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3)
라. 제 2 구간 [갈령-형제봉-천왕봉-문장대]
2006/10/21(토)아침 05:30분.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約束을 잊지 않고 세 사람은 정확한 약속시간에 약속 장소에 모였다. 모두들 환한 얼굴이다. 지난 주 어려운 구간을 무사히 완주하여서인지 여유까지 있어 보인다. 그래서 다음으로 예정된 3구간(구병산) 종주를 쉽게 하기 위하여 오늘의 출발지를 갈령이 아니라 장고개나 동관음고개로 바꾸는 문제를 긴급의제로 논의했으나 결국 최초의 계획대로 갈령으로 하기로 했다.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각축장인 報恩 삼년산성을 지나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의 본향인 尙州지경으로 접어드니 아직 未踏구간인 구병산이 여명 속에 날카로운 실루엣을 자랑한다. 역시 예상대로 만만치 않은 산세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마저 정복하고야 말리라. 너의 아름다운 허리를 껴안고야 말리라.
(1) 갈령(443m)-갈령삼거리-형제봉(832m)
[07:00-08:10, 70=70분, +2=2km]
구병산에서 장고개까지의 산마루를 돌아 지난 주 보아두었던 갈령(葛嶺)에 도착하니 하늘이 꾸물꾸물하다. 내일 비가 온다고 했는데 오늘은 지난번의 맑은 眺望같은 행운은 어려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인생사도 그렇듯 매사 순탄하지 만은 않은 것이 宇宙의 법칙이니까. 갈령 기념탑 옆의 표지판을 보니 형제봉이 90분, 대궐터산이 110분 거리에 있슴을 알겠는데 대궐터산이 있슴을 보니 계룡산 신도안 대궐평처럼 누군가 이곳에 수도를 삼으려고 도모하였는지 궁금하다. 들머리부터 여간 가파르지 않다. 조금 前進하니 속리산 특유의 奇巖들이 나타난다. 그리고 연이어 봉우리가 나타나는데 지도상의 721봉으로 짐작된다. 07:25분 721봉을 지나니 안부가 나타나는데 표지판을 보니 갈령3거리임이 분명하다. 구병산 신선대까지 9.6km요, 장고개까지 6.5km, 형제봉이 700m라고 표시되어있다. 능선을 지나 앞을 보니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앞을 막아선다.
(2) 형제봉(832m)-피앗재
[08:10-09:15, +65=135분, +1.6=3.6km]
왠지 이름도 모르는 그 봉우리를 오르고 싶었다. 박차장님과 오사장님의 만류를 뿌리치고 제일 실력이 부족한 내가 바위 모서리를 붙들고 천신만고 끝에 올라서니 둥그스름한 바위 두 개가 솟아 있다. 거기에 대간꾼들이 달아 놓은 리본이 현란하다. 여기가 형제봉인가? 아마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그 유명한 형제봉이라면 분명 표지판이 있을 것인데 아무런 표지판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분의 염려 속에 벼랑을 내려와 그대로 直進했다. 마테호른봉 같은 칼날 삼각바위봉이 또 나타났다. 거기는 도저히 오를 자신이 없어 그대로 전진하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 리본도 안보이고 大幹길치고는 낙엽이 너무 많이 쌓여있다. 발목까지 차오른다. 길을 분간하기도 어렵다. 길라잡이 박차장님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며 낙엽이 쌓인 희미한 오솔길을 20여분 전진하다가는 되돌아가기로 했다.
다시 마테호른봉을 지나 내가 오른 봉우리에 가 보고야 그 봉우리가 바로 형제봉이고 그 바위봉 바로 아래 우회전하는 길이 뚜렷이 나 있슴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님! 박차장님의 용단이 아니었으면 우리의 충북 알프스 종주 2구간은 不發로 끝날 뻔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렇게 거기서 20여분을 헤매었으나 제대로 판단하여 변경하여 갈 수 있었던 것에 대하여 다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충북 알프스를 종주하시는 분들은 잊지 말 것을 부탁드린다. 갈령3거리에서 첫 번째 나타나는 봉우리가 형제봉이고 형제봉을 넘자마자 직진하지 말고 우회전하여 가실 것을...
형제봉을 지나자 계속 내리막이다. 지도를 보니 형제봉이 832m요, 피앗재가 630m이므로 200여m의 고도차이니 엄청난 내리막이라 짐작은 했지만 막상 急轉直下의 급경사를 만나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급경사를 지나고 조그만 봉우리(803봉)을 지나자 능선인데 능선 바로 아래로 비닐하우스단지며 田畓이 보인다. 이어서 내속리면 만수동에서 올라오는 피앗재가 보인다. “여기서 뛰어서 7분 내려가면 물이 있다. 형제봉까지 1.6km, 천왕봉까지 5.8km”등 情報가 刻印된 이정표가 반겨준다.
(3) 피앗재(630m)-전망바위
[09:15-10:50, +95=230분]
피앗재에서 10여 분 휴식 후 진행하여 보니 부드러운 흙으로 된 肉山이 지속된다. 오사장님은 巖山보다 오히려 이런 산이 운동이 되며 편안하다고 하시는데 박차장님은 성에 차지 않는 듯 내달리기도 하며 가다간 우리가 따라가지 못하면 오두마니 서 있기도 하다. 그리곤 연신 지도를 꺼내보며 계속 地形地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부지런하신 분이다. 앞에 문득 소봉(667봉, 09:45)이 나타났는데 그 소봉을 올라서자 연달아 봉우리들이 줄지어 있다. 그러나 편안한 낙엽 쌓인 오솔길만큼은 지속된다.
10:00시 가파른 726봉, 10:30분 703봉을 연이어 올라서니 빨간 단풍이 아름답다. 올 가을은 지독히도 가물어 단풍이 흉년인데 이곳에서 原色的인 단풍을 만나니 새삼스럽다. 산죽(조릿대)이 우거진 길을 치고 오르니 병풍 같은 계곡과 단풍이 물들어가는 절벽 아래 대목리 계곡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바위에 다다라 한동안 忙中閑을 즐겨 본다.
(4) 전망바위-천왕봉(1057.7m)
[10:50-11:50, +60=290분, +5.8=9.4km]
전망바위를 지나 소봉에 올라서니 커다란 암봉인 천왕봉이 접근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高壓的인 자세로 굴참나무 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다. 천왕봉이 육산이라 흙으로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남측에서 거슬러 올라가니 계룡산 쌀개봉 같은 거대한 바위덩어리를 자랑하고 있어 이러한 선입견에 혼란이 일어온다. 전망바위에서부터 주변 巖質을 살펴보니 속리 특유의 붉은 반점을 가진 문경석이 아니고 거무튀튀한 계룡산 바위 같은 特性을 드러낸다. 그리고 바위 덩어리가 아니고 편마암같이 판상형으로 절리를 이루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암질 분석가들이 말한 대로 속리산의 수많은 봉우리 중에서 천왕봉은 상봉이지만 훨씬 後代에 生成되었슴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오솔길에 울창하게 우거진 산죽을 헤집고 소봉을 넘어 안부에 도착하니 안내판이 보인다. 가파른 오름은 참나무 계단으로 되어 있다. 그 안내판 앞에 50대 부부가 서 있다. 오늘 5시간 산행 중 처음으로 부딪힌 사람들인 셈인데 우리는 그만큼 인적이 드문 대간길을 밟아 온 것이다. 내일 비가 온다고 豫報 된 탓인지, 오늘 조망이 좋지 않아서 인지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 노년에 접어든 부부를 보니 반가웠다. 그런데 그 부부가 안내판 앞에서 난감해 하고 있었다. 법주사에서 출발하여 상환암을 거쳐 천왕봉에 오른 후 문장대에 가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천왕봉에서 문장대 방향을 잘못 판단하여 그대로 직진하여 이 안부에까지 넘어온 것이었다. 내려온 비탈이 보통이 아니라며 난감해 하기에 내가 “상봉을 두 번 배알함은 큰 행운입니다.”라고 위로하였더니 빙그레 웃으시는 것이었다.
천천히 된비알을 오르니 갈참나무 사이로 보이는 절벽이 상봉이라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 같다. 이어 상봉의 봉우리가 보이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산죽은 내 키를 넘본다. 화강암을 기반으로 하여 변성퇴적암이 군데군데 섞여있어 변성 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이고 화강암 부분은 날카롭게 솟아올라 아름다운 근육을 자랑하는 상봉이 고압적이었던 아까의 느낌과는 달리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온다. 여기에 오니 꽤 많은 사람을 볼 수 있다. 총 면적이 283.4㎢란 어마어마한 속리산이 안고 있는 산줄기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것 같다.
속리산 천왕봉은 상봉으로써 구병산으로부터 문장대. 묘봉, 도명산, 큰군자산까지 전체 국립공원이 한눈에 조망되며 삼파수(三波水, 三陀水))의 발원지로 유명하다. 한반도 남반부의 대동맥을 이루는 한강, 금강, 낙동강 등의 3대강이 이곳을 起點으로 서로 물길을 달리하며 나누어져 흘러내리는 것이다.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한강, 금강, 낙동강의 물이 나누어지는 삼파수의 기점이 속리산의 문장대라고 적혀 있지만 최근 자료에 의하면 천왕봉이 그 발원지로 판명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이 산마루에 옛날엔 대자재천왕사라는 사당이 있었다고 한다. 천왕신이 해마다 가을 10월이면 법주사에 내려가서 45일 동안 머무르다가 상봉으로 도로 올라오는데 그 동안에 이 산 아래 사는 모든 주민들까지 그 신을 맞이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산 이름 중에 천황봉이 많은데 이 곳 속리산의 주봉도 현재 일반적으로 천황봉으로 부른다. 그런데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는 천왕봉이었던 것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천황을 상징하는 천황봉으로 바뀐 듯하다. 그러나 대동여지도를 비롯하여 구한말에 만들어진 실측지도에도 천왕봉으로 표시되어 있으므로 지금부터라도 천왕봉으로 바꾸어야 하며 그렇게 쓰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5) 천왕봉(1057.7m)-비로봉(1008m)
[11:50-12:20, +30=320분]
생각보다도 훨씬 방대한 영역을 가진 속리, 삼파수의 발원지로써의 천왕봉을 생각하며 문장대 방향으로 향한다. 조릿대 가득한 오솔길을 내려오니 잘 닦아놓은 헬기장에 점심을 하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우리도 여기서 점심을 하기로 했다. 각자의 배낭에서 맛깔스런 김치와 밑반찬, 그리고 과일이며 커피등이 우수수 쏟아져 나온다. 조그만 배낭에 이 많은 먹거리가 들어갈 수 있다는 自體가 신기하다. 식사 중 이야기를 들어보니 오늘의 등반대장 박차장님은 경북 청송의 주왕산에서 암벽등반대회가 있어 심판으로 참석해야하는데 하루 미루고 오늘의 산행에 동참하셨단다. 너무나 감사하다. 사실 형제봉에서 박차장님의 예리한 판단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피앗재에도 못 오르고 대목리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 하산하였을 것이다.
맛있는 점심을 하고 주위를 둘러보니 암릉이 압권이다. “저 바위들이 수 억 년 전 지하 4km에서 불덩어리 용암이 굳어 2000만년 전 지상에 모습을 드러냈다지? 엄청난 지각변동과 풍우에 씻겨 하느님이 만든 작품들이란 말이지? 참! 대단한 名作이로고. 대자연이신 하느님이여! 당신께 경배 드립니다.” 이렇게 중얼거리고는 헬기장을 내려와 암릉에 근접하여 스쳐 지나가며 가까이 바라보니 암릉은 또 다른 모습을 연출한다. 분명 저런 기암괴봉 하나하나에도 이름이 있고 전설이 있을 텐데 알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디카에 그 모습의 한 컷을 담아 보지만 연이어 펼쳐지는 주능선의 동영상이 나의 뇌리에 얼마나 지속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모습이 보고 싶다면 다리가 허락하는 한 다시 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헬기장을 내려와 전진하니 비로봉인데 들어 갈 수 없다. 여기서 장각동이 3.7km란다. 그러므로 상봉만 알현코자 한다면 경북 장각동에서 오르는 길을 택하여야 할 것이다.
(6) 비로봉(1008m)-입석대
[12:20-13:10, +50=370분, +1.6=11km]
조금 내려가니 상환암으로 내려가는 길과 문장대로 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경업대1.9km, 천왕봉0.6km, 상고암 0.7km, 법주사 5.1km"란 이정표가 서 있다. 그 삼거리를 지나가니 비로봉인데 입산금지로 들어갈 수는 없다. 비로봉을 지나니 지난 겨울 폭설이 내렸을 때 아내와 와 본 상황 석문이다. 백설을 뒤집어 쓴 석문과 단풍 속의 석문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지난 번 묘봉 구간 종주시 상환 석문 같은 석문이 거기에도 많음을 보았거니와 자연의 조화를 그 누가 흉내낼 것인가? 여기서 지난겨울 속리 방문 후 지은 시조 한 수를 읊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즈음 -속리산 설경(雪景)-
속세(俗世)의 하늘 아래 그 속에 살아가도
사람들은 왜 이 곳을 속리(俗離)라 불러줄까?
말티를 넘어서 보면 저절로야 알 것을.
찬바람 맞으면서 가쁜 숨 몰아쉬고
석문(石門)을 돌아 지나 경업대 올라보니
상고대 시려운 숲이 꿈 속에 들어온 듯
버리려 들었지만 얻어서 넘는 길에
돌아보지 않아도 아련히 눈감으면
미륵님 따스한 미소 눈꽃처럼 피어나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2/1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속리산의 어느 구석 하나 금산사 미륵대사 진표율사와 관련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이 곳 비로봉(毘盧峰)에도 진표의 體溫이 느껴지는 곳이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렇다. 진표율사가 속리산 법주사에 온 이튿날 아침 새벽 방안에서 좌선을 하고 있는데 별안간 밝은 빛이 방문 가득히 비쳤다. 대사가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더니 맞은편 산봉우리에서 눈부신 햇빛이 오색 무지개를 띠고 사발팔방으로 비추고 있었다. 대사가 황급히 합장배례를 하고 그곳으로 달려가 보니 비로자나불(毘盧蔗那佛)이 암석에 앉아 있다가 서쪽 하늘을 향하여 구름을 타고 떠났다. 대사는 비로자나불을 직접 배알할 수 있었던 산봉우리를 비로자나불의 이름을 붙여 비로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비로자나”란 인도말로 "모든 곳을 두루 비친다(光明)"란 뜻이라고 한다.
비로봉을 멀리서 바라보고 문장대로 가는 방향으로 전진하니 그 좁다란 길에 오는 사람, 가는 사람으로 人山人海이다. 다들 올해 단풍은 별로라고 실망한다. 그런데 삼도(일본)에서 본 것처럼 미리 지나가길 기다리는 양보의 미덕과 미리 꺼내는 인사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사장님은 항상 먼저 인사하기를 잊지 않으신다. 사실 인사를 먼저 받으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왜 그게 잘 안될까? 정규 탐방로를 벗어나 암릉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어떤 부부는 접이 의자를 갖고 와 나란히 앉아 풍광을 감상하고 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계곡을 내려다보니 법주사의 경내가 보일락말락이다. 우리나라 사찰은 대부분 방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 그런데 숭유억불을 표방했던 조선에서 어떻게 사찰은 대토지를 하사받았을까? 숭불정책을 취했던 고려조에 받은 토지를 조선시대에도 인정받았던 것일까? 정이품송을 지나 법주사로 향하다 보면 “은구석 공원”을 만나게 되는데 이“은구석”이란 곳에 속리산 법주사의 영역에 관한 설화가 있다. 세조(世祖)가 악질(惡疾)로 인해서 고생을 하고 있을 때 이곳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서 요양을 하고부터 병에 차도를 느꼈다.
왕은 속으로 몹시 기뻐해서 많은 불전(佛錢)을 올려 승려들로 하여금 불교숭상을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질환에서 쾌유됨을 경하하는 자리에서 왕은 속리산에 있는 승려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 이곳에 와서 부처님의 은덕으로 악질을 고치게 되었으니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함이니 복천암 앞에 있는 돌을 끌고 다니다가 힘이 빠져 멈추는 곳을 경계로 해서 산천전답을 모두 절 소유로 인정하겠다.”고 했다. 이에 모든 승려들이 크게 기뻐하여 밖으로 나가 그 커다란 돌에 밧줄을 매어 앞에서 당기고 뒤에서 밀고 해서 끌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들은 우선 복천암에서 내려와 법주사를 지나 사내리를 벗어나자 보은 땅을 차지할 생각으로 말티재(馬峙)를 향해 돌을 끌었다.
그런데 상판리 “새목이”쯤에 이르자 모두들 기진맥진이 되어 더 이상 돌을 끌어갈 힘이 없어지고 말았다. 좌상주지스님이 앞에서 호령을 하면서 다시 한 번 힘을 내도록 독려를 했으나 이제 돌은 더 이상 움직이질 않았다. 이것을 본 왕은 미소를 지으며 “세상 모든 일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 이제 그 자리를 한계선으로 정하는 편이 좋겠다.”고 하며“그만하면 공양미와 승려들의 량도(糧度, 식량)가 족할 것이다.”라고 하며 사전(寺田) 문서를 작정해 주고 돌을 끌어온 자리에 놓아 주도록 했다. 이리해서 돌이 있는 곳에서 속리산 쪽 전부의 땅을 법주사에 내주었다는 것이다.
(7) 입석대-신선대(1018m)-경업대삼거리
[13:10-13:30, +20=390분, +0.5=11.5km]
암릉을 지나 조그만 나무계단으로 된 고갯마루를 내려서니 거대한 입석대가 보인다. 입석대 初入에 서 있는 안내판을 보니 천왕봉 1.6km, 문장대 1.9km이니 천왕봉에서 문장대까지 3.5km인 셈이다. 이곳을 지날 때 항상 입석대에 가보지 못하고 우회길로 지나치기 일쑤였는데 오늘은 人波도 피할 겸 입석대에 接近해 보기로 했다. 좁은 바위틈이 보이는데 빠져 나갈 수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지만 몸을 움츠리고 비집고 들어가 겨우 빠져나와 절벽에 올라서니 우람한 입석대가 마치 大虎가 입을 벌리고 앞발을 쳐든 모습으로 다가온다.
장중하다. 발아래는 천애의 절벽인데 법주사 방향의 계곡은 깊기가 한량없고 건너편 봉우리에 상고암이 보인다. 계곡에 가득한 수림은 단풍으로 타들어가고 있다. 누군가 입석대를 올랐다고 했는데 그것은 거짓말임이 분명하다. 촛대처럼 깎아지른 암벽을 어찌 오른단 말인가? 그리고 조금 지나니 신선대, 경업대로 내려가는 삼거리가 나온다. 그 곳들 모두 휴식하기에 좋은 장소여서 인산인해이다. 특히 신선대 휴게소는 시골 난전이다. 속리산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입석대와 신선대, 경업대, 청법대의 傳說을 알아보았다.
<입석대 立石臺>
조선 인조 때(1623~1634)에 임경업장군이 이곳에 이르러 6년 동안 몸과 마음을 단련하며 장군의 기상을 닦고 있었는데 어느 정도의 단련이 그의 체력한계가 되는지를 알 길이 없었다. 그는 그것을 시험해 보고자 했으나 기준조차 알 길이 없어 매우 당혹하게 여겨오고 있었는데 하루는 석굴에 앉아 정신을 통일하고 있는데 그 뇌리에 홀연히 형체는 보이지 않고 목소리만이 들려왔다. 임경업이 정신을 모아 그 말을 들으니“마주 바라다 보이는 석벽에 올라가 그 옆에 누워있는 돌을 비석처럼 세워놓으면 그 힘을 측정할 수 있으리라”하는 내용이었다. 임경업은 곧 경업대에서 마주보이는 곳에 올라가 커다란 돌을 일으켜 세우는데 아직도 힘이 부족했다. 이에 임경업이 그 힘이 모자람을 깨닫고 다시 열심히 체력을 단련하기를 1년, 마침내 7년째 되던 해 반석(盤石)위에 돌을 세우는 데 성공을 했다. 그 후부터 “돌을 세웠다”고해서 입석대(立石臺)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신선대 神仙臺>
아득한 옛날 속리산에서 絶景에 혼을 빼앗긴 高僧이 청법대에서 불경 소리를 듣고 멀리 남쪽 능선을 바라보니 산봉우리에 白鶴이 수없이 날아와 춤을 추고 그 가운데 백발이 성성한 신선들이 앉아 놀고 있는데 그 모습은 고승이 평생 원하는 仙遊世界인지라 황급히 청법대를 지나 神仙들과 놀고자 그곳으로 달려갔으나 막상 당도하여 보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승은 크게 실망하고 아쉬워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 다음 봉우리로 가서 다시 이곳을 보니 여전히 주위에는 백학이 놀고 신선들이 담소를 하는지라 고승은 아직도 자신이 신선들과 만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는 그곳으로 달려갈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신선들이 놀던 봉우리를 “신선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경업대 慶業臺>
신선대를 내려오면 천황봉과 법주사로 가는 갈림길이 나오는데 법주사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만나게 되는 바위이다. 이곳에서 바라다보는 입석대의 모습이 제일 아름답다. 조선시대 인조 때 임경업장군이 독보대사를 모시고 무술연마 등을 한 수련도장으로 삼았으므로 그의 이름을 따라 경업대라 부른다. 이 경업대로부터 5보 지점에 뜀금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뛰어 넘는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임경업이 심신을 단련하고 있던 어느 날 밤, 하늘의 별을 향해 救國 神力을 내려줄 것을 빌고 있던 임경업은 바람처럼 계곡을 날라 오는 사람의 그림자를 보고 태연하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그 正體를 확인하고자 암석위에 버티어 서서“요괴는 무엇이냐”고 고함을 쳤다. 그러자 난데없이 산 계곡에서 강풍이 몰아치는데 눈을 바로 뜰 수가 없을 만큼 심했고 자칫 잘 못하면 하늘로 날아가 버릴 듯 했다. 그러나 임경업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암석위에 버티어 서서 그 强風을 막아냈다. 이윽고 바람이 멎으면서 바랑을 진 도승 하나가 사뿐하게 암석으로 날아올라왔다. 임경업이 그 동작을 보고 범상치 않음을 알고 정중히 고개를 숙여 신력(神力)을 내려주도록 부탁을 했다. 도승은 그 스스로가 독보대사(獨步大師)라고 말 하고 언제든지 이 암석을 둘로 갈라놓고 그 사이에 길을 만들어 놓는다면 그 때 비로소 신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며 석굴 곁에 있는 물을 하루에 다섯 번 씩 마시면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임경업이 수행을 하는데 그 곁에서 戰略과 學識등 여러모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난 후 만 5년이 되던 해 가을 임경업은 혼신의 힘을 쏟아 마침내 거대한 암반을 두 조각으로 갈라놓는데 성공을 했다. 그 후 이곳 관음암으로 통하는 곳이 하나의 명소로 등장하였다. 그리고 그 중간에 경업이 정신수양을 하던 석굴이 있으며 임경업이 5년 동안을 마시고 힘을 기른 물이 해발 800m의 경업대에 오늘날도 마를 줄 모르고 흘러나오고 있다. 그 물은 차고 신묘(神妙)해서 한 모금을 마셔도 몸이 상쾌해서 악질을 쫓는다고 하며 “임경업 장군이 마신 물”이라 해서 “장군수(將軍水)”라 이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청법대 廳法臺>
옛날 어느 고승이 속리산 절경에 영혼을 잃고 방황하던 중 이 봉우리에서 불경 외우는 소리를 듣고 제 정신을 차렸다 하여 청법대라 부른다고 한다. 또 다른 설은 문장대 왼쪽능선으로 펼쳐진 등산로를 따라 가노라면 병풍처럼 솟아오른 다섯 봉우리가 장관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들 바위모습이 흡사 부처가 앉아 있는 듯하다 해서 청법대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임경업 장군이 속리산에 와서 이 바위를 보고 스승 복보대사가 은거하고 있는 곳임을 알았다는 전설도 있다.
(8) 경업대 삼거리-청법대-문수봉-문장대(1028m)
[13:30-14:00, +30=420분, +1.3=12.8km]
그러한 전설들을 생각하며 능선을 오르내리며 나아가지만 입석대와 오늘 가지 않는 경업대 빼고는 어디가 신선대이고 어디가 청법대이고 문수봉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안내판이라도 세워놓으면 오죽 좋으랴만 좋은 속리산이라고만 하지 나처럼 그런 分野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겐 아쉬운 점이라 하겠다. 문수봉이라 짐작되는 고갯마루에 올라서니 멀리 문장대가 보이는데 사람들이 벌떼같이 오르내린다. 그리고 문장대 근처에 다다르자 휴게소에는 시장바닥처럼 난전의 극치이다. 이곳이 왜 사유지인지 주인에게 물으려 했는데 접근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또 문장대를 자주 배알함도 산신이 바라는 바가 아닐 것 같아 우리는 그대로 시어동으로 내려가기로 하고 지난번처럼 한 시간에 주파하기로 하고 내달렸다.
(9) 문장대(1028m)-시어동
[14:00-15:00, +60=480분, +3.3=16.1km]
어느 곳에는 문장대가 1028m, 또 어느 곳에는 1054m라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바로 잡아야 할 부분이라고 사료된다. 하산하면서 문장대를 바라보니 세조대왕이 생각난다. 속리산 하면 진표와도 관련이 깊지만 조선의 세조대왕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말을 타고 넘었다는 고개가 곧 “말티”이며 하도 자주 임금님이 행차하셔서 그 말티에 박석을 깔았다고도 하며 내속리면에는 세조의 가마가 소나무 가지에 걸려 나아가지 못하자 “길을 열어라.”는 세조의 명에 가지를 들어 정이품을 하사 받았다는 “정이품송”이 있슴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또한 세조대왕은 “복천암”이나 “상환암”에 자주 들러 기도하고 “복천샘”에서는 눈병을 치유했다고도 전한다. 어린 조카를 왕위에서 몰아낸 자책감에 시달려 피부병과 종기가 많았던 세조는 불법에 더욱 매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평소 그와 친분이 두터웠던 신미 대사의 권유로 자주 속리산을 찾았다고 한다. 이는 신미의 불교 중흥의 야망과도 부합되어 있다. 속리산 복천암을 찾아 신미(信眉)․학조(學祖)․학열(學悅) 스님 등과 함께 3일 동안 법회를 열고, 기도를 드린 뒤 절에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는 오랜 동안 앓아왔던 피부병이 깨끗이 나았다고 한다.
문장대는 원래 구름 속에 묻혀 있다 하여 운장대(雲臧臺)라 하였으나 세조가 복천에서 목욕하고 이곳 석천의 감로수를 마시면서 치병할 때 문무 시종과 더불어 날마다 운장대에서 시를 읊었다 하여 문장대라 부르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세조가 속리산에 와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 하루는 월광태자(月光太子) 라고 자칭하는 귀공자가 꿈에 나타나 동쪽으로 시오리에 영봉이 있으니 그곳에 올라가 기도를 올리면 신상에 밝음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에 세조가 신하들을 데리고 온 종일 올라가 보니 하늘 위에 오른 것처럼 사방이 구름과 안개 속에 가린 중 영롱한 봉우리가 보였다. 그러나 위태로운 바위라 올라갈 수 없어 철못을 박고 밧줄을 늘어 정상에 올라보니 널따란 반석 위에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세조가 집어보니 오륜(五倫)과 삼강(三綱)을 명시한 것이라 세조가 크게 감동하고 하루 종일 그 자리에서 글을 읽으며 신하들과 강론을 하였다. 그 뒤부터 이 봉을 문장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며 또 한편으로는 정상이 언제나 구름과 안개에 가려 있는 봉이라 해서 운장대(雲壯臺)라고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시어동의 왼편엔 견훤산성이라는 산성이 있는데 여기에도 애달픈 전설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견훤이 그의 누이와 함께 성을 쌓고 군사를 양성하여 후백제를 일으켰던 곳이라고 하는데 아주 옛날, 근처에 장사로 이름난 남매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단다. 둘 다 장사였는데 두 남매 중에 누가 더 힘이 센지 그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이 놀이를 한다는 것은 힘자랑 놀이였다. 오빠가 커다란 바위를 들어 올리면 누이는 바위를 손으로 쳐서 산산조각을 내고 말아 과연 누가 힘이 더 세고 누가 덜 센지 알 수가 없었다. 날이면 날마다 두 남매는 서로 힘자랑을 하였지만 승부를 가릴 수가 없었다.
보다 못한 어머니는 두 남매를 불러 앉히고 “너희 남매는 천하장사다. 매일같이 힘자랑을 하다간 끝이 없고 한이 없겠다. 그러니 단번에 끝장이 나는 것을 해 보아라. 오빠인 너는 굽 높은 나막신을 신고 송아지를 몰고 서울을 다녀오너라. 그리고 너는 오빠가 서울을 다녀올 동안 돌을 날라 이 산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아보아라. 시합은 아침 해 뜰 때 시작해서 서산에 낙양이 지는 사이에 끝나야 한다. 시합에서 이긴 사람이 진 사람의 목을 잘라 버리도록 하여라.” 라고 말하였는데 시합의 결과가 너무 잔인하지만 이런 시합을 시키면 두 남매가 앞으로는 힘자랑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시킨 것이었다.
이리하여 다음날 아침 동쪽에 해가 솟자 두 사람은 마지막 결판을 짓는 시합에 들어갔는데 그러자 홀어머니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목숨을 걸고 시합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시합 결과에 따라서 아들이건 딸이건 하나는 죽어야만 한다. 왜 이런 시합을 시켰는가? 하고 후회도 했지만 이젠 별 수 없이 결과를 볼 수밖에 없었다. 뜨겁던 햇볕이 시들고 서산마루에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했다. 딸은 성을 다 쌓아 올렸다. 이제 나무로 문짝만 달면 그만이다. 그런데 아들은 어디쯤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초조해졌다. “아들이...아들이 와야 할 텐데...” 시합이 끝나면 그 결과에 따라서 어느 한 쪽의 목숨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딸보다 아들을 살려야 한다. 이것이 어머니의 생각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초조해진 어머니는 무서운 계략을 생각했다. 그것은 어머니들의 공통된 심정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딸이 문짝을 만들지 못하도록 지연시킬 계략을 꾸며냈다. 즉 이제 성을 다 쌓았으니 팥죽을 먹고 쉬엄쉬엄 하라고 꼬드긴 것이었는데 참으로 맛있는 팥죽이라 딸은 식혀가면서 맛있게 먹었다. 이제 팥죽도 불과 몇 술만 남았다. 그때 오빠가 온몸이 땀에 젖은 채 녹초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동생이 쌓은 성을 둘러보았다. “야! 내가 이겼다. 봐라 이 성은 문이 없다. 문을 만들지 못했구나.” 이 사태에 난처해진 것은 어머니였다. 딸이 능히 아들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었는데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뜨거운 팥죽을 먹였기 때문에 조만간 죽음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얘야, 아무리 언약이 중하기로서니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죽일 수야 있단 말이야? 이 에미를 봐서 참아라. 동생을 죽이려면 차라리 에미의 목을 끊어다오.”울며 애원했으나 아들은 냉담했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장사인데 항상 누이 때문에 방해를 받았다. 이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여 누이동생을 죽이고 세상에서 제일가는 장사가 되려는 것이다. 헛간에서 커다란 도끼를 들고 나오는 오빠를 보고 누이는 “오빠! 동정을 구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자 약속대로 내 목을 자르세요. 그리고 부디 홀로 남은 어머니를 잘 봉양하셔요.”하면서 늙은 어머니의 뒤를 보살펴 드리지 못하고 죽으니 억울하다고 울며 오빠가 내려치는 도끼날 아래 죽어갔다는 것이다.
그런 전설을 생각하며 시어동에 내려오니 오늘도 저번처럼 딱 한 시간 걸렸다. 우리는 시어동의 손두부집에 여장을 풀고 충북 알프스 2구간 종주를 自祝했다. 그리고 11월중 남은 구병산 구간을 감행하기로 결의하였다. 남은 구간이 20여km는 족히 될 것이고 이동 중 山勢를 관망하니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되므로 15시간은 소요될 것이지만 우리의 意志를 꺾지는 못하리라. 그러자면 아예 금요일에 속리산으로 이동하여 1박을 하고 이른 새벽 서원리 서원교로 이동하여 시작하여야 늦은 저녁 종주를 끝낼 수 있을 것이란 結論이 나오지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굳은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고 서로 격려하며 속리의 아름다운 암릉을 그리며 2구간 종주를 끝내었다.
- 오늘의 산행 총시간, 거리 : 480분, 17.5km
- 오늘의 산행 순시간, 거리 : 390분, 11.5km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0/21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갈령
2. 들머리 대간꾼들의 리본
3. 바로 드러낸 기암과 가파른 길
4. 벼랑에서
5. 갈령3거리
4. 형제봉
6. 형제봉 아래에서
7. 길 잃은 마테호른봉
8. 큰우산나물 군락
9. 피앗재
10. 편안한 육산길
11. 단풍
12. 전망바위에서 본 대목리 계곡
13. 등반대장님
14. 오사장님은 무슨 생각?
15.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천왕봉
16. 천왕봉과 산죽
옛 "천황봉"이 일제의 잔재라 하여 최근 "천왕봉"으로 바꾸고 표지석을 다시 세움
남이 본 천왕봉 주변 풍광
천왕봉 가는 길의 암릉
군자산 방향
구병산 방향
문장대 방향
17. 천왕봉에서 내려오는 길
18. 비로봉 암릉(디카 조작 잘못)
비로봉
남이 본 천왕봉 직하 암릉
19. 상환석문
20. 기암괴석(디카 조작 잘못)
남이 본 천왕 석문 주위 기암괴석
21. 남과 내가 본 입석대
22. 경업대3거리
22_1. 경업대
신선대
청법대
23. 인산인해의 문장대
24. 시어동 안내판에서 본 주능선
|
'01여행과산행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5) -大尾- (0) | 2015.07.15 |
---|---|
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4) (06/11/25) (0) | 2015.07.15 |
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2) (06/10/14) (0) | 2015.07.15 |
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1) 가을의 속삭임 (0) | 2015.07.15 |
정훈 시인과 함께 한 만인산(06/10/08) (0) | 2015.07.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