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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 처럼.도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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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이 활짝 피었군요. 검푸른 보리도 많이 자랐고요. 잘 보고 갑니다. 2007/02/28 11:4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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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錡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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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치있는 남도로 여행갔다 오셨군요. 잘 직은 한 폭, 한 폭의 사진을 벗삼아 흠벅 취해보고 젖어 보고 갑니다. 2007/02/28 23:36: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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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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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님! 블에 갈 때마다 느끼는 건대 자연을 사랑하는 님의 생각을 잘 알겠더군요, 감사합니다. 2007/03/01 14:0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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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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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형! 오늘도 오셨군요. 부산도 남해 못지 않게 봄이 빠르게 오겠지요. 감사합니다. 2007/03/01 14: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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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 남해대교를 지나 남해읍 우회도로까지 오면 삼거리에서 금산을 안내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20km쯤 달리다 상주해수욕장 조금 못 미쳐 좌회전해서 들어가면 남해의 소금강으로 불리는 금산에 다다른다. 요즘은 창선ㆍ삼천포대교가 개통되어 미조항과 상주해수욕장으로 오는 방법도 있으나 해안의 절경을 같이 즐기려면 남해대교방면으로 오는 길이 좋다. 비록 해발 681m의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기암괴석이 산 전체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다운 해안과 맞물려 절경을 이루고 있다. 기암절벽과 해안의 절경이 어우러져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산은 바다와 가장 잘 어울리는 명산이다. 금산의 원래 산 이름은 보광산이었다.원효스님이 신라 문무왕 3년(663년)에 이 산에 보광사를 창건하면서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금산이란 이름은 조선 건국 이전에 이성계가 조선의 개국을 앞두고 보광산에서 1백일간 기도를 올렸는데,조선이 자신의 뜻대로 개국되자 그 보답으로 산을 온통 비단으로 덮겠다고 한것에서 유래한다. 이름이야 어찌되었던 금산은 아름다운 산이다.마치 고운 비단 치마를 입고 있는 것처럼 산이 수려하고 눈부시게 하는 비경이 곳곳에 숨어있다.금산의 제1경인 쌍홍문을 비롯,무려 38경이 해발 681m의 조그마한 산에 자리하고 있다. 상주면에서 등산로를 이용하면 온갖 기암괴석들로 뒤덮인 금산의 참맛을 느낄 수 있다. 금산의 등산길은 사방으로 여러 개의 길이 있으나 그 정문은 쌍홍문(雙虹門)이다. 두 개의 큰 굴이 웅장한 바위에 뚫려있다. 이 문을 들어서면 바로 바위 전시장이다. 굴속은 여름에도 서늘한 바람이 분다. 2007/03/02 10:35: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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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운산 786m, 남해 최고높이를 자랑하는 망운산, 그러나 남해안 제1의 명산인 금산에 가려 진가가 꼭꼭 숨겨진 곳이다. 그리고 망운산을 오르는 사람은 이곳이 알려지길 두려워한다. 깨끗한 풍모, 드넓은 기상, 아는 자만 오르리라. 금산이 남해를 찾는 손님들의 산이라면, 망운산은 남해인들이 가장 아끼는 늠름한 기상이다. 고현면 대곡마을에 있는 화방사에서 조용한 산사의 정적을 뒤로 하며 산길을 올라 정상에 오른다. 정상에서 보는 주변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자그마한 섬들과 강진만, 연죽저수지, 청정해역의 서상 앞바다, 멀리 지리산, 여천공단, 여수, 삼천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는 기우제를 지냈던 흔적인 듯, 평평하게 북쪽을 향하도록 되어 있고, 옆에는 제관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의자가 놓여있다. 남해에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제일 먼저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고, 그래도 비가 오지 않을 경우 상주리 앞바다 세존도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정상 반대편에 있는 연대봉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5월에는 철쭉군락지의 꽃들이 만개해 가족단위나 친목회등의 모임에서 많이 찾아오며, 정상까지는 1시간 30분정도 소요된다. 남해읍에서 관광안내판을 따라 남해대교 방향으로 3분 정도 가면 고현면 이어마을이 나타난다. 그곳에서 좌회전하여 5분 정도 가면 화방사 입구 이정표가 있어 찾기 쉽다. 화방사 그늘에 차를 세워두고, 망운산 등산로로 들어선다. 길이 험난하지 않으므로 가벼운 마음으로 등반을 할 수 있다. 2007/03/02 10:5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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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흘산 남면 홍현마을에 있는 설흘산(488m)은 망산(406m)과 인접해 있다. 설흘산에서 내려다 보면 깊숙하게 들어온 앵강만이 한눈에 들어오고 서포 김만중의 유배지인 노도가 아늑하게 내려다 보인다. 인접하고 있는 전남 해안지역 뿐만아니라 한려수도의 아기자기한 작은 섬들도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설흘산 정상 부근에는 봉수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원래 봉수대는 주위를 넓게 관측할 수 있는 곳에 정한다. 설흘산 역시 한려수도와 앵강만 그리고 망망한 남쪽 대해를 관측할 수 있는 곳이다. 남면 구미지역과 응봉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망망대해와 기암괴석 그리고 아래로 내려다 보이는 다랭이마을의 풍경을 같이 즐길수 있는 산행코스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7/03/02 10:50: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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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구산 산에 미친 사람들이라면 분명 남해에서 금산부터 탐낼 것이 틀림없다. 그 다음으로 남해 최고봉인 망운산에 눈을 돌린 후, 돌아가는 시간에 쫓겨 황급히 섬을 떠난다. 이 때문에 남해의 잘록한 허리춤에 자리한 호구산(627m)은 그냥 스쳐 지나치기 쉬운 곳이다. 하지만 남해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 호구산의 거친 산세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지형도에는 산이름이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송등산, 괴음산 등 산군을 엮어 호구산으로 대표되는 '호구산군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군의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것은 그만큼 자연경관이 뛰어나고 보존가치가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호구산은 호랑이 형상을 닮았다는 유래가 있고, 옛날 호랑이가 지리산에서 건너와 이 산에 살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정상에 오르면 멀리 광양, 여수, 하동, 통영이 모두 보이며 잔잔히 펼쳐진 바다가 포근함을 느끼게 한다. 2007/03/02 10:51: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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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 683년 원효대사가 이곳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면서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뒤로 산 이름을 보광산, 초당 이름을 보광사라고 했다. 훗날 이성계가 이곳에서 백일 기도를 하고 조선 왕조를 열었다는데, 그 감사의 뜻으로 1660년 현종이 이 절을 왕실의 원당으로 삼고 산 이름을 금산, 절 이름을 보리암 으로 바꿨다. 금산의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보리암은 금산의 온갖 기이한 암석과 푸르른 남해의 경치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경내에는 원효대사가 좌선했다는 좌선대 바위가 눈길을 끌며, 부근의 쌍홍문이라는 바위굴은 금산 38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다. 강원도 낙산사 홍연암, 경기 강화도 보문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기도처의 하나로 신도들이 연일 줄지어 찾고 있다. 빼어난 경치와 남해의 금강, 동물 형상의 바위가 많아 바위동물원으로 불리는 금산. 쪽빛 바다와 초록빛 들녘의 조화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산으로 한려해상 국립공원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금산 정상에 원효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우리나라 3대 기도처 중 가장 유명한 보리암이 있다. 또한 금산은 바위마다 불교에 얽힌 전설들을 간직하고 있고 보리암은 대장봉·형리암·화엄봉·일월봉·삼불암 등 기암괴석에 둘러싸여 있다. 상주마을 금산 입구에서 보리암으로 오르는 코스는 울창한 숲과 남해바다가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산행코스. 하룻밤 묵으며 금산서 일출을 보면 천지신명의 조화를 느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출이 절경이다.자동차로는 앵강고개를 넘어 이동면 벅시골에서 복곡저수지를 지나 금산 8부능선까지 도로가 나있다. 2007/03/02 10:53: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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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38경 1. 망대 2. 문장암 3. 대장봉 4.형리암 5.탑대 6.천구암 7.이태조기단 8.가사굴 9.삼불암 10.천계암 11.천마암 12.만장대 13.음성굴 14.용굴 15.쌍홍문 16.사선대 17. 백명굴 18.천구봉 19.제석봉 20.좌선대 21.삼사기단 22.저두암 23.상사바위 24.향로봉 25.사자암 26.팔선대 27.촉대봉 28.구정암 29.감로수 30.농주암 31.화엄봉 32.일월봉 33.흔들바위 34.부소암 35.상주리 석각 36.세존도 37.노인성 38.일출경 2007/03/02 10:5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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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수교! 잿빛옷을 벗고 붉은 옷으로 갈아입었다.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남해의 관문은 동양 최대의 현수교라 불렸던 남해대교이다. 하동과 남해를 잇는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1973년 개통된지 3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곳으로, 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맺힌 곳이었다. 남해대교가 놓여지기 전, 남해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의 물살을 가로질러 다녀야 했지만 30년전부터는 승용차로 1~2분이면 거뜬히 물을 건너온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한 남해대교를 건너면 벚꽃터널이 반겨준다. 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벚꽃의 터널이 장관이다. 남해대교는 태어날 때부터 짙붉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식을 이유로 잿빛옷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2003년 산뜻한 선홍색빛으로 새단장을 하여 창선·삼천포대교와 함께 섬으로 가는 남해군 최고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2007/03/02 10:5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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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 충렬사는 노량해전의 치열했던 전투가 떠오르고, 노량 앞바다의 푸른 물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노량마을 해안 언덕배기 울창한 숲 속에 자리잡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거룩한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이 충무공은 관음포 노량해전에서 순국하고 아산으로 운구를 옮기기 전에 3개월간 이곳에 안치했다. 충무공의 순국을 슬프게 느끼던 남해사람 김여빈과 고승후가 이 충무공이 순국한지 35년이 지난 1633년에 초가집 한 칸을 사당으로 건립하고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게 되자 남해현령 이정건이 사당 앞에 충민공비를 세웠다. 이순신장군이 순국한지 45년 후인 1643년에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58년. 어사 민정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사당을 신축하도록 해서 모습을 갖추었다. 현재 사당 앞에 있는 "유명조선국삼도통제사 증시충무이공 묘비"는 1660년에 숭록대부 의정부 우찬성 송시열이 글을 짓고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송준길이 쓴 것이다. 현종 때에는 임금이 직접 쓴 충렬사 현판이 하사되었다. 이렇게 조정에서는 이곳 남해 충렬사를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인정하였고 세월은 흘러 순국 195년이 지난 후인 1793년에 이곳에 충무공비를 세우고 충민공비를 땅속에 묻었다. 충무공은 이 해에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남해 충렬사는 그 뒤에도 계속 성역화사업이 추진되었으나 고종8년인 1871년에 향사, 서원 철폐령에 따라 사당은 허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1922년에 윤기섭과 고준홍이 자기집 재산으로 사우3칸을 새로 지어 제사를 지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03/02 11:00: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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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3층석탑 지정번호 : 유형문화재 제 74호 지정일자 : 1974. 2. 16 소재지 : 남해군 상주면 상주리 산2065 시대 : 고려시대 남해금산 상봉에 위치하고 있는 보리암 앞에 상주해수욕장을 바라보고 서 있는 탑. 이 석탑은 여러 가지 전설과 얘기를 남기고 있다. 김수로왕비 허태후가 인도에 갔다가 돌아올 때 풍파를 만나 건너오지를 못했다. 그런데, 허태후가 탄 배에 파사석(인도에만 있는 석재)을 싣고 오니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건너오게 된 것이다. 이 돌을 가지고 원효대사가 보리암 앞에 세웠다고 한다. 재질은 화강암으로 상륜부 이상은 파손이 약간 되었으나 후에 복원되었다. 석탑은 1층부터 3층 옥개석(탑의 맨 위쪽에 있는 덮게 돌)까지 높이는 1.8m이고 1층 한쪽의 길이는 1.2m이다. 3층 탑신에는 우주(隅住)가 새겨져 있고, 상륜부(相輪部)에는 귀한 구슬 모양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보리암 삼층석탑 앞에 서면 남해 금산의 선경(仙境)과 해수관음상(海水觀音像)의 미소도 함께 감상할 수 있고, 뒤로는 상주해수욕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다도해의 절경이 펼쳐진다. 불가사의한 일도 있다. 탑에 나침반을 놓으면 '자기 난리'가 일어나는 것이다. 즉 나침반을 놓는 곳에 따라 북쪽을 가리켜야 하는 나침반이 놓는 방향에 따라 동서남북이 모두 나타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떤 원리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지는 모른다. 일부 풍수학자들은 탑 아래로 우주의 지기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방향을 못 잡는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는 탑 안에 사리가 있기 때문에, 혹은 온천수가 흐르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다.2007/0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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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설화 지리산이 남쪽으로 쭉 뻗어 나와 섬을 만들었다. 섬을 만들면서도 푸른 바다와 그림 같은 섬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도 만들었다. 기암괴석이 수를 놓고 있는 수많은 전설과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있는 해발681m의 남해금산. 일명 소금강이라 불리기도 하는 영산이다. 금산의 첫 이름은 보광산. 보광산은 원효대사가 보광사라는 사찰을 이곳에 짓고 보광산이라 부른데서 유래한다. 그 다음 이 산의 이름을 바꾼 사람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 이성계는 전국의 명산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했다. '새 왕조를 세우고 왕이 되게 해 주십시오' 효험이 없자 마지막으로 이곳 금산을 찾아와 백일기도를 했다. '저를 왕이 되게 해 주시면 이 산을 비단으로 둘러서 보답을 하겠소' 기도가 효험이 있었는지, 그는 조선왕조를 열게 되었다. 비단을 두르려니 막막했다. 그 많은 비단을 어디서 구하겠는가? 이성계는 대신 산 이름을 비단금(錦)자를 써서 금산이라 했다. 금산에는 보리암을 비롯하여 이태조기단, 봉수대, 주세붕의 명필바위, 쌍홍문, 좌선대, 상사바위등 38경이 갖가지 옛이야기를 간직한 채 나그네를 기다리고 있다. 애틋한 이야기가 세세손손 전해지길 바라며... 2007/03/02 11: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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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다랭이마을 우리 마을은 선조들이 농토를 한뼘이라도 더 넓히려고 산비탈을 깎아 곧추 석축을 쌓고 계단식 다랭이 논을 만들어 토양의 소중함과 고단한 조상들의 삶의 애환을 느낄 수 있으며 다랭이논과 바다. 산이 어우러져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찾는 분들 모두 탄성을 자아내는 마을이다. 농촌전통테마마을은.... 정겨운 농가에 머물며 옛 조상님의 슬기와 지혜를 느끼고 배울수 있는곳, 지친 현실을 떠나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고 도시민과 농업인이 서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곳, 오랜 세월을 이어온 전통과 자연이 빚어내는 멋이 살아있는 곳이다. 대를 이어 온 고향의 맛이 있으며, 넉넉하고 포근한 대지와 시골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며,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믿음이 있다. 그리고 눈으로 보고 몸으로 직접 체험해 보며 마음으로 느끼는 관광 체험 놀이가 있다. 관광포인트 가족들과 연인들, 뜻이 맞는 사람끼리 신나는 여행을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다랭이 마을이 가족, 단체 손님을 항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원한 망망대해를 보면서 농사체험도 할 수 있고 조용한 해안을 산책하며 피로를 씻고 새로운 에너지를 얻으실 수 있습니다. 아직 인터넷도 안되고 불때는 아궁이도 있고 자연과 주어진 여건에서 느긋하게 삶을 즐기며 주어진 여건에 만족하고 조상들의 삶의 지혜와 터전을 그대로 간직하며 비탈진 척박한 땅에 옹기종기 모여 높은곳에 있는 집은 높은곳에 있는대로 낮은곳에 있는 집은 낮은곳에 있는대로 푸른 바다를 느낄수 있는곳 우리의 일상 처럼 바쁘게 스쳐 가지마시고 하룻밤 묵으면서 다랭이마을을 느껴 보세요. 2007/03/02 13:21: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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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흘산이 바다로 내리지르는 45°경사의 비탈에 석축을 쌓아 108층이 넘는 계단식 논을 일구어 놓은 곳으로 조상들의 억척스러움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옛날에 한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보니 한배미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포기하고 집에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논 한배미가 있었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의 삿갓배미에서 300평이 족히 넘는 큰 논까지 있는 다랭이논 마을입니다. (배미 : 이곳에서 논을 세는 단위) 바다를 끼고 있지만 배 한척이 없는 마을로 마늘과 벼가 주소득 작목입니다. 최남단에 위치해 한겨울에도 눈을 구경하기 어려운 따뜻한 마을로 쑥과 시금치 등의 봄나물이 가장 먼저 고개를 내미는 곳이며, 해풍의 영향으로 작물의 병해충 발생률이 낮아 친환경농업이 가능한 마을입니다. 아직도 개울에는 참게가 살고 있고, 얼레지나 용담, 가마우지 등이 서식하는 천혜의 자연여건을 지닌 마을 입니다. 2007/03/02 13:3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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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마을의 유래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없으나 대대로 마을에서 살아온 김해 김씨, 함안 조씨 가(家)에 전해오는 자료로 미루어 볼 때 신라 신문왕 당시로 추정되어지고 있으며, 미륵전설과 육조문에 대한 전설이 고려시대 이전에 삶이 시작 되었고, 400여년 전에 일어난 임진왜란 시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설흘산 봉수대(烽燧臺)는 이미 그전에 이곳 가천마을에 집단적으로 거주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마을의 옛 이름은 간천(間川)이라 불리어 왔으나 조선 중엽에 이르러 가천(加川)이라고 고쳐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위 치 : 남해군 남면 홍현리 가천 다랭이마을 면 적 : 156 ha 농 가수 (호) 인구수(명) 경지면적(ha) 계 남 여 계 전 답 58 154 68 86 42 18 24 육조문 얼레지 가마우지 마을 뒷편의 육조문, 설흘산, 응봉산 등에서 자생하는 얼레지, 용담, 춘란,구절초, 원추리 등 풍부한 야생식물 자원과 마을을 가로 지르는 두 하천에 서식하는 참게를 비롯한 민물생물, 바다의 다양한 해산물과 어류 등 많은 생물들이 서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러한 먹이감과 따뜻한 기후를 가진 가천마을의 해안가에는 가마우지가 매년 이곳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집단서식을 하고 있습니다. 2007/03/02 13:35: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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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무덤 洞祭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혼령에게 밥을 주어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고 마을의 안녕과 태평 축원을 위해 해마다 음력 10월 15일 밤 9-10시경에 동제를 지냅니다. 제례절차는 降神(강신), 參神(삼신), 初獻(초헌), 讀祝(독축), 亞獻(아헌), 四神(사신), 燒紙(소지), 飮福(음복)의 순서인 유교식으로 행하고 풍년과 풍어를 기원하는 소지를 5번 올리며, 소지를 올린 뒤 젯밥을 한지에 싸서 밥무덤에 묻습니다. 옛날에는 제가 끝난 뒤 메구(농악)도 치고 횃불놀이도 하였으나 지금은 징, 꽹과리를 치고 노는 것으로 축소되었습니다. 2007/03/02 13:36: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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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수바위(미륵불) 彌勒祭 마을 남쪽 바닷가에서 마을로 올라오는 입구에 두개의 커다란 바위가 있습니다. 오른쪽에 서 있는 바위를 수미륵, 왼쪽에 누워있는 바위를 암미륵 이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암수바위라고 불리나 옛 부터 아이를 못 낳는 여자들은 절에 가미륵부처에게 빌었듯이, 이 암수바위에 빌다 보니 점잖은 이름이 이 바위로 옮겨 붙어 미륵바위가 된 것이고 수미륵은 높이가 약 4.5m, 둘레 1.5m 정도이고, 암미륵은 높이 약 3.9m, 둘레 2.5m정도입니다. 다음은 미륵바위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입니다. <조선 영조 27년(1751년) 어느날, 이고을 현감인 조광진의 꿈에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 바닷가에 묻혀 있는데 우마(牛馬)의 통행이 너무 잦아 세상을 보고 싶어도 보지를 못해 견디기 어려우니 나를 일으켜 주면 필경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이상하다고 여긴 현감이 이튿날 아침 관원을 데리고 이곳으로 달려와 일러준 대로 땅을 파보니 두개의 큰 바위가 나와서 암미륵은 파내어 그대로 두고, 수미륵은 일으켜 세워 매년 미륵을 파낸 날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미륵제(彌勒祭)를 지내오고 있습니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식을 얻고자 하는 사람이 이 바위에 기도를 올리면 옥동자를 얻는다는 이야기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습니다. 2007/03/0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