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심우정사 찾아 가는 길 (06/08/26)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3. 16:06

 

 

 

 

심우정사(尋牛精舍) 찾아 가는 길(06/8/26)


(1)

계룡산 - 언제 보아도 정겨운 산,

그리 높지 않아도 높은 산이 가진 모든 것을 갖춘 산,

그리 넓지 않아도 넓은 산이 가진 모든 것을 갖춘 산,

그리하여 가볼 만큼 가 보았어도 또 가보고 싶은 산!


(2)

06/8/26(토) 

未知의 계룡산 심우정사를 찾아 나섰더라.

동학사에서 오르면 쉽겠지만 [장군봉-큰배재-삼불봉] 길을 택하였더라.

편안한 지석골로 가려다

兵士들의 함성이 그리워 병사골로 향하였더라.


(3)

들머리 병사골 매표소 직원이 순찰중이어서 무사통과.

장군봉에 이르는 된비알을 오른다는 것은 일본 호다까산을 오르기보다도 힘들다.

일본이 아름드리 숲을 자랑한다지만 정겨운 우리의 소나무가 우거진 숲이 좋아라.

작은 초목들이 정겹게 들어찬 우리의 숲이 좋아라.

부스러기 바위가 아니고 덩어리 바위들이 장승처럼 반겨주고

때론 널찍한 마당바위가 마련되어 쉬어가기 좋은 우리의 비알이 좋아라.


(4)

한 시간여 만에 장군봉에 오르니

주변에 쓰레기가 보이고 산하의 동학사 初入엔 旅閣이 즐비.

일본이라면 아름드리 삼나무가 들어찼을 것.

참으로 아쉽다.

저 박정자 초입부터 숲이 우거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5)

갓바위, 신선대로 가는

암릉지대와 고갯마루마다 야생화가 즐비.

아기자기한 이름 모를 그들을 보니

일본보다도 다양한 植生이라는 생각.


(6)

큰배재를 거쳐 남매탑에 이르니

이끼 오른 나무 사이로 의남매의 傳說이 보였다.

상원암 마당에 핀 붉은 봉선화가

그들의 가슴 속 불꽃으로 보였다.


(7)

삼불봉에서 바라보는

계룡의 靈峰들이 아름다웠다.

해발 몇 천 미터에 오른 것보다도 가슴 벅찬 느낌!

그 느낌은 이곳이 靈氣로 뭉쳐진 곳이라서 만이 아닐 것이다.


(8)

누구에게 물어도 모르는 심우정사 가는 길!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심우정사 가는 길!

삼불봉에서 자연성능 방향으로 내려와 금잔디 가는 길에서

어림짐작하여 왼쪽 된비알로 접어들다.

너덜겅길이 천길 인데

심우정사 가는 길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더라.

그저 하산하려고 은선 폭포가는 방향의 계곡을 더듬는데

실낱같은 오솔길이었던듯한 심마니들의 痕迹을 발견하였더라.


(9)

그 오솔길을 더듬어 벼랑을 끼고 돌아가니

치마 입은 여인네 같은 장독대가 나타났더라.

심우정사는 단아한 암자가 아니고 허름한 임시거처였더라.

목초(牧樵) 비구는 간데없고 그의 제자 법수(法秀) 비구니가 지키고 있더라.

법수는 목초의 부도로 안내하며 그의 흔적을 더듬어 주었더라.

大慈大悲한 부처님께 경배하는 요령도 가르쳐 주었더라.


(10)

그리고 尋牛의 뜻을 물었더라.

소를 찾는다는 뜻이며 소는 사람의 本性이란다.

소를 타고 소를 찾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난 뒤

소도 나도 잃어버리는 경지에까지 이르러야 한다고 하였더라.

만해 한용운은 그래서 성북동에서 本性을 찾다가 本性을 잊어버리고자 하였구나.

폭음과 기행을 일삼은 목초의 제자가 이 정도의 道를 터득했다면

목초 비구는 분명 破戒僧이 아니라 道通한 비구였다는 생각이 들었더라.

 

(11)

그리고 비구니는 따스한 미소를 띄우며

그의 마음만큼이나 편안한 두충차 한 잔을 권하였더라.

그러자 무더위 속 7시간의 산행으로 인한 피로가 싸악 가시었더라.

힘도 들이지 않고 동학사 산문의 날머리로 가볍게 내려왔더라.

10:00-17:00, 총 7시간 소요.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8/28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0. 병사골로 가는 길의 시냇물은 졸졸졸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1. 단풍취

 

 

2. 장군봉

 

 

3. 심우정사는 어디쯤?

 

 

4. 저 아래에 숲이 기득찼다면?

 

 

5. 은꿩의 다리

 

 

6. 애기며느리밥풀꽃

 

 

7. 절벽 사이로 본 황적봉

 

 

8. 머나 먼 삼불봉

 

 

9. 樹海의 천장골

 

 

10. 계룡종주의 종착지 황적봉(왼쪽)

 

 

11. 삼불봉 방향

 

 

12. 남매탑

 

 

13. 상원암 마당의 봉선화

 

 

14. 가는 장구채

 

 

15. 삼불봉에서 본 장군능선

 

 

16. 삼불봉에서 본 칼능선

 

 

17. 삼불봉에서 본 쌀개-관음-문필-연천

  

 

18. 아무래도 "모싯대는 아니고 "잔대"인듯

 

 

19. 개모시풀?

 

 

20. ?

 

 

21. 목초의 흔적

 

 

22. 심우정사를 떠나며

 

 

 

 

풀뿌리 계룡산 목탁새, 목초
붉디붉은 날카로운 입맞춤. 장미에 부서지는 햇살. 계절의 여왕은 장미향기만 남기고 연둣빛 녹음 속으로 사라진다. 도도한 유혹인가, 찬란한 외로움의 슬픔인가. 보이지 않는 엘리뇨, 눈에 보이는 실업자들, 계절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길거리를 헤매는 사이, 세상은 이미 여름 중턱에 걸려 있다. 덥구나! 종교계가 국제통화기금 체제하의 대량 실직사태를 계기로 몇 가지 새로운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불교·기독교 등이 최근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실직자 지원사업은 종교사회학적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앉아서 ‘받는 종교’가 아니라, 나가서 ‘주는 종교’라는 새로운 교회상과 사찰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한국의 종교는 6·25전쟁 이후 세계 유례가 없는 신앙열풍을 타고 요원의 불길처럼 성장해왔다. 특히 1970~80년대의 경제개발 붐에 편승한 종교의 물량주의와 팽창주의는 종교 귀족화·호화성전 등과 같은 저차원의 세속화 현상을 빚어내 많은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귀족화된 성직자들은 가만히 앉아서 신자들의 헌금과 시주를 절까지 얹어서 받는 데 익숙해지면서 베풀고 주는 삶과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이렇게 돼 종교의 본질인 ‘주는 삶, 나누는 삶’의 공동체 모습은 좀처럼 보기가 어려웠다. 종교계의 실직자 구원은 ‘받는 자’의 모습으로만 굴절돼 있던 한국 종교의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종교 본래의 모습인 ‘주는 자’의 상(像)을 새삼 각인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일찍이 그 본보기를 실천한 분이 바로 목초(牧樵) 스님이다. 나는 시나브로 계룡산으로 눈길을 옮긴다. 한국산 5악(岳) 중 중악, 일명 서악으로 일컬어지는 계룡산은 온화하고 후덕한 충청인의 진산. ‘산이 커야 그늘도 크다’는 옛말처럼 계룡은 기슭에 300만 식솔을 거느리고 산다. 그런 무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살았던 우리 목초 스님, 그 스님의 우렁찬 목소리가 여전히 칼칼하게 들려온다. “홍박사! 그대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명예를 꿈꾸고 계시는가?” “아닙니다. 저는 소 가운데 가장 예쁜 소를 꿈꾸고 있지요.” (미소)… “홍시인! 그대는 아직도 글감옥에서 행복한 항복을 하고 계시는가?” “아닙니다. 저는 아침, 점심, 저녁으로 침만 흘리고 아무것도 못 얻어먹고 있지요.” (행주)…. 어수선한 송년회, 그리고 부활하려는 간절한 신년회를 치르고 난 뒤, 안식구와 다음날 아침 일찍 <심우정사>에 가자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신새벽에 고양이 울음같은 전화벨이 울린다. 밤늦게나 신새벽의 전화벨소리는 대부분 기분 좋은 것이 아니다.  2006/09/11 08:12:02  
풀뿌리 양보살이었다. “우리 목초 스님이 열반을….” 하면서 흐느꼈다. 양보살은 스님을 신통력 있는 도인으로 믿고 정성으로 모시는 마흔 살의 노처녀. 나는 여러 가지를 묻고서 평소처럼 갑천 둔치를 뛰면서 계룡산을 우러러보았다. “아하, 내가 요즘 뜸하니까 우리 스님이 보고 싶어서, 아니,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왜 그렇게 빨리 열반을, 우리 스님!” 평소 목초 스님을 흠모하던 대전일보 신도성 문화부장은 신문에다 열반 소식을 알린다. “계룡산 심우정사의 목초 스님이 1998년 1월 4일 새벽 3시경 심우정사에서 홀연히 열반에 들었다. 세수 62세 법랍 26세. 강창건씨 등 신자들의 말에 따르면 스님은 일주일 전부터 ‘오늘 내일 오늘 내일한다’며 열반을 암시한 듯한 말을 자주 했다 한다. 스님은 2일 밤 9시경에는 마당에서 갑자기 ‘아이쿠!’ 소리를 질러 나가보니 땅바닥에 일부러 비스듬히 드러누워 있다가 일어나면서 ‘자네들 중에 한 명은 교대로 내 곁에 있어야 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고 한다. 건강하게 저녁 공양을 드신 스님은 4일 새벽 돌연 가쁜 숨을 몰아쉬어 신도들이 당황한 나머지 119구급대를 불렀고 열반에 든 채 성심병원 영안실에 모셔졌다.” 내가 드높은 목초 스님의 존재를 안 것은 1990년대 초, 학봉리에서 <계룡한의원>을 하는 동서 형님에게서다. “염불대신 붓글씨만 쓰시는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거 경지가 대단해!” 그후 박기식 화가시인에게 또 그 스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호기심이 발동되어 박시인의 안내로 스님을 찾아나섰다. 동학사 뒤쪽으로 실개천 같은 산길이 하나 숨어 있다. 뭇사람들은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르는 <심우정사>로 가는 길. 중간에 성황당 같은 돌무덤이 있어 거기서 한 호흡 쉬었다가 1시간 정도 땀을 흘리면 삼불봉 오성대 밑에 초록 함석지붕의 암자가 우뚝하다. 아, 계룡산에도 이렇게 아름다이 숨은 암자가 있구나 감탄을 하는데 쩌렁쩌렁한 고함소리가 울린다. “잘 오셨소. 우선 두충차 한 잔 하시오!” 스님은 큰 키에 어깨가 쩍 벌어지고 눈길이 형형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났다. 토요일 주말에 <심우정사> 촛불 밑에서 곡차를 앞에 놓고 스님과 마주앉았다. 한밤을 새워 곡차를 마셔도 취하지 않았다. 곡차 속에 담긴 계룡산의 별빛은 더욱더 영롱하였다. 그때만 해도 그 암자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방바닥까지 번개가 비수처럼 내리꽂히고, 뒤편 절벽에서는 천둥소리가 호랑이 절규처럼 들끓었다. 으시시했다. 그때 목초 스님이 “이곳은 이렇게 기(氣)가 드세어 아무나 머물지 못하고 금방 떠나지요. 지금 내가 버티고 있지만….” 2006/09/11 08:12:55  
풀뿌리 부처님 오신 날 몇 해 동안 스님은 큰항아리에 막걸리를 빚어 오가는 사람에게 곡차를 보시하고 자신도 크게 마셨다. 곁에 있던 나도 물론 마음껏 마셨다. 밑의 큰절에서 아우성이 나 이 행사는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스님은 또한 도회지 아파트에서는 장을 담아먹을 수 없다고 <심우정사> 신도들에게 된장 간장을 퍼담아 주곤 하셨다. 그래서 이 작은 암자는 항상 먹거리 풍부한 장날이었다. 계룡산은 국립공원, 등산객이 취사를 할 수 없는 곳이다. 그러나 이 암자에서는 스님과 더불어 마음대로 취사도 할 수 있고, 곡차도 마실 수 있었다. 어떤 분은 이곳을 ‘심우까페’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내가 어설픈 시집을 간행할 때마다 스님은 “홍시인은 참 부지런해. 내게 한 백부만 보내주소. 우리 신도님에게 보시 좀 하게!” 하시며 자랑스레 선전하시곤 했다. 스님의 이런 특유한 기행과 통큰 보시 때문에 <심우회> <심우예우회> 등도 만들어져 우리 스님 곁에 있었다. 수많은 글장이들이 이 암자에 모였다. 나도 이곳에서 많은 시쓰기를 했다. 그리고 곧잘 자문자답하기도 했다. 다시, 시인은 무엇인가? 나의 아픔에 스며든 깊이를 통한 연대, 그리고 그 역사를 통해서 단번에, 단 몇 개의 낱말로써 마른 지혜를 쪼개고, 삶의 오래된 무늬를 열매처럼 달고 있는 뿌리를 되찾아오는 존재인가, 나는? 최근세의 경허(鏡虛) 큰스님부터 지금 제가 가까이 모시는 몇몇 스님들에 이르기까지 저는 그분들에게서 진정한 큰 시인의 모습을 봅니다. 틀에 사로잡히지 않고, 운(韻)에 시달리지 않고, 격(格)에 몸부림치지 않는 무애인으로서, 구도인으로서의 이상적인 한 시인의 모습을 봅니다. 결국 우리 시인이 도달할 정점은 진정한 언어에서의 벗어남, 그 정신의 땅에서 벗어남이 아닐까요. 2006/09/11 08:13:34  
풀뿌리 졸시집 『이 뭐꼬!』의 자서의 한 부분이다. 나는 목초 스님에게서 바로 그런 큰시인의 모습을 본 것이 아닐까. “걸림이 없고 생명이 없는 진리의 문은 마음이니라. 진리의 세계가 아니면서 진리의 세계 아님이 없고, 문이 아니면서 문 아님이 없으니 영겁의 절대 자유의 세상, 늘 열려 있는 절대 평등의 길이라. 누구나 이 문에 들어서는 자는 너와 나 모두 하나되어 구경에는 깨달음의 참맛을 즐기리라.” 「진리의 문」이라는 룸비니의 종지이다. 목초 스님은 독안룡(獨眼龍). 스님은 「금강경」을 소의 경전으로 하는 수행의 신조를 강조했다. 일체만법의 근원이 마음이라는 심외무불(心外無佛)의 불법진리관에 서서 마음의 혁명을 통한 참사람(眞人) 회복, 지혜로운 창의력 고양, 자비로운 덕행 등과 같은 덕목들을 주장한다. 생활신조로는 「법화경」을 따라 생명경외·인간존중 사상을 설파한다. 여기서는 너와 나, 정신과 물질을 구분하는 분별심(分別心)을 초월한 불이법(不二法)을 따라 중생의 아픔을 같이 나누고 제법개공(諸法皆空) 속의 동체대비(同體大悲)가 구체적 실천 덕목이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넉넉한 사람이 누구니? / 물론 목초스님! / 왜? /항상 곡차와 달이 있으니까! //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누구니? 물론 목초스님!/ 항상 곡차와 달이 없으니까! // 목탁새 그 소리 듣고/ 목쳐어! 목쳐어!” 목초 스님을 그린 졸시 「목탁새」이다. 이 시를 가지고 스님의 독실한 숭배자 김길원 거사가 스님의 49제 때 <심우정사>에 시비를 세우고자 열망하다가 그 무서운 IMF 때문에 연기하고 말았다. 그런데 우리 문학동네에서는 왜 그리 감투 욕심들이 많은지, 지부장 선거 때만 되면 자천으로 선후배 없이 날뛰고, 또 어떤 분은 시인협회장을 몇 년씩이나 독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시인의 마음은 불바다의 유소유이고, 목초 스님의 마음은 꽃하늘의 무소유인가! 목초 스님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의사 생활을 하다 37세때에 입산출가, 오늘도 우리가 그리워 삼불봉 <심우정사>로 내려와 피안과 차안의 영겁을 넘나들지도 모를 일이다.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디 사바하!◑  2006/09/11 08:4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