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금병산과 수운교(06/04/16)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3. 15:52

 

 

 

금병산과 수운교

 

 

(1)

06/4/16(일) 아내와 금병산을 한바퀴 돌아 내려와

수운교당을 둘러보다.

금병산은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창을 꿈꾸면서

비단병풍을 갖추고 치성하라는 현몽에

병풍같은 이 곳에서 치성하여 뜻을 이루었다하여

금병산(金屛山)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해발382m로 얕으막하지만 길게 누워 있는 어미소 같아서

가볍게 산행하기엔 안성마춤인데

그러한 정겨운 산행과 더불어

수운교란 정겨운 전설이 있어서 아내와 자주 찾곤 한다.

 

(2) 

우리는 일반적으로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 1824~1864)가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에서

41세란 장년의 나이로 순도하였다고 알고 있는데 

수운교에서는 그 때 최제우가 대구에서 죽지 않고

수운의 道術로 짚으로 엮은 제웅이 대신 죽은

허신참형(虛身斬刑)을 당한 것이며

기실 최제우는 바로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도에 정진하여

이최출룡자(李崔出龍子)로 재위출세하게 되었는데

수운강생 102(단기 4256, 서기 1923)년 계해10월15일 서울에서 개교(開敎)하였고

1929년 현재의 대전으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설명한다.

 

(3)

또한 수운교 영내의 중앙에 도솔천이란 궁전이 있는데

출룡자 천사님께서 친히 설계하시고,

전국 교인의 헌금을 모아 외9포 내12포로 건축하여

수강 108년(1929. 기사) 4월 15일 장엄한 낙성식을 거행하였다고 한다.

경복궁 중건 복원을 맡았던

최원식 목수가

도편수로 공사에 참여하였다고 하여

대전시보물 12호로 지정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그 단아한 건축선이

범상한 구조물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다.

 

(4) 

수운 천사님께서는

「천상천하의 도솔천궁을 지상에 건설하시니

지상의 도솔천궁은 개벽후 5만년에 처음있는 일이요,

자고유래로 무주고혼을 해원하고,

 세계의 왕생극락을 해원해 주시니

만고에 없었던 새 법이라」고 하셨다고 한다.

수운교에서는

"불천심(佛天心) 일원의 무극대도(無極大道)로서

유 불 선(儒佛仙) 합일의 천도이며

옥황상제 하날님을 신앙하며

만화귀일의 지상천국(地上天國)을 건설하고자 하며

교기(敎旗)는 궁을기(弓乙旗)라하며 천하만물의 원리가 묘각되어 있으매

궁은 선(仙)이요, 을은 불(佛)이니 선불합덕이라 한다.

하늘과 땅이 열리고 닫히는 조화의 문이며,

음양이 출입하는 길이요,

만물이 생성하는 기틀이다."라고 설명한다.

 

(5) 

그러나 네이버 백과사전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이최출룡자는 이상룡이란 사람으로

 출가()한 중이라는데

금강산 유점사()에서 도를 깨닫고 각지를 순례하던 중

충청남도 청양군에 머물 때,

불교를 토대로 하고 수운() 최제우()를 부처의 후신이라 하여

그를 교조로 삼아 이 교를 세웠다고 한다.
한때 교세를 크게 떨쳐 1923년에는 본부를 서울에 두었으나,

교조() 문제로

천도교와 의견이 맞지 않아

대전광역시 중구 탄동면()으로 옮겼다고 하며

현재의 추목동을 근거지로 교세를 떨쳤는데

정부의 620사업으로 추목동일원에 자운대가 건립되어

그들의 영역이 대부분 자운대로 편입되고 신도는

대전, 제주등 전국 곳곳으로 흩어졌다고 한다.

 

(6) 

현재는 극히 일부만 수운교영내로 남아 있어서

옛 위세를 찾아보기 어렵거니와

수운교에서는 지금도 10여만 이상의 신도가 있다고 주장한다.

많은 종교중 교주가 없는 종교로 유명하며

그들의 교주는 이최출룡자 한 분으로

그들이 건립한 도솔천에서 지금도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한다.

 

(7) 

아- 이최출룡자가 수행을 끝내고

저 도솔천 문을 열고 출세하실 날은 언제런가?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4/16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1. 금병산을 오르며 본 양지꽃 군락

 

 

2. 진달래꽃이 어우러진 능선

 

 

3. 그 능선을 잠시 스쳐가는 드난이

 

 

4. 산도화(山桃花)를 들여다 보노라니 때묻지 않은 순수함에 놀라고

 

 

5. 산벚꽃 또한 앳된 아름다움이 수줍어 고개를 쳐들지 못하고

 

 

6. 산을 내려와 수운교 경내에 들어서다.

 

 

7. 봉령각 출입문의 단아한 모습

 

 

8. 봉령각 경내엔 적막만이 잠겨있고

 

 

9. 그 담장도 너무나 한국적

 

 

10. 봉령각 뒷곁에 모셔진 토속신에 대한 제단

 

 

11. 이로써 수운교는 유불선의 합일임을 알겠다.

 

 

12. 수운교도들처럼 해맑은 목련 꽃송이

 

 

13. 출룡자의 사저였던 용호각

 

 

14. 그 용호각의 담장 너머로 거닐었을 출룡자를 생각하며

 

 

15. 그 때에도 저 박태기나무꽃은 피었을까?

 

 

16. 그 담장 아래 그리워할 꽃을 찾아 두리번 거리는 상사화군락

 

 

17. 수운교 법회당의 쓸모있는 담장과 건물 그리고 아름드리 송백

 

 

18. 아직도 저 도솔천에서 수행중인 출룡자

 

 

19. 출룡자를 들여다 보려 했으나 볼 수 없었슴

 

 

20. 다만 외목도리에 용의 장혀만 내밀고 있었다.

 

 

21. 출룡자의 侍者만이 출입한다는 쪽문

 

 

22. 출룡자를 기다리는 도솔천 아래의 비비추

 

 

23. 두드리면 종소리를 낸다는 석고(石鼓)

 

 

24. 도솔천 경내를 들어오는 광덕문

 

 

25. 수운교 입구의 아름다움

 

 

26. 경내 입구의 아름드리 솔밭

 

 

 

 

 

풀뿌리

최제우 [崔濟愚, 1824~1864]
본관 경주(慶州). 호 수운(水雲)·수운재(水雲齋). 초명 복술(福述)·제선(濟宣).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공부하여 학문에 정진하다가 1844년(헌종 10) 구도행각에 나선 지 10년 만에 울산(蔚山) 유곡(裕谷)에 은거, 수도에 들어갔다. 1856년(철종 7) 천성산(千聖山) 내원암(內院庵)에서 49일간 기도하고, 1857년 천성산 적멸굴(寂滅窟)에서 49일간 기도했으며, 1859년 다시 경주 용담정(龍潭亭)에서 수도한 끝에, 그리스도교적 영향과 유불선(儒佛仙)의 장점을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핵심으로 한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하고 동학을 창시했다. 천(天)·인(人)을 대도(大道)의 근원으로, 성(誠)·경(敬)·신(信)을 도행(道行)의 본체로,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수도의 요결로 삼고 포교를 시작하여 도를 천도(天道)라 하고, 농민·천민·유생에 이르는 광범한 계층에 전파했다. 1862년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接主)를 두어 관내의 교도를 관장하게 하였는데, 1863년에는 교인 3,000여 명, 접소 14곳에 이르렀다. 같은 해 최시형(崔時亨)을 북접(北接) 대도주로 앉히고 8월에 도통(道統)을 계승하여 교주로 삼았다. 1864년(고종 1) 각 접소를 순회하다가 용담정에서 동학을 사학(邪學)으로 단정한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에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순도하였다. 1907년(융희 1) 신원되었다. 저서에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2006/09/07

풀뿌리 최시형 [崔時亨, 1827~1898]
본관 경주(慶州). 호 해월(海月). 초명 경상(慶翔). 경주 출생.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한때 조지소(造紙所)에서 일했다. 1861년(철종 12) 동학에 입문, 1863년 초대 교조(敎祖) 최제우(崔濟愚)에 이어 제2세 교조(敎祖)가 되었다. 1864년(고종 1) 정부의 탄압으로 최제우가 처형되자 태백산(太白山)에 은신, 관헌의 감시를 피해 안동(安東) ·울진(蔚珍) 등지에서 포교에 힘썼다. 1871년 허락도 없이 이필제(李弼濟)가 교조의 신원운동(伸寃運動)을 전개, 영해(寧海)에서 민란을 일으킴으로써 탄압이 강화되자 소백산(小白山)에 피신했다. 그 후 《동경대전(東經大全)》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주요 경전(經典)을 발간, 교의(敎義)를 체계화했으며,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 후 탄압이 완화되자 육임제(六任制)를 확립하고 전국에 육임소(六任所)를 설치, 조직을 강화했다. 1892년 손천민(孫天民) ·손병희(孫秉熙) 등의 주장에 따라 교조의 신원, 포교의 자유, 탐관오리의 숙청을 충청도관찰사에게 요구했다. 1893년 2월 제2차로 각 도의 동학 대표 40여 명을 모으고 그 소두(疏頭)로서 박광호(朴光浩)를 내세워 왕에게 직접 상소, 대궐 앞에서 사흘 밤낮을 통곡하게 했다. 왕의 선처를 약속받고 해산했으나 시행되지 않자, 다시 보은(報恩)의 대도소(大都所)에 전국 교도들을 시켜 교조의 신원, 부패관리의 처단,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며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의 기치를 들고 제3차 신원운동을 계획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감행하려 했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 우선 경상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 등 탐관을 파면하자 자진 해산했다. 1894년 고부 접주(古阜接主) 전봉준(全琫準)이 주도한 동학농민운동에 북접(北接) 산하 동학도를 궐기시켜 호응했으며, 9월 전봉준이 일본군 상륙과 정부의 요구조건 불이행을 이유로 재기포(再起包)하자, 북접 각지의 접주들에게 총궐기를 명하여 10만여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논산(論山)에서 남접군(南接軍)과 합세했다. 관군 ·일본군의 혼성군과의 공주(公州)싸움에서 참패하고 또 장수(長水) 등지에서 연패하여 피신했다가 98년 원주(原州)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처형되었다. 1907년 고종의 특지(特旨)로 신원되었다.
 2006/09/07 14:43:28  
풀뿌리 최시형[崔時亨 1827(순조 27) 경북 경주~1898(광무 2)]
경주역에서 포항 방향으로 가다보면 왼편에 큰 숲으로 된 공원이 나온다. 이 숲을 신라 때는 고성 숲으로 불렀다고 한다. 숲 속에 경주시립운동장이 있다. 지금은 이 숲 속이 황성공원이다. 조금 높은 언덕(야산?)에는 김유신 장군의 동상이 서 있어 경주시내 어디서든지 보인다. 운동장 메인스타디움 서쪽에 이 공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흉물같은 건물이 경주실내체육관이다. 실내체육관 건물 주차장에서 동남쪽에 동학2대 교주 <해월 최시형 동상>이 있다. 최시형[崔時亨 1827(순조 27) 경북 경주~1898(광무 2)]은 경주 동촌 황오리에서 최치원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났다. 심한 탄압 속에서도 포교활동과 교단정비를 통해 동학을 크게 성장시켰다. 온건한 방법으로 동학을 합법화하고자 했으나 교조신원운동과 갑오농민전쟁에도 참여했다. 호는 해월(海月)이다. 5세 때 어머니를, 1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남의 집 머슴살이 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17세에 조지소(造紙所)의 고공(雇工)이 되었다. 19세에 결혼한 뒤 처가가 있는 경북 흥해(興海)에서 살다가, 28세 때 경주 승광면 마복동으로 이사하여 마을 대표인 집강(執綱)이 되었는데 일을 잘 처리하여 마을 사람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한다. 최제우(崔濟愚)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철종 12) 6월 동학에 입교했다. 한달에 3, 4차례씩 최제우를 찾아가 설교를 듣고 의범(儀範)을 배웠으며 집에 있을 때는 명상과 극기로 도를 닦기에 힘써 하늘의 소리를 듣는 등 여러 가지 이적(異蹟)을 체험했다고 한다. 1875년 도(道)는 용시용활(用時用活)하는 데 있으니 때에 따라 나아가야 한다고 하여 이름을 때를 따라 순응한다는 뜻의 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1897년 손병희(孫秉熙)에게 도통을 전수했다. 1898년 3월 원주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6월 교수형을 당했다. 2006/09/07 14:43:46  
풀뿌리 최시형은 처음 설법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귀천의 차별이 없어야 한다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피력했으며, 그뒤 자기 자신 속에 있는 하늘을 키워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 동학이 기본임을 알려주는 양천주설(養天主說), 신과 사람이 직접 합일된다는 향아설위(向我設位), 하늘과 사람과 물(物)을 공경하라는 삼경설(三敬說), 세상 만물이 하늘의 기운으로 생긴 것이니 사람이 다른 물건을 먹는 것은 곧 하늘이 하늘을 먹는 것이라는 이천식천설(以天食天說) 등을 주장했다. 또 우(愚)·묵(默)·눌(訥)을 강조하여 새 세상이 되는 것은 자연적인 것이니 인위적으로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여 무저항의 사상을 강조했다. 경주가 낳은 한말의 큰 인물 중 한 분이 최시형이다. 동상의 건립문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사람을 섬기되 한울같이 하라’ 하시던 해월 최시형 선생은 억눌린 백성들에개 인간의 평등과 인간존엄의 새 원리를 일깨워주셨다.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건설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스승인 수운 최제우선생의 동학사상을 이어받아 선생은 평생동안 방방곡곡을 찾아 다니시며 민중의 가슴 속에 사인여천의 씨를 뿌렸고 ‘천리만물이 모두 한울이니 일마다 한울아님이 없고 사물마다 한울아님이 없다’고 설법하셨다. ‘어린이도 한울님이니 매질하지 말라’고 어린이 존중을 가르쳤고 지저귀는 새소리도 한울의 소리로 듣게하여 천지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하셨다. 포덕 35년 갑오동학혁명을 총지휘하신 선생의 보국안민사상은 3.1 독립운동에까지 연면히 흘러내려 우리민족의 자주정신의 초석이 되었다. 문정화는 조각하고 신일철은 글을 짓고 김충현은 제자하고 손경식은 글씨를 쓰고 해월 최시형 선생 기념사업회와 동포들의 성금을 모아 해월 최시형 선생 동상건립이원회에서 이 동상을 세우다. 포덕 백이십년 (1979년) 9월 일 최시형의 동상 앞에 선다.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한 듯한 나라와 겨레의 현재를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된다. 2006/09/07 14:44:09  
풀뿌리 손병희 [孫秉熙, 1861.4.8~1922.5.19]
호 의암(義菴). 초명 응구(應九). 후명 규동(奎東). 충북 청주(淸州) 출생. 1882년(고종 19) 22세 때 동학(東學)에 입교, 2년 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수제자로서 연성수도(鍊性修道)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통령(統領)으로서 북접(北接)의 농민군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에서 합세, 호남 ·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을 격파했으나, 일본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원산(元山) ·강계(江界) 등지로 피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뒤를 이어 3년 동안 지하에서 교세 확장에 힘쓰다가 1901년 일본을 경유,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 ·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사정을 듣고 1903년에 귀국, 두 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으로 데리고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개혁운동을 목표로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한 후 이용구(李容九)를 파견하여 국내 조직에 착수, 경향 각지에 회원 16만 명을 확보하고 전회원에게 단발령(斷髮令)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인 유신회(維新會)와 합하여 일진회(一進會)를 만들고 을사조약에 찬동하는 성명을 내자, 즉시 귀국하여 일진회와는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분자 26명을 출교(黜敎)시켰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개칭하고 제3세 교주에 취임, 교세 확장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고 보성(普成) ·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 ·문화사업에 힘썼다. 1908년 교주 자리를 박인호(朴寅浩)에게 인계하고 우이동에 은거, 수도에 힘쓰다가 1919년 민족대표 33인의 대표로 3·1운동을 주도하고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이듬해 10월 병보석으로 출감 치료중 별장 상춘원(常春園)에서 사망했다.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2006/09/07 14:45:43  
풀뿌리 水雲敎
1923년 이상룡(李象龍)이 창시한 동학계통의 신종교. 수운교에서는 그를 이최출룡자(李崔出龍子)라고 하며, 수운 최제우의 현신(現身)으로 믿고 있다. 최제우는 1864년 처형당했으나 하늘님의 보호로 허신(虛身)만이 참형되었고 실제의 몸은 그후 55년간 전국을 방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12년 충청남도 청양에 도성암(道成庵)을 짓고 9년간 은거한 후 1920년부터 제자들을 모아 포교활동에 나섰다. 1923년에는 천황교(天皇敎)를 창립하려 했으나, 일제가 불허하므로 대신 수운교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그후 충청남도 대덕(지금의 대전 유성구 추목동)으로 교주사저를 옮긴 뒤 '도솔천'(率天)을 상징하는 천단(天壇)을 지었다. 1936년 일제의 간섭으로 교명을 '미타교'(彌陀敎)로 고쳤으나, 일본의 진종(眞宗)에 통합되어 흥룡사(興龍寺)로 되었고 계속 감시를 받았다. 그후 일제강점기에 수운교의 의식을 지키며 배일사상을 고취하다가 많은 신도들이 순교했으며 교주도 죽었다. 8·15해방 후 다시 수운교로 명칭을 바꾸었다. 음력 4월 15일 교주탄일, 음력 10월 15일 개교기념일 등의 행사를 개최한다. 신앙 대상은 하늘님, 단군, 유·불·선 3성(三聖), 나옹, 수운, 불상(佛像), 신중(神衆) 등이다. 주요경전으로는 〈동경대전 東經大全〉·〈용담유사 龍潭遺詞〉·〈훈법대전 訓法大典〉·〈만세선화 萬世宣話〉 등이 있다.
 2006/09/07 15:00:04  
풀뿌리 동학계
동학은 조선조 철종11년 경주인 최제우에 의해서 창교된 종교다. 최제우는 전통적인 유교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유교의 경전을 배웠는데 성년이 되어서는 유학자로 이름이 알려지기도 했다고 한다. 동학혁명과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한때 큰 세력을 과시했으나 현재는 세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동학의 쇠퇴는 손병희 이후 뚜렷한 지도자가 출현하지 못했고 일제의 통제와 내부분열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해방이후 기독교 등 거대종교들의 공세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데도 원인이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도 재정과 조직의 열세로 당분간 세력을 떨치지는 못할 것으로 보인다. 동학계 계열 교단에는 천도교(손병희), 수운교(이최출룡자), 시천교(이용구), 동학본부(김주희), 천진교(김역국), 성도교(이민제), 동학회중앙본부(박성호) 등이 있다.  2006/09/07 15:01:42  
풀뿌리 대전 금병산 자락에 자리한 수운교본부
"하날님이 정한 후천 5만년의 종교기지" 수운교 본부는 계룡산에서 동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금병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크게 보면 계룡산의 한 줄기라 볼 수도 있다. 계룡산일대는 전북 김제 모악산 일대와 함께 한국 신종교의 본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계룡산은 일찍부터 풍수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일대가 민간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도참설의 영향이 컸다. 계룡산은 신라 이래로 토함산(東嶽), 태백산(北嶽), 지리산(南嶽), 팔공산(中嶽)과 함께 5악(五嶽)중 하나(西嶽)로 국가에서 직접 산악신께 제사를 지낸 곳이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후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1년 가까이 공사를 하다 최종적으로 한양을 수도로 정하기도 했다. 정감록에는 도읍지뿐 아니라 전란이 일어날 때 살 수 있는 몇 안되는 피난처로도 적고 있다. 이런 도참적 배경 때문에 수운교 본부도 계룡산에서 멀지 않은 금병산 자락에 자리했다고 볼 수 있다. 금병산 주위에는 금병산(360m), 수양산(315m), 오봉산(240m) 등이 중요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대전시 유성구 추목동의 북쪽에서 병풍처럼 둘러싸면서 그 안쪽에 전형적인 숯골(추목)분지를 형성해 놓고 있다. 이 숯골분지에 수운교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2006/09/07 15:04:14  
풀뿌리 수운교본부를 가려면 북대전 톨게이트에서 좌회전을 하여 자운대를 지나야 한다. 자운대는 육군대학교, 해군대학교, 공군대학교 등 군 교육시설이 있는 곳이다. 제5공화국 시절이던 1983년 '620국방사업'의 일환으로 수운교본부가 있는 금병산 자운지구 240만평과 계룡산 신도지구 360만평이 '군사시설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이로 말미암아 계룡산 신도지구 1,200가구와 금병산 자운지구 900가구는 일시에 철거됐다. 자운지구에 신앙촌을 형성하고 있던 수운교인들이 이때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수운교본부 역시 철거대상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수운교는 정부의 방침을 수용할 수 없다면서 법적 소송 등 적극적인 대처를 통해 5년이 지난 1988년 수운교 존치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됐다. 수운교본부는 본전인 도솔천(率天), 봉령각(鳳靈閣), 법회당(法會堂), 용호당(龍虎堂), 장실(丈室) 등 수운교본부의 대전 이전과 함께 건립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건물들은 1930년을 전후하여 세워졌다. 본전인 도솔천의 경우 1928년 상량식을 갖고 이듬해인 1929년 낙성식을 가졌다. 이 건물은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최원식(崔元植)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천궁(天宮) 또는 천단(天壇)으로도 불리고 있는 도솔천은 남향한 목조건물로 음양의 원리에 따라 60갑자의 천간 10수를 반영해 기둥이 10개로 되어 있다. 또한 문은 28수에 맞춰 28개이며 작은 용 44마리, 봉황 88마리의 상을 조각하여 용두봉각체(龍頭鳳角體)로 지어졌다. 건축당시 화려한 단청과 건물의 장엄함으로 세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이 도솔천은 '수운교천단'이라는 이름으로 충남 문화재 자료 33호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이래 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솔천궁안의 천단은 수운교의 신앙대상인 '하날님'을 모시고 있다. 중앙에 금단색의 직사각형 모양이 있는데 하날님의 보좌를 상징한다. 좌우에는 적색과 분홍색의 원반형이 있는데 각각 해(日)와 달(月)의 형상을 띠고 있다. 수운교에서는 해와 달은 해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나옹도사와 달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수운천사(이최출룡자.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를 상징하며 두 사람은 하날님 좌우에 있는 시위선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자미성(紫星)과 삼태성(三台星)의 8성(八星)이 있고 동남, 서북의 순으로 4대칠성의 28수 성좌를 봉안하여 모두 36성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천계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천단앞에는 단군, 석가, 노자, 공자 등 4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건립초기에는 일제시대여서 단군 위패를 모실 수 없어 해방이 되고 난 후 모셨다고 수운교 관계자는 말했다. 오른쪽 벽면에는 18개의 머리와 36개의 손을 가진 신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수운교에서는 창검과 방패를 들고 불천계(佛天界)를 호령하는 동진보살로 부르고 있다.  2006/09/07 15:06:54  
풀뿌리 천단앞 왼쪽으로는 금강탑, 오른쪽에 무량수탑이 있다. 수운교 도성암 이찬구 선교사는 "중앙에는 미타탑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일본에 빼앗겨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탑은 1933년 수운천사의 명에 따라 봉안됐다고 전한다. 봉령각은 1929년 도솔천궁과 동시에 건축된 건물로 금병산 기슭에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안타깝게도 1939년 화재로 본래 건물은 소실되고 해방이후 당초의 건물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자리에 중건했다. 이곳 봉령각은 윗장실로도 불렸으며 수운교를 창도한 수운천사가 별채와 같이 사용하면서 거처했던 곳이다. 법회당은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단의 중앙에 삼불상(三佛像.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불)을 모셨다. 1934년 8월 조성된 삼불상은 처음에는 천단에 봉안했으나 1936년 법회당 준공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삼불상 왼편에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 탱화가 있고 오른쪽에는 '삼천대천세계도'가 봉안돼 있다. 삼천대천세계도는 1930년 그린 것으로 수운교의 우주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호당은 수운천사가 정양하던 사저로 1926년 지어진 건물이다. 수운교본부에 있는 건물중 최초로 지어졌다. 수운교본부에는 석고(石鼓)라는 기이한 바위가 있다. 수운교 신도가 현몽을 통해 얻은 석고는 돌로 치면 쟁쟁 쇳소리가 난다는 것. 현재 '수운교 석종'이라는 이름으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수운교는 천도교와 같은 동학계열이지만 신앙내용은 큰 차이가 있다. 천도교가 의식을 간소화하고 현대화되어 있다면 수운교는 의례나 신앙대상에 있어서 불교와 습합된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수운교는 불교인으로 알려진 나옹화상을 받들고 있고 육식을 피할 뿐 아니라 부처를 봉안하고 있다. 불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조 단군은 물론 노자도 선성(先聖)으로 모신다. 유-불-선 합일을 주장하는 신종교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운교는 교조인 이최출룡자가 수운 최제우와 동일인라고 주장한다. 대구장대에서 살아나 입산한 후부터 스스로 이최출룡자로 이름을 바꿔 행세했다는 것이다. 이후 55년간 은둔 고행하면서 수행에 정진하다 1923년 수운교를 개교하고 1938년 11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고 주장한다. 수운교는 수운교본부가 위치한 금병산이 천명계시에 의해 하늘이 정한 후천 5만년의 종교기지이며 동학이 수운교를 통해 결실할 청정도량(淸淨道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삼천대천세계 53불 부처님의 강림터라고 믿고 있다. 계룡산 일대에 산재해 있던 대부분의 신종교들은 정부시책에 의해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교본부는 대단했던 옛 영화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계룡산일대 신종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일부나마 짐작할 수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2006/09/07 15:07:41  

 

 

 

 

<1932년, 도솔천에서 제자들과 함께 하신 수운천사>

 

 

 

수운교 천단(유형문화재 제28호), 석종(문화재자료 제13호)

http://blog.naver.com/jiyouls?Redirect=Log&logNo=19098924 

 

 

대전 유성의 충남대를 지나 자운대(군사시설-군사교육대학 등 교육시설 있음)로 향하면 수운교 도솔천이란 표지판을 볼 수 있다. 몇달전 갔을때 검문을 받아 사진기를 맡기고 들어간 씁씁한 기억을 뒤로한채 오늘은 무사통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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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교 [水雲敎]    

한말 이상룡(李象龍)이 창시한 신흥종교.  
유(儒)·불(佛)·선(仙)의 무량대도(無量大道)를 현실세계에 널리 보급하여 사람을 지극히 섬기며, 영세의 행복을 누리고 덕(德)을 천하에 펼쳐 창생을 구제한다는 것을 교의(敎義)로 삼고 있다.
교인은 경천(敬天)·배불(拜佛)·주문(呪文)·청수(淸水)·공덕미(功德米)의 치성을 잘 지켜야 한다. 이상룡은 출가(出家)한 중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서 도를 깨닫고 각지를 순례하던 중 충청남도 청양군에 머물 때, 불교를 토대로 하고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를 부처의 후신이라 하여 그를 교조로 삼아 이 교를 세웠다. 한때 교세를 크게 떨쳐 1923년에는 본부를 서울에 두었으나, 교조(敎祖) 문제로 천도교와 의견이 맞지 않아 대전광역시 중구 탄동면(炭洞面)으로 옮겼다. 
*발췌-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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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솔천

대 지 위 치 ; 대전광역시 유성구 추목동 산40
건   립   자 ; 이상룡
시   공   자 ; 최원식
문화재구분 :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1999.5.26. 석고;문화재자료 제13호/1989.3.18.
지 정 일 자 ; 1989.3.18.
수 량 형 태 ; 건조 1동
규         모 ;  정면 3칸 측면 2칸
건 립 연 도 ; 1925년/1929.4.25.

 이 건물은 수운교 본부가 있는 곳으로 이 천단은 수운교의 상징이 되는 건물이다.수운교는 이상룡(李象龍)이 창립한 종교로, 그의 스승이었던 동학 창시자 수운 최재우(崔濟愚)를 교조(敎祖)로 하여 하느님을 숭배하는 종교이다. 한때 그 교세가 왕성하여 본부가 서울에 있었으나 교조문제로 천도교와 의견 차이가 생기자 이곳으로 옮겨와 1923년도에 창건하였다. 이 천단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다포계의 건물로 설게는 교주인 이상룡이 직접하고, 경복궁을 지은 최원식이 맡아서 지었다. 건물의 정면에는 도솔천(桃率天)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있다. 경내에는 천단 외에 광덕문(출입문)과 종각이 있는데, 종각은 높은 화강암 기단 위에 육각모양의 다포계 건물로 지어졌다.수운교의 상징적 존재인 천단은 단순하게 꾸며진 정원 안의 높은 단위에 위치해 있다. 정원 주변에는 야트막한 담이 둘러 처져 있으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문이 나있다. 정면에 있는 제일 큰 문이 광덕문이다. 57평 규모의 천단 건물에는 12마리의 큰 용과 44마리의 작은용, 88개의 봉황산이 조각되어 있다. 건물 안에는 북벽에 일월성신 조각과 동쪽에는 금강탑, 서쪽에는 무량수탑이 각각 목조6층으로 금박되어 있다. 또 4면에 불보살, 선관, 성군, 사천왕 조각이 있으며 서벽에는 동진보살의 탱화를 배치해 종교적인 냄새를 물씬풍기고 있다. 또 문살에 조각된 도깨비 문양과 처마밑의 오색단청은 사찰건물과 많이 닮았다. 지붕에는 궁궐과 왕실 건축물 등에만 이용하던 2지신상을 배치해 이 건물의 위엄을 강조하고 있다. 이곳 주변에는 한때 큰동네가 많았으나 6.20사업으로 모두 이전하였다. 수운교 천단을 비롯한 다른 건물도 6.20사업당시 다른곳으로 이전될 위기에 처했으나 신도들의 노력으로 현재 자리에 남게됐다. 천단은 건물 자체뿐 아니라 주변경치도 수려한데 병풍을 두른 듯한 금병산과 울창한 소나무 숲사이로 산들바람이 불면 이곳 저곳에서 들리는 은은한 풍경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준다. 또한 천단 옆에는 두드리면 쇠북소리가 난다 하여 석고(石鼓)라고 일컫는 개구리 모양의 석물이 있다. 이 석종은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 받았다. 수운교 창립 후 얼마되지 않아 어느해 여름 보령군 미산면 황룡리에 거주하던 송석호(宋石虎)씨는 꿈을 꾸었다. 석고가 있는 장소와 형상이 보이며 '나를 수운교로 인도해 달라.'고 부탁을 하는 꿈이었다. 송씨는 그 꿈을 무시했고 그 다음날 밤에도 같은 꿈을 또 꾸었으나 이상하게만 생각했다. 그러자 3일째 되는날 밤에는 다시 전과 같은 내용이 꿈속에서 나타나면서 '나의 부탁을 듣지 않으면 큰 앙화를 면치 못하리라.'는 위협적인 소리도 듣게 되었다. 괴이하다고 생각한 송씨가 그때야 비로소 그 장소에 가보았더니 과연 꿈에 보았던 이상한 바위가 있었다. 돌로 쳐보니 이상하게도 쇠 소리가 나는지라 송씨는 수운교주를 찾아가 이를 알렸다. 수운교에서는 이를 가져오도록 했다. 그리하여 석고를 운반하기 시작하였으나 산주가 나타나서 돌 값을 내라고 하였다. 할 수 없이 돈을 내어 주고 운반을 했으나 도중에 보령경찰서에 압수 당하고 말았다. 이석종은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되찾아 1925년 3월에 이곳으로 옮겨졌다. 이석종을 천단 옆에 놓아 두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조그만 돌로 두드려 쇠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드리는 부위에 따라 약간씩 다른쇠 소리가 나며, 세계 평화와 종교 통일의 날을 알릴 때 크게 울릴 것이라는 전설이 있다. 몇 년 전 건물 보수공사를 하면서 이 석종 주변에 보호망을 설치한 후 잘 보관하고 있다. 한편 수운교 측은 이석종 맞은 편에 이와 비슷한 형상의 또 다른 돌을 구해다 놓았다. 지금은 주변에 호남고속도로가 가로 지르면서 도심과 멀리 떨어진 듯하며, 인근 대덕연구단지의 외곽으로 군사시설이 많이 들어서서 황량한 느낌을 전달한다. 하지만 건물의 우아한 기품은 당당한 위세로 넓은 들판을 향하여 시원하게 가슴을 열고 있다. 발췌 - www.ucnet.pe.kr  참고문헌; 문화재 대관(대전광역시/1997), 대전문화 유적 순례/1996, 유성구청 홈사이트, 대전문화재 알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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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교 중심 - 천단(도솔천)

동서로 놓여져 있는 옥계6천을 상징하는 금색목탑.극락정토신앙과 관련괸 아미타불을 상징한다. 동학계열 민족종교의 하나인 수운교의 중심이 되는 천단(도솔천)은 솔밭을 지나면 정면으로 나타난다. 만선당 너른 마당에 오르면 수운교를 상징하는 궁을(弓乙-태극의 다른 모습으로 볼 수 있음) 모양의 형상이 박석으로 표현되어 있고, 다시 몇 계단을 올라 불교의 금강신장이 그려진 광덕문에 들어서면 일제시대에 지어졌지만 조선후기의 건축기술이 유감없이 발휘된 건축물인 도솔천이 그 위용을 자랑한다. 지붕엔 서유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형상화한 잡상들이 삿된 귀신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건물의 중앙과 모서리에 멋진 수염을 단 용이 화재를 예방하며, 화려한 연꽃으로 장식된 문살 아래엔 도깨비가 큰 눈을 뜨고 경계를 서고 있다. 경복궁을 중건(重建)한 목수(최원식)가 지었다고 전하는 건물이다. 쪽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서면 장식으로 가득 찬 느낌을 받는다. 욕계 6천을 상징하는 금색의 목탑이 동서로 놓여져 있으니 동쪽이 무량탑이요, 서쪽이 금강탑이다. 모두 극락정토신앙과 관련된 아미타불을 상징한다. 처음 세 개의 탑을 4대 총무원장을 지낸 이기서 원장이 조각을 하여 봉안하였다. 가운데 있던 미타탑은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근래에 찾아왔으나 훼손이 심하여 보관만 하고, 미타탑을 가져간 일본이 미타탑 대신 보내온 불상이 복령각에 봉안되어 있다.

  탑 뒤로 동쪽부터 조선시조 단군지위, 모상정각 석존지위, 태상노군 노자지위, 대성지성 공자지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나 일제시대에는 단군의 위패는 모시지 못했다 한다. 사성의 위패 뒤 벽면에는 가운데 직사각형의 금색으로 하날님을 상징하는 천단이 있고, 좌우로 나옹선사와 수운선생으로 시위선관을 삼았으니 각각 해와 달을 상징한다. 동쪽에는 삼태성·동두칠성·자미성·남두칠성이, 서쪽으로는 삼태성·북두칠성·자미성·서두칠성이 조성되어 있다. 8성과 4대 칠성, 28수 성좌 모두를 합치니 36성이므로 우주 전체를 상징한다. 또한 서쪽 벽면에는 18두(頭) 36수(手) 신장탱화가 모셔져 있으니 이 천단은 유불선이 합쳐진 공간이다. 발췌 - http://citynews.daejeon.go.kr(e-대전뉴스)
----------------------------------------------------------------------------------------대전 금병산 자락에 자리한 수운교본부   
"하날님이 정한 후천 5만년의 종교기지"   
수운교 본부는 계룡산에서 동북쪽으로 30리 떨어진 금병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크게 보면 계룡산의 한 줄기라 볼 수도 있다. 계룡산일대는 전북 김제 모악산 일대와 함께 한국 신종교의 본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계룡산은 일찍부터 풍수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 일대가 민간신앙의 중심지가 된 것은 도참설의 영향이 컸다. 계룡산은 신라 이래로 토함산(東嶽), 태백산(北嶽), 지리산(南嶽), 팔공산(中嶽)과 함께 5악(五嶽)중 하나(西嶽)로 국가에서 직접 산악신께 제사를 지낸 곳이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개국한 후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고 1년 가까이 공사를 하다 최종적으로 한양을 수도로 정하기도 했다. 정감록에는 도읍지뿐 아니라 전란이 일어날 때 살 수 있는 몇 안되는 피난처로도 적고 있다. 이런 도참적 배경 때문에 수운교 본부도 계룡산에서 멀지 않은 금병산 자락에 자리했다고 볼 수 있다. 금병산 주위에는 금병산(360m), 수양산(315m), 오봉산(240m) 등이 중요한 산지를 이루고 있다. 대전시 유성구 추목동의 북쪽에서 병풍처럼 둘러싸면서 그 안쪽에 전형적인 숯골(추목)분지를 형성해 놓고 있다. 이 숯골분지에 수운교본부가 자리잡고 있다. 수운교본부를 가려면 북대전 톨게이트에서 좌회전을 하여 자운대를 지나야 한다. 자운대는 육군대학교, 해군대학교, 공군대학교 등 군 교육시설이 있는 곳이다. 제5공화국 시절이던 1983년 '620국방사업'의 일환으로 수운교본부가 있는 금병산 자운지구 240만평과 계룡산 신도지구 360만평이 '군사시설보호지역'으로 지정됐다. 이로 말미암아 계룡산 신도지구 1,200가구와 금병산 자운지구 900가구는 일시에 철거됐다. 자운지구에 신앙촌을 형성하고 있던 수운교인들이 이때 곳곳으로 흩어지게 됐다. 수운교본부 역시 철거대상에 포함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수운교는 정부의 방침을 수용할 수 없다면서 법적 소송 등 적극적인 대처를 통해 5년이 지난 1988년 수운교 존치를 법적으로 보장받게 됐다. 수운교본부는 본전인 도솔천(率天), 봉령각(鳳靈閣), 법회당(法會堂), 용호당(龍虎堂), 장실(丈室) 등 수운교본부의 대전 이전과 함께 건립된 건물들이 대부분이다. 건물들은 1930년을 전후하여 세워졌다. 본전인 도솔천의 경우 1928년 상량식을 갖고 이듬해인 1929년 낙성식을 가졌다. 이 건물은 경복궁을 중건한 도편수 최원식(崔元植)이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천궁(天宮) 또는 천단(天壇)으로도 불리고 있는 도솔천은 남향한 목조건물로 음양의 원리에 따라 60갑자의 천간 10수를 반영해 기둥이 10개로 되어 있다. 또한 문은 28수에 맞춰 28개이며 작은 용 44마리, 봉황 88마리의 상을 조각하여 용두봉각체(龍頭鳳角體)로 지어졌다. 건축당시 화려한 단청과 건물의 장엄함으로 세인들에게도 큰 관심을 끌었다고 한다. 이 도솔천은 '수운교천단'이라는 이름으로 충남 문화재 자료 33호로 지정되었다가 1989년 이래 대전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도솔천궁안의 천단은 수운교의 신앙대상인 '하날님'을 모시고 있다. 중앙에 금단색의 직사각형 모양이 있는데 하날님의 보좌를 상징한다. 좌우에는 적색과 분홍색의 원반형이 있는데 각각 해(日)와 달(月)의 형상을 띠고 있다. 수운교에서는 해와 달은 해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나옹도사와 달의 정기를 타고났다는 수운천사(이최출룡자.동학을 창도한 수운 최제우)를 상징하며 두 사람은 하날님 좌우에 있는 시위선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자미성(紫星)과 삼태성(三台星)의 8성(八星)이 있고 동남, 서북의 순으로 4대칠성의 28수 성좌를 봉안하여 모두 36성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천계를 상징한다고 설명한다. 천단앞에는 단군, 석가, 노자, 공자 등 4성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건립초기에는 일제시대여서 단군 위패를 모실 수 없어 해방이 되고 난 후 모셨다고 수운교 관계자는 말했다. 오른쪽 벽면에는 18개의 머리와 36개의 손을 가진 신장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수운교에서는 창검과 방패를 들고 불천계(佛天界)를 호령하는 동진보살로 부르고 있다. 천단앞 왼쪽으로는 금강탑, 오른쪽에 무량수탑이 있다. 수운교 도성암 이찬구 선교사는 "중앙에는 미타탑이 있었는데 일제시대 일본에 빼앗겨 아직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들 탑은 1933년 수운천사의 명에 따라 봉안됐다고 전한다. 봉령각은 1929년 도솔천궁과 동시에 건축된 건물로 금병산 기슭에 목조건물로 지어졌다. 안타깝게도 1939년 화재로 본래 건물은 소실되고 해방이후 당초의 건물과는 차이가 있지만 그 자리에 중건했다. 이곳 봉령각은 윗장실로도 불렸으며 수운교를 창도한 수운천사가 별채와 같이 사용하면서 거처했던 곳이다. 법회당은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단의 중앙에 삼불상(三佛像.석가모니불-아미타불-약사여래불)을 모셨다. 1934년 8월 조성된 삼불상은 처음에는 천단에 봉안했으나 1936년 법회당 준공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봉안했다고 한다. 삼불상 왼편에는 '천수천안관자재보살' 탱화가 있고 오른쪽에는 '삼천대천세계도'가 봉안돼 있다. 삼천대천세계도는 1930년 그린 것으로 수운교의 우주관을 잘 나타내고 있다. 용호당은 수운천사가 정양하던 사저로 1926년 지어진 건물이다. 수운교본부에 있는 건물중 최초로 지어졌다. 수운교본부에는 석고(石鼓)라는 기이한 바위가 있다. 수운교 신도가 현몽을 통해 얻은 석고는 돌로 치면 쟁쟁 쇳소리가 난다는 것. 현재 '수운교 석종'이라는 이름으로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수운교는 천도교와 같은 동학계열이지만 신앙내용은 큰 차이가 있다. 천도교가 의식을 간소화하고 현대화되어 있다면 수운교는 의례나 신앙대상에 있어서 불교와 습합된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 있다. 수운교는 불교인으로 알려진 나옹화상을 받들고 있고 육식을 피할 뿐 아니라 부처를 봉안하고 있다. 불교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국조 단군은 물론 노자도 선성(先聖)으로 모신다. 유-불-선 합일을 주장하는 신종교의 전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수운교는 교조인 이최출룡자가 수운 최제우와 동일인라고 주장한다. 대구장대에서 살아나 입산한 후부터 스스로 이최출룡자로 이름을 바꿔 행세했다는 것이다. 이후 55년간 은둔 고행하면서 수행에 정진하다 1923년 수운교를 개교하고 1938년 11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고 주장한다. 수운교는 수운교본부가 위치한 금병산이 천명계시에 의해 하늘이 정한 후천 5만년의 종교기지이며 동학이 수운교를 통해 결실할 청정도량(淸淨道場)이라고 의미를 부여한다. 또한 삼천대천세계 53불 부처님의 강림터라고 믿고 있다. 계룡산 일대에 산재해 있던 대부분의 신종교들은 정부시책에 의해 지금은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운교본부는 대단했던 옛 영화를 누리고 있지는 못하지만 계룡산일대 신종교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일부나마 짐작할 수 짐작할 수 있게 해주고 있다. 발췌 - 종교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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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교 입구

 

 

 도솔천 앞의 넓은 마당과 뒷편의 금병산

 

 

 

 

 

 

 

 

 

 

 

 

 

 

 

 

광덕문

 

 

 

 

 

 

 

 

석종-손가락이나 작은 돌로 치면 맑은 음의 소리가 난다.

우측에 있는 비슷한 돌과는 전혀 다르다.

 

 

도솔천에 있는 도깨비

 

 

 

 

 
  
1. 동학혁명사 요약
<※ 수강은 수운강생(水雲降生)의 약칭. 원년은 1822년임>

수강71(1892)

  • 1월. 해월 최시형 진천군 부창리 이거
  • 5월. 상주군 왕숙촌 이거
  • 7월. 최해월 서인주 · 서병학 등의 신원 운동 제청을 거절. 이에 서인주 등이 자의로 공주에서 관찰사 조병식에게 장사 제출
  • 10월. 최해월 교조 신원을 위한 입의문을 지어 각 포에 발하다. 이어서 삼례 집회지시
  • 11월 1일 삼례에서 수만명이 모여 충청 · 전라감영에 소문(疏文) 제출
  • 11월 7일. 다시 소문 제출. 9일 관찰사의 관문을 반포
  • 12월 2일. 보은장내에 도소설치하고 육임을 두다.
   

수강72(1893)

  • 서울 남부 남산동 최창한 집에 도소 설치하고 상소(上疏) 준비. 소두(疏頭) 박광호. 소문 손천민. 서가 남홍원
  • 서울 광화문 앞에 수천명의 도인이 모여 교조신원 읍소. 삼일삼야 복합(伏閤)상소(2.11)
  • 2월 13일. 국왕의 제음받고 도인들 흩어지다.
  • 음 3월 10일. 최해월 청산 보전리 김연국 집에서 보은 취회를 결정지시하다. 이에 따라 2만여 도중이 축성취회함.(보은장내)
  • 3월 20일. 30일. 보은군수 · 선무사 어윤중과 담판
  • 4월 2일. 어윤중이 국왕의 칙교받아 도중에게 해산령 내림
  • 4월 2일밤. 최해월 보은을 떠나 칠곡 · 인동 · 금산 · 청산 등지로 피신
  • 7월. 서병학 등의 폭력혁명 요구거절
   
수강73(1894)
  • 1월 10일. 전봉준은 정익서 · 김도삼과 상의하여 만석보 남쪽 마항 장터에 1천여 도인과 주민을 회집케 하여 고부(古阜)관아를 장악하고 만석보 파괴
  • 1월 14일. 15일 개촌에서 1만여명 운집하여 기세 충천
  • 2월 25일. 동학군 자진해산
  • 3월 21일. 동학군, 동도대장이라 크게 쓴 기치 앞세우고 부안 백산(白山) 점거, 군열정비(1만여명)하여 발진
  • 3월 25일. 동학혁명 기포, 대의를 밝히고 군기확립을 위한 사대 강령발표
    ①불살인 불살물(不殺人, 不殺物)
    ②충효쌍전 제세안민(忠孝雙全, 濟世安民)
    ③축멸왜이 징청성도(逐滅倭夷, 澄淸聖道)
    ④구병입경 진멸권귀(驅兵入京, 盡滅權貴)
  • 3월 29일. 태인현 아문 습격
  • 4월 2일. 해월 북접에 통문을 발하여 도인을 청산에 소집(수천명)
  • 4월 6일, 7일. 고부 황토현 전투에서 동학군 대승. 사기충천 삼남전역 완전 석권할 기세
  • 5월 31일. 전주성 함락 후 관군과 담판
  • 6월 10일. 전주 화약 성립
  • 6월 12일. 동학군 전주성 철수
    전봉준 호남 각 군읍에 집강소 설치하고 민정실시
  • 9월 18일. 북접은 청산에 집결하여 손병희를 통령으로 하고, 남접에 적극 협력(10만기포)
  • 10월. 논산에서 손병희와 전봉준 상면
  • 10월 23일. 공주 공방전 개시(동학군 기병 연인원 300만에 달함)
  • 11월 25일. 공주 공방전(우금치)에서 완전 실패하여 후퇴
  • 12월 2일. 전봉준, 피로리에서 체포당함.
  • 12월 24일. 북접군. 충주에서 해산시킴. 희생자 30만여명
   
수강74(1895)
  • 서북지방에서 동학군 계속 항거
  • 3월 29일. 전봉준은 동학군 동지 손화중 · 최경선 · 성두환 · 김덕명과 함께 서울에서 처형당하다




2. 수운천사와 수운교 연혁

수강91 서기 1912 2. 수운천사, 1864년 3월 10일 대구 감옥에서 금강산으로 은신하신 이후 근 50여년 동안 전국을 주류하시며 고행하시다가, 충남 청양 도성암에 은거 수도(9년간)
수강99   1920 9. 15 이최출룡자로 재위출세, 제자에게 도호수여 시작(예산 출운당)
수강102   1923 10.15
 
수운천사 출룡자께서 수운교 개교
경성부(서울) 임정에 본부를 두고 각지방에 지부 설치
수강103   1924 4. 도위발급을 시작하시다.
수강104   1925 10. 교주 사저를 대전군 탄동면 금병산하 장실 현위치로 이전
수강105   1926 3.
8.

용호당 건축, (소실로 1946년 재건)
석고(석종)를 수운교 도량으로 운래 안치

수강107   1928 3. 도솔천, 사대문, 종각, 사무실 건축 착공
수강108   1929 4.

9.
 
도솔천 준공낙성, 옥황상제 하날님을 모신 천단봉안, 용운가 저술 시작
수운교본부를 현위치로 이전, 봉령각 건축 (소실로 1946년 재건)
수강109   1930 3. 만성당 건립기지 정리
삼천대천 세계도 화성 봉안
금강경탑 다라니 한글판 조각 봉령각에 안치
수강111   1932 7. 유불선 합일에 따라 부처님을 모시고 불천묘경 법문으로 의식봉행 시작
       
        <1932년,도솔천에서 제자들과 함께하신 수운천사>
         
수강112   1933 2. 15 인호 조병휘, 동도전서 강서 받음
      5. 금강탑, 미타탑, 무량수탑 3탑 조성 천단에 안치
수강113   1934 9. 선성당 건립기지 지정표시
영세물체의 영우 총보(갑술총보) 봉안
      10. 15 불천묘법전수 선포
수강115   1936 4. 법회당 건축, 일제의 강압으로 미타교로 개칭
수강116   1937 5. 또다시 흥룡사로 개칭, 아미타불 입불식 거행
수운교 법문의식제도 등을 폐지 당함
교기, 인장, 용운가, 법문, 의식책등 30여종 경성별원으로 압수당함.
수강117   1938 3.

9. 18
미타탑은 일본 동본원사로 반출됨(찾아 오지 못하여 현재에 이름)
천사께서 장실에서 열반하심.
수강119   1940

2. 5.

수운교를 감시하는 일본 개교 감독자가 용호당에 상주하려하자 때 아닌 봄에 낙뢰로 용호당 소실됨
수강120   1941 9. 철원사건으로 28명 옥고자중 5명 순교
수강122   1943 5. 선교리사건으로 9명 옥고자중 1명 순교
수강124   1945 8. 조국광복으로 수운교로 원상 복구하여 법문, 의식, 제도 등 수운교법으로 시행, 삼원 운영직제 실시
(사해월인 등 인장은 회수하지 못함)
수강140   1961 9. 5.16혁명으로 민족종교 연합인 동도교로 통합
수강143   1964 2. 교리와 이념차이로 연합을 탈퇴, 수운교로 복구
수강161   1982 봄. 만성당기지에 궁을 도형 시설
수강162   1983 6. 국방 군사 620사업으로 교단부지 5만여평 강제 수용,
교단철거 강요당함. 이에 철거 반대 운동 전개
수운교 보존을 위해 각계에 진정, 탄원
주민은 철거 당해 각지방으로 분산 이주
수강163   1984 5. 17 도솔천 천단을 충남 문화재자료 제33호, 석종을 제34호로 지정 보호
수강167   1988 7. 4 수용부지중 일부인 일만천여평 환수
수운교 천단, 봉령각, 법회당 등 삼단 보존 확정
      8.12~14 제주 한라산에서 「평화통일기원 및 88서울 올림픽 성공기원 대법회」봉행
수강168   1989 3. 18 천단과 석종이 대전직할시 문화재 자료 제 12와 13호로 각각 지정 보호
수강170   1991 12. 사단법인 한국민족종교 협의회의 창립교단으로 동참
수강176   1997 3. 미환수분 부지 환원 소송 대법원 상고(이후에 기각됨)
수강178   1999 5. 26 수운교 천단(도솔천)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8호로 승격 지정
      7. 7 금강경탑다라니판 복원 3 · 7일 특별기도 봉행(전국동시)
      11. 12 수운교, 재단법인 설립 (문화관광부 허가 제137호)
수강179   2000 1. 1

재단법인 수운교, 법인 업무 개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