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5) -大尾-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5. 09:58

 

 

 

 

 

 

 

꿈결 속의 충북 알프스 종주 (5)

 

(4) 신선대-헬기장(521m)

[10:30-11:30, +60=380분, +2.2=12.9km]

신선대에서 내려오니 이제까지의 骨山길과는 달리 기분 좋은 肉山길이 연속된다. 그리고 우리가 가야할 만수계곡과 대목계곡이 아스라하게 내려다보인다. 깊은 심심산골의 조밀하지 않은 村落들이 그림같이 펼쳐져 있다. 장고개로 가는 23번 지방도만이 실핏줄처럼 樹海의 바다를 헤집고 뱀처럼 기어가고 있다. 몇 개의 소봉을 지나자 멀리 헬기장이 있는 521봉이 한층 가까이 다가온다. 신선대에서 볼 때 30분이면 닿을 것 같았는데 50여분 만에 도착했다. 여기서 좌측 샛길로 내려가니 묘지 앞에 팻말이 있다. 거기서 10여분 휴식하고 장고개로 계속 내리막길을 가야한다.

 

이러한 길을 걷자니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70여장의 목판으로 찍어 만든 22첩의 지도를 펼치면 가로 3m, 세로 7m나 된다는데 거기에 한반도의 모든 것을 담은 대동여지도. 축적은 약 16만분의 1, 각 층을 척의 크기로 접은 판의 크기는 동서 80리, 남북 120리를 포괄한다는 어마어마한 대동여지도. 일부에서는 그가 직접 답사치는 않고 그 당시의 여러 지도를 참조해 만든 커닝 제품이라고 헐뜯지만 나는 여기에 동의 할 수 없다. 물론 그러한 자료들을 참조했겠지만 全國의 상당부분을 직접 밟아보고 확인하지 않고서 10리마다 방점까지 表記하고 산의 형상까지 그려 넣은 정밀 지도를 제작하기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등산장비(배낭, 등산화, 스틱등)가 全無하던 시절에 단표누항(簞瓢陋巷)의 고산자는 어떻게 험난한 대간의 산들을 죽장망혜(竹杖芒鞋)에 의지하여 어떻게 올랐을까? 어쩌면 그는 이 나라의 최초의 등산가였는지도 모른다. 일개 軍校였던 가난하기 그지없었다는 그는 어떠한 사명의식으로 그러한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어떠한 부분에 있어서는 현대지도보다도 정밀한 지도를 19세기 중엽에 만들 수 있었던 그의 動因은 무엇이었을까?

 

(5) 헬기장(521m)-장고개

[11:30-12:00, +30=410분, +2.5=15.4km]

그러한 생각을 하며 521봉을 떠나니 길은 一瀉千里로 내리막이다. 그리고 樹木들은 모두들 옷을 벗고 있어서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데 그들이 벗어 팽개친 옷가지들이 오솔길에 수북하다. 그리고 발목까지 차올라 내리막길이 흡사 스키타는 듯 미끄럽다. 모두들 비틀비틀 뛰다시피 갈 수 밖에 없었고 넘어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록이 있어서인지 넘어진 사람은 없었는데 낙엽사이의 바위나 맨 땅에 살짝 등산화를 들이 밀어 밟는 것이 미끄러지지 않는 요령이었다.

 

희미한 오솔길 양 옆으로 낙엽송 群落이 있었는데 단풍이 절정이다. 샛노란 치장을 한, 곧게 뻗은 낙엽송 군락이 異國的이다. 그리고 조금 지나니 이번엔 푸르름을 자랑하는 잣나무 群落이 반겨준다. 노랑, 청록, 낙엽, 오솔길... 이런 主題와 事物들은 지천명에 접어드는 사나이들에게는 哀想에 젖어들게 하기에 충분한 조건들이었다.

 

드디어 낙엽송의 몸통 사이로 장고개의 2차선 포장길이 보인다. 길은 急轉直下로 추락하여 가는데 전혀 반갑지가 않다. 갈령으로 가자면 추락하는 만큼 다시 올라야 할 것이므로... 왼편으로 600여m 떨어진 갈골마을에 가면 食水를 구할 수 있다는데 초겨울 산행이라서 물을 별로 소모하지 않아 충분하다. 2.5리터를 준비했는데 아직 반도 소모하지 못했다. 장고개란 보은에서 상주로 넘어가는 긴 고개란 뜻이라는데 언덕 위에 형제봉 6.3km란 표지판이 다시 올라야하는 旅程을 두렵게 만든다.

 

(6)장고개-헬기장(532m)-율령산왕각-동관음고개

[12:00-13:40, +100=510분, +2.8=18.2km]

예상대로 장고개를 지나 율령으로 가는 길은 낙엽이 쌓인 급경사지다. 하지만 이미 숙달된 등산화는 우리를 자빠트리지 않고 능선에 올라서게 만든다. 일단 능선에 오르자 편안한 肉山길이다. 조금 가니 또 헬기장이 나타나는데(12:40) 거기서 바라보는 지나온 구병능선이며 이미 종주한 천왕능선, 그리고 未踏의 대궐터산 능선의 우람한 모습은 물론이고 형제봉의 두 봉우리가 한층 가까이 다가온다. 이 조망 좋은 곳에서 그냥 갈 수 없어 10여분 휴식하며 점심을 먹었다.

 

첫 종주 때에는 다들 밥이며 과일, 뜨거운 커피까지 바리바리 싸오더니 이번엔 김밥과 약간의 과일로 단출하다. 사실 오랜 산행에 있어서 많이 먹는다는 것이 오히려 속이 더부룩하여 불편하고 몸에서 받아들이질 않는다. 약간의 과일과 사탕, 그리고 충분한 食水가 오히려 산행을 즐겁게 함을 우리들은 저절로 파악하였던 것이다.

 

그 헬기장에서 충북 알프스 종주자들은 형제봉이 바라다 보이는 좌측으로 내려서기 쉬운데 헬기장을 가로질러 직진해야만 한다. 왜냐면 계곡을 건너 형제봉으로 직접 가는 것이 아니라 경북 상주 동관리를 지나는 백두대간 방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능선을 따라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기자기한 오솔길을 따라 가니 다시 급한 내리막이다. 율령이다.(12:50) 산왕각(산신각)이 보인다. 산신각이라지만 이곳 율령을 지키는 山神은 키가 작으신지 조그만 원두막 같다. 열려있는 門을 들여다보니 한사람이 겨우 들어갈 만한 공간에 제단이 마련되어있고 산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사람들의 祈禱가 없어서인지 장판이 지저분하다. 다만 산신의 그림만이 선명하게 살아서 지키고 있다.

 

산왕각이 있는 율령도 人跡이 끊긴지 오래여서인지 낙엽만이 오솔길을 메우고 가을을 노래하는 낙엽들이 뒹구는 소리가 쓸쓸한 팀파니 연주 소리같이 들려온다. 다시 계속되는 肉山의 부드러운 허리를 더듬어 올라가니 동관음 마을 사람들이 상주지방으로 시장을 보러간다는 비포장의 동관음 고갯길이 내려다보인다.

 

(7) 동관음고개-721봉-못재

[13:40-14:45, +65=575분]

고갯마루에 구병산7.5km, 형제봉3.5km란 푯말이 서 있다. 형제봉 방향을 올려다보니 제법 가파른 암봉이 넘실댄다. 박차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저 암봉을 넘어 능선을 따라 가야지만 갈령삼거리에 도달할 수 있단다. 이제 거의 다다른 것이다. 동관음 고갯마루에 양지바른 묘지가 있어서 그 묘지의 잔디밭에서 우리는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동관음 고개를 트럭 한 대가 먼지를 날리며 지나갔다. 지난 2구간 종주시 여기서 출발했다면 오늘의 산행은 이것으로 종료됐을 텐데...하는 아쉬움에 젖을 만큼 우리들의 다리도 피곤해져 갔다.

 

동관음을 지나 암봉인 721봉을 치달아 오르니 지도상에서 본 치마바위 같은 바위 斜面이 펼쳐진다. 登路도 바위 사이로 사라져버려 분간조차 못하겠다. 박상채 차장님을 따라 용하게도 낙엽에 묻혀 있는 길을 찾아 된비알을 오르니 암봉을 우회하는 길이 나타난다. 그러나 밑에서 범상치 않은 암봉을 눈여겨보아 두었던 터라 호기심이 발동하여 길도 없는 암봉을 올라타니 기대에 부응하듯 奇巖이 버티고 있었다. 느릿느릿 걷는 이구아나 같은 바위가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구아나의 등에 올라 산 아래를 내려다 보니 동관음 마을이 동양화같이 펼쳐져 있었다.

 

(8) 못재-갈령삼거리

[14:45-15:30, +45=620분, +2.8=21.0km]

그러한 암봉을 넘어 능선을 따라 내려가니 어느덧 해가 서산마루에 걸려 있었다.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참나무가 울창한 길을 내려가니 습지인 듯한 우묵한 지대가 나타났다. 이름하여 백두대간의 갈림길인 “못재”였던 것이다. 그 우묵한 지대에 濕地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고 낙엽만이 수북하다.

 

그런데 저 쪽에서 중년 몇이 나타나더니 갈령삼거리 방향을 묻는다. 대간꾼들이었는데 낙엽이 너무 많이 쌓여 길을 헤매는 것 같았다. 그들에게 우리도 갈령으로 간다고 하니 반가워한다. 그들은 산악회 소속으로 대간길을 멋도 모르고 따라 나섰다는데 지쳐있는 기색이 역력했다. 탈수증인지도 몰랐다. 오사장님이 얼음물을 건네이니 너무도 고마워하신다.

 

못재를 지나니 “진부령까지 무사히 종주하세요”란 리본이 반겨준다. 내가 마치 대간꾼이라도 된양 그 리본을 보니 가슴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들은 어째서 그 먼 길의 종주를 감행할까? 자기와의 싸움? 성취감? 산하에의 무한한 사랑? 산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알 것도 같지만 진정으로 그들을 이해하는지는 자신하지 못하겠다.

 

(9) 갈령삼거리-갈령

[15:30-16:00, +30=650분, +1.3=22.3km]

그들 대간꾼들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전진하다보니 상봉에 암릉을 이고 있는 형제봉 아래 갈령삼거리에 도달하였다. 거기에 대간꾼 일행 중 선두 그룹이 주저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에게 사진을 부탁하니 선뜻 표지판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준다. 그리고 지난 번 올라온 길을 이번엔 되짚어 내려오며 보니 대궐터산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위치에 넓은 가슴을 열고 있다.

 

지난 번 산행기에 신도안 대궐평처럼 대궐터산에 무언가 사연이 있지않나하여 알아보았더니 과연 사연이 있었다. 높이 877m로, 인근 대간선상의 형제봉(832m)보다는 높은 산으로 산 아래 마을에서는 두루뭉술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 부른다고 하며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 한다고 한다. 역시 아자개의 아들인 견훤과 관련이 있었다. 언젠가는 한번 가보고 싶다.

 

치마바위 같은 암릉을 넘으니 조망이 좋다. 지난 번 종주한 천왕봉까지의 능선이 붓으로 그어 내린듯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다. 앞에는 대궐터산이 넓은 가슴을 열고 있었고 북쪽에는 49번 지방도를 따라 가까이에는 도장산(827.9m), 멀리로는 시루봉(876.2m)이 깊은 계곡을 들추고 불끈 솟아 있다.

 

그런데 급전직하의 갈령가는 길에 보니 계절을 착각한 진달래꽃이 봉긋이 피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드디어 갈령이다. 갈령이란 표석 아래 최주임이 함박웃음을 띄우며 우리의 충북 알프스 종주를 축하해 주고 있었다. 우리는 標石 아래에서 부둥켜안고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보은읍으로 이동하여 보글보글 끓는 두부찌개 집에서 얼어있는 속을 풀고 다음 산행을 기약하며 헤어졌다.

 

- 오늘의 산행 총시간, 거리 : 650분, 22.3km

- 오늘의 산행 순시간, 거리 : 620분, 21.0km

 

 

바. 後記

 

1) 이로써 평소 별러오던 꿈결 속 같은 충북알프스 종주를 盛了하게 되었는데,

 

2) 이는 동행한 박상채차장님과 오병관 사장님의 훌륭한 인도 덕분이 아닌가 한다.

 

이에 속리산에 관한 필자의 시조가 있어 다시 한 번 읊어 본다.

 

 

 

요즈음 -속리산-

 

네 안에 내가드니 품에 든 아기 같아

 

젖무덤 더듬다가 저근듯 잠이 들어

 

손사래 휘젖다보니 네 밖에 내 있었다.

 

 

배달9202/개천5903/단기4338/서기2005/2/16 이름 없는 풀뿌리 나강하

 

* 저근듯:잠깐동안.

 

 

 

3) “충북 알프스”란 이름에 걸맞게 북릉, 주릉, 남릉은 나름대로 훌륭한 경관을 간직하고 있었다.

 

북릉은 암릉미가 좋고 주릉은 전설을 간직한 대간길이 좋고 남릉은 육산길이 좋았다.

 

4) 일반적인 답사 순서인 서원리부터 시작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으나

 

5) 단풍을 놓치기 전에 암릉의 압권인 북릉부터 역순으로 탐사한 점은 결과적으로 옳은 선택이었다.

 

6) 생각 같아서는 북릉은 사계절 골고루 다시 몇 번 탐방해 보고 싶은 희망이 있다.

 

7) 업무표장등록까지 된 명성에 걸맞지 않게 표지판이 허술한 점은 옥의 티였다.

 

8) 더구나 표지판들이 삐뚤어지고 거리가 맞지 않게 표시되어 있는 점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9) 총산행시간은 1730분(28시간50분) 57.3km, 알프스구간 순산행시간은 1550분(25시간50분) 46.7km였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2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헬기장(521봉)에서 본 구병산

 

 

 2. 수림 사이로 드러난 장고개

 

 

 3. 뒤돌아 본 구병능선과 장고개 근처 수림

 

 

 4. 곧은 낙엽송 사이의 장고개

 

 

 5. 포장된 장고개

 

 

 6. 장고개 언덕의 나무들

 

 

 7. 낙엽 쌓인 육산길

 

 

 8. 헬기장(532봉)에서 지나온 구병능선을 배경으로

 

 

 9. 헬기장에서 본 형제봉

 

 

 10. 그리고 천왕봉

 

 

 

 11. 율령산왕각

 

 

 

 12. 비포장의 동관음고개

 

 

 13. 치마바위

 

 

 14. 대궐터산 투구봉이 가까이에

 

 

 15. 동관음 마을의 고즈넉한 모습

 

 

 16. 저 봉우리를 지나니

 

 

 17. 이구아나같은 기암이 반겨주고

 

 

 18. 또 다른 암봉을 넘어(삼형제봉, 나중에 알았슴)

 

 

 19. 그 암봉에 다다르니 해도 넘어가고

 

 

 20. 봉황산 방향의 백두대간길과 만나는 "못재"풍광

 

 

21. 이 리본을 보자 눈물이 핑 돌고... 

 

 

 22. 형제봉이 반겨주고

 

 

 

 

23. 마침내 갈령삼거리

 

 

 24. 하산길에 본 대궐터산

 

 

 25. 그리고 천왕봉으로 갔던 2구간 능선

 

 

26.  도장산(827.9m), 시루봉(876.2m)

 

 

 

27. 기암

 

 

 28. 철잊은 진달래

 

 

 

 

 

 

 30. 마침내 갈령에 - 충북 알프스 종주 완성

 

 

풀뿌리 김정호 [金正浩, ?~1864]
본관은 청도(淸道)이다. 자는 백원(伯元)·백온(伯溫)이고, 호는 고산자(古山子)이다. 출생연도는 분명하지 않으며, 태어난 곳은 황해도 봉산(鳳山) 또는 토산(兎山)이라고도 한다. 평민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지리학에 정진하여 일생을 정밀한 지도와 지리서를 만드는 일에 바쳤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30여 년간의 각고 끝에 1834년(순조 34) 《청구도》 2첩을 완성하였다. 이후 1857년(철종 8)에 전국 채색 지도인 《동여도》, 1861년(철종 12)에 《대동여지도》를 완성하여 교간(校刊)하였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전도(全圖)로서 의의가 크다. 김정호는 조선 후기에 민간에서 활발하게 전사되었던 전국지도·도별지도와 국가가 중심이 되어 제작하였던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함을 갖춘 대(大)축척 전국지도를 만들었다. 특히 《대동여지도》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가장 정확하고 정밀한 과학적 실측지도로 평가된다. 이밖에 서울 지도인 《수선전도(首善全圖)》 등을 남겼다. 또 지리지 편찬에도 힘써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44),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4) 등을 펴냈다. 《동여도지》와 《대동지지》는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지와 강역·도로·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킨 지리지로서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을 취한다. 그의 저작활동은 19세기 조선의 국토 정보를 집대성하여 구축하고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국토 정보화의 중요성을 제시하고 실천한 선각자였다. 그의 사망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를 흥선대원군에게 바치자 그 정밀함에 놀란 조정 대신들이 국가기밀을 누설하였다는 죄를 물어 옥사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그가 만든 지도와 지리서가 보존되었다는 점, 그의 후원자였던 실학자 최한기와 고위 관리를 지낸 신헌 등이 연루되어 처벌받았다는 기록이 없는 점 등으로 보아 신빙성이 적다.  2006/12/11 14:55:32  
풀뿌리 대궐터산
청계산 [淸溪山], 높이 877m로, 백두대간 형제봉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솟은 산이다. 상주시의 역사지인 《상산지》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산 아래 마을에서는 두리뭉실하게 생겼다 하여 두루봉이라고 부른다. 후백제의 견훤이 이 산에 성을 쌓고 대궐을 지었다 하여 대궐터산이라고도 하는데 대궐터산은 극락정사 뒤 삼각점이 있는 봉우리이다. 산기슭에 청계사와 후백제의 견훤이 쌓았다는 성산산성이 있다. 성산산성은 둘레가 3.3km인 토석성으로 산 아래에서 보면 바위산으로 보이는 천혜의 요새이다. 산행은 갈령에서 오르는 코스와 청계사나 서문골에서 오르는 코스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갈령 코스가 많이 알려져 있다. 갈령에서 산행을 시작하면 고갯마루에서 오른쪽 낙엽송 조림지 사이의 가파른 비탈을 올라 헬기장을 지난다. 능선을 타고 오른쪽으로 노송군락과 산불감시초소를 지나 능선을 따라가다 바위 옆을 돌아 올라가면 정상이다. 정상에서 바위 사이를 통과하여 능선을 타고 투구봉(작은 두루봉)과 성산산성에 들렀다가 삼각점이 있는 대궐터산에 오른다. 하산은 성터를 따라 극락정사까지 내려온 뒤 주차장을 지나 도로에 내려선다. 찾아가려면 상주버스정류장에서 화북행 시내버스를 타고 송내나 극락정사 입구, 갈령 등에서 내리면 된다.  2006/12/11 15:01:47  
풀뿌리 도장산 [道藏山]
높이 828m. 이 산은 경상북도 문경시 농암면 내서리와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의 경계를 이루는 숨은 명산이다. 캄브리아기 이전 중생대 쥐라기의 대보조산운동 때 편마암 및 화강편마암층이 침식에 저항하며 형성된 소백산맥 동사면의 산이다. 경북과 상주시 서북부에 닿은 백두대간 자락의 마지막 비경지대이다. 첩첩 산으로 둘러싸여 교통이 아주 불편하다. 빼어나게 아름다운 고을의 주민들은 밤낮 익은 풍경에 무관심해져 산골이 다 그렇다 할 테고, 도시 산꾼들도 문경이라면 희양산과 주흘산을 꼽을 정도이다. 문경과 상주 사이에 숨은 이 산은 비경지대 쌍룡계곡과 함께 찾는 이들이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理志)》에도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에 화양구곡과 쌍용 용유계곡이 있고 또한 청화산과 속리산 사이에 경치 좋고 사람 살기 그만인 복지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문경시에서 관광코스는 문경새재·봉암사·선유계곡·용추계곡·대정숲에 이어 마지막 명소로 쌍룡계곡을 자랑하고 있고, 상주시에도 동관 대궐터·장각폭포·칠층석탑·견훤산성·오송폭포·오량폭포에 이미 마지막 비경인 용유폭포(쌍룡계곡)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쌍룡계곡 가는 길은 문경시청이 있는 점촌에서 농암행 버스를 옮겨 타고 새롭게 포장된 구불구불한 뭉어리재를 넘으면 대정숲에 이른다. 여기서 2㎞에 천연기념물 제292호로 지정된 삿갓모양의 반송을 감상하고 포장도로를 가면 병풍암반이 발길을 멎게 한다. 계곡에는 풍파에 씻겨 감자모양인 너럭바위를 타내리는 옥수가 하얀 포말을 일으키며 세차게 흘러내려 그 밑에 아름다운 담을 이룬다. 출발점 심원골 입구는 너럭바위에서 담으로 쏟아지는 물줄기 양쪽에 두 개의 용바위가 하류 쪽으로 엎드려 있다. 남쪽 바위가 암룡이고 북쪽의 두툼한 바위가 숫룡이다. 담 아래로 뛰는 듯한 암룡과 숫룡바위가 있는 너럭바위는 백척단애와 협곡 초입을 가로막는 기암에 10여 그루 노송이 분재처럼 뿌리내려 보기드문 절경이다.  2006/12/11 15:11:45  
풀뿌리 심원골로 들어 출렁다리 놓인 계곡을 건너면 산길이 뚜렷하다. 저승골로 불리는 심원골도 예사 계곡이 아니다. 지옥 첫 관문 너북등을 뒤로 가파른 산길을 따라 1㎞ 들어서면 오른쪽 깊은 계곡 아래 15m 됨직한 수직폭포가 나온다. 폭포를 굽어보는 데서 서쪽으로 휘도는 숲터널을 따라 10분쯤 가면 심원사가 나타난다. 단풍나무·상수리나무·싸리나무 등 잡목숲이 절을 감싸고 짙푸른 산마루가 숲 뒤로 병풍을 친 심원사는 초라해도 유서 깊은 천년 고찰이다. 신라시대 원효가 창건하고 고승 윤필과 의상이 머물던 절로 1958년 화재로 불탄 뒤 1964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윤필과 의상 두 대사가 청화산 기슭 용추 속의 용왕아들인 동자승에게 글을 가르친 뒤 그의 간청으로 용궁에 가 용왕의 극진한 예우와 함께 병증·월겸·월부·요령 등의 선물을 받고 돌아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심원사를 뒤로 남쪽 작은 계곡에 들어서면 폐쇄된 표고밭터에서 산길이 끊어진다. 그러나 표고밭터의 서쪽 지능선 위로 오르기만 하면 뚜렷한 능선길이 다시 나온다. 남으로 뻗어 오른 지능선길은 햇살이 송림 위로 번쩍이고 소나무 아래 서면 온몸에 송진내 묻어나는 제법 가파른 지능선길을 따라 오르면 절로 천마공 행의 서정을 만끽하게 되는 정상이다. 1979년에 재설한 삼각점 옆에 문경시청 등 산회 표지기가 나무기둥에 펄럭이는 조망은 경탄할 만하다. 능선 서쪽 멀리 속리산이 삐죽삐죽한 봉우리들을 죄다 드러내 보이고 북으로 청화산과 시루봉이 쌍룡계곡을 감싼 듯한 자태로 건너다보인다. 속리산과 청화산 사이로는 백악산·도명산·군자산 줄기가 송면계곡과 함께 보이고 고개를 돌려 청화산 오른쪽을 보면 둔덕산 너머로 희양산과 백화산·주흘산·운달산이 고개를 내민 듯 바라보인다. 하산은 내서리 쌍룡마을이나 능선을 내려와 삼거리에서 심원사 아래 계곡으로 하거나, 하북면으로 할 수도 있다. 인적 드물어 뚜렷한 길이 없지만 쌍룡계곡에 도로가 완공되면 드라이브 코스로 각광받을 것이다. 등산코스는 쌍룡계곡-너북등-심원골-심원사-삼거리-정상-삼거리-능선- 표고밭-심원사 아래 계곡 -너북동으로 이어지며, 4시간 정도 소요된다. 2006/12/11 15:11:49  
풀뿌리 시루봉
경북 문경시에 있는 시루봉은 푸른학이 알을 품고 있는 산세를 이루고 있어 풍수지리가들 사이에서도 인정받은 명산이다. 그러나 임진왜란이나 6.25때에도 화가 미치지 않을 만큼 후미진 곳에 자리해 있어 일반인에게는 좀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아직 시루봉이 생소하게 느껴지는 등산객도 많겠지만 경북 최후의 비경지대라 일컫는 쌍룡계곡이 있는 산이라하면 금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섬진강 상류를 이루는 쌍룡계곡은 한번 들어가면 함흥차사가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풍광이 수려하며 선간회, 병천정, 쌍룡바위 등 볼거리가 풍성하다. 2006/12/11 15:47:16  
풀뿌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축척 16만분의 1 아닌 18만분의 1` [중앙일보 2007.01.26 05:14 입력] 국립중앙박물관 연구 발표 조선시대 최고의 지도로 평가받는 김정호(?~1864)의 '대동여지도'(사진)는 18만 분의 1 축척(지도상의 거리와 실제 거리의 비율)으로 제작됐다는 새 연구결과가 나왔다. 지금까지는 흔히 16만 분의 1로 알려져 왔다. 국립중앙박물관 장상훈 학예사는 25일 "조선시대 당시의 거리와 길이 단위를 비교해 다시 분석한 결과"라고 차이의 원인을 설명했다. 장 학예사는 조선시대에는 거리 단위인 '리(里)'와 길이 단위인 척(尺), 촌(寸.1척=10촌)이 달리 사용된 점을 주목했다. 거리와 길이 단위를 함께 쓰는 현대의 '미터법'으로는 조선시대의 지도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총 22첩) 제1첩에는 정사각형 모양의 '방안'(方眼.모눈)이 나와있다. 지도의 축척을 알려주는 기본 단위다. 김정호는 1 눈금(2.5㎝)을 10리로 표기했다. 1리는 2160척에 해당한다(1746년 간행된 조선시대 법전인 '續大典(속대전)'에 규정됐다). 조선시대의 1척(周尺)은 요즘의 21㎝, 1촌은 2.1㎝ 안팎(옛 도량형기를 측정한 수치)이다. 이대로 계산해 보면 '대동여지도'의 1 눈금은 1.2촌. 1.2촌으로 10리를 나타낸 것이다. 10리를 촌으로 환산하면 21만6000촌이 나온다. 결과적으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18만 분의 1(21만6000을 1.2로 나눈 값)이다. 지금까지는 일제 강점기부터 쓰인 '10리=4㎞'를 기준으로 '대동여지도'의 축척을 추정했었다. 장 학예사는 "조선시대의 축척법을 당시 거리개념을 근거로 밝혀내기는 처음"이라고 강조했다. 또 "이번 방법을 김정호의 또 다른 지도인 '청구도'(1834)에 적용한 결과 역시 18만 분의 1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조선후기 제작된 고지도인 '동여(東輿)'를 이날 일반에 처음 공개하고, 자료집도 함께 발간했다. '동여'는 18세기 후반의 군현(郡縣) 지도에서 19세기 대축척 전국지도로 옮겨가는 한국 고지도의 발전사를 보여주는 지도다. ◆대동여지도=보물 850호. 1861년 제작됐다. 가로 4.0m, 세로 6.6m 크기의 대형지도다. 우리나라를 남북 120리 간격으로 모두 22개로 나눠 만들었다. 박정호 기자  2007/01/26 10:08:27  
풀뿌리 `김정호, 20년 동안 골방에서 대동여지도 만들었다` [조인스 2006.09.29 09:09 입력] 조선시대 최대.최고의 지도로 평가받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물 850호)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04~1866 추정)가 직접 전국을 답사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당시 유행했던 지리지와 지도를 총정리한 지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고 쿠키뉴스가 29일 보도했다. 큐키뉴스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이기봉 박사가 28일 '조선의 고지도와 김정호'라는 강연록에서 "일반인은 물론 일부 학자들조차 김정호가 수십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대동여지도를 그린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는 한평생 집에서 지도를 제작했다"고 밝혔다고 덧붙였다. 이 박사는 29일 서울대 인문주간 행사로 열리는 규장각 학술대회에서 이 내용을 발표한다. 이 박사에 따르면 김정호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나 '문헌비고(文獻備考)' 등 지리지와 정상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신경준 주도로 제작된 '군현도(群賢圖)' 등 당시 지도들을 토대로 자신의 서재에서 평생 동안 각종 지리정보를 간추려 지도를 제작했다. 이 박사는 김정호가 현장답사를 하지 않은 근거로 혼자서 1만8000여개의 위치정보를 측정할 수 없다는 점, 실제 가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잘못된 지리정보가 계속 등장하는 점, 조선은 당시 각 지역에 대한 충분한 지리정보를 확보해 굳이 갈 필요가 없었다는 점 등을 들었다. 한 예로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나 동여도,대동여지도에는 충청도 해미현(海美縣. 충남 서산시 해미면) 근처의 서면(西面) 지역이 잘못 표기돼 있다. 이는 서면을 잘못 그린 기존의 지리지와 지도를 참조했기 때문에 잘못을 답습했다. 이 박사는 강연록에서 "김정호는 한양에서 아주 가까운 곳의 잘못된 지명도 수십년간 잘못 기재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대한지리학회에서 김정호가 백두산을 등정하고 전국을 답사했다는 연구보고서를 냈을 정도로 잘못된 학설이 통용되고 있다"며 "정확한 고증 없이 일제시대 등장한 통설을 그대로 받아들여선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디지털뉴스 digital@joongang.co.kr] 2007/01/26 10:11:45  
풀뿌리 `대동여지도 기존지도 편집해 제작` [연합 2006.09.28 21:26 입력] 서울대 연구원 `전국답사설 사실과 달라` 조선의 지도학을 집대성한 '대동여지도'는 고산자(古山子) 김정호가 직접 전국을 답사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리서와 지도를 편집해 만들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기봉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조선의 고지도와 김정호'를 주제로 29일 오후 2시 서울대 인문주간 행사로 열리는 규장각 학술대회를 앞두고 28일 미리 공개한 강연문을 통해 이렇게 주장했다. 이 연구원은 강연문에서 "김정호가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는 통설은 잘못됐다"며 "그는 '동국여지승람', '문헌비고' 등 조선시대 지리지와 정상기의 '동국지도' 등을 참조해 자신의 집에서 각종 지리 정보를 취합해 '대동여지도'를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1만3천여개의 지명을 혼자 측량할 수 없고 ▲이미 조선은 상당히 자세한 위치정보를 확보하고 있었으며 ▲ 다른 지역에 비해 위치 정보가 부족했던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이 상대적으로 부정확한 점 등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 답사설' 등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김정호는 남북 6.6m에 이르는 조선에서 가장 큰 '대동여지도'를 민간 수요자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목판본 지도로 제작해 조선의 지도를 집대성했다는데 그 위대함이 있다"고 평가했다. (서울=연합뉴스) 2007/0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