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등뼈
- 정끝별 / 제22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 문학사상사 / 2007년 05월 -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 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 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 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사랑의 병법
- 정끝별 -
네가 나를 베려는 순간 내가 너를 베는 궁극의 타이밍을 일격(一擊)이라 하고
뿌리가 같고 가지 잎새가 하나로 꿰는 이치를 일관(一貫)이라 한다
한 점 두려움 없이 열매처럼 나를 주고 너를 받는 기미가 일격이고
흙 없이 뿌리 없듯 뿌리 없이 가지 잎새 없고
너 없이 나 없는 그 수미가 일관이라면
너를 관(觀)하여 나를 통(通)하는 한가락이 일격이고
나를 관(觀)하여 너를 통(通)하는 한마음이 일관이다
일격이 일관을 꽃피울 때
단숨이 솟고 바람이 부푼다
무인이 그렇고 애인이 그렇다
일생을 건 일순의 급소
너를 통과하는 외마디를 들은 것도 같다
단숨에 내리친 단 한 번의 사랑
나를 읽어버린 첫 포옹이 지나간 것도 같다
바람을 베낀 긴 침묵을 읽은 것도 같다
굳이 시의 병법이라 말하지 않겠다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원시적 혼돈, No.16, 1906-7년
은는이가
- 정끝별 -
당신은 당신 뒤에 ‘이(가)’를 붙이기 좋아하고
나는 내 뒤에 ‘은(는)’을 붙이기 좋아한다
당신은 내‘가’ 하며 힘을 빼 한 발 물러서고
나는 나‘는’ 하며 힘을 넣어 한 발 앞선다
강‘이’ 하면서 강을 따라 출렁출렁 달려가고
강‘은’ 하면서 달려가는 강을 불러세우듯
구름이나 바람에게도 그러하고
산‘이’ 하면서 산을 풀어놓고
산‘은’ 하면서 산을 주저앉히듯
꽃과 나무와 꿈과 마음에게도 그러하다
당신은 사랑‘이’ 하면서 바람에 말을 걸고
나는 사랑‘은’ 하면서 바람을 가둔다
안 보면서 보는 당신은 ‘이(가)’로 세상과 놀고
보면서 안 보는 나는 ‘은(는)’으로 세상을 잰다
당신의 혀끝은 멀리 달아나려는 원심력이고
내 혀끝은 가까이 닿으려는 구심력이다
그러니 입술이여, 두 혀를 섞어다오
비문(非文)의 사랑을 완성해다오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0개의 가장 큰 그림(No.7.성인), 1907년
가스 밸브를 열며
- 정끝별 -
이십 년 전 일이다 첫딸을 낳은 직후였고 강의를 마치고
강사실에 들어갔을 때였다 독신의 선배가 독설을 날렸다
오랜만 시인!
엄마는 절망할 수 없다는데
절망 없는 시인의 시는 안녕할까?
그때 나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할 일은 많았고 시 쓸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맙소사 둘째까지 낳고
둘째가 성년이 되는 날
천돌에 봉인해두었던 그 말을 꺼내들었다
나를 향해 있었다
눈부시게 벼려져 있었다
날을 향해 기꺼이 달려갔다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절망 따위
이제 그만 엄마여도 돼
힐마 아프 클린트(Hilma af Klint) 10개의 가장 큰 그림(No.3.청소년), 1907년
불선여정(不宣餘情)
- 정끝별 / <시와사람> 2011, 봄호-
쓸 말은 많으나 다 쓰지 못한다 하였습니다 편지 말미에 덧붙이는 다 오르지 못한 남은 계
단이라 하였습니다
꿈에 돋는 소름 같고 입 속에 돋는 혓바늘 같고 물낯에 돋는 눈빛 같이 미처 다스리지 못한
파문이라 하였습니다
나비의 두 날개를 하나로 접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이 마음을 안아 겹이라든가 그늘을
새기고 아침마다 다른 빛깔을 펼쳐내던 두 날개, 다 펄럭였다면 눈멀고 숨 멎어 가라앉은
돌이 되었을 거라 하였습니다
불쑥 끼어든 샛길들목에서 저무는 店房처럼 남겨지는 일이라 하였습니다 봉인된 이후로도
노을을 노을이게 하고 어둠을 어둠이게 하며 何念悤悤 하염총총 저리 수북한 바람을 때맞춰
때늦은 바람이게 하는 지평선의 목메임이라 하였습니다
때가 깊고 숨이 깊고 정이 깊습니다 밤새 낙엽이 받아낸 아침서리가 소금처럼 와 앉았습니
다 갈바람도 주저앉아
불선여정 불선여정 하였습니다
강그라 가르추
- 정끝별 -
한밤을 가자 아무것도 쓰여지지 않은
흰 밤을 맨발로 달려가자 모든 죄를 싣고
검은 야크의 눈에 서른 개의 달을 싣고
강그라 가르추를 가자 가다 갇히면
덧창문 안으로 강된장을 끓이며 몇 날 며칠
오랜 슬픔에 씨앗만 해진 두 입술로
뭉쳐진 밥알을 나누며 숨죽이며 가자
얼음 냄새 밴 발꿈치를 어루만지며
몇 날 며칠을 가자 버리고 도망 온 것들이
가랑가랑 뜨물처럼 갈앉는 꿈에서야
눈보라에 튼 붉은 뺨을 씻으며
처마 밑 고드름 녹는 소리에
겨울 순무의 푸른 귀가 돋는 곳으로
가자 도망 온 것들이 그리워지는 곳으로
가까스로 도망 온 도망갈 곳으로 가자
강그라지듯 가자 몇 날 며칠을 하염없이
너라는 천산산맥 나라는 만년설산을 넘어
가도 가도 강그라 가르추를 다시 넘어
“제 시의 7할은 페미니즘 시예요”···
퀴어·동물·생태로 넓어진 정끝별의 시세계[2023 박인환상]
https://v.daum.net/v/20230904190522237
세상의 등뼈(문태준의 시배달) / 시낭송 정끝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