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산성을 돌아보다.
(1)
06/9/15(토)
아내와 청주 상당산성(上堂山城) 탐방.
이스라기가 내리는 산성은 5년 전의 모습 그대로더라.
이만한 모습을 갖춘 완벽한 산성도 드물리라.
4.1km의 포곡식 산성은 백제 상당현의 토성으로부터
여러 조를 거치면서 개수 되었다는데
신라의 서원경의 배후로써
이조의 청주읍에 상주한 병마절도사를 호위하면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아름다움과
5門3치3水口를 보존하며 유지하고 있더라.
(2)
고아한 南門에 도착하니
소풍 나온 아이들이 함성을 지르며
남문 앞 잔디 언덕에서 미끄럼을 타고 있더라.
성벽이 구렁이처럼 기어오르는 길을 따라 성밟기를 하듯이 오르니
치가 나타나고 위엄 있는 장대도 나타나더라.
성벽이 감싸고 있는 안쪽엔 야생화가 만발해 있더라.
(3)
西門을 돌아든 北門 앞에는
물봉선이 커다란 群落을 이루며 절정이더라.
북문을 돌아 내려오니 서문인데
서문은 그대로 산성 안으로 통하는 길이더라.
거기엔 저수지도 있었고 마을도 있더라.
된비알을 오르니 다시 남문인데
그 앞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드리웠더라.
아내와의 단출한 1시간 반의 散步였더라.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9/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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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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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도 난리가 나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잘가꾸어진 성 같습니다. 까실쑥부쟁이가 가을을 재촉하는군요. 2006/09/21 18:42: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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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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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오셨군요. 그 생각은 못했는데... 그래요, 요즘 난리가 나도 능히 피할 수 있는 장소겠군요. 개미취인줄 알았는데 까실쑥부쟁이였군요. 구절초, 산국화, 쑥부쟁이, 무슨 취... 도무지 구분이 안갑니다. 아! 참 저는 여행기나 각종 관심 자료는 조블에 정리하고 창작 문학(취미 생활임)은 별도의 문학서재(http://kanghan8.kll.co.kr)에 상재하는데 시간되시면 한번 보아 주세요. 배달 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9/2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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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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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청주에서 산적이 있었는데...상당공원은 지나다녔지만...상당산성은 말만하고 다녔다는......지금 보니 후회막급.... 너무 좋다... 2006/09/23 07:39: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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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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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셨군요. 제가 들러 본 소감은 인우적이 아닌 옛 모습을 많이 간직했을 뿐더러 온전한 모습을 보이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는 성 중의 하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9/24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9/24 15:3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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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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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산성 안에 왜 절이 많았을까? 조선후기까지 '구룡사' 등 4개 절 존재 조혁연 기자 chohy@jbnews.com ▲ 청주 상당산성 안에는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구룡사 등 4개의 절이 존재했다. 사진은 조선시대 제작된 상당산성도 모습. 청주시는 올 40억원의 예산을 들여 국가지정 및 도지정문화재 11곳을 보수·정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10억원의 예산으로 정북동토성의 성곽 및 성 내부 정비를 실시, 지역 역사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이밖에 2억5000천만원을 들여 부모산성 성곽 정비 사업을 추진하고, 부모산성이 국가 사적으로 지정될 수 있도록 행정적인 노력을 하기로 했다. 올 보수·정비사업에는 상당산성도 포함돼 있다. 시는 19억원의 예산을 들여 상당산성 서장대를 복원하고 저수지 주변 수문지에 대한 발굴조사도 실시키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상당산성을 처음부터 석성(石城)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으나 그렇지는 않다.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처음 축조된 상당산성은 조선 숙종 이전까지 토성(土城)이었다. 이후 조선 중후기의 대규모 정비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의 석성으로 변했다. 상당산성과 관련, 한 가지 눈여겨 볼 대목이 있다. 상당산성은 둘레 4.2㎞, 내부 22만평 제원으로 그리 규모가 큰 성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에는 '남악사', '장대사', '구룡사' 등 3개의 절이 존재했다. 지금도 절터 흔적이 뚜렷히 남아 있다. 이밖에 지난 19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보국사'라는 사찰이 종교적 기능을 했던 것으로 근대 기록은 전하고 있다. 일설에는 용화사를 짓는데 보국사 건축자재를 사용했다는 말도 있으나 확인은 안되고 있다. 왜 그리 크지 않은 상당산성에 절이 4개 씩이나 존재했을까. 지역 사가들에 따르면 임진왜란 등 조선시대 전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익히 알다시피 조선은 이른바 '숭유억불'을 국시로 채택, 불교를 철저히 억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승려들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호국불교'를 외치며 일주문을 나왔다. 그리고 곳곳에서 적지 않은 전과를 올렸다. 이에 대해 당시 조정은 전공의 댓가로 사찰 중창을 대규모로 허가했다. 속리산 법주사도 이때(인조) 중창된 것을 지금 우리들이 관람하고 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전국의 유생(儒生)들이 "유교가 국시인 나라에서 불교에게 너무 특혜를 준다"며 강하게 들고 일어났다. 2007/01/04 18:18: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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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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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던 당시 조정은 성곽 관리를 승려에게 맡기는 묘책을 짜냈다. 이렇게 되자 당시 승려는 면역 혜택을 받는대신 성을 관리·보수하고 대신 국가는 별도 인력동원없이 성을 유지할 수 있는 등 호혜의 관계가 성립됐다. 상당산성내 3개 사찰은 이같은 시대적 환경을 배경으로 생겨났다. 여기까지 진행해도 가시지 않는 의문이 있다. 왜 당시 조정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상당산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는가 하는 점이다. 사가들에 따르면 당시 조정은 임진왜란을 통해 몇가지 중요한 군사적 정보를 얻었다. 이중 하나가 '왜군들이 소백산맥을 넘을 경우 너무도 빨리 한양까지 치고 올리온다'는 점이었다. 이에따라 당시 조정은 왜군이 다시 침입할 것에 대비, 이의 저지용 산성으로 상당산성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상당산성을 한양, 호남 진출의 전략적 요충지로 봤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까지만 해도 상당산성 내에 '관리자 승려'가 많이 거주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1900년대초 성의 기능이 소멸되면서 승려들도 사리지고 절은 폐사가 됐다. 참고로 어문학자들은 상당산성 할 때의 '상당'(上黨)은 백제식 지명으로 '금강 상류'라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 '상'은 한자훈 그대로 '위쪽'을 의미한다. 반면 '당'은 훈의 음을 빌린 경우로 '물'(水)을 뜻하고 있다. '무리 黨'의 '무리'에서 '물'의 의미가 나왔다. 백제 도읍지에서 보면 청주는 금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이같은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청주'라는 지명을 만들었다. 광주가 '빛고을'인 것 처럼 청주는 '물고을' 이다. 그래서 '푸를 靑'이 아닌 '물맑을 淸'의 '청주'이기도 하다. 입력 : 2007년 01월 03일 16:34:50 / 수정 : 2007년 01월 03일 2007/01/04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