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운현궁의 가을(09/24)과 낙산성곽(2011/10/02)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7. 14:30
운현궁의 가을 고종황제 - 한때 무능하고 나약한 임금으로 알고 있었던 그가 열강의 야욕에 맞서 처절히 항거한 수 많은 증거가 발굴되고 있다. 선조 - 우리는 대부분 겁많고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임금으로 알고 있지만 그의 높은 경륜과 적절한 인재 기용이 있었기에 전대미문의 병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지킬 수 있었슴이 증명되고 있다. 민비 - 여우사냥으로 희생된 그녀가 시아버지인 대원이 대감에 맞서지 말고 合心했다면 대한제국이 일본제국보다도 훨씬 빨리 근대화되고 자주국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아무리 포악한 승냥이들이 조선에 몰려들었을지라도 일국의 국모를 감히 건드릴 수는 없지 않았겠느냐고 곰곰 생각해 본다. 어쨌든 왕권을 지키려 맞서 싸웠던 민비는 아이러니하게도 정치적 적수인 시아버지 대원군에 의해 간택되어 한동안 한 울타리에서 기거하면서 왕가의 윤리를 학습받고 혼례식을 치뤘던 운현궁. 봄, 가을 두 번에 걸쳐 그 혼례 재현 행사가 해마다 펼쳐진다 한다. 아내 동행 노락당, 노안당, 이로당 .... 차례로 둘러보다. 운현궁의 봄이 아닌 가을이었다.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09/24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운현궁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는 사적 257호인 운현궁(雲峴宮)은 파란만장한 기울어져 가는 조선말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고종의 아버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살았던 역사적인 곳이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작은 사가였던 이곳은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 사가를 증축하여 제법 규모가 컸었는데 일부가 덕성여자대학교 건물로 쓰이고 있고 전 동양방송에도 일부가 팔려나가 지금은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 안채인 이노당(二老堂), 노락당(老樂堂) 등만 남아 있어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있는 것이 안타깝다. 내정(內庭)에는 아직도 고종이 오르던 노송이 있어 정2품 금관자(金貫子)를 달아주고 대부송이라 불리우고 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 창덕궁에 거처가 있던 시기에는 고종의 전용 출입문인 경근문(敬勤門)과 대원군의 전용 출입문인 공근문(恭勤門)이 있었고 아재당(我在堂) 등이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철거되고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규모가 작아 운현궁을 찾는데도 쉽지가 않게 되어있는데 나중에 예산이 허용하면 주변 건물을 매입하여 모두 복원해서 역사의 현장을 살려야 하고 장기적으로 서울의 관광명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종이 나이가 어려 섭정(1863~1874년)의 지위에 오른 이후에는 기울어져 가는 조선의 운명을 되돌리기 위해 고뇌의 삶을 살았던 풍운아 대원군! 세계 제국주의 열강이 동양을 침탈해오던(西勢東占) 조선 말기, 쇄국정책으로 나라의 발전을 크게 지체시켰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힘이 빠져가는 청나라 상황를 면밀히 분석하며 비록 약소국이었지만 청나라와 대등한 관계를 가지려는 치열한 자주정신, 북경의 자금성에 80%가 넘는 우람한(?) 규모로 중건한 경복궁 공사 (당시 주변 속국들은 자금성 규모의 70%가 넘는 궁궐건축은 불허되었다 한다.)등을 추진하였으며 안동김씨를 비롯한 몇몇 권세가문의 세도정치에 맞서 당시 전국적으로 서원에서 공부하던 양반들에 의한 폐해가 심각하자 대부분의 서원을 철폐한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정책을 추진한 한 대원군은 안동김씨의 세도속에서 불운한 젊은시절을 보냈다. 1933년에 김동인님이 발표한 '운현궁의 봄'이라는 장편소설은 흥선 대원군의 일생과 조선 말기의 복잡한 내외정세와 당시 세도정치를 하던 안동김씨를 비롯한 권세가의 폐해를 적시하면서 민족의식을 가지고 씌여졌다. 여기에는 지배계급이었던 양반들과 벼슬아치들의 억압과 착취로 고통받는 민중에 대한 연민과 그럼에도 그들을 도울 방법이 없음에 대한 좌절, 밑바닥 인생을 살았던 경험과 장부의 기개가 살아있던 이하응이 호령을 하면 누구도 도전하지 못했던 대장부 흥선대원군의 기개 등 그의 인간적인 모습들을 담백한 문장으로 구체적으로 잘 표현하였는데 최근 10년을 전후한 대원군이나 고종 또는 명성왕후를 소재로 한 TV드라마나 영화는 이 '운현궁의 봄'에서 많은 영감을 얻거나 작품내용을 참고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본다. 1820년에 태어나 12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17세때엔 아버지 남연군마저 여의고 종친의 양자로 들어간 이하응은 돈도 없고 권세도 없는 왕의 종친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뿐이었는지를 뼈져리게 깨달으면서 허허롭게 세상을 관조하였고 추사 김정희선생으로 부터 배운 난(蘭)과 그림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였으나 너무 많은 같은 그림을 팔아 시중에 가격이 떨어져 춥고 배고푼 생활을 하면서 젊은 날을 견디어 냈다. 그러면서도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양반사회의 문제점을 낱낱이 깨닫게 되고 안동김씨의 주목을 피하기 위해 주변의 건달 또는 파락호들과 어울려 놀다가 양반들에게 따귀를 맞거나 음식을 얻으러 갔다가 그 집 하인에게 얻어 맞은 사건도 발생하게 되는 등 그의 젊은 날은 파란만장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 젊은 날의 다양한 경험 덕분에 왕의 섭정자리에 올라서는 세상을 낮은 곳에서 부터 높은 곳까지 통찰하면서 당시 시대정신에 맞는 정채글 펼쳐 시민들의 박수를 받은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다. 하지만 고종의 성장과 자기가 직접 간택하여 믿었던 명성왕후와 명성왕후 외척인 민씨일가, 청나라에 빌붙는 사대주의에 발목이 잡힌 조정 대신들의 면종복배로 인해 퇴위하게 되었고 1898년 운현궁의 별장인 아소당에서 78세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으나 아직도 풍운아 대원군의 이름은 인기리에 인구에 회자되고 있으니... 김동인의 운현궁의 봄 줄거리> 이 작품은 전 25장으로 된 장편 소설이다. 1장에서는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집권하기 전으로 이하응의 권력 지향과 영웅성이 긍정적으로 나타나며, 2장에서는 명종 때부터 철종에 이르는 300년 간의 조선조 정치사가 요약되었고, 3장에서는 해가 바뀐 신유년의 사건으로 전개된다. 4장에서는 흥선이 조 대비와의 만남으로 인해 장래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고, 5장은 김병기로부터의 수모, 6장은 민숭호의의 인연 구축, 7장은 영의정 김좌근의 애첩 양씨의 권력 행패, 8장은 동궁 책립에 대한 조 대비의 의향 타진, 9장은 김병국 일파로부터의 망신과 조롱, 10장은 양씨로 인한 백성들의 원성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12장은 김문 일파의 음모로 터진 이하전 역모 사건, 13장은 흥선과 심복들이 투전에서 포교와의 금전거래, 14∼20장까지는 현 제도의 모순과 위정자들의 타락상이 표출되며, 25장에서는 계해년이 지나 갑자년 정월에 26대 조선 국왕이 즉위하는 것으로 대미를 장식한다. <등장 인물의 성격> ▷이하응 - 흥선 대원군. 야인으로 추락하여 갖은 천대을 견디어 대권을 잡는 인물. ▷조성하 - 조 대비의 조카. 승후관. ▷김병국 - 안동 김씨 세도 김문근의 일족으로서 이하응에게 호의적인 인물. <핵심 사항>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조선 왕조 말기 철종 등극 직후부터 대원군이 정권을 잡기까지의 격변기. ▷주제 : 격변기의 민족 현실과 민족 정신. <감상의 길잡이> <1> <운현궁의 봄>은 1933년 4월 26일에서 다음해 2월 15일까지 <조선일보>에 연재한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의 특징은, '상승적 구조'를 보인다는 것과 남의 천대에 대한 분노, 즉 인격적 모독에 대한 반발의 원리 등이 역사적 도정의 과정을 통하여 응축되어 있는 데 있다. 또한 대원군이란 인물을 긍정하는 데서 오는 역사적인 사실 인식도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는 일제 치하의 상황을 민족의 역사 의식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민족적 울분을 부추기고 공동화(共同化)된 의식을 되찾으려고 노력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일제 하의 검열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현실성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역사 소설을 선택했으며, 이는 민족적인 의식을 심화시켰다는 점에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 1930년대의 역사적 소재를 통한 민족의식 함양과 국민 문학파의 소설적 성과를 보여 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특히, 이 작품은 <붉은 산>, <태형> 등과 함께 그의 민족주의적 작가 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2> 김동인의 대표작인 운현궁의 봄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쇄국정책의 상징적 인물이며 정치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유일한 대원군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안동김씨의 감시권 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건달 노릇을 하던 시절부터 조대비와 연합해서 자신의 둘째아들(나중에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섭정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사실적(내가 보기엔 사실적이 아닌 사실 같다.)으로 쓴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는 한국사에서 대표적인 권력쟁탈전 (태종 이방원 : 다른 왕자들, 세조 : 단종(의 추종세력들 장희빈(을 위시한 그녀의 추종세력들) : 인현왕후(을 추종하는 세력들), 광해군(을 위시한 추종세력들: 영창대군(을 위시한 그의 추종세력들), 등)의 하나인 흥선대원군 : 안동김씨에 대해 다루었을 뿐만 아니라 또다른 권력 쟁탈전인 흥선대원군 : 민비의 시작인 흥선대원군과 민비의 첫 만남 (이때에는 민비가 아닌 민치록의 딸)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온갖 사회적 부조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타락한 흥선을 통해 안동김씨의 왕족에 대한 심한 견제을 통해 당시의 외척과 왕족의 갈등을 보여준다.· 소설 중간중간에 등장하는 짧은 에피소드와 세간 청지기와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에 성행하던 매관매직과 관료들의 부패를 고발하고 있을 뿐만아니라 나아가 당쟁의 폐해와 외척의 세도 정치의 극심한 폐해를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의 오른팔로 나오는 조성하와 한 늙은 선비의 대화를 통해서 당시의 서원의 부패를 보여준다.· 사이사이에 등장하는 고위관리들의 행차 모습과 흥선대원군이 조성하에게 대전통편을 보여주는 대목에서 조선시대의 허례허식과 부패의 원인을 보여준다.· 김좌근의 첩 양씨의 시반선에서 던지는 밥을 줍기 위해 몰려드는 군중에 대한 이야기와 민란 이야기를 통해 그 당시의 피폐한 민중 생활을 보여준다. 또한 소설의 등장인물들과 에피소드를 통해 우리가 잘 모르는 조선시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흥선대원군이 골패점을 치는 장면을 통해 당시에는 화투가 아닌 골패가 유행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조시대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서 조선전기에는 무인들이 득세하였으나 후기에는 문인들이 득세하였음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이 둘째 아들을 교육시키는 장면을 통해서 당시 궁궐에서 궁안에서만 쓰이는 궁화라는 특수어가 존재하였음을 보여준다.· 안동김씨와 김대비의 결탁과 흥선대원군과 조대비의 결탁을 통해서 왕의 후계자 결정권리를 왕 뿐만아니라 대비가 쥘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흥선대원군의 집에 있는 사당과 왕족 이하전의 집에 있는 사당을 통해 당시 조상에 대한 생각을 보여준다.· 조대비와 헌종의 에피소드와 철종을 통해서 왕족의 생활의 부자유성을 보여준다.· 김병기가 읽던 금병매를 통해 그 당시의 양반들에게도 지금의 베스트셀러처럼 유행하는 연애소설책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종,민비 혼례식을 보고 느낀점 몇 마디... 김만중 | 조회 30 |추천 0 | 2001.04.25. 19:53 지난 토요일 퇴근길에 안국역을 향해 운현궁 앞을 지나가는데... 평소 인적이 없던 곳인데 사람들이 와글와글 하다. 나도 공짜구경은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는지라 안에 들어가 보았다. 운현궁 마당무대에서 고종과 민비의 혼례식을 재현하는 행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마당에 넘쳐나는관중들 틈에서 까치발을 딛고서니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혼례의 절차와 복식은 철저하게 기록과 고증 따랐다고 하며 해설자가 관중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혼례식의 화사한 색채가 운현궁의 우중충한 건물과 대조를 이룬다. 이 혼례식의 Super Star는 단연 민비이고 조연은 고종과 이 운현궁의 주인인 대원군이다. 주욱 지켜보니 아무리 왕실의 혼례식이라지만 너무 절차가 복잡하고 까다롭다. 대원군 부인이 대궐로 떠나는 민비에게 "부디 법도를 지키시며.." 하면서 덕담을 나누는 장면까지 세세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 때 고종이 15세, 민비가 16세이고 지금부터 130년 전이라고 한다. 특히 일반혼인과 다른점은 신랑신부 맞절 시 신랑인 왕은 절을 하지않는다. 해설자의 말 인즉 왕은 지존이므로 어느누구에게도 절을하지 않는다고 한다. 혼례식의 High Light는 민비가 모든 신하들과 상궁 등 궁녀들로 부터 국모로서의 예로 절을 받는 장면이다. 여주에 살던 조실부모한 소녀가 국모 즉 무한권력의 중전이 되는 순간이다. 행사를 주최하는 팀에서 꼼곰하게 준비를 한것 같다. 대원군,신하들,상궁,궁녀,민비,고종 등의 인물은 당시의 나이에 맞는 세대를 선정했고,분장도 전혀 어설프지 않다. 복식과 동원된 각종 깃발도 사실감이 느껴졌다. Performance를 하는 사람들도 진지하게 행동했다. 혼례식장 경비를 하는 포졸들도 깃발든채 끝까지 근엄한표정을 유지하면서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사전에 교육을 철저히 받았나 보다. 꼬마들이 옷을 잡아당기며 동물원 원숭이 쳐다보듯 하는데 이게 어디 쉬운 일인가. 결혼이란 인륜지대사라는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부모나 당사자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은 예날에도 그랬으며 왕실도 역시 마찬가지 이다. 당시 대원군은 왕실의 외척 안동김씨 세도에 치를 떨었던터라 부인(대원군 부인도 민씨)이 천거한 민비가 부모가 없는 것을 더욱 며느리로서 호조건으로 생각 했을 것이다. 궁궐을 두고 사저인 운현궁에서 왕의 혼례식을 치르게 한것도 자기의 위상을 드 높일려는 책략이 아니겠는가. 권력에는 피도 눈물도 없다. 민비시해 시 일본공사가 대원군의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그뒤 민비는 어떠했나. 나라의 안위 보다는 민씨일파의 권력유지에 더 신경을 썻고 시아버지인 대원군이 청나라 볼모로 잡혀갔을 때 영원히 귀국 못하도록 청나라에 청원도 넣었다. 성격이 표독스러워 고종이 다른궁녀와 가까이 지내는 걸 알면 그궁녀를 요절을 냈다. 왕은 여러 여자를 취할 수있는 특귄이 있었지만 이를 인정 안했다. 임오군란,갑신정변,아관파천등의 사건 배후에는 대원군과 민비가 있었다. 그러면 고종은 어떠했나. 민비와 결혼 당시 이미 장씨 성을 가진 궁녀를 좋아하고 있었다고 한다. 민비에게는 괸심을 두지않아 민비가 대부분의 세월을 독수공방으로 보내게했다. 아버지 대원군과 여장부 민비 사이에서 소신없이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 민비가 죽고나니 자기도 죽을까 두려워 궁궐을 버리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망가서(우리는 역사시간에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배웠다) 사는 모습을 어디 체통있는국왕이라고 할 수 있는가. 관중들의 감탄속에서 혼례식의 재현은 끝났다. 그러나 이 화려한 혼례식의 주인공 세 사람은 뒤에 권력다툼을 일삼고 우유부단하게 처신하여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는 원인이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니 한편으로 씁슬한 기분을 느끼면서 궁을 나와 안국역으로 향했다.끝 2011/10/2(일) 영등포에서 자전거로 마포-서대문-종로를 거쳐 동대문역에서 아내를 만나 서울 낙산성곽을 돌아보다. 서울 성곽 전체 18km를 하루에 종주해보고 싶은 바람이 있지만 아직은 시간과 여유가 허락치를 읺는다. 태어나 처음 가 본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