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
- 이영도 / <청저집>(1954) -
트인 하늘 아래
무성히 젊은 꿈들
휘느린 가지마다
가지마다 숨 가쁘다.
오월(五月)은 절로 겨워라.
우쭐대는 이 강산(江山).
노을
- 이영도 / <청저집>(1954) -
먼 첨탑(尖塔)이 타네
내 가슴 절벽에도
돌아앉은 인정 위에
뜨겁던 임의 그 피
회한은 어진 깨달음인가
‘골고다’로 젖는 노을.
진달래
- 이영도 / <청저집>(1954) -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爛漫)히 멧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恨)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山河).
단풍
- 이영도 / <청저집>(1954) -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선 정이어라
못내 턴
그 청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향로!
석류
- 이영도 / <청저집>(1954) -
다스려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 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정
한자락
가던 구름도
처마 끝에 머문다
단란
- 이영도 / <청저집>(1954) -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한 듯 들렸다
모란
- 이영도 / <청저집>(1954) -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흔든다
황혼에 서서
- 이영도 / <청저집>(1954) -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네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는 바다에 저무는데
그 달래임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
* 이영도(李永道, 1916~1976)
해방 이후 『청저집』, 『석류』 등을 저술한 시인. 시조시인.
호는 정운(丁芸). 경상북도 청도 출생. 시조시인 이호우(李鎬雨)의 누이동생이다.
1916.10. 22. 경북 청도군 청도면 내호동 259번지에서 일제 지방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종수와 어머니 구봉래의 1남 2녀 중 막내 딸로 출생.
정규 교육 없이 자가에서 가정교사를 두고 신구 학문 섭렵
1.정운(丁芸) 이영도 여류 시조시인 연보
1936 대구의 대부호 집안의 막내 아들 박기주와 결혼
1939 외동딸 박진아 출생
1945 부군과 사별, 대구의 이윤수가 주재한 죽순(竹筍)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제야"로 등단.
경남 통영여중 교사 취임
1953 부산 남성여중고 교사
1954 시조집 "청저집(靑苧集)" 상재
1955 마산 성지여고 교사 취임
1956 부산여대 강사
1958 수필집 :춘근집(椿芹集)" 출간
1964 부산 아동회관 관장 취임
1966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 상재 제8회 늘원 문화상 수상
1968 시조집 "석류"를 오빠 이호우와 함께 오누이 시조집 출간. 중대 출강
1971 시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 상재
1975 한국시조작가협회 부회장, 한국여류문학인회 부회장
1976.3.6 자택에서 뇌일혈로 별세
1945년 대구의 문예동인지 『죽순(竹筍)』에 시 「제야(除夜)」를 발표하면서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
였다. 그 뒤 통영여자고등학교·부산남성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거쳐 부산여자대학에 출강하기도
하였다.1964년부산직할시(지금의 부산광역시) 어린이회관 관장을 맡은 바 있으며, 『현대시학(現代詩
學)』 편집위원을 역임하였다. 문학을 통한 사회봉사의 공로로 1966년 눌월문화상(訥月文化賞)을 수
상하였다. 주요작품으로「바람」(1956)·「시조3수」(1956)·「지리산시초(智異山詩抄)」(1957)·「한라산」
(1958)·「설악산시초(雪嶽山詩抄)」(1959)·「4월의 하늘 아래서」(1960)·「경주시초(慶州詩抄)」
(1961)·「목련화」(1965)·「수혈(輸血)」(1965)·「아지랭이」(1966)·「나목(裸木)」(1967)·「백
록담」(1968)·「미소」(1969)·「들에서」(1969)·「추청(秋晴)을 갈(磨)다」(1969)·「제야(除夜)
에」(1970)·「구천동소묘(九千洞素描)」(1970) 등이 있다.
그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 가는 고유의 가락을 재현하고자 하는 한편, 여성의 맑고 경건한 계
시주의(啓示主義)와 한국적 전래의 기다림, 연연한 낭만적 정서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
였다. 대표작 「황혼에 서서」(1958)는 애모(愛慕)를 주제로 한 것이면서도 나약하지 않은 강렬한 자
기 분신(分身)에 이르는 종교적인 애정을 노래하였다. 「아지랭이」에서는 현대시조의 연작 형식을
벗어나 자유시 이상의 자재성(自在性)을 보인 새로운 형식을 실험하였다. 시조집으로 『청저집(靑苧
集)』(1954)·『석류』(1968)가 있고 수필집으로 『춘근집(春芹集)』(1958)·『비둘기 내리는 뜨락』
(1966)·『머나먼 사념(思念)의 길목』(1971) 등이 있다. 후기의 수필은 구도적인 면과 사회 부조리
를 고발하는 등 사색적인 면과 현실적 관심을 함께 드러냈다. 『한국문학』에서는 그를 기념하여 매
년 정운시조문학상(丁芸時調文學賞)을 시상하고 있다.
『석류』(이영도,중앙출판공사,1968)
『시조연구논총』(이태극,을유문화사,1965)
『청저집』(이영도,문예사,1954)
『현대시조약사』(이태극,『현대시조』,1970.8.)
유고집 『언약』,
유고수필집 『내 그리움은 오직 푸르고 깊은 것』
2.작품
言約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愛慕는 낙락히 나부끼고
透明을 切한 水天을
한 점 밝혀 뜬 言約
그 자락
감감한 山河여
귀뚜리 叡智를 간(磨)다.
바위
- 어머님께 드리는 詩 -
여기 내 놓인대로 앉아
눈 감고 귀 막아도
목숨의 아픈 證言
꽃가루로 쌓이는 四月
萬里 밖
回歸의 길섶
저 歸燭道 피 뱉는 소리
달무리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鶴같이 여기고, 이 밤
너울 너울 아지랑이
외 따로 열고
비 오고 바람 불어도
가슴은 푸른 하늘
홀로 고운 星座
지우고 일으키며
솔바람
머언 가락에
목이 긴 鶴 한 마리
멀수록 다가 드는
思慕의 空間 밖을
萬里 더 지척같이
넘나드는 꿈의 通路
그 세월
외따로 열고
다둑이는 추운 마음
蘭
나직이 영창 밖으로
스며드는 물빛 黎明
그 숨결 이마에 감고
새댁처럼 素心 눈 뜨네
내 마음
사래 긴 渴症 위를
왁짜히 장다리꽃 튼다
모란
여미어 도사릴수록
그리움은 아득하고
가슴 열면 고여 닿는
겹겹이 먼 하늘
바람만
봄이 겨웁네
옷자락을 흩는다.
天啓
-사월탑 앞에서
신 벗고, 塔 앞에 서면
한 걸음 다가서는 祖國
그 絶叫 사무친 골엔
솔바람도 설레어 운다
푸르게
눈매를 태우며, 너희
지켜 선 하얀 天啓
고비
꽃 피고 싹 트이면
골을 우는 뻐꾸기들
목숨의 크낙한 分娩
함께 앓는 이 고비를
山河도
끓이던 靑血
아, 그 三月, 그 四月에......
雪夜
눈이 오시네, 사락사락
먼 어머님 옷자락 소리
내 新房 장지 밖을
감도시던 기척인 듯
이 한밤
시린 이마 짚으시며
약손인 듯 오시네.
곰곰이 헤는 星霜
멀고 험한 오솔길을
갈(耕)아도 갈아도 목숨은
연자방아 도는 바퀴
갈퀴손
어루만지며
言約인 듯 오시네.
恩寵
잎잎이 가을을 흔들고
들국화 낭랑한 언덕
그 푸름 속 아른 아른
고추감자리 난다
당신 뜰
마지막 饗宴 위로
구름이 가네, 바람이 가네.
그 노을
먼 尖塔이 타네
내 가슴 절벽에도
돌아 앉은 人情 위에
뜨겁던 임의 그 피
悔恨은
어진 깨달음인가
"골고다"로 젖는 노을.
光化門 네거리에서
사월의 이 거리에 서면
내 귀는 소용도는 海溢
그날, 東海를 딩굴며
허옇게 부셔지던 泡哮
그 소리
네 목청에 겹쳐
이 廣場을 넘친다
정작 바길 덤덤해도
한 가슴 앓는 傷痕
차마 바래일(漂白) 수 없는
녹물 같은 얼룩마다
千이요
萬의 푸른 눈매가
나를 불러 세운다.
石榴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秋晴
한 자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丹楓
너도 타라 여기
황홀한 불길 속에
사랑도 미움도
넘어 선 淸이어라
못내편
그 충춘들이
사뤄 오르는 저 香爐
아지랑이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조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團欒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繡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愛淸에
삼가한 듯 들렀다.
生長
-진아에게
날로 달 붓듯이
자라나는 너를 보면
무엔지 서러움이
기쁨보다 느껴웁고
차라리
바라던 마음
도로 허전 하구나.
비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塔3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愛慕는
舍利로 맺쳐
푸른 도로 굳어라.
그리움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무지개
여윈 그 세월이
덧없는 살음이매
남은 日月은
비단 繡로 새기고저
오매로
어리는 꿈에
눈 부시는 무지개.
白鹿潭
차라리 스스로 달래어
쓰느라니 고였는가
그날 하늘을 흔들고
아우성 치던 불길
투명한
가슴을 열고
여기 내다뵈는 상채기.
海女
눈은 서늘한 눈은
珊瑚빛 어린 하늘
먼 갈매기 울음에
부풀은 淸일레라
여울져
달무리 가듯
일렁이는 뒤움박.
이별
정작 너를 두고
떨쳐 가는 이 길인데
嶺湖 千里를
구비마다 겨운 봄빛
山川이 뒤져 갈수록
닥아 드는 體溫이여!
3. 이영도의 작품세계
- 사향 노루 지나간 뒤에는 <이은상>
동양에 있어서 여류 시인의 작품들을 살펴본다면, 중국 고대로 올라가 서왕모(西王母)의 "천자요(天
子謠)" 까지는 굳이 들추지 않더라도,노나라 도명(陶明)의 딸 도영(陶영)이 지은 황곡가(黃鵠歌)나
송강왕(宋康王) 때 한빙(韓憑)의 아내 하씨(河氏)가 지은 오작가(烏鵲歌)로부터는 헤아릴 수 있을 것
이다. 이미 수천년의 역사를 지녔고, 또 우리 국사상에 있어서도, 고구려 뱃사공 곽리자고(藿里子高)
의 아내 여옥(麗玉)의 공후인과 신라 여인 설요(薛요)의 반속요(返俗謠)와 백제 행상의 아내가 부른
정읍사(井邑詞)로부터 손꼽을 수 있을 것이라.
이도 역시 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녔고, 그 이후 고려, 이씨 왕조를 통하여서도 자못 수 백명의 여류
시인과 그들의 아름다운 작품을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시조 작품을 남긴 여성들만도
역대를 통하여 현부인, 궁녀, 기생들을 아울러 현재 문헌상에 나타 난 이름이 자못 30명에 이르고 있
음을 본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와서도, 일찍부터 여류 시조 작가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 아니었지만, 그 중에서
도 여름밤 구름을 뚫고 나타나는 달처럼, 모두를 쳐다보도록 맑고 환한 모습을 드러내보인 두드러진
여류 시조 작가가 누구였더냐 물으면, 아마 누구도 이 영도를 지적할 것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
것은 그가 확실히 시인이 도달해야 할 어떤 경지에 이르렀던 여인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자연을 묘사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서는 시인이 어느 깊은 경지에 들어갔다고는 보
기 어렵다. 시는 어떤 묘사로써 일삼기보다는 자연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음
악이나 미술 등 모든 예술에 다 통하는 말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는 이영도의 시조 작품 속에서 그가 자연과 나누던 대화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느것에서
는 그가 자기 스스로 맑고 미묘한 정서 속에 휘말려 들어가서 숨가쁘게 심호흡을 하는 소리를 듣기도
하는 것이다. 그는 무엇인가 갈구하고 있었다. 신의 문을 두들기며 대답을 들으려 했다. 그러나 마침
내 세상 인연을 끊어버리고 신의 품속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이 그의 일생이었다.
다만 사향노루가 지나간 위에는 발자국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유고집 "언약" 서문에서-
정운(丁芸)과 청마(靑馬)의 연시(戀詩)낙화(落花) - 丁芸 이영도
-눈 내리는 군 묘지에서-
뜨겁게 목숨을 사르고
사모침은 돌로 섰네.
겨레와 더불어 푸르를
이 증언의 언덕 위에
감감히
하늘을 덮어
쌓이는 꽃잎,
꽃잎.
석류(石榴) - 丁芸 이영도
다스려도 다스려도
못 여밀 가슴 속을
알알 익은 고독
기어이 터지는 추청(秋晴),
한 가락
가던 구름도
추녀 끝에 머문다.
언약(言約) - 丁芸 이영도
해거름 등성이에 서면
애모(愛慕)는 낙락히 나부끼고
투명(透明)을 절(切)한 수천(水天)을
한 점 밝혀 뜬 언약(言約)
그 자락
감감한 산하(山河)여
귀뚜리 예지(叡智)를 간(磨)다.
그리움 - 丁芸 이영도
생각을 멀리하면
잊을 수도 있다는데
고된 살음에
잊었는가 하다가도
가다가
월컥 한 가슴
밀고 드는 그리움.
세월(歲月) - 靑馬 유치환
끝내 올리 없는 올이를 기다려
여기 외따로이 열려 있는 하늘이 있어.
하냥 외로운 세월이기에
나무그늘 아롱대는 뜨락에
내려 앉는 참새 조찰히 그림자 빛나고.
자고 일고 -
이렇게 아쉬이 삶을 이어 감은
목숨의 보람 여기 있지 아니함이거니.
먼 산에 우기(雨氣) 짙으량이면
자옥 기어 드는 안개 되창을 넘어
나의 글줄 행결 고독에 근심 배이고 -
끝내 올리 없는 올이를 기다려
외따로이 열고 사는 세월이 있어.
아지랑이 - 丁芸 이영도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바람에게 - 靑馬 유치환
바람아 나는 알겠다.
네 말을 나는 알겠다.
한사코 풀잎을 흔들고
또 나의 얼굴을 스쳐 가
하늘 끝에 우는
네 말을 나는 알겠다.
눈 감고 이렇게 등성이에 누우면
나의 영혼의 깊은데까지 닿는 너.
이 호호(浩浩)한 천지를 배경하고
나의 모나.리자!
어디에 어찌 안아 볼 길 없는 너.
바람아 나는 알겠다.
한오리 풀잎마다 부여잡고 흐느끼는
네 말을 나는 정녕 알겠다.
비 - 丁芸 이영도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밤바람 - 靑馬 유치환
너의 편지에
창밖의 저 바람소리마저
함께 봉하여 보낸다던 그 바람소리
잠결에도 외로와 깨어 이 한밤을 듣는다.
알수 없는 먼 먼데서 한사코
적막한 부르짖음 하고 달려와
또 어디론지 만리(萬里)나 날 이끌고 가는
고독한 저 소리!
너 또한 잠 못이루 대로 아득히 생각
이 한밤을 꼬박이 뜨고 밝히는가?
그리움을 모르는 이에겐
저 하늘의 푸름인들 무슨 뜻이리.
진정 밤 외로운 바람은
너와 나만을 위하여 있는 것.
아아 또 적막한 부르짖음 하고 저렇게
내게로 달려 오는 정녕 네 소리!
탑(塔) 3 - 丁芸 이영도
너는 저만치 가고
나는 여기 섰는데....
손 한번 흔들지 못한 채
돌아선 하늘과 땅
애모(愛慕)는
사리(舍利)로 맺쳐
푸른 도로 굳어라.
기다림 - 靑馬 유치환
무척이나 무척이나 기다렸네라.
기다리다 기다리다 갔네라.
날에 날마다 속여 울던 뱃고동이
그제사 아니우는 빈 창머리
책상 위엔 쓰던 펜대도 종이도 그대로
눈 익은 검정 모자도 벽에 걸어 둔대로.
두번 다시 못올 길이었으매
홀홀히 어느 때고 떠나야 할 길이었으매
미래(未來) 없는 억만(億萬) 시간(時間)을
시간마다 기다리고 기다렸네라.
흐림 없는 그리움에 닦이고 닦이었기
하늘에 구름빨도 비취는대로
이름 없는 등성이에
백골(白骨)은 울어도.
그때사는 정녕
너는 아니 와도 좋으네라.
황혼에 서서 - 丁芸 이영도
산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 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라.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 靑馬 유치환
마침내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무량한 안식을 거느린 저녁의 손길이
집도 새도 나무도 마음도 온갖 것을
소리 없이 포근히 껴안으며 껴안기며 -
그리하여 그지없이 안온한 상냥스럼 위에
아슬한 각달이 거리 위에 내걸리고
등들이 오르고
교회당 종이 소리를 흩뿌리고.
그립고 애달픔에 꾸겨진 혼 하나
이제 어디메에 숨 지우고 있어도.
행복은 이렇게 오더니라.
귀를 막고 -
그리고 외로운 사람은
또한 그렇게 죽어 가더니라.
행복 - 丁芸 이영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리라.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 빛 하늘이
훤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 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연인 - 丁芸 이영도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
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窓)만 바라보다
그대로 일어서 하염없이 보내니라.
정운 이영도(1916~1976)와 청마 유치환(1908~1967)
* 청마 유치환과 이영도의 편지 사랑
두사람의 인연은 청마 유치환이 통영여자중학교에서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 정운 이영도 시조
시인이 가사교사로 부임하면서 시작 되었다. 이영도는 1940년대말~50년대말 통영에서 10여 년간 머물
렀고, 50년 대 말에 부산으로 옮겨와서 67년 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청마가 세상을 세상을 떠나
자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살았고 뇌출혈로 삶을 마감했다. 청초한 아름다움과 남다른 기품을 지닌 여
인상이었다. 청마와 정운이 처음 만난 것은 통영여중 교사시절이었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정운은 21
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둔 29살 과부였다. 당시 통영으로 시집 온 그녀의
언니집에 머물러있었던 것이 두 사람이 만나는 계기가 되었다. 문재와 미모를 갖춘 정운은 처음 수예
점을 운영하다 해방되던 해 가을 통영여중 가사교사로 부임했다.
청마는 만주로 떠돌다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와 통영여중 국어교사가 되었다. 청마는 정운보다 아
홉살이 많은 38살의 유부남이었다. 정운은 워낙 재색이 뛰어나고 행실이 조신했기에 누구도 그녀에게
서 눈을 떼지 못했다고 한다. 청마의 첫눈에 정운은 깊은 물그림자로 자리잡기 시작했고, 교무실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정운의 얼굴을 보며 감정을 추스리기가 쉽지 않았다. 퇴근 후에도 수예점에서 대부
분의 시간을 보내던 정운을 보기 위해 청마는 수예점이 보이는 우체국 창가에서 연서를 쓰기 시작했
다. 이미 결혼한 청마와 홀로 된 정운은 닿지 않는 인연이 안타까워 연서로 그리움을 달랬다. 누군가
에게 연서를 보낼 수 있고 또한 받을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청마가 60살이 되던 1967년 부산
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명을 달리한 후에야 이들의 사랑도 끝이 나고 러브스토리가 세상에 알려졌
다. 1947년 이후 20년 동안 청마가 정운에게 뛰운 연서는 모두 5,000여 통이였다. 사모의 정을 담은
편지를 거의 매일 보낸 셈이다. 정운은 그 편지를 꼬박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 중 200통을 추려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의 서간집을 단행본으로 엮었다. 청마 사후 정운은
<탑>이란 시를 통해 그녀의 애뜻한 마음을 표현했다. 사랑은 미완성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사리로 남는 것이다.
황진이/이매창/봉경미 시조 / 시낭송(봉경미) / 대금연주(손방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