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여행과산행길

북악과 인왕에서 내려다본 과거, 현재, 미래 (2012/09/15 무명곡)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17. 14:37
북악과 인왕에서 내려다본 과거, 현재, 미래 (1) 내사산을 향하여 내사산이라 함은 동측의 낙산(125m), 북측의 북악산(백악산, 342m) 서측의 인왕산(338m) 남측의 남산(목멱산, 262m)을 말함인데 오늘 중학 동창과 더불어 모처럼
혜화문-말바위-숙정문-북악-창의문-인왕산-돈의문(총8.615km) 을 탐방하며, 한양을 내려다보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생각해 보기로 하다. (2) 과거 혜화문에 도착하니 친구는 벌써 와 있다. 정확한 친구다. 그를 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머언 과거로 날아가 그 속의 까까머리 주인공이 된 느낌. 이끼 낀 성곽이 용케도 살아남아 왼쪽에 보이는 한양 땅을 내려다보면 길과 집과 인간이 개미처럼 꿈틀거리며 내가 마치 새가 된 느낌. 말바위에서 명패를 받아들고 단아한 숙정문을 지나 1.21소나무에 감탄하며 백악의 정상석을 밟으며 현재로 접어들다. 한양 인구변화 조선초 인구 : 10만명 조선말 인구 : 20만명 1910년 인구 : 28만명 1935년 인구 : 40만명 1941년 인구 : 111만명 1950년 인구 : 160만명 1959년 인구 : 200만명 1970년 인구 : 543만명 1988년 인구 :1,028만명 2018년 인구 : 977만명 세계 인구 나라별 TOP10(2018 기준) 10위 멕시코(멕시코시티) 1억3,100만 09위 러시어(머스까우) 1억4,400만 08위 방글라데시(다카) 1억6,700만 07위 나이지리아(아부자) 2억 06위 파키스탄(파키스탄) 2억100만 05위 브라질(브라질리아) 2억1,100만 04위 인도네시아(자카르타) 2억6,700만 03위 미국(워싱턴DC) 3억2,700만 02위 인도(뉴델리) 13억5,600만 01위 china(베이징) 14억1,600만 27위 대한민국(서울) 5,100만 20위 한반도 7,700만 (3) 현재 백악을 내려오니 성곽너머로 삼각산의 峰, 峰이 파도쳐 가며 과거의 기억이 물동그라미를 그리고 있다. 창의문을 지나 인왕을 오르는 오금이 모처럼의 산행으로 땡땡하게 당겨온다. 영등포를 접으며 화성 병점을 그래도 성공적으로 열었지만 항상 문제와 해결은 모색되어야하는 법. 병점을 가꾸며 미래를 엿본다. 계곡에 물이 모이듯 힘과 돈과 권력에 세상은 모인다. 세상이 멀어져 갈 때 힘과 돈과 권력도 멀어져 간다. 소식도 사라져 간다. 그러한 모형은 역사가 구상하였고 한번 만들어진 모듈은 쉽사리 부수어지지 않는다. 공자와 석가와 예수가 부수려했지만 오히려 계곡은 깊어지고 정상에 가려는 사람은 많아지고 정상은 단지 몇 사람에게만 자리를 내어 줄 뿐이다. (4) 미래 인왕을 오르는 길, 이 반도를 아우른 권력이 집중된 서슬 퍼런 기력 쎈 터전이 보이는 길에 벌개미취와 나팔꽃과 쑥부쟁이가 반겨준다. 인왕 정상에도 수많은 이들의 발길에 상처 난 정상석이 신음하고 있다. 누구도 미래를 알 수는 없지만 설계하려는 미래는 정상을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고 정상에 도전하려는 것이 아니고 남들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정상에 머물지 않고 내려오는 길 가의, 구절초가 핀 좋은 조망처, 그 곳이 바로 나의 미래임을 자각하며 09:00시 혜화문 출발, 돈의문 근처에 다다른 13:00시까지 4시간, 8Km의 서울 내사산의 백미인 북악, 인왕을 친구와 더불어 과거와 현재, 미래를 생각해 본 하루였다. 배달9209/개천5910/단기4345/서기2012/09/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덧붙임) 1. 혜화문에서 본 낙산방향 성곽 2. 혜화문 3. 사연많은 삼청각 4. 말바위 안내소 5. 숙정문 가는 길의 아름다움 6. 숙정문에서 7. 북악 정상 가는 길 8. 북측 삼각산의 웅자 9. 여기까지 도달한 그들의 무모함과 대담함. 10. 북악 정상가는 길과 정상의 모습 11. 정상에서 본 인왕산 방향 12. 내려오며 본 삼각산 방향 평창동 고급주택가 13. 창의문에서 14. 윤동주 시인의 길에서 15. 오르며 본 인왕의 아름다움 16. 이조와 현재의 권력이 집중된 저 곳 17. 정상조망(남측) 18. 정상조망(동측) 19. 정상조망(서측) 20. 정상조망(남서측) 21. 정상조망(북서측) 22. 내려가는 길 23. 내려가며 다시 본 권부의 核 24. 배초향, 유홍초, 좀작살의 향연 [참고] 북악산(北岳山)/ 342m 북악산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하고 있는 해발고도 342m의 산이다. 기반암은 화강암으로 북악(北岳),백악(白岳), 백악산(白岳山)이라고도 하며인왕 산, 낙산, 남산,북한산,관악산,용마산, 덕양산등과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 으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한 산으로 서울을 방위하는 경복궁 의 진산이다. 1395년(태조5년) 시축한 서울성곽(사적 제10호)의 기점으로서 18. 2km의 서울성곽은 북악산에서 낙산~남산~인와산의 능선을 따라 쌓았다. 정도전 이 성저(城底)를 측정한 뒤 천자문의 글자순서에 따라서 97구좌로 나누고 북악산 의 정상에서부터 각 구마다 순서대로 번호를 동족으로 붙여나가면서 97번째 글자 인 조(弔)자에서 다시 북악산에 이르도록 하였다.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어 일반인 의 등산이 금지되었다가 지난 2007년도에 개방되었다. 서쪽의 인왕산과의 안부에 자하문(紫霞門)이 있으며, 남동쪽 기슭에 삼청터널과 삼청공원이 있다. 인왕산(仁王山) 인왕산(仁王山)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에 걸쳐있는 해발338.2m의 산으로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쪽에 위치한 내사산중의 한 산으로 전체 면적은 1 ,086,696.50㎡의골산으로 기차바위, 치마바위, 매바위, 범바위, 이슬바위, 모자바 위, 선바위, 등의 저마다 기이한 형상을 뽐내고있다. 조선초에 도성(都城)을 세울 때 북쪽의 북악산(北岳山)을 주산(主山), 남쪽의 남산(南山)을 안산(案山),동쪽의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서쪽의 인왕산(仁王山)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된 서울의 진산중의 하나로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 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는 널리 알려져있다.일제강 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仁旺"이라 하였으나 1995년에 "仁王"으로 옛지명이 환원 되었다. 이 인왕산의 능선을 따라 서울성곽이 이어지며 동쪽산허리로 북악산과 연 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북한무장공비의 청와대 침투사건 이후으로 1968년 1월 21일 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1972년 11월 26 일에 북악로로 이름 붙여졌으며, 1984년 11월 7일에 지리적 위치와 교통흐름을 고 려하여 창의문을 기준으로 북악산길과 인왕산길로 분리하였다.서울시 종로구 사직 동229번지의 사직공원에서 종로구 옥인동을 거쳐서 종로구부암동257번지의 창의문 에 이르는 길이2,300m, 너비12m~15m의 2차선 도로로 산허리와 능선을 따라 개설되 어 경복궁 일대를 조망할 수 있다. 서울성곽(城郭) 사적 제10호 조선시대 서울방위를 위하여 둘러쌌던 성곽이며, 조선시대에는 한성(漢城)으로불렸다. 1392년 개성의수창궁(壽昌宮)에서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도 못되어 한양 천도계획을 명하고 한양 천도 후 일차적으로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다음 태조 4년(1395) 9월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정도전에게 명하여 성터를 살피게 하였다. 정 도전은 백악(白岳), 인왕(仁王), 목멱(木覓), 낙산(駱山)에 올라 실측하여 네곳의 산을 연결하는 5만 9,500척 (18.2km)의 성터를 결정하였다. 1396년(태조 5년) 음력 1월 9일 기공식을 올리고 춘추 2회에 걸쳐 전국에서 징발한 장정 19만 7천 4백여 명을 동원, 전 후 98일 만에 북악산,낙산,남산, 인왕산을 따라 성의 축조를 완료하였다. 성의 길이는 9천 9백 70보(步:1보는 6자) 이며 높이는 40자 2치로서 성을 97구(區)로 나누어 구마다 천자문에 따른 번호를 하늘 천(天) 자부터 조상할 조(弔) 자까지 붙였다. 성곽의 관문 으로 숙청문(북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의 4대문과 홍화문(동소문), 광희문(남소문), 창의문(북소문), 소덕문(서소문)의 4소문을 합해 8문 을 완성하였다.그 후 세종은 1422년(세종 4년)에 토성이었던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으로 쌓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공사를 1422년(세종 4년) 1월 겨울 농한기에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인을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당시 서울인구가 10만명인 것을 생각하면 엄청 난 공사였고, 사망자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의 서울성곽의 골격으로 숙종30년 (1704년)까지260년간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뿐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 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때는 제 구실을하지 못했다. 1704년(숙종3 0년) 숙종은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방어체제를 정비하였 다. 그 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선로를 공사하면서 동대문과서대문 부근의 성곽일부가 헐려나갔고,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에 전차선로공사로 남대문 부근을 철거 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의 도시계획과 한국전쟁으로 성문과 성벽이 많이 부서졌다. 오 늘날에는 18.2km중 산지성곽 10.5km만 남게되었다. 현재에는 삼청동, 성북동, 장충동 일 대에 성벽이 일부 남아 있고, 현존하는 성문은 현재 흥인지문, 광희문, 창의문, 숙정문, 혜화문의 다섯곳이 남아 있다. ㅁ서울의 외사산과 내사산 ◦서울은 현 광화문 비각(북위 37도 34분, 동경 126도 59분)을 중심으로 방사선상으로 확대, 발전하여 왔는데, 서울을 이중으로 둘러싼 각각 4개씩의 산들이 각각 외사산과 내사산이다. ◦내사산은 성벽으로 연결되어 서울 방어의 제1선이었고,외사산을 연결하 는 선은 제2선에 해당. ◦광화문 비각을 중심으로 외사산은 반경 약 8㎞ 이내, 내사산 은 반경 약 2㎞ 이내의 지역이다. ■외사산(外四山) ◦오늘날의 실제 서울시보다 훨씬 넓은 지역, 이른바 외사산으로 둘러싸인 약 627㎢의 넓은 지역. -북: 삼각산(현 북한 산 836m) -동 : 용마산(348m) -남 : 관악산(829m) -서 : 덕양산(125m, 행주산성) ■내사산(內四山) ◦천도당시의 14C 말(조선시대 태조 3년. 1394년 10월 25일 지금의 수도로 정함) 한양(서울)은, 대체로 내사산 도성내를 말함. ◦즉 당시 서울 4대문안 4개산인 내사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로 약 500만평. -북:백악산(현 북악산, 342m) -동: 낙타산(또는 타락산.현재의 낙산 125m) -남:목멱산(현 남산,265m) -서:인왕산(338m) [조용헌살롱] 숙정문(肅靖門) 조용헌· goat1356@hanmail.net 입력 : 2005.09.09 18:49 01' 서울 북악산의 숨어 있던 비경인 ‘숙정문’이 내년 4월부터 시민에게 개방된다. 1968년 무장공비들이 침 투한 1.21사태가 발생하면서 일반인의 접근이 금지된 이후 38년 만이다. 서울을 둘러 싼 4대 성문 가운데 숙정문은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북대문(北大門)에 해당한 다. 이 4대문의 명칭은 모두 음양오행에다 근거를 두고 있다. 동대문을 흥인지문 (興仁之門)이라고 한 이유는 동쪽이 봄을 상징하는 까닭이다. 봄은 생명이 움트는 목 (木)의 계절이므로 어질 인(仁)으로 생각하였다. 팔자에 목이 많은 사람은 인정이 있 다. 서쪽은 계절적으로는 서리 내리는 가을이요, 금(金)을 상징한다. 금은 의리를 뜻 한다. 금이 많은 사람은 의리가 있다고 본다. 그래서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하 였다. 남쪽은 여름이요 화(火)를 의미한다. 화는 사물을 밝게 비추므로 투명하고 예의 가 바르다. 화가 많은 사람은 자기가 먼저 술값을 낸다. 그래서 남대문을 숭례문(崇禮 門)이라고 하였다. 북쪽은 겨울이요 수(水)를 가리킨다. 물은 고요하므로 지(智)를 뜻 한다. 물이 많은 사람은 지혜가 있다. 따라서 이런 원칙에 따른다면 북대문의 이름은 ‘지’(智) 자가 들어가는 이름이 들어가야 맞지만, 실제 이름은 숙정문이다. ‘숙정’ (肅靖)의 뜻을 풀어보면 ‘엄숙하게 다스린다’, 또는 ‘엄숙하고 고요하다’는 의미이 다. 왜 북대문에다가 이런 이름을 붙였을까. 풍수원리에서 볼 때 북대문 자리는 주산인 백악산(白岳山)의 동쪽 맥이 내려오는 곳이다. 경복궁의 좌청룡에 해당한다. 1413년 풍 수학생 최양선(崔揚善)이 문을 내면 왼팔의 기운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하여 북대문이 폐 쇄되기도 하였다. 될 수 있으면 손을 대지 말고 조용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런 가 하면 북쪽은 물이 들어오는 방향이다. 물은 성적인 에너지를 의미하기도 한다. ‘물 이 많다’는 것은 섹스에너지가 풍부하다는 함축이 들어 있다. 따라서 북쪽 문을 열어 놓으면 서울의 여자들이 음란해진다고 보았다. 엄숙한 통제가 필요한 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뭄이 들었을 때는 예외적으로 북대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았다고 한다. 물은 유입하고 불은 차단한다는 의미였다.

제목 : 서울성곽순례: 혜화문, 경신고, 과학교, 와룡공원, 말바위 쉼터, 숙정문

 

제목 : 개방된 북악산 일명 김신조 루트의 아직 탄흔이 남아있는 호경암, 북악산 팔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