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기
- 최승자 / 시집<즐거운 일기>(1984) -
오늘 나는 기쁘다. 어머니는 건강하심이 증명되었고 밀린 번역료를 받았고 낮의 어느 모임
에서 수수한 남자를 소개받았으므로.
오늘도 여의도 강변에선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팔렸고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의 밤하늘에선
달님이 별님들을 둘러앉히고 맥주 한 잔씩 돌리며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잠든 기린이의 망막
에선 노란 튤립 꽃들이 까르르거리고 기린이 엄마의 꿈속에선 포니 자가용이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피곤한 기린이 아빠의 겨드랑이에선 지금 남몰래 일 센티미터의 날개가 돋고 …….
수영이 삼촌 별아저씨 오늘도 캄사캄사합니다. 아저씨들이 우리 조카들을 많이많이 사랑해 주
신 덕분에 오늘도 우리는 코리아의 유구한 푸른 하늘 아래 꿈 잘 꾸고 한판 잘 놀아났습니다.
아싸라비아
도로아미타불
* 여의도 강변, 도곡동 개나리 아파트 → 소위 벼락부자들이나 산다는 여의도와 강남 지역
* 날개들이 풍선 돋친 듯 → 과도하게 부풀려진 욕망을 함축함.(풍선이 날개 돋친듯이 아니라 날개들
이 풍선 돋친 듯이라고 한 것은, 그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풍선이 아니라 날개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 봉봉 크랙카를 깨물고 ~ 까르르거리고 → 서구 문화에 경도된 현실
* 포니 자가용이 ~ 휘발유도 없이 잘 나가고 → 물신주의와 소비 문화에 탐닉하는 삶
* 피곤한 기린이 아빠 ~ 날개가 돋고 → 성공에의 꿈이 실패로 끝날 것임을 암시(아기장수 설화처럼)
* 별아저씨 → 외세를 상징
* 캄사캄사합니다. → 외세 의존적인 현실을 조롱함.
* 사랑해 주신 덕분에 → 반어적 표현(의존적 자세, 억압의 모습)
* 아싸라비아 → 비속어를 활용한 야유(아, 좋네!)
* 작품해설 : 1970~80년대 산업화 당시 부동산 투기로 일확천금을 얻어 졸부가 된 소위 한국의 신흥
상류 중산층은 자신에게 주어진 부(富)를 제대로 누릴 수 있을 만큼 의식이 성장하지 못했다. 그들은
외세의 영향으로 각종 향락과 유흥 문화, 소비 문화에 탐닉하면서 과도하게 부풀려진 욕망의 포로가
되어 물질적이고 허위적인 삶을 즐기기에 바빴다. 시인은 2연에서 이러한 신흥 상류 중산층의 허위적
인 삶을 기린이 가족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3연에서 시적 화자는 2연에서의 상류 중산층의
천박한 자본주의적 삶이 철저히 외세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음을 통찰하며 서양식 말투를 흉내 내어
반어적으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4연에서 시적 화자의 조롱은 야유로 발전한다. '아싸라
비아'라는 속어적 표현과 '도로아미타불(모두 꿈이었구나!)'이라는 패러디까지 동원하여 반어적으로
야유를 보내면서 시상을 종결하고 있다.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주제를 드러내기 위해 사용한 가장 중
요한 기법은 '반어'이다. 2연에 나타난 기린이 가족의 화려한 삶은 3연과 4연에서 시적 화자의 반어
적 표현에 의해 조롱과 야유의 대상으로 바뀌게 된다. 그것은 '캄사캄사합니다'나 '아싸라비아'와 같
은 표현으로 나타나며, 이를 통해 '기린이 가족'으로 대표되는 상류 중산층의 허위적인 삶은 여지없
이 무너져 내린다. 즉, 시적 화자는 기린이 가족의 삶을 통해 한국의 자본주의가 외세에 지나치게 경
도된 현실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통찰하고, 반어적 표현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현실
을 조롱하고 야유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기억하고 있다
- 최승자 /《쓸쓸해서 머나먼》/ (1979년 『문학과지성』으로 등단) / 《문학과지성》시인선 372 -
길이 없었다
분명 길이 있었는데
뛰고 뛰던 길이 있었는데
길 끊어진 시간 속에서
어둠만이 들끓고 있었다
(셔터가 내려진 상가
보이지 않는 발자국들만 저벅거리는
불 꺼진 어둠의 상가)
그 십여 년 고요히 끝나가고 있다
아직은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분명 길이 있었음을
뛰고 뛰던 길이 있었음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서울역 뒤쪽에 자리 잡은 청파동은 경부선 철도를 경계로 갈월동, 남영동과 접하고 있다.
시인 최승자가 노래한 1980년대의 청파동에는 빈대떡 집과 낡은 골목들이 남루하게 널려 있었다.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 최승자 / 『이 時代의 사랑』(문학과지성사, 1981) -
겨울 동안 너는 다정했었다.
눈의 흰 손이 우리의 잠을 어루만지고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따뜻한 땅속을 떠돌 동안엔
봄이 오고 너는 갔다.
라일락꽃이 귀신처럼 피어나고
먼 곳에서도 너는 웃지 않았다.
자주 너의 눈빛이 셀로판지 구겨지는 소리를 냈고
너의 목소리가 쇠꼬챙이처럼 나를 찔렀고
그래, 나는 소리 없이 오래 찔렸다.
찔린 몸으로 지렁이처럼 기어서라도,
가고 싶다 네가 있는 곳으로,
너의 따뜻한 불빛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번 최후로 찔리면서
한없이 오래 죽고 싶다.
그리고 지금, 주인 없는 해진 신발마냥
내가 빈 벌판을 헤맬 때
청파동을 기억하는가
우리가 꽃잎처럼 포개져
눈 덮인 꿈속을 떠돌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을,
* 작품해설 : 격렬한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 최승자 시인의 시입니다. 청파동이 어딘가 싶어서 검색
해봤더니 소나무 숲으로 유명한 효창공원이 있는 동네였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푸른 야산이 많아 청
파(靑波)라는 지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연인들이 꽃잎처럼 포개져 잠들고 눈의 흰 손이 연인들의 잠
을 어루만지던 곳, 눈 덮인 꿈속을 헤매던 몇 세기 전의 겨울이 있는 곳, 연인의 따뜻한 품 안으로
숨어들어가 다시 한 번 최후로 찔리고 한없이 오래 죽고 싶은, 그곳 청파동……. 잊을 수 없는 겨울
을 묻고 온 여러분의 청파동은 어디입니까? - 최형심 시인
최승자(1952-)
출생 : 1952. 충청남도 연기
학력 :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 학사
데뷔 : 1979년 시 '이 시대의 사랑'
수상 : 2017년 제27회 편운문학상 시부문
2010년 제18회 대산문학상
2010년 제5회 지리산문학상
1952년 충청남도 연기군에서 태어났다. 1971년 수도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
과에 입학하였다.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94년 아이오
와대학 초청으로 4개월간 미국에 체류하였다. 시 창작과 번역을 같이 해왔는데, 1996년 이제 시는 졸
업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내무덤, 푸르고’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고 이후 5년간 신비주의를 공부하였
다. 1998년 시집 ‘연인들’을 펴내던 중 그간 신비주의 공부의 여파로 정신분열증을 앓게 되면서 시
작 활동을 한동안 중단하였다. 가족이 없었고, 서울의 세 평짜리 고시원에서, 여관방에서, 밥 대신
소주로, 불면의 시간으로 죽음 직전의 단계까지 가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2006년 다시 시를 발표했다.
지금은 상황이 많이 나아졌는지 2014년 퇴원해 경주시에 정착했다. 2016년 새 시집 '빈 배처럼 텅 비
어'를 발표했다. 198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인으로서 황지우, 이성복과 함께 아주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2010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한바탕 난장이 훓고 지나간 후의 권태와 상념에 대한 뒤돌아봄,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과 허무를 담
은 시로, 우리나라 현대시인들 중에서는 아주 드물게 인기 작가가 됐다. 작품세계가 끔찍할 정도로
어둡고, 자기 과거에 대한 노출이 적나라하다. 비극적 사랑에 의한 슬픔 혹은 인생의 덧없음에 의한
공허감, 자기연민 등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이를 자학에 가까울 정도로 찢어발기며 냉소한다. 그런
데 그러한 어둠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게 반전이다. 시집으로 '이 시대의 사랑' '즐거운 일기' '기억
의 집' '내 무덤, 푸르고' '연인들' '쓸쓸해서 머나먼' 등을 냈고, 번역서로는 막스 피카르트의 '침
묵의 세계', 메이 사튼의 '혼자 산다는 것' 등을 냈다. 2021년 세상을 떠난 래퍼 아이언의 트위터 마
지막 리트윗(RT)이 최승자 시인의 구절(그래서 나는 언제나, 내가 믿지 않는 것들 속으로 천연덕스럽
게, 어기적거리며 되돌아오는 것이다.)이었다. 이제는 영영 고인이 되어 버린 아이언의 심경이 어떠
하였는지를 헤아려볼 수 있어 의미심장하다.
그리하여 어느 날, 사랑이여 / 시낭송 최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