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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연수 [桂延壽, ?~1920]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운초(雲樵)·일시당(一始堂)이다. 한말에 민중계몽운동을 한 이기(李沂)의 문인으로,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을 지낸 이상룡(李相龍)의 지휘 아래 참획군정을 맡기도 하였다. 단군사상을 연구하고 역사의식 회복을 위해 이기와 나철(羅喆)이 창설한 단학회(檀學會)의 2대 회장을 지낸 뒤 홍범도(洪範圖)·오동진(吳東振)의 지원을 받아 1911년에 《한단고기(桓檀古記)》 30권을 편찬하였다. 《한단고기》는 신라의 승려 안함로(安含老)와 원동중(元董仲)이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의 역사를 서술한 〈삼성기(三聖記)〉, 고려시대의 문신 이암(李喦)이 단군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檀君世記)〉, 고려 말의 학자 범장(范樟)이 북부여의 역사를 서술한 〈북부여기(北夫餘紀)〉, 조선시대의 학자 이맥(李陌)이 한국(桓國)·신시시대·고려에 대한 내용을 다룬 〈태백일사(太白逸史)〉등을 한데 묶은 역사책이다. 단군조선을 대통일 민족국가로 서술한 《한단고기》의 편저자인 그는 만주(滿洲:지금의 중국 둥베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0년 일본 밀정에게 살해되었다. 제자 이유립(李裕岦)에게 다음 경신년인 1980년에 《한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하라는 말을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유립은 1979년에 이 책을 영인하였다. 2006/01/19 22:44: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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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단고기(桓檀古記) 환단고기는 계연수 선생 약 13종의 고대사서를 한데 묶어 환인이하 단군조선의 역사를 편집한 역사서이다. 일전의 기고문에서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한 가장 큰 이유는 일제의 눈을 피해 국민정신 계몽운동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고 독립투사들에게 정신적 지주를 세워주기 위함이었다. 환단이란 뜻은 환인과 단군을 이름한 것이다. 우리역사의 출발이 하늘민족에서 출발했다는 천손사상이 근간이 되어 환인으로부터 출발한 사서인 삼성밀기를 가장 처음 장에 실었다. 고기를 붙힌 이유는 일연이 쓴 삼국유사 단군신화 기술부분에 “고기에 이르기를” 이란 구절을 본따 삼국유사에서 지칭한 고기가 바로 환인과 단군조선의 사서가 실재함을 증거로 삼기 위해서였다. 계연수 선생은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역사정신의 회복으로부터 시작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지사였다. 특히 이기선생과의 교분을 통해 단군사상을 부흥하는 것 만이 우리민족의 살길임을 직시했다. 그래서 이기 선생과 함께 일본의 신교와 서양종교를 대신할 태백교를 창교했다. 나중에 태백교도들은 모두 나철 선생의 대종교로 통합되고 나철 선생과 이기 선생은 역사의식 회복을 위해 단학회를 창설하여 역사발굴과 계몽운동에 매진하였다. 계연수 선생은 이기 선생이 일제에 항거하여 단식끝에 운명하시자 이기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2대 단학회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과 오동진 선생에게 자금지원을 받아 1912년에 환단고기 30권을 편찬하였다. 이렇게 하여 환단고기가 바로 구한말 암울했던 우리 역사의 하나의 태풍으로 부상한 것이다. 30권의 환단고기를 대부분 일제에 의해 압수당해 불태워 졌고 몇권은 남아 독립운동가들의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계연수 선생은 만주에 건너가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인 천마대, 서로군정서, 의민사, 벽파대, 기원독립단 등의 무장독립운동에 대하여 정신적, 사상적 계몽에 중심적 역할을 하게 되는데 대부분 일제의 눈을 피해 가명을 사용하였으므로 구체적 업적을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 후 1923년 계연수 선생은 일본인들의 지독한 추적과 감시망에 걸려들어 붙잡히게 되었는데 조선독립군으로 위장한 일본인 스파이에 의하여 붙잡혀 처형되었다고 한다. 일인들은 계연수 선생을 처형한 뒤 머리와 사지를 절단한 후 머리는 대동강에 몸통과 사지는 압록강에 버린 만행을 저질렀다고 한다. 계연수 선생의 서거 이후 단학회와 환단고기는 독립군 천마대(天摩隊)대장 최시흥(崔始興)선생에게 이어졌고 다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함께 혁혁한 무공을 세운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이덕수(李德秀)장군에에 이어졌으나 이덕수 선생이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단학회도 침체되고 환단고기도 유실되었다. 2006/01/19 23: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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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天符經] 대종교(大倧敎)의 기본 경전. 대종교의 설명에 의하면 한배하느님께서 환웅을 통해 백두천산에 내려와 천하만민에게 직접 가르친 것으로서, 교화를 끝내고 어천(御天:승천)하면서 내렸다고 하는 《삼일신고》와 더불어 교훈경전에 속한다. 태백산에 있는 단군전비(檀君篆碑)를 최치원(崔致遠)이 번역하였다고 한다. 오늘날의 것은 묘향산에서 10년간 수도한 계연수(桂延壽)가 1916년에 암벽에 새겨진 내용을 발견하여 이듬해 대종교에 전하였다고 하는데, 1975년 교단의 교무회의에서 경전으로 공인하였으며 1983년의 《대종교요감》에 처음 경전으로 수록되었다. 3장 81자로 구성되었는데 이것의 연역이 360자로 이루어진 《삼일신고》이고 《삼일신고》의 귀납은 다시 이 경전이 된다고 한다. 천지장(天之章)은 대우주 생성의 원리를 다루었고, 지지장(地之章)은 만물의 생성을 다루었고, 인지장(人之章)은 인간 궁극의 문제를 다루었다. 1에서 10까지의 숫자가 지닌 원리를 통해 천(天) ·지(地) ·인(人)의 삼극(三極)이 태어나[生] 자라고[長] 늙으며[老] 병들고[病] 죽는[死] 것을 끝없이 반복하는 경위를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그 중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천 ·지 ·인이 한배하느님을 뜻하는 일(一)로 귀일(歸一) 또는 통일된다고 하는 것이다. 즉 하나는 우주의 근본이요 만유의 비롯되는 수이니 하나보다 먼저 비롯됨은 없으며, 그것을 분석하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삼극이지만 그 근본은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민족의 통일이나 인류의 세계일가(世界一家) 건설도, 천지 만유가 하나에서 비롯하여 하나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필연을 설명한 이 경전의 우주 원리에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후로 이름만이 전하던 것으로서, 위작 여부에 대한 논란이 있다. 2006/01/21 09:29: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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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전계경(佺戒經) (一) 참전계경( 佺戒經)의 유래 1. 참전계경과 을파소(乙巴素) 선생 1) 고구려 제 9대 고국천왕때에, 압록곡 좌물촌(지금의 평안북도 선천지역) 태생의 사람으로서, 고국천왕 13년 안유(安留)의 천거로 대정(大政)을 맡아 유명한 재상이 되어, 우리 역사에 영명(英名)을 남긴 을파소 선생이 있었다. 을파소 선생은 고구려 제 2대 유리왕때 대신(大臣)을 지낸 을소(乙蘇)의 손자이다. 을파소 선생은 일찍이 평안북도에 가로 걸쳐 있는 묘향산맥중의 백운산중에 들어가, 하늘에 원도하면서, 천경신고(天經神誥)를 면학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자시(子時)에 홀연히 오색구름에 군림(君臨)하시어 내려오시는 국조 단군(檀君)성신(聖神)을 참알케 되고, 그 은연한 계시(啓示)를 받아, 어느 석굴암벽에서 하늘의 글(天書)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선생은 이에 석굴 한쪽 바닥에 고요히 결과부좌하고 삼법회통(三法會通)의 청정한 심상(心相)으로 그 하늘의 글을 정관(靜觀)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천서는 기본 근간(基本根幹)이 되는 이른바 성(誠), 신(信), 애(愛), 제(濟), 화(禍), 복(福), 보(報), 응(應)〕의 팔리훈(八理訓), 곧 기본 강목과 그 팔리훈 낱낱의 실덕(實德)을 응분하여, 체(體)와 용(用)을 각기 분설한 총 366훈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판별해 내었던 것이다. 2) 을파소 선생은 이같은 천서(天書)를 수학정진(修學精進)하고 낱낱이 깨달음마다 주서(註書)하고 말하기를, 「신시이화(神市理化)의 세상에 팔훈(八訓)을 날줄(經度)로 하고, 오사(五事)를 씨줄(緯度)로 하여, 그 교화가 크게 행하여져 홍익제물(弘益祭物)하였으니, 참전(參佺)의 이룬바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이 천서(天書)를 일러 참전계경( 佺戒經)이라 하였던 것이다. 참전( 佺)이라 함은「사람으로서 온전하게 됨을 꾀한다」는 뜻인 것이다. 이는 대시(大始)에 밝은이가 배달국 신시(神市)에서 인간의 366여의 일을 주재하였다는 데서 유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늘은 비록 말이 없으나,「하늘님은 오르락 내리락 하며 두루 보살피는 것」이니, 나를 알고자 하는 자는 열심히 인간 366사를 구하므로서 그 근본을 성실하게 하여, 참전( 佺)으로서 깨우침을 얻게 되는 것이다. 2. 참전계경과 을파소 선생의 선인도랑 백운산 석굴에서 정진수도가 이루어지자 을파소선생은 고국천왕에 의하여 일약 재상의 대위(大位)에 선발되었다. 이에 국상(國相) 을파소 선생은 전국에서 20세전의 연소한 영준(英俊)을 선발하여, 이른바 선인도랑(仙人徒郞)이라 칭하게 하고, 천서(天書)인 참전계경을 수학하게 하며 천경신고(天經神誥)와 더불어 육예(六禮)를 익히고, 닦도록 하였다. 그 가운데서 능히 교화(敎化)를 관장할수 있는 도랑(道郞)은 "참전( 佺)"이라 호칭케 하고, 무예가 출중하여 능히 이를 관장할 수 있는 도랑은“조의( 衣)”라 호칭하게 하여, 이들에게 각기 "천지화"가 앞머리에 꽂힌 관을 쓰게 하였으므로, 이후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리게 된 것이며, 이들이 대 고구려의 꿋꿋한 동량(棟梁)이 되었던 것이다. 2006/01/21 09:46: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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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치화경으로서의 참전계경 고기(古記)에 따르면, 한국(桓國)의 한인천제(桓因天帝)시에는 오훈(五訓)이 있었고, 신시(神市)의 한웅천왕(桓雄天王)시에는 오사(五事)가 있었다고 하고, 이 오훈과 오사를 천부(天賦)의 순리에 따라, 조선에 이르러 삼백육십육사에 관한 계율로 나타내어, 교화(敎化) 치화(治化)의 양화에 치용(致用)했다고 한다. 이가 곧 조화경(造化經), 교화경(敎化經), 치화경(治化經)이라 하는 삼화경(三化經)의 중핵을 이룬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른바 육대(六大)라는, 공(空), 열(熱), 진(震), 습(濕), 한(寒), 고(固)의 원소가 우주만물과 만상을 조성(造成)하는 것인데, 그 조화의 원리는「天二三 地二三 人二三 大三合六 生七八九」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운삼(運三) 사성(四成)」함에 의하여 三·四는 十二로서 그 절도(節度) 12에 용변의 기수 3이 승(乘)하여져 36을 성수(成數)하고 이것에,「일적십거(一積十鉅) 무궤화삼(無 化三)」의 순리에 의하여 천도수 삼백육십이 이루어져, 육대(六大)가 우주만상을 생성케 됨으로서, 인간 삼백육십육사가 이루어진다는 원리인 것이다. 이를 거룩하신 우리의 대황조 단군왕검께서 참전계경 366훈으로 가르쳐 뭇 백성을 치화(治化)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후 연(燕)나라 침략 등의 병화(兵禍)를 당하고 황제(皇帝)직할의 진한(眞韓)이 허물어 지면서, 천경신고와 더불어 참전계경도 잠적되었던 것을, 을파소선생의 정성으로 말미암아 대황조 단군성신(檀君聖神)의 계시로 다시 얻어, 오늘에 전해지게 된 것이다. 4. 오늘날의 참전계경은, 『단군 예절교훈 팔리 삼백육십육사』라는 책명으로, 단기 4300(서기 1967)년 12월에 박노철(朴魯哲)선생님이 편집하고, 권선정(權善正)선생님이 발행인이 되고, 안호상(安浩相)철학박사님이 감수를 맡아, 단군예절교훈학술연구원 출판부의 명의로, 비매품으로 처음으로 출판, 배포되기 시작하였으며, 그후 단기 4317(서기 1984)년 송호수(宋浩洙)박사님이“삼화개천경(三化開天經)”이라는 책에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 등과 같이 참전계경을 치화경이라는 제목으로 실어 출판하여,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후 많은 분들이 참전계경(팔리훈)을 책자로 엮어 보급하였다. 그러나 공자(孔子)나 노자(老子)의 글과 가르침이, 석가 (釋迦)의 글이나 깨우침이, 팔리훈(八理訓)에서부터 연유된 것을 모르고, 우리의 것을 공부하기보다, 아직도 외래사상에 젖어 있음을 어찌 평해야 하겠습니까. 이는 모두 먼저 깨달은 자들의 정성부족으로 알고 더욱 분발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이에 참전계경을 본서의 부록으로 실었으며, 번역은 위의 책들을 참고하였으나 독자적인 해석을 보태었다. 신세대들이 보기 쉽도록 원문과 한글풀이를 각각 분리한 점을 양해하시고,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2006/01/21 09:47: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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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일신고 [三一神誥] 단군이 한울·한얼·한울집·누리·참이치 등 다섯 가지를 삼천단부(三千團部)에게 가르쳤다고 하는 말. 이것을 신지(神誌)가 써 둔 고문(古文)과 왕수긍(王受兢)이 번역한 은문(殷文)은 모두 없어졌고, 지금은 고구려 때 번역하고, 발해 때 해석한 한문으로 된 것만이 남아 있다고 한다. <삼일신고>는 <천부경><참전계경>과 더불어 대종교의 3대 신전으로서, 그중에서도 제일 근원이 되고 중심이 되는 보경(寶經)이다. 특히 <삼일신고>의 '삼일(三一)'은 삼신일체(三一體) 삼진귀일(三眞歸一)이라는 이치를 뜻하고, '신고(誥)'는 '신()의 신명(神明)한 글로 하신 말씀'을 뜻한다. 따라서 삼일신고는 삼신일체, 즉 신도(道)의 차원에서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고, 삼진귀일, 즉 인도(人道)의 차원에서 성통공완(性通功完)의 공덕을 쌓아 지상천궁을 세우는 가르침을 한배검께서 분명하게 남겨 전하신 말씀이라는 뜻이 된다. 이 책이 전하여진 경위는 다음과 같다. 개천 4363(서기 1906)년 1월 24일 하오 11시, 당시 구국운동으로 동분서주하던 홍암 나 철 대종사께서 일본에서 귀국, 서대문역에 도착하여 지금의 세종로 방향으로 걸어갈 때, 한 노인이 급히 걸어 오다가 발길을 멈추고, "그대가 나인영(나철)이 아닌가."하고 하고 묻고 "나의 본명은 백전(伯佺)이요, 호는 두암(頭岩)이며 나이는 90인데, 백두산에 계신 백봉신형(白峯神兄)의 명을 받고 이를 전하러 왔노라."하면서 백지에 싼 것을 주고 총총히 가버렸다. 나중에 풀어보니 <삼일신고>와 <신사기>가 한권씩 들어 있었다고 한다. <삼일신고>의 본문 앞에는 발해국 고왕의 '어제삼일신고찬문[御製三一誥贊]'이 있고, 그 앞에 대야발(大野勃: 고왕의 아우)의 '삼일신고서문'이 있으며, 본문 뒤에는 고구려 개국공신인 마의극재사(麻衣克再思)의 '삼일신고독법'이 있고, 끝으로 발해 문왕의 '삼일신고봉장기(三一誥奉藏記)'가 붙어 있다. 삼일신고봉장기에는 삼일신고가 전하여진 경위와 유실되지 않도록 보존하고자 문왕이 각별히 노력한 경위가 실려있다. 이들 내용 가운데 발해 문왕까지 이 경전이 전해진 경위가 밝혀져 있고, 그뒤에 대종교까지 전하여진 경위는 백두산의 백봉신형과 백전 등이 개천 4361(1904)년 10월 3일에 발표한 <단군교포명서>에 밝혀져 있다. 이에 따르면, 한말에 백봉신사(白峯神師)께서 백두산중에서 10년을 한얼님께 원도하시어 묵계를 받으시고, 석실에 비장되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햇빛을 못 보고 지낸 본교 <경전>(삼일신고)과 <단군조실사>를 돌집속에서 얻으셨다. 개천4363(1906)년 백전도사(伯佺道士)를 통하여 <신사기>와 함께 홍암대종사께 전하였고, 이를 받으신 대종사께서 대종교를 중광하시고 잘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삼일신고>는 본래 신시개천 시대에 나와서 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교리는 대저 하나를 잡아 셋을 포함하고(執一含三),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옴(會三歸一)의 뜻으로 근본을 삼는다. 5장으로 나뉘어져 천신조화의 근원과 세상 사람들과 사물들의 교화를 논한 것이다. 2006/01/21 09:57: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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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366자의 한자(고자 포함)로 쓰여졌으며, 천훈·신훈·천궁훈·세계훈·진리훈의 오훈(五訓)으로 구성되어 있다. 천훈에서는 '천(天)'에 대한 무가명성(無可名性)·무형질성(無形質性)·무시종성(無始終性)·무위치성(無位置性) 등 무한성(無限性)을 전제함으로써 천체의 지대함과 천리의 지명함, 천도의 무궁함을 36자로 가르치고 있다. 종교적인 우주관과 절대성의 개념이 명백하게 밝혀져 있어, 신도(神道)의 달통무애(達通無碍)함을 설명하는 바탕이 된다. 신훈에서는, 무상위(上位)인 '신()'이 대덕(大德)·대혜(大慧)·대력(大力)이라는 삼대권능(三大權能)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고 다스림에 조금도 허술하거나 빠짐이 없으며, 인간이 진성(眞性)으로 구하면 머리 속에 항상 내려와 자리한다는 내용이다.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한 절대신임을 밝혔고, 동시에 신인합일(人合一)이라는 달통무애함이 인간의 신앙적 가능성을 열어주는 의의를 가지게 한다. 천궁훈에서는, 신교(敎, 대종교)에 따라 성통공완(性通功完), 즉 반망귀진(返妄歸眞: 헛된 마음을 돌이켜 참된 성품으로 돌아옴)하는 수행을 쌓아 진성(眞性)과 통하고, 366가지의 모든 인간사(人間事)에 공덕(功德)을 이룬 사람이 갈 수 있는 곳이 천궁(天宮)이다. 여기는 한배검이 여러 신장(神將)과 철인(哲人)을 거느리고 있는 곳이며, 길상(吉祥)과 고아명과 아울러 영원한 쾌락이 있는 곳이다. 인생이 마지막 찾아야 할 희망처가 천궁이며, 신교(대종교)가 단순한 기복형(祈福型)의 신앙이 아니고 힘든 수도를 전제로 한 구도형(求道型)의 신앙이 바탕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성통공완이란 반드시 죽음을 통하여 이룩하는 것이 아니요 현세적으로도 가능하며, 뿐만 아니라 이것이 더욱 바람직한 것이다. 실제로 천궁훈의 주해에, "천궁은 천상(天上)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상에도 있는 것이니 태백산(지금의 백두산) 남북이 신국(國)이며, 산상(山上)의 신강처(降處)가 천궁이다. 또한 사람에게도 있으니 몸이 신국이요 뇌가 천궁이다. 그래서 삼천궁(三天宮)은 하나이다."라고 하여 신인합일적이요 삼이일적(三而一的)인 천궁설(天宮設)을 설명하고 있어 단순한 내세관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2006/01/21 09:59: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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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훈에서는, 우주창조의 과정을 설명한다. 우주전체에 관한 내용과 지구 자체에 관한 내용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다. 즉, "눈앞에 보이는 별들은 무수히 많고 크기와 밝기와 고락이 같지 않다. 신()이 모든 세계를 창조하고 일세계(日世界)를 맡은 사자(使者)를 시켜 700세계를 다스리게 하였다."는 내용과, "지구가 큰 듯하지만 하나의 둥근 덩어리이며, 땅속의 불[中火]이 울려서 바다가 육지로 되었다. 신이 기(氣)를 불어 둘러싸고 태양의 빛과 더움으로 동식물을 비롯한 만물을 번식하게 하였다."는 내용인데, 뒤의 부분은 현대과학적인 안목으로도 설득력이 있어 관심을 끌게 한다. 진리훈에서는, 사람이 수행하여 반망귀진하고 성통공완에 이르는 가르침이 주요내용으로 되어 있어 신앙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천부경>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사람은 삼망(三妄)인 심(心)·기(氣)·신(身)에서 벗어나 본래적인 삼진(三眞)인 성(性)·명(命)·정(精)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대종교에 따른 수행이 필요하다. 즉 심의 감(感)을 지(止感)하고, 기의 식(息)을 조(調息)하고, 신의 촉(觸)을 금(觸)하는 삼법(三法)을 익혀야 한다. 이상이 그 내용인데, 여기서 지감은 불가(佛家)의 명심견성(明心見性), 조식은 선가(仙家)의 영기연성(養氣鍊性), 금촉은 유가(儒家)의 수신솔성(修身率性)의 각각 뿌리가 되는 것이다. <김정신 대형> 2006/01/21 1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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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요슈 [萬葉集(만엽집)]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가집(歌集). 일본(630년대~760년대) 만뇨슈라고도 한다. 여기에 수록된 노래는 4,536수이며, 그 중에서 장가(長歌) 265수, 단가(短歌) 4,207수, 기타 64수로 되었다. 이 가집은 오래 되었을 뿐만 아니라 문학적으로도 높이 평가되며, 일본사상사(日本思想史) 및 생활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그 성립 시기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어 확실하지 않으나, 대체로 630년대부터 760년대까지 약 130년간에 걸쳐 가장 많은 작품을 만들었으며, 이 시기를 만요슈시대로 본다. 이 가집은 일관된 방침 아래 한 사람 또는 몇 사람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역대 선인들의 뒤를 이어 보충 ·정리된 것으로 이름이 밝혀진 작자만도 수십 명에 이르며, 성명미상의 작자도 수십 명이다. 시기별로 중요한 작가들을 들면, 제1기에는 덴무천황[天武天皇]의 비(妃)인 누카다노 오키미[額田王], 제2기에는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枾本人麻呂], 제3기의 야마노우에노 오쿠라[山上憶良], 제4기의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에 이르러 종합 ·정리되었다. 이 가집의 특징은 ① 오랜 세월에 걸쳐 위로 천황에서부터 아래로는 서민 ·한량에 이르기까지 작자가 각양각색이므로 고대인들이 가졌던 즉흥적이고 의욕적인 힘, 즉 섬약한 아름다움이 여과되지 않은 발랄한 생명의 숨소리를 느낄 수 있는 점, ② 가체(歌體)가 일정하지 않고 표현형식도 모두 다르다는 점, ③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이나 장소가 매우 다양하다는 점, ④ 사용한 어휘가 생활실태와 밀착된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 시대별(時代別) 언어 연구에는 이 가집이 기본이 된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2006/01/21 14:5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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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기 [古事記] 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술한 책. 저자 오노 야스마로, 시대 712년. 고대 일본의 신화·전설 및 사적을 기술한 책. 일본 사람 오노 야스마로[太安麻呂]가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의 부름을 받아 저술했다. 천황가(天皇家)의 연대기와 계보를 기록한 《제기(帝記)》와 신화·전설 등을 기록한 《구사(舊辭)》에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편찬했다. 덴무조[天武朝:678∼686]에 편찬이 처음 기획되어 서기 712년 정월에 완성했다. 《고사기》의 편찬사정을 밝힌 서문(序文)에 의하면, 덴무천황이 히에다노 아레[稗田阿禮]에게 자료가 될 《제기》와 《구사》를 읽고 배우게 했으나 완성하지 못했고, 30여 년 뒤에 오노 야스마로가 이를 집필하여, 712년에 헌상했다고 한다.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가 체제를 다지고 정당화하기 위하여 편찬한 이 책은, 나라를 세운 신의 이야기부터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이야기까지 신화와 전설을 기록한 것이다. 모두 3권으로 되어 있는데 상권은 신들의 이야기, 중·하권은 초대(初代) 진무천황[神武天皇]에서부터 628년, 즉 제34대 스이코 천황에 이르는 계보(系譜)와 천황·황태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야기이다. 한문과 일본어를 혼용하였으며, 한자의 음과 훈을 따서 일본의 고어를 적은 문장이 매우 난해하다. 기록되어 있는 내용이나 문자는 어문학·역사학뿐만 아니라 신화학·고고학·민속학·문화인류학 등 여러 분야에서 연구하고 있다. 특히 일본 고대사와 고대문학 연구, 고대 한일관계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쓰이는 문헌이다. 일본에서 전해지는 역사책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日本書紀)》와 함께 중요한 고전으로 여겨지고 있다. 2006/01/21 14:59: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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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쇼키 [日本書紀] 일본 나라[奈良]시대에 관찬(官撰)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역사서. 저자 도네리친왕 등, 시대 720년, 30권. 이 밖에 계도(系圖) 1권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덴무[天武]왕의 명으로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중심이 되어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일본 6국사(六國史) 중의 첫째로 꼽히는 정사(正史)로서 왕실을 중심으로 하여 순한문의 편년체(編年體)로 엮었으며, 편찬의 자료로는 제기(帝紀), 구사(舊辭), 제가(諸家)의 전승기록(傳承記錄), 정부의 공식기록, 개인의 수기(手記), 사원(寺院)의 내력 등을 기초로 하고, 특히 《백제기(百濟記)》 《백제본기(百濟本記)》 《백제신찬(百濟新撰)》 등 한국의 사료(史料)와 《위서(魏書)》 《진서(晉書)》 등 중국의 사서(史書)를 병용하고 있어, 일본에서 비교적 객관적으로 저술한 역사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서술된 한국과의 관계는 왜곡된 부분이 많아, 진구황후[神功皇后]가 신라를 정복하였다는 터무니없는 대목이 있고, 또 연대(年代)도 백제의 기년(紀年)과는 약 120년의 차이가 있어, 이주갑인상(二周甲引上) 사실이 드러나 한국 학자 중에는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2006/01/21 15:06: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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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샤워 [Reischauer, Edwin Oldfather, 1910.10.15~1990.9.1] 미국의 언어학자 ·외교관. 국적 미국, 활동분야 어학, 외교, 출생지 일본 도쿄, 일본 도쿄[東京] 출생. 1939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중국사 ·일본사를 전공하였고 1942년까지 하버드대학교 교수, 1961~1966년 주일 미국대사를 역임하였다. 1966~1981년 다시 하버드대학교로 돌아와 일본사를 강의하면서, 일본문화를 소개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1939년 G.M.매쿤과 공동으로 한국어의 로마자표기법(매쿤라이샤워 로마자표기법)을 제안하였는데 이후 상당히 널리 쓰이게 되었다. 1984년 고시되어 현재 시행되고 있는 한국의 규범적인 로마자표기법도 매쿤라이샤워 로마자표기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ㅝ’를 매쿤라이샤워 표기법에서는 wŏ`라고 하는 데 반하여 현행 국어의 로마자표기법은 wo로 표기한다. 주요 저서에 《일본, 과거와 현재》(1946) 《미국과 일본》(1957) 《동아시아:위대한 전통》(1960) 등이 있다. 2006/01/22 10:22: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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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ffrey Sampson Birth and Civil Status : Born in 1944 at Broxbourne, Herts. UK citizen, Current Employment : I am a professor at the University of Sussex, where I work in the Department of Informatics. For more information about my working life, see under “Profession” in my Life page. Address : Department of Informatics University of Sussex. Falmer: BRIGHTON BN1 9QH, England, Degrees, Professional Qualifications:MA (Cambridge); MA (Yale); MA (Oxford, by incorporation) PhD (Cambridge, under the special regulations) MBCS (Member of the British Computer Society) CITP (Chartered Information Technology Professional) ILTM (Member of the Institute for Learning and Teaching in Higher Education — now the Higher Education Academy) Education Bristol Grammar School, 1952–62 St John’s College, University of Cambridge, 1962–5 Scholar of the College 1st class honours, Parts I and II of Oriental Studies Tripos Pass with Distinction, Oral Examination in Mandarin Chinese Yale University, 1965–7 and 1968–9 English-Speaking Union Fellow studying in Departments of Linguistics and Engineering & Applied Science Employment History Research Fellow in Vietnamese, School of Oriental & African Studies, University of London, 1967–8 Fellow, Queen’s College, University of Oxford, 1969–72 Lecturer, London School of Economics, 1972–4 Lecturer, from 1976 Reader, University of Lancaster, 1974–84 Founder member, Unit for Computer Research on English Language Professor of Linguistics, University of Leeds, 1985–90 Founder Director, Centre for Computer Analysis of Language and Speech Self-employed language engineering consultant, 1990–1 — major clients: British Telecom Research Labs (now BT Advanced Communications Technology Centre) Economic & Social Research Council Reader, from 1999 Professor, in the Department of Informatics (previously Computer Science & AI), University of Sussex, 1991– Department Chairman, 1993–96 Director, Centre for Advanced Software Applications, 1991–6 External Activities Visiting Professor, Institut d’Etudes Sémantiques et Cognitives, Geneva, 1980–1 Visiting Professor, University of Cape Town, 1982 Consultant, Research Initiative in Pattern Recognition, Royal Signals & Radar Establishment (now Qinetiq), 1989–90 Participant in the US/EU-sponsored Text Encoding Initiative (early 1990s) Panelist, “Ask-a-Linguist” service, 1997– Executive Board member, ELSNET — the European “Network of Excellence” in Human Language echnologies, 1998– — responsible for its magazine ELSNews Conservative member of Wealden District Council, 2001–2 2006/01/22 11:31: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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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D. McCawley EDUCATION University of Chicago, 1954-59 and 1960-61 (M.S., mathematics, 1958) Massachusetts Institute of Technology, 1961-64 (Ph. D., linguistics, 1965; thesis topic: The accentual system of modern standard Japanese) Courses at Westfälische Wilhelms-Universität (Münster) 1959-60; University of Texas, summer 1961 (Linguistic Institute); Seton Hall University, summer 1963 (Intensive Japanese) OFFICES HELD Linguistic Society of America: member of Nominating Committee (Jan 74 to Dec 76; Chairman 76), member of Executive Committee (Jan 78-Dec 80); Vice-President (1995); President (1996) EMPLOYMENT, PERMANENT Assistant professor of linguistics, University of Chicago, 9/64-9/69 Associate professor of linguistics, University of Chicago, 9/69-9/70 Professor of linguistics, University of Chicago, 9/70 to present Currently Andrew MacLeish Distinguished Service Professor of Linguistics and of East Asian Languages and Civilizations 2006/01/22 11:37: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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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본명 : Pearl Sydenstricker Buck) 출신학교 및 전공 미국 랜돌프 메이콘 여자대학, 1917~중국 난징 대학 교수로 재직, 1941~동서협회 설립, 1949~입양기관 웰컴 하우스 창설, 1964~펄벅 인터내셔널 설립, 1931퓰리처상, 1938노벨 문학상, 웨스트버지니아주(州)에서 출생하였다. 생후 수개월 만에 장로회의 선교사인 부모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10여 년 간 어머니와 왕(王) 노파의 감화 속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전도사업에만 열중했기 때문에 집안 일은 어머니가 도맡고 있어서, 어머니의 뜻대로 펄 벅은 1910년 대학교육을 받으러 미국으로 돌아왔다. 1914년 랜돌프 매콘 여자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곧 중국으로 돌아가, 1917년, 뒤에 중국농업연구의 세계적 권위자가 된 존 로싱 벅(John Lossing Buck 그녀의 필명은 여기서 온 것) 박사와 결혼을 하였다. 그들 사이에는 두 딸이 있었는데, 큰딸은 극도의 정신박약아였다. 《자라지 않는 아이 The Child Who Never Grew》(1950)에서 펄 벅 자신이 술회하듯이, 이 사실이 그녀를 작가로 만든 주요한 동기의 하나가 되었다(그 백치 딸은 《대지》에 왕룽의 딸로 그려져 있다). 거기에 중국 전토가 동란에 휘말려 있었고, 특히 1927년 국민정부군이 난징[南京]으로 쳐들어왔을 때 하마터면 온 가족이 몰살당할 뻔했던 위기를 몸소 체험하여 동서간(東西間)의 피치 못할 균열을 깊이 자각한 일도 그녀로 하여금 창작활동을 시작하게 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균열이야말로 그녀의 작품의 겉에 나타나고 바닥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테마로 흐르고 있다. 그녀는 이 균열을, 자기가 미국인이라는 입장에 서서 제2의 조국 중국에 대한 애착에서 평생을 두고 어떻게 해서라도 메워 보려고 애썼다. 1930년 중국에 있어서의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장편 처녀작 《동풍·서풍 East Wind:West Wind》을 출판하였는데, 출판사의 예상을 뒤엎고 1년이 채 안 되어 3판을 거듭하였다. 이어 빈농으로부터 입신하여 대지주가 되는 왕룽[王龍]을 중심으로 그 처와 아들들 일가의 역사를 그린 장편 《대지 The Good Earth》(1931)를 내어 작가로서의 명성을 남겼다. 이는 《아들들 Sons》(1933) 《분열된 일가 A House Divided》(1935)과 함께 3부작 《대지의 집 The House of Earth》(《대지》로 총칭한다)을 구성한다. 1934년 이후로는 그녀의 저서들을 출판해 온 J.데이 출판사의 사장 R.J.월시와 재혼, 미국에 정착하였다. 1938년에는 미국의 여류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이 《대지》 3부작에 수여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도 미국의 양심으로서 평화를 위한 집필을 계속하였는데, 질적으로 보면 그녀의 관심은 사회활동 쪽으로 쏠려 있었다. 펄 벅 재단을 설립하여 전쟁 중 미군으로 인해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태어난 사생아 입양 알선사업을 벌였고, 1967년에는 이 사업에 700만 달러를 희사하였으며, 6·25전쟁 후에는 한국의 수난사를 그린 《갈대는 바람에 시달려도 The Living Reed》(1963)와 한국의 혼혈아를 소재로 한 소설 《새해》(1968)를 썼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무명의 어머니를 통해서 영원한 모성상을 그린 《어머니》(1934), 아버지의 전기인 《싸우는 천사들 Fighting Angels》(1936), 어머니의 전기인 《어머니의 초상 The Exile》(1936)과 《애국자 Patriots》 《서태후 Imperial Woman》(1956), 자서전인 《나의 가지가지 세계 My Several Worlds》(1954) 등이 있다. 2006/01/22 12:13: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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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國際聯合敎育科學文化機構,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유네스코라고도 한다. 1945년 11월 영국과 프랑스의 공동주체로 런던에서 열린 유네스코창설준비위원회에서 44개국 정부대표에 의해 유네스코헌장이 채택되었으며, 1946년 11월 20개 서명국가들이 헌장비준서를 영국 정부에 기탁함으로써 최초의 국제연합전문기구로 발족했다. 모든 이를 위한 평생교육, 인류에 기여하는 과학, 세계유산보호와 창의성을 바탕으로 하는 문화발전, 정보와 정보학의 기반구축에 활동목표를 두고 있으며, 각 분야별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① 교육분야:문맹퇴치, 초등의무교육의 보급, 난민교육 등, ② 과학분야:생물학·해양학·환경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연구, 정보교환 등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인권문제에 관한 연구·분석, 개발도상국의 통신설비·정보시설 지원, 언론인을 육성 지원 등, ③ 문화분야:세계문화유산 지정, 가치있는 문화유적의 보존 및 보수 지원, 세계 각국의 독자성있는 전통문화 보존지원, 세계 각국의 문학 및 사상에 관한 문헌의 번역소개 등이다. 이밖에 라디오·텔레비전·영화의 개발 보급, 출판기술의 향상, 우주통신의 개발과 평화적 이용, 매스미디어를 이용한 교육의 보급에도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교육·과학용 자재의 구입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유네스코 쿠폰제도'를 운영한다. 또한 인재 양성을 위한 연구보조금의 지급 등도 이루어지고 있다. 기구로는 총회·집행위원회 및 사무국이 있다. 총회는 회원국 전체의 대표로 구성되는 최고의사결정기관이며, 2년에 1회씩 약 1개월에 걸쳐 개최된다. 주요 임무는 집행위원회위원의 선거, 사무국장의 임명, 가입의 승인, 유네스코의 정책·사업계획·예산의 심의와 의결, 국제조약 및 권고의 채택 등이다. 집행위원회는 총회에서 선출한 58명으로 구성되며 임기는 4년이다. 매년 2회 이상 소집되며. 주요 임무는 총회 의사일정의 준비, 총회에서 채택한 사업의 실행 및 예산의 집행을 감독하는 외에 사무총장을 추천하여 총회에서 임명하게 한다. 사무국은 임기 6년의 사무총장 지휘 아래 총회와 집행위원회의 의결사항들을 집행한다. 사무국은 파리 본부와 세계 각지에 설치된 지역사무처 및 각종 부속기관으로 구성된다. 본부의 직원은 세계 각국에서 모집된 전문가를 포함하여 2,200명에 달하며, 60개국의 지역사무처에는 500여 명이 일하고 있다. 주요 임무는 총회와 집행위원회에 제출할 사업계획과 예산안을 준비하며, 전반적인 활동에 관해 보고하고 총회에서 결정된 사업계획과 예산에 따라 각종 사업을 추진한다. 회원국은 188개국이며, 6개의 준회원국이 있다. 준회원국은 총회의 투표권이 없고 이사회의 직책을 맡을 수 없는 점 외에 회원국과 같은 권한을 갖는다. 한국은 1950년에 가입했고, 1987년 제24회 총회에서 집행위원국에 선출된 바 있다. 또한 1995년에 종묘, 불국사 석굴암, 팔만대장경 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00년에 강화군·화순군·고창군의 고인돌과 경주유적이 세계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본부는 프랑스 파리에 있다. 2006/01/25 11:43: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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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세계유산이란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되어 유네스코 세계유산 일람표에 등록한 문화재를 말하며 세계유산에는 '자연유산'과 '문화유산', '복합유산' 등 3가지가 있다. 이중 세계문화유산에는 역사적·과학적·예술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는 건축물·고고유적과 심미적·민족학적·인류학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니는 문화지역 등이 포함된다. 세계문화유산은 움직일 수 없는 건축물, 성곽, 탑 등이며 이집트의 누비아 유적지, 피라미드, 그리스의 아크로폴리스, 인더스문명의 발생지 모엔조다로, 안데스산맥의 마야문명 유적지인 마추피추, 중국의 만리장성, 돈황의 막고굴, 인도의 아잔타 석굴, 이탈리아의 피사의 사탑, 선사시대 유적지인 알타미르 동굴벽화 등이 포함되어 있다. 문화유산의 지정에는 국제 기념물유적 협회(ICOMOS), 국제 문화재보존 로마센타(ICCROM)가 도움을 주고 있고, 자연유산은 국제 자연보전 연맹(IUCN)이 참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4년 현재 종묘,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전, 수원 화성, 창덕궁, 고인돌, 경주 역사유적지 등 총 7점의 유산이 세계문화유산목록에 올라있다. 그리고 북한의 '고구려 고분군'이 2004년 7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2006/01/25 11:45: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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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ng Se-Jong Prize We Should Have only one National Language/By Kwon Young-Ro We have a very good national language, Korean. It is true that the International Language Association recognized Korean as being superior to other languages in science, and made a prize named after the Great King Se-Jong a few years ago. Especially, Professor G, Sampson, who is a remarkable philologist, said " Korean is the excellent language of other languages in science." However, Pok G -Il, writer "Radical Language with Internationalization", The Chosun IlBo, July 14, 1998, has suggested that the Korean Government approve two national languages, Korean and English, because he thought that a Global Empire would appear and our nation should be included there. So we have to follow the standards of the Global Empire, including linguistic and economic standards. I doubt that his opinion may be right, but I suggest that we should have only one national language, Korean. We live with internationalization. We need English to communicate our thoughts to foreigners, so we are studying it as an international language very hard. Although we feel the need for English, we must keep Korean to maintain the unity of our nation. For example, the people in Quebec, Canada, want independence for their province from their nation. There is only one reason: because they speak French. They can't unite with other Canadians speaking English as their first language. As another example, the Jews wandered from Egypt to Germany for the unexistence of their nation. In 1948, they made their own nation called Israel near Jerusalem. Although they did not have any land for thousands of years, they kept their national language which let them unite as a people. As a result, they had their own nation. In other words, it is important for the people to speak one national language for the unity of their nation. So, if we use two national languages to communicate, our nation may split into several states. We should not approve a second national language to protect our nation from being separated. 2006/01/25 13:24: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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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people in the Basque Region of Spain have a unique tradition different from the rest of Spain. They have used their dialect for a long time, which is a language unlike Spanish. Their language is used in television programs, magazines, schools and even official documents. The reason is that they think that if they don't use their own words, their own culture and tradition will disappear. They keep it for national identity which makes them unite, develop and grow. It seems nationalistic, but many nations sell their culture to other nations through movies, music, food, design, and craftwork. Now, businessmen see traditional culture and making much money in a new light. It is important for people to develop their own language which is the center of their own culture and tradition. only their own words contain their own culture and tradition. So, we speak Korean to protect and develop our own culture and tradition. Switzerland has four languages which are French, German Reto-Romance and Italian as official languages. The Swiss have used four languages since they first became a nation because their nation consisted of four peoples, which were German, Italian, French and native Swiss, all of whom continually used their first language. It is easy for the Swiss to travel somewhere. Switzerland is so famous as a center of international business. However, Korean consists of only one blooded people. The Korean mind is based on Confucianism which has a hierarchy and authority. It has reflected Korean including national identity since the Chosun Period. So, it is not relevant to compare Korea with Switzerland. We need English for communicating with foreigners, passing an entrance examination of a company, and so on. We recognize that English is very important for living with internationalization, but making English a second national language is only a temporary solution to the problem. We must keep and develop our own language to maintain our culture and tradition and unite our nation. If we refine the Korean language, it makes our soul clear and our mind one. 2006/01/25 13:25: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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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레이션 [simulation] 복잡한 문제를 해석하기 위하여 모델에 의한 실험, 또는 사회현상 등을 해결하는 데서 실제와 비슷한 상태를 수식 등으로 만들어 모의적(模擬的)으로 연산(演算)을 되풀이하여 그 특성을 파악하는 일. 즉 실제 또는 가상의 동적 시스템모형을 컴퓨터를 사용하여 연구하는 것을 말하며 모의실험 또는 모사(模寫)라고도 한다. 물리적 모형을 써서 하는 실험으로서 예로부터 유명한 것은 풍동(風洞)을 써서 항공기의 비행 중 상태를 조사하거나, 물탱크 안에서 배의 항행 중 상태를 조사하거나 하는 것 등이 있다. 오늘날은 자동차 운전자의 훈련용 운전석 모형, 비행기 조종사 훈련용의 콕피트(cock-pit) 모형, 우주비행사 훈련용 캡슐 모형 등의 시뮬레이터가 많이 개발되어 안전운행을 위해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곳은 오퍼레이션리서치(operation research)와 계량경제학 분야이며, 여기에서는 대형 컴퓨터가 많이 이용된다. 오퍼레이션리서치에서는 전쟁전략·기업전략·대기행렬(待期行列)·재고관리 등의 문제에 대해 어떤 가정 아래에서 수리(數理) 모델을 설정하고 여러 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 또는 수단을 발견하는 일이 중요하다. 수학적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수리 모델의 기초가 되는 가정이 현실에 비하여 너무 엄밀하여(추상적이어서) 실제 상태를 충분히 모델에 반영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결점을 바로잡기 위해 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에서는 수리 모델을 구성할 뿐 아니라 난수(亂數)를 발생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현실에 가까운 실험을 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시뮬레이션 전용의 컴퓨터 언어가 여러 개 개발되어 있다. 예컨대 대기행렬을 포함하는 시스템 등의 해석에는 GPSS(General Purpose System Simulation, 1961)·SIMSCRIPT(Simulation Scriptor, 1961), 기업 성장의 예측 등에는 DYNAMO(Dynamic Model, 1962), 연속적인 변화를 하는 시스템의 해석에는 CSMP(Continuous System Modeling Program, 1967) 등이 자주 쓰인다. 한편 시뮬레이션 전용은 아니지만 인간행동의 시뮬레이션에는 IPL-V·SNOBOL 등의 언어가 쓰이고 있다. 계량경제학에서는 경제의 운동 메커니즘을 나타내는 수식 모델이 과거의 데이터를 사용해서 추정된 다음, 모델에 포함된 변수의 일부[外生變數], 예컨대 노동인구·수출고·이자율 등이 장차 변동하면 그 변동이 다른 경제 부문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알아보는 실험 등을 시뮬레이션이라 한다. 2006/01/25 16:2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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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분 벽화 고구려 시대 고분은 석총과 토총이 있는데, 석총은 광개토왕릉(장군총)이 대표적이며 벽화가 없다. 토총은 벽화가 있는데, 고구려시대의 벽화고분은 당시 수도였던 통구(현 중국 길림성 집안현)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압록강 유역과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 유역에 분포되어 있다.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벽화 고분은 중국 집안(지안: 集安)의 20여기를 포함해100여기에 이른다. 3세기에 첫 등장한 고분 벽화는 생활풍속도가 주류를 이루다가 장식문양을 거쳐 후기로 가면 악귀를 쫓는 의미의 사신도(四神圖)로 발전한다. 생활 풍속을 주로 그린 벽화가 있는 고분으로는 안악 2.3호분, 각저총, 무용총 등이 있고,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쌍영총, 대안리 1호분이 있다. 사신도를 함께 그린 것으로는 강서대묘, 중묘, 소묘를 들 수 있다. 장수왕릉 [長壽王陵]3세기 초부터 427년까지 고구려가 도읍한 지안현 퉁거우평야[通溝平野]에는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고구려 최대형 무덤인 태왕릉(太王陵)·사신총(四神塚) 등 석릉과 토분(土墳) 1만 기(基)가 있으나 외형이 거의 완존(完存)한 석릉은 이것뿐이다. 화강암 표면을 정성들여 가공한 절석(切石)을 7단의 스텝 피라미드형으로 쌓았는데, 기단(基壇)의 한 변 길이 33m, 높이 약 13m 이다. 기단의 둘레에는 너비 4m로 돌을 깔았으며, 그 바깥둘레에 너비 30m 의 역석(礫石)을 깔아 능역(陵域)을 표시하였다. 널방[墓室]은 화강암의 절석을 쌓아 지었는데, 천장석(天障石)이 있는 굴식[橫穴式]이며, 2개의 널받침[棺臺]이 있다. 1905년 일본인 학자 도리이[鳥居龍藏]가 처음으로 현지조사하고, 프랑스 학자 E.샤반과 일본인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등이 조사하여 《남만주조사보고(南滿洲調査報告)》 등에 발표한 뒤부터 학계에 알려졌다. 돌무지돌방무덤[積石石室墓]은 대체로 3세기 말∼4세기 초로부터 5세기에 나타나며, 기와를 통해서는 4세기 중엽 이후 5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므로 이 장군총의 연대는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일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이 무덤의 주인공으로는 광개토대왕과 그 아들인 장수왕(長壽王)의 것이라는 두 설이 있는데, 현지 중국 학자들은 태왕릉을 광개토대왕릉으로, 장군총을 장수왕릉으로 보고 있다. 2006/01/25 16:26:25 | | |