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가족과 함께한 公山城 한바퀴(2007/03/03)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5. 13:58

 

 

 

가족과 함께한 公山城 한바퀴

 

(1)

07/3/3(토)

큰아이와 아내와

한때 백제의 터전이었던

공산성을 돌아보다.

 

(2)

아이 둘 딸린 과부 소서노와

결혼한 주몽은

적장자 유리가 돌아오자

親子인 유리를 좋아하게 되고

갈 곳 없는 주몽을 도와

고구려란 맥족 통일국가를 건설케 한

과부 소서노는

주몽을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그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들인 온조와 비류를 이끌고

남하하게 된다.

작은 애 온조는 아리수(몽촌토성)에,

큰 애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터전을 마련하였으나

인천의 짠물을 견디지 못한 비류일파는 몰락하고

처음에 10村으로 출발하여 十濟라한 아우 온조는

중국과 한국 일대의

百家를 통일하여 百濟라 칭하였다고 한다.

 

(3)

우리는 여기서

소서노(召西奴)란

여장부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국가 성립의 주역이었지만

조연으로 잊혀지고만

걸출한 여장부 소서노(召西奴).

주몽을 사랑했기에

그를 도와 고구려란 국가를 설립하였고,

종국에는 사랑하는 그의 곁을 떠나가야 했던

사랑이 무언가를 알았고 실천했던 소서노(召西奴).

두 국가 성립의 후견인 역할을 할 정도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지녔던 소서노(召西奴).

일부에서는 훗날 그녀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국가 성립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고구려, 백제, 일본이 한 뿌리임을

여장부 한 몸으로 말해주고 있는

소서노(召西奴)란 인물 하나만 제대로 규명하더라도

古代史의 커다란 비밀이 밝혀지리라고 본다.

 

(3)

475년 고구려와의 한성전투시

개로왕의 패사로

문주왕에 의하여 웅진으로 천도후

538년 성왕에 의하여

부여로 천도하기 전까지

그녀의 후손 문주, 삼근, 동성, 무령, 성왕대에

64년간 수도였다는 公山城.

당시 土城이었다는 궁성은 지금

이씨조선에 의해 石城으로 개축되어

지금 그의 殘影을 드리우고 있다.

 

(4)

아이에게 그러한 내력을

설명하여도

관심이 있는지 없는지

듣는둥 마는둥이나

따라와 준 것만으로도 고맙기만하다.

 

(5)

아이는

계획된대로는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백제가 최초로 수도로 한

한양성의 유수한 대학에

입학이 확정되어

내일(3/4) 일단은 또 한번

우리의 품을 떠나가야 한다.

그래서 같이 산행이라도 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유서깊은 성루를 가볍게 돌며

아이의 미래를 이야기한 즐거운 하루였다.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3/3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풀뿌리 始祖 溫祚王(시조 온조왕)
○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아버지가 鄒牟(추모)니 혹은 朱蒙(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왔는데, 졸본부여의 왕은 아들이 없고 세 딸만 있었다. 주몽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고 그의 둘째딸로 아내를 삼았다. 얼마 아니하여 졸본부여왕이 죽으니 주몽이 그 位(위)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沸流(비류)라 하고 둘째아들은 溫祚(온조)라 하였다[혹은 주몽이 졸본에 와서 건너편 고을 越郡(월군)의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琉璃)이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烏干(오간)·馬黎(마려) 등 열 명의 신하와 함께 南行(남행)하였는데, 따라오는 백성이 많았다. 드디어 漢山(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가히 살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건대 이 河南(하남)의 땅은 북은 漢水(한수)를 띠고, 동은 高岳(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沃澤(옥택)을 바라보고, 서로는 大海(대해)를 격하였으니, 그 천험지리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이루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이에) 온조는 河南慰禮城(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輔翼(보익)을 삼아 국호를 十濟(십제)라 하니, 이 때가 전한 성제의 홍가 3년이었다.  2007/03/05 14:55:27  
풀뿌리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安居(안거)할 수 없으므로 돌아와 慰禮(위례)를 보았는데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참회하여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에 돌아왔다. 올 때에 백성이 (모두) 즐겨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百濟(백제)라고 고쳤다. 그 世系(세계)가 고구려와 한가지로 부여에서 나왔기 때문에 扶餘(부여)로써 姓氏(성씨)를 삼았다. 혹은 이르기를, 시조는 沸流王(비류왕)으로서, 아버지는 優台(우태)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庶孫(서손)이며, 어머니는 召西奴(소서노)니 졸본인 延陀勃(연타발)의 딸이다. 소서노가 처음 우태에게 시집가서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였다. 우태가 죽자 소서노는 졸본에서 과부로 지내었다. 뒤에 주몽이 북부여에 용납되지 못하여 전한 건소 2년(서기전 37) 2월에 남으로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세우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소서노를 취하여 妃(비)로 삼았다. 그(소서노)가 건국에 내조의 공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주몽의 총애가 특히 두터웠고, 비류 등을 마치 친아들과 같이 대우하였다.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禮氏(예씨)에게서 낳은 아들 孺留(유류)가 오자 그를 태자로 세우고 (드디어) 位(위)를 잇게 하였다. 이에 비류가 온조에게 말하기를, '처음 대왕이 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여기로 도망하여 오자, 우리 어머니께서 가재를 기울여서 도와 邦業(방업)을 이룩해 그 근로가 많았다. 대왕이 세상을 싫어하자[昇天(승천)], 나라는 유류의 것이 되었으니 우리는 한갓 여기에 (붙어) 있어 혹과 같아 답답할 뿐이다. 차라리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서 땅을 택하여 따로 국도를 세우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고 드디어 아우(溫祚)와 함께 무리를 거느리고 浿水(패수)와 帶水(대수)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 한다.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이르기를 '東明(동명)의 후손에 仇台(구태)란 이가 있어 仁信(인신)에 돈독하였다. 처음 帶方故地(대방고지)에 나라를 세웠는데 漢(한)의 요동태수 公孫度(공손도)가 딸을 맞이하여 그 아내를 삼았다. 드디어 東夷(동이)의 强國(강국)이 되었다'고 한다. (그 건국설에 있어) 어느 편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 ○ 원년 5월에 東明王廟(동명왕묘)를 세웠다. 2007/03/05 14:55:31  
풀뿌리 문주왕 [文周王, ?~477]
개로왕(蓋鹵王)의 아들. 문주왕(文洲王)이라고도 한다. 개로왕을 도와 상좌평(上佐平)으로서 국정을 보살폈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침입으로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은 전사하였다. 이때 상좌평의 자격으로 신라에 가서 1만 원군을 이끌고 왔으나, 백제는 이미 패퇴한 뒤였다. 곧 즉위하여 웅진(熊津: 충남 공주)으로 천도하고,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는 등 국방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개로왕의 패전으로 한강유역의 중요지대를 잃었기 때문에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당기간 동안 국력을 떨칠 수가 없었다. 476년 탐라국(耽羅國)으로부터 조공을 받기도 하였으나, 나중에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解仇)에게 실권을 빼앗겨 결국 해구의 하수인에게 살해되었다. 2007/03/06 11:07:58  
풀뿌리 삼근왕 [三斤王, ?~479]
문주왕(文周王)의 장자(長子)로서 문주왕이 시해(弑害)당하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 때 왕의 나이가 13세에 불과했으므로 군국(軍國)의 정사 일체를 좌평(佐平) 해구(解仇)에게 맡겼다. 해구는 삼근왕의 부왕(父王)을 죽인 원수인데 그에게 정사를 맡겼다면 당시에 해구의 세력이 매우 강했던 모양이다. 478년(삼근왕 2) 해구가 은솔(恩率) 연신(燕信)과 공모하여 대두성(大豆城)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은 좌평 진남(眞男)에게 군사 2000명을 주어 그들을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다시 덕솔(德率) 진로(眞老)에게 정병(精兵) 500명을 주어 그들을 치게 하여, 해구를 격살(擊殺)하였다. 연신이 고구려로 도망치자, 그 처자를 잡아다가 웅진(熊津)거리에서 목베어 죽였다. 2007/03/06 11:12:02  
풀뿌리 동성왕 [東城王, ?~501]
이름 모대(牟大) 또는 마제(麻帝) ·여대(餘大). 문주왕(文周王)의 조카. 곤지(昆支)의 아들. 삼근왕(三斤王:문주왕의 장자)의 뒤를 이어 즉위, 484년 중국 남제(南齊)와 수교하였고, 485년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수교하였다. 493년에는 결혼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伊飡) 비지(比智)의 딸을 비(妃)로 맞이하고,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싸웠으며(495), 498년에는 탐라를 복속시켰다. 499년에는 한재(旱災)가 심해서 백성의 굶주림은 물론 도둑의 무리가 들끓었으나 간언(諫言)을 듣지 않고 임류각(臨流閣)을 짓는 등 방종에 흘러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에게 살해당하였다. 2007/03/06 11:13:53  
풀뿌리 무령왕 [武寧王, 462~523]
이름은 사마(斯摩)·융(隆), 시호는 여륭(餘隆)이며, 동성왕(東城王)의 둘째 아들로 부왕(父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502년(무령왕 2) 가림성(加林城)에서 반란을 일으킨 백가(苩加)를 정벌했고, 같은 해 고구려의 수곡성(水谷城)을 공격하였다. 507년 말갈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장령성(長嶺城)을 쌓았다. 512년 중국 양(梁)나라에 조공(朝貢)하였으며, 같은 해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가불(加弗)·원산(圓山)의 두 성을 빼앗겼다. 521년 양나라의 무제(武帝)는 무령왕을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523년 인우(因友)·사오(沙烏) 등에게 명하여 한북주(漢北州)의 장정을 동원시켜 쌍현성(雙峴城)을 쌓았다. 1971년 무령왕과 왕비가 합장된 능(陵)이 충남 공주(公州)에서 발굴되었다.  2007/03/06
풀뿌리 성왕 [聖王, ?~554]
성명왕(聖明王)이라고도 한다. 휘(諱) 명농(明襛). 무령왕(武寧王)의 아들.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영주(英主)라 일컬어진다. 523년 패수(浿水)에 침입한 고구려군을 장군 지충(知忠)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양(梁)나라 고조(高祖)와 국교를 강화하여 고조로부터 '지절도독백제제군사수동장군백제왕(持節都督百濟諸軍事綏東將軍百濟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529년 고구려의 침입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고구려에 대해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하였으며, 532년 금관가야(金官伽倻)가 신라에 항복하자 왕은 잔존 가야제국(伽倻諸國)을 회유하여 표면상으로는 신라에 대하여 적대(敵對)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제적으로는 가야의 분할을 획책하였다. 고구려가 신라와 동맹을 맺어 백제를 위협할 기미가 보이자 왕은 일본에 사람을 보내 불상(佛像)·번개(幡蓋)·경론(經論) 등을 전해 주고 일본의 원조를 청하였다. 이것이 일본에 불교가 전해진 시초였다. 538년 협소한 웅진(熊津:충남 공주)으로부터 광활한 사비성(泗沘城:충남 부여)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고쳤으며, 중앙의 22부(部), 지방의 5부(部)·5방(方)제도를 이때 실시한 것으로 추측된다. 541년 양(梁)나라로부터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사(畵師) 등을 초빙하고 《열반경(涅槃經)》 등을 들여왔으며, 550년 고구려의 도살성(道薩城)을 쳐서 빼앗고, 그 이듬해에는 신라와 함께 고구려가 차지하고 있던 한강(漢江) 유역을 공격하여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郡)을 되찾았으나, 553년 그 지역의 대부분을 신라에 빼앗겼다. 이듬해 일본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왕자 여창(餘昌:27대 威德王)과 함께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섰으나 신라의 군주(軍主) 무력(武力)에게 대패하고 관산성(管山城)에서 신라의 복병(伏兵)에 의하여 전사하였다. 2007/03/06 11:18:06  
풀뿌리 공주 공산성 [公州公山城]
백제시대 축성된 산성으로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불렸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475년(문주왕 1)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538년(성왕 16)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4년간의 도읍지인 공주를 수호하기 위하여 축조한 것으로, 당시의 중심 산성이었다. 해발 110m인 공산(公山)의 정상에서 서쪽의 봉우리까지 에워싼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며 성의 둘레는 2450m이다. 평면으로는 동서 약 800m, 남북이 약 400m이며 사방에 석벽이 남아 있다. 원래 토성이었는데 조선 중기에 석성으로 개축된 것이다. 동쪽과 남쪽 성벽은 돌로 쌓아 높이 약 2.5m인데, 전면만을 석축하였으며 내면은 토사·잡석으로 다져 붙였고, 너비는 3m이다. 동쪽 성벽 밖에 토성이 있는데, 높이는 무너져서 알 수 없으나 너비는 약 3m이다. 서쪽 성벽은 본래 토축(土築)된 위에 돌로 쌓아 외면만을 축조하여 높이는 4m 정도이다. 지금은 원형을 알 수 없는 서문터(현재는 통로) 남쪽은 석재로 쌓았는데, 너비 4.5m, 높이 3m이다. 성벽 안에는 7∼8m의 호(壕)가 남아 있다. 북쪽에는 조잡한 석축성벽(石築城壁)이 높이 2m, 너비 1.5m 정도로 남아 있으며, 수구(水口)도 있다. 남쪽에 남문터(현재 鎭南樓)가 있고, 그 서쪽은 높이 3m, 너비 3.7m로 석축하였고, 성내에는 너비 11m의 호가 있다. 진남루 앞의 넓은 터는 백제의 궁터이고, 공북루(拱北樓)의 윗부분은 건물터로 추정된다. 또, 이 부근에는 우물터 3개가 있다. 성내에는 후대에 세워진 영은사·광복루(光復樓)·쌍수정(雙樹亭)·연못터 등이 남아 있다. 2007/03/06 14:31:45  
물처럼 THE SWETEEST GIFI... 잘 지네세요.  2007/03/11 13:48:48  
金錡泰

늠름한 아들의 모습에 주몽과 비류 그리고 온조의 氣가 서려있는 듯 느껴집니다.
역사여행을 떠난 듯 세세한 설명과 성터구경 잘 했습니다.
성터도 인상적이고 가족사진도 멋집니다. 갑장님의 '자태'를 보니

건강이 알배기처럼 꽉 차있군요. 흐뭇~~  2007/04/02 07:00:21  

풀뿌리 그게 그저 그런 기록이 되어있을 리는 없는데 많은 기록이 유실되어 안타깝습니다. 안녕하시지요? 배달9204/개천5905/단기4340/서기2007/4/2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7/04/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