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 2004 유럽 여행 시조[44-46] 벨렝탑 –44. 벨렝탑
해적을 가두었던 요새는 비었는데
대서양 횡단했던 쌍발기 한대 앉아
벨렝탑 가로질러서 리우 쪽을 향하고 있다.
45. 알퐁스 엔리끄 왕자
반도의 동편서편 어디를 둘러봐도
강국에 가로막혀 갈 곳이 없었을 때
위대한 왕자 혼자서 대서양을 보았다.
46. 떼주강 항구
황금을 가득 실은 범선은 간데없고
지금은 요트 몇 척 빈 채로 흔들거리며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돈주머니 열라 한다.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2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
1. 벨렝탑 에서
1-1. 벨렝탑 가는 길에 본 떼주강 하구 풍광
1-2. 벨렝탑에 기까운 공원에 있는 1914 리스보아-리우 횡단 쌍발기(기수 방향이 리우임)
1-3. 벨렝탑 원경
1-4. 벨렝탑 근경
1-5. 벨랭탑 내부
2. 해양발견기념비
2-1. 기념비 앞에서
2-2. 기념비와 떼주강과 425다리
2-3. 기념비 근경
2-4. 기념비 맨 앞의 인물이 엔리끄 왕자이고 그 뒤를 선교사, 학자, 선원등이 따르다.
2-5. 한국
2-6. 인도양
2-7. 태평양 – 이상 그들이 정복한 영역을 바닥에 타일로 그려 놓음.
3. 디아즈와 희망봉4. 정화 선단
4-1. 정화 함대 중심선박 보선 상상도[타임지]
4-2. 2006년 중국이 복원한 정화 함대 선박
5. 우리나라와 세계의 고지도
5-1. 18C 중엽 영남대 소장(중화사상에 입각하여 중국이 중심에 위치)
5-2. 역시 중국이 중심에 위치(우리나라는 소중화라는 편협한 사고방식)
5-3. 혼일강리대국도지도(1403원본 1420수정, 중화사상은 마찬가지이나
1488 디아즈 희망봉 발견, 이미 아프리카 지도에 표시)
덧붙임)
(1)
4.25다리 아래로 난
제방을 따라 내려간 해안 도로를 따라 가니
잘 가꾸어진 드넓은 잔디밭에 1914년 최초로
리스보아에서 리우데자네이로까지 대서양을 횡단 했다는
쌍발 비행기가 앉아 있는 너머로
우뚝 솟은 하얀 요새가 보인다.
바로 벨렝탑(Torre de Belem)이다.
1515-1519년에 마누엘 1세가
항구 감시를 위하여
리스보아를 가로지르는 떼주 강 하류의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세운 요새로
하얀 나비가 물 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누엘 양식의 멋진 테라스를 가진 탑인데
귀부인이 드레스 자락을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고 하여
“떼주강의 귀부인”으로도 불린다고 한다.
원래는 테주강 한가운데 세워졌으나
강의 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스페인이 지배할 때부터 19세기까지도 1층은 정치범의 감옥으로 사용되었고,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렝의 마리아상”이 있으며,
3층은 왕족의 귀빈실로 이용되었으며
지금은 16~17세기의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는데 들어가 보진 못했다.
주로 정치범을 다뤘다는 1층 감옥은
간만의 차로 인해 물이 드나들어
죄수들이 물에 젖기를 반복했다는데,
상상만으로도 그들의 고통이 전해지는 듯한 오싹함이 일었다.
떼주강은 총 연장 1,080㎞에 이르는 유럽의 2대 강이며,
하구는 가장 넓은 곳의 폭이 10㎞가 넘어 바다로 착각할 정도이다.
벨렝탑 우측의 높은 가로등은
시내 어디에서건 동일한 모양과 규격이었는데
"까라벨라"라 불리우며
바로 리스보아의 황홀한 야경을 연출한 주인공이다.
(2)
거기서 이따금 낚시꾼이 앉아있는
제방을 따라서 상류로 올라오니
해양발견 기념비(Padrao Dos Descobrimentos)가 나타났다.
건너편은 고색창연한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대항해 시대의 번영을 상징하듯
53m 높이의 범선을 형상화한 조각상과 어우러진 탑이
바다를 향해 출정하는 웅장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포르투갈 대항해 시대의 선구자이며 대서양의 여러 섬을 발견한
항해 왕자 엔리케(1394-1460) 사후 500주년을 기념해
1960년에 바스코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그 자리에 세워졌다.
맨 앞에 엔리케 왕자가 범선을 두 손에 들고 있고,
그 뒤로 항해에 공헌한
기사, 천문학자, 선원, 지리학자, 선교사 등이 뒤따르는 모습이다.
기념탑 상부의 밧줄을 꼬아 만든 듯한 십자가 문양은
마누엘 탑 양식으로 포르투갈 특유의 것이라 했다.
광장 바닥에는 지역별 발견(도착) 연도가 적힌 세계지도가 있는데,
1541년으로 표시된 일본 옆에 한반도의 모습이 생생했고,
1514년 마카오,
1500년 브라질,
1498년 캘커타,
1492년 미대륙,
1488년 희망봉이라 표시한
부조(浮彫)물은 15~16세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해양제국으로 군림하던 당시의 흔적을 바닥에 깔아 놓은 듯했다.
포르투갈의 이러한 해양에의 열망은
비좁은 국토에서 탈출하려는 야망이라기보다는
드넓은 세계에 대한 끝없는 열망,
다시 말하면 세계화의 시초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당시까지는 인류는 가까운 거리에 살면서도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바다의 끝은 낭떠러지로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항해 이후로 비로소 세계는 하나가 되었고
진정한 의미의 경제적, 문화적 교류를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수세기 동안 수천 명의 선원, 군인, 선교사, 상인들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면서
포르투갈인들의 생활의 중심은 해외활동이었다.
이것은 그 당시 포르투갈 인구가
150만 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 시대는 또한 포르투갈 문화의 전성기였다.
이러한 국부(國富)는 건축 분야에서는 르네상스 양식의 도입 외에도
플랑봐양 (Flamboyant) 양식과
해양 생활에서 모티브를 얻은 장식적 요소가
결합된 독특한 "마누엘리누 (Manuelino)" 양식이 꽃을 피웠으며
문학 분야에서는 수많은 서정시와
대표적 서사시 "루지아다스 (Os Lusiadas)" 를 쓴
국민적 시인 루이스 드 까몽이스가 등장하였고
그 당시 유럽 전체가 그랬듯이
포르투갈도 문학과 미술 전반에서
이탈리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이다.
기념비 옆에는 화려한 요트들의 정박장이 있고
이곳 사람들의 富의 척도이기도 한 요트는
생각보다 비싸고 관리하기도 어려워서
사람들은 요트를 사면서 커다란 행복감을 느끼지만
관리문제로 골치를 썩다가
요트를 처분할 때 역시 해방감으로 인한 기쁨을 느끼는
아이러니를 겪는다고 한다.
(3)
여기서 해양제국 포르투갈을 빛나게 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먼저 항해왕 엔리끄(Henrique o Navegader, 1394-1460년)에 대해 알아볼까?
앞서 연표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그는 포르투갈 왕 주앙 1세(재위 1394~1460년)와
영국의 랭커스타 공주 필립사이의 3왕자 중에 막내로 태어나
비록 왕위에는 오르지는 못했지만
3명의 포르투칼왕 밑에서 통상·식민 대신 직책을 맡아
1418년 아프리카 서해안 탐험이나 인도 항로 개척을 목표로
서인도 제도의 산 빈세테 부근에 있는 라고스에 정착하여
수학·천문학·지리학을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라고스 부근에 사글레스 라는 이름의 거리를 만들고
요새, 관측소, 조선소 그리고 항해 학교를 세웠다.
또한 그는 그 곳에서 유망한 뱃길 안내인이나
선장을 선발하여 훈련시키고
항해 및 관측용 기계ㆍ도구를 연구하여 제작하고,
또 여러 가지 항해 계획을 세우거나
원정 결과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항해탐험을 발전시켰으며
그 당시의 범선을 개량하기 위하여
해외의 항해술을 도입하여
어떤 바람 에서도 노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돛으로만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여
오늘날 포르투갈식 범선이라고 알려진 돛배가 개발하였다.
그리고 여러 항해의 자금을 지원하며
항해기술을 발전시키고 유능한 선원을 양성시켜
훗날 희망봉을 발견한 디아즈,
인도항로를 개척한 다 가마,
세계일주를 왕성한 마젤란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
엔리끄 왕자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다음은 희망봉을 발견한
디아스(1450-1500)에 대하여 알아볼까?
포르투갈은 엔리케 왕자의 지도하에
1420년경부터 아프리카 탐사에 주력하여
1460년경에는 세네갈 인근 해안까지 탐사하였다.
포르투갈 인들은 1471년 적도를 넘어
현재의 가나 즉 황금 해안을 황금 거래와 탐험의 기지로 삼았다.
포르투갈 군대가 바하도르 곶을 지난 시기를 전후로
엔리케는 교황 마르티누스 5세(재위1417-1431년)에게 청하여
“앞으로 인도까지의 구간과 인도에서 발견된 모든 토지를
포르투갈령으로 한다.”는 내락을 받았다.
그러나 엔리케 사후 국내외의 정세가 안정되지 못해
1480년대 초까지 아프리카 탐사는 지지부진했으나,
1481년에 주앙 2세(1481-95)가 왕위를 계승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당시 유럽에는 선교사 존(Prestor John)의 왕국이
아비시니아(Abysinia, 오늘날 에디오피아)에 자리 잡고 있다는 풍문이 전해졌다.
이 풍문이 사실이라면 유럽의 기독교 왕국들은
선교사 존과 연합하여 이교도인 무어인을 협공할 수 있었다.
이후 포르투갈인들은 남하하여
1484년에는 자이르(콩고) 하구를 발견하여 상륙하였고,
따라서 주앙 2세는 이 풍문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하여
1487년에 쿠빌량과 디아스를 육로와 해로로 각각 파견하였다.
쿠빌량은 육로를 통해 인도에까지 이른 뒤 귀환하는 길에
“해로를 통해 인도까지 갈 수 있다”고 보고하고,
자신은 아비시니아에 머물렀다.
1487년 8월에 3개의 석주를 3척의 배에 싣고
포르투갈을 출발한 디아스(Bartholomeu Diaz : 1450-1500년)는
나미브 사막 남단에 있는 오렌지 강 하구에 도달하여
그 곳에 최초의 석주를 세웠다.
그 후 남하한 곳에서 격렬한 폭풍우에 휘말려
약 2주일 동안 육지를 볼 수 없었다.
폭풍우가 가라앉았을 무렵에
이제까지의 포르투갈 배의 상식에 따라 동진하였지만
육지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과감히 북진을 감행했을 때 마침내 육지를 발견하였다.
그리하여 대륙 남단에 도착한 것 같음을 알게 된 그들은
해안선을 따라 동진하여,
마침내 해안선이 북쪽을 향해 구부러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디아스는 아프리카의 동쪽 해안을 따라
그대로 북상하자고 제안하였지만
겁이 난 선원들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거기에 제2의 석주를 세우고 되돌아가기로 하였다.
도중에 큰 곶을 만났는데,
폭풍 때문에 가는 길에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는 데서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 이름붙이고
그 곳에 제3의 석주를 세웠다. 1488년의 일이다.
귀환한 그들로부터 사정을 전해들은 포르투갈 왕 주앙 2세는
그 후 1498년 바스코 다 가마가
이 곶을 통과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한데 연유하여,
“폭풍의 곶”이라는 이름이 부적합하다고 여기고는
Cabo da Boa Esperana(희망의 곶)라고 개칭,
그것을 “희망봉”이라고 이름 지었다.
인도 항로를 찾는 희망을 북돋운 곶이었기 때문이다.
희망봉은 Cape Town 근처 해발 256M(840ft)로
아프리카 대륙 최남단의 아굴라스곶의 북서쪽 160km 지점에 있으며
대서양과 인도양 사이를 항해할 때 기점으로 표시되고 있다.
그 후 1493년에는 교황 알렉산드르 6세(재위 1492-1503년)가
아조레스 제도의 서쪽(서경 약 30°)을 경계선으로
그것보다 동쪽의 반구(동경 약 150°까지)를 포르투갈,
서쪽의 반구를 에스파냐의 세력 범위로 하는 교황 경계선을 제안하였다.
494년의 “토르데시야스 조약”에서는
교황 경계선을 약 1600km 서쪽으로 움직인 것으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양국이 합의하여 세계를 양분했던 것이다.
다음은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약 1469-1524년)를 알아볼까?
그는 인도 항로를 개척하는데 처음으로 성공한 항해 탐험가로
마누엘 1세로부터 희망봉을 우회하여
인도로 가는 항로 탐사를 의뢰받아 바다로 나서게 된다.
1492년에 스페인의 후원을 받아
대서양 쪽으로 항해한 콜럼버스는 귀환하여
자신이 도착한 곳이 인디즈라고 주장하였다.
그러자 포르투갈의 주앙 2세는
"카나리아 제도의 스페인령 섬을 제외한
대서양상의 모든 섬을 포르투갈령으로 한다."는
[알카소바스 조약]을 근거로 들어
서인도제도는 포르투갈령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간에 분쟁이 발생했다.
베르데 곶 서방 370 리이그를 경계로
그 동쪽은 포르투갈령으로 하고,
그 서쪽은 스페인령으로 한다는 데 합의하였다(1494).
영토 경계 문제를 해결한 주앙 2세는
곧 인디즈 탐사대를 조직하도록 하였으나,
1495년 왕 자신이 사망하는 바람에 이 탐사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결국 1497년 7월 8일, 약 170명의 승무원을 태운
가브리엘호(Gabriel), 라파이엘호(Rafayel), 베리오호(Berrio)등 본선 3척과
보급선 1척 등 4척으로 구성된 탐사대가 조직되었다.
이 탐사대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사람이 바스코 다 가마였다.
원래 이 탐사대는 바스코 다 가마의 아버지가 지휘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그가 사망하여 바스코 다 가마가 인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497년 4월 총 170여명의 탐사대원을 이끌고 리스본을 출항한 다 가마는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항해를 계속하면서
인디즈까지 안내해 줄 수로안내인을 물색하다
1498년 2월 아프리카 동해안의 모잠비크 해안에서
그 지역의 통치자로부터 수로안내인 2명을 소개받았다.
그러나 이슬람교도였던 이들은
다 가마 일행이 기독교도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다시 아프리카 동해안을 북상한 다 가마는
1498년 4월 케냐의 말린디 인근에서
이븐 마지드(Ibn Majid)라는 유능한 수로안내인을 만나
그해 11월 22일 희망봉을 우회하게 되고
폭풍우와 반란을 만났지만
인도양을 가로질러 이듬해 무사히 메링단에 도착했고,
1498년 5월 20일에는 목적지인 캘리컷에 도착하여
캘리컷 지역을 다스리는
자모린 토후국과 무역관계를 맺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자모린 토후는 다 가마 일행이 가져온 유럽 상품들이
보잘 것 없는 것에 실망하여 무역관계를 맺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다 가마는 인도 서해안의 여러 항구를 방문하고
물물교환으로 향료 등을 수집하여
1498년 10월 인도를 출항하여 이듬해에 귀환하였다.
애초 170여명, 4척으로 구성되었던 탐사대 중 귀환한 것은
탐사대원 55명 내외와 배 2척 뿐이었다.
바스코 다 가마는 그 후
제3차 인도 탐사대를 지휘하는 등
포르투갈의 인도 문제에 대해 왕에게 자문하는 역할을 맡았으며,
1519년에는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백작으로 서임되었다.
1524년에 인도 책임자로 임명된 다 가마는 그 해 9월 인도 고아에 도착하여
전임 책임자의 잘못을 바로잡는 데 진력하였으나,
과로 등으로 그 해 12월 코친에서 사망하였다.
이 인도 항로의 발견은 포루투갈이 동방에서
보석, 향료 등을 아주 싼값에 수입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가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15세기말에 사용된 인디즈(Indies)란 말은
갠지즈강 너머의 인도, 카타이, 씨팡고 등
아시아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 가마의 인디즈 항해는 역사 전개에 끼친 영향은 컸다.
첫째는 이제까지 육로를 통해 간접적으로 통교해 왔던 유럽과 동양이
해로를 통해 직접 통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다 가마의 항해 이후 동양물품이 해로를 통해
대량 유입됨으로써 가격이 떨어졌고,
이는 유럽인의 일상생활과 경제생활을 크게 변화시켜
“산업혁명”을 촉발하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둘째는 동양의 실태를 목격한 유럽인들이
압도적인 무력을 바탕으로
동양을 잠식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와 영국이 해양팽창의 대열에 뛰어들게 됨으로써
유럽 각국은 동양무역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은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해 나갔다.
어쨌든 다 가마는 유럽인으로서 처음으로
아시아 항로를 개척한 공을 인정받아
마이클 하트가 선정한 [역사 전개에 영향을 끼친 100인의 인물] 가운데 84위를 차지했고,
아담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가마의 인디즈 항해를
"세계 역사상 2대 사건 중 하나"로 평가하였다.
다음은 최초로 세계 일주한
마젤란(Ferdinand Magellan 1480-1521)에 대하여 알아볼까?
그는 포르투갈의 하급귀족 출신으로,
마누엘왕에게 출사하여 포르투갈령 인도 총독의 부하로서
동남아시아에서 일하였으며, 아프리카-인도 항로에 근무하였다(1504∼1511).
이어서 1511년 말라카에서 몰루카제도 무역의 정보도 입수하였다.
그는 포르투갈왕의 중신(重臣)중 한 사람이었으나,
모로코에서 현지 무어인과의 거래가 왕의 의심을 사게 되어 불신을 받자
포르투갈과의 인연을 끊고 에스파냐로 갔다.
그리하여 아메리카와
자기가 경험한 동남아시아를 연결하는 계획을 세우고,
여기에 앙베르의 상인인 전주(錢主)를 얻고
국왕 카를로스 1세(뒤에 신성로마황제 카를 5세)의 특허를 얻어서,
1519년 8월 10일 서항로(西航路)로 몰루카제도에 갈 계획하에
선박 5척과 승무원 270명으로 에스파냐의 세비야를 출발하였다.
그는 행선지를 감춘 채 항해하여
12월 중순에 리우데자네이루에 닿고,
이듬해 1월 라플라타강에 도착하여
이것이 해협이 아니라 강인 것을 확인하였다.
남하를 계속하여 1520년 11월 28일 해협을 빠져나가 새로운 해면에 나갔다.
이것들을 “파타고니아(마젤란)해협”, “태평양”이라고 명명(命名)하였다.
이때에 침몰, 도망한 함대는 각각 1척, 남은 것은 3척뿐이었다.
마젤란은 태평양을 작은 것으로 예상하고 서진(西進)하였으나,
결과는 3개월 이상이 걸리는 대항해였다.
불안에 떠는 선원들을 통솔하여
계속 서쪽으로 가는 동안에
이상하게도 아무 섬도 접하지 못했으나,
1521년 3월 6일 괌섬에 도착하여 원주민과 교전하였다.
3월 16일 현 필리핀군도 레이테만(灣)의 즈르안섬에 도착하여
세비야에서 연행하여 온 수마트라인 노예의 통역으로
원주민과 우호관계를 맺었다.
4월 세부섬의 왕 및 부하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고
에스파냐왕에게 충성할 것을 서약하게 하였으며,
27일에는 준비가 덜 된 채 막탄섬의 토벌을 시작하였다가
마젤란은 부하 12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그가 죽은 지점이 몰루카제도의 경선(經線)을 넘었기 때문에
“세계일주”를 완수하였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지휘자를 잃은 선단원(船團員)들은
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배 1척을 불태우고
나머지 2척으로 11월 몰루카제도의 포르투갈 무역권으로 들어갔는데,
할마헤라섬에서 잔존 2척 중 트리니다드호(號)는 난파하고
나머지 1척인 빅토리아호에 향료를 만재한 뒤에
60명이 귀로에 올라 포르투갈 해군의 추적을 피하면서
1522년 9월 8일 세비야로 귀항하였다.
이때에 생존자는 엘카노 등 18명이었다.
필리핀, 마리아나 제도 등의 명명도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대항해는 탐험가들의 업적 가운데 최대의 것이었으며,
또한 승무원들은 지구가 문자 그대로
둥글다는 것을 확인한 셈이었다.
(4)
그런데 그러한 그들의 발견과 업적을 기린
기념탑을 보니 한 가지 의문이 일어온다.
콜룸부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기 전에도 이미 아메리카는
인디언들이 왕국을 이루고 수천 년간 살아 숨쉬고 있었고,
디아즈가 희망봉을 발견하기 오래 전에 희망봉은
이미 그 곳 흑인들의 다른 지명이었고,
다 가마가 인도 항로를 개척하기 전에
이미 다른 사람들이 그 곳을 통행하고 있었고
마젤란이 세계일주를 함으로써 지구가 둥근 것이 아니고
지구는 이미 둥근 모습으로 있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은
그들만의 시각으로 굳이 “발견(發見)이라 한다.
그러기에 그 곳에 오래전부터 정주(定住)했던
인디언, 흑인등을 짐승처럼 도륙했다.
이는 분명 유럽 사람들만이 인간이라는 자기중심적 오만이요, 야만이다.
그들이 야만인이라 불렀던 토착민들이
야만이 아니라 그들이 야만이었기에
“해양발견 기념비”를 세울 게 아니고
그들의 손에 목숨을 놓고
짐승처럼 살아가야 했던 선량한 희생자들에게
먼저 석고대죄하여야 마땅하지 않을까?
기념물을 보니 그러한 텀험가들은 반드시
선교사를 대동하고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했는데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토착의 애니미즘과
토테미즘을 고수했다해서 짐승 대하듯 함이
과연 자애로운 그리스도의 가르침인지 그들의 후손들에게 묻고 싶었다.
즉 그들의 “발견”은 “발견”이 아니고
“탐험”이고 “도착”이라고 말하고 싶다.
(5)
여기에 아메리카에
지나(중국)인이 먼저 도착했다는 설이 있다.
퇴역한 영국 해군 잠수함 장교 개빈 멘지스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의 도서관에서
베네치아의 지도 제작자인 주아네 피치가노의 서명과
1424년이란 연도가 적혀있는 옛 지도 한 장을 발견했다.
그는 그 지도의 서대서양 부분에 네 개의 섬으로 이뤄진 제도가
그려져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지도에 “안틸리아”라고 이름 붙여진 이 섬이 어디인지 연구한 결과
그는 푸에르토리코와 과들루프 섬이라는 확신을 내렸다.
그러자 놀라운 의문이 생겼다.
콜럼버스가 카리브해에 도착하기 70여 년 전에
누군가 이 섬들을 탐사해 지도에 남겼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케빈 멘지스의 추적을 살펴보자.
1492년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연대로 기록돼 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처음 탐사한 해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부터 유럽 각국은 전 세계 탐험과 함께 세계 무역을 해나갔고
자본주의 체제 성립에 큰 도화선이 됐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콜럼버스나 바스코 다 가마, 마젤란 등은
이미 지나인들이 “발견한 것들”을 다시 발견한 것이었고
이들은 모두 지나인들이 만든 지도를 갖고서 항해에 나섰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지나의 제독들은
콜롬부스보다 1년 먼저(1491) 아메리카에 도착했고,
디아스보다 60년 먼저 희망봉을 회항했으며
마젤란보다 98년 앞서 마젤란 해협을 통과했고,
쿡 선장보다 3백년 먼저 호주를 탐사했고,
남극과 북극은 최초의 유럽인보다 4백년 앞서,
아메리카는 콜럼버스보다 70여년 먼저 탐사했다는데
그들은 곧 지나의 제독인 정화와 홍보, 주만, 주문, 양경등이다.
중국 영락제 때인 1405년부터 1433년까지
일곱 차례의 원정에 나선 중국의 정화(鄭和)가
1421년에서 1423년 사이의 원정에서는
아프리카, 호주, 남아메리카, 북아메리카, 남극과 북극 등을 모두 돌았다고 한다.
좀더 자세히 주장을 살펴보면 정화의 함대는
4개의 소선단으로 나뉘어 세계를 항해했는데
각 선단의 제독은 홍보, 주만, 주문, 양경 등이었다는 것이다.
홍보는 남아메리카의 동부 해안과
남극, 호주, 뉴질랜드를 탐사했고,
주만은 남북아메리카의 서해안과
환태평양 지역의 나라들을 방문했다고 한다.
주문은 북아메리카의 동부와 그린란드 그리고 북극해를 항해했다고 한다.
양경은 인도양 주변 나라들을 탐사했다고 한다.
정화 원정대 규모는 2백50척의 정크선과
이를 보좌하기 위한 3천5백 척의 기타 선박들이 포함돼 있었고
승무원만 3만 명에 이르렀는데
정크선의 크기는 전장 1백50m에
선폭은 60m여서 보통의 어선 50척과 맞먹는 크기였다고 한다.
이 같은 대규모 선단을 이끌며 항해에 나섰던 정화 원정대는
놀라운 과학기술로 해안을 측정하고 자신들의 흔적을 남겼으며
포루투갈인들이 항해에 나섰을 때
이들은 지나인들이 만들어 놓은 지도를 보여
그들이 “발견”이라고 한 것은 기실 지나인들의 발자취를
쫒아 다녔다는 것에 불과한 행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역과 외교정책을 통해
세계를 유교의 조화 속에 편입시킨다는 영락제의 기본 계획에 따라
원정에 나섰던 이들의 흔적은 영락제의 쇠퇴와
이들이 만들어놓은 세계제국을 해체하려던 관료들에 의해 사라지게 됐다고 한다.
지나의 대외정책이 갑작스럽게 바뀌면서
선박들은 파괴되거나 유기되어 삭아버렸고
그들의 위업을 기록한 지도와 해도, 수천 건의 귀중한 문서들은 파기되었다고 한다.
어찌 보면 생뚱맞아 보이는 주장이라고 폄훼할 수도 있지만
증거자료들을 보면 결코 우습게 보이지가 않는다.
우선 지도 등의 문헌적 증거이다.
18세기말 영국의 수집가가 보관하고 있던 피치가노 해도에 보면
1424년이라는 연도와 지금의 카리브 해에 있는
푸에르토리코 등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즉 1492년 콜럼버스가 카리브 해에 도착하기 전
이미 누군가가 이 섬들을 자세히 탐험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콜럼버스의 항해 일지를 통해서도
콜럼버스가 누군가가 제작한 지도를 보며
항해에 나섰음을 암시하는 문구가 나오기도 한다.
그는 항해일지에 “내가 본 지구의에서, 그리고 세계지도의 도면에서
그 섬은 이 지역에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가
1431년 선장들에게 내린 명령 문서에서 그는
1428년의 해도에 표기된 안틸리아 제도를 찾으라는
지시가 쓰여 있는 것을 찾아냈다.
멘지스는 콜럼버스 이전에 아메리카 대륙에
먼저 상륙해 섬들의 존재를 확인했고
이를 유럽의 지도 제작자들에게 알려준
“누군가”가 있었다는 반증이라는 확신을 갖게 됐다.
다음으로는 물적 증거이다.
아프리카, 아메리카, 호주, 뉴질랜드의
세계 각지에서는 이미 24척의 난파선이 발견됐다.
방사성 탄소 측정법에 의해 지나가 15세기 초에
세계 곳곳을 누볐음을 이 난파선들은 증명하고 있다.
또 서아프리카 카보 베르데 제도와 뉴질랜드, 남아메리카에는
지나인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비석이 발견되고 있고
명나라 도자기들이 동아프리카와 호주 등에서 발견되었다.
이밖에도 후쿠나카토의 멕시코 원주민 부족이 남긴 그림 가운데는
발목까지 내려오는 붉은 옷을 입고 도착하는
지나인들을 묘사한 그림이 남아있기도 하다.
동식물 등의 생물학적 증거도 놀랍기만 하다.
우선 닭이다.
유럽의 정복자들이 멕시코의 마야 문명을 점령했을 때
그들은 유럽의 닭과는 아주 다른 아시아 닭을 발견하게 됐다.
마야인들은 달걀을 얻기 위해서나 식용을 위해서가 아니라
점복 같은 의식을 핼하기 위해서 닭을 사용했는데
이는 지나인들의 사용 습관과 흡사했다.
게다가 닭의 마야식 명칭인 켁(kek)이나 키(ki)는
지나어의 명칭인 지(ji)와 유사한 어원이 있다.
그리고 마젤란은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옥수수를
필리핀에서 발견하게 되었으며,
지나의 금앵자는 이미 그때 캘리포니아를 뒤덮고 있었다.
물론 많은 식물들이 자연적으로 즉 대양의 해류나 새들에 의해 씨앗이 운반되어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식물들이 다 이런 식으로
전파되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옥수수와 고구마는 물에 뜨지 않으며
고구마는 새가 물어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기기에는 너무 무겁다는 지적이다.
또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 공통된 식물들,
그리고 남아메리카와 오스트랄아시아에 공통된 식물들을 분석해보면,
그들이 모두 항풍과 해류의 방향으로,
즉 인간 승무원이 승선한 선박에 의해 퍼졌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 식물들이 전파된 시기는 유럽인들의 발견 항해보다 앞서고
전 세계에 걸쳐 식물과 동물을 그렇게 배열할 수 있었던 나라는
단 하나 지나의 선박들이
그 식물들과 씨앗들을 운반해 간 것은 아닐까?
이런 증거들에 대해서도 못 믿어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이러한 증거들은 어떻게 찾아냈을까?
저자는 15세인 1953년 영국 해군에 입대해 17년간 근무하며
위성항법이 개발되기 전,
자와 컴퍼스를 대고 별을 보며 항로를 그려내던 시절부터
영국 해군에서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점이 아마추어 역사학자였던 저자에게는 상당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옛 항해가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며
그들의 항로를 재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저자가 고지도와 해도, 항해, 천체관측 등에 대한
전문가적 식견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이 책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이 됐다.
저자는 이러한 지식을 배경으로 지도를 그린 사람이
해역을 밤에 지났는지 낮에 지났는지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저자는 또 14년 동안이나 1차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도
무려 1백40여 개국, 9백 곳 이상의 문서보관소, 도서관, 박물관, 과학연구소,
중세 후기의 주요 항구 등을 답사했으며
그가 섭렵한 옛 지도, 각종 문헌, 동식물, 유물과 유적, 고대의 건축물, 비석, 바위,
그리고 전문가나 지역 주민들과의 인터뷰 등
고증 자료의 방대함은 그 분량만으로도 압도하고 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했다.
하지만 정화의 업적을 지나가 이어갔더라면 어떠했을까?
그랬다면 어쩌면 현재의 뉴욕(New York)은
뉴베이징(New Beijing)으로 불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저자는 이와 관련하여 재미난 상상을 한다.
“1420년대에 중국의 보선단이 유럽의 수평선 위에 출현했더라면
이후의 세계사가 어떠했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영락제를 계승한 황제들이
외국 혐오증으로 중국을 고립시키지 않았다면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 세계의 주인이 되었을 것이다.”
멘지스의 주장대로라면
아메리카의 존재를 담은 정화 함대의 오리지널 지도가
막상 지나에서는 버림받고 유럽에서는 채용된 결과
세계사의 서양화가 결정됐다는 추론으로 이어진다.
지나가 영국보다 수세기 앞서
미국을 식민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린 셈이다.
따라서 정화 함대의 지도가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는 상상하기조차 힘들다.
실제로 멘지스가 정화 함대의 지도를 베껴 짜깁기한 것으로 분석하는
주요 초기 세계지도는 현재 1천만 달러에 거래되기도 한다.
이미 대항해시대가 400~500년씩이나 지났는데도 말이다.
현재 지나 운남성 쿤밍에
아무 말 없이 누워있는 정화 제독은
자신의 항해 일지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까.
혹시 이미 웅천하고 있는 중국으로 인해 아쉬움을 털어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중국, 세계를 발견하다』(개빈 멘지스 지음/ 조행복 옮김, 사계절 펴냄)
[2006년 9월 조선일보 보도 내용]
중국에서 정화(鄭和) 함대의 함선이 복원됐다.
신화통신은 난징(南京)시 명나라 황실조선소 유적공원에서
정화 함대의 중심 선박을 복원한 낙성식이 열렸다고 25일 보도했다.
복원된 선박은 길이 63.3m, 폭 13.8m 크기로,
6개의 돛대에 모두 8개의 돛을 갖춘 대형 범선이다.
선수 쪽은 2층, 선미 쪽은 3층으로 돼 있으며
한꺼번에 400명을 태울 수 있는 규모이다.
이 선박은 정화 함대에서 중간급 크기의 범선으로 함대의 지휘선 역할을 했다.
정화 함대에서 큰 범선은 길이가 126m, 폭 61.6m에 이르며,
1000명가량의 인원이 승선할 수 있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이 선박 2층은 중국고대항해과학기술박물관으로 꾸며져,
중국 고대 선박의 기원과 항해기술, 조선공업, 해상 무기 등이 전시된다.
환관 출신인 정화는 명나라 영락제(永樂帝)의 명령을 받고
1405년 62척의 선단을 이끌고 해양 원정에 나서
1433년까지 총 7차례 원정을 통해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일대까지 진출했다.
일부 중국 전문가들은 정화 함대가
콜럼버스에 앞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주장한다.
(6)
멘지스가 제시하는 주요한 논거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 문화유산인 조선시대 지도 [강리도]가 포함되어 있다.
[강리도]는 원래 1402년(태종 2) 5월 조선전도인 [팔도도]가 모태인데
그것은 김사형(金士衡;1333~1407),
이무(李茂;1355~1409), 이회(李撓; ?~?) 등이 작성했다.
1403년 조선 사신이 명나라 영락제의 황제 즉위 기념으로 보낸 것으로
원본은 소실됐고
현재 남은 것은 1420년 이후 대대적으로 수정된 사본이다.
크기는 세로 158.5㎝, 가로 168.0㎝으로 비단 바탕에 그린 채색 필사본이다.
유럽 사람들은 이 지도보다 60여년 뒤에야 아프리카 남부에 다다랐다.
[강리도]는 1399년(정조 1) 김사형이
명(明)나라에서 가지고 온
원(元)나라의 이택민(李澤民)이 만든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1330)와
승려 청준(淸濬)의 “역대제왕 혼일강리도”(1328∼1392)의
두 지도를 합하여 개정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두 지도를 합치되
서로 틀리는 곳은 조화시키고
자세하게 더 조사해 교정하여 합쳐진 지도에다
랴오둥[遼東]의 동쪽 부분이 많이 생략된 대신
거기에 다시 조선을 특별하게 크게 넓히도록 했다.
1401년(태종 1) 박돈지(朴敦之)가 일본에서 가지고 온
“늑성신도“라는 새 일본지도에
이키섬[壹岐島]과 쓰시마섬[對馬島] 등을 보충하고
참고하여 일본을 그려 넣어,
그 전보다 완전한 세계지도를 작성(1402)하고
“혼일강리대국지도”라고 이름 붙였다.
이 지도는 1328년에
주사본(朱思本)이 작성한 ‘여도(輿圖)’와
지명이 똑같은 점으로 미루어
그 당시의 지도들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한 것으로 본다.
이회가 [강리도]를 종합하는 기간이 불과 3개월 안팎인 점을 미뤄볼 때
[강리도]의 조선 부분에는 [팔도도]를 그대로 옮겨 실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초기 세계지도도 이런 식의 베끼기나 짜깁기가
일반적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러한 사실은 권근(權近)의 《양촌집(陽村集)》에 의해 전해지며,
이 지도의 필사본이 일본 교토[京都]의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규슈[九州] 시마바라 시[島原市] 혼코지[本光寺]에도 유사한 본이 있다.
당시 조선은 수도 이전과 행정구역의 개편
그리고 압록강·두만강 유역일대의 영토회복과 주민 이주 등
일련의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왕조는 각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부터 지도와 지리지의 편찬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 불안정한 북방 영토 및
고려 말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등에 대비하기 위해
세계지도의 제작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 제작은 행정·국방상의 필요성 이 외에
조선왕조의 국가적 권위와 왕권을 확립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즉, 지나 중심의 세계에 조선왕조가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세계지도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었다.
조선은 세계지도를 만들기 전에
우선 사신을 통하여 다른 나라의 지도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지도 제작에 조정의 중신들이 직접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세계지도의 제작이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서 아랍지역을,
청 준의 혼일강리도에서 지나를,
이회의 팔도 지도가 동서가 남북으로 된 행기도에서
각각 우리나라와 일본을 참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아랍·중국·한국·일본 지도가 합쳐져서 편집된 세계지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명은 성교광피도에서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신대륙이 빠져 있는데
이는 이 지도가 신대륙 발견(1492)보다 무려 9년이나 앞서 만들어 졌기 때문이다.
이 지도에 나타난 서방(西方)에는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약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이 포함되어 있으나
인도반도가 없고,
나일강 수원(水源)의 표현방법이,
특히 1267년에 베이징[北京]에 가지고 왔던
자말 알 딘의 지구의(地球儀)와 비슷하다는 점 등은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이슬람 과학의 영향을 받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학자들에 의하여 제작된
거의 유일한 세계지도로서
조선 전기의 세계지리학의 지식을 결산한 것이며,
17세기에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坤輿萬國全圖)’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까지
가장 훌륭하고, 사실상 유일한 세계지도였다.
이 지도의 큰 결점은 중화적(中華的) 세계관에 의하여
지나와 한국을 너무 크게 그려 넣음으로써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및 아프리카 대륙과 균형을 이루지 못하는 점이다.
곤여만국전도는
마테오 리치가 1602년 목판에 새겨 인쇄한 세계 전도이다.
마테오 리치는 카톨릭 선교를 위해 서양 학문을 중국어로 번역하였으며,
사진에서 보듯이
전 세계를 계란 모양의 화폭에 그린 곤여만국전도를 선보였다.
당시 중화사상을 갖고 있던 중국인들에게 이 지도는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지나인들은 더 넓은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하늘이 둥글고 땅은 사각형이라는 생각도 바꾸게 되었다.
이후 곤여만국전도는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에도 전해져,
지나 중심의 세계관이 수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에는 아프리카의 해안선이 정확하게 그려져 있다.
세계의 지리학자들은 조선 태종 2년(1402)에 만들어진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混一彊理歷代國都之圖, 이하 ‘강리도’)를 보고 놀란다.
강리도는 예수회 신부 마테오 리치가 만든
곤여만국전도(1602)가 들어오기 전에
동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유일한 세계지도이다.
학자들은 특히 아프리카의 남단 부분이
정확하게 그려진 것을 보고 경탄을 금치 못한다.
왜냐하면 바르톨로뮤 디아스가 희망봉을 발견한 1488년까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남쪽이 어떤 형태인지 몰랐기 때문이다.
큰 대륙이 연이어 있다고 믿고서 그린 지도도 많았다.
유럽도 제법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스페인은 금방 식별할 수가 있다.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프랑스의 모습도 뚜렷하게 보인다.
1492년에 아메리카를 조우하게 될 제노아 사람 콜럼버스가 이 지도를 보았다면,
자신의 고향을 이 지도에서 찾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는 자신이 가고자 했던
지팡구(일본)와 카타이(중국)가 얼마나 큰지 놀랐을 것이다.
일본의 모습이 비록 작게 그려져 있지만,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일본 학자들은 큐슈와 혼슈의 위치 잡기가 상당히 정확하고,
간토 이북의 묘사도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교기 지도보다 낫다고 말한다.
다만 일본 열도의 위치를
한반도 남쪽에다 그려 넣어 전체구도가 일그러졌고,
위도도 뒤집어져 있지만,
이는 여백을 살리기 위해 사용한 편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대교린의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애써 세계지도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중국에서 가져온 지도를 그냥 이용할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조선은 자주적으로 세계지도를 그렸다.
국초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존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요동수복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도 않았다.
태종은 권근과 이회에 일러 우리 시각에 선 세계지도를 만들게 했던 것이다.
북쪽으로는 여진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고,
남쪽에는 왜구가 자주 출몰하였기 때문에
건국 초기 조선은 해외정보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회는 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명에서 가져온 성교광피도와 혼일강리도를 합성하였고,
일본에도 사람을 두 차례나 보내 지도를 구하고, 실제조사를 하게 하였다.
강리도는 15세기 조선의 지도제작자들이 얼마나 외부의 정보를 가공하고
합성하는데 뛰어났는지 잘 보여준다.
여기에는 그리스의 위대한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아랍-페르시아의 지도 제작자,
중국과 일본의 지도 제작자들의 지식이 훌륭하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세계지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실측도가 아니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과 조선이 대단히 크게 그려졌고, 일본은 왜소하게 그려졌다.
실제로 중국과 조선의 상대적 크기는 50:1이지만 지도에서는 5:1로 그려져 있다.
한반도의 크기가 10배나 부풀려진 것이다.
한반도보다 2배의 크기를 지닌 일본열도도 지도에서는 1/5 가량의 크기로 그려져 있다.
역시 이것도 10배나 부풀려져 있는 셈이다.
유럽, 아프리카, 아라비아 등 나머지 세계도 대단히 축소된 형태로 그려져 있고,
인도 대륙도 해안선에 붙어있어 금방 식별하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이 지도가 당대 조선의 국제정치적 관심을 보여주는
심상지도(心象地圖)라는 점도 명심하자.
당시 조선은 동아시아 지리정보의 센터였고,
정녕 뛰어난 지정학적 감수성을 지닌 지도제작자들이 많았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탁월한 비전을 가졌고,
전 세계의 지도 지식을 모아서
합성하는 탁월한 능력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전통은 성리학의 융성과 더불어 점차 사라졌다.
뒤늦게도 구한말 유길준이'서유견문’에서
새로운 심상지도를 그리지만, 너무 늦었다.
조선은 세계의 변화에 적응할 시간을 얻지 못했고, 결국 국권을 상실했다.
강리도가 제작된 지도 벌써 6백년이 넘게 흘렀다.
하지만 지정학적 감수성으로 재단하면 지금이 그 때보다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과학적이라는 현재의 세계지도는
얼마나 세계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을까?
배달9201/개천5902/단기4337/서기2004/4/20 이름없는풀뿌리 라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