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洪 益 人 間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1)

이름없는풀뿌리 2015. 8. 7. 10:03

[들어가기 전에]

1. 서언
2. 그 출전과 기원
3. 홍익인간을 잉태한 배달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4. 그 사상의 참뜻
5. 위대한 사상의 탄생과 계승 발전
(가) 탄생 배경

(나) 세계인이 감탄하는 훈민정음
(다) 훈민정음은 과연 세종대왕의 창작품일까?
(라) 그 비밀의 열쇠
(마) 그리하여 민족의 정신이 계승되다.
(바) 영원하여라! 훈민정음! 그리고 홍익인간!

6. 결언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1)- 라강하 -



[들어가기 전에]

먼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란 명제(命題)를 던져주신 삼목림선생님께 감사드린다. 평소에 홍익인간에 대하여 많은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정리하지 못하던 차에 이번 기회에 내가 생각하는 짧은 생각을 정리해 보게 되었다. 본인은 역사학자가 아니다. 그저 “내가 누구이고 나의 조상(祖上)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을까?”하는 궁금증에 역사(歷史)에 관심을 갖게 됐고 그러다 보니 철학(哲學)과 종교(宗敎)와 우주(宇宙)와 고고학(考古學)의 영역(領域)에까지도 자연스레 접근하게 됐다. 물론 스스로 이런 유(類)의 글을 자신있게 쓸 정도로 탐구해보지는 못했지만 실증적(實證的)으로 접근하는 현재의 역사학이 민족의 상고사(上古史)들을 너무 도외시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직도 궁금한 사항들이 많고 공부하고 있는 과정에 있지만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알리고 그에 대한 의견을 구하고 토론함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읽고 편향된 사고방식, 골수국수주의자의 궤변(詭辯)이라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현재의 언로(言路)가 일백퍼센트 햇볕 아래 드러나는 길이 아니듯 승리자의 전유물인 역사기록물이 전적(全的)으로 진실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사는 다양한 의견이 있고 그러한 주변 이야기에 더욱 더 진실이 내재(內在)되어 있을 수가 있으므로 다시 한번 숙고하여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곰팡내 나는 고서적을 뒤적거림이 별도의 직업이 있는 필자의 삶에 경제적으로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또한 그 때문에 아내에게서 핀잔을 듣기 일쑤이지만 이러한 분야를 탐구하다보면 가끔 짜릿한 감동을 느낄 때가 있다. 추측하건대 고고학자가 유물을 찾아서 오지(奧地)를 헤매고, 문학가(文學家)가 밤을 세워 저작 활동을 하고, 건축가(建築家)가 훌륭한 집을 짓기 위해 세계를 섭렵함도 불국사 석가탑(釋迦塔)을 조영(造營)한 백제의 장인(匠人)인 아사달을 구태여 거론 할 것도 없이 그와 같은 심정이리라고 생각한다. 이에 단지 순수한 재야(在野)의 입장에서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숙고(熟考)해 본 "홍익인간(弘益人間)"과 관련한 이야기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1. 서 언(序 言)

우리 나라는 다종교(多宗敎) 국가이다. 지금 이 두 동강난 조그마한 반도 국가에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탄생한 수많은 종교들이 저마다의 믿음을 가지고 인간을 구제하고자 활동을 하고 있다. 필자도 소싯적에 여러 종교들을 기웃거려 보았다. 현재는 무종교자이다. 하지만 항상 종교적인 삶을 지향(指向)하고 있다. 많은 종교가 난립하는 가운데 심히 우려되는 현상중의 하나는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우상(偶像)이라고 타부시하는 독선적(獨善的)인 사상을 가지는 종교들이 일부 있다는 사실이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종교인의 기본예절은 남을 존중하는 신실한 태도를 지녀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그러하지 아니하는 종교집단은 광신도(狂信徒)라고 보면 틀림없다고 단언(斷言)하고 싶다. 이 땅에 살고 있는 배달겨레들 중에는 기독(基督)을 믿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도 따지고 보면 예외 없이 배달의 뿌리에서 뻗어 나왔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진실로 기독(基督)을 섬긴다면 자신의 조상들이 믿음을 가졌던 선도(仙道)와 불교(佛敎)와 유교(儒敎)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관심을 가질뿐더러 깊이 연구하여야 한다고 믿는 바이다. 어떤 기독인은 불교 이야기를 하면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들이 쓰는 말씀들을 가만히 들어 보면 불교 용어(찰나, 피안, 화두, 인연, 인과, 업보, 아수라장, 야단법석 등등)를 자연스레 구사하고 있음을 본다. 이 무슨 모순인가?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기독사상을 갖는 것은 좋다. 그러나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이 땅의 토양과 풍속(風俗)은 거부하지 말자.

 

자신의 할머니들이 정한수를 떠 놓고 삼신할미에게 빌고, 성주신께 빌고, 조왕신께 빌고, 부처님께 빌어서 이 땅이 유지되어 왔음이 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부한다고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더 공부하고 계승 발전시킬 때 신실한 기독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불교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천주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가끔 우리는 우매한 특정종교의 광신도들이 단군 상을 훼손하고 때로는 그 정도를 넘어서서 자녀들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교정에 서 있는 동상의 목을 자르는 소행을 간간히 듣기도 하지만 그래도 참으로 안심(安心)되는 것은 아직 교육의 기본(基本)을 잊지 않고 있다는 고무적인 사실 하나가 있다.

1949년 12월 31일 법률 제 86조로 제정 공포된 교육법 제1조에는 우리나라 교육의 근본이념을 아래와 같이 천명하고 있는데 이제껏 그 이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교육은 홍익인간의 이념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생활능력과 공민으로서의 자질을 구유하게 하여 민주국가 발전에 봉사하며 인류공영의 이상실현에 기여하게 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당당히 배달국이념인 홍익인간.재세이화사상을 명시하고 있음은 홍익인간의 위대한 사상의 참뜻을 인지(認知)하고 못하고의 차원을 떠나서 작금의 식민역사관으로 쓰인 역사교육 환경 하에서 그 숭고한 이념이 수많은 법개정에도 불구하고 용하게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에 전율하여야하는 현실이 애닮기도한 것은 사실이지만 민족의 지상과제인 분단의 통합과 더불어 슬기로운 백의민족(白衣民族)은 반드시 이 지상의 지고불변(至高不變)한 사상을 저마다의 가슴속에 새겨 널리널리 알리고 다물(多勿, 되물림)하리라고 본다.


 

 

2. 그 출전(出典)과 기원(起源)

세계의 여러 나라에는 창세(創世)에 관한 신화와 기원에 관한 설화들이 있다. 그런데 그 신화(神話)와 설화(說話)들은 실증적인 사료만 맹신하는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에게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는 자료로 팽개쳐지기 일쑤이다. 과연 그럴까? 실증적인 사료로 간주되는 유물유적은 지구의 지각운동과 천재지변, 전쟁등으로 사라지게 마련이고 기록적인 측면에서 보면 일반적으로 논(論)하는 역사시대라야 문자의 기원과 더불어 생각하면 고작 5,000년을 넘을 수 없다. 본격적인 역사의 기록은 2,000년이라고 보아야한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 이전의 세계는 흔히 유인원 집단생활처럼 아주 미개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구석기, 신석기라 일컫는 선사(先史)시대에도 현재 시스템 이상의 사회와 문화의 체계가 갖추어져 있었슴을 알아야한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어느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암흑(暗黑)으로 가려진 수백만 겹의 베일에는 역사 이전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엄청난 족적(足跡)이 숨어서 신화와 설화로 구전되다가 다만 추상형(抽象型)의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그러한 추상형의 메시지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구체적인 사실을 추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觀点)을 가지고 홍익인간과 재세이화의 기원을 살펴보기로 한다. 홍익인간과 재세이화를 알려면 단지 그 이념만이 아니고 그 출전(出典)과 기원(起源), 그리고 그에 관련된 왜곡된 우리의 역사, 신화에 대한 고찰(考察)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흔히 홍익인간이나 재세이화를 단군(檀君)의 건국이념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상고사(上古史)에 대한 인식결여와 무관심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물론 단군 시대에 그 이념을 계승 발전 시킨 것은 사실이나 삼국유사에서조차 단군 이전에 기원했슴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일단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출전으로 알고 있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의 내용을 살펴보면,

지나(중국)의 위서(魏書)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 왕검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經에는 無葉山이라 하고 또는 白岳이라고도 하는데 白州에 있었다. 혹은 또 開城 동쪽에 있다고도 한다. 이는 바로 지금의 白岳宮이다)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國號)를 조선(朝鮮)이라고 불렀으니 이것은 고(高)와 같은 시기였다. 옛적 우리나라 기록인 고기(古記)에 의하면 桓國의 庶子 桓雄이 늘 천하에 뜻을 두어 인간 세상의 일을 貪求하였다. 그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굽어 살펴 세 가지가 바른 太白山 주변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할 수 있음을 알고는, 天符印 3개를 주고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한웅이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마루턱 神檀樹 아래로 내려와 그곳을 神市라 하였으니, 그가 이른바 桓雄天王이었다. 風伯, 雨師, 雲師를 거느리고 곡식, 人命, 질병, 형벌, 선악 등을 맡아 보살피되, 무릇 인간의 3백 6십여 가지의 일을 두루 맡아 세상을 순리로써 조화롭게 다스렸다. 이때 한 곰과 한 범이 한 동굴 속에서 함께 살면서 항상 神人 한웅에게 빌어 사람으로 탈바꿈하기를 원하였다. 신인은 곧 신령스러운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개를 주면서,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는다면 곧 人形을 얻게 되리라」고 일러 주었다. 곰과 범이 이것을 얻어먹고 忌한 지 三七日만에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범은 잘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熊女는 더불어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매양 신단수 밑에서 잉태할 수 있게 하여 줄 것을 빌었다. 한웅이 다른 사람으로 변신한 뒤 혼인하여 아들을 낳아 檀君王儉이라 불렀다.

魏書云. 乃往二千載有壇君王儉. 立都阿斯達.[經云無葉山. 亦云白岳. 在白州地. 或云在開城東. 今白岳宮是.] 開國號朝鮮. 與高同時. 古記云. 昔有桓國(國[정덕본], 因[복사본]), 謂帝釋也) 庶子桓雄 數意天下 貪求人世 父知子意 下視三危太伯 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箇 遣往理之 雄率徒三千 降於太伯山頂(卽太伯今妙香山) 神壇樹下 謂之神市 是謂桓雄天王也 將風伯雨師雲師 而主穀主命主病主刑主善惡 凡主人間三百六十餘事 在世理化 時有一熊一虎 同穴而居 常祈于神雄 願化爲人 時神遺靈艾一炷 蒜二十枚曰 爾輩食之 不見日光百日 便得人形 熊虎得而食之 忌三七日 熊得女身 虎不能忌 而不得人身 熊女者無與爲婚 故每於壇樹下 呪願有孕 雄乃仮化而婚之 孕生子 號曰壇君王儉 以唐高卽位五十年庚寅(唐高卽位元年戊辰 則五十年丁巳 非庚寅也 疑其未實) 都平壤城(今西京) 始稱朝鮮 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 又名弓(一作方)忽山 又今彌達 御國一千五百年 周虎王卽位己卯 封箕子於朝鮮 壇君乃移藏唐京 後還隱於阿斯達 爲山神 壽一千九百八歲 唐裵(一然, 三國遺事, 卷一 紀異篇, 古朝鮮)

 

 


일연이 소개한 단군설화를 요약하여 해석하면,

1) 지나(중국)의 위서란 역사책의 기록을 보면

2) BC2,333년(與高同時)에 단군왕검이 아사달을 수도로 조선을 건국했다고 했다.

3) 그런데 우리 옛 기록인 고기(古記)란 책을 보니

4) 옛날에 한국(桓國)이란 나라에 서자(庶子) 한웅이란 왕자가 있었는데

5) 그는 세상일에 유난히 관심이 많았단다.

6) 그 아버지가 보건데 태백산 근처가 홍익인간하기에 알맞은 장소이어서

7) 무리 3,000을 주어 신시를 수도로 독립 국가를 열도록 하였다.

8) 세상사 360가지 일을 재세이화로써 다스렸는데 사람들은 한웅천왕이라고 받들었다.

9) 그곳의 토착 부족들 중에는 문화적으로 조금 뒤떨어진 곰족과 범족이 있었고,

10) 신문화를 갖고 들어온 이주민인 한웅족과 화합하기를 다투었는데

11) 범족은 동화되지 못하고 곰족만이 개혁에 성공하여 한웅족에 동화되었다.

12) 곰족의 공주와 한웅족의 왕자가 혼인하여 단군왕검이란 아들을 낳았다. 

우리는 홍익인간하면 단군으로 알고 있었는데 삼국유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홍익인간이 단군이 아닌 한웅천왕시대의 국가이념이었다는 단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홍익인간이 왜 단군의 이념으로 이해되었을까? 이는 식민사관으로 교육을 받은 어느 누구도 단군 이전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 식민사관으로 이해한다면 절대 곰족과 호랑이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곰과 호랑이의 전설로만 고집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곰의 자손이 되어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식민사관으로 보자면 나이토우 코우지로(內藤虎次郞)교수와 이마니시 류(今西龍)조교가 공모하여 〈삼국유사 정덕본〉을 극비리에 사개(詐改) 영인(影印) 배포한 「昔有桓因(석유한인)」을 절대 「昔有桓國(석유한국)」으로 이해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불교사관으로 점철된 일연의 삼국유사 하나만 잘 살피더라도 단군 이전의 한국및 한웅시대를 발견할 수 있었을텐데 말이다. 물론 서자(庶子)란 말도 "곁부인에게서 난 아들"이 아닌 "뭇 아들 가운데 선택된 아들"이란 의미로 식민사관에 세뇌된 이들에겐 이해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단고기란 책이 나타남으로 인해서 삼국유사와 관련된 홍익인간, 한국, 서자 한웅, 단군, 곰과 호랑이 설화등이 아주 명쾌히 설명되어지는 것이다. 필자는 일찍이 <<왜 배달/개천/단기/서기인가?>>에서 한단고기(桓檀古記)와 부도지(符都誌)에 나온 배달민족의 역년(歷年)을 정리하여 본 적이 있다.

1) 마고할미의 마고성(麻姑城)에서 시작된 朕世시대(BC63,182 ~ BC7,197)로 4대의 왕조가 54,000년간 다스렸다 한다.

2) 한인들이 다스린 한국12연방시대(BC7,197 ~ BC3,898)로 7대의 한인이 3,100년간 다스렸다 한다. 즉 배달 = BC7,197 + AD2003 = 9,200년으로 한인 천제들이 배달민족을 다스린 배달을 역년으로 삼았다.

3) 한웅들이 다스린 배달국(倍達國, 靑邱國)시대(BC3,898 ~ BC2,333)으로 18대의 한웅들이 1565년간 다스렸다 한다. 즉 개천 = BC3,898 + AD2003 = 5,901년으로 배달국의 연호 개천을 역년으로 삼았다.

4) 단군들이 다스린 단군 조선시대(BC2,333 ~ BC238)로 47대의 단군들이 2096년 간 다스렸다 한다. 즉 단기 = BC2,333+AD2003 = 4336년이 단기의 역년(歷年)이다.

삼국유사와 한단고기의 두 기록을 살펴보면 너무나 유사하지 않은가?

다만 일연은 7대의 한인들이 3100년간 다스린

한국12연방을 한국(桓國)이란 한마디로,

또한 18대의 한웅들이 1565년간 다스린

배달국을 서자 한웅이란 한마디로,

또한 47대의 단군들이 2096년간 다스린

단군조선을 단군 왕검이란 한마디로 축약하여 표현함만 다를 뿐이다.

그렇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저작 자료로써 그 당시 쉽게 구해 볼 수 있었던 고기(古記) 즉, 선가사서(仙家史書)들을 참조했음이 분명하다. 동시대인인 김부식과 일연은 분명히 선가사서들을 보았을 것인데 어찌하여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그러한 역사를 언급조차하지 않고 다만 일연만이 축약하여 표현했을까? 그것은 유가들이 우리나라를 소중화(小中華)로 자처한데서 찾아보아야한다. 즉 변방의 역사는 대중화(大中華)인 지나의 역사를 앞설 수 없다는 김부식의 유교사상과 불교와 민간 토속설화에 중점을 둔 일연의 불교적 사고방식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집안(옛 통구)이 고구려의 수도였다는 사실은 삼국유사, 삼국사기 어디에도 없어 평양이 고구려의 수도로만 알았는데 1875년 발견된 광개토대제비를 통하여 겨우 알게 되었다. 1875년 이전에는 그 어느 누구도 만주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음을 몰랐다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사서 뿐 아니라 정통성이 있다는 사마천의 사기나 한서지리지에도 등장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극심하였다. 세종 때 간행된 용비어천가에서는 "삼수갑산을 넘어 압록을 건너면 통구라는 찬란한 문화유적이 있는데 이는 금나라의 도읍지였다."라고 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소중화(小中華)의 극치를 보는 느낌이다.

 

흔히들 한단고기에 나오는 일부 용어(문화, 경제등)의 시대적 불균형을 예로 들어 한단고기가 위서(僞書)라느니 아니라느니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하늘의 메시지라고 알고 있고, 그 자체가 진리라고 믿고있는 성서와 불경조차도 누대(累代)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수 차의 공의회와 결집을 통하여 다듬어 조제한 것일진데 어찌 오랜 기록인 한단고기만 예외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한단고기의 내용이 전적(全的)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연까지 언급한 한국, 한웅 그리고 단군의 역사에 대한 잔영(殘影)들을 깡그리 무시하여야만 할까? 거기 나오는 내용의 기본 골격은 사실로 인정하고 군더더기는 오랜 세월동안 첨삭(添削)되었다고 이해하면 안될까? 그럼 그러한 기록들은 오랜 세월동안 어떻게 전(傳)하여 왔을까? 단지 구전(口傳)으로만 전하다가 한문으로 기록되었을까? 그 어마어마한 내용들은 제법 체계적인 스토리를 구성하고 있는데, 단지 구전(口傳)으로만 전해오다 일반적인 문자의 시대인 BC2,000년 이후에야 비로소 구성되었다면 이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고찰(考察)은 뒤편으로 미루고 우선 한단고기에서 말하는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주인공 한웅천왕에 대해 알아보자.(한단고기의 原文은 생략하고 그 내용을 현대적 사고 방식으로 재해설하기로 한다.)

여기서 한웅천왕은 일개인의 호칭이 아니라, 현재의 대통령처럼 최고지위자의 호칭이란 점을 이해해야 한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배달국에는 18명의 한웅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럼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이념을 펼치며 단군 왕검이 조선이란 나라를 건국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준 시조 한웅은 누구일까? 그는 신시천왕(神市天王)또는 거발한(居發桓)이라고도 불리는 인물이다. 지금부터 일만년 이전에는 사람들이 씨족 단위로 무리를 이루어 먹거리를 찾아 이동생활(移動生活)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그들의 족장을 한인(桓人)이라 칭하며 따르는 씨족이 있었다. 이 한인씨족은 여러 지역으로 이동생활을 하면서 주로 수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민족이었는데 생활 패턴이 수렵에서 농업으로 바뀌면서 정주(定住)생활을 하게 되었고, 삼위산(三危山, 지금의 지나 甘肅城 敦惶縣)과 태백산(太白山, 지금의 지나 섬서성, 물론 지금의 태백산이 아님)이 가장 정주(定住)하기에 좋은 장소임을 알게 되었다.

 

이 두 산 가운데 태백산 근처가 더 좋은 입지(立地)임을 알게 된 한인씨족은 지금부터 9천여 년 전에 태백산 아래 기름진 벌판이 펼쳐진 지나 북부, 만주 지방, 시베리아등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정착하여 부락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 이 지역은 지금은 기후의 변화로 추운 지방이지만 그 당시에는 살기 좋은 온대지방이었다. 이 때부터 한인씨족은 인구가 늘어나 큰 부족을 이루었는데 그때부터 그들의 족장을 한웅(桓雄)으로 고쳐 불렀다. 한웅부족은 태백산에 신단(神檀)을 설치하고 그곳에 신단수(神檀樹)를 심어 종교적 성지(聖地)로 삼고 하늘을 최고신으로 받들면서 농사를 지으며 정착생활을 하였다. 그 후 서기전 3923년에 거발한 한웅이 태어났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거발한 한웅은 어려서부터 영특하더니 부족장인 한웅의 자리에 앉자 종교를 정돈하여 천부인(天符印)을 만들고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등의 관료조직을 정비하여 神을 섬기게 하고 곡물, 명령, 질병, 형벌, 선악 등의 업무를 홍익인간(弘益人間), 재세이화(在世理化)의 정신에 따라 처결하니 부족구성원 모두가 태평하였다.

 

이때부터 한웅부족은 스스로를 조선족(쥬신족)이라 불렀다. 부족내부의 통치 시스템을 정돈한 거발한 한웅은 3,000명으로 조직된 군대를 만들어 주위의 여러 부족을 종교적인 감화와 무력으로 하나하나 복속시켜 부족연맹체를 형성하여 마침내 큰 정치세력을 만들었다. 이때 거발한 한웅에게 복속된 부족 가운데는 곰을 수호신으로 숭배하던 웅족(熊族) 과 호랑이를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호족(虎族)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호족은 새 정치의 틀에 동화되지 못하고 곰족만이 개혁에 성공하여 한웅족의 정치에 공동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렇게 거발한 한웅은 94년간을 재위(在位)하시고 120년을 살았으며 한웅에 의하여 형성된 부족연맹체는 그 후 거발한(居發桓)한웅으로부터 18대인 거불단(居弗檀)한웅까지 1,565년간 계속되었는데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배달국(倍達國)이라고도 부른다. 이때는 바로 신석기시대 후기에서 청동기시대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국가(國家)라는 개념(槪念)이 태동하는 시기였다. 서기전2333년에 거불단 환웅의 아들인 단군왕검이 고조선(古朝鮮)을 건국하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비로소 국가가 출현하였는바 이러한 기초를 마련한 인물이 바로 거발한 한웅이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은 이분을 신시천왕(神弗天王), 개천성조(開天聖祖), 한웅천왕(桓雄天王)등으로 부른다. (계속됩니다. blog.chosun.com/kanghan8)

 

 

배달9200/개천5901/단기4336/서기2003/9/26(초고)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0(퇴고)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상선약수 좋은 글 입니다. 19세기 경에야 서양에서는 민족이라는 개념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서구의 사상은 몽고에게도 속박당하는 시절을 맞은 것 처럼 그 깊이는 그리 크지않습니다. 배달겨레 광명족인 우리 한민족은 이미 배달시대 부터 민족이라는 혈연적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에는 이미 문자는 물론 그 활용법까지 널리 쓰여지게 됩니다. 우리의 상고사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님과같은 고견은 참으로 이 시대의 달디단 샘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6/01/06 00:49:11  
아직은 한단고기나 다른 위서 논쟁이 있는 사서들에 대한 확실한 소견이 없이
지금은 어떤 견해도 표현할 수 없지만 시간을 두고 조금씩 읽어본 후에 나그네의
의견을 말할까 합니다. 다만 위의 문장 중
후찌후지도라(內藤虎次郞) 교수와 이마니시(今西龍)조교가
나이토우 토라우치(內藤虎次郞)) 이마니시 류(今西龍)라고
읽는 것으로 압니다.
앞으로 시간을 두고 읽어 본 후 의견을 말해 보겠습니다. 무 2006/01/06 17:11:46  
나이토우 토라지로(內藤虎次郞)가 맞습니다. 2006/01/06 17:12:50  
풀뿌리 회사일로 서울 출장을 다녀와 보니 제가 제일 좋아하고 존경하는 두 분께서 좋은 글을 남기셨군요. 이 글 뿐이 아니고 산행을 하면서 디카로 찍어 이곳에 올리는 이유도 남에게 제 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디카로 찍은 경치는 직접 보고 느낀 감동을 1/10도 전하지 못함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 1/10이나마 전해드리고 싶어 올린 것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산에 오르기도 힘든데 디카로 찍어가면서 간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저는 이 글을 칭찬받기 위해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제 주장이 옳다고 단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제가 지금까지 탐구한 바에 의하면 이러하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주시면고맙겠습니다. 저는 그저 막연한 傳言을 듣고 이러한 글을 쓰지는 않습니다. 말미에 제가 읽은 책들을 열거하겠지만 異見이 있다면 최소한 그러한 책들을 일독을 하고 의견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또한 중간중간 이곳 제 블러그의 "[스크랩]역사,종교"에 관련 글의 참고자료를 올릴 것인데 그것을 읽고 의견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무님께서 지적하신 나이토우 토라지로(內藤虎次郞))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수정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삼도어를 하지 못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6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1/06 21:59:30  
풀뿌리

內藤湖南(나이토 코난. ないとう こなん).

 : 정보 출전은 http://ja.wikipedia.org/wiki/%E5%86%85%E8%97%A4%E6%B9%96%E5%8D%97 1866년 8월27일(慶應 2년 7월17일) - 1934년6월26일. 이름은 코우지로(虎次郞)이며 코난(湖南)은 호.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와 함께 戰前을 대표하는 일본 동양사 1세대. 시라토리와 격렬한 邪馬台國 論爭을 벌이는가 하면 中國사 시대구분 논쟁에서도 충돌했다. 전전 일본 동양사학을 양분한 한 축이다. 이런 치열한 논쟁 이면에는 학맥도 작용하고 있다. 즉 시라토리가 도쿄제국대학 중심이라면, 후자는 쿄토제국대학을 기반으로 활동했다. 陸奧國 毛馬內村(케마나이무라.けまないむら. 현재의 秋田縣 鹿角市)에서 전 南部藩士인 十灣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3살에 『日本外史를 통독했다고 전한다. 秋田師範學校 졸업 후 綴子小學校(츠즈레코.つづれこ)에서 훈도로 일한 뒤인 1887년(明治 20)에 상경했다. 大內靑巒이 主管하는 불교雜誌인 「明敎新誌」 기자가 되었고, 그 뒤에는 「三河新聞」이라든가 잡지 ‘日本人’, 「大阪朝日新聞」, 「臺灣日報」, 「万朝報」 등의 편집으로 이름을 날렸다. 日露戰爭에서는 開戰論을 展開했으며 1907年(明治四十年)에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현 京都大學) 文科大學史學科에 講師로서 초대되었다。1909년에 교수가 되고 1910년에 당시 총장의 추천을 얻어 문학박사가 되어 20년을 東洋史 담당으로 일하면서 京大의 學寶라고까지 일컬어졌다。그의 사학을 대표하는 것으로서는 중국사 시대구분을 唐과 宋 사이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는 秦漢시대를 上古로 규정하고 後漢에서 西晋 사이를 제1차 과도기로 삼았으며, 五胡十六國時代부터 唐中期까지를 중세로 삼았으며 당 後期부터 五代十國時代를 제2의 과도기로 삼고、이 시대를 계기로 크게 사회가 변용했다고 보았다. 邪馬台國 논쟁에 대해서는 시라토리의 큐슈설에 대해 기내설(畿內說)을 주창하면서 격한 논쟁을 벌였다. 이에 "東의 白鳥庫吉, 西의 內藤湖南", 實증학파의 內藤湖南、文獻학파의 白鳥庫吉"이라고 칭해졌다. 1926년(大正十五年)에 퇴임해 京都府 미카노하라(병?原村. みかのはら. 현재의 加茂町)에 은거하며 독서로 나날을 보냈다。1934年 6月26日死去해 東山의 法然院에 매장됐다。 주요 저작으로는 內藤湖南全集 日本文化史硏究 支那繪畵史 支那史學史 가 있다. 2005.05.16 09:42:38  2006/01/08 17:43:49  

풀뿌리

이마니시 류[今西龍, Imanishi Ryu]

1875~1932. 일본의 동양사학자. 신라·백제 등 한국고대사를 연구했다. 1903년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 사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조선사를 연구했다. 1906년 한국에 건너와 신라의 고도(古都) 경주를 답사했다. 1914년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 조교수를 거쳐 교수가 되었다. 그후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에 임명되어, 재직중에 〈단군설화 檀君說話〉·〈백제국도한산고 百濟國都漢山考〉 등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특히 평안남도 용강군에 있는 점제현신사비를 발견하고 그에 관한 논문인 〈열·대·패 삼수고 洌帶浿三水考〉를 발표했다. 한편 한국 사서(史書)를 연구·조사하여 안정복(安鼎福)이 주석을 단 중종본(中宗本) 〈삼국사기〉를 발굴하기도 했다. 1922년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후 2년간 중국에 유학, 베이징대학[北京大學]에서 조선사를 강의했다. 1925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가 설립되자 조선사 교수가 되었다. 저서로는 〈신라사연구〉·〈백제사연구〉·〈조선고사의 연구 朝鮮古史の硏究〉·〈조선사의 간 朝鮮史の〉 등이 있다. 2006/01/09 04:30:40  

폭풍전야 스토머님 블로그에 새해 인사차 들럿다가 풀뿌리님의 글을 보고 찾아 왔습니다.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아직 우리역사의 배움이 짧아 깊이있는 대화상대는 안되어도
멀직히 뒤에서 풀뿌리님의 글 읽으며 많은 배움의 장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부디 새해 몸 건강하시고 댁내 두루 평안하시길 바람니다.^^* 꾸벅.  2006/01/11 22:58:35  
풀뿌리 [홍익인간]연재건으로 이제야 답신드립니다. 방문 감사드리고 [홍익인간]은 일단 끝냈는데 많은 토론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5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1/15 21:53:19  
풀뿌리 아사달
영지(影池)는 경덕왕 10년(751) 재상 김대성(金大城)이 불굴사를 지을때, 옛 백제지역 출신의 석공 아사달(阿斯達)과 그의 아내 아사녀(阿斯女)의 애달픈 전설이 서린 곳이다. 황룡사 9층탑을 만든 백제 아비지의 후예로써, 불후의 걸작인 다보탑과 석가탑을 완성하기에 여념이 없던 남편 아사달을 밤낮 그리워 하다, 여인의 몸으로 멀고 험한 이곳 서라벌까지 찾아온 아사녀는, 남편 아사달을 금방 찾아 뵈질 못하고 탑이 완성될 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한편, 아사달은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가 이곳 서라벌 까지 남편을 찾아 왔다는 사실을 모른체 열심히 돌을 빚고 다듬었다. 그리워 눈물 짓는 아사녀에게, 불국사 스님께서 어디메쯤에 있는 영지(影池)란 연못에 가면 토함산이 비치고, 탑을 만들고 있는 남편의 모습이 비칠것이란 소리를 해주어 이 연못을 찾았다. 연못은 남편의 모습이 비치기는 커녕, 애잔한 물결만 일었는데, 어느날 바람이 자는가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물속에 탑의 환영(幻影)이 비치었다. 얼마나 그리웠던가~ 오매불망 그리워 하던 남편의 모습이 물결에 비치자, 자신도 모르게 그만 물 속으로 뛰어 들고 말았다. 세월이 흘러 드디어 탑을 완성했는데, 서라벌에 왔다는 아사녀의 소식을 그때서야 듣게된 아사달은 황급히 영지를 찾았으나 이미 아내는 죽고 없었다. 그리움은 아사녀에게만 있었던게 아니었다. 남편 역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내 아사녀가 너무도 그리웠었다. 어느날, 아사달이 아내의 죽음을 애썩해 하다 아사녀를 부르며 통곡하다 연못속에 뛰어 들었는데 그때 못에 그림자가 비친탑을 유영탑(有影塔), 비치지 않는 석가탑을 무영탑(無影塔)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못가에는 옛날 두 사람을 위해 지은 영사(影寺)의 돌부처가 남아 있으며, 늦가을 맑은날 오후에는 불국사가 있는 토함산의 그림자가 못에 비치기도 한다. 배달9203/개천5904/단기4339/서기2006/1/19 이름 없는 풀뿌리 라강하 2006/01/19 16:31:07  
풀뿌리 일연[一然] 1206(희종 2)~1289(충렬왕 15). 고려 후기의 승려.
속성은 김씨,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경주 장산군(章山郡 : 지금의 경산시) 출신으로, 아버지는 지방 향리 출신인 언필(彦弼)이다. 9세 때 해양(海陽 : 지금의 光州) 무량사(無量寺)에서 취학(就學)했으며, 14세 때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출가하여 대웅장로(大雄長老)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1227년(고종 14) 선불장(選佛場)에 나아가 상상과(上上科)에 급제한 이후 포산(包山 : 경주 근처 현풍현 비슬산)의 보당암(寶幢庵)·무주암(無住庵)·묘문암(妙門庵) 등지에서 머물렀으며, 12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1246년 선사(禪師)가 되었다. 당시 정치적으로 최이(崔怡)가 정권을 담당하던 시기로 대몽항쟁기였는데, 일연은 포산에서 22년을 보내면서 뚜렷한 행적을 남기지 않았다. 1249년 최씨 무인정권과 밀접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정안(鄭晏)의 초청으로 남해(南海) 정림사(定林社)에 머물게 되었다. 이는 일시적으로 최이에게 반발한 정안이 수선사(修禪社) 계통의 승려를 기피하여 가지산문(迦智山門)의 일연을 초청한 것인데, 이로 인하여 가지산문의 승려들이 최씨 정권과 연결되어 1251년에 완성된 대장경 조판 중 남해분사(南海分司)에서의 작업에 참가하게 되었다. 1259년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1261년(원종 2) 원종의 명에 따라 강화도에 초청되어 선월사(禪月社)에 머물렀는데, 이때 지눌(知訥)의 법맥을 계승했다. 이는 그가 가지산문에서 사굴산문(堀山門)으로 법맥을 바꾼 것이 아니라 원종을 옹위한 정치세력이 불교계를 통솔하기 위해 일연을 이전의 수선사 계통의 승려를 대신한 계승자로 부각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연은 중앙정계와 관련을 맺은 이후, 이를 배경으로 가지산문의 재건에 힘썼다. 1268년 왕명에 의해 운해사(雲海社)에서 대장낙성회(大藏落成會)를 주관하고, 1274년 비슬산 인홍사(仁弘社)를 중수한 후 왕의 사액에 따라 인흥사(仁興社)로 개명했으며, 같은 해 비슬산 용천사(湧泉寺)를 불일사(佛日社)로 개명했다.  2006/01/19 16:43:09  
풀뿌리 1277년(충렬왕 3)부터 충렬왕의 명에 따라 운문사(雲門寺)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곳에서 〈삼국유사 三國遺事〉의 집필에 착수했다. 1281년 충렬왕이 동정군(東征軍)을 격려하기 위하여 경주에 왔을 때 부름을 받고, 이 인연으로 다음해에 개경 광명사(廣明寺)에 머물게 되었다. 1283년 3월 국존(國尊)으로 책봉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다. 1284년 인각사(麟角寺)에서 2회에 걸쳐 구산문도회(九山門徒會)를 열었는데, 이는 가지산문이 일연을 중심으로 고려 불교계의 전 교권을 장악한 것을 뜻한다. 1289년 7월 왕에게 올리는 글을 남기고 입적했다. 일연은 12세기 이후 고려 선종계에 유행한 임제선(臨濟禪)의 영향에 의해 간화선(看話禪)에 심취했으나, 남해 정림사에 초청을 받아 머물게 되면서 이미 기존의 임제종 계통의 간화선을 적극 수용하여 정리한 단계에 있던 수선사의 선풍(禪風)에 의해 더욱 세련된 간화선에 심취했다. 하지만 특정 신앙이나 종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불교신앙을 표방하는 저술을 찬술했으며, 선·교(禪敎)를 막론하고 많은 불교 서적을 편수했다. 그의 저술의 특징은 선종 계통이 주를 이루며, 사전(事典)의 성격을 지닌 저작이 많다는 것이다. 또 〈중편조동오위 重編曹洞五位〉에는 초기 성리학적 분위기와 서로 맥락이 닿는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한편 〈삼국유사〉 찬술을 위해 1278년에 이미 〈역대연표〉를 작성하고, 이후 그의 나이 73~76세에 운문사에서 〈삼국유사〉를 찬술했다. 저서로는 〈어록 語錄〉 2권, 〈게송잡저 偈頌雜著〉 3권, 〈삼국유사〉 5권, 〈중편조동오위〉 2권, 〈조파도 祖派圖〉 2권, 〈조정사원 祖庭事苑〉 30권, 〈선문염송사원 禪門頌事苑〉 30권, 〈대장수지록 大藏須知錄〉 3권, 〈제승법수 諸乘法數〉 7권 등이 있다.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2006/01/19 16:43:18  
풀뿌리 김부식[金富軾]1075(문종 29)~1151(의종 5).고려 중기의 유학자·역사가·정치가. 경주세력을 대표했으며, 서경 천도를 주장한 묘청(妙淸)의 난을 진압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한편 현존하는 역사서로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신라왕실의 후예로 증조부 위영(魏英)이 신라가 망할 무렵 고려 태조에게 귀의, 경주지방의 행정을 담당하는 주장(州長)이 되었다. 그의 가문이 중앙정계에 진출한 것은 아버지 좌간의대부 근(覲) 때부터였다. 부식은 고려 중기 정계에서 활약한 부필(富弼)·부일(富佾)의 동생이며, 부의(富儀)의 형이다. 이들은 모두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했다. 본관은 경주. 자는 입지(立之), 호는 뇌천(雷川). 1096년(숙종 1) 과거에 급제,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사록(司錄)과 참군사(參軍事)를 거쳐 직한림(直翰林)이 되어 중앙에 들어온 뒤 우사간(右司諫)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다. 인종 즉위 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자겸을 비판,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로 부르자는 주장 등을 앞장서 반대했다. 1126년(인종 4) 이자겸이 제거된 뒤 경주세력의 대표로서 1130년 정당문학 겸 수국사(政堂文學兼修國史), 1131년 검교사공참지정사(檢校司空參知政事), 1132년 수사공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司空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2006/01/19 16:45:47  
풀뿌리 묘청(妙淸) 등 서경을 근거로 한 신진 관료세력이 칭제건원을 주장하고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 하자 극력 반대하여 시행되지 않게 했다. 1135년 묘청이 서경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키자, 개경에서 묘청의 의견에 동조하던 정지상(鄭知常)·김안(金安)·백수한(白壽翰) 등을 죽이고 원수(元帥)가 되어 삼군(三軍)을 이끌고 출정했다. 처음에는 완강히 저항하는 반군에 고전했으나 1년 2개월 만에 진압하고, 이 공으로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에 책봉되고 검교태보수태위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檢校太保守太尉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가 되었다. 아울러 감수국사 상주국 태자태보(監修國史上柱國太子太保)의 직도 겸했다. 1138년 집현전 태학사, 태자태사(太子太師) 등을 다시 겸했고, 1142년 벼슬에서 물러난 후 동덕찬화공신(同德贊化功臣)에 봉해졌다. 1145년, 정권을 장악한 경주계통 문신귀족의 역사적 정통성 확보를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했다. 스스로 편찬체제를 정하고 사론을 집필하기도 했다. 명문장가로서 인종 초년에 박승중(朴昇中)·정극영(鄭克永)과 함께 〈예종실록〉을 편찬했고, 1146년 의종 즉위 후 낙랑군개국후(樂浪郡開國候)에 봉해짐과 함께 〈인종실록〉의 편찬을 주재했다. 그의 문집은 20여 권이 되었다 하나 현존하지 않는다. 많은 글이 〈동문수 東文粹〉와 〈동문선〉에 전하는데, 우리나라 고문체의 대가라 할 수 있다. 늙어서는 개성 주위에 관란사(觀爛寺)를 원찰로 세워 불교를 수행하기도 했다. 1153년(의종 7)에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으며, 인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묘청의 난, 삼국사기) 金武鎭 글 2006/01/19 16:4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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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중국 25사(二十五史)의 하나. 북제(北齊) 사람 위수(魏收)의 저서로 《북위서(北魏書)》 또는 《후한서(後漢書)》라고도 한다. 114권(本紀 12권, 志 10지, 列傳 92편)으로 되어 있다.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2년(551)에 만들어졌고, 현재 전하는 것은 잃어버린 부분을 송(宋)나라 때 보완한 것이다. 북위(北魏) 건국 이전부터 시작하여 북위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동위(東魏)를 정통이라 하였으나 북제(北齊)를 왜곡하고 열전(列傳)의 서술이 불공평하여 후세의 사가(史家)들로부터 예사(穢史)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2006/01/20 12:0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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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麻姑)의 역사적 고찰
① 우리 기록에 麻姑가 처음 등장하는 때는 신라 내물왕(奈勿王) 때이다. 당시의 재상 朴堤上(363-419?)이 징심록澄心錄 15誌를 지었는데, 5誌 부도지符都誌에 인류문명인의 시조로 나온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마고가 등장하는 때가 지구의 운동으로歲差運動으로 지구가 뒤집어져 바다가 육지가 되고 육지가 바다가 되고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던 때라고 한다. 혹은 헤성과의 충돌로 이러한 현상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이때가 지금으로부터 약 14,000년 전으로, 대빙하기의 말기의 혹독한 추위가 걷히어 가던 때이다. 남태평양 상에서 뮤 대륙이 침몰하고, 대서양에서 아틀란티스가 침몰했는데, 뮤 대륙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마고라고 하고, 아틀란티스에서 살아남은 사람을 멜기세댁이라고 한다. 마고에 대한 기록은 인도 등 동남아시아의 사원에 보관되어 있는 토판에 쇄기문자로 기록되어 있고, 멜키세댁은 구약성서 창세기에 영원히 죽지 않는 자로 기록이 되어 있다.

 

② <부도지>에 따르면, 인류의 조상 마고는 두 딸 궁희와 소희를 낳았고, 궁희에게서 청궁과 황궁이 태어나고, 소희에게서 백소와 흑소가 태어난다. 지금 지구상에 살고 있는 원시인이 아닌 문명인으로 불리는 인류는 이분들의 후손이 된다. 우리는 황궁의 후손으로, 황궁에게서 유인이 태어나고, 유인에게서 한인이 태어나고, 한인에게서 한웅이 태어나고, 한웅에게서 단군이 태어난다. 마고에서부터 단군까지의 역사가 1만년이다.

 

③ 이후로 마고에 대한 기록은 우리 역사 곳곳에 나온다. 마고는 태초의 하늘에서는 직녀성이고, 북두칠성에 좌정하여 곰으로 불린다. 큰곰별자리와 작은곰별자리가 이리하여 생긴다. 마고의 자손은 칠성의 자손으로 불리기 시작한다. 곰은 단군왕검 때에 와서 검으로 변한다. 검은 곰이고 곰은 한자로 쓰면 고마固麻이다.

 

④ 삼각산 기슭에 소서노와 온조 모자가 백제를 세울 때, 이곳을 한자로 위레성慰禮城이라고 하였다. 인수봉에 우레가 치므로 우레성이라고 한 것을 한자로 바꾸어 쓰다 보니 위례성이라고 한 것이다.

 

⑤ 南齊史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북두칠성은 그 음이 곰이다. 한자로 고마固麻로 쓴다. 고마는 백제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남사백제전南史百濟傳?(?康熙字典? 부수-麻 1622쪽 國際文化出版公司)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남사는 南齊史이다. 百濟國號王所都城曰固麻邑曰?魯如中國言郡縣也(백제국호왕소도성왈고마읍왕첨로여중국언군현야) 백제의 국호는 왕이 머무르는 도성으로 하는데, 고마읍이라고 하고, 첨로라고도 하고, 중국말로 군현과 같다. 위 글에서 고마固麻는 우리글 곰을 한자로 바꾸기 위하여 고마로 풀어 쓴 것이다. 이글은 백제의 도성이 ‘곰’으로 불렸다는 증거이다. 첨로?魯의 ‘첨’은 단군왕검의 검儉과 같은 뜻으로 쓴 말이다. 두 말 다 ‘처음’이라는 뜻이다. 이들 문자는 모두 다 마고에 근원을 두고 있다. 이 말의 중요한 점은 마고를 계승한 조선과 백제가 국조國祖를 마고로 하였다는 점이다. 삼각산에 마고가 관련이 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곰이 다시 한자화 하여 웅진熊津이라는 지명이 생긴다. 웅진은 곰나루(지금의 公州)의 한자화 이다. 마고는 지방마다 사당을 지어 모시는데, 이 사당을 할미당 또는 삼신당이라고 하였다. 할미는 한어머니라는 뜻이다. 2006/01/20 12:12:49  

풀뿌리 시베리아 [Siberia]
러시아어로는 시비르(Sibir)라고 한다. 미국과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시베리아를 ‘우랄산맥에서 태평양 연안까지’로 생각한다. 그러나 러시아 연방에서는 자연 ·인문 양면에서 우랄산맥 동쪽 사면에서 태평양 사면의 하천 분수령까지를 ‘시베리아’라고 부르고, 태평양 사면 부분을 ‘극동부’라고 하여 시베리아와는 명확히 구분한다. 또, 러시아 연방 국민경제회의의 경제지역 구분에서도 ‘넓은 의미의 시베리아’는 우랄 ·서시베리아 ·동시베리아 ·극동지방 등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러시아의 개념으로 시베리아는 동서 7,000 km, 남북 3,500 km, 면적 650만 km2이고, 극동지방을 포함한 광의(廣義)의 개념으로는 면적 1380만 7037km2으로 아시아 대륙의 1/4을 넘는다.  2006/01/24 21:46:49  
풀뿌리 산시성 [陝西省(섬서성), Shaanxi]
면적은 19만㎢, 인구는 3605만 명(2000)이다. 성도(省都)는 시안[西安]이며, 황허강[黃河] 중류 유역에 있다. 시안 부근에는 주(周)·진(秦)·한(漢)으로부터 수(隋)·당(唐)에 걸쳐 역대 국도(國都)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당시 중국의 문화·정치·경제의 중심지로서 번영하였다. 주변의 웨이허평원[渭河平原]에는 베이징원인[北京原人:북경원인]과 함께 란톈원인[藍田原人]의 유적과 시안반포유적[西安半坡遺蹟] 등 원시고대 이래 당대(唐代)까지의 유적이 많으며, 현재 중국 시베이지구[西北地區]의 현관에 해당한다. 친링산맥[秦嶺山脈]이 성의 남부를 동서로 달리며, 그 남쪽은 양쯔강[揚子江] 수계의 한수이강[漢水]의 유역이고, 그 북쪽은 황허강 유역에 속한다. 친링에서 성 남단의 다바산지[大巴山地]까지는 친바산지[秦巴山地]로 불리는데, 두 산지 사이에 한수이강에 연하여 비옥한 한중[漢中]·안캉[安康]의 양 분지가 있다. 친링의 단층애(斷層崖) 북쪽은 웨이허 평원으로 관중분지라고도 한다. 관개용수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농업이 성하여 보리·목화 등의 주산지로 알려져 있다. 북부의 산베이고원[陝北高原]은 황투고원[黃土高原]의 일부로 해발고도 1,000m 전후이며, 황토층이 두껍게 퇴적되어 있다. 고원면은 평탄하나 수직의 곡벽(谷壁)을 갖는 우열(雨裂)과 하곡이 발달해 있다. 황허강은 본성과 산시성[山西省] 사이를 깊은 협곡을 만들며 남류하고, 본성에서 흘러나오는 우딩강[無定河]·옌허강[延河]·뤄허강[洛河]·웨이허강을 합류시키는데, 이들 지류로부터 대량의 진흙이 유입되어 황허강 흙탕물의 원인이 되고 있으며 현재 물과 흙의 유출을 방지하기 위하여 수토보지공사가 넓은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다. 기후는 1월 평균기온이 3~10℃, 7월 평균기온 22~28℃이고, 연강수량은 1000mm이다. 한중에서는 841mm, 북단의 위린[楡林]에서는 396mm로서 친링 이남은 온난습윤하나 북쪽으로 갈수록 한랭·건조하다. 연강수량은 적으나 강우는 대개 집중호우의 형태이기 때문에 수해·한발 등을 초래하고, 북쪽에서는 모래바람의 피해도 많다. 농업은 웨이허 평원이 중심이지만 한중분지에서도 많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북쪽에서도 농지 조성이 많이 이루어져 농업이 발전을 보이고 있다. 주요 농산물로는 밀·옥수수·수수 등이 있고, 상품작물로는 목화·콩이 있다. 산베이에서는 양·염소의 사육이 활발하다. 친링산 기슭에는 과수원이 많으며, 남쪽에는 쌀·차 외에 동유(桐油)·칠(漆)·한방약의 원료 등 임산물이 많다. 광물자원은 석탄·석유·철·사금·소금 등이 풍부한데, 소금은 옌츠[鹽池]에서 채취한다. 석탄은 징허강[涇河]·뤄허강[洛河] 하류 유역에 대상(帶狀)으로 달리는 탄층이 있고 퉁촨강[銅川]이 그 중심이며, 석유는 옌창[延長]에서 산출한다. 최근에 와서 시안[西安]·셴양[咸陽]·바오지[寶鷄] 등의 공업화가 현저하여 철강·기계·전기·방직·화학플라스틱·시멘트 등 각종 공장이 들어서고 있다. 교통은 룽하이철도[隴 海鐵道:連雲港~蘭州]가 성의 중앙을 횡단하며, 바오지에서 쓰촨성[四川省]을 지나는 바오청철도[寶成鐵道]와 셴양~퉁촨 간 지선도 있다. 시안에는 전국 각지에 대한 항공로도 열려 있다. 성내 교통은 버스 교통을 주로 하며 시안·한중·옌안이 그 중심이다. 성도인 시안 외에 셴양·바오지·퉁촨·옌안의 4개 시가 있다. 2006/01/25 12:10:00  
풀뿌리 간쑤성 [甘肅省(감숙성), Gansusheng]
면적은 93만 ㎢, 인구는 2562만 명(2000)이다. 약칭은 간[甘], 성도(省都)는 란저우[蘭州]이다. 황허강[黃河] 상류와 닝샤[寧夏]·산시성[陝西省]·쓰촨성[四川省]·칭하이성[靑海省]·신장[新疆]·네이멍구[內蒙古], 몽골공화국과 접한다. 중국과 서방세계를 연결해주는 성으로,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이다. 행정구역은 7개의 구와 5개의 시, 9개의 현급 시, 60개의 현, 7개의 자치현으로 나뉜다. 주민은 대부분이 한족(漢族)이나, 북서부의 사막·초원지대에 몽고족, 고원지대 남서부에 티베트족, 허시후이랑[河西回廊]과 성 동부에 후이족[回族]이 분포하여 자치주와 자치현을 구성하고 있다. 산지 56%, 구릉과 평원지대가 22%를 차지한다. 황허강 상류부를 차지하는 네이멍구고원, 황투[黃土]고원, 칭장[靑藏]고원의 접촉지대에 해당되며, 가장 낮은 룽시분지도 해발고도 1,000m를 넘는다. 룽시분지 남쪽은 친링[秦嶺]산맥, 동쪽은 리우판[六盤]산맥, 서쪽은 치리엔[祁連]·시칭[西傾]산맥 등의 산지이고, 북쪽의 우차오링[烏齧嶺]을 넘으면 북서쪽으로 면적 50∼70㎢, 길이 1,000km에 달하는 좁고 긴 허시후이랑이 뻗어 있다. 허시후이랑은 일부의 오아시스를 제외하면 거의 사막지대를 이루나, 옛날부터 중국 본토와 서역(西域)을 잇는 주요 교통로가 되었으며, 우웨이[武威]·장예[張掖]·주취엔[酒泉]·위먼[玉門]·둔황[敦煌] 등 고대 실크로드의 역사적인 도시가 많다. 한(漢)나라 때는 랑저우[凉州], 원(元)나라 때는 간수와 산시의 행성(行省)에 속하였고, 청(淸)나라 때 간성이 설치되었다. 실크로드가 개통되면서 수당(隨唐)시대에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 황허는 성(省)의 남서에서 북동으로 흘러 칭하이성과의 경계에 리우자샤[劉家峽]의 협곡을 이루고 유역에 국부적인 소평원을 형성한다. 또 남부에는 자링강[嘉陵江] 상류를 이루는 바이룽강[白龍江]이 흘러, 황허강과 더불어 주요 농업용수원이 된다. 허시후이랑의 수러허[疏勒河]와 뤄수이강[弱水江]은 내륙하천이다.  2006/01/25 12:13:01  
풀뿌리 연강수량 300~560mm의 건조한 기후이고, 1월 평균기온 -10~2℃, 7월 평균기온 20~24℃로 연교차가 크다. 대륙성기후로 공기가 건조한 사막기후와 비슷하며, 지진과 가뭄이 자주 발생하여 관개시설 확충에 주력하고 있다. 농경지는 거의 룽시분지에 집중되어 밀·조·보리·수수 등을 재배하며, 그 중 밀의 경작면적이 총경지의 40%를 차지한다. 경제작물로는 둔황의 목화, 란저우의 담배 및 마류(麻類) 생산이 많고, 란저우 일대의 수박이 유명하다. 목축이 크게 발달하여 치롄산록을 중심으로 양을 비롯한 각종 가축이 사육되며, 특히 북부의 낙타털은 중국 제1의 품질로 손꼽힌다. 그 밖에 산간지대에는 산짐승이 많아 사향·녹용 등의 수출이 활발하다. 지하자원은 위먼의 석유, 장예·란저우의 석탄, 바이인[白銀]의 구리 외에 치롄산지에는 야금·구리·철 등의 매장량이 풍부하다. 공업은 톈수이[天水]·바이인·란저우·위먼 등 신흥공업도시에서 철강·기계·방직·석유화학·원자력공업이 발달하였다. 란저우는 교통의 요충지로, 베이징[北京]·바오터우[包頭]·시닝[西寧]·우루무치[烏魯木齊]·시안[西安] 등지와 철도로 연결된다. 단둥[丹東]에서 라싸까지, 란저우에서 징훙[景洪]까지 통하는 13개 도로와 바오지[寶鷄]·인촨[銀川] 등의 고속도로가 있다. 란저우에서 바오터우에 이르는 황허강 상류의 수운(水運)에는 물의 흐름이 급하여 가죽으로 만든 배를 이용하기도 한다. 역사인물로는 당(唐)나라 왕 이세민(李世民)과 시인 이백(李白)이 유명하다. 문화유적으로는 둔황의 첸포동[千佛洞]·톈수이의 마이지산[麥積山] 석굴·지아관장성[嘉關長城]·위취엔산[玉泉山] 등이 있다. 2006/01/25 12:13:05  
풀뿌리 선사시대 [先史時代]
일반적으로는 문헌사료(文獻史料)가 존재하지 않는 시대, 즉 문헌사료에 의하여 씌어진 역사에서 취급하는 시대에 대하여, 19세기 이래 고고학의 발달에 의하여 새로이 알게 된 인류의 원시시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보통 이 용어 속에는 고고학에서 다루는 석기시대·청동기시대 내지 철기시대가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나, 현존하고 해독이 가능한 문헌사료가 나타나는 시대는 지역에 따라 다르고 또 그 시대의 문화·사회·경제의 발전단계도 각양각색이니만큼, 이 용어의 개념은 상당히 막연하다.  2006/01/25 14:28:20  
풀뿌리 역사시대 [歷史時代]
문자 발생 이후 인류의 과거는 크게 나누어 선사·역사시대의 둘로 구분할 수 있다.이것은 다만 연구방법에 의한 구별인데, 문자로 쓰여진 기록[文獻資料]에 의하여 알 수 있는 과거가 역사시대이다. 그러나 근래 고고학의 발달로 문헌자료뿐만 아니라, 구비(口碑)·회화(繪畵)·유물(遺物) 등도 그 연구대상이다. 고고학 [考古學, archaeology]인간이 남긴 유적 ·유물과 같은 물질 증거와 그 상관관계를 통해 과거의 문화와 역사 및 생활방법을 연구하는 학문. 자연계에서 인간이 남긴 각종 물질적 흔적의 성격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밝혀 인간의 행위양상과 사회 ·문화 ·경제적인 여러 측면을 연구하는 과학이다. 문자가 없는 시대의 인간 역사의 이해에 필수불가결한 학문으로서, 고고학의 발달과 더불어 인류가 언제 기원하였으며, 세계 각지의 다양한 문화가 어떠한 과정을 겪어 오늘날과 같은 상태에 도달할 수 있게 되었는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근대 이전의 서양 ·동양 문화권에서도 자연적으로 발견된 고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과 같은 학문체계로서의 고고학은 19세기 중반에 성립되었다. 고고학이 등장하기 이전의 고대, 특히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해석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와 종교적 설명에 따라 이루어졌다. 서양에서는 성서의 《창세기》에 따라 인간은 기원전 4004년에 지구상에 등장하였다고 한 영국의 한 주교(主敎)의 해석은 서양에서 19세기 중엽까지도 널리 통용되었다. 마찬가지로 한국과 같은 동양권에서도 고대의 석기는 흔히 오행상생설(五行相生說)에 따라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명이 통용되었다. 그러나 유물의 재질에 따라 고대의 문화사를 구분하는 기준이 확립되고, 유적을 구성하는 퇴적층의 해석에 대한 방법론이 확립되며, 유물의 형태적 변화가 지닌 시간적 의미에 대한 과학적 이해가 이루어지면서 고고학이 등장하였으며, 이로부터 인간의 과거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가능하게 되었다. 고고학은 20세기에 들어와 더욱 풍부하고 다양한 내용의 종합과학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래 눈부신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자료분석기법과 연대측정방법의 응용과 더불어, 고고학 연구의 시간적인 폭과 연구대상 역시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오늘날 고고학은 500만 년 전 무렵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지구상에서 살아오며 남긴 온갖 대상을 연구한다. 심지어 일부학자들은 현대 물질문명의 부산물인 쓰레기를 통해 현대의 물질문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있는데, 고고학의 연구영역은 계속 확대되어 나갈 것이다.  2006/01/25 16: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