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북경 천진 여행 ⑥이화원 –
江南을 옮겨놓고 上帝님도 모셔오는
엄청난 權勢가진 태후님이 뭐가 아쉬워
아내가 아끼는 외투 벗어놓고 가라시나요?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2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 2024/04/22(월) 실재 일정 타임테이블
호텔조식(06:00-06:50)->이화원 이동(06:50-09:20)->이화원 관람(09:20-11:30)->
용경협 이동(11:30-13:00)->중식(13:00-13:30)->용경협 탐방(13:30-14:30)->
팔달령 이동(14:45-15:30)->팔달령 만리장성 탐방(15:30-16:30)->북경이동(16:30-17:30)->
발맛사지 및 시내관광(17:30-18:30)->석식(19:00-20:00)->랑팡호텔(20:00-22:00)2泊
쉐라톤 랑팡 차오바이 리버 호텔(SHERATON LANGFANG CHAOBAI RIVER HOTEL)
북경 천진 여행 ⑥이화원(1)
아침 일찍 일어나 랑팡호텔 주변을 둘러보다.
넓은 포플러숲 위로 붉은 해가 솟아오른다.
호텔도 깔끔, 조식도 깔끔, 깔끔 랑팡이다.
검문소를 거쳐 붐비는 북경 6환도로를 하나씩 격파해 나가다 보니
차창밖으로 올림픽 메인스타디움 냐오차오(鳥巢)가 보인다.
(2)
도착한 이화원 입구는 인산인해.
중국 시골 사람들 평생 소원이 북경 관광이고
그런 관광을 국가에서 지원해준다니
관광지 어디든 시골에서 온 중국인들로 바글바글.
동문에 들어가자마자 보인는 서태후의 섭정처 인수전(仁壽殿) 앞도 인산인해.
우측 오솔길로 가니 한적, 조그만 호수와 수양버들이 어우러진 함원당(涵遠堂) 앞이다.
함원당을 지나 노송과 백송이 휘늘어진 오솔길을 따라가다
소주(蘇州)街, 사대부주에 다다랐을 때 아내가 외투 분실했다며 아연실색.
함원당으로 돌아가 찾아볼까 생각하다
서태후님이 탐이 나 가져간 외투 찾을 자신이 없고
너무 멀고 일행에 폐 끼칠수 없어 포기.
서태후님께 30만원짜리 외투 헌납.
(3)
건륭제가 모친을 위해 조성한 후호(后湖)의 강남 소주(蘇州)街,
서장 지방 승려들을 위한 티베트의 유명 사찰 쌍예쓰(桑耶寺)를 복제한
사대부주(四大部洲), 향암종인지각(香岩宗印之閣).
중턱까지 올라가 관람한 후 소주가로 내려와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의 기슭의 불향각 (佛香閣)과
십칠공교(十七孔橋) 옆을 지나
남문 선착장에 도착 후 이화원 남문을 나오다.
배달9221/개천5922/단기4357/서기2024/04/22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조식도 좋고 호텔 시설도 좋은 랑팡쉐라톤호텔의 아침
2) 막히는 고속도로와 검문을 뚫고 도착한 북경 중심에 올림픽주경기장도 스쳐지나가도...
2008년 8월 8일 열렸던 제29회 북경 올림픽대회의 주경기장이며, 나뭇가지로 만든‘새 둥지’를 닮아
‘냐오차오’(鳥巢, Bird's nest)라는 별칭으로 더욱 유명하다. 올림픽 그린의 심장부에 있으며, 세
로 333m, 가로 294m, 높이 69m 규모로 9만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초대형 경기장이다. 화려하고 웅장한
올림픽 개막식과 폐막식은 1억 달러를 투자해 화제가 되었으며 장이머우 감독의 빼어난 연출과 영상
미로 지상 최대의 쇼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
3) 이화원(이허위안)은 베이징 북서쪽 4환도로 근처에 위치
4) 동궁문으로 들어가 소주가(쑤저우제), 향암종이지각(사대부주)을 거쳐 곤명호를 가로지를 계획
5) 이화원 둥궁문은 인산인해
6) 우람한 측백나무가 우거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이화원
7) 서태후의 섭정처 인수전(런서우뎬, 仁壽殿)
동궁문을 통해 들어오면 곧바로 궁전구가 나타난다. 이곳에 궁전구가 조성된 이유는 원명원과 거리가
가까워서 황제가 두 원림을 오가기 편리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궁전구의 첫 번째 건물인 인수전은 황
제가 조회를 열고 정무를 처리하던 곳으로, 옥좌가 마련되어 있다. 한마디로 광서제를 수렴청정한 서
태후가 정무를 보던 곳이다. 내부는 자금성의 황궁처럼 꾸몄지만, 대전 앞뜰에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심고 태호석으로 장식해서 원림 분위기를 살렸다. 대전 앞에 용과 봉황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인
상적이다.
8) 외투를 잃어버린 함원당(涵遠堂)
9) 노송과 백송과 목향장미등 이름모를 꽃들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 도착한 사대부주(四大部洲)
10) 북경에 온 서장 승려들을 위한 사대부주(쓰다부저우, 四大部洲)
만수산 북쪽 언덕은 4대부주(四大部洲)라고 하는 불교 건축군으로 이루어져 있다. 처음 건물들은 청
건륭 연간에 건축되었다. 중심에 보이는 큰 건물이 향암종인지각(香岩宗印之閣)이라고 하는 주전 건
물이고 건축군 전체는 운회사(云會寺)라고 써 있다. 전체 건물은 자금성의 경우처럼 동서로 좌우 대
칭을 이루고 있는데 주목해서 볼 것은 이 건물들이 향하고 있는 방향이 북쪽이라는 점이다. 청이 북
경에 천도하기 전 심양에 처음 세운 고궁은 좌우 대칭의 개념이 전혀 없었다. 건축군의 좌우 대칭 개
념은 남북 축선에서 동서가 서로 대칭을 이루어 충돌을 피하여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염원에서 나타
난 건축사상으로 보인다. 4대부주라는 말은 불교세계의 4방 극락세계를 일컫는 말로 다소 생소하지만
東勝身洲, 西牛貨洲, 南瞻部洲, 北俱盧洲를 말한다. 위에 보이는 건물 중에서 하얀 벽에 기와를 얹은
누각 4개를 이르는 것같다. 각부주 양쪽에는 소주(小洲)가 하나씩 건축되어 8개 소부주라는 말도 있
다 한다. 티뱉의 쌍예쓰(桑耶寺)를 모방하여 지었다는 설도 있다.
11) 다른 분이 본 사대부주(쓰다부저우)
11) 건륭제가 모친을 위해 조성한 후호(后湖)의 강남 소주가(蘇州街, 쑤저우제)
사가원림으로 유명한 쑤저우와 명나라 초기 수도였던 난징의 저잣거리를 본떠 조성했다. 270m에 달하
는 저잣거리를 따라 상점이 들어섰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이곳에서 서민 분위기를 즐겼다고 한다. 황
제가 행차할 때면 내시들이 상점 주인과 손님으로 변장해 왁자지껄한 시장 분위기를 연출했다고 한
다. 지금도 이화원 내 상업 거리로 조성되어 간단하게 한끼를 해결할 수 있다.
12) 배를 타고 곤명호(쿤밍호, 昆明湖)진입
항저우의 시 호를 닮은 이화원 최대의 호수이다 . 호수의 면적은 220만㎡로, 이화원 총면적인 290만
㎡의 4분의 3을 차지한다. 이화원에 들어와서 곤명호를 처음 마주하면 바다처럼 거대한 모습에 입이
벌어진다. 호수의 둘레는 6.4km에 달한다. 곤명호는 원래 원나라와 명나라 때 물 저장고로 이용하던
서호(西湖)를 건륭제가 확장 공사를 해 조성했다. 호수에서 나온 흙으로는 만수산을 더 높게 쌓았
다. 호수를 3개 수면으로 나누고 인공섬도 3개 만들었으며, 긴 제방을 쌓았다. 항저우 시 호에 매료
된 건륭제는 그곳에 있는 다리를 모방해서 6개의 다리를 제방과 연결시키고, 이름을 곤명호로 개명하
였다. 여름에는 이화원 북쪽 구역을 모두 관람한 후, 석방에서 유람선을 타고 동남쪽 남호도(南湖岛)
에서 내려 십칠공교와 동우를 감상하면 잠시지만 더위를 식힐 수 있다. 겨울이면 꽁꽁 언 곤명호에서
스케이트를 즐기는 시민들을 볼 수 있다.
13) 지혜해(즈우이하이, 智慧海)
만수산(万寿山) 정상부에 있는 불교 건축물로 무량불전(无梁佛殿)인데, 외부는 황색, 녹색 유리기와
로, 윗부분은 자색, 남색 유리기와로 장식되어 있고, 천여 개의 불상이 새겨져 있다. '지혜해(智慧
海)'는 불교용어로, 부처님의 지혜가 바다와 같고, 불법이 끝이 없이 이어짐을 상징한다. 겉보기엔
목조건축으로 보이나, 목조건축은 아니며, 벽돌로 지었지만, 무게를 받치지는 않아, 일명 무량전(无
梁殿)'이라고도 불린다. 또한 무량수불(无量寿佛)이 안치되어 무량전(无量殿)으로도 불린다.
14) 불향각(포샹거, 佛香閣)
배운전 뒤로 만수산에 우뚝 솟아 있어, 이화원의 중심이자 나침판 역할을 한다. 1891년에 은화 78만
냥을 들여 지은 것으로, 이화원 내 최대 공사로 꼽힌다. 밑에서 보면 황금색 유리기와가 햇볕에 반사
되어 눈이 부시게 아름답고, 산 위에 세워져 더 웅장해 보인다.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면 곤명호가 드
넓게 펼쳐지고 원림 전체가 한눈에 쏙 들어온다.
15)청안방(清晏舫)
서태후의 정치적 야욕을 상징하는 돌배로, 석방(石舫)이라고도 부른다. 장랑의 서쪽 끝 곤명호에 떠
있다. 대리석으로 조각해 만든 배의 길이가 36m에 달한다. 배 위에는 역시 돌로 만든 2층 누각이 있
다. 영원한 권력을 갖고 싶었던 서태후는 순자(荀子, BC 298~238)의 경고가 두려웠다. ‘수즉재주 수
즉복주(水則載舟水則覆舟)’, 즉 물은 배를 띄울 수 있고, 뒤집어 가라앉게도 한다는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어떤 물결에도 뒤집히지 않는 돌배를 만들어 낸 것이다. 지만 돌이 물위에
떠 있을 수는 없는 법. 4개의 지지대가 밑에서 돌배를 받치고 있다. 지지대가 붕괴되면 배는 언제든
가라앉기 마련이다. 민심에 귀를 닫고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던 그녀는 청나라가 멸망의 길을 걷는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16) 십칠공교(스치쿵치아오, 十七孔桥)
이화원 최대의 돌다리로 무지개처럼 생긴 아치형 다리이다. 곤명호(昆明湖) 동제(东堤)와 남호도(南
湖岛) 사이를 잇는 다리이고, 원림 내에서 가장 길다. 폭 8미터, 길이 150미터에, 17개의 교동(桥洞)
으로부터 이름지어졌다. 난간에 500여 마리에 달하는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각각의 크기와 생김
새가 달라서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사진이 예쁘게 나오는 장소라서 연인과 가족들로 북적인다. 십칠
공교에서 가까운 동쪽 제방에 동우(铜牛)도 잊지 말고 찾아보자. 1755년 비로 인해서 호수가 범람하
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만든 동상이라고 한다. 이는 우황제가 소의 형상을 만들어 홍수를 막았
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17) 이화원 상세지도
* 이화원(頤和園)
중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보존이 잘 되어 있는 아름다운 황실 정원이다. 1988년 유네스코 지정 세
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화원은 서태후의 여름 별장으로 더 유명하다. 청일 전쟁 중에도 전쟁 자금
을 이화원을 꾸미는데 썼다고 하니 서태후의 권력과 이화원 사랑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끝없이
펼쳐진 호수 곤명호는 사람이 만들어 낸 인공 호수이며 그 흙을 쌓아 만들어진 산이 이화원을 둘러싼
만수산이다. 만수산의 화려한 누각에서 내려보고, 곤명호에서 배를 타고 유람하며, 또 긴 장랑을 따
라 걸으며 이화원의 각기 다른 매력을 감상할 수 있다.
* 이화원 십칠공교, 노을 빛 금광천동 현상 나타나 2019-12-19
매년 동지(冬至)를 전후로 이화원 십칠공교 (颐和园 十七孔桥)에는 노을 빛이 다리 구멍을 물들이는
이른 바 금광천동 (金光穿洞) 현상이 나타난다. 일몰 무렵의 태양 빛이 십칠공교의 다리 구멍에 황금
빛을 비추어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때가 되면 사진 애호가들이 몰린다. 이화원 측 소개에 따르면,
최근 십칠공교를 찾는 관광객이 점자 많아지고 있으며, 일몰 전에 약 700명이 몰리기도 했다. 이런
탓에 관광지 측에서는 안전을 위하여 일방 통행과 인원수 제한 조치를 실행할 방침이다. 마치 이번
주 일요일이 동지 절기로, 많은 사진 애호가들과 관광객들이 십칠공교를 찾을 것으로 예측된다.
* 불교의 시간관,세계관,우주관
https://blog.naver.com/amitapeace/223345176301
* 사대주 (四大洲 )
범어 Catvaro Dvipah, 또는 四大部洲(사대부주), 四洲(사주), 四天下(사천하), 須彌四洲(수미사주)라
고도 한다. 四大洲(사대주)는 고대 인도인의 세계관으로써 須彌山(수미산) 사방의 七金山(칠금산)과
대 鐵圍山(철위산) 사이의 鹹海(함해) 가운데 있는 네개의 대주(大洲)를 말한다.
0. 東勝身洲 (동승신주) :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몸매가 殊勝(수승)한 까닭에 勝身(승신)이라 일컬었
고, 地形(지형)은 半月(반달)모양이며 사람의 얼굴 또한 반달형이다. 그 국토는 지극히 넓고 크며 묘
함이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이다.
0. 南贍部洲 (남섬부주) : 원래는 포도나무의 音譯(음역)인데 本洲(본주)는 이 나무로써 이름을 얻게
되었으며 지형은 네모상자 같으며, 사람의 얼굴 또한 그러하다. 이곳의 특별한 점은 주민이 용맹스럽
고 훌륭한 기억력으로 능히 좋은 業을 지으며 능히 청정 법행을 닦으며, 부처님이 이 땅에도 출현하
심 등이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뛰어난 점 이다.
0. 西牛貨洲 (서우화주) : 소(牛)로써 貿易(무역)하는 것으로 인해 이러한 이름을 짓게 되었고, 地形
(지형)은 滿月(만월)같고, 사람의 얼굴 모양 또한 그러하다.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은 소
가 많고, 양이 많고 주옥(珠玉)이 많다는 점이다.
0. 北俱盧洲 (북구로주) : 이 지역은 위 三洲(3주)에 비해 殊勝(수승)하기 때문에 이러한 이름을 얻
게 되었고, 地形(지형)은 正方形(정방형)이며 사람의 얼굴 모양 또한 그러하다. 다른 諸天(제천)에
비해 특별한 점은 걸림이 없고 내것이라는 게 없고, 수명이 千歲(천세)라는 제일 수승한 과보를 받
아서 즐거움이 많고 고통은 적지만 오직 부처님이 이 국토에는 출세(出世)하지 않은 점이 있다. 그러
므로 이곳에 태어남을 八難(팔난)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 이화원(頤和園, 颐和园, Summer Palace)
https://namu.wiki/w/%EC%9D%B4%ED%99%94%EC%9B%90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古建築及歷史紀念建築物
北京市海淀区新建宫门路19号 1961년 등재, 중국 국가 AAAAA급 명승지로 지정
1. 개요
2. 역사
2.1. 금나라와 원나라
2.2. 명나라
2.3. 청나라
2.4.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3. 주요 건축
3.1. 전산(前山)
3.2. 후산(後山)
3.3. 동제(東堤)
3.4. 남호도(南湖島)
3.5. 서제(西堤)
4. 기타
1. 개요
중국 베이징시 북서쪽 하이뎬구에 위치한 황실원림. 총면적 2.9 km²에 달하며 베이징에서 현존하는
황실원림 중 건축규모가 제일 크고 비교적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중국 고전원림의 본보기이기도 한
이화원은 높이 60m인 만수산(萬壽山)과 면적 2.2 km²인 쿤밍호(昆明湖)가 있다.
2. 역사
2.1. 금나라와 원나라
만수산은 원래 이름은 옹산(瓮山)인데, 베이징 서산(西山)의 지맥으로 처음에는 높이가 60 m도 안 되
는 작은 언덕이었다.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이 흘러내려 옹산 앞에서 호수를 이루었는데, 이 호수가
당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中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서호(西湖)라고 불렀다. 1153년 금나라 해릉양
왕이 이곳 산기슭에 행궁을 짓기 시작했고, 원나라 쿠빌라이 칸은 대도(大都)로 천도하면서 대운하를
통한 조운을 원활히 하고 궁중의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1262년과 1290년 두 차례에 걸쳐 도수감
곽수경에게 명해 옥천산의 샘물을 옹산 기슭에 막아 물을 끌어들여 서호를 준설 확대해 수역을 크게
늘리도록 했다. 이때 서호에서 파낸 흙은 옹산에 쌓아놓게 해 원래보다 크게 높아졌다.
2.2. 명나라
1497년 홍치제가 유모 조성부인(助聖夫人)을 위해 옹산에 원정사(圓靜寺)를 지었지만 나중에 폐사되
었다. 그 후 놀기 좋아하던 정덕제는 이곳에 호산원(好山園)이라는 행궁을 건축하고 옹산을 금산(金
山)으로 개칭했다. 정덕제와 가정제는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천계제 시절 위충현이 호산원에서
지내기도 했다.
2.3. 청나라
이화원이 본격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건륭제의 치세 때였다. 1750년(건륭 15) 건륭제는 생모 효
성헌황후의 환갑을 기념해 이화원의 전신인 청의원(淸漪園)을 조영하도록 명령하고, 홍치제가 지었던
원정사 터에는 대보은연수사(大報恩延壽寺)를 세우도록 했으며, 이듬해(1751) 옹산을 만수산, 서호를
곤명호라 개칭했다. 청의원은 은자 480만 냥을 쏟아 부어 공사한 끝에 1764년 완공되었다. 청의원 내
에는 '바다에는 신선이 사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이 있다'는 중
국 신화를 바탕으로 곤명호 위에 남호도(南湖島), 단성도(團城島), 조감당도(藻鑒堂島)를 만들었고,
강남의 풍경과 원림을 좋아한 건륭제의 취향에 맞춰 항저우의 서호를 위시해 강남 지역의 내로라하는
경승지를 모방해 이곳에 재현했다.
이로써 청나라의 황실원림으로 유명한 '3산 5원', 즉 창춘원(暢春園)·원명원(圓明園)·향산(香山)
정의원(靜宜園)·옥천산(玉泉山) 정명원(靜明園)·만수산(萬壽山) 청의원(淸漪園)을 형성해 장관을
연출했으나 도광제 때 이후 청나라의 국력이 약해지고 재정이 쪼들리면서 유지에 어려움을 겪다가
1860년(함풍 10) 제2차 아편전쟁 때 영불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해 3산 5원을 불태우고 진귀한 보물을
약탈해 청의원의 목조 건축은 전소되어 폐허로 변했다. 하지만 서태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면서 해군
경비를 유용, 청의원의 중건을 개시해 1884년(광서 10)부터 1895년(광서 21)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
고 '이양충화(頤養衝和)'의 뜻을 취해 청의원에서 이화원이라 개칭했다. 이렇게 무리를 해서 겨우 복
구해놨지만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자업자득으로 패배했다. 1900년(광서 26) 또다시 8개국 연합군의
침입으로 훼손되었다. 이때는 청나라의 황혼기였으므로, 1902년 서태후는 베이징에 돌아온 뒤 전산
(前山)과 원내의 동쪽 부분만 재보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2.4.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자 이화원은 황실의 사유재산으로 남았다가 1924년 선통제가 자
금성에서 쫓겨나면서 북평시가 접수해 공원으로 일반에 개방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후 1951
년부터 수차에 걸친 자금조달과 보수공사를 통해 원내의 대부분의 전각과 정원이 전성기의 모습을 회
복했다. 1961년 국무원은 이화원을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했고 이후 문화대혁명 시기에 불향각
내부가 홍위병들에게 훼손이 되는 피해를 입기는 했지만 이화원 자체는 무사했다. 이 때 훼손된 문화
재도 이후 복원되었고 199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최대의인공정원 이화원(颐和园) / K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