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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1) 가을의 속삭임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5. 09:41

 

 

 

 

 

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1)

 

가. 산행 계획

 

(1)

12년 째 근무하는 우리 회사에서는 매년 겨울에 속리산에서 冬季敎育을 하는데 교육 마지막 날 아침에 문장대 登頂 과정이 있다. 교육을 빼먹은 적이 없으니 문장대에 12번은 오른 셈이다. 학창시절에도 오르고 아내와 오른 적도 있으므로 15번 이상은 오른 것 같다. 문장대에 3번 오르면 神仙이 된다고 했는데 그렇게 오르고도 아직 신선을 모르니 30번은 올라야 어떤 조짐이 보이려나? 아무튼 문장대에서 바라보는 장쾌한 충북 알프스를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縱走해보리라 다짐하며 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2)

충북 알프스는 크게 [서원리-구병산-장고개]의 남릉 구병산 구간, [장고개-형제봉-천왕봉-문장대]의 주능선 구간, [문장대-관음봉-묘봉-상학봉-활목고개]의 북릉 암릉 구간의 3개 구역으로 大別되는데 그 거리는 무려 44km에 달한다고 한다. 급경사의 오름과 내림이 예사롭지 않은 구병산 구간, 암릉과 급경사로 어우러진 공개된 주탐방로인 주능선 구간, 기암과 괴석의 암릉미가 압권이어서 속리의 속살이라고까지 칭하는 암릉 구간 중 어느 하나 만만한 區間은 없다 할 것이다. 그동안 오를 때 마다 쳐다보는 관음봉, 묘봉, 상학봉, 천왕봉, 구병산은 어서 오라고 나를 부르는 것 같았지만 종주는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내고 계획은 圖上으로만 그치고 말곤 하였었다.

 

(3)

그러나 묘봉이나 상학봉이 암릉의 壓卷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언젠가는 마주해 보리라며 숨겨놓은 보석처럼 마음속에 품어오던 차였다. 매번 문장대에 오를 때 마다 그러한 熱望은 더하였지만 직장인으로서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44km라는 長距離와 암릉이라는 障碍物 앞에는 그 意志를 접고 [문장대-천왕봉]정도로만 만족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번 [만인-식장]능선과 계룡 남부능선 20km를 동반 종주한 농협 오병관 사장님과 달포 전에 속리산 종주에 의기투합하였는데 역시 등산 베테랑인 박상채차장이 가세하여 상세한 계획을 짜 둔 터였다.

 

 

나. 속리산과 암릉의 형성에 관한 자료 조사

 

(1)

속리산의 유래를 살펴보니 다음과 같은 설화가 있었다. 속리산이란 “세속을 여읜 산”이란 뜻으로 옛 이름은 구봉산(九峯山)인데 “삼국유사”의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風岳鉢淵數石記)”에 의하면 법주사가 창건된 지 233년 후인 신라 선덕왕 5년(784년)에, 이 구봉산을 지나던 금산사의 고승 진표(眞表) 율사 앞에 지나가던 소달구지가 멈추어 선다. 소가 무릎을 꿇고 우는 것이다. 주인이 그 이유를 물으니 율사는 “이 소는 겉으로 어리석으나 속으로는 현명하여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불법을 중히 여기는 까닭에 이렇게 우는 것이오.” 한다. 이 말에 감동한 주인은 스스로 낫을 들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율사를 뒤따른다. “축생도 이러한 신심이 있는데 사람에게 어찌 신심이 없겠습니까?”라는 이유였다. 이후부터 구봉산을 속리산이라 이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한 가지는 신라 말 대문호이자 학자였던 최치원이 이곳 속리산을 찾았다가 읊었다는 시(詩),

 

‘바르고 참된 도는 인간을 멀리하지 않는데, (道不遠人)

인간은 그 도를 멀리하려 든다. (人遠道)

그렇듯 이 산은 매양 세속을 떠나려 하지 않는데 (山非離俗)

세속은 산을 떠나려 한다. (俗離山)

 

에서 지금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 두 가지 설이 있다는데 그만큼 이곳은 말티를 넘어서면 세속과는 단절된 풍광을 연출하였던 것에서 기인했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지금이야 관광지로 변모하고 말았지만 우리가 탐방하려는 3개 구간 중 어느 곳인가에는 분명 그러한 이름에 걸맞은 풍광이 숨어서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2)

地政學的으로 살펴보면 백두대간이 남서진하며 태백산과 소백산, 그리고 죽령과 이화령 사이에 월악산群을 품어내고 이내 방향을 남으로 돌리는 지점, 한반도 남쪽 땅덩어리 한가운데에 또 하나의 名山을 일구어냈으니 바로 충북 보은과 괴산, 그리고 경북 상주와 문경 사이에 위치한 속리산(1,058m)인 것이다. 속리산은 일반인들에게 산 자체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 대사찰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진 법주사와 조선조 임금 태종에게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正二品松이 산자락 내에 자리 잡고 있어 더 잘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구병산(876m)에서 형제봉(803m)을 거쳐 속리산에 이르는 산군(山群)은 산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북 알프스’로 통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산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3)

속리산은 주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수정봉, 문수봉, 관음봉 등 1,000m 내외의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고, 그 사이로 문장대, 신선대, 입석대, 경업대, 학소대, 배석대, 산호대, 봉황대 등의 기암괴석과 암릉이 울창한 산림과 어우러져 뛰어난 풍치를 자아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속리산은 설악산, 월출산, 계룡산, 북한산, 월악산 등과 함께 남한을 대표하는 암산(巖山)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봄철 산 벚꽃, 여름에는 청송, 가을의 단풍, 겨울철 설경으로 바꿔가며 사시사철 장관을 이루는 속리산은 우리에게 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속리산의 진수는 역시 설악산, 월출산, 북한산, 도봉산 등과 더불어 산 전체가 바위로 넘쳐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등 완만한 산릉으로 육산(肉山) 혹은 토산(土山)의 형태를 이루며 북상하던 백두대간은 이곳 속리산에 이르러 그 형상을 골산(骨山)과 암산(巖山)으로 바꾸며 크게 솟구쳐 올랐다.

 

(4)

속리산은 처음에는 主峰인 천왕봉을 비롯하여 비로봉, 길상봉, 관음봉, 수정봉, 보현봉, 문수봉, 묘봉 등 아홉 개의 連峰으로 활처럼 휜 형상을 이루었다고 하여 구봉산(九峯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그 절경이 금강산에 맘먹을 만큼 뛰어나 소금강(小金剛), 혹은 제2금강(第二金剛)이라고도 하며, 또 광명산(光明山)이라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사시사철 秀麗한 山勢를 자랑하며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속리산이 만들어낸 깊은 계곡에 들거나 능선 자락에 오르면 어느덧 俗世의 시름과 고뇌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능선과 계곡에 발달한 수많은 奇巖들이 불을 뿜어내듯 하는, 기품과 위용이 넘쳐나는 속리산의 絶景은 마치 속세를 떠난 선경과도 흡사하여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5)

속리산은 풍수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산(火山)으로 통한다. 이는 바위들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같은 형국으로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광경을 두고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속리산 이곳저곳의 능선을 타고 넘쳐나는 기암들, 그리고 속리산에 속하는 산군으로 큰군자산(948.2m)과 칠보산(778m)을 끼고 발달한 쌍곡계곡, 도명산(643m)과 낙영산(684m) 아래로 발달한 화양구곡에 가득 들어선 기암들은 속리산의 진면목이 바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 속리산은 산 전체가 바로 하나의 암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산 전체에 다양한 형태의 암괴들이 넘쳐나고 있다. 속리산은 그야말로 ‘바위들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6)

과연 이렇게 많은 바위덩어리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인가. 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지질사에서 가장 지각변동이 심했던 중생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생대 당시 한반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 거대한 화산이 폭발하며 땅이 갈라지고, 이로 인해 지각의 일부가 내려앉고 올라가며, 또 지층이 휘어지는 등 단층과 습곡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났다. 그야말로 한반도는 ‘불의 시대’를 맞아 땅덩어리 전역이 요동쳤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한반도를 차지하는 암석 가운데 약 30% 가량의 화강암이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관입되어 형성되었다.

 

(7)

화강암은 대규모 지각변동에 따라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고온의 불덩어리인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틈을 뚫고 올라오다가 냉각·고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지하의 화강암 암반을 덮고 있던 지표 물질들이 오랜 세월의 지질 시대를 거치며 깎여 나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속리산을 포함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설악산, 월출산, 계룡산, 북한산, 월악산 등의 화강암 산지들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중생대 지각변동의 산물이다.

 

(8)

다만 화강암 산지별로 그 화강암의 형성 시기가 각기 다르다. 화강암 관입과 관련하여 한반도 중생대에 일어났던 화성활동은 크게 3차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트라이아스기 중기(약 2억2천만~2억1천만 년 전)에 송림 운동으로 인하여 평안북도와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송림화강암’이 관입되었다. 이후 쥐라기 중기에서 말기(1억8천만~1억6천만 년 전)에 걸쳐 대보 운동으로 인하여 원산~서울을 잇는 추가령구조곡 이남에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은 ‘대보화강암’이 관입되었다.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설악산, 계룡산 등을 이루는 화강암들은 이 당시에 생겨난 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악기 중기 이후(1억~7천만 년 전)에 일어난 불국사 변동에 의하여 경상퇴적분지와 옥천습곡대 주변 지역에 소규모의 ‘불국사 화강암’이 관입되었다. 월출산, 월악산, 속리산 등을 이루는 화강암들은 이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9)

속리산이 위치한 이 지역 일대의 기반암은 고생대 당시 이곳이 바다였을 때 쌓여 형성된 옥천누층군에 속하는 변성퇴적암이 주를 이룬다. 속리산을 이루는 화강암은 백악기 말 9천만~8천만 년 전 바로 한반도에 공룡들이 넘쳐나고 있을 당시 붉은 마그마가 변성퇴적암의 기반암을 뚫고 관입한 후 지하 약 3~4km 부근(대보 화강암은 약 10~12km)에서 식으면서 굳어져 형성된 것이다. 속리산에서 북으로 뻗어나간 지산(枝山)에 속하는 도명산, 낙영산, 군자산, 백화산, 칠보산, 대야산 등에 분포하는 화강암들 또한 모두 속리산의 화강암과 동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이를 총칭하여 ‘속리산 화강암’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더 멀리 주흘산, 조령산, 신선봉, 만수봉, 포암산, 월악산, 구담·옥순봉, 제비봉, 금수산으로 이루어진 월악산군(월악산 화강암이라고 말함) 또한 속리산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된 화강암체로, 백두대간을 타고 속리산군과 연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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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지하 약 3~4km 부근 깊은 곳에 있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어떻게 해서 지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일까. 화강암 관입 이후 오랜 지질시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지반이 융기함과 함께 피복 물질들이 침식과 풍화를 받아 차츰 깎여나가면서 지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에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지질구조선인 소백산맥은 속리산의 화강암체를 지표로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1)

소백산맥의 형성으로 지반이 높게 융기하게 되자 하천의 침식력이 증가하여 피복 물질들은 보다 빠르게 깎여나갈 수 있었다. 소백산맥의 형성은 지하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체의 육상 출현을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약 3~4km에 달하는 두꺼운 피복층이 중생대 백악기와 신생대의 지질 시대를 거치며 모두 깎여 나갔다. 속리산의 화강암이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인간의 시간관념으로 쉽게 가늠하기가 어렵다.

 

(12)

속리산 능선과 계곡 곳곳에는 특이하고도 기묘한 형태의 암석 지형들이 널려 있다. 마치 돌을 일부러 조각하여 쌓아 놓은 성곽 같기도 하고 혹은 비석, 돌탑 같기도 한 다양한 암괴 지형들이 산지 전역에 넘쳐난다. 마치 칼로 무를 자른 듯 정교하게 재단되어 있는 암석 무더기들이 저마다 모양새를 갖추며 산릉과 계곡 곳곳에 들어서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암석 예술을 거석 체험을 통해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속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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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이와 같이 다양한 암괴 지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화강암 재단의 마술사’인 절리(節理, joint) 작용 덕분이다. 화강암은 지표 가까이로 올라오면서 점차 압력의 하중이 제거됨에 따라 팽창한다. 이때 암체에는 팽창에 의해 금이 가면서 갈라지는 절리가 발생한다. 이때 절리는 보통 수직 및 수평 방향으로 발달한다. 이후 암체에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수분이 침투하여 암석을 구성하는 광물질들과 반응해 화학적 풍화를 이끌고, 또한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한편 나무와 이끼 등의 뿌리가 안착하면서 그 틈새를 더욱 벌리는 등의 기계적 풍화가 암석의 붕괴를 촉진시킨다. 그 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표를 덮고 있는 피복 물질들이 빗물, 바람, 하천수 등에 의해 씻겨 내려간 후 지표에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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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은 매우 단단한 암석에 속한다. 그렇지만 화강암이 일단 지하 심층부에서나 표층에서 물과 접촉하면 쉽게 풍화되어 부서지는 특성이 있다. 실제로 북한산이나 도봉산 등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을 오를 경우 등산로를 따라 화강암이 풍화되어 쉽게 부서져 내리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화강암의 푸석푸석한 풍화토를 가리켜 ‘썩은 바위’ 혹은 ‘석비레’라고 말하며, 지형학 용어로는 새프롤라이트(saprolite)라고 한다. 한편, 화강암에 가해진 절리의 방향과 발달 정도에 따라 그 암괴의 형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수직 방향의 절리가 탁월할 경우 암주(巖柱) 모양의 기둥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입석대를 중심으로 문장대에 이르는 종주 능선을 따라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판상의 수평절리와 수직절리가 서로 동일한 간격으로 형성된 격자상 절리가 발달할 경우는 모서리 풍화가 진행되어 핵석(核石·tor)이라고 하는 돌알(돌탑)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문장대에서 청법대, 그리고 칠형제봉으로 이어지는 곳에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수직보다는 판상의 수평절리가 탁월할 경우는 평탄한 너럭 형태와 돔 모양의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경업대를 비롯하여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 등이 이에 속한다.

 

(15)

그런데 속리산의 주봉을 이루는 천왕봉만큼은 유독 그 형상이 다른 봉우리들과 달리 펑퍼짐한 육산의 형태를 띠고 있어 특이하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일까? 천왕봉 일대를 이루는 화강암은 주변 암석에 비하여 절리의 규모가 미세하게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화학적인 풍화작용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능선과 봉우리에 비하여 침식과 삭박이 빠르게 진행되어 암석 파괴가 손쉽게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두꺼운 토양층의 피복이 형성되어 여러 다른 암봉들과 같은 걸출한 암석의 돌출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16)

한편, 남한만을 두고 이야기할 때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속리산에서 한남, 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까닭에 속리산은 국토의 종갓집 산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남한 땅의 산줄기들이 이곳을 정점으로 몰려드는 형세라고도 볼 수 있다. 속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을 꼭짓점으로 하여 남한 땅의 모든 산들이 뻗어나가고 또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에 의해 한반도 남반부의 대동맥을 이루는 한강, 금강, 낙동강 등의 삼대 강은 이곳 속리산을 기점으로 서로 물길을 달리하며 나누어져 흐른다. 바로 그 삼파수(三波水)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이 속리산의 정상 천왕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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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1년 우리나라의 지리, 풍속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한강, 금강, 낙동강의 물이 나누어지는 삼파수의 기점이 속리산의 문장대라고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속리산은 보은현 동쪽 44리 되는 곳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꼭대기에 문장루대가 있다. 문장루대는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넓이는 삼천 명이 앉을만하다. 이 누대 위에 가마솥 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서 가뭄에 줄지 않고 장마철에도 불지 않는다. 이 물은 세 갈래로 나누어져(삼파수) 흘러내려 가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꺾어진 것은 달천(한강)이 된다.’

 

(18)

그러나 필자의 답사와 지형도 판독에 의하면 이는 지극히 잘못된 사실이기에 바로잡는다. 문장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경북 상주시 하북면 용유리를 지나 농암천을 따라 문경시 가은면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낙동강의 발원지에 대한 설명은 옳다. 그러나 문장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는 금강이 아니라 한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장대 남쪽으로 파인 용바위골을 타고 법주사를 돌아 나온 물이 대청호로 흘러들어 금강에 이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은 금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내속리면 상판리를 지나면서 물길을 갑자기 북쪽으로 돌려 보은군 산외면 백석리~청원군 미원면 운암리~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를 거쳐 남한강 지류인 달천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문장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이 아닌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함이 옳다.

 

(19)

문장대를 기준으로 서쪽으로 흘러드는 물 또한 달천(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문장대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정낭골과 합산골을 타고 흘러내려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운흥리를 거쳐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를 타고 달천(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문장대가 삼파수의 분기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속리산에서 금강의 물길을 가르는 분수령은 문장대가 아닌 속리산의 주봉인 천왕봉이다. 천왕봉에서 남쪽으로 파인 대목골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삼가 저수지를 거쳐 삼가천을 타고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탄부면 하장리~마로면 관기리~옥천군 대청호로 흘러들어 금강에 이른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동국여지승람에서 속리산의 문장대를 우리나라 남한 땅의 삼파수로 단정 지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형적으로 볼 때 한강, 금강, 낙동강의 삼파수 기점을 문장대에서 천왕봉으로 옮겨 놓고 보면 삼파수의 물길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교사 http://blog.naver.com/doll114 에서 참조]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0/14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가을의 속삭임

 

 

 

 

박원 어쩐 일인지 많은 산을 타고도 속리산은 가보질 못했습니다.
소개글 잘 읽었습니다. 2006/10/24 16:08:20  
풀뿌리 "속리산"을 가시면 안됩니다. 안 가보시길 잘 하셨습니다. 세속을 여의면 안되지요. 저야 수 십번 버렸지만 말입니다. 그런대 버려지지 않더군요.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0/2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10/25 09:31:38  
풀뿌리 [조용헌살롱] 岩壁忘憂
‘마운틴 오르가슴’(mountain orgasm). 나는 등산의 쾌감을 이렇게 표현한다. 살아 있는 동안에 오르가슴을 최대한 느끼다가 가는 인생이 성공한 인생이다. 낙(樂) 중에서 최고의 낙이 바로 ‘마운틴 오르가슴’이 아니겠는가. 몸이 찌뿌드드하거나 감기·몸살 기운이 있다 싶으면 바위산에 오른다. 3,4시간 정도 바위산을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개운해지고, 삶의 의욕이 생긴다. 마운틴 오르가슴의 이론적 근거는 바위다. 바위 속에 함유되어 있는 광물질에서 지기(地氣)가 나온다. 이 기운이 인체의 피 속에 있는 철분을 타고 들어와 뇌세포를 활성화시키고,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것이 나의 가설(假說)이다. 전국을 여행하면서 30리 밖에서라도 바위산이 나타나면 한번 올라가 보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우뚝하게 솟은 바위를 바라다보면 입에 침이 넘어간다. 1주일에 한번 정도 바위를 주식(週食)할 수 있는 인생은 상팔자(上八字)에 틀림없다. 바위 찾아 3만리로 돌아다니다 보니 드디어 바위 전문가와 조우하게 되었다. 산악계에서 암벽고수(岩壁高手)로 알려진 김용기(金龍基·55) 선생이다. 20대 중반부터 시작해서 약 30년 동안 전국 바위산의 암벽을 모조리 타본 사나이다. ‘한국 암장순례’라는 책 2권은 그가 전국 300개의 바위절벽을 어떻게 오르내렸는가를 기록한 보고서다. 보통 한군데의 암장(岩場)에 10개의 코스가 있으므로, 300개의 암장에는 3000군데의 코스가 있다. 이 3000군데를 올라가는 세밀한 지도 책을 그가 만든 것이다. 김용기는 한국 암벽의 ‘모암’(母岩)이라 할 수 있는 도봉산 인수봉(仁壽峰)만 해도 약 3000번 이상 올라간 인물이다. 물론 밧줄을 걸고 절벽을 올라갔다. 한세상 태어나서 그가 한 일은 목숨을 걸고 바위절벽에 올라간 일이다.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닌데, 왜 절벽에 올라갔는가?”라는 질문에 “50억 빚이 있는 사람이라도 밧줄을 감고 천 길 낭떠러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으면 그 근심을 잊어버린다. 섹스도, 골프도, 술을 먹어도, 어떤 도박을 해도 근심을 잊어버릴 수 없지만 암벽을 타면 잊어버릴 수 있다. 바위에 매달려 있을 때면 부귀(富貴)와 빈천(貧賤)의 차별이 없다”는 대답이 되돌아 왔다. 30년 암벽 인생의 철학은 ‘암벽망우’(岩壁忘憂) 였다. 조용헌 ·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6.1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