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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유럽 여행 시조[18-21] -마드리드-

이름없는풀뿌리 2015. 7. 28. 14:29
요즈음 – 2004 유럽 여행 시조[18-21] 마드리드 – 18. 마드리드 일착(一着) 밀라노 이륙(離陸)하여 나르길 두 시간여 시저와 나폴레옹이 도모한 길 더듬어 마침내 이베리아의 배꼽에 당도하다. 19. 마드리드 아침달리기① 아직은 어둑어둑한 마드리드 이른 아침 소나무, 종려나무들 기지개 켜려다가 동양인(東洋人) 발자국 소리에 숨죽이고 엿본다. 20. 아내와 국제전화 떠날 땐 잊어버리자, 푹 쉬자 하였건만 내 삶의 일심동체 떠난 지 얼마라고 아련한 반쪽의 목소리에 수화기가 떨린다. 21. 아토차(ATOCHA)역을 지나며 테러에 희생이 된 이백(貳百)의 영령이여! 스치는 인연이 된 동방의 한 사나이 지나다 눈길을 멈춰 꽃 한 송이 바친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마드리드 1-1. 밀라노->마드리드(1,600km, 2시간) 1-2. 마드리드 시내 모습 1-3. 지나가며 본 아토차역 외관 1-4. 아토차역 내부 1-5. 2004.3.11, 아토차역 폭탄 테러 현장 191명 사망, 1800명 부상 1-6. 마드리드 거리의 모습 2. 스페인의 성가족 성당과 알함브라 궁전(가 보지 못함) 2-1. 가우디의 성(聖) 가족 성당 모습 : 1882년 공사를 시작 현재도 진행 중에 있으며 앞으로 언제 완공(完工) 될지 아무도 모르나 대략 200년은 더 걸릴 것이라고 함. 2-2.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정 전경과 소예브 지방의 올리브밭 전경 덧붙임) (1) 이베리아 반도 - 집시의 고장 안달루시아와 플라멩고, 그라나다의 알함브라궁전, 그리고 바르셀로나의 파밀리아 성당이 생각나는 곳.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이베리아 반도는 두꺼운 하얀 구름 아래에 놓여있어 처음 방문으로 설레는 나그네에게 그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으려고 하는 것 같다. 마치 우리의 전통 혼례에서 신부가 쉽사리 얼굴을 보여주지 않듯 공항에 내리니 새까만 어둠 속의 마드리드는 그들이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을 때 아녀자들이 착용하던 까만 차도르를 두르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여! 너는 누구인가? 25,000년 전 피레네 산중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는 오래 전부터 너에게 의지하였지. BC 10세기에 이미 페니키아인들이 도래하였고 뒤이어 그리스 인들이 오랫동안 활개치고 다니더니 BC 3세기에는 카르타고의 이베로족이 이베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고, 로마와 카르타고가 너의 허리에서 창검을 겨누어 AD5세기 까지도 지금은 후진국인 아프리카에 신음하여야 하였고, 5세기에는 서코트왕국을 세워졌으나 곧 이슬람 세력에 밀려났으며 이후로 이슬람이 800년이나 이베리아의 주인으로써 행세하였고, 722년 Covadonga 전투승리를 기점으로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국토의 재탈환 시작되어 13세기 중엽, 기독교 세력이 남부 Andalucia 지방 일부를 제외한 이베리아 반도 전역 탈환하였고, 1469년에는 까스띠야의 이사벨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결혼으로 가톨릭 통일왕국으로 거듭나게 되었고, 1492년 이슬람세력을 완전 추방(레꽁끼스타, 국토재탈환운동)하여 가톨릭으로 정신무장을 새롭게 하고 땅끝에서 범선을 타고 미지의 세께로 나아가 미주대륙 발견하고, 16세기에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 대부분을 정복하고 그들의 內海인 지중해도 제패하여 대제국 건설 할 때 까지만 해도 해양 식민대국으로서 영원히 그 누구도 감히 넘볼 수는 없을 줄 알았지. 제국은 영원히 지지 않는 태양의 제국일 줄 알았지. 그러나... (2) 에스파냐여! 너는 누구인가? 1588년 너의 무적함대가 영국에 패배한 이후 국력 쇠퇴의 길로 접어들어 1808년부터 11년간 땅꼬마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았으며 이때부터 경영하던 중남미 식민지들이 대거 독립하여 떨어져 나갔지. 1898년엔 미/서 전쟁에서 패배하여 잔여 식민지인 쿠바/필리핀 및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 빼앗겼고, 1931년 총선에서 공화파 승리하고 Alfonso 13세의 폐위와 함께 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1936. 7 프랑코의 쿠데타로 독재가 시작되어 75년 그가 죽을 때까지 독재에 신음하여야 하였고, 1978년에야 서구 의회민주주의에 기초한 신헌법 국민투표 통과 되어 민주체재가 출발하게 되었으니 그러한 역정이 동방의 조그만 반도국가인 우리와 닮은 부분이 많기도 하구나. 에스파냐여! 너는 집시와 투우를 연상시키는 정열이 넘치는 나라, 피카소나 달리, 미로 등을 배출한 예술의 나라,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는 나라, 한때 무적함대를 휘몰아 세계의 대양들을 제패하며 신대륙과 미개지를 개척하던 나라 에스파냐여!, 그 격렬한 정렬과 죽음의 향기는 거칠고 광활한 황야와 거의 사면을 바다와 접하고 있는 지형적, 기후적 특성에서가 아닐까? 지금 비록 세계에 휘날리던 에스파냐의 국기는 이베리아반도에만 남아 있지만 마음껏 누비던 대서양을 현재에도 680km나 차지하고서 과거의 추억을 반추하는 듯 하구나. 우리나라보다 약간 북위에 있으면서도 지중해의 온화한 기후로 연중 따스하고, 유럽대륙에서는 흔치 않는 맑은 하늘과 태양이 내리쬐는 여름이 있고, 적은 강우량으로 황막한 사막의 정취가 풍겨오기도 하지만 지하수가 풍부하여 사람 살만한 나라가 아니던가? 유럽대륙이면서도 중세에까지 회교도의 영향권 하에 있어서 그 황량한 평원에 펼쳐진 이슬람 스타일의 이국적인 풍취는 서구 문명과 이슬람 문화의 점이적 특성으로 나타나고 있구나. 그래서 인종과 문화적으로 유럽의 다른 나라와는 차이가 많기도 한 것인가? 너의 가슴 넓이는 5십여만 평방킬로미터로 우리 남한 면적의 5배가 넘는다지. 그러나 인구는 우리와 비슷한 4천여 만 명으로 낮은 인구밀도여서 좋겠구나. 그래서 해마다 4천여 만 명의 관광객이 다녀가는 이유인가?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유럽 대륙에서 느끼지 못하는 훈훈한 인간미를 너에게서 느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너에게 오면 모자 쓴 할아버지가 다가와 다정한 우리의 할아버지가 되어줄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는구나. 에스파냐여! 뒤늦게 네가 비록 EU에 가입하였지만 수천 년 전부터, 도시국가이던 시절부터, 중세의 성주들과 수도원 시절부터 이미 유럽은 하나였다지. 일반적인 유럽통합운동은 2차대전 이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지. 근대적 유럽통합사상은 이미 그것은 수백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18, 19세기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미 유럽통합사상을 전개한 바 있었으나. 본격적인 유럽통합운동은 2차대전 이후에 시작되었다지. 10세기 이전 유럽은 그리스-로마라고 하는 제국, 그리고 그 뒤를 이은 프랑크 왕국의 존재로 하나의 정치적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러나 10세기에 프랑크 왕국이 3분되면서 유럽의 정치적 통일은 깨지고 이후 분할과 이질화가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겠지. 지난 1,000년 동안 유럽사는 전쟁의 시대였고, 그것은 평화에 대한 열망을 더욱 고조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 칸트의 영구평화론이 그래서 나온 것이지. (3) 마드르드여! 너는 누구인가? 8세기, 그러니까 지금부터 천오백년 전에 아랍인이 침입하여 수도 톨레도(Toledo)의 전위기지로서 성체(현재 왕궁 위치)를 건설한 이래 11C에 십자군이 이곳을 탈환 후 주변 농촌의 시장 마을이 되었다지. 1561년 펠리페2세(felipe II)가 수도를 궁벽한 요새 톨레도에서 마드리드로 천도한 이래 급속 도로 발전하여 북, 동 방향으로 커졌으며 현재도 유럽의 신흥 공업도시로 팽창중이라지. 관광객이 주로 찾는 구시가는 마드리드 전체의 1/10정도로 그 기점은 뿌에르따 델 솔(la Puertaa del Sol) 이며 마드리드 번지수의 출발점이라지. 구시가는 17-18C에 건설되었으며 특히 18C후반 카를로스 3세 (Carlos III)때 수많은 건물이 건축되어 현재의 왕궁, 시벨레스와 넵튠의 분수, 알깔라문(la Puerta de Alca la), 식물원등이 완성되고 쁘라도 미술관(el Musep del Prado)이 착공되는 등 현재의 수도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며 19C이후 철도가 개통되면서 신시가지로 확장되었다지. 스페인 제국의 전성기를 거쳐 현재까지 400여 년간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인구 400만을 보유한 유럽의 타국가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고지대인 해발 646m에 자리하고 있는 이베리아 반도의 중앙 배꼽에 위치한 선선한 고원도시라 했던가? 오랜 이방인들의 지배의 역사를 간직한 너는 유럽 문명과 오리엔트적 요소가 잘 결합되어 있어 그 매력을 더하고 있구나. 더구나 거리에는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미술관, 박물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고, 신시가지에 들어서면 현대적인 빌딩거리가 펼쳐지며 교외에는 공장과 고층건물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로 너의 추진력과 활기를 느낄 수 있겠구나. 수많은 박물관에는 진귀한 작품으로 넘쳐나고 미술화랑, 쾌적하고 드넓은 공원과 정원은 너희 삶의 여유를 알겠구나. 이러한 상념을 하며 비행기를 내리니 빗방울이 흩뿌리는 깜깜한 마드리드 공항은 예상대로 그의 모습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다. 시내 중심가 아파트밀집지역의 모퉁이에 있는 "GRAW HOTEL COLON(FIESTA)"호텔에 도착하니 밤 11시였다. (4) 다음날(04/4/18) 역시 아침 일찍 일어나 주택가를 달려본다. 05:30분에 달리기 복장을 하고 나서니 카운터에 있는 청년이 이상스레 쳐다본다. 이태리와 마찬가지로 역시 여기도 아침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쿨드삭 같은 골목길을 돌아 달려 나가며 그들의 주거형태, 정원, 나무와 풀들을 살핀다. 아파트가 우리처럼 일자형이 아닌 ㅁ자형인 점, 일층은 상점이나 피로티인 점이 특이하다. 또한 오래된 아파트 단지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많은 지하주차장이 없어 자동차들이 우리나라처럼 간이 도로의 양편을 일자주차로 차지하고 늘어서 있다. 그러한 사이사이 역시 자랄 대로 자란 나무들은 숲을 이루고 있다. 이태리와 마찬가지로 여기도 의외로 소나무가 많다. 소나무는 우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작년에 로마에 갔을 때 보니 소나무가 로마의 시목(市木)일 정도라니 몰라도 너무 몰랐고 착각도 큰 착각이었다. 아파트 단지도 우리처럼 장방형이 아니고 구불구불한 단지에 오밀조밀하게 배치되어 있다. (5) 돌아와 샤워를 하고 아내에게 전화한다. 7시간 시차이니 한국은 밤 12시 쯤 일 텐데 아이들 수발에 여태 잠자지 않고 있나보다. 작년 여행 때에는 동행했는데 올해에는 아이들 때문에 동행치 못하여 미안하다. 하루에 한 번 조깅을 하고 7시쯤 전화하곤 하는데 세상이 좋아져서 이웃집에 전화하는 것처럼 또렷하게 들리지만 지구의 반대편에 아내가 있다고 생각하니 연애시절 전화하는 것처럼 떨려온다. 오늘의 일정은 마드리드 시내 미술관, 공원 등을 돌아보고, 오후에 고도(古都)톨레도를 돌아 본 다음 저녁 플라멩고를 감상하는 강행군을 하여야 한다. 시내의 조경은 수준급이다. 한국에서도 조경학자들이 탐방할 정도라 한다. 차내에서 가이드가 이곳 인사말을 가르쳐 준다. - 올라(만났을 때), 아디오스(헤어질때), 그라시아스(감사합니다) - 시내를 지나는데 차창 밖으로 3.11테러로 200명이 희생된 아토차역이 보인다. 영령이여! 편히 잠드시라. 마음속으로 기도드리며 꽃 한 송이 바친다. 로마에선 소나무가 영광의 상징 /매일경제 05/4/27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312년에 만들어진 군사용 도로로 소나무 가로수가 유독 아름답다. 로마의 소나무는 나지막한 것이 매력인 국내 소나무와는 달리 높이가 4~5m에 육박한다. 곁가지를 쳐주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뻗어 올라가 꼭대기에 울창 한 소나무 숲을 이뤄 일명 우산 소나무라고도 불린다. 길게는 몇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로마 소나무는 좁은 도로에선 서로의 잎이 맞 닿아 소나무 터널을 만들기도 한다. 위풍당당한 풍모를 지닌 우산 소나무는 고대 로마인들에게 승리와 생존을 상징 하는 존재였다. 이탈리아 반도와 지중해 전체를 지배했던 고대 최대 제국 로마 병사들은 세계 정복에 나서면서 유럽 곳곳에 도로를 닦고 소나무를 심었다. '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로마제국은 유럽 도로 절반 가량의 초석을 닦았다고 한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는 로마 병사들의 개선 행진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바로 소나무였다. 콜로세움 앞 개선문에 이어진 쭉 뻗은 대로에도 우산 소나무 가로수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소나무 그늘은 때로는 지친 병사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했다. 고향으로 돌아오 는 길에 소나무 아래에서 낮잠을 자다 보면 떨어지는 솔방울에 맞기도 했는데 아픔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곧 생존을 의미했다. 전장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것 은 곧 승리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소나무는 내로라 하는 명문가와 부유층의 정원수로 인기가 높다.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품고 있는 로마 소나무는 예술가들에게도 많은 영감을 줬다. 20세기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작곡가 레스피기(1879~1936)는 교향시 '로마의 소 나무(Pini di Roma)'를 작곡해 이 우산 소나무를 더욱 유명하게 만들었다. 1924년 작곡된 이 음악은 '로마의 분수' '로마의 제전'과 더불어 교향시 3부작 을 이루는데 로마 4곳의 소나무 숲을 풍부한 색채감을 살려 서정적으로 잘 묘 사하고 있다. 특히 제4부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는 안개 짙은 새벽, 로마가 흥성했을 무렵 군대의 행진을 환상으로 그리고 있다. [로마 = 전지현 기자]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18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