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다시 찾은 오봉, 그리고 우이암 능선
(1)
지난 週의 오봉의 오묘함을
집에 돌아 와 아내에게 말하니
선뜻 同行을 제의.
08/2/16(토)
비교적 평탄하다고 생각되는
송추방향에서 출발하여
여성봉, 오봉, 우이암능선을 택하기로 하다.
지난 주와 逆방향인 셈이다.
(2)
송추입구-오봉탐방 안내소
(10:25-10:40, +15=15, +1=1)
구파발에서 의정부행 버스에 많은 산님들이 오른다.
대부분 북한산성입구에서 우수수 下車하고
숨은벽 능선을 오르려는지 국사당 앞에서 일부가 내리고
송추입구에는 우리 內外만이 하차.
의외로 바람이 세차다.
세찬 바람을 피하려 모자를 쓴 산님들이 우주인같은데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산행준비들을 하고 있다.
(3)
들머리-여성봉(495m)
(10:40-11:30, +50=65, +1.9=2.9)
들머리에는 공원 직원들이 나와
안전산행을 빌어주며
곰돌이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해 주기도 한다.
지난 주까지 수북이 쌓인 눈은
많이 녹아 내려 登路는 먼지가 풀풀 난다.
아내는 부드러운 능선에 만족하는 눈치.
(4)
여성봉(495m)-오봉(655m)
(11:30-12:00, +30=95, +1.2=4.1)
지난 주, 내가 심조심 오른 여성봉을
아내는 가벼운 몸이어선지 가볍게 오른다.
주위의 파노라마에 감탄하는 아내 앞에서
지난 주엔 못 올랐던 정상 바위에 훌쩍 오름.
오봉 가는 길 내내
펼쳐지는 오봉능선이며,
상장능선, 포대능선, 사패능선이
연주하는 선율에 연신 감탄하는 아내.
(5)
오봉(655m)에서 점심및 오봉 조망
(12:00-12:50)
五兄弟가 공기놀이하다 멈춰선듯한
그 수려한 조망을 내려다 보며
점심을 먹으며 보니 제1봉으로 한 팀이 내려간다.
이어 리더가 줄을 내리고
차례로 오르고...
그렇게 1봉에서 2봉으로 가는 그들을 보며
점심 후 오봉이 제일 잘 보인다는 우이령 능선 쪽으로 향하다.
거기서 보니 남쪽에서 비취는 햇살에
오봉의 실핏줄까지 드러나며
길다란 바위 장딴지까지 한눈에 보인다.
또한 그 바위 사이 사이에서 수백년을 살아온
낙락장송들이 산수화를 연출.
우이령을 지키는 군부대 막사는
역사소설에서 보는 도적들의 산채같다.
발 아래 그 산채가 훤히 보이는데
그 곳을 지난 121무장간첩이 되어볼까 하다
아내의 편안한 산행을 위하여 우이암능선으로 向하다.
(6)
오봉(655m)-우이암능선 안부
(12:50-13:20, +30=125, +1.3=5.4)
다시 오봉으로 돌아와 오봉샘방향으로 向.
오봉샘으로 가는 계곡은 바람 한점 없는 아늑함을 자랑.
우이령이 통제구역이어서인지
계곡으로 내려간 登路는 다시 솟구쳐 능선으로 연결.
능선으로 오르니 다시 불어오는 세찬 찬바람.
(7)
우이암능선 안부-우이암
(13:20-13:50, +30=155, +0.8=6.2)
안부에 올라서니
오봉 1.3km, 자운봉1.5km, 우이암 0.8km란 이정목이 반기다.
이정목을 살필 겨를도 없이 능선을 오르내리며 주위를 살핀다.
도봉주릉 너머로
선인봉, 만장봉, 자운봉이
上峰을 이루는 線上과 연결되어
주봉, 뜀바위, 칼바위가 스카이라인을 그리더니
통제구역인 상장능선의 한 복판을 향하여
우봉, 오봉능선의 오밀조밀함이
파란 하늘을 쭉 가로질러 찔러 들어가고 있다.
인수봉과 백운대는 희미한 자태로 우뚝 솟아
그러한 대자연의 장관을 지켜보고 있는 듯 하다.
우이암능선 곳곳, 어디든
그러한 도봉을 감상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8)
우이암-우이동 날머리
(13:50-14:50, +60=215, +2.7=8.9)
우뚝 솟은 우이암은 흔히 바위와
그 아래 암자를 칭하는 이름과 혼동하기 쉬우나
그저 우이암이라 칭하자.
깍아지른 벼랑 그 사이를 지나는 오솔길,
그리고 급전직하로 떨어지는 하산길,
다시 지루하게 이어지는 날머리로 향하는
등로는 가뭄으로 폴싹폴싹 먼지가 피어 올랐다.
배달9205/개천5906/단기4341/서기2008/2/16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1. 들머리에서
2. 여성봉
3. 여성봉에서 오봉 조망
4. 여성봉에서 삼각산, 상장능선, 우이령 조망
5. 사패산 조망
6. 오봉 진행중 봉 오봉 능선
7. 오봉
8. 오봉에서 본 삼각산, 상장, 우이령
9. 우봉
10. 오봉 파노라마
11. 흔들바위 사이의 우봉
12. 흔들바위 사이의 자운봉, 만장봉, 선인봉
13. 오봉 원경
14. 도봉 주릉 파노라마
15. 우이암
|
|
|
이름없는풀뿌리 |
|
[우이령]
중앙일보 전익진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교현리에서 서울 우이동을 잇는 우이령길(6.8㎞). 1968년 1.21 사태 당시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를 기습하기 위한 침투로로 사용했던 이 길은 그뒤 폐쇄돼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겼다. 그동안 군부대 작전차량 통행로로만 이용되던 이 도로가 16일 하루 동안 일반에 개방된다. 양주시 장흥면체육회는 장흥면 송추초등학교~오봉휴게소~석굴암 입구~우이령 정상(서울 우이동 경계) 간을 왕복하는 '장흥면 한마음 건강 걷기 대회'를 16일 개최한다고 밝혔다. 대회 코스는 왕복 11㎞ 구간으로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행사 당일 오전 8시30분까지 송추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이면 된다. 참가비는 없으며 간단한 음료수와 빵 등이 제공된다. 폭 3~6m 규모의 비포장도로인 이곳은 40년 가까이 사람들의 발길이 끊겨 생태계와 자연경관이 잘 보전돼 있다. 우이령길 주변은 계곡과 어우러진 데다 진달래 등 봄꽃이 만발해 있고 나무는 초록빛 새싹이 나기 시작해 멋진 봄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반환코스인 우이령은 북한산과 도봉산을 연결하는 고개로 소의 귀처럼 길게 늘어졌다 해서 '소귀고개'로도 불리며 '우이령(牛耳嶺)'이라는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우이령길에서 북쪽으로 눈앞에 올려다보이는 도봉산의 끝자락 '오봉'의 경치는 그중에서도 압권이다. 북한산국립공원 가운데를 관통하는 우이령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북한산.도봉산 등 두 개의 수도권 명산의 비경을 고스란히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이번 걷기 대회에서는 우이령 정상에서 서울 우이동 방면으로 가파른 고개 숲길을 따라 난 1.3㎞ 구간의 길을 따라 서울 우이동 방면으로 하산할 수도 있어 우이령길 도보 관통도 가능하다. 우이령길은 과거 양주시 장흥.백석.광적면 주민들이 서울 도봉 지역과 미아리시장 등으로 땔감과 채소를 팔러 다니던 유일한 마찻길로 사용해 왔던 곳이다. 정성수(44) 장흥면체육회장은 "이번 걷기 대회는 수도권의 대표적 관광명소인 양주시 장흥면 지역이 서울에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될 정도로 가까운 곳에 있다는 점을 알리는 한편 우이령길을 등산로로 개방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문의는 031-820-5781~3. 2008/02/17 10:02:22 |
|
|
| |
|
|
이름없는풀뿌리 |
|
[김신조 침투 루트]
1·21 사태는 국민과 서울 시민의 생활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사태 직후 정부는 한강 하류와 동해에 철책을 설치하는 등 대북 경계를 강화했다. 북한의 비정규전에 대비하기 위해 그해 4월 1일 향토예비군도 출범시켰다. 보안상의 이유로 서울 시민은 수십 년간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과 인왕산을 마음대로 다니지 못했다. 인왕산은 폐쇄 25년 만인 1993년 2월 문민정부를 내세운 김영삼 정부에 의해 개방됐고, 북악산은 지난해 비로소 개방됐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에서 서울 강북구 우이동까지 6.8㎞ 구간의 우이령 도로는 ‘김신조 루트’라는 별명을 얻었다. 사태 후 보안상 이유로 폐쇄됐고, 현재도 환경 보호 등의 이유로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북악 스카이웨이(북악산길)와 남산·북악터널 등도 사태의 산물이다. 손정목 서울시립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박정희 정부는 청와대와 가까운 구역은 철저히 통제하되 그 바깥은 개발을 장려하는 이중 정책을 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있어야 공비가 숨어서 침투하기 어려울 것이란 계산이었다. 북악 스카이웨이(7.7㎞)와 인왕 스카이웨이(2.3㎞)가 건설된 것도 이 때문이다. 남산 1, 2호 터널도 69년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이 구상한 ‘서울 요새화 계획’에 따라 만들어졌다. 평상시에는 교통 수단으로 쓰다가 전쟁이 터지면 대피용으로 쓸 공간을 만든다는 것. 40년이 지나 북한군의 침투 코스는 새롭게 관심을 얻고 있다. 서울시는 1·21 사태의 현장이면서 서울 성곽이 지나가는 북악산·인왕산 일대에 야간 조명을 설치하기로 했다. 주정완 기자 2008/02/17 10:03:55 |
|
|
| |
|
|
이름없는풀뿌리 |
|
[고암]
내가 부임한 1사단은 지산 육군으로써는 가장 서부전선을 담담하는 부대다. 우리 1사단의 좌측은 한강의 하구로 연결되는 김포와 강화도로 연결되는 강 중앙에 군사분계선이 설정되어 있기때문에 우리 해병대가 담당을 하고있다. 우리 1사단은 장단반도를 끝으로 육지로써는 가장 서쪽을 맡았는데 전에 미군들이 주둔하여 경계를 담당했으나 미군 2사단이 철수를 하고나서 1사단이 1년전부터 인수를 받아 새롭게 경계초소를 만들고 우리 실정에 맡는 조건을 만들어 부대를 재 배치하여 경계근무를 시작 하는 단계에 내가 부임을 하였다. 내가 부임한 제3대대는 우리 연대의 우측 부대로써 다음 우측은 25사단이 담당을 하고있다. 우리 3대대의 경계선 남방 한계선을 뚫고 과거 김신조가 침투를 한 바로 그 지역이였다. 철조망을 ㄴ자로 기둥옆에서 끊고 33명이라는 정예 무장 간첩단이 침투를 했던 것이다. 내가 바로 그지역의 정보장교로 보직을 받은 것이다. 김신조가 뚫고 들어온 그 철조망은 반공교육 장으로 새롭게 태어나 전국의 초등학교 교사등 많은 사람들이 정기적으로 계획된 교육을 받으로 온다. 전에는 임진강 자유교 북쪽의 작은 고지를 반공 교육장으로 사용 판문점을 바라보며 북한의 현실을 낱낱히 설명하는 방법으로 교육을 했는데 지금은 이 김신조 루트를 반공 교육장으로 추가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신조 일당은 이곳의 철조망을 절단하고 몰래 들어왔는데 그당시는 미군들이 경계를 하였는데 그 미군들은 곡각지점에 점망대를 높히 만들어 놓고 그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방식의 경계를 하였던 것인데 심야의 야음을 틈타 침투하는 간첩단을 인식하지 못했었다. 그러니까 전망대에서 약 150미터쯤 떨어진 낮은 골자기를 골라서 은밀하게 침투를 했던 것이다. 이 철조망을 무사히 통과한 간첩단들은 바로 임진강으로 건너 장파리를 지나 좌측의 적성면 미타산으로 들어가 은신을 하면서 상황을 보다가 곧바로 서울의 구파발로 달려가 청와대 뒷산까지 침투를 했던것을 그제서야 발견하고 경찰이 심문을 하고 대치를 하다가 당시 종로경찰서 서장이 간첩단에게 전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그렇게 상황이 긴박해진 다음에 군대가 비상을 발령하고 대 간첩 작전이 시작되어 그 일당을 모두 사살하고 김신조만 생포를 했던 그 루트를 내가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2008/02/17 10:15:30 |
|
|
| |
|
|
이름없는풀뿌리 |
|
김신조씨는 1968년 1월 21일 청와대부근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가한 북괴군 무장공비였습니다. 1968년 1월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 124군 부대에서 영하 25도의 영하의 강추위 속에 남파된 상위~소위까지의 특수공작원 31명중에 한명(소위)였죠. 이들은 하전사계급자에서 남파가 결정된 이후 모두 소위로 임관되었고 2명은 중위와 상위로 파격적으로 진급했다고 합니다. 개성 남동부 남파공작원 초대소에서 한국군 사단 마크가 달린 군복, 일제 바바리코트와 신사복 한벌,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비상 약품, 비상식량으로 찹살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그리고 30발들이 소련제 기관단총,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등으로 무장했죠. 최초 이들은 76명으로 편성되었지만 공격 목표가 청와대만으로 압축된데 따라 31명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원래 목표는 청와대를 포함해 미 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5개소였다고하죠. 2008/02/17 10:21:53 |
|
|
| |
|
|
이름없는풀뿌리 |
|
침투 전날 밤 환송식에서 훈시하던 124군 부대장은 불과 1년반 전인 1967년 남파돼 경기도 송추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군경 포위망에 걸려 도주, 복부에 총상을 입고 5일만에 임진강을 건너 귀환한 경력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고하고 이사람은 1990/2000년대 북한군의 특수전부대를 총지휘했던 박재경 대장이라고 합니다. 1조는 청와대 본청사 2층, 2조는 1층, 3조 경호실, 4조 비서실 공격. 5조는 정문 보초 제거 및 청와대 차량 탈취 후 탈주 준비등의 임무를 분담했는데 이 중 김신조는 2조의 조장이었다고하죠. 예상 침투로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 관할지의 경계선으로 부대간 경계지역으로 침투한다는 침투전술의 기본을 따른 것이었다고하죠. 이 후 이들은 파주광탄을 거쳐 서울로 진입해 청와대 뒷산에서 각 조별로 갈라져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되었으나 당시 청와대 경호를 담당하던 수방사 모 부대 지휘관이었던 전두환이 예하부대에 지시해 평소의 연습대로 예정된 시간에 조명탄 발사연습을 했는데 이떄 기습조는 자신들이 발각된것으로 착각하여 신분을 드러낸채로 교전이 벌어졌다고 하죠. 31명중 김신조를 제외한 전원은 아군에의해 사살되었고 1명이 실종되었다는데 월북한것으로 추정되고있습니다. 실종이란것은 시신이 김신조에 의해 확인된 수가 한명이 부족한데 기인했다고 하죠. 이 후 김신조씨는 아군에게 투항하여 전향하고 남한생활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하다가 목사가 되어 현재 이름도 개명하고 목회생활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귀순자가 오면 김신조씨가 먼저가서 이들을 전향하도록 설득하고 신앙에 귀오토록 했다더군요. 1983년 부산 다대포로 침투중, 아군 정보사 첩보부대원에게 생포당한 전충남, 이상규씨도 이런 124군부대 출신인 김신조씨와 1976년 귀순했던 경보병부대출신 이덕남씨등의 특수전부대출신자들의 설득을 받았구요. 여담이지만 김신조씨는 침투전 정치범들을 대상으로 영화 쉬리 초반에 잠깐 나온것처럼 살상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평양부근 도시의 청사격인 곳에 실탄으로 침투훈련을 했고 방자측도 실탄을 사용한 훈련에서 상호간에 여러명이 교전중에 사망했다더군요. 124군부대와 283도보정찰소 소속 대원들중 이런 실전을 가정한 훈련상황을 통과한 자들만이 엄선되어 부대를 구성했다고 하죠. 2008/02/17 10:21:57 |
|
|
| |
|
|
박원 |
|
이름없는 풀뿌리님 다녀갑니다. 김신조 얘기도 재미있고 여성봉 잘 보았습니다. 두어번 저 코스를 탄적이 있답니다. 늘 건강하십시오. 2008/02/23 12:17:07 |
|
|
| |
|
|
이름없는풀뿌리 |
|
화백님의 초목에 관한 이야기도 잘 읽었습니다. 특히 방크스 소나무 이야기-감명이었습니다. 어제는 숨은벽, 백운대, 영봉, 육모정을 종주했습니다. 그렇게 바위와 산그림자에 저 자신도 잊어버리고 묻혀있다 돌아오니 화백님께서 다녀가셨군요. 화백님의 건강과 행복을 항상 기원합니다. 배달9205/개천5906/단기4341/서기2008/2/24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8/02/24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