 그 기사에서 아버지는 자신은 잡지를 지키기 위해 친일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아버지는 시인이자 기자출신이지만 <삼천리> 창간 이후 잡지에 미쳐 있
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지난해 부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한 것으로 안다. 지금 돌아보면 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나, 또 자식으로서 어떤 정을 느끼는가?
"지난해 파인탄생 100주년행사는 총 7회의 행사를 가졌는데 많은 분들의 은혜를 입었다.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드린다. 아버지는 공인이었기 때문에 탄생100주년 행사도 공인으로서의 모습을 부각시
켜 행사를 진행했다. 따라서 아버지의 어두운 면도 당연히 드러냈다. 올 9월 100주년행사 기념 자료
집을 내는데 여기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수록된다. 30여 편의 논문, 평론, 언론의 보도기사 등 파
인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적으로 아버지는 대단히 노력가였던 것 같다. 아버지는 초기에는 분명 민족지사의 풍모
와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선구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 이후에 시국순응이다 시
류편승이다 해서 결국은 친일변절의 길로 들어선 셈이다. 이런 형태로 친일대열에 끼여 잡지를 만들
다가 43년 3월에 잡지가 막을 내리면서 뜻한 바를 이루지도 못하고 결국 하루아침에 몰락한 그런 분
이다. 역사적 평가에서 공과가 교차된 아버지의 행적은 분명히 그 분야에서 일하는 후배들에게 교훈
이 될 것이다. 잘 한 것은 잘 한대로, 못한 것은 못한대로."
김영식씨는 어떤 인물?
파인 김동환의 3남 김영식 씨는 1933년 서울출생으로, 경복고,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30여년간
내무부, 청와대 비서실, 주불대사관 등에서 경찰공무원(최종계급은 총경)으로 근무하다 92년 정년퇴
직했다.
93년 모친의 타계를 계기로 부친의 행적에 관한 자료을 수집, 이듬해 ”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
애와 문학“을 펴냈는데 고서적상, 고서수집가 사회에서는 '꾼'이자 '효자'로 소문나 있다. 그는 부
친 관련 자료라면 전국을 찾아 다니면서 자료를 수집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웬만한 연구자 뺨칠 정
도로 역사·문학 분야에 폭넓은 식견을 갖추었다.
10년 가까이 모은 자료를 토대로 그는 지난 95년 <파인 김동환 전집>(전5권), <삼천리 영인본>(전 32
권)을 펴낸 데 이어, 98년에는 <파인 김동환 문학연구>(전 30권)를, 2000년에는 ”언론인 파인 김동
환 연구-신문기자. 잡지인“(전 15권)을, 그리고 지난해에는 부친과 부친의 동거인 소설가 최정희씨
가 보관해온 서한을 묶어 <작고문인 48인의 육필서한집>(영인본, 도록)을 펴냈다. 김씨가 펴낸 파인
관련 자료집들은 파인과 문학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난해 파인 탄생100주년을 맞아 그는 시화전, 가곡의밤, 자료전 등 총 7개 분야에서 다채로운 행사
를 펼쳤는데 주변에서는 "일개인이 할 수 없는, 초인적인 행사를 치렀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6.25때
납북된 부친의 '최후'를 확인하기 위해 어서 빨리 통일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 정운현 기자
2002/08/17 오후 4:07
□ 부록7-3) ‘노천명, 여성 화자를 앞세운 친일시들
이 풍진 세상에 / 친일문학 이야기 / by 낮달2018 2021. 5. 16.
▲ 노천명(1912~1957) ⓒ 동아일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은 시인 노천명(盧天命, 1912~1957)의 「사슴」을 아느냐 모르느냐에
따라 답이 달라진다. 한 퀴즈 프로그램에서 유명 연예인이 과감히 ‘기린’이라고 답하여 장안의 화
제가 되었듯 목이 길기로는 기린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기린도 목이 길어서 슬픈가? 사슴이 ‘목
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 된 것은 한 시인의 부름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외
로운 삶’을 노래한 시에서 ‘사슴’은 곧 감정 이입의 기법으로 투영된 시인 노천명 자신이었다.
일제에 부역한 「사슴」의 시인
내가 우리 현대시를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때 한림출판사에서 펴낸 『영원한 한국의 명시』를 통
해서였다. 나는 집안을 굴러다니던 세로쓰기의 이 장정 본 시집으로 우리 현대시에 입문하였다. 이
시집에서 유독 기억에 남는 시인이 노천명이다.
정작 그의 대표작인 「사슴」보다는 「고향」이라는 시가 더 살갑게 다가왔다. ‘아프리카에서 온 반
마(斑馬)처럼’이라는 구절이 이상하게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물론 시 자체에 대한 호오라기보다 시
가 초등학생도 알아먹을 만큼 쉬웠기 때문이다.
언제든 가리
마지막엔 돌아가리.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조밥이 맛있는 내 고향으로.
아이들 하눌타리 따는 길머리엔
학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며 지나가고
대낮에 여우가 우는 산골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
목사가 없는 교회당
회당지기 전도사가 강도상을 치며
설교하는 산골이 문득 그리워
아프리카서 온 반마(斑馬)처럼
향수에 잠기는 날이 있다.
- 「고향」, 『인문평론』(1940년 6월호)
노천명은 황해도 장연 출신이다. 진명여학교를 나와 1934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이화여전 재학 중 『신동아』(1932)에 「밤의 찬미」를 발표하며 등단하였다. 졸업 후 《조선중앙일
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였으며, ‘극예술연구회’와 『시원(詩苑)』의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8
년 첫 시집 『산호림(珊瑚林)』(1932)을 펴냈다.
▲ 노천명이 펴낸 시집들. 왼쪽부터 <산호림>(1932), 창변(1945), <별을 쳐다보며>(1956)
노천명이 친일에 참여한 것은 1940년대다. 1941년 7월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한 ‘호국신사(護國神社)
어조영지(御造營地) 근로봉사’에 참여한 이래 조선문인협회의 간사, 조선임전보국단 산하 부인대(婦
人隊)의 간사로 일하면서 친일 활동을 벌였다. 1942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군복 수리 근로’에
참가하였고, 조선임전보국단에서 주최한 ‘저축 강조의 결전 대강연회’에서 연사로 활동하였고, 징
병제 선전을 위해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단의 일원으로 경상남도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대동아전 1주년 기념 국민시 낭독회에도 참여하였다.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 주 공을 세워 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山)만 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부인근로대」, 《매일신보》(1942년 3월 4일 자)
2차 대전이 점차 치열해져 가던 1940년대에는 남자들만 징용과 징병으로 끌려간 것이 아니었다. 여자
들은 여자들대로 애국금차회(愛國金釵會)를 통해서 금비녀를 헌납하고 군복 수리 등에 동원되었으며,
말기에는 여자정신대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노천명의 「부인근로대」는 군복 수리에 동원된 부인을
통해서 ‘총후(銃後)’의 각오를 노래한 것이었다.
* 애국금차회 : 1937년에 금차(금비녀) 등 금제 장신구의 헌납과 군인 환송연·위문 등 ‘황군 원
호’를 강화할 목적으로 총독부가 사주하여 조직한 친일 단체. 일제 수작자(受爵者)들과 친일 장교의
아내 등 상류층 부녀와 중 견 여류를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어머니와 누이를 내세운 ‘친일시’들
▲ 노천명이 <매일신보>에 발표한 시 '진혼가'(1942년 2월 28일 자)
노천명은 주로 여성(어머니 혹은 누이) 화자를 내세운 시를 통해 일제에 부역하였다. 그의 시에는 참
전 군인들의 무운을 기원하거나 전몰 병사들을 추모하고 학병 출전을 권유하며, 일본군의 승전을 찬
양하거나 후방의 여성이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가다듬는 내용 등이 담겼던 것이다.
노천명은 시를 통해 일제의 침략전쟁 수행을 옹호하고 미화하였다. 시 「젊은이들에게」를 통해서는
일본의 선전포고 행위를 미화하였고, 「기원」을 통해서는 총후 여성의 정신 자세를 노래하였다.
「싱가폴 함락」에서는 일제의 승전을 해방으로 미화하였다. 특히 ‘동아 민족’의 침략자로 규정된
‘영미(英米)’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하고, ‘대동아공영권’ 건설의 당위성을 강조하였다.
늙은 영국을 대해서
저 혼혈아 아메리카를 향해서
제국(帝國)은 드디어 선전을 포고했다
정의를 위해 대동아 건설을 위해서
우리는 불수레를 달렸다
- 「젊은이들에게」, 『삼천리』(1942년 1월호)
신사(神社)의 이른 아침
뜰엔 비질한 자욱 머리 빗은 듯 아직 새로운데
경건(敬虔)히 나와 손 모으며 기원하는 여인이 있다
일본의 전 아세아의 무운을 비는 청정한 아침이어라
어머니의 거룩한 정성
아내의 간절한 기원
아버지를 위한 갸륵한 마음들……
같은 이 시간 방방곡곡 신사가 있는 곳
아름다운 이런 정경이 빚어지고 있으리
- 「기원」, 『조광』(1942년 2월호)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毒牙)에서
-「진혼가」, 《매일신보》(1942년 2월 28일 자)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坡)를 뺏어 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寺院)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弔喪)하는 만종(晩鐘)을 울려라
- 「싱가폴 함락」, 《매일신보》(1942년 2월 19일 자)
추녀 끝 드높이 나부끼는
일장기ㅅ발도 유난히 선명한 이 낮
고운 처녀들아 꽃을 꺾어라
푸른 하늘에 흰 비둘기를 날려라
- 「흰 비둘기를 날려라」, 《매일신보》(1942년 12월 8일 자)
「흰 비둘기를 날려라」는 일본군의 진주만 습격(1941) 1주년을 맞아 일본군의 명복을 비는 내용이
다. 특히 진주만 폭격에서 숨진 일본군 의 충성 뒤에 뛰어난 ‘아홉 어머니’, ‘굳센 일본의 아내’
가 숨어 있다는 점을 환기하기도 하였다.
문인들의 친일 행위를 들여다보면 일정한 시기를 지나면서 이들의 반민족적 일탈이 매우 위태위태하
게 치달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본인이 얼마나 체감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원색적
이고 노골적인 자기 부정과 굴욕의 수사들 너머에 최소한의 민족적 정체성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다.
노천명 역시 예외가 아니다. 친일에 대한 변명이나 해명도 따로 보이지 않으니, 일말의 갈등이나 번
뇌조차도 상정해 볼 수 없다. 정말 그는 친일 부역, 그 반민족적 선택을 전폭적으로 수용했던 것일
까. 노천명의 친일은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는 시기까지 일관되게 이루어졌다.
전쟁이 말기로 접어들면서 친일시의 내용도 일본군의 승리를 찬양하는 것에서 전쟁 동원 논리를 전파
하는 것으로 변해 갔다.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전쟁터로 나갈 것을 선동한 시로 「님의 부르심을 받들
고 서」와 「출정하는 동생에게」 등이 있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쟁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더면 나도 사나이였더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년 8월 5일자)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매일신보> 1943년 8월 5일자). 조선인 징병제가 시행에 대한 찬양시.
노천명은 가미카제(神風) 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청년 마쓰이(松井) 오장의 명복을 비는 추모
시 「신익(神翼)–마쓰이 오장 영전에」(《매일신보》 1944년 12월 6일자)를 발표하고, 1944년 12월
《매일신보》의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에 「군신송(軍神頌)」을 싣는다. 병사들의 죽음을 ‘거
룩한 역사’를 완성하기 위한 ‘아름다운 희생’으로 미화 한 시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 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 「군신송(軍神頌)」, 《매일신보》(사진판, 1944년 12월) 106
▲ 1944년 12월 대동아전쟁 3돌 기념 특집호로 제작한 『매일신보』(사진판)에는 카미카제특공대로
나가 전사한 조선인 군인 사진과 함께 노천명의 군신송(軍神松)도 실려 있다.
전쟁 때 부역 혐의로 수감, 불우한 만년
1945년 2월에는 두 번째 시집 『창변(窓邊)』을 간행하면서 「흰 비둘기를 날려라」, 「진혼가」,
「출정하는 동생에게」, 「승전의 날」, 「병정」, 「천인침(千人針)」, 「학병」, 「창공에 빛나
는」, 「아들의 편지」 등 9편의 친일시를 수록하였다. 이 시집은 해방 직후에도 친일시만 뺀 채 계
속 출판되었다.
노천명의 친일은 시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단상·논설·참관기 등을 통해서도 친일 행위를 계속하였
다. 수필 「싸움하는 여성」에서 그는 총 후 여성으로서 생산 증대에 노력할 것을 주장하는 등 결연
한 모습을 유감없이 연출한다.
대동아전쟁의 승패는 결국에 있어서 적국여성들과 일본여성의 근로의 투쟁에 있을 것입니다. ……유복
자의 외아들을 전지로 바치는 늙은 어머니도 있습니다. 엊그제 혼인한 남편을 특별지원병으로 내보내
는 젊은 아내도 있었습니다. ……여자정신대는 이때 우리 여성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길인 줄 압니다.
- 「싸움하는 여성」, 『조광』(1944년 10월호)
친일에 눈먼 문인들이 시로, 수필로 전쟁을 찬미하고 젊은이들의 희생을 요구하였지만, 이미 대세는
꺾이고 일본은 패망의 길로 접어들었다. 바칠 외아들도 남편도 없었던 것이 노천명에게 있어 다행한
일이었을까.
해방이 되었지만, 시간은 여전히 노천명의 편이 아니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못해 서울에 남았고 북한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울 수복 후 노천명은 부역자 처벌 특별
법에 따라 20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문인들의 석방 운동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본인의 선택과 그 결과이긴 하지만, 노천명은 여느 친일 문인들과 달리 불운하였다. 그는 1957년 백
혈병으로 사망하였다. 향년 46세. 2001년 이후 한국시연구협회에서 노천명 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수필·평론 등 9개 부문에서 시상하고 있다.
시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한 것은 그의 문학을 기리고자 함일 터이다. 그러나 이 기림은 일제
의 침략전쟁을 옹호하고 동포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떠미는 데 쓰인 그의 친일 부역은 감춘 채 나머지
성취만을 선택적으로 비추고 있다. 굴절된 역사 속에 노천명은 여전히 ‘사슴’의 가련한 시인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2019. 5. 낮달
□ 부록7-4) '사슴의 시인' 노천명은 왜 그토록 구차했을까
정소슬의 詩내가 / 친일문인들 / by 정소슬 posted Apr 05, 2016
[백운동천을 따라 서촌을 걷다 16] 다재다능했지만 권력에 굴복했던 노천명 시인의 가옥
[오마이뉴스] 2016.04.04 21:15 글: 유영호(ecosansa) 편집: 김예지
▲ 노천명이 1919년 경성에 와서 1949년부터 그가 사망한 1957년까지 거주한 집 ⓒ 유영호
서촌 '이상의 집'에서 불과 2~3분 거리에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시인, 노천명의 집이 있다. 비
록 세월이 흐르며 변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모습을 그대로 갖고 있기에 2015년 서울시 미래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60년 가까이 되었지만, 이곳에 서서 시인 노천명을 상상
해 보기로 하자.
노천명의 시 가운데 <사슴>이 워낙 유명한 탓에, 보통 우리는 그에게 '시인'이라는 칭호를 붙인다. 하
지만 그는 시인으로 활동할 뿐만 아니라 소설가와 언론인으로도 재능을 보여준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노천명은 1911년 황해도 장연 태생으로, 본명은 노기선이었는데 어릴 때 병으로 사경을 헤맨 뒤 지금
의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또 그는 부친이 사망한 뒤 1919년 경성으로 올라와 종로구 체부동 이모 집
에서 살면서 진명보통학교와 진명여고를 거쳐 1934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졸업했다. 그러다 해방된 후
1949년 이곳 누하동 225-1번지로 이사를 와서, 1957년 6월 이곳에서 숨졌다.
다재다능한 시인, 권력 앞에 갈대가 되다
▲ 노천명 ⓒ 국어국문학자료사전
노천명의 활동 상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934년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4년간 근무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유명한 시 <사슴>도 이때 발표
되었다. 그 뒤 1938년에는 '극예술연구회'에서 활동했고 <조선일보> 기자가 되었다.
그러다 1943년에는 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기자가 되어 '승전하는 날', '출정하는 동생에게',
'진혼가' 등 다수의 친일 작품을 발표했다. 광복 후에는 거센 친일파 척결 분위기에 대외활동을 자제
하고,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쟁이 발발했다.
곧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미쳐 피난 가지 못한 노천명은 이때 월북 작가인 임화, 김사량 등이 주
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문화인 총궐기 대회' 등의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다시 유엔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노천명은 좌익분자 혐의로 자그마치 20년의 실형을 선
고받았다. 하지만 여러 문인이 구명운동을 벌였고, 약 6개월간 투옥한 뒤 1951년 4월 석방됐다.
그 후 노천명은 공보실 중앙 방송국에서 일하고, 3차 시집을 발표했지만 건강이 악화됐다. 1957년 6
월 16일엔 재생불능성 뇌빈혈로 쓰러졌고, 46년이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다.
노천명은 그의 대표작 '사슴'으로 인하여 독자들에게는 한없이 순수한 시적 낭만에 잠긴 소녀처럼 상
상된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만할 정도의 도도함과 결벽증을 지닌 여성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성품으로 인하여 동료들과 자주 충돌하였으며, 누구에게도 곁을 주지 못해 독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대처럼 꺾어는 질망정 구리 모양 휘어지기가 어려운 성격"이었다고 그는
<자화상>에서 고백하였다.
하지만 그런 도도함조차 권력 앞에서는 한낱 갈대에 불과했나 보다. 일제강점기 총독부 권력에 굴복
했고, 또 전쟁 당시 인민군과 유엔군의 권력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그때그때 굴종한 노천명의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에게 도도함이란 기회주의와 같은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일본 패전 후 삭제해버린 친일시, 그는 구차했다
▲ 해방 직전 친일시를 실어 출간했다가 해방 후 친일시만 잘라내어 다시 출간한 시집 《창변》의
목차, 친일시는 창호지로 가렸다. ⓒ 유영호
이런 면모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그는 해방 전인 1945년 2월 25일 시집 <창변>
을 출간하며 성대한 출판 기념회를 했다. 그 시집에는 친일시 9편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런데 불과 6
개월 뒤 일본이 패전하고 해방이 되자 그는 그 시집에서 친일시 9편을 빼고 계속 출판했다.
친일시는 시집의 마지막 부분에 편집되어 있었기 때문에, 뒷부분의 친일시를 본문에서 없애고 흔적을
지웠지만 목차에는 그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 '재단장판'을 유통한 것이다. 물론 목차도 친일시가 나
열된 부분은 뜯어냈지만, 다른 시와 섞여 나열된 페이지는 친일시의 제목을 창호지로 가렸다. 참으로
구차한 행위다.
서울시가 이곳을 미래유산으로 지정할 때 어떠한 이유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 없고, 또 이곳을
찾을 많은 관광객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할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최근 일본인 관광객이 이 일대를
많이 찾으니 그들을 위해 노천명의 유명한 이 시를 이곳에 써 놓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다.
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오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 1943. 8.5)
▲ 조선인징병제 실시를 찬양한 노천명의 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대한매일신보 1943.8.5)
참고로 노천명은 서울 중곡동 천주교 묘지에 묻혔다가, 개발에 밀려 1973년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천
주교 묘지에 그의 언니 노기용과 함께 나란히 안장되었다. 고양시에서는 그의 시비 건립을 추진했으
나, 시민단체들이 그의 친일 경력을 들어 이를 반대하면서 취소되었다.
※ 여기 노천명의 친일시를 원문 그대로 소개한다.
싱가폴 함락
(노천명 / 1942.2.19. 매일신보)
1
아세아의 세기적인 여명은 왔다
영미의 독아에서
일본군은 마침내 신가파(新嘉披)를 뺏아내고야 말았다
동양 침략의 근거지
온갖 죄악이 음모되는 불야의 성
싱가폴이 불의 세례를 받는
이 장엄한 최후의 저녁
싱가폴 구석구석의 작고 큰 사원들아
너의 피를 빨아먹고 넘어지는 영미를 조상하는 만종을 울려라
얼마나 기다렸던 아침이냐
동아민족은 다같이 고대했던 날이냐
오랜 압제 우리들의 쓰라린 추억이 다시 새롭다
일본의 태양이 한번 밝게 비치니
죄악의 몸뚱이를 어둠의 그늘 속으로
끌고 들어가며 신음하는 저 영미를 웃어줘라
점잖은 신사풍을 하고
가장 교활한 족속이여 네 이름은 영미다
너는 신사도 아무것도 아니었다
조상을 해적으로 모신 너는 같은 해적이었다
쌓이고 쌓인 양키들의 굴욕과 압박 아래
그 큰 눈에는 의흑이 가득히 깃들여졌고
눈물이 핑 돌면 차라리 병적으로
선웃음을 쳐버리는 남양의 슬픈 형제들이여
대동아의 공영권이 건설되는 이날
남양의 구석구석에서 앵글로색슨을 내모는 이 아침 ---
우리들이 내놓는 정다운 손길을 잡아라
젖과 꿀이 흐르는 이 땅에
일장기가 나부끼고 있는 한
너희는 평화스러우리 영원히 자유스러우리
얼굴이 검은 친구여!
머리에 터번올 두른 형제여!
잔을 들자
우리 방언을 서로 모르는 채
통하는 마음-굳게 뭉쳐지는 마음과 마음-
종려나무 그늘 아래 횃불을 질러라
낙타 등에 바리바리 술을 실어 오라
우리 이날을 유쾌히 기념하자-
부인 근로대
(노천명 / 1942.3.4 매일신보)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을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노천명 / 1943.8.5 매일신보)
남아라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드면 나도 사나이였드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
갑옷 떨쳐입고 머리에 투구 쓰고
창검을 휘두르며 싸움터로 나감이
남아의 장쾌한 기상이어든-
이제
아세아의 큰 운명을 걸고
우리의 숙원을 뿜으며
저 영미를 치는 마당에랴
영문(營門)으로 들라는 우렁찬 나팔소리-
요랜만에
이 강산 골짜구니와 마을 구석구석을
흥분 속에 흔드네-
군신송軍神頌
(노천명 / 1942.12 매일신보)
항상
거룩한 역사엔 피가 흘렀다
아름다운 장章 우엔 희생이 있었다
유리같이 맑은 하늘 아래
조국은 지금 고요히
세기의 거체巨體_--
새 아세아를 바로잡고 있다
앞으로 앞으로 오직 돌진이 있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는
남방 거친 파도 위에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싸움 하는 나라의 거리다운
네거리를 지나며
12월의 하늘을 우러러본다
어뢰를 안고 몸으로
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성좌처럼 솟는다
▲출격하는 가미가제에게 여고생들이 사쿠라꽃 가지를 흔들며 전송하고 있다
Chiran high school girls wave kamikaze pilot
□ 부록7-5) 盧天命과 趙敬姬 兩人에 死刑求刑
<朝鮮日報> 1950. 10. 29
盧天命과 趙敬姬 兩人에 死刑求刑
북한공산괴뢰군남침을기회로 이에부역한시인노천명(盧大命)조경희(趙敬姬)양인에대한 중앙고등군법회
의는二십七일하오一시반부터 대법원二호법정에서재판장고원증(高元增)중렁주심 법무사조병일(趙炳日)
중령□심판관한동성(韓東□)대위 검찰관이용석(李용錫)대위 특별변호인 김덕주(金德柱)대위백석하에
개정되어 사실심리가 있었는데검찰관으로부터 노·조양인에대하야 六·二五이후에도 도피할기회가있
었다는것 문학가동맹이 어떠한단체며 그에가맹하면 어떠한일을한다는것을잘알면서가맹하여 그들에적
극협력하였다는것은 용서□수없음으로 마땅히국빙경비법제三십二조에비추어 사형을구형한다는 최후논
고가있고 하오五시반一단페정하였다 그리고재판장의최후언도는 二십八일상오에 서면으로있을예정이다
□ 부록7-5-1) 盧,趙兩人에 各二十年懲役
<朝鮮日報> 1950. 10. 30
盧,趙兩人에 各二十年懲役
부역한혐의로 二십七일사형구형을받은 노천명(虛天命)조경히(趙敬姬)양인에 대한 언도는 二□八일□오서면으로 있었는데 양인에게각각二십년징역을 언도하였다한다
주익종의 인물이야기, 노천명 / 이승만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