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의 만추(晩秋)
20011/11/5(토)
前 직장 동료들 문경 모임.
모처럼 감옥 脫出.
손사장 生家에서 1박 후
골프조와 떨어져 문경새재로 向.
당초에는
[1관-2관-주흘산-영봉-마패봉-3관-2관-1관]을
계획했으나
골프조와의 시간상
[1관-2관] 왕복으로 만족해야하는 아쉬움.
하지만 만추의 문경새재 여기저기와
과거길 이었던 옛길도 걸어보는
혼자만의 孤獨을 즐겨봄.
배달9208/개천5909/단기4344/서기2011/11/6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손사장 생가에서 1박.
2) 한국의 아름다운길에 선정된 새재길
3) 선비상
4)멀고 먼 새재길(36km)
5) 박물관 앞의 솟대
6) 1관에서
7) 못가보는 주흘산 영봉, 마패봉을 그림으로나마
8) 2관으로 가며 본 풍경
9) 최근 광개토태왕에도 나온 신임, 전임 관찰사 교대식이 있었던 교귀정
10) 과거급제 소원빌던 돌탑
11) 용추폭포
12) 해발 380m 2관(1관3km, 3관3.5km, 주흘산5km)
13) 제2관(아쉽지만 여기까지, 간혹 비, 찬바람 많이 붐)
14) 내려가며(올라올때 놓친 풍경)
15) 다시 돌아 온 1관
문경새재(聞慶鳥嶺)의 유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그리고 역사에 얽힌 갖가지 전설을 비롯하여
임진왜란과 신립(申砬) 장군, 동학(東學)과 의병(義兵)이 남긴
사담(史談)이 골골이 서리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이 일대를 1974년 지방기념물(제18호), 1981년 도립공원으로 지정,
보호하고 있어 전국에서 관람객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조령산성축성(築城)
임진왜란 때 신립 장군이 충주 달천에서 배수진을 쳤으나 패하자
조령로를 막지 못한 것을 크게 후회하고 방비가 없음을 한탄하였다.
명나라 측에서도 선조가 안주에 파천하여 있을 때
백상루에서 유원외가 선조에게 조령관 설비의 필요성을 역설하게 하였다.
그렇지만 전란에 따른 물자의 결핍으로 인해
중국 산해관처럼 하자느니 조령만이 천험은 아닌데
다른 곳은 설관하지 않아 되겠느냐는 등 논의만 거듭하게 되었다.
결국 평안감사 이원익, 병사 신집, 우승지 유몽정, 주서 김상설, 검열 조유한 등의 논의로
죽령과 조령에 설관하기 위한 자료수집차
화공 12인을 중국에 파견토록 선조의 지시가 있었으나 파견이 중지되었다.
선조 26년 12월 영의정 류성룡이 성에 의지하여 승전한 경험을 들어
조령 설관을 다시 주장하여 선조도 조령 설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류성룡은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의 조령지세와 설관 및
설관 후 파수 계책에 대한 것을 듣고 선조 27년(1594) 2월에 상주(上奏)하게 하였다.
조령은 나라의 문과 같아 충주를 지키자면 조령에서 막아야 되고
충주가 함락되면 한강수백리(漢江數百里)를 자연히 잃게 된다.
충주 사는 수문장 신충원이 조령지세를 잘 알고 있다.
조령의 영상(嶺上)에는 잡로(雜路)가 많아 막기가 힘들고,
영(嶺)에서 동쪽으로 10리쯤 내려가면 깍아지른 절벽이 양쪽으로 솟고
그 가운데로 물이 흘러 행인들이 나무를 걸치고 건너야 한다.
이와 같은 곳이 무려 24곳이나 된다.
또 응암(鷹巖)이라는 곳이 있는데 이곳에 설관하여
적이 이곳에 이를 때 다리를 철거하고 물을 막았다 트면
감히 발붙이기가 어렵고 궁노(弓弩)와 능철화포 등을 쏘면 백여명이 지킬 수 있다.
문경 동쪽에는 구로(舊路)가 있어 조령의 서쪽에 이르게 되나
백년간 사용치 않아 산림이 울창하고 하늘이 보이지 않아 다니기 어렵고
문경 서편에도 소로가 연풍현의 동쪽에 닿으나
워낙 험준하여 여기도 수십인이면 지킬 수 있다.
연풍읍과 수회촌의 땅이 기름지니
승군(僧軍) 산척(山尺) 백여인을 얻어 둔전경종(屯田耕種)하여 군량에 충당하고
화약총포를 얻어 주야로 조련하면 정군(精軍)을 얻을 수 있으니
농자(農資)를 주어 파견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신충원은 곧 사람을 모아 축성을 하였으니 선조 27년 10월의 일이다.
용장에게 수백명을 주어 지킨다면 대병(大兵)이 쳐들어 온데도 전일 같이 유린당하지 않을 것이다.
신충원이 성을 쌓고 난 후 죽령에도 축성케 하면
좋은 성과를 얻을 것 같다는 상계(上啓)가 있었으나 물력이 부족하여 시작하지 못했다.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징천인(徵賤人)이 축성의 거역(巨役)을 마쳤다고 포상하자고 건의하여
선조의 윤허를 받았다.
논의뿐이던 설관이 수문장에 의하여 완공되자
요새방어를 위하여 용장의 배치 건의가 있었고
비변사에서는 경상좌도에서 방어를 맡으라는 등의 논의가 계속되었다.
선조 30년(1597) 2월 신충원이 파수관(把守官)으로 임명되어
응암의 일자성(一字城)을 쌓고 가운데 문을 세워 고개 밑을 내려다보게 하는 축성이 끝났다.
신충원은 훈련원 주부(主簿)로 승진하고
조령은 중요 관방(關防)으로 방어책임이 분담되었으나
임란이 끝나자 조령 수어(守禦)에도 관심이 없다가
인조(仁祖) 16년 왜구의 동란이 심상치 않아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조령 등 남관요충(南關要衝)의 수호계책이 논의된 적이 있다.
축성공사는 문경현감 이중창과 영비(營裨) 손명대에 의하여
수마석(水磨石)과 잡석소편(雜石小片)으로 쌓아 가자(加資)되었다.
그러나 숙종 38년 5월에 축성상태가 부실하여 무너졌다는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여
현감과 영비는 삭탈 당하고 논죄(論罪)됐었다.
그 규모는 기록에 따라 다르나 남북 18리 18,509보인가하면,
남북 8리에 둘레 18,509보로도 기록되고 있다.
성이 3곳의 골짜기를 막고 있는데
하나는 고개 정상에 있어 충청, 경상 두 도의 경계를 이루며 조령관(鳥嶺關)이라고 하고,
하나는 응암에 있는데 신충원(辛忠元)이 쌓은 옛 성으로서 조동문(鳥東門)이라 하며,
하나는 초곡(草谷)에 있는데 주흘관(主屹關)이라 한다.
위의 세 곳은 모두 홍예문이 있으며 대로를 통하도록 되어 있다.
성내(城內)에서는 여러 갈래의 개천이 있고 항상 맑은 물이 흘러간다.
제1, 2, 3관문은 양쪽 산골짜기에 위치하고 있다.
관문 좌우의 성벽은 능선을 따라 우회하며
높이 솟은 봉우리 6부 능선쯤에서 끝났다가 다음 골짜기로 이어져 있다.
설진(設鎭)
주흘관에 있는 조령편람(鳥嶺便覽) 정묘(丁卯) 1927년 9월에
정규원 문경군수가 지은 현판에 의하면 선조 5년에 설진하여 570여명을 배치하였다고 하나
선조실록이나 다른 기록에서는 전혀 설진 기록이 없다.
그러나 조령편람을 개첨한 것이 일제강점기이고 원귀 3년(元龜三年)이라는 일본의 연호가 있다.
이는 선조 5년부터 설진한 천험의 요새가 임란에 쉽사리 방어치 못했음을 강조하여
조선의 무방비와 일본의 전공을 자랑하기 위한 가증스러운 기록으로 생각된다.
문경현지에 의하면 영조 28년(1752)에 설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성(修城)
축성 후 3년이 지난
1712년(숙종38) 5월에 서종태의 보고에 의하며
수마석(水磨石)과 잡석(雜石)으로 쌓아 성의 과반이 무너졌음을 알 수 있다.
영남어사(嶺南御使) 여광주에 의하여 수보(修補) 논의가 제기되고
국가존망이 달린 막중한 곳이라
경성(京城)의 수보규칙(修補之規)에 따르자고 진언되나 시행하지 못했다.
주흘관의 향우측(向右側) 성벽의 각기(刻記)에 의하면 별장 이인성이 1721년에 개축했다.
그 아래의 각기에는 도석수(都石手) 송성원, 이영우, 강두정 등이 있으니
앞의 성벽 각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아 개축 시 또는 축성할 때 기여한 도석수로 짐작이 된다.
주흘관 중수기에 의하면 1752년(영조28), 1772년(영조48), 1840년(헌종6)에 중수한 기록이 있다.
주흘관의 향우측 성황사(城隍祠) 부근의 각기는
무진년(戊辰, 1748 영조24·1808 순조8) 3월에 별장(別將) 오해림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주흘관 향좌측 성벽 각기에서는 1880년(고종17) 별장 심영식 등의 개축사항을 알 수 있으며,
주흘관 향우측 성벽 각기로 1886년(고종23)에도 별장 김순기 등이 개축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성벽에 새긴 몇 자의 글이라 개축한 규모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 아쉽다.
박성호는 1880년에는 감역(監役)으로
1886년에는 감관(監官)으로 수성(修城)에 참여하였다.
그후 1923년~1926년 사이에도 제1관문이 수선되었으며
경진년(庚辰, 1940)에도 제1관문을 중수한 바 있으나
조동문 및 조령관의 수성기록은 찾을 수 없다.
조령편람에 의하면 2, 3관문은 1907년 의병(義兵)의 토벌대(討伐隊)에 의하여 훼손되었고,
제1관문인 주흘관만이 여러 차례의 보수로 옛 모습을 현재까지 유지하고 있다.
문경새재와 산신령
조선 태종 때 처음으로 조령의 길을 개척할 때의 일이다.
문경현감이 긴급히 조정에 치계(馳啓)하여야 할 중대 안건이 있었다.
현감은 요성 역졸 중에 신체가 건강한 역졸을 골라서
조정에 상계(上啓) 할 장계를 가지고 급히 다음 역까지 체송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현감의 명령을 받은 역졸은 다음 역을 향해 문경새재를 넘어가는데
새재의 중간지점에 이르렀을 때 호환(虎患)을 당하였다.
문경현감은 체송간 역졸이 호환 당한 줄도 모르고 조정에 상계하였으니
그 비답만 내릴 줄 알고 기다리고 있던 차
조정에서는 문경현감에게 관계사건의 전말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엄명이 내렸다.
문경현감은 깜짝 놀라 요성역으로 가서 체송한 역졸을 호출하였더니
그 역졸은 지금까지 귀임하지 않고 행방불명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안 현감은 즉시 그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고 호령하고
그 역졸의 행방을 탐색하기 위해 문경새재 일대를 수색한 결과
호랑이가 먹다 남은 신체 일부와 행장이 발견되었다.
현감은 또 다시 지연된 사유와 아울러 조정에 사건의 경위를 상보(上報)했다.
이 장계를 받은 태종은 대노하여 즉시
봉명사(奉命使)를 차원(差員)하여 문경새재 산신령을 잡아오라는 엄명을 내리셨다.
봉명사는 주야배도(晝夜倍道)하여 문경새재에 도착하여
산신령을 포착하려고 하나 산신령을 잡을 묘안이 나지 않았다.
궁여일책으로 새재 산신사(山神祠)에 제문을 지어 치제(致祭)한 후
제문을 불사르고 혜국사에 머무르면서 하회(下廻)를 기다렸다.
그날 밤 만월로 월광이 교교하여 잠도 못 이루고 전전반측(轉轉反側)하고 있는데
삼경쯤 되어 천지가 진동하는 듯한 호랑이 울부짖음이 일어나더니 잠잠해진다.
그 이튿날 새재 산신사 앞마당에 여산대호(如山大虎)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봉명사는 그 호랑이를 박피하여 태종대왕께 호피를 바치고 사실을 상주(上奏)하였다.
그후부터 문경새재에는 호환이 사라졌다.
그 사건이 있은 이후 전진공(錢珍公 : 聞慶錢氏 2世祖)이 혜국사에 유숙하여 있는데
그의 꿈에 새재 산신령이 현몽하기를
'나는 새재 산신령이요 나라에 득제하여 아직 면죄를 못 받았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나라에 상소(上疏)하여 억울한 죄명을 씻어줄 수 없겠는가?'하고 간청했다.
그는 쾌락(快諾)하고 즉시 새재 산신령에 관한 사죄상소를 올렸더니
태종께서 친히 비답(批答)을 내리시어 새재 산신령의 죄를 사(赦)하였다는 전설이 전한다.
달성판관의 명판결
옛날에는 신임사또가 임명되면 육방관속이 그 본가까지 모시고 왔었다.
어느 시대 서울 사는 가난한 선비가 과거에 급제했고
얼마 후 달성 판관으로 임명된지라 달성의 육방관속은 관례대로 사또를 모시러 갔다.
신임 사또가 인물이 어떠하며 성격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한마음에
급히 사또 집을 물어 찾아가니 기대와는 딴판으로
사또의 키는 5척도 못되는 단구요
거기다 얼굴까지 빡빡 얽었고
나이도 겨우 스물이 넘을락 말락하는 애송이로 도무지 볼품이 없었다.
육방관속들은 별 것 아니구나 속으로 만만히 보며 함께 내려오는데
문경새재에서 쉬어가게 되었다.
그때 찢어진 갓을 쓰고 남루한 옷차림의 어린 상주가
사또에게 울면서 딱한 사정을 하소연하였다.
내용인즉 가난한 살림에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비용을 마련키 위해
상주의 몸인데도 닭 다섯 마리를 팔러 장에 나왔다.
평생 물건을 팔러 시장에 나온 것은 처음이라 어떻게 파는지를 몰라 어리둥절해 있으려니
한 장수가 가까이 와 자기가 맡아 있다가 팔아주겠다면서
상주의 닭 다섯 마리를 자기 닭장 속에 집어넣었다.
한나절을 지나 그 닭 장수에게 맡긴 닭을 달라니
맡은 일조차 없다고 잡아떼 본관사또에 이 사실을 알리고
닭을 찾아 달라했더니 "이놈 네 닭을 내가 어찌 안단 말이야" 고
호통만 칠 뿐 찾아줄 생각을 않는다는 것이다.
얘기를 다 듣고 난 달성판관은 곧 사령을 보내 닭 장사를 잡아오게 했다.
상주에게 자기 닭을 찾아라 하니 여러 마리 중에서 하나 하나 골라낸다.
사또가 먼저 닭 장수에게 물었다. "이놈 저 닭이 정녕 네 놈 것이 이라면
저 닭에게 아침에 뭘 먹였느냐" 닭 장수는 쌀, 보리 등 온갖 것을 주어 섬기며 횡설수설한다.
상주에게 다시 물으니 아무 것도 먹일만한 것이 없어
집에 있는 수수 한줌을 먹였다는 대답이다.
다섯 마리 중 한 마리를 잡으니 과연 수수가 나왔다.
닭 장수는 꼼짝못하고 백배 사죄한 후
그를 얼러 닭 값을 열배나 물게 하고
문경 본관사또에게 5백냥을 빌어 상주에게 장례비용으로 쓰도록 마련해 주었다.
교묘히 사건의 곡절을 가려내는 판관의 기질을 본
육방관속들은 혀를 내둘렀고 경멸이 여겼던 것을 뉘우쳤다.
달성판관이 부임한 후 여러 달이 지나도
문경사또에게 빌린 돈 5백냥을 갚지 않자
문경사또가 사람을 보내 돈을 갚으라고 독촉했다.
달성판관은 심부름 온 사람을 불러 "돈을 벌써 갚았는데
네 고을사또가 그렇게 정신이 없으시냐"고 되려 나무란다.
심부름꾼이 영문을 몰라 의아해하자
사또에게 돌아가 대전통편 몇장 몇조를 보면 알 것이라 이르도록 했다.
대전통편 그 장은 본래 자기 고을에서 일어난 사건을 본관사또가 처리 못했을 때는
사또가 벌금을 5백냥을 물도록 규정한 것이다.
달성판관은 그것을 이용, 5백냥을 빌린다고 받아
불쌍한 상주에게 도움을 베풀고 똑똑치 못한 사또를 그 나름대로 징벌한 것이다.
새재와 신립장군
신립 장군은 1546년에 태어나
자는 입지(立之)이고 시호는 충장(忠壯)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며 생원(生員) 화국(華國)의 아들로 2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도총 도사 경력 진주판관을 거쳐 은성부사가 됐다.
육진을 괴롭힌 니탕개를 두만강 건너 소굴까지 가서 소탕하고
함경북도 병사로 승진했으며 니탕개를 잡아죽이는 등 전공이 혁혁하여
평안병사를 거쳐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임란이 일어나자 삼도도순변사로 임명되어
선조가 친히 검을 하사하며 격려하였다.
같이 간 김여물이 조령에 진지를 구축하고자 건의했으나
적이 이미 고개 밑에 당도하였으니 고개에서 부딪치면 위험하고
우리 병정은 아무 훈련 없는 장정들이라
사지(死地)에 갖다 놓지 않으면 용기를 내지 않을 것으로 알고
천험의 요새인 새재를 버리고 달천(達川)에 배수진을 쳐서
장열한 전사를 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임란을 당하여 영남의 패보가 서울에 도달하자 조정에서는 대경실색하였다.
선조대왕께서는 신립 장군으로 하여금 모병 대적하게 하고
일방 순변사 이일 장군을 상주에 급파하여 방어케 하였다.
대치중인 왜장 소서행장은 임진 4월 24일 상주를 포위 공격하자
중과부적으로 이 장군은 대패하여 문경 조령으로 진지를 옮기게 되었다.
이때 중도인 당교에서 남하하는 신 장군과 만나 대패한 사실을 전하고
신 장군과 함께 문경으로 회군하여 방어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제장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때 회의를 주제하는 신 장군 앞에 한 도승이 나타나
천험의 요새인 조령에 포진반격을 가하면 왜적을 격퇴할 수 있다고 간곡히 진언하였다.
그러나 신 장군이 인솔한 병사는 충청도 태생으로 산악전에 익숙하지 않을 뿐더러
사기가 저하되어 평야인 충청도 지대에서 적을 격퇴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주장이 많으므로
신 장군도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유예미결하고 있었다.
그 때에 신 장군의 소식에 장군을 사모하다가
함원자결한 처녀의 원귀가 장군앞에 나타나 "신 장군은 대명을 받아
왜적을 격멸하는데 있어 어찌 이와 같이 협착한 새재에 포진하여
후세의 조소거리가 되게 하시나이까
충청도 달천의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면 크게 대승하리라" 말하니
새재에서 싸울 마음이 없던 충청도 출신 장병들이 떠들고 일어나는지라
신 장군은 요사스런 원귀의 말을 믿고
부장 김여물 등은 회군의 불가함을 극간하고
조령방어책을 주장하였으나
신 장군은 그 계략을 묵살하고 충주 탄금대에 포진하였다.
왜적과 대진한 신 장군과 전 장병은 순사 대패하고 말았으니
조령을 사수하였던들 임란의 양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주흘산 [主屹山]
높이 1,106m. 소백산맥에 솟아 있다.
서쪽으로 조령천을 사이에 두고 조령산(鳥嶺山:1,017m)과 마주보며,
포암산(布巖山:962m)·신선봉(967m)·대미산(1,115m) 등과 함께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를 이룬다.
서쪽과 남서쪽 사면을 제외하면 대체로 급경사를 이루며,
깎아지른 듯한 거대한 암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동쪽과 서쪽에서 발원하는 물은 신북천과 조령천으로 각각 흘러들며,
높이 10m 정도 되는 여궁폭포·파랑폭포가 있다.
남서쪽 기슭에는 통일신라시대인 846년(문성왕 8)에 보조국사가 창건했으며,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했다는 혜국사(惠國寺)가 있다.
과거에는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를 이루기도 했으며,
조령산과 주흘산 가운데의 계곡 길을 따라
문경관문(사적 147호)이 세워졌는데, 제2관문은 1594년(선조 27)에,
제1·3관문은 1708년(숙종 34)에 세워졌다.
이곳은 영남지방과 중부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제2·3관문은 현재 복원되어 관광명소와 산책로로 알려져 있으며,
조령제1관문-혜국사-샘터-정상-제2관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산의 서쪽 산록에 도로가 나 있어서 문경에서 조령까지 버스가 운행된다.
조령산 [鳥嶺山]
높이 1,017m. 소백산맥에 솟아 있으며,
주위에는 신선봉(神仙峯:967m)·주흘산(主屹山:1,106m) 등이 있다.
조령산과 신선봉의 안부에 해당하는 조령은 문경새재·새재라고도 부른다.
남쪽과 북쪽 산록에 있는 이화령(梨花嶺:548m)·소조령을 비롯하여 유명한 고개가 많다.
특히 문경새재라는 이름은 과거부터 영남사람들이 이 고개를 넘어
서울로 가는 주요관문이 되었던 것에서 비롯된다.
동쪽에 조령천을 따라 조령 제1·2·3 관문이 있다.
또한 이곳에 박달나무가 많아 박달재라고도 불렀으며,
이곳 박달나무로 만든 홍두깨가 전국으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산정부는 평탄하나, 사방이 비교적 급경사이다.
특히 조령산을 중심으로
북쪽은 월악산·문수봉·소백산 등으로 이어지는 고봉이 연속되며,
남쪽은 속리산으로 이어져 차츰 낮아진다.
동서사면에는 조령천·쌍천의 지류가 각각 발원한다.
이화령-능선안부-샘터-정상-안부-신풍리,
정상-안부-한섬지기-수옥정폭포로 이어지는 등산 코스가 있다.
조령산을 중앙에 두고 도로가 둘러 나 있다.
주흘산(主屹山) 기행문 (145) 예당 류재호. 2011/11/9
오동(梧桐) 잎이 지고나면 단풍이든다. 관풍(觀楓).즉 단풍 놀이가 시작된다.
선조들은 오동잎 지는소리로 가을 을 알았다.
오동잎이 가장 먼저 지기 때문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서당 김응림의 가을감회(書堂次金應霖秋懷)' 라는 시에
"오동 나무에 가을이 들어있네(秋入梧桐)" 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조선 중기 최고의 시인으로 꼽혔지만
평생 야인으로 마쳤던 석주(石洲) 권필(權畢.1569ㅡ1612)의 '송도가는
의상인을 보내며(送義上人之松都二首)' 라는 시에
"고사에서 경서 뒤적이는데
가을이 또 다하니.만산에 붉은단풍잎 절로 저녁 노을이구나
(古寺飜 經秋又盡. 萬山紅葉自黃昏)" 라는 구절이있다.
모든산에 단풍이 저녁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는 절창이다.
이번 산행은 산사랑 가족과 함께 동행하지 못해 아쉬움이 많으나
지난해 가을 주흘산에 올랐던 기억으로 대신 하고자 하오니 많은 이해바랍니다.
문경 새재길은 조선시대 영남 대로이므로 나라의 출입문이다.
영남대로는 조선시대 부산 동래 읍성에서 서울 숭례문에 이르는 길이다.
보통 걸어서 보름정도 걸렸다. 950 여리(380KM) 길에 도중 거치는 읍이 68개나됐다.
조선시대 영남에서 한양으로 갈때 넘는 고개는 문경새재만 있는것이 아니다.
충북 단양과 경북 풍기를 잇는 죽령(696M)과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잇는 추풍령(221M)도 있었다.
그러나 과거길 선비들은 반드시 문경 새재를 넘어 한양을 오고갔다.
죽령을 넘으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 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때문에
오죽하면 호남 선비들조차 이곳을 통해 한양으로 갔다고한다.
문경(聞慶)은 글자 뜻 그대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게 된다는 믿음을 줬던것이다.
문경 새재는 영남대로가 주흘산과 조령산을 만나 이뤄진 고개길로
한양에서 영남으로 내려갈때 좌청룡 주흘산. 우백호 조령산 사이로 난길이다.
새재 등마루는 조선시대 영남 대로중에서 가장높고 험한곳으로
나는 새도 넘기 힘들다고 할만큼 지형이 험해
예로부터 국가 방위의 요충지로 인식되었던 곳이기도하다.
이 하늘재가 잇는 문경쪽 마을이름은 관음리요.
충주쪽 마을은 미륵리다.
관음은 자비와 소망의 보살이요.
미륵은 미래 세상을 구원하러 온다 했으니
하늘재는 그 현세와 미래의 어느사이다.
옛날 과객들은 청운의 꿈을품고
개나리 봇찜지고 이 고개를 넘었지만
우리는 배낭메고 느긋하고 호젖하게 고개를 넘는다.
주위의 주흘산.백화산.희양산.의 봉우리들이 붉은 단풍으로 아주멋진 풍경이다.
다산 정약용의 "겨울날 서울가는길에 새재를 넘으며"에서
새재의 험한산길 끝이 없는길/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시내도 언덕도 하얗게 얼었는데/
눈덮힌 칡넝쿨엔 마른 잎 붙어있네/
마침내 똑바로 새재를 벗어나니/
서울쪽 하늘엔 초승달이 걸렸네/
주흘산(主屹山1.106M)은
예로부터 나라의 기둥이 되는 큰산(中嶽)으로
우러러 매년 조정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 제사를 올리던
신령 스러운 영산(靈山)으로 받들어왔다.
문경의 진산(鎭山)이기도한 주흘산은
'우두머리 의연한산' 이란 한자 뜻 그대로 문경 새재의 주산이다.
제 1관문인 주흘관에서 출발하여 여궁폭포(女宮瀑布)와
천년고찰 혜국사를 지나 안적암을 거쳐 1075봉을 오른후 정상으로 오른다.
곱게 물든 단풍과 푸른 하늘이 산행을 재촉하는 계절임에 틀림없다.
새록새록 로맨스를 꿈꾸게 하는 계절. 쉬엄쉬엄 오르며 하늘을 쳐다본다.
도시에서 보는 하늘은 조각난 자투리 하늘이고
산에올라 하늘을 보면 넓고 높은 가을 하늘의 풍치가
가슴 벅차게 느껴져 청명한 가을 하늘의 운치를 느낀다.
바위틈. 척박한 곳에 붙박이처럼 박혀있는 애기 단풍을 보면
호기심 보다는 경외(敬畏)심으로 바라본다.
2시간 30분만에 정상에 오르니 넓은 평지이며 사방이 탁 트여 조망이 일품이다.
서남쪽으로는 조령산.
동남쪽으로는 문경시가 한눈에 들어오며
멀리 포암산(布岩山) 대미산(大美山) 운달산(雲達山) 등 고산 준령과 황금빛 들판이 출렁인다.
문화 유적으로는 천년고찰 혜국사(惠國寺)
(신라 문성왕 8년(848년)에 최징 보국 조사가 창건하여 법흥사라 칭했다.
그러나 고려말 공민왕이 거란족의 침입을 피해
이곳에서 지낸후 은혜를 많이 입었다하여 혜국사로 개칭했다.) 가 있으며
자연 유적으로는 여궁폭포.자연석탑.용이 승천했다는 용추폭포.어류동.1.2.3.관이있다.
빠른 속도에 떠밀려 살아가는 도시의 삶.
그러나 오늘은 아주 느긋하게 옛 사람들과 교유(交遊) 하는듯한 시간으로 즐겁고 행복한 산행 이었다.
주흘산 산행기 / 한국의산라/11.11.14/김석환
일 시 : 2011년 11월 12일
행 선 지 : 문경 주흘산의 마패봉(927), 부봉(917)
산행코스 : 문경새재주차장 - 1관문 - 2관문 - 3관문- 마패봉(마역봉) -
부봉 - 2관문 -1관문 - 주차장 (약 16.5km)
산행시간 : 오전 9시 50분~오후 4시 30분 (7시간 산행)
7시에 교대역에 모여 주흘산을 향해 출발했다.
오늘은 전국 건축사 등산 동호회 행사로 주흘산 산행을 하는 날이다.
몇 주 전 오늘 산행에 참석 댓글을 올릴때부터 온통 회상에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그 구간이 바로 전에 걸었던 백두대간의 일부 구간이었기 때문이었다.
8시 5분 우리 일행이 탄 차가 호법 IC인근을 지날무렵 도로에 멈추듯 느리게 움직였다.
막바지 가을 정취를 느끼러 떠나는 사람들이 많은 듯 했다. 차창 성애를 닦아 밖을 보니
이미 갈무리가 끝난 밭이 고랑을 드러낸 채 텅 비어 있었다.
9시 45분 주흘산 주차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너른 주차장에 벌써 대형 버스가 많이 차 있었다.
앞으로 걸어가니 전국 각지에서 온 회원들이 주차장 언저리 등산로 입구 표지판 근처에 모여
분주히 행사 준비를 하고 있다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잠시 후 산행을 시작했다.
길 오른편에 식당과 기념품을 가게들이 열 지어 서 있었다.
그 안쪽으로 가다보니 다시 주차장이 보였다.
그 입구에 설치된 차단기 옆에 ‘한국의 아름다운 길’ 이라는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 산맥의 가장 큰 등즐기인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길은 많지 않았다.
영주에서 원주 쪽으로 연결되는 죽령이 가장 먼저 열렸고 미륵대원을 지나는 하늘재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가는 문경의 새재와 추풍령이 열렸는데
조선시대에는 새재가 가장 많이 이용되었다.
오늘 지나는 새재는 “새도 넘기 힘든 험한길” “새로 난 길”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새재를 이용하는 가장 빈번한 일은 과거 보러가는 길이었다.
그래서 새재와 그를 통과하는 곳곳에는
과거와 관계된 유적과 예기들이 적지 않게 전해지고 있다.
다시 안으로 걸어가다 보니 우측 길옆에 선비 상이 보였다.
옛날에 이곳을 지나던 선비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상징적으로 세워 둔 것 같았다.
그 앞에 조각 공원처럼 여러 부조상이 원형 마당을 둘러싸며 난간벽처럼 설치되어 있고
그 바깥쪽 벽면에 ‘선비’ 와 관계가 있는 좋은 글들이 새겨져 있었다.
그 중 앞쪽에 지봉 이수광(1553~1628) 선생의 글이 눈에 띠었다.
途 中
산길 접어드니 경치는 시 속의 그림이요
냇물 소리는 악보에 없는 거문고 가락이라
길은 멀어 가도가도 끝이 없는데
해는 멀리 서산마루에 걸려 있네
다시 안쪽으로 가니 우측에 신길원 현감 충려비와 옛길 박물관이 보였는데
옛길 박물관은 규모가 너무 커서
오히려 옛길의 정취를 떨어뜨리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조금 더 나아가니 제1관 주흘관이 보였다.
그 좌우로 성벽처럼 둘러쳐진 지형을 이어 성벽을 막아서
방어진지를 구축해 놓은 모습이었다.
성문 앞으로 다가가니 좌측에 공성 장비가 보였다.
성을 지키려는 자와 성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자의 치열한 공방전이 연상되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뒤돌아보니 양옆으로 오르는 계단이 놓여 있었다.
새재는 조선시대 한양이 도읍이 된 후로 안동 등 남쪽 지방에서
한양 등지로 원활히 연결되게 하기 위해 길을 찾아 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그 길이 결국 적군의 침입로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 후 이 곳에는 제1관문 주흘관, 제2관문인 조곡관,
그리고 제 3관문인 조령관 3개의 관문을 설치했는데
백두대간의 험준한 지형이 곧 성벽 역할을 하고 있다.
그리고 겹겹히 놓인 관문은 새재의 통행을 통제하는 기능을 갖기도 한다.
그런데 전쟁의 대상이 없는 평시에는 공허하게 느껴지게 한다.
다시 안쪽 길을 걷다보니 좌측 개울 건너에 왕건 촬영 세트장이 보였다.
몇 해 전 방영되었던 드라마 ‘왕건’을 촬영하며 지은 대규모 세트장인데
그 후 관광지화 된 곳이다.
앞쪽에는 민가들이 있고 뒤쪽으로는 궁궐이 배치되어 있었다.
인근을 지날 때마다 그 광고판을 보곤 했는데 직접 와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 곳을 지나 길이 좌측으로 에둘러 꺽여 지나가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어 들어갔다.
한동안 호젓한 흙길이 이어졌다.
좌측에는 맑은 개울이 계속해서 흐르고 있었다.
올려보이는 주변의 큰 산세가 바로 백두대간이다.
그러한 대간이나 정맥 들은 물줄기로 나뉘지 않고 이어진 곳이기에
옆에 흐르는 물줄기도 대간의 이쪽 저쪽으로
흐름의 골이 다르게 형성되어 있기 마련이었다.
즉 대간 줄기에서 문경 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물이 되고
산마루 너머로 고이는 물은 한강물이 된다.
문경세대’로 불리는 이곳은 문경에서 충주 쪽으로
마치 흡입기처럼 깊은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애초에는 그 안으로 좌우 지형의 형세에 따라 난 길이
마치 미로처럼 나 있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미로를 더듬어가듯 안으로 들어서 가면
큰 대간 산줄기를 넘어설 수 있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반듯한 흙길로 닦여져 있다.
이 길은 ‘과거옛길’로 불리기도 한다.
바로 영남지역에서 한양으로 청운의 뜻을 품고
과거를 보러 다녔던 길이기도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길은 조선 시대 체취가 물씬 느껴지는 곳이다.
한양이 생기기 전에는 이곳으로 이동하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에
이런 길의 필요성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아름아름 알고 오가는 인근 주민들은 있었겠지만
멀리서부터 찾아와 이곳으로 지나가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양에 볼 일이 생기면서 통행량이 많아졌을 것이다.
2관문을 향해 걸으며 전에 백두대간을 지났을 때
급히 꺾여가던 구간 지도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희양산을 지난 후 대간 마루금이 책이 접히듯 걲여지는 지점이었다.
대간을 시작한 후 중간을 조금 못 미쳐 지날 때인데,
횟수를 거듭할수록 심리적으로 점차 지리한 느낌이 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간 종주길 에서는 늘 완주의 종착지를 염두에 둔 채 걷게 되고
한시바삐 도중의 구간들을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그리고 이처럼 목적지를 향해 뻗쳐가지 않고 횡보를 하며
늘어지는 구간을 가면서는 심리적인 부담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속리산을 지나고부터 대간 마루금은 우측으로 태백산까지
한동안 갈지자걸음으로 꺾여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안을 향해 걷다보니
우측에 돌담이 둘러쳐진 건물이 보였다.
옆에 표지를 보니 조령원터였다.
그것은 조선시대 때 출장하는 관리들에게
숙식의 편의를 위해 세워 놓은 것이었다.
대문에서 보니 돌담 안에 건물이 한 채 보였다.
그 좌우에도 더 있었던 듯 초석이 보였다.
그 돌담 어귀에 낙엽이 많이 쌓여 있었다.
옆에 있던 여자분 둘이 땅에 시든 낙엽을 보며 “얼마나 붉었을까” 라고 말했다.
어느새 진 단풍잎마저 색이 갈빛으로 변한만큼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다.
산을 올려보니 대부분 낙엽이 져서 앙상한 모습이었다.
다시 안쪽으로 가는 길옆에 맑은 소가 보였다.
그 곳에 송사리 떼가 스몰 거렸다.
옆에 서보고 계시던 분이 “한 사발 건져서 끓이면 좋겠다.” 고 했다.
좌측에 세워진 주막을 들여다보고
다시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 보니 우측에 교귀정이 보였다.
그 곳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임무를 인계인수하던 곳이라고 쓰여 있었다.
문경 새재
2011. 11. 12 김석환
걷다보면
우리 강산의 살가운 체취와
이 길을 지나던 사람들의 감회가
내 몸에 절로 베어든다.
그리움과 탄식이 엉겨
켜켜이 쌓여온 역사의 여운...
청운의 뜻을 안고
설렘의 발걸음을 걷던 과거객이나
화들짝한 도임 행차를 하던
경상 감사 부임의 포부도
길 어귀 한편에 아로 새져져 있다.
험지 더딘 발걸음에
먼 하늘로 솟구친 작은 새가
큰 마루 고갯길을 아득히 넘어간다.
그 곳을 지나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산길이 아닌 평평하고 완만한 길인데도 2관문이 금세 나타나 보이지 않았다.
길 우측에 홈통처럼 나무속을 파내고 물길을 만들어 둔 것이 보였다.
나무와 나무 이음부에는 더 통통한 나무를 물확처럼 파내어
물이 고여 흐르게 되어 있는데 그 곳으로 물이 생기 있게 괄괄 넘쳐 흐르고 있었다.
다시 조금 더 올라가니 우축에 폭포가 보였다.
아까 지난 나무통 물길은 바로 그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흐르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앞쪽에 2관문이 보였다.
그 앞은 개울을 건너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다리를 건너가려다 뒷걸음질을 치며 적당한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했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니 너른 공터에서
보이스카우트 복장을 한 많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 같은 학생들에게 ‘과거길’로 불리는 이곳이 좋은 체험학습 장소가 될 것 같았다.
다시 안쪽으로 걷다보니 녹음기를 통해 ‘문경새재 아리랑’ 가락이 들렸다.
문경 아리랑
작자미상
문경 새재 물박달 나무
홍두께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께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아기 손길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문경 새재 넘어를 갈 재
굽이야 굽이야 눈물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조금 더 가니 우측에 바위굴을 알리는 화살표를 새겨놓은 바위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 안내표지에 그 바위굴에 얽힌 설화가 쓰여 있었다.
옛날 갑작스런 소낙비로 이 바위굴에 들어와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아비 없는 자식이라 놀림을 받자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
깊은 산골 주막에서 우연히 자신의 사연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만나
아버지임을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 구도에서 이효석 선생이 쓴 '메밀꽃 필 무렵'이 연상되었다.
다시 가다 우측으로 꺽여지는 지점에 ‘이진터’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그 곳은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이 18,500명의 왜군을 이끌고
이곳에 진을 치고 정탐할 때 대치하던 신립장군의 군대가 충주 달천으로 가
배수진을 치면서 허수아비 초병을 세워 두었는데
그 허수아비에 까마귀가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보고
위장임을 눈치챈 왜군이 새재를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천혜의 요새 조건을 갖춘 곳에서 지키는 것이
전투에 훨씬 유리했을 것을 미리 적에게 내주는 꼴이 되고 만 것이어서
그 때를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한다.
만약 이곳에서 적을 막았더라면 조선의 역사가 크게 바뀌었을 것이라는 말도 있다.
다시 조금 가다보니 우측에 산장 같은 분위기의 동화원이 보였다.
그 앞을 지나는데, 전에 친환경 아카데미 수업에 함께참가했던
이보경 건축사가 안에서 나오다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했다.
주변을 보니 경기도 소속의 그 동료 회원들이 함께 가고 있었다.
인사를 하고 3관문을 향해 앞서 걷다보니 과거 급제 길이 나왔다.
거기서 좌측의 옛 길과 나뉘어 있어서 좌측 옛길로 들어서니
잠시 후 낙동강 발원지 표지가 보였다.
대개 태백의 황지 연못이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도 그 근원지 가운데 하나여서 그리 표시한 듯 했다.
완만히 경사진 길을 더 올라가다 보니 ‘소원성취탑’이 보였다.
그 돌탑 둘레에는 지나던 사람들이 소원을 빈 듯 소원지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옛날 과거길 에 오른 선비들도 저 소원탑 돌틈에 소원지를 끼워두고 지났을지도 모른다.
그 옆 정자에서는 다른 일행들이 점심을 먹으며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그 곳을 지나가다 땀이 많이 나서 이른 아침 쌀쌀한 기운에
껴입고 나왔던 옷을 벗어 배낭에 넣으니 배낭이 더욱 불룩해졌다.
다시 올라가다 아까 갈라지던 길이 다시 합쳐진 곳으로 나오니
금의환양길’이라는 표지가 놓여 있었다.
거기서 조금 가다 보니 3관문이 보였다.
대개 관문은 양옆 협곡을 막아서듯 세워지는데
여기서는 백두대간 능선에 세워져 있는데
가장 앞에 놓인 1관문부터 이곳까지는 6.5km 정도나 되었다.
1관문부터 3관문까지 과거 임진왜란때 적이 쳐들어온 길목을
철저히 차단 할 수 있게 해 논 것이었다.
적에게 당한 경험이 이토록 집요함을 낳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관문은 그 후 전쟁을 위해 쓰여지지 않았다.
현대전에서 그 같은 방벽은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3관문 앞에서 스케치를 하며 백두대간 종주때 느꼈던 감회를 잠시 회상했다.
깜깜한 밤에 조령산 산행을 시작해 동이 튼 후 아침을 먹고 이곳으로 내려왔었다.
그리고 대간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주흘산을 거쳐 가기 위해 일행보다 앞서 진행했었다.
그 때 대간 길을 지나오다 이곳에 이르러 읍성 어귀 같은 분위기를 느꼈었다.
그리고 호기심에 충주 쪽으로 성문을 들어서니
그 쪽에도 주막시설 등이 안내되어 있었다.
잠시 후 우측의 마패봉을 향해 올랐다. 거기서부터 마패봉까지의 거리는 0.9km였다.
이 길이 바로 백두대간 마루금이다. 길 입구에 대간 길을 표시하는 리본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그 길에 접어들며 오랜만에 백두대간을 다시 걷는 감회가 일었다.
길옆에는 3관문부터 이어지는 성벽이 뿌리만 남은 채 놓여 있었다.
그 성벽은 조선시대 이전, 삼국시대 때 축성된 것일 수도 있다.
이 마루금이 바로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선이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뿌리부분이 당시 고구려 영토 쪽에
다듬어진 것으로 보아서 신라가 쌓았을 것 같았다.
잠시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3관문 건너에
조령산의 윤곽이 안개 속에 희뿌옇게 보였다.
급히 경사진 길을 올라 가다보니 앞서가던 다른 일행이 보였다.
그들이 길을 비켜주어 앞서 걷게 되었다. 잠시 후 마패봉에 올랐다.
표지석에는 마역봉(927)으로 되어 있었다.
잠시 후 지나쳤던 일행이 뒤따라 올라와 서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리고 그 일행이 갖고 온 동동주를 나눠 마셨다.
그 중 한분이 북한산을 좋아한다고 해서 반갑게 예기를 나눴다.
다시 이정표를 보며 진행할 방향을 찾았다.
하늘재 방향으로 가다 부봉삼거리에서 2관문으로 가면 될 것 같아 그 곳을 목표로 걸었다.
마역봉에서부터 부봉삼거리까지 거리는 4km였다.
전에 백두대간 종주때 지났던 길이지만 낯이 설었다.
아마 전 구간을 다시 걷는다 해도
눈에 익은 큰 산세와 지리를 제외하고는
그처럼 많은 곳이 낯설게 느껴질 것 같았다.
어두운 밤길을 걷기도 하고 비가 내릴 때 등 시야가 흐릴 때도 많았다.
대간 능선을 음미하듯 한동안 묵묵히 걸었다.
대간 마루금은 가장 높은 지대이지만
그 곳을 걷는 동안은 실감이 잘 나지 않게 되었다.
그저 길만을 하염없이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험준함이 느껴지곤 했다.
걸으면서 부봉까지 거리가 제법 멀게 느껴졌다.
걷다보니 우측 멀리 부봉이 희뿌옇게 보였다.
지나는 길이 험한 편이라 바위를 로프를 잡고 오르내리며 지나는 곳도 있었다.
좀 더 가다보니 우측으로 부봉 연봉이 좀 더 가까이 보였다.
부봉이란 이름은 하늘에 떠 있듯 하다는 의미일 것 같은데
실제 지나며 보는 느낌이 그렇게 느껴졌다.
그 부봉은 제1봉부터 제6봉까지 6개의 봉우리가 연이어 놓여 있다.
지도를 보니 그 연봉을 거쳐 2관문쪽으로 내려가게 되어 있었다.
부봉삼거리에 닿았다.
그 곳은 바로 제1부봉을 오르는 중간 지점이다.
거기서 곧바로가는 길이 하늘재로 이어지는 대간 무루금이고
부봉 정상을 넘어 제2관문으로 나갈 수도 있는 지점이었다.
잠시 후 급경사진 길을 지나 제1부봉에 올랐다.
주변을 돌아보았지만 안개가 끼어 휠출하게 시야가 펼쳐지는 않았다.
이정표를 보니 2관문까지 길이 제법 멀었다.
연이너 2, 3, 4, 5봉을 지나갔디.
경사가 급하여 큰 바위를 로프를 잡고 오르락 거리는 곳이 많았다.
기암괴석 사이서 홀로 선 소나무와 멀리 배경으로 보이는
산세가 멋진 풍경을 이루는 모습도 보였다.
5봉에 올라 길을 가늠하니 6봉을 거치지 않고 2관문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2관문까지 도착하려면 아직도 시간이 제법 걸릴 것 같았다.
2관문쪽으로 가는 동안 맞은편 능선이 보였다.
지금 지나가는 능선과 그 능선이 함께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그처럼 위에서 주변을 조망하니 임진왜란 때
이곳에서 대치하던 형국이 떠올려졌다.
한동안 걷다보니 아래쪽에서 사람들 소리가 들렸다.
아까 지났던 새재길이 가까워진 듯 했다.
잠시 후 2관문에 도착해 그리로 들어서던 길을 따라 밖으로 나오다
다시 뒤돌아서 성문을 바라보며 올라올 때 하던 스케치를 좀 더 마무리 했다.
대구 회원 분들이 옆을 지나다 서로 인사를 나눴다.
나오면서 과거급제길 언저리서 만났던
경북 회장이 알려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식당 위치를 물어 보았다.
1관문 밖으로 내려오다 좌측에 있다고 했다.
식당까지 거리가 멀었다.
벌써 주변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1관문을 지나서 내려오다 보니 아까 올라갈 때 길가에서
모과 등을 팔고 계시던 할머니가 보였다.
하지만 자리에 펼쳐놓은 고구마 등이 그대로여서 별로 판 것 같지 않았다.
지나쳐 오다 다시 가서 고구마를 사고 식당을 찾아 들어섰다.
식당 정문으로 들어서려니 주인이 식사를 아직 안했으면 되로 들어가라고 했다.
알려준 대로 뒤로 가니 안쪽에도 다른 건물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서니 서울 회원들이 어디까지 갔다 왔냐며 어서 식사하라고 자리를 권했다.
빈 좌석에서 앉아 식사를 했다.
앞에 앉은 대구 회원 분들과 식탁위에 놓인 막걸리를 나눠 마셨다.
식사를 하고 나오다 보니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행운상에 당첨 되었다면 신종복 사무총장이 잘 포장된 선물을 주었다.
나는 “이게 왠일이냐“며 즐거운 기분으로 선물을 받았다.
연이어 당첨자가 호명될때마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들렸다.
5시 30분경 식당 밖으로 나오니 땅거미가 몰려오며 금새 어둑해졌다.
타고 온 차령에 올라보니 낯선 분들 4명이 타고 있었다.
이곳에 다른 차편으로 왔다
서울로 올라가는 차편의 편의를 얻게 된 것으로 여기며 인사를 했다.
차가 출발하려던 참에 박형규 대한 건축사 등산동호회 회장이 올라와
살갑게 배웅을 해 주었다.
올라오는 차 안에서 뒤에 타신 분들이 제주에서 올라오신 두 회원 부부라고 했다.
전국 행사로 모인 날에 그처럼 다른 지역 회원 분들과 동행한 것도 좋은 의미로 여겨졌다.
주말인데 걱정한 만큼 차가 막히지 않아서
9시경 출발지인 교대역에 무사히 도착해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20111112)
다음 산행은 내장산으로 많은 기대가된다.
| 깨달음(인회) | | 고향이 가까워서 문경새재는 자주가는데.. 낮익은 풍경이 좋습니다. 2011/12/26 08:32:53 | | | |
| | 이름없는풀뿌리 | | 새재가 고향이라니 부럽군요. 한양길이 죽령, 추풍령도 있지만 죽령은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이라하여 과거보는 선비는 반드시 새처럼 훨훨 날아올라 출세하는 새재령을 넘었다더군요. 감사합니다 2011/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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