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한강변 따라가는 자전거 출퇴근길 20km (7)동작대교-사육신묘-한강대교-한강철교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7. 13:55
(7)동작대교-사육신묘-한강대교-한강철교 7-1) 원음(원불교)방송 근처의 풍광 7-2) 비좁은 올림픽대로 아래의 자전거길 7-3) 하얀민들레, 현호색, 애기똥풀이 군락을 이룬 사육신묘 근처 7-4) 산괴불주머니 군락 / 희귀한 붉은아까시 / 흰 아까시 7-5) 한강대교(상행, 하행), 6.25때의 한강인도교, 노들섬 7-6) 한강철교 노량진 (鷺梁津) 지명 유래 노량진이란 이름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란 뜻으로, 노량’(鷺梁)의 한자는 백로 로(鷺)에, 징검돌 량(梁)이다. 그래서 `노량`을 `노돌`이라고 했던 것이 `노들`로 변했다. 조선시대에 지금의 용산에서 수원 쪽으로 가려면 노들나루를 이용하였는데 이곳에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노량진’이 설치되었으므로 마을 이름도 노량진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도 인근 한강변 도로명이 ‘노들길’이고, 맞은 편 한강의 섬 이름이 ‘노들섬’이다 노량진은 한강철교와 수산물 시장간 강변일대와 그 서·남쪽지역으로는 대방동, 동쪽으로는 상도동과 북쪽으로는 한강과 인접해 강 건너 용산과 마주하고 있다. 옛 부터 수양버들이 울창하여 노들나루라고 불리는 도선장으로 인해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한 곳이다. 특히 상류의 한강진 하류와 양화진과 함께 서울로 통하는 한강나루터 중에서도 중요한 길목이므로 군대가 주둔하는 진을 설치하였다 한다. 노량진 철교 옆에 있는 인천 수도 정수지(淨水池) 앞 한강은 꽤 깊었다. 그 곳에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마리는 승천했고 남은 한 마리는 인천 수원지를 만들기 전까지만 해도 그 곳에 살고 있는 것으로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1910년 초 수로공사를 시작하자 노량진 주민들은 용을 덧들인다 하여 부녀자들 수 백 명으로 하여금 공사장에 연좌하여 시위케 하였다. 남자들의 싸움은 그 파워의 다과(多寡)로 판결이 나지만, 이 우먼파워는 파워의 분량으로는 판결이 나지 않는 이질적인 힘이 있었다. 여자들의 집단 농성은 파워로서는 절대적인 것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당시 노량진은 무당촌이었고, 농성하는 강 둔덕에서 무당들이 혼을 빼는 신굿을 하는 바람에 공사는 지연되기 시작했다. 이 끈덕진 저항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진행하는 도중 괴변이 일어났다. 둔덕이 무너지면서 흙탕물이 솟아오르는 순간 괴물의 등 같은 것이 떠올랐던 것이다. 농성하던 노량진의 여인들은 용의 등이라 하여 공사의 중단을 주장했고, 공사장 측에서는 잉어가 아니면 큰 메기라고 우겼다. 그러자 무녀들은 꽹과리를 치며 반 넘어 물속까지 들어가 굿을 하였다. 공사장 측에서는 주민들과 협상을 시작하였다. 결국 그 둔덕에 용신사(龍神祠)를 세우고 치제(致祭)를 한 다음 공사를 진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세상에 불샹한 죠션 녀편네, 이규태, 1988, 신태양사, 30쪽) [출처] 노량진역(鷺梁津驛)|작성자 덕전 노량진역(鷺梁津驛)은 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 경부선의 철도역으로, 1899년 9월 18일 우리나라 최초로 노량진~(인천)제물포역간 경인선 33.2km의 철도가 개통되어 영업을 한 역이다. 사육신묘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8호. 서울특별시 동작구 노량진동에 있다. 사육신묘는 조선의 6대 임금인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1456년(세조 2) 목숨을 바친 6명의 신하인 사육신의 무덤이다. 1681년(숙종 7) 숙종이 이곳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곳에 민절서원(愍節書院)을 세웠고 정조 6년(1782)에는 신도비(神道碑)를 세웠으며 1955년 5월 육각의 사육신비(死六臣碑)를 세웠다. 후에 서원은 철폐되었으며, 1978년 묘역을 확장하고 사육신의 위패를 모신 의절사(義節祠), 불이문(不二門), 홍살문, 비각(碑閣)을 새로 지어 충효사상의 실천도량으로 정화하였다. 사육신묘에는 원래 이곳에 있던 성삼문·이개·박팽년·유응부의 묘와 하위지ㆍ유성원ㆍ김문기의 가묘(假墓)가 있다. 7개의 묘가 있는 이유는 〈조선왕조실록〉과 〈추강집〉 등 사료의 내용이 달라 육신에 대한 논란이 있은 후, 김문기를 현창(顯彰)하고 그의 가묘도 추가했기 때문이다. 의절사 안의 위패와 마찬가지로 그 뒷편의 묘소는 동쪽으로부터 김문기ㆍ박팽년ㆍ유응부ㆍ이개ㆍ유성원ㆍ성삼문ㆍ하위지 순서로 모셔져 있다. 사육신 관련내용 http://blog.daum.net/psk3710/841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585 http://blog.daum.net/0118983530/8438584 한강대교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와 동작구 본동을 연결하는 한강상의 교량. 총연장 1,005m로 한강에 가설된 최초의 인도교이다. 한강인도교의 가설 계획은 민간인 영업차가 들어온 1912년부터 수립되기 시작해 1916년 3월에 가교에 착수, 1917년 10월에 준공했다. 교량의 상부는 핀 프랫 트러스(Pin Pratt Truss) 강구조(鋼構造)로 하여 최대경간을 60.6m로 했고, 교각(橋脚)의 기초는 우물통공법으로 시공했다. 교량은 중앙부에 있는 노들섬을 중심으로 하여 노량진측으로 경간 60.6m인 7연(連)의 한강교를, 용산측으로 경간 60.6m인 3연의 한강소교를 설치하고 다리 중간에는 401m의 둑을 쌓아 연결했다. 따라서 실제 교량의 길이는 629m이며, 폭은 7.7m로 중앙차도를 4.5m, 좌우 보도를 각각 1.6m씩 두었다. 그러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중간둑이 유실되어 용산측 한강소교가 위험한 상태에 놓임에 따라 용산측 한강소교를 폐지하고 종래에 둑을 쌓았던 곳(지금의 노들섬 북측 교량)까지 연장해 459m의 교량 가설공사를 1927년 5월에 실시해 1929년 9월에 완공했다. 도로교통로뿐만 아니라 가로등을 설치해 시민들의 산책로로도 이용되었던 이 교량은 영등포·노량진 지역의 발전에 기여했으나 교통량의 증가에 따라 1934년 8월에 새 한강인도교 건설에 착수해, 1936년 10월에 완공했다. 교량의 형식은 타이드 아치(tied arch) 강구조로 최대경간이 63.55m인 교량과 최대경간 28.787m인 강판형교(steel plate girder)로 했으며, 하부구조는 아치교에 잠함(潛函)공법을, 강판형교(鋼鈑桁橋)에 우물통공법을 적용했다. 교량의 연장은 1,005m(노들섬 164m 포함)이며, 교량폭은 19.99m로 하여 중앙에 복선의 전차궤도를, 좌우 양측에 각각 차도와 인도를 설치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6월 28일 타이드 아치 3경간과 판형교 일부분이 파괴되어 1957년 1월부터 복구공사에 착수, 1958년 5월에 준공됨에 따라 서울의 명물이었던 한강대교가 새로운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그후 계속되는 영등포구·구로구·금천구·동작구·관악구 지역의 도시확장과 인구증가에 따라 폭주하는 교통량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신설 계획중이던 한강대교-관악구청 간의 폭 40m 도로가 개설됨에 따라 발생되는 교통체증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 1979년 1월부터 1981년 12월까지 교량확장공사가 실시되었다. 교량의 형식은 기존의 교량과 완전대칭을 이루는 쌍둥이 교량으로 하여 도로폭을 기존 18.4m에서 36.8m의 8차선으로 확장했다. 판형교 19경간교를 상류측으로, 타이드 아치 6경간교를 하류측에 확장했고, 노들섬측에 우회도로를 가설하고 북쪽에 입체교차로를 설치했다.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던 이 교량은 한강인도교·제1한강교 등으로 불리다가 1984년 11월에 한강대교로 개칭해 현재에 이른다. • 1912년: 교량가설계획 수립 • 1916년 3월: 착공 • 1917년 10월: 준공 • 1925년 7월: 홍수로 인해 소교(용산 측) 유실 • 1929년 9월 18일: 소교 재개통, 폭 18m로 확장 • 1935년 10월: 대교(노량진 측) 재건축 후 개통, 전차궤도 부설 • 1950년 6월 28일: 한국 전쟁으로 인해 폭파 • 1950년 10월: 임시 복구됨, 1차선 운행 • 1958년 5월 15일: 한강 인도교 완전 복구 • 1982년 2월 27일: 한강대교 신교 부설, 개통 (4차선에서 8차선으로 확장) 한강철교 한강철교(漢江鐵橋)는 한강의 교량 중 최초로 건설된 교량[1]으로, 노량진역과 용산역 사이를 잇는 철교이다. 1900년 한강 이남으로 노량진역에서 끊겨 있던 경인선을 용산역과 남대문역(현 서울역)까지 연장하기 위하여 건설된 철도 전용 교량이다. 현재 경인선, 경부선등의 열차가 이용하는 교량이다. 한강철교는 A, B, C, D선의 4개 교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A선과 B선은 단선교량이며, C선과 D선은 복선교량이다. 처음에 정부와 정식으로 교량 건설 계약을 맺은 사람은 미국인 제임스 모스였다. 그는 경인철도 부설권과 함께 교량 가설권도 획득했다. 처음 계약에 따르면 보행자의 편의를 위해 다리 한쪽이나 양쪽에 보도를 만들어야 하며, 선박의 운항을 위해 개폐부를 만들거나 충분히 높게 가설하도록 규정했다. 1897년 3월 29일 기공식을 올리고 철도 공사가 시작되었으나 곧 인력난과 재정난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에 더하여 일본의 압력으로 위협을 느낀 모스는 철도 부지의 토목 공사가 끝날 무렵 일본에 부설권을 넘긴다. 일본은 계약을 인수한 뒤 공사비가 많이 든다는 이유로 보도 가설을 하도록 된 계약을 파기한다. 일본은 인력난으로 시일을 끌다가 1900년 7월에야 완공한다. 완공 당시 한강철교는 근대식 토목 공사로는 가장 규모가 컸다. 한강철교에는 교각이 9개였는데, 모스가 그 가운데 제1, 2, 9호 교각을 만들었으나 일본이 안전도 검사를 한 뒤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다시 가설했다. 모스가 만든 교량의 양 기둥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철교를 만들 때 들어간 재료는 철강이 1,200톤, 벽돌이 120만 장, 시멘트가 5천 포, 석재가 5만 개 이상이며, 상부구조를 이루는 철재는 61미터짜리로 미국산이었다. 완성된 교량은 628.9미터였고, 교각은 위쪽을 뾰족하게 하여 장방형으로 만들었다. 아래 둘레는 8.2미터, 폭은 2.1미터였고, 위쪽 둘레는 7.6미터, 폭 1.8미터이며, 교각의 수면 위 높이는 11.2미터였다. 북쪽 교대는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되어 다시 세웠다. 경인선 및 한강철교가 개통되기 이전에는 서울에서 인천까지 육로로 12시간, 배편으로 8시간이 걸렸으나, 완공 뒤에는 1시간에서 2시간이 걸렸다. 철교는 그때까지 나루터였던 곳이었으며, 일본인에 대한 반감으로 나룻배를 계속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원래 계약에 있었던 보도 설치는 1917년 인도교(人道橋, 현 한강대교)가 가설됨으로써 이루어졌다.[1] • 1897년 3월 29일 : 기공식 • 1900년 7월 5일 : A선 개통 • 1912년 9월 : B선 개통 • 1944년 8월 1일 : C선 개통 • 1950년 6월 28일 : 한국 전쟁으로 A·B·C선 폭파 • 1957년 7월 : C선 복구 • 1969년 6월 : A·B선 복구 • 1994년 12월 : D선 개통 노들섬 ▣ 위치 : 서울 이촌2동 320번지▣ 규모 : 149,746㎡ ▣ 연혁 : 조선말까지 모래벌판으로 이촌동에 속해 있었음. ▣ 한강에서 낙하산 훈련중 동료 구하고 순직한 이원등(李源登)상사의 동상이 있음 ▣ 현재 테니스장 등 체육공원으로 사용됨 중지도라고도 불린다. 강북의 용산이나 강남의 노량진 부근을 주행할 때 시선을 사로잡는 섬. 한강대교를 중간에서 떠받치고 있는 타원형의 땅이 바로 이곳이다. 면적은 4만5300평. 자동차로도 찾아갈 수 있다. ▲올림픽대로에서 원효대교를 지나 한강대교로 들어가거나 ▲강변대로에서 이촌동 방면으로 빠진 뒤 직진, 신호등을 지나 오르막 고가차도로 빠진뒤 한강대교로 들어가거나 ▲현충로쪽에서 한강대교를 지나간 뒤 중대부속병원 앞에서 유턴을 받아 다시 한강대교로 가면 된다. 걸어가려면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또는 국철 용산역에서 내려 한강대교쪽으로 1㎞쯤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그리고 철제계단을 내려가면 섬을 일주하는 시멘트 도로가 나온다. 산책하는 보폭으로는 15분정도의 거리. 요즘엔 매일 낚싯대가 수백개씩 드리워지는 강태공의 낙원이다. 2000여㎡의 헬기 이·착륙장, 25개 코트의 테니스장도 눈길을 끈다. 섬 끝에서 보는 한강의 모습은 일품. 노들’은 예부터 ‘서울 한강의 남쪽 동네‘를 가리키는 지명이었고, ‘백로가 놀던 돌’이라는 뜻의 ‘노돌’에서 연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시대에 노들나루는 한강 5대 나루 중 하나로, 지금의 노량진은 이 지명을 한자로 바꾼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섬을 만들면서 중지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1995년 일본식 지명 개선사업에 의해 비로소 노들섬이라는 우리식 이름으로 바뀌었다. 노들섬은 본래 외따로 떨어진 섬이 아니라 이촌동에서 노들섬까지 이어진 모래벌판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모래밭 마을’이라는 의미의 ‘사촌’이라 불렀으며, 해지는 풍경이 아름답다하여 용산 8경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일제강점기 들어 철제인도교를 건설하면서 주변의 모래를 모아 언덕을 쌓아올리고 이를 중지도라 이름붙이면서 모래벌판이었던 노들섬 주변이 섬이 되었다. 근대화 이전까지는 노들섬 주변의 한강 백사장이 넓게 남아있었으므로 많은 시민들이 몰려들어 물놀이를 즐기곤 했다. 그러나 68년부터 한강개발계획에 따른 현 강변북로의 건설에 백사장의 모래가 사용됨에 따라 모래밭은 사라졌고 노들섬 주위로 강물이 흘러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